스님 법문

[백중기도] 7월 26일 백중 2재 법문 2023-07-26

 

 

-염불은 깨닫지 않은 깨달음-

 

 

        반갑습니다.
       저는 한 삼십 년 동안, 스님 된 지는 더 됐고, 오직 염불만, 나무아미타불만 하고, 나무아미타불에 관한 저술도 많이 냈고, 어쨌든 한국에서 제일 많이 냈어요. 이 불교 사회 염불, 이 위대한 법이라는 것을 한국뿐만 아니고 중국, 일본, 대만, 미국에까지 다 알리려고 제가 큰 꿈을 가지고 있습니다. 제가 능력이 아직은 부족하니까 대중 법회도 그렇게 많이는 못 하고, 초대하는 데는 가서 합니다.

       제 법문 중에, 염불도 여러 가지가 있고, 참선도 여러 가지가 있고, 나무아미타불 염불도 상중하의 수준이 있습니다. 그런데 오늘 이제 여기 진관사에 와서는 나무아미타불의 중급, -무시한 건 아니고,- 왜 그러냐 하면, 중급 중에서 상, 상급을 하게 되면은 참선에서 견성했다는 거 하고 똑같아요. 어쩌면 더 뛰어나다. 이거는 그냥 하는 얘기가 아니에요. 이건 진관사 tv나 우리 동영상으로 다 나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거는 여러분이 다음에 와서 또 들을 기회도 있고요. 오늘은 중급을 하는데, 이 중급도 원효의 정토 사상, 나무아미타불의 수행법이 아니면 알 수 없는 내용입니다. 여기 여러분의 스님들이 계신데, 이 스님들께서 다 삼십 년, 사십 년 되시고 열심히 공부하시고 하는데, 1020, 30년이 돼가지고 여기에 있는 내용을 들었으면 이 염불법이 중급이 아니라 하급이라.

 

 

<염불은 깨닫지 않은 깨달음>

부처님께서 세계와 인간의 존재법칙을 밝힌 연기법.

일심· 이문· 삼대의 일심법, 네 가지 지혜의 무상보리,

삼신의 보리 등, 일체의 법을 말씀하신 것은

심체에 상념이 없는 진여법신을 증득한

깨달음으로부터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굳이 그 깨달음을 얻지 않아도

안락을 얻는 희유한 법이 있다.

염불은 깨닫지 않은 깨달음[상사각]으로

지혜와 복덕이 증장하는 최상의 법이다.

 

아미타불이 어디에 계시는가?

부처님의 몸은 법신[진여] · 보신[지혜의 모습]·

화신[응신: 3280종호를 갖추신 몸]이 있는데

어느 부처님을 중심으로 말하는가에 따라 다르다.

화신의 아미타불은 서방에 계시고,

법신의 아미타불은 우주법계에 계신다. [법계신]

모든 부처님의 몸의 본성은 진여인 법신이다.

진여는 세계와 인간의 본성이며 여래의 법신이다.

 

우리 몸에서 청정한 진여의 힘이 작용하면

지혜와 복덕이 증장한다.

 

예배문/ 신업청정 / 몸을 굽혀 절을 함

찬탄문/ 구업청정 / 시방에서 소리를 듣는다.

작원문/ 의업청정 / 삼매 / 일상관

관찰문/ 지업청정 / 일체가 아미타불의 화신이다.

회향문/ 방편지업청정 / 모든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고 회향.

 

 

       이 내용은 제가 들고 다니는 거예요. 원래 어디 가든지 법문 딱 이 프린트를 해가지고, 한 장씩 제가 메모해서 외워가지고, 또 이제 소화시켜서 하는데, 항상 가면 주지스님에게나 어디 가서 오늘 제가 이 법문할 겁니다.” 그러면서 말씀을 드려요. 어디 가서든지 그렇습니다. 가서 헛소리 하면 안 되니까, 주지스님의 뜻에 어긋나면 안 되니까 딱 드립니다. 드리면은 그 중에 한 열 명 중에 한 명 정도만 복사해가지고 우리 신도들 다 나눠주시죠.” 이렇게 하시는 분은 열 분 중에 한 분밖에 안 계신데. 정말입니다. 저는 법문 준비를 아주 철저히 해가요. 모든 세미나에 가서도 여기 글이 틀리면 안 돼요. 이 글은 또 밖에 돌아다니기 때문에 아주 띄어쓰기가 틀려도 안 되고, 뜻이 틀리면 더욱 안 되고 그렇습니다. 오늘 주지스님께 제가 무슨 말씀을 드렸냐 하면, “주지스님, 진관사를 이끌어 가겠습니다.” 역시, 이거는 있죠, 배포가 큰 것이고, 센스도 빠른 것이고, 그 초대한 스님에 대한 믿음도 있는 겁니다. 주지스님이 사십 년 생활하시면서 이런 말은 저한테 처음 들어볼 거예요. 제가 아주 정확하게 보니까 그렇습니다. 이렇게 딱 해가지고 가면은, 읽어보고 논리도 철저하고. 여러분들이 말로 끝내고 말면, 내일모레 지나면 그 스님이 무슨 법문 했는지 다 모르거든요. 다 잊어버리거든요. 여러분 그렇죠? 글로 딱 해놓으면 자기 집에서 보고 보고 씹고 또 씹고 새기고 그러잖아요. 그럼 혹시 주지스님한테 자꾸 물어볼 수도 있고, 주지스님 법문하고 비교를 할 수도 있고, 그렇거든요. 그래서 그냥 나눠주라 소리를 안 해요. 그런데 이제 다 봐야 되고, 꼭 주지스님이 복사해서 드리라 하면 드리죠. 저는 절대 임의적으로 드리지를 않습니다. 같이 읽으면 더욱 좋습니다, 같이 읽으면.

 

       오늘은 이제 <염불은 깨닫지 않은 깨달음이다.> 그런 주제로 하는 거예요. 깨닫지 않은 깨달음이다. 염불은, -따라서 하겠습니다.- 염불은 깨닫지 않은 깨달음이다. 대강 이해를 하겠어요? 어렵든지 안 어렵든지 말은 일단 재밌죠. 염불은 깨닫지 않은 깨달음이다. 이건 그냥 사람들한테 재밌게 들리라고 한 게 아니고, 약 한 30년 동안 피땀 흘리고 각고 끝에 제가 내린 결론 중에 하나에요. 뭐냐 그러면은 이런 겁니다. 우리가 지금요, 여기 보면 있어요, 글에. 이제 대강 말을 듣고 보면 알 거예요. 우리가 알고 있는 불교는 연기법이다. 또 무슨 사성제다 또 팔정도다 이런 거 배우죠. 제가 이제 평생 집중적으로 배우는 공부는 뭐냐 그러면, 연기에 대한 것, 그다음에 일심에 대한 것, 그다음에 무상보리에 대한 것, 그다음에 이제 삼신의 보리에 대한 것 이런 것들이에요. 여러분이 잘 들어보지도 못한 얘기야. 아주 차원 높은 공부입니다. 원효가 세상에 알리는 데 실패한 공부입니다. 실패한 공부. ? 그 당시도 너무 수준이 높은 거라서, 당나라 스님들이 이거 뭐야. 말이 왜 이리 어려워그러면서 그냥 내쳐버린 불교학이에요. 그러나 이제 지금은 인재가 발달하고 있으니까, 여러분들도 자꾸 설명을 하면은 다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부처님이 이제 이런 깨달음을 얻었다 이 말이에요. 이것은 우리 범부 생각처럼, 무엇을 가만히 사유하고, 과학자들이나 무슨 불교학자들이나, 이런 철학을 연구하는 사람들이 사유하는 것처럼 자꾸 씹고 씹고 또 사유하고 사유하고 해가지고 내린 결론이 아니고, 부처님의 깨달음은 그런 결론이 아니고 뭐냐 그러면은, 이 심체라 그래요, 심체. 우리 마음의 본체 있죠, 마음의 본성에 상념이 하나도 없다. 이제 용어가 어려워 좀. 상념이 하나도 없다. 번뇌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진여법신이라 그래요. 그냥 그렇게 이해하면 됩니다. 우리 본성이 진여법신이다. 따라서 하세요. 진여법신. 진여법신을 증득했다 그래. 번뇌가 하나도 없는 상태를 자기가 들어가야 돼, 그 상태에. 거기에서 깨달은 것이 이 팔만 사천 법문이란 말이에요. 그래서 법문을 쫙 내놓고, 이제 수행법도 만들어 놓고 그랬잖아요.

 

        그런데 지금 이제 나도 그 번뇌가 없는 진여 법신을 증득해야 연기법이라든지 인과라든지 사성제 팔정도, 이런 것을 명확하게 알 수가 있어. 명확하게 . 맞구나.’ 하고 알 수가 있단 말이야. 그래서 이 모든 일이 뭐냐면 중생, 많은 사람들이, 부처님 이후에 특히 선종에서 나도 부처님처럼 한 번 깨달아보자.’ 그러고 지금 선을 하고 있죠. 선을 한다. 선이든지 주력이든지 다 할 수가 있어. 이것을 보고 견성이라 그래, 견성. 진여법신을 깨닫는 것을 진여법신의 자리를 체험하는 것을 견성이라 그래요. 많이 들어봤잖아. 우리나라에서 1,600년 동안 해온 말이잖아. 그래도 나는 가장 현대적이고, 모든 사람들이 알아들을 수 있고, 그다음에 불자가 아니라도 알아들을 수 있게 지금 설명을 하려고 애를 쓰는 거야. 그걸 견성이라 그래. 그러면 견성은 어려울까 쉬울까? (어려워요.) 어렵습니다. 인간이 순간이라도 번뇌가 제로가 되는 것은 아주 어려워요. 아주 짧은 순간에 될 수는 있는데, 한나절이 되거나 삼일이 되거나, 아주 어렵습니다. 그런데 이제 부처님은 그런 상태로 14일 동안 앉아 계셨어요. 그러면 오늘도 지금 결제 기간이니까 전부 이제 견성을 해보겠다고 앉아 있죠. 여러분도 시간이 있으면, 그럴 필요가 있을까 없을까?(없어요.) 이거 잘 알아야 돼. 잘 알아야 된다고. 여러분은 그럴 필요가 없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어려워요. 그러니까 이 염불은 그 견성이라는 깨달음이 있죠, 그것과 비슷한 수행법이다. 그러니까 그 견성이라는 깨달음을 깨닫지 않아도 염불을 하게 되면은 불자가 아닌 사람, 불교에서 믿음을 성취하지 않은 사람, 매일 신을 믿는 사람, 이런 사람들의 깨달음과는 전혀 다른 차원의 지혜를 얻고, 삶이 풍요로워지고, 잘 배우면 그렇다 이 말이야. 이것을 보고 깨닫지 않은 깨달음이라 그런다. 견성은 깨달음은 아니지만, 견성을 깨달음을 진짜 깨달음이라고 그러고 진각이라 그래.
       그런데 그 깨달음은 아니라도 밖에서 범부가 깨달은 게 있죠. 이건 뭐냐 하면은, 전날은 악을 짓고 해가 지나서 오늘 , 내가 잘못됐다. 내가 잘못됐다. 앞으로는 악을 짓지 않아야 되겠다.’이건 깨달음인가 아닌가? 그러니까 이거는 세속의 깨달음이다. 세속의 깨달음이지, 불교에서 요구하는 깨달음이 아니야. 아시겠습니까? 이거는 불교를 믿지 않아도, 누구라도 다 깨닫는 깨달음이야. 이거는 깨달음이 아니야. 염불은 이런 깨달음, 세속에서 악을 짓다가 마음을 돌이켜서 선을 짓겠다고 깨닫는 이런 깨달음하고 차원이 틀린 깨달음이다 이 말이에요. 이 내 가르침의 요지는 있죠, 한국의 학자, 뛰어난 철학자, 그다음에 스님들, 1020년 나보다 더 든 선배 스님이라도 이걸 설득시키기 위해서 온 내가 지금 혼과 열을 쏟는 거예요. 이 이치, 여러분도 자꾸 얘기하니까 알아듣겠죠. 이겁니다. 이거는 아주 어려운 거에요. 내가 말한 거를 녹음해서 자꾸 들어보세요. 무슨 말을 하는지. 이 정치인들 있죠, 정치인들이든지 기업인들이든지 도둑놈이든지 이런 사람들이 세상을 자꾸 깨우치잖아요. 자기들이 반성하고 그러죠. 그런 깨달음하고는 염불의 깨달음은 전혀 틀리다 이 말이야. 차원이 틀리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말을 붙인 거예요. 부처님이 요구하는 진짜 깨달음은 범부들이 깨닫는 깨달음하고는 다른 것이다. 그래서 깨닫지 않은 깨달음이라고 얘기하는 겁니다.

 

 

        넘어가서, 아미타 부처님이 서쪽에 계시다고 그러죠. 들었죠? 여러분도 믿고 있죠? 아미타 부처님이 이 땅에도 계시다는 말씀 들어봤죠? 그럼 모순이잖아. 모순. 우리 또 주지스님께서도 반드시 그리했을 거예요. 돌아가시면 전부 서방에 극락 왕생한다 그러셨다가, 어느 때는 또 차 마시면서 <염념보리심 처처안락국>이다 그랬을 거예요. 그렇죠. 여러분 들었죠? “마음 잘 쓰면 이 땅이 극락이다그러죠. 많이 그랬죠?
       그럼 우리가 무심코 얘기를 해요. 무심코 얘기를 하지만은, 이것은 논리적으로 상당히 모순이 있는 거예요. 서쪽에 있다 그랬다가, 여기도 있다 그랬다가. 그러면 서쪽에도 있고, 여기도 있는 거죠. 그래요? 아미타부처님이 여럿이 돼야 되잖아. 왔다 갔다. 이거는 백년, 이백년 전, 부처님의 말씀이, 관무량수경에서 그대는 아는가. 아미타 부처님께서는 여기서 멀리 계시지 않는다.” 이렇게 했어요. 가까이 있다 이 말이야. 그리고 또 부처님께서 아미타 부처님께서는 지금도 서쪽에서 설법하고 계신다.” 그랬단 말이야. 그러니까 이 모순을 해결하는데 100, 200년이 걸리는 게 아니고, 일단 서기로 육백 년 경에 원효스님이 답을 내놨어. “그건 말이야 이런 뜻이야.” 그러면서 내놨는데, 중국이나 일본이나 대만 사람들이 안 들었어요. 이쪽에 있으면 이쪽에 있고, 요쪽에 있으면 요쪽에 있다고 그거 하나만 믿으면 되는 것이지, 뭐냐. 원효가 이제 풀어놓은 거야. 풀어놓은 얘기를 하는 거예요. 지금 풀어놓은 겁니다. 이건 이제 원효 화쟁 사상이에요.

        부처님의 몸이 세 가지 몸이 있어. 여러분들도 지금 자꾸 인격이 올라가는데, 뭐냐 하면은 덕을 많이 쌓게 되면 몸이 자꾸 뚜렷하게 분리가 돼. 한 몸인데 알 수가 있다고. 여러분들도 덕을, 선행을 많이 쌓는 사람은 얼굴의 모습이 딱 보이죠. 안 보여요? 보여요. 욕심이 많은 사람은 안 보입니다. 마음이 착한 사람은 마음이 어지러운 사람이 보여요. 같이 어지러우면 안 보이는 거예요. 아주 마음이 착한 사람은 도둑놈을 금방 봐요. 여러분은 도둑놈이 잘 안 보이죠? 주위에 도둑놈이 딱 걸어다니는데 잘 안 보이면, 여러분도 수상한 사람이야. 화를 잘 안 내는 사람 있죠. 이런 사람들은 화를 조금만 밖으로 내려고 하는 사람도 봐버려요. 여러분은 다른 사람이 화가 올라오는 거 잘 안 보이죠? 보여야 됩니다. 우리도 이제 마음의 본성과 밖으로 나타나는 특성과 행위, 행위가 아주 명확해지고 바르게 되는 경우가 있어요. 더 올라가면.

 

 

       그런데 이제 부처님은, 성도 하시고, 몸이 세 가지로 분명해졌어요. 그게 뭐냐 하면, 하나는 법신이고, 하나는 보신이고, 하나는 화신이다. 많이 들었죠. 그래도 오늘 개념 정리를 명확하게 해서 한 번 더 하겠습니다. 법신, 보신, 화신. 법신은 뭐냐 그러면은, 이 몸이 진여로 돼 있다는 거야. 진여. 굉장히 설명이 어려워요. 이건 과학적으로 설명해야 되는 거라. 진여. 아주 쉽게 말해서 청정한 에너지로 돼 있어. 청정한 에너지. 가만히 있질 않아. 이 법신의 몸 본성이 가만히 있질 않고, 계속 이 몸 안에서 파장을 일으키고 있어. 미세한 파장. 이게 뭐냐 하면 이 현대의 과학의 기계라도 측정할 수 없을 만큼 미세한 파장을 일으키고 있는 거예요. 우리 몸이. 아시겠어요? 여러분 아무리 잠자고, 고요하더라도 그렇게 움직이고 있다. 그 진여법신이 이제 만물을 생산해내고, 모든 선업을 짓는 본성이에요. 진여 법신, 진여 법신이 있어.
       그런데 그 부처님의 진여법신하고 우리 본성과는 같을까 다를까? 같을까 다를까? 같을까 다를까? 지금 정답이 안 나오니까 자꾸 묻는 거야. 그거를 알아야지. 그럼 빨리 돌려야지. 왜 스님이 자꾸 묻는지 모르고 그냥 달라요, 달라요. 내 말에 귀를 기울이지 않아. 지금부터 세 번 물으면 틀린 거야. 알았죠?

       주지스님이 수백 번 얘기했을 거야. 부처님의 본성과 중생의 본성은 같다 틀리다? 인제 정신 차려. 같아요. 아시겠어요? 같단 말입니다. 이 본성 있죠, 본성. 이 본성은 사람의 본성하고 같을까 틀릴까? 같을까 틀릴까? 자신 있게 같아요하는 사람은 있죠. 항상 더 배워가지고 도반들에게 같다는 것을 얘기를 해줘요. 그래서 모르면 또 스님들께 와서 물어보고. 아시겠어요?

서양 철학하고 무슨 기독교하고 이런 거 하고 전혀 틀린 거야, 불교는. 부처님과 이 중생, 나의 성품이 같을 뿐 아니라, 이 자연의 성품하고도 똑같다. 저번 주에 우리 회주 스님이 와서 법문 하시는데 그렇게 하더구먼. 토지 정기라고. 들었어요. 대지정기인데 아함경에는 이걸 보고 이제 진여를 정기라 그래. 그거 놔두고 진여로 통일시키고 보세요. 그러니까 이 자연, 모든 산하대지 산천초목 그 성품하고 사람의 성품하고 부처님의 성품도 똑같다는 거야. 그렇게 아세요. 그렇게 이걸 보고 이제 법신이라 그래요. 부처 몸 하면서 법신이라 그러고.

 

 

       보신은 뭐냐 하면, 여름 하면 보신 생각나죠? 아무리 여름이 와도 부처님 모시는 생각해요, 아시겠어요? 부처님 보신 생각하면은 엄청난 지혜를 얻는 거라. 부처님 보신은, 부처님의 안목으로, 부처님의 지혜로 바라본 세계의 모습을 말해. 지혜의 모습, 세계의 모습을 말해요. 부처님은 이것을 아주 감성적으로 얘기했어. 부처님은 이 모습을 우리와 다르게 봐. 아시겠습니까? 똑같은 배고 바나나고 수박이고 그러는데 다르게 봅니다. 똑같이 본다 그러면은 부처님이 아니야. 다르게 봐. 이 다르게 보는 차원이 아주 많아요. 이 부처님이 바라보는 지혜의 모습을 우리가 금방 알 수 있을까 없을까? 지혜가 부처님만큼 높아야지 아는 거예요. 보살은 보살의 지혜로 보는 것이고 부처님은 부처님의 지혜로 보시는 거고 그래요. 그다음에 이제 부처님의 성품이라는 법신을 우리가 바로 바로 느끼거나 볼 수가 있을까 없을까? 없어요.
       화신은 뭐냐 하면은 아까 그 성품 법신이나 지혜의 모습이나 이것과 다르게, 30 이상 80종호를 갖추고 나온 부처님을 화신이라 그래요. 이러한 보살의 모습, 부처님의 모습으로 우리에게 나타나는 것을 화신이라 그럽니다. 그러면 이 화신의 부처님은 석가모니 부처님이나 아미타불 부처님이나 전부 화신이고 법신이고 보신이고 그래요. 그런데 이 형상에 있는 부처님은 장소가 있어요. 장소. 형상이 있는 부처님은 장소가 있어. 장소가 없으면 공중에 매일 날아다녀야 되잖아요. 부처님도 땅을 걷고 다녀요. 그래서 형상이 있는 부처님은 여기 우리 사바세계에 살고 있거나 서쪽에 살고 있거나 장소가 있고, 이 법신의 부처님은 장소가 없어요.

       여기 지금 우리는 법신의 부처와 보신의 부처를 중심으로 수행을 해야지, 지혜가 아주 뛰어나게 발달한다 이 말이에요. 우리가 이 법신을 조금이라도 체험을 해야지 지혜가 늘어나고 복덕이 늘어나고 세상을 보는 안목이 달라지고 그렇습니다.

       아무리 지금까지 공부를 많이 했느니 안 했느니, 무슨 가방끈이 짧고 길고 전혀 틀려. 저는 공부를 많이 하는 사람이 아니라, 가장 우리나라에서 스님들 중에서 일을 많이 한 사람이에요. 노동. 노동도 막노동. 아주 깊은 산속에서 농사 짓고 그래. 지금은 이제 힘들어서 안 하고. 가방끈이 길지 않은 사람이라니까. 완전히 보통 사람이라. 여러분에게 지금 희망을 주려고 그러는 거에요. 모든 스님들한테. 나는 그런 사람인데 지금 이 공부를 하고 있는 거라.

 

 

      법신을 체험을 해야지, 정말로 이 불법에 대한 환희심을 느끼는 거예요. 그래서 염불을 하는데 여러 가지 방법이 있는데, 여기에 적어놓은 거 있죠. 우리 몸에서 청정한 진여의 힘이 작용하면 지혜와 복덕이 증장한다. 그렇습니다. 부처님은 온몸이 진여로 돼 있어요. 청정하다 이 말이에요. 이해가 가죠? 이거는 불자들은 이해를 잘 못해. 왜 그러냐 하면 자기 집착에 딱 빠지고 자기 수행법에만 빠져가지고. 그런데 불교를 믿지 않는 사람이 있죠, 일반 학생들 있죠, 얘들이 더 잘 알아들어. 여러분들도 항상 법문을 마음을 열어놓고 들으라고, ‘나는 이렇게 알고 있는데 오늘 저 스님은 무슨 법문을 할까?’ 그렇게 오면은 그 마음 자세가 아주 애초에 틀린 거야. 그럼 안 들어가. 법문이 안 들어가. 오늘 딱 비우고 내 얘기만 일단 들어야 돼. 옳고 그런 거는 다음에 판단을 하고.
       이 진여가 한 80%70% 60%나 이 정도가 돼야지 우리가 공덕을 얻고 지혜가 늘어날 텐데, 진여가 작용하는 거, 우리 몸에서 청정한 마음이 작용하는 것이 10%5%밖에 안 돼. 기분 나빠요? 실제로 그래. 프로수가 너무 적으니까 이것이 작용하는지 아닌지를 여러분들이 감지를 못해. 감지를 못 하는 거는 프로수가 적은 거예요. 이것이 이제 많이 여기서 작용을 하면 30% 이상, 40%, 50% 작용을 하게 되면은 자기가 알아, 안다 이 말이라. 이제 이것을 보고 진짜 환희심이라 그래요.

       그런데 100% 법신을 깨닫는 것을 진짜 깨달음이라 그래요. 체험하는 거 이걸 안 해도, 진여의 작용을 많이 받으면은 이것은 깨닫지 않은 깨달음이다 이런 뜻으로 얘기한 거예요.

       보세요, 첫 번째 절이라는 게 여기 있죠. 예배문, 찬탄문, 작원문, 관찰문, 회향문이다. 이거는 여러분들이 이제 많이 하고 나서, 다음에 5년 후, 3년 후나 뒤에, 세계적인 그 염불 수행에 관한 많은 어떤 책들을 보게 되면은 이런 글을 보게 돼 있어. “여기도 있네하면서 보게 돼 있다고. 아주 뛰어난 분들이 연구하는 것이 바로 이거예요.

       예배문이라. 예배문은 여기서는 절을 해요. . 절을 하는데 여러분이 지금은 지장보살 하죠. 지장보살을 나무아미타불로 바꿀 필요가 있을까 없을까? 바꿀 필요 없어요. 원리만 아세요. 관세음보살이라든지 지장보살이라든지 아미타불이라든지 원리는 알았어요. 원리는 아는데,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에서 지장보살 지장보살하면서 어떤 원을, 소를 가지고, 소원을 하나를 세워가지고 하지요. 주지스님이 또 그러라 했을지 몰라. 뭐든지 소원 하나 진관사에 하면 성취되니까 다 그것만 빌고 하라고 한 적 있어요? 아무리 급해도, 손주 입학이 아주 급해도, 우리 며느리 지금 수술이 아주 급해도, 그거 생각하지 마. 하지 말고 절을 해. 내가 시키는 건 이제 아미타불인데, 나무아미타불하고 이제 꿇어앉는거야. 이해하죠? 서서 합장하고 있다가 나무아미타불 이러면서 꿇어 앉는 거지. 그다음에 무릎 꿇고 앉는 거, 나무아미타불하면서 절하는 거지.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이것만 해. 이렇게 하면 여기 잡념이 없어지잖아요. 잡념이 없어지는 자리로 진여에요. 진여는 기운이에요. 진여는 에너지입니다. 우리 회주스님도 에너지라고 그러데요. 그래서 우리 회주스님이 확실히 잘 알고 있다. 현대적으로 이렇게 생각을 합니다. 가장 쉽게 말하면 에너지입니다. 에너지. 이게 이 자리에 집중을 했을 때, 딱 아무 생각을 안 하고 집중을 하고 있을 때, 진여가 이 빈 자리를 뚫고 들어와. 들어온다니까. 이 진여가 어디로 들어오냐면 구멍이 있어서 들어오는 게 아니라, 온 육근으로 다 들어와. 실제로. 그런데 진여의 힘이 아주 강렬한 건 아니야. 강렬한 건 아니라 저 이 무명의 힘이 강하면 이것이 다시 또 밀려나버려요. 우리 계속 그러고 있는 거라. 그래서 여러분들이 아주 착한 마음 먹고, 근심 걱정도 없고 그러면, 60이 넘었는데도 또 다시 시집 갈 사람처럼 막 얼굴이 훤하고 막 그래 보이는 거야. 진여가 작용이 돼서 그래. 아시겠어요? 절을 이제 옛날에 하던 그런 식으로 하면 안 되고, 여러분들이 절을 되게 반동으로 하잖아요. 반동으로 절하는 거 알죠? 108배를 금방 빨리하면 안 되고, 천천히 해야 돼. 많이 한다고 복을 빨리 받는 게 아니고, 절을 천천히 하시라. 그리고 절을 많이 목표를 세워가지고 하지 마. 천 배, 이천 배 세워놓고 하면 그건 바보짓이라. 적게 해도 진심으로 천천히 하시라.

        이제 여러분들이 다 끝나고, 이 예배문을 다 하고 나서, 아들 손자 며느리 그때는 그냥 마음대로 우리 손자 우리 손자 우리 손자 우리 손자 그러든지 돈돈돈돈돈돈돈 그러든지 알아서 하세요. 할 때는 그렇게 하면 안 돼. 그러면 청정한 진여의 힘이 작용하게 하는 겁니다.

        그다음에 소리 있죠. 이제 나무아미타불을 하든지, 지장보살, 우리 스님 지장보살을 잘 하시대. 다른 거는, 관세음보살이나 지장보살은 나는 잘 못 해. 나무아미타불만 조금 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할 때 숨을 꼭 타에서만 쉬어. 이건 이제 아주 기본적인 것만 그런데, 지장보살을 할 때도 한 곳에서만 숨을 쉬어야 돼.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지장보살 이렇게 하지 말아요(숨 쉼없이 계속함). 아시겠어요? 그렇다고 여기서 쉬다 저기서 쉬다 그러면 안 되고, 고르게 딱 하려면은 항상 숨이 조금 남아 있을 때 숨을 쉬어야 돼요. ‘, 스님이 타에서 쉬라 그랬다 타에서 쉬라 그랬다.’ 그래가지고 꼭 타에서만 쉬면은 타에서 쉰다는 그 생각 때문에 다른 생각이 들어오질 않아. 이치를 알았죠. 아까 절도 집중해서 나무아미타불의 타에서 하라고 했지요. 지장보살도 할 때 어느 하나 지점을 정하면 되요.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절하고. 그러면 이제 절을 한 번 할 때 나무아미타불을 네 번을 해. 꼭 네 번밖에 안 해. 스님이 타에서 몸을 움직이라고 그랬지, 그러니까 이 가르치는 사람한테 대한 믿음이 강해야 돼. 스승에 대한 믿음이 강해야 돼. 그래야지 되는 거라. 그러면 이제 그 생각 때문에 잡음이 안 들어오는 거야. 아시겠어요?

 

        이 산천초목도 본성이 진여라고 그랬죠. 사람의 본성도 진여라고 그랬죠. 짐승도 다 진여죠. 그러면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러면은 산천초목이 내 소리를 들을까 안 들을까? (들어요) 이거는 어떻게 강력한 믿음이 있네. 이거를 믿어야 돼. 저건 미신 아닌가? 신비주의 아닌가? 그렇지 않아요. 강력한 믿음이 돼야 돼요. 이게 여러분이 여기서 아주 고요한 소리로 청아한 소리로 욕심이 없는 소리로 여기서 염불을 하면, 주지스님은 마음이 움직일까 안 움직일까? 대중이 움직여요. 대중이 다 움직입니다. 그래서 대중이 헛짓거리를 못 해요. 누구나 똑같이 듣는 감정은 들리지만 다 움직입니다. 움직이고 이 진여에서 나오는 소리는 그 파동은 수행자들이 금방 알아버려요. 여러분이 분풀이로 염불할 때도 있죠? 가서 그냥 관세음보살이나 불러버리자. 그러면은 그건 진여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야. 그러니까 산천초목이 다 싫어. 믿으세요. 평생 믿으라 안 할 테니까 이번 사십구일 있죠, 이동안만이라도 믿고 해봐. 그러면 반드시 변화가 있어요.

        그다음에 세 번째, 첫 번째 절하는 것, 두 번째 이 명호를 입으로 부르는 걸 찬탄이라 그러고. 찬탄. 절이라는 거는 신업청정이고, 찬탄문은 구업청정이고, 작원문은 의업청정이라. 요거 삼매를 닦는 법이에요.

 

        그러면 여러분 이제 절도 했는데 힘도 들고 땀도 나고 소리를 했는데도 소리를 하는 것도 한계가 있잖아. 그렇죠? 그러면 이제 가만히 앉아서 할 수도 있어요. 앉아서 하는데 이때는 일상관이라는 거 있죠, 일상관. 이건 무슨 말이냐면 중생은 이 목표가 유상 유념, 어떤 형상이 있어야지 그것을 보고 집중하기가 좋지, 지금처럼 화두를 든다. 스님들은 화두 들죠. ‘이뭣고를 든다든지 시심마를 든단 말이야. 그건 내가 깊이 봤을 때는 굉장히 우스운 일이야. 왜 그러냐 하면, ‘이뭣고시심마든 형상이 없고 어떤 화두로 말을 개념을 준 거죠. 그렇죠? 여러분들이 그 안 해도 번뇌가 많은데, 스님들도 번뇌가 많아요. 많은데 이것을 깨달으려고 하니 설상가상이라, 번뇌 위에다가 진짜 큰 번뇌 또 하나 주는 거야.
       그래서 누구든지, 스님이든 누구든지 처음에 삼매에 들어가는 연습을 할 때는 일상관해요. 해의 모습이 있죠. 지는 해의 모습을 일단 딱 놓고, 이건 다 선종에서도 한 거예요. 해의 모습. 이 지는 해의 모습. 뜨는 해의 모습은 마음으로 생각만 해도 눈이 부시거든. 그렇죠? 그래 마음이 대단한 거야. 미운 놈 생각하면 열이 오르죠. 똑같아. 뜨는 해를 생각하면 눈이 부셔. 그래서 집중이 안 돼. 그래서 지는 해를 해야 돼.

        이렇게 자꾸 연습을 하면 깊은 삼매에 들어가지 않더라도 한 곳에 집중을 하고 있기 때문에 진여가 작용을 한다 이 말입니다. 그런 이치에요.

  

        관찰문. 삼매를 해가지고 아무 생각이 없을 때 다른 잡념이 일어나. 누구든지 한 곳에 지금 한 곳에 집중을 하면은 잡념이 들어오질 않아요. 여러분은 관세음보살 지장보살 부르면 잡념이 들어오죠. 잡념이 안 들어오다가 지장보살 부르면 들어오죠. 왜 들어올까? 왜 지장보살만 부르고 있는데 잡념이 들어올까? 지장보살만 부르라 그랬는데 지장보살만 안 부르니까 그래요. 아시겠어요? 너무 간단하죠. 지장보살만 안 부르고 다른 거 생각해가면서 불러. 그렇죠. 이렇게 단순해야 돼. 수행은 머리 굴리면 안 돼. 여러분이 머리 굴리는 거 다 버려야 돼요. 조용해 졌죠. 집중을 하죠. 집중. 스님이 뭐냐 하면은 이 일상, 나뿐 아니라 수 100200년 천년 내려오는 조사들이 그래요. 오조홍인부터 지금까지 그런 거야. 지금까지 1,500년 동안 면면히 내려오는 일상관이라는 겁니다. 일상관을 하면, 딱 집중을 하면, 마음이 고요해져요. 마음이 많이 고요해지면 계속 집중만 하고 있으면 정신이 몽롱해져버릴 수가 있어요. 그래서 삼매 중에 관찰을 해야 돼. 관찰. 이 사물을 관찰하는데 어떻게 관찰을 하냐 그러면, 내가 하는 수행법이 아미타불 화신이라고 관찰을 해. 아미타불 화신. 진리의 입장에서, 부처의 입장에서 볼 때는, 여러분은 아미타불 화신이에요. 아미타 부처님은 화신이라고. 실제로. 그렇게 보라는 게 아니고 실제로 그래. 화신이에요. 이게 끝이라. 계속 화신으로만 봐. 화신으로. 지금 금생에 이 수행이 끝이라고 봐. 아미타불 화신으로 보는 거야.
       여러분이 아미타불 화신이라. 여러분이 아미타불 화신인데, 여러분들은 오늘 여기 어떻게 왔냐 그러면, 나의 입장에서는 저 스님이 염불을 제대로 했나 그러고 지금 나한테 실험을 온 거야. 안 그래요? 여러분은 그 뜻을 몰라. 부처님의 뜻은 그래요. 실제로 그렇습니다. 전부 아미타불 화신이라. 그러면 이제 화신의 의미를 깊이 배우면은 여러분이 이제 난리 나는 거야. 난리 나. 잠도 안 오고 밥도 안 먹고 그냥 밤낮을 잊어버리고 그래요. 이 아미타불 화신 뜻을 알아버리면. 놀라는 일이 생겨. 다 가르쳐줘도. 그만해야지.

       아미타불 화신이니까요. 이제 지혜와, 지혜로서 자비를 베풀라 그러잖아요. 그렇죠. 불교는 아주 실용적이고 실존적이고 현실적이고 그렇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 지금 여러분은 보살이 아니잖아요. 그러면은 자비를 베푼다는 것이 좀 마음이 부끄럽죠. 부끄러워. 나도 부끄러운데 그래서 말입니다. 염불의 깨달음은 모든 인연의 은혜에 감사하고, 보은하고 회향하는 것이다. 알았어요? 그것을 자비를 안 하고 말입니다. 이 중생의 마음을 아주 편안하게 해주는 거야. 이건 내 말이 아니고 부처님이 말씀하신 게야. 나도 여러분한테요, 오늘 왔다 가면서 여러분에게 자비를 베풀 것이 하나도 없어. 능력이 없어. 그런데 여러분을 향해서 내가 여러분이 여기 이 더운데 이렇게 많이 모여가지고 법문하는데 이렇게 장엄을 해준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게 생각하면, 나로서는 더 큰 마음이 없는 거야. 그렇게 생각하는 겁니다. 아시겠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