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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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6월 10일 49재 법문
종범스님 2022-06-10
今日 靈駕 至心諦廳 至心諦受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生身太空塵 태어난 몸은 허공의 티끌 한 점이고 생신태공진이요識心夢念想 생각은 꿈꾸는 몽상과 다름없네! 식심몽념상하여浮雲自去來 뜬구름이 덧없이 오고 가듯 부운이 자거래하니身識如是相 몸과 생각의 모습도 그러하네!신식이 여시상이로다나무아미타불 돌아가신 분을 극락세계로 모시는 것이 재를 올리는 의식입니다. 재는 어떻게 올리는가. 우리가 이 세상에 태어나서 받은 몸, 움직이는 생각이 있고, 석가모니가 깨달은 몸, 석가모니가 이룩한 지혜, 그게 이제 극락세계는 깨달은 몸이 도달한 곳이고 이룩한 지혜로 머무는 곳인데요. 지금 한문으로 읽은 내용이 생신(生身)은, 날 생자, 몸 신자, 이 세상에 태어난 몸은, 석가모니가 깨달은 청정법신, 아무 데도 물들지 않고, 아무리 세월이 지나가도 변함이 없는, 물듦이 없고 변함이 없는 그 몸을 깨달았는데 그걸 청정법신이라고 한다. 법 법자, 몸 신자. 이 세상에 태어난 몸을 인연소생신, 인연으로 태어났다. 이 청정법신에다가 인연소생 세상에 태어난 몸을 비교를 해보니까, 이 태어난 몸은 태공진(太空塵)이라, 저 태허공에, 넓고 넓은 허공에 한 점의 티끌과 같다. 청정법신은 끝없는 허공과 같다. 이런 몸이거든요. 평생을 세상에서 움직인 생각은 그 청정법신을 깨달아서 이룩한 지혜, 생신이 법신이 되고, 생각이 지혜가 되는 걸 깨달음이라고 하는데, 그 지혜는 보광명지(普光明智), 넓을 보, 빛 광, 밝을 명, 지혜 지, 넓게 빛나고 밝은 지혜, 보광명지. 그 보광명지에다가 알 식, 마음 심(識心), 생각하는 마음을 비교해 보니까 몽념상(夢念想)이라. 꿈의 꿈꾸는 생각과 같다. 생각은 꿈과 같고, 우리 태어난 몸은 허공에 한점 티끌과 같다. 그래서 그 모습이 부운이 자거래(浮雲自去來)하니, 구름이 스스로 스스로 가니 이 태어난 몸과 생각하는 생각이 마치 그와 같다. 그러면 극락세계에 가려면 이렇게 뜬구름과 같고, 허공에 티끌과 같고, 꿈꾸는 생각과 같은 그런 걸로 가는 게 아니라, 부처님이 깨달은 청정법신, 부처님이 이룩한 보광명지 그 세계로 가는 것이다. 이런 얘기죠. 一切凡夫 妄想執著 일체범부는 망상집착으로住於世間 生滅相續 주어세간하야 생멸이 상속하고三世諸佛 般若觀照 삼세제불은 반야관조到於彼岸 眞如法界 도어피안하니 진여법계요淸淨法界 常住法界 청정법계요 상주법계이니 壽光無量 福德具足 수광이 무량하고 복덕이 구족하며神通自在 極樂世界신통이 자재하니 극락세계로다나무아미타불 그럼 뭘 깨달았나. 마음이라는 걸 깨달았는데, 이 마음이라는 게 불가사이하고, 생각할수록 무량공덕이라, 한량없는 공덕이다. 그런데 이 마음은 보통 사람의 마음이 있고, 도를 많이 닦아서 얻은 마음이 있고, 완전한 깨달음을 얻어서, 그 완전한 깨달음을 대각이라고 하는데, 큰 대자, 깨달음, 그 대각을 얻은 마음이 있고, 세상살이에 골몰하는 마음이 있고, 인연 따라서 여러 가지로 나타나요, 이 마음이라는 게. 그래서 세상살이에 골몰하는 마음을 범부심이라 이러고, 도를 닦아가는 마음을 보살심이라 하고, 대각을 이룬 부처님의 마음을 두 마디로 설명하면 자성청정심, 신통광명심. 부처님은 그 마음의 근본 바탕, 자성, 그 근본 바탕에 티끌 한 점도 붓지 않은 청정한 모습으로 왔다. 그래서 이게 자성청정심이고. 그 자성청정심을 얻으면 어떻게 되냐. 거기서 한량없는 신통과 광명이 나온다. 이걸 신통광명심이라고 해요. 부처님의 마음은 자성청정심, 신통광명심이고, 도를 닦아가는 보살의 마음은 보살심, 범부심, 제불심. 보살의 마음은 반야관조(般若觀照), 반야는 지혜인데, 지혜가 하는 일은 볼 관자, 비출 조자, 보는 거예요. 하늘을 보고, 땅을 보고, 사람을 보고, 생각이 일어나는 걸 보고, 생각이 사라지는 걸 다 봐요. 이걸 반야관조심이라고 해요. 반야관조. 그럼 범부의 마음은 뭐냐. 보는 대로 취하고 집착을 해요. 보는 대로 얻으려고 하고, 취하려고 하고, 가지려고 하고, 가진 것은 소유하려고 하고, 그래서 이걸 망상집착심이라고 해요. 허망한 생각으로 집착하는 마음이다. 그래서 일체범부는 망상집착으로(一切凡夫 妄想執著), 주어세간(住於世間)하니, 세간이라고 하는 것은 낳다 죽었다 하는 공간이에요. 범부가 머무는 것은 낳다 죽었다하는 세간 공간에 머문다. 그러니까 어떻게 되느냐. 생멸이 상속이라(生滅相續). 나고 죽는 것이 계속된다 이 말이죠. 생멸 상속. 근데 삼세제불은(三世諸佛) 보살행을 통해서 반야를 관조(般若觀照)하니, 망상집착을 하는 게 아니라 반야로 관조를 하니까 모든 지 딱 보면 취할 게 하나도 없어요. 버릴 게 하나도 없어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이걸 청정법계(淸淨法界)라. 망상 집착을 하면 생로병사 생멸상속인데, 반야로 관조를 하면 청정법계다. 뭐든지 딱 보면 두려울 게 없어요. 색즉시공이에요. 딱 보니 죽음이 없는데요. 딱 보면 태어나는 게 없어요. 그런데 망상 집착을 하면 태어나고 죽고 태어나고 죽고 끝없이 생멸이 상속을 해요. 보면 없다. 그러면 없는 것 때문에 어떡하냐. 없는 것도 없는 거예요. 없는 거를 자세히 보면 없는 게 없어요. 있는 걸 자세히 보면 있는 게 없어요. 이게 반야관조에요. 그래서 반야관조하면 모든 것에 버릴 것도 없고 취할 것도 없는 그런 경지에 도달하는데, 망상집착하면 전부 생겼다 사라지고 탐나고 두렵고 그런 거예요. 취한 거 버리고. 딱 보면 취할 것도 없고, 두려울 것도 없고, 무서울 것 없고. 그래서 그걸 세간이라고 하지 않고 피안(彼岸)이라고, 건너 공간이다. 피안. 보면 피안인데 집착하면 생사에요. 뭐든지 딱 보면 무서울 거 없어요. 탐 날 거 없어요. 집착하면 무섭고 탐나고 그런단 말이죠. 그래서 삼세제불(三世諸佛)은 이 지혜로 봤기 때문에, 집착하지 않고 봤기 때문에 어떻게 되냐. 도어피안(到於彼岸)이라, 피안에 도달한다. 그러니까 그 피안이 어떤 세계인가. 진여법계(眞如法界)다, 참 그대로 법의 세계다. 진여법계. 피안이다. 청정법계(淸淨法界)다. 뭐가 변하고 물들고 그게 아니라 그대로 청정한 법계다. 상주법계(常住法界)다. 항상 상자, 머물 주자. 항상 하는 상주. 그리고 거기는 수광이 무량하고(壽光無量), 수명과 광명이 한량이 없고. 청정법계는 수명이 없어요. 백 년 수명이 있는 게 아니고, 천년 수명이 있는 게 아니고, 만년 수명이 있는 게 아니고, 저 허공과 같이 무량해요, 수명이. 수명이 무량하고. 또 복덕이 구족하고(福德具足), 좋은 게 복덕인데 좋은 게 한량없이 많아요. 그리고 신통이 자재하고(神通自在), 신통이 자재라는 것은 보는 지혜로 딱 보면 여기서 움직이지 않고 가고 싶은 데 다 가는 게 그게 신통이에요. 비행기 타고 화성이나 달나라에 가는 게 아니라 지혜로 간단 말이죠. 지혜로 딱 보면 이곳을 움직이지 않고 저곳에 가. 그런 것을 신통이라고 해요. 그래서 신통이 자재하니 그 세계를 극락세계라고 한다. 여기까지 아까 읽은 것이거든요. 非識所能識 생각으로 알 수 있는 것 아니고 비식소능식이며 亦非心境界 또한 마음의 대상도 아니다. 역비심경계이니其性本淸淨 그 신령한 자성이 본래 청정하여 기성이 본청정하야開示諸群生 중생에게 길을 열어 깨우친다. 개시제군생이로다(화엄경, 보살문명품)나무아미타불 이 마음이라는 건 불가사이하다. 왜 불가사이하냐. 그냥 망상집착을 가지고 탐내고 화내고 근심하고 걱정하고 해도 그 근심 걱정하는 속에 자성청정심이 그대로 들어있어요. 그래서 불가사의하다는 거예요. 아주 희한해요. 생각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금방 화냈다가 금방 또 웃을 수가 있는 거예요. 화내는 속에도 그 본래 깨끗한 마음이 그냥 들어있어요. 즐거워하는 속에도 본래 깨끗한 마음이 그냥 들어있어요. 그래서 이거를 수연심(隨緣心) 불변심, 수연이라는 건 따를 수 자, 인연 연자, 인연을 따르는 마음이 있다. 인연 따르는 마음이라는 것은 사람이 오면 사람 보고, 하늘이 열리면 하늘 보고, 어두울 때는 어두운 거 보고, 밝을 때는 밝은 거 보고 다 보는 거예요. 그걸 수연심이라고 하거든요. 인연 따른 마음, 근데 아무리 어두운 걸 봐도 마음 청정심이 어두워지질 않아요. 아무리 밝은 걸 봐도 마음 청정심이 밝아지지 않아요. 사람을 봐도 마음 그 청정심이 사람 되는 게 아니에요. 나무를 봐도 그 청정심이 나무 되는 게 아니에요. 이걸 불변심이라고 해요. 하나도 변함이 없는 상태로 모든 거를 다 보고 모든 걸 다 판단하니까 수연심 불변심이라고 한다. 이 사바세계를 세간법이라고 하는데, 이 세간법에 근심걱정을 하다가도 극락세계에 딱 가면 극락세계 그대로 담아요. 마음이 사바세계 된 게 아니고 세간법이 된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이거를 설명할 방법이 없어서, 해인삼매라는 말로 이제 멋지게 가르쳤는데, 해인이라는 건 바다 해자, 도장 인자인데, 바다가 있고 거기 비춰진 그림자가 있단 말이에요. 그 그림자를 하얀 종이에 도장 찍은 것처럼 보인다고 해서 비유로 도장 인자를 쓰는데, 바다라는 건 물이에요, 해수. 바닷물은 그냥 바닷물일 뿐이야. 그런데 이 바닷물에 비추어지는 그림자는 아주 다양하다. 나무도 비치고 사람도 비치고 구름도 비치고 해도 비치고 달도 비치고 어두운 것도 비치고, 밝은 것도 비치고. 이걸 해인이라고 해요. 아무리 해인의 모습이 다종다양해도 해수는 항상 바닷물인 거예요. 그냥. 밤중이 되었다고 바닷물이 밤중이 된 게 아니고요, 햇빛이 올라왔다고 해도 바닷물이 햇빛 된 게 아니고 그냥 바닷물 그대로 변함이 없는 상태로 온갖 것이 나타나는 것마다 다 비친다. 이걸 불변수연이라, 이것이 해인삼매다. 이렇게 가르쳐요. 이것도 신통인 게 어째서 신통이냐. 바다에 높은 산이 비췄다고 해서 바닷물이 산꼭대기로 올라간 것도 아니고 산 정상이 바닷속으로 들어간 것도 아닌데, 그대로 바닷속을 보니 높은 산이 바닷물 속에 환히 비춘단 말이에요. 이게 신통이에요. 산이 제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바닷속에 비치고 물이 산꼭대기에 올라가지 않고 산 그림자가 바닷속에 다 비친다. 이걸 깨달은 거예요. 아무리 세간 속에서 근심 걱정하고 애를 태우고 살았어도 극락세계에 가면 이 세간법은 없고 그대로 극락세계에 그냥 머물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런 마음이 있기 때문에 석가모니가 청정법신을 깨닫고, 보광명지를 성취하고 극락세계에 노니는데, 일체 모든 사람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해서 이 세상에서 근심 걱정하는 사람들도 극락세계로 오면 그날로 극락세계에서 복을 받는 거지, 산 보고 왔다고 그래서 마음이 산 된 게 아니고, 싸우고 갔다고 마음이 싸우는 게 아니다 이거죠. 그런데 이것은 역비심경계(亦非心境界)라, 자성청정심 보광명지는 마음이 저 밖에서 알아내고 밖에 가서 찾는 게 아니다. 있는 장소가 없어요. 바닷물의 움직임이 전혀 없는 것처럼. 기성이 본천정(其性本淸淨)하야, 마음 자성청정이 본래로 청정해서, 개시제군생(開示諸群生)이라, 여러 중생들에게 깨달음의 길, 청정의 길, 복덕의 길을 열어서 인도한다. 그러니까 극락세계를 인도하는 삼세제불의 인도받을 수 있는 자성심을 일체범부가 다 가지고 있기 때문에 바로 극락세계에 갈 수 있는 거에요. 그런데 부처님은 반야관조, 반야로 딱 보는 행위를 통해서 갔는데, 오늘의 영가는 반야관조행을 닦을 일이 없기 때문에 부처님의 인도를 받아서 간다 이거에요. 그 인도가 반야용선이라고 그래요. 반야의 배. 용이라는 건 보이지 않는데 하늘에 올라가듯이 반야라는 보이지 않는데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배다. 반야용선을 타고 간다. 믿으면 바로 가는데 안 믿으면 갈 수 없어요. 못 가. 아무리 이렇게 법문을 해도 아무도 못 가는 거예요. 그게 또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가라고 법문하지 못 가라고 법문 하는 거 아닌데 아무나 갈 수 없는 거에요. 그 마음은 불가사이 한 거지요. 이렇게 공덕을 드리고, 아들 딸 드리고 가족들이 손주 손녀가 인연을 짓는데 안 믿을 이는 없죠. 안 믿을 이는 없어요. 그렇게 잘 믿으시고, 반야용선의 인도를 잘 받아서 극락세계 왕생하도록 하는 게 재를 지내는 뜻입니다. 今日 靈駕 至心諦廳 至心諦受금일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今日當靈 直往樂土 금일영가 직왕낙토하야無盡福樂 無盡受用무진복락을 무진수용하십시오나무아미타불 오늘 영가께서는 바로 낙토에 가서, 직왕낙토(直往樂土)라, 낙토는 극락세계를 즐거운 락자, 흑 토자, 낙토라고 그래요. 극락세계를 줄이면 낙토. 바로 극락세계 낙토에 가셔서 무진복락(無盡福樂)을, 없을 무, 다할 진, 다함없는 끝없는 복과 즐거움을 무진수용(無盡受用)하십시오. 끝없이 끝없이 수용은, 받을 수자, 쓸 용자, 받는다는 말인데, 끝없이 끝없이 받으십시오. 이렇게 해서 오늘 법문을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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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법회]6월 5일 일요가족법회 법문
주지 법해스님 2022-06-05
안녕하세요. 날씨가 많이 더워졌죠. 절기 적으로도 더울 때가 됐어요. 다들 건강을 조심하고 내 몸을 살피셔야 해요. 특히 음식을 조심스럽게 드셔야 돼요. 이열치열이거든요. 우리 위장이 제일 먼저 음식을 받아들이는데, 위장은 화생토입니다. 위장은 따뜻한 기운이 들어와야지 움직이는 겁니다. 그런데 찬물을 자꾸 마시게 되면 위가 위축이 되어서 다른 힘든 나쁜 일이 발생하게 됩니다. 오늘은 여러분들께 신심(信心)에 대해 말씀드리겠습니다. 우리 불교에서는 가장 중요한 게 신심입니다. 신심은 곧 공덕의 어머니가 됩니다. 공덕이라는 것은 내가 짓고 내가 한 행동인데, 선한 행위가 쌓여서 미래를 좌우하는 게 공덕이에요. 불교에서 말하지 않아도, 사회생활에서 신뢰라는 건 너무 중요합니다. 부모가 자식을 믿지 않고, 부부가 서로를 믿지 않고, 학생이 스승을 믿지 않고, 친구가 친구를 믿지 않을 때 나타나는 현상은 괴로움이에요. 우리 불교는 믿음의 종교라고 할 수 있습니다. 신심, 믿을 신자, 마음 심자, 믿는 마음. 딱 마음을 믿게 되면 결정심이라 그래요. 내가 일단 그 사람을 믿었기 때문에 믿으면 하나가 되는 거, 하나가 되어서 결정심이 생기게 되는 거예요. 이럴까 저럴까가 아니라 결정심이 생기기 때문에 신심을 다른 말로 결정심이다, 또는 일심이다, 한마음이 되었다, 라고 합니다. 그래서 믿음이 생기면 그다음에는 ‘내가 무엇을 하겠다.’라는 나의 꿈이 발견이 돼요. 그것을 우리는 원력(願力)이라 그러죠. 원력, 내가 하고자 하는 원할 원자, 힘 력자, 꿈을 발견할 수 있어요. 믿음이 생기면 내가 뭐를 해야 되겠다라는 결정이 내 스스로 일어나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믿음이 생기면 그다음에 원력이 생긴다. 원력이 생기면 그다음에는 열심히 마음을 모아서 정진을 하게 되는 겁니다. 이제 이 길이 맞다. 맞다고 생각하면은 그거를 그냥 열심히 내가 정성을 들인다. 정성이라는 것은 진실한 마음을 그대로 행하는 게 정성이에요. 최선을 다해서 하는 거, 진실한 마음을 이게 맞다고 내가 생각했으면 끊임없이 부단히 그것을 하다가 보면 그다음에는 공덕이 이루어지는 거예요. 공덕, 공덕은 선근이 쌓여서, 내가 잘한 일이 거기에 축적이 되어서 나의 미래를 보장해 주는 걸 공덕이라고 하고, 공덕, 원력이 있으면 가피가 있어요. 가피나 공덕이나 같은 말이에요. 내가 받는 거, 그걸 받을 수 있으면 그런 다음에 성도가 되는 거예요. 내가 이루고자 하는 부처를 이룰 수 있는 거예요. 그 제일 밑바탕이 믿음이에요. 우리 한문화 체험관의 지하가 흙다움이죠. 그 믿음은 다시 말하면, 우리가 한 그루의 나무를 심으면 흙에 뿌리를 깊이 내리는 것처럼, 뿌리와 같은 거예요. 그 뿌리가 깊이 박히고, 그다음에 원력으로 내가 하고자 하는 방향으로 열심히 하는 건 줄기, 그다음, 뿌리가 깊고 줄기가 튼튼하면 그다음에 뭐가 생겨요? 잎이 나고 꽃이 피고 열매를 얻을 수 있잖아요. 열매를 얻는 것이 공덕의 과예요. 그렇게 하는 거를 신심이라고 해요. 그러면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떤 걸 믿느냐. 우리는 뭐를 믿고 있어요? 부처님의 말씀을 믿고 있어요. 부처님 말씀 이전에 동양은 주로 유교 사상의 영향을 받았고, 특히 한국은 유교 사상이 뿌리를 많이 내리고 있습니다. 유교에서 제일 중요시하는 것은 어질 인자(仁)입니다. 어질 인자. 어질 인자는 관계에요. 사람 인 변에 두 이자이기 때문에,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 관계를 잘하는 사람은 분명히 성공을 합니다. 그리고 유교에서는 ‘어질 인자는 나의 씨앗이다.’라고 얘기해요. 내가 분자가 되는 씨앗이다. 이렇게 해서 논어에 보면 어질 인자, 배울 학자가 제일 첫 번째에 나오는 겁니다. 배울 학자. 인의예지, 성인이 말씀하신 거를 깊이 배워서 그걸 내 거로 습득해서 살다가 보면 만족한 삶을 살고 군자가 된다.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그러면 도교에서는 유불선이잖아요. 도교에서는 또 뭐라 그러느냐. 도교에서는 제일 첫 글자가 도라는 글자에요. 도덕경에 보면 도는 뭐냐. 무위자연(無爲自然), 자연이 돌아가는 섭리를 우리가 배우면 너무 행복하고 부족함이 없이 만족하게 살 수가 있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래서 그 도라는 건 이 자연이 내가 뭔가를 계속 채우려는 마음, 이 마음을 버리고 계속 아는 것도 들어내고, 가진 것도 들어내고, 이렇게 해서 계속 들어내라, 비워라. 이게 도교에서 가르치는 거예요. 그렇게 하면 모두가 행복할 것이다. 그럼 부처님은 뭐라고 말씀을 하셨느냐. 부처님은 각(覺)을 말씀하셨어요. 각, 깨달을 각자. 그럼 이 깨달음이라는 것은 뭐예요. 깨달음이라는 것은 우리가 없는 것을 알아내는 게 깨달음이 아니에요. 내가 간직하고 있는 것을 몰랐던 것을 아는 게 깨달음이에요. 내가 가지고 있었던 그거를 알아내는 게 깨달음이거든요. 그러면 뭐를 알아냈느냐. 생사대사(生死大事)가, 우리가 밥 먹고 생활하고 나고 죽고 하는 것이 곧 해탈이더라. 그래서 생사대사가 곧 번뇌와 고통이 아니고 그게 곧 적멸이더라. 생사대사는 곧 적멸이다. 그 마음의 차이거든요. 마음의 차이. 그래서 우리 진관사에서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하지요. 누가? 내가. 내가 부처라는 거를 알면 이걸 믿어야 될 거 아니에요. 그죠. “마음의 정원 진관사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스님이 계속 주장을 해요. 당신은 부처고, 우리 엄마도 부처고, 우리 아들도 부처고, 우리 선생님도 부처고, 다 부처님이다, 그거를 이제 인지를 했어요. 그걸 믿었어요. 믿으면 믿음대로 부처님처럼 내가 행동하고 보는 것도 부처님처럼 봐야 돼요. 그런데 우리는 색안경을 끼고 나를 보게 되고, ‘내가 뭐 스님이 말해도 거기 내가 뭐..’ 이러면서 스스로를 자학하는 거. 자신감이 없는 거예요. 자신감. 스스로 자자에 믿을 신자. 스스로를 믿지 않는 거예요. 그래서 이 믿음이 나의 팔자를 바꾸는데 근본입니다. 믿음이 형성이 되면 그다음에는 방향이 설정이 됐어요. 내가 뭐를 해야 되겠다라는 원력, 꿈이 생겼어요. “난 부처님처럼, 스님께서 부처님처럼 행동하면 내가 행복하다니까” 이렇게 되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렇게 행동을 하려고 하는데 인간이 가지고 있는 두 가지 고질병이 있어요. 믿으라 해도 이게 안 되는 거예요. 무슨 고질병이냐. 매일 치료를 하고 약을 먹는데도 죽을 때까지 치료가 안 되는 병이 있어요. 뭘까요? 첫째는, 배고픔이에요. 밥 한 끼 먹으면 그다음 배가 안 고파야 하는데 시간이 되면 또 배가 고파요. 그래서 평생 먹는 거예요. 그것도 잘 먹으면 되는데 탐욕으로 먹고, 잘못 먹고. 이게 고질병이에요. 배고픈 병. 근데 이제 다 치료가 됐나 하고 먹기 싫어서 안 먹으려니까 죽더라 이거에요. 할머니들이 그러시잖아요. ‘아이고 물도 안 넘어간다.’ 그런 말을 많이 들었어요. ‘아이고 입이 모래알 씹는 것 같다.’ 이게 죽을 때가 다 됐다 이 말이에요. 인간이 가지고 있는 고질병이 배고픈 병이고, 그거보다 더 중병이 또 하나 있어요. 만족하지 못하는 병이에요. 만족하지 못하는 병이 두 번째 고질병이에요. 그러니까 이걸 하면 좋을까 저걸 하면 좋을까. 특히 만족하지 못하는 게 부모와 자식 관계에요. 예를 들어 아들이 핸드폰을 사달라고 졸라서 핸드폰을 사 주고 나면, 엄마 입장에선 아들이 공부도 잘하고 말도 잘 들을 거 같죠. 그러나 하루, 이틀, 일주일까지는 그 핸드폰에 빠져 있다가, 시간이 지나면 “엄마 자전거 사줘”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근데 그것뿐만 아니에요. 그냥 이걸 가지면 저걸 가지고 싶고. 그중에서 제일 문제가 되는 게 수명이에요. 백 살을 산들 여러분들 죽고 싶다고 말하겠어요? ‘아 나는 죽고 싶어.’ 는 세계의 3대 거짓말에 들어간다잖아요. 수명, 만족하지 못해요. 배 속에서 죽는 사람, 한 살이 되어서 죽는 사람, 또 어린아이가 되어서 죽는 사람, 노인이 되어서 죽는 사람, 다 죽는데, 죽을 때 ‘나 잘 죽는다’ 하는 사람은 없어요. 그런데 저는 여여하게 가신 분을 보았습니다. 우리 진자 관자 진관스님은 손을 흔들면서 ‘모두 무병장수하라, 고맙다,’ 그렇게 하고 제 손을 잡고 ‘있는 척, 아는 척, 잘난 척, 아무 소용이 없다. 복을 지어라. 복을 지으면 네가 살기가 좋고, 네가 지은 복으로 많은 사람이 편하게 산다. 마음을 닦아라.’ 이런 말을 하면서 여여하게 가셨어요. 저희 스님뿐만 아니라 많은 선지식들이 그렇게 가셨을 거라 생각합니다. 부처님도 역시 그렇게 가셨어요. ‘나는 이제 갈 시간이다. 내가 없더라도 법을 믿고, 너 자신을, 자신의 마음을 밝혀라.’ 그래서 자등명 법등명을 말씀하셨거든요. 그다음 재산이에요. 한 개를 모아놓으면 두 개를 가지고 싶고. 그 말에 맞는 속담이 있죠. <말을 구하면 경마잡히고 싶다>는 말이요. 사람의 가지고 싶어 하는 그런 물욕, 이게 만족을 못하게 해서 우리를 너무나 고통스럽게 해요. 또 하나는 명예에요. 명예도 마찬가지예요. 회장, 국회의원, 대통령... 내 자식에게 권한을 물려줄 때도요. 자식 몇 남매 중에서 누가 나한테 잘할까. 그 사람한테 물려주고 싶어요. 권세를 가지고 싶어 하는 거 때문에 우리가 행복하지 못해요. 그러면 <내가 내 스스로 만족한다> 그 말이 뭐냐. 오유지족(吾唯知足). 나는 오직 만족할 줄 안다. 이 말을 옛날에 칠보사에 석주큰스님이,-저는 그때 그 당시에 무슨 말씀인지 몰랐어요,- ‘이거 최고 부자 부적이야’ 하셨어요. 이 부자 부족을 96살 먹은 노스님이 앉은 자리에서 한 번에 100장 이상을 쓰신다는 거예요. 그냥 붓을 띄지 않고 오유지족을 그렇게 쓰신다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아, 그걸 붙여놓으면 부자가 되는구나.’ 이렇게 생각을 했어요. 내 스스로가 만족하면 사고를 당해도 ‘아이고 큰 일 날 뻔했어. 내가 죽을 뻔했네. 이만하니 다행이다.’ 이러면 아픔이 좀 덜해요. 항상 만족할 수 있는 거, 이거를 배우는 거에요. 그러면 어떻게 만족을 하는가. 그게 믿음이에요. 믿음. 곧 현재의 내 마음이 부처다. 그러면 내 마음이 부처인 줄을 내가 봐야 돼요. 내가 봐야지 내가 부처인지 알죠. 그러면 보는 연습이 되어야 하는 거예요. 그게 뭐냐면 염불입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우리 여기 있는 어린이, 청소년 친구들은 잠자기 전에 관세음보살을 매일 하는 거에요. 매일 그러면 내 입에서 그냥 자동으로 관세음보살이 나오게 돼요. 내 입에서 좋아도 관세음보살이 나오고, 싫어도 관세음보살이 나와요. 그걸 안 하고 그냥 “스님이 마음을 봐라” 하니까, 허리를 꼿꼿이 세우고 가만히 앉아 있다고 마음이 보이지는 않아요. 마음을 고요하게 해야 해요. 고요하게 하는 게 명상이에요. 그리고 고요해지지 않으면 염불을 하는 거예요. 안 되면 절을 해요. 절을 자꾸 하다가 보면 마음이 훈훈해져요.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 내 자신이 보이기 시작해요. 그게 정진이에요. 그게 원력이에요. 자꾸만 자꾸만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해야 되는데 그거는 안 하고, 나무를 땅에 심어야 되는데, 믿음으로 심어야 줄기가 나고 잎이 나고 꽃이 피는데, 종이에 그림만 그리는 거에요, 나무를. 그림을 그리면 나무 열매가 열려요? 꽃이 펴요? 안 열려요. 우리 진관사 신도님들은 이 진관사를 믿고, ‘여기는 깨달음의 도량이다, 나를 발견하는 도량이다, 내 꿈을 이루는 도량이다, 나는 분명히 행복해질 수 있다’, 이 마음, 한 마음, 이 믿음을 가지신다면 여러분들은 최고의 가치를 이룰 수 있어요. 안 되는 게 없어요. 내가 가진 잘못을 보고 트집을 잡고 비방하고 그러면, 내가 전생에 업이 많아가지고 -업이라는 건 내가 그렇게 익힌 습관이 더 많다는 거예요-, 그런 마음이 일어나면 오늘부터는 얼른 이쪽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부처님 마음으로 돌리는 거, 이거 제일 빨리 돌릴 수 있는 게 관세음보살이예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그러면 경계에 내 마음이 쫓아가지 않아요. 내 마음이 그쪽으로 쫓아가는 생사,- 부처님이 분명히 말씀하셨거든요,- 생사대사 생로병사 우비고뇌. 그러니까 태어나고 죽고 생활하고 거기서 우비고뇌, 슬프고 괴롭고 이런 것이 곧 생사해탈이다. 그게 다른 게 아니다. 중생이 곧 부처다. 니가 곧 부처다. 이거를 믿어라. 그걸 믿는 것이 신심이다. 여러분들은 다 믿어요? 믿죠. 그걸 믿었으면 이제 가는 거예요. 열심히 공덕을 닦아가는 거에요. 닦아가면 내 마음을 어떻게 해야 된다? 정성스럽게 해야 된다. 정성이라는 건 참된 마음을 최선을 다하게 쓰는 마음이 정성이에요. 지극정성. 뜻을 모아서 지극하게 참된 마음을 행하는 거, 그게 예배예요. 예배. 여기 부처님께 와서 예를 하고 기도를 하고 이렇게 하면 자연적으로 좋은 행위가 계속 축적이 되어가지고, 그 축적이 된 걸 우리는 공덕이라고 얘기해요. 공덕이 축적되면 어떻게 되느냐. 분명히 부처를 이룰 수가 있다. 내가 나를 부처로 보고 그러면 세상이 다 부처님 세상으로 바뀌고 어떤 경계에도 부처님 시방 세계가 다 들었다 했거든요. 부처님으로 본다면 이게 얼마나 좋겠어요. 특히 우리 어린이 청소년 청년들은 어마어마한 희망이 있어요. 복이 있으니까 이렇게 와서 법문을 듣고 내 꿈을 발견할 수 있게 그 길로 벌써 입도, 도에 들어간 거예요. 내가 가진 것을, 내가 공부 한 것을 세상 사람들에게 다 나누어주니까 더 행복하더라 이거예요. 내가 다른 사람보다 머리가 좋으면 다른 사람들을 더 잘 살게 이끌어주고 발견해주고 시스템을 구축해주고 이렇게 해주면서 내가 기쁨을 얻는 거예요. 또 내가 돈을 많이 벌었다면 기부를 하면서 내가 기뻐져요. 그러니까 내가 그렇게 좋은 일을 하니 공덕이 자라더라, 좋은 일이 쌓이더라, 이거예요. 이렇게 되니까 내가 너무나 행복하고 늘 만족하고 고질병이 없어져요. 그러면 ‘한 방울의 물에도 천지의 은혜가 들어있고, 하나의 곡식에도 만인의 노고가 들어 있으니 참 고맙습니다. 부모님 감사합니다. 우리 아들 감사합니다.’ 특히 자식에 대한 집착을 버려야 되겠더라고요. 서로 그 집착만 없으면 자유로워요. 집착을 내려놓고 그냥 그 아이가 꿈을 발견할 수 있도록 해 주세요. 또 모든 거를 지금 이렇게 어린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다 해주면 안 돼요. 경험을 쌓게 해줘야지, 부모들이 다 해주면 이 아이들의 권한을 뺏어서 자기만족을 하고 있는 거예요. 뭐든지 그냥 아이들이 하게 해주세요. 지금 어렸을 때 자기가 할 수 있는 힘을 확장하고 경험을 쌓게 해야합니다. 우리 진관사가 인생학교라고 제가 얘기를 하죠. 인생학교에서 그걸 배우고 또 서로 가르쳐주고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 마음에 정원 진관사가 신심을 구축하게 되고 나의 원력을 이루게 되고 가피를 받게 되는 그런 시간이 될 것 같고 좋은 공간이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나는 부처님이다. 내 옆에 있는 분이 부처님이다. 내가 하고 있는 행위는 지혜로운 행위다’, 반야심경에 정답이 다 나와 있어요.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바라밀다를 행할 때 오온이 공한 것은 다 허망하거든요. 이거 지금 시계라고 말할 수 없어요. 시계를 해체해 보니까 플라스틱이고 하나의 철이고 건전지가 들어있고 어느 걸 보고 시계라고 말하겠어요. 그래서 오온이 공한 것을 여기에 집착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래서 반야심경을 매일 읽으세요. 관자재보살이 깊은 반야, -반야라는 말은 지혜거든요. 지혜라는 것은 부처님 마음, 밝고 맑은 공덕이 되는 그 행위 그게 지혜예요.- 반야를 행하게 되면 어디에 도착하게 되느냐. 해탈의 경계, 적멸의 세계에 갈 수가 있다. 그 내용이에요. 사리자는 누구를 얘기하냐면 가장 지혜로운 사람을 사리자라고 해요. 나라고 지칭하면 돼요. 내 스스로에게 반야심경을 매일 읽어주는 거예요. 내 모든 세포에게 반야심경을 읽어주면 몇 개만 기억하고, 오늘은 이만큼 기억하고, 내일은 이만큼 기억하고, 그게 점점점점 쌓이고 쌓이면 내 온몸이 다 반야바라밀로 바뀌어요. 마음이 그렇게 돌아가는 거예요. 그렇게 돌아갈 수 있도록 합시다. 다 같이 합장해 보세요.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그래서 오늘 법문은 신심을 가지고 내가 부처님이라는 것을 분명히 알고, 공덕(功德), -공에 힘 력자거든요.- 나의 재능을 가지고 힘껏, -덕이라는 것은 행하다,- 바른 마음을 향해서 노력해 나가는 것이 공덕이에요. 내가 바른 마음을 가지고 행해서 계속 그 재능을 축적해 가는 게 공덕이에요. 그렇게 되면은 결국 내가 행복하고 모든 것에 만족하고 이렇게 살 수가 있다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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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6월 2일 49재 법문
종범스님 2022-06-02
금일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人生이 如草露하니(인생여초로) 인생은 풀잎에 이슬 같으니 光陰이 夢一場이라(광음몽일장) 한평생이 하룻밤 꿈인 듯하다. 於中有靈心하니(어중유영심) 그중에 신령한 마음이 있으니 天終這不終이로다.(천종저부종) 하늘은 다해도 ‘이것’은 다함이 없다.나무아미타불 극락세계 극락세계 가셔야 되요. 극락세계가 어느 곳에 있으며, 극락세계에 누가 가며, 극락세계를 어떻게 가는가 그게 오늘 법문의 내용입니다. 극락세계는 삼세 제불이 깨닫고 역대 조사가 깨닫고 천하 선지식이 깨달은 세계인데요. 어떻게 깨달았냐. 사람에게는 의식이 있고, 생각, 지혜가 있는데, 그 지혜로 얻은 세계를 극락세계라고 합니다. 지혜로 얻은 세계. 의식으로 얻은 세계를 생로병사 우비고뇌라고, 나고 죽고 근심 걱정하는 거. 나고 죽고 근심 걱정하는 것은 모두 생각에서 오는 거고, 극락세계는 지혜에서 온다. 그래서 생각으로 보면 한평생이 긴 것 같지만 지혜로 보면 한평생이 일순간이다. 그래서 지혜로 한평생을 돌아볼 때, 인생이 여초로하니(人生如草露), 인생이 풀잎에 이슬과 같다. 생각으로 보면 한평생이 까마득하고 먼데요. 지혜로 딱 돌아보면 한평생이라는 게 풀잎에 맺은 이슬이 해가 뜨면 금방 사라지는 그런 이슬과 같다. 그래서 광음이 몽일장이라(光陰夢一場), 한평생 시간이 하룻저녁 꿈꾸고 깬 것과 같은 것이 우리 인생사다, 이렇게 느끼는 거거든요. 그럼 어중의 유영심(於中有靈心)만이, 그 가운데 그러면 한평생이 풀잎에 이슬과 같은 줄 알고 한평생이 한바탕 꿈꾸는 것과 같은 것을 아는 그건 뭐냐. 그걸 아는 거. 그걸 신령스러운 마음이라고 그러는데요. 신령 령자. 진짜 그 신령스러운 마음이 인생이 허망한 것도 알고 한평생이 순간이라는 것도 아는데 그 지혜의 신령스러운 마음이 극락세계를 간다. 이런 말씀이에요. 그래서 나고 죽는 그 사이에 신령스러운 마음이 있으니 그 신령스러운 마음은 천종하되 저부종이라(天終這不終), 하늘은 끝이 나도 그 신령스러운 마음은 끝이 없다. 그게 깨달은 지혜거든요. 그래서 이 지혜라는 게 뭐냐. 낮에는 밝은 거 보고, 눈을 감으면 어두운 거 보고, 잠을 자면 꿈을 꾸고, 소리가 나면 소리 나는 거 듣고, 소리가 안 나면 그 조용한 것을 안다. 소리가 날 때는 소리 듣고, 소리가 안 날 때는 그 조용한 것을 들어서, 보일 때나 안 보일 때나 소리를 들을 때나 소리를 안 들을 때나 나고 죽음이 없이 항상 하는 마음, 그걸 깨달은 거예요. 생각은 우리 몸에 매여 있고, 생각은 우리 몸의 대상을 쫓아가는데, 이 생각은 몸 떠나서 있을 수가 없어요. 또 생각은 몸으로 접촉하는 대상을 떠나서 있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근경에 머문다. 근이라는 건 육근, 우리 몸이고요. 경계라는 것은 보고 듣고 하는 대상인데, 몸과 대상에 머물러 있는 게 생각인데, 이 지혜는 몸이 있을 때는 몸을 느끼고 몸이 없을 때는 몸이 없는 걸 느끼고, 보일 때는 보는 걸 느끼고 안 보일 때는 안 보이는 걸 느끼는데 보고 듣고 느끼고 안 느끼고 해도 전혀 이게 지장을 받지 않아요. 그래서 그걸 비유하기를 거울에다가 비유를 하는데, 거울에 사람이 비칠 때나, 나무가 비칠 때나 해가 비칠 때나 아무런 지장이 없어요. 거울에 안 비쳐도 아무런 지장이 없고 허공을 비칠 때나, 맨날 비쳐도 맨날 그대로예요. 그래서 이거는 수연불변(隨緣不變)이라, 인연 따라서 사람도 되고 인연 따라서 나무도 보고 인연 따라서 눈도 감고 인연 따라서 눈도 떠도 그 청정한 지혜는 거울에 물건 비치나 안 비치나 똑같듯이, 항상 청정한 상태로 항상 사물을 보고 듣고 느끼고 판단한다. 그래서 수연하되 불변이요, 인연을 따르되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되 인연을 따른다. 이걸 깨닫는 걸 정각(正覺)이라고 하거든요. 바를 정자, 깨달은 각자. 그래서 그걸 지혜로 돌아가면 그게 극락세계에요. 몸에 매이고 대상에 매이면 그게 생로병사 우비고뇌 사바세계고. 사바세계가 딴 게 아니고 몸에 매이고 대상에 매이는 게 사바세계고, 몸에 자유롭고 대상에 자유로운 것이 그게 지혜의 극락세계다. 그래서 생각으로 살면 몸 걱정, 뭘 보는 대로 구할 마음이 생겼어, 구할 걱정. 구하고 나면 그게 금방 또 심드렁해져서 버리게 되고, 버려야 되는데 안 버리게 되면 또 속상하고. 구해야 되는데 못 구하고 나면 또 속상하고. 맨날 근심 걱정, 그걸 어려운 말로 우비고뇌(憂悲苦惱)라고 하거든요. 근심 우, 슬픈 비, 괴로울 고, 걱정할 뇌. 이 생로병사 우비고뇌가 그게 사바세계 생각의 세계고, 수연불변, 항상 청정 인연 따르되 변하지 않은, 항상 청정한 지혜 광명 자재 세계는 그게 극락세계다. 극락 가기 얼마나 쉬운지 몰라요. 금방 가는 거예요. 금방. 사바세계와 극락세계 차이가 백지장 한 장 차이도 없어요. 바로 지혜로 돌아가면 바로 극락이고 생각에 머물면 사바세계다. 그런 지혜의 세계를 眞如佛性 菩提自性 진여불성 보리자성無漏智性 無生法忍이니무루지성 무생법인 釋迦世尊 始成正覺에석가세존 시성정각寂滅場中 華藏刹海이니적멸장중 화장찰해 壽福具足의 極樂世界로다수복구족 극락세계나무아미타불 그 지혜의 마음을 가지가지로 이름을 붙이는데 첫 번째는 진여불성(眞如佛性)이라고 그런다. 진여, 참 진자, 같을 여자. 참 그대로 똑같은, 불성은 깨달을 각자, 성품 성자인데, 느껴요. 그 느끼는 성품 그게 불성이고. 또 보리자성(菩提自性)이라. 보리도 깨달음인데, 그 깨달은 본성, 생각은 본 걸 기억하고 대상을 쫓아가고 그게 생각인데, 이거는 보기 전에, 대상을 쫓아가기 전에 자체 본성이다. 그게 보리자성. 무루지성(無漏智性)이다. 없을 무자, 샐 루자인데, 없어지지 않는다. 없어지지 않아요. 없을 때는 없는 거 알고 있을 때는 있는 거 알고, 태어날 때는 태어난 거 알고 죽을 때는 죽는 거 알고, 그걸 깨달아서, 깨달음이라고 하는 건 모든 걸 아는 걸 깨달음이라고 하거든요. 깨달음이라는 건 간단한 거예요. 모르던가 아는 거. 없는 거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모르던가 아는 거. 무루지성이라. 없어지지 않는 지혜의 본성. 무생법인(無生法忍)이라. 나고 죽음이 없는 그 법의 지혜, 참을 인자는 지혜라는 뜻인데 나고 죽음이 없는 법의 지혜. 나고 죽음이 없단 말은 이게 항상 알고 항상 청정해서 뭘 보되 보는 거에 변하지 않고 변하지 않는 상태로 본단 말이에요. 뭘 알 때 불변 상태로 알고 그걸 인연 따른다고 수연이라고 하거든요. 막 화를 낼 때는 불같이 일어나는데 화를 내고 나면 또 그냥 그만이에요. 어디 갔는지 화가. 그러니까 화를 불같이 내도 그 지혜에는 변함이 없어요. 아주 미치는 일인데, 이게 무루지성이라는 거에요. 아주 슬플 때는 한없이 슬픈데, 그 슬픔 속에 그냥 지혜가 변함없이 있어요. 그게 불변 수연이라고. 그게 무생법 지혜라. 그렇게 석가세존이 처음으로 그걸 바르게 깨달았는데 어떤 일이 벌어지는가. 나고 죽음이 없는 적멸장에(寂滅場中), 생멸을 생로병사라 그러고, 적멸을 불생불멸이라고 그러는데요. 나고 죽음이 없다. 거울에 물건이 비칠 때 그 거울의 물건이 난 게 아니고 거울에 물건이 사라질 때 거울이 사라진 게 아니고. 그래서 그걸 적멸이라고 그래요. 고요할 적자, 없을 멸자. 나고 죽음이 없는 속에 적멸장에, 화장찰해(華藏刹海)라, 화장이라는 건 공덕이 많다 이 말인데 꽃 화자, 감출 장자. 감출 장자는 많다. 꽃 화자는 공덕이라. 그 생멸 없는 세계에 공덕이 한량없이 많아요. 그 한량 없이 많은 세계가 있는데 그걸 찰해라고, 찰이라는 말은 국토라는 말이고, 해는, 바다 해자는 복수, 무량수 많다 이 말이거든요. 적멸장중에 화장찰해라. 나고 죽음이 없는데 한량없는 공덕 세계가 있다. 거기가 어디냐 그러면 수복이 구족한, 수명과 복덕이 다 갖추어진 극락세계(壽福具足의 極樂世界)다.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 극락세계라는 나의 생각에서 나의 지혜로 돌아가는 거지, 엉뚱한 데로 가는 게 아니다 이 말이죠. 나의 생각에서, 나의 생각은 사바세계, 나의 지혜는 극락세계. 그럼 극락세계에 가려면 어떻게 되냐. 생각이 지혜로 싹 바뀌면 되요. 생각이 지혜로 바뀌면 극락세계에요. 생각 일어나서, 몸 걱정, 구할 걱정, 버릴 걱정, 이런 거 하다 보면 거기에 이제 사바세계 생로병사 근심 걱정이고. 그리 되면 어떻게 되냐. 마음을 깨끗하게, 조용하게 하면 극락 가는 길이에요. 조용하고 깨끗하면 극락이다. 시끄럽고 쫓아가면 그거는 근심 걱정이다. 그래서 극락을 일순간이라도 체험할 수가 있어요. 몸을 딱 바르게 하고, 생각을 다 거두어서 그대로 조용히 하면 거기에 근심 걱정이 하나도 없는 세계를 내가 느낄 수가 있어요. 그런 근심 걱정이 없는데 들어가면 거기에 무한한 공덕이 나타나요. 근심 걱정 없는 속에 한없는 공덕을 극락세계라고 한다. 그렇게 되면 생각이 고요하고 고요하고 깨끗하고 깨끗하면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그 지혜 광명이 확 드러나요. 그 지혜 광명이 드러난 체험을 한 분들을 삼세 제불이라고 하고, 역대 조사라 그러고 천하 선지식이라 그래요. 생각을 고요하게 하는 데까지 수련하는 분들은 도를 닦는다 이래요. 그러면 그 생각을 고요하게 해서 지혜 광명이 드러난 분들을 도를 이룬다 이러는데요. 수도, 성도. 생각을 깊게 가지면 그 생각이 깊어졌을 때 눈을 감았다가 눈을 딱 뜨면 보이는 게 환히 나타나듯이, 지혜 광명이 온 누리에 차는 경험을 하게 돼요. 그런데 전생에서부터 약간 인연이 있는 분들은 금방 되는 거예요. 그런 길이 있는 걸 모르고 또 그런 말을 들어도 믿음이 깊게 안 생겨서 그런 체험을 안 해서 그렇지, 살아서 극락세계 체험하는 거 금방 되는 건데, 이 몸에 이제 생각의 습관이 너무 깊이 들어가지고 그런 말을 들어도 잘 들어오지도 않고 안 들려요. 소리가 들려도 그걸 잘 익히지를 않고 익힌다고 하더라도 몸에 다른 게 너무 많이 익혀져서 잘 못 들어가서 그렇지, 그거 아무 것도 아닌 건데 못해요. 생각이 조용하면 거기서 지혜 광명이 확 드러나는데 그걸 도를 이룬다고 하고 그걸 극락세계에 간다고 한다 이거죠. 淨極光通達 맑음이 깊어 광명이 드러나면정극광통달寂照含虛空 고요하게 봄이 허공을 삼킨다. 적조함허공却來觀世間 다시 세간을 보면각래관세간猶如夢中事 꿈속의 일과 같다.유여몽중사(능엄경제6권) 이걸 정극광통달(淨極光通達)이라고 하는데, 깨끗함이 깊어지면 광명이 온 누리에 나타난다. 통이라는 거는 온 누리고 달이라고 하는 건 나타난다 이 말이에요. 온 누리에 나타난다. 그러면 적조가 함허공(寂照含虛空)이라, 그 지혜는 첫째는 고요해요. 고요하다는 말은 형체도 없고 머물러 있는 주소가 없어요. 무주. 적정무주, 아주 희한한 거예요. 적정이라는 거는 있어도 그림자가 없어요. 또 머물러도 주소가 없어요. 그래서 이제 어렵다고 그러는 거예요. 있기는 있는데 그림자도 없고 머무를 주소도 없다. 적정(寂靜), 고요 적, 고요 정. 무주, 없을 무, 머물 주. 생각은 몸에 머물면 돼요, 생각은. 그래서 이거 몸이 탈 나면 생각이 탈 나요. 그걸 요새 정신 건강이라고 그래요. 정신 건강은 몸부터 탈 나거든요. 그런데 이 지혜라고 하는 것은 머무는 데가 없어서 몸 아무리 갈라봐도 지혜 안 보이거든요. 근데 이게 어디 있는지 그냥 시방세계에 꽉 찼는데 머무는 장소가 없어요. 참 희한한 거에요. 정극하면 광통달. 정극하면, 맑음이 깊으면 빛이 시방에 가득하나니, 적조가 함허공이라, 그 고요히 비치는 광명이 허공을 다 삼킨다. 들어오지 않는 게 하나도 없다 이 말이죠. 그런 상태에서 다시 세간을 보니, 각래관세간(却來觀世間)하니, 세간이라는 거는 생로병사 근심 걱정인데요. 이 생로병사 근심 걱정하는 이 세상만사를 보니 유여몽중사(猶如夢中事)라, 꿈속에 일과 같다. 극락세계에서 사바세계를 보면 꿈속에 일이에요, 이게. 그런데 생각으로 생로병사 근심 걱정할 때는 꿈속의 일인지 전혀 모르죠. 그걸 선지식들이 가르칠 때 꿈도 깨어나야 꿈인 줄 알지, 꿈꿀 때는 꿈인 줄 모른다 이래요. 인생도 다 살고 봐야 인생이 잠깐이다 알지, 한참 욕심에 부풀어서 세상을 다 얻으려고 그러는데 ‘인생이 잠깐이다’ 이런 말했다가는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이에요. 어떻게 해요. 얻어맞지 않으면 다행이에요. 참 그거 희한한 게 생각과 지혜의 차이, 생각에 헤맬 때는 생각이 그게 허망하고 꿈 같은 줄 꿈에도 몰라요. 근데 이 지혜로 돌아가서 이 생각의 세계를 보니 유여몽중사라, 꿈속의 일과 같다 그런 거죠. 그러니까 오늘 영가께서는 지혜를 깨달아서 갈 수는 없어요. 그러면 어떻게 가냐. 이 극락세계를 믿고 부처님의 인도를 받아서 그래서 부처님이 접인 도사(接引導師)가 되고,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영접해서 인도하는 접인 인도자가 되고, 지장보살 길을 인도하는 인로왕보살(引路王菩薩)이 되고 그래서 불보살의 안내를 받아서, 뭐 타고 가냐. 지혜의 배를 타고 간다. 그 지혜의 배를 반야용선이라고 그래요. 반야가 지혜 아니에요. 배가 용이 끄는 배다. 용이라고 하는 건 가기는 가는데 어디 있는지 잘 안 보이는 게 용이거든요. 접인도사 일로왕보살의 인도를 받아서 반야용선을 타고 극락세계에 간다. 그러니까 다른 데 가지 마시고 극락세계에 가시라고요 하는 거예요. 금일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 願生華藏蓮華界 원생화장연화계화장연화 극락세계에 왕생하십시오! 願生華藏蓮華界 원생화장연화계화장연화 극락세계에 왕생하십시오! 直往華藏極樂國 직왕화장극락국바로 화장극락국에 왕생하여 無量壽福盡受容하십시오 무량수복진수용무량한 수복을 다 받으십시오!나무아미타불 화장연화계 극락세계로 가는데, 극락세계는 청정한 공덕으로 가득한데 그걸 연꽃에 비유했어요. 연꽃이 꽃은 피는데 물들지 않는다. 화장이라는 건 많은 공덕으로 쌓인 극락세계. 원생 그러면 거기에 가서 나십시오 이런 뜻이에요. 다른 데 가지 마시고, 또 생각에 빠져서 몸에 매달리고 또 보이고 들리는 대상에 쫓아가서 다시 근심 걱정하는데 돌아가지 마시고 화장연화계, 공덕으로 가득 한 극락세계에 왕생하십시오. 원한다는 말은 그렇게 해라 이 말이거든요. 화장 연화 극락세계에 가십시오. 가서 거기에 나십시오. 원생화장연화계, 화장연화 극락세계에 가서 나십시오. 직왕화장극락국하야(直往華藏極樂國), 바로 공덕이 가득한 극락국에 가서 무량수복을, 한량없는 수명, 거울이 아무리 물건을 비춰도 그대로고, 물건이 떠나도 그대로라 수명이 한량이 없다 이 말이죠. 극락 수명은. 그러면 극락 복덕은 받아도 받아도 끝이 없으니까 복덕이 한량이 없다. 그래서 한량없는 수명과 복덕을 진수용하십시오. 다 받으십시오. 그렇게 해서 오늘 법문을 다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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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5월30일 음력 5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2-05-30
안녕하십니까. 오늘 5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은 공양올리는 이야기, 차 공양 진실, 공양 올리는 이야기, 차 공양 진실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공양을 왜 올리느냐. 부처님과 우리가 만나고, 우리가 부처님처럼 복덕을 갖추고, 우리가 부처님처럼 지혜를 갖추어서, 부처님과 같은 광명과 행복을 이루는 것이 그게 공양입니다. 근데 이 공양이라고 하는 것은 준비하는 것은 세상에 있는 물질을 준비하는데요. 그것이 향화, 향과 꽃과, 등다, 등과 차와, 과미, 과일 진수, 이런 건데 이게 세상의 물건이거든요. 근데 이 세상의 물건을 준비해서 이루려는 것은 복덕 지혜 해탈 열반 극락 성불, 이런 걸 이루는 거예요. 그래서 이루는 것은 묘법지 공양을 이룬다. 묘법 해탈 열반 복덕 지혜, 세상에 물질을 준비해서 묘법의 공양을 이루는 것이 공양이다, 이런 뜻이거든요. 오늘은 차 공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차 공양. 이제 부처님께 차를 올릴 때 물을 올리는데 물이 세상에 있는 물질인데요. 이것이 무슨 물질이냐. 감로 다다. 감로. 감로라는 것은 생사의 고통을 벗어나서 생사 없는 열반의 기쁨을 감로라고 그러는데요. 부처님께 올리는 청정수는 감로의 공양이다, 이렇게 발원을 해요. 今將甘露茶(금장감로다) 지금 감로다를 가지고奉獻三寶前(봉헌삼보전) 삼보전에 올립니다.監察虔懇心(감찰건간심) 간절한 마음을 살피셔서願垂哀納受(원수애납수) 자비롭게 받아 주십시오. 그래서 금장감로다(今將甘露茶). 지금 감로의 차를 가지고, 봉헌삼보전(奉獻三寶前)이라, 삼보전에 올린다. 감찰건간심(監察虔懇心)하시고, 이 공양을 올리는 정성의 마음을 잘 살피시고 원수애납수(願垂哀納受)하소서, 자비로운 부처님의 마음으로 잘 받아주십시오. 이렇게 서원을 해서 공양을 올리는 것이 차 공양의 서원입니다. 그다음에는 청정다, 감로다, 청정다, 청정이라는 것은 고통이 범접하지 못하고 번뇌가 가까이 할 수 없고, 일체의 세월과 장소가 가까이 할 수 없는 일심 청정, 이 세상에는 한 마음뿐이고, 그 한 마음은 세월도 없고 장소도 없어서 시방삼세에 항상 청정한 그것이 일심청정인데, 차라는 것은 청정 차가 되어서 일심청정 청정다를 지금 올립니다. 이런 차공양 올리는 의식인데요. 淸淨茗茶藥(청정명다약) 청정한 명다의 영약은 能除病昏沈(능제병혼침) 질병과 혼침을 없애 줍니다. 奉獻三寶前(봉헌삼보전) 삼보전에 올리오니 願垂哀納受(원수애납수) 자비롭게 받아 주십시오. 卽世帝之莊嚴(즉세제지장엄) 세상의 물품을 준비하여 成妙法之供養(성묘법지공양) 묘법의 공양을 이룹니다(釋門儀範 禮文 석문의범 예문) 청정명다약(淸淨茗茶藥)으로, 명다라는 건 좋은 차를 명다라고 그래요. 좋은 차 이름 명자가 있고 차 다자가 있는데 이 청정한 차는 약이다. 약은 능제병혼침(能除病昏沈)이라, 일체중생의 팔만사천 업장 번뇌 질병과 정신이 막지 못한 혼침들을 다 제거한다. 청정다를 마시면 일체 번뇌 질병 일체 혼침 업장을 다 제거하는 것이 청정 명다약이다. 이런 말이죠. 봉헌삼보전(奉獻三寶前)하노니, 삼보전에 올리오니, 자비롭게 받아주십시오, 이렇게 차공양을 올려요. 이걸 감로다 청정다, 헌공다라고 그러는데요. 공양을 올리는 차라고. 그런데 이 차가 점점 어떻게 발전을 했느냐. 수행오도, 도를 닦아서 도를 깨닫는 수행오도의 차로 발전을 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 올리는 차는 감로다 청정다고, 일상생활에서 마시는 차는 일미오도, 한 맛의 차를 일미다라고 그러는데, 한 맛의 일미다를 마시면 어떻게 되냐. 도를 깨닫는다. 그래서 차 마시는 일은 도를 깨닫는 일이에요. 그래서 차와 도는 하나다. 그래가지고 일미도인, 일미다인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이거 참 좋아요. 목도 축이고 도도 깨닫고 이게 얼마나 좋아요. 진짜 이 차 생각만 해도 참 기분 좋아지고 설레어지죠. 목도 축여 도도 깨달아. 그래서 이 차에 대한 칭송과 차에 대한 찬탄이 굉장히 많은데, 내용은 차는 일미다. 한 일자, 맛 미자, 한 맛이에요. 이 한 맛이라는 건 뭐냐. 여기에는 삶도 없고, 죽음도 없고, 장소도 없고, 시간도 없고, 수억만 년이 지나가고 하늘과 땅이 사라지고 없어지고 해도, 그 한 맛, 일체중생의 본래면목, 시방 법계의 본래열반, 그 한 맛을 나타내는 것이 차다. 그래서 이 차 한 잔을 잘 마시면, 바르고 한 맛의 본래 해탈, 본래 성불 본래 청정심을 깨닫게 돼요. 그래서 그냥 물만 마시는 게 아니라 도를 깨닫는 차 마심이다. 그래서 도인들이 차 마셔라, 차 마셔라, 이런 법문을 하게 되는데 조주선사라고 하는 분이 누구든지 보기만 하면 차 먹으라 그래요. 차를 마시는 것은 먹을 긱(喫)자를 쓰는데요. 옥편에 보면 그 긱자를 끽이라고 했더라고요. 끽다. 근데 그냥 긱이에요. 먹을 긱. 차 먹어라. 만나는 사람마다 차 먹으라고 한 거예요. “이 절에 왔었나?” “왔었습니다.” “차 먹어라” “이 절에 왔었나?” “안 왔었습니다.” “차 먹어라.” 차 방이 있거든요. 절에는 차 대접하는 차 방이 있어요. 옆에서 시자가 보니까, 왔었다고 말한 사람에게도 차 먹으라고 하고 안 왔었다고 말하는 사람에게도 차 먹으라고 그러니 이상하거든요. 그래서 “왜 스님은 왔었던 사람에게도 차 먹으라고 그러고, 안 왔다고 하는 사람에게도 차 먹으라고 합니까?” 그러니까 “너도 차 먹어라.” 이랬어요. 너도 차 먹어라. 그러니까 일체 중생이 다 도를 깨달아야 돼요. 도는 깨달을 사람이 따로 있고 안 깨달을 사람이 따로 있는 게 아니라 누구나 다 도를 깨달아야 돼요. 도를 깨달아라 하는 말을 차 먹어라. 긱다 하라. 그래서 이걸 한자로 쓸 때는 먹을 긱, 차 다, 갈 거. 긱다거(喫茶去)하라 이래야 되는데 그 거자는 어조사고요. 그냥 긱다라, 긱다. 차 먹어라. 그리고 조주는 법문을 하기를, 구자무불성(狗子無佛性) 법문을 했는데, 개한테도 불성이 있느냐. 누가 와서 이렇게 물으니까 무, 없을 무자 하나, “무” 이랬어요. 이게 조주무자의지(趙州無字意旨)라고 그러는데, 조주무자의지. 그럼 이 무라는 게 무슨 뜻인가. 선지식들이 법문을 하기를 이 조주가 무, 없을 무자로 하나 말을 한 것은 유무지무(有無之無)가 아니다. 있다, 없다 하는 무가 아니다. 또 허무지무(虛無之無)가 아니다. 있던 것이 없어져서 아주 허망하고 절망스러운 그런 무가 아니다. 그리고 처음부터 없었던 진무지무(眞無之無), 참 진자, 없을 무자, 참으로 없다고 하는, 그런 처음부터 없다는 무도 아니다. 유무의 무도 아니오, 허무의 무도 아니오, 진무의 무도 아니다. 그 의미로 <무> 했다는 거예요. 그러면 어떡하면 조주무자의지를 알 수가 있는가. 조주무자의 뜻, 의지는 뜻이죠. 뜻을 알 수가 있는가. 내가 마음이 고요해져서 번뇌가 다 사라지면 조주무자의 뜻에 들어가게 돼요. 이걸 계합(契合)이라 그러고 입도(入道)라 그래요. 계합이라고 하는 계자는 마주한다 이 말인데, 만나서 합하게 돼요. 계합. 계약할 계자를 쓰고. 입도는 들어갈 입자, 도라는 도자인데, 그 조주 무자에 자기 마음이 친히 들어가게 되는 거예요. 이걸 입도라고 그래요. 그러면 나중에는 성도가 되는데 이룰 성자, 도라는 도자. 성도는 조주가 온갖 지혜를 펼친 것처럼 자기도 조주의 지혜를 마음대로 쓰게 돼요. 이거를 성도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 도를 닦는 데는 수도, 입도, 성도 3단계가 있는데, 처음에는 도를 부지런히 닦는 거고, 그다음에는 도의 세계에 들어가는 거고, 그다음에는 도의 세계를 이루어서 경계는 없고 마음만 있고, 천지 만물은 없는 것이고, 오직 일심 청정 신통 경계 그것뿐이다. 그래서 조주무, 조주긱다거, 이게 이 도를 닦아가는 도가 문중에 아주 중요한 법문이에요. 조주긱다거, 조주가 차마시라고 했다. 조주무자의, 조주가 무했는데 그 뜻을 아는 거 그게 중요하다. 그건 그렇고 이 차에 대해서 많은 찬탄송이 있는데, 오늘은 그 찬탄송 두 가지만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讚茶(찬다) : 차를 찬탄함 (眞言勸供, 學祖譯 진언권공, 학조역) 碧玉甁中銀浪湧(벽옥병중은랑용) 푸른 옥병에서 흰 물결 솟아오르고 黃金碾畔雪花飛(황금연반설화비) 황금 맷돌 가에서 눈꽃이 나른다. 療天鼻孔始聞香(요천비공시문향) 하늘 뚫은 콧구멍 차 향기 맡고 具眼舌頭方了味(구안설두방요미) 눈 있는 혀끝 차 맛을 안다. 이 차라고 하는 것은 눈으로 보는 차, 코로 만든 차, 입으로 맛을 아는 차 3단계가 있어요. 차는 눈으로 턱 보기만 해도 그 차 빛을 보고 도를 깨닫게 돼요. 그거를 진언권공이라고 하는 책에서 어떻게 말했냐면은, 벽옥병중은랑용(碧玉甁中銀浪湧)이라, 차 다리는 기구가 있는데, 옥이 이제 흰옥도 있지만 푸른 옥도 있거든요. 푸른 옥을 차 다리는 그릇으로 해서 거기다가 물을 붓고 찬물을 끓이면 은이라는 은자, 은은 흰 거지요, 물결 랑자, 솟을 용자, 그 김을 통해서, 차 다리는 김을 통해서 흰 물결이 하늘로 싹 솟아 올라가요. 그걸 보고 도를 깨닫는 거요. 그게 눈으로 접하는 차예요. 기가 막히지요. 황금연반설화비(黃金碾畔雪花飛)라, 또 이 차를 맷돌에 가는 것이 있는데 그 가는 것은 황금맷돌이다. 황금 맷돌로 차를 갈게 되면 그 맷돌 가에서 설화라, 눈 설자, 꽃 화자, 나를 비자, 눈은 또 흰 거죠. 눈이 펄펄 날리듯이 하얀 꽃이 하늘로 날아 올라간다. 그걸 보고 도를 깨달아요. 이게 눈으로 보는 차예요. 그다음에 요천비공이 시문향(療天鼻孔始聞香)이라, 이 코가 아주 깊어지면 하늘을 다 삼켜서 꿰뚫는 그런 코가 생겨요. 요천이라 하는 것은 하늘을 꿰뚫는 콧구멍이다. 우리 콧구멍으로 하늘을 다 집어 삼켜서 꿰뚫게 돼요. 그게 도의 콧구멍이에요. 우리도 그렇게 하면 돼요. 공기를 쑥 들이마시면, 그게 알고 보면 하늘을 다 들이마셔서 하늘 전체를 다 꿰뚫은 거예요. 그런 콧구멍으로 시문향이라, 비로소 향기를 맡는다. 구안설두가(具眼舌頭), 구안설두라는 건 갖출 구자, 눈 안자인데, 설두는 혀설자 머리 두자, 혀 끝, 혀 끝인데, 이 차를 마시는 도인의 혀 끝은 혀에도 눈이 갖추어져 있다. 이게 구한설두라 그래요. 혀가 그냥 혀만 있는 게 아니라 혀 끝에 눈이 있어. 이게 도인의 혀란 말이죠. 그래서 눈이 있는 혀 끝이 방요미(方了味)라, 바야흐로 맛을 안다. 이 차에 대한 시가 얼마나 멋진지 참 기가 막혀요. 벽옥병중에 은랑용하고 황금연반에 설화비라. 요천비공이 시문향하고 구안설두방요미라. 멋진 시에요. 차 한 잔 떡 먹으면 그게 도를 통하는 것이고 도를 이루는 것이고 그게 도를 쓰는 것이다, 응용하는 것이다, 이 말이죠. 도에 들어가는 거, 도를 이루는 거, 도를 쓰는 거. 百草林中一味新(백초임중일미신) 여러 찻잎에서 한 맛이 새로우니 趙州常勸幾千人(조주상권기천인) 조주는 많은 이에게 항상 권했다. 烹將石鼎江心水(팽장석정강심수) 돌 솥에 강 속의 물을 다렸으니 願使亡靈歇苦輪(원사망령헐고륜) 망령께서는 고통에서 벗어나십시오. 또 그 다음에는 석문의범에서 맨날 외우는 건데, 백초임중에 일미신(百草林中一味新)하고, 차에는 여러 가지 차나무가 있는데, 그 차나무를 수풀이라고 그러고, 또 여러 가지 차 잎이 있는데 그걸 백초라 그래요. 차나무의 많은, 차나무에 온갖 차잎들이 백이라는 건 많단 말이거든요. 일백 백자. 많은 차나무에 많은 차잎들이 있는데, 이것을 가지고 차를 만들어서 차를 다리면, 이파리는 여러 이파리를 가지고 차를 만들었는데 차 맛은 한 맛이다. 한 맛이 새롭다. 멋진 말이에요. 차잎은 여러 잎이었는데 맛은 한 맛이다. 우주 법계가 일법성이다. 우주의 법계가 하나의 법계의 본성이다. 그게 일미다라는 거죠. 한 맛은 차. 그런데 조주는 상권기천인(趙州常勸幾千人)이라, 조주는 항상 기천인, 얼마나 많은 몇천 명에게 권했던고, 이 말은 많은 사람에게 조주는 항상 차 먹어라 권했다 이 말이에요. 도를 깨닫는 것처럼 더 중요한 게 없으니까 만나는 사람마다 도 깨달아라 그러면 짜증 낼까 봐 차 먹어라 차 먹는 게 바로 도를 깨닫는 일이다 이 말이죠. 팽장석정강심수(烹將石鼎江心水)하니, 석정 아주 때묻지 않은 돌솥, 돌솥에다가 강심수, 저 깊은 강 속에 있는 물. 여기서 마음 심자는 속이라는 뜻인데, 강물도 그냥 껍데기로 흐르는 강물이 아니라 아주 강 속 깊이 깊이 강 속에 흐르는 물을 돌솥을 가지고 끓이고 다렸다. 이게 이제 일미, 참맛의 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이것은 혀 끝에, 눈이 있고, 허공을 삼키는 코를 가진 사람은 냄새 한 번 더 맡고 차 한 번 먹는 그 순간에 도가 다 이루어지고 도를 다 쓰는 것이다.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원사망령헐고륜(願使亡靈歇苦輪), 망령께서 지금 재를 올리는 그 망령께서는 고통에서 다 벗어나십시오. 이렇게 차를, 영가 천도하는 차, 도를 깨닫는 차,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차, 이런 차로 우리는 차를 알고 차를 공양 올리고 차를 먹고 하는 것입니다. 오늘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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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5월1일 음력 4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영진스님 2022-05-01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여기 진관사는 제가 한 4, 50년 전으로 기억을 하는데, 어느 스님과 함께 점심 때쯤 시내버스 타고 내려서 들어온 적이 있습니다. 그런데 그때 스님들께서 아마 저쪽 방 같은데 발우 공양을 하고 계시더라고요. 시내에 살면서 대중이 여법하게 발우공양하는 도량이 없습니다. 근데 여기서 발우공양하시는 모습을 보고 인상이 좋았습니다. 근데 스님들 오시면 맞이하는 스님을 지객 스님이라고 하는데, 지객 스님께서 나오셔 가지고 “스님들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공양을 다시 지어드리겠습니다.” 이래요. 그래서 “아니 스님들 지금 공양 시간인데 밥이 있을 거 아닙니까. 그냥 주십시오.” 하니까, 난 그때 들어보고 처음 들어보는데, “어찌 저희들이 먹는 밥을 드리겠습니까. 다시 해서 드리겠습니다.” 이래요. 그래 가지고 스님들이 다 공양 끝난 뒤에 나가시고, 큰 방으로 저하고 그 스님을 안내하더라고요. 그래서 큰 방에 공양을 차려주셨어요. 큰 방에 이렇게 안내하는 것이 가장 큰 대접입니다. 대중이 사는 판도방(判道房), 도를 닦는 방, 그 큰 방은 이 법당 다음으로 중요한 방입니다. 그 방으로 안내해서 공양을 차려주셔서 너무너무 감사하게 먹고, 등, 오방번 이런 걸 달더라고요. 그래서 내가 다 달아 드리고 내려갔어요. 그런 좋은 인상이 있었습니다. 돌아가신 진관 큰스님께서 주석하시면서 대중과 수행을 함께 하고 도량을 정비하고 살던 그때가 생각이 납니다. 지금 회주 스님이나 우리 새로운 법해주지스님, 이런 모든 스님들이 그 진관 스님의 문도일 겁니다. 그 정신을 그대로 이어받아서 이렇게 사시는 모습을 보니까 아주 기분도 좋고, 그래서 오늘 와달라고 해서 왔습니다. 새벽에 와가지고 오늘 무슨 말씀을 드릴까 하다가, 오늘이 딱 초파일 일주일 전이에요. 그래서 잘 아시겠지만, 우리 부처님의 탄생, 또 탄생에 담긴 의미, 또 부처님이 최초로 말씀하신 내용을 가지고 여러분과 함께 소통하고자 합니다. 지금 우리나라, 이 지구촌을 지금의 개념으로 파악하면 이해가 안 갑니다. 불기 올해 몇 년이죠? 2566년에다가 부처님이 80살까지 사셨어요. 이걸 더 해야 돼요. 부처님이 돌아가신 해를 불기 1년으로 쳤어요, 세계불교도대회에서. 그래서 지금 그 불기로 3천 년이 넘는데, 세계불교도대회에서 여러 가지 근거를 가지고 정한 게 2566년입니다. 여기에다가 80살을 더하면은 많죠. 2646년이에요. 그런데 그때 당시의 80세는요, 정말 대단한 천수를 누리신 분입니다. 지금 지구상의 4대 성인, 이런 분들 중에도 부처님이 가장 유복하게 태어나셨고, 유복한 환경에서 자라셨고, 교육도 받고, 또 천수를 다 누리다가 돌아가신 분입니다. 부처님은 어디로 태어나셨어요? 옆구리로 태어났대요. 오른쪽 옆구리인지. 부처님은 제왕절개 일호에요. 옛날에는 안 믿었는데 다 요즘 배로 나오잖아요. 앞서 간 분인데, 왜 그런 말이 있느냐면 이제 인도에서는 우주를 주재하는 신을 범천이라고 합니다. 범천. 범천의 머리 꼭대기로 태어나는 계급이 있어요. 이건 바라문 계급이에요. 종교 계급입니다. 바라문이 제일 위의 계급이에요. 그다음에 옆구리로 나오는 계급이 왕족이나 귀족이에요. 그리고 우리와 같이 나오는 게 평민이에요. 그다음에 이제 수드라라고 이 노예 계급은 범천의 발바닥으로 태어난다 이랬어요. 그래서 사성제가 있는 거예요. 네 계급이 정해져 있어요. 태어날 때부터. 인도가 지금 민주사회라 해도 이것을 극복 못 하고 있습니다. 엄청난 세월이 흘렀는데도 말로는 헌법도 다 민주적이지만 실질적인 사회 풍토는 이게 있습니다. 거기다가 하나 더 있어요. 불가촉천민이라는 게 있어 접촉하면 안 되는 사람들, 이건 짐승 취급도 못 받아요. 그래서 다섯 계급이 있는데 이것은 태어날 때부터 이런 범천의 정수리, 옆구리, 또 우리와 같이, 아니면 발바닥으로 태어난다고 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부처님은 그래서 바라문 계급이 아닌 왕족으로 태어나서 옆구리로 탄생하셨다. 이랬는데 탄생의 제일성(第一聲)이 뭐예요.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天上天下 唯我獨尊 三界皆苦 我當安之) 이거예요. 그전에는 등을 스님들이 다 만들어서, 철사부터 해서 만들어서 다 붙일 때 거기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팔각이니까 이런 식으로 썼었어요. 지금은 등을 한 달, 일주일 이상 다 달아 되니까, 종이로 못 달죠. 비도 안 맞아야 되니까. 천상천하 유아독존, 부처님이 탄생의 제일성이라고 그래요.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홀로 존귀하다.’ 이것은 우리들의 마음자리를 이야기하는 거예요. 우리 보살님, 거사님, 여기 지금 진관사 경내에 계시는 모든 분들의 본질 자리, 이 본질 자리는 위아래가 없다는 이야기입니다. 스님이니까 그 마음이 높고, 신도니까 낮고 이런 게 아니에요. 그 마음은 같은 거예요. 이걸 이야기했는데 지금 이야기하니까 이해가 가는데, 부처님이 태어나신 2646년 전에 이 말씀은 목숨 내걸고 하시는 말씀이에요. 왜 그러냐 하면, 노예나 바라문이나 왕족이나 귀족이나 평민이나 똑같다 이래 버리니까. 그래서 불교를 민주적이지 않은 독재자들은 안 좋아해요. 똑같다 하니까. 평등. 그러니까 이 선언이야말로 인류 최초의 평등 선언이라고 저는 생각합니다. 천상천하 유아독존. 우리가 가지고 있는 본바탕. 우리식으로 하면 불성입니다. 불성 부처님이죠. 본래 가지고 있는 부처님을 표현한 이야기예요. 그다음에 나온 말이 삼계개고 아당안지. 삼계는 욕계, 색계, 무색계, 18계 중생세상을 이야기합니다. 이게 다 고통이다. ‘삼계개고, 다 고통이다. 그래서 나는 마땅히 그들을 편안케 하리라.’ 이게 삼계개고 아당안지 선언입니다. 이런 탄생 설화가 있기 때문에, 부처님의 삶은 자신의 행복에 만족하지 않고 자신의 지위에 만족하지 않고 왕위도 버리고 출가하신 분입니다. 그래서 태어나신 날이 일주일 후 초파일이죠. 이분은 어디서 태어나느냐 하면 룸비니동산에서 길에서 태어나셨습니다. 무슨 나무? 무우수(無憂樹). 불교는 세 가지 나무를 기억해야 돼요. 무우수입니다. 근심 없는 나무입니다. 인도에선 아쇼카라고 그래요. 아쇼카. 무는 없다는 뜻이니까 영어로 보면 아가 부정이에요. 근심이 없는 나무, 아쇼카, 아쇼카 대왕이 있잖아요. 화장실을 우리 뭐라고 해요? 해우소라고 그래요. 근심 푸는 것. 근심은 어떻게 해서 생길까. 그러면 이 고통은? 담아두려고 하니까 생겨요. 비교하니까 생겨요. 비워야 돼요. 비워야 돼. 여러분이 만약에 진관사에 초하루날 부처님에게 기도하고 여러분 수행을 위해서 오셨다면 첫째 마음을 내려놓아야 돼요. 내려놓고 비워야 됩니다. 비워야 채우지요, 채우려고 비우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 신도님들 수준이 높아졌어요. 그전에는 제가 출가할 때만 해도요, 스님들 법문도 없었고요. 열심히 자기 이름, 자기 가족 축원 나오나, 나오면 얼른 내려가서 후원에 가서 밥 먹고 있어요. 스님들은 기도하고 있는데. 이름만 나오면 끝난 거야. 근데 지금은 안 그러잖아요. 지금은 법문이 주죠. 그렇게 됐습니다. 의식 수준이 높아져서 그래요. 그러니까 부처님이 태어나신 나무는 무우수예요. 그래가지고 스물아홉 살에 출가하죠. 동서남북 4대문을 바라보면서 세상의 모습을 보고, 생로병사가 이렇게 이루어지는구나 이렇게 관찰하시고 이 생로병사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왕위를 버리고 출가합니다. 출가해서 어느 나무 밑에서 성도 하시나요? 보리수입니다. 여기 보리수나무 어디 있을 거예요. 제가 옛날에 94년도 봄에 앞뒤 배낭을 메고 인도를 다니는데, 일반적으로 여행사를 통하면 못 가는 곳이 있어요. 부처님이 성도하신 보드가야, 거기에 강이 니련선하란 강이고, 그 강을 넘어서 저 멀리 바라보면 산이 하나 보여요. 야산이. 그게 전정각산이에요. 부처님이 정각을 이루기 전에 마지막 고행하셨던 산이에요. 저는 논두렁길 산길 해가지고 반나절을 걸어가서 거의 참배했거든요. 그 산에 가면 지금은 지형이 변했지만, 옛날에는 숲이 우거져 있었어요. 근데 지금은 메말라 있고 원숭이만 다니고 부처님이 정진하시던 굴, 문도 없습니다. 앞에 바위가 하나 이렇게 막아져 있고. 이런 데서 고행을 하시다가 ‘아, 방향을 잘못 틀었다.’ 부처님은 29살까지는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호화로운 생활을 하셨던 분이에요. 그쵸. 태자였으니까. 그다음에 출가하신 뒤 6년간은 어느 누구도 따라올 수 없는 고행을 하신 분입니다. 인도의 수행법은 그때만 해도 고행이 대세였어요. 육신을 학대함으로 해서 오는 그 마음의 행복을 얻으려고 그리했던 겁니다. 쌀 한 톨로 하루를 연명하는 부처님 고행상 보면은 뼈가 다 드러나 있잖아요. 이렇게 고행을 하셨는데 이것이 아니더라는 거지요. 극단주의를 지양하는 거예요. 쾌락도 너무, 고행도 고행만 하게 되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하면 순간적으로 쾌락을 느낄 수 있어도 그것이 지속되지 않아요. 그리고 또 그 이전 단계는 고통 때문에 수행이 안 돼요. 저한테 가끔 와서 묻는 분들 이렇게 대담해보면 어떤 거냐면 “스님이 말씀하시는 대로 좀 참선 좀 하고 싶은데 무릎이 아파서 참선을 못합니다. 무릎이 아파서 앉지 못한다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제 그런 분들한테 늘 드리는 말씀이 있어요. 이게 기본이 이제 좌선이니까 좌복에 이렇게 지금 스님들처럼 앉아 계시지만, 이것은 참선 잘하기 위해서 앉는 것이지, 자세가 좋으려고 참선하는 건 아니에요. 본말이 이게 전도됐다고. 무릎이 아픈 분이 좌복에 앉아서 화두를 들면 고통 때문에 화두가 달아나거든요. 그러면 무릎을 안 아프게 해야지요. 그럼 의자에 앉으면 돼요. 발 뻗고 이렇게 하면 더 힘드니까 편한 의자에 앉으셔서 공부하면 되는 겁니다. 공부 잘하기 위해서 앉는 거란 말이지, 잘 앉기 위해서 공부하는 게 아니고. 대신에 의자에서 깊숙이 몸을 묻으면 한 5분 가면 졸려요. 세상에서 제일 무거운 게 눈꺼풀입니다. 어떤 것도 무겁지 않은데 눈꺼풀만큼 무거운 게 없어요. 그래서 이게 진짜 의미가 뭔가 이것을 우리가 파악하고 공부할 필요가 있다. 그러니까 부처님도 6년간 어느 누구도 따를 수 없는 고행을 하다 보니까 그게 아니다 해서 그 굴에서 내려오셔요. 내려오면 이제 니련선하 강이 흐릅니다. 거기 강에 몸을 담가요. 그러니까 어떤 일이 벌어져요? 고행자는 수행자는 목욕을 안 해야 돼요. 목욕을 했네. 수행을 너무도 잘하니까, 고행을 잘하니까 5명이 멀리서 늘 지켜봤는데, 저 고다마 시따르타가, -부처님 태자 때 이름이 고다마 시따르타에요.- 부처님이 성은 샤카족, 석가, 우리 말로 석가인데, 그 전 이름은 고타마 시타르타- 고타마 시타르타가 타락했다, 목욕했다, 해서 떠나요. 그런데 목욕하다가 지쳐가지고 쓰러져요. 쌀 한 톨로 연명한 고행자가 목욕하니까 쓰러져. 그러니까 한 소녀가 지나가다가 유미죽이라고, -우유에다가 쌀을 넣어서 죽을 끓이면 유미죽인데 고소합니다.- 그걸 이제 입에 넣어줘요. 그걸 먹고 고타마 시타르타가 깨어나요. 힘이 나는 거예요. 근데 그 모습을 본 5명의 수행자는 타락했다 해서 떠나버려요. 이제는 자기 주위에는 어느 누구도 없어요. 그래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보리수 아래 앉으셔서 ‘이제 내가 깨닫기 전에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 하고 일주일 만에 드디어 정각을 이루십니다. 그래서 그 앞산이 전정각산, 정각을 이루기 전에 산이고, 이 인도에 가면 보리수가 큰 게 있는데 부처님이 깨달음을 이루었다 해서 보리수가 된 거예요. 보리는 <깨달다> 이 말이지요, 보리살다. 우리 보살님 보고 보살님 보살님 하는데 깨달은 중생이라는 표현이니까 얼마나 큰 칭찬이에요. 큰 스님들도 좋으신 큰 스님들을 보살님 같다 하거든요. 고암 큰스님 이런 분들 ‘늘 보살님 같다, 보살님 같다’ 그랬어요. 보살님이라는 칭호는 대단한 칭호입니다. 그냥 함부로 쓰는 칭호가 아니에요. 부처님이 성도하신 나무가 보리수예요. 열반하신 나무는 사라쌍수 사라수라는 나무가 있는데 두 개가 이렇게 있어요. 그래서 사라쌍수하에서 돌아가십니다. 근데 돌아가신 이야기까지 많이 하면 시간이 없으니까, 부처님의 생애를 정리하자면, 지금으로부터 2646년전에 태어나신 우리 석가모니 부처님은 29살에 출가하고, 35세에 부처님이 되는 거예요. 정각을 이루고 45년 동안 중생교화를 위해서 길에서 길로, 길에서 길로, 이렇게 사시다가 돌아가신 분이 부처님이십니다. 그러니까 아까 말씀드린 천상천하 유아독존 삼계개고 아당안지의 그 실현을 위해서 정말로 맨발로, 맨발로 인도 전역을 다니시면서 교화하신 그런 위대한 성인 중에 성인이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 오신 날을 경축하는 의미는, 등에 보면 이제 자등명 법등명(自燈明 法燈明)이라고 주로 많이 쓰여 있는데, 등을 밝히는 이유는 자등명이에요. 자신의 등불을 밝혀라, 자신이 본래 부처임을 확인하는 거예요. 수행을 통해서. 수행은 여러 가지가 있죠. 뭐 기도도 있고, 염불도 있고, 부처님 경전을 보는 강경도 있고, 또 참선도 있고, 또 능력껏 재능 보시도 하고, 자기가 가지고 있는 걸 보시하는 거예요. 돈만이 아니고 무슨 기술이 있으면 기술을 보시해서 이웃과 함께하는 이런 여러 가지 행을 통해서 스스로 부처임을 확인하는 일이 이게 자등명입니다. 자신의 등불을 밝히는 거고. 그다음에 법등명은 진리의 등불을 밝히는 거예요. 이 세상에 진리가 이럴 것이라, 부처님 말씀하신 진리의 내용을 세상에 밝히기 위해서 우리가 등을 초파일 날 밝히는 겁니다. 근데 등은 어디에서 빛이 나나요. 어두운 곳에서 빛이 납니다. 어제 시내에서 3년 만에 연등회 제등 행렬을 했는데, 밤에 하는 이유가 그래요. 낮에는 햇볕이 강해서 등이 빛을 발하지 못해요. 그런데 밤이 되면 등이 밝아져요. 이게 이제 어둠을 밝히는 등이듯이, 진리의 등을 밝히고 자신의 등을 밝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등의 위치가 어디에 있느냐는 중요하지 않습니다. 오히려 나 같으면 저 모서리에다가 달 것 같아요. 사람들이 가다가 넘어질세라. 경축하는 의미가 진리의 등 그다음에 자신의 등불을 밝히는 것이고, 그다음에 부처님이 오신 본래 의미를 실천해 옮기는 것, 이게 이제 1년 열두 달 늘 하면 좋겠지만 안 되니까 초파일 봉축 기간만이라도 좀 해보자는 거예요. 이게 뭐든지 습관들여야 되잖아요. 그렇죠. 그다음에 그러면 이제 부처님이 6년의 고행 끝에 성도 하시고 나셔서 무슨 말씀을 하셨을까. 첫 말씀이 “기재기재다, 참 기특하고 기특하다. 일체 중생에게 여래의 원만 덕상이 본래 다 갖추어져 있구나.” 그랬어요. 그러니까 부처님도 6년 고행할 때는 자기 자신이 본래 부처의 씨앗이 있는 줄 몰랐던 거예요. 근데 깨닫고 보니까 본래 자기 안에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 중생들도 마찬가지죠. 본래 다 부처라는 거예요. 근데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셔?. 여러분이 부처라면 안 믿지요. 겸양이 너무 심해. 종이라고 하면 믿어. 아니 종이라고 하면 믿는 분들한테는 여러 가지 방편이 많이 사용할 수 있어요. 그런데 아니기 때문에, 진실을 말할 수밖에 없기 때문에, 여러분이 다 주인이라고 하는 거예요. 주인이라고 하면 안 믿고 종이라고 믿는 것은 이건 잘못된 견해입니다. 그리고 문벌로 봐도 우리는 부처님의 제자들이니까 석가족이에요. 샤카족. 이것같이 귀한 존재가 어디 있습니까. 이 불자임에 대한 자부심이 있어야 됩니다. 저는 스님에 대한 자부심이 대단해요. 물론 살다 보면 허물도 생기고 하지만 부처님 제자로서 누가 되지 않기 위해서 스스로 다잡고 수행합니다. 그래서 나는 택시 잡으려고 하다가 누가 뛰어가서 얼른 잡으면 손해 보고 말아요. 스님이니까 손해 보는 것도 많아요. 싸우다가도 누가 막 대들다가 “왜 그러쇼.” 소리 한 번 지르면 스님이 소리를 질러요 그래. 그러면 “당신이 나를 지금 스님으로 생각하고 그런 말을 했습니까?” 하면은 그 사람도 이제 쭈삣해요. 그러나 수행자니까 참아야 되는 거에요. 그것이 손해라는 생각도 없이 참아야 돼요. 근데 아직 수행이 덜 됐으니까 어쩌다 한 번씩 성질이 나오는 거죠. 그러나 성질 내는 횟수가 줄어들게 돼 있습니다. 그렇다고요. 진관사 스님들한테 와서 괜히 시비하지 말고. 이게 다 우리가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는 자세일 수 있습니다. 그러니까 본래 우리가 다 여래의 원만 덕상을 지니고 있다. 이 강한 믿음, 믿음이 있어야지, 믿지 않으면 한 발 더 나아갈 수 없어요. 그다음에 하나만 더 말씀드리면, 이제 여기 등이 달려서 하는 말인데, 여러분 심청가 아시나요. 심청가 아시죠. 그 심청가의 마지막 대목이 뭐예요. 심봉사 눈 뜨는 장면이에요. 어떻게? 공양미 300석에 제물이 돼가지고 팔려가서 자기 아버지 눈을 뜨기 위해서 효녀 심청이가 인당수에 제물이 되잖아요. 봉은사 화주승이 300석 하면은 눈 뜰 거라고 하니까 믿고 자기가 인당수에 뛰어들어서 죽었는데, 그 효성이 지극해서인지 연꽃이 나타나서 효녀 심청을 받아요. 그래가지고 이게 바닷가 가로 나가니까 백성들이 보고 임금님한테 알려요. 그래서 연꽃 속에서 아름다운 여인이 나와 임금님이 자기 부인으로 삼지요. 근데 늘 왕비가 되어도 아버지 눈이 떠졌을까 궁금해요. 그래서 어떻게 해요. 요즘 같으면 tv도 있고 라디오도 있고 ‘아버지 찾습니다.’ 하면 되는데, 그때는 그런 시절이 아니니까, 전국의 맹인 잔치를 열어요. 전국에 있는 맹인들은 다 모여라. 심학규도 가지요. 뺑덕어미가 데리고 가다가 젊은 사람한테 눈 맞아서 도망가고 그 과정이 재미있게 이렇게 연출되는데, 효녀 심청이 가보니까 전부 맹인인데 아버지가 저 뒤에 혼자 앉아 계시는 거예요. 눈을 안 떴지. 눈을 떴으면 왜 왔겠어요. 그러니까 막 달려가 “아버지 저 청입니다. 아버지 딸 청입니다.” 하면서 막 통곡을 하니까 심봉사가 어떻게 돼요? 꿈에도 그리던 자기 딸 목소리가 들리니까 눈을 뜨려고 막 껌뻑껌뻑 하다가 툭 뜨네. 어떤 일이 벌어지나요. 거기에 있는 모든 맹인들이 눈을 뜹니다. 눈을 뜨는 거예요. 이게 이제 하이라이트예요. 이게 불교의 화엄경에 있는 중중무진 연기 사상의 바탕한 심청전이에요. 그러면 여기서 눈을 떴다는 건 뭘까. 육신의 눈을 뜬 것도 뜬 것이지만, 지혜의 눈을 떴다는 이야기지요. 자등명 법등명 아까 말씀드린. 제 눈을 뜬 거예요. 그러니까 여러분 경쟁할 필요가 없어요. 이 등들도, 이 많은 등이 있는데 빛은 서로 방해하지 않아요. 이 빛이 저 빛을 비치고 이 빛이 저길 비치고 해서 완전히 빛의 세계가 됩니다. 그런데 우리는 누구를 누르고 성공하려 한다 이런 개념인데 전혀 그러지 않습니다. 지금 지구촌이에요. 코로나가 지구촌 한쪽에서 일어나니까 지금 전 세계가 몸살을 앓고, 연결돼 있어요. 이거 연결되어 있다는 말이 연기법이에요. 연기. 이 부처님이 성도 하시고 나서 또 이런 말씀을 하셨어요. ‘차유고피유(此有故彼有) 차멸고피멸(此滅故彼滅)’ 이것이 있으므로 저것이 있고 이것이 소멸함으로 저것도 소멸한다. 이게 연기법입니다. 여기 앉아 있는 저나 또 이 법당에 앉아 계시는 진관사의 거룩한 스님들, 또 지금 의자에서 제 말씀을 듣는 여런 분들은 다 연결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제가 잘 되어야 여러분이 잘 되고, 여러분이 잘 돼야 저도 잘 됩니다. 그래서 불자들은 이런 큰 마음을 가지고, 동체대비심의 마음을 가지고 부처님 오신 날을 봉축하고 또 나의 모든 재능이 있으면 그것을 사회에 환원할 수 있는 이런 자세를 가지고 맞이하는 것이 부처님 오신 날을 맞이하는 불자의 자세이지 아닐까 생각합니다. 우리들도 스님들도 그러기 위해서 수행합니다. 자기만의 깨달음을 위해서 수행하면 그건 독각승이에요. 그러나 그 큰 원력을 가지고 저희들도 수행하고 또 저희들도 기도하고 염불하고 축원하고 합니다. 성스러운 우리 부처님이 오신 날을 맞이해서 모든 불자들이 본래 스스로 부처임을 확인하고 그 확인한 그 지혜를 가지고 사유의 자비로 베푸는 그런 멋있는 4월 초파일이 되기를 발원하며 제 말씀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