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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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춘기도]2월 4일 입춘기도 회향 법문
종범스님 2023-02-04
안녕하십니까. 계묘년 입춘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진관사 계묘년 입춘 법문입니다. 입춘은 <봄맞이, 복 맞이, 봄을 맞이하고 복을 맞이한다> 그런 의미거든요. 봄을 맞이해서 복을 부르는 행사를 어떻게 하냐. 첫째는 온 집안을 청소를 하죠. 그리고 입춘송을 붙여요. 그리고 음식을 해서 먹고. 옛날에는 남자들 중심 문화이기 때문에 남성들이 술을 마시고, 여성들은 술상을 보고. 그런 게 이제 어릴 때부터 봐왔던 입춘 맞이 행사입니다. 立春大吉(입춘대길)새해의 새봄을 맞으니 많은 복 빠르게 오소라.建陽多慶(건양다경)새해의 새 햇살 맞으니 많은 복 빠르게 오소라.天增歲月人增壽(천증세월인증수)하늘에 세월이 불어나듯 사람의 수명도 불어나라.春滿乾坤福滿家(춘만건곤복만가) 봄 햇살 천지에 가득하듯 만복이 집안에 가득하라. 입춘을 맞이해서 복을 부르는 송이 많이 있지만, 맨날 보는 게 <입춘대길 건양다경(立春大吉 建陽多慶)> 이거거든요. 그 입춘이라는 게 뭔가. 그 설 립자가 온다는 뜻이에요. 온다. 봄이 오니 그 길자가 그게 복이라는 뜻이에요. 길 복. 대복이라는 말인데, 한자는 그냥 명사가 형용사 서술어가 돼요. ‘큰 복이다’ 그런 게 아니고 ‘큰 복이 오라’ 그런 말이거든요. <봄을 맞이해서 큰 복이 오십시오.> 그래서 입춘대길이고. 건양이라는 것도 세울 건자인데, 그것도 온다는 소리예요. 양은 햇빛이라는 뜻이죠. 봄 햇살, 따뜻한 햇살이 새해를 맞이해서 새롭게 다가오니, 그 밑에 이제 다경이라고, 많을 다자고 경사 경자인데, 그 경사 경자도 복이라는 소리예요, 복 경자예요. <많은 복이 오십시오>. <햇살을 맞으니, 봄 햇살을 맞으니, 많은 복이 오십시오> 이런 거거든요. 입춘대길 건양다경. 그래서 이것을 간단하게 번역을 하기를, <새해의 새봄을 맞으니 많은 복 빠르게 오소라.> 이건 시적인 용어인데, ‘오십시오’하면 너무 건조하고 재미없잖아요. ‘오소라’, 가라는 말을 ‘가소라’ 오라는 말을 오소라, 좋아하십시오, 이 말을 좋으라. 이제 시에서 많이 쓰는 용어인데, 새해에 새봄을 맞으니 많은 복, 해 다 가서 오지 말고, 오늘부터 당장, 여름에 오거나 가을에 오거나 그러지 말고, 아주 오늘 당장 빠르게, 많은 복 빠르게 오소라. 또 건양다경도 <새해의 새 햇살 맞으니 많은 복 빠르게 오소라.> ‘새해의 새봄을 맞으니 많은 복 빠르게 오소라’. 또 ‘새해의 새 햇살 맞으니 많은 복 빠르게 오소라.’ 거기에 모든 염원이 다 담겨 있어요. 복이 제일 좋잖아요. 복이라는 건 좋은 게 다 복인데, 서경에서는 오복을 말했는데, 서경에서 말하는 오복이라는 게, 수(壽), 오래 사는 거. 근데 요새는 다 오래 살아서 장수 재앙이라는 말이 있어요. 장수가 재앙이다. 그래서 자녀들한테 “부모가 몇 살 살기를 원하느냐?” 그러니까 “60대에 가셨으면 좋겠다.” 그래요. 이게 자녀가 생각하는 부모의 수명이에요. 왜 그러냐. 60 이상은 더이상 부모가 이룰 게 없다는 겁니다. 이룰 거 다 이루었다면 빨리 넘기고 가라. 그러면 본인이 생각하는 수명은 얼마냐. 최소한이 90이거든요. 최소한이. 80대에 가도 이거는 병으로 갔다. 수명으로 간 게 아니고, 명으로 간 게 아니고, 병으로 갔다. 조금 장수한다면 요새는 100세예요. 그렇죠. 보통 수명이 90이고 90전에 가면 명대로 다 못 살고 병에 의해서 간 걸로 이렇게 되거든요. 근데 요즘에는 그 수명도 원하는 수명이 있어요. 옛날처럼 적어도 60은 살아야 되고, 70 사는 거는 흔하지 않은 일이다, 그런 게 아니고, 내가 생각하는 수명대로 가면 그게 장수예요. 자식이 생각할 때는 60만 살면 좋겠다. 이러는데 본인이 생각할 때는 90 정도만 살면 알맞겠다. 또 뭐 한 사람은 100세 더 살아도 좋다. 그러니까 본인이 부족함이 없이 사는 거를 수복이라고 할 수 있죠. 목숨 수자, 수복. 그다음에 부(富). 이제 재산이 많은 게 부거든요. 이게 부복이에요. 수부. 강령(康寧), 건강한 게 이게 복이에요. 강령복. 이게 재산도 있고 오래 사는데 건강이 없으면 또 안 되잖아요. 호덕(好德)이라고 심복이 있는 게 그게 또 복이에요. 이게 덕성이 있어야지, 인성이 풍부해야지, 이게 사는데 복이 있지, 오래 살고 재산도 있고, 그리고 건강하고 그래도 인성이 안 갖춰지면 행복할 수가 없어요. 요즘에는 인성의 시대라, 요즘에는 실력의 시대가 아니고 인성의 시대, 실력은 다 있고, 엘리트라는 게 요새는 아니에요. 대중 시대예요. 그래서 대중 시대는 대중의 관심을 받아야 성공을 하지, 엘리트 자기 능력만 있고 대중의 관심을 못 받으면 절대로 성공할 수가 없어요. 대중 시대이기 때문에. 그럼 실력은 다 있는 거고, 그러면 대중 관심을 어떻게 받느냐. 인성이 좋아야 되거든요. 인성이. 그래서 요즘은 인성 시대지 엘리트 시대가 아니다. 그런데 부모들은 여전히 엘리트를 강조하고, 인성을 등한시해요. 그러면 그 아들이 반드시 실패해요. 이 대중의 인기, 대중의 선택을 못 받으면 대중문화, 대중사회, 대중이 취향이기 때문에, 요새 또 옳고 그른 게 아니라 취향이라는 게 있거든요. 대중이 어느 쪽으로 선택을 하느냐. 취향에 맞춰야 되고. 대중에 맞춰야 되고. 또 다 함께 살아가는 노력을 해야 성공을 하지, 자기 똑똑한 것만 가지면 절대 안 된다. 근데 이미 서경에서도 호덕, 좋은 덕이 넉넉하게 보이다, 그 얘기를 했어요, 이미. 오복 중에 호덕. 그다음에 요즘엔 조금 틀린데, 고종명(考終命)이라고, 죽을 고자가 있는데, 죽을 때 자기 명대로 생을 맞춰야 된다, 이게 고종명인데요. 뭔 소리냐. 옛날에는 호식이 많았어요. 호랑이한테 목숨을 잃는 거. 이렇게 재앙으로 하고, 갑자기 뭐 수중 사고가 난다든지, 갑자기 화재 사고가 난다든지, 그렇게 되면 복이 하나 없는 걸로 생각을 했어요. 그래서 그 죽음을 자기 명대로 죽고, 병으로 죽는 것도 고종명으로 본 거예요. 이병 치사, 병으로 치사한다든지 그래야지, 뜻밖에 사고를 당해서 가는 거는 고종명이 아니다. 이래서 수부 강령 유호덕 고종명, 이걸 이제 오복으로 했는데, 불교는 온갖 복을 다 설명을 했어요. 그래서 백복이라는 말도 있어요. 백이라는 백자. 천복이라는 말도 있고, 만복이라는 말도 있어요. 백복, 천복, 만복. 그래서 여러 가지 복이 있는데, 이 오복 중에 숫자에 안 들어가는 복이 과거에 하나 있었는데, 오복 중에 치아가 좋은 게 오복의 하나다. 그런데 그건 속담이에요. 오복에 치아는 없어요. 그런데 나이 들어보니까, 이거 이가 좋은 게 굉장히 중요하더라고요. 나이가 들어도 아무리 딱딱한 거라도 마음대로 씹고 먹으면 그거 진짜. 그래서 아 이게 치아 좋은 걸 하나 더 넣든지 해야 되겠다. 이런 게 아주 중요해요. 어쨌든 좋은 게 복이라고 해요. 좋은 게 복. 그래서 복과 수명은 항상 따라다니는 거고. 가만히 보니까 이게 같은 세월이라도 연령에 따라서 똑같지 않아요. 10대 때 보내는 10년 하고, 20대 때 보내는 10년 하고, 30대 10년, 40대 10년, 60대 10년이. 30대, 40대, 50대 10년 요게 진짜 수명이고, 60 넘어서부터 60대, 70대, 80대, 70 넘어서 사는 거는 별로 사는 게 아니야 이게. 누가 뭐 만나자고를 하나, 누가 뭐 오라고 하나, 올까봐 겁나요. 칠십 먹은 사람 함부로 움직이면 안 돼요. 찻집에를 가도 뭐 좋게 안 봐. 그래서 70 먹은 사람은 약속된 장소 외에는 가면 안 된다. 큰일 나요. 굉장히 무서워하고 경계를 해요. 왜 왔나. 큰일 나요. 더군다나 며느리한테 함부로 70 먹은 시어머니가 가면 큰일 나. 그거. 그 사전에, 열흘 전에, 일주일 전에, 약속을 하고 가야지, 아들도 함부로 만나자고하면 안 돼요. 왜 왔나. 무슨 일이지. 겁부터 낸다고. 그러니까 찾는 사람도 없고, 찾아갈 데도 없고, 뭘 하려고 해도 할 수 있는 것도 별로 없고. 이러니까 60대까지는 그런대로 버티는데 70 넘어서부터는 같은 십년이라도 전혀 틀려요. 30대 10년하고 70대 10년하고는 이거 같이 비교할 수가 없어요. 그 활동량이라든지, 여러 가지 할 수 있는 업적을 볼 때. 그런데 70대 넘어서 80대 10년이라 이거는 뭐, 어떻게 지나가는지 그냥 번개같이 지나가고, 90 넘어서부터는 숨만 쉬면 수명이에요. 숨을 안 쉴 수가 없으니까 숨은 매일 쉬잖아요. 근데 그 하는 일을 기대할 수 없어요. 구십서부터. 그러니까 구십 넘어서는 살아도 사는 게 아니다. 그냥 숨만 쉴 뿐이다. 그러니까 이게 수복이라는 게 몇 살까지 살아야 이게 수명의 복을 얻은 건가. 이거는 본인이 결정에 달린 거예요. 같은 숫자라도 그게 똑같은 게 절대로 아니에요. 그런데 여하튼 소년에 간다든지 중년에 간다든지 그런 거를 하면 안 되거든요. 40에 가는 걸 단명이라고 그랬어요, 옛날에. 40전에 가는 걸 다 요절이라 그래요, 요절. 빠르게 간다. 요절하고 단명하면 안 되니까, 적어도 50은 살아야 된다. 50이라면 단명이라고 안 하고, 그냥 보통으로 생각했거든요. 요즘으로 보면 적어도 60까지는 살아야 될 것 같아요. 60에는 할 일이 많아요. 60에서는 뭐 결혼도 다시 할 수 있다고 그래요, 60대는. 충분히 결혼할 수 있다고 그래, 60대는. 그러니까 뭐 할 일이 많잖아요. 그러니까 요즘으로 보면 기본적으로 60대까지 사는 거는 적당한 수명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거기에 이제 입춘송이 천증세월인증수(天增歲月人增壽), 하늘은 세월을 점점 불려가고 사람은 수명을 불려간다. 춘만건곤복만가(春滿乾坤福滿家), 봄이 하늘과 땅에 가득하니, 복이 집 안에 가득하기를 원한다. 이게 아주 기본 송이에요. 하늘은 세월을 불려가고, 사람은 수명을 불려가고, 또 봄이 천지에 가득하니 복이 집안에 가득하게 하소서. 이런 거. 이거를 이제 번역하기를 <하늘에 세월이 불어나듯 사람의 수명도 불어나라> 이거죠, 내용은. <하늘에 수명이 불어나듯 사람의 수명도 불어나라. 봄 햇살 천지에 가득하니 만복이 집 안에 가득하라.> 이게 이제 입춘을 맞이하는 기본 축원이예요. 그렇게 새해를 시작하는 거지요. 계절로 보면 입춘이 처음이거든요. 입춘에서부터 시작해서 대한까지가 24절기예요. 그러니까 계절로 보면 입춘이 새해인 거예요. 입춘 새해. 근데 이걸 가만히 보면, 봄은 지난해에도 맞이했고 그 지난해에도 맞이했는데, 한 번만 보면 안 온다고요. 그런데 이 봄을 맞이하는 마음은 지난 마음이 없어요. 항상 새 마음인 거예요. 지난해는 새 마음으로 새봄을 맞이했고, 또 금년에는 금년에 새 마음으로 새봄을 맞이하고, 내년에는 또 내년에 새 마음으로 새봄을 맞이한다. 세월은 오기도 하고 가기도 하는데, 마음은 항상 새 마음이다. 이게 지난 마음은 젊었고 오늘 마음은 늙었고 그게 아니에요. 몸은 늙는데 마음은 항상 새 마음인 거예요. 이거를 가르치는 게 불교예요. 세월은 오고 가는데 오고 가지 않는 마음이 있다. 이거 참 중요한 거예요. 迎春迎福 古今同事 봄맞이는 고금이 같으나 영춘영복 고금동사迎迎之人 是箇阿誰 맞이하는 '이는' 누구인가?영영지인 시개아수 그래서 영춘영복은 고금이 동사다(迎春迎福 古今同事). 봄을 맞이하고 복을 맞이하는 거는 옛날이나 지금이나 같은 일이다. 그런데 영영지인(迎迎之人), 봄맞이 복맞이하는 그 사람은 무엇이 사람이냐. 이걸 이제 항상 하는데, 무엇이 사람인가. 그 이름이 있어요. 누가 오잖아요. 딱 와서 대면을 하면 이름을 부르는 게 아니라, 무슨 물건이 이렇게 왔나. 이게 이 마음공부하는 아주 첫 번째 화두예요. 몸을 보는 게 아니에요. 몸은 늙어도 늙지 않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몸은 젊어도 젊지 않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몸은 어려도 어리지 않은 마음이 있는 거예요. 몸은 죽어도 죽지 않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딱 깨우치기 위해서 딱 부르면 뭔 물건이 이렇게 왔냐 이거예요. 몸 보고 이름 보고 아무개야 잘 왔냐, 그거는 아주 세속적인 거고. 이 마음을 깨우치고 마음을 찾게 하는 이 마음공부에서는 몸 보고 이름 보고 그거 아니에요. 그건 아주 세속적인 거예요. ‘뭔 물건이 왔냐’ 이 말이에요. 여기 온 게 다리가 왔냐, 팔이 왔냐. 거기 다리요, 숨지면 못 걸어요. 눈요, 이거 숨지면 못 봐. 다리가 온 게 아니라 다리를 움직이는 마음이 있었다. 눈이 보는 게 아니라 눈을 움직이는 마음이 있다. 두뇌가 생각하는 게 아니라 이 두뇌를 움직이는 마음이 있다. 이게 마음공부의 핵심이에요. 그래서 이 마음이라는 것은 눈을 감으면 검은 게 보이고, 눈을 뜨면 밝은 게 보이는데, 마음은 눈 감을 때 어두운 것도 보고, 눈 떴을 때 밝은 것도 보고, 마음은 그 넓고 넓은 허공도 보고, 마음은 이 먼지가 풀풀 나는 땅도 보고, 못 보는 게 없어요. 그럼 마음이 허공이라면 땅을 못 볼 거고, 마음이 땅이라면 허공을 못 볼 거고, 마음이 사람이라면 나무를 못 볼 거고, 마음이 나무라면 사람을 못 볼 건데, 이 마음은 소리가 날 때는 소리를 듣고, ‘아무것도 안 들리네’ 그러는데 아무것도 안 들리는 걸 아는 게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조용할 때는 조용한 걸 알고, 시끄러울 때는 시끄러운 걸 알고, 밝을 때는 밝은 걸 알고, 어두울 때는 어두운 걸 알아서, 찾아보면 한 물건도 없는데 마음은 무일무이라, 찾아보면 이 마음이 어디에 들어 있는지 아무리 이 몸을 조사를 해봐도 마음이 안 보여요. 그러나 항상 안다. 상방광명이라고, 항상 광명을 비춘다. 찾으면 한 물건도 없는데, 상방대광명 항상 광명을 비춘다. 그 마음을 하나 딱 찾고 나면 어두운 것도 마음이 보는 그림자고, 밝은 것도 마음이 보는 그림자고, 죽는 것도 마음이 보는 그림자고, 사는 것도 마음이 보는 그림자고, 마음은 죽어도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요, 살아도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보여도 보여도 보이는 게 아니고, 안 보여도 안 보여도 안 보이는 게 아니라, 보이고 안 보이고 오고 가는 데서 걱정 근심할 일이 하나도 없다는 말을, 요새는 일도 없다고 그러더라고요. 하나도 없다는 건 옛날 말이고, 일도 없다, 이거는 현대 말이에요. 일도 없어요. 이 마음을 알고 나면 걱정 근심할 일은 일도 없다. 그럼 걱정 근심이 뭐냐. 이 마음을 모르는 번뇌망상이예요. 마음 하나 딱 챙기면 보이고 안 보이는, 오고 가는 건 전부 그 마음에 비친 그림자예요. 예를 들면 깨끗한 연못이 있는데 그 연못에 보면 비행기 지나가는 것도 보이고, 구름 낀 것도 보이고, 사람 오고 가는 것도 보이고, 산도 보이고 다 보이는데, 그 연못에 맑은 물은 아무것도 없어요. 근데 그 연못 속에 보이는 건 전부 그림자에요. 그래서 이 걱정 근심이 생기는 건 그 연못에 있는 맑은 물은 못 보고 거기 오고 가는 그림자를 보고 그 그림자가 올 때는 좋아하고 그림자가 사라질 때는 싫어하고 이거란 말이지. 이걸 가르치는 게 불교의 마음공부예요. 그게 해탈이고 그게 깨달음이라는 거지요. 그래서 지금 눈앞에 보이는 건 내 마음에 비추어진 그림자고, 내 마음은 그 연못의 맑은 물과 같은 그게 내 마음이다. 이거 오가는 걸 보고 붙잡으려고 하고 밀어내려고 할 게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이런 얘기를 하면 “정말로 그래요?” 또 이런 사람이 있어요. 정말로 그럴까요. 왜 그러냐면 전부 이게 전도몽상(顚倒夢想)이라 그래가지고, 내 마음에 비친 그림자를 좋아하기도 하고 싫어하기도 하고 했기 때문에, 이걸 전도라 그래요, 뒤바뀌었다고. 예를 들면 자기 그림자를 보고 자기가 싫어한다든지 좋아하는 거 이게 전도거든요. 또 꿈꾸는 생각과 같다. 이걸 몽상이라 그래요. 전도몽상. 그러니까 일심삼매(一心三昧)에 딱 들면 삼매라는 거는 하나가 되는 게 삼매인데, 여러 가지 보고 듣는데 지금 걱정 근심이 꽉 차 있는데, 그걸 한 마음으로 딱 돌아가면 걱정할 일 하나도 없는 거예요. 그걸 불생불멸이라고 그러거든요. 불생불멸이라는 말은 걱정할 일이 없다 이거예요. 나도 난 게 아니고, 연못에 그림자가 비춰도 생긴 게 아니고, 안 비춰도 없어진 게 아니고. 三般物 삼반물七賢女遊屍多林 曰 屍在者裏 人向甚處去 云 作麽作麽칠현녀유시다림 왈 시재자이 인향심처거 운 작마작마賢女諦觀 各各契悟 帝釋云 有何所須 女云 唯要三般物 현녀체관 각각계오 제석운 유하소수 여운 유요삼반물一要無根樹子一株 二要無陰陽地一片 三要叫不響山谷一 일요무근수자일주 이요무음양지이편 삼요규불향산곡일所 帝一切所須 我實有之 若三般物 我實無得 소 제일체소수 아실유지 약삼반물 아실무득(禪門拈頌集卷1.第18則)(선문염송집권1,제18칙) 그리고 이제 60년대 후반에 경상남도 양산 통도사 강원에서 있었는데, 그때는 큰 스님들이 학인들에게 수시로 법문을 해주시는데, 저녁에 주지 스님도 해주시고, 큰스님들도 해주셨어요. 그게 항상 이야기가 있는데, 칠현녀 삼반물(七賢女 三般物), 칠현녀라는 건 일곱, 어질 현자, 여인 여자, 일곱 어진 여인들이 제석천왕에게 요구한 것이 있는데 그게 뭘 요구했냐 그러면, 삼반물이다. 석 삼자, 일반이라는 반자가 있는데, 가지 반자, 가지가지, 한 가지, 두 가지 이런 삼반, 물, 물건 물자, 세 가지 물건이다. 이 법문이 선문염송집(禪門拈頌集)이라고 하는데, 30권짜리가 있는데 그 제1번에 수록된 내용이에요. 칠현녀라, 인도에서 일곱 현녀들이 아주 어질고 지혜도 높고 하는 현녀들이, 인도는 시다림(屍多林)이라고, 사람이 죽으면 그 숲속에 갖다가 안치를 하는 그 숲을 시다림이라고 그래요. 숲에 갖다, 그냥 수목장식으로 갖다 안치를 하는 거예요. 화장이나 뭐 토장이나 이거는 또 따로고, 임장이 있어요. 숲속에 시신을 갖다 놔. 임장이에요. 그 임장하는 그 숲을 시다림이라고 그래요. 시신이 있는 숲이다. 그래서 이 칠현녀가 이 시신을 갖다가 장례를 치르는 시다림에 떡 갔는데, 어떤 시신이 있어요. 그런데 칠현녀 중에 한 여인이 “시신은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 갔나?” 이런 질문을 했어요. 이게 이제 마음공부에요. 사람이 오면 “무슨 몸이 왔나?” 이렇게 묻고, 또 시신을 보면 “시신은 여기 있는데 이 사람은 어디 갔나?”. 그게 마음공부예요. 그냥 울고 이것만이 아니라 도대체 이 시신의 사람이 어디 갔냐 이 말이에요. 그러니까 그중에서 어떤 사람이 어디로 갔나, 어디로 갔나. 작마작마(作麽作麽) 이렇게 쓰는데, 지을 작자 어조사 마자. 어떤 일인가. 어떤 일인가. 이게 무슨 일인가, 무슨 일인가, 뭐냐, 뭐냐, 이렇게 다 돼요. 어디로 갔나, 어디로 갔나, 이 말이지. 자꾸 그러는 거예요. 시신은 여기 있는데 사람은 어디로 갔나, 어디로 갔나. 어떻게 된 일인가, 어떻게 된 일인가. 그래서 한참을 그렇게 집중을 하고 관찰을 했는데, 이 칠현녀들이 다 거기서 깨달음을 얻었어요. 각각계오(各各契悟)라, 깨달을 계자가 있고, 깨달을 오자가 있는데, 다 그 시신이 어디로 갔는지, 죽음이라는 게 뭔지 다 알게 됐어요. 근데 그걸 보고 제석천왕이 하도 감동을 해서, “내가 이 칠현녀들에게 공양을 올리고 싶은데 공양을 받아줄 수 있겠냐”, 그러니까 칠현녀 하는 말이 “나에게는 모든 게 다 있어서 필요한 게 하나도 없다. 오직 세 가지만 필요하다. 그러니까 공양을 하려거든 이 세 가지를 우리에게 공양을 해라.” 그러니까 그럼 “세 가지가 뭐냐.” 첫째 요구하는 거는 무근수자일주(無根樹子一株)라고, 뿌리 없는 나무 한 그루 그게 필요하다라는 거예요. 뿌리 없는 나무 한 그루, 무근수자일주를 요한다, 필요로 한다. 두 번째는 요구하는 것이 무음양지일편(無陰陽地一片). 햇살, 그늘 없는 땅 한 조각, 햇빛도 없고 그늘도 없는 땅 한 조각, 음양이 없단 말이에요. 그리고 세 번째는, 요구하는 게요, 규불향산곡일소(叫不響山谷一所), 아무리 소리를 질러도, 소리 지를 규자가 있거든요. 불향, 메아리가 없어, 울림이 없는 산골짜기 한 장소. 이것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이거를 우리가 받기를 원한다. 이게 칠현녀 삼반물이에요. 근데 이 제석천왕 궁중에는 없는 게 없는데 이건 없어요. 제석궁중에. 그냥 무진 보물이 있는데, 이 삼반물은 없어요. 뿌리 없는 나무 한 그루, 햇빛 그늘 안 드는 땅 한 조각, 소리쳐도 메아리 없는 골짜기 하나, 이건 없어요. 그러니까 제석천왕이 말하기를, 일체소수는 아실유지하되(一切所須 我實有之), 일체 다른 바라는 바는 내가 다 있지만은, 약삼반물(若三般物)은 아실무득(我實無得)이라. 나는 이걸 가지고 있지 않다. 그런데 이 마음이라는 거는 뿌리 없는 나무, 뿌리 없는 나무, 불생불멸 무생실법, 생멸 없는 진실법, 불생불멸 무생실법이란 말이에요. 또 없을 무, 날 생, 진실할 실, 법 법, 생멸 없는 진실법, 이게 마음이다. 또 이 마음이라는 것은 뭐 아침에 태어나서 저녁에 죽고 그게 아니고 음양이 없어요. 태어나는 거는 양이고 죽는 건 음인데, 죽고 사는 게 없어. 또 이 마음이라는 거는 고함을 지른다고 해서 소리가 나고, 고함을 안 지른다고 해서 소리가 나고 그런 게 아니에요. 이게 소리가 났다 안 났다 울렸다 안 울렸다, 그런 게 아니에요. 그게 규불향산곡, 소리쳐도 메아리 없는 산골짜기 하나. 이게 이제 자성 청정심인데, 자성 청정심. 자성 청정심은 뿌리 없는 나무와 같고, 햇빛 그늘 안 드는 나무와 같고, 메아리 없는 산골짜기와 같아서 세월의 지배를 받지 않고 오고 가는 데 영향을 받지 않아요. 이거를 딱 하나 이렇게 찾고만 있어도, 그 찾는 순간에 죄는 하나도 안 지어요. 마음을 찾는 순간에 누구 욕도 안 하고, 누구 원망도 안 하고, 뭐 누구 거 뭐 해칠 생각도 안 하고, 그러니까 마음을 딱 이렇게 찾는 그 순간만 하더라도 죄는 하나도 안 짓고, 번뇌망상은 싹 사라지니까 거기에 한없는 복이 생기는 거예요. 못 깨달아도 깨달으려고 하는 노력만으로도 죄는 사라지고, 지혜는 드러나서 한량없는 복을 거기서 받게 된다. 그러면 오래 안 해도 돼요. 사람에 따라서 0.5초만 해도 다 깨달아요. 왜냐하면 자기 있는 거 자기가 찾는 거니까, 그 어떤 사람은 지나가다가 경 한마디 읽는 것만으로 그냥 깨달았어요. 그래서 이 수행이라고 하는 것은 익히는 게 아니라 깨닫는 거예요. 깨닫는 게 수행이지, 뭘 실습을 하고 연습을 하고 그게 아니에요. 수행은 연습이 아니다. 오늘은 오늘 깨닫고, 내일은 내일 깨닫고, 모레는 모레 깨닫고, 항상 깨달으라는 거지. 연습이 아닌데 왜 그러고 자꾸 자꾸 오래오래 해야 되느냐. 이게 번뇌망상이 너무 깊어서 그 마음을 찾는 청정한 힘이 그 번뇌망상을 확 녹이는 힘이 부족해가지고 그래요. 그게 예를 들면 뜨거운 물이 있는데, 그 뜨거운 물은 분명히 뜨거운 건데, 이 얼음이 워낙 넓고 깊으면 뜨거운 물 한 바가지 얼음에 부어봐야 얼음을 다 녹일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런데 얼음이 본래 없는 거면 뜨거운 물을 부을 필요도 없는 거예요. 말 한마디 들으면 그냥 다 깨달아요. 옛날 훌륭한 선지식들이 다 그렇게 일언지하에 다 깨달아버렸거든요. 어떤 분은 5년 만에 깨닫고, 어떤 분은 10년 만에 깨닫고, 어떤 분은 평생 닦기만 하는데, 그 닦는 것 자체가 그게 깨달음이에요. 그 생각을 해봐요. 한 10분이라도, 오고 가는 게 이게 무슨 물건인가. 보고 듣는 게 이게 무슨 물건인가. 그 순간에는 번뇌망상이 싹 사라지고 일체 죄를 짓지 않아요. 그리고 거기서 그대로 빛을 발하기 시작하거든요. 그렇게 하고 있는데 스스로 이제 망상이 계속 연결돼 있기 때문에 그걸 본인이 모를 뿐이다. 그럼 이제 마음을 딱 찾고 나면 다른 물건은 하나도 없고 오직 마음뿐이다. 이제 심외무법(心外無法)이라, <마음 밖에는 아무것도 없다> 이렇게 가르쳐요. 百年三萬六千日 翻覆元來是這漢백년3만6천일 번복원래시자한(法演禪師語錄卷下. 大正藏47. 666中)(법연선사어록권하.대정장47. 666중) 그래서 우리나라의 강원에서 가르치는 교제 중에 선요라고 하는 책이 있는데, 선요. 거기에 보면, 100년 3만 6천일이, 100년 살면 그걸 3만 6천일로 본 거예요. 요즘은 365일이니까 3만 6천 500일인데, 500일을 빼고, 옛날 어릴 때는 1년 360일이라고 그랬어요. 이상하게 365일이라고 안 했어요.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는데. 360일을 100년 하면 3만 6천 일이거든요. 100년 3만 6천 일이, 번복이, 계속 억지락뒤치락 그냥 오고 가고 계속 되풀이하는 걸 말하는데, 되풀이하는 것이, 원래 바로 이놈이다. 시자한(是這漢)이라고 쓰는데 이건 이놈이다. 이놈 바로 이놈. 100년 3만 6천일, 계속 되풀이 되풀이하고 하는 것이 바로 이놈이다. 근데 이게 보고 듣고 오고 가는 게 전부 마음인데, 우리는 이거를 눈이 보고 귀가 듣고 발이 걷는다고 봐서, 물속에 그림자가 비춰졌는데, 그게 물로 안 보고 그 그림자로만 본단 말이죠. 물은 잊어버리고. 그걸 전도몽상이라고 그래요. 그게 비추어진 햇빛이나 달빛이나 사람 모양이 물이야, 그게 물. 이 소리 들으면 바로 깨달아야 되는데, 연못 속에 가서 보이는 게 다 물인데, 물은 못 보고 그 물에 비친 그림자만 본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거 구하려고 연못 속에 들어가요. 들어가면 그림자는 안 보이고 물 뿐이야. 아 이거 참. -아니 누가 박수 치기 시작한 거요. 억지로 따라서 쳤는데 지금. 억지로 따라서. 용기가 대단하시네. 네.- 그러니까 이게 몸도 마음이고, 몸도 마음에 비춰진 그림자니까, 물 없으면 그림자 안 비춰지잖아요. 마음 없으면 이 몸이 없어, 안 보여. 산도 마음이고, 하늘도 마음이고, 듣는 것도 마음, 전부 마음뿐인데, 몸만 보고 산만 보고 사람만 보고 마음을 모른다 이걸 미했다 그래요. 미해서 산다고. 그래서 마음 하나 딱 찾으면 이 몸도 마음이고, 죽는 것도 마음이고, 사는 것도 마음이라. 심외무법이라, 일체유심이라, 마음밖에 법이 없고, 모든 것은 오직 마음이다. 일체유심. 오직 유자, 마음 심자거든요. 심외무법, 일체유심. 근데 봄을 맞이하는데 그 봄이 마음이에요. 마음에 비춰진 그림자가 그게 봄이에요. 여름을 얘기하는데 여름이 마음이요, 가을도 마음이요, 겨울도 마음이에요. 심외무법 일체유심이요. 일체가 오직 마음이요, 이게 이제 해탈이고, 이걸 아는 게 반야거든요. 해탈을 하면 오직 마음이기 때문에 어디에도 걸릴 게 없어요. 다 자유로워요. 입춘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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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도량참법기도] 2월10일 자비도량참법기도 회향 법문
종범스님 2023-01-31
- 祈禱의 實行과 成就(기도의 실행과 성취) - 안녕하십니까. 계묘년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 자비도량참법기도 회향의 법문은 <기도의 실행과 성취>, 기도의 실행과 성취, 이런 제목으로 말씀을 드립니다. 1. 祈禱實行(기도실행) 一念精進 隨順淨心일념정진 수순정심 기도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하느냐. 실질적으로 하는 내용은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아무것도 없는 게 기도하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아무것도 없냐. 일념정진(一念精進), 한 생각으로 계속하는 게 기도거든요. 일념정진. 경을 계속 읽어도 그게 일념정진이고, 부처님의 명호를,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이게 한 생각으로 계속하는 거예요. 그게 기도의 핵심이거든요. 기도라고 하는 것은 이거 생각하고, 저거 생각하고 그게 아니에요. 생각이 하나로 계속되면 그걸 기도라 그래요. 생각이 여러 가지로 왔다 갔다 하면 그건 기도가 아니거든요. 산란이에요. 산란. 기도는 산란과 반대되는 것이다. 이게 기도예요. 그러면 그런 실현을 통해서 무엇을 성취하느냐. 첫째로 청정심으로 돌아가요. 이 돌아간다는 걸 수순(隨順)이라고 하는데, 따를 수, 따를 순. 따라간다. 어디로. 청정심으로. 그러면 청정심이 뭐냐. 마음을 세 가지로 설명을 하는데, 첫째는 중생심, 둘째는 제불심, 제불의 마음, 근본적으로 청정심. 그래서 자성청정심(自性淸淨心)이 있는데, 마음의 본래 자성. 그 마음의 본래 자성을 다 가지고 있는데, 그 본래 자성을 그대로 가지고 있는 상태에서 번뇌망상을 일으키면 그걸 중생이라 그래요. 번뇌망상. 번뇌망상을 전혀 일으키지 않고 지혜광명을 일으키면 그걸 제불이라 그래요. 그런데 그 자성은 번뇌망상을 일으켰을 때도 자성청정심은 전혀 물든 데도 없고 달라진 게 없어요. 또 지혜 광명을 일으킬 때도 전혀 뭐 불어난 것도 없고 달라진 것도 없고. 그래서 불가사의 자성 청정심, 생각할 수 없는 자성청정심이다 이거예요. 그래서 번뇌망상 중생심, 지혜광명 제불심, 자성청정 본원심, 본원, 본래 근원. 기도를 하면 이 번뇌망상 심이 자성청정 본원심으로 돌아가는 거예요. 그게 수순이에요. 수순. 정심으로 수순한다. 그럼 정심수순이 무슨 의미가 있냐. 자성청정 본원심에는 본자구족(本自具足) 본자원만, 본래 수순으로 다 갖춰져 있어요. 그걸 본자구족이라고 그래요. 본래 스스로 구족하다. 또 본래 스스로 다 원만해요. 그리 돌아가는 게 기도예요. 기도는 불시조작이라, 조작을 하는 게 아니에요. 기도는 불시조작. 그럼 뭐냐 수순정심(隨順淨心)이라, 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게 기도거든요. 기도는 뭘 만들어내고 그게 아니라, 수순정심이라, 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것이 기도다. 그럼 이 자성청정 본원정심에는 무엇이 있나. 본자원성(本自圓成) 본자구족. 본래 스스로 원만히 다 이루어져 있고 본래 스스로 원만히 다 갖춰져 있다. 그래서 기도라고 하는 것은 물을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물이 꽉 차 있는 데서 그냥 물을 뜨는 거예요. 요즘 말로 하면, 기도는 물이 어마어마하게 끊임없이 연결돼 있는 수도를 그냥 트는 거예요. 수도꼭지 딱 틀면 물이 나오는 거는, 그 트는 데서 물이 나오는 게 아니라 본래 물이 거기 있었던 거예요. 물이 거기 없었으면 아무리 꼭지를 틀어도 안 나와요. 전기도 마찬가지. 전기가 여기 와 있기 때문에 작동을 딱 하면 불이 오지, 전기를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이미 여기 와 있는 전기를 그냥 쓰는 거예요. 근데 왜 기도가 필요하냐. 평소에는 그 전기를 쓸 줄 몰라요. 그래서 맨날 어둡다고 하면서, 그 틀 줄 몰라. 그런데 어둠이라는 건 없고, 밝음만 나타나면 어둠은 없다. 그거죠. 물은 항상 차 있다. 꼭지만 열면 물은 내려온다. 이런 거거든요. 그래서 기도는, 꿈을 깨는 것도 마찬가지인데 꿈 깨는 것 같은데, 꿈을 꾸다가 어떡하면 꿈과 다른, 꿈은 망상의 세계인데, 꿈에서 깨는 건 실상의 세계란 말입니다. 그러면 그 꿈에서 꿈을 만드는 건 기도가 아니다. 꿈을 깨는 게 기도다 이 말이지요. 꿈에서 꿈꾸면 그건 망상에 망상을 더 하는 거예요. 그래서 꿈을 딱 깨버리면 그게 기도인 거예요. 그럼 꿈을 깨면 그 새로운 세계를 꿈속에서 만들었느냐. 그게 아니고 있는 세계를 그냥 본 거예요. 있는 세계를. 꿈 깨가지고 뭐 그걸 지금 꿈 깨서 본 세계를 새로 만들어내고 그게 아니라, 그냥 있는 세계를 꿈을 깨는 걸 통해서 그냥 본 거죠. 이제 그런 논리가 기도는 일념 정진이요, 수순정심이다. 청정심으로 돌아가는 거다 이거죠. 근데 이게 우리가 왜 모자라는 게 있느냐. 있는 거를 망상으로 가려서 보지를 못해서 그래요. 그래서 망상 없이 본래 갖추어진 본성 세계를 설명하는 게 화엄경인데, 그 화엄경에는 일미진중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이라, 한 티클 속에도 시방이 다 있어요. 또 무량원겁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라, 이 한 찰나 순간에도 무량겁이 다 있는 게 그게 원융원통(圓融圓通)이라. 원융이라고 하는 것은 하나가 전체가 다 되고, 전체가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여기 집이 있는데, 저 기둥 하나하나가 자리를 움직이지 않아요. 그런데 저 기둥 하나하나가 전체 집이 되는 거예요. 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하나가 전체가 되는 거 그걸 원융이라고 그래요. 그 티끌 하나가 움직이지 않고 전체가 다 되는 게 그게 원융이거든요. 그러니까 그 본성에서 돌아가 보면 이루어지지 않은 것이 하나도 없어요. 그게 원통이거든요. 원융원통. 그래서 지금 눈앞에 나타난 것만 이루어진 게 아니라, 눈앞에 나타나지 않은 것도 다 이루어진 거예요. 그런데 이제 번뇌망상이 눈을 가려서 이루어졌다 안 이루어졌다 이렇게 하는 거죠. 그러니까 이제 기도를 하게 되면 청정심으로 돌아가서 본래 갖추어지던 걸 하나하나 보게 돼요. 또 본 대로 쓰게 돼요. 이걸 수분 수용이라고 그럽니다. 분에 따라서, 나눌 수, 나눌 분. 분에 따라서 수용한다, 받아 쓴다, 그런 거거든요. 근데 막상 기도를 해보면 어떤 일이 벌어지느냐. 아주 해괴망칙한 일이 벌어져요, 기도를 하다 보면. 과거에는 생각나지 않던 게 전부 생각이 기어 올라와요. 또 지루하기가 그렇게 지루하고, 답답하기가 그렇게 답답하고, 재미라고 하는 건 티끌만큼도 없고. 그게 기도입니다. 왜 그러냐. 그게 온갖 번뇌망상과 온갖 생활 습관이 온몸에 꽉 잡혔는데, 그거 하나도 보이지도 않고 하나도 잡을 수도 없는데 꽉 찬 거예요. 그게 번뇌망상이거든요. 마음이란 그런 거예요. 하나도 없는데 꽉 차 있는 게 마음이거든요. 근데 그 번뇌망상의 티끌들이 평소에는 어디에 박혀있는지 어디에 들어있는지 몰라요. 그런데 이걸 이제 절을 한다. 그럼 다른 거 안 하고 절만 하니까 막 기어 올라오는 거에요, 이게 그냥. 부처님의 이름을 계속 부른다, 그러면 다 막 그렇게 기어 올라오고. 그거 뭐 같으냐 하면 평소엔 먼지도 없고 뭐가 없었는데, 대청소를 하려고 들면 온갖 치울 것도 많고 먼지가 투성이로 많이 나오거든요. 그거하고 똑같아요. 그런데 그 지루하고 생각이 막 기어 올라오고 복잡하고 답답하면 어떻게 해야 되냐. 그거 하나 신경 쓰시면 안 돼요. 그 기도가 안 되는 거예요. 생각이 올라오면 그걸 환영한다든지, 응대를 하지 말아야 돼요. 생각이 올라오는 거 절대 그거 인식도 하지 말고, 응대도 하지 말고, 환영하지 말아야 돼요. 그냥 하던 일만 계속하면 그게 일념정진이에요. 일념이라는 건 다른 생각이 안 올라와서 일념이 아니라, 하던 걸 계속하는 게 한 생각이거든요. 무슨 생각이 올라와도 ‘이 녀석이 또 왔네’, 응대할 거 없어요. ‘빨리 가’, 내쫓을 것도 없어요. 그건 허락 안 받고 올라온 거기 때문에, 응대 안 하면 허락 없이 또 나가요. 언제 왔다가 언제 사라지고, 언제 왔다가 언제 사라지고, 그러는 게 그게 번뇌망상이거든요. 그러니까 계속해요. 그게 일념이에요. 그 일념을 잘못 생각하면 망상도 하나도 안 일어나고, 기억도 하나도 안 일어나고, 꿈도 하나도 안 꾸고. 그런 건 없어요. 아무리 허공이 맑아도 먼지 없는 허공은 없다. 먼지가 아무리 있어도 그냥 청정 허공이에요. 번뇌망상이 아무리 일어나도 자성 청정심은 그대로 자성 청정심인 거예요. 평소에는 그 망상심에 계속 끌려다녔는데, 기도를 할 때는 일어나거나 말거나 한 생각으로 계속 나아가는 게 기도다 이거죠. 그러면 어떻게 되느냐. 망상은 다 사라져요. 자성 청정심이 그대로 드러나요. 그러면 하나도 없는 가운데에도 모든 것이 다 구족하고, 또 많이 있는 가운데에도 장애가 하나도 없고. 그래서 무장무애 원만성취라는 게 그런 거에요. 아무리 많은 것이 있어도 그 많은 것에 서로 걸림이 없어, 장애가 없어, 그게 무장무애거든요. 그게 이제 원만성취라. 2. 祈禱 成就(기도성취) ① 加被成就(가피성취)一切罪障 皆得清淨 一切衆苦 悉得解脫 일체제장 개득청정 일체중고 실득해탈一切煩惱 皆得斷除 隨念往生 諸佛淨土 일체번뇌 개득단제 수념왕생 제불정토(慈悲道場懺法卷六.1474년 간행)(자비도량참법권6. 1474년 간행) 그런데 이 성취하는 과정은 여러 가지 단계를 거쳐요. 첫 번째는 가피 성취(加被成就)라고, 가피를 입게 되는데, 겁이 많았는데 기도를 하다 보면 그 무섭고 겁나는 게 싹 없어져요. 그게 가피에요. 그리고 기도를 하다 보면 자기가 늘 불렀던 것이 꿈에 나타날 수가 있어요. 내가 늘 바라보고 관세음보살을 불렀는데, 꿈에 그 관세음보살이 나한테 왔어. 그런 게 또 일종의 가피거든요. 자기가 기도했을 때 바라본 그 부처님 모습이 걸어와요. 그게 이제 첫 번째 느끼는 가피 현상이에요. 그리고 어디를 갔는데, 가기 전 밤에 꿈을 꿔서 보았던 부처님이 가보니 그 법당에 떡 앉아 계셔. 신기해요, 보면. 이 가피는 앉아있던 부처님이 움직이는 모습을 본다. 그게 이게 가피 성취예요. 그럼 무슨 일이 벌어지는가. 마음이 굉장히 좋아요. 기뻐. 아주 쾌활해. 그리고 원한심이라든지 공포감이라든지 이런 게 사라지는 거예요. 공포감이라든지. 그리고 그날에는 몰랐는데 조금씩 조금씩 자족감이 생기기 시작해요. 자족감. 그게 뭐 두려움이 있고, 부족함이 많고, 원망이 많고, 물론 그게 다 내가 스스로 자성청정심을 멀리 등지고, 번뇌망상심에 지금 계속 따라가는 현상이거든요. 자성청정심에서 딱 보면 만나고 헤어지고 죽고 살고 하는 게 그게 다 자성청정심 수연상이에요. 자성청정심 인연을 따르는 모습이다. 있고 없고, 만나고 헤어지는데 거기 뭐 생각을 두고 매일 필요가 전혀 없는 자성청정심 수연 현상인데, 인연 따르는 현상인데, 이제 번뇌망상으로 그걸 취하고 버리고 집착을 하니까, 어리석은 결과물이 고통이에요. 고통은 다 어리석은 결과물이다. 어리석지 않은 고통은 없거든요. 죽음을 딱 보면 죽음이 없어요, 자성청정심으로. 꿈속에서 보던 건 꿈 깨면 없어요. 그러니까 기도는 뭘 만들어내는 게 아니라 본래 있던 걸 찾는 거다. 두려움이 본래 없거든요. 근데 없는 데로 돌아가는 거예요. 근데 왜 두렵냐. 망상심으로 두려운 거예요. 원망이 그게 없는 건데, 원망이라는 건 남한테서 생기는 거잖아요. 그럼 내가 남을 어쩔 수 없는데, 어쩔 수 없는 걸 내가 바랬기 때문에 원망이 생겨요. 말은 이렇게 하지만, 원망 안 하는 거 쉬운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내가 나면 어쩔 수 없는 거예요. 그런데 어쩔 수 없는 걸 내 감정대로 바란단 말이에요. 기대를 해요. 거기서부터 고통의 싹이 심어지는 거예요. 싹이 심어지는 게 아니라, 씨앗이 심어져서 고통의 싹이 나오는 거죠. 그러니까 그 원망, 공포, 불안, 죽음이 없는데, 불안이 어디 있어요. 죽음이라는 건 이 형상을 바로 보지 못하는 미혹한 감정이거든요. 형상이라는 죽음만 딱 보고, 죽음이 없다는 걸 몰라. 그러니까 “할머니가 죽으면 어디로 가느냐?” 참 속 터지는 소리에요. 속 터지는 소리. 그럼 “꿈 깨면 어디로 가느냐?” 물어봐요. 꿈 깨면 어디로 가느냐. 꿈꾸던 사람이 꿈 깨면 어디로 가는 거예요? 꿈이라는 자체가 본래 없었던 거기 때문에, 오고 가는 게 없죠. 없는 데서 있는 걸 만드는 것이 꿈이기 때문에, 그냥 본래 자리로 돌아가는 게 그게 죽음이지, 삶과 죽음이 본래 다른 게 아니다. 이런 것에 점점 가까워지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자비도량참법 의식문을 보면, 가피성취가, 일체제장이 개득 청정(一切罪障 皆得清淨)하고, 일체 모든 죄업과 장애가 다 청정해진다. 이게 가피거든요. 그다음에 일체중고를 실득해탈(一切衆苦 悉得解脫)하고. 여러 가지 괴로움을 다 벗어나요. 그리고 일체 번뇌를 개득단제(一切煩惱 皆得斷除)하고, 온갖 번뇌 망상을 다 끊는다, 이게 가피 성취예요. 그리고 수념왕생 제불정토(隨念往生 諸佛淨土)라, 생각에 따라서 극락세계, 도솔세계, 무슨 동방약사여래세계, 어느 불찰이든지 다 생각해서 다 간다. 이게 기도 가피로 이루어지는 성취거든요. ② 熏習成就(훈습성취)掬水月在手 弄花香滿衣국수월재수 농화향만의(法演禪師語錄卷中)(법연선사어록권중) 그다음에는 기도를 통해서 훈습성취(熏習成就)가 있는데, 연기 쏘일 훈자, 익힐 습자. 대승기신론이라는 편에서 번뇌훈습, 진여훈습(眞如薰習). 청정 자성을 자꾸 익히면 그게 진여훈습이고, 참 진자. 번뇌망상을 계속 일으키면 그게 번뇌훈습이에요. 익히는 거예요. 익히는 게 중요해요. 이 몸은 익힌 대로 반응해요. 몸은 생각하고, 움직이고, 말하고, 이게 몸인데, 이게 생각을 익혀서 생각을 저장해 놓지 않으면, 말할 수 없고, 볼 수 없고, 행동할 수 없어요. 그래서 말하고 행동하는 건 그 사람이 생각이 지금 나오는 거지, 생각 없으면 절대로 말도 못하고요. 그냥 어버버라는 말이 있잖아요. 왜 어버버 하냐. 그 생각이 정리되지 않은 거예요. 왜 아무 행동도 못하냐. 이걸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안 서는 거다. 왜 그러냐. 저장된 게 없어요. 그래서 저장은 어떻게 되냐. 이 훈습을 통해서, 훈자도 익힌다는 말이고, 연기를 쏘이다 보면 그 연기가 점점 물체한테 들어가잖아요. 그걸 기신론에서는 옷으로 비유했는데, 옷이 있는데 그 옷에 다 향을 피워서 향기를 자꾸 피우면, 그 옷에 향기가 배잖아요. 그런 걸 훈습이라고 해요. 익힐 훈, 익힐 습. 기도하다 보면 내 몸에 청정한 기운이 다 훈습이 돼서, 몸에 청정한 그걸 역(力)이라고 하는데, 역, 청정력, 청정한 힘이 훈습이 돼서, 생겨가지고 뭐를 보든지 청정력이 나타나게 돼요. 청정력이 훈습이 돼 있으면 청정력이 나타나요. 그러니까 이 몸에 습관을 익히면 습관대로 나타나는 거예요. 습관이 안 익혀지면 절대 안 나타나요. 그래서 왜 아이들이 집안일을 안 하냐. 집안일을 해야 한다는 그런 훈습이 전혀 안 된 거예요. 그래서 일할 것이 앞에 있는데, 어머니가 볼 때는 있지만, 애들이 볼 때는 없는 거예요. 있다고 다 보는 게 절대로 아니에요. 그걸 볼 수 있는 훈습이 있어야 봐요. 그런데 이 기도를 통해서 그 좋은 청정한 힘을 자꾸 익히게 되니까, 그것이 훈습성취다. 한 시간 기도를 한 사람하고, 한 시간 기도 안 한 사람하고는 몸에 익힌 게 전혀 달라요. 한 시간 싸움을 한 사람하고, 한 시간 가만히 그냥 집에 앉았던 사람하고, 한 시간 기도한 사람하고는 익힌 바가 전혀 달라요. 그 몸에 익혀지면 그게 나오는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어릴 때부터 몸에 익혀주는 게 부모예요. 익혀주지 않으면 행동을 못해요. 근데 크면 하겠지. 천만에 말씀. 안 해본 건 아무리 나이가 많아도 못합니다. 정말 신기해요. 내가 알던 정신과 의사가 있었는데, 부부가 다 의사거든요. 근데 이제 학술 토론해 보면 남녀가 똑같고 뭐 인권이 어떻고, 행복이 어떻고 하는데, 얘기 들어보면 그 남자 의사는 집에 가면 아무것도 안 해요. 똑같다는 건 말뿐이에요. 그래서 그 부인이 토론장에 있다가도 나가기에, ‘왜 나가냐’고 하면, ‘우리 영감 밥 차려줘야 된다.’고 꾸역꾸역 나가고 있어요. 그럼 왜 그렇게 남자들은 집안일을 못하냐. 몸에 안 익혀서 그래요. 몸에 안 익힌 거예요. 그러고 뭐 평소에는 무슨 사랑이 어떻고, 상대편을 이해를 해주고 어쩌고 그러는데, 그 자녀들 말 들어보면 사랑할 줄 전혀 모른대요. 말 한마디 안 한대요, 집에 오면. 왜 이렇게 학문하고 생활하고 다르냐. 몸에 익힌 게 없어요. 학문은 책 보고 논문 쓰고 발표하고 토론하고 그런 것만 익혔기 때문에 그런 건 잘하죠, 아주. 안 익힌 건 못해요. 그래서 이 몸에 익히는 게 그렇게 중요해요. 이게 훈습이다. 훈습. 그래서 기신론에서 훈습을 얼마나 자세히 설명했는지, 염불을 쭉 하다 보면 그게 진여 훈습인데, 청정심으로 돌아가는 훈습이다 말이에요. 그런게 있어요. 그거 흡습에 대해서 오조법연선사(法演禪師)라고 하는 분의 어록이 있는데, 거기 보면, <익힌 건 작게 익혔는데 얻은 건 많이 얻는다.> 뭐 이런 얘긴데, 국수에 물 뜰 국자가 있거든요. 물을 뜨면 뜨기는 물만 떴는데, 월계수하고 달이 자기 손에 있다. 국수에 월계수(掬水月在手)라. 물을 한 바가지 떴어. 근데 뜨기를 물을 떴어요. 그런데 물을 이렇게 쳐다보니까, 그 안에 달이 들어 있어. 참 기가 막힌 거잖아요. 그래서 부르기는 뭐 부처님 이름 몇 번 불렀는데, 거기에 어마어마한 공덕이 들어왔단 말이에요. 그리고 농화에 향만의(弄花香滿衣)라. 희롱할 롱자인데, 희롱이라는 건 가까이 하는 거예요. 좋아하는 거예요. 좋아하고 가까이 하고. 뭘? 꽃을. 농화. 꽃을 좋아하고 꽃을 가까이 했을 뿐인데, 내 옷을 이렇게 보니까 옷에 향기가 가득해. 이게 농화향만의라고. 옷에 향기 배는 건 생각도 안 했어요. 그냥 꽃이 좋아서 꽃을 쳐다보고 꽃을 가까이 하고 했는데, 옷에 향기가 가득했더라. 달 보는 건 생각도 안 하고, 그냥 물을 한 바가지 떴는데 그 물속에 달이 환하게 들어있다. 그게 이 훈습을 통해서 얻어지는 결과거든요. 그래서 기도라는 거는 몸에 좋은 습관을 익히는 거예요. 몸에 좋은 습관. 뭔가 공덕의 습관, 인욕의 습관, 지혜의 습관. 근데 막상 하려면 재미 어지간히 없어요. 그러니까 재미없어도 중단하지 말고 계속하는 게 이게 일념이다. 산란심으로 빠져서 이게 망념으로 돌아가면 기도는 안 된다 이거에요. 망념에 흔들리지 말고 일념으로 나아가라. ③ 圓滿成就(원만성취)掘地得天 漸增歡喜굴지득천 점증환희擧首見天 本來在天거수견천 본래재천 그러면 원만 성취(圓滿成就)가 있어요, 기도에. 아주 원만히 성취하는. 그런 원만 성취인데 원만 성취는 모자라는 거 하나도 없는 게, 또 이 장애가 하나도 없는 게, 부족한 것도 없고 장애도 없고, 그게 원만구족 무장무애 이런 거거든요. 원만구족하고 무장무애하다. 그런데 원만구족 무장무애를 비유로 설명한 게 있는데, 원만 성취되기 전에는, 비유로 말하자면, 굴지득천(掘地得天)이라, 팔 굴자가 있고, 땅 지자가 있으니까, 굴지를 해요. 굴착기로 땅을 파. 그러면 뭐가 나오냐. 거기서 하늘이 나와요. 땅을 한 삽 파면 한 삽 크기만큼 하늘이 나와. 두 삽을 파면 두 삽 크기만큼 하늘이 나와. 이걸 굴지득천이라고 해요. 땅을 파서 하늘을 얻는다. 그럼 평생 굴을 파면 어떻게 되냐. 그 땅에서 판 굴 공간만큼 하늘을 얻는 거예요. 그게 전부 굴지득천이에요. 그럼 기도하기 전에는 이제 땅 파서 하늘 얻는 식으로, 요거 조금 해서 요거 조금 얻고, 요거 조금 해서 요거 조금 얻고, 이 모양으로 살았거든요. 그런데 이 원만 성취라는 것은 뭐냐. 거수견천(擧首見天)하니, 땅 파서 공간이 조금씩 조금씩 늘어나는 거에 아주 점증환희(漸增歡喜)라, 점점 기쁨을 느꼈는데, 그러다가 머리를 딱 들어서, 밑으로 내려다보고 땅을 파는 게 아니라, 머리를 들어서 딱 보니 전체가 하늘이더란 말이에요. 이게 거수견천이에요. 땅 파다가 머리를 딱 들어서 하늘을 쳐다보니 하늘이 뭐 그냥 없는 데가 없다. 그러고 가만히 보니 본래재천(本來在天)이라, 본래 내가 하늘에 있었어. 그러고 보니까 하늘 없는 데가 없다 그 얘기에요. 그릇 속에도 하늘이 있고, 물건 속에도 하늘이 있고, 내 몸속에도 하늘이 있고, 산속에도 하늘이 있고. 그래서 뭐든지 부숴보면 하늘이 나오는데, 부숴야 나오는 게 아니라 본래 하늘이다. 그런 거를 이제 원만 성취라고 그래요. 기가 막히지. 깨닫기 전에 사는 거는 땅 파서 거기서 나오는 하늘 보고, 조금씩 조금씩 즐거워했단 말이에요. 그런데 머리 딱 들어서 하늘을 전체를 쳐다보니까 그냥 본래가 전체가 하늘이고, 본래가 내가 하늘 속에 있었고, 나도 하늘이고, 나 아닌 것도 하늘이고. 이런 거를 이제 원만구족 원만성취 무장무애 해탈경계 이렇게 얘기를 해요. 원만구족 원만성취 무장무애 해탈경계. 이곳으로 이제 가는 행위를 기도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이 기도를 통해서 내가 뭘 바랬는데 왜 안 이루어지냐’,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그런데 이루어지는 것이 아주 고통일 수가 있어요. 이루어지는 게. 어떤 사람은 머리가 너무 좋아서 고통이 생기고, 어떤 사람은 운동을 너무 잘해서 고통이 생겨. 그래서 이게, 해서 얻는 걸 유위법(有爲法)이라고 하는데, 유위법, 함이 있는 걸 통해서 얻어진다. 근데 이거는 이루어지면 좋고 안 이루어지면 더 좋은 거예요. 이게 기도로서 세간을 보는 안목이에요. 어떤 사람이 아들이 감옥에 갔는데 그때 전쟁이 났어. 근데 감옥 안 가는 사람들은 전쟁에 죽었는데 감옥 간 사람은 전쟁 통에 안 죽었어. 그러니까 이게 이루어진 게 더 나쁠 수도 있고, 안 이루어진 게 더 좋을 수도 있고. 그러니까 현상적으로 뭐가 이루어지든 안 이루어지든 그건 망상과 같아서, 망상이 일어나든 사라지든 관계하지 말 듯이, 되고 안 되는데 전혀 관계를 하지 말아야 그게 기도가 돼요. 되고 안 되는데 생각을 하는 건 그게 망상이에요. 망상. 그래서 생각이 일어나든 생각에 안 쫓아가야 하듯이, 되든지 안 되든지 거기에 쫓아가지 않아야 기도가 되는 거예요. 이게 오늘 좋은 게 내일 나쁠 수도 있고요. 그런 거 있거든요. 그러니까 언제든지 좋은 것이 나빠지지, 나쁜 건 더 나빠지지 않아요. 근데 사람은 좋은 거 찾다 나쁜 거 만나거든요. 좋은 거 안 찾으면 나쁜 거 안 만나요. 그게 인생이에요. 좋은 거 찾다가 나빠져가지고 나중에는 운다. 그게 인생은 구하다 죽는 거다. 인생은 통곡하며 죽는 거다. 통곡을 해요. 그런데 통곡을 왜 하냐. 자기 스스로 엉뚱한 걸 구했기 때문에. 이 몸 오래 살아봐야 좋은 거 없는데, ‘오늘 죽어라’ 그러면 누가 좋아하겠어요. 이상하죠. 삶이 고통이라고 그러는데 그러면 ‘오늘 죽어라’ 그러면 아 싫어해요. 그래서 극락세계가 좋다고 하는데도, 오늘 극락 가라고 그러면 안 간다고 그래요. 그래서 둘이 있을 때도 자기가 먼저 안 가려고 그러고, 자기는 뒤에 간다고 그래요. ‘당신은 죽어서 극락세계로 가고, 나는 뒤에서 나무아미타불’. 이런 게 있거든요. 그게 이제 중생심이에요. 인간은 바라다가 그랬는데 죽으면서는 통곡을 한다. 그 통곡이 어디서 나왔느냐. 쓸데없는 걸 구했기 때문에. 쓸데없는 거 안 구하면 통곡이 나올 수가 없거든요. 그거 얻어봐야 쓸 데가 없는데, 자꾸 얻으려고 그래요. 얻어봐야 아무 쓸 데가 없어. 그런데 쓸데없는 걸 자꾸 얻으려고 그런단 말이야. 三界猶如汲井輪 百千萬劫歷微塵 삼계유여급정륜 백천만겁역미진此身不向今生度 更待何生度此身차신불염금생도 갱대하생도차신(釋門儀範上,莊嚴念佛)(석문의범상, 장엄염불) 그래서 ‘빨리 기도를 잘해서 깨달아가지고 이 몸을 제도하라’ 그런 가르침이 있는데, 시식할 때마다 맨날 장엄염불로 하는 가르침인데, 삼계유여급정륜(三界猶如汲井輪)이라. 삼계라고 하는 것은 나고 죽는 그런 일이 삼계인데, 나면 죽고, 죽으면 나고, 나면 죽고 하는 것이 급정륜이라고 그러는데, 옛날에 수도 시설이 없을 때 깊은 우물 속에서 물을 떠내는 바가지가 있어요. 그걸 나는 충청도에서 타레박이라고 그랬는데, 국어사전에는 두레박이라고 돼 있더라고. 충청도는 타레박이라고 했어. 타레박에다 물을 준다. 국어사전에는 두레박이라고. 그 두레박이 둥그렇거든요. 물 뜨는 둥그런 두레박, 그게 우리 인생이다. 그래서 푹 집어넣어서 물이 떠지면 올라오잖아요. 또 비면 또 내려가잖아요. 또 올라오잖아요. 이렇게 죽었다, 살았다. 우물의 물들은 두레박처럼 올라갔다 내려갔다. 이게 삼계유여급정륜이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백천만겁역미진(百千萬劫歷微塵)이라. 백천만겁, 그 진흙 티끌과 같은 겁수를 지나도 끝이 없다. 났다 죽었다 하는 일이 끝이 없다는 거죠. 차신불염금생도(此身不向今生度), 이 몸을 금생, 이 몸 죽기 전에 제도를 해서 그 청정심 원만구족한 세계로 돌아가지 않으면, 갱대하생도차신(更待何生度此身), 다시 어느 생을 기다려서 이 몸을 그 원만구족한 청정세계로 가게 할 것인가. 그런 가르침이 있는데 만날 하는 거예요. 만날. 근데 이 번뇌 망상이 계속 습관화돼 있어서, 습관은 이게 본다고 듣는다고 바꿔지는 게 아니에요. 자기가 새롭게 익혀졌을 때 그게 없어져요. 그러니까 부모들이 조심해야 되는 게, 책 공부시킨다고 인생 공부가 되는 게 아니에요. 인생 공부는 몸으로 익히는 거예요. 책 공부는 머리로 익히는 거잖아요. 그 머리로 알아도 몸이 안 움직여. 그러니까 기도하면 좋다는 말은 들어도 안 돼. 그러니까 이걸 이렇게 기회를 만들어서 이렇게 순서를 정해가지고 하는 건 아주 중요한 거죠. 그러나 재미는 없어. 그렇지만 재미없는 걸 할 때 거기에 이렇게 어마어마한 이익이 있으니까, 안 하면 어떻게 하겠는가. 방법이 없어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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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하례법회] 1월29일신년하례법회 법문
회주 계호스님 2023-01-29
안녕하세요. 올해 음력 일월하고 양력 일월하고 나란히 갔습니다. 왜냐하면 윤년이, 윤달이 2월달이기 때문에 똑같이 가서, 자비도량참법기도에 여러분들하고 세배를 같이 하게 됐습니다. 그전에는 더 일찍 했었죠. 우리는 네 번의 설을 쇱니다. 음양의 설이 있고 절기의 설이 있는데, 양력 1월 1일 하고, 음력 1월 1일은 음양의 설이고, 그다음에 절기의 설은, 동지 지나면 나이 하나 더 먹는다는 말씀 들어보셨죠. 100세 먹은 분은 옹심이를 100개 잡숴야 됩니까, 10개 잡숴야 됩니까? 십진법에 따라서 한 백 살이 그냥 열 개라고 생각하면 되고, 우리는 일곱 개면, -이제 밥 먹어야 되는데-, 일곱 개만 먹으면 되고, 오십 세 분은 다섯 개만 드시면 돼요. 너무 많이 드시면 괜히 잘 살겠다고 해가지고 먹었는데 목에 안 넘어가서 숨 못 쉬면 큰일 나잖아요. 그래서 절기에 동지가 있고, 입춘이 하나 남았죠. 이제 입춘도 며칠 있으면 오고, 또 이제 봄이 시작하는데, 이렇게 설을 잘 쇠시고. 올해는 무슨 해죠? 토끼. 검은 토끼해죠. 그래서 사람들이 검은 옷을 많이 입나 봐요. 겨울에 뭐 잠바고 뭐고 보면 그렇게 검은 옷이 많더라고요. 그래서 어쨌든 검은 토끼든지, 흰 토끼든지 상관없이 토끼의 지혜로운 기지, 판소리에 별주부전이 있죠. 거기에 보면 아주 절체 위기에 빠져 나가서 사는 내용이 있어요. 토끼의 지혜로움과 아주 날렵하게 잘 뛰는 모습을 우리는 배워가면서 1년 내내 무탈하고. 또 살아가면서 내 업이 가벼워야지만이 나쁜 일이 생기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번에 여러분들이 자비도량참법 기도를 했는데, 참회가 이참(理懺)도 있고 사참(事懺)도 있습니다. 이치로 참회하는 거는 우리가 이제 참선을 한다든지, 내 죄가 무엇인가 하고 이제 마음속으로 생각하는 거고, 사참이라는 거는 절을 한다든지, 그다음에 이제 주력을 한다든지 여러 가지로 참회하는 방법인데, 지금 자비도량참법은 인과법의 참회법이에요. 그래서 십팔계 죄 지은 업을 참회하고, 그다음에 10권을 갖다가 육도사생법을 같이해서 참회하는 내용인데, 참회를 오늘 몇 권까지 하셨어요? 5권까지. 많이 하셨네요. 그럼 어느 정도 업장은 다 없어질 것 같습니다. 내 업장이 없어지면요, 남의 흉을 안 봅니다. 내 업이 지중하니까 자꾸 볼 게 없으니까 흉을 보는 거예요. 볼 게 없으니까 자꾸 탐심 부리고, 볼 게 없으니까, 할 게 없으니까 자꾸 욕심도 부리고, 어리석고. 그래서 우리는 탐욕의 불은 보시의 물로 끄고, 또 이 분노는 인욕으로서, 인욕의 물로 끄고, 또 어리석음은 지혜의 물로 꺼야 되겠죠. 그래서 우리는 삼계가 화택이라 그랬습니다. 살아가는 게 다 이렇게 불타는 지옥과 같다 했는데, 이 모든 살아가는 게 사실은, 사바세계는 어쩔 수 없지만, 그래도 감인의 세계예요. 그래서 저기 하동산 스님께서는 좌우명을 감인대(堪忍待)라고 했습니다. 견디고 참고 기다려라. 그러다 보면은 어쨌든 우리 마음속에 악이 없으면은 그대로 선이잖아요. 그렇죠. 나쁜 행동을 안 하면 선행이고, 나쁜 행동을 자꾸 하면 그대로 악행이에요. 그래서 되도록이면 좋은 선업을 가지고 있으면, 선행만 하시면은 나쁜 일은 생기지 않습니다. 남을 모함하고 자꾸 뭘 더 가지려고 하니까 자꾸 나쁜 일만 생기는 거예요. 그러니까 욕심을 비우고 마음을 비우면 좋은 일만 생기고, 나보다 남을 위하는 마음 그리고 모든 사람들을 위하는 마음만 생기면은 세상에 나쁠 것이 하나도 없습니다. 자기가 짓고 자기가 받는 것이기 때문에, 누가 받으라고 만들어준 것도 아니고, 누가 지으라고 한 것도 아니에요. 자업자득이란 말 들어보셨죠. 살아가면서 자업자득, 이렇게 좋은 업을 지으면 선업을 받는 거예요. 우리는 되도록이면 기도하는 사람들은 내 업장에 바이러스를 없애는 게 그게 치유예요. 다른 게 치유가 아니고 그러니까 자꾸 업장소멸 기도를 하면서 점점점점점점 좋은 생각하시면은 세상이 극락이에요. 사바세계가 아니고. 좋은 세계예요. 그러니까 그 좋은 세계를 우리 신도님들은 함께 누리면서, 너도 나도 스님도, 혹은 아기 부처님, 어른 부처님, 학생 부처님, 그다음에 청소년 부처님, 다 부처님이잖아요. <절로 절로 저절로>라고 하셨죠. 저절로 잘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막 하려고 애써 하지 마시고, 그냥 살아가는 대로 가면은 살아집니다. 우리가요, 젊었을 때는 “빨리 나이 좀 먹어가지고 어른 노릇해야 되는데”, 어쩌다 보니까 이렇게 빨리 지나가더라고요. 그러니까 나이가 많은 분들은 점점 빨리 지나가고, 나이가 적은 사람은 느리게 가는 거예요. 그러니까 우리는 부처님의 말씀을 그대로 따르면서 부처님처럼 행동하고, 부처님처럼 수행하고, 부처님처럼 말씀하면은 그대로 부처님입니다. 맨날 욕만 하면 부처님이에요? 뭐예요? 욕쟁이죠. 그러니까 욕쟁이가 안 되도록 잘 이렇게 착한 마음 가지면, 평생동안 올해 한 해도 무탈하시고, 좋은 일만 생기겠죠. 다 같이 좋은 생각가지면서 좋은 나날 됩시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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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1월24일 음력 1월 정초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3-01-24
계묘년 새해에 복 많이 받으십시오. 계묘년 정월 초3일 진관사 신중기도 입재 법문입니다. 기도라고 하는 것은 소원을 이루는 행위이다. 소원을 이루는 행위가 기도다.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그러면 불교에서 소원이란 무엇인가. 불교는 깨달음을 가르치는 종교에요. 그래서 불교의 소원은 깨달음이죠. 깨달음. 깨달음이란 있는 걸 모르고 있다가 아는 거, 있었는데 모르고 있다가 아는 거,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그런데 왜 깨달음을 얘기하는가. 인간의 모든 문제가 깨닫지 못한 데서 생겼다, 이렇게 가르치고, 깨달음을 이루는 동시에 모든 문제가 다 해결된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불교에요. 근데 그럼 깨달음을 어떻게 이루느냐. 범부라고 그래서, 깨닫지 못한 범부가 깨달음을 이루는 행위, 그걸 어려운 말로 보리행이다, 이렇게 말하거든요. 보리는 깨달음이고, 행은 행위고, 범부보리행(凡夫菩提行). 이제 보살들이 깨달아가는 행위가 있어요. 그걸 보살보리행(菩薩菩提行). 그리고 이미 깨달음을 이루신 제불, 과거, 현재, 미래, 삼세제불께서 깨달음을 이룬 다음에 어떻게 깨달음을 이루는 행위를 하는가. 그걸 이제 제불보리행(諸佛菩提行). 凡夫菩提行 범부보리행念佛行 : 염불행 :六法供養 獻供念佛 隨時禮敬 禮敬念佛 육법공양 헌공염불 수시예경 예경염불如來名號 稱名念佛 輕典讀誦 持誦念佛여래명호 칭명염불 경전독송 지송염불 禮懺行 예참행 ①罪業懺悔죄업참회 : 我昔所造諸惡業 皆由無始貪瞋癡 아석소조제악업 개유무시탐진치 從身口意之所生 一切我今皆懺悔 종신두의지소생 일체아금개참회 ②六情懺悔육정참회 : 内立六情 依而生識 外作六塵 執爲實有 내립육정 의이생식 외작육진 집위식유 不知皆是 自心所作 起諸煩惱 自以纏縛 부지개시 자심소작 기제번뇌 자이전박 (大乘六情懺悔,元曉撰)(대승육전참회, 원효찬) 誓願行 : 普賢菩薩 十種大願(普賢行願品)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범부가 이 깨달음을 이루는 기도 행위는 작법 의식을 통해서 하거든요, 범부들은. 작법(作法), 법을 만들어요. 지을 작자, 법 법자. 또 법을 세우는 형식을 가지고 한단 말이에요. 이걸 의식이라 그래요. 법 세우는 형식. 그래서 절을 어떻게 한다, 공양을 어떻게 올린다, 이게 전부 작법 의식이거든요. 이게 범부들이 하는 기도 행위예요. 그러면 범부들이 하는 첫 번째 기도가 염불행(念佛行) 기도인데요. 염불. 생각할 염자, 부처님 불자. 부처님을 생각하는 행위의 기도인데, 왜 부처님을 생각하는가. 깨닫지 못한 범부들은 생각하는 것이 전부가 티끌 세간 경계예요. 육진(六震) 세간(世間)이라고 그러는데, 티끌 세간 경계, 눈에 보이는 티끌, 귀에 들리는 티끌 이런 거, 몸에 부딪히는 티끌, 티끌 경계만, 티끌 경계만, 꿈에서도 이걸 어려운 말로 진경(塵境)이라고 그러거든요. 티끌 진짜, 경계 경자. 이 세간 진경만, 진경만 생각하는 게 범부예요. 그래서 깨닫지 못한 범부들은 모든 기억 속에, 생각 속에 남아 있는 게 사람 생각, 물질 생각, 자기 몸 생각, 과거 생각, 미래 생각, 그것뿐이에요. 인간이란 다 똑같아요. 말을 안 해도 그거 생각하고, 말을 해도 사람 생각, 물질 생각, 몸 생각, 과거 생각, 현재 생각, 미래 생각, 삼세 육진, 이거 빼면 없어요. 삼세 육진 빼면. 근데 그 삼세 육진이라는 게 전부 다 허망하고 무상해서 그냥 흘러가 버려요. 그래서 아무리 내 몸이 건강하다고 하더라도 이거 얼마 못 가거든요. 그러면 몸을 위해서 지금까지 노력했던 게 공허해요. 그거 몸 만든다고 요새 많이들 노력하는데, 그 만든 몸이 서서히 시들어가고 사라져 갈 때 공허해요. 사람을 얻는다고 많이 노력하는데, 사람 얻는 것도 내 몸이 약해지면 사람도 다 떠나가요. 사람을 많이 얻은 것도 공허해. 공허라는 건 텅 비었다 이 말이죠. 물질도 내가 소유하고 있는데 소유하던 내가 사라지면 내가 소유한 물질도 다 사라져요. 공허해요. 그런데 범부들은 그걸 모르고 이 삼세 육진만 추구할 수도 있고, 설사 알았다 하더라도 지금까지 구하던 것이 그거니까 안 구할 수가 없어요. 모르고 하고, 알면서 구하다가 마지막에 공허하다, 가슴이 텅 비었다. 이게 나중에는 이 몸이 점점 쇠약해지니까 후회해도 소용이 없어요. 옛날 말로 ‘때는 늦으리.’ 때가 늦었다는 거에요, 어쩔 거야. 그러니까 여기서 이제 부처님이 제시한 게, <뭘 구해도 구하는 건 공하다. 깨달아라. 깨닫는 것만이 진실하다.> 그래서 삼세 육진을 구하는 거와 전혀 다른 것이 염불이에요. 부처님을 생각한다는 거는 과거, 현재, 미래를 생각하는 게 아니고, 몸 생각, 사람 생각, 물질 생각하는 게 아니라, 깨달음의 세계를 생각하는 것이 염불이거든요. 그럼 염불을 어떻게 하느냐. 작법 의식 염불로는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는 염불이 있어요. 공양을 올리는 것 자체가 부처님을 생각하지 않으면 공양이 안 되거든요. 그래서 육법공양(六法供養) 헌공염불(獻供念佛), 공양을 이렇게 가만히 보니까 공양물을 준비하는 것 자체가 그대로 염불이에요. 공양물을 잘 씻어서 불단에 올리는 것 자체가 다 염불이고 그렇거든요. 또 수시예경(隨時禮敬) 예경염불(禮敬念佛), 불전에 가서 수시로 때에 따라서 절을 딱 올리면 절하는 게 그게 염불이에요. 그래서 공양물도 올리고 절도 하고 여래명호(如來名號) 칭명염불(稱名念佛), 여래의 여러 명호를, 이름을 칭명한다, 부를 칭자. 이름 명자. 자꾸 여래의 명호를 부르는 거예요. 그걸 칭명염불이라고. 경전독송(輕典讀誦) 지송염불(持誦念佛). 부처님께서 말씀하신 경전을 잘 독송하면 그 경전독송 하나하나가 전부 염불이에요. 그래서 그것을 가질 지자, 외울 송자, 항상 간직해서 외운다고 지송이라고 하거든요. 소지한다는 지자가 있어요. 외운다고 하는 송자. 지송염불. 이렇게 작법 의식을 통해서 하는 거예요. 혼자 해도 되지만 여럿이 할 때 작법 의식이 깊어지고 강해져요. 여럿이 하게 되면. 왜냐하면 사람이라는 건 그게 아주 재미있어요. 누가 옆에 있으면 자기 강한 모습을 보이려고 하는 성격이 있어요. 근데 혼자 있으면 편한 모습을 보여요. 인간이란 묘한 동물이에요. 그래서 혼자 들어가 있으면, ‘뻔하구나. 저 편케 있으라고 하는구나.’ 틀림없어요. 혼자 있으면 이제 편하게 지내려고 그러고, 옆에 누가 있으면 강하게 보이려고 하는 아주 본능적인 그런 습관이 나와요.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건, 같은 동성끼리 같이 있는 거보다 남녀 이성이 같이 있으면 더 강한 걸 보이려고 더 애를 써요. 그거 참 재미있어요. 그러니까 남녀가 한 법당에서 동참을 해서, 대중을 형성해가지고, 이렇게 경전을 읽고, 공양을 올리고, 예경을 올리고 하면, 나에게 있던 그동안 그 감춰져 있던 능력들이 막 솟아나요. 그리고 지금까지 구했던 삼세 육진을 쫓아다니던 그런 습관들이 사라져요. 그래서 이거를 어려운 말로 <죄업은 소멸하고 선업은 증장한다.>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죄업이라는 건 나에게 괴로움이 되는 삼세 육진을 구하던 그런 것이 다 죄업이에요. 그래서 죄업은 작법 의식 기도를 통해서 소멸을 하고, 나에게 드러나지 않았던 선업, 좋은 업은 증장을 한다. 더욱더 성장한다 이 말이죠, 증장이라는 말은. 그거를 이제 기도라고 그래요. 그리고 예참(禮懺)기도가 있는데, 부처님께 예경을 올리고 참회를 하는 걸 예참이라고 그러는데, 예참은 죄업을 참회한다, 첫 번째가. 천수경에 보면 아석소조제악업(我昔所造諸惡業), 내가 지금 옛적부터 지금까지 지은 악업인데, 악업이라는 건 뭐냐. 첫째는 자기를 해치고 남을 해치는 게 악업이에요. 자해해타. 근데 나타날 때는 남 해치는 걸로 나타나요. 그런데 해타를 하면 그게 자해가 돼요. 자기를 해치는 게 돼요. 남을 이롭게 하면 자기가 이로와요. 지금까지 많은 복덕과 이익을 성취한 사람들은 다 남을 해친 사람들이 아니에요. 이타(利他) 를 하면 자리(自利)가 돼요. 남을 이롭게 하면 나를 이롭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중생들은 우선 탐욕이 앞서니까 남 해치는 일을 하게 돼요. 또 탐하는 대로 안 되면 분노가 일어나요. 그 탐욕과 분노가 전부 자기 어리석음에서 나왔는데 그걸 모르는 거예요. 이거 알려면 굉장히 마음공부를 깊게 해야 돼요. 저 사람이 잘못해서 내가 화가 났다, 이렇게 알고 있거든요. 근데 진실은 내가 저 사람에게 욕심을 부리니까 화가 나는 거예요. 자식은 자식이고, 나는 난데, 자식이 청소를 안 하고 산다고 잔소리를 하는 어머니가 있어요. 아니, 자식이 청소를 안 해서 내가 화가 나는 게 아니라, 자식이 청소하고 살기를 바라는 내 욕심 때문에 화나는 거예요. 청소 안 하고 사는 자식은 편안하고 좋은데, 왜 어머니가 난리예요. 남편이 내 말을 안 들어서 화가 난다. 남편이 왜 부인 말을 들어야 돼요. 남편은 남편, 나는 나, 그게 현실이잖아요. 남편이 자기 멋대로 해서 화가 나는 게 아니라, 남편은 내 말을 들어야 하는 자기 욕심 때문에 화나는 거예요. 자기 욕심은 어리석어서 욕심을 내는 거고 이게 탐진치거든요. 이거 알려고 마음공부를 조용히 해보면, ‘나의 분노가 나의 욕심이구나, 나의 욕심은 나의 어리석음이구나.’ 이걸 알게 돼요. 그래서 그런 나도 해치고 남도 해치는 죄업들을 전부 참회한다. 이것은 다 신구의 삼업에서 나왔다. 생각과 말과 행동, 의가 왜 중요하냐면 범부들은 생각이 없으면 행동할 수가 없어요. 생각이 없으면 말할 수도 없고요. 생각이 없으면 뭐를 이해할 수도 없고, 생각이 없으면 행동할 수가 없어요. 저거 딱 보면 저것들은 생각이 일어나야 그걸 알지, 생각이 안 일어나면 몰라요. 그래서 생각을 건강하게 하는 게, 그게 나의 말도 건강하게 하는 거고, 나의 행동도 건강하게 하는 거라, 생각이 없으면 전혀 말도 못하고 행동할 수가 없다. 그래서 숨도 쉬고 맥박도 뛰는데 의식이 정지가 되면 식물인간이라고 그래요. 사람이라고 안 해요. 사람은 생각이다. 생각 없으면 사람일 수가 없다 이거예요. 그런데 이 생각을 건강하게 하는 게 그렇게 중요한 거예요. 생각은 사람이다. 생각 없으면 사람이 아니다. 이거지요. 그래서 신구의 삼업이니까, 생각과 말과 행동을 다 차별해서 생각을 좋게 하고, 말을 좋게 하고, 행동을 좋게 하고, 이게 이제 죄업 참회거든요. 그다음에 육정참회(六情懺悔)라는 게 있어요. 제 생각인데, 육정이라고 하는 것은 안이비설신의에 하나하나 감정이 실려가지고 육근이 감정이 거기에 묻어서 감정대로 세상을 보는 거예요. 저게 좋은 게 아닌데, 자기 감정으로 좋게 봐요. 이 자기 감정에 속아서 고생하는 거 참 많아요. 쉬운 말로는 이제 콩깍지 씌었다 이러는데, 그 콩깍지라는 게 자기 감정의 콩깍지거든요. 콩깍지만 씌운 게 아니에요. 자기 감정에 속아서 분노를 해요. 분노한 건 말이 없더라고요. 뭔 딱지에 분노한 거. 좋게 씌운 건 콩깍지고, 나쁜 감정이 눈을 가린 건 뭐라 그러죠? 충청도 말로는 소가지 피운다 이랬는데. 소가지. 자기 소가지에 속는 거예요. 막 분노가 일어나는 거를 속인데, 충정도 사람들은 거기다 가지라는 말을 쓰더라고, 싸가지, 소가지, 왜 그런지 모르겠어요. 아지라는 게 이런 게 이게 이제 싹 아자, 가지 지자, 처음에 일어나는 걸 말하거든요. 잘 안 보이지만 일어나는 거. 자기 분노에 속아서 자기가 괴롭고, 자기 탐애에 속아서 자기가 괴롭고, 그런 거는 다 참회하는 게 그게 육정참회에요. 그런데 이 원효 선사가 대승육정참회(大乘六情懺悔)라는 저술을 지었는데, 아주 중요한 저술이에요. 그래서 이게 좋고 나쁜 게 개시자심소작(皆是自心所作)이라, 다 자기 마음이 지은 바다. 그걸 모른다라는 거예요, 범부들은. 좋고 나쁜 거, 이게 슬프고 괴로운 게, 전부 자기 마음이 지은 거라는 거에요. 자심소작이라는 거에요, 자심소작. 죽음이라는 게 과연 나쁜 거냐. 또 태어난다는 게 좋은 거냐. 그거 아니에요. 좋은 것도 아니고 나쁜 것도 아니에요. 오래 사는 게 과연 좋은 거냐. 좋은 거 아니에요. 그러면 빨리 죽는 게 좋은 거냐. 그것도 아니에요. 전부가 좋고 나쁘게 생각하는 건 자심소작이에요. 자심소작. 그래서 그 자심소작인 걸 모르고 기제에 번뇌(起諸煩惱)하야, 모든 번뇌를 일으켜서, 번뇌는 망상이거든요. 쓸데없는 생각. 번뇌 망상. 허망한 생각을 일으켜서, 자이전박(自以纏縛)이라, 스스로 묶일 전자가 있고, 묶길 박자가 있는데, 스스로 자기 생각에, 자기 어리석음에 스스로 묶인다 이거예요. 자승자박이라는 말은 있어요. 자기 줄에 자기가 묶인다. 그럼 자기 줄이 뭐냐. 자기 어리석음이다라고 하는 거죠. 자기감정. 그래서 내 인생 문제를 해결하려면 내 감정을 편안하게 맑히면 되요. 내 문제는 내 감정이다. 그래서 인간의 모든 문제는 자기 문제예요. 남편 문제가 아니고, 아내 문제가 아니고, 자식 문제가 아니고, 내 문제야, 내 문제. 내가 마음이 깨끗하고 편안하면, ‘너는 너, 나는 나, 내가 당신 뜻대로 살 수도 없는 일, 당신이 내 뜻대로 살 수도 없는 일, 어쩌다 서로를 이해한다면 그것은 아름다운 일. 그렇지 못하면 어쩔 수 없는 일. 당신은, 당신은 나였나.’ 죽음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죽음이 없어요. 또 삶도 가만히 들여다 보면 삶이 없어요. 이게 지혜거든요. 근데 자기 감정이 삶을 보고 죽음을 봐서 거기에 어떤 건 좋아하고, 어떤 걸 싫어하니까, 이게 전부 자기 감정이 자기 눈을 가려서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육정참회라는 게 있어요. 내 감정에 속는 이런 감정을 참회합니다. 그리고 서원행(誓願行) 기도가 있어요. 서원행. 원을 크게 세우고 원을 깊게 세우면 그 원이 나를 인도해요. 나의 서원이 나를 인도한다. 이게 원이 없으면 내가 갈 방향이 없어서 뭐 제대로 못해요. 그래서 내가 의지를 딱 가지고 자기 의지가 정해지면, 의지는 반드시 이루어지게 되는데, 언제 이루어지냐. 언제든지 이루어져요. 이렇게 의지가 없으면 이루어질 게 없어. 그래서 이 서원행 기도라는 거는 서원을 딱 세우면 그 서원이 나를 인도하기 때문에 이루고자 하는 것을 이루거든요. 그래서 불교의 기본적인 서원은 사홍서원이고요. 아주 위대한 서원은 보현행원품(普賢行願品)이라는 게 있어요. 보현보살 십종 대원(普賢菩薩 十種大願)이라는 내용이 있거든요. 그걸 이렇게 외우기만 해도, 다 안 외우고 제목만 외워도, 십종 대원, 그게 나를 이끌고 가는 등불이 돼요. 또 나를 인도하는 방향이 돼요. 그래서 이제 이런 것이 불교 기도의 작법 의식 기도의 내용이에요. 염불행 기도, 예참행 기도, 서원행 기도. 이제 범부들은 이렇게 작법 의식을 통해서 하게 돼요. 菩薩菩提行 보살보리행世間人生 生老病死 剎那不住 生滅不息세간인생 생로병사 찰나부주 생멸불식一念妙體 勿形段者 惺惺寂寂 寂寂惺惺일심묘체 물형단자 성성적적 적적성성六波羅密 菩提行 육바라밀 보리행布施 持戒 忍辱 : 修福菩提行, 般若 : 修慧菩提行보시 기계 인욕 : 수복보리행, 반야 : 수혜보리행精進 禪定 : 福慧雙修菩提行정진 선정 : 복혜쌍수보리행 그런데 이제 보살은 감정으로 사는 게 아니라 반야로 사는데, 보살들은 다 보는데 두 가지를 봐요. 첫째는 인생을 봐요, 인생. 그다음에 마음을 봐요. 그래서 인생이라고 하는 것은 세간 속에 사는데, 세월과 공간 속에 사는 게 인생이란 말이죠. 세간인생(世間人生)은 가만히 보니까 생로병사(生老病死)가 있어. 생로병사. 그래서 이 생로병사를 또 가만히 보니까 찰나부주(剎那不住)라. 한순간도 머물질 않아요. 우리가 한참 있다보면 달라진 것 같지만, 그게 순간순간 달라져서 지금까지 달라진 거지, 가만히 있다가 달라진 게 아니거든요. 태어났을 때 내 모습이 있었는데, 지금 70년 후에 내 모습이라. 그러면 태어났을 때 내 모습은 70년 후에 어디로 갔나. 태어났을 때 이 모습이 변해서 지금 모습이 된 거지, 두 놈이 있는 건 아니에요. 그럼 언제 변했나? 순간순간 변하는 거예요. 순간순간. 그래서 젊은이들이 상대편이 뭐 예쁘다, 잘생겼다 그러는데, 지금 예쁘고 잘생긴 모습이 얼마 안 가요. 지금 노인은 옛날 청춘이 없었나. 지금 청춘은 그럼 앞으로 노인이 없나. 이게 이제 찰나부주라는 거예요. 찰나에도 머물지 않는다. 그걸 보는 거예요, 보살은. 세상만 보는 게 아니라 인생을 본다. 근데 보통 사람들은 인생을 못 봐요. 그냥 세상만 보고 쫓아가다가 늙어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마지막에는 허무와 통곡이라고 해요. 인생은 허무하구나. 그 허무한 감정이 너무 슬퍼서 통곡을 한다, 그래요. 찰나부주에서 생멸불식(生滅不息)이라. 나고 죽는 일이 멈추지를 않는다. 쉬지 않는다. 그런데 그럼 그 속에 아무것도 없을까? 가만히 보니까 마음이라는 게 있는데 그걸, 일념(一念)이라고 그랬어요. 한 일자, 생각 념자. 일념, 한 생각. 왜 한 생각이라는 말을 쓰냐 하면은, 이 생각은 들으면 듣는 생각이 일어나고, 보면 보는 생각이 일어나는데, 보고 듣고 맨날 해도 늘 들을 때도 그대로 있고, 듣지 않을 때도 그대로 있는 한 생각이라는 게 있어요. 산을 볼 때도 그대로 있고, 물을 볼 때도 그대로 있고, 슬픔을 아는 것도 그대로 있고, 또 즐거움을 알 때도 그대로 있고, 늘 한 생명이라는 게 있더라 말이지요. 그걸 일념이다. 그걸 마음이라고 한다는데 마음은 일념이에요. 그래서 일념은 그러면 어디에 있냐. 형체가 없어. 그래서 묘할 묘자, 몸 체자, 묘체라고 하거든요. 너무 심각해지는 것 같네. 일념묘체(一念妙體), 눈으로 보이는 몸이 아니에요. 귀로 들리는 몸이 아니에요. 근데 있기는 있는 거예요. 한 생각 묘체는 물형단자(勿形段者)라, 형상 덩어리가 아니다. 형단자가 아니다. 그러니까 그 한 생각 묘체를 찾아보려고 온 몸을 해부를 하고, 해체를 해봐도 그거 안 보여요. 그런 데 있는 거예요. 그거를 확실히 지혜로 얻을 때, 그 한 생각을 얻을 때 증득(證得)이라고 그래요. 증명할 증자, 얻을 득자. 보이는 걸 얻으면 수득이에요. 받을 수자, 얻을 득자. 그냥 받아서 얻는 거예요. 근데 이건 한 생각을 내 지혜로 얻으니까, 이건 손으로 받는 것도 아니고, 귀로 듣는 것도 아니고, 증득을 한단 말이에요. 그래서 어려운 거예요, 이게. 받아서 얻는 게 아니라 내 지혜로 얻는 거다. 지혜로 얻는다는 게 이게 얼마나, 이게 쉬운 일이 아니에요. 맨날 이거 손으로 받고만 얻었는데. 이 물형단자인데, 이거는 항상 아는데 항상 고요해, 이걸 성성적적(惺惺寂寂)이라고 그러거든요. 깨 성자가 있어요. 마음심 심방 변에, 별 성한 거. 항상 깨어 있어. 항상 뭘 보고 듣고 생각하고 움직이고 하는데, 찾아보면 실체가 없어. 물형이라. 물형. 명명물형이라, 밝고 밝게 다 아는데 형상이 없어. 아닐 물자, 형상 형자, 형상은 아니야. 그럼 이거 어떻게 아냐. 내 지혜로 아는 거예요. 보아서 아는 게 아니라 지혜로 아는 거예요. 적적성성(寂寂惺惺)이라. 고요하고 고요한데 항상 고요한데, 항상 알아. 근데 이 세상에 있는데 안 보이는 게 너무 많거든요. 예를 들면 이 법당이 지금 있잖아요. 법당이 보면 불상도 모셔져 있고 벽도 있고 이런 것도 다 있는데, 여기에 하나 안 보이는 게 있어요. 뭐가 안 보이냐. 이 법당을 처음에 설계한 마음이 있는데, 설계자의 마음은 안 보이는 거예요. 이걸 여기다 배치할 때 이 배치하는 사람의 생각이 있었을 거 아닙니까. 근데 이 배치된 상만 보이지 배치한 사람의 마음은 안 보이거든요. 근데 여기 이렇게 놓여 있는 거는 그 놓고자 하는 사람의 생각이 여기 놓게 만든 거예요. 그러니까 바둑이나 장기를 두는 걸 가만히 보면 바둑알이 왔다 갔다 하고, 장기 알이 왔다 갔다 하잖아요. 그러면 왔다 갔다 하는 장기알은 보이는데, 그걸 옮기는 사람의 손도 보이죠. 근데 그 사람이 손을 움직이는 그 생각은 안 보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장기알이 왔다 갔다 해서 뭘 잡히고 잡고 그게 아니라, 순전히 생각만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그러면 돌아보면 이상한 게 있어요. 뭐가 이상하냐. 누가 그림을 그려서 전시를 하는데 그게 음란화라고 전시 못한다고 그러고, 어떤 분은 아주 성화라고 아주 존중시해야 된다고 그래요. 근데 가만히 그걸 보면 그림이라는 게 전부 물감이거든요. 그 물감이 음란이 어디 있고 신성이 어디 있어요. 없어요. 다만 그 그린 사람의 생각일 뿐이에요. 화가의 생각. 화가가 이렇게 ‘이거는 코다’라고 생각을 표현한 거지, 이게 물감이지, 무슨 코예요. ‘요건 입이다’라고 그러면 그 화가가 입이라고 표현해서 그렇게 물감을 칠한 거지, 그게 입은 무슨 입이에요. 이게 마음이거든요. 그러니까 딱 보면 이건 그림이다. 화가의 생각을 표현한 거다. 그렇게 알아야지, ‘저 그림이 예쁘네.’ 예쁘긴 뭐가 예뻐요, 물감인데. 흑판에다가 이렇게 이제 산을 그린다든지 세계 지도를 그리거든요. 그러면 흑판에다가 분필를 가지고 그린다. 여기는 유럽이고, 여기는 아시아, 그 무슨 아시아고 유럽이에요. 그냥 흑판이지. 그런데 뭐가 있냐. ‘여기는 아시아, 이 구역은 유럽이다라고 표현하는 사람의 생각이 여기 있어요. 그러니까 마음은 항상 있는 거예요. 항상 있는데 눈으로 안 보인다는 거죠. 그런데 이거를 지혜로 깨닫는다는 거죠. 그렇게 하는 게 기도에요. 그래서 이 보살들은 일상 정진으로 기도를 해요. 일상 정진, 항상 기도를 해요. 자기가 원하는 걸 이루려고 노력을 해요. 그게 일상정진기도거든요. 그렇게 돼서 바라밀행을 닦는데, 바라밀행 대표적인 걸 육바라밀(六波羅密)이라고 그런단 말이에요. 보시 지계 인욕(布施 持戒 忍辱) 이렇게 하는데, 이거는 복을 닦는 일상 기도예요. 보시 지계 인욕을 하면 복이 생겨요. 그다음에 반야(般若)라고 했는데, 이 반야는 지혜를 닦는 일상기도예요. 반야를 닦으면 지혜가 불어나거든요. 이게 중간에 정진 선정(精進 禪定)이 있는데, 정진 선정은 복과 지혜를 쌍으로 함께 닦아요. 정진을 계속하고 선정을 닦으면 거기에 지혜도 생기고 복도 생기고, 복도 생기고 지혜도 생겨 이걸 쌍수(福慧雙修)라고 그래요. 이래가지고 복을 닦는 거를 수복(修福)이라고 그러고, 수복기도, 수복 일상 정진 기도, 이게 보살이 하는 기도예요. 반야를 수행하는 거는 수혜(修慧), 닦을 수, 지혜 혜, 지혜를 닦는 일상 정신 기도. 그다음에 정진과 선정을 항상 닦는 것은 복혜쌍수, 복과 혜를 쌍으로 닦는 일상 정진 기도. 이게 보살이 하는 기도예요. 보살은 스스로 항상 자기 지혜를 가지고 기도를 하기 때문에, 이렇게 작법 의식 기도를 통하지 않고도 일상이 항상 기도인 거예요. 일상이. 그럼 보살은 전혀 작법 의식을 안 하느냐? 해요. 여럿이 모일 때는 함께 하면 좋아요. 그런데 혼자 있을 때는 편하게만 있느냐. 아니에요. 늘 일상 정진 기도를 한단 말이에요. 諸佛菩提行 제불보리행一念妙體 常住寂照 三世諸佛 同證同悟일념묘체 상주적조 삼세제불 동증동오 圓融圓通 無障無礙 不可思議 解脫境界원융원통 무장무애 불가사의 해탈경계 그러면 이제 제불은 어떻게 하냐. 제불보리행(諸佛菩提行)은 어떻게 하냐. 제불은요, 일념묘체(一念妙體)뿐이에요. 보고 듣는 게 다 한 생각 미묘한 몸이 보는 세계예요. 저건 집이 아니라 한 생각이 보는 세계다. 소리가 좋고 나쁜 게 있는 게 아니라 한 생각이 듣는 세계예요. 이게 접촉되는 게 좋고 나쁜 게 아니라 한 생각이 이게 접촉하는 세계예요. 그래서 대상은 없고 한 생각만 있는 거예요. 범부는 한 생각은 없고 대상만 있어요. 그래서 이걸 전도망상이라고 하거든요. 자기는 없고 대상만 쫓아간다고. 그런데 이제 제불이 되면 일념묘체가 항상 있어서 보는 것도 저게 일념묘체의 세계다, 듣는 것도 일념묘체의 세계다. 이제 물에다가 비유하는데, 연못에 가서 가만히 들여다 보면 연못 물 속에 사람이 있거든요. 그러면 저 물속에 있는 사람 만난다고 물에 들어가면 사람이 있냐? 어떻게 해요? 대답 좀 해보세요. 연못 속에 보이는 사람 만난다고 물속에 들어간단 말이에요. 그러면 물속에서 사람을 만날 수 있어요?(없어요) 그게 무슨 원리인고 하니, 그 물속에 보이는 사람이 그대로 물인 거예요. 사람이 아니고 물인 거예요. 그러니까 물속에 뭐가 비춰져도 다 물이듯이, 산을 봐도 그게 한 생각인 거예요. 한 생각이 나타나는 거예요. 하늘을 봐도 한 생각이 나타난 거예요. 죽음을 의식해도 한 생각이 나타난 거예요. 아, 이거 말 안 해야 되는데. 무서운 걸 봐도 한 생각이 나타나는 거고요. 좋은 걸 봐도 한 생각이 나타나는 거고요. 이게 깨달은 경지예요. 대상은 없고 마음뿐이다. 범부는 마음은 없고 대상뿐이다 이렇게 되는 겁니다. 중간에 보살은 이제 범부도 느끼고, 그 마음도 느끼고 늘 그쪽으로 가는 게 보살이고, 그래서 일념묘체가 상주적조(常住寂照)를 해요. 항상 그대로 고요히 비춰. 그래가지고 이걸 삼세제불이 동증동어(三世諸佛 同證同悟)라. 삼세제불이 다 똑같이 증득하고 똑같이 깨달았어. 그래가지고 원융원통(圓融圓通)이요, 이 한 생각이 원융원통해서 안 통하는 데가 없어요. 또 무장무애(無障無礙)라. 이 한 생각이 모두 나타나는 경지이기 때문에 장애가 없어. 이래가지고 이 경지를 불가사의 해탈경계(不可思議 解脫境界)라고 한다. 생각할 수 없는 해탈의 경계다 이거지요. 아무데도 매이지 않고. 그래서 이 경지를 부처님의 경우에는 원성원만, 원만원성 또 원성원융, 원만히 이루어서 원만히 수용한다. 둥글 원자가 있죠. 이룰 성자, 원성(圓成). 원만히 이루어. 이건 시작이 결과고, 결과가 시작이고, 이걸 원성이라고 그래요. 또 원융, 원만히 수용을 해. 받아서 쓴다. 원성원융. 또 이걸 수수즉득이라고 표현하는데, 의상스님 같은 경우에는. 불보살의 기도는 따를 수, 필요할 수, 필수품이라는 수자가 있거든요. 바랄 수자인데, 자기가 바라는 대로, 바람을 따라서, 이게 수수예요. 즉득이라, 곧 얻는다. 이게 부처님 기도예요. 근데 부처님은 좋은 걸 딱 생각하면 좋아져요. 참 좋지요. 있는 거 생각하면 있어요. 없는 거 생각하면 그냥 없는 거예요. 이게 원성원융 수수즉득. -아이, 이런 거 말하다가 시간 다가고 참. 뭘 알면 아는 거 얘기하고 싶은 게 또 있거든요. 왜냐하면 그냥 평범한 말로 하면 양이 안 차서 그래요.- 부처님 기도는 원성원융 수수즉득. 필요한 대로 바라는 대로 바로 얻어. 또 원만히 이루어서 원만히 받아. 수용. 기도는 다 하는데 방식만 다를 뿐이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우리의 능력에 맞춰서, 이렇게 의식 작법으로 기도를 하는 게 맞아요. 염불기도, 예참기도, 서원기도 쭉 하면 거기에 온갖 중생의 죄업은 다 소멸되고, 좋은 업이 성장해서 결국은 다 깨달음으로 가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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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묘장구대다라니천독기도]1월 8일 신묘장구대다라니천독기도 회향 법문
가섭스님 2023-01-08
신묘장구대다라니 천독을 회향을 하는 날인데, 다 하셨죠, 천독? 천독이라고 하는 게 쉽지 않은 건데 능히 이렇게 잘 해내셨다는 자체가 신묘한 일이다, 이렇게 생각이 듭니다. 그 신묘한 제가 예언을 가끔씩 하는데, 이게 딱 딱 들어맞는 예언만 제가 하거든요. 우리 신도들은, 우리 절의 신도들은 깜짝깜짝 놀랍니다. 지나고 나면 딱 들어맞거든요. 제가 여름에, 한참 더운 백중기도 때 어떤 예언을 했냐 하면, “동지 때가 되면 날이 제일 짧아지고 제일 추울 거다”고 그랬어요. 요번에 또 제가 동짓날 가서 제가 예언을 또 했잖아요. “3월이 되면 살랑살랑 푸근한 바람이 불고 꽃이 필 거다, 개나리부터 제일 먼저 필 거다.” 이런 예언을 했거든요. 딱 맞은 예언이지요. 중요한 거는 끝말에 제가 “여기 앉아 계신 모든 동참한 사람들이 그 노란 꽃, 개나리 꽃을 다 볼 거다.” 이렇게 예언했어요. 그런데 그 무거움을 잘 모르더라고요. ‘우리 스님은 농담을, 조크를 잘 하셔.’ 이렇게 하시는데 그게 아니고 어마어마한 축원이 거기 안에 들어있는 겁니다. 요즘은 어찌 될지 모르는 불안 사회라고 그러잖아요. 어디서 어떤 사고를 당할지 모르는 그런 불안 사회라고 하는데, 이럴 때 스님이 “내년 이제 겨울이, 삼동 겨울이 가면 개나리 꽃 필 때 다 같이 개나리 보고, 또 벚꽃 보고 할 거다.” 이거는 다 건강하게 잘 날 거라는 얘기잖아요. 그런 이제 간절한 축원이 있고, 그런 간절한 축원은 아마도 우리 진관사 신도들이 간절하게 했던 다라니 소원과도 맥을 같이 하는 게 아닌가 생각을 하게 됩니다. 올해 토끼해잖아요. 토끼가 꾀가 많은데, 교토삼굴( 狡兎三窟)이라는 옛말이 있어요. 그래 이 토끼는 굴을 세 개 꼭 판대요. 나가는데, 들어가는데, 또 맹수가 왔을 때 유인하는데. 유인하는 데 제일 많이 자기의 채취를 붙여 놓는다는 거 아니겠어요. 그래서 이제 교자가 교환하다 이런 뜻인데, 교환하다 보다는 약간 좀 꾀가 많다, 이렇게 좀 봐야 되겠죠. 우리도 이제 토끼처럼 꾀가 많게, 올해는 굴을 세 가지로 파자. 들어갈 데, 나갈 데 말고, 자기가 이렇게 피해 있을 굴 하나 또 파자. 저는 이 교토삼굴의 세 가지 굴 중에 중생이 파는 굴이 세 가지가 있고, 또 대승보살이 파는 굴이 세 가지가 있다고 봐요. 여러분은 지금까지는 요 중생심에서 늘 이 굴 세 개를 파고 살았어요. 그런데 그게 이런 다라니 기도라든지 또 진관사의 마음이 정원의 경험을 통해 가지고, 이 대승보살의 세 가지 굴로 전환되고 있는 거예요. 전환. 바뀌고 있는 과정이라고 봐요. 보살도를 통해서. 그래서 중생심으로 파는 세 가지, 그게 뭐냐 그러면, 뭐겠어요? 탐진치잖아요. 탐진치. 탐 내고, 화내고 또 어리석은 건데, 그 굴을 끊임없이 자기의 근기대로 파고 있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평생을 그 굴에서 머물다 가는 사람도 있고, 시절인연이 좋아가지고, 전생에 복을 많이 지어가지고, 이생에 와가지고 그 굴에 있다가고. 그 굴만이 아니라 또 다른 대승보살이 그러한 또 다른 굴 세개를 파는데, 그건 계정혜라고 하는 굴이에요. 계정혜 삼학.우리가 올해는 탐진치에서 계정혜로 전환되는 그런 경험들을 했으면 좋겠다라는 말씀을 드리는데, 탐진치는 많이 들어서 알겠지만, 일상적으로 우리가 하고 있기 때문에 잘 몰라요. 욕심이 나고 화를 내고 있죠. 그리고 어리석다고 얘기하는데, 그 어리석다는 말은 아주 쉬운 말로 표현하면 빠져든다고 표현합니다. 빠져드는 현상. 화가 나는데 화로 빠져들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내가 욕심이 나는데, 욕심이 욕심으로 빠져들고 있는 그 상태 그거는 어리석음이라고 말하는 거예요. 어리석음이라는 게 더 광의적으로는, 큰 뜻으로는 무지라고 표현할 수 있지만, 더 현실적으로는 빠져들고 있는 상태예요. 물들고 있는 상태. 그거를 어리석다고 얘기를 하죠. 그런데 내가 화내고 있는 거, 내가 욕심이 나고 있는 걸 아는 것도 그것도 그냥 되는 것이 아니죠. 그래서 이제는 계정혜 삼학으로 좀 우리가 옮겨야 되겠는데, 계정혜 삼학이라는 굴을 파야 되는데, 왜 그래야 되느냐. 이거는 그 누구를 위해서가 아니라 가장 중요한 건 나를 위해서예요. 여기 앉아계신 분들 얼굴을 뵈니까 연령대가 나를 위해 기도할 때에요, 이제. 이미 늦은 분도 계셔요. 지금 나를 위해서 기도해요. 우리 불자들이 기도를 열심히 하는데 다 남편 위해, 자식 위해 합니다. 물론 이제 간절한 서원이 있으면 해야 되겠지만, 저는 올해 첫 천독 다라이를 끝내고 여러분에게 드리고 싶은 말씀은 “여러분을 위해서 기도하라 .” 우리는 나를 위해 기도를 잘 안 합니다. 나를 위해 기도하라는 말은 ‘내 마음 상태를 점검하고 살피는 시간들을 가져라.’는 거지요. 그게 지금 현재 탐진치에서 계정혜로 가는 것도 나를 위해서 하는 거예요. 그런데 부처님의 말씀은, 요약하자면, 남을 위해서 법문하신 게 아니에요. 나를 위해서, 나의 변화를 위해서 한 거거든요. 제가 출가를 했는데 제가 출가를 왜 했겠어요. 큰 뜻은 당위적으로 많은 중생을 제도하기 위해 출가했겠지만, 첫째로는 나를 변화시키기 위한 거예요. 출가라고 하는 게 변화거든요. 근데 그걸 이제 다른 말로 하면 관점이 바뀌는 거고 시점이 바뀌는 거예요. 관점이라고 하면 보는 궤적이 바뀌는 거잖아요. 시점도 마찬가지고. 보는 게 바뀌는 거거든요. 보는 게 바뀐다는 얘기는 생각이 바뀐다는 얘기고, 생각이 바뀐다는 얘기는 행동이 바뀐다는 얘기잖아요. 연결이 쭉 되는 거니까. 자, 그러면 나를 위해서 기도를 해야 되는데, 부처님께서는 내가 변하는 걸 원하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우르벨라로 많은 제자들에게 전법을 가라고 말씀하시면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많은 사람들의 안락과 행복과 이익을 위해서’ 이렇게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 안락과 행복과 이익을 요즘 말로 바꾸면 뭐예요? 행복하고 건강하다는 말이에요. 저는 경전을 볼 때마다 늘 느끼는 게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늘 얼마나 간곡하게 말씀하시냐면, “제발 행복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거예요. “제발 건강하라”고 말씀하고 계신 거예요. 이 두 가지 외에는 다른 것들은 다 군더더기에요. 우리가 중생의 몸으로 이생에 와서 인연을 맺고 부처님하고 인연을 맺는데 부처님이 우리에게 주는 간절한 말씀은 제발 행복하라는, 제발 건강하라는 그 외에는 없습니다. 그 간절한 가르침을 우리가 받고 있는데, 늘 행복하지 못해요. 다른 말로 불안해요. 또 하나는 늘 아파. 마음이 아프기도 하고 몸이 아프기도 하고. 그러면 행복해야 되고, 또 건강해야 되는데, 누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되느냐. 누가요? 내가. 내가 건강하고 행복해야 주위가 다 건강하고 행복할 수 있어요. 제 스스로가 이렇게 돌이켜보면, 제가 출가해서 얻은 가장 큰 복은 마음이 늘 만족하다는 거 하나하고, 또 몸이 건강하다는 거예요. 물론 이제 감기도 걸리고 때로는 무릎도 까지고 합니다. 그런 걸 얘기하는 게 아니고, 마음이 병이 걸려 가지고 늘 불안증에 사는 사람이 있어요. 원망하는 마음으로 사는 사람이 있단 말이죠. 그러니까 행복할 수가 없죠. 부처님께서는 우리에게 늘 행복한 방법, 또 건강하게 사는 방법을 말씀하시고 계신 거예요. 그러면 건강하고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요? 행복하지 않은 요소들을 내 삶 속에서 제거해 나가면 돼요. 아주 간단합니다. 건강하지 못한 사람들은 내가 건강하게 사는 원인을 분석해서 하나씩 제거해 나가면 되요. 그게 이제 욕심을 덜어내는 거잖아요, 쉽게 말하면. 근데 행복하라고 그렇게 말씀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늘 마음이 불안해. 쫓기고 있단 말이에요. 뭔가 늘 만족하지 못해서 뭘 맨날 허덕이고 있단 말이에요. 그거를 하나씩 제거해 나가야 합니다. 건강하라고 했는데 건강한 행동을 안 해. 맨날 뭔지 아시죠, 이거 맨날 마셔. 그리고 맨날 먹어. 탄수화물을 줄이라고 그렇게 말했는데도 빵을 끊지를 못해. 그리고 살 뺀다고 맨날 고생을 해요. 다이어트를 작심을 하는데, 항상 내일부터야. 오늘 저녁까지는 실컷 먹고. 건강하려면 운동을 해야 하잖아요. 움직여야 되잖아요. 근데 그것도 규칙적으로 해야 돼요. 규칙적으로. 그냥 번갯불에 콩 구워먹듯이 해서 되는 게 아니라, 요 행복과 건강이라고 하는 것은 꾸준하게 해야 돼요. 이번에 월드컵이 있었잖아요. 지난 얘기지만 월드컵 때 우리나라에서 응원 구호가 있었어요. 중꺽마, 요즘 젊은 사람들 말대로 줄여서 중꺽마, 이렇게 표현하는데, ‘중요한 거는 꺾이지 않는 마음이다’ 이런 이제 응원 구호가 있었어요. 저는 그걸 보면서 ‘저거는 누군가 불교적 정서를 가진 사람이 카피를 하는 모양이다’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꺾이지 않는 마음이라고 하는 게 중요한 거예요. 다라니를 천독을 하면서도 가장 중요한 건 뭐냐면 꺾이지 않는 마음이거든요. 그래야 회향할 수 있잖아요. 나를 위한 기도, 나를 위한 그러한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도 꺾이지 않는 마음이 중요하고 꺽이지 않는 마음으로 행복과 건강을 하나하나 회복해 가는 게 중요한 거예요. 그러려면 어떻게 해야 하느냐 하면, 지금 얘기했듯이 행복하고 건강하려면, 나는 어떤 사람인가를 알아야 돼요. 내가 어떤 사람인가. 어떤 마음의 작용을 하고 있고, 어떤 언어적 습관을 가지고 있고, 어떤 행위적인 그런 습관을 가지고 있는지를 알아야 해요. 여러분은 이제 우리 불교에서 얘기할 때, 물론 불교의 전통적인 사상은 아니지만, 윤회라는 게 있잖아요. 근데 우리 한국에서는 윤회를 불교 사상으로 이해하고 있죠. 출발점은 물론 그게 아닌데, 윤회라고 하는데 이제 내가 다시 태어나는 거예요.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살림살이를 다 정리해 보면 요 질문에 답을 어떻게 하냐가 달라지는 거예요. 여러분이 다시 그대로 태어난다면은 그대로 태어날 사람? 나는 태어나겠다. 태어나가지고 지금의 남편과 지금의 부인과, -지금 벌써 눈 돌리는 사람이 있어, 벌써 이미 돌아가는 사람이 있단 말이에요, 여기까지 얘기했는데- 지금의 자식들을 만나가지고 그대로 또 한 생을 살겠다 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겠고, 그러지 못하는 사람도 있겠죠. 여러분은 어떠세요? 한 번 그대로 한번 또 살아볼까요? 아니에요. 왜 아니에요? 이보다 좋을 수가 없는데. 윤회라는 것이, 이제 우리가 윤회사상을 왜 믿냐면, 지금 내 살림살이를 그대로 물려받는다면 그래도 살아갈 수 있느냐. 이거는 노후한 사람들은 뭐냐면 많이 힘든 거예요. 힘든 거. 힘들었던 거 힘들어 왔거나 현재 힘든 거죠. 근데 그것이 나쁘다는 것이 아니라 힘들다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그 종자가 언젠가 싹을 틔워요. 그러니까 나를 위한 기도를 하는 이유가 뭐냐면 여러분이 지금의 인연들을 그대로 내가 물려받는다 하더라도 내가 능히 그걸 물려받을 수 있는 마음의 준비를 해야 된다는 거예요. 무슨 의미인지 아시겠어요? 내가 똑같이 물려받는데 나 정말 힘들어, 나 못할 것 같아, 이렇게 마음이 혹시라도 드는 사람은 그 마음을 전환시켜야 돼요. 그래야 소멸됩니다. 지겨워서 못살겠어, 아주 그냥. 지긋지긋해 이렇게 하는 사람이 있어요. 만약에 그런 마음이 드는 사람은 마음 챙김을 해야해요. 그 마음 종자를 그냥 두고, 다라니를 천독을 하는 건 어떤 거냐면, 좋은 옷을 내가 오늘 사 입는 것 같은 거예요. 그러면은 옷이 이쁘니까 달라지죠, 달라 보이죠, 사람이. 근데 그 옷이 해지고 낡아지고 때가 묻으면 어떻게 돼요. 그때로 돌아가는 거지. 그 마음을 정리를 해야 돼요. 그래서 다라니 기도할 때 가장 중요한 거는 나의 마음을 변화시키는 기도를 해야 돼요. 지금의 인연들에 대해서. 그 전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지금의 인연들에 대해서 자비한 마음을 가져야 되요, 자비한 마음을. 지금의 인연들에 대해서 내가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되요. 지금까지 살아온 인연들에 대해서 내가 찬탄의 마음을 가져야 됩니다. 이 세 가지가 자기를 변화시키는 가장 큰 힘이에요. 다라니 기도를 막 했는데 열심히 했어요. 다라니 기도할 때는 마음이 기쁘고 법열로 가득 찼는데, 마치고 집에 돌아가 면상을 보는 순간 마음에서 부글부글 올라와. 자기도 몰래 한숨이 나와. 이러면 비싼 옷 사 입고 구정물에 들어가는 꼴이 되는 거예요. 아무 소용 없는 거예요. 마음을 바꿔야 해요. 자비한 마음으로, 감사한 마음으로, 찬탄의 마음으로 바꿔야 한다. 자비한 마음이라고 하는 건 뭐예요. 자비는 항상 따뜻하고 온화하게 보는 거예요. 긍정적인 마음이에요. 쉽게 말하면 긍정적인 마음. 불안하고 힘들고 죽을 맛이고 이런 것이 아니고, 그 어떤 인연에 대해 긍정적으로 바라보는 마음이 자비심이에요. 다른 말로 감사한 마음일 수 있는데, 중요한 건 뭐냐면, 찬탄의 마음이라는 거죠. 여러분이 지금 여기 앞에 다라니가 있잖아요. 다라니를 해석해보면, 우리가 해석하고 있지 않지만, 해석해보면 관세음보살의 덕성을 찬탄하는 거예요. 이 관세음보살님은 이렇게 해서 훌륭하시고,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관세음보살님 이래서 내가 귀의를 하고, 이런 모습을 하고 있는 관세음보살님은 이런 모습이기 때문에 내가 귀의할 수밖에 없고.. 찬탄 구조에요. 우리가 왜 찬탄을 하겠어요. 관세음을 찬탄하는 마음으로 나한테 주어진 모든 인연들을 찬탄하라는 얘깁니다. 관세음보살이니까 찬탄하는 거예요. 스님, 우리 집안 우리 집에 있는 사람은 그럴 사람이 아니에요. 그럴 만한 사람이 아니면 이렇게 얘기할 수도 있지만, 그렇게 봐왔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또 그렇게 왔다하더라도 지금 이 순간부터 찬탄을 해야 됩니다. 찬탄을 해야 돼요. 그래야지 내가 편안해져요. 이 우주의 시작과 끝은 나부터 시작됐다는 거, 나부터 끝납니다. 뒤집어 볶고 많은 사연들이 있어도, 내가 사대 육신이 흩어져 버리면 끝나는 거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어요. 다라니도 할 수가 없고, 다라니를 통해서 자비한 마음과 감사한 마음과 찬탄의 마음도 할 수 없는 거예요. 지금 이 순간 인연 있을 때 지금 나와 함께 하고 있는 인연들에 대해서 변화해야 됩니다. 그게 다라니기도의 최후의 목적지가 돼요. 그래야지만이 자기 자신이 행복해지고 자기 자신이 건강해질 수가 있어요. 그러지 못하면 말짱 도루묵이다. 여러분은 다라니를 읽으면서, 앞으로는 다라니를 쭉 읽을 때 이렇게 눈을 지그시 감고, 천독할 때 단 한 독이라도, 999독은 남편을 위해서, 자식을 위해서, 또 나와 함께 인연을 위해서 하고, 999독 외에 한독은 나를 위해서 하십시오. 눈을 지그시 감고, 자기 마음을 향해서 다라니를 하세요. 만약에 그게 진심으로 맞닥뜨린다면 여러분은 뜨거운 경험을 하게 될 거예요. 그동안 경험하지 못했던 뜨거운 눈물이, 뜨거운 환희가 내 마음에서 올라오는 거예요. 왜? 내가 이생에 와서 내가 나 스스로에게 빚진 게 많거든요. 나한테 저질렀던 그 많은 인권 침해 사례들이 막 올라올 거예요. 내가 내자신에서 제일 많이 인권 침해하거든요. 인권이 뭔지 아시죠, 인권. 사람이 가져야 되는 천부의 권리에요. 그걸 인권이라고 하는데, 자기 인권을 잘 챙기지 않고 살아요. 자기 자신을 자기가 제일 괴롭히고 살거든요. 근데 저 다라니 천독을 통해 자기 자신을 딱 비춰보면, 자기 자신이 자기한테 얼마나 많은 상처를 주고, 자기가 자기한테 얼마나 많은 흠집을 냈는지를 알 수가 있어요. 그러면서 그것이 메꿔지는 경험들을 하게 됩니다. 그리고 하루에 한 번씩은 하면 좋겠지만, 하루에 한 번이 안 된다면 한 번이라도 집에 가셔가지고 혼자 조용한 음악을 틀어놓고 반조하는 시간을 가지세요. 우리가 그동안에는 계속 밖을 향해서 보던 시각, 버릇들이 있어요. 다라니 할 때도 보면은 생각이 여기 가 있어요. 제가 경험해봐서 알아요. 저 다라니 천독 기도를 해보면 입에서는 다라니가 자동으로 나오는데 이제 자동으로 되잖아요. 그죠. 오토가 돼. 오토. 목탁 치면서 하다 보면 목탁도 오토에요. 목탁 오토로 가는데 다라니도 오토야. 근데 가끔씩 내가 깜짝 놀란 게 뭐냐면, 마음은 다른 데 가 있어요. 불사 생각을 한다든가, 저번에 왔던 그 보살님 고민을 어떻게 해결해 줘야 되나 그런 생각도 하고, 여러 생각들이. 깜짝깜짝 놀라죠. 그때마다 당겨 오는데, 그 당겨오는 마음을 다른 말로 반조라고 해요. 반조. 반조 이러는데 집에서 이렇게 해보셔야 되고, 또 법당에 와서도 그런 시간들을 반드시 가져야 됩니다. 이렇게 시각을 관점을 자기 자신을 보고 이렇게 돌리는 연습을 해야 되는데, 이걸 열심히 하면은 이런 말할 때도 자기 자신을 보면서 말을 하게 되요. 이걸 일여라고 그래요, 한결 같다. 그런 힘이 생겨요. 빠져들지 않죠. 어떤 상황이라도 놀라지도 않고 두렵지도 않고. 두렵지 않고 겁나지 않고 걱정이 없으니까 어떻게 돼요. 전도될 생각이 올라오지 않는 거에요. 그런 과정인데, 그런 거 잘 안 된다 그러면은 이렇게 손을 엑스자로 이렇게 가슴에 놓고, 아니면 다라니를 할 때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도 집중이 안되면 고개를 오른쪽으로 살짝 숙여요. 왼쪽으로 숙이면 안 돼요. 오른쪽으로 이렇게 잘 숙여보세요. 그리고 생각하기에는 어머니의 품에 들어있다. 어머니 품이라는 거는 관세음보살님의 품에 안겨 있다. 살짝 안겨 있는 게 아니라 폭 안겨있다 생각하고, 그리고 그 다라니를 자신을 위해서 딱 일독만 하세요. 그렇게 한번 딱 하고 나면 자신을 사랑하게 됩니다. 자신을 아끼게 돼요. 이 사랑하고 아끼라는 말은 자기에게 집착하라는 말이 아니에요. 집착과 별개의 색깔이에요. 결이 달라요. 자기를 정말 아껴야, 소중하게 자기 자신을 바라봐야지만이, 타인을 안을 수 있는 힘이 생깁니다. 우리가 왜 남편이나 자식이나 내지는 가까운 이웃에 여러 가지 갈등과 대립과 내지는 여러 가지 그런 서로간에 지청구를 하냐면 내 꿈이 넉넉하지 못하기 때문이에요. 부처님이 우리한테 야단치는 거 보셨습니까. 부처님은 단 한 번도 우리에게 야단치신 적이 없죠. 왜? 늘 저렇게 앉아 계시니까. 늘 밝은 미소로 저기 앉아 계시니까 야단치지 않잖아요. 그 얘기는 그 부처님의 품이, 관세음보살님의 품이 광대무변하기 때문이에요. 어떠한 꼬라지를 봐도 그 꼬라지 다 봐주고 이해하고 하기 때문에. 우리가 어떤 꼬라지를 못 보잖아요. 꼬라지 좀 낮춘 말인가요. 꼴을 보려고 꼴이 이 얼굴이잖아요. 얼굴이라는 말은 얼의 꼴, 이렇게 변형된 말이라고 그래요. 그 꼴을 좀 보고 살려면 내 자신의 품이 넓어야 되요. 내 자신의 품이 넓으려면은 내가 변화해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계묘년에는 나 자신을 위한 기도를 하자. 그리고 아까 들으니까 6월에 천독 기도가 또 있다고 그러죠. 그러면 저랑 약속 하시는 거예요. 약속해줘. 약속해줘 해야 돼요. 999독은 가족을 위해서, 인연들을 위해서 하고, 그 한독은 누구를 위해서 한다? 나를 위해서 한다. 하다가 집중하려면 어떻게 한다. 이렇게 한다(가슴에 엑스자로 품고). 기도를 해가지고 올해는 꼭 자기 자신을 사랑하는, 자기 자신을 늘 최고로 여기는 명품 자아를 찾기를 바라면서, 제가 말 서두에 예언을 하나 했잖아요. ‘3월이면 꽃이 필 거다’, 이건 뭐 틀림없는 얘길 거예요. 안 맞으면 큰일 나는 거예요. 안 맞으면은 이게 지구가 이상해지는 거야. 꼭 맞아야 되는 건데요. 지금 올라오면서 보니까 우리 진관사 계곡 골짜기의 바람이 매서워요. 그렇죠. 차갑죠. 그런데 그 차가운 바람 사이로 봄 내음이 있어요. 혹시라도 확인하고 싶은 분들은 법회 끝나고 나가서 골짜기에 서서 가슴을 열고 심호흡을 크게 해보세요. 그럼 냉기가 확 들어올 거에요. 그런데 그 냉기 안에 봄 향기가 있다. 봄 내음이 있다. 이걸 잊으면 안 돼요. 다르게 표현하면 지금 힘들고 어렵고 벅차고 여러 가지 장애가 있지만, 그 어렵고 힘든 과정 속에 부처님의 가피가 내려오고 있다. 마치 이 엄동설한에 칼바람 사이에 봄 향기가 있듯이, 그것을 믿고 의지하는 것, 그런 마음들이 중요하다. 올해는 계묘년에는 어느 해 보다도 나를 위한 그런 마음으로 지금 현재 힘들고 어렵다 하더라도 그 안에 풋풋한 봄 내음이 있다는 걸 잊지 마시고 늘 자비하고 감사하고 찬탄한 마음으로 사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