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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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재] 9월 26일 국행수륙재 5재 법문(유튜브라이브)
혜국스님 2021-09-26
가장 먼저 고려, 조선을 거쳐서 지금까지 이런 수륙대재를 봉행해 주시는 여러 선조들과, 오늘도 그 전통을 이어서 수륙재를 지내주시는, 준비해 주신 모든 분들께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드립니다. 천지명양수륙무차평등대재라고 하는 이 수륙재는, 우리가 알고 보면, 얼마나 소중한 재인가를 알게 됩니다. 지금은 인간들끼리, 우리나라 국민들끼리도 서로 마음이 소통이 안 돼서 ‘너다 나다, 진보다 보수다’ 하는데, 수륙재를 처음 만드신 우리 선조들은 인간들이 마음이 서로 통일이 되고 하나가 되려면, 인간들만이 아니라 하늘과 땅과 이승과 저승과 뭍과 물과 일체 모든 것이 차별없다는 것을 알고, ‘근본은 부처 하나뿐이다’ 하는 이러한 법이 믿어질 때 저절로 소통이 되고 하나가 된다는 그런 법을 가르쳐주신 분들입니다. 그건 대단한 철학이요, 대단한 신심입니다. 그래서 오늘 그러한 고마움을 먼저 가지고 수륙대재 법문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지심발원금차 진관사 수륙대재를 증명하시고 호념하여 주시는모든 불보살님 전에 일심발원하옵나니,이 도량에 모인 과거 무시이래로 인연있는 수륙고혼들과 모든 중생들마음에 맺힌 한을 수륙의식에 의지하여 방하착하고참나는 누구런가죄업에 물듦이 없는본마음을 깨달아서왕생극락 임운등등(任運騰騰) 하여지이다나무아미타불 지금 바깥에 앉아 계시는 분들 중 나무 그늘에 앉아 있는 분들도 많습니다. 나무 그늘이 시원하다는 이유는 나무가 온통 햇빛을 다 받아주고, 나무가 그 햇빛을 가지고 바로 광합성을 해서 엽록소를 만들고, 줄기를 피우고 열매를 맺는 까닭입니다. 우리가 나무 그늘에서, 아니면 지붕 아래서, 당장 대한민국이라고 하는 이 나라의 그늘 아래서 오늘 살아갈 수 있는 것은, 저 큰 나무가 햇빛을 받아준 그 그늘이 있듯이, 우리 선조들, 오늘 모시는 수륙재에 온 모든 그런 영령들, 그러한 분들이 햇빛을 대신 받아주고 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치고, 가족들을 위해서, 나라를 위해서, 나무 그늘을 만들어준 까닭입니다. 그러한 분들을 해마다 청해 모시고, 그 마음의 아픈 상처를 씻어드리는 목욕 의식, 그 염불. 지금 금방 와서 그 염불 잠깐 듣는데도 아유일원경(我有一卷經), 우리 수륙재 도량에는 하나의 큰 누구나 볼 수 있는 경전이 있는데 이거는 종이로 된 것도 아니고 먹으로 쓴 글도 아니고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 한 글자도 쓴 바가 없는데도 과거 무시이래로 오늘날까지 그 광명이 조금 더 쉰 바도 없고 적어진 바도 없으니, 오늘 수륙재에 오신 모든 수륙고혼들이여, 그리고 이 나라를 위해서 목숨 바쳐서, -오늘 우리 대한민국이 2차 대전이 끝난 다음에 독립국이 100여 나라가 더 넘는데도 경제, 문화, 철학까지 모든 것이 독립된 나라는 대한민국 하나뿐입니다.- 이러한 나라를 물려주신 모든 조상들을 모셔놓고 이런 수륙재를 지낼 수 있는 도량이 있다는 자체가, 이거는 전 국민이 고마워야 할 일이고, 전 국민이 조용히 저 염불 의식을 들어봐야 합니다. 우리가 저 염불 의식을 들을 때 그 마음 떨림이 일어나지 않는 것은, 서구 문명에 너무 물이 젖어서 좋은 클래식을 들을 때는 마음 떨림이 오면서, 그 좋은 염불 의식을 들을 때는 그러한 마음의 울림이 없다면, 그만큼 우리가 조상으로부터 내려오는 고고한 전통을 놓치고 살고 있구나 라고 생각해야 합니다. 그러나 반대로 오늘 수륙고혼들이 참 엄청 많이 와 계시는데, 그분들이 들을 때는, 그 낭랑한 목소리로 하는 염불을 들으면 그 마음에 맺혔던 한이 스르르 풀어집니다. 풀어졌다는 것은 구름이 걷혔다는 얘기요, 구름만 거치면 태양은 그냥 비추고 있지, 태양을 새로 만들 필요가 없습니다. 오늘 수륙고혼과 모든 선조, 나라를 위해 목숨 바친 영령들이여. 부처님 말씀 중에 가장 인류에게 큰 도움을 준 말씀 중의 한 가지가, 영가들 오늘 이 자리에 온 영혼들의 본마음이나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우리들 마음이나, 마음은 완전하다는 것입니다. 태양 광명이 우리나라가 깜깜할 때도 저 호주나 뉴질랜드 반대쪽에서 환하게 비추고 있듯이, 구름이 아무리 끼어도 구름 위에 태양 광명은 조금 더 모자람이 없듯이, 당신들 마음 마음 오늘 와서 염불 들을 줄 알고, 목욕을 시키며 큰 마음의 상처를 씻어주는 염불를 들으면 고마워할 줄 아는 그 마음은, 지옥에는 가면 아픈 줄을 알고, 즐거운 데 가면 즐거운 줄 알고, 밤이면 밤인 줄 알고 낮이면 낮인 줄 아니, 어느 날, 어느 때, 어떤 상황이라도 그 마음은 적어지지도 않고 많아지지도 않으니, 그것을 하나 알게 되면 이것이 바로 수륙무차평등대재더라. 그러한 세계, 그것을 알려주려고 이 의식을 합니다. 옛날 선조들은, 저 염불 목소리는, -듣다 보면요, 우리는 어려서 그걸 좀 배웠기 때문에,- 목에서 나오는 소리가 아니고, 저 밑에서 부처님을 청해 모시고, 부처님 보고 증명해 달라 그러고, 모든 영령들 보고 이리이리 해서 마음의 목욕을 해서 이런 염불소리 듣고, 법문 들어서, 부디 마음의 상처는 놓아두고 마음의 태양과 같은 그러한 영원한 희망이 당신 본질, 본 모습이라는 걸 깨달아서, 라라리라라 라라리라라 태평가를 부르라고 하는 것입니다. 절에서가 아니면 이런 의식을 해주는 데가 없습니다. 그러면 오늘 영가들이여. 부처님 말씀이나 조사스님들 말씀 듣다 보면 ‘마음은 닦을 필요 없다, 완전하다’ 그러면 속습니다, 우리는. 그럼 닦을 필요도 없지 않느냐. 닦을 필요 없기 때문에, 금일 영령들이여, 열심히 닦아야 되고, 인생을 바쳐야 되고, 목숨을 바쳐야 됩니다. 왜 그러냐 하면, 구름 안에 있는 태양 자체는 닦을 필요가 없습니다. 광명은 그냥 아미타불이니까. 그러나 태양을 새로 만들 필요도 없고, 닦을 필요도 없는 까닭에 구름은 걷어내야 된다, 이 말이에요. 내가 완벽한 걸 믿고 내가 부처라고, 내가 내 마음은 완벽하다고 믿음이 가면, ‘아! 내가 이 완벽한 걸 써먹지 못하고 고통 받는 건, 내가 미워하는 마음, 원망하는 마음, 이 세상에 살았을 때 미련과 애착이라는 구름이라는 감옥 속에 갇혔구나.’ 그걸 부처님께서는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라 하셨어요. 수륙재는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나는 길을 보여줍니다. 시청각 교육이죠. 저는 가만히 어떤 때는 앉았다가 그 좋은 염불소리를 듣다 보면 ‘저건 인간의 소리가 아니다. 자연과 인간과 이승과 저승이 하나 되어서, 영혼의 언어는 인간들 귀만 즐겁게 하는 게 아니라, 염불이란 모든 중생들이 귓구멍으로 듣는 언어가 아니고 그냥 마음으로 받아들이는 온 우주의 언어구나.’라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금일 영가들이여. 그런 언어를 우리는 마음이라 그러고, 부처라 그러고, 마하반야바라밀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마하반야바라밀을 우리는 대화엄의 꽃이라고 합니다. 그러면 금일 영가들이여, 혜국스님이라고 하는 법사가 금일 영혼들에게 전하려고 하는 것은 그 완벽한 당신들의 마음과 내 마음은 둘이 아닌 까닭에, 그럼 둘이 아니라는 거는 하나냐? 하나까지도 없어질 때 둘이 아니란 말이에요. 지금 우리 스님들은 함월당 법당 안에 앉아 있고 저 바깥에 계신 분들은 바깥에 앉아 계시는데, 벽을 싹 허물어버리면 안이 없어져요. 안이 없어지고 나면 뭐가 없어져요? 밖이라고 할 게 없어요. 안이 있을 때 우리는 안이다, 저쪽은 바깥이다 그러는데 안이 없어지고 나니 바깥도 없어지고 한 허공이구나. 허공에서 볼 때는 미국 허공도 이 허공이오, 인도 허공도 이 허공이오, 한국 허공도 그 허공입니다. 자, 금일 영가여. 그러면 우리가 하나 생각해 봅시다. 내가 충주 석종사에서 여기를 오려면 자동차로 와도 2시간 걸립니다. 석종사 하면 두 시간, 부산하면 한 네댓 시간, 인도 타지마할 룸비니 기원정사 하면 비행기로 가도 한 여 남은 시간. 그런데 금일 영가들이 나하고 인도 룸비니 1초도 안 걸리고 갔다, 석종사 1초도 안 걸리고 갔다, 해인사 1초도 안 걸리고 갔다. 마음으로는 먼 데, 가까운 데가 없어져 버렸어요. 시간과 공간이 없는 자리에 살면서 왜 고통을 받고 왜 생사윤회를 하는가. 그런 까닭에 마하반야바라밀이더라. 그러면 태양은 결코 더러움이 없는데도 구름이 끼면 광명을 발할 수 없듯이, 오늘 이 자리에, 수륙대재에 동참한 명과 양, 하늘과 땅, 이승과 저승, 인간과 중생, 일체 색계, 무색계, 욕계까지 다 합친 모든 그것이 오직 한 허공이더라. 허공이 아니라 허공성이다. 다만 그 허공성 한 허공이 저 벽 때문에 밖이 생기고 안이 생기고, 내가 생기고 남이 생겨서 나와 남이 나누어진 바람에 서로 진보니 보수니 싸우지만, 근본 벽만 허물어버리고 나면 한 허공을 보여준 것을, 부처님께서는 꽃 한 송이를 들어보였고, 달마 대사는 확연무성(廓然無聖)이라 하였습니다. 오늘 그걸 한 번 듣고 금일 영령들이여, 수륙대재를 지내준 그분들에 대한 그 고마움이 마음속으로 자라고 이고득락하여, 임운등등하여, 그 공덕이 우리나라뿐만이 아니라 남북통일까지, 세계 평화까지 이어지도록 우리 한 번 한 생각 내보자 하는 그런 바람입니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가장 큰 복이었다면 스승이 있는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입니다. 성철 큰스님부터 기라성 같은 그런 스승들, 내가 스님 된 다음만 하더라도 동산스님, 효봉스님, 금호스님을 비롯해서 그 아래로 쭉 스승들, 그 스승이 안 계셨는데 내가 이 길을 갈 수 있었을까, 60년 넘어 이 길을 갈 수 있었을까, 아마 어려웠을 겁니다. 오늘 진관사 수륙대재에 동참한 모든 영령들이여, 수륙고혼들이여, 우리 스승을 한 번 찾아서, 이 앞에 계시는 스님들과 신도들의 정성과 그러한 마음을 가지고, 시간과 공간이 없는 자리이기에, 바로 이 자리에서 법안문익선사라는 큰 스승을 한 번 찾아가 봅시다. 앞에 계시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우리를 대신해서, 자방(子方)스님이라는 스님이 와 계십니다. 그 이전에 금일 영가들이여, 젊은 영령들이 듣기 쉽게 하기 위해서 내가 좋아하는 김광섭씨 <마음>이라는 시를 한 수 영전에 올리고 본론 본문으로 들어가니 한 번 들어보도록 합시다. 마음 나의 마음은 고요한 물결바람이 불어도 흔들리고 구름이 지나가면 그림자 지는 곳 돌을 던지는 사람 고기를 낚는 사람 노래를 부르는 사람 이리하여 이 물가 외로운 밤이면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노니 행여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 어지러워질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는다 내가 참 좋아하는 시 중의 하나입니다. 영령들이여, 수륙고혼들이여, 당신이나 나나, 이 앞에 계시는 모든 분들이나, 날아가는 새나 뒷산에 노루나, 마음의 샘물은 꼭 같습니다. 그런데 한 평생 살다 보면 내 마음의 샘물에 돌 던지는 놈, 고기를 낚아간 놈,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는 놈, 별별 일을 다 당합니다. 금일 영령들이여, 살아가는 동안 많이 당한 일이죠. 그게 인생입니다. 만일 그런 거 아무것도 없는 인생이라면, 그런 인생은 없습니다. 만약 1년 365일 맑은 날만 이어진다면 우리는 진관사 저 푸른 숲은 하나도 볼 수 없고, 들국화, 맨드라미, 봉선화 단 한 송이 꽃도 볼 수 없습니다. 6개월만 맑아도 다 죽어서 사막이 되어 인간은 못 삽니다. 비바람과 태풍과 해일이 저 푸른 숲을 만들어주듯이, 돌을 던지고, 고기를 낚고, 노래를 부르고, 소리를 지른 이것이 인간 삶이라는 걸 알고, 그래도 별은 고요히 물 위에 뜨고, 숲은 말없이 물결을 재우느니, 행여 내가 내 자신이 부처라는 백조가 깨어나는 날, 내 마음의 산물이 흙탕물이라면 어떻게 달이 비추겠냐는 이 말이에요. 백조가 오는 날 이 물가가 어지러워지면 달이 안 비추니까 나는 밤마다 꿈을 덮는다. 그 꿈을 덮는 걸 뛰어넘어서, 꿈 자체와 꿈 아닌 게 하나가 되는 게 오늘 법안문익선사를 찾아가서 당신들이 가야 할 수륙대재의 종착점입니다. 떡 법안문익선사를 찾아갔다 이 말입니다. 가보니 그날따라 자방스님이란 스님이 수륙대재의 도를 물으러 왔다 이 말이죠. 도, 길을 물으러 왔어요. 그러니 법안문익선사가 오늘 수륙고혼들과 그 자방스님을 두고 하는 말이 ‘자방스님, 자네 스승은 장경스님인데, 자네 스승 장경스님이 살아 생전에 늘 평생 쓰신 법문이 <삼라만상 중에 법신만이 홀로 드러났구나.>일세. 자네는 이 말을, 이 스승의 뜻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있는가.’ 이랬다 이 말이에요. 금일 영가여. 삼라만상 중에 때로는 오늘 이 진관사에 오신 그 많은 수륙고혼들이 고통을 받다가 오신 그런 분들은 잠깐이라도 나왔으니 정말 이 시간이 즐거울 것이오, 또는 그보다 덜한 데서 온 사람들은 더 오래 염불을 듣고 싶고 법문을 듣고 싶지만, ‘들을 줄 아는 그 자리는 너와 내가 없는 자리요, 극락과 지옥이 둘이 아닌 자리니, 어떻게 저 허공에 너와 나를 가르며 이쪽과 저쪽이 있겠느냐. 그럼 허공이 있는 것이냐. 있다고 하려니 눈 먼 시각장애인분께 어떻게 허공을 보여줄 것이며, 없다면은 이 집은 어디에 어디에 있고, 나무들은 어디에 어디에 살고 있느냐’ 이 말이에요. ‘있고 없는 걸 뛰어넘는 중도 연기가 존재의 원리더라. 그것이 삼라만상 중에 법신만이 홀로 드러났구나,’ 이랬다 이 말이에요. 그런데 자방스님이 공부를 좀 했는가 몰라도 떡하니 이런 걸(그릇 뚜껑) 들어 올렸단 말입니다. 근데 스승은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그런 것은 인정을 안 해요. ‘자네 그렇게 흉내 내는 건 어디서 배웠어.’ 꽉 막혔다 이 말입니다. ‘금일 수륙고혼들이여. ‘장경스승께서 한 평생 쓰신 <삼라만상 중에 법신만이 홀로 드러났구나.> 이 뜻이 어디 있는가.’ 그러니 그 제자가 또 한 번 대답을 하기를 ‘옛 사람들은 삼라만상을 벗어나지를 못했습니다.’ 그랬어요. 금일 영가들이여, ‘스승이 한 말씀 바로 받아들이면 이거야말로 참으로 아유일원경이요, 상방대광명이란 말이요.’ ‘이 사람아.’ 스승이 하는 말씀이, ‘이 사람아, 삼라만상 중에 법신만이 드러나지 삼라만상은 없다며, 벗어날 삼라만상은 없다고 해놓고는 무엇을 벗어난다는 말인가.’ 이랬어요. 그러니 ‘그럼 삼라만상 중에 법신만이 홀로 드러났다는 그러한 세계를 자네가 한번 물어보게.’ ‘딱 삼라만상 중에 법신만이 홀로 드러났다는 그 세계가 소식이 어떠한 소식입니까’ 하니까, -사실상 법안문익선사는 아무 말 없는 걸로, 입을 다문 걸로 대답을 하고 싶었을 수도 있을 겁니다, 아마. 이건 혼자 생각이니까 이거 욕 얻어먹을 소리지만.- 자비심으로 대답을 하기를 ‘공이지, 공이지.’ 금일 수륙대재에 동참한 모든 영가들이여, ‘저 텅 빈 허공에는 먹물을 끼얹어도 더러워지지 않고, 똥물을 끼얹어도 더러워지지 않으니 텅 빈 공성은 더럽힐 수가 없다. 더러워질 수가 없다는 게 아니라 더럽힐 수가 없다. 밝은 무량광명 아미타 광명을 어디에서 피할 것인가. 오히려 피할 수가 없다. 이게 수륙재야.’ 그런데 자방스님이 여기서 활연대오, 깨달아버렸어요. ‘아하 삼라만상 중에 법신만이 드러났다는 건 드러날 것이 있는 게 아니라 공성이었구나. 벽만 허물어버리면 온통 한 허공인데 나는 벗어난 법신이 있는 걸로 생각을 했었구나.’ 금일 수륙대재에 동참한 하늘과 땅, 명과 양, 물과 뭍, 온갖 유와 무라는 상대성에서 양변이라는 벽을 허물어버리니 중도 연기라는 영원한 평화가 왔으니, 금일영가여. 그게 당신 본질이오, 내 본질이오, 우주의 본질이오. 그걸 부처라 그러고 마음이라 그럽니다. 옛날 선조들이 양 무제 이래로, 고려 광종 이래로, 조선 태조 임금께서 막상 고려를 없애고 조선이라는 나라를 세워보니 얼마나 많은 충신이 죽었으며, 내 편에서 죽은 사람만이 아니라 상대 쪽에서 죽어간 모든 그런 영혼들. 이건 그냥 있을 수가 없는 일이다. 세상 사람들은 내 마음이 상처받은 건 억울하게 생각하지만, 남의 마음의 아픈 상처까지 내 마음의 상처와 꼭 같이 볼 줄 알면 그건 공성입니다. 그래서 부처님 법이, 나와 남을 둘로 보지 않는 나와 남이 하나인 법을 가르쳐주는 부처님 그러한 법이 염불 의식으로 내려와 수륙재가 되었습니다. 그렇다면은 우리 수륙고혼들이, 오늘 모인 영혼들이 해야 할 일이 뭐에요. 벽을 허물어야 되는 거구나. 저 벽을 허물어버리기 전에는 안이 따로 있고 밖이 따로 있으니, 내가 따로 있고 남이 따로 있고, 조선이 따로 있고 고려가 따로 있어요. 그런데 벽을 허물어 버려서 한 허공일 때는 고려 때 허공이나 조선시대 허공이나, 만 년 후에 허공이나 허공은 없어지질 않는 이유가 생하지 아니한 까닭이다. 생하지 아니한 까닭이 아니라, 생과 멸이 둘이 아닌 까닭이다. 그래서 금일 수륙고혼들의 마음의 벽을 허물어버리는 것을 우린 수륙대재라 그럽니다. 서두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너무 서구 문물에 익숙해져서 클래식이나, 팝송 좋아하는 사람은 팝송을 들으면 그냥 마음이 움직인다는 거예요. 그런데 나는 요즘 랩음악인가 뭔가를 들어보니 무슨 ‘샤발락 샤발락 샤발락 언니에게 물어봐. 나 나는. 나는 몰라.’ 도대체가 무슨 소리인지는 모르겠어요. 아무리 들어도 마음이 안 움직여지는 거예요. 근데 아까 딱 들어오는데 하, 염불이 좀 뭐라 그럴까. 꾼들이 하는 염불이 아니라 아주 순수한 정성이 나오는 염불이 떡 들렸어요. 들어와서 합장을 하고 법문 전에 들어보니까 ‘아 정말 좋다.’ 내가 이리 좋은데 수륙 고혼들은 얼마나 좋을까. 덩실덩실 춤을 추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면 금일영가들이여, 춤추는 그 자리에서 머물면 또다시 돌아가야 돼요. 그러니 벽을 허물어버리자. 그럼 생각의 벽을 허물어버리는 방법을 우리는 팔만대장경이요, 그 생각 자체의 벽을 허문 게 아니라, 생각 자체가 우주 진리라는 거를 딱 꽃으로 보여준 게 대화엄입니다. 그러면 대화엄이고 대법화로 한번 들어가 보자. 자 금일영가들이여. 어제 저녁 내가 꿈에, 불이 나서 막 뜨겁다고 난리를 쳤는데 아침에 딱 깨고 보면 불이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그러면 내 생각에서 불이라고 해서 그렇게 막 쫓아다니고, 물이 들어오면 허우적거렸어요. 금일 영혼들이여, 내가 오늘 진관사 수륙재가 고마워서 얼음으로 잘 생긴 조각상을 하나 가지고 와서 저 법당 앞에 놔두면 한 시간 있으면 눈이 녹아버리고 코가 녹아버리고 나중에 요만한 얼음덩어리로 있다가 나중에는 물이 돼버리는데, 금일 수륙고혼들이여, 얼음이 있는 것인가 없는 것인가. 있다고 하니 물이 되어버려서 없어졌고, 없다고 하려니 아까는 분명히 있었고. 얼음이라는 세계는 없다, 삼라만상도 마찬가지다. 나도 마찬가지고 당신도 마찬가지다. 물이라고 하는 존재가 영하라는 인연을 만나면 얼음으로 나투고, 영상이라는 인연을 만나면 물로 나투고, 100도 이상의 끓는 물 인연을 만나면 수증기가 되듯이, 인연만이 있구나. 연기 공성일 뿐이구나. 오늘 서울에서 온 분들 보고, 한강 건너 온 사람 보고 ‘한강 몇 번이나 봤냐’면 ‘스님 수십 번 봤습니다.’ 그것 때문에 마음에 상처가 생기는 겁니다. 눈에 보이는 모든 모양은 저 한강물이 쉼없이 흘러가듯이, 아침에 본 강물은 이미 바다로 흘러가버렸고, 조금 전에 본 강물 또한 흘러가 버렸으니, 우리가 같은 강물을 두 번 볼 수 없듯이, 같은 얼굴도 볼 수가 없고 같은 산천도 볼 수 없고, 얼음과 다를 게 무엇이냐. 다만 얼음이다 물이다 그 만드는 인연은 오늘 나를 만들어서 말을 하게 만들고 수륙고혼들이 인연을 만들어서 듣게 만들고 있으니 인연법의 소중함이여, 연기공성의 소중함이여, 이것이 바로 삼라만상 중에 법신만이 홀로 드러났으니, 금일 수륙고혼들은 듣는 놈이 누구인가. 이 듣는 놈 하나가 바로 연기공성이니, 연기법을 깨달은 나를 깨닫고 나를 깨달으면 연기법을 깨닫는 것이다. 부처님께서 한평생 말씀하신 게 연기 중도법이더라. 그 말을 조사 스님들은, 금일 영가여, ‘벽을 허물어 버리는 방법을 나도 없고 남도 없을 때 어떠합니까. 즉 벽을 허물어버린 상태가 어떠한 상태입니까’ 하고 물으니, <대나무 그림자 댓돌을 쓸어도,> 대나무 그림자가 막 댓돌을 쓴다고 마당을 쓴다고 먼지가 일어나요, 안 일어나요? 안 일어나요. 금일영가여. 고통받는 그림자가 그림자인 줄 알면, 당신 마음만 일으키지 않으면 먼지 하나 일어나지 않고, 밝은 달 연못을 투과해 들어가도 물결 하나 일어나지 않는다. 그 밝은 달 연못에 투과한 달은 천 강에 있건 만 강에 있건 하늘에 있는 한 달이었구나. 금일 수륙고혼 등이여. 알고 보니 나와 남이 오직 한 공성인 부처 뿐이었구나.‘ 금일 수륙대재에 동참하신 수륙고혼들이여.이러한 수륙재 공덕으로 마음이 공한 줄을 바로 보면 생각의 감옥에서 벗어난 시간 금일 영가들이여. 오늘 금일 영가들이 드리워준 그 그늘 아래서 살아가는 후손들이 지극정성 바라옵나니부디 부디 이고득락, 참나인 연기공성 깨달아서 이고득락하여지이다나무아미타불 다 끝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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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재] 9월19일 국행수륙대재 4재 법문
종범스님 2021-09-19
오늘 진관사 신축년 국행수륙대재 법문은 <예불의식과 찬불게송>, 이런 제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禮佛讚佛 解脫妙門 作法儀式 奉行禮佛 예불찬불 해탈묘문 작법의식 봉행예불安立三法壇 莊嚴悉圓滿 안립삼법단 장엄실원만普法普供養 共證無生身보법보공양 공증무생신 불교는 성불하는 게 불교인데, 성불을 하려면 부처님에 의지에서 성불을 한다, 의불성불(依佛成佛)이라. 처음에는 부처님께 귀의하고, 나중에는 스스로 성불하고, 이게 불교거든요. 그런데 초의불을 어떻게 하냐. 처음 부처님에 의지하는 걸 어떻게 하냐. 첫 번째는 신불(信佛)이에요. 부처님을 믿는 거예요. 다음에는 염불(念佛)인데, 신불, 염불. 염불은 공불(供佛)염불이 있고, 부처님께 공양하는 염불, 그다음에 예경(禮敬)염불, 부처님께 예경하는 염불, 그다음에는 찬탄염불, 부처님을 찬탄하는 염불, 그래서 공불, 예경, 찬불(讚佛)이 전부가 다 염불이거든요. 이렇게 염불이 깊어지면 견불(見佛)을 해요. 볼 견자, 부처님 불자, 견불을 보살 수행의 초지보살(初地菩薩)이라 그러는데, 초지보살이 되면 견불을 해요. 그래서 이제 견불이 점점 익숙해지면 보살도가 성숙해서 그다음에 성불이란 말이죠. 그러니까 신불, 염불, 견불, 성불. 그런데 염불은 공불염불, 부처님께 공양하는 염불, 예불연불, 부처님께 예경하는 염불, 찬불염불, 부처님의 공덕을 찬탄하는 염불, 이래서 흔히 그냥 염불이다, 이렇게만 말을 해요, 염불. 그런데 염불을 굉장히 깊이 있게 하고 대중이 다 함께하기 위해서 작법 의식을 만들었어요, 작법 의식. 이 작법이라는 것은 순서, 방법을 정하는 게 작법이에요. 그 법이라는 건 순서법, 방법법 그게 법이거든요. 그걸 이제 세운다, 만든다. 이게 작(作)자란 말이죠. 작법, 거기에 앉기도 하고 서기도 하고 가만히 있기도 하고 창도 하고 하니까 그런 걸 의식이라고 한다 이거죠. 예불은 의식이 있다. 이렇게 돼서 예불, 찬불은 뭐 하는 거냐. 해탈묘문(解脫妙門)이다, 해탈묘문. 그러면 이제 불교가 표현하는 언어 중에 해탈, 열반, 극락, 성불 이런데, 해탈은 장애를 여의는 게 해탈이에요. 이장해탈이라고 그래요. 장애는 무명 삼장이 있고, 수행 삼장이 있는데, 무명 삼장은 혹업고(惑業苦), 미혹과 망업과 고통과, 이게 무명 삼장이고, 수행 3장은 번뇌장(煩惱障), 번뇌가 장애를 일으키는 거, 알아야 할 걸 모르는 소지장(所知障), 또 그다음에는 몸에 쓸데없는 무명 장애가 꽉 끼어서 이 습기가 완전히 벗어나기가 쉽지 않아요. 그걸 습기장(習氣障)이라고 그래요. 습기장은 등각 이후에까지 있어요. 이게 수행 삼장이에요. 무명 삼장, 수행 삼장을 다 여의면 그게 이장 해탈이에요. 장애를 다 여의어서 해탈한다. 그 다음에 열반은 증입열반인데, 열반으로 증득해 들어가는 거에요. 장애를 여의는 열반이 아니에요.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본래 구족 열반이에요, 본래 구족. 그럼 본래 구족 열반은 어떻게 되냐. 증득해 들어가는 거예요. 붙어 있는 장애를 여의는 게 아니고 증득해 들어가는, 그래서 증입열반이라고 그러지요. 이장 해탈, 장애를 여읜다고 안 하거든요. 그리고 극락이라는 것은 자수용정토에요. 스스로 지혜를 이루면 국토가 좋아지는데 지혜 청정, 국토청정을 극락세계라고 한단 말이죠. 그걸 수용하는 거예요. 받아 쓰는 거라고요. 그게 극락세계에요. 그래서 극락은 수용정토고. 성불은 각지성취인데, 성불은 으레 삼신을 구족하는데요. 법신여래, 보신여래, 화신여래인데, 법신여래는 그냥 청정법신, 진여법신, 청정, 진여. 그 몸을 깨달으면 깨닫기 전부터 있었고, 깨달은 후에도 있었고, 이게 진여법신이거든요. 그러면 그 진여법신을 깨달으면, 진여법신을 깨달은 공덕으로 지혜가 나와요. 이거를 화엄경여래출현품 제일 첫 게송에서 <정각 공덕으로 대지출이라>, 정각의 공덕으로 대지가 출연했다. 깨달으면 중생의 업식이 전부 지혜가 돼요. 이게 정각 공덕 대지출이에요. 이거를 보신여래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법신은 진여신이고, 보신은 지혜신이고, 화신은 자비 원력의 몸이니까 비원신이다. 그렇게 지혜를 갖추면 자비심이 쫙 일어나고, 자비심이 일어나면 원력이 행해져서 천백억 화신으로 자비원력을 실행하니까 그걸 화신이라고 한다 이거죠. 이게 성불이에요. 그래서 해탈, 열반, 정토, 성불, 이건데, 다 이게 처음에는 부처님께 의지해야 돼요. 의불이에요. 그러면 점점 다 이루어져서 성불 한단 말이죠. 그 과정에 신불, 염불, 견불, 성불, 이렇게 나오는데 혼자 하는 게 아니고 여럿이 같이 해야 되니까 작법 의식으로 이걸 하게 됐다. 그럼 첫째 작법이 뭐냐. 3단을 설치하는 건데, 상단 설치, 중단 설치, 하단 설치. 상단은 불보살을 모신 단이 상단이고, 중단은 호법선신(護法善神)을 모신 단이 중단인데, 신중단이라고 그러죠. 상단은 불보살단이고, 하단은 시식단인데, 중단에는 진공이라고 그러고 공양을 올린다, 하단은 시식이라 그래요. 이게 전부 작법이에요. 그리고 상단은 헌공이라 그러고, 헌공, 진공, 시식. 이렇게 시식단에는 영가를 모시는 단이라 영단이라고도 하고, 늘 향공양을 올리기 때문에 향단이라고도 하고, 늘 시식을 하니까 시식단이라고도 하고, 또 상단, 중단보다 한 단계 낮으니까 하단이라고도 하고. 이렇게 삼단을 딱 설치를 해서 모든 게 삼단에서 작법 의식이 이루어져요. 이게 불교 의식이에요. 그런데 여기에 예외가 하나 있어요. 조선시대 서산 스님께서는 조사 선법으로 조사선을 이야기하는 의식이 있는데 그걸 설선의라, 선을 말하는 의식이다. 조사선법으로 시식하는 단을 운수단(雲水壇)이라고 그래요. 구름 운자, 물 수자. 이게 의식에 들어와 있어요. 청법 의식에도 보면 그런 게 들어와 있고. 근데 그거는 하나의 법식이고, 기본은 3단이에요. 이렇게 단을 설치를 해서 공양을 하는데, 이 공양은 상단 헌공이나 중단 진공이나 하단 시식이나 똑같이 보공양(普供養)을 해요. 보공양, 보공양 진언이 없는 데가 없어요. 보공양, 넓게 다 공양을 하는 거예요. 넓을 보자, 보 공양이죠. 그 모든 의식에 보공양, 보회향이 안 들어가는 데가 없어요. 이게 불교 의식이에요. 그럼 보공양은 어때서 보공양이 되냐. 보법보공양(普法普供養), 넓을 보, 법 법, 보법보공양인데, 이 보법이라고 하는 것은 일승법이고, 일승은 불성이다, 부처님 깨달은 그 경지를 보법이라고 그래요. 그게 일승법이라고. 일승 보법, 불승 보법, 불과 보법, 부처님 결과의 보법이다. 그걸로써 공양을 한단 말이죠. 그래서 보법으로 보공양해요. 그래가지고 불교 의식은 안립삼법단(安立三法壇)하고, 삼법단을 안립을 하고, 안치 건립한다고 그래서 안립인데, 안치해서 건립을 하고, 장엄실원만(莊嚴悉圓滿)이라, 장엄을 다 원만하게 한다. 보법보공양(普法普供養)으로, 넓은 부처님 법으로 넓게 공양하는 공덕으로, 공증무생신(共證無生身)이라, 우리가 느끼고 있는 중생 업식의 몸은 생멸이 있는 몸인데, 지혜로 얻은 몸은 생멸 없는 몸을 지혜로 얻는다 이거지요. 그게 무생신이에요. 생멸 없는 몸이라고. 생멸 없는 몸을 얻으면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러고, 그걸 성불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함께 생멸 없는 몸을, 증이라는 건 얻을 득자와 마찬가지인데, 증득하는 것이 불교 의식의 중심이다 이거에요. 이게 기본이고. 云何爲人演說 不取於相 如如不動 (金剛經 應化非眞分32) 운하위인연설고 불취어상하야 여여부동이니라(금강경 응화비진분32) 그다음에는 이런 부처님의 찬불과 예불, 또 부처님의 경전 송경을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하는 걸 경에서 얘기를 하는데, 금강경에 보면 이 경을 연설을 하는데 <운화위인연설고(云何爲人演說)> 이랬어요. ‘어떻게 사람을 위해서 연설해야 합니까.’ 아 이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불취어상하야 여여부동이니라(不取於相 如如不動)> 이랬거든. 그게 ‘경전을 설할 때는 불취어상 여여부동으로 살아라’, 이 말인데, 그럼 불취어상이라는 건 뭐냐. 이 염불을 해서 견불해서 성불하고자 하는 보살은 세상 사물을 취하지 마라. 이걸 제상(諸相)이라 그래요. 모든 제자, 상이라는 상자, 제상. 제상은 세간상인데, 이 세간의 모든 것들을 취하지 마라. 불취제상이 불취어상이지요. 그다음에 어떻게 해야 되냐. 여여부동이라. 여여부동이라는 말은 무슨 말이냐 그러면은, 여여부동, 주어무주(住於無住)하라. 머물며 없는데 머물러라. 이게 성불이에요. 주어무주. 무주에 머문다. 왜 그러냐 하면 이 부처님 법의 세계는 만법에 무주상이오, 만법에 상광명이라. 만법에 머무는 상이 없고 만법에 항상 광명을 비추는 게 부처님 법이기 때문에 무주에 머무른다, 큰 데도 머무르지 않고, 작은 데도 머무르지 않고, 보이는 데도 머무르지 않고, 보이지 않는 데도 머무르지 않고. 이게 여여부동이에요. 그래서 ‘어떻게 이 경을 설해야 합니까.’ 이렇게 물으니까 ‘불취어상하여 여여부동이니라.’ 그게 무슨 얘기냐. 불취세간상하고, 세간상을 취하지 말고, 주어무주하라, 머뭄이 없는 곳에 머물러라. 그럼 바로 성불하는 거예요. 불취제상, 불취제상하고. 제상은 세간상이니까 주어무주하라. 바로 성불이에요. 머뭄이 없는데 머물면 그게 바로 해탈이고 그게 바로 극락이고 그게 바로 열반이고 그게 바로 성불이에요. 그렇게 가르쳐 놨어. 그러니까 우리가 그렇게 현재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런 원력을 가지고 하면 금방 되거든요. 그러니까 현재 안 된다고 비관할 거 절대 없어요. 애가 커서 어른 되지 무슨 뭐 어른이 커서 어른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불경말학(不輕末學)하라, 말학을 가벼이 여기지 마라. 말학이라는 건 제일 끝에 출발한 학인을 말학이라고 그러잖아요. 말학이 구참이 되는 거지, 말학 없이 어떻게 구참이 되냐 이거예요. 入如來室 著如來衣 坐如來座 廣說斯經 如來室者 大慈입여래실 착여래의 좌여래좌 광설사경 여래실자 대자悲心是 如來衣者 柔和忍辱心是 如來座者 一切法空是 비심시 여래의자 유화인욕심시 여래좌자 일체법공시大慈悲爲室 柔和忍辱衣 諸法空爲座 處此爲說法대자비위실 유화인욕의 제법공위좌 처차위설법(法華經法師品제10) (법화경법사품 제10) 그리고 법화경에서는 법화경을 강설하는 법사는 <여래 방에 들어가고 여래 옷을 입고 여래 자리에 앉아서 이 법화경을 널리 널리 말할지니라(入如來室 著如來衣 坐如來座 廣說斯經)> 이렇게 했어요. 여래실 여래의 여래좌. 이게 참 겁주는 거 같아요, 완전히. 여래실에 어떻게 들어가냐. 여래옷을 어떻게 입냐. 여래 자리에 어떻게 앉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는데, 거기서 설명을 하기를, 여래실자는, 여래의 방이라고 하는 것은 대자비심이시오(如來室者 大慈悲心是). 큰 자비심이 그게 여래의 방이다. 그러니까 이런 염불법사는 첫째 자비심을 가져야 된다. 그게 여래의 실이다 이거지요. 두 번째는 <여래의자는 유화인욕심이 이것이다(如來衣者 柔和忍辱心是).> 유화인욕심이시다. 유화하고, 부드럽고 화합하고, 인욕하고, 어려운 걸 있으면 참는 게 그게 경을 설하는 사람의 자세다 이거죠. 유화인욕심이 여래의 옷이고. <여래의 좌자는, 여래의 자리라는 것은 일체법공이시니라(如來座者 一切法空是).> 일체법이 다 공한 것이 그게 여래의 자리다. 색도 공하고 공도 공하고 유체 만법계가 다 불생불멸이다. 공이란 불생불멸인데, 그걸 여래의 자리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여래는 항상 불생불멸의 자리에 딱 앉아 계시니까 여래경을 설하는 사람도 여래의 자리에 앉아서 여래의 경을 설하라. 이거죠. 그러면 어떻게 해야 그렇게 되냐. 지극 정성으로 염불을 다 하면 자기도 모르게 그 자비심이 생기고 인욕심이 생기고 불생불멸 자리에 들어가게 되는 거에요. 일부러 마음 먹어서 되는 게 아니라 정성 일심으로 정성 한 마음이 그렇게 돼요. 그래서 염불 정진, 염불 공덕이 참으로 무량하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거든요. 근데 이제 모든 것은 불에 의지해서 성불하는 거기 때문에 부처님을 잘 믿고 염불하고 그러면 부처님을 친견하게 되고 그러면 부처님을 성불하게 된단 말이죠. 그래서 모든 의식에는 부처님을 제일 먼저 모셔야 돼요. 그걸 거불(擧佛)이라 그래요, 거불. 들 거자, 부처 불자 쓰는데, 거불 없는 불교 의식은 없어요. 거불이 뭐냐. 거자는 움직일 거자가 되고, 또 받들 거자가 되고 그러는데, 움직인다는 말은 부처님을 청해서 잘 받들어서 헌좌진언으로 딱 부처님을 모시는 게 그게 거불이거든요. 이 거불을 소홀히 하는 불교 의식은 없어요. 그래서 시간 없다고 막 거불을 후딱 하고 그러면 그거는 불교 예경에 조금 어긋나는 거예요. 다른 걸 생략을 해도 거불은 아주 잘 하고. 또 범패도 어디서 범패 법사의 급수가 결정되냐. 거불 범패 하나 딱 하는 거 보면 알아요. <나~> 이거 쉬운 일이 아니에요. 거불범패를 그러니까 연습을 자꾸 하셔요, 하고 또 하고. 서예원에 가서 붓글씨 배울 때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게 영자팔법이라고, 길 영자 이 팔법이 있는데 이것만 가르쳐요. 그게 기본이에요. 그러니까 이 범패는, 이 거불 범패가 제일 중요해요. 그래서 이 거불 창법 이거 잘 하고, 아주 자신이 있고 공경이 푹 배면 다른 거는 다 잘 될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 <나~> 하는 그 나무 거불범패 이것들을 아주 몸에 꽉 배게, 자신이 만만하게 그렇게 하시면 염불이 겁나지도 않고 다른 사람에게 환희심도 주고 나에게 큰 법력이 성장하고 그런 거예요. 자기 성장 없이 절대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없어요. 내가 성장하는 것만큼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거든요. 그래서 자리가 이타지 자리 없는 이타는 없다. 이게 보살도거든요. 그래 하라 그랬고. 讚佛頌 찬불송蟭螟眼睫起皇州 玉帛諸侯次第投초명안첩기황주 옥백제후차제투天子臨軒論土廣 太虛猶是一浮漚(華嚴大禮文 第1禮文)천자임헌논토광 태허유시일부구(화엄대예문 제1예문)佛身普遍十方中 三世如來一切同불신보변시방중 삼세여래일체동廣大願雲恒不盡 汪洋覺海渺難窮(華嚴大禮文 第14禮文)광대원운항부진 왕양각해묘란궁(화엄대예문 제14예문)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불신충만어법계 보현일체중생전隨緣赴感靡不周 而恒處此菩提座(華嚴經如來現相品제2)수연부감미부주 이항처차보리좌(화엄경여래현상품제2)剎塵心念可數知 大海中水可飲盡찰진심념가수지 대해중수가음진虛空可量風可繫 無能盡說佛功德(華嚴經入法界品제39)허공가량풍가계 무능진설불공덕(화엄경입법계품제39) 그다음에 화엄경에 보면 견불하기 전에는 찬불이 그렇게 많아요. 화엄경에 보면 게찬품이 세 군데 있는데, 수미정상게찬품, 야마궁중게찬품, 도솔궁중게찬품이 있는데, 이게 전부 찬불송이에요. 게찬이라는 거는 게로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거거든요. 왜 그렇게 찬불이 많냐. 아직까지 견불을 못한 보살들은 찬불을 통해서 부처님을 아주 가까이 믿게 돼요. 근데 십지품에 올라가면 찬불송이 없어요. 바로 본문으로 돌아가버려. 그거는 왜냐하면 이제 견불을 했기 때문에, 환희지에서 부처님을 봤기 때문에 더이상 찬불이 필요가 없어 그렇게 된단 말이죠. 그러니까 이 찬불을 잘하면 바로 견불을 하게 되고, 견불하게 되면 성불하게 돼요. 그런데 우리 의식문에 보면 찬불송이 엄청나게 많거든요. 많은데 그중에 내가 아주 어릴 때부터 그거 참 의문 덩어리였는데, 오늘은 화엄경을 안 가져오고 이걸 가져왔는데, 제목이 화엄대예문이에요. 화엄대예문. 화엄대예문인데 여기에 예경 의식이 쭉 나온단 말이에요. 근데 여기 첫 번째 제1배 예경문에 송이 나오는데, 이 비로자나불 송인데, 그 비로자나불송에 무슨 말씀이 있냐. 이 첫 번째 화엄 대예참 제1배 찬불송인데, 아 나 이것 때문에 참 애 먹었어요. 이것 때문에. 어떻게 살아야 되나. <초명안첩기황주(蟭螟眼睫起皇州)>, 그거 외우는 사람 있어요? 요새 이 대예참을 안 하면 몰라요. <옥백제후차제투(玉帛諸侯次第投) 천자임헌론토광(天子臨軒論土廣) 태허유시일부구(太虛猶是一浮漚)> 이게 화엄대예참 첫 번째 절할 때 나오는 찬불송이거든요. 초명이라는 것은, 이게 뭔 말이냐. 파리인데 파리 중에도 제일 작아서 보이지도 않는 파리를 초명이라 그래요. 파리 초, 파리 명. 근데 그 파리에 안첩, 눈 안 자, 눈썹 첩자, 그 파리 눈썹, 그렇게 작은 파리 눈썹이 얼마나 작겠어요. 근데 거기다가 황제의 나라를 세워, 초명안첩에다가 기황주라, 임금 황자, 고을 주자, 고을 주자는 국토라는 말이거든. 임금의 국토를 툭 세워서 그런데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옥백 제후가 차제투라. 구슬 옥자, 비단 백자인데, 옥백이라는 것은 황제가 있으면 그 산하의 제후 국가의 왕들이 전부 조공물을 가지고 오는 그 조공을 옥백이라고 그래요. 조공을 들고 오는 제후의 왕들이 차제투라, 차례차례로 온다. 던질 투자는 온다는 말이거든요. 기가 막혀. 그런데 천자가 임헌해서 논토광하니, 천자 황제가 궁전에 떡 앉아서 자기 국토가 넓고도 넓다 하는 걸 논하니, 얼마나 그게 넓으냐, 태허유시일부구라. 태허공이 오히려 한 바다에 물거품과 같다. 뜰 부자하고 물거품 구자가 있거든요. 이런 게송을 해요. 그래서 어떻게 이게 가능하냐, 아주 참 애를 먹었는데, 이게 왜 그런고 하니까, 불경계는 작아도 작은 상이 없고, 커도 큰 상이 없어요. 크다 작다 하는 것은 의식 경계요, 불경계는 일미진중에 함시방이고 또 일념 즉시 무량검이고 해서 일찰라가 또 일찰라에 자체가 없고, 무량겁에도 무량겁에 자체가 없어서, 크고 작은데 전혀 장벽 장애가 없는 게 불경계에요. 그래서 뭘 안 해도 안 한 장애가 없고, 해도 한 장애가 없고 이게 불경계이기 때문에 초명안첩의 황제 국가를 세웠는데 거기에 모든 제후들이 다 조공을 들고 와서 조공을 바친다, 차지했더라. 근데 그 국토가 얼마나 넓으냐 하면 이 세상에 그렇게 넓은 국토는 없다. 천자가 임원논토광 하니까 얼마나 넓으냐. 태허공이 오히려 한 물거품과 같다. 이게 화엄경 법신송 아주 중요한데 이건 경전에는 없어요. 화엄 예경에만 있는 거에요. 그리고 우리가 많이 아는 불신보변시방중(佛身普遍十方中) 삼세여래일체동(三世如來一切同) 광대원운항부진(廣大願雲恒不盡) 왕양각해묘란궁(汪洋覺海渺難窮), 이것도 경전에는 없어요. 예경에만 있어요. 그리고 불신송으로 삼신불이 다 포함된 불신송인데, 불신충만어법계(佛身充滿於法界)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靡不周)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 이거는 여래현상품에 있는데 이것은 불신, 보통 삼신불이 기본인데 여기에 더하면 이제 십신불이거든요. 십신불 전체를 다 찬탄하는 게 이런 불신충만어법계고. 이 진여불 또 각지불, 비원불, 일체 원불, 주지불, 선정불, 이런 불공덕이 얼마나 무량하고 무궁하냐 하는 거를 80화엄경 제일 마지막에서 두 번째 찬불송인데, 찰진심념을가수지(剎塵心念可數知)하고, 일체 중생의 마음을 다 헤아려서 알고, 대해중수를 가음진(大海中水可飲盡)하며, 온 바닷물을 한 입으로 다 들어마셔, 허공가량풍가계(虛空可量風可繫)라도, 허공이 얼마나 되는지 전부 헤아려서 다 측량을 하고, 바람을 오도가도 못하게 얽어맬 수 있다 하더라도, 무능진설불공덕(無能盡說佛功德)이라, 불공덕은 다 말할 수가 없다. 화엄경은 이래서 불경계 불공덕이에요. 불경계. 불경계 불공덕이 이렇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런 찬불송을 일심으로 딱 하면 그 순간 성불이에요 그게. 거기에는 자비심도 생기고 인욕심도 생기고 아무 분별 집착이 없으니까 불생불멸 법공좌에 딱 앉게 된단 말이죠. 그래서 이런 공덕으로 일체 수륙공계명양무주고혼영가들이 다 이 부처님의 가피로 불경계 공덕으로 이고득락하고 필경 성불하는 것이 불교 의식 작법의 법칙이거든요.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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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재]9월 12일 국행수륙재 3재 법문
혜거스님 2021-09-12
진관사는 나라를 위해서 재를 모시는 절이잖아요.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진관사가 그런 역할을 했던 걸 잘 몰라요. 중국 태산에 가보니까, 그 나라를 위해서 재를 지내던 곳이 태산이거든요, 태산. 임금이 1년에 한 번씩 거기 가서 참가를 했어요. 중국 사람들은 지금도 그걸 알고있고, 중국 사람만 아는 게 아니라 세계 사람들이 다 알아요. ‘중국 태산은 나라를 위해서 재를 지냈던 곳이다.’ 그러나 ‘진관사는 나라를 위해서 이렇게 크게 재를 모셨던 곳이다.’ 하는 것은 아는 분만 알지, 대부분 잘 몰랐어요. 근자에 와서 진관사에서 수륙대재를 이렇게 크게 봉행함으로 해서 널리 ‘옛날부터 진관사에서는 나라를 위해서 큰 재를 모셨던 곳이다.’ 하는 걸 이제 조금씩 조금씩 알아가고 있습니다. 근데 종교 그러면은 몇 가지 조건이 있는데, 그중의 하나가 의전이에요. 의전이라고 하는 게, 의례 의전이 그렇게 중요한데, 그 의전을 하나도 빠트리지 않고 살려서 이렇게 봉행하는 진관사 수륙대재는, 정말로 지금 현재 전 세계가 고통받고 있는 코로나를 빨리 소멸시켜서 온 세상이 태평하기를 간절히 발원하는 그러한 재가 되고, 또 하나는 이 땅에 살고있는 우리 중생들뿐만 아니라 모든 수중고혼 또 육지의 모든 많은 중생들이 다 함께 고통에서 벗어나서 모두 이고득락하기를 간곡히 발원하는 큰 재입니다. 여러분들은 전부 주역이 돼서 이 재를 지금 봉행하고 계십니다. 그 뜻이 꼭 이루어져서 빨리 코로나가 없어지고, 모든 사람들이 질병에서 벗어나고, 모든 사람들이 근심 걱정에서 다 벗어나시기를 간곡히 발원을 합니다. 사람이라고 한다면은 원을 가진 사람과 원이 없는 사람, 이 두 가지 류로 나눌 수가 있어요. 원을 가진 사람은 이 세상의 주인이 되는 사람들이고, 원이 없는 사람들은 주인이 되는 사람이 아니고, 남의 심부름꾼, 종이 되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큰 원을 가지고 있기에 이 재에 모두 다 참여를 하고 계십니다. 그러면 그 원을 어떻게 할까. 우리가 살고 있는 현실에서 여러분들 가족, 친지 그리고 자녀들 모두 다 한 단계 향상되기를, 한 단계 더 올라가서 더 잘 살 수 있도록 이런 세상을 만들기 위해서 원을 갖는다 말이죠. 그러면 원을 이루기 위해서 하는 것이 뭐가 있느냐. 자기를 닦는 겁니다. 자기를 닦는 것 중에 세 가지가 있어요. 첫 번째로는 경전 공부를 열심히 해서 나를 닦는 것. 두 번째로는 지금 이렇게 의전 연구를 해서 열심히 나를 닦는 거. 세 번째로는 그야말로 내 본성자리를 찾는 참선 명상을 해서 나를 찾는 거. 이런 세 가지 방법을 가지고 우리는 그 원을 이룹니다. 이 세 가지를 얼마만큼 잘하느냐에 따라서 자기 원이 얼마만큼 이루어지느냐가 달려 있어요. 정말로 자기 원이 잘 다 이루어지려고 한다면은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가지고 더 열심히, 더 열심히 했을 때 그 뜻이 이루어집니다. 여러 가지 중에서 염불, 과연 염불을 한다고 운명이 바꿔질 수가 있을까. 내 업이 바꿔질 수 있을까. 지난번에 외국 대사 부인들에게 참선, 명상을 가르치는데 한 분이 손을 들고 질문을 하는데 뭐라고 질문하느냐. ‘이 세상에 전쟁이 없고, 질병이 없고, 천재지변이 없고,’ 이런 것을 간곡히 발원하는 발원문을 먼저 말을 했더니, “그 원이, 그 발원이 잘 안 되기 때문에 무엇을 갖느냐 하면 종교를 갖는다. -아주 종교적인 분이더라고요. 종교를 갖는 분이다.- 그런데 종교의 힘이 아니고 그 뜻을 이룰 수가 있습니까, 천재지변을 물리치고 질병에서 벗어나고 전쟁에서 벗어날 방법이 있습니까. 그래서 자기네는 종교에 간절하게 매달린다.” 이런 얘기입니다. 그것은 바로 자기가 부딪쳐 있는 일을 남에게 부탁하는 것이 됩니다. 종교에 의해서 ‘자 이거를 없애게 해주세요, 이 질병에서 벗어나게 해주세요,’ 부탁하는 것이 되지요. 어떻게 하면 이 질병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내가 그 길을 찾아내는 것이 참선이고 명상이다. 그렇게 하니까 그때 얼른 또 긍정도 굉장히 잘해요. 질문도 잘하고. “부탁하는 것과 내가 내 길을 찾아가는 것과 같지가 않다 이건. 이 세상의 모든 일은 사람이 자기 스스로 자기 길을 찾아가는 것이 진정한 바른길이에요. 이것이 바로 명상이고 이것이 바로 참선이다.” 이렇게 말해준 일이 있습니다. 그러면 지금 코로나가 이렇게 난리가 나고, 또 세상 가만히 보면 지금 무엇이 염려가 되냐. 지금 젊은 청소년들, 어린 애들이 크고 나면 어떤 세상이 될까? 자세히 살펴보면 난감해요. 왜 난감하냐. 어른들이 하는 짓을 보고 얘들은 크는데, 하는 짓이 너무 난감한 짓만 하거든요, 어른들이. 그런데 그걸 보고 자란 애들이 그것 말고 다른 길을 갈 방법이 없잖아요. 그럴 때 우리가 무엇을 해야 되겠느냐. 그럴 적에 어른들이 복잡한 이 상황에서 벗어나려면 가장 중요한 것이 내가 잘살기 위한 마음을 가질 것인가, 세상이 잘 사는 세상을 만드는 데 마음을 가질 것인가, 이것뿐이거든요. 세상이 잘 사는 세상을 가려고 마음을 먹으면 내가 아니죠 그거는. 내가 아니에요. ‘내가 잘 안 살아도 좋으니까 온 세상이 편안하게 해달라. 온 세상이 편안하게 하려면 어떻게 할까.’ 이 마음이 간절해진다면 지금과 같은 그렇게 괴상망측한 짓은 하지 않을 것이고, 이 세상을 잘되게 하기 위해서는 서로 양보하고, 이렇게 가르치는 사고 방식을 자세히 찾아보니까 이런 방법을 역대로 모든 현인 성자들은 읊지 않은 사람이 하나도 없어요. 그거는 노자도 똑같이 불선지선, 앞 가지 않고, 남을 앞 가게 밀어주고, 나는 뒤에 밀어주고 가는 사람이 되겠다. 이게 불선지선이거든요. 주역에서도 그렇게 가르쳐요. ‘앞 가고자 하지 말고, 나를 위하지 말고, 세상을 위해서 산다면 그것이 바로 사람이 사는 길이다.’ 이렇게 했는데, 여기서 한 가지 우리가 확신을 할 것이 그렇게 말만 있지, 노자나 주역에서는 그렇게 되는 방법이 없어요. 그런데 그렇게 말만 하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되는 방법을 제시하는 가르침은 불교밖에 없어요. 이 세상에서 올바로 가고 올바로 성장하고 올바로 크게 성공하게 길을 제시해 주는 것은 불교가 가장 옳게 가르치고 있습니다. 처음에는 바로 내 길을 내가 찾아야 되겠다고 혼자 간다고 해서 찾아지는 게 아니란 말이에요. 그러면 처음에는 누구의 가르침이 있어야 돼요. 그 가르침이 바로 부처님의 말씀이고, 경전입니다. 그러면 경전에 의해서 우리는 내 길을 아는 거예요. 내가 어느 곳으로 가야 될지를 안다 이 말이죠. 그럼 경전 가운데서 가장 참선 수행의 아주 기본 교재가 되고 있는 능엄경이라고 하는 경전에서 보면, 사람이 정말로 자기 길을 제대로 찾아가는 방법을 어떻게 가르치느냐. 기탁념(棄濁念) 그래요. 이 세상에 혼탁하게 물 들은 것을 씻어내 버리고. 탁은 혼탁하고 물들고. 그러니까 혼탁하게 물든 것은 뭡니까. 보고 듣고 배워서 욕심내고 화내고 하는 것들이 전부 혼탁하게 물들어서 그런 일이 벌어지거든요. 이걸 내버리는 거예요. 이걸 내버려서 발묘명(發妙明) 하는 것에다가 전념을 다 해라. 이 오묘하고 환히 밝은 지혜가 있으면 그런 일을 안 하게 되니까 이런 지혜를 찾아내는데 전력을 다해라. 지혜가 있으니까 찾아내는 것은 무엇과 같으냐. 캄캄한 밤에 길을 갈 때는 아무것도 안 보이니까 이리 가고 저리 가고 물이 들고 진흙탕에 빠지지마는, 훤한 낮에 길을 가니까 물에 빠지는 일이 없다, 이것이 묘명이에요. 그래서 우리는 훤한 낮 길을 가기 위해서 최선을 다하는 것인데 훤한 낮 길은 어디에 있느냐. 내 욕심 하나, 내 오욕 하나, 내 화내는 마음 하나, 하나씩 하나씩 떨어져 나가고 나니까 날이 훤히 밝아지더라. 하나씩 그것이 열리지 않으면은 밝은 날이 아니라 컴컴한 밤이었어요. 근데 컴컴한 밤에서 화내는 마음 하나 떨쳐 내버리고, 컴컴한 밤에서 그야말로 욕심부렸던 탐욕 하나 떨쳐 내버리고, 이렇게 하다 보니까 묘명이에요. 아주 무궁무진하게 밝은 지혜가 거기서 쏟아져 나온다는 말이에요. 밝은 지혜가 쏟아져 나오는 그때에는 바로 훤히 밝은 대낮이 됐다. 그러니까 다시는 잘못 가는 길을 안 가게 되는 그런 경지가 바로 다름이 아니라 내 오욕을 내버리고 내 마음의 습관 들었던 모든 것을 싹 씻어 내버렸더니 훤히 밝은 낮이 되더라. 이렇게 가르치는 것이 능엄경이에요. 그러면 이런 말을 들으니까 ‘아 나도 한번 내버리고 밝은 낮으로 가야지’ 이렇게 발심을 한단 말이에요. 이렇게 발심을 하게 능엄경에서 가르쳤지, 완전하게 열게는 또 안 돼 있어요. 그럼 여는 것은 누가 하느냐. 자기가 하는 거란 말이에요. 자기가 하는 거예요. 부지런하면 부자 된다. 옛날부터 대부는 유천(大富由天)이요, 소부는 유군(小富由勤)이다, 그래요. 큰 부자는 하늘이 내리고 적은 부자는 부지런하기만 하면 부자가 된다. 그런데 그러면 적은 부자 되는 것은 누구든지 따 놓은 당상이에요. 가난하게 살라고 살게 돼 있지가 않아요, 내가 부지런하기만 하면. 이 말은 맞기는 맞는데 안 부지런해버리면 부자가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아는 것과 행동이 그렇게 다르다 이 말이에요. 그러면 지금 오늘 이런 행사를 하고 나서 우리는 이 행사 끝에 무엇을 하느냐. ‘아, 그동안에 내가 알고 있던 거, 잘못된 거, 버릴 거, 지금까지는 알기만 했는데 이제부터는 그걸 실천해 옮기자, 실천에 옮기자.’ 이 다짐이 오늘의 행사의 다짐입니다. 그런데 이 다짐을 해서 실천에 옮기니까 어떻게 돼요. 기탕념하고 발묘명하는 위치에 이르게 됐다. 그다음에 모든 가르침이 다 똑같아요. 기신론이라고 하는 아주 유명한 참선 수행의 교과서가 있습니다, 기신론. 그걸 보면 참 기가 막히게 잘 돼 있거든요. 개일심(開一心)하야, 일심 한 마음 한 마음을 딱 밝혀가지고, 열어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 가는 게 아니에요. 명이문(明二門)이에요. 생멸문(生滅門)과 진여문(眞如門)을 딱 이렇게 밝혀주는 거예요. 그러면은 우리가 지금 세상 살아가는 데 이 세상에서 생멸문이라고 하는 문은 무엇이냐. 정말로 탐욕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시비 분쟁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이렇게 살다 보니까 결국은 생멸문에 빠져서 윤회를 계속하게 된다. 이게 생멸문이에요. 그런데 일심을 훤히 딱 깨닫고 나니까, 깨닫는 일심은 뭐냐. 모든 것이 마음에 달렸다는 것을 아는 거예요. 이제 마음에 달렸다는 거에요. 이미 부처님께서 무엇을 아셨습니까. 일체유심조, 모든 것은 내 마음에 달려 있다, 이걸 알았어요. 알았는데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기만 하고 또 실천에 안 옮기면 그것도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마음에 달려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지금부터 마음을 실천하는 일에 적극 나선단 말이죠. 그러면 어떤 경지에 이르게 되느냐. 이때 실천에 옮기니까 그야말로 일심이 훤히 밝아서 그 자리에는 근심 걱정 모든 것이 다 끊어지고 조금도 잘못 가는 길이 없는 밝은 길, 그 자리가 무슨 길이냐. 진여문이라. 그러면 이제 이 진여문에 드는 사람과 생멸문에 든 사람 이 두 가지를 한번 비교를 한다면, 생멸문에 든 사람은 임종기가 됩니다. 요즘 나도 이제 어느 정도 나이가 돼서 그런지 만나도 ‘야 이 녀석. 너 이리 와.’ 이렇게 친하게 얘기해 주던 이런 노장들이 없어요, 이제는. 만나면 그냥 ‘안녕하십니까.’ 그러면은 어떻게 돼요. 그렇게 되면 좀 있으면은 아는 사람 다 가고 나니까 결국 남는 것은 내 차례구나, 한심스럽고 통곡하는 일만 남는 거예요. 이럴 적에 정말로 여기에서 훌훌 벗어가지고 진여문으로, 진여문의 생사에서 해탈하는 해탈문으로 우리가 가야 되겠는데 이 생사해탈이 그렇게 어려운 문인가. 어렵지 않습니다. 한 가지 알아야 돼요. 지금 생사해탈은 사람들보다 미물들이 더 잘하고 있어요. 산속에 올라가 보면 산속에 수많은 짐승들이 사는데 짐승들 뼈 하나도 없어요. 왜 없을까. 자기가 가게 되면은 숨기고 가요. 그런데 사람은 가면서 자기 몸을 숨겨요? 못 숨겨요? 못 숨겨요. 그 옛날에 선지식들은 숨겼어요. 자기 임종하는 모습을 남에게 안 보였어요. 지금 오대산에 한암 노스님. 여러분들 잘 아시죠. 6•25 때 임종하는 날이 오니까 모시고 있던 스님이 만화스님이었는데, 손주상좌인 만화스님 보고, ‘야 너 진부 가서 약 좀 지어와라.’ 그런데 그때 어떤 상황이었느냐. 오대산은 격전지예요. 북한 사람들하고 격전을 했었어요. ‘스님, 지금 나갈 수가 없습니다. 저기 총소리 안 들리십니까. 갈 수가 없습니다.’ 이러니까 ‘이놈의 자슥이, 어른이 하라고 하면 해야지.’ 어른 말을 안 듣는다고 소리를 질러서, 할 수 없이 만화스님이 나가셨어요. 약을 가지고 돌아와서 보니까 이런 의자에 앉아 가버리셨단 말이에요. 그 모습을 안 보여준다 이 말이에요. 그렇게 해서 자기의 마지막 모습, 딱 가는 모습을 그렇게 안 보여준 근자에 가장 큰 스님이세요. 남 보는 앞에서도 근사하게 잘 가는 사람은 참 드뭅니다. 드물지만, 여기 밖에 우리 신도님들도 계시는데, 열심히 절에 다니면서 염불을 했던 분들 가운데 깜짝 놀라게 잘 돌아가신 분들 많아요. 진부에 그런 노인네가 계시는데, 보살이신데, 아침에 가서 보니까 밤에 아무도 모르게 혼자 목욕재계하고, 머리 다 빗어서 딱 묶고 그렇게 옷 새로 갈아입고 이불 덥고 그냥 가신 거예요, 편안하게. 어떤 이들이 그렇게 하느냐. 일생을 염불만 했어요, 그냥.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일생을 염불만 하니까, 그이는 그렇게 해서 가더라고요. 그렇게 가니까 월정사에서 난리가 났어요. 보살이 중보다 더 잘 가버렸단 말이에요, 중보다도. 또 저희보다 한참 선배인데 돈암동에 가면 거기는 비구니 스님이에요. 이 스님은 지장보살을 열심히 하셨어요. 딱 임종이 끝났는데 손에서 단주가 달칵달칵 돌아갔어요. 지장보살을 그 정도 해야 그렇게 임종을 하세요. 그러니까 그 정도 될려면 얼마만큼 했다는 거예요. 그냥 해서는 그렇게 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러니 우리 밖에 계신 모든 신도 여러분. 그냥 말로만 아니라 실제로 하면 그와 같이 된다. 그래서 그렇게 실제로 하면 된다 하는 것이 일심이란 말입니다.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바로 내가 가는 길이 극락이고, 내가 안 해서 그렇지, 하기만 하면 생멸문에는 나는 가지 않는다. 생사에서 내가 해탈할 수 있다. 실제로 하자. 일심 마음을 딱 다잡는단 말이죠. 이렇게 다잡으면서 오늘 이 행사를 하신다면 그야말로 그 공덕이 여러분들에게만이 아니라 여러분들 주변 모든 식구들에게 갑니다. 한 사람, 그런 분을 보면 그 식구들이 전부 감동을 해요. 모든 일가친척들이 다 감동하고 그렇게 되면 또 그런 사람이 또 나오게 되고, 또 나오게 되고, 이런 사람이 수없이 나와서 이 세상 정말로 태평성대가 되도록, 태평성대를 만드는 일에 다 함께 한 번 여러분 최선을 한번 다해보시죠. 그런데 가장 최고의 경전인 화엄경에서는 요약하면 뭐라고 가르쳤느냐. 통만법명일심(統萬法明一心) 이렇게 되어있어요. 다른 곳에서는 일심이 먼저 나오고, 일심 마음이 먼저 나오고 그다음에 만법이 나중에 나와요. 그런데 화엄경은 만법이 먼저 나와요. 만법을 통괄해서 일심을 밝힌 것이 화엄경이다. 그러면은 만법을 통괄하는 것은 여러분들, 이 세상 사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말이에요. 이 일도 해봐야 되고, 저 일도 해봐야 되고, 가족도 가져봐야 되고, 온 세상을 같이 살아봐야 돼요. 세상에 돈도 벌어봐야 되고, 출세도 해봐야 되고. 다 출세도 해보니까 결국은 출세를 하는 사람과 못 하는 사람이 어떤 차이가 있느냐. 내 마음이 얌전하고 착한 사람은 출세를 하더라. 돈을 잘 번 사람은 어떤 사람이 잘 벌더냐. 정말로 어떻게 하든지 세상을 위해서, 세상에 좋은 일을 하려고 마음 먹은 사람이 큰 부자가 되더라. 그냥 큰 부자가 되는 법이 없어요. ‘내가 온 세상을 다 잘살게 만들어주고 싶다.’ 이런 마음을 가지면 큰 부자가 되는 거예요. 그런데 그러질 않고 내가 부자가 되려고 하니까 큰 부자가 안 된단 말이에요. 이게 통만법이에요. 만법을 총괄해가지고 탁 달통을 하니까 그 자리가 바로 아주 맑고 깨끗한 일심 자리더라. 일심 자리 하나 딱 알고 나니까 만법이 통괄하게 되더라. 이렇게 거꾸로 붙여도 되고 옳게 붙여도 되는 말이 화엄경의 통만법명일심이에요. 이렇게 가르쳐서 모든 분들이, 모든 신도들이, 모든 세상 사람들이 정말로 발심하도록 만들어줍니다. 그럼 이렇게 모든 경전은 발심하도록 만들었습니다. 그러니까 경전에서 발심이 됐어요. 그러면 발심만 되고 안 해버리면 아무 소용이 없다. 그러면 이 발심을 실천에 옮기는 거다. 실천에 옮기는 방법이 뭐냐 그러면 염불, 참선 두 가지예요. 참선과 염불은 둘이 아니에요. 참선 아주 일념하는 것이나 일념으로 염불하는 것이나 똑같아요. 염불해서 일념되는 것과 참선해서 일념되는 거 똑같습니다. 그러니까 모든 경전에서는 이치를 깨닫게 만들어주고 깨달은 이치를 행동으로 옮기려니까, 행동으로 옮기는 방법은 참선과 염불 두 가지 길, 두 문이다. 그러면 그 문 중의 하나가 지금 수륙대재를 모시는 거예요. 그 문에 여러분 지금 이렇게 들어섰으니까 이 문에서 정말로 더 큰 발심, 더 큰 발심은 어떤 것이냐. 나는 한참 염불하는 것을 권장하기를 ‘새벽에 일어나자마자, 눈 뜨자마자 관세음보살 세 번만 불러라. 그러면 온종일 수만 번 부른 것보다 낫다.’ 하는 말을 수없이 한 일이 있는데,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까 새벽에 일어나서 눈 뜨자마자 관세음보살 세 번 부르는 게 하루에 수만 번 하는 것보다 훨씬 어렵더라고요. 그러니까 눈 뜨자마자 관세음보살이 나오려면 잘 때에 관세음보살을 안 놓쳐야 눈을 뜨면 관세음보살이 나오지, 놓쳐버리면 안 나온단 말이죠. 그런데 그것이 정말로 안 될까. 그것은 간절하게 하면 된다. 그래서 관세음보살을 눈을 뜨자마자 불러주고, 눈을 감기 전에 불러주고. 여러분 잠 오는 거 아세요? 모르세요? 잠 오는 것 알고 자요? 그냥 자요? 그게 쉽지가 않아요. 그냥 자지. ‘아 잠 오는구나.’ 그거 알고 자는 법이 없어요. 그냥 자요. 그러니까 다른 거 하나도 없어요. 얼마만큼 일념이 간절해야 그게 가능하느냐. 딱 잠들기 전에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하고 사르르 이렇게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일념이 돼야 된단 말이에요. 이렇게 일념이 되고 나면 안 될 일이 이 세상에 아무것도 없어요. 모든 일이 다 이루어져요. 여러분 열심히 큰 행사 잘 모시고 나서, 그야말로 눈을 감기 전에 관세음보살을 부를 줄 알고, 눈을 뜨면서 관세음보살을 부를 줄 알 때까지 열심히 해서 여러분이 가지고 있는 그 큰 뜻을 다 성취하시기를 간곡히 빌고 또 빕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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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9월 7일 음력 8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1-09-07
-부처님 가르침-이야기 오늘은 비가 좀 옵니다. 진관사 신축년 8월 초하루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 제목은 <부처님의 가르침>, 부처님의 가르침 이런 말씀입니다. 불교를 교학적으로 연구를 하는데, -불교를 체계적으로 배우는 것을 교학이라 그러는데,- 이 불교 교학에는 부처님 설법의 가르침이 어떻게 분류될 수 있을까, 그 부처님 가르침을 종류별로 나누는데 상당히 많은 노력을 했어요. 그래서 그것을 가르칠 교자, 형상 상자, 교상(敎相), 그 교상을 판단해서 해석한다, 그래서 판석이라,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그런데 이 불교 학문마다 교상판석이 다 특징이 있거든요. 그리고 그 교상판석에 대체적인 내용을 오승(五乘) 차별이라, 다섯이란 오자고, 수레 승자, 그 수레 승자는 가르칠 교자의 뜻이고, 길 도자, 길이라는 뜻인데, 부처님의 교상을 종합적으로 판단해 보니 다섯으로 나눌 수 있다 이거죠. 그 다섯이 뭐냐. 인천승(人天乘), 인간에게 태어날 사람, 천상에게 태어날 사람에게 하신 법문, 성문승(聲聞乘), 출가 수도할 사람에게 하신 법문, 연각승(緣覺乘), 인연의 이치를 깨닫는 사람에게 한 법문, 보살승(菩薩乘), 보살도를 닦는 분에게 한 법문, 불승(佛乘), 부처님의 깨달은 내용을 말씀하신 법문, 이렇게 해서 이게 오승 차별인데, 이게 참 자세하고 중요해요. 說法儀式 설법의식 ①三轉十二行 삼전십이항 此處는鹿野苑이니 如來가 轉法輪이라 차처녹야원 여래전법륜三轉十二行 五人得道跡 삼전십이항 오인득도적(雜阿含經제23권)(잡아함경 제23권)(三轉者 示轉 勸轉 證轉) (삼전자 시전 권전 증전) ②三遍說 삼변설法華經의 法說 喩說 因緣說 법화경 법설 유설 인연설 그런데 오늘은 그 오승 차별을 말씀할 시간은 없고, 부처님이 어떠한 방식으로 설법을 했느냐, 이걸 설법의식(說法儀式)이라고 하거든요. 내용은 오승차별 교상판석으로 분류할 수 있는데, 그 설법하는 방식, 설법 진행하는 차례, 이런 걸 설법 의식이라고 그러는데, 그 설법을 부처님이 어떤 방식으로 했을까, 그걸 연구를 해 보니까 3전 12항(三轉十二行) 법문이 있었다. 처음에 법화경 화성유품(化城유品)에 보면, 3전 12항이라고 하는 말씀이 나오는데 그게 뭔 말인지 참 알기가 어려웠어요. 다닐 행자인데 거기서는 순서라는 뜻이기 때문에 항 이렇게 읽어야 되거든요. 3전 12항. 항렬(行列)이라고 할 때도 그 한자 쓰고. 근데 석가모니 부처님이 설법하실 때 3전 12항 방식이 있었다 이거고요. 그다음에는 법화경에 보면 삼변 설법 의식(三遍說)이 있었다. 그 변자는 두루 할 변잔데, -첫 번째 한 번, 두 번째 한 번, 세 번째 한 번, 한 번, 두 번, 세 번, 그럴 때 그 변자를 쓰는데요.- 삼변, 첫 번째, 두 번째, 세 번째, 삼변설법이라고 그러는데 이런 것이 이제 설법 방식이에요. 3전 12항 법문은 잡아함경(雜阿含經)에 나오는 말씀인데, 잡아함경 제23권에 보면, 차처는 녹야원이니(此處鹿野苑), 이곳은 녹야원이다, 부처님이 설법하신 장소 녹야원인데, 여래가 전법륜이라(如來轉法輪), 부처님께서 법의 수레를 운전하셨다. 법륜이라고 하는 얘기는 수레 륜자가 법을 비유한 말이고, 그걸 운전했단 말은 법을 설했단 말이고, 전법륜은 설법인데, 녹야원이라고 하는 곳은 설법한 곳이고 또 보다가야는 깨달은 곳이다. 그래서 녹야원에서 설법을 했는데 어떤 방식으로 설법을 했느냐. 3전 12항으로 법을 설하셨다. 이렇게 나와요. 그럼 삼전이라는 얘기는 세 번 설법을 한다 이 말인데요. 세 번. 세 번을 하니까 12번이 됐다. 이게 3전 12항인데 이게 뭔 말이냐. 부처님이 고진멸도 사성제 법문를 하실 적에 그 사성제를 삼전으로 하셨다. 세 번씩 하셨다 이거예요. 그래서 사성제를 세 번씩 하다 보니까 열두 번이 됐다. 이게 3전 12항 법문이거든요. 그러면 세 번씩 하는 게 뭐냐. 부처님이 깨달으신 내용, 고, 인간에게 괴로움, 첫 번째는 보일 시자, 운전할 전자, (떡~) 보이는 말씀을 하세요. 중생에게 괴로움이 있다, 이걸 시전(示轉)이라 그래요. 보일 시자, 운전할 전자, 시전. 인간에게 괴로움이 있다. 그러면 괴로움에 대해서 생노병사니 우비고뇌니 뭐 이런 자세한 설명 안 해도, 상근대지는 ‘아, 인생에게 괴로움이 있구나.’ 금방 알아요. 그래서 상근기는 시전만 해도 된다는 거예요. 보이기만 보여도. 그다음에 이제 중근기는 권해야 돼요(勸轉). 고통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그게 중근기가 필요한 법문이죠. 고통이라는 걸 알아야 한다. 그런데 이제 하근기는 고통을 누가 알았느냐, 이런 안 사람을 직접 보여주는 것이 필요하다 이 말이죠. 그래서 나는 고통을 알았다. 이게 증명할 증자, 증전(證轉)이에요. 증전. 이렇게 돼서 고성제도 이렇게 고를 보이고, 고를 알기를 권하고, 고를 알았다는 걸 자신으로 증명을 하고 이렇게 시전, 권전, 증전, 삼전을 하고, 집성제(集聖諦)도 집이라는 것이 번뇌라는 것이 있다, 이걸 보이고, 그다음에 번뇌는 끊어야 한다, 이렇게 권하고, 나는 번뇌를 끊었다, 이렇게 증하고, 멸도 마찬가지로, 멸은 얻어야 된다, 멸이 있다. 이렇게 시전을 하고. 멸은 얻어야 한다, 권전을 하고, 나는 열반 적멸을 얻었다 이렇게 증전을 해서, 하근기는 이 증전까지 가야 법을 받아들인다는 거예요. 그다음에 도전도 마찬가지예요. 닦는 길이 있다, 이거 보이는 거고, 도는 닦아야 된다, 이건 권하는 거고, 나는 도를 닦았다, 이렇게 증전을 하고. 이렇게 사성제를 시전, 권전, 증전, 삼전을 하니까 열두 번이 됐다. 이거예요. 이게 이제 3전 12항 법문이다. 이것이 설법 의식이라는 거죠. 그래서 거기에 대한 게송이 차처는 녹야원이니(此處鹿野苑), 이곳은 녹야원이니, 여래 전법륜이라(如來轉法輪), 여래께서 법륜을 굴리셨다. 3전 12항으로 하셨으니(三轉十二行), 세 번 굴려서 열두 번으로 하셨으니, 오인이 득도적이라(五人得道跡), 다섯 사람이 도의 세계를 얻었다. 이것이 부처님의 설법 의식이에요. 그다음에 법화경의 삼변설법은, 법화경을 보면, 방편품에서는 법을 설해요. 법 자체를. 그리고 비유품 이하로는 비유로 설해요. 그리고 화성유품에 가면 인연을 설하는데 인연은 사례거든요. 대통지승불(大通智勝佛)이 과거에 어떻게 어떻게 했다 이렇게. 법설, 유설, 사례설, 그러니까 이제 설법은 이런 걸 갖추는 게 필요하다 이거지요. 법이 어떤 거다. 비유로 말하면 어떻다, 사례로 말하면 어떻다, 이렇게 법으로 설법하고, 비유로 설법하고, 사례로 설법하고. 이런 내용이 있다 이거예요. 옛날에 이게, 학교에서 이런 거 가르친다고, 연구한다고 애 먹었어요, 이런 이런 거 아주. 포교 방법론이라고 하는 과목이 있는데, 이게 계속 발표되고 토론하고 하는 내용이거든요. 설법 의식 이런 거. 그건 그렇고. 說法大要설법대요 ①諸法空相 제법공상諸法이從因生이요 諸法이從因滅이라 제법종인생 제법종인멸如是滅與生을 沙門은說如是라(佛本行集經제48권) 여시멸여생 사문설여시 (불본행집경)諸法이從緣生이요 諸法이從緣滅하니 제법종연생 제법종연멸我佛大沙門은 常作如是說이라(常用法門)아불대사문 상작여시설 (상용법문) 未曾有一法이 不從因緣生미증유일법 부종인연생是故一切法 無不是空者(中論제4권)시고일체법 무불시공자(중론제4권) ②唯心所現 유심소현心如工畫師 畫種種五陰 심여공화사 화종종오음一切世界中 無法而不造 일체세계중 무법이부조若人欲求知 三世一切佛 약인욕구지 삼세일체불應當如是觀 心造諸如來응당여시관 심조제여래 그러면 부처님이 설법한 대요, 법을 설한 큰 요점은 뭐냐 이게 이제 설법대요(說法大要)인데, 이 설법을 연구를 해보면 부처님이 증지라는 게 있는데, 증득한 지혜, 증지소지후 비여경(證智所知非餘境)이라. 증지로 알 바요, 다른 일로는 알 수가 없다, 이 말입니다. 증득은 깨달음인데 깨달으면 뭐가 생기냐. 지혜가 생기거든요. 이게 증득한 지혜인데 이걸 증지라고 하고, 그 증득한 세계의 부분을 증분이라 그래요. 특히 의상 화엄학에서 이런 말을 많이 쓰는데 증지 영역을 증분, 나눌 분자. 그러면 그 증지가 이루어지면 이제 교설(敎說)을 하는데, 가르쳐서 말씀하신단 말이에요. 그럼 그 교설 부분을 교분이라 그래요, 교분. 근데 부처님의 증분은 알 수가 없고 이제 알 수 있는 방법은 교설 교분을 통해서, 왜냐하면 증분에서 다 나온 게 교설이기 때문에, 교설 교분을 통해서 부처님의 깨달음으로 증분으로 들어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 교설 교분을 분류를 해보니까, 크게 나누면 두 가지라는 거죠. 첫째는 제법이 공한 모양을 말했다(諸法空相). 공상. 둘째는 유심소연(唯心所現)이라, 오직 마음이라고 하는 걸 말했다. 공상과 유심, 이게 교분의 큰 세계예요. 그럼 공이라는 건 뭐냐. 공이라는 걸 일반적으로 알기가 어려운 게 보통 사람이 느낀 공간은 허공밖에 없는데, 허공, 빈 공간, 근데 불교에서 말하는 공간은 인연 공을 말해요. 허공 공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 인연 공, 인연을 공이라고 그래요. 그거 뭔 말이냐. 인연이라는 것은 인연소생인데, 인연으로 난 바인데, 인연은 뭐냐. 말미암는다 이거죠. 이것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생기고, 저것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생긴다. 그래서 이것저것이 다 인연소생이다. 그것도 소멸도 마찬가지예요. 인연으로 말미암아 이것이 없어지고, 인연으로 말미암아 저것이 없어진다. 그래서 생기고 사라지는 게 인연뿐이다. 생기는데 자체가 없다. 이게 인연 공이죠, 사라지는데 자체가 없다. 이게 인연이 공이에요. 죽음이라는 건 없고, 그 죽음을 이루는 인연이 있을 뿐이다 이거예요. 말미암음이 있을 뿐이다. 태어남이란 없고 태어남을 이루는 인연이 있을 뿐이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그러니까 내가 이 세상에 태어나는 것도 인연으로 태어났고, 머무르는 것도 인연으로 머물고, 죽는 것도 인연으로 죽으니까 나는 없는 거예요. 인연만 있는 거예요. 이거 참 문제여,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인연만 있지, 나고 죽는 건 없는 거예요. 이게 인연 공이거든요. 그래서 제법이 공상은 전부 인연상이다 이거죠. 그래서 제일 많이 독송하는 게송이 제법이 종인생이오(諸法從因生), 모든 법은 이 모든 법이라는 건 생멸법, 또 출세간법(出世間法), 제불이 성불하는 것도 법이고, 범부가 윤회하는 것도 법인데 이게 범부가 그냥 생긴 게 아니라 범부 인연으로 범부가 생기고, 제불이 그냥 생긴 게 아니라 제불 인연으로 제불이 생긴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부처 종자도 인연으로 생기고 범부 종자도 인연으로 생기는 거예요. 이게 뭔 말이냐 하면 범부 종자를 심지 아니하면 범부는 없어요. 그래서 한 시간 동안 기도를 한다. 그러면 그 순간에는 범부 종자가 안 심어져. 그러니까 종자를 심기 때문에 생긴다 이거예요. 그럼 한 시간 동안 기도를 한다, 그러면 그때는 복덕이 이루어지고 지혜가 이루어져서 불종자가 생긴단 말이에요. 범종과 불종이 전부 인연으로부터 생기는 거기 때문에 범부도 없고 제불도 없고, 인연만 있을 뿐이다. 그게 제법이죠. 제법이 인연으로부터 나고 제법종인생, 제법이 종인멸이라(諸法從因滅). 인연으로부터 사라진다. 여시멸여생(如是滅與生)을, 이와 같이 생기고 사라지는 것을 사문은 설여시라(沙門說如是), 사문께서는 이와 같이 말했다. 이거는 부처님이 성불한 지 얼마 안 됐기 때문에 그때는 부처님을 사문이라고 했다 이 말이죠. 성불한 지 얼마 안 됐는데 그 부처님 제자가 밖에 나갔는데 사리불이 물었어요. 당신 누구 제자냐. 석가모니 제자다. 석가모니가 뭔 법을 말했냐. 그러니까 이걸 말한 거예요. ‘석가모니 부처님은 제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제법이 인연으로부터 사라진다. 이와 같이 사라지고 설하는 것을 우리 스승께서는 이와 같이 말씀하신다.’ 그걸 듣고 사리불이 깨달아서 부처님 제자가 됐다 이 말이죠. 그런데 우리나라에서는 내가 어릴 때부터 이거를 많이 들었는데 이렇게 안 외우고, 제법이 종연생이요(諸法從緣生), 제법이 종연멸이니(諸法從緣滅), 아불대사문(我佛大沙門)은 상작여시설(常作如是說)이라, 이렇게 외웠어요. 이거는 이제 지도론을 보고 약간 변형해서 한 건데 너무 외우기가 편해요. 제법이 인연으로부터 생기고 제법이 인연으로부터 사라지니 우리 부처님 대사문께서는 항상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게 우리나라에서 전통적으로 외우는 방식이에요. 위와 같이 하면 뜻은 아주 명확한데 외우기가 조금 불편해요. 그거 얼마나 좋아, 제법이 종연생이오, 제법이 종연멸이니, 아불대사문은, 우리 부처님 대사문께서는, 상작여시설이라, 항상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법문할 거 없으면요, 이것만 가지고 하면 돼요. 이거 한 구절만 가지고. 그럼 법문이 훌륭해요. 옛날 노인들도 마찬가지요 뭐, 법문이 맨날 새로운 게 나오나. 그러니까 이것도 한 게송 읽으면 끝나는 거예요. 준비할 것도 없어, 법문이라는 게. 제법이 종연생이오 제법이 종연멸이니 아불대사문은 상작여시설이라, 항상 이와 같이 말씀하셨다. 이게 인연법이란 말이죠. 인연법. 그럼 인연법은 뭐냐. 공이요 그게. 공이라는 것은 생겨도 생긴 게 없으니까 불생이고, 사라져도 사라진 게 없으니까 불멸이거든요. 그 불생불멸이 공인데 그 공이 인연이에요. 그러니까 이걸 알면 바로 해탈하는 거예요. 인연을 몰라가지고 미혹한 거거든요. 그리고 중론 제4권에서는 뭐라고 그랬냐 하면 미증유일법(未曾有一法)이 미증유라는 건 일찍이 없다 이 말이죠. 그 어떤 한 법도 부종인연생(不從因緣生)이라,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아니한 것이 없다. 전부 인연이란 말이에요. 인연이 생기는 인연이 생기면 생기고, 사라지는 인연이 생기면 사라지는 거여. 그러니까 늙는 것도 인연이고. 늙는 자체는 없어요. 생기는 것도 인연이여. 머무르는 것도 인연이고. 그러니까 미증유일법도 부종인연생이라, 한 법도 인연을 좇아서 인연으로부터 생기지 아니한 것은 미증유, 일찍이 없다. 그러니까 시고로, 이런 거로, 이렇기 때문에, 일체법이(是故一切法), 범부법이나 제불법이나 무슨 생멸법이나 불생멸법이나 일체법이, 무불시공자라(無不是空者), 무불이라는 건 아님이 없다 이거지요. 시공자 이 공이, 자자는 어조사고, 공 아닌 것이 없다. 공이라는 것은 불생불멸 인연법인데, 인연법 아닌 것이 없다. 그러면 이 인연 공 이런 거를 경전에서 가르칠 때 인연은 무생이라. 생긴 게 없다. 그래서 이 생긴 걸 없는 걸 아는 게 깨달음이에요. 인연은 무생. 또 인연은 무아라. 내가 없는 거. 내가 없는 걸 아는 게 깨달음이에요. 인연은 무법이라, 법이 없는 걸 아는 게 깨달음이에요. 전부 인연이기 때문에 일체법이 일체법이 아닌 거예요. 인연이 형성돼서 일체법이지, 인연이 사라지면 일체법은 사라진다. 그래서 깨달음이라는 것은 무생법, 무아법, 무법법, 이렇게 보면 모든 게 전부 인연뿐이지, 법도 없고 자아도 없고 소생도 없고. 이게 무생 무아 무법, 이걸 통달하면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무생을 통달하고 무아를 통달하고 무법을 통달하면 그게 깨달음이다. 그러면 이게 뭐만 있느냐. 그 무생 무아 무법 인연이라는 걸 누가 아느냐 이거예요. 그걸 마음이라 그런다. 그래서 법이 있는 곳에는 마음이 있다. 마음이 있는 곳에는 법이 있다. 그래서 이 마음이 깨닫기도 하고 집착하기도 하고, 집착하는 거는 범종이고 깨닫는 건 불종인데 부처 종자는 깨닫는 거고 범부 종자는 집착하는 거예요. 근데 집착을 하는 것도 마음이고 깨닫는 것도 마음이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화엄경에서 유심소현(唯心所現)을 말할 때, 야마궁중게찬품 법문인데, 오직 마음이 나타나는 거다. 범부도 마음이 나타난 거고 제불도 마음이 나타난 거다 이 말이죠. 심여공화사(心如工畫師), 마음은 그림을 만드는 사람과 같다. 그래서 화종종오음(畫種種五陰)이라, 가지가지, 오음이라는 건 중생의 몸인데, 중생의 몸을 만든다. 그래서 일체세계 중(一切世界中)에, 일체 세계 가운데, 무법이 부조라(無法而不造), 어떤 법도 만들지 않는 것이 없다. 약인욕구지(若人欲求知), 사람이 욕구, 삼세 일체불(三世一切佛), 삼세 일체 부처님을 굳이 알기를 구하고자 하면, 응당여시관하라(應當如是觀), 응당히 다음과 같이 딱 관찰을 하라. 심조제여래(心造諸如來)니라, 마음이 모든 여래를 만드느니라. 80화엄에서는 일체유심조 이렇게 번역을 했는데, 이건 육십화엄이야, 육십화엄에서는 심조제여래. 위에서는 화종종오음 무법부조 이래 가지고 어떤 법도 만들지 못하는 게 없다. 어떤 중생의 몸도 다 만든다. 이러니까 마음은 일체 중생도 만들고 삼세제불도 만들고, 산하대지도 만들고 못 만드는 게 없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부처님의 설법대요는 인연과 마음을 말한 것이다. 그러니까 마음을 미혹하고 집착해서 쓰면 범부 종자가 계속 끊어지지 않고, 마음을 관찰하고 공덕으로 쓰면 불종자가 끊어지지 않는다 이건데요. 이건 가르칠 때 이렇게 가르치는 거고, 실제 상에는 어떠냐. 마음과 현상이 분리되는 게 아니라 현상이 있는 곳에 그대로 전체가 마음이다. 이거 인제 형상과 마음을 분리해서 생각을 하고 행동하면 범부고, 형상도 아니고 마음도 아닌 형상과 마음이 분리되지 아니한 상태로 돌아가면 깨달음인데, 마음이 있는 곳에 보이고 들리고 하는 형상이 없는 곳이 없고, 형상이 있는 곳에 마음이 없는 곳이 없다. 그래서 동아시아의 대표적인 불교학자를 들라면 규봉(圭峰)과 청량(淸凉)을 들 수가 있는데 그 규봉의 불교관을 보면 강원에서 가르치는 <선원제전집(禪源諸詮集)도서>, 도서는 그게 동아시아 불교학의 아주 기본 개론이에요. 그래서 전체 불교에 아주 중요한 지침을 주는 학자가 규봉 종밀이기 때문에 언제든지 규봉 청량. 이렇게 말을 해요. 청량은 이제 화엄학의 최고봉이거든요. 청량 규봉 그렇게 말 안 하고 규봉 청량 그러는데, 규봉 청량이 이제 중요한 가르침이 뭐냐. 제법은, 모든 법은, 전일심지제법(全一心之諸法)이라. 일심을 온전히 한 제법이라는 거예요. 제법이 있는 곳에 일심이 없을 수가 없다. 또 일심은 전제법지일심(全諸法之一心)이라, 한마음은 제법을 온전히 한 한마음이다. 한마음이 있는 곳에 제법이 없을 수가 없다. 참 이런 게 선지식이에요. 그러니까 이런 물건(컵을 가르키시며)이 하나 있으면 이게 그대로 온전한 마음이에요. 또 이게 온전한 마음이 있으면 바로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하늘이 있을 때 그 하늘을 보는 마음이 없이 어떻게 하늘이 있냐, 죽음이 있을 때 죽음을 아는 마음이 없이 어떻게 죽음이 있는가. 또 좋아할 때 좋아할 줄 아는 마음이 없이 어떻게 좋아할 수 있나. 그러니까 좋아하고 싫어하고 있고 없고가 전부 마음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제법은 전일심지제법이라, 제법은 한마음을 온전히 한 제법이다. 일심은 전제법지일심이라. 한마음은 제법을 온전히 한 한마음이다. 그러면 이제 불종자가 점점 성장을 해서 열매를 맺으면 그것이 구경각(究竟覺)인데, 더 이상 모르는 게 없이 다 통달을 했다. 그러면 마음이 물질이오, 물질이 마음이라, 그래서 마음이라는 구분도 없고 물질이라는 구분도 없고 과거 현재도 없고 그냥 자재할 뿐이다 이 말이죠. 자재, 자재. 그냥 갈 때는 가는 걸로 온전하고 올 때는 오는 걸로 온전하고 앉을 때는 앉는 걸로 온전해서 그냥 자재하고 자재할 뿐이지 다른 것이 없다. 그래서 부처님 법은 공상과 유심을 말했다. 여기서 모든 수행이 다 나오고. 마음을 불종자를 심는 걸로 쓰면 온갖 수행공덕이 여기서 다 나오는 거예요. 또 수행을 어떻게 할 수 있느냐. 일체법이 전부 인연 공상이라는 걸 알면 거기서 범부 종자는 심어지지 않는다, 범부 종자가 심어지려면 경계를 분별하고 집착해야 범부가 이어지는데 경계를 볼 때 분별하는 마음을 그치고 또 경계를 볼 때 경계가 공함을 관찰을 하면 범부 종자는 없다. 뭐 이렇게 돼서 경계는 없고 마음뿐인 게 이게 처음 깨달음인데 나중에는 경계도 마음도 다 구분이 없이 그냥 자재하는 게 구경각이다 이거죠. 오늘 초하루 본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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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륙재] 9월5일 국행수륙재 2재 법문
혜거스님 2021-09-05
수륙대재 하면은 그 근원이 어디냐. 어디서부터냐. 이걸 따지는 학자들이 종종 있어요. 그런데 종교에는 종교 설화가 있고, 나라를 세우는데도 건국 설화가 있습니다. 우리나라에는 단군 설화가 있지요. 단군 설화가 역사적인 어떤 근거가 없다고 해서 단군 설화를 내버리면 안 돼요. 단군 설화는 그대로, 우리나라 모든 국민들에게 꿈을 주고 희망을 주는 것이 설화입니다. 따라서 건국 설화가 있듯이 종교도 종교 설화가 있어요. 그리고 수륙대재는, 합리적으로 언제부터 누가 무엇을, 이렇게 따지는 게 아니에요. 부처님 당시에, 부처님께서 가장 가깝고 가장 사랑했던 제자, 목련존자의 어머니를 천도할 적부터 제 조상 부모를 위해서 정식으로 재를 지내도록 부처님께서 허락을 하셨던 것에서부터 유래가 됩니다. 그래서 목련존자 어머니께서는 무간지옥에서 벗어나서 그야말로 해탈을 얻을 수가 있었다 하는 것이 시원이에요. 그러면 목련존자만 어머니를 그렇게 천도할 수가 있고 제도할 수가 있었단 말인가. 누구든지 그와 같은 신념을, 신심을 다하면 된다 해서, 그 이후로 이것이 점차 의식화가 된 거예요. 여러분들 지금 이렇게 같이 해보시니까 너무 정중하고 너무 좋으시잖아요. 거기다가 특히 또 동희스님의 염불, 아주 탁월하고 우리나라에 둘도 없는 아주 좋은 스님의 염불 소리는 정말로 사람들의 마음에 감화를 줍니다. 이 소리라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느냐. 천상에까지 이어질 수 있고 연결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소리밖에 없어요. 천상, 온 삼천대천세계를 한 군데도 빠지지 않고 전부 깰 수가 있고, 다 통할 수 있는 것이 소리입니다. 우리가 여기서 하는 이 소리가 여기에만 그치는 게 아니라, 온 세상에 다 퍼져서 온 세상의 모든 중생이 전부 교화를 받을 수 있는 것, 이것이 수륙재의 큰 의미입니다. 여기서 지금 우리가 꼭 한 번 더 크게 발심을 해야 할 것이 무엇인가. 불교와 유교의 관계에서 하나 찾을 것이 있습니다. 그런데 이걸 찾기 전에, 며칠 전에 홍천에 일이 있어서 갔는데, 홍천강 그 옆에를 갔더니 너무 근사한 건물이 하나 있었어요. ‘야, 저거 뭔 집이 저렇게 잘 지어졌냐, 산속에.’ 그러다 깜짝 놀랐어요. 강아지 49재 지내는 건물이었어요. 상상도 못 해요. 제가 그래서 ‘세상에. 자기 부모 제사는 안 지내려고 그 난리를 치는 중생들이 어떻게 강아지 재는 그렇게 열심히 지내려고 하는지.’ 아주 가슴이 딱 막혔어요. 그리고 또 한 가지 더 재미있는 게 있습니다. 집에서는 제사 안 지내는 그런 분들이 강아지 재는 그렇게 잘 지내더라고요. 그리고 거기에 화장도 하고 재도 지내고, 또 와서 강아지가 쉬어갈 수 있는 호텔 룸도 만들어 놓고, 상상을 초월해요. 그래서 ‘세상이 아주 묘하구나.’ 그거 하지 말라는 얘기는 아닙니다. ‘강아지, 짐승에게도 우리가 자비심을 베풀 수 있다.’ 이거는 너무 좋은 일이에요. 그러면 강아지, 짐승에게 자비심을 베푸는 그 자비심이 먼저 어디로 가야 되냐. 부모 공양할 줄 알고 사람들에게 자비심 베풀 줄 알고, 이렇게 한 나머지 기운으로 강아지에게 자비를 베풀면은 더 금상첨화가 되겠죠. 그런데 자기 부모, 형제 이런 건 다 내버리고 강아지만 가지고 석 달 열흘 울고 다니는 젊은이 얘기를 들어보면 가관이에요. 그래서 그것이 나쁜 건 아닌데 한 가지 알아야 될 것이, 사람의 업이 하류층과 가까워지면 사람의 업도 하류가 돼요. 정말로 사람의 업은 하류층과 자비심을 가지고 베풀어주는 건 좋지만은 거기에 집착하고 울어서 눈이 붓고 이러한 마음은 자기가 하류로 떨어지는 위험성이 있으니까 이런 점을 유념을 하고, 혹시 그런 마음이 있거든, 혹시 우리 불자들도 그런 마음이 있거든, 그야말로 자비심을 베푸는 여기에서 최선을 다하시라 말씀을 드립니다. 오늘 이 수륙재는 무엇인가 보세요. 물속에 있는 어류들 그리고 육지에 있는 강아지뿐만 아니라 모든 짐승들, -왜 강아지만 굳이 가서 또 그렇게 그 재를 지내야 되겠어요.- 육지에 사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의 부모 조상들을 위해서 모시는 재가 수륙재예요. 수륙, 수중 고혼들, 육지에 있는 모든 생명체들을 위해서 모시는 것이 수륙대재다. 이 세상에 있는 모든 중생들을 위해서 우리는 이 지금 행사를 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기서 우리가 이제 무엇을 해야 되느냐. 이 재를 모심으로써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자비심을 기르는 거예요. 자비심을 길러 자비심을 훈련하는 겁니다. 이 재를 통해서 우리는 자비심을 얻는단 말이죠. 이 재를 통해서 다 끝나고 나면 그 재를 지내고 갔던 이 마음이, 온 천지 사방에 자비심이 꽉 펼쳐지는 이런 사람이 되기 위해서 오늘 이런 행사를 하는 것이다. 이렇게 우선 정의를 내리면 좋겠고요. 그러면서 유교와 불교에 대해서 한 가지를 여러분들에게 말씀을 드리고 싶은 게 있습니다. 전부 우리나라 사람들은 유교식인데, 부모님 돌아가실 때 묘를 쓰고 제를 모시고 하는 것은 유교식인데도 중국보다 우리나라가 훨씬 더 잘합니다. 중국에는 그런 의전들이 다 없어졌어요. 우리나라에는 그 의전이 남아 있습니다. 그 중국 사람들 사고방식이 뭐냐. 우리나라 사람들이 본성이 훨씬 더 어질다는 얘기예요. 그 사람들은 그런 것이 자기네 건데도 내버렸다. 왜 내버리느냐. 어진 성품이 없으면 내버리게 돼 있습니다. 정말로 우리는 대대로 어진 성품을 너무 많이 가지고 있어서, 그야말로 유교의 국가인 중국보다 우리가 더 유교적인 이런 사고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중의 하나가 뭐가 있느냐. 불교가 당나라 때, 수나라 때부터 중국으로 오기 시작하면서, 불교가 들어와서 뭘 가르쳤느냐. 십이인연, 십이연기. 아주 기가 막힌 소리가 있어요. 남에게 손가락질 하나를 한 과보로 나는 뒤에 몽둥이를 맞는 과보를 받아요. 그 업보의 과보 받는 것이, 여기 있는 스님들은 다 아는 얘기인데, 일미칠근이라고 그래요. 쌀 한톨 내버린 죄를 지어 7근을 받아요. 그러니까 남을 흉만 봐도, 손가락질만 해도, 나는 얻어맞는 과보를 받아요. 그렇게 무서운 것이 업보예요. 그래서 이 업보에 걸리지 않게 가르친 것이 뭐냐. 십이연기란 말이에요. 십이연기. 내가 한 만큼 그대로 받는 것이 연기법이에요. 이 연기법을 가르치는 것을 유교가 보고, 자기네는 그런 연기법이 없거든요, 유교에. 유교가 그걸 보고 연기법을 만들어냈습니다. 연기법을 만들어낸 것이 뭐냐. 기가 막히게도 사주라는 걸 여러분들 아시죠. 사주라고 하는 것이 4천 년 전부터, 하나라, 은나라 시대에는 단순한 4괘, 8괘에서 끝나요. 8괘 밖에 없어요. 이것을 주나라에 와가지고 문왕이 이걸 갖다가 64괘를 풀어가지고, 64괘의 현상까지 전부 붙여서 하나의 주역을 만들어 놓습니다. 여기에는 절대로 언제 무슨 일이 생기고 언제 어떤 일이 생기고 이런 구절이 하나도 없어요. 그 주역의 핵심은 소인과 군자 두 가지를 딱 가르치는 거예요. 소인은 왜 소인이냐, 못된 짓만 골라서 하니까 소인입니다. 대인은 왜 대인이냐. 좋은 일만 골라서 하니까 대인이다. 이걸 가르친 것이 주역이에요. 그런데 그렇게만 가르쳤는데 나중에 사람들이 보니까 좋은 일만 한 사람은 좋은 운만 오지요. 또 나쁜 일만 한 사람은 나쁜 운만 오지요. 이렇게 보니까, ‘좋은 일을 하면 좋은 일이 오고, 나쁜 일을 하면 나쁜 일이 오는구나’, 이걸 안 거예요. 그리고 나서 불교가 들어와서 십이연기법을 설하는 걸 보고서 만들어낸 것이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의 12개에요, 12지(支). 이 12개가 제일 첫 번째가 뭐냐. 음양이 교류하고, 두 번째 어머니 뱃속에 들어가고 이 세상에 태어나고, 그다음에 세상에 태어난 사람이 자라나서 성인이 되고, 성인이 돼서는 자기 뜻을 세워가지고, 내 뜻을 세워서 ‘이 세상에 나는 무엇을 하면서 살 것인가.’ 이게 떨칠 진자예요. 그다음에 사(巳). 그러면 뜻을 세웠으면 뜻을 펼쳐야 된다. 그래 펼칠 사자예요. 펼치고 나서는, 인간의 인생 정명이 몇 살이냐, 인간의 수명의 정명에 다다릅니다. 지금 현재의 수준으로 보면 80세 정명이에요. 그러면 80세가 정명이라고 할 적에 한 가운데가 몇 살이 되겠어요. 80세니까 40세죠. 40년을 살고 나면 더 이상 올라갈 때가 있어요? 없어요? 내려가는 길밖에 없는 거예요. 사람들이 착각을 하는 것이 40이 되고도 올라가려고 하는 거예요. 50이 되어도 올라가려고 하고 그러다가 나중에는 올라가려고만 하다 보니까 잘못 떨어지고 마는 거란 말이죠. 그러니까 그때부터 해서 40이 되고 나면은 서서히 내려갈 준비를 하면 절대로 잘못 떨어지는 법이 없어요. 이게 이 세상에 이치란 말이에요. 그래서 딱 그때가, 딱 40, 한중간에 오게 되면은 그 뒤에 붙어서 오는 것은 뭐냐. 미자가 있죠, 오미(午未). 미자는 날 일 옆에 미자를 쓰면 매할 매(昧)자에요. 그때부터는 매하기 시작이에요. 지금 내가 머리가, 저도 옛날에는 이 세상에서 보면 외우고 외우면 안 잊어버리기로 자신을 가졌는데, 지금은 보면 잊어버리고 뇌가 매하기 시작한다고요 . 매할 적에 무엇을 해야 되느냐. 이게 굉장히 중요합니다. 매하는 대로 놔두지 말아라. 거기서 한번 더 가서 자기 뜻을 펼칠 신(申)자예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의 신. 뜻을 펼쳐라. 그러고 나서는 유(酉)자는 성취할 취자(就)예요. 그래서 죽기 전에, 술(戌)자는 없어질 멸(滅)자가 술자만 남은 거예요. 모든 자기 원을, 꿈을 결국 성취해라. 그러고 나면은 술이 나오죠. 없어지게 돼 있어요, 몸뚱이가. 그러고 나면 뭐만 남느냐. 그다음에 남는 것이 나무 목 옆에다가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하는 해(亥)자를 쓰면은 핵자(核)가 남지요. 핵은 뭐예요. 종자. 종자가 남으면 또 어떻게 돼요. 내생으로 다시 연결된다 이 말입니다 지금. 내생으로 또 연결돼요. 그러니까 내생으로 연결되지 않는다면은 우리는 좋은 일할 것도 없고, 마음대로 살다 가버리면 그만이야. 대단히 미안하지만 마음대로 살다가 가면 내생에 내가 여기서 잘못한 과보를 그대로 짊어지고 가기 때문에 잘못 가서는 안 된다. 마음대로 가서는 안 된다. 이것을 확실하게 가르친 것이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입니다. 그러면 여기 이 자리에 오신 여러분들 모두 지금 40살이 됐다고 칩시다. 40살 됐다. 그러면 지금부터 내려가는 길이구나. 그렇다면 지금까지 살아온 것을 한번 다 돌이켜서 정말로 잘 살 수 있는 방법이 무엇일까를 지금부터 생각해야 돼요. 그래서 잘 살 수 있는 방법, 이거는 어떤 것이 제일 잘 사느냐. 내가 성공 하는 것은 절대 성공이 아닙니다. 대부분 사람들이 나 성공하려고 애를 쓰거든요. 정치권 사람들을 봐요. 얼마나 우스운가. 내가 성공하지 말고 남을 성공시키는 거, 세상을 성공시키는 것. 이렇게 마음이 돌아가야 해요. 이 세상을 위해서 나는 무엇을 하고 무엇을 남기고 죽을까. 이 세상을 위해서 나는 무엇 하나를, 좋은 일을 하고 죽을까. 이걸 우리는 다 같이 생각해야 돼요. 이것을 생각할 때가 펼칠 신(申/伸)자예요. 펼칠 신자. 그런데 우리는 지금까지 살다 온 거 하나도 남을 위해서 남길 것이 없어요. 그러면 지금부터 어떻게 해야 돼요? 부지런히 남겨야 됩니다. 그러면 불자가 남길 수 있는 거. 뭔가 한번 보세요. 불자가 남길 수 있는 거. 염불을 부지런히 해서 일념이 이루어져서 이 세상 사람들을 편안하게 할 수 있어요. 염불을 열심히 하게 되면은 그 기운이 이 세상을 편안하게 해줘요. 이 세상에 좋은 사람들이 사는 나라에는 환란이 닥쳐도 그 나라는 환란이 크게 오질 않아요. 지금 코로나가 오고 뭐가 오고 난리가 나도, 아주 안 좋은 사람들이 살던 나라는 정말로 큰 환란이 오고 좋은 사람이 살던 나라는 정말로 환란이 적어요. 그리고 이런 것뿐만 아니라 천재지변이 오는 것도, 천재지변이 계속 오는 것은 잘 못 사는 사람들이 많을 때에 그 나라의 천재지변이 온다고요. 그러면 천재지변이 오지 않고 맑고 깨끗한 세상을 우리가 만들어야 되는데 그 일을 하려고 하면은 우리가 할 수 있는 것, 하늘과 더불어 우리가 경쟁하고 하늘과 더불어 싸울 수 있는 것이 뭐예요. 염불 빼놓고는 없어요. 하늘하고 힘내기를 한번 해보세요. 하늘을 이길 수 있는가. 이길 방법이 없어요. 염불밖에 없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염불하고. 두 번째로는 공부를 하자. 열심히 공부를 해서 그 힘을 가지고 세상을 위해서 더 편리하게 잘 살고 더 좋은 세상 만들고 더 훌륭한 세상을 만드는데 기여하자. 이것이 공부예요. 공부하는 것은 그런 목적이란 말이에요. 그런 목표. 그런데 세상 사람들이 이렇게 보니까 아주 못된 사람 천지에요. 이 못된 사람을 어떻게 하면 좋은 사람으로 바꿀 수 있을까. 이것은 아는 것 가지고는 되지를 않아요. 이것을 바꿔주려면 열심히 참선 수행을 해야합니다, 참선 수행. 참선 수행은 다른 거 없어요. 반복하고 반복하고 반복하면 바꿔져요. 마음 한 번, ‘나는 이거 지금부터 안 해야지.’ 한 번 하고 말면 안 바꿔져요. 근데 바꿔야지 바꿔야지 하고, 내일도 또 바꿔야지, 모레도 바꿔야지, 계속 바꿔야지 바꿔야지 하면 자기도 모르게 싹 바꿔져 있어요, 참선하니까. 도를 아니까 별의별 통하는 것이 있는 줄로 착각하면 안 돼요. 이렇게 해서 나를 바꾸는 것이 참선이에요. 우리 다 같이 한 마음을 가지고 대재를 모실 적에, 이런 큰 원력을 가지고 수륙대재를 모셔서, 수륙대재의 공덕으로 이 세상이 맑고 깨끗한 세상 되기를 간절히 발원하면서, 이 행사를 잘 이루시기를 바라겠습니다. 여기서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