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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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기도] 7월 14일 백중기도 2재 법문
자현스님 2024-07-14
자, 안녕하세요. 이게 훅 간 시즌에 찾아오는 자현스님입니다. 보통 때 이렇게 좀 활기 있을 때는 사람을 안 부르다가, 이렇게 무슨 가신 분들 뭐라 할 때, 이렇게 어떻게 보면 돌아가신 분 전문 같기도 하고. 근데 저는 사실 여러분들 이렇게 뵈면서, 제가 그 생각 전에도, 이게 독립운동가인가, 진짜 모나미인가 이런 생각을 했는데, 절마다 특색들이 좀 있어요. 이렇게 제가 여러 절을 다녀보면, 우리 보살님들은 화이트, 블랙이잖아. 이렇게 층으로 딱 만들어서 딱 계시고. 그리고 각 잡는 거 진짜 잘하는 데는, 회색 막 입고 이렇게 딱 각 잡는 거, 통도사 강주스님 인해스님 절, 바라밀선원, 거기 가도 그렇게, 거기는 막 줄을 맞춰가지고, 막, 막, 뭐 하는 것처럼 사람 몇 명 되도 않더만, 이렇게 줄만 맞추니까 사람 겁나 많은 것처럼 또 보이고. 제일 어떻게 보면 엄격해 보이고 막 이러한 데는 어디 있냐면, 저 수불 큰스님 하시는 안국선원. 거기는 진짜 노보살님들이 표정도 안 바뀌어, 그냥 그대로 있어. 그래서 내가 처음 갔을 때 뭘 느꼈냐면, 안도 다다오의 그 시멘트 건물 같은 느낌, 이렇게 블록으로 이렇게 사람들이 있는데, 섬뜩합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사실은 자유로운 걸 좋아해요. 자유롭고 혼란스럽고 정신산만한 거. 방금 우리 회주 스님한테 가서 “또 손목에 주렁주렁 달고 댕기냐.” 이렇게 큰 스님들의 여러 번 말씀을 들었습니다. 문자도 들어오고. “그만해라.” 이렇게 쉽게 그만하지 않습니다. 혼란스러운 거. 그래서 변화라고 하는 것은, 개인적으로는 그렇게 생각해요, 변화는 원래 정형화된 게 아니고, 불규칙성이 작동할 수밖에 없는 거고, 그게 어떻게 보면 변화의 철학의 기본적인 거예요. 그리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데서 어떤 자기 원칙이 생기는 걸 그걸 질서라고 보는 거예요. 그래서 질서는 소수고 그다음에 혼란이라고 하는 거는 훨씬 더 많은 거예요. 그런데 우리가 질서를 선택하기 때문에 혼란이 힘들어지는 겁니다. 근데 질서인 상태로 계속 갈 수가 없어. 우주도 마찬가지예요. 질서는 일부분이고, 아주 극히 일부분일 겁니다. 그 나머지는 전부 혼란스러운 거예요. 치고 받고 패고 막 이런 거예요. 그래서 그 혼란에 대해서 사실 관점을 환기하면 그거야말로 생생한 철학이라고 하는 게 있어요. 제가 그런 얘기하는데 혼란스럽지만, 여러분 모두는, 여러분 모두는 사실 우주의 하나밖에 없는 존재들이에요. 전 우주를 다 통틀어도 같은 대상은 존재할 수 없습니다. 그리고 유일물은 비교 대상이 아니고, 독립된 완결성을 가지고 있어요. 독립된 완결성을. 유일물이기 때문에 그걸 자각하면 모두가 다 행복한 세상이 돼요. 그게 사실 선에서 말하려고 하는 어떻게 보면 쩌리의 행복이라고 하는 건데, 부처님이 돼서 행복한 게 아니고, 내가 그 자체로 모순 속에 있는 그 자체의 완결성을 이해하게 되면 그것이 곧 행복이다. 유일물은, 유일물은 고통스러울 것도 없고, 그다음에 비교 대상 자체가 아니기 때문에, 뭔가 이렇게 떨어진다라고 하는 생각 자체가 성립되지 않아요. 그런데 사람들은 그거를 모르고 자꾸 피라미드 같은 구조에서 위로 올라가려고 하죠. 그러다 보면 힘들어요. 사는 게 보통 힘든 게 아니잖아. 여러분 지금 덥죠. 근데 이 절의 특징이 약간 사람들은 어느 정도 있는데, 약간 매가리가 없어요. 그게 뭐. 약간 외국인들이, 외국 음식하시는 분들이 우리나라에 오면 굉장히 놀라운 것 중에 하나가, 독 있는 걸 삶아가지고 제독해서 먹는다 이런 거 있거든요. 고사리 같은 거 원래 독 있어서 못 먹잖아. 근데 우리 다 삶아가지고 이렇게 먹잖아. 삶아놓은 고사리 같아요. 그래서 이게 서울 사람인가 싶거든. 이게 어디 쪽에서 나타나는 현상이냐면, 충청도 쪽 가면, 그쪽에서 나타나는 사람들이 점잖고 이렇게 약간 풀 죽은 듯한, 새로 벤 배추가 아니고, 소금에 약간 한탕 뛰고 온 배추의 느낌인데, 조금 예전에 그러니까 왕이 나와서 왕기가 쇠해서 그런가. 이게 그래서 나는 박수 소리도 짜증나게 박수를 치는 거야. 칠 거면 치고, 말 거면 말지.(박수) 아우. 나 내가 유도한 거 아니다. 여러분이 자발적으로 하신 거예요.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조금 자유롭게 움직였으면 좋겠어요. 절이 정형화된 바둑판 같은 게 절인가에 대한 생각을 개인적으로 합니다. 그래서 살아있는 것은 무엇이냐. 그것은 그때그때마다 변화하는 생생한 거, 활발한 거, 그리고 변화는 잠시도 멈추지 않는 게 변화예요. 그래서 하늘의 움직임은, 하늘의 움직임은 잠시도 쉬지 않는다. 그리고 제가 그 구절 굉장히 좋아합니다. 그 주역에 나오는 구절인데, 천행건 군자이자강불식(天行健 君子而自强不息)이라고, 하늘의 움직임은 잠시도 쉬지 않기 때문에, 군자는 그것을 본받아서 언제나 쉼 없이 노력한다. 노력이라는 게 때론 옳을 수도 있고, 때로는 그를 수도 있어요. 잘못된 결과를 낳을 수도 있어요. 하지만 모든 노력은 그 자체로 존중받아야 마땅하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리고 그렇게 되면, 그게 객관적인 쪽으로 가면, 화엄철학이 되고, 주관성으로 가면 나의 행복과 관련된 미학적 판단, 그게 선이 돼요. 기회 되면 이런 얘기를 좀 해주면 좋은데, 언제나 시간이, 이게 추모 기간에만 부르고, 시간은 언제나 짧아. 이게 나중에 기회가. 저는 몰랐었어요. 제가 어저께 일본에서 왔는데, 제가 김응철 선생님이라고 한방을 썼거든요. 김응철 선생님 아세요? 근데 여기에 불교대학도 있대. 그런 건 한 번도 안 부르더라고, 나. 그래서 불교대학이 있는지도 몰랐다고. 그런 걸 부르면 사람이 좀 길게 얘기할 건데. 이게 법문 시간은 짧을 수밖에 없는 게, 이게 큰스님들한테 맞춰져 있어요. 큰스님들 오래 하시면 힘드셔요. 누가? 여러분들이. 이런 게 잘못하다가 또 욕 바가지로 먹을 수도 있는데, 인생이 다 그런 거예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가지고 계시는 이러한 모든 가치들을 평등으로 놓고, 그다음에 내가 가진 것에 대한 소중함, 그리고 그것은 비교 대상이 아니라는 생각을 언제나 하세요. 그리고 위를 보고 달리기 시작하면 너무너무 힘들어져요. 그래서 나를 보고 달릴 수 있는. 달리지 말라는 뜻은 아닙니다. 달리는 것은 정당하지만 그것의 목적이 내가 돼야지, 대상이 되면 그것은 언제나. 그런 걸 보고 불교에서는 갈애(渴愛)라고 합니다. 갈애. 그러니까는 채워지지 않는 목마름. 무엇을 채웠을 때 만족하는 게 아니고, 채웠을 때 허전함을 느끼게 되는 현상들이 있어요. 그러니까 내가 목적을 했어. 그래서 힘들게 거기까지 올라갔어. 딱 들어가 보면 가장 대표적인 게 결혼이죠. 채워지고 나서, ‘아 이런 거구나. 그럼 엄마 말씀 잘 들을걸.’이라는 생각이 드는 그래서 그런 거 있는 거고. 그리고 오늘 지금 말씀드릴 주제는, 여기가 이제 수륙재 도량이기도 하고, 상원사도 수륙사였는데. 그래서 어저께 그런 얘기를 상원사 얘기를 했었는데 수륙사였었고, 수륙재 도량이었고. 여기도 그래서 수륙재 학교가 얼마 전에 통화할 때까지는 오늘 입학식 한다더니, 다음 주로 늦춰졌다고. 그 얘기 이제 그만해도 된다고, 이렇게. 근데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국가적으로 왜 수륙재를 지내려고 하는지. 그러니까 수륙재와 관련해서 한 가지만 말씀드리면, 꼭 물 있는 데서 하는 거 아니다. 사람들이 자꾸 수륙재라 하니까 어디 바닷가나 큰 하천에서 하는 줄 알아. 수륙사가 그런 데인 줄 알아. 근데 그런 게 아니고, 원한을 푸는 거예요. 모든 원한을 풀어주는, 그리고 원한이 풀려야 국가가 잘 되고, 그다음에 개인도 화평해진대. 행복해진대. 그런 얘기를 조금 해드릴 거예요. 그런데 그에 앞서서, 지금 이제 이번에 백중 이재잖아. 저도 그거 알아요. 월정사도 오늘 이재하는데 제가 빼먹고 왔거든. 그래서 백중 기간인데, 이제 되게 재미있는 걸 말씀드리면 사람은 연결돼 있을까. 예전에 그런 아바타 영화 보면 그 나비족들은 서로 즈그들끼리 약간의 이렇게 연결성이 있잖아. 그렇지 않아요? 사람은 독립되어 있을까? 연결되어 있을까? 어떻게 생각하셔. 연결돼 있다라고 생각하는 게 사실은 동아시아 관점이거든요. 그래서 동기는 상응(同氣相應)을 하는 거고, 동기간에는 서로 통하는 거고, 그래서 가장 대표적인 게 부모님이, 부모님이 꿈자리가 안 좋으면 자식들한테 전화해가지고 “내가 이러이러한 꿈을 꿨는데, 네가 좀 조심해줬으면 좋겠어.” 이렇게 얘기하면 아무리 젊은 자식이라도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 그걸 약간 귀담아듣는 척을 하죠. 막 귀담아듣지 않는데, 아예 어렸을 때는 “뭐 쓸데없는 소리 하고 있어.” 이렇게 되는 거고, 조금 지나고 나면 그거를 꼭 믿어서가 아니고, 그 부모님의 간절함이 전달되는 거죠. 그렇게라도 해서 나를 조금이라도 안 좋은 거가 생기지 않도록 하는 그런 거 있지 않아요. 그리고 또 다른 게 뭐가 있냐면 태몽입니다. 태몽. 태몽을. 사실 새로운 생명이 내 몸 안으로 딱 들어오면, 내 생각이나 몸이 좀 바뀔 것 같아. 몸만 바뀌는 게 아니고 생각도 좀 바뀔 것 같아. 그렇지 않을까? 그게 일신이령의 상태거든요. 한 몸에 영혼이 2개가 들어와 있는 상태야. 그러면 그 간섭 효과가 좀 이루어지지, 일어나지 않을까? 그 간섭 효과 중에서 가장 대표적으로 불교에 기록된 경우는 사리불하고, 그다음에 구마라즙입니다. 그때는 이 양반들이 너무 세 갖고, 엄마가 오히려 자식한테 말려 들어갔어요. 그래서 애를 임신을 하니까, 엄마가 천재가 됐대. 어, 뭔가 포스가 강렬하지. 그래서 결국은 나중에 애 낳고 나서 평범한 사람으로 되돌아왔다 이렇게 되거든. 그래서 내가 뭐라 그랬냐면, 낳지 말고 참았어야지, 참았어야지. 제가 예전에 그 얘기했었는데, 제가 28일생인데, 이게 1월 28일인데, 팔자가 안 좋아요. 추울 때 태어나면 힘들어. 제가 허우대가 멀쩡해서 사람들이 참 고생 안 하고 편하게 큰 줄 아는 분들이 있는데, 진짜 고생고생 상고생은 다 한 것 같아요. 안 믿기죠. 나도, 나도 불만이야. 고생한 것처럼 생겨야 되는데, 너무 편하게 생겨가지고, 그지. 그래서 이게 2월만 태어났어도 조금 팔자가 피거든. 사람이 이게 팔자라는 게 참 묘해서, 인생을 살다 보면 그런 게 있어요. 내가 <노력하는 만큼 이루어진다>라는 것도 있는데, 아니야. 노력하는 것만큼 노력 플러스 알파가 붙는 경우가 있고, 노력해도 안 되는 경우가 있어요. 참 그게 묘한 거라고. 그래서 제가 얘기하잖아. 인생은 고스톱과 마찬가지다. 손에 쥔 패가 50프로, 뒷장이 50프로다. 뒷장이 가피다. 뒷장이 가피야. 시작하자마자 갑자기 금두꺼비를 하나 잡고 있어. 그러면 인생이 바뀌는 거예요. 깠는데 두꺼비가 나와. 거의 필패입니다. 아니 뭐야, 패할 수가 없는 상황이 돼요. 되게 재미있잖아. 실컷 이렇게 내가 든 패를 가지고 맞춰가지고 이게 청단이 3개 들었네. 그래서 청단을 하려고 했는데, 꼭 앞에서 하나 잘라먹고 끝까지 안 내놓는, 그래서 그것 때문에 다 내놓다가 인생 끝나는 경우도 있고. 인생이 묘한 거예요. 그리고 손에 든 거는 내가 조절하는데, 타짜가 아닌 이상은 뒷장은 우리가 조절할 수 없다. 참 저급한 비유를 들고 있죠. 그거를 조절하는 거는 뭘까 도대체. 이 생각이 드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제가 오만 쓸데없는 짓은 진짜 거의 다 하면서 살았거든요. 제가 고등학생 때 금 만든다고, 연단술이라는 게 있어요. 그게 원래는 그때 뭐가 유행했냐면, 단학 이런 게 유행을 했어요. 단전호흡. 그런 거 유행했는데, 그게 원래 오리지널을 쫙 이렇게 문헌들을 올라가면, 금을 외부적인 진료를 통해서 만들어서, 그 금을 먹고 그게 몸으로 녹여서 금의 몸이 되는 거야. 그걸 금선이라 그래요. 도교에서 최고 신선이 금선이거든요. 대라금선이거든요. 그 못된 풍속이 우리나라 불교에 들어와 가지고 지금도 하고 있죠. 지금도 스님들이 행선축원(行禪祝願)에서 <귀의삼보예금선(歸依三寶禮金仙)> 그렇게 하고 있습니다. 지금 다 하고 있잖아. 그렇죠. 귀의삼보, 모르는 척하지 마. 그래서 그게 금선이라고 하는 게 그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내가 금 만든다고 또 열심히 어렸을 때 노력도 하고, 그것만 한 게 아니고, 점이나 이런 것도 진짜 여러 가지 많이 했었어요. 고등학교 때 점 보는 걸 한 16가지는 배워본 것 같아요. 안 맞아요. 답만 얘기하면 안 맞아요. 그리고 더이상 이건 이쪽에는 길이 없다. 그러니까 사람들이 그렇게 생각하거든. 깊게 파면 우물 물은 나오는 거 아니냐. 덜 파서 안 나오는 거 아니냐. 때론 마그마가 나옵니다. 판다고 계속 물 나오는 거 아니다. 언제 이거는 답이 없다라고 생각을 했냐면, 이게 점하고 이런 분들이 그래서 저를 별로 안 좋아하는데, 사마천의 사기에 보면 황제가 며느리를 들이는 대목이 나와요. 며느리를 맞이하는데 점을 봤거든. 그 당시에는 점이 과학이에요. 침대는 가구가 아니고, 점은 과학이에요. 그래서 진시왕 때 점서는 불타지 않았어. 과학서로 분류됐기 때문에. 진짜야, 진짜. 이런 얼굴 표정들은 뭘까? 그때 진시왕 때 분서갱유할 때 이렇게 책을 다 태우는데, 그 철학적인 거나 그게 사상 통제 정책이거든요. 그렇지만 과학하고 의료 그러니까 의술, 농업, 생산과 관련된 것들, 기술과 관련된 것들은 태우지 않았어요. 그걸 마지막 어떻게 보면 끝장을 냈었던 건, 항우가 함양궁을 함락시킬 때 그때 사건들이 벌어져요. 그리고 진시왕 같은 경우는 그것도 다 없애긴 없앴지만, 기본 자료들은 전부 다 저장을 해놨어요. 우리 종자은행 만들듯이. 그러니까 아주 생각이 없었던 사람은 아니에요. 근데 그거를 항우가 끝냈습니다. 항우가. 그래서 한나라 때도 점은 과학이었습니다. 그래서 며느리를 맞이할 때 이제 이게 재미있는 거거든. 새로운 기운이 들어오는 거야. 마치 임신했을 때 애가 뱃속에 들어와서 두 몸이 되는 것처럼, 가족이라고 하는 어떤 기운의 흐름 속에 외부인이 들어오는 거예요. 기운이 다른 사람이. 그게 조화될 거냐, 안 될 거냐. 그거 조화 안 되면 진짜 피곤하지, 누군가는 맞춰야지. 그리고 동아시아 결혼 같은 경우는, 지금 우리나라가 결혼이 힘든 이유 중에 하나도 그건데, 그 사람한테만 맞추면 되는 게 아니고, 집안끼리 맞춰야 돼요. 이게, 이게 더럽게 피곤해요. 잘 모르는 분까지 애경사를 가야 돼, 갑자기. 힘들죠. 아니 그게 결혼을 안 하는 이유 중의 하나예요. 스트레스받기 싫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이제 며느리를 맞을 때 점을 치라고 그랬는데, 각 점쟁이마다 점괘가 달라. 음양으로 치는 사람이 있고, 그다음에 주역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오행으로 보는 사람이 있고, 다 룰이 다르니까 다 다른 거예요. 그랬는데 되게 재밌는 얘기를 해. 이런 거는, 이런 며느리 볼 때는 오행으로 보는 사람 거 취하는 게 맞으니까, 오행 쪽으로 봐서 문제가 없으니까 통과 이런 식으로 하거든요. 그 얘기는 뭐냐. 즈그들끼리도 룰이 안 맞는다는 뜻이에요. 하나의 단일 룰이 아니구나. 그리고 지금 점쟁이는, 제가 그런 얘기하는데, 예전 글씨 잘 쓰시는 분이나 예전 점 잘 보시는 분을 지금 사람들은 따라갈 수가 없어요. 이유가 뭐냐. 글씨만 가지고 한번 봐봐. 글씨를 서예, 서예 인구가 예전에는 굉장히 많았었잖아요. 지금은 붓글씨 쓰는 사람이 별로 없잖아요. 근데 그렇게 서예를 잘하는 사람이 황제의 명을 받으면 그 정성이 미친 듯이 들어가요. 아버님한테 오다 받았다고 그런 정성이 들어가는 게 아니에요. 왕조 국가에서 아마 유일하게 가능한 나라는 북한이지 싶어. 북한의 주석께서 명령을 하시면, 그런 정성이 들어가. 그러니까 최고로 가장 서예 인구가 많을 때 최고로 글씨 잘 쓰는 사람이 황제에게 부탁을 받아서 글을 쓴다. 그 글을 능가하기가 어려워요. 현대에도 그런 기술을 능가, 그런 장인 정신이 나오겠어요? 점도 마찬가지예요. 수요가 많을 때, 지금보다 예전에 수요가 훨씬 많지 않았을까. 그렇게. 그때도 그렇게 뒤죽박죽이었는데, 그리고 주자가 쓴 서법, 주역 전의대전, 서법, 주자하고 정이천이 쓴 거기에도 뭐라고 나오냐면, <같은 점은 두 번 치지 않는다.> 우리 또 주역, 제가 주역학회 회장님한테 주역을 배웠잖아. 또 같은 점은 두 번 치지 않는다. 점신이도 하기 때문에. 근데 사실은 우리 선생님이 뭐라고 말씀하셨냐면, 두 번 치면 같은 괘 안 나온다, 같은 괘 안 나온다. 이 이거 랜덤이 작동하는 거기 때문에 같은 괘가 나올 수 없다. 그래서 이렇게 써놓은 거다. 정직하신 분입니다. 그분은 지역학회 회장이라도 학회 쪽에 계셨던 어른이라서, 대학 교수여서 그래요. 근데 일반 점 보시는 분들은 거기에 맹신해. 뭐나 되는 것처럼. 왜 그게 밥그릇이잖아. 교수는 그건 알바죠. 월급은 이쪽에서 나오고, 이건 알바죠. 이렇게 해서, 이게 굉장히 재미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람들이 개인적으로 만약에 이렇게 독립돼 있다라고 하면 서로 영향을 안 받아야 돼. 그러니까 며느리가 들어오든 사위가 들어오든 큰 문제는 없어야 돼. 그게 어떻게 보면 서구식 관점이에요. 서구식 관점. 그래서 개인주의적인 생각. 그래서 지금 우리나라도 그런 식으로 많이 갔죠. 그래서 재산도 결혼할 때 재산도 대충 정리를 해서, 나중에 헤어질 때는 니 재산, 내 재산이 어느 정도 나뉘게. 아니면 결혼해서도 자기 월급을 자기가 관리하는 경우들도 있어요. 되게 재미있습니다. 그래 서로 선물해줘, 서로 선물해줘. 아니 그런 경우들도 있어. 근데 그게 동아시아 전통문화에서는 굉장히 이질적인 겁니다. 동아시아에서는 그냥 결혼하면 다 섞이는 거고, 가족은 다 섞이는 거예요. 그래서 저희 어렸을 때 되게 재미있는 현상이, 우리나라가 다 거지같이 살았었잖아. 저는 여러분들보다 훨씬 편 세대인데, 여러분들 굉장히 힘들 때 사셨었잖아요. 그러면 그때는 방 한 칸에 진짜 막 오글오글 이렇게 살던 시절들이 있었잖아. 그럼 니 거, 내 거는 당연히 없어요. 니 거, 내 건 당연히 없어. 그리고 나중에 이제 한 70년대 말, 80년대가 되면서 형편이 피고, 각각 개인의 방들이 생기기 시작했어. 그때 부모가 자식 방문을 벌컥 여는 사건들이 벌어져요. 그 벌컥 열었을 때 자식은 “노크를 하라”라고 요구를 했고, 부모는 “부모, 자식 간에 뭔 노크냐”라는 게 있었어요. 그 논점이 한 번 있었어. 그러다가 이제 자식이 문을 잠그기 시작하면 노크 해야지. 들어갈 수가 없는데 뭐. 이거 굉장히 재미있는 겁니다. 지금도 아마 부부 간에도 그게 가능할 거야. 뭐가 있냐면 “부부니까 핸드폰 비밀번호를 네가 나한테 가르쳐줘야 되는 거 아니야? 부부래도 야 그거는 그거 아니냐.” 아니 이게 성립될 수 있는 얘기라니까. 성립될 수 있는 얘기라니까. 근데 동아시아는 그냥 뭉뚱그려서 하나예요. 그래서 부모님이 돌아가, 부모님이 어느 정도 이상 연세가 많이 드시면, 자식에게 상속을 하고, 부모님은 그 자식에게 어떻게 보면 의지해서 사는 거죠. 그래서 그런 거 있잖아. 여자는 이런 얘기를 해도 되는가 모르겠다. 이거 지금 여자분 많은데. <어렸을 때는 아버지에게 의지하고, 커서는 남편에게 의지하고, 나이 들어서는 아들에게 의지해라>, 이런 쓸데없는 소리, 전 근대적 그런 얘기들 있잖아. 그지 한 번씩 들어보셨잖아. 그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하는 게 전체를 어떻게 보면 하나의 연결됐다라는 생각으로 판단을 하고 있어서 그래요. 그런데 기독교 문화는 기독교나 이슬람은 신이 인간의 영혼을 하나씩 주는 겁니다. 그러니까 너네는 같은 팀으로 뭉쳐 있지만, 마치 직장의 어떤 부서와 비슷한 거야. 그러니까 그것은 단독 유닛이에요. 하나하나가 분리돼 있는 거야. 그게 개인주의입니다. 우리는 집단이 뭉쳐 있다라고 생각을 하는 거고 그래서 태몽도 꿔줄 수 있는 거야. 내 꿈을, 내 손자의 꿈을 내가 꿔주는 거죠. 그게 어디까지 가능한지는. 사실 저도 되게 재미있어요. 왜냐하면 피가 통하는 사람끼리 그게 이제 존존친친이라고, 친친존존이라고, 혈연 혈통 피가 얼마나 같이 섞였느냐가 촌수 개념이거든요. 촌수. 그래서 부부는 무촌이잖아. 피가 없으니까. 그래서 부부는 언제든지 바꿀 수 있다. 갈아낄 수 있다. 아니 유교적 생각, 유교적 생각이야. 내 생각 아니야. 내 생각 아니야. 오해하지 마. 갈아낄 수 있다. 그건 부품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는 거고. 그다음에 1촌은 이게 피의 농도예요. 1촌, 2촌, 3촌, 계산해 봐. 그냥 피의 농도예요. 몇 프로를 우리가 같으냐로 묶이는 거예요. 이게 지금 그리고 그런 사람들은 서로 그 피가 같듯이, 서로 통하는 에너지가 있대. 그러니까 내 딸 태몽을 엄마가 꿔줄 수도 있어. 근데 간혹 가다가는 ‘며느리 걸 꿔줬어요’도 나와. 그게 가능한가. 난 그 생각은 사실 들거든요. 그런데 동아시아에서는 기본적으로는 태몽이 내가 안 꿔도, 그러니까 자기도 뭔가 변화는 있을 것 같은데, 그러니까 구마라즙이나 안 그러면 사리불처럼 애가 딱 임신이 됐을 때, 이게 워낙 에너지가 강하니까 엄마가 바뀌어. 그렇게까지는 아니더라도 좀 바뀌지 않을까. 다른 생명이 내 몸 안으로 들어오면. 회충이 있어도 구역질이 나잖아. 그런데 뭔가 좀 바뀌지 않을까. 근데 자기가 그걸 느낄 것 같아. 몰라. 내가 안 해봐서 잘은 모르겠는데, 뭔가 좀 느껴지지 않아요? 안 느껴지면 뭐 무딘 거고. 그리고 그거를, 가족도 그 영향을 받는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것과 가장 어떻게 보면 합이 맞거나, 그러니까 잘 이해관계가 이렇게 잘 맞거나, 안 그러면 충돌하는 사람에게 그 꿈이 보이는 거거든요. 약간 너무 밋밋한 사람은 별 볼 일이 없고, 그렇게 해서 보통은 이제 할아버지, 할머니까지 이렇게 영역이 그 정도까지 되더라고요. 그래서 이런 집단 구조를 이루는 게 돌아가신 뒤에도 작동을 한다라고 봐요. 참고로 말씀드리면 불교는. 이거 지금 이렇게 집단으로 연결된다라고 하는 게 유교 문화입니다. 유교 문화입니다. 불교는 개인주의랑 비슷해요. 끊어진다라고 봐요. 끊어진다라고 봐요. 불교는 그러니까 기독교나 이슬람은 신이 하나하나를 꽂아준 거고, 꽂아준 거고, 불교는 업이라고 하는 것이 상속되면서 그렇게 해서 한 팀이 만들어진 것뿐이야. 그러니까 어벤저스가 만들어진 거야. 그리고 그것은 각각의 어떠한 특징들을 가지고 있어. 그래서 언젠가는 떠나고 싶으면 떠날 수 있는 게, 가족을 등지고 출가할 수 있다는 문화는 사실은 거기서 나오는 거예요. 지금 예전하고는 생각이 좀 달라졌는데, 지금은 저도 주변에서 그런 말씀들을 하시는 분들이 있거든요. 결혼을 안 해서 걱정인 부분들도 요즘은 되게 많이 있는데, 결혼을 하더라도 부모가 탐탁지 않은 거야. 왠지 나는 탐탁지 않아. 그런데 예전 같으면 탐탁지 않다라고 대놓고 얘기를 할 건데 , 한두 번 이렇게 언질을 줬는데 얘가 밀어붙이는 거야. 그때 이제 어떻게 해야 될 거냐를 저한테 물어보는 경우도 있어요. 내가 모르지. 내가 알겠어. 왜 나한테 그런 걸 물어보는지 잘 모르겠는데. 그런데 예전에는 부모님이 하지 마라고 하면 그 하지 마라고 하는 어떻게 보면 가장 극렬한 멘트가 두 가지입니다. “내 눈에 흙이 들어가기 전에는 안 된다.” 그건 뭐냐 하면 관뚜껑을 덮고 흙을 뿌리는 걸 상정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죽기 전에는 안 된다. 하나는 그러면 “내 자식이 아니다. 호적을 파라.” 진짜 한두 번씩은 들어보신 옛날 멘트. 요즘은 그런 경우가 별로 없죠. 그리고 지금은 시절이 바뀌어서 예전에는 그렇게 말씀을 어른이 하시면 실제로 멈추는 경우가 대부분이었습니다. 여러분 세대 같으면 택도 없죠. 그냥 그냥 스톱이죠. 그러고 보면 인간 세상이라는 게 진짜 재미있어. 그렇게 간을 보고 맞춰보고 살아도 깨지는 거는 지금 더 깨지고, 예전에는 그냥 그냥 한 두어 번 보고 결혼하신 분도 여기 있을걸. 그래도 안 깨지고 잘 살아요. 그러니까 맞춘다고 뭘 꼭 해결되는 것 같지 않아, 이게 진짜 랜덤 박스 같아요. 그리고 요즘은 너무 맞춰서 안 되는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그런데 지금은 부모님이 왜 저한테 그걸 물어보시냐면 당신도 아마 제가 전문가가 아니라는 걸 인지하고 있을 거예요. 근데 답답해서 물어보시는 거예요. 그 이유는 지금은 내가 마음에 안 든다고 그거를 대놓고 자식에게 말할 수 없어. 대놓고 자식에게 말했다가 자식이 끝까지 밀어붙이면 그걸 어떻게 처리할 거야? 분위기만 쎄 해지면서 이제 문제가 터지거든요. 근데 여기서 중요한 게 있습니다. 뭐가 있냐면, 부모님이 내가 데려갔는데 아니라고 했을 때, 내가 수용하는 거는 집단 의식이 더 강한 거예요. 집단 의식이 강한 거예요. 그리고 지금 같은 경우는, 개인 의식이 더 강한 거예요. 어차피 내가 살 건데 부모님이 살아주실 것도 아니잖아요. 그것도 말이 돼. 그런 상황에서 “내가 올바르다고 선택하고, 내가 책임을 질 건데, 내가 한두 살도 아니고, 그리고 예전같이 무슨 철없이 결혼하는 상황도 아니고, 30이 넘었는데 이게 내가 책임지면 되는 거 아니에요”라고 얘기했을 때 할 말도 없어. 그 얘기는 뭐냐. 집단주의적인 구조에서 개인주의적인 구조로 바뀌었다라는 걸 알 수 있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은 부모님도 눈치를 봐. 그러니까 해주기는 싫은데 저한테 와서 그 얘기를 했을 때는, 대부분 99%는 해주기 싫은 거야. 그러면 저는 뭐라고 대답하는지 아세요? 함부로 나서지 마세요. 가족 간에도 너무 골이 깊으면 회복되지 못합니다. 천륜이라는 게 쉽게 안 끊어지는데, 거기서 너무 브레이크를 잡아놓으면 나중에 돌파당했을 때, 그리고 또 돌파를 안 하고 양보했을 때도, 나중에 안 좋은 일이 생기면 그때 ‘내가 그걸 밀어붙였어야 되는데’ 또 이 생각을 해요. 이게 참 피곤하다고, 해법이 있느냐. 없어요. 그리고 사람은 잃은 것에 대한 어떻게 보면 아쉬움이 더 커. 그때 내가 그랬으면. 안 산 땅하고 비슷하지. 그때 내가 딴 거 다 필요 없고 서울 사시는 분들은 그 생각 많잖아. ‘다 필요 없고 뭐 한다고 저런 걸 샀는가 몰라.’ 이러면서 ‘그냥 강남 개발하기 전에 땅이나 좀 사놓을 걸.’ 저희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강남이 강남이 아니었었어요. 서울이 커지고 있을 때였거든. 제가 그걸 현장에서 목격하고 있었잖아. 서초동은 화훼단지였었어요. 그런 데 사는 애들 학교 오면 코찔찔이 좀 같이 놀면 안 됐었어. 좀 떨어지는 애들이었어. 그리고 서울은 어떻게 돼 있었냐면, 사대문 안에 사는 사람들은 자부심이 있었어. ‘내가 우리 집이 사대문 안에 있는데 뭔.’ 이런 게 있었어. 그러니까 서울이라고 하는 개념이, 토박이 개념이 사대문 안에 있었어요. 그래서 사대문 밖에 있으면 약간 떨어지는 사람이라고 생각을 했는데 ,지금은 상황이 바뀌었지. 그러면서 여러분도 무슨 생각을 하냐면 ‘그때 조금 조금 내가 복잡하더라도 그때 땅을 샀으면, 다 필요 없는데 이게 지금.’ 이게 진짜 제가 그 얘기하잖아. 칠성사이다, 칠성사이다를 그렇게 많이 팔아먹었는데 칠성사이다 팔아먹은 이익보다 테헤란에 있는 공장 파니까 그 돈이 더 많더라. 어. 야 그거 참 진귀하지. 그래서 그런 식으로, 그런 식으로 참 안타깝다라는 생각들을 할 수도 있는 게 인간이에요. 그러다 보니까 큰 선택에서 일이 잘못되면, ‘그때 저 어른이 나를 안 막았으면’이라고 하는 원망으로 돌아와. 그래서 참 이게 처리하기가 굉장히 어렵다고. 그런데 유교 룰에서는 이거는 제가 늘상 얘기하는 게 있어. 정답이냐가 아니고, 그들은 그렇게 생각했다. 그리고 그들이 생각한 게 이들이 생각한 거랑은 달라요. 그러니까 유교에서 생각하는 문화, 그다음에 불교에서 생각하는 문화, 그다음에 기독교나 이슬람에서 생각하는 게 다 달라요. 그래서 그냥 단적으로만 얘기하면, 저는 사실 요즘 자살 문제 이런 데 관심이 되게 많거든요. 예전부터 관심이 많았어요. 자살, 자살을 어떻게 처리할 거냐. 예를 들어서 기독교나 이슬람은 자살하면 지옥 갑니다. 영구 지옥입니다. 한 번 지옥 가면 영원히 가는 거예요. 이유는 뭐냐. 신이 부여해 준 건데, 생명을 부여했는데, 니가 스스로 끊었기 때문에. 그러니까 뭐하고 똑같은 거냐면, 은행원에게 돈을 맡겼더니 자기가 알아서 쓴 거야. 지 용도로. 횡령이죠. 그렇게 하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라고 얘기하는 거예요. 불교는 사실 자살이 별 문제가 없어요. 왜냐하면 그거는 내 업에 의해서 내가 만든 내 거예요. 그래서 자살에 대한 관점이 서로 약간 달라. 서로 약간 달라. 그게 종교 문화들이 각각 생각하는 것들이거든요. 유교에서는 자살하면 그거는 대역죄입니다. 부모를 계승하고 있는데. 그래서 그래서 예전에 그런 자살을 하면, 자살을 하면 진짜 그거는 부모님 입장에서는 당연히 억장이 무너지는 일이기도 하지만, 굉장한 불효로 동시에 문화권마다 다른 거예요. 근데 왜 요즘 자살에 대해 생각이 있냐면, 너무 오래 사는 세상이 돼서 이게 존엄사 문제예요. 사실은 젊은 사람의 자살의 문제가 아니고. 저번에 이제 뉴스에 그것 때문에 대서특필을 한 번 했죠. 네덜란드 총리 지내신 분이 연세가 너무 많다 보니까 이제 좀 오락가락하시게 된 거예요. 그래서 부부가 다 존엄사를 선택을 해서 갔죠. 한국 사람들도 지금 스위스에 가서 존엄사를 선택해놓고 돈 내고 대기하고 있는 사람이 100명이 넘어요. 그래서 이걸 어떻게 처리할 거냐. 쌩쌩할 때 자기 의지대로 판단할 수 있느냐, 이게 종교마다 판단들이 달라요. 종교마다 판단이 달라. 그래서 이런 식으로 각 종교들이 어떤 식의 생각들을 했는지에 대한 판단 기준들이 있어요. 근데 유교는 <다 연결돼 있다>라고 판단을 해요. 그리고 그 유교가 연결되어 있는 것은 죽은 뒤에도 연결이 된다. 그 얘기를 하려고 지금까지 왔어. 아 힘들다.(박수)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거 옛날 방식이야. 하지 마. 그래서 지금 돌아가신 뒤에도 불교나 기독교는, 기독교는 어떻게 돼 있는 거냐면 사람이 죽고 나면, 걔네 자꾸 뭐 천국 지옥 간다는데 가는 거 아닙니다. 그냥 시체 상태로 묻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예수가 재림할 때까지 계속 대기타고 있다가, 그때 판단이 결정이 돼서 끝나는 거예요. 그래서 유럽에 가면 그 카타콤도 많고 그다음에 성당 옆에 무덤들이 그렇게 다 대기 타고 있는 거예요. 그게. 그래서 기독교나 이슬람에서는 화장을 하면 사실은 영원히 소멸되는 쪽으로 가요. 그래서 걔네는 무조건 매장 문화를 해야 되고, 유교 같은 경우는, 죽고 난 뒤에도 그 영혼이 사라지지 않아요. 언제까지? 여러분들이 기억할 때까지. 여러분이 기억할 때까지. 기억에서 잊혀지면 거의 사라집니다. 사후 세계가 없습니다. 유교의 문화권에는 사후 세계가 없습니다. 그래서 <눈에 안 보이게 이 세상에 같이 존재한다>라고 생각을 해요. 단지 형질이 약간 성글어서 마치 구름 같은 거야. 그래서 우리 주변으로 통과가 되는 거죠. 그리고 우리가 잘 인식을 못한대. 아니 그들은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들은 그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 에너지는 언제까지 존재하냐면, 마치 관성의 법칙처럼 기차가, 달리던 기차가 멈춰 섰을 때 한 1kg 정도 이상 이렇게 진행을 하거든요. 그 힘을 브레이크를 걸어도 더 이상 안 되는 거예요. 그것처럼 살아있는 세월에 준해서 그 에너지가 넘어갑니다. 그리고 그 에너지는 어디까지 간다라고 생각을 하냐면, 그 후손들이 기억해 주는 것까지 가요. 그래서 그게 4대 봉사까지 대부분 얘기를 하거든요. 그러니까는 증조부, 고조부까지. 5대 이렇게 얘기는 안 합니다. 불교는 되게 재미있게 칠대를 얘기합니다. 불교는 칠대조를 얘기합니다. 그거는 인도 문화에서는 니 혈통이, 인도 귀족 문화에서 네 혈통이 얼마나 청정한가를 증명할 때 나를 포함한 7대를 변증해야 되기 때문에 그래요. 내 위로 그러니까 내 위로 6대가 순혈이어야, 그러니까 거기에 잡피가 안 섞여야 그래야 내 정당성이 강조된다. 유지된다라는 생각이 있어서 인도 문화에서는 칠대를 강조하는 거고. 그래서 부처님도 조상이 7대까지 나오는 거고, 그다음에 불교 안에서도 비바시불, 시기불, 비사부불, 구류손불, 구나함모니불, 가섭불, 석가모니불 해서 7대가 나오는 거예요. 그렇게 그런데 동아시아는 기억해 주는 사람, 고조 정도까지 볼 수 있어요. 진짜 열심히 일찍 결혼하시면 장손은 고조 정도까지 볼 수 있어요. 그래서 기억해야 되는 이유 중에 하나는 뭐냐면, 유교에서는 사진을 안 쓰고 그러니까 초상화를 안 쓰고 위패를 쓰죠. 그러니까 글씨만 있기 때문에 기억하는 사람이 있어야 감응할 수 있어요. 그리고 같은 피만 감응이 돼요. 그러니까 피가 통하는 사람이 아니면 그 혼을 부를 수 없어요. 그래서 우리 주변에 있는 거예요. 그리고 우리 주변에 있기 때문에, 이 양반이 배고플 거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밥을 줘. 되게 재미있는 거예요. 돌아가신 분에게 밥을 준다는 게 우리가 익숙해서 문제의식을 못 느끼는 거지. ‘야 죽은 사람이 밥 먹냐.’ 서양 사람들이 보면 되게 재미있을 거예요. 이게 뭐 하는 짓인가. 그리고 결정적으로 재미있는 거, 어느 시점이 되면, 자기가 이렇게 절하던 후손이 밥 먹는 역할을 대신합니다. 그래서 숟가락을 자기가 떠 놓습니다. 자기가, 자기가 떠 놓고 자기가 또 절을 해. 1인 2역을 해. 1인 2역을. 옆에 사람이 할 수 있느냐? 하면 안 됩니다. 제주가 해야 되는 거예요. 왜 피가 통하는 사람이. 피가 통하는 사람이. 예전에는 제가 그런 얘기도 해드렸는데, 예전에는 후손 중에서 가장 닮은 애를 그 제상에 앉혔다니까. 그걸 시동이라 그래요. 그러면 진짜 리얼하게 “지금 먹어.” 그럼 걔가 먹어. 먹어. 그렇게 했었어요. 원래 제사가 예전에. 공자 때도 그랬어요. 그래서 공자 죽고 났을 때도 뭐라고 얘기가 있냐면, 제자들이 공자하고 닮은 제자 중의 한 명을 세워서 우리가 제를 모시면 어떠냐 이 논점이 벌어져요. 그랬더니 “야 우리 선생님을 대신할 분은 없다.” 이런 반론이 제기되면서 결국 무너졌다고. 공자 때도 그런 문화가 있구나라는 걸. 그래서 혈통과 연결해서 여기밖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에, 그 돌아가신 분의 집을 지어드리는 게 사실은 저 위폐입니다. 그래서 위에는, 원래 제가 눈이 나빠서 정확하게 지금 잘 안 보이는데, 저 밑에 조금 큰 거 큰 거 이렇게 보시면 저게 집 모양이에요. 기와집 모양. 기와집 모양. 그렇게 해서 저게 원룸이죠. 원룸, 원룸. 이렇게 쭉 조금 많이 내면 투룸으로. 원룸으로 이렇게 딱 해가지고. 아니야 되게 재미있어요. 살아있는 사람에게 똑같이 해준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그래서 처음 돌아가시면 3년 동안은 밥을 떠 놓고 곡을 합니다. 근데 난 그거 곡하는 건 내가 별론데. 내가 죽은 입장이면 밥 떠 주는 거는 그렇다 치고, 그건 습관 때문에 먹는 거예요. 그거는 내가 먹어야 돼서 먹는 게 아니고, 습관 때문에 먹는 거예요. 그거 있잖아요. 여러분들 ‘팔 잘리면 잘린 팔이 가렵다’ 이런 거 들어보셨어요? 그것도 어떻게 보면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사실은 팔이 이렇게 급격하게 잘리면, 그게 이제 의학적으로는 다르게 생각해요. 근데 저는 어떻게 생각하냐면, 영혼은 이 팔 상태로 있는 거야. 그래서 여기서 감각이 남아 있는 거야, 아직. 그리고 이게 좀 오래돼서 내가 팔이 잘렸다라는 걸 계속 인지를 하면 이게 이렇게 작아져, 작아져. 그리고 죽고 나서는 어떤 일이 벌어지냐면 팔 없는 귀신으로 나와. 자기가 팔이 없다고 생각해. 이게 고정관념인데 되게 재밌어요. 그래서 그런 귀신들의 팔을 회복시켜주는 방법, ‘너 죽었어’를 반복적으로 가르쳐주면 팔이 회복돼. 되게 재밌어. 늙어서 돌아가시면 늙은 모습으로 나와요. 되게 재밌어. 그냥 젊게 해도 될 건데, 굳이 리즈 시절로 돌아가세요. 그래서 저렇게 집에 모셔놓고 저건 영혼의 집이에요. 그래서 잘 나가는 분들은 사당이 따로 있는 거고, 그러니까 생활하는 공간 안에 그 옆에 사당을 모셔놓고 있는 거고. 그리고 이제 형편이 좀 어려우신 분들은 집을 놨다가, 만들었다가, 가설했다가 없앴다가를 반복하는 거예요. 아니 그렇게, 산 사람도 살 집이 없는데, ‘야 돌아가신 분 집이 어디 있냐’ 이렇게 되는 경우도 있는 거고. 그래서 처음에 3년 동안은 음식을 공급한다라고 하는 게, 그분이 습관이 남아 있기 때문에 거기에 준해서 맞춰주는 겁니다. 맞춰드리는 거예요. 그래서 그 얘기 있는데 여러분들 이런 얘기 들어보셨어? 저도 그런 거를 옆에서 보면서 참 그런 생각을 하거든요. 제가 꼰대라서 그럴 수도 있어요. 제가 놀랍게도 거의 맨 마지막 서당 출신일 거예요. 저희 조부님이 서당 훈장이었었기 때문에. 그래서 보통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부모님이 돌아가시면 보통 뭐라고 얘기하냐면, 그 일이 내 뜻에 안 맞더라도 3년은 한다. 그 3년은 언제나 만 3년 아닙니다. 햇수 3년입니다. 3년상, 이러면 햇수 3년입니다. 3일장 하면 날로 3일인 거야. 만 아니에요. 절대. 이 문화가 있기 때문에 우리는 태어날 때 한 살을 먹고 나오는 거야. 이게 다 동일 룰이거든. 그런데 지금은 이제 좀 헷갈리게 됐지. 그 동일 룰로 다 안쳐주니까. 이게 룰들이 있어요. 그렇게 해서 3년 동안은 그 부모가 하시던 일을 내가 마음에 안 들더라도 그냥 유지시키고 바꾼다. 이게 유교 룰이에요. 우리 부모님이 약간 이상한 행동을 해놨어. 그냥 내가 볼 때는 그분은 그게 맞다라고 생각했는데 그래도 3년 동안은 고치지 않는다라고 하는 게 기본 룰이에요. 왜 그때까지는 이분의 에너지가 강하게 남아 있다라고 보기 때문에. 근데 요즘은 그냥 휙휙 바꾸는 경우들이 있어요. 그래서 그거는 조금 어른을 생각하면 저렇게 하면 안 될 것 같은데. 근데 말하면 꼰대가 돼. 말하면 꼰대가. 아 그래서 “제사 같은 경우도 어떻게 합쳐야 돼요?” 이런 거 물어보시는 분 되게 많거든요. 근데 “저는 특별하지 않으면 3년까지는 해드리고, 해드리고 움직이시면 좋을 것 같아요.” 보통 그렇게 말씀을 드려요. 왜? 크게 힘들지만 않으면, 크게 힘들지만 않으면, 그래서 3년 동안은 음식을 드리고 그다음부터는 이제 그쪽 세계에 적응하는 거야. 내가 팔이 잘리면 처음에는 팔이 있어서 팔에 대한 감각이라든지 이런 게 눈 뜨고 있을 때는 그 감각이 잘 안 느껴질 수 있는데, 꿈속에서는 팔이 그대로 존재합니다. 그리고 요게 영혼이 이렇게 수축돼 들어가면 언제 완료가 된다라고 보시면 되냐면, 꿈속에서도 내가 외팔이로 나오면 내 고정관념이 다 바뀌었구나, 형태가 바뀌었구나 이렇게 생각하시면 돼요. 이런 귀신에 대한 얘기를 자꾸 하면 솔깃하기는 한데, 사람이 너무 좀 미신적으로 보여. 그래서 많이는 안 해줄 거야. 이런 얘기 저한테밖에 못 듣는 그런 얘기들이 있는데. 근데 여러분들은 사실은 들어두는 것도 도움이 돼요. 왜 얼마 안 남았어. 미리 선행학습을 태교라고 생각하고 잘 들어주시면. 그렇게 해서 저 집 안에 이렇게 들어가 있는 거고, 들어가 있는 거고. 제가 그 얘기하는데 진짜 FM으로 만들어진 위폐에는 위아래에 구멍이 뚫려 있다. 그게 영혼이 출입하는 통로예요. 그리고 저기에만 구멍이 뚫린 게 아니고, 원래는 스님들 가사도 FM으로 만든 가사에는 구멍이 뚫려 있어요. 통문불(通門佛)이라고 해서, 한쪽 끝에서 한쪽 끝으로 콩이나 팥이 이렇게 지나가도록 되어 있어요. 미로같이. 그리고 예전에 신라 범종을 보면 위아래가 뚫려 있어요. 그것도 <부처님이 내려온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이게 유교적인 관점에서 열반에 든 부처님이 온다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사시할 때도 우리가 어떻게 보면 부처님을 모시는 의식을 하는 거거든요. 룰이 섞여 있어서 약간 헷갈릴 수도 있는데 유교 룰이 생각보다 단순해요. 그렇게 해서 존재한다라고 보고, 그 존재하는 기간이 4대 봉사 정도까지 가는 거고, 빡시게 존재하는 기간 적응 기간 그러니까 내가 유학을 갔어. 그럼 적응 기간이 3년이야. 이해가 되세요? 그 적응 이제 어학 연수도 해야 되고, 이렇게 한 3년 잡히는 거야, 만 3년 아니고요. 햇수 3년. 그렇게. 그래서 그 기간 동안은 예전에는 공양을 계속 음식을 놔드렸고, 그리고 부모님 일은 바꾸는 게 아니고, 왜냐하면 그 어른이 보고 있다가 서운해할까 봐. 저는 그게 타당하냐를 떠나서 그런 마음은 굉장히 귀하다고 생각해요. 그건 자식의 어떻게 보면 도리라고 생각을 하거든요. 합리적이래도, 불편을 감수하면서라도 어른의 말을 따라주려고 하는 게 어떻게 보면 자식 된 자의 기본 도리고, 효의 근본이다라는 생각을 해요. 편의적이고 합리적이고 그다음에 타당한 가치만 따지면 인간의 관계성이라고 하는 것은 어떻게 성립할 수 있느냐라는 부분이 존재하기 때문에, 그래서 한 3년 동안은 저렇게 모셔드리고 그다음부터는 이제 적응을 하기 때문에, 당신도 적응을 하기 때문에, 그래서 그냥 제사한 날만 이렇게 드리는 그렇게, 그렇게 드리는 그런 방식으로 하고, 더 오래되면 기리기는 기려야 되지만 이미 흩어졌어요. 이게 유교의 귀신은 영구적으로 존재하는 게 아니에요. 신멸론(神滅論)이라고 합니다. 그러니까 죽고 나서 내가 그 잠재적으로 약간 관성의 법칙처럼 에너지가 존재하지만, 동인은 사라졌기 때문에 결국 흐트러져요. 그래서 주자가 뭐라고 얘기하냐면, “만약에 흐트러지지 않고 귀신이 계속 누적만 된다면 유사이래 귀신들이 꽉 차서 귀신들은 못 돌아다닐 거다.” 되게 재미있는 얘기예요. 주자는 그렇게 생각했다니까. 이게 뭔 헛소리인가 싶은데, 그래서 결국 흐트러진다, 흐트러진다라고 생각해. 마치 구름이 흐트러지고 뭉치고 비가 되고 다시 만들어지고 흐트러지고 하듯이, 그렇게 순환하듯이. 그리고 인간의 영혼은 부모에 의해서 만들어진다라고 생각해요. 유교에서는, 유교적 생각은 그래요. 그리고 죽은 뒤에도 마치 살았을 때 부모가 자식의 아니면 손자의 태몽을 대신 꿔주듯이 그런 식의 연결고리가 존재한다라고 생각해요. 죽은 뒤에도 불교처럼 다른 세계로 넘어갔어요. 다르게 환생을 했어요. 이러면 작동하지 않습니다. 서로 간의 연결 관계는. 하지만 죽은 뒤에도 계속 존재하고 있으면서 나와 연결 관계가 존재한다라고 생각해요. 그래서 부모님이 아무래도 나쁜 데 있으면 안 좋은 영향을 받고. 제가 그런 거 생각을 하는데, 지금은 100% 그렇지 않은데, 여러분 어렸을 때만 하더라도 어떤 문화가 있었냐면 출가외인이라 그래서 결혼하면 완전히 단절이에요. 그때 시집 갈 때, 진짜 잔인한 얘기인데, 딸한테 하는 얘기가 있었죠. <죽어도 그 집 귀신이 되라>, 그거 진짜 잔인한. 근데 요즘은 이제 사랑은 돌아오는 거야 이러면서, 돌아오죠. 죽어도 그 집 귀신 들어봤잖아. 여기에는 아마 시집 갈 때 들어보신 분도 있을 거야. 그리고 그쪽에 완전히 너는 편입이 돼야 되기 때문에 흐름 자체가, 기의 흐름 자체가 바뀐다 그래요. 그래서 시집 가면 팔자가 바뀐다 그래. 팔자가 바뀐다. 그쪽 소속의 에너지로 니가 들어간다는 거예요. 그리고 그쪽 성씨의 사람들이 새로 들어온 사람을 이제 조금 이렇게, 조금 이렇게 왕따를 시키고 이렇게 하죠. 그게 이제 시집살이가 되는 거고, 룰은 그렇게 돼. 룰은. 그렇게 해서 굉장히 좀 약간 힘든 상황들이 됐어. 힘든 상황들이 됐어. 하지만 친정이 번창하면 내가 친정에서 돈을 갖다 쓰는 것도 아니고, 아무것도 아니더라도, 사람이 어깨에 힘이 들어가고, 목소리가 당당해. 근데 아버님이 사업하시다가 잘못해서 내 친정이 무너졌어. 그러니까 내가 뭘 후원을 받고 있었던 것도 아니야.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렇게 무너져버리면, 사람이 위축되고 힘들어져요. 왠지 우울해지지, 계속. 그게 인간 아니겠어요. 그래서 돌아가시고 난 상황 속에서도 돌아가신 분이 평온하고 행복하면, 그 에너지가 공유되기 때문에 연결돼 있다라는 생각인 거예요. 그렇기 때문에 내 일들이 조금씩 잘 되고, 그러니까 조상을 잘 모시면 후손이 발복한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렇게 되는 거고. 조상이 안 좋은 데 가 있으면 나를 자꾸 끌어내리는 거지. 누군가 보이지 않는 발목을 잡는 거지. 결초보은이라는 얘기 들어보셨어요? 결초보은. 되게 재밌는 얘기인데 은혜를 갚을 때 죽어서, 전쟁터에 나갔는데, 전쟁터에 나갔는데 상대 장군이 너무너무 대단한 사람이 나왔어. 그래서 내가 분명히 질 수밖에 없는데 걔가 발을 잘 못 움직이면서 결국 스텝이 꼬여서 나한테 죽었어요. 그런데 그 옆에서 누군가 무당 같은 사람이 보고 있으니까 귀신이 자꾸 풀을 묶는대. 풀 묶는 거 아세요? 우리 어렸을 때 그런 거 했었는데. 쓸데없는 짓이에요. 그냥 산에 가면 잡풀 같은 거 이렇게 있으면 그 풀을 묶어. 풀을 묶으면 이렇게 터널같이 되거든요. 그러면 그냥 재미삼아 묶고 발로 차서 끊고 이런 거 하고 있었어. 그게 놀이야. 놀이. 별것도 아니야. 안 해보신 분들은 행복하신 분입니다. 그렇게. 근데 그 무당 같은 사람이 보니까, 어떤 귀신이 계속 풀을 묶어서 그 사람의 발을 방해하고 있더래. 그런데 그 전쟁터에 나갔던 그 사람이 그 집 자식을 살펴줬어. 그래서 그 부모가 너무 감동해서 ‘죽은 뒤에라도 내가 은혜를 갚겠습니다’라고 죽어서, 그 고사가 결초보은이에요. 풀을 묶어서 은혜를 갚는다. 결초보은은 들어봤어도 처음 들어봤지. 결초보은는 지금은 어디서 들어봅니까? 보은에 대추 사러 가면 결초보은. 보은 대추. 이렇게 그렇게 해서, 어 조상을 잘 모시면 후손이 발복하고. 그리고 인생이라는 게 제가, 제가 살아보면 제가 참 제가 늘상 얘기하는 거 있어요. 나는 150을 노력해야, 한 100 정도의 점수가 나온다. 사람들이, 우리 어른 스님들이 저한테 “너 너무 나대는 거 아니냐.” 나대지 않으면 존재감이, 이게 누가 어떤 놈이 봐주는 사람이 없어. 진짜 슬프다. 끊임없이 내가 살려고, “너는 공부가 취미냐?” 취미가 아니고 살라고, 살려고 했다. 누구는 논문 쓰는 게 쉬운 줄 알아? 나도 힘들어. 나도 잠 못 자고 쓰는 거야. 근데 왜 그러면 그렇게 해야 되느냐. 쉬운 얘기를 하고 싶으면 논문 양을 줄이면 안 돼요. 논문 양을 줄이고 쉬운 얘기를 하면 그다음부터는 실력 없다라고 그래요. 이게 참 인생 치사하다. 박사 논문 하나에 있을 때는 “뭐?” 이러길래, 여러 개를 만들었더니 “넌 전공이 뭐냐? 전공이 불분명하다.” 그래서 내가 뭐라고 얘기했냐면 “각각 전공으로도 너네보다 내가 실적이 더 많다.” 내가 이렇게 얘기했거든. 그랬더니 “다전공자를 원하지 않는다.” 이게 무슨 개똥 같은 소리지. 이거 되게 재밌어. 그런 거 진짜 아픔을 당한 얘기를 하면, 여러분들 진짜 정상적으로 못 가요. 그러니까 여기 폭풍에 어떻게 보면, 저 앞에 진관사 개울물을 다 채우고도 남을 거다. 그런 슬픔이 있어. 그래서 인생이라고 하는 거는 그거는 노력하는 부분이 분명히 존재하지만, 저는 노력이라고 하는 부분을 높이 평가해요. 그리고 노력, 끝까지 노력한 사람에게 후회는 없어. 할 만큼 한 사람에게는 후회가 남지 않아. 그게 떳떳함, 노력한 사람의 떳떳함이야. 그런데 그렇다고 팔자가 피느냐? 그건 아니야. 그건 아니야. 그래서 팔자가 피는 거는 마치 뒷장과 같아. 고스톱판의 뒷장과 같아. 그 뒷장을 누가 책임져주느냐. 그게 이제 세 가지가 있는 거예요. 세 가지. 제가 늘상 말씀드리는 세 가지, 불교에서는 그거를 부처님께 기도를 하면 그게 명훈가피(冥薰加被), 보이지 않는 가피가 있는 거예요. 우리는 이게 없어. 그래서 될 듯 될 듯 이렇게 미끄러져. 우리 선생님이 그랬다니까. 지금 동대 총장 하시는 윤재웅 선생님이 저한테 뭐라고 그랬냐면, <얼음에 박 밀듯이>, 그 양반 국문학 하시는 어른이라서, 참 비유를 진짜 들으면서도 웃겼어. 얼음에 박 밀듯이 나아가래. 살살 진짜 조심해서. 조금만 삐끗하면 이렇게 밀린다는 거예요. 살살 밀고 가래. 불교식으로는 그걸 유발봉지라고 하는데, <발우에다가 기름을 찰랑찰랑하게 딱 받아가지고 안 흘리고 가게> 이렇게, 이렇게 얘기하는데, 얼음에 박 밀듯이 가래. 근데 저는 결과적으로 다 안 좋았고요. 당신은 총장이 되더라고. 그래서 영험한데, 영험한데. 내가 이랬거든 난 총장 나왔을 때 ‘이 어른이 왜 나오지.’ 이랬는데, 보고 있을까 봐 내가 차마 말을 못하겠는데, 제 지도 교수님이라 제가 이렇게 아는데 ‘왜 나오셨지.’ 이게 야 이게 인생인가, 이게 인생인가, 이게 뒷장이구나. 이게 뒷장이구나. 우리는 앞장만 신경 썼는데. 뒷장, 그게 불교식으로는 명훈가피, 그게 있으면 인생이 편해요. 분기점에서 이걸 선택하거나 이걸 선택하나 진짜 차이 없을 때, 이게 선택되는. 왜 그거 있잖아. 통밥 딱 이렇게 시험 문제 하다가, 이거 아리까리 둘 중에 하나, 이때 지금 이제 신기 만랩을 딱 올려갖고 했는데 신기는 개뿔, 이렇게 되는 경우가 있고, 그게 기가 막히게 들어가. 내가 이 신기를 진짜 엄청나게 느꼈을 때는, 이런 얘기 해봐야 분위기 안 좋을 것 같은데, 예전에 그 지뢰찾기 게임할 때 언제 한 번은, 언제 한 번은 반드시 이게 애매한 상황에 봉착해 큰 판을 하면. 죄송합니다. 여러분 지뢰 찾기 안 해보셨을 것 같은데. 그래서 그런 게 있고. 조상과 관련해서 유교에서는 뭐라고 얘기하냐면 조상의 음덕이라고 그러는 거예요. 음덕. 그래서 음덕이 있으면 그게 이제 양보가 생긴다. 그래서 이게 집단적인 의식이에요. 집단적인 의식. 그래서 주역에 보면 그것도 굉장히 재미있는 말이에요. 적선지가 필유여경(積善之家 必有餘慶)이고, 그 주역 계사전에 나오는 말인데, 적악지가 필유여앙(積惡之家 必有餘殃)이라고, 선을 쌓은 집에는 분명히 남은 경사가 있고, 악을 쌓은 집에는 남은 재앙이 있다. 되게 재미있는 게, 개인인데 이건 개인주의가 아니고, 집단주의를 표현하는 문화예요. 그 반원입니다. 그래서 조상을 잘 모시면 그 은덕이 후손에게 잘 풀리는 걸로 그러니까, 음덕이 양보의 결과를 가지고 오고, 그리고 그렇게 못했을 경우에는 이제 문제가 좀 생길 수도 있다. 그게 꼭 그렇게까지 중요하냐. 그렇게까지 중요하지 않지만 사지선다형에서 2개는 아닌 거 분명하고, 둘 중에 하나 이거 꽂아야 될까? 저거 꽂아야 될까? 막 머리 쓰고 있을 때, 그때 통밥을 찍었는데 맞느냐 틀리느냐로 합격과 불합격이 결정이 돼요. 그러니까 생각보다 큰 겁니다. 적지만 초격차라고 하는 거예요. 그거 굉장히 중요해요. 그래서 크게 힘들지 않으면 조상을 모시는 것도 문화권적 관습상으로는 굉장히 괜찮을 것 같다라는 생각을 해요. 그리고 여기는 뿐만 아니라 수륙사잖아. 그러니까 수륙재 천도, 국가에서 지정하는 데는 다 나름의 이유가 있습니다. 국가적인 행사를 주관할 때 찌리한 데 쓰지 않습니다. 나름 다 검토를 하고, 이 절에서 하면 그건 국가 차원에서 굉장히 유리하겠다라는 생각에 판단이 섰을 때 그렇게 하는 거예요. 진짜예요. 진짜. 그거는 당연한 거지. 지금도 국책 사업을 하는데 아무나 선정해서 주지는 않잖아. 나름 다 여러 역량들을 보고, 그리고 그때는 뭘 보냐 하면, 이제 터가 어떠냐라는 걸 보죠. 영험한 터냐. 그래서 여기 같은 경우는 어떻게 보면 백중을 하면 가장 좋은 터에 조상들을 천도할 수 있는 아주 좋은 그런 상황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저는 그 얘기 되게 좋아해요. 부처님 말씀에 아나율이 부처님 제자 중에 아나율이 장님이거든요. 장님이거든요. 장님이 되는 사연이 되게 재밌죠. 부처님 법문 때, 법문하실 때, 졸다가, 졸다가 욕 태바가지로 먹고 장님이 됐어. 장님이 돼. 저는 이해합니다. 인도가 45도, 55도까지 올라가기 때문에 그때 아열대 습해요. 졸리지. 그렇게 해서 장님이 되고, 나중에 가사 옷을 기워야 되는데, 꿰매야 되는데 이걸 못 꿰매죠. 그러니까 “누가 나를 위해서 옷을 기워주고 복을 짓겠는가”라고 얘기를 해요. 나중에는 이제 수행을 열심히 해서 깨달음을 얻었잖아. 그래도 눈이 좋아지는 건 아닙니다. 그래서 이렇게 기우니까, 기워달라 이러니까, 부처님께서 그걸 기워줘요. 그래서 “부처님이 제 옷을 기워주시는 거는 맞는 것 같지 않습니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시냐면 “복은 많을수록 좋은 거고, 복은 많을수록 좋은 거고, 나는 복 짓는 게 버릇이 돼 있다.” 부처님을 복해왕양(福海汪洋)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복이 앞서고 그다음에 지혜입니다. 저는 그걸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하거든요. 복이 있어야 돼. 지혜만 있으면 허덕여요. 힘들어. 머리 좋고 힘든 인생이 펼쳐져요. 그런데 복이 있으면 제가 얘기하잖아. 돈 벌 필요가 뭐 있냐. 공부 열심히 해서 무슨 시험 볼 필요가 뭐 있냐. 태어나니까 만수룬데. 사람 부리면 되지. 그거 필요 없어. 필요 없어. 그래서 복이라고 하는 것은 어른을 잘 모셔서 지금 후손이 발복하는 것도 있지만, 죽을 때 나를 따라갈 수 있는 것은 그 사람의 복밖에 없대. 저는 그 얘기는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그래서 죽을 때 니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은 무엇인가. 가족이나 재산은 언젠가는 놓고 갈 수밖에 없는 거고, 내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 그것은 내가 쌓아온 고정관념 습관, 그걸 불교에서는 업이라 그래요. 제가 그 얘기하잖아. 꿈속에서 자식이 바뀌어도 못 알아보고, 남편이 바뀌어도 못 알아보지만, 그런 상황들도 연출되지만, 꿈속이라고 해서 영어 쓰지 않는다. 한국말만 하더라라고 하는 거예요. 굉장히 재밌는 거야. 그래서 내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것들에 대해서도 투자해라. 그러면 현세적 가치는 다 무가치하냐? 안 그래요. 현세적 가치도 중요하고 내가 가지고 갈 수 있는 거에 투자하는 것도 중요하다. 왜? 사람은 여기서만 계속 살 수도 없고 그렇다고 저쪽에 지금 가는 게 아니기 때문에, 이런 걸 보고 뭐라고 얘기하냐면 분산 투자라고 하죠. 포트폴리오를 맞춰서 적절하게 재산을 잘 배분한다라고 하는 거예요. 그리고 그거는 언제 해야 되는 거냐 하면, 젊었을 때는 현세적 가치에 더 집중을 하고, 연세가 드시면 후손과 그다음에 내 자신에 대한 투자를 해야 돼요. 그 복만이 나를 따르면서, 나에게 다가오는 모든 안 좋은 일에서 갑옷 같은 역할을 해줍니다. 다른 것들은 언젠가는 다 쓸려갈 것들이고, 내가 마지막 떠날 때 내 가족이 배웅을 해줘요. 하지만 그 뒤부터 걸어가는 길에서는 내 복밖에는 내가 의지할 것이 없어. 그래서 그 부분에 대해서 어느 정도 이상 투자를 해야 되고. 그래서 오늘 백중 2재를 맞아서 여러분들께서 조상을 잘 섬겨서 발복하시기를 기원드리고. 그다음에 불교에서는 그렇게 얘기해. 유교에서는 내 후손이 발복한다, 나와 내 후손이 발복한다 그렇게 얘기하고, 불교에서는 그렇게 얘기해요. <조상을 잘 모시면 7분의 1은 조상에게 가고, 7분의 6은 내 자신에게 돌아온다.> 그래서 그 두 가지를 좋은 거는 아울러서 이렇게 계산을 하고, 안 좋은 거는 대충 무시하고, 이러면서 인생을 행복하고 보람되게. 그리고 여러분들은 이런 좋은 도량에서 우리 스님들 모시고 이렇게 재를 올릴 수 있다는 것도 참 복되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래서 여기 같이 떡상하는 기운이 있는 절도 없는 것 같아요. 전국에서. 제가 진짜 그런 생각이 들어. 여기 우리 스님들 사시듯이만 봉은사가 해줬으면 조선이 바뀌었다. 근데 참 안타깝게도 우리 비구 스님들이 못하는 거를 우리 비구니 스님들이 이렇게 훌륭하게. 물론 우리 스님들은 얼마나 노동력을 갈아넣고 있겠나 싶은 안타까운 생각이 들기는 하는데, 그게 한국불교의 초석이 되고, 그다음에 신도들의 기쁨이 된다라고 하는 높은 사명감으로 임해주시면 감사하겠다는 말씀드리면서, 오늘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자,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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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기도] 7월7일 백중초재 법문
가섭스님 2024-07-07
네. 반갑습니다. 저는 진관사를 좋아하고, 우리 법해 스님을 존경하는 가섭이라 합니다. 반갑습니다. 백중 초재를 맞아서 백중기도의 공덕 세 가지를, 제일 낮은 단계의 공덕부터 해서 가장 상위의 공덕까지 세 가지로 분류해서 같이 법담을 나눠볼 건데요. 그전에 이렇게 오다 보니까 우리 주지스님께서 “이 더운 날 기도하니까 좋지요.” 이렇게 물어보시던데 진짜 좋아요? 진짜로? 그렇군요. 네. 이 더운 날 이제 땀 흘리면서 기도하는 것이 나도 모르는 그런 신심이 분발할 수 있는 그런 경험을 하기도 합니다. 저는 이제 지금부터 30년 좀 넘기 전에 통도사에서 계를 받았는데, 이제 우리 스님들은 계를 받기 전에, 전날에 삼보일배를 해요. 그래서 저는 통도사에서 이제 계를 받았는데, 통도사 일주문에서, 통도사는 이제 부처님의 사리가 모셔져 있는 곳이잖아요. 거기까지 삼보일배를 해서 쭉 들어가는데, 그때가 8월 말이었어요. 8월 말이면 더워요? 추워요? 억수로 덥잖아요. 그러니까 땀이 나니까 절을 해서 이제 땅에다가 이마를 댈 때마다 이마에 흙이 붙는 건 당연한 거고 이 자갈이 붙어요. 이만한 돌들이 이렇게 붙어 있어요. 근데 그거를 자꾸 이제 하다 보면 신심이 동반해가지고 머리를 자꾸 찧게 돼, 땅에다가. 그거 희한하더구먼요. 제가 그때 느낀 게, 경전에 보면은, “부처님을 만난 재가자나 제자들이 땅에다 머리를 찧었다.” 이런 구절들이 나와요. 근데 그게 그때 제가 마음속으로 그전에는 이해가 잘 안 됐는데, 그게 이제 이해가 되는 거예요. 본인의 그런 업장을 이 자리에 다 녹여야 되겠다는 마음으로 더 힘을 줘서 머리에 땅을 대는 거예요. 그래서 하다 보니까 몇몇 이제 동료들은, 도반들은 머리에서 피가 나기도 하고, 그걸 보면서 또 같이 뭔가 가슴에서 뜨거운 게 올라오면서 더 이제 신심을 내게 되고. 그런데 이게 이제 크라이막스 절정은 어디냐면은, 이 통도사 부처님 사리탑에 가면은 거기가 대리석으로 돼 있거든요. 8월 한 달 오후 내내 데펴진 데를 거기를 세 바퀴를 돌아야 돼요. 우요삼잡이니까. 이렇게 절을 내려가서 조금 쉬고 싶어도 뜨거워서 쉴 수가 없어요. 빨리 일어나야 돼. 손바닥 익어요. 근데 문제는 이제 절을 할 때마다 그 대리석이니까 이마는 괜찮은데 무릎이 이제 해지기 시작해요. 옷이 대리석이라서. 우리는 이제 대중들이 많았어요. 그때만 해도 200명 넘게 이제 대중들이 오니까, 같이 하니까, 이마가 까지고 발등이 이제 해지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러면서 이제 한 바퀴 돌고 났는데, 앞에 붉은 자국들이 남기 시작해. 피가 나는 거예요. 왜 그러냐면 그전에 이제 한 20일간 계속 아침에 절을 해가지고 여름에, 지금은 그렇게 하면 아마 인권 침해로 다 고소할 건데, 우리 때는 방석을 안 줬어요. 이걸 니사단이라고 그러거든, 방석을, 깔게, 방석을 안 줬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이제 맨데다가 아침마다 절을 하고 또 참회기도도 하고 그러니까 무릎이 까지고, 발등이 까져가지고, 발등이 까졌는데 염증이 생기잖아요. 이제. 그러니까 한여름이잖아요. 그러니까 좀 쉴 때 이 피가 난 게 양말하고 이렇게 붙어버려요. 그래도 참고 하는 거예요, 이제. 근데 그게 대리석에 올라가서 어떻게 되겠어요? 홀라당 벗겨질 거 아니에요. 근데 그게 아픈 게 아니라, 내가 그 순간에 느꼈던 건 뭐냐 하면 ‘이게 신심이고, 이게 원력이고, 이게 이생에 내가 끝내야 되는 일을 하고 있구나’ 그런 경험을 했어요. 그래서 이제 우리 진관사 우리 마음의 정원에 오신 분들도, 혹시라도 평소에 마음이 괴롭고 일이 잘 안 풀리고 집안이 조금 뭔가 얼크렁 설크렁 해가지고 이제 큰소리가 나기도 하고 이런 분들은 절에 와서 법당에 절하지 말고, 제가 강추하는데, 마당에서 한번 해보세요. 땅에서 한번. 땅에서. 이 코에 땅의 냄새가 싹 들어오는 게 이게 법당에서 할 때하고 완전히 다릅니다. 일단 해보시라니까요. 자기도 모르게 울컥하는 게 올라옵니다. 여기는 이제 법당 안에는 스님들이 다 장엄을 아주 거룩하게 해놔가지고 그런데, 그냥 우리 여기 함월당이죠. 함월당 마당에서나, 아니면은 저기 대웅전 앞에서나, 그래도 좀 남들이 보는 게 조금 뭔가 이게 내가 연기하는 게 아닌가 이렇게 하는 분들은 저기 나가가지고 일주문 밖에서, 저기 일주문 밖에서 이 진관사를 바라보고 한번 삼배를 한번 지극하게 해보세요. 이게 가슴에서 이게 올라오는 게 다르다니까. 그렇게 하면은 이 주지스님께서 땀 흘리면서 기도하는 공덕을 제대로 느낄 거예요, 아마. 요즘에는 이제 이야기가 나온 김에, 이게 자꾸 옆으로 새면 안 되는데, 나온 김에 더 얘기를 하면은 요즘에는 브레이크를 잘못 밟아가지고 사고가 많이 나요. 저도 이제 우리 같이 공부했던 스님이 아침에 문자가 왔는데 급발진 사고가 났다는 거예요. 그래가지고는 병원에 입원했대. 그런데 그거를 우리 도반 스님들이 있는데 단체 카톡방에 올렸는데, 왜 올렸는지 모르겠어요. 저는 그걸. 근데 하여간 이제 급발진이 나는데 급발진은 왜 나는 거예요? 브레이크를 밟아도 안 될 때 급발진이라고 그러잖아요. 근데 또 사고가 그런 것도, 그런 케이스도 있는가 하면은, 브레이크하고 엑셀하고 잘못 밟아 사고가 나죠. 또 하나는 이제 브레이크가 파열돼가지고 이제 고장 나도 사고가 나죠. 저는 이제 이 백중 기도를 하는데 백중을 다른 말로 우란분재 그러죠. 그래서 우람바나 그럽니다. 이게 거꾸로 매달려 있다 그러거든요. 근데 거꾸로 매달려 있는 게 왜 그러냐면, 그 나쁜 갈래에 가 있는 거잖아요. 우리가 이제 명을 다하고 다음에 인연을 맺었는데, 나쁜 갈래에 갈 때 그때는 이제 나쁜 갈래에 가서 거꾸로 매달려 있는 거예요. 똑바로 서 있어도 힘든데 거꾸로 되면 얼마나 힘들어요. 그런 나쁜 갈래를 우리가 인연을 맺는 데 있어서 가장 큰 게 급발진이에요. 이거를 이제 경전에서는 분노라고 그래요. 분노. 우리가 살아있어서 나쁜 갈래로 가는 가장 큰 에너지원이 되는 게 분노, 급발진이에요. 근데 이 자리에 이제 보니까, 대략 아까 우리 스님한테 물어보니까 300여 분 앉아 계신다고 하는데,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한 번도 분노하지 않는 분들은 있으면 손들어보세요. 살면서 분노를 하게 되죠. 저도 분노를 잘합니다. 잘하게 생겼잖아요, 저도 분노를. 근데 이 분노라는 게 사람이 화냄이잖아요. 화냄. 근데 분노는 제가 말씀드리듯이, 지금 말씀드린 거는 이 백중 우란분재라고 하는 이제 그런 나쁜 갈래로 가는 데 있어서 가장 큰 에너지를 내는 게 분노다. 근데 이 분노는 경전에 보면은 첫 번째는 자기 방어 기제로 발동을 합니다. 그냥 툭 나오는 게 아니라, 자기 에고, 자기를 보호하려고 하면 화를 내요. 근데 그 화가 한 단계 넘어가면서 자기 자신을 태워버리는 거예요. 이런 단계로 오는 게 분노입니다. 이 분노를 잡아야 돼요. 꺼야 돼요. 급발진을 꺼야 되는 거예요. 급발진을. 마음에 급발진을 안 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브레이크를 잘 밟아야 되잖아요. 그 분노를 누그러뜨리는 그런 마음의 브레이크를 잘 밟으려면 뭘 해야 되느냐. 진관사에 백중기도를 입재해야 된다. 웃긴 얘긴데 안 웃네. 백중기도 입재 다 하셨죠? 네. 본인이 입재하는 것뿐만 아니라 이제 주위에도 권선을 많이 하셔야 됩니다. 권선을. 권선를 많이 하셔야 되는데, 그래서 이제 그러한 마음의 분노를 잡는 마음의 브레이크를 잘 잡으려면은 뭘 해야 되느냐. 진관사에 백중기도를 입재해야 되지만, 우리 일상에서는 숨길을 잡아야 돼요. 숨길. 숨길이 뭐예요? 들어가는 거, 나가는 숨이죠. 들숨 날숨이잖아요. 이 들숨 날숨을 잘 관찰해야 됩니다. 우리가 일상을 살면서는 이 들숨 날숨을 잃어버리고 살아요. 특히 분노할 때 보면은 들숨 날숨이 뭐야? 자기 자신도 없는데. 자기 자신만 잘 이렇게 분노를 조절하려면, 그때 숨만 깊이 들이쉬었다가 내쉬어도 분노가 많이 가라앉죠. 제가 늘 하는 말 중에 <숨길을 잡으면 꽃길이 열린다.> 이런 말을 하는데 말 괜찮죠? 한번 따라 해보실래요? <숨길을 잡으면 꽃길이 열린다.> 그냥 마음에 이제 꽃이 피기 시작해요, 숨길를 잘 잡으면. 우리가 염불할 때도 그렇고, 정근할 때도 그렇고, 누워 자기. 잠자기 전에 직전에도 그렇고, 자기 숨길을 잘 살피는, 이게 이제 만약에 많이 연마가 되고 힘을 받으면 일상적으로 대화를 나누면서 자기 숨길을 보는 습관이 생겨요. 그러면은 어떤 상황이 오더라도 놀라거나 분노하지 않는다라는 건데. 이 분노하면 안 되는 거예요. 분노하면 잘못하면 나쁜 갈래에 가는 겁니다. 나쁜 갈래에 가 있는 그런 혹시라도 모르는 나와 인연됐던 영가들을 스님들의 그런 법문과 또 스님들의 염불 그리고 우리 정성들이 다 모여가지고 좋은 갈래로 안내하는 게 바로 백중이잖아요. 백중은 이제 매년 이맘때쯤 하는데, 신도분들이 궁금해하는 것이 “작년 했는데 올해 또 해야 됩니까?” 이런 이제 질문들을 많이 하신단 말이에요. 근데 꼭 해야 되는 거예요. 매년 해야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나한테 인연을 맺었던 선망 부모들이 나를 양육해가지고 나를 키우고 나를 어느 정도 성장케한 세월에 비하면, 지금 내게 남아 있는 세월을 보면 앞으로 이제 많이 해도 10번이에요. 조금 넉넉하면도 20번이고. 더 넉넉하게 봐도 30분 이상 여기 할 사람 없어요. 그죠? 30년 뒤에 백중기도 입재 할 수 있겠어요? 적어도 앞으로 30번 이상은 못 한단 말이에요. 그러면 우리가 나를 양육하고 길러줬던 선망 부모들의 은혜에 비춰봤을 때, 300번 해도 모자라는 그러한 기도를 어느 해는 빼먹고 어느 해는 또 마음이 나서 하고 이렇게 하면 안 된다는 거예요. 매년 꾸준히 해야 된다. 특히 저는 꼭 말씀드리고 싶은 게 뭐냐 하면, 나와 인연을 맺어 왔던 나를 찾아왔던 인연들 중 나의 여러 가지 여건과 환경에 의해서 인연을 저버렸던 인연들이 있습니다. 태아 영가들이죠. 태아 영가들은 이 백중 때 꼭 입재를 하셔야 돼요. 그 인연들은 나한테 찾아왔던 인연들이기 때문에, 내가 인생을 마감하는, 그 숨을 끊는 그 순간까지 내가 그 영가들을 위해서 기도를 하고 가야 되는 거예요.저는 이제 어느 스님한테 들은 얘기인데, 이 스님도 이제 불교에 입문했어요, 거사님인데. 불교에 입문해가지고 공부를 해보니까 제일 첫 번째 중요한 게 불살생을 배운 거예요. 생명을 앗아가지 마라. 근데 가만히 보니까 결혼해가지고 자기 이제 안사람하고 인연을 맺고 살다가 어찌저찌 하다 보니까 두 번의 인연을 저버린 경험을 한 거예요. 그래서 마음으로 너무 이제 큰 게 와닿아서 이 거사님 100일 기도를 했답니다. 100일 기도를 하고 100일 기도를 성껏 하고 회향을 해가지고 회향 기도를 끝내고 내려오다, 큰 절에서 하고 내려오다가 조그만 암자가 보이더래요. 그래서 이제 보살님하고 “저기 가 참배 좀 하고 갑시다.” 이렇게 해서 참배하고 딱 나오는데, 신발을 이렇게 툭 벗어놨는데, 신발 안에 참새 두 마리가 하나씩 들어가 죽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얼마나 놀랄 일이에요. 근데 한 마리도 아니고, 세 마리도 아니고 두 마리가 죽어 있는데, 백일기도 회향하고 이게 무슨 일인가 찝찝한 마음도 들고 그래서 이제 그 참새를 정성껏 잘 모셔서 주위 암자 곁에, 이제 나뭇가지로 땅을 파가지고 잘 모셔줬대요. 그리고 또 돌아서는데 이 참새 두 마리라는 게 참 마음에 걸리는 거예요. 그 거사님 마음에. ‘혹시라도 나하고 인연을 맺었던 그런 인연들이 이렇게 회향하는 걸까’ 이런 이제 생각도 들은 거죠. 근데 그날 저녁에 잠을 자는데, 큰 광명이, 빛이 나는 거기에 동자 둘이 나타나가지고 ‘거사님. 너무 감사합니다. 거사님의 정성 덕분에 제가 좋은데, 좋은 갈래로 가게 됐습니다.’ 그러더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 어떻게 보면 알게 모르게 그런 이제 인연들을 다 가슴속에 품고 있단 말이죠. 그거를 이생해서 풀고 가야 돼요. 백중 기도는 해원이라고 하는 걸 해야 돼요. 원망하는 마음, 서운한 마음들을 풀어내는 것도 이 백중 기도에도 하나의 목적이라고, 방향성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이 백중 기도는 그런 이제 의미를 갖고 있기 때문에, 첫 번째로 제일 낮은 단계로 하는 게 뭐냐면, 그렇게 나와 인연을 맺었던 선망 부모라든지 아니면은 내가 인연을 맺지 못했던, 저버렸던 그런 영가들을 위패 모셔서 스님들의 법문을 듣게 해주고, 공양을 베풀고 하는 거란 말이에요. 그게 이제 가장 낮은 단계의 백중의 공덕이에요. 첫 번째가. 두 번째는 백중은 음식을 베푸는 거잖아요. 그리고 이제 목련존자가 부처님 말씀을 들어가지고 시작된 게 이제 백중인데, 그때 “100가지 음식을 차려서 100명이 대중을 모셔라. 이렇게 이제 공덕을 지어라.” 이렇게 말씀하셨다고 하잖아요. 다 아시는 얘기죠. 다 아는 눈빛들이에요. 지금 눈빛들이 초롱초롱합니다. 그 얘기는 뭐냐 하면, 이 백중에 두 번째 공덕인데, 백중은 나보다 못 먹고, 그다음에 힘들게 살고, 아프고 어렵게 살아온 사람들을 도와줘야 되는 거예요. 그 공력을 키워서 그 공력으로 나의 선망부모와 내가 인연을 저버렸던 인연들의 영가들에 대해서 좋은 갈래로 갈 수 있는 공양이 되는 겁니다. 내가 지금 그 공덕을 지어야 되는 거예요. 여러분이 이제 와가지고 이제 백중기도를 열심히 동참하는 분도 되지만, 이 49일 동안에는 이제 오늘 초재니까 벌써 7일이, 7일 지났잖아요. 남은 기간 동안이라도 내가 그러한 마음의 에너지를 내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팁을 하나 드리면, 오늘부터 봉투를 이렇게 하나 마련을 하세요. 봉투를. 봉투를 마련해가지고 거기다가 <백중 회향 공양금> 이렇게 쓰세요. 백중 회향 공양금, 회향 공양금. 그리고 하루에 1천 원씩을 딱 넣어요. 그러니까 이제 일주일 지났으니까, 이제 7천 원을 딱 넣고, 그리고 오늘 가서 천원 더 넣고, 내일 또 진관사 바라보고 절 한 번 세 번 하고 또 천원 넣고, 이렇게 해가지고 쭉 49재 준비를 하는 거예요. 이건 얘기 듣고, 이제 스님이 말씀을 했기 때문에 마음에 좀 깨름칙해가지고 백중 전날 은행 가가지고 신권 찾아가지고 49장, 49장 넣고 ,이거 하지 말라는 얘기예요. 그렇게 하면 안 되고, 매일 천 원씩을 모으는 거예요. 그리고 그 천 원 넣으면서 “이 공덕으로 배를 곯거나, 아니면 끼니를 굶거나, 아니면 아프거나, 이런 사람들이 이 공덕으로 그런 업을 다 면하고, 그 공력으로 나의 선망부모가 잘 좋은 갈래로 가고 그 공력으로 살아있는 나의 가족들이 건강하고 막힘없이 일이 잘 풀려서 부처님 잘 모시기를 발원합니다.” 이렇게 마음속으로 하고 천 원씩 모으는 거예요. 그리고는 이제 백중날 그거를 가져와가지고 부처님 전에 이렇게 딱 올려놓고 삼배를 하고 보시함에다 딱 넣어도 되고 아니면은 그거를 가까운 지역의 복지관이나 어려운 사람 돌보는 곳에 후원을 하는 거예요. 후원을. 그렇게 회향을 해야 두 번째로 가장 의미가 있는 백중의 공덕이 되는 겁니다. 결국은 첫 번째는 영가를 위한 거고, 두 번째로는 우리 함께 살아가는 우리의 이웃들을 위한 거예요. 이웃들을. 영가를 위한 게 첫 번째 공덕이고, 두 번째가 우리의 이웃들을 위한 것이 두 번째 공덕이다. 이 세 번째 공덕이 가장 중요하고 ,또 반드시 해야 되는 일이 있는데, 백중이라는 우란분, 거꾸로 매달려 있는 그런 나쁜 갈래로 가는 가장 큰 에너지가 되는 게 뭐라고 그랬어요? 분노라고 그랬죠? 분노. 분노. 이 백중기도를 하는 가장 큰 세 번째 공덕은 마음의 분노를 잠재우는 겁니다. 분노에서 해방되는 거예요. 본인ㅡ 자기 자신을 분노에서 해탈시키는 거, 해방시키는 거예요. 이게 백중 기도의 가장 마지막에 꼭 해야 되는 일입니다. 여름에 특히 이제 더우니까 짜증 나잖아요. 짜증 난다고. 짜증 나는 게 분노예요. 분노. 절에서 이제 제가 많이 보는 광경 중에 하나가 기도를 법당에서 열심히 하고, 철야 기도를 한다든가 하면은 기도하고, 법당문 딱 나가면서 본인 신발이 어디로 갔나 사라졌어. 없어. 그러면은 신발이 어디 갔냐고 짜증을 확 내는 사람들이 있어요. 그럼 법당에서 공덕을 이만큼 쌓아놓고, 발 한 짝 딱 내밀면서 그냥 다 까먹는 거예요. 기도를 또 열심히 봉행하고 공양간 가가지고 나는 왜 과일 안 주냐고 짜증 내는 분들이 있어요. 또 나는 왜 오늘 떡 안느냐고 짜증 내는 분들 있어요. 그거는 그냥 이루어지는 게 아니고요. 내가 평소에 그만큼 많이 분노했다는 반증입니다. 반증. 백중을 하면서는 자꾸 내 마음속에 분노라고 하는 화냄이라고 하는 것을 자꾸 가라앉힌다는 생각을 갖고, 이 백중 기도에 임해야 됩니다. 그 세 번째는 뭐예요? 나를 위한 거죠. 나를 위한 거. 첫 번째는 조상을 위한 거고, 두 번째는 이웃을 위한 거고, 세 번째는 나를 위한 기도다, 백중은. 이 세 가지를 다 우리가 성취해야지만이 되는 거예요, 백중은. 나를 위한 기도, 분노를 내려놓으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라고 그랬어요? 숨길을 잡아야 된다. 숨길을. 숨길을 잡으면 꽃길이 열린다. 그 다른 말로는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이 말하고 똑같은 말이에요. 글자만 다를 뿐이지. 숨길을 잡으면 꽃길이 열린 것이 당신은 부처님을 확인하는 것처럼, “당신은 부처님입니다.”라고 한 보살님이 한 분 계시잖아요. 법화경에 나오는 상불경보살이라는 분이 계세요. 그분은 누구 만나기만 하면 부처님이라고 한 거예요. 그런 것처럼 우리의 마음속에 결국은 참된 자신을 드러내는 것이니까, 그러려면 숨길을 잘 잡아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상 속에서 할 수 있는 쉽게 범할 수 있는 이 짜증 내고 화내고 분노하는, 결국은 그 분노가 조절이 되면 좋은데, 자꾸 내다보면 거기에 장애가 생겨버려요. 그게 어떤 장애냐. 조절하는 장애가 생기는 거예요. 그거를 이제 뭐라고 불러요? 이 심리학 용어로 <분노 조절 장애>라고 그러잖아요. 특히 우리 한국 사회가 이게 분노가 조절되는 게 장애가 있다는 거예요. 한국 사회를 <분노 조절 장애 사회> 이렇게 부르기도 합니다. 그만큼 바쁘게 산다는 거죠. 바쁘게. 바쁘게 사는 건 좋은데, 너무 그렇게 하다 보니까 그 분노를 주체를 못하고, 남을 해하기도 하고. 그죠? 그런단 말이에요. 남을 직접 가서 해 한단 말이에요, 잘못하면. 분명 스스로가. 그런 것들이 요즘에 간혹가다 나오잖아요. 그래서 결국은 그것이 다 숨길을 우리가 놓쳤기 때문에 그렇다. 그래서 이 백중 기도를 통해서 지극정성으로 선망부모를 위한 기도를 하시고, 그리고 우리 이웃을 위해서 남은 49일 동안에 단돈 천 원이라도 우리가 따로 모아서, 그리고 <백중 회향 공양금> 쓰고, 뒤에다가 본인 발원문을 쭉 쓰세요. 그리고 보시함에 딱 넣으면 어떻게 되겠어요? 회향할 때 우리 이제 스님이, 주지 스님께서 그 공양금을 다 보고, 거기다가 또 하나는 이거는 “진관사 운영하는 복지관에 기탁해 주세요.” 이렇게 써놓으면은 주지스님이 그거를 복지관에 다 기탁해 줄 거 아니에요. 서비스를 다 해드린다고, 주지스님께서. 발원문을 다 써도 되고. 그러니까 그렇게 해서 복지관을, 이웃을 위한 백중기도가 돼야 되고, 세 번째로는 분노를 다 내려놓을 수 있는 숨길을 잘 찾아서 나를 위한 백중기도가 되기를 오늘 축원하면서 오늘 법담을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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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7월 6일 초하루 신중기도 법문
종범스님 2024-07-06
주제 : 義相祖師法性偈(의상조사법성게) 이야기 ④-- 無名無相絕一切(무명무상절일체) -- 안녕하십니까. 오늘 갑진년 6월 초하루 진관사 법회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은 법성게 세 번째 게송 <無名無相絕一切(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그 게송이거든요. 지난번부터 하는 방식이 있었는데, 자 손바닥 한번 치고. 10번 외우고 또 한 번 치고. 무명무상절일체, 똑같이 시작합시다.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무명무상절일체 (박수 1번) 이럼 다 된 거예요. 무명무상절일체 법문이 다 이루어졌거든요. 그럼 무명무상이라는 게 무슨 뜻인가. 부처님 세계를 말하는 거예요. 부처님 세계. 부처님 세계는 이름이 없어요. 그게 무슨 소리냐. 범부는 이름으로 살아요. 이름으로. 보살은 이름을 끊고 벗어나요. 부처님은 이름이 없어요. 근데 범부는 이름으로 살고, 보살은 이름을 벗어나면서 살고, 부처님은 이름이 없이 사신다. 또 형상이라는 게 있는데, 모든 형태에 형상이 있고, 형골이 있어요. 뼈 골자(骨). 형상에는 형상의 뼈가 있다. 그걸 어려운 말로 제법진실상(諸法 眞實相)이라 이러거든요. 제법의 진실한 모습이다. 그런데 쉽게 말하면 형상의 뼈예요. 뼈. 허공에는 허공의 뼈가 있고, 산에는 산의 뼈가 있는데, 그걸 허공골, 산골이래요. 그래서 산을 보되 산의 형상을 보는 게 아니라 산의 뼈를 본다. 허공을 보되 허공의 형상을 보는 게 아니라 허공의 뼈를 본다. 그게 진실상이라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의 세계는 형상을 보고 살아가는 세계가 아니라, 형상의 뼈를 본다. 내가 죽고 사는 형상을 보는 게 아니라, 죽고 사는 진실상을 본다. 그럼 형상은 없어요, 진실상을 보면. 형상에 형상이 없다. 몸에 몸이 없다. 죽음에 죽음이 없다. 죽음의 뼈를 보면 죽음이 없거든요. 죽음의 형태를 보면 죽음이 있어요. 그래서 무명무상은 부처님의 세계다. 부처님이 아닌 사람은 이름으로 살고 형상으로 사는 거예요. 그건 이제 범부의 세계다 이거죠. 無名無相 絕名離相 十佛普賢 大人境界 무명무상 절명이상 십불보현 대인경계事事物物 法性性起 無障無礙 圓滿具足사사물물 법성성기 무장무애 원만구족 그래서 무명무상은 절명이상(絕名離相)이라. 절명이상은 보살경계인데, 보살은 형상을 딱 보고 그 진실상을 점점 찾아서 들어가니까 이름에서 이름을 끊어요. 끊을 절자, 이름 명자, 절명이라. 이름에서 이름을 끊는다. 근데 범부는 자꾸 좋은 이름 차지하려고 이름에 계속 매달리고, 이름을 구해가는 게 범부거든요. 그래서 이름에 속아서 인생 망치는 거예요. 이름이 아무것도 아닌데 이름에 속아요. “살아서는 갖지 못하는 이름 하나 때문에” 어디 나오는 말이죠. 이름에 속아서 일생 망치는 거예요. 그다음에 형상에서 형상을 여읜다. 버릴 이자(離). 상에서 상을 버려요. 그 진실상을 보지, 형태상을 안 본단 말이에요. 진실상, 형태상. 그래서 이름에서 이름을 끊고 형상에서 형상을 버린다. 그러면 이 세계가 어떤 세계냐 그러면, 십불보현 대인경계(十佛普賢 大人境界)다. 십불보현이 있는데 이게 이제 대인경계란 말이에요. 부처님 경계다 이 말이지. 이 부처님 경계는 사사물물이 법성성기(事事物物 法性性起)니, 모든 물건 물건 하나가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의 그 진성이 나타난 세계다. 이걸 이제 알고 이 속에서 사는 게 부처님인데, 법성이 원융해서, 법의 본성이 다 통해서 이상이 둘이 없다. 둘이 없는 게 또 법성이다. 법성은 둘이 없다. 그래서 그 무이법성이 나타난 게 일체 사물이다, 이거예요. 무이법성 소연지물이 일체 사물이다. 이게 법성 소연인데 원인이에요, 이게 성품이. 둘이 없어요. 근데 이 법성이 하늘로도 나타나고, 이 법성이, 무이법성이 땅으로도 나타나고, 이 법성이 죽음으로도 나타나고, 이 법성이 삶으로도 나타나서, 사사물물이 법성의 그 성이 일어난 현상이다. 이게 부처님의 세계인 거예요. 법성성기라는 게. 법성의 성이 일어난 거다. 그러니까 이 손가락도 이 법성의 성이 일어난 거고, 하나 굽힐 때도 그렇고, 둘 굽힐 때도 그렇고, 탁 치는 것도 그게 소리가 아니라 법성의 성이 일어난 거다. 가만히 있을 때도 법성성기. 그러니까 거기에는 장애가 전혀 없어요. 그걸 무장무애(無障無礙)라고 그래요. 법성성기는 무장무애다. 그걸 원만구족(圓滿具足)이라 그래요. 모자라는 거 하나도 없어. 원만구족해. 그 세계를 말하는데, 그걸 간단히 말하면 무상무명이라. 무명무상,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는 진실상 법성세계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무명무상절일체거든요. 그리고 이제 십불보현이 되면 자연히 이름에 살지 않고 모양에 살지 않아요. 그럼 이제 우리가 인생 문제라는 말을 요새 쓰는데, 인생이 뭐가 문제냐. 인생 문제 뭐 많아요. 근데 결국은 생로병사거든요, 인생 문제는. 근데 생로병사가 어떻단 말이냐. 그 생로병사를 생로병사로 해결하려면 해결이 안 돼요. 그래서 인생 문제는 인생으로 해결 안 된다. 아무리 건강 관리를 잘해도 건강에 대한 걱정은 놓을 수가 없어요. 무슨 병이 나올지 모르고, 무슨 사고가 나올지 모르고, 그게 마치 정치 문제는 정치로 해결이 안 된다. 정치 세계는 맨날 싸우게 돼 있고요. 앞서가는 사람이 있으면 뒤에서 공격하는 사람이 있게 마련이에요. 안 돼요. 또 좋았다가도 금방 나빠지는 게 정치 현상이거든요. 그래서 정치 문제는 정치 문제로 해결이 안 되고. 경제 문제도 마찬가지예요. 경제가 맨날 좋다 나쁘다 이러는데, 경제 걱정 없는 때가 없어요. 경제 걱정 안 하는 건 제가 보질 못했거든요. 정치 걱정 안 하는 거 보지 못했고, 인생 걱정 안 하는 거 보지 못했어요. 근데 이게 건강 걱정 안 하는 거 보지 못했고. 멀쩡한 얼굴을 가지고 엄마들은 “얼굴 반쪽 됐네. ”이래요. 내가 볼 땐 온쪽인데, 엄마는 반쪽이라고 그래요. 이게 엄마의 걱정이 거기에 나타났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나는 걱정 안 나타난 걸 본 거고, 걱정 나타난 걸 보면 반쪽 된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끝날 일이 없어요. 정치 문제도 해결이 안 되고, 경제 문제도 해결이 안 되고, 인생 문제 해결 안 되고, 건강 문제 해결 안 되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거기서 진실상을 보면 해결이 돼요. 진실상. 그 진실상을 뭐라고 비유를 하냐면 꿈꾸는 과정에서, 꿈속에서 꿈을 해결하려면 꿈에서 깨는 수밖에 없어요. 꿈으로는 꿈이 해결이 안 돼요. 꿈에서 깨어나야만 꿈을 해결할 수가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이 해결하는 방법이 바로 이거예요. 사사물물이, 모든 물건, 천지만물이 법성성기다. 둘 없는 법성에서 일어난 현상이다 이거지. 성기라는 게 법성의 성이 일어난 것이다. 그래서 거기에는 죽어도 법성이고, 살아도 법성이고, 보여도 법성, 안 보여도 법성이다. 무장무애하고 원만구족하다. 끝. 근심 걱정 하나도 없는 거예요. 사사물물 법성성기 무장무애 원만구족. 깜깜한 것도 법성이고, 밝은 것도 법성이고, 작은 것도 법성, 큰 것도 법성, 이게 그거거든요. 물골, 물건의 뼈, 또 사물의 진실상, 이건 말이, 그게 진실상은 어려운 말인데 뼈다 뼈. 산을 보되 산의 뼈를 본다. 산골, 물골. 근데 우리 말에, 말에 뼈가 있단 말이 있어요. 언중유골(言中有骨)이라고, 언골. 이거는 나쁜 뜻으로 쓰이는 말이에요. 한바탕 싸우고 난 사람들은 말을 할 때 그 싸웠던 감정이 말 속에 들어있어. 그걸 말에 뼈가 있다고 하는 거예요. 그런 게 아니고요. 아주 진실상. 죽음의 진실상. 그러니 죽음을 슬퍼하는 것은 죽음의 형상을 보고 슬퍼하는 거예요. 죽음의 형상을 보고. 형상을 벗어나지 못하니까 슬퍼할 수밖에 없는 거지. 여기서 이제 무명무상절일체라. 근데 이것은 제불이 방광(放光)경계, 이렇게 광명을 비추는 경계고, 보현이 입정경계라, 보현이 삼매에 들었을 때 법성성기 무장무애 경계란 말이죠. 그러면 이제 거기서 이 의상 스님의 제자들이 이 의상 스님의 법성게 법문을 놓고, 자기들이 해석을 달아서 그걸 후대의 책으로 만들어졌는데, 그거는 보현이 삼매 속에서 증득한 세계다. 그래서 이걸 증득한 세계라는 말을 어려운 말로 증득할 증자하고 나눌 분자하고 증분이라고 그래요. 증득한 분야. 그럼 보현이 삼매 속에서 딱 깨달음을 얻었는데, 그 깨달음을 얻은 세계가 뭐냐. 무명무상절일체라는 거에요. 이름도 형상도 없는 그런 세계다. ① 此訂分者 言語道斷故絶名也 心行處滅故離相也 차정분자 언어도단고절명야 심행처멸고이상야 問 若爾 此處 與淨名默何別 答淨名默者 以名相倒 문 약이 차처 여정명묵하별 답정명묵자 이명상도 離此名相 方爲默也 이차명상 방위묵야 그래서 그걸 언어도단(言語道斷)이기 때문에, 거기는 말의 길이 끊어졌기 때문에, 절명(絶名)이라고 하고, 심행처멸(心行處滅)이기 때문에, 생각의 길이 또 없어졌기 때문에 이상(離相)이라고 그런다. 상을 여의었다고 한다. 이렇게 이제 저술이 시작돼요.그러니까 물어요. 그렇다면 말의 길이 끊어진 게 이제 불교에 몇 가지 사례가 있는데, 문수보살이 유마거사하고 둘이 아니라는 내용으로 토론을 해요. 그런데 문수보살이 나는 이런 이런 것이 법성원융무이 법성무이경계라고 나는 본다. 이러니까 유마는 입을 닫고 말을 안 했어요. 이걸 유마묵연(默然)이라고 그러는데, 묵, 침묵이라는 묵자, 그러할 련자. 문수는 말을 했는데 유마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게 이제 유명한 얘기예요. 유마가 왜 말을 하지 않았나? 진정으로 둘이 없는 경지에 들어가려면 말이 거기는 끊어졌다, 이런 소리예요. 그래서 유마는 말 없는 걸로 둘이 없는 세계를 보였고, 문수는 말을 통해서 둘이 없는 세계를 보였다. 이런 뜻이거든. 그래서 이제 무명무상이라고 하는 것은 유마식으로 말을 하나도 안하는 세계가 있어요. 말이 없어. 무명무상이야 그대로. 그러는데 무명무상 여기서 말하는 그 내용하고 유마거사가 말을 닫은 그 내용하고 어떻게 다르냐 이렇게 이제 묻는 거예요. 십불보현 대인경계 무명무상절일체하고 유마거사가 말을 딱 닫은 그 세계하고 어떻게 다르냐. 그러니까 대답을 해요. 답이라 정명묵자(答淨名默者)는 정명은 유마거사인데 유마거사가 말을 딱 닫은 것은 이명상도(以名相倒)해라. 거기에는 이름도 형상도 딱 끊어진 세계다. 거꾸러질 도자를 쓰는데 거꾸러질 도자는 끊어졌다 이거예요. 없다, 거기는. 이름도 형상도 없는 세계이기 때문에 유마는 딱 말을 닫았고. ② 九會佛默 名相中默 故玄別也 謂不捨名相 即此名相中默 구회불묵 명상중묵 고현별야 위불사명상 즉차명상중묵 非如虛空都無物也 此約普賢訂分辨耳 비여허공도무물야 차약보현정분변이 (叢髓錄 眞秀大德記. 韓佛全6-770中) (총수록 진수대덕기. 한불전6-770중) 그다음에 화엄회상에서 석가모니는 딱 방광만 하고 설법은 전부 보살이 해요. 그래서 그걸 화엄구회불묵(九會佛默)이라고 구회에서 불이 묵언을 했다. 화엄경이 이제 모임이 9번 있었거든요. 그래서 이제 화엄구회불묵. 화엄회상에서 부처님은 딱 10도 방광이라고 10번 방광만 했지, 설법은 안 해요. 그 문수 보현 뭐 이런 사람들이 전부 나와서 설법을 해요. 그러면 화엄회상에서 부처님이 말씀을 안 하신 거 하고 유마가 말을 딱 닫은 거 하고 어떻게 다르냐. 침묵도 단계가 있고 성격이 있거든요. 유마의 침묵과 화엄의 부처님의 침묵은 어떻게 다르냐, 이걸 이제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화엄구회의 불이 묵연한 것은 명상중묵(名相中默)이라. 말을 딱 끊어서 말을 안 하는 게 아니라, 화엄구회는 일체 보살들의 설법을 다 들어요. 말과 형상 속에서 침묵을 하는 거예요. 이게 이제 최고의 침묵이에요. 말을 일체 그냥 끊는 것보다 말을 다 들으면서 말을 안 하는 게 최고의 그게 침묵이에요. 그러니까 우리도 보면 그렇거든요. “시끄럽다, 말하지 마라” 이런 거 있거든. 그것보다도 하는 소리를 전부 다 들어. 그러면서 본인은 하는 말이 없어. 그게 최고인 거예요. 막 우격다짐으로 말하지 말라고 막 침묵령을 내리는 것보다, 이 사람 하는 말도 듣고, 저 사람 하는 말도 듣고, 말을 다 들으면서 자기는 하는 말이 없어. 그러면 뭐 하냐. 표정으로 말을 해요. 그 말들이 다 좋으면 말로 하는 게 아니라, 표정으로, 좋으면 기쁜 표정을 내고, 안 좋으면 또 안 좋은 표정을 내고, 이제 부처님이 그런 거예요. 그래서 그 말에 따라서 발바닥에서도 방광을 하고, 무릎에서도 방광을 하고, 정수리에서도 방광을 하고, 그렇게 그 경우에 따라서 빛만 내보이지 말은 안 해요. 그게 부처님의 침묵이다. 이렇게 제자들이 얘기를 해요. 그래서 유마의 침묵과 부처님의 침묵하고는 멀리 다르다. 전혀 이게 같을 수가 없다 이런 식이에요. 그리고 부처님의 침묵은 불사명상(不捨名相)이니, 이름과 형상을 버리지 않는 것이니, 이른바 형상 속에 있는 거예요. 그렇지만 그 이름과 형상에 매이지 않는 거예요. 이름 속에 있으면서 이름에 매이지 않고 형상 속에 있으면서 형상에 매이지 않는 게 이 부처님의 해탈 경계다 이거죠. 불사명상이니, 즉 차(此)는 이 화엄의 침묵은, 명상 중 침묵(此名相中默)이라, 허공에 아무것도 없는 거와는 같지 않다. 이렇게 이제 설명을 해요. 이것은 보현의 증분에 의해서 나타내는 것이다. 보현이 깨달은 경지가 이 경지고, 이 경지는 또 석가모니 부처님이 방광하는 경지가 이 경지다. 보살은 입정을 하고 부처는 방광을 하는데, 입정 방광의 내용이 무명무상절일체다 이거죠. 뭔 소린지 참 답답하긴 답답하네요. 답답하긴 답답해. 무슨 소리야 도대체가 무슨 소리야? 이게 이제 부처님이 이제 그 광명을 나타내는 세계고, 보현이 삼매에 든 세계인데, 그 세계에 가지 못한 입장에서 이 소리를 들어놓으니 같이 안 통한단 말이에요, 이게. 꿈을 꾸면서 꿈 깬 사람들이 뭐라고 떠들어 싸니 그게 꿈 깬 사람 떠드는 소리가 꿈꾸는 사람에게 잘 안 들린단 말이에요. 그런 거예요. 그러면 이 십불보현 대인경 무명무상절일체 이 세계에 가는 방법이 뭐냐. 이게 이제 반야바라밀 반야 수행이에요. 반야 수행은 뭐냐 하면은 의식을 맑혀서 진실상에 들어가는 건데, 이게 이제 반야 도피안이라고 바라밀이라고 해요. 그러면 행동으로 어떻게 해야 되느냐. 경 읽는 것도 반야 도피안 수행이고, 기도하는 것도 반야 도피안 수행이고, 염불하는 것도 반야 도피안 수행이고, 의식을 중지하고 지혜 광명을 불러내는 게 이게 수행이거든요. 그래서 지혜로, 피안이라는 거는 이름도 형상도 없는 진실상 그걸 말하는 거예요. 이름도 형상도 없는 진실상이 그게 저 언덕이다, 피안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 가는 방법은 방법이 없어요. 뭐가 없느냐. 생각을 맑히고 지혜를 일으키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 지혜는 반야라고 그러고 생각은 의식이라고 그러거든 의식. 그럼 생각을 이게 맑히는 방법이 뭐냐. 경 읽고 기도하고 참선하고 염불하고 선행하고 그 방법 밖에는 방법이 없어요. 하다 보니까 싱겁네. 결론이. 결론이 싱거워 뭔가 좀 특별한 게 있으면 좋으련만. 그게 없어요. ③ 無名無相絕一切者 如上初初 不見名相處也 무명무상절일체자 여상초초 불견명상처야 (叢髓錄 眞記. 韓佛全6-776下) (총수록 진기. 한불전6-776하) 그리고 또 하나 방법은 세 번째 무명무상절일체라고 하는 것은 여러 가지 화엄이다, 뭐 반야심경이다, 염불이다 이런 말, 여러 가지 법문의 말이 위에 있었는데, 이런 거 시작하기 그전에, 초초, 처음의 그 처음에 한 법문도 말하기 전 처음 있었는데, 그 처음보다 더 처음, 한 말도 안 했을 때, 처음에는 불견명상(不見名相)이라, 이름도 형상도 보지 않은 그 세계가 있었다. 명상을 보지 않은, 곳 처자(處), 처, 세계가 있는데 그 세계다. 그게 본래 명상이 있었던 게 아니고요. 배워 익혀서 명상이 생겼거든요. 처음에 딱 사람이 태어나는 순간에는 이름도 없어요. 그냥 적나라 적세세라고, 빨간 모양 몸뿐이에요. 그걸 적나라 적세세라는 말을 썼는데, 그냥 발가벗은 몸 그것뿐인데, 얘가 이제 이 몸을 받기는 받았는데 그냥 버릴 수가 없잖아요. 이거 살아야 돼. 몸을 유지해야 돼. 유지하려다 보니까 몸에 필요하고 필요하지 않은 것을 부지런히 익혀야 돼요. 그래서 뭘 보니까 이름부터 물어. 이거 이름 뭐냐고. 왜냐하면 이름은 왜 필요하냐면 그 물건의 성격에 맞춰서 보통 이름을 붙이거든요. 그러니까 이름을 알면 성격을 아는데 너무너무 도움이 돼요. 그러니까 어린애들 이 녀석 하는 짓이 보면, 맨날 물어. 뭐 이름 묻고, 이거 뭐 하는 거냐고 묻고. 그게 왜 그러냐면 지금 저 살 궁리하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것이 나에게 도움이 되나, 나에게 도움이 안 되나. 전부 익혀가는 거예요. 근데 그걸 엄마들이 보면 귀찮거든. ‘그만 물어라’ 그러면 막 화내요. 지는 살려고 묻는데 엄마는 그만 물으라 그래요. 근데 이걸 다 익히는 과정이 있어요. 그러면 그다음부터는 어떻게 되느냐. 나쁜 건 버리고 좋은 건 취해야 돼. 그게 욕심이에요. 그게 전부 이게 이 몸을 위해서 배우고 익힌 것이 명상이지, 본래는 명상이 없는 거예요. 초초의 불견명상처야, 그 배우기 전에 그 처음 처음에는 명상을 보지 않는 세계가 있었다. 이렇게 이제 또 얘기를 해요. 그래서 명상을 끊는 세계가 있고, 말을 닿는 세계가 있고, 말 속에서 침묵하는 세계가 있고, 또 처음에 이름과 형상을 아예 보지 않는 세계가 있었다. 能知此實體(능지차실체) 이 진실체의寂滅眞實相(적멸진실상) 적멸 진실상 알면則見正覺尊(즉견정각존) 정각세존을 친견함이니超出語言道(초출어언도) 어언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言語說諸法(언어설제법) 언어로 제법을 말하나不能顯實相(불능현실상) 실상은 나타낼 수 없다.平等乃能見(평등내능견) 평등해져야만 본다.如法佛亦然(여법불역연) 법과 같아서 여래도 그러하다.(華嚴經須彌偈讚品 智慧菩薩頌)(화엄경수미게찬품 지혜보살송) 근데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이라고 하는 데가 있는데, 이제 문제는 진실상인데, 진실상, 형상 때문에 근심 걱정이 생기는데, 이 근심 걱정을 해결하는 방법은 형상으로 해결할 수가 없다. 형상은 형상으로 해결이 안 된다 이거예요. 그리고 지금 보면 우리가 전부 강해져서 강해져서 크게 되려고 하거든요. 근데 더 강하고 더 빠르고 하다 보면, 언제 나보다 더 빠른 사람이 나올지 몰라서, 언제 나보다 더 강한 사람이 나올지 몰라서, 불안하기 짝이 없어요. 그래서 형상은 형상으로 해결이 안 된다. 그럼 형상을 해결하는 방법은 형상의 진실상을 봐야 된다 이거야. 이걸 깨달음이라 그래요. 형상의 진실상으로 가는 게 반야바라밀, 지혜로 저 언덕에 가는 거, 지혜로 저 언덕에 간다. 형상 없는 진실상에 간다 이 말이죠. 근데 이 진실상을 아는 게 쉽지가 않아. 그래서 수미정상게찬품에서, 능지차실체(能知此實體), 이 형상의 진실체, 진실한 몸, 진실체. 이거는 적멸진여상인데, 생멸이 전혀 없고 참 그대로의 모습이 형상 진실체고 만물의 뼈다. 어떤 사람들은 뼈다구다 이런 말은 쓰는데, 뼈나 뼈다구나 비슷하죠. 사물에 뼈다구가 있다. 이거는 형상인데 여기 뼈다구가 있다는 거예요. 이 뼈다구를 보면 이것이 있든지 없든지 아무 상관이 없다는 거예요. 그걸 무장무애 원만구족 해탈이라 그래요. 사물에서 형상을 보지 않고 뼈다구를 보면 무장무애하고 원만구족하고 극락세계고 해탈세계다. 가르치는 게 그거예요. 그러니까 아주 간단해요. 생각을 딱 맑혀서 사물의 진실상을 보면 끝나는 거예요. 근데 그게 왜 안 되냐면 어릴 때부터 이 몸 살리려고, 이 이름과 형상을 꽉 익혀놨기 때문에 거기서 벗어나지를 스스로 못할 뿐이에요. 살려고 익혔는데 그걸 벗어나기가 쉽지 않거든요. 그래서 그렇지, 전생에서부터 조금 닦은 사람은 무명무상절일체 덜커덕 끝나는 거예요, 거기서. 다시는 또 이름과 형상을 싣지 않아요. 그걸 돈오돈수(頓悟頓修)라 그래요. 그대로 알아서 그대로 다 닦아버렸다. 돈오돈수라는 얘기, 돈오라는 건 금방 알았다는 얘기고, 돈수라는 얘기는 더 이상 형상을 안 쫓아간다 이거예요. 형상 안 쫓아가면 그걸 돈수라 그래요. 바로 전체를 다 닦았다. 돈이라는 건 금방이라는 소리고 전체라는 소리거든요. 아무것도 아닌건데. 이렇게 되면 그 적멸진실상(寂滅眞實相) 사물의 실체를 보면 이 사람은 즉견정각존(則見正覺尊)이다. 바로 부처님을 보는 거다. 그 실체를 깨달으면 바로 그 자리에서 부처님을 보는 거다. 부처님이 그 자리이기 때문에. 그래가지고 그때는 어떻게 되냐. 초출어언도(超出語言道)라. 언어도라는 건 말의 세계인데 모든 말의 세계에서 벗어난다 이렇게 되요. 말은 생각이에요. 근데 진실상을 보면 생각의 세계에서 벗어나니까 말의 세계에서 벗어나는 거예요. 우리가 전부 말로 살아요. 말로. 근데 말에서 왜 못 벗어났느냐. 진실상을 못 봐서 그래요. 그래서 말은 말로 해결하려고 그러니까 말이 또 말을 만들고, 말이 또 말을 만들어서, 말에서 벗어날 수가 없어. 그래서 꿈에서 벗어나려면 꿈을 깨야 하듯이, 말에서 벗어나려면 진실상을 봐야 한다. 이걸 지금 얘기하고 있는 거예요. 그다음에 언설로 설제법(言語說諸法)이나, 말로서 모든 법을 이야기를 하지만, 불능현진실이라 진실을 나타낼 수가 없다. 말로써 여러 가지를 말은 하지만 진실은 못 나타낸다. 그게 왜 그러냐. 말은 하지만 실제 진실상은 못 나타내요. 내가 느낀 좋은 진실이 있는데 이거 다른 말로 아무리 해봐야 내 느낀 진실상을 나타낼 수가 없어. 그러니까 뭐 사랑하기 때문에 말을 많이 하는데도 소용없어요. 그건 말하는 사람의 감정만 있을 뿐이지, 저쪽 사람은 전혀 모르니까, 몇 시간을 얘기해도 그건 아니고 하면 끝나요, 그냥. 방법이 없어요. 그건 아니라는데 뭐 아무 방법 없어요. 그러니 불능현진실이라, 진실을 나타낼 수가 없다. 그럼 어떻게 되냐. 평등내능견(平等乃能見)이라. 내 생각이 이 이름과 형상에 매이지 않고, 평등해지면 무이상, 두 가지가 없는 세계에 들어가면, 내 마음이 평등해진다. 사는 거와 죽는 것이 평등하고, 있는 거와 없는 것이 평등하고, 보이는 거와 안 보이는 게 평등하고. 내 마음이 일심청정 평등세계를 다 이루게 되면 그때 이제 진실상이 보인다는 거예요. 내 생각이 평등하지 않은데 평등한 세계가 보일 리가 있나요? 근데 이제 하나 분명한 것은 중생들은 이걸 보지, 이걸 보는 마음을 못 보는 거예요. 쎄하네 아주. 쎄해요. 이거 보잖아요. 근데 이것만 딱 생각이 여기에 멈춰 있지, 이걸 보는 마음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이걸 보는 건 사물을 보는 건 용이라 그러고 이 마음은 체라 그래요. 체. 근데 범부는 단용무체라. 다만 사물을 보는 작용만 있지, 그 사물을 보는 마음의 본체를 모른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이게 화엄이에요. 의상스님이 특히 범부는 단용무체라. 용이라는 거는 쓸 용자인데 이게 그릇이다. 이거는 물이다. 이건 책이다. 사람이다. 이게 작용이에요. 그런데 이 그릇을 보는 마음은 체란 말이에요. 몸이 몸체란 말이지. 본체. 체는 못 보고 용만 본다. 다만 용뿐이다. 체가 없다. 그래서 그 체로 들어가야 진실상인데, 이 용에서만 머문다 이거예요. 이거 파도다 뭐다. 파도의 진실상은 뭐예요? 물이잖아요. 물. 그러니까 보는 대상에 매이지 않고 보는 마음으로 돌아가면 그게 진실상이에요. 그걸 평등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마음은 평등하거든. 왜 평등하냐. 요 작은 걸 보는 것도 마음이고, 큰 걸 보는 것도 마음이니까, 마음으로는 크고 작은 게 평등해. 이상해요? 무슨 최면 거는 것 같네. 그걸 그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사람을 보는 것도 마음이고, 내 몸을 보는 것도 마음이다. 형상으로 보면 저 사람하고 내 몸하고 다른데, 보는 마음으로 보면 저 사람 보는 마음이나 내 몸 보는 마음이나 똑같잖아요. 이걸 무이평등이라고 그래요. 둘이 없는 평등이다. 그 세계로 돌아가면 이거 문제가 전혀 없어요. 무장무애 원만구족이라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마음으로 안 돌아가고 형상으로 돌아가니까 문제가 이제 끝날 날이 없는 거죠. 모든 근심 걱정은 이름과 형상에서 온다 이거죠. 그래서 평등해야 이제 이게 보는데, 법도 그러하지만 불도 그러하다. 그래서 이제 화엄에서는 이게 있는 거, 법, 이걸 깨달은 불 이게 차별이 없다고 하는 거예요. 불을 보는 자는 법을 보고 법을 보는 자는 불을 본다. 약견제상이 비상이면, 제상이 상이 아닌 걸 보면, 즉견여래다. 바로 여래불을 본다 이거죠. 이런 사물을 볼 때 진실상을 보면 바로 여기서 부처를 본다. 이 소리예요. 사물의 진실상과 여래상이 다른 게 아니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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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기도] 6월 30일 백중입재 법문
도혜스님 2024-06-30
예.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여러분이 오늘 백중을 기해서 기도 입재에 참석하셨습니다. 자, 여러분들이 참석한 여러분 자신, 나는 누구일까? 과연 나라는 존재는 어떤 존재일까? 그러면 나라는 존재가 있다면, 그러면 어떻게 살아야 할까? 이 <어떻게 살아야 할까>라는 말은 <어떻게 죽어야 할까>라는 것도 이 말에 포함이 되어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가장 무서운 것은, 절대로 돌이킬 수 없는 것이 가장 무서운 겁니다. 그래서 금년을 제대로 못 살았다면 내년이 있어요. 그런데 금생을, 금생의 일생을 잘못 살았다면 그러면 다음 생은 어떻게 될 것인가. 그래서 여러분이 지금 오늘 이 자리에 오신 것은, 돌아가신 여러분의 조상님들을 좋은 곳으로 가시게 해드리겠다고 지금 이 자리에 기도 동참을 하러 오셨습니다. 그런데 그러면 여러분들 자신은 누가 제도해줄까요? 그거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보셨을까요? 그래서 우선 나 자신부터 먼저 제도를 해야 여러분들의 조상님들도 함께 천도가 되는 겁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 그 삶의 방식이 죽는 순간에도 그대로 이어지고 드러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20대, 30대를 어떻게 살아가느냐에 따라서 40대가 만들어지고, 40대를 어떻게 살았느냐에 따라서 50대의 얼굴이 만들어지고, 마인드 역시 똑같습니다. 생각도 그렇게 만들어지겠죠. 그렇다면 <금생의 삶은 내생을 만든다>라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목련존자의 어머니께서 돌아가셨는데, 육신은 벗어버렸는데 그 어머니의 탐심은 그대로 남아가지고 아귀의 모습으로 드러났습니다. 그래서 죽어서도 사라지지 않는 강렬한 욕망의 에너지거든요. 그래서 어느 심리학자는 뭐라고 말했느냐. 죽음의 순간에 모든 정신적 기능은 멈춰버린다. 그런데 과거의 업에 의한 우리들의 잠재의식, 무의식의 형태는 표면으로 드러나는데, 그 드러나는 것 중에 가장 으뜸인 것이 <갈망의 힘이다>라고 이야기를 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육신은 사라져도 우리가 지은 업과 욕망의 에너지는 사라지지 않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여러분들은 이 순간부터 여러분들의 마인드를 100% 바꾸어서 순선을 해서, -순선는 순수한 선행입니다.- 순수한 선행을 해서 여러분 자기 자신을 제도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여러분들의 마음이 바뀌고, 선한 행동을 하게 되면, 그 공덕이 여러분들의 조상의 위로 3대까지 영향이 미칩니다. 그렇게 하는 것이 여러분들이 가장 여러분들의 조상을 제대로 잘 천도하는 그런 것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백중이라고 하는 것은 잘못된 삶을 거스리는 거다. 거스린다라는 것은 반대로 산다라는 거죠. 그래서 이 백중을 이제 우란분이라고도 합니다. 우란분은 거꾸로 매어단다는 뜻인데, <거꾸로 매어 달려서 고통받는 중생들을 풀어서 바르게 세움으로 인해서 고통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준다>라는 그러한 뜻이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이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마음으로는 ‘나한테 이롭게 하는 게 아니라 다른 사람을 이롭게 하는 삶을 살아야지’ 이렇게 생각은 하면서도, 실제로 그 상황에 부딪히게 되면 자기도 모르게 자기에게 이롭게 하고 다른 사람에게 해가 되는 그러한 삶을 살고, 또 그러한 마음을 쓰고 행동을 합니다. 그래서 그것이 바로 거꾸로 된 거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렇게 거꾸로 된 삶을 우리가 살아가기 때문에, 그로 인해서 우리의 삶이 고통스러운 삶이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이 거꾸로 가니까 정말 여러분이 행복하고 바르게 잘 살고 싶다면, 그 반대로 살아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그 반대로 살아가는 삶을 가르치고 살아가도록 인도하는 그러한 종교가 바로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가르침을 역류문이다> 이렇게도 표현을 하는데, 불교가 거꾸로 가는 게 아니라 이 세상이 거꾸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 살아가는 우리 세상과 우리들의 삶이 일시적인 이익 때문에 탐진치에 눈이 멀어가지고 지옥 갈 일을 서슴지 않고 합니다. 그리고 나에게 화가 될 일을 하고, 또 고통이 오는 방향으로 우리가 살아가고 있거든요. 이것을 바꾸는 것이 불교다 그런 말입니다. 그래서 이 우란분절이라고 하는 이 백중은 이렇게 바르고 큰길을 놓아두고, 낭떠러지를 향해서 달려가는 이 어리석은 우리들의 마음을 바꾸는, 이 백중을 기해서 우리들의 나쁜 마음을 바꾸는 그러한 날이 바로 백중이고 우란 분절이다 이 말이에요. 요즘 이제 우리 여러분들이 이 백중이라고 하면, 백중은 여러분들의 조상을 천도하는 그런 날이다, 이 정도로까지만 여러분들이 알고 있고, 그렇게 의미가 축소되어 전해지고 있다고 보여집니다. 그런데 사실은 이 백중을 기해서 여러분들의 잘못된 마음을 바로 고쳐서 수행을 해서 지혜 자량을 쌓고, 또 이 백중은 백종(百種)이라고도 합니다. 백종은 100가지의 많은 여러 가지 음식을, 하안거를 마치고 공부를 마친 스님들께 공양을 올린다, 또는 100가지의 수많은 물건들을, 그런 것들을, 재물을 모든 사람에게 베푸는 그러한 날이다. 그래서 복덕 자량을 쌓는 날이다 이렇게 보셔야 됩니다. 왜냐. 목련존자께서 어머니를 지옥에서 나오게 할 때 어떤 방법을 썼느냐. 하안거를 마친 스님들께 백미로 공양을 올리고 그 공양을 받은 스님들이 경전을 읽은 공덕, 이 두 가지 공덕으로 어머니가 지옥에서 나오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백중은 스님들께 공양을 올리는 성공(聖供)의 날이다 이렇게도 전해져 옵니다. 그래서 이제 이 백중을 성공의 날이기도 하지만, 가치나의 기간이다라고도 합니다. 가치나의 기간이라고 하는 것은 그 백중을 기해서 한 달 동안 스님들이 마음껏 신도들에게 공양을 받을 수 있는 것을 허용하는 기간이었습니다. 그래서 이 백중을 기해서 앞으로 한 달간은 스님들이 제한을 받지 않고 공양을 받는 기간이고, 또는 성공을 하는 날이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아셔야 됩니다. 그래서 쭉 내려오면서 조상 천도만 여러분들이 생각하지, 공양 올리는 공덕은 여러분들이 전혀 생각을 못하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 <백중은 지혜 자량과 복덕 자량을 쌓는 그러한 기간이다> 이렇게 생각을 하시고, 오늘 이렇게 기도 입재를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이 기도 동안 여러분들이 지혜 자량과 복덕 자량을 쌓을 수 있도록 터전을 마련해 주는 것입니다. 보통 우리가 ‘아이고 내가 공덕을 쌓아야지, 좋은 일을 해야지’ 생각은 하면서도 선뜻하지를 못하는 경우가 많아요. 그래서 ‘오늘 기도 입재를 했으니까 백중 회향할 때까지는 내가 어떤 일이 있어도 기도도 하고 좋은 일도 하고 복덕과 지혜를 쌓아야지’ 이렇게 기간을 여러분들에게 스님들께서 마련을 해 주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보통 때는 아무 생각 없이 살다가도 이 기도 기간 동안만큼은 여러분들이 지혜도 쌓고 또 복덕을 쌓는 그러한 행동을 하셔야 된다 그 말입니다. 그리고 이제 우리가 해마다 백중을 기해서 돌아가신 분들을 위해서 이제 이렇게 천도재를 올립니다. 그러니까 이제 어느 불자가 질문을 하기를 “부처님 말씀 중에 제사나 천도에 대한 어떤 그런 것을 해야 하는 그런 근거가 있습니까”라고 질문을 했습니다. 또 그리고 또 한 가지 질문은 “해마다 이 백중이 돌아오는데 해마다 백중에 조상 이름을 올려야 됩니까?” 이렇게 물어요. 그래서 이 두 가지 중에 첫 번째 것을 먼저 대답을 하겠습니다. 부처님의 경전 중에 이제 근거를 보면은, 부처님, 석가모니 부처님 시대에도 그랬지만은, 과거에 부처님이 이 세상에 오셨을 때도,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을 하시면은 수많은 신도님들이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게 되는데, 그중에는 이제 대시주자가 많이 있습니다. 대시주자는 한 분, 두 분 스님께 공양을 올리는 게 아니라, 스님들의 전체를, 그러니까 석가모니 부처님도 상수 대중이 1,200명이었습니다. 그런데 법회를 한 번씩 열게 되면 수천 명이 모이는 그런 경우가 많거든요. 그러니까 그러한 수천 명을 다 공양을 올리는 그러한 대시주자, 그런 분들은 보통 이제 국왕이나 이런 분들입니다. 그래서 이제 옛적에 어느 부처님이 이 세상에 출현하셨는데, 그때도 어느 왕이 신심을 일으켜서 부처님을 아주 크게 공양을 올리고 했습니다. 근데 그 왕에게 아들이 5명이 있었는데 그중에 한 아들이 출가를 해서, 그 아들이 석가모니 부처님처럼 깨달음을 얻어서 부처님이 되셨어요. 그러니까 그 막내아들, 5명 중에 막내아들도 출가를 해서, 자기 형님이 부처님이 된 그 형님의 제자가 돼서, 상수제자가 됐습니다. 그리고 또 대신 중에 한 아들이 출가를 해서 상수제자가 돼서, 그 부처님과 두 제자가 함께 힘을 합해서 중생들을 교화를 하고 있었습니다. 근데 이제 이 국왕이 자기 아들이 부처님이 되니까 너무너무 좋고 기뻐서 부처님에게 가서 청을 했습니다. “제가 앞으로 살 날이 9만세가 남았는데, -9만세라고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해가 안 가죠. 우리는 지금 100세가 수명이지만, 부처님이 세상에 태어났었을 때는 수명이 1,200만세 뭐 이렇게 수명이 긴 그러한 세계에 태어나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앞으로 9만세가 남았는데, 그 기간 동안 부처님은 저 혼자만 공양을 올리게 해 주십시오.” 이렇게 가서 간절하게 부탁을 했습니다. 그러니까 부처님이 원체 그 아버님이 간절하게 청을 하니까 허락을 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 공양 올리는 것을 이 아버지가, 아버지 왕이 완전 독점을 한 거죠. 그런데 이제 그 독점을 한 왕에게 아직도 세 아들 태자가 있잖아요. 그 태자가 자기네들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싶어 죽겠는데, 절대로 아버지가 허용을 안 하는 겁니다. 그래서 아무리 아무리 간청을 해도 안 들어줬는데 어느 날 변방에 전쟁이 났어요. 다른 나라에서 쳐들어왔죠. 그래서 이 세 아들 태자가 세 사람이 자진을 해서 나가서 그 변방에 전쟁이 난 것을 전부 다 무찌르고 승리를 해서 돌아왔습니다. 그러니까 그 아버지가 너무 기뻐서 “너희들이 무엇이든지 소원이 있으면 들어줄게 말해봐라” 그랬어요. 그러니까 세 태자가 다 똑같이 “저희들에게 부처님께 공양할 권한을 주십시오. 한 사람 앞에 7년씩만, 7년씩만 달라”고 했습니다. 그런데 절대로 안 된대요. 그런데 이 태자들이 끊임없이 간청을 했어요. 그래서 얼마를 얻었느냐. 한 사람 앞에 한 달씩만 얻었어요. 공양 올릴 그 허가를. 그래서 이 세 아들 태자가 자기네들이 거느리고 있던 특수부대 1천 명과 자기들의 권속들, 친속들이죠, 친속들 1천 명, 2천 명에게 부처님과 부처님 제자들에게 공양 올릴 준비를, 음식 준비라든가 모든 준비를 하도록 이제 시켰다 이 말이죠. 그런데 그 친척들 중에 좀 질이 별로 안 좋은 친척들이 좀 있었나 봐요. 그래서 부처님과 스님들에게 공양 올릴 음식을, 이제 맛나는 음식을 많이 해놨겠죠, 그것을 이제 자꾸 공양 올리기도 전에 주워 먹고, 주워 먹고 하다가, 나중에는 아예 통째로 훔쳐다가 먹은 거예요. 그래서 그것이 화근이 돼서, 그다음 생부터 그 훔쳐 먹은 그 친속들이 전부 다 아귀보를 받았습니다. 그런데 아귀보를 받아서 바로 벗어난 것이 아니라 일곱 부처님이 이 세상에 태어나실 동안 수많은 시간을 아귀보에서 벗어나질 못했어요. 그러니까 이 친척들이 너무나 고통스러워서 부처님을 찾아가서 사정을 했습니다. “부처님, 어떻게 하면 우리가 이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겠습니까? 제발 좀 방법을 알려주십시오.” 그랬어요. 그러니까 “금생에는 안 된다. 다음에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태어나시면 그때 너희에게 고통에서 벗어날 방법을 아마 얻게 될 거다.” 그렇게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아귀들이 어쩔 수 없이 그다음에 부처님이 태어나기를 기다리고 있었죠. 그래서 이제 석가모니 부처님이 이 세상에서 깨달음을 얻으시고 그 부처님을 공양하는 대시주자 가운데에 왕이 빔비사라라는 왕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빔비사라왕이 어느 날 밤에 꿈을 꿨는데, 1천 명의 아귀들이 꿈에 나타나서 배고프다고 야단을 하는 거예요. 그냥 밤새도록 악몽에 시달려서 그냥 잠도 한숨 제대로 못 자고. 그다음 날 이제 부처님께 가서 어젯밤에 그런 꿈을 꾸었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이제 이런 이야기를, 너의 권속 중에 이런 일이 있었다라고 이제 말씀을 해주셨어요. 그러니까 이제 빔비사라 왕이 “그러면 제가 어떻게 하면 되겠습니까?”라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너가 다음에 이 부처님과 제자들을 청해서 공양을 올리고 난 다음에, 그 공양 올린 공덕을 아귀들에게 회향을 해줘야 된다”는 거죠. “이때까지 너가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다 공덕을 쌓았지만, 그 회향해주는 한 가지를 빠뜨렸다”는 겁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시니까 이제 빔비사라왕이 알겠습니다 하고는 그 자리에서 스님과 부처님들을 전부 다 공양청을 했습니다. 그래서 이제 공양청을 받고 그다음 날 부처님이 왕궁에 가셔서 이제 공양을 받으셨습니다. 그런데 이제 아귀들도 다 이제 회향을 받으려고 왔어요. 왔는데 아귀들이 우리 눈에는 안 보이죠. 그러니까 부처님이 신통력으로, 빔비사라왕은 그 아귀들이 담밖에 와 있는 것을 보도록, 신통력으로 보도록 해 주셨습니다. 근데 아귀들이 담 밖에까지 왔는데 이름을 불러주지 않으니까 담 안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거예요. 그래서 담 밖에 있는 아귀들을 보고 이제 빔비사라왕이 공양을 다 올린 후에 감로수를 부처님께 부어드리고 축원을 했습니다. “제가 올린 이 공덕의 공덕이 저 담 밖에 있는 아귀들에게 가서 저 아귀들이 고통을 면하게 해주십시오.”라고 회향을 했더니, 바로 그 공덕이 아귀들에게 가서 아귀의 보를 그 자리에서 벗고 본래의 모습으로 다 변해서, 그 옛날에 왕의 친척들이기 때문에 생김새도 잘 생겼고 옷도 잘 입었고 하거든요. 이제 그렇게 변한 것을 빔비사라왕이 직접 눈으로 볼 수가 있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것을 근거로 해서 스님들이나 이 스님들이 신도님들의 공양을 받고 그것을 영가에게 회향을 하면 그 영가들이 공덕을 받는다는 것을 직접 보여주신 그러한 사례입니다. 그래서 이것이 <담장 밖 경>이라는 특수한 이름을 가진 경전에 있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우리가 제사를 지내고, 천도를 하는 그런 것들이, 스님들이 하는 그러한 것들이 근거 없이 그렇게 하는 것이 절대 아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리고. 또 두 번째 해마다 백중이 돌아오는데 해마다 조상 이름을 올려야 됩니까? 올려야 됩니다. 왜냐하면은 지난번에도 제가 언제 한번 말씀을 드린 것 같은데, 우리가 언제부터 시작했는지 모르도록 수천 수억겁을 나고 죽고,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하면서, 다 태어날 때마다 부모를 의지해서 태어났습니다. 여러분 여기 앉아 계신 분들, 부모 의지 아니하고 하늘에서 뚝 떨어졌거나 땅에서 솟은 분 계시면 손 한번 들어보세요. 아무도 없죠. 그죠. 우리가 사람으로 태어나든, 짐승으로 태어나든, 새로 태어나든, 어떤 것으로 태어나든 간에 부모를 의지해서 태어납니다. 그러면 수천 수백 생을 부모를 의지해서 태어났기 때문에, 일체 중생이 전부 다 나의 부모라고 봐도 과언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가 올해 내가 천도재를 올리고 백중에 조상의 이름을 올리고 또 내년에 올리고 그러면 올해 공양을 올려서 만약 여러분의 조상이 천도가 됐다 그러면 그 조상은 천도가 돼서 가지만, 그전에 그전에 전에 나와 인연이 조금이라도 있던 중생들은 또다시 나의 천도를 받고 가고, 또다시 나의 천도를 받고 가고 이렇게 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도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를 못한다” 그랬습니다. 부처님 삼불론 가운데에 하나입니다. 인연 없는 중생은 제도를 못 해요. 인연이 있어야만 제도를 할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래서 길에 가다가 아이들이 스님들 보고 “중중까까중” 이렇게 한 것도 인연이 되는 거예요. 그것이 인연이 돼서 다음에 인연이 도래할 때 제도를 받을 수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종교가 달라서 부처님을 비방하고 욕하고 그런 사람도 욕한 것도 인연이 돼요. 그렇다고 또 욕하시면 안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인연이 있는 중생들이 우리에게 와서 여러분의 천도를 받고 떠나고, 받고 떠나고, 이러한 원리가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해마다 천도재를 지내되 정성을 다해서 그렇게 지내야 됩니다. 그것뿐만 아니라 앞에도 말씀을 드렸지만, 우리가 이렇게 기도를 붙이고 기도 기간 동안은 내가 참 선업을 행하고, 악업을 고치고, 또 복도 짓고 혜도 닦아야지, 그래서 설사 금년에 백중을 기해서 잘 닦았다 하더라도, 시간이 지나면서 나도 모르게 내 마음이 자꾸자꾸 뒤로 물러가서 1년 동안 내가 또 그동안 닦았던 거 다 까먹고, 바탕도 없이 다 까먹을 수도 있어, 그죠. 기본이 남아있는지 안 남아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여러분 스스로 자신을 돌아봤을 때, 내가 작년 백중에 기도했는데 그럼 지금까지 그동안 선업을 다 안 까먹었나 한번 생각해 보세요. 보시고 자꾸 선업을 쌓아서 그것이 이제 까먹지 않도록, 다만 100% 중에 다 까먹고 5%만 남았다, 그러면 5%는 금년에 쌓는 공덕에 플러스가 돼서 이제 조금씩 조금씩 조금씩 여러분들이 업이 악업이 없어지고 선업으로 가는 길로 들어서게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열심히 열심히 여러분들이 닦아야 됩니다. 그리고 부처님께서 부처님 당시에 그 사람들이 어떤 의문을 했느냐 하면, 부처님은 저렇게 생김새도 잘 생기시고 또 깨달음을 얻어서 모든 사람들이 저렇게 그냥 공경하고 존중하고 하는데, 도대체 부처님은 전생에 어떤 선업을 닦으셨길래 저렇게 참 훌륭한 모습으로 태어나셨고, 또 궁중의 태자로 태어나셨고, 또 출가해서는 부처님이 되셔가지고 저렇게 존경받는, 그러한 분이 되셨을까라고 많은 사람들이 의심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것을 아난존자가 잘 알고 그러한 생각을 품고 있는 사람들을 대신해서 부처님께 여쭈었습니다. “모든 사람들이 부처님 전생에 어떤 공덕을 닦으셨길래 금생에 저렇게 훌륭하시고 생긴 모습도 훌륭하실 뿐만 아니라 깨달음을 얻으셔서 모든 사람에게 존경하고 공경을 받는지를 알고 싶어 합니다.”라고 여쭈었어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냐 하면, “내가 전생에 부모에게 지극한 효도를 해서 그 효도의 공덕으로 왕궁에 태어나는 큰 복을 얻었고, 또 출가를 해서 깨달음을 얻어서 이렇게 부처가 돼서 일체 중생을 제도하고, 또 일체 중생들이 나를 존경하고 또 하늘과 제석천 모든 선신들이 나를 공경하고 존중하는 그러한 자리를 얻게 되었느니라.”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것은 잡보장경에 나오는 말씀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여기 앉은 보살님이나 여기 오신 분들은 다 그렇지 않을 걸로 알고 있습니다마는, 요즘 세대들에게 효도라는 말을 하면 그 효도는 옛날에 케케묵은 노인네나 하는 거지, 자기네들한테는 아예 해당이 안 된다라고 생각하는 그러한 젊은 분들이 더러더러 있는 것 같습니다. 그런데 사실은 그것은 정말 뭔가를 참 잘 모르는, 하룻강아지가 범 무서운 줄 모르는 그러한 생각입니다. 그리고 또 이제 요즘 사람들 보면, 부모가 자기 마음에 만족하도록 어떤 물질을 채워주지 못하면, “이럴 거면 왜 나를 낳았냐고 왜 나를 낳아가지고 이렇게 고생시키느냐”고 이러거든요. 그거는 정말 잘못 아는 거예요. 부모가 자식을 선택한 게 절대 아닙니다. 자식이 부모를 찾아온 거예요. 여러분들 그거 모르셨죠? 부모가 자식을 선택할 수가 없어요. 자식이 부모를 선택해서 들어오는 겁니다. 그러면 선택해서 나를 찾아온 자식을 거부하지 않고 낳아서 길러준 그 공덕만 해도 얼마나 큰 공덕인데, 실컷 다 커 놓고는 부모 은혜를 갚을 생각은 눈곱만큼도 안 하고 부모를 꼭 ATM 기계처럼 돈이나 있으면 와서 살살살살 해가지고 뺏어가면 그만이고, 이런 생각을 가진 사람들은 아무리 뭘 하려 해도 안 돼요. 왜냐. 부모는 뿌리입니다. 뿌리가 썩으면 가지나 잎은 어떻게 될까요? 여러분 알죠, 제가 말씀 안 드려도. 뿌리가 성해야 가지도 성하고 잎도 성하고 열매도 맺을 수 있어요. 자기가 잘 되고 돈도 잘 벌고 행복하려면 부모를 잘 모셔야 됩니다. 그래서 제가 다 다 사업하고 잘 되는 분을 다 알지는 못하지만, 제가 이렇게 가까이 계시는 정말 사업 잘하고 돈 잘 버는 이런 분들을 보면 부모한테 잘못하는 사람이 없습니다. 다 부모를 참 지극히 공경하고, 형제간의 우애도 좋고, 그래서 부모나 형제에게 돈 쓰는 걸 아까워 생각하지 않아요. 그런 사람은 100원을 벌어서 100원을 다 쓰면 1천 원이 들어오고, 천 원을 다 벌어서 다 쓰면 1만 원이 들어오고 그게 왜냐하면 이자가 붙고 공덕이 붙어서 나한테 돌아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잘되려면은 정말 부모에게 잘하고 어른을 존경하고 이것을 알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이 우주가 운행되어진 원리가 전부 다 주는 것으로 원리가 돼 있어요. 왜냐. 여러분 태양이 여러분에게 무한한 에너지를 줍니다. 근데 태양이 여러분에게 내가 하루종일 너희들 에너지 줬으니까 돈 얼마 내. 그런 태양 봤습니까? 못 봤죠. 바람이 여러분에게 불어주는데 바람이 불면서 여러분에게 내가 바람을 불어서 시원하게 해줬으니까 돈 내놔라, 뭐 내놔라, 이런 거 없죠. 땅이 여러분을 실어줘서 어디든지 가게 하고 살게 해주지만 땅이 여러분에게 조건 제시를 하고 뭔가를 어떻게 요구를 하던가요? 그렇지 않습니다. 여러분이 지금 숨 쉬고 있는 산소 한 번 숨 쉬면 얼마 그러지 않잖아요. 이 산소라는 게 얼마나 중요한지 모릅니다. 5분만 못 쉬면 뇌가 파괴가 돼요. 파괴가 돼서 식물인간이 됩니다. 그렇다면 여러분이 좋아하는 다이아몬드보다 이 산소가 귀중한 거예요. 산소를 못 마시면 바로 죽어요. 그런데도 여러분은 으레 마시거니 생각하고 감사한 줄 모릅니다. 그래서 이 우주가 운영되어지고 생성되어 가는 모든 원리가 주는 것에 있는 겁니다. 무조건 주는 걸로 원리가 돼 있어요. 그런데 우리는 주는 게 아니라 어쨌든 내가 받는 걸로만 살려고 하니까 이 거꾸로 돌아가는 겁니다. 그래서 우란분이라는 거예요. 거꾸로 되는 거다 이 말이죠. 그런데 100% 태양이나 바람이나 땅이나 이런 것처럼 100%는 못 주더라도 여러분이 그중에 30%만이라도 다른 사람에게 베풀고 산다면 이 우주가 용납을 해요. 그래 ‘잘 살게 내가 도와줄게’ 이러지만은 그야말로 깍쟁이 뭐라 그랬나요? 저기 돈 안 쓰는 구두쇠, 그래서 부모도 안 돌아보고 형제도 안 돌아보고 정말 힘들고 어려운 사람도 내 몰라 하고, 이러면은 그 사람의 앞은 별 볼 일 없습니다. 그런데 여러분 생각하기를 그런 사람도 잘만 살던데 그럴 수도 있어요. 왜냐. 전생의 선업을 많이 지어놓으면 악업과 이렇게 맞바꾸어도 양이 많을 정도로 선업이 많은 사람은, 남들이 볼 때는 그 선업을 다 이렇게 깎아 먹을 동안까지는 잘 살아요. 참 잘 살아 보인다 이 말이죠. 남한테 못할 짓 하고 그래도 잘 살아 보이지만 그것이 오래 못 갑니다. 오래 못 가서 바로 망하게 돼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우리 불자님들은 마음 자세를 똑바로 해야 합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부처님과 부모 공양하는 지극한 마음 하나가 운명을 바꾼다고 하셨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이 백중이라는 이 기간을 기해서 복도 짓고 지혜도 닦는 그러한 행운을 만들어서 늘 웃고 사는 그러한 행복한 분들이 되시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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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6월 13일 49재 법문
종범스님 2024-06-13
합장 풀고 편안히 앉아서 말씀을 잘 들어주십시오. 불교가 인도에서부터 시작이 됐는데, 초기 불교를 계속 이어오는 남방 불교가 있고, 이 동아시아는 대승불교를 계승하고 있는데요. 대승불교에서 신봉하는 내용은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대승 경전하고 조사어록이라고 하는 이 동아시아의 조사들이 나와서 말씀해 주신 조사어록을 신봉하고 있거든요. 대승 경전은 금강경, 법화경, 화엄경이 이제 중심이고, 조사어록은 육조단경, 마조어록, 임제어록, 우리나라 같은 경우에는 원효 저서, 의상 저서, 나옹, 무학, 함허, 서산 이런 분들이 남긴 내용이 다 조사어록에 속하거든요. 그럼 거기서 뭘 가르치느냐. 불교는 여래를 믿는데, 여래가 어떤 분이냐. 如來云者 諸法如義 여래운자 제법여의二行永絶 普見三世이행영절 보견삼세 法無自性 因緣生滅법무자성 인연생멸無生示生 無滅示滅무생시생 무멸시멸 여래운자(如來云者)는, 여래라고 하는 것은 제법여의(諸法如義)다. 일체의 모든 만물이 하나라는 거예요. 여여한 뜻이다. 나고 죽는 게 없고, 이것저것이 없고, 전부가 진여, 참 그와 같은 법이고, 실상법이고, 만물이 일법이다. 하나의 법이다. 우주 만물이 하나라는 것을 깨달은 분을 여래라고 그래요. 죽고 사는 것도 하나, 있고 없는 것도 하나, 나고 죽는 것도 하나, 제법이 여의다. 금강경의 말씀인데, 모든 법이 같다는 뜻이다. 같다. 그래서 올 때도 같은 뜻으로 오고, 그래서 여래라고 하고, 머물 때도 같은 뜻으로, 그래서 여주라고 하고, 갈 때도 같은 뜻으로 간다. 그래서 여거라. 그러면 그걸 깨달으면 어떻게 되냐. 이행이 영절(二行永絶)하고, 이행이라고 하는 것은 뭐 구하는 거, 둘로 보는 거, 두 이자, 행할 행자, 둘로 보는 생각이 전혀 없고 둘로 보는 행위가 전혀 없어요. 있는 거 싫어하고, 없는 거 구하고, 그 취사 선택이 전혀 없는 게 여래예요. 죽음을 피하고 삶을 구하고, 그거 없어요. 그래서 구하고 버리는 게 이행인데, 그 두 가지 행위가 영원히 끊어지고. 일이 없죠. 그래서 여래상을 보면 뭐 구하는 모습으로 조성돼 있지 않아요. 그냥 가만 하나를 보는 모습이에요. 부처님 상을 보면. 하나 버리고 하나 구하는 모습이 아니라, 하나를 보는 모습으로 표현된 게 부처님의 불상이에요. 그래서 그걸 같다는 뜻이다. 구하고 버리는 행위가 영원히 끊어졌다. 보견삼세(普見三世)라. 일순간에 과거, 현재, 미래를 다 봐요. 그게 뭔 소리냐. 미래는 과거다. 미래가 따로 있는 게 아니고, 미래는 과거다. 또 현재는 미래다. 그래서 삼세가 눈앞에 다 있어요. 그걸 여래라 그래요. 앞으로 다가올 세상이 딴 세상이 아니라 과거 지나간 세상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지금 세상이 현재인데 현재는 바로 또 미래가 된다는 거예요. 그 미래는 과거가 되고. 그걸 여래라고 한다. 법무자성(法無自性)이니, 그리고 여래가 깨달은 것은 하나하나 법에 자성이 없다. 자체 성격이 없다는 거예요. 그건 뭐냐. 이타위성(以他爲性)이라. 다른 걸로써 자기 자성이 됐다. 이 그릇도 그릇의 자체 성격이 있는 게 아니라 다른 흙 같은 것이 모여서 다른 걸로 자체가 됐다. 그걸 깨달았어요. 그래서 뭐든지 구할 게 없다는 걸 깨달았어요. 왜냐하면 그 자체는 아무것도 없으니까. 집도 집에 자체가 있는 게 아니라 나무하고 뭐하고 건자재가 모여서 집이 됐기 때문에 집에 자체 성격이 없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구할 게 없다는 거지. 구해봐야 그것에 그것이 없으니까, 그릇을 조사해 보니까 그릇에 그릇이 없고, 나무를 조사해 보니까 나무에 나무가 없고. 이게 법에는 자성이 없다. 자체 성질. 무서운 얘기인데 그걸 깨달아요. 그러면 어째서 여러 가지 물건들이 생기느냐. 그거는 인연생멸(因緣生滅)이라. 인연으로. 이제 물과 찬 공기가 만나면 얼음 되고, 공기가 움직일 때 바람이 되고 하듯이, 인연으로 생기기도 하고 인연으로 없어지기도 한다. 인연이란 말은 인도에서 번역인데 말미암아서 생긴다 이런 소리예요. 말미암지 않으면 안 생긴다. 그래서 무생에 시생(無生示生)하고, 자체 성질로 보면 생긴 게 없는데 생긴 것처럼 모양을 보이고, 무멸에 시멸(無滅示滅)이라, 자체 성질로 보면 없어지는 게 없는데 없어지는 것을 보인다. 이걸 인연생멸이라 그래요. 법무자성하고 인연생멸이라, 어려운 말로. 법에는 자성이 없고 인연으로 생기고 없어진다.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 생사가 본래 없다고 가르쳐요. 생사는 본무하고 일심은 청정하다. 한마음은 깨끗하다. 그래서 부처님이 깨달은 것은 마음을 깨달았는데, 물질은 자체가 없고, 마음은 물드는 것이 없이 항상 깨끗하다는 거예요. 그걸 깨달았어요. 법무자성하고 일심청정이라. 生死如夢 無實虛妄 생사여몽하니 무실허망하고一心如日 常放光明일심여일하니 상방광명이라 一念當體 寂寂照照일념당체가 적적조조하고 一念靈光 無時赫赫일념영광이 무시혁혁이로다나무아미타불 불교의 여러 가지 가르침 중에 이 나무아미타불이라는 거 최고예요, 그게. 나무는 돌아간다 돌아간다 이 뜻이에요. 공경한다 돌아간다 이 뜻이고요. 아미타불이라고 하는 것은 죽음이 없는 생명, 무량수예요. 한량없는 수명. 한량이 없다는 건 죽음이 없다 소리예요. 그 죽음이 없는 수명으로 돌아간다. 죽음이 없는 생명으로 돌아간다. 그거는 뭐 나무아미타불보다 더 깊은 가르침이 없어요. 참 대단한 말씀이죠. 죽음이 없는 데로 돌아간다니. 지금 한문으로 말한 게, 생사는 여몽(生死如夢)이라. 나고 죽는 건 꿈과 같다. 같을 여자, 꿈 몽자. 그래서 무실허망(無實虛妄)이라, 진실성도 없고 오래 가는 게 없다 그래요. 허망, 무실. 이 나고 죽는 게 꿈과 같다. 이 생사를 꿈으로 많이 가르쳐요. 경전에서. 그럼 꿈을 말할 때 화엄경 십인품이라고 하는 품이 있는데, 거기에 이 세상사를 꿈과 같이 관찰한다. 그런 말이 있어요. 세상사가 꿈과 같다. 그럼 꿈이라는 게 그럼 어떤 거냐? 꿈은 꿈을 꾸고 꿈을 깨고 하는 가운데 하나만 알고 둘은 몰라요. 그럼 둘은 모르는 게 뭐냐. 꿈을 언제 꾸기 시작했는지 꿈의 시작을 몰라요. 꿈을 몇 분, 몇 초, 몇 각에 꾸기 시작했는지 그걸 몰라요. 그리고 꿈꿀 때는 꿈인 줄을 몰라요. 꿈꿀 때는. 이제 꿈을 깼을 때 ‘내가 꿈을 꿨었구나’ 알아요. 꿈을 시작할 때도 모르고, 꿈을 꿀 때도 모르고, 모르다가 꿈을 딱 깼을 때 ‘아 내가 꿈을 꿨구나’ 그때만 알아요. 그런데 ‘꿈을 꿨구나’ 하고 그 아는 생각이 언제 없어지는지 그 없어지는 것도 또 몰라요. 그래서 꿈에는 하나는 알고 셋은 모른다 이렇게 가르쳐요. 시작도 모르고, 꿀 때는 꿈인 줄도 모르고, 또 꿈을 깨고 나면 꿈인 줄 알았는데 꿈인 줄 알은 생각이 뭐 움직이다 보면 없어지거든요. 그 꿈 깬 생각이 어느 시간에 없어졌는지 전혀 모르는 거예요. 그래서 아는 건 하나뿐이고 셋은 모른다. 그래서 꿈이라는 거는 무실허망하다. 진실성도 없고, 오래 가는 것도 없고, 허망하다. 생사가 그렇다는 거예요. 생사가 그렇게 꿈같이 무실하고 허망하다는 거지. 근데 일심은 여일(一心如日)이라. 한마음은 같을 여, 날 일, 날은 태양이란 말이죠. 해와 같다. 생사는 꿈과 같고 한마음은 태양과 같다. 그래서 한 마음은 상방광명(常放光明)이라, 항상 광명을 펼친다.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이게 뭔 소리냐. 이제 마음을 말할 때 견문각지하는 마음이 있다고 가르쳐요. 눈으로 보는 마음, 귀로 듣는 마음, 몸으로 느끼는 마음, 생각으로 기억하는 마음, 견문각지 마음이 있는데, 이거는 바람과 같이 왔다 갔다 왔다 갔다 하는데 그 속에 청정일심이 있다. 아무리 봐도 보는 데 물들지 않고, 아무리 들어도 듣는 데 물들지 않고 아무리 생각해도 생각에 물들지 않는. 물들지 않는 걸 청정이라고 그러는데, 맑을 청, 깨끗할 정, 그 맑고 깨끗한 마음이 있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래서 이 보고 듣고 하는 마음을 인식이라는 식자, 마음 심자, 식심(識心)이라고 하고, 식심, 보아도 보는데 물들지 않고, 들어도 듣는데 물들지 않는 마음을 일심이라 한마음이다. 이 한마음은 신령스러워서, 없는 듯하지만 다 있어요. 그리고 화가 나는 속에도 있고, 즐거워하는 속에도 있고, 그 화가 막 날 때는 굉장하지만 그게 또 슬슬 사라져요. 또 본래 마음으로 돌아와. 즐거울 때는 막 정신을 못 차리지만 그것도 사라져. 그러면 본래 마음으로 돌아와요. 100년이 지나가도 100년 전을 생각하고, 또 딱 보면, 저것이 앞으로 어떻게 될 것도 알고, 이렇게 견문각지 희로애락 하는 그런 세상의 식심과 견문각지 희로애락에 물들지 않는 청정한 한마음이 있다. 생사가 꿈과 같다면 일심은 태양과 같다. 태양은 이거는 뭐 밤낮도 없고 항상 밝단 말이에요. 일심은 여일하니 상방광명이라 항상 광명을 비춘다. 그래서 이 몸이 생길 때, 그 한마음 광명에 처음이 아니고, 이 몸이 사라질 때 한마음 광명에는 마지막이 아니다. 그래서 부처님에게는 생사가 없다. 견문각지도 없고 희로애락도 없고. 뭔 말이냐. 일심청정 상방광명, 항상 광명하는 마음이 있고 항상 청정한 마음이 있다. 그걸 안 걸 깨달음이라 그래요. 그걸 안 걸. 이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걸 아는 걸 그걸 깨달음이라 그러고, 물들지 않는 마음이 있다는 걸 아는 걸 깨달음이라 그런다. 그럼 어찌 되냐. 마음을 알고 나면 모든 게 마음뿐이에요. 심외무법(心外無法)이라, 마음밖에 법이 없다. 이렇게 이런 물건을 보는 것도 여기에 마음이 있어요. 근데 보통 사람은 이 물건만 보지, 이 물건을 보는 마음이 있다는 건 꿈에도 몰라요. 산을 봐도 그게 마음이요. 산을 보는 마음이 보는 거예요. 물을 봐도 그게 마음이고, 사람을 봐도 그게 마음이고. 천지 만물이 오직 마음뿐이다. 유시일심(唯是一心)이다. 오직 마음 하나다. 그러니까 뭘 봐도 마음이에요. 이걸 봐도 이걸 보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그걸 깨달은 거지. 죽는 것도 마음이고, 사는 것도 마음이고, 오고 가는 게 전부 한 마음이다. 그러니까 한마음으로 돌아가서 일체 것에 전혀 구애를 안 받는 걸 해탈이라 그래요. 한마음뿐이다. 일체 것에는 전혀 장애가 없다. 그래서 무장애 일심 해탈, 장애 없는 한마음 해탈이다. 근데 그 한마음이라는 게 실체가 뭐냐. 그걸 불교에서는 해당할 당자하고, 당직이라는 당자하고, 몸 체자 써서 당체(當體)라고 그러는데요. 마음의 당체, 그 마음의 그 본질, 그 당체가 뭐냐. 또 일심을 일념이라고도 하고요. 한생각, 일념당체(一念當體)는 찾아보면 없어요. 당체가 찾아보면 없는 걸 고요하다는 적자 두 번 써서 적적(寂寂)이라고 그러고. 이 마음은 이게 몸을 아무리 갈라봐도 마음이 안 보여요. 그런데 맨날 봐요. 맨날 들어. 이걸 조조라고 그래요. 조명이라는 조자. 적적조조(寂寂照照)라. 그래서 마음을 이렇게 들여다보면 한 물건도 없어요. 이게 적적이에요. 그런데 마음을 이렇게 펼쳐보면 온 우주에 꽉 차는 거예요. 펼치면 꽉 차고, 돌이켜보면 한 물건도 없고, 이걸 이제 아는 때가 와요. 그걸 불교의 수행이라고 하고, 깨달음이라 그래요. 돌아보면 한 물건도 없다. 무일물이라. 펼쳐보면 변법계라, 온 우주법계에 두루하다. 그래서 일념은 또 영광(一念靈光)인데 신령스러운 광명인데 이 신령스러운 광명은 무시혁혁(無時赫赫)이라. 시간이 없이 과거도 아니고, 현재도 아니고, 미래도 아니고, 그냥 밝고 밝다. 그걸 비유로 말을 하는데, 江江水月來 一月印千江 강강수에 월래하니 일월이 인천강이로다愚猿水中捉 孤輪不昇降우원수중착이나 고륜은 불승강이로다夢踏青山脚不勞 影入水中衣不濕몽답 청산에 각불로 하고 영입수중에 의불습이로다. 나무아미타불 강강수(江江水)에, 강마다 강마다 물이 있는데, 강마다 강마다 차 있는 그 물에, 달이 전부 하나씩 와 있어요. 그게 강강수에 월래(江江水月來)라. 강강수에 달이 오니, 이 강에 가 봐도 그 강 속에 달이 있고, 저 강에 가 봐도 강 속에 달이 있고, 그게 강강수월래예요. 강강수월래. 그런데 그 달을 건져볼려고 들어가면 달이 없어요. 그런데 밖에서 보면 달이 보여. 희한해요. 근데 그게 강 속에 강마다 달이 하나씩 따로 들어 있는 게 아니라, 일월이, 한 달이 인천강(印千江)이라, 천강에 비춘 것이다, 이 소리예요. 그래서 그걸 월인천강(月印千江)이라고 하거든요. 월인천강, 달이 천강에 비췄다. 도장 인자인데, 백지에 도장 딱 찍으면 도장이 환히 보이듯이 물속에 달이 환히 보인다, 이 소리야. 근데 우원(愚猿)은 어리석은 원숭이는 수중착(水中捉)이나, 물속에서 달을 건지려고 막 찾아. 근데 물속에 들어가면 물에 빠지기만 하지 달은 못 찾아요. 그런데 고륜은 불승강(孤輪不昇降)이라, 이렇게 하늘에 딱 떠 있는 달 모양은 물속에 들어가지도 않고 하늘에 올라가지도 않고 항상 거기 있다 이거예요. 그럼 그 달은 뭐냐 그러면, 생사예요. 나고 죽는 거예요. 물속에 달이 보이나 안 보이나, 늘 하늘에 홀로 밝아 있다고 하는 거는 생사 없는 일심 한마음이다, 이거죠. 그걸 이제 비유로 말할 때 몽답청산에 각불로(夢踏青山脚不勞)요. 꿈에 높은 산을 막 헤매고 돌아다녔는데 꿈꾸는 몸은 다리가 멀쩡해요. 꿈에 청산을 밟았는데도, 다리 각자가 있고, 아니 불자가 있고, 피로할 노자가 있거든요. 다리는 피로하지 않아. 영입수중에 의불습(影入水中衣不濕)이라. 물가에 가서 이렇게 보면 자기 그림자가 물속에 있는데, 자기 옷을 만져보면 옷이 멀쩡해요. 그림자가 물속에 들어갔는데 옷은 젖지 않았다. 이 죽고 사는 속에 죽고 사는 것이 없는 한마음이 있다 이 소리거든요. 그래서 그 한마음이 극락 가는 거예요. 한마음으로 돌아가면 그 자리가 극락이요. 한마음에는 하나뿐이니까 나고 죽는 게 없어요. 무생사, 생사 없는 본극락, 본래 극락. 그리 돌아가시라고 지금 재 지내는 거예요. 일심으로 돌아가면 극락세계다. 환귀일심 극락세계. 환귀는 돌아간단 말이잖아요. 희로애락에 머물러 있으면 그걸 사바세계라고 그래요. 견문각지 희로애락은 사바세계고, 환귀일심 하면, 일심으로 돌아가면, 돌아갈 환자가 있고 돌아갈 귀자가 있거든, 그러면 극락세계다. 이렇게 가르치고 이렇게 믿고 이렇게 의식을 진행하는 게 이런 재 지내는 의식이거든요. 원리가 간단해요, 아주. 인간의 고통은 희로애락에서 온다. 인간의 해탈, 인간의 영원한 즐거움은 일 심 광명에서 온다. 부처님은 일심광명을 깨달은 분이라는 거지. 그래 이렇게 표정이 희로애락에 막 시달리는 표정이 아니에요. 희로애락에 시달리는 표정이 아니에요. 희로애락에서 벗어난 그런 표정이에요. 佛身常顯現 法界悉充滿불신상현현 법계실충만恒演廣大音 普震十方國항연광대음 보진시방국如來普現身 遍入於世間여래보현신 변입어세간隨衆生樂欲 顯示神通力(華嚴經,如來現相品)수중생낙욕하야 현시신통력(화엄경, 여래현상품)나무아미타불 지금 읽은 이 내용은 화엄경 여래현상품(如來現相品)이라고 하는 품이 있는데, 거기서 말씀하시는 건데, 부처님은 마음을 딱 찾아서 일심을 딱 거두기도 하고, 거둘 때는 한 물건도 없는데, 일심을 딱 펼치면 온 우주에 꽉 차요. 그래서 부처님 몸이 항상 나타나니, 법계에 실충만(法界悉充滿)이라, 세계를 법계라고도 하거든요, 불교에서, 이 세계에 충만하다 가득하다. 한마음이 온 세계에 가득하다는 거예요. 찾아보면 한 물건도 없는데 펼치면 세계에 가득해요. 마음 공부라는 건 이제 이걸 체험하는 거예요. 딱 ‘이것이 무엇인가’ 하면 한 물건도 없어요. 근데 눈 딱 뜨고 보면 마음이 끝이 없어요. 그러면 이 즐겁고 괴롭고 막 그냥 갈팡질팡하는 게 꿈 같아. 작야몽중사(昨夜夢中事)라, 어제저녁에 꿈꾸던 일과 같다. 뭔 일이든지 그때는 모르는데 지나놓고 보면 꿈이거든요. 다 부질없어. 10년 전의 일 지금 생각하면 부질없어요. 근데 10년 전 그때는 전혀 그게 부질없는 일인 줄 몰랐어요. 지금 일도 마찬가지예요. 지난 일은 다 꿈이다. 그런데 그 당시에는 꿈인 줄 모른다. 항연광대음(恒演廣大音)하니, 항상 넓은 소리를 내니 널리 우주 법계를 다 진동시킨다. 여래가 보현신(如來普現身)하야. 여래가 널리 몸을 나타내서 변입어세간(遍入於世間)하니, 세간에 두루 다 들어간다. 수중생낙욕(隨衆生樂欲)하야. 중생들이 원하고 바라는 걸 따라서 현시신통력(顯示神通力)이라, 신통력을 나타낸다. 이 신통력이라는 건 뭐냐 하면, 이 마음으로 가면 몸을 전혀 안 움직이고 가요. 그걸 신통력이라고 그래요. 저 해가 왔다 갔다 하지 않아도 온갖 것을 다 비추듯이 그걸 신통력이라고 움직여서 가는 게 아니라 안 움직여서 가는 거. 그거 희한해요. 가만히 있는데 가고자 하는 곳에 다 갔어. 아무리 빨라도 마음으로 가는 것보다 더 빠를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인간은 이 몸을 움직이려고 온갖 기계를 만들었는데, 그건 너무 좋은 일이에요. 좋은 기계 만들어서 쓰는 게. 그런데 이 마음으로 움직이는 거는 털끝 하나 안 움직이고 가고자 하는 곳에 다 가는 게 그게 신통력이에요. 그래서 여래가 사람들을 인도할 때 가만히 한 곳에 앉아 있지만 온갖 중생들을 다 살핀다 이런 뜻이에요. 그래서 여래가 안 움직이지만, 오늘의 영가를 극락세계로 인도하신다. 이게 신통으로 인도한다 이 소리예요. 왔다 갔다 해서 막 땀 흘리고 하는 게 아니라 가만히 앉아 있으면서 신통력으로 극락세계로 인도하신다. 이렇게 가르쳐요. 지심제청 지심제수白蓮淨土 安養佛國 西方淨土 極樂世界 백련정토 안양불국 서방정토 극락세계이니承佛神力 即得往生 無量福德 無盡受用승불신력하야 즉득왕생하야 무량복덕을 무진수용하십시오나무아미타불 청정일심이 쫙 펼쳐질 때 그 세계는 이 진토세계가 아니라, 먼지로 이루어진 세계가 아니라, 불시진토요. 진토가 있고 정토가 있는데, 정토란 말은 깨끗할 정자, 흙 토자 그걸 정토라 그러고, 진토는 먼지 진자 흙 토자 진토라고 그러거든요. 희로애락으로 보면 진토인데, 청정 일심으로 보면 정토다. 그래서 백련정토(白蓮淨土), 흰 백자 연꽃 연자, 깨끗하다는 소리예요. 깨끗한 정토. 안양불국(安養佛國), 편안할 안자, 기를 양자인데, 그게 옛날에는 기를 양자를 즐거운 락자로 썼어요. 안양, 편안하고 즐겁다. 그래서 이 불교 용어로 따서 이제 안양이라는 우리 지명도 있거든요. 그게 불교 용어예요. 그 극락세계라는 소리에요. 그게 안양불국, 편안하고 즐거운 부처님 나라. 그것이 서방정토 극락세계다. 서방이라는 건 깨끗하다는 소리예요. 깨끗한 정토 바로 극락세계이니까 오늘 영감께서 승불실력(承佛神力)하여, 부처님의 신통력을 이어받아서 즉득왕생(即得往生)해서 바로 극락세계에 가서 태어나서 무량복덕(無量福德)을 한량없는 복덕을 무진수용(無盡受用)이라. 끝이 없이, 한순간 두 순간이 아니라 아주 끝이 없이 받으소서. 받을 수자, 쓸 용자인데 그 용자는 받는다는 말을 도와주는 부사예요. 수용하다 그러면 받으소서. 이렇게 해서 오늘 극락세계 가시도록 하는 법문이 끝이 났고요. 다음 의식으로 극락세계에 가시면 되거든요.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