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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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12월 31일 음력12월 초하루 신중기도 법문
종범스님 2024-12-31
주제 : 義相祖師法性偈 이야기 ⑧의상조사법성게 이야기 ⑧-- 一中一切多中一 · 約緣起陀羅尼理用 辨攝法分齊 ---- 일중일체다중일 · 약연기다라니이용 변섭법분제 -- 안녕하십니까? 갑진년 초하루 진관사 법회 법문입니다. 불교는 <복덕구족(福德具足) 보리성취(菩提成就)> 이걸 가르치고 있어요. 복덕을 갖추고 깨달음을 이루자. 보리성취. 그래서 불교는 궁극적으로 깨달음을 인도하고 있는데, 깨달음이란 무엇인가. 자기 진실상의 발견이에요. 자기 진실상. 인간은 다 자기를 위해서 살아가고 있는데, 자기 진실성이 뭐냐 하는 것은 잘 모르고 살아가요. 그래서 자기 진실성을 모르고 살아가는 것을 범부라고 하고, 자기 진실성을 알고 살아가는 것을 제불이다, 모든 부처님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거든요. 凡夫所迷 범부소미四大色身 以爲自身 緣塵識心 以爲自心사대색신 이위자기 연진식심 이위자심生老病死 憂悲苦惱 猶如自家 夢踏高山생로병사 우비고뇌 유여자가 몽답고산 諸佛所證 제불소증法無定性 法法相成 圓成圓融 無障無礙법무정성 법법상성 원성원융 무장무애一中一切 一切中一 塵塵遍滿 念念久劫일중일체 일체중일 진진변만 염념구겁 그러면 범부가 진실상을 모른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범부들은 자기를 어떻게 알고 있느냐 하면, 이 사대오온(四大五蘊)이라고 그래서, 여기에는 지(地) 수(水) 화(火) 풍(風)이 다 들어 있다. 수상행식(受想行識)이라고 하는 생각이 들어 있는데, 이건 한마디로 말해서 이 신체와 생각을 자기라고 알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사대오온 적육단신(赤肉團身), 적이라는 붉을 적자인데, 육단이라는 것은 근육 덩어리라는 뜻이에요. 붉은 근육 덩어리 몸을 나라고 알고 있다. 그래서 무슨 문제가 따르느냐면 생로병사(生老病死)를 느끼고 우비고뇌(憂悲苦惱)를 느껴요. 근심 걱정을 계속 느껴요. 근데 제불들은 무엇을 나라고 알고 있느냐 그러면, 구경청정(究竟淸淨) 일심불성(一心佛性). 구경이라는 건 끝없다는 소리예요. 끝없이 청정해. 청정이라는 것은 다른 이물질이 없다는 얘기예요. 구경청정. 일심불성이라. 한 마음, 아는 본성, 일심불성. 그것이 적적조조(寂寂照照)라. 고요하고 고요해서 아무것도 없는데, 비추고 비추어서 밝고 밝다. 조견이라고 비출 조자가 있거든, 조명이라고, 적적이라는 건 고요할 적자가 있어요. 이게 나라는 게 틀려요. 이 범부는 사대오온 적육단신 생로병사 이걸 나라고 하는데, 부처님들은 구경청정 일심불성 적적조조, 여기에 머물러 계신단 말이에요. 그런데 이 법성게는 그 부처님의 세계를 말하는 게 법성게예요. 왜 그러냐면 경전 중에는 그 복덕구족과 보리성취로 가는 길을 말하는 경이 있고요. 그게 이제 수행과 공덕을 이야기하는 경이에요. 그런데 화엄경은 가고 나서 목적지에 도달한 다음에 내용을 설명한 게 화엄경이에요. 부처가 되는 길을 말하는 경이 아니고, 화엄경은, 그 부처의 세계, 복덕구족 보리성취를 이룬 후에 머무르는 세계를 말한 게 화엄경이거든요. 근데 그 화엄경을 하나의 그림으로 그린 게 이제 법성해인도(法性海印圖)거든요. 그걸 일승법계도(一乘法界圖)라 그래요. 일승법계도. 그런데 거기다가 합시, 시를 합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지금 외우는 게인데, 시를 범어로 표현하면 가타(gāthā). 가타를 생략하면 게가 되거든요. 그건 한자로 시라는 소리예요. 합시를 해서 거기다가, 그림에다가 시를 합했어요. 그게 이제 39 시인데. 좋다. 아주 좋아요. 일승법계도합시, 시를 합해서 그걸 도장으로 만들었어요. 그걸 일인이라고 그래, 한 도장, 일인. 그게 의상 스님이 지은 원 제목이에요. 저술 제목. 근데 그것을 줄여서, 의상조사법성게 이렇게 말하는 것은 줄여서 표현한 것이고, 본래 제목이 화엄일승법계도합시일인(一乘法界圖合詩一印). 그게 이제 의상 스님의 저술 제목이거든요. 그럼 그건 뭘 말하느냐면 화엄경의 모든 내용을 근본과 줄기를 모아서 표현한 거예요. 그래서 이것을 화엄을 둥글 원자, 가르칠 교자, 원교(圓敎)라고 그러고, 그걸 근본과 줄기를 말한 걸 종요(宗要)라고 그러는데, 종갓집이라는 종자하고, 요점이라는 요자를 써서 종요라고 그러는데, 그래서 의상스님이 저술을 다 짓고 표현하기를 이것은 <일승 원교 종요다> 이렇게 표현했어요. 일승원교종요. 아주 종갓집과 같고, 요점과 같은 종요다 이렇게 표현했는데, 여기서 이제 우리가 지금 법문을 하고 법문을 듣는 것은 그 법계도에 합해서 집어넣은 시, 그걸 지금 보는 거예요. 시인데 시는 법성게고, 법성게는 법성원융무이상에서 시작해서 구례부동명위불로 이제 끝이 나는데, 중간에 보면 일중일체다중일(一中一切多中一) 그런 게송이 있어요. 일중일체다중일. 오늘은 세 번만 읽어봅시다. 일중일체다중일 일중일체다중일 일중일체다중일 이게 이제 뭐냐 하면, 한마디로 말해서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그 또 생각에 생각되어지는 모든 것을 법이라고 그러는데, 법은 없다는 얘기예요. 이걸 법은 없다는 말을 뭘로 하냐면 법무자성(法無自性)이라, 법에는 자체 본성이 없다. 법은 보이는 거, 들리는 거, 생각되어지는 거, 만법, 만물, 일체법, 일체상, 이걸 법이라고 그러는데, 이거는 자성이 없다. 없다. 그럼 자성이 없다는 건 뭐냐. 이것에 이것이 없기 때문에 다른 것이 들어와서 이것이 됐다 이거예요. 이거 참 심각하고 아주 새삼스럽네. 안경에 안경이 없어요. 이게 법무자성이요. 안경에 무자성이라 자성이 없어. 그럼 어떤 게 안경이 되냐? 유리가 안경이 되고, 이런 쇠붙이가 안경이 되고, 여러 가지 부속품이 안경이 됐다. 이게 법무자상이에요. 그러면 다른 것도 또 마찬가지다. 진흙에 진흙이 없다. 다른 먼지가 모여서 진흙이 됐지, 먼지 빼면 진흙이 없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사람도 이 사대오온 적육단신이 물이 들어오고 흙이 들어오고 공기가 들어오고 온도가 들어오고 여러 가지 보고 들었던 기억들이 들어와서 사대오온이 된 거지, 이 자체 본성은 없다. 허공도 마찬가지다. 이쪽 산, 저쪽 산이 공간의 간격이 있어서 텅 빈 걸로 보이지만, 허공에 자체 본성은 없다. 자체 본성이 없기로 말하면 진흙에도 자체 본성이 없고, 태산에도 자체 본성이 없어서 자체 본성이 없는 걸 법성이라고 그러는데, 법의 본성, 이게 조금 어려운 말로 자꾸 들어가려고 그러네요. 법의 본성은 진흙의 자체 본성 없는 법성이다, 태산 큰 산에 자체 본성 없는 법성이다, 조금도 다름이 없다는 거예요. 이걸 무이상이라 그래요. 둘이 없다. 원융이라는 거는 진흙의 법성이나 또 허공의 법성이나 태산의 법성이나 다 통한다는 거예요. 이걸 원융이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법의 자체 본성이 없고 원흉하고 둘이 없는 걸 다 다 깨닫는 순간에 근심 걱정할 게 하나도 없다. 왜냐. 태어난대도 태어난 자체 본성이 없지만, 죽는대도 죽는 자체 본성이 없어. 그럼 이 죽고 산다고 하는 것은 전부가 생각 놀음인데, 생각이 나고 안 나는 것을 구별해서 집착하고, 생각이 살고 죽는 것을 구별해서 집착할 뿐이지, 죽는데 죽는 본성이 없고, 태어난 데 태어난 본성이 없고, 머무는데 머무는 본성이 없다. 법성은 원융해서 둘이 없다(法性圓融無二相). 참 멋있네, 이거 멋있어, 참 정말 멋있어요. 법성은 원융해서 둘이 없다. 그럼 둘은 뭐냐. 이게 번뇌 망상이다. 그래서 둘이 없는 걸 못 깨닫고 사는 범부들은 번뇌망상으로 우비고뇌 근심 걱정이 그치질 않고. 그다음 말 뭔 말 나올 것 같아요? 둘이 없는 걸 훤히 깨달은 삼세제불은 둘이 없으니까 뭘 버리고, 뭘 취할 게 없는 거예요. 법성원융 무이상이라. 근심 걱정할 일이 전혀 없죠. 그럼 뭐만 있냐. 오로지 구경청정 일심불성 적적조조. 고요하고 고요하면서 항상 비춘다. 근데 그 비추는 게 그냥 비추는 게 아니고, 청정무애 비지원만(淸淨無碍 悲智圓滿), 청정해가지고 이걸 취할까 저걸 취할까 이게 걸리는 이 무애라는 말을 불교에서 쓰는데, 무애는 갈등이에요. 이거 해야 되나 말아야 되나, 이거 가야 되나 말아야 되나, 그 갈등이 그게 걸리는 거거든요. 그러니까 있는 것도 없는 거와 원융무이하고, 또 없는 것도 있는 거와 원융무이하니까, 그냥 하는 대로 하면 하는 대로 모든 인연이 하는 쪽으로 따라와요. 안 하면 안 하는 대로 모든 인연이 안 하는 쪽으로 따라와요. 그걸 가만히 보면 담배 좋아하는 사람에게는 담배 선물해요. 담배가 안 좋은 거 알면서 사다 준다고. 그게 왜 그러냐면 자기가 원해서 그래요. 또 다른 거, 책 좋아하는 사람은 책 사다 줘. 왜 그러냐? 책 보는 걸 그 사람이 좋아하는 거 아니까 그 사다 주는 거예요. 그러면 뭐냐 하면 이 세상은 자기가 좋아하는 쪽으로 이루게 돼 있어요. 왜 그러냐면 이 세상 법은 고정된 게 아니기 때문에. 노력하는 대로 이루어지는 거예요. 고정된 게 아니니까. 참 심각하다. 이게 심각해. 보통 심각한 게 아냐. 근심 걱정할 게 아무것도 없는데 법성원융무이상이니까 없는데, 자기가 생각해서 걱정한다. 자기가 생각해서 근심한다. 그래서 생각이 깨달음으로 바뀌면, 걱정근심은 어제 저녁 꿈에서 본 거다. 어제저녁에 꿈을 꿨는데 아침에 보면 꿈에서 본 내용이 간 곳이 없어요. 작야몽중사(昨夜夢中事)라, 어제 저녁, 작야는 어제저녁이거든요. 몽중사 꿈에서 본 일이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이제 오늘 일중일체다중일인데, 조그만한 먼지나 온 시방 법계 세계나 자성이 없는 건 똑같아. 그래서 세계가 한 가는 티끌 속에 들어와. 또 한 티끌이 세계 속에 들어가. 이게 일중의 일체라는 거예요. 하나 속에 일체가 다 들어 있다. 일체 속에. 알고 보면 일체가 큰 것 같지. 이걸 가만히 들여다보면 한 먼지뿐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나는 여행을 잘 안 가는데 여행 안 가는 내 나름대로 철학이 있어요. 가봐야 그거는 보이는 것뿐이고 보이는 건 다 먼지뿐이다. 눈앞에 있는 먼지 봐도 다 못 보는데 멀리까지 가서 왜 먼지 보고 오냐 이거여. 그게 내 철학이요. 그럼 또 뭐라고 하더라고. 그러면 됩니까? 그러면 뭐라고 그래 안 되긴 뭘 안돼. 나같이 생각하면 이쪽으로 다 끌려와요. 딴 사람같이 생각하면 여행 좋아하는 사람 맨날 여행 가게끔 세상에 끌려와. 그래가지고 일중일체요. 일체가 또 하나요. 다중일이란 단어는 일체라는 말이거든요. 일중의 일체고 일체가 하나다. 많다라는 건 일체라는 말이에요. 모든 거 하나다. 이게 법무자성하고 자성이 없어서, 법법이 원융무이하다. 법무자성 법법원융, 법법이 둘이 없다. 그걸 여기 얘기하는 거예요. 이거 이제 이게 깨달은 세계예요. 범부들은 이 모양만 바라보고 따라가요. 이게 알고 보면 가는 먼지뿐이라는 건 몰라. 모양만 보고 따라가. 그래서 여기에 포함돼 있는 가는 먼지나, 태산을 이루고 있는 가는 먼지나, 내 몸을 이루고 있는 가는 먼지나 다 자성이 없이 다 평등하단 말이에요. 그래서 둘이 없다는 거예요. 일중의 일체고 다중의 일이다. 그래가지고 내 인생이 뭐냐. 어떤 선지식이 이 옷에서 먼지 하나를 이렇게 집어서 날렸어요. 이 가는 먼지가 내 인생이다. 이게 일중의 일체라는 거예요. 무한한 세월이 뭐냐. 요거다(핑거스냅하시면서). 이거 찰나인데 이 소리가 잘 안 나네. 일찰나가 무량겁이라는 거예요. 일미진이 함시방이고. 이게 삼세제불이 머무는 곳이에요. 그러니까 근심 걱정하는 건 전부 그 자성 없는 일미진은 안 보고 이 모양과 소리만 쫓아가서 자기가 좋아하는 것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그것이 없어지면 대성통곡하고. 이 모양으로 사니까 그런 거예요. 사라지는데도 사라지는 자성이 없어서 안 사라지는 것과 원융무이하고, 또 안 사라지는 것도 안 사라지는 자성이 없어서 사라지는 것과 원융무이하다. 이거를 통달을 하고 떡 보면 거기에는 뭐만 남는가. 법은 없고 뭐만 남냐. 구경청정 일심불성 적적조조, 신통무애(神通無碍) 이것만 남는다고요. 신통무애라는 거는 내가 원하면 원하는 대로 딸려온다 이거예요. 그게 신통무애예요. 내가 원하면. 그러니까 구경청정 일심불성 적적조조 신통무애, 이거를 이제 화엄경에서 설명하는데, 그걸 이렇게 그림으로는 하나의 그림으로 표현을 하고, 시로는 39 게송으로 표현하는데 오늘은 일중일체다중일 이건데, 이것이 39 게송 중에 몇 번째예요? 일곱 번째, 일곱 번째죠. 일곱 번째 게송이 이 일중일체다중일 이 게송이거든요. 하나 속에 일체가 있고 일체 속에 하나다. 이거는 그 법성이라고 하는, 법성이라고 하는 그 형태의 진실상을 알지 못하면 도저히 이게 풀리지 않는 내용이에요. 일체의 만상의 진실상은 법성인데, 법성은 하나하나의 자성이 없어서 하나 속에 안 들어가는 게 없고, 일체 속에 하나가 다 들어간다. 그래서 이걸 비유로 말할 때 이 허공에 고정불변한 자체 자기상이 없거든요. 허공에. 그러니까 허공의 자체 자기상이 없으니까 이것도 허공만큼의 부피예요. 이것도 허공 만큼의 부피고, 근데 이게 이제 모양인데 여기에 허공이 다 있는 거예요. 자체상이 없기 때문에. 바다에도 허공이 있고, 하늘에도 허공이 있고, 사람 몸에도 허공이 있고, 왜 그러냐면 자체 진실상이 없어서 안 통하는 데가 없는 거예요. 이거 참 말하다 보니 참, 너무 당연한 얘기를 너무 어렵게 하는 것 같아서 좀 쑥스럽네. 쑥스러워, 아주 쑥스러워요. 허공에는 자체 진실상이 없어서, 모든 게 다 허공이 되는 거예요. 이것도 허공이, 허공이 이게 되는 거예요. 이걸 깨부숴야 허공이 아니라, 이거 그대로 허공인 거예요. 사람 몸도 태워 없애야 이게 허공이 아니라, 몸 그대로 이게 허공인 거거든요. 이게 이제 이렇게 된다고. 그래서 이거를 일중의 일체가 왜 이게 한 티끌 속에 시방세계가 다 들어가냐. 이걸 화엄학을 토론을 하다 보면 맨날 여기에 걸려 있어요. 말도 아닌 소리를 하고. 어떻게 하나의 미진 속에 시방세계가 어째서 다 들어간단 말이냐. 이 중생의 소견으로 보면 너무 당연한 질문이거든요. 그런데 이게 이 시방세계라고 하는 게 자체 진실상이 없다. 조그마한 가는 티끌도 자체 진실상이 없다. 그러니까 자체 진실상이 없는 허공처럼 허공에 자체 진실상이 없으니까 태산도 허공이 되고 바다도 허공이 되고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게 화엄이에요. 그래서 이걸 비유로 말할 때 허공을 표현하는데 요거 그릇을 보면 요 그릇 안에 빈 공간이 있는데 이것도 허공이다.그러면 방이 있는데 이 방 안에 빈 공간이 있는데 그것도 허공이다. 그러면 저 그냥 뻥 뚫린 허공 이걸 태허공이라고 그러는데 태허공도 허공이다. 그리고 사람에서 눈에 보이지는 않지만 털 하나 뽑으면 그 털 뽑은 구멍이 있잖아요. 그걸 모공이라고 그래요. 모공 털구멍이라고 그 털구멍 그것도 허공이다. 근데 이게 털 뽑은 그 구멍 허공이나, 그릇 안에 있는 허공이나, 이 집안 공간의 허공이나, 저 우주 태허공이나 다를 게 하나도 없다 이 말이에요. 그걸 원융무이라고 하거든요. 원융해서 다름이 없다. ①一中一切多中一 一句者 因果道理門 謂得一而定得十 得十定得一 일중일체다중일 일구자 인과도리문 위득일이정득십 득십정득일 得因而即得果 得果即得因也 (叢髓錄 卷上之一) 득인이즉득과 득과즉득인야 (총수록 권상지일) 왜 이런 얘기를 자꾸 하냐면 법에 매이지 말라는 거예요. 눈에 보이는데 귀에 들리는데 매이지 말라. 눈에 보이는 거 귀에 들리는 건 다 자성이 없어서 원융해가지고 둘이 없다. 힘들어요. 말하기 힘들어. 이게 너무너무 당연하고 너무너무 진실한데 우리 생각은 너무너무 멀리 있어요. 멀리 있어요. 그래서 이 의상 스님 제자들이 그 의상 스님 저술에 이제 주석을 많이 낸 거를 우리가 지금 보고 있는데 거기에는 그런 주석도 있어요. 일중일체라고 하는 거는 또 다중일이라는 것은 인과도리(因果道理)다 이런 말을 했어요. 인과. 왜냐하면 일중에는 일체가 있고 일체 중에는 일이 있으니까, 원인이 있으면 일 중에는 일체 결과가 있고, 또 일체중일이다. 일체 가운데 일이 있다. 결과가 있으면 원인이 있다. 이렇게 해석을 한 분이 있어요. 의상스님 제자 중에. 그러니까 우리는 시작할 때는 원인이고 이룰 때는 결과인데 시작은 지금 보이는데 이루는 건 안 보여. 그래서 불안한 거예요. 그러면 하나가 곧 일체다 하면 시작을 하면 반드시 결과가 있다. 결과를 의심하지 마라. 결과를 불안하게 여기지 마라, 이거예요. 밥 먹으면 배가 부르다. 이걸 먹어도 부를까, 안 부를까 걱정하지 마라. 먹으면 부르다 이런 얘기죠. 그래서 이것은 원인이 있으면 반드시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반드시 원인이 있는 거기 때문에 원인을 보고 결과를 의심하지 말고 결과를 보고 원인을 잊어버리지 마라. 이게 이제 일중일체다중일이라는 것은 인과 도리를 말한 거다. 이렇게 말한 주석이 있고요. ②若欲觀 緣起實相 陁羅尼法者 先應學 數十錢法 所謂一錢乃至十錢 약욕관 연기실상 다라니법자 선응학 수십전법 소위일전내지십전 所以說十者 欲現無量故 此中有二 一者 一中十 十中一 소이설십자 욕현무량고 차중유이 일자 일중십 십중일 二者 一即十 十即一 (叢髓錄 卷下之二. 一乘法界圖原文) 이자 일즉십 십즉일 (총수록 권하지이. 일승법계도원문) 또 이 법은 평등하고 마음은 청정하다. 이거를 가르치는 방법 중에 하나가, 의상 스님이 수십전법(數十錢法)이라는 걸 얘기를 했는데, 10전이라는 건 1전짜리 동전 10개로 이 법은 없고 마음은 평등하다는 것을 비유해서 설명하는 거예요. 동전 열을 세는 방법이에요. 이게 수십전법이에요. 이게 수십전법을 보면, 이 동전이 없으면 그 동전을 세는 숫자는 없어요. 이 숫자라는 것은 셀 수 있는 내용이 있어야 숫자가 드러나요. 그래서 이거 세는 숫자를 능할 능 자 능수라고 하고, 세어지는 숫자를 장소 소자, 소수라고 해요. 그래서 이게 하나가 있다 그러면, 이게 이제 이건 하나거든요. 이 하나가 왜 나오냐 그러면, 이게 하나라는 게 지금 있으니까 이걸 세려고 하나예요. 그러면 하나는 어떻게 해서 구분이 되냐. 이 모든 일체하고 이거 하고 구분되니까 이걸 하나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러면 수는 그 세어지는 숫자가 없으면 안 나타나요. 이것처럼 이 법을 내가 좋다, 나쁘다, 자성 없는 걸 자성이 있는 식으로 생각해서 여기에 매이지 않으면 법은 평등한 거예요. 원융무이한 거예요. 그래서 내가 이게 동전을 세지 않으면 그냥 동전이에요. 열이고 스무 개고 없어요. 그래서 세어지는 내용이 없으면 세는 숫자는 필요가 없다. 첫째 가르치는 게 이거고요. 그리고 또 하나는 이걸 세는데 첫째 하나 시작하는 걸 본수라고 해요. 첫 번째, 첫 번째 하나를 본수. 또 마지막 결과의 수를 말수라고 하거든요. 본말. 그러면 본수가 하나 딱 정해지면 이거는 인연 따라서 정해지는 거지, 고정된 본수가 없어요. 예를 들면 이게 다섯인데 여기 이제 본수를 여기서 하나 하면 둘, 그러면 둘은 이 본수가 없으면 이게 둘이 안 돼요. 이게 본수가 이 둘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둘이 되는 거예요. 이 셋은 또 이 본수가 셋으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셋 되는 거예요. 넷도 마찬가지고 다섯 이렇게 돼요. 그래서 본수는 이 말수와 떨어지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뭐든지 시작하면 결과가 있는 거예요.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그리고 이 말수가 있을 때는 이 본수가 있는 거예요. 이게 다섯이 되면 이게 말수거든요. 끝 숫자. 그러면 다섯이 되면 이 첫 번째 시작한 하나가 없으면 이게 다섯이 안 돼요. 그리고 다섯 속에는 반드시 이 하나하나가 다 들어가 있어요. 또 하나에는 또 이 다섯이 포함돼 있어요. 이게 일중의 일체고 다즉일이다. 많은 것이 곧 하나다. 그래서 하나를 떠나면 다섯이 없고 다섯을 떠나면 하나가 없다. 그래서 하나와 이 많은 것은 원융하다, 평등하다. 그런데 의상 스님이 또 중요하게 말한 것은 이 하나라는 첫째 숫자가 고정된 게 아니고 사람에 따라서는 이 새끼손가락을 첫째 숫자로 따질 수가 있어요. 이걸 본수로 해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이렇게 셀 수도 있어요. 세는 사람 마음이라 그거는. 이게 인연법이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 중간 숫자를 본 수로 해서 첫째 하나 해서 이걸 이쪽으로 돌면 이게 둘이 되고, 이게 저쪽으로 돌면 이게 이제 또 다섯이 되고 이래요. 참 묘한 거예요. 그러니까 어떤 사람은 내가 둘째로 태어난 걸 평생 한을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있어요. 또 어떤 사람은 첫째로 태어난 것을 또 싫어하는 사람도 있고. 내가 왜 본수 제일이 됐을까. 이거 아무 생기는 건 없고 귀찮은 일만 많다 이렇게 생각하고 그러는데, 어느 나라에서는 막내아들한테 모든 걸 다 전해줘요. 이걸 말자 상속이라고 그래요. 말자. 끝아들한테 모든 걸 다 부모가 상속해 주는 풍속이 있어요. 또 어느 나라에서는 장자 상속이라고 그래가지고, 맏아들에게 다 내려주는 수가 있고요. 아들이 없을 때는 이제 딸에게 다 임금 자리도 물려주고 뭐 재산도 물려주고 다 하고 하는 거 있거든요. 이런 게 전부 정해진 법이 없고, 이 숫자처럼 인연 따라서 다 되는 거다. 그러면 첫째도 첫째가 없고, 마지막에도 마지막이 없고, 중간에도 중간이 없다. 법에는 자성이 없고, 평등하고 원융무이하다. 이걸 이 숫자를 통해서 화엄 세계를 알게 하는 것이 이 수십전법이에요. 이것만 잘 알면 아, 수라는 건 본래 없다. 왜냐하면 이 세어지는 내용이 없으면 수가 필요가 없으니까 본래 없고, 또 이 수라는 게 하나뿐이다. 하나. 하나 없는 둘이 없다. 그래도 둘도 하나. 이거 굉장히 중요해요. 그다음에 한번 생각들 해보세요. 하나 없는 열이 있어요. 없죠. 하나 없는 스물이 있습니까? 하나 없는 100이 있어요? 없지. 수는 아무리 많이 세도 하나뿐이고, 아무리 적게 세도 하나뿐이고. 하나에 수가 없고 하나 밑에 수가 없다. 그냥 하나다. 그래서 이걸 딱 보면, 이 세상은 그냥 하나의 가는 티끌뿐이고, 영겁이니 뭐 영혼이니 이거는 생각이 만들어내서 표현하는 거고, 그냥 일찰나 일념, 일념뿐이다. 일념 즉시 무량겁이에요. 일미진 중에 함시방이라. 참 좋네요. 참 좋아. 그러니까 근심 걱정할 일이 아무것도 없는데, 이 범부들이 보이고 듣는데 생각을 붙여서 스스로가 근심 걱정을 한다. 이제 이거거든요. ③大記云 開宗云 數十錢法 治執着病之弟一藥 成無㝵德之最勝門也 대기운 개종운 수십전법 치집착병지제일약 성무애덕지최승문야 解云 若得體達此 數錢之法者 於諸境界 日用之中 隨所聞見 해운 약득체달차 수전지법자 어제경계 일용지중 수소문견 不取不着 ——毛孔 ——塵中 見一切佛 聞一切法 起心動念 불취불착 일일모공 일일진중 견일체불 문일체법 기심동념 擧足下足 凡所施爲 無非究竟 滿足佛事 故云 治病之弟一藥 거족하족 범소시위 무비구경 만족불사 고운 치병지제일약 成德之最勝門也 (叢髓錄 卷下之二) 성덕지최승문야 (총수록 권하지이) 그래서 의상 스님 제자 중에는 수를 헤아리는 숫자 수십전법을 통달하게 되면 뭐냐. 치번뇌병, 치집착병지제일약(治執着病之弟一藥)이라. 집착을 치료하는 데 제일 약이라고 그랬어요. 숫자 이거. 숫자는 하나도 하나, 억만도 하나, 하나 없는 억만은 없으니까. 그러니까 하나에 집착할 필요도 없고, 많은 데 집착할 필요도 없고, 그리고 또 성무애덕지최승문(成無㝵德之最勝門也)이라, 이 어디에 집착하지 않고, 걸리지 않는 그 힘을 이루는 가장 훌륭한 분이다. 이렇게 얘기를 하고. 약득체달차 수전지법(若得體達此 數錢之法者)하면, 만약 이 동전을 세는 법을 체달하게 되면, 어제경계일용중(於諸境界 日用之中)에, 모든 생활하는 일상생활 속에, 소수견문하야 불치불착(隨所聞見 不取不着)하고, 뭘 듣든지 뭘 보든지 이것도 하나고 저것도 하나고 해서, 이거 하나 버리고 저거 하나 취할 게 없고, 그래서 불취불착이라, 취하지도 않고 집착하지도 않는다. 그래서 일일모공(——毛孔)에 가장 적은 하나하나의 털구멍에, 또 일일진중(——塵中)에, 하나하나 티끌 속에 견일체불(見一切佛)하고, 일체 부처님을 거기서 다 본다. 문일체법(聞一切法)하고 일체법을 다 듣는다. 기심동념(起心動念) 거족하족(擧足下足) 범소시위(凡所施爲)에, 마음을 일으키고 움직이고, 발을 움직이고 모든 하는 일이 무비구경 만족불사(無非究竟 滿足佛事)라. 온전한 깨달음을 이루는데 구경불사 아닌 게 없다. 구경불사가 뭐냐. 이 수십전법을 통달하면 손 한번 이렇게 드는데 여기서 온전한 깨달음을 이루니까 그게 구경 불사라는 거예요. 차 한 잔 이렇게 마시는 이게 구경 불사에 더이상 불사할 일이 없는 불사다. 이게 이제 구경만족 불사라는 거죠. 만족불사. 그래서 치병지제일약(治病之弟一藥)이고 무애덕을 이루는 최승문이라고 했다. 이렇게 주석을 내서 가르치고 있어요. 一中解無量 無量中解一일중해무량 무량중해일了彼互生起 當成無所畏(華嚴經 光明覺品)요피호생기 당성무소외(화엄경 광명학품) 如依所數物 而有於能數여의소수물 이유어능수彼性無所有 如是了知法피성무소유 여시료지법譬如算數法 增一至無量비여산수법 증일지무량數法無體性 智慧故差別(華嚴經 夜摩宮偈品)수법무체성 지혜고차별(화엄경 야마궁게품) 그래서 여기서 화엄경에는 이런 수에 대한 게송들이 많은데, 산수법(算數法)이라는 말을 거기서 계속해서 썼어요. 산수법. 인생은 산수법이다. 수학 이런 게 아니고 산수법 수를 계산하는 법이다. 수는 하나밖에 없어요. 하나가 두 번 겹치면 둘이고요. 하나가 세 번 겹치면 셋이요. 아, 이거를 알아야 되는데, 하나하고 셋은 다른 줄 알아요. 세어지는 건 다르지만 숫자는 하나야. 세 번 세면 셋이고요. 네 번 세면 넷이고요. 다섯 번 세면 다섯 아니에요. 이건 맞죠? 맞으면 박수 한번 쳐보세요. 이거를 알면 인생은 하나다. 여기 가도 내 인생이고, 저기 가도 내 인생이고, 죽어도 내 인생이고 살아도 내 인생이고, 눈을 감아도 내 인생이 눈을 떠도 내 인생 이거예요. 인생은 수다. 산수법이다. 근데 이제 사람에 따라서는 전체를 하나로 세는 사람이 있어요. 전체를 이게 뭐 하나뿐이지 그러고. 또 어떤 사람은 하나를 많은 걸로 세는 사람이 있어요. 이 방 안에 떡 들어와서도 방 하나네. 그러면 이 방이 여러 가지가 있네. 이게 그러니까 이 세는 사람의 생각에 따라서, 하나를 여럿으로 셀 수가 있고 여럿을 하나로 셀 수가 있다. 저 마당도 보면 하나거든요. 근데 가만히 보면 뭐 하나가 아니야. 여러 가지가 있어. 그래서 이 수의 철학을 가지고 보면 거기에 정신 건강의 묘법이 있어요. 나한테 뭐가 있냐. 하나도 없다 이렇게 셀 수가 있어요. 그리고 나한테 많이 있다 이렇게 셀 수가 있어요. 그러니까 자기한테 있는 걸 하나도 세지 않고, 불만만 가지는 것을 노이로제라고 그래요. 내 몸이 있고, 내가 숨 쉴 수도 있고, 지금까지 산 것도 여러 해를 살았는데 내가 산 것도 인정 안 하고 안 세요. 내가 숨 쉬는 능력도 인정 안 하고 죽을 때 보면 숨을 못 쉬거든요. 그러니 이렇게 숨 쉬고 있다는 게 이게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아주. 그래서 임종을 보면 느끼는 게 많더라고. 그 쉽게 쉬는 숨도 못 쉬어. 그러니까 이거 숨 쉬는 것 자체가 이거 진짜 중요한 거고요. 그거 내가 세야 되거든요. 하나, 숨 쉰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자기가 숨 쉬는 것도 안 세고, 자기가 돌아다니는 것도 안 세고, 자기가 뭐 가지고 있는 것도 안 세고, 하나도 없다고 그래요, 나한테는. 그게 노이로제인데 그게 우울증이에요. 인정하는 게 많으면 많게 세는 거예요. 인정하는 게 하나도 없으면 도대체 안 세요, 그냥. 그래서 내가 이 세상을 내 인생을 얼마나 하나도 없다고 세고 있느냐, 많다고 세고 있느냐 이거예요. 그래서 이건 순전히 자기 생각으로 세는 거예요. 나한테 하나도 없어 이러면 없는 거죠. 하나도 없다고 그러면 없다고 생각이 들어요. 생각하는 대로 나타난다 이거예요. 화엄경은. 없다고 보면 없는 거예요. 있다고 보면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생각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하나로 보면 하나고 열로 보면 열이다. 이게 숫자의 철학이거든요. 그래서 이건 순전히 마음먹기 달려서 이제 되는 건데, 충청도에서는 아침 인사가 “진지 잡수셔시오” 이런다고. 근데 이거 아주 철학적으로 보면 “마음 잘 잡수셨슈” 이러면 참 좋을 것 같아. “엊저녁에 죽을 생각 안 하고 살 생각했냐, 엊저녁에 마음 잘 잡수셨시오?” 밥 먹었는 거는 뭐 숨 쉬는 거 보면 밥 먹었으니까 숨 쉴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뭐 안 물어도 다 아는 건데, 이 마음을 어떻게 먹느냐는 거는 잘 모르거든요. 그러니까 “건강하십시오.” 이거 좋은 말인데 “마음을 잘 잡수십시오.” 한자에서는 용심(用心)이라고 그러는데요. 쓸 용자 마음 심자. 근데 우리가 말할 때는 마음먹는다고 하더라고요. “큰 맘 먹었네” 이러고. “마음이 왜 이렇게 좁아 ”이러고. 마음을 좁게 먹네, 마음을 크게 먹네. 이걸 먹는다 그래, 우리 말에서는. 그런데 한자에서는 마음을 쓴다고 하거든요. 용심이라고. 그러니까 이 숫자를 보면 용심을 잘하게 된다. 수는 하나뿐이다. 겹치는 대로 숫자가 늘어난다. 억만도 하나, 하나도 하나. 이걸 잘 통달하고 나면 일체만법을 훤히 통달해서 복덕구족 보리성취는 저절로 이루어진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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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지기도]12월 21일 동지기도 회향 법문
회주 계호스님 2024-12-21
안녕하세요. 오늘은 정말 좋은 날입니다. 음력11월의 명절 동짓날입니다. 동지에 대해서 잘 아시죠? 동지는, 오늘 법문지 한번 보세요. "동지(冬至)는 명일(名日)이라 일양이 생하도다. 시식으로 팥죽 쑤어 이웃과 즐기리라. 새 책력 반포하니 절후는 어떠한고. 해 짧아 덧이 없고 밤 길어 지루하다." - <농가월령가> - 동지는 <명일이라 일양이 생하도다> 그랬죠. 여기서 명일이라는 거는 오늘이라는 뜻이에요. ‘명절이라’ 이런 뜻도 되고. ‘일양이 생하도다’ 하는 거는 오늘부터 햇볕이 점점 이제 밝아져가지고 양기가 들어오는 기간이에요. 그래서 낮은 제일 짧고 밤이 긴 긴 밤이라는 거 아시죠? 이게 동지예요. 동지 의미인데, 동짓날은요. 오늘 이렇게 눈이 많이 와서 이렇게 푸근할 때는 풍년이 들고, 좀 이렇게 따뜻하고 그러면은 흉년이 든다는 말이 있어요. 그래서 따뜻하면 사람도 많이 돌아가시고, 병충해가 생겨 가지고 농사도 잘 안 돼서 풍년이라 하지 않고 흉년이라 그래요. 그렇지만 눈이 이렇게 푸근하게 올 때는 풍년이 든다는 말도 있어요.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무를 보면 무가 두꺼우면은 그 해는 풍년이 아니고 흉년이라 그래요. 무가 얇아야 맛있는 거예요. 요새 동치미 먹어보니까 어떻습니까? 무가 두껍죠. 좀 두꺼운 느낌이 안 드시는지 모르겠네. 보살님들은 맛 감각이 없어서? 있어서? 그런지 저는 잘 모르지만 제가 먹는 바에는 무가 좀 질긴 맛이 나더라고요. 그래서 올해는 좀 흉년이었었나 이런 생각도 들고요. 살아가는데 그런 게 생활의 지혜예요. 보통 이렇게 동짓날에는 애동지, 노동지, 중동지 있잖아요. 초순에 들면 애동지라고 그러고, 중순에 들면 중동지고, 20일 이후에 들면 노동지라고 그러는데, 이렇게 이제 많이 애동지나 노동지 때는 뭐 집에서는 팥죽을 안 쑨다고 그러는데 여러분들은 팥죽 쓸 필요도 없어요. 왜냐하면은 죽집에서 <팥죽 주문 받습니다.> 써놨더라고요. 그래서 제가 "절에서 팥죽을 드시는데 요새는 마을에서도 이렇게 그 음식 파는 그게 옛날하고 다르구나." 생각했어요. 옛날에는요, <팥죽 주문 받습니다.> 이런 말을 안 썼거든요. 그냥 팥죽집 하면은 팥죽이고, 그냥 죽집 하면은 거기서 뭐 녹두죽도 팔고, 팥죽도 팔고 그러는데, 저희들 세대 때는요, 시장에서 이렇게 팥죽을 쒀가지고 큰 단지에다가 팥죽을 팔았는데, 저는 먹는 걸 하도 좋아해서 팥죽을 서너 그릇씩 사다 먹었어요. 오늘 여러분들 팥죽 드시고 1년 내내 무탈하시고 또 항상 건강하시고. 이 팥이라는 건요. 우리가 보통 액막이할 때 팥 뿌리잖아요. 또 나쁜 사람이 오면은 가고 난 자리에 뭐 뿌립니까? 재수 없다 할 때.(팥) 그렇지만 그런 건 하나의 민속 신앙이에요. 미신이라고 생각하지 마시고. 옛날 어른들은요. 그런 민속 신앙이 바로 지혜예요. 어른들이 알아서 합니까? 쭉 하다 보니까, 그걸 경험 삼아서 바탕으로 하다 보니까, ‘아, 노인네 말들은 정말 지혜롭구나.’ 그리고 우리는 살아가면서 지혜로운 생각과 자비로운 마음이 필요한 거예요. 팥죽 드신다고 좋다 생각하시고, 이렇게 팥죽을 많이 쑤는 것은 나눔과 베풂의 하나의 실천하는 날이다 이렇게 생각하시고. 오늘 신중기도할 때 불설소재길상다라니 엄청 많이 하시는데, 소재길상다라니는 나쁜 것을 다 없애주고 좋은 일만 자꾸 불러들이는 거예요. 원화소복(遠禍召福)의 얘기예요. “원화”라는 거는, 화(재앙)를 멀리하고, 고를 여읜다는 의미가 되고, “소복”이라는 건 득락이라는 의미이고, 즐거우니까 복이 생겨서, 그게 자비와 지혜가 되는 거예요. 모든 사람들이 이 팥죽을 드시고서 1년 내내 무탈하고, 좋은 일만 생각하고 좋은 생각만 가져야지만이, 모든 게 다 성취되는 거예요. 여러분들이 기도하면서 악한 생각하면 악한 만큼 악해지는 거예요. 그 어떤 생각을 가지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과 완성도가 높아지는 거예요. 마찬가지로 어떤 음식을 드시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이 뭔가 생각이 다르듯이, 세상 사는 건 다 똑같은 거예요. 절집의 일이나 바깥의 일이나 다 똑같다고 생각하시고, 오늘 이렇게 드시면서 모든 사람이 행복하고 좋은 생각 내면서 다 같이 행복해야 되겠죠. 행복은 멀리 있는 거 아니에요. 내 바로 가까이 있는 게 행복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뭐 좀 하면은 ‘오늘 참 행복하다, 즐겁다, 좋다.’ 이런 마음을 자꾸 내면은 정말 행복해지는 거예요. 항상 좋은 생각 내면서 열심히 기도하세요. 예불, 찬탄, 공양, 원력, 원을 가지고 있어서 항상 그렇게 하다 보면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수지독송도 마찬가지예요. 경전을 읽으면 그게 내 것이 돼야 되지, 읽는 데서 그치면 안 되는 거예요. 실천해야 되지. 그래서 보현보살의 행원이, 저희 은사 스님께서 항상 보현의 행으로써 사셨어요. “평생을 가지려고, 받으려고만 하지 말고, 내가 가진 거 다 남한테 좀 베풀어라.” 베푸는 걸 근본으로 생각하셨어요. 베푸는 것이 바로 보살행이라는 거. 그래서 보세요. 동지는 <명일이라 일양이 생하도다> 그랬죠. 오늘부터 점점 양기가 들어와 가지고, 어두운 기운이 없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오늘부터 노루 꼬리만큼 길어져요. 하루에 1분 1분씩 하다 보면은 어두운 기운이 밝아지는 거예요. 그래서 일양이 생하도다. 그리고 시식으로 무엇을 쑤어서? 팥죽을. 팥죽을 두죽이라고도 해요. 두탕이라기도 하고 팥죽을 쑤어 가지고 이웃과 즐기리라. 여기 농가월령가에 보면요. 1월달에 월령가, 2월달에 월령가, 3월달에 월령가가 있는데, 여기는 이제 음력 11월달에 하는 농가 월령가예요. 그러다 보니까 동지가 나오니까 팥죽 쑤어가지고 이웃과 함께 즐기리라 했고요. <새 책력을 반포하니 절후는 어떠한고.> 오늘 다 뭐 받으셨어요? 달력 받으셨죠? 옛날에는요. 나라에서 단오날에는 부채를 주고, 동짓날에는 달력을 줬어요. 그래서 오늘도 진관사에서 달력을 드립니다. 그전에는 동지 전에 했는데, 막 중구난방이 돼가지고 일률적으로 동짓날 드려야 되겠다 해서 동짓날 다 배포하는 거예요. 그래서 필요한 만큼 가져가시라고 내놓으셨죠? 그러니까 필요한 만큼만 가져가세요. ‘절후는 어떠한고.’ 좀 쌀쌀하죠? 쌀쌀해도 풍경이 좋잖아요. 그림이 좋죠. 저는 항상 그러잖아요. 세상에 살아가면서 절, 그러니까 이 인연이 토지연도 맞아야 돼요. 도량연도 맞듯이. 이 도량이라는 게 어떤 도량에서 기도하느냐에 따라서 성취가 좌우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정법 도량에서 열심히 기도하는 도량. 저희가 그랬잖아요. 63년도부터 천일기도가 안 끊어지는 도량이 어디예요? 제가 강원도에서 있다가 2006년도에 왔는데, 여러분들이 정예부대더라고요. 얼마나 일률적으로 잘하는지. 원래 저희 스님은요. 저희들 출가해가지고 새벽에 3시부터 뭘 나눠주는지 아세요? 졸지 말라고 박카스를 나눠주면서 기도를 했답니다. 그래서 저희들은 열심히 기도하고 살았는데, 지금까지도 내려오다 보니까 도량이 맑고, 스님네들이 맑아지고, 여러분들도 다 얼굴 보면은 너무 맑아요. 뭐가 다 성취될 것 같은 느낌이에요. 안 그래요? 그렇죠? 그래서 저는 제가 뒤에 서 있어서 여러분들을 못 볼 것 같지만, 저는 느낌으로 다 알아요. “오늘 보살님들이 기도를 열심히 했구나. 조는 보살님도 있겠구나.” 가끔 졸기도 해야 돼요. 그러니까 눈 감아주고 못 본 척하고 그렇게 지나가야지, 스님네들도 기도하기 편하지. 편안한 게 부처님이잖아요. 그러니까 보살님들이 그걸 다 이렇게 감안해 가지고 열심히 하시면 돼요. 왜 조는 분들도 계시고 앉아 있는 분들, 절집에는 누구나 다 있는 거예요. 어디 대들보만 중요한 건 아니잖아요. 서까래도 중요하고, 뭐 이렇게 주춧돌도 필요하고, 다 필요한 거예요. 그러니까 함께 어우러지는 게 우리가 사는 삶의 세상이에요. 그러니까 맨날 생활하는 게 그대로 기도여야 되고, 기도하는 게 그대로 생활이어야 돼요. 매일 먹는 음식이 그대로 약이듯이 여러분들이 이렇게 살아가는 그 모습이 그대로 기도여야 되고, 모든 게 다 법이어야 돼요. 내가 하는 거는, 어떤 분들은요, 사법을 좋아해가지고 족집게 말만 들어요. 족집게, 과외 족집게도 있는데, 우리는 족집게 말 들으면 안 돼요. 정법을 믿어야지. 세상에 살아가는데 정법 만나기 어렵고, 또 뭐 만나기 어렵죠? 사람 몸 받기 어렵다고 그러죠. 지금 쭉 이렇게 열심히 해야지, 그래도 인도에 태어나는 거예요. 욕심을 너무 많이 내면 축생도에 떨어져요. 육도 윤회가 내 몸에 다 있는 거예요. 극락이 멀리 있는 게 아니고 바로 내 몸속의 극락이에요. 내가 어떤 마음을 쓰느냐에 대해서 ‘저 사람은 육도 윤회하겠구나.’ 눈에 나타나요. 자꾸 탐심 부리고 욕심부리고 그러면 그게 벌써 눈에 나타나가지고 “아이고 저러면 안 되는데 ” 딱 보이잖아요. 내가 지금 현재 하고 있으면 내생의 그림이 나오는 거예요. 전생에 뭘 했는가 보면 금생에 보면 알고, 기도가 열심히 잘 되면 전생에 독경을 많이 한 거예요. 부처님 경전을 많이 본다든지 법문을 많이 듣는지 하면은 금생에 공부가 쑥쑥 잘 되고, 노래는 안 배워도 알잖아요. 전생에 익힌 게 노래니까. 그렇듯이 우리도 노래만 익힐 게 아니라 경전도 잘 보고, 다 모든 게 실제로 내 실천하는 데 그게 도움이 돼야 돼요. 살아가는데. 그래야 되겠죠. 여러분들은 다 그런 것 같아요. 저는 보면은 진관사 신도는 누가 봐도 ‘아, 이래서 진관사 신도구나, 이래서 진관사 스님네들이구나.’ 물물이 각득기소(物物各得其所)예요. 우리가 수처작주 입처개진(隨處作主 立處皆眞), 각각 그 곳에 따라서 다 그게 진실되고 참되는 거예요. 그래서 살아가면서 그 하는 역할이, 담당이 달라요. 마치 학교에서 국어 선생 역할, 수학 선생 역할, 영어 선생 역할이 있듯이, 수학 선생이 다 하는 건 아니잖아요. 초등학교에서는 다 해요. 한 선생님이 다 가르쳐요. 초등학교 때는. 그렇지만 전공 분야가 중학교 오면 다 다르다는 거예요. 그래서 왜 진관사는 종교를 넘어서느냐 하면은, 내 안에 주님이 있어도 상관없고, 내 안에 부처님 있어도 상관없고, 내 안에 공자님이 있어도 상관없고, 내 안에 무슬림이 있어도 상관없는 거예요. 어떤 걸 믿느냐에 따라서 각각 학교에 담임 선생님이 다르듯이, 영어 선생, 과학 선생, 수학 선생, 물리 선생이 다르듯이, 선생님이 다르다라고 생각하면 되는 거예요. 배타적으로 생각하면 안 돼요. 그러니까 다 포용해야 되겠죠. 바닷물이 다 포용하듯이 개울물도 받아들이고, 흐린 물도, 흙탕물도 다 받아들이잖아요. 마찬가지예요. 우리는 한 곳으로 집중적으로 하셔야 돼요. 그래서 오늘 이렇게 동지 팥죽 드시고 모든 사람이 함께 행복해지기를 마음속으로 기도해야 되겠죠. 가족뿐만 아니라, 지금 참 세상이 어렵다 하잖아요. 어렵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우리는 정말 하늘에 거스르지 않는 사람은 정말 이거는 살아가는데 순경계가 되고, 하늘을 거스르면 역이라 그러죠. 망한다고 그러죠. 그래서 누가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서 이게 세상이 달라지는 거예요. 그러니까 좋은 생각 내면은 앞으로 모든 일이 다 좋아질 것 같은 긍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어렵다 하지 마시고, 어려운 것을 능히 극복해 가지고, 이 모든 난관을, 다 어려운 걸 바꾸면은, 어렵다 보면 쉬운 게 오고, 내리막길이 있으면 오르막길이 있죠. 어려운 게 있으면 또 쉬워지는 거예요. 살아가는데 여러분들은 다 경험자시잖아요. 10대 다르고, 20대 다르고, 30대 다르고, 40대 다르고, 50대 다르고, 60대 다를 거예요. 여러분들은 20대가 아니에요. 그렇죠. 20대가 있나? 없죠. 30대 이상인 것 같아요. 그래서 80, 90 된 분들도 계셔요. 여기 다 노보살님들 열심히 기도 따라 하잖아요. 어떤 때보면 그분들이 존경스러워요. 그래서 이분들은 기도가 그냥 허투루 되는 게 아니에요. 와서 앉아가지고 그냥 있는 게 아니고, 막대기가 아니에요. 우리가 그러잖아요. 보통 경전에서 <종일수타보(終日數他寶) 자무반전분(自無半錢分)>이라 그래요. 은행의 직원이 아무리 돈을 세도 자기 게 되는 거예요? 안 되는 거예요. 마찬가지예요. 우리도 남의 걸 자꾸 세면은 안 되는 거예요. 내가 직접 세서 내가 갖고 있어야지만 그게 내 돈이 되고, 내게 되는 거지. 그렇듯이 자기가 실제로 실천해야 되는 거예요. 그래서 불교의 종교는 진리가 중요도 하지만은 실천이 가장 중요해요. 그래서 실천이 진리를 증득하는 유일한 기준이라 그랬어요. 그래서 우리는 보현의 행과 문수의 지혜를 갖춰야 되겠죠. 그래서 양족존(兩足尊)이 돼야 되듯이, 복덕과 지혜가 갖추어지면은 살아가는 데 아무 고생이 없는 거예요. 자꾸 안 되는 걸 억지로 추구하다 보니까. 보살님들이 이렇게 하다 보면 내년에, 다음에는 박사 되는 거예요. 왜냐하면 경전을 많이 독송하고 기도를 열심히 하셨기 때문에, 내생에는 더 훌륭하고, 더 이렇게 반듯하고, 모양이 좋아지는 거예요. 그걸 인과를 아셔야 돼요. 그걸 아주 믿지 않으면은, 인과법을 믿지 않으면, 그건 불교도 아니에요. 그러니까 인과를 꼭 믿어가지고, 내가 지은 바 내가 받는 거예요. 자업자득이란 말, 맨날 어르신들이 하시잖아요. 법문 들어보면 자업자득이라는 말 없는 게 없어요, 인과 법문에. 그래서 내가 열심히 하면은 모든 게 이루어진다는 거. 여기서도 오늘 <해 짧아 덧이 없고 밤 길어 지루하다> 그랬죠. 해 짧아서 덧이 없고 밤 길어 지루하다지만, 지금은 우리는 밤이 길어서 지루하다는 생각은 안 가질 것 같아요. ‘그냥 밤이 길고 밤이 또 길어지면 또 짧아지겠지’ 하는 게 있는 거예요. 동지가 작은 설이라는 말 들어보셨죠? 뭐를 잡수셔야지 한 살 더 먹어요? 새알심. 90된 사람은 90개 먹으면 절대 안 돼요. 제가 십진법으로 나누라고 그랬잖아요. 90된 사람은 9개만 드시고, 50대는 5개, 10대는 10개 먹어야 돼. 10대는 10개 먹어도 돼요. 옛날에는 젊은 저희들 때는요, 어른스님네들이 하시는 말이 너무 많이 먹고 소화 잘 되니까, “니네들은 돌을 씹어도 다 소화된다” 하더라고요. 그래서 그게 무슨 말인지 몰랐는데, 가만히 생각하니까 ‘젊은 사람들은 뭐를 먹어도 배탈 안 나겠구나’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그러니까 그때는 소화가 다 됐는데 지금은 안 되니까, 많이 잡숴서 괜히 절에 가서 새알심 먹고 목매서, 뭐 아파가지고 병원에 가면 안 되잖아요. 절에 가더니 영험이 없다 그래요. 그럼 영험이 있으려면 적당히 알아서 잘 드셔야 돼요. 그게 바로 지혜예요. 그러니까 잘 드셔야 돼요. 오늘 아직 점심 안 드셨죠? 이따 가서 점심 드실 때 곰곰이 생각해서 내가 몇 개를 먹어야 되는가는 본인이 판단하셔야 돼. 너무 많이 잡숴도 안 되고 조금 잡숴도 안 되잖아요. 적당히 잡수면은, 사실은 적당히라는 게 우리가 참 어려운 거거든요. 옛날에는 음식 만들 때 그람 수를 안 달았어요. 어머님들이 집밥 할 때 뭐 적당히 이렇게 넣고, 참기름 조금 넣고, 깨소금 조금 넣고, 소금 조금 넣고, 조물조물 무치면 그게 다 맛있는 거예요. 그랬었는데 요새는 그람 수 따라가지고, 뭐 해가지고, 뭐 해줘 하다 보니까, 욕심이 꽉 챙기니까 음식이 기교가 많으니까 맛이 없어지는 거예요. 담백하고 단순하게 생각하고 해야지, 사람이 살아가는 데 불편치 않은 거예요. 생각이 복잡하면 번뇌 망상이 일어나잖아요. 그렇죠. 번뇌 망상이 없어야지 기도가 잘 되는 거예요. 자꾸 기도하면서 딴 생각하면요, 그건 기도가 자꾸 떨어지는, 자꾸 자꾸 바꿔지는 거예요. 일념으로 돼야 되겠죠. 제일 좋은 게 아미타불도 되고, 관세음보살도 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일념으로 기도 열심히 하자. 다른 것도 좋지만, 물론 법문도 많이 들어도 좋겠지만은, 듣는 거를 갖다가 실제로 실생활에 실천하셔야 돼요. 그걸 갖다가 이분화시켜가지고 아예 법문은 법문이고, 나는 그냥 나대로 그냥 살아가자 하면은 조금 덜 될 것 같아요. 성취가 좀 덜 될 것 같은 느낌이 듭니다. 그렇게 생각하시죠? 그러니까 오늘 팥죽 드시면서 좋은 마음, 좋은 생각 나면 그대로 좋아지는 거예요. 팥죽에 대한 시 한번 보세요. 이거는 이조시대 때 이응희라는 분이 지은 시인데요. 팥죽(豆粥) 復月霜雪至(복월상설지) 동짓달에 서리 눈이 내리니 田家寒事畢(전가한사필) 농가에는 월동준비를 마쳤다.瓦釜明豆粥(와부명두죽) 오지솥에는 팥죽 끓는 소리食之甘如蜜(식지감여밀) 먹으니 그 맛이 꿀처럼 달구나 李應禧(이응희“옥담유고”에서) 복월상설지, 다시 부자로 할 때는 그렇고, 반복할 때는 복자예요. 동짓달에 서리 눈이 내리니까, 참 오늘 적절한 시죠. 눈이 내렸잖아요. ‘동짓달에 서리 눈이 내리니 농가에는 월동 준비를 마쳤다.’ 농가의 월동 준비는 다른 게 아니에요. 참 농사를 잘 지어가지고 저장해놓은 거예요. 춘생, 하장, 추수, 동장(春生, 夏長, 秋收, 冬藏)이에요. 봄에는 씨 뿌리고, 여름에는 싹이 트고, 이렇게 잘 자라고, 가을에는 거둬들이고, 겨울에는 저장해가지고, 또 그다음에 또 이렇게 또 해서 춘생하장 추수동장, 춘하추동이라는 말이 그 말이에요. 춘생, 하장, 추수, 동장의 준말이 춘하추동이에요. 사계절이 뚜렷하죠. 그래서 우리나라가 얼마나 정말 다른 나라에 비해서 아주 조그마한 반 덩어리밖에 안 되는 나라지만은, 요새 아주 유명하잖아요. 좀 나라가 어수선해서 좀 그렇지만은, 그전에는 활발했었어요. K-pop, k-음식, k-명사, 요새는 명상도 k 자 들어가잖아요. 안 그래요? 한국의 준말이 케이잖아요. 코리아니까. 그게 한국이니까 요새는 또 이 5분 명상이요. 10월 24일날 유엔에서 12월 21일 오늘을 명상의 날로 제정했어요. 너무 좋죠. 그러니까 오늘 명상의 날이에요. 아까 명상을 1분도 안 하더라고, 보니까. 죽비 칠 때 한 2분은 해야 되는데. 그러니까 그걸 감안해 가지고 한 30분 법문하면 1분 하면 딱 맞아요. 30분 법문할 때는. 그런데 이렇게 조금 치다가 50초 되니까 끝이더라고. 왜냐하면 하나, 둘, 셋, 넷, 참선할 때요. 이게 딱 좌정이 안 될 때는 숫자를 우리가 수식관을 해요. 그래서 저는 제가 이제 경험담을 말씀드리는 건데, 유치원 꼬마들한테 “자, 참선하자” 하면 애들이 참선이 뭔지 몰라요. “명상하자” 하면 알아요. 그래서 “숫자 세보자” 입으로 뻐끔뻐금하지 말고 손으로 10번 하면 10초예요. 10초만 하자 하면, 지네들이 10번 알아서 세더라고. 제가 그때요, 98년도부터 이제 유치원 하다 보니까 그런 걸 애들한테 가르쳐 주니까 “자 앉아서, 자 하자” 그러니까, 너무 애들이 자비롭고 지혜롭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손으로 지네들이 하더라고요. 그래서 이게 수식관인데, 걔네들은 벌써 터득을 했어요. 그래서 색향미 할 때 차를 마실 때 색향미 하잖아요, 색을 보잖아요. 색깔이 좀 푸르스름하죠. “자, 그럼 향기 맛보자” 하면 그냥 있어도 향기가 들어가는데, (코로 들이마신다). 향기 맡아 맛보자면 꿀꺽 하지 말라니까요, 애들이 너무 잘하는 거예요. 유치원 꼬마들이. 그래서 요새는요. 옛날에는 진짜 우리는 그런 걸 잘 터득을 못했는데, 요즘 그게 벌써 30년 전 일인데도 그렇게 하더라고요. 요새는 애들이 다 노래도 잘하고 다 하잖아요. 그게 전생에 많이 익힌 것 같아요. 그래서 이렇게 차도 다도 할 때도요. 왼손에다가, 왼손 이렇게 한번 내보세요. 차 마실 때 그냥 꿀꺽꿀꺽 마시지 말고, 왼손에다가 차를 찻잔이라고 생각하고 이렇게 손을 올려보세요. 손을 올려가지고 그래서 이렇게 차 올리면은 이걸 이렇게 감싸듯이 해가지고 이렇게 마셔야 돼요, 다도할 때. 다도 하는 거는, 차를 마시는 건 마음을 나누는 거예요. 우리가 이렇게 살아가면서 마음 나누는 게 가장 좋잖아요. 최고의 양념이 마음이듯이, 이 세상의 마음이 중요해요. 일체유심조라는 말 들어보셨죠? 그래서 마음이 마음, 마음 아무리 찾아봐도 없지만은, 그 마음은 다 내 속에 있는 거예요. 몸의 주인은 마음이죠. 마음의 스승은 몸이에요. 그러니까 몸과 마음이 떨어져야 돼요? 불가분의 관계예요. 불가분의 관계. 같이 이렇게 어울려져야 돼요. 몸 따로, 마음 따로 하면 이건 안 되는 거예요. 마음으로 생각하면서 몸은 엉뚱한 짓 하면 그건 이념 두 분파로 나누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일념으로 항상 우리는 일념을 생각하면서 몸 따로 마음 따로 갖지 말고 같이 가자 이 얘기예요. 그래서 열심히 하셔야 돼요. 그래서 농가에는 월동 준비를 마쳤다. 농가의 월동 준비는 추수동장이에요. 추수해 가지고 다 거둬드리고, 다. 절집에서 월동 준비는요, 김장하는 거예요. 여러분들도 마찬가지잖아요. 옛날에는 기름 안 때고, 이렇게 도시가스 이런 거 없을 때는, 연탄 날랐잖아요. 그렇죠. 60년대는 다 연탄이 집에다 수북수북 쌓이면 그게 월동 준비예요. 그래서 있는 집에는 연탄이 한 2~300장 되고, 없는 집은 하루하루 이렇게 사가지고 이렇게 갖다 놓더라고요. 그래서 그걸 연탄을 보고 “아 이 집이 좀 부자구나,” 안 부자인 걸 알 수 있듯이, 요새는 집 크기 보고 알죠. 그건 의미가 없는 거예요. 조그마한 집에서도, 옛날에 유마경에 보면요, 한 평에서도요. 몇백 명이 거기서 있는 거예요. 저는 항상 그러잖아요. 콩알이 한 개 있어요. 남았어요. 왜 남았겠습니까? 왜 남았죠? 양보하니까. 안 먹고 돌리고 돌리고 하니까 콩알이 그대로 남는 거예요. 금방 바로 먹으면은요. 모자라요, 모자라잖아요. 그렇지만은 서로 양보하고 이렇게 근면 절약하고 그러면 그게 다 남아 돌아가는 방법이에요. 그러니까 뭐든지 아끼고 근면 절약해야 돼요. 펑펑 쓰면 안 돼요. 석유도 옛날에 그러잖아요. 어른스님네들이 석유도 안 나는 나라에 전깃불은 맨날 켜놓고 가면, 이렇게 그 어른스님네들은 그걸 다 끄더라고요. 그렇지만 또 킬 때는 키셔야 돼요. 아낀다고 해가지고 부자 되는 건 아니니까, 그냥 적당히 잘 알아서 하는 것도 지혜로운 일이라는 거. 그러니까 지혜롭게 생활해야 되겠죠. 그렇게 합시다. <오지솥에는 팥죽 끓는 소리> 우리가 변덕스러울 때 용덕이 엄마 팥죽 끓듯이 변한다 그래요. 변덕스럽다 할 때 표현력이. 그렇지만은 팥죽은 끓어야 돼가지고 동동동동 떠요. 새알심이 동동동 떠야지 그게 새알이 잘 익는 거예요. 가라앉아 있으면 안 떠요. 그래서 그런 걸 어떻게 증명하냐면은 큰 양재기 같은 데다 찬물을 떠 넣어 보세요. 그럼 새알이 익었나 안 익었나 볼 때는 새알을 거기다 똑 떨어뜨리면 동동동 뜨면 새알은 너무 잘 익었구나, 가라앉으면 안 익은 거예요. 그런 것도 아셔야 돼요. 옛날에 어머님들은 다 그런 걸 아셨어요. 그래가지고 만두 삶을 때도 만두를 큰 그릇에다 넣고 찬물 넣고 만두를 딱 넣으면 동동 뜨면 “만두가 너무 잘 익었구나” 이런 말씀을 하셔요. 그렇지만 넣었다 바로 가라앉으면 만두가 덜 익은 거예요. 그럼 다시 꺼내서 쪄야 되겠죠. 삶든지. 그게 지혜, 생활의 지혜예요. 여기서도 보니 오지 솥에는 팥죽 끓는 소리. 먹고 싶죠. 얼른 법문 끝나고 공양하러 가세요. 먹으니 그 맛이 뭐하구나? 우리가 꿀처럼 달다는 얘기는 맛있다는 표현력이에요. 여기 보면은 빨리 팥죽 먹고 싶은 생각 내잖아요. 그래서 이응희라는 사람이 <옥담유고>에다가 이렇게 써놨어요. 우리가 수륙재 때 두죽 올리는 거, 팥죽을 두죽이라 그래요. 상단에는 10탕기, 중단에는 다섯 탕기, 하단에는 몇 탕기, 이렇게 하는데, 그래서 두죽이라는 시를 한번 써놨어요. 동지의 유래 한번 보세요. 동지 유래. 동국세시기(東國歲時記)는 우리나라에 그 세시기에서, 계절 따라 하는 걸 세시기라고 그러고, 형초세시기는 중국 세시기예요. 동국세시기에 보면은 11월 음력, 12월달이 음력으로는 11월이에요. 동짓달이니까. 동지섣달 하면 섣달은 음력으로 몇 월달이에요? 12월달이죠. 또 올해는 12월달에는요. 동짓달 11월 초하루가 있고, 섣달 초하루가 같은 달에 있어요. 내년에 6월이 윤달이 들기 때문에, 다른 때는 12월 22일이 동지인데 올해는 21일이에요. 그리고 다른 때는 입춘 날이 2월 4일인데, 올해는 2월 3일이에요. 윤년이 있다 보니까 그렇게 밀려서 나간 거예요. 여러분들도 착각하지 마시고, 2월 3일날 오셔가지고 입춘기도 회향하세요. 그래서 우리는 1년에 몇 번 설을 쇠죠? 네 번 쇠죠. 동지가 작은 설, 양력 1월 1일 설, 음력 1월 1월 설, 입춘을 마지막 설로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오늘 동지는 24절기 가운데 스물두 번째예요. 그러면 두 번째고 그다음에 소한, 대한하면 끝나요. 소한, 대한하면 몇 절기? 24절기예요. 소한, 대한. 옛날에 그랬잖아요. 소한 추위가 대한 추위를 이겨본다고. 소설, 대설은 끝났으니까 이제 소한, 대한만 끝나면 “야 이제 봄이다.”했어요. 11월 동지조(冬至條)에 보면은 동짓날을 아세(亞歲), 작은 설, 아자는 작다는 거예요. 아형하면은 작은 형이에요. 대형하면은 큰 형이고. 아자는 작은 이런 뜻이에요. 아세라하고. 팥죽을 쑤는 데 찹쌀가루 가지고 새알 모양의 떡을 만들어 가지고, 팥죽 속에 넣어서 새알심을 만들고 꿀을 타가지고 시절 음식으로 삼았고, 이거는 동국세시기에 보면은 이렇게 나오는데, 팥죽을 문에 뿌려가지고 상스럽지 못한 것을 제거하는데. 여기서는 축귀, 벽사의 뜻, 나쁜 기운을 막아주는 역할이 팥이에요. 그래서 팥을 뿌리고 우리가 또 뭐 할 때? 점안식을 할 때도 팥을 뿌리죠. 개업식 할 때도 팥을 갖다가 해요. 그래서 좋은 기운이 들어오라는 의미에서 팥은 붉은색은 양기의 뜻이에요. 붉다는 거는. 그런 의미도 되고 또 여러분들이 또 이렇게 보면은 손톱에다 뻘건 거 칠한다든지, 입에다 이렇게 칠하는 거는 ‘나를 갖다 함부로 하지 마시오’ 하는 그런, 태권도 배우는 거는 내 몸을 갖다 막는 거잖아요. 호신술을 쓰듯이 내 몸을 막는 호신의 상징이에요. 이런 것들이, 뻘건 색깔도. 근데 여기 보면은 형초세시기에 보면요. 공공씨(共工氏) 성이 두 자예요. 제갈 씨도 있고, 황보 씨도 있고, 공공 씨는 두 자예요. 김 씨, 이 씨, 박 씨는 외자 한자잖아요. 성이요. 근데 공공 씨의 아들이, 집에 보면은 꼭 한 명이 좀 말썽쟁이가 있는가 봐요. 공부 조금 못하는 사람도 있고. 똑같은, 손 길이가 다 똑같지 않잖아요.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이렇게 된 것도 있듯이, 요 공공 씨의 아들이 공부도 못하는 데다가, 말썽을 자주 피우고, 재주를 하도 못하니까 동짓날에 죽어가지고 역귀신, 역귀신(疫鬼神)이 전염병 옮기는 그런 귀신이 된 거예요. 그래서 하도 그 전염병이 안 끊어지고, 하도 사람이 많이 죽어 나가니까 이 공공씨, 그러니까 이 죽은 아들의 아버지가 잘 맞추는 사람한테 물어봤는가 봐요. 족집게, 이제 요새 말하면 족집게분한테 물어보니까 팥을 쒀가지고 그거 뿌리면 전염병도 없어지고 참 좋다고 하니까 그렇게 하니까, 이때 당시에 이제 생전에 팥을 좋아하지 않았는데 팥을 쒀가지고 사방에다가. 저희들도요. 사방에다 오늘 다 팥을 뿌려가지고 구석구석에다 조금씩 뿌렸어요. 액땜 같은 거 나쁜 기운 들어오지 말고 좋은 기운만 들어오는 의미에서 그렇게 해요. 중국의 풍속이 우리나라에 들어와가지고 동짓날 동지죽을 쑬 뿐만 아니라 벽에 뿌리는 풍속이 그때부터 생겼다라고 형초세시기에 나와요. 여러분들도 팥죽 드시고 액막이도 하시고 좋은 일만 있고 무탈하라는 의미에서 팥죽도 드시는 거예요. 그리고 한국 동지의 풍속 가운데 어떤 게 또 있냐면은, 그 공공씨의 아들이 이렇게 말썽을 부려서 죽으니까 팥죽 뿌려가지고 축사의 역할도 했는데, 주나라에서부터는요, 동지를 설로 삼았다 했어요. 그래서 역경의 복괘(復卦)를 보면은 11월, 자축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 해가지고, 자축 11월달을 여기서 보면, 동짓달부터 생명과 광명의 시작점. 동지부터 조금 밝은 기운이 들어온다는 의미에서 여기서부터 이제 자월이라 그래요. 그래서 양시생지일(陽始生之日)이라 그랬죠. 저기 ‘동지는 명일이라 일양이 생하도다’ 하고 그것하고 비슷한 거예요. 그래서 다음 해가 시작되는 날이라 해가지고, 팥죽에 넣는 옹심이를 나이 수만큼 뭐예요? 먹는 풍속도 있다 그랬죠. 그래서 팥죽을 먹어야 진짜 나이를 삼는데 적당히 드시라고 그랬죠. 아까 제일 처음에. 왜냐하면 많이 드셔가지고 얹혀가지고 또 속 끓일까 봐 적당히 드시라는 얘기예요. 그래서 그런 내용도 있고 우리는 항상 비우면 편안해요. 뭐든지 비우면은 비우면 편안하고, 내려놓으면 가뿐하고, 들고 있으면 묵직하잖아요. 집착이 병이라고 하는 말 들어보셨죠? 그건 자꾸만 이렇게 내려놓지 않고 자꾸 들고 있으려니까 그게 병이 되는 거예요. 그럼 딱 내려버리면은 가뿐하고 나누면은 뭐 해져요? 행복해지죠. 그러니까 팥죽도 나눠 먹어 저희들이 나눔과 베풂에 그런 공덕의 음식이 바로 팥죽 이런 나눔의 행사예요. 그래서 팥죽도 이렇게 여러분들 오늘 가실 때 팥죽 가지고 가세요. 달력도 가지고 가시고, 항상 이렇게 드시고 좋은 일, 무탈하시는 걸 마음속으로 기원하세요. 그래서 동짓달을 시작 달로 삼는 역법에서 비롯된 유습이라고 하는데, 사실은 정월달을 인월이라 그래요. 인묘진사오미신유술해자축 그러는데 정월달은 인월이고 마지막 축이 12월달이래요. 축. 인묘진사오미신유술 해자축 해서 자자는 무슨 날이에요? 동짓날이죠. 아까 자월이라 그랬죠. 그게 동짓달이에요. 그럼 섣달은? 축월이에요. 축월. 그래서 그렇게 해서 우리가 이제 쭉 자월은, 동짓달은 새해가 들어오는 해다. 그때부터 이제 점점점점 밝은 기운이 들어온다 이렇게 보시면 되고요. 한국의 동지 풍속은 신라시대 때 성덕 여왕 때 내용이에요. 황룡사에서 예불을 드리고 있는데 무슨 사람이, 지귀, 땅 지자, 귀신 귀자예요. 이름도 묘하잖아요. 귀신같이 생겨가지고 자꾸 홀리고, 선덕여왕을 뵙고 싶어 했어요? 지금 같으면 경호원들이 많아 가지고 범접도 못하는데 그때 당시에는 뭐 경호원들이 있다 해도 보통 사람으로 취급하니까 이제 자꾸 뵙기를 원하니까, 그 밑에 사람들이 그럼 황룡사 9층탑 앞에서 기다리라고 했어요. 그럼 기다려야 되는데 이 사람은 어떻게 됐어요? 못 기다렸죠. 예불 시간을 못 기다려, 보니까 아까 공공씨 아들이 심술 내고 공부도 못하는 그 애가 동짓날에 죽었듯이 여기도 마찬가지예요. 죽은 지귀가 남의 집과 재산 태우는 귀신 됐어요. 아까는 전염병 돌리는 귀신이었는데, 공공씨 아들은. 또 이 지귀는 뭐예요? 남의 이렇게 가옥을 태운다든지 집 태우는 지귀가 됐잖아요. 그렇죠. 집과 재산을 태우는 지귀가 되어서 이게 좋은 귀신이에요, 나쁜 귀신이에요? 나쁜 귀신이에요. 귀신도 좋은 귀신이 있고 선신이 있는데 이는 악귀가 됐어요. 그래서 이 팥죽을 쒀가지고 악귀를 막아야 되겠죠. 그래가지고 팥죽을 쒀가지고 악귀를 막는다 해서 축귀와 벽사의 이런 삿된 기운을 없앤다는 의미에서 팥죽 쑤어가지고 마당에다 뿌리고 이렇게 하는 거예요. 그래서 팥죽을 쑤어서 옛날에는 사당에 올려가지고 제사도 지냈다 그래요. 지금은 그런 건 없지만은, 방방마다 떠놓고 나쁜 기운 물러가십시오 하는 그런 민속 신앙이 있었어요. 또 다음에 보면은 동짓날 축귀 이야기가 있어요. 부산에 조그마한 마하사라는 절이 있었어요. 나한님이 입술이 빨개진 연유를 이제 말씀드리는 거예요. 부산 마하사에 있던 설화예요. 이제 이 마하사에 공양주가 팥죽을 쑤면 미리 이제 팥을 걸러야 되겠죠. 또 새알심을 만들어야 되겠죠. 그래가지고 고단하다 보니까 좀 늦잠을 잤어요. 주지 스님께서 기도하고 나와가지고 마지 올릴 때가 됐는데도 마지도 안 오니까, 이제 공양주 방에 가서 문을 두드리니까, 이 보살이 깜짝 놀라는 거예요. “스님 제가 시간을 못 맞춰서 죄송합니다.” 하고 막 후다닥닥 내려가 가지고 이제 부엌 아궁지에 보니까 불씨가 없는 거예요. 옛날에는 우리가 불씨를 화로에다 넣고 재를 덮어놓으면 불씨가 나와서 그걸 불쏘시개로 쓰잖아요. 여기도 아궁지에다 불쏘시개가 없어진 거예요. 그러니까 너무 당황해가지고 “스님 조금만 기다리십시오. 제가 밑에 김 처사 집에 가가지고 불씨 가지고 와 팥죽 쒀가지고 잘 올려드리겠습니다.” 하고 이제 스님한테 말씀드렸어요. 그래 밑에 김처사 집에 막 가서 “우리가 이렇게 팥죽을 쒀야 되는데 제가 늦잠 자가지고 이렇게 돼서 불을 좀 주십시오.” 하니까 이 김 처사가 하는 말이 “무슨 말씀하세요? 아까 마하사 행자인지 동자스님인지 몰라요. 행자님이 와가지고 불씨 가져가면서 우리가 팥죽 쑨 걸 한 그릇 드시고 가셨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너무 이상해가지고 막 올라가 보니까 아궁지에 불쏘시개가 있으면서 팥죽이 끓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깜짝 놀라서 팥죽을 쑤어가지고 다시 이제 마지 불기에다 대웅전 부처님한테 올리고, 또 이제 한 불기 담아가지고 나한전에 갖다 올리려고 딱 올려놓고 절을 세 번 하는데 한 나한님이 입술이 팥죽을 먹은 입술이 불그스레 보이는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깜짝 놀라서 죄송스러워 “아우 죄송합니다.” 같이 눈이 마주쳤어요. 그러다 보니까 아 나한님이 팥죽을 그 밑에 김처사 집에 가서 이렇게 드시고 와가지고, 그러니까 신통력으로 그렇게 하신 거예요. 그러니까 이 보살님도 너무 당황한 데다가 자기가 열심히 살다 보니까 그런 좋은 일이 생겼다는 거에요, 그래서 나한전에는요. 모든 일을 갖다가 민원을 해결시켜주는 것이 나한전이에요. 나반신통세소희(羅漢神通世所稀) 말도 있고, 그래서 각단에서는 저희들은 많이 오래 가 있지 말라고 그래요. 왜냐하면 나한님들은요. 나한님이나 이렇게 산신님이나 칠성님은요, 인(人)냄새를 싫어해요. 그렇기 때문에 절하고 바로 와야 되는데 어떤 사람들은 거기 가서 끝까지 기도한다고 그러는데, 그걸 몰라서 그렇지. 진관사는 옛날에 500 나한 도량이었었어요. 나한 도량은요. 철저히 안 하고 수행 안 하면요, 장애가 많이 일어난다고 그랬어요. 그래서 직원이라든지 스님네들도 좀 저기한 사람들은 자기네가 알아서 이렇게 다 정리되더라고요. 요새는 기도를 너무 잘하고 열심히 하니까 나가는 사람도 별로 없고, 들어오는 사람도 이렇게 좋은 사람만 다 들어오는 거예요. 신도님들도 기도만 했다면 성취되는 게 바로 이 절이에요. 그래서 저는 그러잖아요. 아무 생각하지 말고 열심히 하면은 가피가 이루어진다. 가피라는 건 느끼는 사람의 몫이에요. 미래는 준비하는 사람의 몫이고. 현재 일을 보면은 그 사람 미래가 보이는 거예요. 공부 안 하면 저 사람은 좋은 대학은 못 가겠다. 그렇지만 건강하면 돼요. 공부가 전부는 아니기 때문에 그렇지만 지혜로워야 되잖아 또. 그 속에서도 망나니짓 하면 안 되잖아요. 공공씨 아들처럼 그렇게 돼 가지고 역질병에 걸려가지고 전염병 돌리는 돌림병자가 되면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우리는 좋은 생각 내고, 좋게만 생각해야 되겠죠. 또 여기에 보면은 또 무착문희선사 얘기도 나오죠. 무착 선사. 동짓날 팥죽의 이야기. 이거는 선사상에 대한 설화를 말씀드리는 거예요. 중국의 무착 선사, 여기 무착선사는요. 어디 도량이냐면 오대산 문수도량이에요. 우리나라 월정사도 문수도량이 있어요. 오대산 있죠, 월정사. 거기도 뭐 오대, 북대, 남대, 중대, 이렇게 있듯이 남대는 지장도량이고, 북대는 저쪽에 문수도량이고, 또 보궁도 있잖아요. 그런데 문수보살을 친견하고자 정진하였으나 아직까지 마음에 집착이 안 떨어진 거예요. 그래서 무착이에요. 그 법명을 그래서 집착 떨구라 없을 무자를 써서 무착이라고 지어놨을 수도 있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문수보살를 뵀는데도 문수보살를 친견 못하는 거예요. 이제 나중에 앙산스님 회상에 가가지고 공부가 되니까 문수보살이 보이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공부가 안 될 때는 문수보살이 보였어요, 안 보였어요? 안 보인 거예요. 마치 내가 공부가 안 되면 내가 깨달은지 안 깨달은지도 몰라요. 내가 허물이 있는지 번뇌 망상을 하는지도 모르는데, 공부가 잘 되면 번뇌 망상을 하는 줄 알아요. 내가 망상하고 있구나. 실컷 정근 하다 보면 딴 생각하면 망상이잖아. 그렇죠. 그것도 모르면 조는 거고. 근데 여기서도 마찬가지예요. 그래서 나중에 공부 열심히 하다 보니까 무착 선사가 정진하여 깨달음을 이루었어요. 근데 이제 동짓날 팥죽을 쑤는데 누가 나타났어요? 문수보살이 나타나니까 확 갈겼어요. 깨닫지 못했을 때는 문수보살을 막 찾으려고 애썼는데, 자기가 문수 이상의 깨달음을 얻었으니까 문수가 나타나든지 뭐든지 딱 하면서 “문수는 문수고, 나는 나일 뿐이다”라고 해서 깨달음의 경지를 표현한 거예요. 그래서 옛날에는 어땠는 줄 아세요? 팥죽을 많이 쑤다 보니까요. 스님 네들이 사찰 자랑하려고 “우리는 얼마나 가마솥이 큰지 배를 타고 젓는다”고 그랬어요. 뻥이 좀 센 거잖아요. 근데 진관사는요. 가마솥이 아니어도 이런 솥에다 수십 솥을 쒔어요. 18일부터 18, 19, 20, 21일까지 나흘 동안 팥죽을 쒀가지고 다 관공서라든지, 이런 데 차상위계층의 그런 데 다 돌렸거든요. 여러분들도 드시면 한 500명 하고 저 사람들 몇 천 명에서 10가마 쑤잖아요. 팥 열 가마, 옹심이 해가지고 뭐 몇 며칠을 옹심이만 네 가마 만들어 가지고 한 이틀 동안 나흘 동안 해서 하루에 두 말씩 해가지고 이렇게 다 돌리니까 잘 돌아가는 거예요. 그래서 나눔과 비움 이런 거 잘 아셔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자비롭게 나누고, 다 같이 자비롭게 나누고, 지혜롭게 배우고, 행복하게 채우고, 아름답게 동행하자. 지금 2024년 12월달이니까 얼마 안 남았잖아요. 25년 되면은 여러분들도 다 행복한 나날이 되어야 되잖아요. 그 좋은 날을 이렇게 기도하고 이렇게 염원하면요, 다 이루어지는 거예요. 내 혼자만 잘 살려고 바득바득하면 그건 독각이에요. 다 같이 하는 거는 뭐예요? 보살이죠. 보살은 여러 사람들 같이 더불어 타는 게 큰 게 보살이고, 혼자만 하려고 애쓰는 거 그건 독각이라고 그러잖아요. 그러니까 혼자만 하려고 하지 말고 다 함께 더불어서 부처님 돼야 되겠죠. 그때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란 말은 그런 의미예요. 그래서 막 옛날에는 비구스님네들이 특별히 그래요. 우리는 배 타고 막 저었다고 옛날에는 그런 말이 돌더라고요. 배 타고 젓지는 않아도 우리는 처사님들이 다 거사님들이 다 저어줬어요. 그래서 보살님들, 거사님들, 신도님들, 스님네들 정말 동지 동안 애썼다고 다 같이 (박수). 그래서 우리가 열심히 기도해요. 그래서 동짓날에 애동지에 팥죽 안 쓰고 뭐 중동지, 노동지 이렇지만은 지금 20일이니까 노동지에 가까운 거예요. 그러니까 집에서는 안 쒀도 이렇게 드시고 가시면 되는 거고. 그 동지불공하고 동지 기도의 의미가 뭐겠어요? 첫째는 지혜로워지기 위해서 기도하는 거죠. 나쁜 기운을 물리치기 위해서 또 팥죽 쒀가지고 드시죠. 밝은 기운을 불려들어가지고 양기가 생하도다 했잖아요. 그래서 성취하기 위해서 이렇게 기도하는 거고 곡물 중에서 팥은 뭣을 의미한다고 했어요? 밝은 기운이니까 광명진언이잖아요. 어두운 거는 무명이잖아요. 그러면 지혜는 밝음이고 자비는 따뜻함이에요. 우리가 자비로운 사람을 냉랭하다는 말 안 하죠. 온기가 있다 그러죠. 그러면 다 온기가 돌아야 돼요. 냉랭하면 안 돼요. 그 신도님들이 서로서로 이렇게 인사하면서 이렇게 해야지 뻘쭘해서 멀찌감치 이렇게 서로 보면 안 돼요. 보면 이렇게 화안보시하고 합장하고. 합장은 내 마음과 내 마음을. 처진 합장하지 맙시다. 스님네들이요. 위의가 불교, 위의가 바로 불교예요. 모습이 부처님같이 돼야 된다 얘기예요. 그래서 항상 그래 스님네들이 이렇게 모습도 단정하고 <내 모양을 보는 이나 내 이름을 듣는 이>는 다 무명 세계에서 벗어나야 되겠죠. 그래서 스님네들 보면 여러분들이 환희심을 내고 똑같이 ‘나도 스님과 같은 모습은 아니지만, 스님과 같은 수행자가 돼야 되겠다. 정말 참다운 수행자가 돼야겠다’ 하고 원을 세우면 참다운 수행자가 되는 거예요. 어떤 원을 세우느냐에 따라서 그 사람의 인격과 원이 갖추어지는 걸 꼭 명심하셔야 돼요. 예. 그래서 그 광명을 상징하고 반야지혜를 의미해서 팥죽 드시는 분들은 동짓날 긴긴밤 수행정진하는 의미를 통해가지고 반야 지혜를 얻기 때문에 항상 밝은 기운으로서 팥죽을 드시는 거. 두 번째는 뭐예요? 붉은 팥은 양의 기운을 상징해가지고 음의 기운인 나쁜 것을 물리치는 거잖아요. 그렇죠. 그래서 여러 가지 삼재팔난 모든 액막이를 다 막아주는 역할을 하기 때문에 기도를 열심히 하는 거. 그다음에 밝은 기운 불러들여가지고 성취한다고 그랬죠. 천체의 기운이 어둠의 그걸 지나가지고 밝음으로 점점점점 그래서 우리가 동지 지나면 노루 꼬리만큼 낮이 밝아진다는 거예요. 그래서 그동안에는 조금 이렇게 어두워졌는데 5시 조금 넘으면 어둡잖아요. 그래서 5시 20분이면 해가, 저희들 예불하는 시간도 거기에 맞춰가지고 예불을 하는 거예요. 점점점점 해서 정월 지나면은 이제 5시 40분에 기도한다든지 6시에 기도한다든지 여름 되면 6시 반에 한다든지 이렇게 해가지고 기도를 하는 거예요. 그거 맞춰서. 그러니까 우리가 좋은 날 팥죽 드시고 부처님께 올리는 동지 기도가 밝은 기운을 갖다 불러들이고 나쁜 기운 없애고 만사형통 여의길상 돼야 되겠죠. 자 불설소재길상다라니 딱 한 번만 해봅시다. 합장하고 자. <나모사만다 못다남 아바라지하다사 사나남 다냐타 옴 카카 카혜카혜 훔훔 아바라 아바라 바라아바라 바라아바라 지따 지따 지리 지리 빠다 빠다 선지가 시리예 사바하> 이건 재앙 소멸하고 복을 불러들이는 그런 좋은 기운이에요. 여러분들이 자동차에 올라 탈 때 항상 합장하면서 대방광불화엄경 대방광불화엄경 7번만 하시고 불설소재길상다라니 한 세 번만 하시면은 교통사고는 일어나지 않아요. 그러니까 항상 진언을 하셔야 돼요. 제가 하기 싫으면 <옴>이라도 하라고 그랬잖아요. 입 떨어지기 싫으면 <옴 남>도 하기 싫으면 옴이라도 하라고 그랬어요. 자 옴 한번 기운 여운을 길게 해가지고 염불 안 되는 사람은 기분 음이 옴이에요. 티베트 사람들 옴 하는 거 들어보셨죠? 그걸 딱 단전에다가 호흡을 맞춰야 돼요. 소프라노로 하면 안 돼요. 저희들은 중저음으로 바리톤으로 해서 내려야지, 배에서 나와야 돼요. 그래서 옴 해가지고 염불 안 되면 옴부터 시작하세요. 그래서 저는 항상 염불 안 되는 사람은 옴부터. 이게 쭉 오분만 가도 정말 호흡이 이렇게 잘 맞춰줘야 돼요. 수식관은 숫자 세는 거지만 호흡관은 호흡 날숨 들숨을 잘하면 병이 없는 거예요. 숨을 제대로 못 쉬니까 전식즉시내생(轉息卽是來生)이에요. 숨이 끊어지면 내생이에요. 그러니까 숨 잘 쉬는 운동해야 돼요. 그러니까 우리는 열심히 하면서 기도 정진하면서 내 2025년 무슨 해, 을사년이죠. 집에서 나쁜 기운이 돌 때는 뱀 사자 써가지고 딱 붙여놓기도 하고 액막이로 호랑이 그림을 해가지고 딱 막기도 하잖아요. 그래서 용은 복을 불러들이고, 호랑이는 액을 갖다가 쫓는다 그랬어요. 그래서 호랑이 민화의 호랑이 그림 그리는 게 그런 의미예요. 호랑이는 무슨 액막이 역할이에요. 그럼 용은 복을 불러와요. 좌청룡 우백호예요. 주지스님은 좌청룡이에요. 갑진이니까. 저는 경인 백호니까 우백호예요. 저기서 딱 막아 지켜주잖아요. 들어올 때. 그래서 아미타 부처님이 거기가 부처님이 계셔도 거기는 서방 극락국이지만은, 거기가 우백호예요. 여러분들 지켜주기 때문에 좌우가 대칭돼 가지고. 옛날에 춘성노스님이 그랬어요. 진관사는 이 성취봉이라고 그랬어. 응봉이라 그래요. 매봉이라고 그러기도 하고. 봉이 매같이 생겼잖아. 저쪽에서 보면요. 두 날개가 이렇게 팔 벌리면 두 날개가 좌청룡 우백호잖아요. 그럼 저는 이쪽에 살잖아. 제가 사는 곳이 선유원이잖아요. 적묵당 아니에요. 적묵당은 뭐예요? 좌청룡 갑진생이 살아요. 갑진생이 누군지 모르죠. 여러분들도 기분 좋게 생활하면은 소화도 잘 되고 성질 부리면 소화도 아니에요. 꽉 막혀요. 수체가 막히면 뚫어야 되죠. 사람들은 막히면 뭐 드셔요? 소화제 먹잖아요. 소화제 안 먹어도 되는 거예요. 많이 웃고, 채소 먹고, 성질 안 내면은 삼소 운동해야 돼. 자, 조금 먹고, 많이 먹지 말고, 조금 먹는 거예요. 많이 먹으면 체하잖아요. 소식, 두 번째 채소, 그다음에 많이 웃는다. 소, 삼소예요. 소소소, 소소영영이 아니고, 채소 조금 먹고 그다음에 많이 웃자. 많이 웃으면 행복해지는 거예요. 안 웃는 사람들이 좀 그래요. 그리고 물을 잘 마셔야 돼요. 다섯 가지 잘 먹자는 거 아시죠? 첫째, 마음을 잘 먹자. 물을 잘 먹자. 공기를 잘 먹자. 음식을 잘 먹자. 나이 잘 먹자. 나이 잘 못 먹으면 주책이라고 그러죠. 주책 부리면 안 되겠죠. 그러니까 마음 잘 먹고 다섯 가지 잘 먹고 행복하게 사셔야 돼요. 그래서 기도하는 거예요. 여러분 건강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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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12월 1일 음력 11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도혜스님 2024-12-01
예. 여러분 반갑습니다. 조금 전에 맑고 아름다운 어린이들의 음악을 들어서, 여러분들 지금 마음이 활짝 열려 있을 것 같아서 너무 좋습니다. 열려 있는 마음에 여러분들이 이 법문을 받아들이면 100% 자기 것이 되겠죠. 그죠. 오늘은 여러분들이 이제 일반적으로 사찰에 가면 “염불한다.” 이런 소리를 많이 듣고, 아마 하시고 그럴 겁니다. 그래서 그 염불에 대한 부분을 오늘 좀 이야기를 해볼까 합니다. 우리가 이제 살아가면서 여러 가지 병이 있습니다. 있지만 그중에서도 가장 좀 병이라고 이름 붙이기는 어려운, 그 외로움의 병이 있죠. 이게 무슨 소리냐 하면, 돈이 아무리 많아도, 또 향락을 즐겨도, 뭔가 꽉 채워지지 않는 뭔가 있죠. 그것을 우리는 이제 그 회향병(懷鄕病)이다, 고향을 그리워하는 마음이다. 여러분이 태어나서 고향을 떠나서 타지에 가서 살게 되면, 문득문득 자기가 태어났던 그 고향을 그리워합니다. 만약에 평양이나 저런 이북에서 태어나셨던 분이 6.25라는 그 전쟁을 통해서 어쩔 수 없이 이남으로 내려왔다가 다시 고향에 못 돌아가는 이러한 분들은 늘 그 고향에 대한 그러한 그리움이 남아 있습니다. 그런 것처럼 그럼 우리가 늘 뭔가 허전하고, 돈을 벌어서 마음에 꽉 찬 것 같은데, 시간이 조금만 지나면 뭔가 허전하고 이런 것은 무엇 때문이냐. 우리 마음의 근본 생명의 근원을 그리워한다. 그러니까 생명 자체의 근본, 이것을 이제 불교에서는 불성이다라고 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진리에서 파생된 존재입니다. 그 진리에서 파생된 존재가 진리를 향하여 가지 않으면, 뭔가 늘 아쉽고, 그 진리와 하나가 되었을 때 비로소 만족하고 진정한 행복을 느낄 수 있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광명에서 파생된 존재인데, 광명을 향해 가지 않고 어둠 쪽으로 향해 가면 뭔가 편안하지 않아, 뭔가 이건 아닌데 하는 이런 것이 있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떤 경로를 통하든 진리를 향해서 가야만 됩니다. 그것이 우리가 염불을 한다, 참선을 한다, 이러한 여러 가지 방법으로 우리가 이제 살아가면서 수행해 나가는 겁니다. 그것이 뭐와 같으냐 하면, 물고기가 물을 떠난 다음에 다시 물로 돌아가지 않으면, 그 물고기에게는 행복이라든가 자유는 있을 수가 없습니다. 우리 인간이 그와 똑같은 거예요. 진리를 향해서 한 발자국이라도 나아가서 거기에 대한 조금이라도 만족감을 느낄 때, 우리는 진정한 만족감을 느끼는 겁니다. 세속에 여러분이 살아가면서, 무슨 쇼핑을 한다, 무슨 음악회를 간다, 영화를 본다, 뭐 여러 가지 즐거움을 느끼지만, 진정한 즐거움은 느끼지 못합니다. 여러분이 이제 실제로 사찰에 와서 기도를 해서 만족한 기도를 했을 때, 정말 그 만족감은 그런 영화를 보거나 쇼핑을 하거나 이러한 만족감보다 훨씬 더 만족감을 느끼는 것을 본인들이 스스로 자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석가모니 부처님께서도 이러한 부분을 고민을 하신 겁니다. 어떻게 하면 이 허전함, 이 허전함을 채우고, 어떻게 하면 영원히 고통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를 고민하고, 그 고민을 깊게 한 결과로 출가해서 수행을 하시고, 수행을 한 결과로 깨달음을 얻으셨죠. 그래서 얻은 깨달음의 그 내용을 당신 혼자만 가지신 게 아니라 일체 중생과 함께 공유를 했습니다. 우리에게 다 나누어 주시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래서 그 가르쳐 주신 가르침을 우리는 따라가는 사람들이 불교 또 불자, 우리 스님들과 이 자리에 앉은 여러분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우리는 어떻게 하든지 우리의 근본 생명을 향해서 가야만 하고, 그 근본 생명을 찾아야만 됩니다. 그런데 그 근본 생명을 찾아가는 길을 부처님께서 여러 가지로 제시를 해 주셨습니다. 그 여러 가지로 제시해준 그것이 해인사에 지금 보관되어 있는 팔만대장경이라는 그만큼 부수가 많은 그러한 가르침이 존재하고 있거든요. 그중에서, 그중에 하나가 염불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 염불이라고 하는 것은 수행 방법 가운데에 가장 수월한 방법이다, 이행도다 그럽니다. 그래서 더더욱이 말세 중생에게는 이 염불의 수행법이 가장 적합한 수행법이다. 이렇게 이제 모두 선사 스님들이나 모든 분들이 이야기를 하고 있습니다. 왜 그러냐 하면은, 염불(念佛)이라고 하는 것은 이제 그 글자 그대로 생각 염자, 부처 불자입니다. 부처님의 뭘 생각한다라는 건데, 부처님의 명호를 생각을 하게 되면은 부처님께서 가피력으로 염불하는 사람에게 가피를 주셔서 이끌어주십니다. 우리가 언덕을 올라갈 때 막 헉헉거리고 힘이 들어 뻘뻘 맬 때, 앞에서 누군가가 손을 잡아서 당겨주면 훨씬 수월하잖아요. 수월하게 언덕을 올라갈 수가 있는데, 혼자서 그 언덕을 올라가려면 굉장히 힘이 듭니다. 또 한 가지는 우리가 태평양을 건너야 되는데, 태평양을 건너는데 내가 스스로 배를 만들어서 그 배를 또 바다에 띄워서 배를 운전하는 기술도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에서 조그마한 배를 몰고 가다가 풍랑이라도 만나게 되면 목숨 보장을, 보장받을 수가 없잖아요. 건너기는커녕 중간에 가다가 그냥 빠져서 죽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됩니다. 그런데 큰 해운회사가 운영하는 큰 배에 뱃삯만 내면 목적지까지 편안하게 데려다 준다. 이것이 바로 염불의 매력입니다. 그래서 큰 해운회사를 운영하는 분들은 부처님이고, 우리는 뱃삯만 내면 돼요. 그 뱃삯이 뭐냐? 염불입니다. 이렇게 수월하기 때문에, 가장 수월한 수행법이 염불이다 이 말이죠. 그리고 물론 이제 우리나라 지금 현재 종단이 조계종입니다. 조계종은 선종이에요. 그래서 이 선종은 가장 빠른 경절문입니다. 바로 직절로 올라가지, 삥삥 돌거나 이런 거 전혀 없어요. 여러분들 아마 성불도 놀이해보셨는지 모르겠습니다. 해보신 분은 보시면은 경절문이 있고, 그렇지 않은 문이 있는데, 그렇지 않은 문은 지옥으로 갔다가, 아귀로 갔다가, 인간에 갔다, 천상에 갔다가, 말이 이렇게 삥삥 돌아요. 근데 경절문은 그냥 바로 뚫고 올라가서 불자리로, 보살이나 불자리로 올라가거든요. 근데 그만큼 빠른 반면, 그만큼 힘듭니다. 공부하기가. 여러분이 빠른 길, 돌아가는 길 말고 빠른 길로 가면 언덕바지는 더 가파르고 힘들잖아요. 그 대신 빠르기는 빠르지. 그런데 다리가 시원찮은 사람이 그 언덕바지로 빠른 길로 간다고 하다가 돌아가는 것보다 더 더딜 수도 있는 법이죠. 그래서 이 염불이라는 것은 정말 누구나 할 수 있는, 꼭 머리를 깎고 출가하지 않아도 세속에 계시면서 얼마든지 해서 스님들보다 훨씬 앞설 수 있는 수행 방법이 바로 이 염불입니다. 그러면 이 염불을 하는데, 그럼 무엇이 필요하냐. 세 가지가 필요해요. 첫째는 믿어야 된다. 부처님이 나를 반드시 이끌어주실 거고, 부처님이 하신 말씀은 한마디도 거짓말이 없다라는 것을 확실히 믿어야 돼요. 그다음에 두 번째는 원력이 있어야 됩니다. 목표가 있어야 된다. 나는 반드시 염불을 해서 이 경지까지 갈 거다. 만약에 여러분이 부자가 되고 싶다 그러면, 부자가 될 때까지 그 목표를 가지고 끊임없이 나무아미타불을 하든, 관세음보살을 하든 성취를 할 때까지 하는 겁니다. 그게 원력이에요. 그다음에 세 번째는 그 원력이 성취될 때까지 밀고 나가는, 꾸준하게 해야 되는데, 오늘 하루 하다가 ‘아이고 힘들어, 나 못해. 내일 하지 뭐.’ 그다음 내일 되면 또 ‘아이고 오늘은 우리 손자 봐줘야 되고, 딸네집에 뭐 김치 담아줘야 되고, 김장해줘야 되고 뭐 해줘야 되고.’ 그러다가 뭐 못하는 거죠, 뭐. 그러니까 어떤 일이 있든 꾸준하게 할 수 있는 이 실천행 이 세 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그러면 염불을 하는데, 나는 어떤 부처님을 선택해서 할 것인가. 이것도 중요하죠. 보편적으로 우리나라 불자님들은 관세음보살님을 많이 합니다. 왜냐하면 관세음보살님은 무엇이든 구하고 원하는 것은 다 소원을 들어준다, 이것이 관세음보살님의 원력이거든요. 중생을 제도하는 방편입니다. 그런데 제가 여러분에게, 물론 관세음보살님을 해도 목표 성취는 합니다, 하는데 그중에서도 나무아미타불을 여러분들이 하면 좋겠다. 나무는 귀의한다는 뜻이고, 계속 염불을 하는 분은 그냥 아미타불 아미타불 하셔도 됩니다. 이 아미타불을 왜 여러분에게 권해 드리느냐 하면, 아미타라는 그 아미타불을 번역을 하면 무량수 무량광이에요. 한량없는 광명과 한량없는 수명이다. 우리 내 자신의 근본 생명의 본체를 말하는 겁니다, 아미타불은. 그래서 이 아미타 부처님을 바로 이제 염불을 하게 되면, 그러니까 이 소리에도 에너지가 얼마만큼 있느냐가 달라요. 나무아미타불이나 석가모니불이나 미륵불이나 불자가 붙은 단어는 보살의 발음보다 에너지가 더 강하답니다. 그것을 이제 저도 몰랐는데, 어떤 비구니 스님이 이제 열심히 공부를 해서 어느 분이 자기가 깨달았다고 하시는 분이 있었습니다. 그분이 그 이야기를 하더라고요. 불자님들이나 스님들이 수행을 하고 기도를 하는 데 있어서, 모든 이제 우리나라는 관음 기도가 많이 이렇게 전파가 돼서 관음기도를 하시는 분이 굉장히 우리 불자님들이 많은데, 불자가 붙은 기도를 해야 에너지가 훨씬 강하다는 거예요. 그래서 석가모니불을 하든, 아미타불을 하든, 미륵불을 하든, 불자가 붙은 기도를 하는 게 훨씬 좋다 이렇게 하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근데 들어보니까 맞는 것 같아요. 그리고 여러분이 관세음보살님의 기도를 하는 근본 그 마음이 뭐냐 하면은 뭔가를 성취하고 싶다. 내가 뭐 부자가 되고 싶고, 건강하고 싶고, 우리 아들이 사업 잘 되게 하고 싶고, 아들을 위해서 기도해주고 싶은데 관세음보살을 하면 그게 다 될 것 같다. 그래서 관세음보살님을 선택해서 하는 경우가 더 많은 것 같아요. 그런데 나무아미타불을 한다고 해서 그런 여러분이 생각하는 게 성취가 안 되는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더 빠르다, 더 잘 된다 이런 말씀을 드립니다. 그래서 이 아미타라고 하는 이 단어 자체가, 우주 공간에 충만한 광명과 우주에 가득한 우리의 그 진리의 자체를 아미타라고 인격화시킨 것이 아미타불입니다. 아미타불은 진리 자체를 말하는 거예요. 물론 관세음보살님도 진리와 하나 된 분이지만은, 이 아미타불은 단어 자체가 진리를 나타내는 거예요. 그래서 우리가 갖고 있는 불성이 가지고 있는 무한한 시간의 영원성과 공간의 무한성을 다 내포하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아미타불을 열심히 여러분들이 하게 되면, 나중에는 어떻게 되느냐. 내가 아미타불이 됩니다. 그래서 옛말에도 이런 말이 있습니다. 10년을 아미타불을 불렀더니 내가 아미타불이 되었다. 처음 시작할 때는 내 바깥에 있는 아미타불을 불렀는데, 10년을 하고 보니까 내 자신이 아미타불이 된 거예요. 이게 이제 완전 성취를 본 거죠. 내가 부처님이 됐으니까. 그래서 이제 이 부처님의 명호 속에는 무량한 공덕이 들어 있습니다. 들어 있어서 불교가 뭔지, 사성제가 뭔지, 팔정도가 뭔지, 아무것도 몰라도 그 염불만 열심히 하면 공덕이 쌓여서 여러분의 업장이 다 녹고, 어느 정도 궤도에 올라가면 여러분의 마음속에서 기쁨이 아주 샘 솟듯이 퐁퐁퐁퐁 솟아납니다. 그런 경지까지 이제 여러분이 가야 되죠. 그래서 참 여러분이 이렇게 염불을 해서 마음이 고요해지면,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가슴에서 기쁨이 솟아납니다. 이렇게 솟아나는 기쁨의 행복은 물질적으로 얻는 행복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직접 한번 해서 스스로 그 기쁨을 느껴본 사람은, 단 1분만이라도 느껴본 사람은 하지 말라고, 밀어서 하지 말라고 스님들이 해도 죽기 살기로 합니다. 본인이 직접 체험했기 때문에. 그래서 이제 제가 누구 어떤 신도님에게 기도를 줬거든요. 아미타불을 하루에 3만 독씩 하라고. 그래서 하루에 3만 독씩 해서 그이가 천일을 채웠어요. 천일을 채우고 그다음에 내가 그랬거든요. 그 보살님이 연세가 좀 있고 해서 “보살님이 이제 천일을 채웠으니까, 이제 그냥 안 해도, 그렇게 하루에 3만 독씩 안 해도, 앉으나 서나 나무아미타불이 될 테니까 그만 하세요.” 했더니 안 된대요. 그래가 또 천일 하시고, 삼천일을 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그 보살님이 나만 보면 나보고 그리 고맙대요. 그래서 나는 또 도로 그 보살님 보고 “보살님이 그래 실천을 해줘서 너무 고맙다고.” 아니 일러줘도 안 하면 어쩔 수가 없잖아요. 근데 그렇게 본인이 하니까, 했으니까, 그렇게 하면서 늘 너무 본인이 좋은 거예요. 좋아한 거예요. 그야말로 뭐 이루 말할 수가 없이 좋은 경지를 본인이 체험한 모양입니다. 그래서 처음 천일을 할 때 끝부분에 가서 이 독수를 못 채운 거예요. 날짜 안에 못 채우니까, 이 보살님이 그냥 24시간 이제 나무아미타불을 하고, 아들이 밥해 먹고, 남편이 청소해주고, 그래서 24시간 해서 겨우겨우 이제 이게 그 독수를 채운 거예요. 그때가 가장 좋았다는 거예요. 이 좋았다는 게 뭐 남편이 청소해주고 아들이 밥을 해먹어서 좋은 게 아니라, 몰아서 계속 염불을 하니까 이제 그때야 비로소 본인이 망상이 스러지고 그 삼매의 경지를 그때 이제 체득한 겁니다. 그래서 그 보살님이 그렇게 막 몰아서 그렇게 기도하실 때 로또 당첨이 됐습니다. 그래가지고 나보고 뭐 어쩌고 저쩌고 하는데, 참 이 보살님이 어리석은 게, 사람들이 로또 당첨돼서 찾으면, 누가 그렇게 당첨된 사람을 뭐 전화를 해서 막 괴롭힌다는 소리를 들었나 봐요. 그리고 그걸 포기를 했어요. 그러니까 아들이 한 달을 몸살을 하더랍니다. 그거 포기를 하니까. “그거 찾아서 니가 다치는 것보다 낫다.” 그래서 내가 나중에 그 소리를 들었어요. 포기한 다음에 내가 그 소리를 듣고는, “그러면 사찰에 보시라도 하면 사찰의 불사라도 하면 복을 짓지, 왜 그걸 포기하냐” 하니까, 포기한 3개월 후에 나한테 말했어요. 그러니까 그건 벌써 떠난 배죠. 그래서 우리가 이제 이렇게 열심히 염불을 하면,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을 하게 되면 자기 안에 불성이 깨어나고, 지극한 마음으로 염불을 하게 되면 축복의 문이 나한테 다가옵니다. 다가오라고 안 해도 모든 게 저절로 풀립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앉은 분이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고통도 겪었고 힘들고 어려운 일들이 한두 가지가 아니었을 것으로 압니다. 그런데 일단 수행을 해서 마음이 고요해지면 바깥 경계가 나를 흔들지 못합니다. 그 정도까지만 가면 어떤 경계가 오든 내 마음은 조용하고 편안해요. 이게 행복이지 다른 게 행복이 아닙니다. 부처님께서 그래 “너 네가 이래 초하루에 와서 기도하니까 내가 복을 줄게” 하고 복주머니를 내려주신다거나 행복 주머니를 내려주시는 게 아니라, 여러분이 본래 갖고 있는 불성 속에, 갖고 있는 무량한 공덕과 무량한 복을 기도를 통해서 꺼내서 자기가 쓰는 거예요. 여러분도 그렇고, 우리 본래가 다 무량한 법과 무량한 공덕을 지금 다 갖고 있습니다. 있는데 왜 못 꺼내 쓰느냐. 번뇌라는 망상이 덮어씌워서 있는 줄도 모르고 살아요. 그러니까 이제 그것을 정화시켜서 깨끗하게 해서 내가 이제 그것을 꺼내서 써야만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염불하고 사경하는 이 지극한 마음 때문에 산란한 마음이 다 없어지고, 내 마음의 기쁨이 이렇게 옹달샘에 물 솟듯이 퐁퐁퐁퐁 솟아나는 이제 그러한 경지를 여러분들이 만들어야 되는데, 그래서 이제 잠들기 전에 염불을 하면 밤에 산란한 꿈을 꾼다거나 하지 않고 푹 잠을 자게 되고요. 또 아침에 그렇게 푹 잠을 자고 아침에 일어나면 정신이 맑고. 아침에 일어나서 염불을 하게 되면 하루종일 정신이 맑고 기분이 좋고 뭔가 모든 것이 척척되는 그런 느낌이 들 겁니다. 그러면 그런 기쁘고 좋은 하루하루가 이어지면 그게 행복이지 뭐 행복이 뭐가 따로 있나요? 그게 진정한 행복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러한 말씀을 드릴 때 여러분이 일반적으로 하는 기도하고 연관이 돼서, 제가 이제 이 기도에 대한 것도 말씀을 조금 이렇게 드리고 가려고 합니다. 우리 불자님들하고 대화를 해보면 “아이, 스님 저는 하루에 기도를 1시간 합니다. 2시간 합니다” 하는데, “그럼 뭘 합니까?” 하면 천수경하고, 반야심경하고, 광명진언하고, 금강경 읽고, 뭐 하고, 뭐 하고, 뭐 하는 게 한 10가지 정도 돼요. 그런 기도는 별로 힘을 얻지 못합니다. 그거는 뭐냐. 욕심으로 끌어모은 기도거든요. 반야심경 읽으면 좋다니까 반야심경, 금강경 읽으면 좋다니까 금강경, 광명진언 읽으면 좋다니까 광명진언, 그게 자꾸 보태다 보니까 나중에 숫자가 많아진 거죠. 그죠? 솔직히 여러분들 자신이 뒤돌아보세요. 이 자리에 계시는 분들이 그렇게 기도하신 분들이 아니신가 모르겠네요. 그런 기도는 물론, 천수경도 반야심경도 다 공덕이 있긴 하지만, 그런 것은 별 힘을 내지 못합니다. 그런 기도는 올바르고 좋은 기도가 못 돼요. 왜? 욕심으로만 뭉친 기도이기 때문에 별 그게 없습니다. 그럼 어떻게 하는 게 진정한 기도냐. 만약에 나무아미타불을 선택했다. 눈 뜨면서 아미타불을 하면 잠자기까지 중간에 정구업진언 이런 거 섞을 거 하나도 없어요. 그냥 아미타불 아미타불, 앉으나 서나 아미타불. 밥을 먹으면서도 아미타불. 그래서 이 오매일여(寤寐一如)라는 소리가 있습니다. 이 오매일여라는 것은 깨 있을 때나 잠잘 때나 일여가 돼야 된다. 깨어 있을 때 아미타불 하면 잠자면서도 아미타불이 돼야 된다. 그 정도 되면 제가 말하는 지금 가슴속에 기쁨이 펑펑 쏟는 경지가 됩니다. 그때까지만 여러분들이 힘들어도 끌고 나가야 되는 거예요. 근데 왜 여러분들이 염불을 하는 게 힘드냐면, 다생겁래로 이 염불을 안 하고 살았거든요. 번뇌 망상만 죽기로 하면서 살았기 때문에, 이 우리 삶을 가만히 보면 번뇌 망상하면서 사는 걸 일종의 즐기고 살아요, 우리는. 기도하다가 딴 생각하면 오히려 수월하잖아요. 그죠. 근데 기도를 계속 이어가려면 그만 힘이 드는 거야, 그 번뇌망상을 안 하고 하려면은. 그런데 사실은 번뇌 망상 때문에 내가 괴로운 건데, 우리는 도로 번뇌 망상하는 게 즐거운 거야. 즐겁다고 생각하는데, 그거는 올바로 가는 길이 아니다 이 말이죠. 그래서 부처님 당시 때에 수보리존자가 계셨는데 그분이 이제 그 수행하는 수행처, 이제 꾸띠를 어느 신도님이 지어주셨다는 거예요. 근데 이제 이 꾸띠라는 게 뭐냐 하면은 스님들이 수행하는 요즘 말로 말하자면 방입니다. 방. 근데 이제 지금도 남방불교에는 다 한 분 한 분 수행처를 따로따로 지어서 그걸 꾸띠라고 해서 수행을 해요. 우리 한국의 수행처하고는 조금 제도가 좀 다르거든요. 그래서 부처님 당시 때도 수보리 존자에게 어느 신도가, 꾸띠라는 건 이제 그 수행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드리는 건데, 다른 게 아니라 이제 풀을 이렇게 해서 우리나라 옛날에 그 짚으로 엮어서 지붕 이을 때 이렇게 엮는 거, 연세 좀 드신 분은 좀 아실 겁니다. 이제 그런 걸로 풀을 엮어서 이렇게 벽을 치고 위에 이제 지붕을 덮어드리는 건데, 그 꾸띠를 지어주는 신도님이 아마 시간이 없었던지, 무슨 사정이 있었든지, 벽만 치고 지붕을 미처 못 덮었다 이 말이에요. 못 덮은 상태에서 수보리 존자가 거기서 이제 수행을 하는데, 3개월 동안 비가 안 와요. 그래서 난리가 났죠. 요즘 같으면 댐도 있고 뭐 어떻게 하지만, 그때 당시 3개월 동안 비가 안 오니까 막 난리가 났습니다. 그 지방만. 그 지방만 비가 안 와. 그래서 여러 가지로 연구를 하고 왜 비가 안 오나 다 해봤더니, 결국은 뭐냐 하면은, 수보리 존자가 계시는 그 지붕을 안 덮어서 하늘에서 수보리 존자가 비 맞을까 봐 비를 안 내리는 거야. 천신이 비를 막고 안 내려. 그래서 3개월 동안 비가 안 왔답니다. 그래서 야단이 난 거예요. 여러분도 염불을 해서 하늘이 여러분을 도와줘서 여러분의 생각을 따라서 비가 안 왔으면 좋겠다 하면 안 오고, 왔으면 좋겠다 하면 오는 그런 경지까지만 가면, 그 뒤는 걱정할 게 뭐가 있겠습니까? 복 달라면 복이 오고, 수명을 달라 하면 수명이 올 거고, 저절로 다 이게 순환이 되고 돌아간다 이 말이야. 그 경지까지 갈 동안까지만 열심히 해봅시다. 해보시라 그 말입니다. 수보리 존자 부처님 당시 때까지 갈 것도 없이, 여러분 일타 큰스님은 아실 겁니다. 일타 큰스님의 할머니, 할머니가 10년 동안 나무아미타불 해서 정말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그 공부한 힘을 보고 47명이 출가를 했습니다. 그중에 한 분이 일타 큰스님이세요. 그 할머니가 10년 동안 나무아미타불 해서 미래를 훤히 알아. 그래서 동네 사람한테 “너는 오늘 무슨 일이 있을 테니까 뭐 준비해라, 뭐 해라”, 또 아들 보고 “오늘은 너 공장에 불이 날 확률이 있으니까 미리 물 떠다놓고 옆에 집에 불 나면 다 미리 불이 번지지 않도록 조심해라”, 이렇게 하니까 온 동네 사람이 이 할머니를 부처님 모시듯 모셨잖아요. 그래서 그러한 신통력을 보고 일타 큰 스님 그 권속이 47명이나 출가를 했습니다. 그뿐만 아니에요. 부산에서도 한 40년 전에 어느 분이, 이분은 나무아미타불을 한 게 아니라 관세음보살을 했어요. 관새음보살을 해서 어느 경지까지 올랐습니다. 그래서 그 아들들이 이 어머니를 부처님같이 모시는 거예요. 60 먹은 아들이 80 먹은 어머니를 업고, 초하루마다, 보름마다 절에 오는데, 요즘 같으면 택시도 있고 뭐 많죠. 그런데 그때 당시는 교통도 불편하고 하니까, 어머니가 절에 오는데 택시나 이런 게 없고, 또 택시가 온다 해도 또 걸어 올라가야 돼. 그러니까 아들이 어머니를 업고 절에까지 와서, 어머니가 기도 참석 다 하고 내려가시면 업고 내려오고, 아들이 어머니를 부처님 같이 모시는 거예요. 왜? 어머니 그 기도 성취에 감격을 했기 때문에 그렇게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그 보살님이 그러셨다는 거예요. “스님. 이 세상이 이렇게 아름다운데 이렇게 아름답고 이렇게 좋을 수가 없는데, 왜 사람들은 그렇게 찡그리고 사는지 모르겠다.” 공부를 해서 경지에 오르면 그렇게 좋은 겁니다. 이 세상에 무슨 여러분들이 그 세속에서 좋아하는 제일 좋고 향락을 누리는 것이 제일 좋은 게 어떤 건지는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그 즐거움은 비할 바가 아니에요. 이 세상 모든 게 풀잎 하나 모든 게 그냥 그렇게 아름답고 그렇게 좋을 수가 없는 거예요. 여러분이 기도를 해서 조금만 힘을 얻게 되면 그 기쁨은 그 어디에도 비할 수가 없습니다. 그래서 이 불교는 부처님의 가르침을 믿는 모든 분들께 즐거움과 행복을 주기 위한 가르침이지, 고통을 주기 위한 가르침이 아니에요. 그래서 이 세속의 분들이 출가한 스님들을 그 자식으로 둔 부모님들이, 출가하면 힘들고 어렵다고 안 보내려고 막 갈 때 눈물 흘리고 울고불고하는데, 사실은 그거 잘못된 겁니다. 스님들처럼 행복하게 사는 사람 없어요. 우리 스님들 다 행복하게 살죠. 그죠? 이 신도님들 사는 거에 비하면. 우리 스님들은 신도님들이 바라보는 스님들의 생활하고는 다릅니다. 얼마나 기쁘고 행복한지 모릅니다. 제가 여기 법문을 하느라고 이런 소리를 하는 게 아니라, 제가 나이가 좀 많아요. 근데 제가 이제 지금 이렇게 살면서 정말 행복하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런 생각을 합니다. ‘내가 만약 출가를 안 했더라면 이 나이에 이렇게 행복하게 살 수 있을까? 절대 없을 거야.’ 이렇게 자부하고 삽니다. 너무 좋아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힘들더라도 염불을 자꾸 해보십시오. 그러면 조금씩 조금씩 마음이 편안해집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지금 마음도 불편하고 이런 문제가 있다면은 무조건 묻지도 따지지도 말고, 무조건 시작해 보세요. 시작해서 걱정 근심이 여기에 딱 들어왔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로 누르는 거예요. 걱정 근심이 생겼다.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을 하면 어느샌가 그게 해결이 돼요. 원리가 그렇습니다. 그래서 제가 이 우울증 앓는 환자를 실제로 몇 사람을 지금 현재 고쳐줬거든요. 우울증이 있는 사람에게 아미타불을 시켜서 한 한 달 보름 내지 한 달쯤 되니까 우울증이 싹 없어졌습니다. 그래서 고친 사람이 몇 사람이 되고, 한 30년 전에 이제 어떤 처사님이 치매가 걸렸어요. 걸렸는데 이 치매도 종류가 아주 여러 가지인가 봐요. 그래서 이 처사님이 걸린 치매가 어떤 치매였느냐면은, 홀라당 벗고 동네를 뛰어다니는 그런 치매라. 그러니까 가족들도 감당을 못하고, 병원에서도 감당을 못해. 왜냐하면 그분이 체력이 아주 좋고, 키도 크고, 몸집도 크고, 이런 분이 막 그렇게 하니까, 병원에서도 아무리 침대에다 이거 묶어놓고 해도 가만 안 있으니까, 힘이 원체 세니까, 다 막 하고 온 병원을 돌아다니니까 병원에서도 제발 좀 퇴원해 가라고. 그래 할 수 없이 퇴원해 왔는데도 집에서도 이거 뭐 감당이 안 돼요. 그렇게 한 사람을 누가 감당을 하겠습니까? 그래 나한테 왔어요. 와가지고 어떡하면 좋겠느냐. 제가 뭐 의사입니까? 뭡니까? 어떤 도리가 없잖아요. 그래서 제가 그랬습니다. 계속 나무아미타불을 하는 그 테이프를 조계사 앞에 가서 사서 24시간 환자가 들을 수 있게끔 틀어놔라 그랬더니, 3일 만에 그 증세가 가라앉아서 그 나머지 가족이 이제 이렇게 그 증세만 가라앉아도 살겠다는 거예요. 어떻게 할 수가 없었는데. 그래갖고 이제 돌아가실 때까지 계속 그 아미타불 그 소리를 들려드리고 하니까, 얌전한 치매가 돼가지고 굉장히 그 가족들이 수월하게 해서 이제 얼마 후에, 한 6개월 후에 돌아가셨습니다. 그래서 이 나무아미타불 부처님의 가진 그 소리의 공덕이 무한합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은 죽기 살기로 한번 해보세요. 그래서 옛말이 있잖아요. 노는 입에 염불을 한다. 잘 아시네. 저보다 더 잘 아시네. 그러니까 그렇게 이제 염불을 자꾸 한번 해보십시오. 그래서 이 염불이라고 하는 것은 크게 얻는 것입니다. 이 크게 얻는 거다라는 것은 크게 얻는 것에 작은 것은 얼마든지 들어갈 수 있어요. 그러면 작은 것은 다 된다라는 겁니다. 이 크게 얻는다는 것은 이제 성불을 한다라는 것인데, 이 여러분들이 원하는 복 받아서 부자가 되고, 건강하고, 수명이 길어지고, 사업 잘 되고 이런 것들, 이런 것들은 그 작은 것이에요. 그래서 큰 것이 되는 것이기 때문에, 작은 것은 지절로 다 된다 이렇게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이제 이 염불하는 한 생각만 끊임없이 이어갈 수만 있다면 모든 것이 해결됩니다. 근데 그게 끊임없이 이어갈 수가 없어. 한 나무아미타불을 하면 또 딴 생각나는 거예요. ‘아이고 우리 손자가 넘어졌나.’ 또 뭐 좀 하다가 보면 ‘아이고 내가 가스 잠그고 왔나.’ 지금도 이 말 들으면서 딴 생각하고 계시는 분 많을 거예요. 그죠. 생각이 그저 수시로 솟아올라 오듯이 온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그걸 자꾸 잠재우는 겁니다. 근데 이제 공부하는 이 비결 중에 가장 좋은 비결이 뭐냐. 참선하는 스님들도 그렇습니다. 참선을 하는 스님들은 이제 화두를 들고 하는데 화두하다가 딴 생각이 났다. ‘내가 왜 딴 생각하고 있지.’ 이러면 딴 생각하고 있지 하는 그것도 딴 생각이야. 그러니까 그 망상이 일어났다는 걸 아는 즉시 바로 화두를 잡아야 되고, 염불하는 사람 역시 나무아미타불하다 딴 생각 났으면 ‘내가 딴 생각 났구나 나무아미타불’ 바로바로 나무아미타불을 잡는 게 이 수행의 비법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러한 것들이 다 성취가 되는 근본적인 이유는 내 마음은 전지전능한 힘을 갖고 있습니다. 그게 불성이거든요. 그래서 전지전능한 힘을 갖고 있는데 그 전지전능한 힘이 힘을 쓸 수 있으려면은 그런 망상이 다 없어지고, 오로지 하나의 생각으로 모아지면 내가 갖고 있는 전지전능한 힘이 발휘가 되고 쓸 수가 있어요. 근데 그게 안 되기 때문에 지금 우리는 이렇게 고통을 당하고 힘들게 살고 있는 겁니다. 그래서 오로지 염불의 생각만 갖고 있는 사람에게는 어떤 마장도 생기지 않고, 어떤 병도 침범할 수 없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여러분들이 확실하게 믿고 염불을 하시면 되는데. 이제 중국 청나라 시대 때 광서성에 철산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이 번대라는 직책을 갖고 있었어요. 이 번대라는 직책은 그 성에서 두 번째 세 번째로 높은 자리였다 합니다. 근데 이제 그 당시 광서성에 토착으로 자리잡고 있던 그 도적떼들이 많았어요. 그래서 그 도적떼를 토벌을 하려고 계획을 세워서 이 사람이 이제 도적들을 토벌하는 사이에서 그 수많은 도적들을 죽이게 됐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이제 살생을 많이 하게 된 겁니다. 그래서 이제 이 사람이 그런 일이 있고 한 4년 후에 어느 날 갑자기 병이 났어요. 병이 났는데 눈만 감으면 시커먼 어느 벽돌로 만든 큰 공간 같은 데 들어갔는데, 수많은 그 죽은 사람들이 막 이 사람한테 핍박을 하고 달려드는 겁니다. 그래서 무서워서 눈을 감을 수가 없어. 눈만 감으면. 그러니까 눈을 감을 수 없어서 눈을 뜨고 만 3일을 눈을 못 감고 밥도 못 먹고 잠도 못 자니까 이 명만 붙어 있지 살아있는 사람이 아니라. 그러니까 그 부인이, 그 아내가 보다 못해서 “여보 그러면 아미타불을 한번 불러보시오. 그러면 좀 나아질 수 있지 않겠냐.” 그래 뭐 급하면 지푸라기라도 잡는다고, 부인이 그러니까 이제 아미타불을 죽기 살기 했어요. 그러니까 얼마 하지 않아서 그런 증세가 없어지고 잠을 푹 자고 그 증세가 나아서 죽을 때까지 편안하게 살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제 이런 영험담을 듣는 게 문제가 아니라, 여러분이 이런 것을 확실하게 믿고, 여러분이 이제 실제로 실천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 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이 불교라는 것은 자기실현의 가르침이고 대안락의 법문입니다. 이 불교는 고통을 여의고 이고득락이 불교의 근본 목표입니다. 고통을 여의고 즐거움을 얻게 해주는 그런 가르침이 불교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요즘 긴장과 불안으로 이어지는 이 현대 시대에서 이 참선이라든가 염불이라든가 이러한 수행법은 정말 마음을 편하게 해주고 삶의 활력을 되찾아주는 이제 그러한 수행법입니다. 그래서 요즘은 명상이 굉장히 지금 세계적으로 유행을 하고 있거든요. 왜냐. 물질적인 것은 많이 전 세계적으로 지금 좋아졌는데, 그 반면에 정신적인 문제가 생겨서 지금 많이 고통을 당하고 있지 않습니까? 그래서 이 불교는 마음을 편안하게 해줘서 행복을 실제적으로 느낄 수 있게끔 해주는 그러한 역할을 하는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열심히, 우리 불자님들은 스님들의 지도를 통해서 열심히 이제 실천을 해서 삶에 늘 기쁜 생활을 하고, 또 삶의 지혜가 생깁니다. 그렇게 염불을 열심히 하게 되면 기쁨도 기쁨이지만은, 지혜가 생겨서 내가 지금까지 살았던 건 이게 잘못 살았고, 이렇게 이렇게 살아야 잘 살겠구나 이렇게 되고, 돈 버는 것도 멍청하면 돈을 못 법니다. 지혜로워서 벌은 돈을 어떻게 투자하고, 그 투자한 돈을 또 투자하고, 이래야 부자가 되지, 매달 받는 월급만 따박따박 받아서 쓰고 10만 원 남으면 10만 원 저축하고, 10만 원 남으면 10만 원 저축하고, 이래서는 평생 1억 못 모읍니다. 그죠. 그러니까 요즘 시대는 다방면으로 여러분들이 머리를 쓰면 돈을 벌 수 있는 그런 것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그러한 지혜가 이제 생겨나게 해주는 것도 역시 이 염불을 열심히 하면 그런 정신이 깨어납니다. 그런데 그렇게 염불을 열심히 하려면 이제 꾸준히 염불이 돼야 되는데, 그렇게 꾸준히 염불을 하려면 앞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원력이 있어야 돼요. 원력이 없이는 이게 쉽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이제 원력을 세워라 하면 이제 이 신도님들은 겁을 내요. ‘아이고 내가 원력 세워서 끝까지 다 못 지키면 어떡하지. 죄가 안 되나.’ 죄 될 거 하나도 없어요. 그러니까 원력을 세우라 하면 무슨 거창한 원력을 세워야 되는 줄 아는데, 거창한 원력 세울 필요 없고, 자기 분수에 맞게, 자기가 할 수 있는 만큼, 그렇게 원력을 세워서 하면 반드시 성취를 하게 되고, 또 원력을 세워서 실천해 보다가 이게 아니다 싶으면 또 바꾸면 돼요. 그거는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원력을 세워서 열심히 이제 해야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원력이라고 하는 것은 이 만물을 창조하고 성취하는 에너지원이 되고, 원동력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제 여러분이 원력을 세울 때 “뭔가를 되게 해 주십시오”라고 하는 게 아니라, “내가 이렇게 이렇게 되겠습니다” 하는 원력은 성취가 됩니다. 그러니까 두려워하지 말고 원력을 세우는데, 문제는 강한 끊임없이 정진하는 노력이 따라붙어야 됩니다. 그래서 미래를 개척하는 그 투철한 생각이 있어야 된다. 지금 예를 들어서 나는 지금 살림이 팍팍하고 가난하다. 그럼 내가 부자가 돼야 되겠다. 그럼 부자가 되겠다는 목표를 세우면 그 부자가 될 때까지 죽기 살기로 하는 겁니다. 해야지, 좀 해보다가 ‘아이고 나는, 나는 안 돼. 나는 이 가난한 게 내 팔자인가 봐.’ 팔자를 십자로 고칠 수가 있어요.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입니다. 그래서 그런 것을 실제로 이제 겪은 분이 이제 요범사훈이라는 책을 쓴 분인데, 그분이 사주팔자로는 벼슬도 못하고 자식도 없고 나이는 40세에 죽는다. 그게 그 사람 사주 팔자야. 그래서 이 사람이 나는 자식도 없고 벼슬도 못하고 40세에 죽는가 보다 했는데, 이제 어느 사찰에 가서 스님하고 의논을 했더니, 그 스님이 그렇지 않다. 당신도 자식도 놓을 수 있고 벼슬도 할 수 있고 수명도 길 수 있다. 그럼 어떻게 하면 되느냐 그래서, 그 스님이 일러준 대로 열심히 착한 일을, 3년 내에 착한 일을 3천 번을 하는데, 착한 일을 하나 할 때마다 기록을 해라. 그래서 3천 번을 채워라. 그래서 그 3천 번을 채워서 벼슬하고 자식 두고 다 했습니다. 그래서 그 사람이 그것을 자기가 체험했기 때문에 책으로 남긴 게 요범사훈이라는 책이에요. 그래서 이게 오늘 너무 법문이 길어져서 빨리 끝내야 될 것 같습니다. 그래서 이제 이러한 것이 이제 여러분들이 와서 법문만 듣고, 오늘 뭐 그런 소리를 들었다. 일어나면 금방 없어지면 안 되죠. 그죠. 해야 된다. 나도 뭔가 본인이 난 요거 요렇게 살고 싶다 그러면, 살고 싶은 것을 계획을 세워서 그게 원력인 겁니다. 세우고 그러면 이거를 이룰 때까지 나는 어떠어떠한 기도를 하겠다 해서 오늘부터 시작하는 거예요. 그래야 시작이 되지. 아이고 오늘은 힘들다 못하겠다. 잠이 오면 또 자느라고 못하고. 그러면 뭐 죽을 때까지 그냥 살아야지 어찌합니까? 그렇죠. 그래서 이제 대길상경이라는 경에서 무슨 말씀을 하셨냐. 바른 서원을 지니는 것이 인생의 진정한 축복이다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중생살이를 좀 재미있게 하려면은 탁 트인 마음을 가져야 돼요. 그래서 여러분이 신나게 염불을 한 번 해서 우리 한번 신나게 살아보면 어떨까요? 좋죠. 여러분들 신나게 살아보는 겁니다. 아셨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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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11월 28일 49재 법문
인묵스님 2024-11-28
합장하시고. 예. 부처님도 이렇게 가셨고, 현세의 부처님도 이렇게 가시며, 오늘 49일을 맞이하는 영가님도 이렇게 가고,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도 언젠가는 이렇게 갈 것입니다. 영가님이시여.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느 곳에서 왔으며, 이 세상을 하직하고서는 이제 어느 곳을 향해 가십니까? 태어난다고 하는 것은 허공에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오, 죽는다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다 했습니다. 구름 자체는 실체가 없는 것. 생사 거래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생사 거래에 상관없는 한 물건이 있어, 온갖 이름이나 모양에서 벗어났으므로, 밝고 고요하고 청정함이 뚜렷이 드러나 생사 거래를 따르지 않습니다. 영가님이시여. 이 도리를 분명히 아십시오. 이러한 도리를 알고자 한다면 허공처럼 마음을 텅 비워 청정하게 하십시오. 번뇌와 망상을 떨쳐버리면 마음 내키는 일마다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영가님이시여. 지금 내가 하는 이 말을 보고 들으십니까? 분명히 보고 듣는다면, 보고 들을 줄 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참 법신불 진공묘지가 갖추어져 둥근 보름달 같고, 일천해가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허망하고 덧없는 꺼풀을 벗어버리고 금강석처럼 견고해서 무너지지 않을 참 몸을 얻었습니다. 청정한 법신에는 가고 옴이 없으니 육신의 생사 또한 지난밤 꿈과 같은 것입니다. 영가님이시여. 이러한 이치를 알아듣겠습니까? 서산으로 지는 해는 동녘에 다시 솟아오르고, 동녘에서 솟은 달은 반드시 서산으로 기웁니다. 영가님이시여. 이 다음 생에는 부디 금강석처럼 튼튼한 몸을 받아 금생에 못다 이룬 뜻을 원만히 이루소서. 서방정토 아미타불께서 오늘 당신을 맞이하시니 열반의 기쁨을 누리시옵소서. 대자대비하신 아미타불께 발원하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저희들은 영가님의 왕생극락을 빌고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49재의 법요를 거행하고 발원하오니 굽어살피시옵소서. 아미타 부처님이시여. 오늘의 인연 공덕으로 영가가 생전에 못다 한 공덕이 원만해지고 생전에 지은 허물이 소멸되어 정토에 왕생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오늘 일로 인하여 저희들 모두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하루하루의 생활을 착실히 쌓아 나가도록 이끌어 주시며, 오늘 영가로 하여금 금생의 못다한 일에 대하여 미련을 가지지 않도록 보살펴 주옵소서. 자비하신 아미타 부처님이시여. 오늘의 유족들과 후손들이 영가께서 남기신 삶의 의지를 본받아 착실한 믿음에 근거하여 자신들 생각을 스스로 가꿔 나갈 줄 알게 해 주시고, 영가께서 평생을 노심초사 보살피셨던 가족들과 친지들이 평화롭고 행복하고 무장무애 하기를 보살펴 주옵소서. 그리하여 오늘 법요 뒤에 오래도록 이 가문이 평안하고 자손들의 복록이 나날이 증진하여 이생에서는 행복을, 내생에서는 은혜를 누리는 가족이 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합장 바로 하시고. 오늘 영가님 49재의 날입니다. 불교에서는 우리가 이생에서 살다가 다음 생으로 넘어가는 그 중간에 그 세계가 하나 있다고 그럽니다. 그게 불교에서는 명부 세계 또는 중유(中有), 가운데 중자, 있을 유자, 중유의 세계입니다. 그 중요의 세계의 기간은 49일입니다. 그래서 이생에서 임종을 하게 되면 다음 생으로 넘어가기 전에 49일 동안 중음신(中陰身)의 몸을 받고 다음 생을 준비하는 기간이 있습니다. 그래서 오늘 49재를 봉행하고 있는데, 무엇보다도 영가님들에게는 이 세 가지가 꼭 필요합니다. 첫째는 음식입니다. 음식. 오늘 찬을 잘 준비해서 공양물을 잘 준비했는데, 그것이 영가가 잡수실 수 있도록, 흠향할 수 있도록, 전달될 수 있도록, 그걸 이제 부처님 법도에 따라, 의식에 따라, 가지변공(加持變供)을 해서 그 의식을 해야 영가가 음식을 받는다고 합니다. 그게 첫째고. 두 번째는 어쨌든 아주 좋은 법문을 들려주면 잘 듣는다고 합니다. 이생에서는 모든 인연에 따라 이렇게 속박되어서 그걸, 잘 좋은 법문이나 좋은 얘기도 잘 못 들을 수 있지만, 저 명부 세계에 있는 분은 간절해서 무슨 말을 조금만 해줘도 그걸 잘 전달받는다고 합니다. 그래서 오늘 아까도 스님이 착어 법문에 잠깐 얘기했는데, 우리 본래 자성청정한, 우리는 잘 알지 못하지만, 어떤 그 도리와 원리가 있어서, 이 세상을 이렇게, 우리 입장에서는 죽었다 살았다 태어났다 늙었다 병들었다 하지만, 세상의 원리로 보면 그렇게 할 것이 없다 이거예요. 그냥 흘러가는 하나의 원리이자 자연의 어떤 현상으로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부처님의 근본적인 좋은 법문 말씀을 들려주고, 또 좋은 경전의 말씀이 너무 많잖아요. 너무 많으니까 스님들 염불하는 속에 부처님 경전을 이렇게 압축해서 게송으로 이렇게 이제 오늘 들려주게 됩니다. 그게 두 번째고. 마지막 세 번째는 중음신이 되고 명부세계에 가면 전도가 막막하여 미지가 허황이라, 앞길이 캄캄해서 어디로 가야 내가 갈 길인가를 잘 모르고, 그러니까 또 두렵기도 하고, 그래서 세 번째는 오늘 영가님한테 두려워하지 말고 그 용기를 내는 그 힘을, 기운을 오늘 이렇게 불어넣어 주는 그런 날입니다. 오늘 스님들하고, 오늘 이곳 진관사 좋은 도량에서 스님들하고 같이 여러 유족들이 정성을 다해서 영가님에게 음식을 전달하고, 법문을 전달하고, 두려움 없는, 두려움이 안 나는 그런 힘을 이렇게 불어넣어 준 것이 오늘 49재에 진정한 의미라고 할 수 있습니다. 계수서방안락찰 접인중생대도사 아금발원원왕생 유원자비애섭수 나무아미타불 극락으로 중생을 인도하옵시는 아미타 부처님께 머리 숙여 절하오며, 아금발원원왕생 유원자비애섭수, 제가 이제 일심으로 오늘 영가님의 극락왕생을 축원하오니 자비하신 원력으로 아미타 부처님께서는 섭수하여 주옵소서. 성불 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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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독다라니기도] 11월 10일 천독다라니기도 회향 법문
가섭스님 2024-11-10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마하반야바라밀.(마하반야바라밀) 대단히 반갑습니다. 오랜만에 뵙죠. 오랜만에 봐야 반갑죠. 그죠. 진관사 도량이 가을로 흠뻑 물들어 있어서, 차에서 내려서 이렇게 둘러보는데 그런 생각이 들더라고요. ‘참 좋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달리 표현할 말이 없더라고요, 보니까. 그런데 제가 지금 안경을 벗고 있잖아요. 그 원래 쓰는 안경이 있는데, 아침에 나오면서 그 일상에 운동할 때 끼는 안경을 끼고 와가지고, 색이 변하는 안경 있잖아요, 변색 안경, 그걸 써가지고, 너무 멋있게 보일 것 같아가지고, 안경을 벗고 해야 되겠다. 벗으니까 좋네요. 왜냐 하면은 이것도 참 좋은 게, 잘 보이지가 않네. 그냥 두려운 마음이 사라져요. 무슨 말도 다 할 것 같은데. 오늘은 이제 천수다라니를 회향하는 그런 날이기 때문에, 기도 성취를 위한 세 가지 마음에 대해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일단은 우리가 기도를 이제 하는데, 우선 기도를 하기 전에 가장 중요한 거는 <생각을 생각해 봐야 됩니다.> 생각을 생각해 봐야 돼. 생각이라는 게 있잖아요. 생각. 누구나 다 생각을 하고 살죠. 근데 요즘에는 생각 없이 사는 사람도 있어요, 또. “생각이 있는 거야, 없는 거야” 이런 말 하잖아요. 생각 있게 살아야 되는데, 생각을 생각하지 않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단 말이에요. 말이 좀 어렵긴 한데, 지금 여러분이 어떤 생각이 있느냐. 여러분의 마음에 생각이 올라오잖아요. 그걸 의식이라고 하잖아요. 의식. 의식은 생멸하는 거란 말이에요. 생멸. 의식은 이렇게 올라왔다가 사라지고, 또 올라왔다 사라지고 하잖아요. 한 생각이 쭉 이렇게 이어지는 사람이 있는데, 그건 죽은 사람이에요. 사는 사람은 생각이든 의식이든 올라왔다 내려갔다 하죠. 그 생각이란 말이에요. 그런데 생각을 생각하고 사는 사람은 많지 않아요. 그냥 살죠. 그래서 이제 우리가 마음 안에 의식 안에 있는 생각이라고 하는 걸 한번 생각해봐야 된다. 그 생각이라고 하는 틀 안에 무엇을 채울 것이냐. 무엇이 채워져 있느냐. 이게 기도의 핵심 포인트예요. 여러분이 지금 눈을 지그시 감고, 평소에 어떤 생각들을 하고 사는지를 이렇게 들여다보면, 그건 옛날 어른들이 뭐라고 했냐면 그걸 자기 살림살이라고 얘기했단 말이에요. 그 마음 생각으로 자기 살림살이를 누구나 다 알아요. 이거는 근데 누구한테도 말하면 안 돼. 자기만 알고 있어야 돼. 왜냐. 말해도 다 군더더기, 자기밖에 모르는 거예요. 그 생각이라고 하는 거 자체를 어떻게 보면 어떠한 것들, 생각이라는 것들을 불교에서는 생각 염자(念)라는 게 있잖아요. 생각 염자. 그 생각이라고 하는 거를 바른 생각을 해야 된다. 그러다 보니까 이제 정념(正念)이라고 표현했어요. 팔정도에서는 바른 생각, 정념. 그걸 뭐 요즘에는 <마음 챙김> 이렇게 번역하는데, 그것도 틀린 번역은 아닙니다마는, 정확한 생각은, 생각은 기억이에요. 기억. 어떤 기억을 해내느냐. 그 생각을 할 때 어떤 생각으로, 어떤 기억으로 내가, 내 생각이 채워져 있느냐라는 거예요. 보통은 과거의 경험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그 생각들이 올라오잖아요. 그래서 우리 부처님께서는 그 생각을 6가지로 국한해서 우리 수행 방법을 말씀하셨단 말이에요. 그걸 육념법이라고 얘기를 합니다. 물론 이제 대승의 수행법인데, 육념법, 육념법은 이제 첫 번째는 이제 부처님이잖아요. 부처님을 생각하라 그게 뭐예요? 염불(念佛), 염법(念法), 염승(念僧), 삼귀의 불법 삼보잖아요. 그다음에 또 나오는 게 염시(念施), 염계(念戒,) 염천(念天) ,이렇게 나와요. 그러니까 염시는 뭐냐 하면, 내가 어떻게 베풀고 살 거냐를 생각하라는 거예요. 우리는 이제 그 생각 안 하고, 어떻게 많이 끌어안을 거냐, 많이 벌 거냐, 내 것을 얼마큼 많이 만들 거냐, 이 생각을 하고 살잖아요. 근데 많이 어떻게 하면 내가 베풀고 살 거냐. 그것이 내 육체를 통하든, 나의 물질을 통하든, 나의 마음을 통하든, 어떻게 베풀고 살 거냐. 그다음에 염계예요. 염계는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살도음망주(殺盜婬妄酒)도 있지만, 오계 살도음망주도 있지만, 또 삼귀의계(三歸依戒)도 있죠. 이것은 내가 얼마큼 윤리적이고 도덕적인 생활을 할 거냐. 쉽게 말하면 양심에 스스로 속이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속이지 않고, 얼마큼 윤리적인 생활을 할 거냐라는 것을 생각하고 사는 거예요. 기억하고 사는 거. 그게 염계죠. 그리고 염천은 뭐냐 그러면, 하늘이라고 표현했지만, 내가 이생에 이 육신이 사대로 흩어지고 나서 그다음에 어떠한 과보를 받을 거냐. 근데 그 과보를 받는데 천이니까, 하늘이니까 좀 더 좋은 과보를, 좋은 결과물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라는 건데, 그것은 바로 얼마큼 공덕을 지고 살 거냐라는 거예요.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부처님 가르침을 닦고 수행하는 수행자들과 그리고 내가 어떻게 베풀고 살 거냐, 그리고 어떻게 윤리적인 생활을 할 거냐, 그리고 어떻게 공덕을 짓고 살 거냐, 이것이 이제 6가지의 수행법 중에 하나였단 말이에요. 그걸 염자를 써가지고 육념법이라고 하는데, 그러니까 우리가 생각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채울 거냐 라는 말이죠. 생각. 그런데 생각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은 우리는 그걸 업이라고 부르기도 해요. 자기 업에 의해 가지고 그 생각의 틀이 구성되고, 내용물이 구성되고, 또 결과물이 구성돼서 그게 밖으로 송출돼 나오는 거잖아요. 생각이 언어나 내지는 행위로 나오는 건데, 그걸 삼업이라고 표현이지 않습니까? 그런데 그 업이라고 하는 거는 결과론적인 업이 아니에요. 우리가 우리 업 이렇게 얘기하면은 늘 우리가 이제 착각하는 게 뭐냐 하면 과보라고 생각한단 말이야. 과보, 업은. 근데 업은 현재 진행형이라는 거예요. 불교의 업설은 인도 당시에 있던 업설하고 다른 이유가 뭐냐 그러면, 무게 중심이 어디 있냐 그러면은, 불교의 업설은 지금 내 마음, 지금 이 순간에 무게 중심이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 내가 업이라고 하는 게 있는데 그 업을 추동하는 업보가 있고, 그것이 내가 습관이 돼서 차 있는 그 창고를 업장이라고 하죠. 업장. 그래서 업보, 업장이 있는데, 그것을 내 안으로, 내가 살아있을 때 내 입으로, 내 언어로, 내 행위로 나오게 하는 것은 뭐냐 하면은, 그거를 업력이라 해요. 업력. 업의 동력이라는 얘기예요. 이거 이제 우리는 알게 모르게 그런 과정 속에서 살고 있단 말이에요. 근데 그 업력이 되는, 업의 동력이 되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그 업의 동력이 되는 것이 하나가 무명이요, 하나는 가래입니다. 가래. 무명은 뭐냐 하면 밝지 못한 거란 말이에요. 밝지 못한 거. 부처님께서 견성하시고 나서, 제일 먼저 이 연기라고 하는 거를 이렇게 순관(順觀)하시는데 그때 첫 번째가 무명을 관하시잖아요. 사람이 왜 생로병사가 있느냐. 역관을 하면은 나중에 무명이 되는 거고, 무명의 순관, 순관으로 순서대로 쭉 하다 보면은 노사까지 가는데, 그때 첫 번째가 무명이잖아요. 지혜롭지 못한 거란 말이에요. 사람이 지혜롭지 못했기 때문에 사람이 생사를 한다는 거예요. 생로병사를 한다. 근데 또 하나가 우리가 업에 빠져드는 이유가 뭐냐. 가래입니다. 가래. 가래는 뭐냐 하면, 어떤 현상들이 그게 좋은 거든 싫은 거든 간에, 거기에 딱 달라붙어가지고 떨어지지 않는, 애착하는 거예요. 애착. 집착이라 하죠. 그걸 다른 말로 이제 가래라고 그러는데 가래는 일종의 번뇌예요. 번뇌. 예를 들면 좋은 거는 계속 내가 취하려고 하는 마음이 있고, 내가 한 번 싫은 사람이 있어요. 가족 관계가 그럴 수도 있고, 이웃과 그럴 수도 있고, 친구 사이에도 그럴 수도 있고, 한 번 싫어지면은 그 사람을 잘 안 보려고 그래요. 잘 안 보려고 그래요. 근데 안 보려고 하면 안 보려고 할수록 어떻게 돼요? 더 내 눈에 나툽니다, 그 사람이. 그게 내 업이라는 거예요. 제가 이제 한 보름 전에 미국을 2주간 다녀왔는데, 저는 이제 미국을 들어가는데, 뉴욕 행사가 있어가지고 들어가는데, 종단 행사가 있었어요. 놀러 간 거 아닙니다. 물론 여행도 했어요. 했는데, 타임스퀘어 참 좋대요. 근데 그 미국을 들어가는데 내가 자리에 쭉 앉았는데, 내 뒷좌석에, 내 바로 옆에 갓난아기가 탄 거예요. 그 비행 시간이 13시간인데, 10시간을 울더라고요. 그것도 이제 좀 장시간이니까, 이제 편하게 간다고 앞에를 탔는데, 앞에가 어딘지 아시죠? 몇 명 못 앉는데. 거기 탔는데 옆에 앉아가지고 10시간을 울어 재끼는데, 나중에 내가 “아, 업보구나.” ‘혼자 평생 편하게 살았으니까 아기를 키우는 게 얼마나 힘든지 한번 경험해 봐라.’ 근데 그 아이가 참 희한하게, 원래 그런가요? 안으면 안 우는데, 놓으면 울더만요. 그래요? 저는 어릴 때 제 큰누이 얘기 들으면, 안아도 안 울고, 놔도 안 울고 했다는데. 10시간 우는데, 내가 마음으로 그때, 이제 처음에는 이렇게 우니까 한두 시간은 그냥 그럴 수 있겠구나. 3시간이 지나니까 단전에서부터 뭔가 쫙 올라와요. 단전에서부터. 그러고 굉장히 예민해져요. 모든 숨구멍이 그 아이의 울음소리로 차기 시작하는 거예요. 그리고 5시간이 딱 지나니까 단전에서 장까지 올라와가지고 장이 뒤집혀요. 밥맛도 없고. 왜냐하면 조용히 살던 사람이. 근데 그 아기가 그냥 우는 게 아니고, 뭐라 할까나 정말로 세게 우는 거 있잖아요. 근데 엄마가 그 누군지, 엄마가 그 아이를 방치해요. 우는데. 아빠가 안아. 엄마, 이러면 또 옆으로 새는데, 어쨌든. 그래서 이제 나중에 한 7, 8시간 지나니까 머리 끝에서 이렇게 뿅 나가더라고요. 뭐가. 그래서 내가 그 순간에 이거 놔야 되겠구나, 이 생각을. 그러면서 이제 마음속으로 마아반야바라밀 마아반야바라밀 마아반야바라밀. 그래서 이제 정근을 하고 있으니까, 애가 울음을 그친 건 아닌데 그다음부터는 내 마음이 요동을 안 치는 거예요. 요동을. 그래서 내가 이게 이것도 하나의 내 마음 수련 과정이구나. 그러고 이제 일정을 마치고 귀국하는데, 똑같이 내가 팔 번이었는데, 육 번에 애가 또 탄 거예요. 근데 그 아이는 단 한 번 안 울어요. 그렇게 순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이게 그 아이의 탓도 있지만 내가 마음을 참 잘 고쳐먹었다, 그 생각을 했습니다. 우리가 이제 자기 업이라고 하는 게 그만큼, 이 어떤 것에 딱 싫은 것에 저 사람들 싫어, 안 봐야 돼, 그러면은 안 봐지는 게 아니고 더 그런 상황들이 내 앞에 나툰다. 그게 업장에서 올라오는 거고, 그게 업력에 의해서 업보를 받게 되는 거거든요. 그래서 제가 이제 어떤 거냐면, 제가 이 안경을 벗고 있는데, 이게 변색 렌즈라고 했잖아요. 요놈이 색깔이 달라지는데, 농도가 달라지는 게 왜 어떻게 달라지냐면, 자외선 농도하고 비례해서 달라집니다. 자외선이 강하면 새까매져요. 안에 들어와서 자외선 없는데 하면 정상 안경이 되고. 그런데 그런 것처럼 내 마음도, 내 마음이라고 하는 이 생각도 그렇게 상황에 따라서 물들어 가는 거란 말이에요. 그래서 그 생각을 우리가 외경계에 따라가지고 쫓아다니다 보면 마음이 물들었다 빠졌다, 물들었다 빠졌다를 반복하는 거예요. 계속. 그래서 우리는 기도를 왜 하냐. 그거를 이겨내려고 기도하는 게 아니에요. 이건 하수 기도입니다. 하수, 하근기 기도. 여러분은 오늘 굉장히 중요한 거를 알게 될 거예요. 왜? 제가 그걸 말씀드릴 거거든요. 그게 뭐냐 하면, 궁금하죠. 기도를 하는 이유는 내 마음에, 내 마음속에 언제나 무량 생명 부처님의 공덕의 빛이 비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겁니다. 밖에서 부처님의 가피를 받아와서 내가 어떠한 소원이나 기도나 성취되는 것이 아니고, 기도를 왜 하느냐, 내 마음에 이미 와 있는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을 확인하기 위해서 기도하는 거예요. 이게 출발점부터 다른 겁니다. 그동안에 기도가 성취가 잘 안 됐다, 기도만 하면 장애가 생긴다, 기도만 하면 자꾸 졸음이 온다, 이거는 밖에서 뭔가를 끄집어 오려고 하기 때문에 그 기도가 그렇게 열리는 겁니다. 그럼 기도를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되느냐. 내 마음에 이미 와 있는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을 깨워내는 게 기도예요. 그거부터 출발해야 되는 거예요. 그러면 그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내 마음에 와 있다는 것을 느끼는 순간, 내가 가지고 있는 이 현상계에 있는 장애는 이미 사라지고 없는 겁니다. 이거를 깨워내고 이거를 연결해야지만이 기도가 되는 거예요. 쉽게 말하면 내가 본래 붓다라고 하는 것을 확실히 내가 내 것으로 만드는 게 기도입니다. 기도를 하면 이 세 가지를 지금부터 말씀드린 대로 내 생명 내 안에 이미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의 와 있다.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그거를 알아야 돼. 그걸 모르고 그렇게 해서 그 마음이 연결돼서 문이, 마음의 문이 활짝 열려야 기도가 성취되는데, 우리는 무명과 가래 때문에, 아까 말씀드렸듯이 무명과 가래 때문에, 이 마음의 문을 꽉 닫아놓고 기도를 하니까 부처님이, 이 안에 있는 부처님하고 내가 바라보는 부처님하고 이렇게 만나가지고 뭔가 이렇게 서로 간에 이게 교합이 돼야 내가 성취가 되는데, 내 마음의 문을 콕 잠가놓고, 뭘로? 가래 욕심으로. 욕심이 뭐냐 하면은 가래니까 미워하는 마음, 싫어하는 마음, 이런 걸로다가 내 마음의 문을 탁 잠가놓고 기도하니까 안 되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우리에게 말씀하신 거는 우리가 이미 다 그러한 부처님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는 거잖아요. 부처님의 씨앗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우리를 뭐라고 불러요? 불자(佛子)라고 부르잖아요. 불자. 불자. 불자를 어떻게 보면은 부처님의 아들, 딸, 아들인가 그렇게 번역하는 그거 틀린 번역이에요. 남자 할 때 남자의 아들입니까? 그 자자는 무음이에요. 해석하면 안 되는 거예요. 불자도 마찬가지예요. 그냥 부처님이라는 뜻입니다, 불자 그러면. 왜? 우리가 내가 이미 부처님의 무량한 공덕 생명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그거를 그 빛을, 내 안에 가지고 있는 그 생명의 무한한 빛을 내가 깨어내는 게 다라니 기도예요. 그 다라니 기도를 하는 이유가 거기 있는 거예요. 그 빛이 깨어나야 내가 살면서 겪는 여러 가지 업으로 인한 그 업장이 녹는다 이거예요. 내가 이생에 와서 지었던 말하고 행동하고 마음먹었던 모든 업장을 녹이는 유일한 빛은 내 마음속에 있는 이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의 빛으로만이 그걸 녹일 수가 있다. 여러분은 엄청난 오늘 보물을 하나 안고 가는 거예요. 내 안에 그런 게 있다고. 이거는 어떠한 현상적인 재물이나 높은 지위나 학력이나 이건 아무 소용없습니다. 이것을 내가 한 번 그 빛을 쬐고 보는 순간, 너무 삶이 여유로워지고 행복하고 장애가 없고 걱정이 사라집니다. 걱정할 때 이제 근심이라는 말이 따라붙잖아요. 근심 걱정 그러는데, 근심 걱정, 근심의 근자가 걱정, 걱정 근자예요. 걱정하다, 염려하다. 근심 걱정으로 가득 내 삶이. 여러분 가만히 보세요. 내가 평소에 근심 걱정을 많이 내 생각에 채우는지, 아니면 좀 아까 말씀드렸듯이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을 내 안에 채우는지. ‘내가 부처님의 무량공덕 생명이 내 안에 있구나’ 이걸 생각하는지 한번 이렇게 스스로가 그거를 잘 생각해 보면은, 금방 본인의 살림살이가 나온단 말이에요. 이게 어느 게 더 낫겠습니까? 근심 걱정보다는 “아, 그래 오늘 스님 말씀하셨는데, 내 안에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환하게 찬란하게 빛나고 있다.” 이 얼마나 큰 보물을 하나 얻어가는 거예요. 부처님께서는 법화경에 이것을 말씀하시려고 일곱 가지 비유로 하신 거예요. 일곱 가지 비유. 하도 못 알아들으니까, 쉽게 말해도 못 알아들으니까 비유를 해서 이제 말씀하신 게 7가지의 비유가 있단 말이에요. 그게 법화칠유(法華七喩)라는 겁니다. 그래서 내가 무량한 공덕 생명을 깨우려면 첫 번째로는 그러하기 때문에 첫 번째 감사한 마음을 가져야 된다. 여러분 아침에 눈 뜰 때마다 “감사합니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부처님. 이렇게 오늘 하루 열게 되어 감사합니다.” 이 감사합니다를 지극하게 마음으로 늘 가지고 있어야 됩니다. 부처님한테 감사한 거예요. 왜? 우리한테 그런 무량한 그런 공덕 생명을 움트게 하고 숨 쉬게 하고 그 빛으로 내가 살아가는 모든 장애를 비춰서 훤히 다 열어주기 때문에 감사하지 아니할 수 없죠. 감사하죠. 땡큐 붓다. 이렇게 해야 되는 거예요. 땡큐 붓다, 고급 영어가 나왔습니다. 땡큐 붓다. 오마이 붓다라고 해야 되나요? 그럼.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두 번째로는 무량 공덕 생명을 움트게 하는, 그걸 더 찬란하게 하는 것은 첫 번째는 감사하는 마음, 두 번째로는 존중하는 마음이에요. 누구를? 나 아닌 타인을, 나 아닌 다른 사람을 존중하는 마음입니다. 존경까지 아니에요. 존중. 그 사람 얘기를 들어주고 존중하는 마음. 첫 번째로는 감사한 마음을 우리가 쉽게 내지 못합니다. 그리고 존중하는 마음은 더욱 그렇죠. 누구를 존중하기보다는 나의 말과 나의 주장을 더. 그리고 그거에 맞지 않으면 미운 마음을 내기 쉽고. 우리가 이생에 벌어진 것 중에 대부분이 누군가의 관계 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이에요. 거기다 근심 걱정이 오거든요. 근데 그 근심 걱정의 안에를 이렇게 들여다보면 결국은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에 그러는 겁니다. 내 뜻대로. 근데 세상에 내 뜻대로 되는 게 있나요? 없습니다. 존중해야 되는 거죠. 존중. 그렇기 때문에 존중해야 된다. 존중하는 생각으로 내 생각을 채워야 된다. 세 번째로는 참회하는 마음을 갖는 겁니다. 참회하는 생각. 그 참회는 내가 원래 업이 많다. 사주팔자가 안 좋다고 참회하는 게 아닙니다. 내가 원래 가지고 있던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을 아직 깨우지 못하고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참회예요. 그 참회는 어떤 죄를 지었기 때문에 그 죄를 뉘우치기 위한 참회가 아니다. 그건 아주 1차적인 차원인 거고, 여기서 참회라고 하는 것은 늘 내가 왜 아직까지 즉 이런 법문을 들었는데도 불구하고, 내 안에 부처님 무량 공덕 생명이 있다고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거를 내가 알아차리지 못하고 내 것으로 만들지 못한 것에 대한 참회. 이 세 가지를 내 생각으로 가득가득 채워야 된다는 거예요. 그래야지만이 나의 법생명이 성장하고, 나의 법생명으로 인해가지고 내가 그동안 느끼지 못했던 가피도, 부처님을 생각하면서 하는 기도도 성취될 수가 있다라는 거예요. 그런데 우리는 그러한 것들을 모르고 작은 거 뭔가, 다라니 하면서도 보세요. 다라니 하면서도. 다라니를 천독을 한다 그랬나요? 단 한 독이라도 지금의 마음, 감사한 마음과 존중하는 마음과 참회하는 마음을 가지고 이 일독을 하게 되면 자기 삶이 바뀔 겁니다. 이 세 개를 다 하기 그러면 한 독할 때 그냥 부처님한테 그 무량한 공덕 생명에 대한 감사한 마음, 내 주위가 부처님의 광명으로 가득 차 있다는 생각을 하면서 일독을 하는 때의 그 마음. 그런데 우리는 이제 절집 도깨비가 돼가지고 눈을 감고 다라니를 외워요. 외우는데 잘 나옵니다. 얼마나 빨리 가는지 몰라요. 나모라 다나다라 야야 나막알약 바로기제 새바라야 모지사다바야 빠르게 해. 근데 마음은 어떤 생각 하고 있어요? 오만 근심과 걱정으로 가득. 그러니까 마음의 문을 닫아놓고 그걸 올린 거예요. 마음의 문을 닫아놓고 계속 문만 두드리는 거야. 천 번 동안. 근데 문을 스스로 잠그고 스스로 열을 내고 하니까 얼마나 애가 탑니까? 그거보다 애타는 게 없죠. 우리 꿈속에서 그런 꿈 가끔 꾸잖아요. 근데 자기 꿈이잖아. 근데 막 꿈속에서 막 몸부림을 쳐요. 근데 안 열려. 이게 얼마나 답답한 일입니까? 왜 그러느냐 하면, 내 생각의 씨앗들을 그렇게 채우지 못했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지금 여러분이 저만 바라보지 마시고 한번 이렇게 눈을 감아보세요. 이렇게 지그시 눈을 감고, 지금 한 5초 동안에 할 테니까, 인례사 스님 죽비를 한번 쳐보세요. 죽비 치면은 5초 동안에 내 주위에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가득 찬 빛이 나를 꽉 비추고 있다. 이거를 5초 동안만 한번 관하도록 하겠습니다. 네. 마음이 흔연해지는 게 마음이 몰랑몰랑해지죠. 그 마음을 가지고 기도를 해야 됩니다. 출발할 때, 절에 와서 진관사 마음의 정원에 와서 부처님한테 딱 삼배할 때에, 내 주위에 모든 것들이 다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으로 빛나고 있다 생각하고서 삼배를 해야 돼요. 그리고 여러분이 일상생활에서도 아침에 일어나서 “아, 오늘도 나의 일상에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가득 빛나고 있구나. 그래서 감사하다. 그리고 나와 함께 살아가는 모든 인연들에게 인연들을 존중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내가 그러한 것들을 완전하게 채우지 못한 나의 생각, 나의 마음에 참회한다.” 이 세 가지만 잘 기억하면 여러분은 예언컨대, 제가 예언을 좋아하는데, 예언컨데 반드시 반드시 부처님이 될 거다. 언제 될지는 모르겠어요. 근데 반드시, 반드시. 근데 이렇게 얘기하니까 어떤 보살님이 저한테 와서, 저 친한 보살님이 “스님 법문은 하나 마나한 소리를 너무 많이 한다고. 스님 법문을 듣다 보면 참 마음에 와닿는데, 나중에 보면 아무것도 안 남는데.” 그래 내가 그래서 법문을 제대로 했다. 들을 때는 간절한데, 듣고 나서 되돌아서면 아무 생각이 안 나. 그게 진짜 법문이에요. 여기 앉아 계신 모든 분들이 언젠가는 다 부처님이 되는데, 그 부처님이 되는 가장 빠른 방법이 내 안에 무량 공덕 생명이 빛나고 있다는 것을 확인하는 겁니다. 부처님의 깨달음의 요체입니다. 그게 부처님이 뭘 깨달았어요? 내가 부처다. 지혜와 자비가 늘 살아 숨쉬는 존재다 라는 걸 당신이 우리에게 역력하게 8만 4천 법문을 통해서 말씀하시는 거잖아요. 저의 예언은 100% 맞습니다. 제가 봄에 와서 얘기했잖아요. 가을이 올 거다. 가을이 오니까 이 진관사의 도량에 오색 단풍이 들어가지고 아름답잖아요. 100%로 맞은 거 아니겠습니까? 중요한 게 더 중요한 게 뭐냐. 그 예언 중에 그때에 건강하게 우리가 다 같이 얼굴 볼 거다. 그게 핵심이에요. 앞에 거 뒤에 거 딱 잘라내고 앞에 것만 생각하면 안 돼. 우리가 그러한 존재이기 때문에 또 언제 만날지 모르겠지만, 그때 우리는 꼭 얼굴에 부처님의 무량 공덕 생명이 빛나는 그러한 불자가 돼서 만나기를 서원하면서 오늘 이야기 접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