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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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6월 6일 음력 5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4-06-06
주제 : 義相祖師法性偈(의상조사법성게) 이야기③ --諸法不動本來寂(제법부동본래적)-- 안녕하십니까. 손을 이렇게 올리시겠습니다. 올리셨어요? 두 손바닥을 이렇게 한번 쳐보세요. 시작. 그리고요. 이렇게 손을 들고 왼손 엄지손가락을 먼저 굽혀서, 하나 둘 셋 넷 다섯 여섯 일곱 여덟 아홉 열까지, 오늘 해야 할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그 구절을 10번을 똑같이 외우겠습니다. 시작.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내리시겠습니다. 오늘 갑진년 5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인데요. 법문 제목은 <의상조사 법성계(義相祖師法性偈)> 두 번째 게송 <제법부동본래적> 그 내용입니다. 이 법성게는 화엄경 종요(宗要)인데, 종요라는 말은 종교라는 종자, 중요할 요자, 뿌리고 줄기다 이 소리예요. 종자는 뿌리라는 말이고, 요 자는 줄기라는 말인데. 이 의상조사법성게는 화음경 종요다 이렇게 가르치고 있어요. 그런데 그중에서도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 무명무상절일체(無名無相絶一切) 증지소지비여경(證知所知非餘境), 이 사구를 깨달을 증자, 증득할 증자, 나눌 분자, 증분(證分)사구라고 그래요. 증분이라고 하는 것은 깨달은 세계를 이야기한 게송이다 이 소리거든요. 깨달은 세계. 그 밑에서부터는 이제 교분이라고 그래가지고, 깨달은 세계를 가르치는 내용이다 이래서, 가르칠 교자, 나눌 분자, 교분(敎分)이라 그래요. 그래서 교분은 26구, 증분은 4구. 이래서 7언 30구. 이 법성게가 구성된 거거든요. 正覺境界 玄極妙體 窮坐實際 眞極法身정각경계 현극묘체 궁좌실제 진극법신法性圓融 無障無礙 諸法不動 本來寂滅법성원융 무장무애 제법부동 본래적멸 何是諸法 法性是也 何故不動 圓融故하시제법 법성시야 하고부동 원융고何故本來寂 無二相故(叢髓錄 法記文)하고본래적 무이상고(총수록 법기문)諸法者 指前法也 不動者 指前性也 性者 無住法性也 제법자 지전법야 부동자 지전성야 성자 무주법성야故此和尙云 約今日五尺身之不動 爲無住也 本來寂者 指 고차화상운 약금일오척신지부동 위무주야 본래적멸 지前無二相也 只是五尺法性 側無餘物 故云本來寂也전무이상야 지시오적법성 측무여물 고운본래적야古記云 表訓德 問和尙言 云何無住 和尙曰 “卽我凡夫 고기운 표훈덕 문화상언 운하무주 화상왈 “즉아범부五尺身 稱於三際 而不動者 是無住也”(叢髓錄 眞記文)오척신 칭어삼제 이부동자 시무주야”(총수록 진기문) 그러니까 이거는 부처님이 깨달은 세계를 이야기하는 거다. 그럼 깨달은 세계가 뭐냐. 정각경계(正覺境界)라 바를 정자고, 깨달을 각자고. 정각경계. 경계라는 말은 세계라는 말과도 틀리고, 지위라는 말과도 틀리고요. 그냥 정각 그 자리에요. 세계는 시간이 있다는 얘긴데, 시간도 없고, 지위는 아래 위가 있다는 얘기인데 아래 위도 없고, 정각 그대로, 정각경계. 이 정각경계인데 이 정각 경계는 현극(玄極)이라. 현묘할 현자하고, 지극할 극자하고. 현극, 생각이 미칠 수가 없다. 오직 삼매로 들어갈 수 있다. 현극이라, 미묘한 몸이다. 이래가지고 묘체라고 하거든요. 현극묘체(玄極妙體). 우리가 지금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거는 다 사라지고 없어지는데, 그 현극묘체는 시간이 없는 곳이라, 미묘한 몸이다. 그리고 궁좌실제(窮坐實際). 궁극적으로 남김없이 진실의 세계에 떡 도달하면, 그게 궁좌실제인데, 진극법신(眞極法身)이다. 아주 진실의 극치, 참 진자, 지극할 극자, 진극의, 진실 극치의 법의 몸이다. 정각경계 현극묘체 궁좌실제 진극법신. 그 세계를 어떻게 말로 표현했느냐 하면, 법성원융(法性圓融), 법성원융이라고 하는 것은 현극묘체요, 진극법신이다. 또 이 법성원융은 무장무애(無障無礙)라. 무장무애. 그걸 법성게에서는 무이상(無二相)이라 이랬거든요. 무이상인데, 무이상은 무장무애, 장애가 하나도 없고 걸림이 하나도 없다. 법성원융이라는 말은 안 통하는 데가 없다, 이 소리예요. 하나에서 모든 것이 통하고 모든 것이 하나로 통하고. 일찰나가 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찰나고. 이렇게 돼서 법성원융 무장무애, 이게 현극묘체 진극법신이다. 이것이 궁좌실제의 경계고, 정각의 경계다. 참 시작부터 겁을 많이 준다, 진짜. 겁 줘, 완전히 겁줘. 제법부동 본래적멸(諸法不動 本來寂滅). 부동이라는 건 뭐냐 하면, 생겼다 사라졌다 생겼다 사라졌다 이게 동이에요. 움직일 동자. 생멸이 동인데, 이 정각의 경계에는 우주만상이 다 생겨도 생긴 게 아니에요. 우주만상이 없어져도 없어지는 게 아니에요. 이게 불생불멸이에요. 그래서 이게 불생불멸을 동하는 것이 없다고 그래가지고 부동이라 그래요. 또 낳다 죽었다 하는 게 없다고 그래가지고 무생이라고 그래요. 무생. 무생 부동. 제법은 뭐냐? 천지만물 우주만법, 인간의 사대오온, 일체 현상을 다 제법이라고 그러는데, 일체 현상을 부처님의 깨달음 삼매로, 정각산매로 딱 들어가 보면, 우주만법이 생겨도 생긴 게 없어요. 없어져도 없어진 게 없어요. 그걸 해인삼매(海印三昧)로, 또 수몽세계로. 해인삼매라고 하는 건 뭐냐 하면 모든 형상의 그림자가 바다에 비추어도 바닷속에 그 비추어진 형상이 없어요. 근데 보이긴 보이는 거예요. 또 그 바다에 비춰졌던 그림자가 없어져도 없어진 게 없어요. 그런데 바다에는 안 보이는 거예요. 또 수몽(睡夢)이라는 건 잠들어서 꿈꿀 때, 잠들어서 꿈을 꾸면 이 꿈이라는 게 언제 시작됐는지 시작을 몰라요. 아무리 머리가 좋은 사람도 내가 꿈을 언제부터 꾸기 시작했나 그거 아는 사람은 없어요. 그리고 꿈을 꿀 때는 그게 꿈인 줄을 몰라요. 꿈을 한창 꿀 때는 그게 꿈인 줄 몰라요. 그런데 꿈에서 깨면 비로소 그때 꿈에서 깼을 때 꿈꾼 걸 알아요. 꿈 깨기 전에 모르거든요. 근데 꿈꾼 걸 이제 꿈에서 깨서 아는데, 그 꿈에서 깬 걸 아는 그 꿈 깬 마음이 언제 사라지는지 몰라요. 내가 꿈꾸다 꿈을 탁 깼잖아요. 그래서 꿈꾸다 깬 거 알죠? 알다 보면 그거 꿈에서 깬 줄을 안 생각이 조금 지나가면 없어지거든요. 근데 그게 언제 없어졌는지도 몰라요. 이거 참 너무 쉬운 거 얘기하나. 이게 제법부동에 대한 설명이에요. 꿈이 났어도 난 게 없고요. 꿈이 사라졌어도 사라진 게 없다. 그러면 왜 이렇게 살고 죽는 게 심각한가. 그 진실을 못 보고 형상만 보기 때문에 그렇다. 이걸 형상이라는 상자, 집착할 집자, 상집이라고 하거든요. 상에 집착하면 나고 죽는 게 있어요. 근데 상에서 진실을 보면 그걸 법성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형상을 말할 때는 제법이라고 하고 형상의 진실을 말할 때는 법성이라고 그래요. 제법은 생로병사가 있는데, 법성은 원융하다, 안 통하는 데가 없다. 그래서 무장무애라, 생로병사는 늘 장애가 따라오는데, 법성은 원융해서 무장무애, 장애가 없다. 이게 이제 해인삼매거든요. 법성게는 이걸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제법은 부동하야, 본래적멸이라. 적멸이라는 건 뭐냐. 나고 죽는 게 아니라는 얘기죠. 나고 죽는 건 생멸인데 나고 죽는 게 아니다. 그럼 뭐냐. 달이 연못 속에 비치면 연못 그 물 깊숙한 데 달이 들어있어요. 그게 보이거든요. 근데 그 달이 연못 속에 들어갔으면, 그 들어간 흔적이 있어야 될 건데, 월천담저수무흔(月穿潭底水無痕)이라. 달이 연못 밑바닥을 뚫고 지나갔는데 물에는 흔적이 없다. 물속으로 뚫고 들어간 흔적이 없거든요. 왜 흔적이 없나? 안 들어갔다는 얘기예요, 달이. 그냥 하늘에 있다는 얘기죠. 하늘에 있어요. 달은 하늘에 있는데, 분명히 연못 속에도 달이 있어요. 이것은 연못 속에 달이 비춰지지만, 사실은 달이 연못 속으로 들어간 게 아니다. 이렇듯이 우리가 나고 죽는 걸 맨날 느끼지만, 이 해인삼매에 딱 들어가 보면 이게 나는 게 나는 게 아니다, 없어지는 게 없어지는 게 아니다. 이걸 불생불멸이라고 하거든요. 불생불멸. 이건 깨달은 세계에요. 그럼 어떻게 하면 이게 느껴지나. 삼매에 들면 돼요. 생각을 딱 멈추고 그 진실의 세계를 가만히 관찰하고 있으면, 달이 연못에서 보이지만, 달이 연못 속으로 들어가지 않았던 것이 환히 보여요. 달이 또 연못 속에서 사라졌지만 진짜 달은 사라진 게 아니라는 것이 환히 보여요. 그래서 이 몸은 생로병사를 하지만, 이 몸의 진실, 즉 허공에 있는 달과 같은 몸의 진실을 가만히 보면, 이거는 달 그림자가 물속에 들어갔다, 물속에서 나왔다 하는 거와 똑같아서 제법이 부동이에요, 이게. 제법은 생멸이 없다. 본래적멸이라. 나고 죽는 게 본래 없다. 이게 깨달은 세계거든요. 제법부동본래적. 손바닥을 한 번 딱 쳤다. 그러면 소리가 나요, 거기서. 근데 이 소리가 나기는 났는데 소리가 온 데가 없어요. 왼손에서 온 것도 아니고 오른손에서 온 것도 아니고. 우리 귀에서 온 것도 아니고. 온 데가 없어요. 또 이게 소리가 사라졌는데 또 사라져서 가는 데가 없어요. 어디로 갔는지. 동쪽으로 갔는지 서쪽으로 갔는지. 이거 참 강원에서 맨날 이런 거 가르쳐요. 이런 거 가르치면 재미없다고 그러거든요. 왜 재미없냐. 이 생각으로 사는 세상하고 틀린 거예요. 생각 세상하고 틀리니까 재미없다고 그러는데, 이게 이제 마음 공부를 조금 시작하면 이게 얼마나 중요한지 몰라요.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는 것은 들려도 들리는 게 없다. 보여도 보이는 게 없다. 이 몸이 죽음을 느끼지만, 사실은 죽음이라는 게 없다. 그건 뭐와 같으냐. 얼음이 녹아도 물은 녹는 게 아니다. 바람이 잠잠해지지만, 공기는 없어지는 게 아니다. 이래서 삼매에 딱 들면 근심 걱정이 하나도 없어요. 그걸 무장무애라 그래요. 근심 걱정 없는 세계가 무장무애의 세계다. 근심 걱정 없는 세계가 법성원융 세계다. 법성원융이라는 게 뭐냐. 하나가 있는 곳에 다섯이 있고, 다섯이 있는 곳에 하나가 있다. 하나가 없으면 넷밖에 안 돼요. 근데 이게 엄지 하나가 있음으로써 이걸 굽히면 다섯이 돼요. 그러니까 이 하나는 다섯과 함께 있고, 다섯은 혼자 다섯이 아니라, 하나와 함께 있는 거예요. 하나라도 빠지면 다섯이 안 되거든요. 이걸 원융이라 그래요. 그리고 세상만사는 인연 따라 이루어지는 거기 때문에 이 엄지손가락이 셀 때는 하나인데, 마칠 때는 열이에요. 하나, 둘, 셋 넷 이래 가지고 셀 때, 시작할 때는 하나인데 끝마칠 때는 열 아니에요. 그래서 이게 손가락 하나가 하나도 됐다가 열도 됐다가 이걸 인연법이라 그래요. 그리고 이 새끼 손가락도 하나, 둘, 셋, 넷 이렇게 세어 나갈 때는 이게 다섯인데, 돌아올 때는 이게 또 여섯이 돼요. 새끼손가락 하나가 다섯도 되고 여섯도 되고. 그리고 시작하는 사람에 따라서 이 새끼 손가락서부터 시작하면 이게 하나가 돼요. 엄지손가락에서 시작하면 엄지손가락이 하나가 돼요. 그러니까 이 세상만사는 인연 따라서 첫째도 될 수 있고, 마지막도 될 수 있고, 중간도 될 수 있고, 이걸 전부 인연법이라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인연법을 깨달으면 장애가 없어요. 하나가 열도 되고 열도 하나가 되고. 하나가 다섯 되고 다섯이 하나가 되고. 물속에 달이 보여도 달이 물속에 들어간 것이 아니고, 물속에 달이 안 보여도 달이 없어진 것이 아니고. 기가 막히지. 기가 막힌 게. 이 땅에서는 밤낮이 있는데 땅에서는, 태양은 밤낮이 없다. 이것도 가르쳐요. 땅에서는 해가 보일 때도 있고 안 보일 때가 있잖아요. 그래서 해가 보일 때는 낮이고, 해가 안 보일 때는 밤이란 말이에요. 근데 해에는 밤낮이 없다. 그거 참 이상해. 그래서 이 삼매에 든 사람은 생사가 없는데 삼매에 들지 못한 사람은 나고 죽음이 있다. 그래서 이 생로병사가 있는 거는, 내가 정신적으로 볼 수 있는 능력이 없을 때는 생로병사가 있는데, 거기서 한 걸음 더 들어가서 삼매에 들면 생로병사는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럼 다 생로병사가 없느냐 그건 아니에요. 마치 꿈을 꿀 때는 꿈이 있는 거거든요. 근데 꿈을 깨고 나면 꿈이 없어요. 꿀 때는 있는데 깰 때는 없다. 그래서 꿈을 못 깬 사람은 꿈이 있고 꿈을 깬 사람은 꿈이 없다. 박수를 치든지 말든지 나는 물이나 한잔 마시고. 아 참 이게 공연히 법성계를 시작해가지고, 얼마나 어렵다고 하는지. 왜냐하면 모르는 소리 하니까 어렵다고 하거든요. 아는 소리만 하면 어렵다고 안 해요. 근데 모르는 소리 하니까 어렵다고 그래. 그러니까 인생은 꿈이다. 꿈이라는 게 뭐냐. 꿈을 꿀 때는 꿈이 있었는데 꿈을 깨고 나면 꿈이 없다. 그럼 그게 뭐냐. 인생은 괴로움이 있다. 깨닫지 못한 사람은 괴로움이 있다. 깨달은 후에는 무장무애라. 괴로움이 없다. 그 누구나 다 괴로움이 없느냐. 아니다. 괴로움이 없는 걸 깨달았을 때 없지, 깨닫기 전에는 괴로움이 있다 이 말이거든요. 如來大醫王 善治煩惱病 여래대의왕 선치번뇌병一念正心現 諸法寂滅相일념정심현 제법적멸상 그래서 여래는, 부처님은, 대의왕이라고 그러는데, 큰 대자, 의원 의자, 임금 왕자, 여래는 대의왕(如來大醫王)인데, 무슨 병을 가르치는 큰 의원이냐. 선치번뇌병(善治煩惱病)이라. 선치라는 건 잘 치료를 한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무슨 병을 잘 치료하느냐. 번뇌병. 범부에게 번뇌병이 있어. 쓸데없이 생각해서 쓸데없이 괴로워하는 거. 한 생각을 가만히 맑히면 문제가 없어요. 한 생각을 일으키면 문제가 생겨. 이게 가장 문제예요. 생각을 일으키면 문제가 생기고, 생각을 안 일으키면 문제가 안 생겨요. 며칠 전에 어느 곳에서 조금 쉬는데, 옆에 할머니들 둘이 앉아서 또 쉬더라고요. 그러면서 얘기를 한참 하는데, 내가 보니까 허리가 많이 굽었고, 지팡이에 의지해서 겨우 다니는데, 하는 얘기는 뭐냐 하면, 전부 시골에 자기 집 땅 있는 거 얘기하고, 서울의 건물에서 세 받는 거 얘기하더라고요. 내가 가만히 쳐다봤어. 저 몸이 며칠 못 살겠는데, 땅 얘기하고 건물 얘기만 해요. 아니, 사람 죽으면 건물이 많아도 아무 소용없고, 땅이 많아도 아무 소용이 없거든요. 그거 나 참 너무. 그러고 이제 가끔 시골에서 기차를 타고 서울에 오다 보면, 용산역이나 영등포역쯤 지나면 할머니 할아버지들이 막 싸워요. 왜 싸우나 가만히 들어보면, 빨리 일어나라고 할머니가 그러면, 할아버지 또 안 일어나. 왜 안 일어나느냐고, 왜 지금부터 일어나냐고 막 싸워. 그래서 그 왜 저럴까 하고 가만히 생각을 해보면, 그 조그마한 이익을 죽을 때까지 붙잡고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할머니가 생각할 때는 빨리 일어나는 것이 이익이 된다고 생각하는 거죠. 이롭다고. 할아버지가 생각할 때는 조금 더 앉아 있는 것이 이롭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그래서 이 생각이 틀린 거예요. 근데 문제는 할머니나 할아버지나 금방 죽기 전까지 그 이로운 거 그거 구하다가 아무 정신도 못 차려. 그리고 어떤 할머니는 너무 기가 막힌 소리를 해요. 요새 이놈의 영감이 도대체 내 말을 안 듣는다고 그래요. 아니 생각을 해보세요. 그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대로 인생 경험이 있고 인생에 다 판단이 있는데 할머니 말을 왜 듣겠어요? 안 듣습니다. 그러니까 절대 말하면 안 돼요. 안 들어요. 또 할아버지는 할아버지 대로 경험이 있고 판단이 있는데 할머니 말 안 듣듯이, 할머니도 마찬가지예요. 할아버지가 하라고 한다고 하겠어요. 이게 전부 이런 거예요. 전부가. 그래서 이런 걸 번뇌병이라 그래요. 번뇌병. 항상 이익만 추구하다가 죽음을 맞이하는 거 이게 번뇌거든요. 맨날 이익을 추구해요. 뭐가 더 좋고 뭐가 더 나쁘냐. 그러다 결론은 죽는 거예요. 결론은. 그래서 탐생에 불각사(貪生 不覺死)라. 사는 것만 탐하다가 죽는 거를 모른다. 오늘도 살려고 산에 올라가는데요. 산에서 못 내려오는 사람도 있어요. 사고가 얼마나 많이 나는지. 종종 보면 북한산에 헬기 뜨거든요. 사고 났다는 얘기예요. 죽는 건 다 같이 느끼는데 사는 것만 탐하다가 죽어요. 이게 번뇌병이야. 죽음을 앞에 두고도 사는 것만 생각하는 거. 그래서 이런 번뇌병을 잘 치료하는 것이 부처님인데, 그래서 여래는 대의왕이라고 한다. 큰 의원 중에도 가장 으뜸가는 의원이다 이거죠. 그러면 병을 치료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일념정심현(一念正心現)이면, 한 생각이 번뇌망상에 전혀 물들지 않고, 그 마음 그대로를 바를 정자, 마음 심자, 정심이라고 하거든요. 한 생각이 마음 그대로 나타나는 거를 일념정심이라고 그래요. 여기에 하늘이라는 생각도 끼어들지 않았고, 땅이라는 생각도 끼어들지 않았고, 사람이라는 생각도 끼어들지 않았고, 한 생각에 일체 티끌이 끼어들지 않은, 거기에 붙어 있지 않은 그 본래의 마음을 바를 정자 마음 심자, 정심이라고 그래요. 한 생각에 정심이 그대로 나타나면 어떻게 되냐. 제법이 적멸상(諸法寂滅相)이라. 모든 현상이 불생불멸의 모습이다, 이렇게 가르치는 거예요. 이게 사라지는 속에도 일어남이 있고, 일어나는 속에도 사라짐이 있는데, 생각으로는 제법의 형상만 보기 때문에, 사라지는 것만 보고 일어나는 것만 보고, 이래요. 이래서 하나를 피하고, 하나를 얻고, 또 하나 얻고, 하나 피하고, 이걸 전도몽상이라고 그러거든요. 있는 거는 영원히 있는 게 아니고 없는 것이 또 그 안에 있어요. 있는 속에 없는 게 있어요. 이거 참 무슨 소린지 진짜 이 옛날에 강원에서 글 배울 때요, 강사 스님이 경을 막 새겨줘요. 새겨주다가 가끔 가끔 뭐라고 했느냐 하면요. “무슨 소리인지 나도 하나도 모르겠다” 이래요. 그러면 그 말은 귀가 번쩍 띄어요. 아, 나만 모르는 게 아니라 선생님도 모르네. 뭐 이래가지고 아이고 얼마나 반가운지 몰라요. 그런 게 있는데 이걸 깊이 깊이 관찰 통달이라고 그러는데, 관찰하고 통달하면 없는 속에도 있는 것이 있어요. 있는 속에도 없는 것이 있고. (박수)아무 때나 쳐서 호응하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인생은 관찰이다. 인생은 통달이다. 인생은 많이 이루어서 되는 게 아니라, 관찰해서 된다 이래요. 성취냐 관찰이냐. 이거 또 무슨 소리야? 도대체. 가만히 관찰해 보면 없는 게 하나도 없어요. 근데 내 생각으로 보면 없는 게 많거든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서 지혜가 높은 사람은 없는 게 없는 것을 보는 거예요. 없는 것이 없는 걸 보고 살아라 이거예요. 그게 관찰 통달이에요. 근데 나이가 100살이 됐다. 100살이 돼서도 그게 좋은 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나이가 60에 죽었다. 60에 죽어도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얼마를 더 살고 안 살고 그건 아무 의미가 없어요. 어떤 사람은 자기 부인이 돌아가셨는데, 노래를 부르고 막 물동이를 두드렸어요. 왜 그러냐. 이 사람은 오늘로써 몸의 고통은 완전히 없어졌다. 그러니까 몸의 고통이 없어진 걸 나는 축하한다 이거예요. 그런데 이거 보통 사람이 이래 하면 미쳤다고 안 하겠어요. 사람이 죽었는데 왜 물동이 두드리고 노래하느냐. 그런데 거기에 깊이 보면 깊은 뜻이 있는 거예요. 그래서 사는 속에도 고통이 있고, 죽는 속에도 고통이 없는 도리가 있는데, 사람에 따라서 살고 죽는 건 전혀 의미가 없고, 문제는 이 삶이 뭐며, 죽음이 뭔가를 관찰하고 통달하면, 이 죽고 사는 속에도 물속에 달이 있지만 진짜 달은 하늘에 있다는 걸 알듯이 아무 장애가 없어요. 그걸 법성원융 무장무애라고 하거든요. 죽는 속에도 사는 게 있고, 사는 속에도 죽는 게 있고, 하나 속에도 여럿이 있고, 여럿 속에도 하나가 있어서 이 세상에 어떤 거 하고도 장애가 없어요. 번뇌병이 없어. 그걸 법성원융무장무애 제법부동 본래적멸 이렇게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근데 이거는 깨달은 세계를 이야기하기 때문에, 이걸 생각으로 알아들으려면 뭐 그 긴가 민가하고 속이 좀 답답해요. 그런데 꿈을 꾸면서도 꿈에서 깬 사람의 이야기를 들으면, ‘아 자기는 꿈속에 있지만은 꿈 밖에 사람도 있고 말소리도 있는가’보다 이걸 알게 되거든요. 그래서 아주 중요해요. 이게. 이게 이걸 들어놓으면 다 이 세계에 가게 되고 이 세계를 깨닫게 돼요. 그래서 지금 몰라도 이게 전부 법문 들은 인연이 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통도사 극락암에 경봉 큰스님이 법문하실 때 꼭 하신 말씀이, 이 법문이라고 하는 걸 알라고 생각하지 마라. 알려고 생각하지 말고 그냥 들어라. 들으면 듣는 순간부터 이익이 된다 이랬어요. 법문을 그냥 들으면 듣는 순간부터 이익이 된다. 그래서 그분이 늘 비유로 말씀하시기를, 몸에 좋은 보약은 그 보약이 뭔지 모르고 먹어도 먹기만 하면 몸에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법문은 아는 게 아니에요. 믿고 이루는 거예요. 믿고 이루는 게 법문이지, 들어서 아는 게 아니에요. 그래서 경전 끝에는 늘 신수봉행(信受奉行) 대원성취(大願成就) 이런 게 있거든요. 믿고 받고 받들어 행해서 대원을 성취한다 이거거든요. 그러니까 몰라도 그냥 들어요. 들으면 다 그게 이익이 돼요. 법성원융 무장무애 제법부동 본래적멸. 알면 그대로 거기 다 있는데 그걸 몰랐다 해도 그걸 듣는 것 자체가 큰 이익이다 이 말이죠. 그것도 10번씩이나 외웠으니 얼마나 이익이여, 그게. 보통 이익이 아니잖아요. 10번씩이나 외웠으니. 八識妄心 自生分別팔식망심 자생분별寂滅寶宮 虛受生滅적멸보궁 허수생멸 그래가지고 제법이 적멸상인데, 제법이 생사 없는 세계인데, 그럼 생사 없는 세계에서 왜 생사를 느끼느냐. 그걸 번뇌망상이라고 하고 팔식망심(八識妄心)이라 그래요. 이제 생각이 8가지가 있는데 그걸 팔식이라고 하거든요. 그 팔식이라는 놈은 늘 생각하는 것이 이 몸만 위해서 생각을 해요. 몸만 위해서 그래서 그걸 허망할 망자, 마음 심자, 팔식망심이라고 하거든요. 이 팔식망심이 자생분별(自生分別)해서 스스로 이걸 있다 하고 생각을 내요. 분별은 생각을 낸단 말인데, 이걸 또 이걸 사라지면 이걸 없는 것이라고 생각을 내요. 근데 사실은 이게 생겨도 생긴 게 아니거든요. 이게 사라져도 사라지는 게 아니거든요. 촛불이 탁 켜져도 그게 생긴 게 아니에요. 그냥 보일 뿐이에요. 보인다고 다 있는 건 아니거든요. 또 촛불이 꺼져도 그게 없어진 게 아니에요. 그런데 팔식이라는 놈은 보이면 생겼다고 하고, 안 보이면 없어졌다고 하고. 이걸 자생분별이라고 그래요. 스스로 분별심을 낸다. 스스로 다르다는 생각을 낸다 이거죠. 그래서 적멸보궁(寂滅寶宮)에서 적멸한 세계에서 허수생멸(虛受生滅)이라. 헛되이 나고 죽는 고통을 받는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이게 불교거든요. 佛身充滿於法界 普現一切衆生前 불신충만어법계 보현일체중생전隨緣赴感未不周 而恒處此菩提座 수연부감미부주 이항처자보리좌(華嚴經 如來現相品)(화엄경 여래현상품) 그리고 화엄경 여래현상품(華嚴經 如來現相品)이라는 데서는, 이 깨달은, 법성원융 무장무애를 깨달은 그 부처님의 세계를 게송으로 전하는 게 있는데, 깨닫고 보니까 그 진여불성이, 진여라는 건 생별 없는 아는 성품이, 진여 불성, 이 진여불성이 깨닫는 순간에 불신광명이 돼요. 부처님 몸 광명이 돼요. 깨닫기 전에는 진여불성이고 깨달은 후에는 불신 광명이라, 부처님 몸 광명이 된다. 이거를 이제 번뇌망상하고, 또 각지광명하고, 깨달은 지혜 광명하고, 깨닫기 전에는 꿈이 없는데 꿈속에서 느끼듯이 번뇌망상이라고 그래요. 그걸 깨달은 후에는 깨달은 지혜 광명이 있어, 그게 원만보신인데. 뭔 소리인지 진짜 모르겠다. 이거 진짜. 근데 이런 소리 안 하면 안 되거든요. 깨닫기 전에는 번뇌 망상이고 깨달은 후에는 지혜 광명이다. 깨달은 후에는 지혜 광명이고 깨닫기 전에는 번뇌 망상이다. 그런데 이 지혜 광명이 부처님 몸이다, 불신이다. 그래서 깨달은 후에 이 부처님의 이 깨달은 지혜 광명이 온 세상에 없는 데가 없어요. 이걸 불신이 충만어법계라(佛身充滿於法界). 부처님 몸이 법계에 가득하다. 이렇게 가르쳐요. 불신이 충만어법계하여, 보현일체중생전(普現一切衆生前)이라. 일체 중생 앞에 다 나타나 있다. 그러면 여기에도 부처님 몸이 들어있고, 우리 몸에도 들어있고, 저 티끌티끌에도 들어있고, 손을 이렇게 이제 올리면, 이게 생각으로 보면 손인데, 이 부처님 깨달은 지혜를 보면 이게 부처님 지혜 광명이에요. 그래서 큰 스님들이 법문할 때 주장자를 탁, 여기에 지혜 광명이 있다 이 소리예요. 생각으로 보면 막대기인데, 지혜로 보면 이게 지혜 광명이란 말이야. 보현일체중생전이라 일체중생 앞에 지혜광명이 다 나타나 있는 거예요. 다 나타나 있다 이 말이지. 그래서 이렇게 꽃 한송이를 보이기도 하고, 꽃이 그게 꽃이 아니라 지혜 광명이라 이 말이에요. 손을 이렇게 보이기도 하고 다른 물건을 이렇게 들어서 보이기도 하고, 수연부감미부주(隨緣赴感未不周)나, 인연 따라서 두루하지 아니한 데가 없으나 이항처차보리좌(而恒處此菩提座)라. 항상 그 깨달은 자리에 전혀 움직이는 게 아니다. 움직임이 없이 두루하고 두루함이 없이 그 움직임이 없다. 맨날 이렇게 가르쳐요. 맨날. 천날만날 이렇게 가르쳐요. 그런데 이런 법문을 듣고 발심을 할 수가 있어요. 나도 한번 깊은 세계에 한번 들어가 봐야 되겠다. 또 이런 법문을 듣고 그 자리에서 깨닫는 사람도 있어요. 근데 이 깨달음이라는 게 부처님 깨달음하고 보통 사람 깨달음하고 달라요. 부처님은 깨닫는 순간에 일체 번뇌 망상이 하나도 없었어요. 이걸 돈오돈수(頓悟頓修)라 그래요. 금방 깨닫는 순간에 다 닦았다. 그런데 이제 보통 사람은 알기는 아는데 번뇌망상은 여전히 일어나는 거예요. 이 무장무애 세계를 알았어, 깨달음을 통해서. 근데 근심 걱정 번뇌 망상은 여전히 일어나. 이럴 때는 어떻게 되냐. 그 근심 걱정 번뇌 망상이 안 일어날 때까지 더 닦아야 돼요. 이걸 돈오점수(頓悟漸修)라고 그래요. 깨달은 후에도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사람이 있고, 부처님은 깨닫는 순간에 번뇌 망상 안 일어났어. 번뇌 망상이 아예 안 일어나는 사람이 있는데, 깨닫기는 깨달았는데 번뇌 망상이 일어나는 경우에는 번뇌 망상이 안 일어날 때까지 계속 더 닦으면 된다. 그래서 그걸 큰스님들이 비유로 말할 때 태양이 딱 떴는데, 태양이 딱 뜰 때 높은 산은 바로 환하게 밝았는데요. 깊은 골짜기는 아 이게 금방 밝는 게 아니라 해가 점점 높이 솟아올라와야 깊은 골짜기까지 완전히 비춰진다. 근데 높은 봉우리는 금방 그냥 환하게 밝아버리잖아요. 그거와 똑같다. 그리고 어린아이가 처음에 태어났는데, 뭐 눈도 있고, 코도 있고, 몸도 있고, 있는 건 다 있어요. 있는 거 다 있는데, 걷지도 못하고, 힘을 못 써. 근데 이게 점점 세월이 지나가서 잘 먹고 잘 크면 나중에는 완전히 이제 장성을 해가지고 어른이 된다 이거죠. 그러면 처음에 어린아이가 태어난 것은 그 법성이 원융하고 무장무애한 것을 깨달은 거예요. 근데 그 어린아이가 힘을 못 쓰는 거는 깨닫기는 깨달았는데 과거에서부터 늘 해오던 번뇌 망상은 그대로 일어나고 근심 걱정은 그대로 있다. 그러니까 아이가 클 때까지 잘 키워야 되듯이, 번뇌 망상이 아무것도 안 일어날 때까지 계속 더 닦으면 되는 거예요. 그게 궁좌실제중도상이라고 그래요. 그걸 궁좌실제, 궁극적으로 실제의 중도상의 도달한다. 앉는다는 건 도달한다는 말이거든요. 이게 이제 화엄경 도리에요. 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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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6월 6일 49재 법문
종범스님 2024-06-06
불교는 팔만대장경이라고 하는 불교 경전과 달마대사를 비롯한 역대 조사(祖師)와 -할아버지 조자, 스승 사자, 높은 스승이다, 이 뜻이죠. 그리고- 미진수 천하 선지식, -미진수라는 거는 가는 티끌과 같은 숫자, 한없이 많은 세상에 선지식이라는 건 착할 선자, 지식이라는 지식인데, 잘 깨닫고 중생을 잘 인도한다, 잘 깨닫고 잘 인도한다, 이제 그런 뜻으로 선지식이라고 하는데,- 그런 선지식의 가르침에 의해서 지금까지 세상에 잘 전해지고 있어요. 경전과 역대 조사와 천하 선지식의 가르침으로 전해지는 게 불교다. 그럼 뭘 가르치고 뭘 전하느냐. 생사가 있고, 나고 죽는 거, 일심이 있는데, 한 일자 마음 심자, 한마음, 생사와 일심이다. 생사는 수몽(睡夢)이다. 잠잘 수자, 꿈 몽자. 나고 죽는 생사는 잠든 속에서 꿈꾸는 일과 같다, 이렇게 가르쳐요. 생사는 수몽이다. 일심은 영광이다. 신령 영자 빛 광자. 신령스러운 광명이다. 그래서 생사는 꿈꾸는 일이오, 한마음은 신령스러운 일이다.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그래서 이 49재는 잠들어서 꿈꾸는 일에 그런 잡념 번뇌를 훌훌 털고 신령스러운 마음의 극락세계로 가십시오. 이런 의식을 받들어 모시는 것이 49재입니다. 그걸 봉행(奉行)이라고 그래요. 받들 봉자, 행할 행자. 三界衆生 至于今日 삼계중생 지우금일我執妄見 顚倒迷惑 아집망견 전도미혹見聞覺知 受想行識 견문각지 수상행식生老病死 憂悲苦惱생로병사 우비고뇌 六道昇沈 不斷不息육도승침 부단불식 그럼 지금 시작한 경문이 뭐냐 하면, 삼계중생(三界衆生)이, 삼계는 생사를 받는 중생을 말해요. 지우금일(至于今日)토록, 오늘에 이르도록 아집망견(我執妄見)으로, 일심 영광에는 아집이 없는데, 이 수몽 생사에는 아집이 있어요. 뭘 나라고 하느냐. 이 몸. 이건 부모에게서 받은 건데, 부모에게 받은 몸을 나라 그래요. 그걸 아집이라 그래요. 근데 그런 아집은 내가 안 죽으려고 해도 죽고, 내가 안 늙으려고 해도 늙어서,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꼭 내 마음대로 됐으면 좋겠다고 집착을 하고, 또 자기 생각대로 됐으면 좋겠다고 집착을 해서 그걸 아집망견이라 그래요. 아집망견. 허망한 견해다. 그래가지고 전도미혹(顚倒迷惑)을 해요. 전도라는 건 뒤바뀌었다는 얘긴데, 금방 사라지는 거를 오래가도록 바라고, 허망한 것을 진실하다고 생각하고, 이래서 전도의 어리석음으로 항상 나를 위해서 견문각지(見聞覺知)하고 뭐를 볼 때도 나를 위해서 보고 이게 아집망견 때문에 그래요. 뭘 들을 때도 나를 위해서 듣고, 뭘 먹을 때도 나를 위해서 먹고, 뭐 생각할 때도 나를 위해서 생각하고, 그래서 보통 범부들은 하나하나 하는 게 전부 자기를 위한 일이에요. 그래서 좋은 일할 때도 자기한테 좋으니까 하는 거예요. 나쁜 일 할 때도 자기한테 좋으니까 나쁜 일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좋고 나쁜 거가 전부 나의 집착으로 펼쳐지는 일이다. 그렇게 가르쳐요. 부모한테 잘하는 것도, 부모한테 잘하면 나에게 좋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잘해요. 근데 부모한테 잘해봐야 아무 소용없다 이런 믿음이 있으면 잘 안 해요. 이게 전부 아집망견이라고 하거든요. 그래가지고 견문각지, 보고 듣고 느끼고 인식하고, 또 수상행식(受想行識), 감수성, 상상성, 행동성, 인식성, 이런 것이 전부 나를 위해서 평생 움직이고 있어요. 그러면 이걸 업이라고 하는데 업은 행위인데요. 행위가 계속 쌓이고 쌓이고 쌓이면 그게 세력이 돼버려. 이걸 업력이라 그래요. 힘 력자. 업력. 업력이 진짜 무서운 거예요. 늘 화를 내 버릇하면 그게 화를 내 버릇하는 게 힘이 돼 가지고 화를 잘 내요. 게으른 걸 계속하면 게으른 것에서 힘이 생겨서 잘 게을러요. 그래서 이 업력이 진짜 무섭다. 이 잠을 많이 자 버릇하면 잠 많이 자는 게 힘이 생겨서 잠 잘 자요. 그래서 이런 업력으로 생로병사(生老病死), 낳다 늙었다 병들었다 죽는 거를 항상 느끼고 있어요. 우비고뇌(憂悲苦惱), 근심 걱정이 항상 따라다녀요. 그래서 육도승침(六道昇沈)이라, 불교에서 가르칠 때, 범부가 머무는 곳이 6곳이 있는데, 지옥, 아귀, 축생은 안 좋은 곳이고, 인간, 천상, 아수라는 좋은 곳인데, 그 업력에 따라서 나쁜 데도 누가 오라는 데 없는데 스스로 가고, 좋은데도 누가 오지 말라는 데 없는데 스스로 못 가고. 이런다고 가르쳐요. 이걸 승침이라 그래요. 오르락내리락하는 거, 좋은 데로 갔다 나쁜 데로 갔다, 이런 거를 부단불식(不斷不息)이라 끊지도 못하고 쉬지도 못한다. 그래서 항상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게 나를 위해서 보고, 나를 위해서 듣고, 나를 위해서 느끼고, 나를 위해서 생각하고. 근데 이 나라는 건 허망해서, 나라는 것이 허망하다는 걸 불교에서는 인생무상이라고 가르쳐요. 인생은 무상하다. 사라지는데 그 사라지는 데 만족하지 않고 또 다른 데로 가려고 또 원을 해요. 이걸 생사윤회라고 가르치고. 인생무상 생사윤회. 이게 이제 범부 세계인데, 이런 범부들을 극락세계로 인도할 때는 첫째로 죽음이 없는 마음이 있다라는 걸 확실히 가르쳐요. 죽음이 없는 마음이 있다. 長靈一物이장영일물이蓋天蓋地개천개지하나니歷千劫而不古역천겁이불고하고亘萬歲而長今긍만세이장금이라不曰神乎 昭昭於俯仰之間 隱隱於視聽之際불왈신호아 소소어부앙지간하고 은은어시청지제로다不曰玄乎 先天地而無其始 後天地而無其終불왈현호아 선천지이무기시하고 후전지이무기종이로다나무아미타불 아미타불이라는 게 죽음이 없는 부처님이다 이 소리예요. 아미타라는 건 무량수인데 죽음이 없다. 아미타. 그러면 그 죽음이 없는 부처님이 이름이 아미타불인데, 죽음이 없는 부처님이 계시는 데는 다 극락세계다. 그래서 아미타불 극락세계. 그렇다면 이 삶과 죽음에 계속 시달리는 범부들은 가는 데마다 고통이 따라요. 그걸 사바세계라고 그래요. 사바세계는 고통과 즐거움이 항상 바뀐다 이 말이거든요. 극락세계는 고통은 없고 즐거움으로만 가득한데, 이걸 무진장엄이라. 장엄이라는 건 여러 가지 꾸며서 만드는 걸 말하는데, 끝없는 장엄세계다. 끝없는 광명 세계다. 끝없는 즐거움으로만 가득하다. 그래서 그걸 극락이라고 하거든요. 지극한 즐거움이라고. 근데 거기 어떻게 가냐. 한마음으로 돌아가야 가요. 생각으로는 못 가. 생각은 늘 경계에 따라서 변하니까, 나무 보던 생각이 산 보면 생각이 산으로 바뀌어요. 또 산 보던 사람이 사람 보면 또 생각이 사람으로 바뀌어요. 그래서 끝없는 나그네 생활하는 게 생각이에요. 어릴 때 좋았던 게 나이 들면 안 좋아요. 젊은 사람이 보는 생각하고 나이 든 사람이 보는 생각하고 틀려요. 어떤 30대 부부가 아이를 하나 사이에다 두고, 아주 귀엽게 예쁘게 아이를 데리고 가는데, 옆에 어떤 할머니가 지나가다 그걸 보고, “잘 키워봐야 소용없어. 잘 키워봐야 소용없어.” 이러고 지나갔어요. 그러니까 그 30대 부모가 아주 황당했어. 저 노인네가 왜 저러나. 근데 그 노인이 볼 때는 애들 잘 키워놨더니 전부 저 살겠다고 떠나가 버린 거예요. 그걸 요즘 말로 먹튀라고 하거든요. 먹고 튄다고. 그러니까 이 사람 종자는 키워놓으면 먹튀 된다. 자기 경험으로 안 거예요. 그러니까 처음에 젊은 부부는 그걸 알 수가 없죠. 이 생각은 사람에 따라서 다 다르고, 어제 생각 다르고 오늘 생각 다르고 내일 생각도 다르고 이거를 나그네라고 그래요. 나그네. 생각은 나그네다. 그런데 그 생각 속에 생각을 다 가라앉혀서 가만히 들어가면 그걸 삼매라고 그러는데, 생각 속으로 들어간다, 생각에 쫓아가지 않는다. 그 생각을 딱 멈추고 마음의 진실상을 딱 본다. 그래서 삼매는 멈추고 보는 거예요. 석가모니가 이걸로 이제 깨달은 거예요. 멈추고 보는 행동으로 멈추고 보면 보여요. 근데 생각 쫓아가면 나그네가 돼버려. 못 봐. 그냥 생각을 딱 멈추고 깊이 깊이 보면 거기에는 길이길이 신령스러운 일심이 있는데, 한마음. 그 일심은 이 몸이 태어날 때 시작이 아니고 이 몸이 죽을 때 끝이 아니다. 이걸 무시무종이라 그래요. 일심은. 이 몸이 시작할 때 시작도 아니고 이 몸이 마칠 때 마침도 아니겠어서 시간이 없어요. 부처님 표정 보면 그 삼매에 든 표정을 만들어요. 부처님은 생각으로 쫓아다니는 표정이 아니라 삼매에 든 표정을 조성한 게 부처님 상이에요. 그래서 신령스러운 영광 일심, 신령스러운 광명의 한마음, 일심영광 그 속에 딱 들어가면 시간이 전혀 없어요. 그걸 장영일물(長靈一物)이라. 길이길이 신령스러운 한 물건이다. 장영일물, 긴 장자 신령스러운 영자. 그리고 거기는 공간이 없어요. 동쪽도 없고 서쪽도 없고 그냥 온 우주가 한 공간이에요. 그걸 극락세계라고 그래요. 공간 없는 장소가 극락세계다. 이 공간이 있으면 이쪽 다르고 저쪽 다르고 해서 뭔가가 이게 다를 텐데 공간이 없는 장소예요. 그래서 그거를 어려운 말로 그냥 충만하다 그래, 충만. 꽉 찼다. 또 변만이라, 두루 꽉 찼다. 또 변조라. 두룻이 비춘다. 그게 이제 극락세계인데 부처님이 항상 거기 계신단 말이지. 그래서 그 세계는 역 천겁이 불고(歷千劫而不古)하고, 천겁을 지나도 옛날이 되는 게 아니고, 긍만세이장금(亘萬歲而長今)이라, 만년이 펼쳐져도 길이길이 지금 이 순간이다. 그러니까 이 삼매에 한 번 들면 이렇게 좋아요. 탁 들면. 온 세계에 충만하고, 온 시간이 전혀 없고, 그래서 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능력대로 느껴요. 즐거움이 많은 사람은 긴 시간을 짧게 느끼고, 괴로움이 많은 사람은 짧은 시간을 길게 느껴요. 그래서 지옥 시간하고 천상 시간하고는 전혀 틀려요. 행복한 사람 시간하고 힘든 사람 시간은 전혀 틀려요. 나이 많은 사람 시간하고 젊은 사람 시간하고 전혀 틀려요. 80 먹은 사람 시간하고, 50 먹은 사람 시간하고는 완전히 틀려요. 50 먹은 사람은 쓸데없이 바빠. 근데 80 넘어보면요, 이게 뭐 하루가 1초 같아, 하루가. 왜냐하면 꾸물꾸물하다 보면 하루 다 갔거든. 그래서 시간은 자기 능력에 의해서 느껴지는 게 시간이다. 정해진 게 절대 없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산매의 가르침이거든요. 삼매에 잠시 들었는데 하루가 지났더라. 그럼 그래서 긍만세이장금이라, 만세, 만년을 펼쳐졌는데 길이길이 현재다. 불왈신호(不曰神乎)아, 이게 신령스럽지 않은가. 근데 이게 딴 데 있는 게 아니고, 소소어부앙지간(昭昭於俯仰之間)하고, 일어날 때, 구부릴 때, 몸을 움직일 때 그 속에 다 들어있다 이거예요. 밝을 소자. 우리가 눈으로 딱 보는 것 같지만, 그 보는데 그 신령스러운 마음이 들어있어요. 말하는데 또 그 신령스러운 마음이 들어있어. 근데 그걸 모를 뿐이에요. 소소라는 건 밝은 소자가 있는데, 부앙이라는 건 몸을 움직이는 걸 말하는데, 구부릴 부, 일어날 앙, 몸을 움직이는 데 아주 밝고 밝게 거기 들어있다. 또 은은어시청지제(隱隱於視聽之際)라, 보고 듣는데 은은히 거기 다 숨어 있어. 드러나 있고 숨어 있다. 그게 뭐와 같으냐. 얼음에 물이 있는 거와 같다. 보기에는 얼음덩어리인데 그 물이 들어 있어요. 근데 얼음만 보면 물을 못 보죠. 바람에 공기가 있는 거와 같다. 느끼는 건 바람인데 그 공기가 들어있다. 어떻게 아냐, 그거를. 자세히 보면 알 듯이, 보고 듣고 움직이는데 거기에 일심영광이 들어있다. 한마음 신령스러운 광명이 거기 들어있다. 이제 석가모니나 역대 조사나 천하 선지식은 그걸 깨달아서 아는 분들이고, 또 모르는 분들은 그분의 가르침을 깨달아서 그걸 깨닫기도 하고, 극락세계도 가고, 그게 불교죠. 불왈현호아(不曰玄乎), 현묘하지 아니한가 선천지이무기시(先天地而無其始)하고, 그 한마음 신령스러운 광명은 선천지, 천지보다도 먼저 있어서 시작이 없어요. 후전지이무기종(後天地而無其終)이라, 천지보다도 뒤에까지 있어서 끝이 없다. 그 세계가 바로 극락세계다 이거에요. 생각이 괴로우면 가는 데마다 고통이 따르는데, 생각이 지혜로우면 가는 데마다 극락이다. 그런데 이제 佛身普遍十方中 三世一切同불신보변시방중 삼세여래일체동廣大願雲恒不盡 汪洋覺海渺難窮(華嚴大禮14禮)광대원운이 항부진하야 왕양각해가 묘란궁이로다(화엄대예14예)나무아미타불 이게 한마음은 다 가지고 있는데, 깨닫지 못한 범부는 종성일심이라고 그래요. 종자 종자, 성품 성자. 이걸 종자로 가지고 있어요. 종성일심. 근데 이제 한마음을 깨달은 분은 영광일심이라, 신령스러운 광명의 한 마음으로 가지고 있다. 그래서 종성이냐 영광이냐. 일심이 잠들었을 적에는 꿈이 되고, 일심이 꿈 깼을 때는 낮이 되는데, 그 낮 속에는 영광이 들어있다. 그래서 이게 3단계죠. 우리가 꿈의 세계가 있고, 꿈에서 깨어난 생각의 세계가 있고, 그 밑에 일심 신령스러운 광명의 세계가 있다. 이게 불교의 가르침이에요. 그러면 그 일심은 청정하다. 거기에는 하나도 뒤섞인 게 없어요. 그래서 청정이라 그래요. 아주 순금과 같이 뒤섞인 게 없는 거. 일심은 영광이다. 일심은 신령스러운 광명이다. 환히 비춘다. 또 일심은 비원(悲願)이다. 일심은 항상 여러 범부 중생들을 보살피게 돼 있어요. 그걸 자비 원력이라고, 자비라는 비자하고, 원하는 힘, 원할 원자, 힘력자, 원력이라고. 한마음 하면 청정, 한마음 하면 영광, 한 마음 하면 비원. 이 마음 광명이 되면 저절로 힘든 사람들을 이끌게 돼 있어요. 마음이 고통을 받을 때는 힘든 사람을 봐도 못 이끌어요. 이제 해가 구름이 없으면 저절로 비추듯이, 한마음이 신령스러운 광명으로 돌아가면 사람을 저절로 이끌게 돼 있어요. 이걸 비원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부처님이 일부러 극락세계로 인도하는 게 아니라, 저절로, 해가 저절로 밝듯이 물이 저절로 흐르듯이 극락세계로 인도하신다. 이게 부처님의 가르침이거든요. 그래서 광대원운이 항부진(廣大願雲恒不盡)하고, 그 넓고 큰 원력의 구름이 항상 다함이없고, 왕양각해(汪洋覺海)가, 그 넓고 넓은 부처님 마음 세계가 이루 생각할 수가 없다. 화엄경에 있는 말씀인데, 이게 그 깨달은 부처님의 세계예요. 못 깨달은 이제 범부의 세계는 이 꿈꾸는 거와 같이 늘 자기를 위해서 살다가 고통에 빠지고, 그러니까 이 부처님의 말씀을 잘 듣고 신령스러운 한마음으로 돌아가서 바로 극락세계 가십시오 하는 거거든요. 영가 지심제청 지심제수西方淨土 極樂世界 서방정토 극락세계에華藏莊嚴 無盡具足 화장장엄이 무진하고 구족하니直得往生 直得往生 직득왕생하시고 직득왕생하시어 受用萬福 受用萬福 수용만복하시고 수용만복하소서 나무아미타불 정토라는 건 깨끗하다는 말이거든요. 깨끗한 세계, 정토인데, 이 서방이라는 거는 이 동아시아에서 방소를 말할 때 서방은 백이라 이래요. 북방은 흙이고, 난방은 적이고, 동방은 청이고, 중방은 황이고, 누를 황자, 서방은 백이다. 이 서방은 흰 백자 백토라고 해서 그걸 쓰는 거예요. 서방정토(西方淨土) 그러니까 여기는 더러운 게 하나도 없고 청정 청백 그것밖에 없다 이 말이죠. 서방. 또 완전히 깨끗한 국토다. 그래서 서방정토. 거기는 늘 일심영광이 비추는 곳이니까 극락세계다. 또 거기는 화장장엄(華藏莊嚴)이다. 여러 가지 장엄이, 화장이라는 거는 꽃 화자, 감출 장자인데 좋은 것이 가득한 이 말이죠. 좋은 것이 가득하게 꾸며져 있다. 그래서 이런 화장장엄이 무진구족(無盡具足)하니, 다함이 없이 다 갖춰져 있으니 오늘 영가께서는 직득왕생(直得往生)하시고 직득이란 말은 곧을 직자, 얻을 득자인데, 바로 딴 데 가지 마시고 바로 그 극락 세계로 가시고 바로 극락세계로 가셔서, 수용만복(受用萬福)하시고, 만복을 다 받으시고 만복을 다 받으십시오. 이렇게 해서 오늘 법문을 다 마치게 됐습니다. 재를 잘 봉행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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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5월 8일 음력4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4-05-08
義相祖師法性偈 이야기② 의상조사법성게 이야기②--法性圓融無二相 ----법성원융무이상-- 안녕하십니까? 갑진년 4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은 의상조사 법성게 두 번째 시간입니다. 오늘 법문 내용은 뭐냐.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법성원융무이상, 그 게송이거든요. 시작을 딱 하고 이 손을 한번 이렇게 펴보세요. 이렇게. 그러면 법성원융무이상 한 번 할 때 엄지 손가락 한 번 굽히고, 두 번 할 때 굽히고 세 번, 네 번, 5번, 6번, 7번, 8번, 9번, 10번 하고, 이제 딱 치고 마치고. 그런 식으로 시작을 해보겠습니다.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성원융무이상 법문이 다 됐는데요. 이게 뭔 말이냐 하면,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으셨다. 깨달았다, 알지 못하던 걸 알았다는 얘긴데, 그거는 여러 가지로 설명이 되는데, 이 화엄경에서는 부처님이 법성을 알았다, 이렇게 설명되는 게 화엄경이에요. 법성을 알았다. 始成正覺 窮證法性시성정각 궁증법성海印三昧 諸佛智光해인삼매 제불지광眞記云 法性者 微塵法性 須彌山法性 一尺法性 五尺法진기운 법성자 미진법성 수미산법성 일척법성 오척법性 若約今日 五尺法性論者 微塵法性 須彌山法性等 不성 약약금일 오척법성론자 미진법성 수미산법성등 부動自位 稱成五尺 不增小位 不減大位 而能成也동자위 칭성오척 부증소위 불감대위 이능성야(叢髓錄권1. 韓佛全6-776下)(총수록권1, 한불전6-776하) 그러면 법성이란 뭐냐. 존재 만법의 진실상. 존재는 뭐냐. 눈에 보이는 거예요. 어려운 게 아니라 귀에 들리는 거, 손에 만져지는 거. 그게 눈에 보이고, 귀에 들리고, 손에 만져지는 그것이 법인데, 그걸 만법이라고 하거든요. 만가지 법. 그 만 가지 법을 우리 몸으로 말할 때는 오온법이고, 눈코귀로 말하면 안이비설신의고, 그 눈코귀 대상을 말하면 색성향미촉법이고, 뭐 이거 한도 없어요. 하여튼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것이 법인데, 그 법에 진실상이 뭐냐 이거예요. 다 보고 살고, 듣고 살고, 느끼고 사는데, 보고 듣고 느끼는 대상의 진실상이 뭐냐, 그걸 깨달았다는 거예요. 그걸 법의 진실상이라고 하는, 실상이라고도 하지만 성이라고 하거든요. 한마디로 성품 성자. 성은 실상이라는 뜻이에요. 진실할 실자, 모양 상자. 진실한 모양. 법의 진실상이 뭐냐. 그걸 깨달았는데, 시성정각(始成正覺)에, 처음으로 정각을 이룰 적에, 궁증법성(窮證法性)하니, 궁이라고 하는 거는 궁극적이라는 궁자가 있어요. 증이라고 하는 건 증득할 증자가 있는데, 그건 깨달았다, 마음으로 얻었다 할 때 증자를 쓰거든요. 법의 궁극적인 실상을 마음으로 조금도 모자람이 없이 다 깨닫고 나니까, 그것이 뭐와 같으냐. 해인삼매(海印三昧)와 같더라. 해인, 바다에 삼라만상이 다 백지 도장 찍히듯이 찍혀서 보이는데 그걸 해인이라고 그러거든요. 백지에 도장 찍히듯이 바닷물 속에 환히 모든 게 다 보여. 근데 바닷물에 들어가면 없어요. 바닷물에 북두칠성도 보이고, 해와 달과 별도 보이고, 산도 보이고, 모든 것이 다 보이는데, 보이기는 보이는데 바닷물에 들어가면 그게 없어. 오직 바닷물일 뿐이야. 근데 바닷물 속에는 모든 게 다 보여. 그와 같다. 그것은 뭐냐. 깨닫고 나니까 법은 없다. 법은 없어. 무법이야, 무법. 뭐만 있느냐, 지혜광명만 있다. 해인삼매로 제불의 지광(諸佛智光)이 되었다. 지혜광명이 되었다. 깨닫고 나니까 깨달은 지혜뿐이고 지금까지 보이고 들리고 하는 건 없어요. 그러면 지금까지 보이고 들린 건 뭐냐. 바닷물 속에 비추어진 그림자와 같다. 보이기는 보이는데 쫓아가면 없어. 근데 난 이 경 보면서, 그전에 뭔 생각이 났냐 하면 그런 생각이 났어요. 우리 그 강강수월래라고 하는 게 있잖아요. 강강수월래 하는데, 그게 내가 할 때는 강강에, 강마다 강마다 물속에 달이 왔다. 강마다 강마다 수월래, 물속에 달이 왔다. 해인삼매를 얘기하는 것 같더라고. 강강수월래, 강마다 강마다 물속에 달이 왔다. 수월인 거예요. 이 세상 모든 게. 이것도, 이 몸도 물속에 비친 달이고, 죽음도 물속에 미친 달이고, 삶도 물속에 비친 달이고, 항상 그걸 환히 보고 계시는 게 해인삼매거든요. 그거는 바로 지혜 광명이다. 그러니까 범부는 법만 아는데, 법, 지혜를 모르는데, 법만 아니까 눈에 보이면 보이는 대로 살고, 들리면 들리는 대로 살고, 느끼면 느끼는 대로 살고, 이거 법뿐이 없는 거예요. 법밖에. 그 법을 보는 지혜는 없는 거예요. 단법무지라, 법뿐이고 지혜는 없다. 그런데 이게 법의 진실상을 깨닫고 보니까 단지무법이라, 다만 지혜뿐이고 법은 없다. 그게 왜 그런가 하니, 이걸 딱 보면 이걸 보는 지혜가 있어요. 근데 범부는 이것만 알고 이걸 보는 지혜는 모르는 거예요. 근데 이 법의 진실상을 깨달은 삼세제불은 이 모양을 보면, 이 모양은 지혜의 물속에 비추어진 달과 같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이걸 깨보면 이 자체가 없고, 이건 완전히 수월이다. 물속에 비친 달이다. 그러면 이게 뭐냐. 물뿐이라는 거예요. 이 물속에 비친 달은 없고. 그래서 이걸 딱 진실상을 보면 이 보이는 물체는 없고 보는 지혜밖에 없다. 아 이거, 참 답답하네. 정말 답답해, 정말 답답해요. 그런데 이 물속에 비친 달이 보이지만 없다 이거거든요. 보이지만 없다. 그래서 그거를 설명한 게 원융무이상이에요. 보이는 건 왜 보이느냐, 없는 건 왜 없느냐, 이걸 설명한 게 원융무이상이라. 원융이라는 거는 하나도 생긴 것이 없이 생기는 걸 원융이라 그래요. 그게 뭔 소리냐 하면, 아까 했잖아요. 하나(엄지손가락을 접어보이며) 그런데 이게 하나가 아니거든요. 그냥 손이지, 근데 인연 따라 하나가 됐어요. 하나 그러면 이게 하나가 되면 다음 건 둘이 될 수밖에 없어요. 다음 이게 또 둘이 되면 그다음 건 셋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다음에 넷이 될 수밖에 없는 거예요. 그다음에 다섯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이 하나가 제 자리를 지키지 않고 그대로 있으면서 이 마지막 거를 다섯으로 만들어버리는 거예요. 왜냐하면 이게 하나 자리가 없으면 다섯이 안 되거든. 그러니까 이놈은 그냥 가만히 있는데 다섯이 된 거예요. 새끼손가락은 새끼손가락일 뿐인데 이게 다섯이 됐어. 뭐 때문에 다섯이 됐냐. 이 엄지손가락 때문에. 그래 엄지손가락에 의해서 새끼손가락은 다섯 번째가 되고, 또 새끼손가락에 의해서 엄지손가락은 첫 번째가 된 거예요. 이래서 원융이라는 건 다 제자리 제자리에 다 있어서 하나도 움직이지도 않았는데 그 전체의 형상을 만들어내는 걸 원융이라 그래요. 그러면 강강수월래를 본다면 사람들이 손을 맞잡고 있으면 둥그런 원이 돼 있잖아요. 그러면 사람 하나하나 보면 둥그런 게 없어요. 하나하나 사람일 뿐이야. 근데 손을 맞잡으면 하나하나 사람이 둥근 걸 만들어낸 거예요. 근데 사람 하나하나에는 둥근 게 없어. 이걸 비신현신(非身現身)이라 몸이 아닌데 몸을 나타냈다. 비신현신, 몸이 아니에요. 근데 몸을 나타냈듯이 사람 하나하나에는 둥그런 게 없어. 그런데 둥근 모양을 한 사람 한 사람이 원융하게 뭉쳐서 둥근 게 된 거예요. 매사가 다 그렇다. 이게 법성은 원융이다 이렇게 된 거예요. 이 법성을 깨달아서 보이는 대상으로부터 해탈해버렸어. 이걸 법계해탈이라 그래요. 원융을 깨달으면 법계라는 게 생긴 게 아니에요. 이걸 무생이라고 그러고. 아 어렵다, 이거. 원융무생. 없을 무, 날 생잔데, 난 건 전부 일어난 거거든요. 생기 연기. 인연으로 일어난 거, 생겨서 일어난 거 이런 건데, 그 법성원융을 보면 하나도 일어난 게 없고 하나도 생긴 게 없다. 이게 무생성기라 그래요. 법성은 진실상인데 진실상이 그냥 일어난 거다. 성기, 법성이 일어났을 때 법성성기라고 하거든요. 뭔 소린지 참 이게 뭔 소린지 진짜 맥빠진다. 이거. 법성성기다. 그러면 법성은 물, 물이다. 물. 그럼 거기에 그림자가 탁 생겼다 그러면, 그 물이 일어난 거지 하나도 일어난 게 없다. 그냥 물뿐이지, 그 안에 비춰진 달은 없다 이거잖아요. 그러니까 이 원융을 이걸 발견해 내는데 엄청난 그 깨달음이 있었어요. 원융. 처음에는 몰랐는데 화엄경을 보니까 화엄경 초지에 육상원융(六相圓融)이라는 게 나와가지고, 마지막에 무너질 괴자, 괴상(壞相)이 있는데 이 괴상이라는 건 뭘 보더라도 각자 자리에 있더라 이거예요. 각자 자리에. 예를 들면 집을 하나 짓는데, 주춧돌이나 뭐 기둥이나 서까래나 지붕이나 마룻장이나 다 각자 자리에 있어. 그런데 이놈들이 전부 이제 제자리에 있으면서 하나의 집을 만들어내더라 이거죠. 여기서 보고 탁 깨달은 거예요. 여기서 보고. 그래서 어떻게 깨달았냐. 조그마한 티끌이 전 우주를 만들어낸다. 우주 티끌이 제자리를 지키면서 우주가 됐다. 그러니까 동쪽에서 동쪽을 떠나지 않고 모든 걸 다 만들고, 서쪽에서 서쪽을 떠나지 않고 모든 걸 다 만든다. 그래가지고 이걸 이 원융을 설명하기가 너무 어려우니까, 사람 몸을 또 비유를 해서 설명을 하거든요. 사람 몸을 가만히 보니까 하나하나가 전부 제 자리를 지키고 있어요. 팔도 제자리에 있고, 손도 제자리에 있고, 얼굴도 제자리에 있는데, 몸이 없어, 거기는. 발뿐이야, 손뿐이에요. 몸이 없고. 그런데 발이 발 위치를 떠나지 않고 온몸을 만들어요. 온몸이 돼버려. 이걸 원융이라고 그러거든. 또 얼굴이 얼굴을 떠나지 않고 몸을 이루어. 이걸 이제 원융이다. 그러니까 법의 진실상은 이 원융으로 된 거다. 원융으로 됐기 때문에 발은 발뿐인데 몸이 나왔고, 이러니까 무생소생이라는 거예요. 남이 없이 난 바라는 거예요. 아따 어렵네. 이거 이거. 무생소생, 생긴 것이 없이 생긴 바다. 생긴 게 없어요. 손가락 하나뿐인데 이 손가락이 다른 거와 원융하게 조화를 이루어서 몸이 나왔으니까 생긴 바 없이 생긴 바다. 무생소생. 없을 무, 날 생, 바 소, 장소 소, 날 생. 남이 없이 난 바다. 이러니까 이 무생법을 아는 게 무생삼매인데 이 무생삼매에 딱 들고 나면 이 몸이 해인수월이에요. 바다에 비친 그림자, 물속의 달이다. 해인수월. 그래서 해인수월이니까 보이기는 보이되 전혀 생긴 게 아니기 때문에, 이 몸을 위해서 얽매일 필요가 하나도 없는 거예요. 이걸 불가사의 해탈 경계이래요. 생각할 수 없는 해탈의 세계다. 무생삼매, 불가사의 해탈 경계, 이런 걸 깨닫고, 이런 걸 가르치는 게 불교예요. 무생삼매에 든다. 우리가 지금 낳는데, 움직이는데 이 몸을 가만히 관찰을 하니까 이 몸이라고 하는 것은 몸이 없고 뭐만 있냐. 지수화풍만 있더라. 흙과 물과 불과 바람과 이런 것만 있더라. 그래서 바람은 바람대로 있고, 흙은 흙대로 있는데, 이것이 원융하게 제자리를 움직이지 않고 하나의 몸을 이루었다. 그러니까 몸이 보이지만 이건 남이 없이 난 거예요. 무생소생이요. 그래서 이 무생삼매에 딱 든단 말이에요. 그러면 나만 무생소생이냐. 일체법이 전부 남이 없이 난 것이다. 무생소생이다. 그러니까 삼천 대천세계가 삼천대천세계가 아니고 전부 수월해인이다. 물속의 달이고 바다의 그림자다. 이래 해놓으니 이게 해인삼매란 말이죠. 그래서 해인삼매에 떡 들면 시간도 없고, 일체 법이 일체 법이 아니고, 오직 그걸 보고 듣고 관찰하는 지혜만 있는 거다. 그래서 여기서 일체유심조라는 거예요. 여기서. 일체는 마음으로 만든 거다. 그 마음에 비친 그림자다 이 소리예요. 법법은 원융이고 법법은 무생이다. 무생을 설명한 게 원융이에요. 원융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에 생겨도 생긴 게 없다 그거죠. 그러니까 이게 하나인데 하나라고 하는 것은 둘이 없으면 하나가 있을 수 없어요. 둘을 전제로 한 하나란 말이에요. 또 하나가 없으면 둘이 안 돼요. 이렇게 하나는 둘로, 둘은 하나로, 그렇지만 하나는 하나 자리에서, 둘은 둘 자리에서, 수를 만들어내는 거예요. 그러니까 수가 아무리 나와도 하나뿐이여. 하나 없으면 무량수가 될 수가 없어요. 이래서 어쩌자는 건데 이래서. 이래서 어쩌자는 거예요. 어쩌자는 게 뭐냐 하면, 우리 몸이 수월상이니까 물속에 비친 달의 모습이니까 근심 걱정할 거 없다는 거죠. 그게 해탈 경계라는 거죠. 몸이 물속에 비친 달의 모습인 줄을 환히 보고, 근심 걱정에서 훨훨 벗어나서 해탈 경계에서 놀아라 이 소리예요. 전부 우리가 몸에 매여서 근심하거든요. 근데도 이 몸은 우리가 걱정한다고 오래 머물러주질 않아요. 결국 보면 이제 화장막에 갈 몸을 하나 붙들고, 온갖 근심 걱정 다 하는 거예요. 이런 참, 이런 어처구니없는 일이 어디 있어요. 그러니까 법성은 원융하다. 두 모양은 없다. 원융치 않은 건 없다. 이 소리예요. 원융 밖에 없다. 두 모양 둘은 없다. 다른 건 없다 이 소리거든요. 둘은 다른 건데 둘은 없다. 이걸 다 깨치고 나니 그 둘이 없는 것을 보는 지혜뿐이다 이 말이야. 그걸 해인삼매라 그래요. 근데 이 지혜는 무시무종이여. 생긴 시작이 없고 끝나는 끝이 없어요. 끝도 시작도 없어. 언제나 그냥 해인삼매, 바다에 그림자가 비치는 그 물과 같은 것을 보는 거예요. 근데 보는 것도 해인이 지금 본다 시작하고 보고, 지금 안 본다 이렇게 끝내고 보고 그런 게 아니라, 그냥 물이 항상 맑으면 그냥 보고 그냥 안 보는 거예요. 이걸 무시무종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제불 삼매는 시작과 끝이 없어요. 부처님의 삼매는 죽비 딱 딱 치고 시작하고 들어가고, 또 죽비 딱 딱 치고 끝하고 마치고 그게 아니라, 바닷물에 달빛이 비칠 때 그냥 시작도 없이 그냥 비치고, 바닷물에 달빛이 사라질 때 사라짐이 없이 그냥 사라져요. 이게 불가사의 해탈 경계예요. 일부러 해탈하려고 와서 해탈하는 게 아니라 그냥 불가사의, 생각할 수 없는 해탈의 경계다 이 말이거든요. 法性者 無性法性 圓融法性 無住法性 不動法性也법성자 무성법성 원융법성 부주법성 부동법성야圓融者 竪窮橫遍 無處不遍 日圓融也원융자 수궁횡변 무처불변 일원융야芥納須彌 毛吞大海(維摩經 不思議品)개납수미 모탄대해(유마경 부사의품) 그래서 이건 전부 화엄경의 세계를 이렇게 얘기를 하는데, 화엄경에서는 원융이라는 것을 수궁횡변(竪窮橫遍)이라, 원이라는 건, 둥글다라는 건 뭘 말하느냐. 수는 세울 수자인데, ·궁은 다 할 궁자. 시간적으로 과거·현재·미래를 다 관통해서, 과거·현재·미래에 통하지 않는 것이 없는 걸 원이라고 그래요. 둥글 원자. 또 융이라고 하는 것은 무처불변이라, 어느 곳에든지 없는 게 없는 걸 융이라 그래요. 어느 곳에든지 없는 게 없는 거. 산에 올라가면 되게 재밌는데, 그 나무나무마다 한결같이 잎새가 피는데 그거 신기하더라고. 저쪽 나무에도 잎새가 피고, 이쪽 나무에도 잎새가 피고 가는 데마다 그 나무에 잎새가 그렇게 펴요. 이게 누가 시켜서 이렇게 피나. 저쪽에 피고 이쪽에 피고 그냥 안 피는 나무가 없어. 그게 융이거든요. 끊임이 없이 두루하다. 그런데 그거를 유마경 부사의품이 있는데 그런 데서는 이렇게 설명했어요. 큰 것도 작은 것도 없이 다 원융하다. 개납수미(芥納須彌)라. 겨자씨 개자가 있는데요. 겨자씨 그 들깨 모양보다도 더 작을걸요. 겨자씨 모양이. 계자 계자 계자씨. 근데 이 개자씨가 수미산을 다 거둬들인다 이거지. 겨자씨가 수미산을 거둬들여. 이걸 개납수미라 그래요. 개납수미. 겨자씨 개자, 거둬들일 납자, 출납이라는 납자, 수미, 수미산 또 모탄대해(毛吞大海), 털이 하나 있는데, 이 털이 탄, 삼킬 탄, 큰 대 바다 해. 요 털 끝에서 큰 바다를 다 삼킨다. 이게 이제 법이에요. 근데 이 게송이 통도사 극락암 그 법당 주련에 있었는데, 나 처음에 이거 보고 이상하다 이상하다 했거든요. 근데 이게 딴 게 아니고 부처님이 깨달으신 법성원융 이치를 유마경 부사의품에서 말했는데 그걸 이렇게 게송으로 달았더라고. 그러니까 수미산도 겨자씨도 전부 법성원융으로 이게 생긴 거예요. 수미산이 없으면 겨자씨도 없고, 겨자씨 없으면 수미산 없고, 서로서로 제자리를 지키면서 수미산도 되고 겨자씨도 되는 거예요. 털끝과 바다. 털끝이 없으면 바다도 없고, 바다가 털끝을 삼키고 또 털끝이 바다를 삼키고. 그래서 이건 전부 수월해인이다. 물속에 비친 달이다 이런 거예요. 그래서 법에 하나하나에는 법이 없다. 그게 뭔 말이냐. 기둥에는 집이 없다. 기둥 하나에 집이 없다. 또 서까래 하나에는 집이 없다. 마룻장 하나에는 집이 없다.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무법이라 그래요. 법이 없다고. 그럼 어째서 있느냐, 원융으로 있다. 이게 전부. 끝없이 서로 합쳐져서 있는 거다. 끝없이 합쳐져서 있으니까 있어도 생긴 게 아니다. 물속의 달과 같다. 이렇게 아무리 설명해봐도 돌아서면 그만이여. 그런데 안 할 수도 없어. 이렇게 오랫동안 불교를 믿고 기도를 하고 복을 짓고 정진을 했는데 도대체 이게 부처님은 뭘 깨달았을까. 필경성불이라, 우리가 마침내는 성불을 해야 되거든, 해탈해야 된단 말이에요. 불교는 믿으면서, 해탈을 못하고 믿으면 너무 억울하잖아요. 了知一切法 自性無所有요지일체법 자성무소유如是解法性 卽見盧舍那(華嚴經,須彌頂上偈讚品)여시해법성 즉견노사나(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 그래서 법에 법이 없다. 그걸 화엄경에서 요지일체법(了知一切法) 이런 게송이 있어요. 요지, 알 료자, 수료한다는 료자고, 알 지자고, 일체법이다. 자성무소유(自性無所有), 자성이 있는 바가 없다. 내가 절에 와서 어떤 선배 스님이 이것 좀 새겨보라고 하더라고. 이게 잘 안 들어와. 그래서 내가 겨우 새긴 게 <일체법을 알면 자성은 있는 바가 없다> 이렇게 새겼거든요. 요지일체법, 요지는 안다 이 소리 아니에요. 일체법 자성무소유 자성이 일체법의 그 자체 실상, 일체법의 자체 실상이 있는 바가 없다. 그래서 그렇게 새겼어요. 일체법을 알면 자성이 있는 바가 없다. 여시해법성(如是解法性)하면, 이것이 해법성 하면, 이와 같이 법성을 알면, 즉견노사나(卽見盧舍那)라, 바로 노사나불을 본다.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에 있는 게송인데, 그렇게 생각했는데 나중에 배워보니 그게 아니고, <일체의 법이 자성이 있는 바가 없음을 알아라.> 이게 요지는 안다. 깨닫는다고 하는 것은 일체법이 자성이 있는 바가 없다. 몸에는 몸이 없고 돌에는 돌이 없고 하늘에는 하늘이 없고 자성이 있는 바가 없어. 자체 진실상이 있는 바가 없어. 화나는 데는 화가 없어요. 화나는 곳을 가만히 보면 어딘가 사라져버렸어. 화가. 또 좋아하는 마음도 자성이 없어, 좋아하는 마음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그놈도 어딘가 사라져 버렸어요. 이 모양이에요. 그냥 뜬구름처럼 왔다 갔다 하는 거예요. 인생은 뜬구름이다. 진실상은 없고 그냥 왔다 갔다만 하는 거예요. 이게 자성무소유거든요. 자성이 있는 바가 없다. 이와 같이 법성을 알면, 법의 진실상을 알면 즉견노사나라. 노사나는 이게 이제 광대지혜인데 바로 광대한 지혜의 부처님을 볼 것이다 이랬어요. 나중에는 법은 없고 노사나만 있다는 얘기여. 노사나만 있다는 얘기거든요. 그러니까 법은 없고 지혜뿐이여. 무법유지, 법은 없고 지혜만 있다. 그러니까 그렇게 되면 어떻게 되냐. 생각하는 대로 보이는 거죠. 없는 걸 딱 생각하면 다 없어. 있는 걸 딱 생각하면 다 있어. 이게 이제 해인삼매의 경지거든요. 그 물속에 모양을 딱 보면 모양으로 보면 모양이에요. 물로 보면 물이에요. 그냥. 근데 그걸 모르면 그 물속에 보인 모양을 구하려고 물속으로 들어가서 찾다 보면 찾지는 못하고 몸만 빠져 죽는 거지. 그게 뭐와 같으냐 하면 세상 거 구하려고 무진 애를 썼는데 구하는 건 못 구하고 나중에는 걱정 근심뿐이더라. 진짜 갈수록 어렵다. 이거. 보통 아니네. 一念普觀無量劫 無去無來亦無住일념보관무량겁 무거무래역무주如是了知三世事 超諸方便成十力(華嚴經,光明覺品)여시요지삼세가 초제방편성십력(화엄경,광명각품) 그리고 또 화엄경 광명각품이 있는데, 광명각품 거기에는 일념보관무량겁(一念普觀無量劫)하면 1찰나에 무량겁을 볼 수 있어요. 한순간에. 무량억겁을 딱 볼 수 있는 게 지혜란 말이에요. 무거무래역무주라(無去無來亦無住), 이 법이라는 게 가는 것도 없어. 법은 자성이 없기 때문에. 법이라는 게 오는 것도 없어. 법이라는 게 머무는 것도 없어. 그러니까 여시요지삼세사(如是了知三世事)하면, 이와 같이 과거· 현재· 미래 3세를 환히 알면, -이게 지혜로서 아는 거죠.- 알면 초제방편성십력(超諸方便成十力)이라. 모든 방편의 세속된 단계를 뛰어넘어서, 초월해서 여래만이 가질 수 있는 정각 십력, 10가지 힘이 있는데 그것도 역시 지혜의 힘이죠. 여래십력, 여래만이 가질 수 있는 여래 지혜의 힘을 이룬다. 그러니까 이 가르침이 법은 없다. 지혜만 있다. 그래서 지혜로 만법에 자제하고, 지혜로 만법에 안락하니까 이것을 불가사의 해탈 경계라고 한다. 불가사의 해탈 경계, 거기에 극락세계도 있고 거기에 온갖 복된 세계도 있고, 거기에 안락세계도 있고 이런 게 전부 무법유지에서 오는 거예요. 법은 없고 지혜만 있는 데서 오는 거예요. 참 기가 막히네. 기가 막혀요. 기가 막혀. 無住法性 圓融無二 무주법성 원융무이無住常住 解脫境界무주상주 해탈경계 그러면 그거를 이제 뭐라고 하냐 무주상주(無住常住)요. 머묾이 없이 항상 머무는 거. 무주, 없을 무 머물 주. 그게 이제 물속의 달이 머묾이 없이 머문다 이 말이죠. 무주상주 원융무이(圓融無二). 원융해서 다른 것이 없어. 물이 없으면 달도 안 보이고 또 달이 없으면 또 물속에 물이 있는지 없는지도 모를 거 아니에요. 그림자가 없기때문에. 원융해서 둘이 없다. 그러니까 무주법성 무주법성(無住法性)이 원융무이다. 무주, 머묾이 없는 법성이 원융무이하다. 원융해서 다른 것이 없다. 무주법성 원융무의. 머묾이 없는 법의 진실상이 원융해서 다름이 없으니, 무주 상주로, 머묾이 없이 항상 머무는 것으로 해탈 경계다. 그러니까 일체 이 죽고 사는 게 전부 해인수월인데 바다의 그림자고, 물속의 달인데 이게 그냥 무주상주인 거예요. 머묾이 없이 항상 머무는 거예요. 해인수월이 어디서 와도 오는 게 아니고 가도 가는 게 아니고. 물속에 오는 달을 볼 때도 보는 지혜뿐이고. 왜 그러냐 하면 물속에 달이 보이긴 하는데 물이 달로 쫓아간 것도 아니고, 달이 물에 빠진 것도 아니고, 물은 물대로 있고 달은 달대로 있는데 물속에 보인단 말이에요. 이걸 무생소생이라 그래요. 남이 없이 난 바다. 참 기가 막힌다. 이게. 기가 막힌 게 보통 기가 막힌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무주, 머묾이 없이 항상 머무니까 그게 해탈 경계다. 물속의 달이 머물긴 머물러. 근데 머묾이 없어요. 무주상주요. 그러니까 일체만법이 다 해탈 경계다 이거죠. 우리가 이게 무주상주 법성원융 해탈 속에 있으면서 온갖 근심 걱정에 꿈을 꾸고 사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깜깜하게 꿈꾸는 마음에 눈을 딱 뜨라고 이렇게 4월 초파일 날은 온갖 지혜 광명의 등불을 비춰서, 중생의 어리석은 마음을 환히 비춰서 다 불가사의 해탈 경계를 이루어라 이거거든요. 심정토정이라,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가 다 깨끗하다. 마음 심, 깨끗할 정, 또 국토 토 깨끗할 정, 심정토정, 마음이 깨끗하면 국토가 깨끗하다. 그래서 등불을 계속 밝히는 거죠.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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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4월9일 음력 3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4-04-09
- 義相祖師法性偈(의상조사 법성게) 이야기 ① -義相스님의 生沒年代와 華嚴學風(의상스님의 생몰연대와 화엄학풍) 안녕하십니까? 갑진년 3월 초하루 진관사 법문입니다. 초하루 법문에 <의상조사 법성게(義相祖師法性偈)> 법문을 하기로 했습니다. 의상조사 법송게 법문. <의상조사 법성게 이야기> 이런 내용이거든요. 법성게가 뭐냐? 한국불교는 그 주류가 화엄 신앙이에요. 한국불교의 주류가 화엄신앙인데, 화엄신앙의 대중 의례가 첫째는 약찬게(略纂偈), 둘째는 법성게 그렇거든요. 약찬게는 화엄경의 성립 구조, 화엄경이 어떻게 어떻게 성립이 됐다, 품이 몇 품이고, 뭐 이렇게 나오는 보살, 신장, 선지식 이름이 누구 누구다, 이렇게 그 명목, 차례, 구성, 이런 걸 쭉 기술하고 그걸 외우는 게 약찬게 독송이거든요. 법성게는 화엄경에서 뭘 말하고 있느냐, 경전이나 그 품 수, 차례는 전혀 말이 없고요. 화엄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그 본뜻, 그것만 설명하는 게 의상조사 법성게에요. 그러면 의상조사 법성게라는 게 뭐냐 하면, 신라시대에 의상스님께서 화엄경을 공부를 하시고, 그 법성게를 지으신 거예요. 지었는데, 그것이 다른 내용이 아니라 <화엄경 내용을 그대로 요약해서 요지로 제시하고 계신다> 이런 뜻이거든요. 그래서 화엄경은 법성을 말하고 있는데, 법이라는 것은 만법의 본성, 일체만법의 본성, 자성의 법성인데 그것을 게송으로 설명한다. 그래서 법성게거든요. 그런 내용이고. 生沒年代(생몰연대)湘武德八年生 丱歲出家 至龍朔元年辛酉入唐 就學於智儼상무덕팔년생 관세출가 지룡삭원년신유입당 취학어지엄總章元年(668) 儼遷化 咸亨二年(671) 湘來還新羅총장원년(668) 엄천화 함형이년(671) 상래환신라長安二年壬寅示滅 年七十八(三國遺事卷三, 前後所將舍利條)장안이년임인시멸 연칠십팔(삼국유사권삼, 전후소장사찰이조) 의상스님은 眞平王(진평왕)47년(625년)에 示生(시생)했다. 어린 나이에 출가했다. 文武王一年(문무왕1년)(661,37세)에 입당하여 智儼祖師(지엄조사)에게서 가르침을 받았다. 668년에 지엄조사가 입적한 뒤 671년(47세)에 의상스님은 신라로 돌아왔다. 의상스님은 聖德王一年(성덕왕1년)(702,78세)에 示滅(시멸)하였다. 법성게는 누가 지었느냐. 의상 스님께서 지으셨는데, 의상 스님이 언제 분인가. 신라 시대에 진평왕이라고 있는데요. 선덕왕, 그 이전에 진평왕이고, 진흥왕보다는 좀 긴데, 북한산 비봉에 올라가면 비가 있는데요. 이건 진흥왕이 세운 거예요. 진흥왕 다음에 이제 진평왕인데, 그 진평왕 47년에 태어났어요. 그때가 47년에 태어났는데, 서기로는 625년. 그래서 횟수로는 금년이 딱 1,400년이에요. 이제 내년 되면 1,400주년인데, 태어난 지가, 그래서 1,400주년을 맞이해서 학술 모임이라든지 기념 모임을 어떻게 준비한다는 소리도 듣고 있거든요. 그래가지고 625년에 태어나서 딱 보니, 이 성 씨가 박씨인지 김씨인지 잘 몰라요. 어느 기록에는 박씨라고 하고, 어느 기록에는 김씨라고 했어요. 박씨, 김씨가 신라의 왕족이거든요. 그건 뭐 크게 알 것도 없고. 근데 어린 나이에 출가를 했다. 어린 나이라 그러면 쌍머리 따는 나이, 옛날에는 쌍머리로 땄다고 그래요. 그러다가 이제 나이가 들면 총각이라고, 외 머리를 땄고, 총각은 아니고 관세(丱歲)라는 건 쌍머리 관자가 있는데, 쌍머리 땋을 나이, 그러니까 10세에서 15세 이전의 나이를 관세, 쌍머리하고 다니는 나이, 이렇게 설명을 하거든요. 어린 나이에 출가를 했어요. 그래가지고 출가해서 뭘 공부했는지, 어디서 배웠는지 전혀 몰라요. 기록이 전혀 없어, 지금 기록으로는 알 수가 없어요. 그런데 나이가 37세가 됐어요. 그때가 이제 문무왕 때인데, 문무왕 1년, 문무왕이라고 그러면 누구냐 하면, 저기 경주 감포에 가면 수중에 능이 있다고 하잖아요. 그 왕이 문무왕이에요. 태종 무열왕의 아들이거든. 그러니까 문무왕 1년에, 37살 나이에, 중국에 들어갔어요. 중국에 왜 갔냐. 화엄경 공부하러 가신 거예요. 그래서 이제 입당(入唐)을 해서, 그 당시 지엄조사(智儼祖師)라고, 화엄종 지엄조사라고 대단한 스승이 계셨는데, 거기에 가서 가르침을 받았어요. 37살에 가서 7년 있었는데, 44살 때쯤, 44살에 이 법성게를 지으셨어요. 근데 그 해에 또 지엄선사가 돌아가시는 해에요. 그래서 지을 때부터 지엄조사의 지도를 받고, 여러 가지 평가를 듣고, 격려를 받고 해서, 이거는 지엄화상의 가르침과 또 의상 스님의 학습 능력이 합해져서 이루어진 거라, 이루 말할 수 없이 감회가 깊은 그런 저술이거든요. 지엄화상이 668년에 이제 돌아가시고, 3년 있다가 671년 의상 스님의 나이 마흔일곱에 신라로 돌아오셨어요. 신라로 돌아오셔서 31년을 더 사셨어요. 47에 신라로 돌아오셔서 78살에 입적을 하시거든요. 이제 오시자마자 역시 여러 곳에 다니면서 화엄경을 가르치시는 일에 열중하셨거든요. 그래서 그 근본 도량이 영주 부석사, 그곳이 의상 스님 화엄 근본도량이고, 그 외에는 화엄 도량이 전국 곳곳에 건설이 돼가지고, 의상 스님 화엄십찰이라고 얘기를 해요. 화엄십찰. 그래서 화엄십찰과 선문구산, 천태육산, 뭐 이렇게 정리를 해서 한국불교사를 기록하는 경우가 있어요. 화엄십찰, 선문구산, 천태종의 천태육산. 지금 생각해 보면 성덕왕 1년 702년에 78세에 돌아가셨는데, 그때는 이렇게 오래 살 때가 아니거든요. 한 50대면 대략 딱 가는데, 엄청나게 오래 산 거예요. 78에. 생몰연대는 이렇고요. 의상스님이 화엄을 공부하시고 화엄으로 화엄삼매에 드시고 그 화엄으로 제자들을 육성하시고 인도하셨는데, 의상스님은 이 화엄 학자로서 세계에 하나밖에 없는 독특한 분이에요. 왜 독특하냐. 일반 화엄학의 대가가 중국에 세 분이 계신데, 지엄조사, 법장조사, 청량조사 세 분인데, 이분이 다 화엄을 어떻게 공부했느냐면 화엄경에 대한 해석을 해요. 화엄경. 그래서 경소예요. 경소. 그래가지고 오늘날 화엄경에서 뭘 가르쳤나, 이걸 알려면 이 삼소를 보지 않으면 안 돼요. 지엄소, 법장소, 청량소. 이걸 화엄삼소라고 그러는데, 그걸 봐야 되는 이유가 화엄경에 대해서 해석을 하고 화엄경에 대해서 설명을 했기 때문이에요. 華嚴學風(화엄학풍)① 의상스님의 著述特性(저술특성)“一乘法界圖 合詩一印 依華嚴經 及十地論 表圓教宗要 總 “일승법계도 합시일인 의화엄경 급십지론 표원교종요 총章元年 七月十五日記”(佛教著述 : 釋經書 宗要書)장원년 칠월십오일기”(불교저술 : 석경서 종요서)合詩大旨 大經大教 一乘法界 圓融圓滿합시대지 대경대교 일승법계 원융원만 無障無礙 自位不動 行業滿成 무장무애 자위부동 행업만성 근데 의상스님은 화엄경 해석은 한 마디도 없어요. 참 희한해요. 그러면 뭘 했냐. 이 지금 우리가 독송하는 의상조사법성게인데, 이거는 의상조사 법성게라고 하는 것은 이건 독송 명칭이고, 저술 명칭은 일승법계도 합시일인(一乘法界圖 合詩一印) 이거예요. 이거 어려운데, 일승법계, 그림 도자, 합할 합자, 시라는 시자, 합시, 한 일자, 도장 인자, 일인. 일승법계도 합시일인. 이것이 이 저술 명칭이에요. 이런 명칭으로서 이제 짓는 이유가 뭐냐. 제일 끝부분에 밝혔는데, 의화음경 급십지론(依華嚴經 及十地論)하여, 화엄경이 있고 화엄경을 해석한 세친보살의 십지론이 있는데, 의상스님은 화엄경과 화엄경 십지론에 의지하고 근거해서, 표원교종요(表圓教宗要)라, 원교라고 하는 것은 둥글 원자, 가르칠 교자, 원교인데, 화엄경의 가르침을 원교라고 해요. 원교. 원만 무궁한 가르침이다 이 말이에요. 원만하고 끝이 없다. 원교라고 그러는데, 원교에 종요를 표한다. 종요는 종갓집이라는 종자하고 중요하다는 요 자, 종요인데, 그 종은 뿌리를 말하는 거예요. 뿌리. 요는 줄기를 말하는 거예요. 줄기. 그래서 이제 나무를 비유로 말하면 6가지 구분이 있는데, 뿌리, 그걸 뿌리 근자 근, 줄기, 줄기 경자, 경, 근경, 지엽, 가지 지, 가지, 잎새, 꽃 화, 열매 과자, 과. 그래서 나무는 근경지엽화과(根莖枝葉華果) 6가지로 구분이 된다. 그런데 종요라고 하면 그 뿌리하고 줄기만 이야기한다 이거예요. 뿌리하고 줄기. 이게 종요예요. 지엽이라든지 이런 거는 말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제 글을 지을 때 종요서가 있고, 석경서가 있는데, 석경이라는 건 해석할 석자하고 경전이라는 경자, 경전을 처음부터 쭉 해석하는 게 이게 석경사에요. 근데 종요라는 건 경전을 따라서 해석을 안 해요. 경전에서 이야기하는 골수, 골자, 그것만 딱 정리해내는 걸 이걸 종요라고 그래요. 근데 이 법성게 저술은 화엄경 종요다, 화엄경 해석이 아니다 이거예요. 이렇게 전술한 거는 의상스님밖에 없어요. 다 경전을 해석했어요. 종요를 제시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경전 공부하다 보면, 두 가지 대표적인 거 있는데, 석경서와 종요서 대표적인 게 석경, 경전을 해석한 대표적인 게 화엄경 십지론이고, 종요만 드러낸 대표적인 게 대승기신론이라 그래요. 대승기신론은 여러 경전을 전부 종합해서 그 골수만 드러낸 게 대승기신론이라, 성론, 종론 뭐 이러거든요. 근데 우리나라에는 이 종요를 좋아해요. 원효성사도 저술한 거 보면 종요라는 제목이 많아요. 한국 사람들은 특이해요. 요점만 챙기지, 나머지는 그냥 싫어해요. 그래서 사람도 말 많은 거 싫어해요. 결론, 핵심만 딱 드러내는 거 좋아하거든요. 제일 인기 없는 남자가 말 많은 남자예요. 말 많은 사람. 그런 사람 인기 하나도 없어요. 연애도 못해요. 만났다 금방 헤어져. 그래서 그 핵심, 요점, 그걸 말로 하는 게 아니라 또 행동으로 탁 할 때 감동을 줘요. 설명이 길면 지루해. 핵심 요점을 파악해서 행동으로 표현할 때, 굉장히 감동을 주는데 의상스님이 바로 그런 분이에요. 저술도 종요로 저술을 했지, 경전 해석으로 저술을 안 했다. 그리고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경전을 설명하지 않으세요. 그럼 뭐냐? 경전에서 가르치는 내용을 직접 보게 하고, 직접 만지게 하고, 직접 간직하게 하는 건데, 그걸 관법이라 그래요. 화엄경을 보고 니가 스스로 봐라. 이게 관법이거든. 보는 방법. 화엄경에서 뭔가 말할 거 아니에요, 그런 말을 하면 내가 지금 눈으로 보는 거 하고 화엄경에서 말하는 내용하고 거리가 있어, 틀려. 그럼 화엄경에서 말하는 내용을 내가 보려면 어떻게 해야 되나? 관을 하는 거예요. 딱 보는 거예요. 봐. 그래서 인간의 행위는 생사업이 있고 지혜업이 있는데, 생사, 나고 죽는 행위인데, 이 생사업이라는 건 뭐냐 하면 계속 구하는 거예요. 그래서 소유를 해요. 구하고 소유하고 구하고 소유하고. 구하다 죽어요. 이건 어린애서부터 나이 많아도 똑같아요. 어떤 분은 이야기하기를 자기가 나이가 80인데, 80에도 대중 앞에 나가면 떨린다고 하더라고. 기가 막히더라고. 나이 80에 뭘 구하길래 떨고 있냐. 근데 100살 때도 떨어요. 그냥 더 잘 보이려고 하는 욕심이 있고, 더 잘하려고 하는 욕심이 있어서, 그럼 잘 보이고 잘하려는 건 뭐냐. 좋은 거 구하려고. 이게 생사업이라고 그래요. 구하면 그게 영원한가. 없어져요. 또 구하고. 구하면 없어져요. 또 구하고. 구하다 죽는 거예요. 새는 날다가 죽고, 인간은 구하다 죽어요. 채워도 채워도 채워지지 않는 빈 가슴을 가지고 사는 거예요. 인간이라는 게. 근데 잘해줄 필요 없어요. 잘해주면 그거 받고, 금방 또 다른 걸 달라고 그래요. 근데 이것들은 잘 모르더라고. 내가 이만큼 해주면 좋아하겠지. 천만에. 받을 때만 좋아해요. 받고 나면 다른 거 또 달라고 그래요. 그게 인간이에요. 그러니까 인간 자체가 구하다 죽는 그런 존재이기 때문에 주어서는 안 된다. 그럼 어떻게 되냐. 안 주면 원수 되니까 원수가 안 될 만큼만 줘야 돼요. 그리고 스스로 지혜의 업을 닦게 해야 되는 거에요. 생사업은 구하는 업인데, 지혜의 업은 깨우치는 업이에요. ‘인간이라는 게 이런 거로구나.’ 그걸 깨우쳐서 지혜로 만족하고, 지혜로 행복하고, 지혜로 평화로운 그런 훈련이 있어야 돼요. 그래야 그 막 구하는 감정을 조절할 수 있어요. 인간은 능력 있으면 행복할 줄 아는데 천만의 말씀이에요. 이 무지막지하게 구하는 감정 조절 못하면 그냥 멸망해요. 감정 조절 못해서 멸망한 사람이 대부분이에요. 대부분. 시어머니한테 대들었다가 평생 혼나고, 이런 거. 이런 거 많아요. 그래서 이 감정 조절 못해서 불행한 경우가 많지, 능력이 부족해서 불행한 경우가 얼마 없어요. 능력은 키우면 돼요. 참, 근데 우리나라 이 교육이 감정을 조절하는 교육은 별로 없어요. 능력 신장하는 교육이 대부분이에요. 능력 아무리 많으면 뭐해요? 한순간에 감정 조절 못해서 큰 사고 쳐가지고 평생 힘들게 사는데. 이런 얘기는 이제 법성게에 없고요. 공연한 소리 이렇게 해보는 거지. 그래가지고 이제 한국에 돌아오셨는데, 31년 동안을, 47세에 돌아오셔서 78세까지 이제 사셨단 말이에요. 그래서 계속 이 화엄경 지도를 하는데, 경을 가르친 게 아니라 화엄경에서 말하는 그 내용을 직접 보게 하는 관법을 지도했다. 그래서 의상 스님은 큰 저술이 없어요. 이 법성게 이거예요. 일승법계도 합시일인. 그런데 그 내용이 들어가기 전에 이 법계도 이 법성게가 무엇을 말하는 거냐. 이 화엄경을 대경대교(大經大教)라고 하거든요. 큰 대자, 경이라는 경자, 대경. 큰 경. 크단 말은 온전하게 다 설명하는 경. 또 큰 가르침. 이 대경 대교인데, 대경대교에서는 일승법계(一乘法界)를 말한다. 일승법계. 한 일자, 승용차라고 하는 탈 승자, 일승, 법의 세계. 그럼 일승이라는 게 뭐냐? 일승이라고 하는 거는 오신신상, 내 몸에 내 몸 모양이 있고, 법계신상, 온 우주의 모양이 있어요. 내 몸 모양과 우주 모양이 원융무이하다. 서로 통해서 둘이 없다, 이걸 가르치는 거예요. 오신신상 법계신상 원융무이. 근데 우리 범부는 내 몸이라는 건 만만하지. 이게 법계 몸이라는 거는 생각이 없어요. 이 우주의 몸이다, 이게. 이게 참 대단하지, 대단해. 너무 대단해서 목 좀 축이고 해야 되는데. 저 소리(핸드폰벨소리)도 법문이에요. 듣고 나면 저 소리와 듣는 내가 원융무이해요. 저 소리와 저 소리는 법계신이고, 듣는 나는 나의 오신상인데 둘이 없다. 이 몸이 나라는 것만 알기 때문에 그렇게 구해요. 이 몸이 온 천지 우주 법계의 몸이다. 이렇게 되면 오신상이 법계신상이 되는 거예요. 한번 만져봐라. 여기 법계 몸 너 잘 있냐, 여기. 법계 몸 너 잘 있냐, 우주 몸 너 잘 있냐, 이 몸은 우주의 몸이다. 이 몸은 온 세계 자연의 몸이다. 그 오신과 법계신이 원융해. 원융이라는 말은 서로 들어간다는 말입니다. 이 우주 속에 내가 들어가고, 또 우주가 나한테 들어오고 그래서 둘이 없어요. 원융무이해요. 그리고 하나도 장애가 없어, 원융무애해요. 근데 이걸 어찌 알았냐? 화엄 삼매에 들어야 알아요, 이거를. 그게 화엄 삼매고. 화엄 삼매의 이제 기본을 또 해인삼매라고 하는데, 화엄 삼매는 그 원융무이를 공덕으로 무한히 펼쳐가는 게 화엄삼매고, 해인삼매는 원융무이를 물속에 든 달 보듯이 환하게 보는 게 그게 해인삼매예요. 해인이란 말은 바닷속에 그림자다 이 말인데, 그 인자가 그게 그림자처럼 선명하게 보인다 그런 도장 인잔데, 생각을 멈추고 지혜 바다로 환히 들어가면 내 몸과 온 우주가 똑같이 자기 지혜 광명 안에 다 들어있어요. 그걸 수월도량이라 그래요. 물속에 있는 달과 같은 세계, 도량이라는 건 세계라는 말인데 물속에 달과 같은 세계다. 그래서 이 몸을 느끼는 것도 내 지혜 광명이 있어서 이 몸을 느끼고요. 지혜광명 그 물 속에 이 몸이 들어있는 거예요. 그걸 보는 게 해인삼매거든요. 삼매에 들면 돼요, 이거. 생각으로는 안 돼요. 해인삼매에 딱 들면 이 몸도 지혜광명, 바닷 속에 밝고 밝은 그림자. 허공도 지혜광명, 바닷 속에 밝고 밝은 그림자. 온 우주가 지혜광명의 바닷속에 있다. 이걸 가르치는 거예요. 왜? 이제 부처님이 깨달아가지고 이걸 가르쳤기 때문에, 깨달은 게 바로 해인삼매거든요. 우리도 삼매에 들면 바로 봐요. 바로. 못 볼 게 하나도 없는 거예요. 삼매에 안 들지. 말만 듣고 그다음에 안 해요. 왜 안 하냐. 이 생각으로 사는 습관이 너무 깊이 들어서 그래요. 생각으로 구하려고 그러지, 해인삼매로 평화로우려고 안 해요. 지혜로 들어가면 평화가 있는데, 생각으로 구하다 보면 근심 걱정이 있어. 그러니까 이게 구하지 않으면요, 걱정할 거 하나도 없어요. 모든 걱정은 구하는 데서 생겨. 거 희한하데. 희한한 게 뭐냐 요즘 젊은 사람들도 부모한테서 못 벗어나요. 근데 왜 그렇게 못 벗어났냐 그러니까, “부모 거슬리면요, 앞으로 돈 안 줘요.” 이래요. 돈 받으려고 부모 못 떠나. 이 참 기가 막혀요. 지 몸을 지가 살피지, 왜 부모한테 받아서 살라 그래. 이게 받으려고 하면 종 돼요. 노예가 되는 거예요. 안 받으려고 하면 그냥 주인 돼요. 그러니까 구하면 노예 되고, 안 구하면 주인 된다. 그 자식한테 뭐 바라지 말아요. 바라면 자식이 원수 돼요. 자식이 누가 주나, 지 살기 바쁘지. 부모 관심이 없어요. 그건 잘 모르더라고. 가끔 와가지고 뭐 잘 계셨느냐고 좋은 말 다 하니까 그게 자식의 본심인 줄 알아. 그게 속는 거예요. 자식 본심은 따로 있어요. 자식은 근본적으로 먹고 튀는 거예요. 나도 자식 해봤잖아요. 아니 부모한테서 뭐 받아먹을 건 많이 받아먹는데 그거 안 갚고 튀어버려. 그게 자식의 기본 마음이에요. 그러니까 해줄 거 다 해줬으면 그다음에 바라지 말아라. 안 바라면 자식으로부터 자유로워, 바라면 자식에게 끌려가, 끌려가면 노예죠. 이런 말은 또 화엄경에 없어요. 화엄경은 이 글자뿐이거든. 이런 말이 어디 있어. 그래서 일승법계. 화엄경을 보는 나와 화엄경에서 말하는 저 세계가 하나라는 거예요. 이게 일승이에요. 일승법계를 말한다. 그 일승법계가 원융원만(圓融圓滿)이라. 하나의 길이니까 원융하고 원만해. 원융원만이라는 건 뭔가. 작은 것이 큰 것을 다 거둬들이고요. 큰 것이 작은 것을 다 거둬들여서 큰 것이 작은 것 속에 있고, 작은 것이 큰 것 속에 있고, 이것 속에 저것이 있고 저것 속에 이것이 있어서 원융하고 다 무애해요. 그래서 무장무애해요. 장애가 하나도 없어. 대경대교 일승법계 원융원만 무장무애(大經大教 一乘法界 圓融圓滿 無障無礙)라. 그래서 어떡하자는 거냐. 각위부동하고, 각자 자기 지위에서 움직이지 않고, 이놈이 여기 딱 있어서 여기서 움직이지 않고, 이거를 다 여기 거둬들이는 도리가 있어요. 또 이것도 이걸 움직이지 않고 이것을 다 거둬들이는 도리가 있어요. 이게 자위부동(自位不動)이라, 각위부동. 자기 지위를 옮겨가지 않고 자위를 부동하고, 행업을 만성(行業滿成)이라, 하는 업은 원만히 다 이룬다. 이게 이제 화엄경의 뜻이고, 법성게의 뜻인데 핵심이 자위부동 행업만성. 자위 부동이라는 건 뭐냐. 이런 거예요. 이 집이 있는데 이 집은 주춧돌, 기둥, 서까래가 다 있어요. 근데 기둥이면 기둥, 주춧돌이면 주춧돌, 서까래 하면 서까래가 그대로 자기 자리에 다 지키고 자기 역할만 하는 거예요. 자기 역할만 하되 전체 집을 다 그것들이 완성시키고 있는 거예요. 기둥이 왔다 갔다 하는 거 아니에요. 기둥은 기둥대로 다 있는데 그게 집이 돼요, 전체가. 서까래는 그냥 서까래만 있는데 그게 다 집이 돼. 이게 자위부동하고 행업만성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하나가 모든 것 속에 있고 모든 것이 하나 속에 있다. 이게 이제 원융원만 무장무애인데, 이러니까 이걸 강의를 하는데 어떤 모임에서 그런 일이 있었다 그래요. 그래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야. 그러면 너한테 그걸 증명해 보여라. 그래서 돈을 1원을 딱 가지고 이걸 만 원으로 바꿔달라 이랬어요. 이걸 1원을 내면서 이걸 만 원으로 바꿔달라. 그러니까 그 사람이 뭐라 그랬을까요? 대답을 잘 못했대. 공감이 안 됐대. 근데 이게 화엄경에서 일즉다 다즉일이라고 하는 건요.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라고 하는 것은, 일원을 가지고 만원으로 바꾸는 게 아니에요. 일원 자리를 그대로 지키고 있으면서 그 일원 속에 만원이 다 포함된 거예요. 그거를 어려운 말로 1원은 본수라고 하고, 만원은 만수라고 하는 거예요. 가득할 만자. 본수를 옮기지 않고 만수를 본수에서 다 포함하고 있는 거거든요. 또 만수를 만 원을 옮기지 않고 그 만 원 속에 1원이 다 있는 거예요. 한번 생각해 보세요. 1원 없는 만 원이 어디 있어요? 1만 원에서 1원 빼면 만 원 안 되거든요. 그런 거예요. 그래서 본수, 만수. 그래서 한 덩어리가 억이라고 할 때도 억은 만수 쓰고 그 일은 본수인데 억에서 1 빼봐요. 그게 얼만가. 99,999,999 그것밖에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만원 속에 일원이 있고 일원 속에 만원이 있어서 제자리를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만원을 이루는 거예요. 이게 이제 행업을 원만하게 이룬다. 그러면 이것을 수행으로 보면, 행업이 수행인데 지금 이 중생의 몸을 하나도 움직이지 않고 여래의 업을 다 이루는 거예요. 이게 화엄이에요. 이 몸 바꿔서 뭐 하는 게 아니에요? 법화경에는 바꿔서 한다는 말이 있어요. 변성 남자(變成男子)라는 말이 있는데, 용녀가, 용의 딸이 몸을 바꿔서 남자가 돼가지고 성불했다 이런 게 있어요. 근데 화엄경은 변성이 아니여. 그냥 자위를 부동하고, 자기 지위를 움직이지 않고, 행업만성이여, 하는 일을 다 이뤄요. 그래서 이 중생 몸 바꾸지 않고 그대로 성불하는 거예요. 그게 일즉다 다즉일이에요. 근데 이게 어떻게 가능하냐. 이게 저런 게 이해가 잘 안 된다 하는 건 이게 무명 망상이라 그래요. 그게 어리석은 망상 때문에 이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혜 광명으로 들어가면 되는데, 지혜 광명은 삼매에 드는 거예요. 딱 지혜광명에 들어가 보면 이 삼라만상 4대 육신이 참 지혜의 광명 속에 나타난 현상이에요. 이게 화엄삼매거든요. 근데 화엄삼매는 시작도 끝도 없어요. 보통 우리가 참선할 때 입선 출정이 있거든요, 입정 출정이 있는데, 시작할 때 죽비 딱 딱 치고, 정에 들어, 마칠 때 또 딱 딱 치고 마쳐. 이거는 이제 보통 일상 수행이고, 이 화엄삼매는 들어가는 게 없고 나오는 게 없어요. 항상 이 화엄삼매에요. 그리고 전생에 들었다가 금생이 나오고, 금생에 들었다가 내생이 나오고, 동방에서 입정했다가 서방에서 출정하고, 여자 몸으로 입정했다가 남자 몸으로 출정하고, 이런 거예요. 희한해요. 그냥 상식으로는 도저히 안 되는 거예요. 그런데 해인삼매에 딱 들면 이게 뭐 하나도 이상한 게 아니고 그대로 나타나는 현상이에요. 이런 걸 가르치는 게 이게 화엄경이고 그 화엄경을 요약을 해서 제시하는 게 법성게거든요. 그리고 이제 우리나라에 돌아와서 제자들을 가르칠 때, 그 관법을 이제 가르치는데, 관법은 뭐냐. 이 일승법계 여래십신. 여래간의 법계인데, 법계에는 한두 가지 몸이 아니라 무한한 놈이 다 있다. 이걸 열 십자, 몸 신자 십신이라 고 해요. 하나로 이루어진 법계, 여래에게는 열 가지 몸으로 나타난다. 일승법계 여래십신인데, 일승법계 여래십신을 보는 게 중요하다. 그것이 이제 삼매를 닦는 건데 삼매를 어떻게 닦아야 이거 일승법계 여래십신을 바로 볼 수가 있나. 그 말은 이게 내 몸인데 내 몸이 법계 몸이라고 하는 걸 보는 거예요. 법계의 몸을 법신이라고 하거든요. 내 몸을 오신이라고 한단 말이에요. 나 오자 몸 신자, 오신. 이게 내 몸인데, 이 내 몸이 법계 몸이라고 하는 걸 어떻게하면 볼 수 있습니까? 이거예요. 그래서 이 몸이 법신이다. 참 기가 막히네. 보통 일 아니에요. 근데 화엄삼매를 닦으면 이 몸이 법신이라는 걸 바로 눈앞에서 본다. 그건 뭐와 같으냐 하면, 꿈에 큰 바닷물 속에 빠졌어요. 그 바다가 끝이 없어. 근데 이 바다에서 어떻게 하면 나갈 수 있나. 그 망망대해에서 한복판에 빠져가지고 허우적거릴 때 그것도 바닷물에서 나간다는 게 그게 불가능한 거잖아요. 근데 금방 나갈 방법이 있거든요. 어떻게 하면 되지요? 꿈 한 번 딱 깨면 그만이에요. 꿈 딱 깨면 그만이에요. 그게 삼매예요. 삼매라고 하는 건 중생의 망상의 꿈에서 깨는 거다. 그런데 화엄경이 그런 거예요. 일승법계 여래십신을 바로 보게 하는 거다 말이죠. ② 의상스님의 學業指導(학업지도) 相和尙 住大伯山 大蘆房時 爲眞定智通等說 行人欲見十佛 상화상 주대백산 대로방시 위진정지통등설 행인욕견십불 者 應先作眼目 通等問 云何是眼目耶 和尙曰 以華嚴經 爲 자 응선작안목 통등문 운하시안목야 화상왈 이화엄경 위 自眼目 所謂 文文句句 皆是十佛 자안목 소위 문문구구 개시십불 (叢髓錄卷下之二. 韓佛全6, 834中) (총수록권하지이. 한불전6, 834중) 그래서 이제 의상 스님이 그랬어요. 하루는 태백산 대로방(大伯山 大蘆房)이라고 하는 데가 있었는데, 큰 대자, 갈대 로자, 대로방에 머물 때 진정 지통(眞定智通), 진정 스님, 지통 스님이 의상 스님 제자, 아주 중요한 제자들이에요, 지통을 위해서 말씀을 하시기를, 행인이 욕견시불자(行人欲見十佛者)라, 여래십불, 여래십신 일승법계를 보고자 하는 자는 응선작안목(應先作眼目)하라, 응당히 먼저 눈을 갖추어라 이랬어요. 이 몸이 법신임을 볼 때, 또 십불 십신 일승법계를 보려고 하면 먼저 눈을 마련하라. 눈이 있어야 본다. 그러니까 지통 이런 분들이 묻기를 운하시 안목이냐(云何是眼目耶), 어떤 것이 이 십신을 보는 눈이냐. 그렇게 의상 선생님한테 물었죠. 화상왈(和尙曰), 의상 선생님이 말씀하시기를, 이 화엄경으로 위안목하라(以華嚴經 爲自眼目), 화엄경으로 눈을 삼아라 이랬어요. 화엄경이 이 몸이 법신임을 보는 눈이다, 화엄경의 눈으로 보면 다 보인다 이거죠. 그래서 이 경문을 본다는 것은 경문을 그냥 해석하고 외우고 하는 것만이 아니라, 그 경의 눈으로 우주 법계를 보는 거예요. 경의 눈으로 보는 거다. 이게 경안이에요. 근래에 와서 경안을 또 바로 해석한 적이 있는데, 본래 경안의 뜻은 경의 눈으로 우주법계 진실성을 보는 거다 그거거든요. 그냥 화엄경에서 가르치는 게 있잖아요. 그 가르침으로 눈을 삼아서 보는 거예요. 그러면 그게 이제 뭐냐 하면, 법성게에서는 일미진중에 함시방(一微塵中含十方)하고, 한 조그마한 티끌 속에 시방 세계는 다 포함하고 있다. 그 눈을 가지고 보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뭐 미진이 세계고, 세계가 미진이고 다 보일 거 아니에요. 무량원겁이 즉일념(無量遠劫卽一念)이요, 일념즉시 무량겁(一念卽是無量劫)이라, 무량아승지겁이 그냥 일찰라다 이 말이죠. 일찰라가 무량아승지겁이다. 그런 삼매에 딱 들어서 무량원급즉일념 삼매에 딱 들면 무량원급이 즉일념이라고 환히 보일 거 아니에요. 그러면 문문구구(文文句句)가 화엄경으로 눈을 삼아서 우주를 보면, 글자 글자 문구 문구가 다 십불세계 일승법계다. 그런 가르침을 주신 거예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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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3월 29일 49재 법문
가섭스님 2024-03-29
마하반야바라밀 반갑습니다. 오늘 영가님의 49재를 맞이해서 하늘에서도 그간의 어머니가 주셨던 사랑만큼의 비가 내리고 있습니다. 오늘은 49재인 만큼 우선 어머니를 위해서 다 함께 마음을 모으는 시간을 좀 갖고자 합니다. 합장을 하시고요. 지금 게송은 어머니에게 전해주는 우리들의 마음입니다. 제행은 무상이요 생자는 필멸이라태어났다 죽는 것은 모든 생명 이치이니 임금으로 태어나서 온 천하를 호령해도결국에는 죽는 것을 영가님은 모르는가영가시여 어디에서 이 세상에 오셨다가 가신다니 가시는 곳 어디인 줄 아시는가 태어났다 죽는 것은 중생계의 흐름이라 이곳에서 가시면은 저세상에 태어나니 오는 듯이 가시옵고 가는 듯이 오신다면 이 육신의 마지막을 걱정할 것 없잖는가 일가친척 많이 있고 부귀영화 높았어도죽는 길엔 누구 하나 힘이 되지 못한다네 맺고 쌓은 모든 감정 가시는 길 짐 되오니 염불하는 인연으로 남김없이 놓으소서 49재를 맞이해서 우리 어머님이 극락왕생하셨으면 하는 그런 우리들의 간절한 마음을 담아서, 어머니에게 그 마음을 전했습니다. 우리가 어디 갈 때 짐이 많으면 옮기기가 힘들 듯이, 돌아가신 분이 좋은 곳에 안락하게 가는 데 있어서 제일 힘든 건 아마도 내가 이생에 와서 인연 맺어서 또 같이 살았던 아들, 딸, 또 며느리, 손자, 또 손녀, 아마 가장 마음에 밟히는 것이 그런 친족들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그런 마음들을 좀 내려놓고 좀 가벼운 마음으로 더 좋은 세상에 인연 맺게 하기 위해서, 우리는 49재를 봉행을 해서 그 마음을 기립니다. 어떻게 보면 49재는 돌아가신 어머니보다는 살아있는 우리들의 마음들을 좀 더 편안하고, 또 그리움들을 좀 더 아프고 또 힘들었던 기억보다는 어머니하고도 아름다운 기억으로 남기기 위해서 모십니다. <기억은 역사다>라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아마도 우리의 어머니에 대한 기억들이 어머니와 우리 가족들의 가정사의 한 부분일 겁니다. 오늘 이제 비가 자분자분 내리는데 이 빗물이 아마도 어머니에 대한 그리움만큼의 의미가 있을 것이고, 저는 이 그리움의 빗물이 또 어떻게 보면 그동안에 어머니하고 조금이라도 서운한 게 있다면, 조금 나쁜 게 있다면 그것을 씻어내는 그러한 빗물의 의미도 또 있을 거다 그런 생각을 해보게 되고, 또 봄의 빗물은 다른 때와 다르게 새로운 생명을 움트게 하고 성장하고 자라게 하는 그런 힘이 있거든요. 그래서 오늘 49재를 통해서 좀 더 성숙한 인연으로 나아가는 길이 될 것 같고, 또 어머니는 좀 더 좋은 세계로 갈 수 있는 그런 그립지만, 축복의 비가 세 번째 의미로 있지 않을까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옛날에 부처님께서 아난존자하고 길을 가는데 갑자기 부처님께서 뼈 무덤을 보고 절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20년 넘게 부처님을 시봉했던 아난존자 입장에서는 깜짝 놀랐죠. 왜냐하면 부처님은 위대한 스승이고 또 사생의 자부(四生慈父)라고 표현하지 않습니까? 근데 그런 분이 아주 남루한 그 초라한 뼈 무덤에 절을 하니까 아난이 웃습니다. “어떠한 연고로, 어떠한 인연으로 그 뼈 무덤에 그렇게 간절하게 절을 하십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아난에게 묻습니다. “이 뼈가 남자 뼈이겠느냐, 여자 뼈이겠느냐?” 이렇게 물어봐요. 그러니까 이제 아난존자가 “어찌 뼈만 보고 남자인지 여자인지 알 수 있습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이 뼈 무덤은 여자의 뼈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잖아요. “어떻게 아느냐?” 그러니까 “남자의 뼈는 희고 무거울 것이며, 여자의 뼈는 검고도 가벼울 거다. 왜 그런고 하면은 아기를 한 번 낳을 때마다 여덟 섬 너 말의 피를 흘리고, 또 아기를 어느 정도 양육할 때까지 모든 본인의 영양분을 전달해 주기 때문에, 또 열 달 동안 품어서도 본인의 모든 걸 주기 때문에 그 뼈가 검고도 가볍다.” 그렇게 부처님께서 부모의 은혜가 얼마나 지중한지 말씀을 하십니다. 그래서 “오른쪽 어깨에 어머니를 업고, 왼쪽 어깨에 아버지를 업고, 무릎을 꿇고 그 수미산이 닳도록 오르락 내리락 해도 그 부모의 은혜는 다 갚을 수가 없다”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러니까 부모의 은혜 특히 어머니의 은혜는 우리가 이생에 올 수 있는 그런 인연을 주신 거기 때문에, 부모의 은혜는 참 지중하죠. 근데 살아있을 때는 알면서도, 모르는 건 아닌데, 알면서도 잘 되뇔 수 없는 그런 망각의 시간들을 우리가 보냅니다. 근데 그게 절실해지는 게 돌아가시고 한 달이 지고, 두 달이 지고, 49재가 지나고 나서, 100일째가 되면 그 그리움이라는 게 또 잘해줬던 것보다는 못 해줬던 게 생각이 나서 마음이 너무 아려오죠. 우리가 이제 옛날 어른들이 이렇게 3년 탈상한 것도, 이렇게 49재를 지내고 7번을 지냈잖아요, 그리고 100일째 한 번 더 지내고, 그리고 1년째 한 번 더 지내고, 그 3년째 한 번 더 지낸 게 이게 10번이에요. 시황에 해당되는 건데 그러면서 우리가 적어도 3년은 지나야 우리의 마음도 수순해지고 또 그때 우리 마음도 좀 더 정리된다. 아마 그런 의미에서 옛날에 어른들은 3년간 그렇게 모셨던 것 같습니다. 요즘에는 뭐 워낙 세월이 빠르다 보니까. 부처님께서 이제 80세에 입멸하셨잖아요. 저번 주 일요일이 이제 열반재일이었는데, 부처님께서 이제 입적하신, 적멸에 드신, 불교 용어로 말하면 반열반에 드신 그런 날이기도 합니다. 열반재일 그러죠. 부처님도 열반하실 때가 돼서 그 숲속에 머리를 북측에 두고 오른쪽으로 누워가지고 마지막 입멸의 순간을 맞이하십니다. 부처님이 얼마나 위대한 분이었냐면, 부처님 칭찬 한마디를 하고 가면, 아난다가 “왜 이렇게 허름한 숲속에 누워서, -그게 이제 구시나라의 사라쌍수 밑이죠.- 많은 대중이 모여 있는 데도 있고, 왕궁도 있고, 좋은 환경이 많은데, 왜 이 초라한 나무 두 그루 사이에서 입멸을 하십니까?” 이러니까, 부처님께서 “그런 말 하지 말아라. 나중에 이곳이 큰 성지가 될 것이다.” 그렇게 말씀을 하세요. 그게 현재 열반당에 있는 장소입니다. 구시나라의. 그러면서 말씀을 더 하시기를, “내가 왕궁에 들어가서 입멸을 하게 되면, 이생의 인연을 다하게 되면, 지위가 높은 사람은 나를 보러 올 수 있겠지만, 지위가 높지 않은 사람은 나를 보러 올 수가 없다.” 그러면서 부처님께서 아난다에게 “지금 모든 사람에게 알려서 마지막 나에게 궁금한 것을 물으라 해라. 나를 마지막 보고 싶은 사람은 오도록 하라.” 이렇게 말씀을 하십니다. 그게 소문이 나가지고, 이제 많은 사람들이 그 구시나국의 사라쌍수 근처에 모이게 되는 거죠. 그 제자들도 이제 많이 모여 있고, 그러니까 제자들은 얼마나 그 마음이, 본인이 그렇게 마음으로 영적으로, 이렇게 마음을 다해서 의지했던 귀했던 분의 마지막 모습을 보는 입장에서는 얼마나 아프겠어요. 그러고 있는데 이제 아난다가 여러 가지 질문을 합니다. “이제 부처님께서 돌아가시면 우리는 누구에게 공양을 해야 됩니까? 그동안에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서 공덕을 짓기도 하고, 흔연한 마음도 생기고, 또 법의 그런 환희심이라 법열이라 그러는데 그런 것도 느끼고 했는데, 이제는 부처님이 안 계시니 누구한테 해야 됩니까?” 우리도 그렇죠. 어머니 살아계실 때는 어머니하고 같이 외식을 해서 맛있는 걸 먹는다든가, 어머니하고 외출을 해가지고 고운 옷을 사드려서 아주 곱디 고운 그런 자태를 볼 때 마음이 기쁘죠. 근데 어머님이 이제 사대가 모두 흩어져서 안 계신단 말이에요. 그런 그때 부처님의 제자들도 그런 마음이었을 겁니다. “누구한테, 이제는 부처님 안 계시는데, 어떻게 공양을 짓고 어떻게 공덕을 지어야 됩니까?”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걱정하지 말아라. 나한테 공양을 하는 것과 똑같은 공덕이 있는 4가지가 있는데, 이 4가지를 잘 공양하면 마치 여래를 공양하는 것처럼 그 공덕이 수승하고 그 마음의 복이 충만할 거다.” 이런 얘기를 합니다. 아마도 지금 드릴 말씀, 이렇게 네 가지 공양을 그중에서 한 가지만이라도 잘 선택을 해서 내가 실천한다면, 그거야말로 어머니에게 공양 올리는, 그래서 그 공덕으로 어머니도 좋은 세상에 가고, 또 내가 이생의 인연이 되는 그 순간까지 장애 없이 막힘없이 하는 일마다 잘 풀리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그래서 첫 번째가 뭐냐 그러면은, 배고픈 사람에게 밥을 주는 겁니다. 우리는 이제 지금은 많이 좋아졌지만 그래도 배를 굶는 사람들이 많습니다. 제 도반이 있는데, -도반이 친구예요. 같이 스님 생활하는 친군데, 도반인데,- 이 친구는 매일 아침마다 새벽 4시면은 빵, 우유, 사과 이렇게 해가지고 종로 일대를 돌아요. 종로 일대를. 길거리에서 집을 잃어버리고, 끼니를 잘 못 채우는 분들을 새벽마다 찾아다녀요. 그 스님에게는 그 아침에 종로를 도는 게 새벽 예불이에요. 그리고 만나는 사람은 다 부처님처럼 대하는 거. 다 자고 있으니까 먹을 걸 놓고 합장을 탁 하고 물러나고. 그러는 도반이지만, 내가 아주 존경하는 도반이 하나 있습니다. 그런데 또 인연을 맺어서 내가 조금이라도 마음을 더하고 하는 것. 그것이 이제 첫 번째로 끼니를 굶는 사람에게 먹을 것을 공양하는 것, 그것은 어머니를 공양하는 것 같은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과 마찬가지다. 두 번째로는 아픈 사람에게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게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것과 같다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세계에 아픈 사람이 얼마나 많습니까? 의학이 발달하고 과학이 발달해도 병원은 항상 만원이잖아요. 그리고 작은 병, 큰 병으로 시름 하는 사람이 많아요. 인간이 이생에서 경험할 수 있는 병이 404가지나 된다고 그래요. 사대에서 한 대마다 101가지의 병이 있으니까 404가지, 404가지의 병이 있다, 그렇게 이제 얘기를 하는데, 얼마나 많은 아픈 사람들이 있습니까? 그 아픈 사람들을 위해서 가끔씩 가서 봉사도 하고 위로도 해주고 하는 것. 그것이 공양이고, 그것이 어머니에게 공양하는 것이고, 그리고 부처님에게 공양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제 공양이라고 하는 거는 평소에 그런 마음들을 지어야 되는 거예요. <마음을 짓다> 이렇게 표현하잖아요. 세상에는 이 짓다라고 하는 용어가 있는데 여기에는 집을 짓다, 여러 가지 옷을 짓다 그러죠. 여기는 마음이라고 하는 게 포함돼 있는 거예요. 마음 없이는 불가능한 겁니다. 그래서 그런 마음을 평소에 잘 짓는 것, 밥을 짓다 그러죠. 밥을 짓는 것도 마음이 빠져버리면 설어버려요. 그래서 마음을 잘 짓는 거, 평소에, 그게 공양입니다. 내가 끼니를 걱정하는 사람들에게 조금 마음을 더 해야지, 아픈 사람에게 가서 내가 한번 아픈 거를 치료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수 있는 행동을 실천을 해야지. 그리고 세 번째는 가난하고 외로운 자들을 도와라.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그것이 부처님을 공양하는 것이고, 더 나아가서는 내가 공덕을 짓는 일이다, 이렇게 말씀을 하세요. 우리가 이제 평소에 그런 마음을 잘 지어야 되겠죠. 외로운 사람을 돕기 위해서, 잘 위로하고, 가난한 사람들은 가난에서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줘야 됩니다. 그게 보통 사찰에서, 우리 마음의 정원 진관사도 보면은 이 세 가지 일을 다 하죠. 세 가지 일을 다 합니다. 지역사회에 활동을 통해서 다 하죠. 그리고 마지막 네 번째가 뭐냐 그러면, 바르게 수행하는, 바르게 수행하는 수행자들을 잘 공양해야 된다, 이렇게 얘기하십니다. 그것이 최상의 공덕이다. 이 네 가지를 잘 실천하는 것이, 네 가지 전부 다 수승하지만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어머니가 가시고 49재가 됐으니, 100일 안에, 내지는 1년 안에, 3년 안에 이 중에 한 가지라도 실천하면 그 마음이 오롯하게 어머니에게 전달되고, 그 어머니는 흔연한 마음으로 또 가벼운 마음으로 즐거운 마음으로 좋은 세계에 인연 맺고, 또 다시 우리 곁에 모습은 다를지언정 좋은 마음의 씨앗을 가지고 우리 곁에 올 거다. 저는 그거를 확신합니다. 우리가 오늘 이 49재를 거룩하게 이렇게 봉행하는 그 공덕으로, 어머니가 우리 곁에 분명히 오시는데, 더 좋은 마음, 더 좋은 복락을 가지고, 우리를 도와주는 인연으로 오실 거다, 그렇게 생각을 합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살아있는 사람들이 중요한데, 마지막으로 이거는 꼭 해야 됩니다. 뭘 해야 되냐 그러면, 어머니의 후손들이 본인의 마음을 관찰하는 연습을 오늘부터 해야 돼요. 본인의 마음에 거울을 만들어서, 그 거울에 남편도, 자식도, 어머니도, 아버지도 아니고, 본인의 얼굴을 비춰보는 연습을 해야 돼요. 근데 우리는 일생동안 마음의 거울에 맨날 남의 얼굴만 비쳤어요. 잘한다, 못한다. 그러니까 마음이 점점점 걸어지고 거칠어지고 울퉁불퉁해지고, 때로는 마음에 뾰루지도 나고 곪기도 하고 그러다 어떻게 돼요? 터져요. 그러니 그거를 방지하려면, 오늘부터는 내 마음의 거울을 만들어서, 그 거울에 자신을 잘 비추는 거예요. 그래서 나를 자꾸 보는 연습을 하면, 그리고 그 보이는 내 모습에 내가 스스로가 자꾸 칭찬하고 잘하고 있다, 그리고 아까 말씀드렸던 네 가지 중에 한 가지라도 실천하는 것이 어머니를 도와주는 거다, 그런 생각을 지어야 되고, 마음을 지어야 되고, 또 하나는 그 비춰진 그 본인의 모습으로 형제 간에 특히 직계 형제 간에 다툼을 하면 절대로 안 돼요. 다툼을 하면. 혹여라도 서운한 게 있고 또 마음에 맺힌 게 있다 하더라도, 이걸 통해서 다 풀어야 됩니다.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얘기하는데, 반대로 조상님이 좋은 데를, 우리 선망 부모들이 좋은 데를 못 가는 이유는 남아 있는 사람들이 자꾸 다투기 때문에 그래요. 이거는 철없을 때는 몰랐는데, 자식을 키우고 나도 이제 제 아들, 딸도 있고 손자, 손녀가 있는 나이쯤 되면 그걸 알아요. 근데 그걸 아는데 이미 그때 되면 마음의 연습을 안 해가지고 마음이 이렇게 좁아져가지고, 마음의 문이, 아는데 이해가 안 돼요,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요. 알긴 아는데. 그래서 지금 말씀드렸던 연습은, 마지막에 마음의 거울을 만들어서 그 마음의 거울에 나를 자꾸 비춰보라고 하는 이유가 뭐냐 하면, 우리가 나이가 먹을수록 마음이 넉넉해지고 여유 있어지고 커져야 되는데, 그걸 안 하니까 마음이 밴댕이 소갈딱지가 돼가지고, 밴댕이 속이 밴댕이도 작은데 밴댕이 속은 얼마나 작아요, 거기다 딱지예요. 얼마나 작겠어요? 그렇게 된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같은 형제들끼리도 요만한 게 실수하거나 요만한 게 마음에 안 들어도 용서가 안 돼, 용납이 안 돼, 그렇게 되면 안 된다는 거예요. 자, 이제는 어머니를 보내드릴 시간입니다. 이제 눈물이 아니고, 슬픔이 아니고, 이제는 우리 기존보다 더 좋은 인연으로 좋은 마음에 그런 복덕의 종자를 안고 우리를 도와주러 올 어머니를 위해서 극락왕생을 간절히 간절히 기도하고 발원하고 그것이 진정한 어머니에 대한 천도입니다. 이제 슬픔의 눈물을 닦고, 그리움의 눈물도 닦고, 이제 축원의 눈물, 그리고 우리 발심의 그런 눈물로, 발원의 눈물로, 어머니가 좀 더 좋은 세상에 편안하게 계시다가 정말 큰 복덕, 공양을 가지고 우리 곁에 다시 오시라는 믿음을 갖고 천도하시기를 발원하면서, 오늘 말씀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