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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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10월 3일 초하루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4-10-03
주제 : 義相祖師法性偈이야기⑥ 의상조사법성게이야기⑥-- 眞性甚深極微妙 · 指緣起體 --진성심심극미묘 · 지연기체 갑진년 9월 초하루 진관사 법회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은 의상조사 법성게 중에서 진성심심극미묘(眞性甚深極微妙) 그 내용인데요. 하기 전에 박수 한번 딱 치고, 10번을 외우고 또 마지막 한 번 딱 치고 시작합니다. 시작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진성심심극미묘 진성심심극미묘 (박수) 잘 됐어요 아주. 아주 잘 됐어요. 대승불교에서 삼종 인과를 가르치고 있는데요. 세 가지 인과, 삼종 인과. 첫째는 육도인과. 육도인과는 범부가 생사를 거듭하는 내용이죠. 육도윤회, 육도생사, 육도인과 그걸 가르치고 있고. 둘째는 삼승인과.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이 삼승인데, 삼승인과는 해탈인데, 해탈인과인데, 이 삼승들은 삼승이 각별이다. 성문승 해탈, 연각승 해탈, 보살승 해탈도가 각각각 다를 별, 각각 다른 인과다. 그래서 삼승 각별인과라 그래요. 그다음에는 법계인과. 온 우주 법계의 인과인데, 이 우주 법계 인과는 화엄경에서 가르친다고 해서 화엄 인과라고도 하고, 화엄경은 원교를 말한다고 그래서, 원교, 둥글 원자, 가르칠 교자, 그래서 화엄종을 원종이라고 하고, 화엄경의 가르침을 원교라고 하고 그래요. 그래서 원교인과라고도 하고. 또 화엄경은 하나의 길을 말한다라고 해서 일승인과라고도 그래요. 일승. 삼승이 아니고 일승인과다. 그런데 화엄인과나 원교인과나 일승인과나 다 법계인과를 말한다. 그래서 법계인과라고 하거든요. 그럼 법계인과라고 하는 게 뭐냐. 육도인과와 삼승인과는 순서가 있는데 이 법계인과는 순서가 없어요. 시작이 바로 결과예요. 결과가 바로 시작이고요. 또 미래가 현재예요. 또 과거가 현재고. 이래서 원융(圓融)이라 그래요. 원융. 순서가 없이 하나로 통하는 것은 원융이다. 그래서 화엄인과는 법계인관데, 법계인과는 원융인과다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法無自性 以他爲性 塵塵混入 剎剎圓融 법무자성 이타위성 진진혼입 찰찰원융眞性甚深 眞極微妙 法不相知 法不相離진성심심 진극미묘 법불상지 법불상리 그럼 오늘 육도인과, 삼승인과, 법계인과 중에서 오늘 말씀이 법계인과를 말하는 내용이에요. 그럼 법계인과가 뭐냐? 화엄경에서는 하나하나 법에 자체 성격이 없다. 그래서 이걸 법무자성(法無自性)이라고 하거든요. 이것은(컵뚜껑을 가르치며) 이것의 자체 성질, 자체의 성격이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법무자성이라. 법에는 자성이 없다. 그럼 이게 어떻게 이루어졌냐. 이타위성(以他爲性)이라, 다른 것으로서 자체의 성격을 삼고 있다. 이걸 이타위성이라 그래요. 다른 것으로 자체 성격을 삼고 있다. 그래서 진진혼입(塵塵混入)이라. 티끌 티끌이, 우주 법계가 다 티끌로 이루어졌는데, 티끌 티끌에 모든 티끌이 다 들어가요. 하나의 티끌에 우주 전체 티끌이 다 들어오고, 또 지금 이 티끌도 우주 전체 티끌에 다 들어가고, 티끌 티끌마다 우주 법계가 다 들어가는 거예요. 이걸 다 혼자(混)가 있는데, 다 혼자, 다 들어간다. 진진에 혼입이라. 뭔 소리인지, 이게 어려워서 죽겠네, 이거. 진진혼입. 스님들은 많이 들어본 말인데. 찰찰원융(剎剎圓融)이라, 찰은 세계인데, 국토, 국토, 세계, 세계마다, 국토, 국토마다, 이 세계에 다른 것이 다 들어와 있고, 이것이 또 다른 데 다 들어가 있고, 이걸 원융이라고 하거든요. 하나에 모든 것이 다 들어갔고, 모든 것이 하나에 다 들어가고, 이걸 원융이라 그래. 그런 건데 오늘은 이 진성이 심심(眞性甚深)하다. 진성이라고 하는 것은 이 원융무애의 지난번에 한 법성을 말하는데, 원융무애는 법의 성격이다. 법의 자성이다. 이래서 법성인데, 법성은 여기서 진짜가 거짓을 상대해서 진이 아니라, 전체가 진이다. 생멸을 상대한 진을 말하는 건 기신론인데, 화엄경은 생멸 상대 진이 아니라 전체가 온전하게 진이다, 이게. 여기서 진성은. 진성밖에 없다. 다른 건 없다. 그래서 그 진성이 심심해요. 심히 깊어. 그 깊단 말은 끝이 없어요. 심히 깊어. 그러고 진극이 미묘 미묘(眞極微妙)라. 그 진성으로 모든 것을 다 이룬다고 그래서 진극이라고 하거든요. 다 이룰 극자. 진극이 미묘하다. 이것이 있으면 저것이 있고 그러는데, 이거는 그게 아니고, 이것 속에 모든 게 다 들어가 있고요. 또 저것 속에 모든 게 다 들어가 있어. 그래서 이걸 진극이라 그래요. 참 그대로 모든 것을 다 안다. 참뿐이다. 그래서 이 화엄은 원융이기 때문에 제이는 없어요. 제이, 둘째는 없고, 또 주변은 없다. 주변이라는 말을 의상 스님은 측면이라는 측자를 써서 무측(無側)이라는 말을 쓰거든요. 무측. 측면. 옛날에는 다섯 손가락 외에 한 손가락이 더 있는 분이 종종 있었는데, 그때는 성형 기술이 없어서 그냥 들고 살았거든요. 그런 것 같은 걸 측이라고 그래요. 근데 이 화엄에서는 하나하나가 다 중심이에요. 주변이 없어요. 그래가지고 이 진극은 다 미묘한 주체가 돼서, 티끌에 우주만상이 다 들어가고, 또 티끌이 우주만상 속에 다 들어가서, 전부가 진성으로 모든 것을 다 뒤덮지, 거기에 측면이나 주변이나 없어도 될 쓸데없는 거는 없다. 이걸 미묘하다 그래요. 미묘해. 그래가지고 법불상지(法不相知)라. 그런데 원융하고 심심하고 미묘한데, 이 법법이 서로 몰라요. 이걸 불상지라 그래요. 아니 불자, 서로 상자, 알 지자. 서로 알지 못한다. 어떤 법이든지. 그게 왜 그러냐 하면, 여기 이제 법당에 기둥이 있는데, 저 왼쪽 기둥이 오른쪽 기둥을 몰라요. 오른쪽 기둥이 왼쪽 기둥을 몰라요. 이게 불상지여. 서로 알지 못해. 그런데 왼쪽 기둥 혼자 법당이 될 수가 없어요. 오른쪽 기둥 혼자 법당이 될 수가 없어. 이걸 불상리(不相離)라고 그래요. 서로 떨어진 것이 아니다. 법불상지, 법은 서로 알지 못한다. 법불상리, 어떤 법이든지 법은 서로 떨어진 것이 없다. 이게 이제 화엄이거든요. 이걸 법계인과라고 그래요. 그래서 우리 몸도 발은 머리를 알지 못하고 머리는 발을 알지 못하는데 이게 불상지죠. 근데 발이 머리를 떠나 있지 않고, 머리가 발을 떠나 있지 않고 그런 거예요. 지금 전화하는 사람도 모르고, 전화 받는 사람도 모르는데, 서로 모르죠. 근데 전화 거는 사람하고, 받는 사람하고 서로 떨어져 있는 건 아니에요. 그래서 지금 한 사람이 모든 사람하고 다 연결돼 있어요. 이게 불상리여. 서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근데 서로 몰라요, 어떻게 연결돼 있는지. 불상지예요. 이제 이런 식으로 화엄경에서는 법계인과를 가르쳐요. 그래서 화엄은 발심이 성불이다, 이걸 가르쳐요. 언제 성불을 하냐. ‘성불을 해야 되겠다.’ 마음을 내는 순간에 바로 성불하는 거예요. 이게 법계인과예요. 그리고 불상리라. 그런데 성불했을 때 언제 발심했는지 몰라요. 불상지여. 그런데 발심과 성불이 그대로 다 연결돼 있어요. 이래가지고 성불 떡 하고 보니까, 언제 성불했느냐. 발심했을 때 성불했더라. 그런데 성불하기 전에는 언제 발심했는지도 몰라요. 근데 하고 보니까 성불이 발심을 떠나지 않고 있다. 그래서 하나의 티끌에 모든 세계가 다 들어가고, 또 모든 세계가 하나의 티끌로 다 들어가고, 그래서 이걸 원융무이라고 하거든요. 원융해서 둘이 없다. 참. 그러니까 법이 뭐냐. 일체중생의 오온 신상이라. 오온 수상행식이라고 가르쳤잖아요. 오온 신상이 법인데, 이 법이 그대로 우주 만상이 되는 거예요. 하나의 티끌이 온 우주 법계에 다 들어가듯이, 그러니까 이 화엄 법계 인과를 턱 알아서 믿게 되면, 이 한몸이 우주 법계에 다 들어가니까 이 몸이 우주 법계요, 법계가 이 몸이요. 근심 걱정 없어요. 전혀 없어요. 법무자성이라, 법에는 자성이 없다. 이타위성이라 다른 것으로서 자성을 삼는다. 진진혼입이라, 티끌티끌마다 우주 법계가 다 들어간다. 찰찰원융이라, 국토 국토마다 다 연결돼 있다. 진성심심이라, 모든 것이 깊고 깊다. 또 모든 것이 참된 것으로 다 이루어져서 미묘하다. 그래서 법은 서로 알지 못하지만, 법은 서로 떨어진 것이 하나도 없다. 이렇게 돼요. 그 나머지는 이제 이 법성게를 의상스님 제자들이 주석을 쭉 달아놨는데 그 주석들 중심으로 말씀을 드려야 돼요. 아무리 종범이 공부를 깊이한다고 해도 의상 스님 제자분들처럼 깊을 수는 없거든요. 法記云。①上訂分中 指其身心 直示法性 由無名相 機難得入故 법기운。①상증분중 지기신심 직시법성 유무명상 기난득입고以法性 轉名眞性 令其習也 ··· 如是訂分 絕一切故 唯訂所知 이법성 전명진성 영기습야 여시증분 절일체고 유증소지然以八識妄心 而欲訂入 故於此人 不能直指 訂分之處 乃下一 연이팔식망심 이욕증입 고어차인 불능직지 증분지처 내하일步 假作眞性之名 以示之也。②甚深者 入眞性之門 謂花藏世界 보 가작진성지명 이시지야。②심심자 입진성지문 위화장세계之甚深 與彌勒樓閣之甚深也 花藏世界甚深者 以一一塵中 見法지심심 여미륵누각지심심야 화장세계심심자 이일일진중 견법界故 是故約一微塵 求其内外 並不可得 ··· ③極微妙者 中道也 계고 시고약일미진 구기내외 병불가 ③극미묘자 중도야 非謂離二邊故 以爲中道 即約諸邊 云中道也(叢髓錄)비위이이변고 이위중도 즉약제변 운중도야(총수록) 그러면 의상 선생님 제자분들 중에 법기(法記)라고 하는 주석을 남긴 주석이 있는데, 그 법기에서는 무슨 말로 해석을 했는가. 위 증분 중(上訂分中)에서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부터 증지소지비여경(證知所知非餘境)까지를 증득한 내용, 깨달은 내용이다, 이렇게 설명을 했단 말이에요. 증분 중에서 지기신심(指其身心)이, 중생의 그 몸과 마음이 직시법성(直示法性) 마음이 바로 법성이라는 걸 가르쳤다는 거예요. 법성. 법의 본성임을 가르쳤다. 그런데 그 법의 본성이 무명무상(由無名相)해서,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서, 깊은 해인삼매를 통해서 들어갈 수 있는데, 해인삼매를 얻지 못해가지고, 기난득입(機難得入故)이라, 하근기 · 중근기 · 상근기까지도 들어가기가 어려워. 그럼 뭐냐. 아주 상근대지가 들어갈 수 있는데, 상근대지는 만나기가 어려우니까, 근기들이 난득입이라, 들어감을 얻기가 어려운 고로, 이 법성으로(以法性), 법성이라는 말을 전명진성(轉名眞性)이라, 이름을 바꿔서 진성이라고 했다. 이제 중근기 · 하근기들이 거기에 법성이라는 데 체험할 수 있고 들어갈 수 있도록 하기 위해서 법성이라는 말을 진성이라는 말로 바꿔서 가르치기 시작한다, 이 소리예요. 이게 의상스님 제자가 이 진성에 대한 이름을 주석한 거예요. 참, 이런 주석이 있으니까 이게 공부를 하지, 이거 없으면 더 막막할 거 아니에요. 참. 법성이라고 하면 이 중생의 신상이 법성이기 때문에, 바로 그냥 법성인 걸 알고 그냥 해탈이고, 자재고 원만구족이고 무장무애라. 되는데 그게 이름도 없고 모양도 없어서 중하근기들이 들어가기 어렵기 때문에, 그 못 들어가는 중생들을 가르치기 위해서 법성이라는 말을 진성이라는 말로 바꿔서 가르치고 있다, 이런 설명이에요. 참 기가 막히네. 이와 같이 법성을 깨달은 증분은 절일체고(絕一切故)로, 일체가 다 끊어져서 유증소지(唯訂所知)라, 오직 증득한 지혜로만 그 법성을 알 수가 있어요. 그런데, 그러나 일체 중생들은 팔식망심(然以八識妄心)으로, 생각으로, 망상으로, 이걸 팔식망심이라고 그러는데, 팔식 허망된 마음으로 이욕증입(而欲訂入)이라, 그 법성에 증득하고자 한다. 증지로 들어갈 수 있는데 망령된 마음으로 들어가려고 한다 이 말이에요. 이게 꿈을 꿀 때, 꿈꾸기 전에 본래 이 낮의 경지는 꿈을 깨서만이 알 수 있는데, 꿈을 깨지 않고 꿈속에서 이 꿈 깬 세계를 알려고 한다 이 말이에요. 그거 안 되거든요. 이 꿈 깬 세계는 꿈을 깨기 전에는 알 수가 없어요. 꿈속에서는 아무리 생각을 해봐도 꿈 깬 세계를 몰라. 그래가지고 어차인(於此人)에, 이 법성을 모르는 사람에게 불능직지 증분지처(不能直指 訂分之處)일세. 바로 법성의 세계를 바로 가리킬 수가 없기 때문에 내하일보(乃下一步)하야, 이에 한 걸음을 옮겨서, 가작진성지명(假作眞性之名)하야, 시지야(示之也)니라. 임시로 진성이라는 이름을 지어가지고 중생들에게 보인다. 이렇게 주를 달았어요. 심심자(甚深者)는 심심이라고 하는 것은 진성에 들어가는 문이니, 입진성지문(入眞性之門)이니, 위, 그 심심이 어떤 거냐. 화장세계 심심(花藏世界之甚深)도 있고, 미륵누각심심(彌勒樓閣之甚深)도 있는데, 화장세계 심심이라고 하는 것은 화장세계품에서 일일진중에서(以一一塵中), 하나하나 티끌에서, 견 법계라(見法界故), 우주 법계를 다 본다. 왜냐하면 우주법계가 하나의 티끌로 이루어진 거예요. 하나의 티끌이 없으면, 둘 티끌도 없고, 둘이 없으면 셋도 없고, 넷도 없고, 그래서 하나의 티끌 속에 우주 법계가 다 들어 있는데, 이제 사람들은 그 티끌 모양만 보지, 티끌의 근본을 보지 못하기 때문에 그냥 티끌만 보는 거예요. 그걸 망심이라 그래요. 망심이라고 하는 것은 모양만 보는 게 망심이다. 지혜라고 하는 것은 근본을 보는 것이 지혜다. 망상은 식심이라고 하고, 그 지혜를 반야라고 하는데, 이 망상은 생사업이고 반야는 보리업이에요. 깨닫는 업이라. 그래서 이 반야라고 하는 것은 식심을 먼저 그쳐야 돼요. 식심은 뭐냐. 좋다 나쁘다, 간다 온다, 너다 나다, 이거 생각하는 게 의식의 마음이다 이래가지고, 식심이라고 하거든요. 근데 내가 좋아하는 거를 가만히 보면 좋은 게 아니에요. 내가 싫어하는 걸 보면 싫은 게 아니에요. 그냥 생각으로 싫어하고 생각으로 좋아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 식심으로 법계에 들어갈 수가 없고, 이제 그 보이고 들리는 거를 가만히 관찰을 하면, 보이고 들리는 속에 하나 속에 모든 것이 다 들어 있고, 모든 것이 하나 속에 다 들어 있고, 이것이 보여요. 그걸 삼매라고 그래요. 삼매. 그 삼매로만 들어갈 수 있는데 삼매는 반야다. 그래서 이 삼매 반야로 들어갈 수 있는 것을 중생들은 망상으로 들어가려고 하기때문에, 이런 말이죠. 이렇게 이제 가르치는데 그것은 하나 티끌 티끌 가운데 법계를 보는 거로 약일미진(約一微塵)하여, 하나의 티끌을 잡아서, 구기내외(求其内外)하되 병불가득(並不可得)이라. 이 하나의 티끌에 안이 어디고 밖이 어디고, 언제 시작했고 언제 사라지고, 이걸 찾아봐도 찾을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 몸이라는 것도 몸 밖이 뭐고, 몸 안이 뭐고, 몸이 언제 생기고, 또 몸이 언제 사라지고. 그 내가 이거 사람들이 죽는다는 말을 쓰는데 죽는다는 게 뭔가. 죽는 건 없더라고 보니까. 없는 게 뭐냐 하니까 임종을 가만히 지켜보고 있으면요, 죽었다 살았다 그 경계선이 없어요. 영화에 보면 뭐 몸이 턱 떨어지는 거 나오는데, 그거 전부 가짜거든요. 그거. 죽은 사람이 몸이 어떻게 그렇게 움직여. 움직이는 걸 딱 연기를 하거든요. 근데 그건 아니고 마지막으로 언제 돌아가시는가 가만히 보는데, 마지막 숨 떨어지는 거를 거의 모르겠더라고. 근데 그 오래된 경험 있는 분이 이제 돌아가셨다 선언을 하니까, 그때 돌아가신 걸로 인정을 하는 거지, 죽음이라는 건 없다. 표시는 숨쉬다 숨 안 쉬는 것뿐인데, 어느 시각에 숨을 안 쉬었는지 알 수가 없다. 나중에 임종 맞이할 때 한번 보세요. 마지막 숨 떨어지는 요 시각이 언젠가 몰라요, 그게. 그런데 숨은 졌어도 몸은 따뜻한데 뭐. 한참 동안 따뜻해요. 또 따뜻하지 않아도 몸은 있잖아요. 이것이 불에 들어가든지 어디든지 이게 또 남아 있어. 이게 다 없어지면 그냥 어디로 들어간 거지. 사실 죽는 건 없는 거예요. 죽는 게 없으면 태어난 것도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죽고 산다는 건 순전히 생각 망상이 만들어내서, 생각 망상이 좋아하고 싫어하는 것뿐이지, 없어요. 한 티끌 속에 우주가 다 들어가고, 우주가 한 티끌 속에 들어가고 그거예요. 이걸 법계인과라고 그래요. 하 참. 그래서 극미묘자(極微妙者)는 중도라(中道也). 중도라는 건 뭐냐. 불생불멸을 중도라고 그러는데, 여기서는 그게 아니고, 뭐라고 가르쳤느냐 하면, 비위이이변(非謂離二邊)이라. 이 두 끝을 벗어났기 때문에 중도라고 말하는 게 아니다. 그럼 뭐냐. 모든 이 경계가. 경계가 여기서 끝나고. 저기서 끝나고. 이렇게 시작과 끝이 있는데. 그게 전부 중도라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은 시작이 그게 시작이 아니오. 서로 떨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끝이 그게 끝이 아니오. 서로 떨어진 게 아니기 때문에. 그래서 하나 하나 하나 생긴 게 여기에 국한된 것도 아니고, 저기에 국한된 것도 아니고, 전부 다가 중심을 이루고 있다. 그래서 하나하나 개별 개별이 다 중심을 이루는 길이라는 뜻에서 중도라고 그래요. 변방이 없다는 뜻에서 무변방을 중도라고 그러지, 뭐 두 끝을 버렸다고 중도라고 가르치는 게 아니다 이거지. 화엄경에서는. 그래서 궁좌실제중도상(窮坐實際中道床)하는 거 그거 얘기인데요. 실제중도상이라는 거는 하나하나 모양 모양이 전부 변방이 아니다. 이거요, 주변이 아니고 중심이다. 그래서 변방은 없고 중심으로 가득한 그 세계, 중심을 이루는 모든 세계를 중도라고 한다. 이 기도하러 와 가지고 이런 법문만 들어보니 참 기가 막히네. 기가 막혀요. 이걸로(컵뚜껑) 보면요. 변방은 요 오른쪽 변방, 왼쪽 변방이 변방이고, 이 중간이 중도잖아요. 화엄경 중도는 그게 아니다. 이것도 중심이고 이것도 중심이고 저것도 중심이니까 모든 게 다 중도다 이거지. 그걸 화엄경에서는 실제 중도라고 그래요. 이변을 여읜 중도가 아니다. 그래서 그걸 가르켜서 진성은 심심하다. 심히 깊다. 이걸 이제 전체가 중도다. 그래서 심히 깊다라고 했는데. 華藏世界所有塵 一一塵中見法界화장세계소유진 일일진중견법계寶光現佛如雲集 此是如來刹自在(華嚴經卷8. 華藏世界品)보광현불여운집 차시어래찰자재(화엄경권8. 화장세계품) 그 화장세계품에서 무슨 말을 했냐면, 화장세계에 있는 모든 티끌이 하나하나 티끌 속에서 견법계라. 이 티끌 하나하나에서 우주 법계를 본다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게 화엄경 화엄 삼매를 닦으면 여기저기 여행 다닐 필요가 없어요. 요만한 티끌에서 우주를 다 보는데 가긴 어딜 가 그렇잖아요. 일일진중에서 견법계라(一一塵中見法界). 기가 막혀요. 하나하나 티끌에서 온 우주 법계를 다 본다. 돌아다닐 필요 없이, 가만히 이렇게 멈춰서 보면, 이게 시작이 없고, 끝이 없고, 보이는 게 없고, 보이지 않는 게 없고, 이걸 실제 중도라고 하거든요. 진실 경지 그 중도. 보광이 현불이 여운집(寶光現佛如雲集)하니 이 보배 광명 속에서 부처님 몸이 막 나타나. 그래가지고 구름같이 모여드니 차시여래찰자재(此是如來刹自在)라. 이것이 여래는 국토의 구애를 받질 않아요. 국토에. 이 지구에서 하늘에 올라가는 것도 구애가 없고, 이쪽에서 저쪽에 가는 것도 구애가 없고, 사람은 자기 집 담 안에서만 살아야 되는데, 새들은 휘휘 날아다니면 뭐 어느 집이든지 아무 필요가 없잖아요. 근데 새들처럼 구애 안 받는 게 아니라, 그냥 이 세계를 떠나지 않고 저 세계에 가는 도리가 이게 찰자재예요. 그러니까 오른쪽 기둥을 떠나지 않고, 왼쪽 기둥과 만나는 거예요. 이거 참. 좌이부동(坐而不動)하고, 자기 위치에서 떠나지 않고 상즉상입(相卽相入)이라 서로 만나고 서로 들어간다. 이쪽에서 떠나지 않고 저쪽으로 들어가고, 저쪽에서 떠나지 않고 이쪽으로 들어가고, 이걸 상즉상입이라 그래요. 서로 상자, 들어갈 입자, 서로 상자, 만날 즉자. 떠나서 만나는 게 아니라 떠나지 않고 만나요. 떠나서 들어가는 게 아니라 떠나지 않고 들어가요. 이걸 법성원융이라고 하고요. 진진혼입이라고 해요. 법성원융, 진진혼입. 眞記云 問 眞性 與上法性 何別 答 有云別也 謂法性則 通眞妄 진기운 문 진성 여상법성 하별 답 유운별야 위법성즉 통진망取圓融 又通情非情也 此則唯是眞 而又唯是有情門 以下釋眞性취원융 우통정비정야 차즉유시진 이우유시유정문 이하택진성段 約衆生十二支故也 然而今約實云 眞性即是法性也 所謂眞性단 약중생십이지고야 연이금약실운 진성즉시법성야 소위진성之體甚深微妙者 但以不存自性 攬諸緣成故也(韓佛全6-777中)지체심심미묘자 단이부존자성 남제연성고야(한불전6-777중) 그게 진기라는 분이 또 말을 하기를, 법성과 진성은 어떠냐 그러니까, 어떤 사람들은 말을 하기를, 법성은 진망(眞妄)에 다 통하고, 진실과 거짓에 통하는 게 법성이고, 또 유정과 무정, 정과 비정, 생명이 있는 생명체하고 생명이 없는 거 하고 다 통하는 게 법성이고, 진성이라고 하는 것은 그것은 중생만을 지적해서 진성이라고 한다라고도 얘기를 하는데, 연이나 약실이 운(然而今約實云)임은, 진실에 근거해서 말을 한다면, 진성즉시법성(眞性即是法性也)이라, 진성은 바로 법성이다. 다를 게 없다. 이렇게 진기라고 하는 분이 기록으로 해석을 하고 있어요. 이름은 달라도 진성과 법성이 다를 바가 없다. 소위 진성지체(所謂眞性之體)가, 진성의 그 본체가, 심심미묘자(甚深微妙者)는 단이부존자성(但以不存自性)하고, 어떤 것도 자기 자체의 성질을 딱 보존해서 지키지 않고. 이 나무가 있는데 책상이 된다. 그러면 나무가 나무의 자체 모양, 자체의 성질을 지키지 않고 책상도 돼요. 이걸 진성이라고 한다 이거죠. 물이 얼음도 돼요. 이것이 진성이다. 또 물이 구름도 된다. 뭔 소리인지. 진짜 삼매에 들어가서 이걸 딱 보면, 이 삼매에 들어갈 수 있고, 이 삼매에 들어가 보면 우리 몸이 죽고, 살고, 오고, 가고 하는 게 전부 법의 인과가 펼쳐지는 거다. 법계 인과가 펼쳐지는 거다. 그래서 이걸 법계 연기라고 그러고요. 이게 법계 인과다. 근데 이걸 법이라고 보지 않고 내 몸이라고 딱 보니까, 멀쩡한 자기 집에서 몸이라는 꿈을 꿔 가지고, 생로병사 우비고뇌의 고통을 계속 받고 있다. 이걸 가르치는 게 화엄경이에요. 이걸 내 몸이라고 알고 있는 한 생로병사 근심 걱정을 떠날 수가 없어요. 근데 이거는 우주의 법이다. 우주 법계다. 우주 법계의 근본지다. 이렇게 알고 나면, 이게 태어날 적에도 저 티끌 티끌이 모여서 태어났고, 죽을 때도 이 몸이 티끌 티끌이 저 우주 밖으로 돌아가서 서로 상입상즉하는 거예요. 서로 들어가고 서로 만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죽는다라고 하지 말고, 이 몸이 우주 법계와 만난다. 물도 돌아가서 다른 거와 만나고, 공기도 돌아가서 만나고, 이게 이제 화엄경에서는 법성원융 상입상즉, 서로 들어가고 서로 만난다. 근데 이걸 몸에 딱 집착해서 근심 걱정하고 있기 때문에, 말로 아무리 해봐야 한참 들을 때는 ‘그럴 수도 있겠다’ 생각이 들지만, 듣고 나면 어디 갔어, 들은 기억도 없어, 어디 갔냐고요. 이게. 그래서 증지소지라는 거예요. 증득한 지혜로 알 바다. 팔식 망심으로는 불가지라. 팔식 망심으로는 모른다는 거죠. 이래가지고 이 진성이라는 거는 부존자성(不存自性)하고, 자체 성격을 탁 보존하지 않고, 남제연성고로(攬諸緣成故也), 여러 가지 인연을 잡아서 이루어진다. 이게 책상은 나무로, 나무가 이루어지려면 여기 이제 목수도 있어야 되고, 설계하는 사람도 있어야 되고, 이러잖아요. 또 집도 되고, 뭣도 되고, 여러 가지 그 인연으로 이루어진 것이고, 자체 성격을 지키지 아니하기 때문에, 진성은 심심하고 진성은 극미묘라. 지극히 미묘하다고 한다. 이렇게 이제 저술을 하는 거죠. 大記云 ··· 又何者吾身 虚空是也 何者虚空 吾身是也 以無側故대기운 우하자오신 허공시야 하자허공 오신시야 이무측고又六道即是虛空 虛空即是六道也。頌曰。우육도즉시허공 허공즉시육도야。소왈。虛空法界爲身心 行住坐臥念相續허공법계위신심 행주좌와염상속所見諸物亦身心 念念相續無絶已 (叢髓錄.韓佛全6-779中)소견제물역신심 염념상속무절이 (총수록,한불전6-779중) 그리고 대기(大記)라고 하는 분이 뭐라고 했냐 하면, 하자가 오신고(何者吾身), 어떤 것이 내 몸이냐 이렇게 해. 내 몸이라는 게 이게 뭐냐. 허공이 시야(虚空是也)라. 허공이 내 몸이다. 이렇게 했던 거예요. 내 몸은 허공이다. 허공은 죽고 사는 게 없는데, 또 변방이 없는데 저거는, 서로 중앙에 모이려고 애쓸 필요가 없지. 허공이 내 몸이면. 오래 살려고 애쓸 필요도 없잖아. 허공이 내 몸이면. 이게 법계 인과라고 하는 거지. 그러면 하자가 허공고(何者虚空). 무엇이 허공이냐. 이러니까 오신이 시야라(吾身是也), 내 몸이 허공이다. 내 몸이 허공이다. 근데 가만히 생각해 보면요. 이 속이 텅 비었더라고, 사람 몸도. 허공이에요. 허공. 또 물질 하나하나도 그게 다 허공이에요. 그러니까 저 보이는 허공만 허공이 아니라, 내 몸도 허공인 거예요. 그래서 허공삼매에 딱 들어도 근심 걱정 없어져요. 삼매라는 것은 바로 보는 게 삼매인데, 이 몸을 허공이라고 딱 바라보고 있으면, 몸이 없는데 어떻게 걱정이 있어요? 모든 걱정은 몸에서 나오는 거거든요. 기가 막힌 거예요. 이무측고라(以無側故). 주변이 없기 때문이다. 허공에는 주변이 없잖아요. 이 몸도 주변이 없어, 그냥 중심이야. 또 육도가 즉시 허공이니(又六道即是虛空), 지옥 · 아귀 · 축생 · 인도 · 천도 · 아수라가 허공이니, 허공이 즉시 육도라. 그래서 게송을 하기를 허공법계로 위신심(虛空法界爲身心)하고, 허공 우주 법계로 자기 몸과 자기 마음을 삼고. 쳐다보긴 열심히 쳐다보고. 열심히 쳐다봐요. 내 마음 내 몸이라는 건 우주 법계다. 허공 법계다. 그리고 또 행주좌와의 염상속(行住坐臥念相續)이라. 행주좌와, 가고 오고 움직이는데, 생각 생각이 계속 상속하는 게 이게 전부 허공법계다. 생각하는 것도 허공이고 앉는 것도 허공이고 오고 가는 것도 허공이고. 그러니까 이게 의상 스님 제자들은 이래서 다 성인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성인의 지위에 오른 사람들이다. 의상스님이 훌륭한 거는 제자가 이 경지까지 올라가도록 지도를 했고, 본인은 저술도 안 했어요. 교육에만 종사했어. 그러면 요즘 학생들하고 토론해보면 어떻게 저술을 안 하고 살 수가 있어요, 이런 말해요. 근데 의상 스님은 이것밖에 안 했어요. 법성게밖에, 해인도(海印圖) 밖에. 그리고 제자들이 그 경지에 올라갈 수 있도록 이 교육을 했기 때문에 이런 제자들이 나온 거예요. 허공이 돌아다니고, 허공이 앉고, 눕고, 허공이 생각 생각이 계속 이어진다. 그다음에 소견제물도 역신심(所見諸物亦身心)이니, 내가 지금 볼 수 있는 모든 물건도 바로 내 몸이다. 내가 저 물건 속에 들어가고, 저 물건이 내 몸 속에 들어가고, 요것만 내 몸이 아니라 이것도 내 몸이고, 저 물건도 내 몸이고, 이것도 내 몸이고, 소견제물도 역신심이라, 또한 몸과 마음이다. 그러니까 누가 이게 내 몸이다 그러면, 이게 이해가 안 되거든요. 그러니까 이것도 나를 모르고, 나도 이것도 모르고 불상지지. 그런데 이 허공 삼매에 딱 들어보면 이것이 이 자리를 떠나지 않고 내 몸속에 들어오고, 내가 내 자리를 떠나지 않고 이것 속에 들어가고 이러는 거예요. 이것이 이제 화엄삼매인 거예요. 이것이 상입상즉이여. 서로 들어가고 서로 만난다. 염념상속무절이(念念相續無絶已)라. 이 허공이 내 몸이 돼서 생각 생각이 서로 이어져서 끝남이 없다. 그래서 과거가 옛날이고, 현재가 지금이고, 미래가 앞으로가 아니라, 과거 · 현재 · 미래가 한순간이다. 가(주변)가 없어요. 중심뿐이에요. 또 티끌티끌이 주변이 없고 바로 중심뿐이다. 그래서 하나의 티끌이 법계를 이루고, 법계가 하나의 티끌을 이룬다. 이것을 화엄경에서는 법계 인과라 하고 가르친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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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9월 29일 국행수륙재 4재 법문
종범스님 2024-09-29
진관사국행천지명양수륙무차평등대재 普召請 普咸集 一切孤魂哀魂 列位列名靈駕 同生信心 同往西方淨土 보소청 보함집 일체고혼애혼 열위열명영가 동생신심 동왕서방정토極樂世界 無窮受福 法界受生 一切含靈 同悟無生 同登彼岸 念願念願극락세계 무궁수복하시고 법계수생의 일체함령이 동오무생 동등피안을 염원염원이옵니다나무아미타불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진관사 금년 수륙재에 늘 염불작법으로 보소청(普召請) 영가들이 있거든요. 빠짐없이 빠짐없이 두루두루 알려서 여기 오시라고 청했다. 그게 소청이에요. 그래서 보함집(普咸集)하셨다. 여러 영가들이 알고, 함께 널리널리 이곳에 오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런 영가분들께서 동생신심(同生信心)하시고, 함께 불성을 깨달으면 불성밖에 없다. 불성을 깨달으면 불성밖에 없다. 이런 신심을 내라는 거예요, 동생신심이라는 건. 그래서 동왕서방정토(同往西方淨土) 극락세계(極樂世界)하시고, 여기에 참가한 모든 혼령들은 서방정토 극락세계에 함께 가시고, 또 법계수생(法界受生), 온 법계에서 생을 받은 일체 생령, 살아있는 영혼, 일체함령(一切含靈), 일체 불성을 품고 있는 중생들은 동오무생(同悟無生)하여, 나고 죽는 게 나고 죽는 것이 아니고, 불성의 표현이다. 생사가 생사가 아니고 불성현현(佛性顯現)이다. 태어나는 것도 불성의 나타남이요, 죽는 것도 불성의 나타남이다. 그래서 생사는 없고 불성의 나타남이 있다. 그걸 깨닫는 게 무생법을 깨닫는다 이래요. 생사 없는 불성법. 그래가지고 동등피안(同登彼岸)이라, 함께 저 생사 없는 피안에 오르기를 염원하고 염원합니다. 이건 불성법문이기 때문에 누구를 위한 팔팔한 주제, 이런 건 다 여기에 포함돼 있어요. 이것밖에 팔팔한 주제는 다시 없어요. 내가 뭐 본래 팔팔하지도 않는데, 팔팔한 주제라고 그랬는데, 이 불성은 일체 중생에게 다 해당되기 때문에 어떤 특별한 누구에게만 국한될 수가 없어요. 그런 내용입니다. 一切群生 無明行識 憂悲苦惱 不絕相續 일체군생은 무명행식으로 우비고뇌가 부절상속하고 一切諸佛 圓成正覺 萬德莊嚴 窮劫無盡 일체제불은 원성정각하야 만덕장엄이 궁겁무진이로다群生諸佛 本乎一心 物物諸法 唯心所現 군생제불이 본호일심하니 물물제법이 유심소현이요十方三世 四生六道 生死出沒 悉是一念시방삼세와 사생육도의 생사출몰이 실시일념이로다 나무아미타불 일체군생(一切群生)은, 일체중생은 무명행식(無明行識)이 있다. 무명이라는 게 뭐냐. 모든 물건(컵 뚜껑을 들어보이시며)이 한마음인데, 일심인데, 일심을 보지 못하고 마음 밖에 있는 물건으로 본다. 이게 무명이에요. 자기 마음을 자기 마음으로 보지 못하고, 자기 마음 밖에 있는 물건으로 본다. 이게 무명이에요. 이게 뭐냐 그러면, 그릇이다 그러면, 여기엔 자기 마음이 없는 거거든요. 그릇뿐이고. 그걸 무명이라고 그래요. 근데 여기에 마음이 있어. 근데 이 마음은 미묘하다. 특징이 미묘해. 미묘하다는 건 있는데, 생각의 눈에 안 보이는 거예요. 있는데 육안에 안 보여. 육안은 생각의 눈인데, 그럼 있는 게 안 보이는 게 뭐냐. 화가가 그림을 그렸는데, 그 그림의 모양과 그림의 재료 물감은 보이는데, 그 화가의 생각은 안 보여요. 근데 그 그림의 배치와 형태가 전부 그림 그리는 사람의 생각에서 나왔거든요. 물감을 쓰는 것도 그렇고, 배치하는 것도 그렇고, 구성하는 것도 그렇고. 근데 그림 형태만 보이지, 그린 사람의 생각은 안 보여요. 근데 알고 보면 그 물감 구성 하나하나가 전부 화가의 생각이에요. 이 집을 지은 것도 여기 집 자체만 보이지만, 이 집 지은 사람의 생각은 안 보여. 근데 이게 하나하나가 전부 집 지은 사람의 생각이 이게 이루어진 거거든요. 그걸 미묘하다고 그래요. 미묘하다. 묘하다. 그래가지고 이 한 생각이 미해서, 미한다는 말은 잘못 봐서, 마음을 물질로 봤다 이거지. 그래서 우비고뇌가 부절상속(憂悲苦惱 不絕相續)하고, 근심 걱정이 끊어지지 않고 계속 이어진다. 물질이 떠나면 내가 괴롭고, 물질이 오면 또 오는 대로 또 괴롭고. 근데 일체제불은 원성정각(一切諸佛 圓成正覺)하야, 일체제불은 마음밖에 한 물건도 없다. 전부가 마음이다. 이걸 그냥 남김없이 온전하게 깨달았어요. 그걸 정각을 원만히 이루었다. 죽는 것도 마음이고, 사는 것도 마음이고, 미워하는 거 좋아하는 거가 일체가 마음인데, 그걸 온전하게 깨달은 걸 원성이라고 그래요. 원만히 이루었다고. 원성정각하야, 만덕장엄이 궁겁무진(萬德莊嚴 窮劫無盡)이라, 온갖 좋은 것들이 이 세월이 다 하도록 끝이 없다. 그런데 이 군생이나 제불이나 어디서 나왔냐. 군생제불(群生諸佛)이 본호일심(本乎一心)하니, 여러 일체중생과 삼세제불이 본래 한 마음에서 근원하여 나왔으니, 물물제법(物物諸法)이 물건, 물건 모든 것들이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 오직 마음이 나타난 바다. 시방삼세와 사생육도(十方三世 四生六道)의 생사출몰(生死出沒)이 시방 삼세도 마음이 나타난 바고, 사생육도, 생사 오르고 내리는 게 실시일념(悉是一念)이다. 다 한 생각이다. 그래서 이걸 일심이라고도 하고, 불성이라고도 하고, 일념이라고도 하고, 이건 다 일체중생이 다 가지고 있는 근본 마음을 말하는 거예요. 불성, 일심, 한 생각이. 一心妙體 圓明靈明 無名無相 獨露常露 일심묘체는 원명영명하여 무명무상하되 독로상로로다靈明無古 冥通三際 圓明無住 洞徹十方 영명은 무고하니 명통삼제하고 원명은 무주하니 통철시방이로다不隨生生 不隨滅滅 大包沙界 小入微塵 불수생생이요 불수멸멸하니 대포사계하고 소입미진이로다.圓滿具足 無障無礙 開眼合眼 本無他物 원만구족하고 무장무애하야 개안합안에 본무타물이로다나무아미타불 에 좋다 좋아. 좋아요. 좋아요. 뭐가 좋냐. 일심묘체(一心妙體)는 원명하고 영명(圓明靈明)하다. 둥글고 밝고 신령스럽게 밝다. 원명이라는 거는 둥글 원자인데, 끝없이 밝아요. 또 신령스럽게 밝아. 끝없다는 말은 전체에 다 포함되고, 신령스럽다는 건 하나하나를 또 분명히 안다 이거죠. 전체도 알고 하나하나도 알고. 그래서 무명무상(無名無相)하되, 이름도 없고 형상도 없으되, 독로상로(獨露常露)라, 홀로 드러나고 항상 드러난다. 영명은 무고(靈明無古)하니, 신령스럽게 밝은 것은 세월이 없어. 아무리 오래 가도 옛날 되는 게 없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무고라 그래요. 옛날 되는 게 없어. 그래서 명통삼제(冥通三際)하고, 그윽이 과거·현재·미래에 다 통하고, 원명은 무주(圓明無住)하니, 둥글고 밝은 것은 머무는 데가 없으니, 통철시방(洞徹十方)이라, 시방에 밝게 다 통한다. 이것은 불수생생(不隨生生)이요. 이 몸이 태어날 때 태어남을 따라서 처음으로 생긴 게 아니고, 이 마음이라고 하는 것은 몸이 태어난 생일날 태어난 게 아니고, 이 소리예요. 이 몸은 생일날이 있는데, 마음은 생일날 없어요. 또 몸은 제삿날 있는데 마음은 제삿날 없어. 그래서 허공에 물질은 생기기도 하고 없어지기도 하지만, 허공은 생기는 거 없고 없어지는 거 없어요. 불수생생이라. 생을 따라서 생기는 게 아니다. 불수멸멸(不隨滅滅)이라, 없어짐을 따라서 없어지는 게 아니다. 이게 하도 미묘해가지고 대포사계(大包沙界)하고, 크기로 말하면 항하사 모래알 숫자와 같은 3천대천세계를 다 포함하고도 남아요. 소입미진(小入微塵)이라. 작기로 말하면 가느다란 눈에 보이지도 않는 티끌에 들어가도 오히려 티끌이 남는다. 참 이게 이게 이게 뭐여 이게. 깨닫는다는 건 이런 걸 깨닫는다는 거야. 이런 거 아는 거를. 깨달음이 뭐냐. 이 마음이라는 거는 우주를 감싸고도 남고, 마음이라는 거는 티끌에 들어가도 오히려 티끌이 더 넓이가 비어 있는 그런 거를 눈에 보고, 손으로 만지고, 몸으로 깔고 앉는다. 그걸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거예요. 그러니까 거기에는 남녀노소 어린이, 청소년, 노년층 없어요. 다 한마음에 넉넉함이 있을 뿐이에요. 그래서 여기는 원만구족(圓滿具足)하고, 다 채워져서 모자라는 것이 하나도 없고, 무장무애(無障無礙)라, 장애가 하나도 없다. 개안합안(開眼合眼)에, 눈을 뜰 때나 눈을 감을 때나 본무타물(本無他物)이라. 본래 마음 밖에 다른 물건은 하나도 없다. (저쪽에도 가득 찬 거 보니까 많이 오셨네요. 저 밖에도 계시던데. 저쪽 앞쪽에도 계시고, 여기 안에 들어오신 분들은 어떻게 이렇게 경쟁을 해서 이긴 거예요? 어떻게 해서 안에까지 들어오신 거예요? 와. 그래요.) 그러니까 이런 법문을 듣고 이런 법문을 믿기만 해도 근심 걱정 없어요. 근심 걱정 없어. 終日圓覺 而未嘗圓覺者 凡夫也 欲證圓覺 而未極圓覺者 菩薩也 종일원각 이미상원각자는 범부야요 욕증원각 이미극원각자는 보살야요具足圓覺 而住持圓覺者 如來也 離圓覺 無六道 捨圓覺 無三乘 구족원각하야 이주지원각자는 여래이니 이원각하면 무육도하고 사원각하면 무삼승하고非圓覺 無如來 泯圓覺 無眞法 其實 皆一道也 (圓覺經 表休序文) 비원각이면 무여래하니 민원각하면 무진법이니라 기실은 개일도야니라 (원각경 표휴서문)나무아미타불 이 일심을 그냥 가지고 있으면 일심인데, 이걸 깨달았을 때는 정각이라고 하고, 보리, 깨달았을 땐 보리라 그래요. 보리는 깨닫기 전엔 보리라고 안 해요. 그냥 일심이라 그래요. 그냥 불성이라고 하고, 그냥 한 생각이라고 그래요. 근데 이걸 깨달으면 보리라고 그런다. 보리를 삼보리라고 이제 적는데, 그걸 우리 말로 하면 정각이라고 적어요, 삼보리를. 삼보리, 정각. 근데 그걸 원만히 둥근 내용을 깨달았다, 그래서 원각이라 그러고. 이거 그것밖에는 없다, 그래서 대각이라 그래요. 정각, 원각, 대각. 거기 대각밖에 없는데, 중생은 그 대각 속에서 물건을 마음 밖에 있는 걸로 알고 평생 물건 구하다가 죽는 거예요. 구하다 죽어요. 새는 날다 죽고, 사람은 구하다 죽는다. 80 먹어도 떨린다 그래요. 80 먹어서 뭐 연애를 할 것도 아닌데, 왜 떨리나. 구하는 것이 습관이 돼가지고 아무리 나이가 먹어도 구해요. 구하다 보니까 떨리는 거예요. 안 구하면 안 떨려. 구하면 떨리고, 안 구하면 안 떨린다. 이 구하는 게 아주 버릇이 됐어요. 그래서 아이도 떨고, 어른도 떨고, 노인도 떨고, 다 떤다. 그게 요즘 말로 하면은 노이로제 스트레스예요. 구하면서 떠는 게 그게 노이로제고, 스트레스거든. 저 사람 구하면서 떤다. 근데 그게 왜 그렇게 되냐. 원각을 몰라서 그렇다. 그래서 범부들은 종일 토록 원각 속에 있는데, 미상원각(未嘗圓覺)이라 한순간도 원각을 느끼질 못했어요. 한순간도, 잠깐도 원각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범부고. 욕증원각 미극 원각자(欲證圓覺 而未極圓覺者)는 원각을 얻으려고 노력은 하는데, 원각을 다 얻지 못한 건 보살이고, 구족원각(具足圓覺)하야, 원각을 다 갖추어서 주지원각자(住持圓覺者)는 원각에 그대로 머물러 있는 것은 여래다. 그러니까 원각을 떠나면 사생육도도 없고, 원각을 떠나면 성문, 연각, 보살, 삼승도 없고, 원각이 아니면 여래도 없고, 원각이 없으면 참법도 없으니 기실은 다 하나다. 원각이란 말이죠. 원각은 일심이여. 모두가 일체중생도 한마음이고, 삼세 제불도 한마음이고, 일체보살도 다 한마음이다. 이걸 말하는 거예요. 이거는 원각경 서문에 있는 말인데 아주 유명한 서문이에요. 그래서 강당에서 글을 가르치는데, 4종 서문만 외우면 강당에서 가르치는 전부 다 안 배워도 도에 들어간다. 4종 서문이라는 게 금강경오가해 일물서(一物序), 일물,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일물로 시작하거든요. 그다음에 혈기서(血氣序). 지금 말한 이게 이제 원각경 서문, <부혈기지속(夫血氣之屬)>이, 몸에 혈기가 도는 모든 생명들이, 이렇게 시작한다고 그래서 혈기서라 그래요. 이 혈기서하고, 또 원각경 본문을 저술한 <원형이정(元亨利貞)은~> 이렇게 출발한다고 그래서 원형서(元亨序)이래. 또 화엄경에 <왕복이 무제나(往復無際)> 이렇게 시작한다고 그래서 왕복서(往復序), 이게 4종 서문이거든요. 일물서, 혈기서, 원형서, 왕복서 그러는데, 일물서하고 혈기서하고 원형서는 뒤에 다 읽을 필요가 없어요. 그거는 경전 해석하는 경의 설명이 쭉 있으니까 그 앞부분만 딱 읽으면 그냥 그대로 일심묘체를 보이는 내용이거든요. 근데 왕복서는 처음부터 끝까지 다 읽어야 돼요. 그거는 끝까지 다 중요한 내용을 말씀했기 때문에. 그럼 뭐 강원에 입방을 해서 전체 다 안 배워도 4종서만 딱 외워서, 마음 딱 챙기면 바로 성불하지요. 그럼 불교를 믿으면 첫째 좋은 게 수복이 구족해요. 수복. 수명과 복덕이 구족하다. 그리고 사후에 극락왕생해요. 그것이 이게 이 세상에서 이제 누릴 수 있는 좋은 복덕이고, 그리고 불교를 믿는 최종 목적, 근본 이유는 딱 네 가지예요. 첫째는 보리, 깨달음, 보리. 둘째는 왕생, 셋째는 해탈, 넷째는 열반. 그럼 보리는 뭐냐. 이 무명의 잠을 자다가, 무명 혼침(惛沈)의 잠을 계속 자다가, 이 불성의 눈을 딱 뜨는 거예요. 그래서 보리는 개안(開眼)이라. 눈을 뜨는 걸 열 개자하고, 눈 안자 하고 개안이라 그래요. 개안광명진언 뭐 이런 것도 있어요. 눈을 탁 뜬다. 이제 이런 얘기하다 보니까 눈 뜨는 건 고사하고, 지금 눈 감기려고 하는 사람이 많아. 나는 눈 뜨는 얘기를 했는데, 이제 눈 감기는 사람이 더러 있네. 아 이거 참. 이런 얘기하면 본래 눈 감겨요. 개안 보리, 눈을 딱 뜨는 순간에 다른 건 아무것도 없고 오직 마음만 있는 거, 그걸 보리라 그래요. 이제 극락 왕생하는 거, 극락세계 간다고 왕생이라고 그러는데, 왕생은 어떻게 하냐. 왕생은 가피 왕생이요. 가피. 부처님의 가피를 입어서 극락 가는 거예요. 그래 왕생은 가피요, 보리는 개안이요. 그다음에 해탈은 뭐냐. 해탈은 이장(離障)이라고, 여읠 리, 장애 장자.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는 거, 그걸 해탈이라고 그래요. 온갖 마음의 장애, 온갖 몸의 장애, 온갖 세상의 장애를 다 벗어나. 그래서 여일 리자를 써가지고 버린다. 장애를 다 버린다. 장애를 여읜다. 그래서 그걸 해탈이라고 그러거든요. 이장해탈. 그다음에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본구(本具)열반, 본래 갖추어진 것이 열반이다. 이제 해탈을 딱 하고 보니까 열반이 본래가 갖추어졌어. 거기가 본래 불생불멸이고, 본래 상락아정이고, 본래 원만구족하다. 그래서 열반은 새롭게 얻는 게 아니고, 본래 갖추어진 걸 열반이라 그래요. 오늘 법문 참 여러 가지 많이 말을 하네. 많은 걸 말을 해요. 눈 딱 뜨면 깨닫는 거고, 부처님 가피 잘 입으면 극락 가는 거고, 모든 장애를 다 여의면 해탈하는 거고, 해탈해보면 거기에는 없는 거 없이 다 갖추어져 있는데 그게 열반에 드는 거다, 이거죠. 그러니까 이제 재를 이렇게 떡 지내니까, 다 극락 가라고 지금 하는 거거든요. 修齋之功則不無 往生之路是什麼수재지공은 즉불무나 왕생지로는 시십마오自法性身明了了 自金剛身常不昧 자법성신에 명료료하고 자금강신에 상불매하면見色聞聲超然行 不離當處到蓮臺견색문성의 초연행으로 불이당처도연대로다. 나무아미타불 이렇게 수륙재를 주욱 지내는 거는 재를 지금 올리고 있는 거거든요. 이 재를 올리고 있는 공은 있어. 그런데 왕생하는 길은 어떤 것이냐. 왕생은 어떠한 길로 가느냐. 첫째 왕생이 있는데, 첫째 왕생은 띄을 초, 그러할 연, 초연(超然)왕생이에요. 초연 왕생. 그럼 초연 왕생이라는 게 뭐냐 하면, 자기 자성, 자법성신(自法性身), 자기 법성신, 자기 본래 죽음이 없는 본성 몸, 자법성신에 항상 밝아 있고, 명료료(明了了)하고, 또 자금강신(自金剛身), 이 몸이 아무리 불 속에 들어가도 타지 않는 그 금강신이 있는데, 그 금강신에 상불매(常不昧) 하면 견색문성(見色聞聲)에 눈으로 뭘 본다든지 귀로 듣는다든지 전혀 아무것도 없어요. 그걸 초연행(超然行)이라고 그래요. 보아도 마음이요, 들어도 마음이요, 앉아도 마음이요, 서도 마음이요. 이상하고 뭐 별다를 것이 전혀 없다. 그걸 초연이라고 그래. 초연. 견색문성의 초연행으로 불이의당처(不離當處)하고, 본래 자기가 지금 머물러 있는 곳, 지금 여기 앉아 있으면 앉아 있는 곳에서, 서 있으면 서 있는 곳에서, 도연대(到蓮臺)라. 구품연대에 바로 도달한다. 뭔 소린지 참 내. 참 좋기는 좋은데 좋아요. 좋아요. 너무너무 좋아요. 그냥 선 자리에서 극락세계에 도달하고, 앉은 자리에서 도달하고, 누우면 누울 때 도달하고, 서면 설 때 도달하고, 이걸 초연왕생이라고 그래요. 其或未然 承佛神力 十念念佛 往生極樂기혹미연 승불신력 십념념불 왕생극락 기혹미연(其或未然)이면, 그 후 그렇지 못하면 승불실력(承佛神力)하여, 부처님의 신통력을 이어받아서, 십념념불(十念念佛)로, 십념, 아미타불 10번 부르는 염불로 왕생극락(往生極樂)이라, 극락세계 왕생한다. 이걸 십념왕생이라 그래요. 십념. 아미타불 10번 부르면 극락 가요. 이 소리 하면 어떤 분은 ‘그럴까?’ 하고 눈 크게 뜨고 쳐다보고, 어떤 분은 ‘뭘 가’ 이렇게 못 믿게 쳐다보는데, 벌써 극락에 와 있는데 모르기 때문에, 극락에 와 있는데 모르기 때문에, 이게 불가사의법이거든요. 이제 십념염불로 오늘 모든 참석한 일체영가 대중들에게 극락세계 가시라고 하는 걸로 마칩니다. 이제 십념염불을 어떻게 하냐. 이제 전염불, 후염불, 십념염불, 이제 십념염불 하기 전에 앞에 하는 염불이 있어요. 또 그다음에, 십념염불 그다음에 뒤에 또 하는 염불이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제가 하라는 대로 하면, 이제 그대로 제 손 쳐다보고 극락 가는 거예요. 十念往生願 십념왕생원 나무아미타불往生極樂願 왕생극락원 나무아미타불上品上生願 상품상생원 나무아미타불廣度衆生願 광도중생원 나무아미타불제일염불 나무아미타불제이염불 나무아미타불제삼염불 나무아미타불제사염불 나무아미타불제오염불 나무아미타불제육염불 나무아미타불제칠염불 나무아미타불제팔염불 나무아미타불제구염불 나무아미타불제십염불 나무아미타불願共法界諸衆生 원공법계제중생 나무아미타불同入彌陀大願海동입미타대원해 나무아미타불盡未來際度衆生 진미래제도중생 나무아미타불自他一時成佛道자타일시성불도 나무아미타불 오늘 법문 마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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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9월 22일 국행수륙재 3재 법문
자현스님 2024-09-22
자 안녕하세요. 개인적으로 사실은 조금 여러 가지 말씀을 드리고 싶었는데, 어른 스님들이 앞에 계셔서. 이거 보고 되게 재밌었거든요. 사실 이거, 이거 다 보셨죠? 수륙재 할 때 이렇게 보면 어린이를 위한 그다음에 청소년을 위한 그다음에 청년을 위한 뭐 이렇게. 지난주에 우리 해주 스님 오셨었는데 그때도 오셨었나요? 개인적으로는 제 석사 때 지도교수님입니다. 그리고 정년하신 지도 되게 오래됐고. 아니 여기에 저랑 인연 있는 분들이 제법 많이 지금 계세요. 그래서, 그런데 제가 알기로 정년 한 지 꽤 됐거든요. 그래서 아기, 어린이랑 관계가 있겠나, 내가 곧 아기 어린이로 태어날 분입니다. 지금 끝까지 가신 분인데, 이게 대화가 되겠나 이런 생각을 했거든요. 그리고 그다음에 다음 주에 보니까 이거 사회초년생. ‘우리 또 종범 큰스님이 초년생 이게 되나’ 그러다가 생각한 게, ‘나는 되냐’ 이 생각을 했거든요. 그래서 청소년 뭐 이렇게 써 있어도 청소년 안 올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크게, 그렇게 큰 기대는 하지 않았고요. 그래서 마음만 청소년. 청소년도 조금 간헐적으로 섞여 있고, 마음만은 청소년들을 위해서. 이 수륙재라고 하는 게, 개인적으로 저도 수륙재를 조금은 압니다. 이유는 뭐냐 하면 저희 교구에 삼화사가 있기 때문에. 그래서 내용들을 그런 쪽도 제가 조금 이렇게 본 게 있었어요. 그래서 천지명양수륙재에서, 모든 기운이 다 화합하는, 사실 오늘날 같은 시대에는 가장 중요한 의미가 있는 거 아닌가 싶어요. 그러니까 단순히 돌아가신 분뿐만이 아니고, 예전에 이게 나누는 방식이 되게 재미있거든요. 그러니까 천지로 하나 나누는 거고, 천지로, 그다음에 물과 바다로, 그러니까 수륙이니까 뭍하고 바다로 나누는 거잖아요. 물하고. 그러니까 물은 다 연결돼 있다고 옛날 사람들을 봤습니다. 그러니까 짠물, 민물에 대한 개념이 없어요. 그래서 물은 다 연결돼 있다라고 봤고. 그다음에 명계잖아요. 명양이니까 살았거나 죽었거나. 하늘이나 땅이나, 천지, 하늘이나 땅이나. 근데 이게 뭐하고 똑같은 거냐면 희랍 신화에 나오는 거랑 비슷해요. 희랍 신화에 보면, 크로노스를 결국 아버지를 이기고 3명의 자식들이 천하를 3개로 나누잖아요. 그게 이제 아시다시피 제우스가 어떻게 보면 땅과 하늘 세계까지 커버를 하는 거고, 그다음에 바다는 포세이돈, 그러니까는 천지, 그다음에 수륙에 해당하는 게 어떻게 보면 포세이돈이라고 볼 수 있는 거고, 명양에 해당하는 게 하데스, 이렇게 그러니까 옛날 사람들이 나누는 기준들이 비슷했던 거예요. 단지 왜 죽음이 나오느냐라고 물어보시는 분들이 있는데, 옛날 사람들은 죽은 게 단절된 세계라고 생각을 안 했어요. 지금처럼 죽으면 그건 사후 세계고, 그건 단절이에요라고 생각하는 거는 사실은 기원 전후에 나오는 생각이고요. 그 이전에는 연결돼 있다고 생각해. 그 어딘가로 가면 사후 세계가 있는 거예요. 우리랑 멀 뿐이지. 그래서 철이산 사이에 오무간지옥이 있는데, 그 오무간지옥뿐만이 아니고, 팔대지옥, 팔한지옥 그러니까는 팔열지옥, 팔한지옥 이런 게 다 있는데, 그게 어디냐 하면 수평 세계에 존재하는 거예요. 우리로부터 먼 바깥쪽 세계에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생암지옥이라는 말도 가능하고. 불교에도 있는 얘기예요. 그러니까 산 채로 지옥에 떨어진다. 안 죽었는데 어떻게 떨어져요? 연결 세계라고 생각해서 그런 거예요. 그리고 희랍 신화도 보면 헤라클레스도 그 하데스 세계를 왔다 갔다 합니다. 그래서 가서 케르베로스라고 머리 세 개 달린 개. 그게 나중에 이제 해리포터와 마법사의 돌에서도 나오는 거죠. 머리 세 개 달린 애. 그래서 그런 애도 이제 좀 잡아서 때려주고, 떼찌떼찌 해주고 오고. 이게 가능한 게 다 연결세계라고 생각해서 그래요. 그리고 그게 이제 분절되는 거는 기원 전후쯤 돼야. 그래서 그게 이제 기본. 그래서 같이 삶과 죽음이라고 하는 게 같이 연결돼 있다라는 거고, 그리고 중국에서는 이게 이런 게 만들어지는, 이런 의식들이 만들어지는 게 남조 시절에 만들어져요. 육조 시절에 육조 남조에서. 그리고 그때 양자강을 중심으로 양자강, 그다음에 회수라고 하는, 정확하게 말하면 회수라고 하는 강이에요. 그 회수를 중심으로 강남, 강북이 전쟁 상황에서 대치하고 있었어요. 그게 이제 그리고 거기를 6조 시대라고 합니다. 크게 얘기할 때는 위진남북조 시대. 북쪽에는 5호 16국이라고 하는 게 있었고, 남쪽에는 6조 오동진 송제양진의 여섯 나라가 있었어요. 그리고 그거를 전선이 강을 중심으로 대치가 되는 거예요. 회수, 회수라고 들어보셨는지 모르겠는데, 단순히 들으면 회수가 뭐지 이렇게 생각할지 모르지만, 어른들은 이제 들어보면 바로 아는 내용이에요. 뭐가 있냐면 <귤이 회수를 지나면 탱자가 된다.> 그게 회수입니다. 그러니까 중국으로는 거기서부터 기후대가 약간 바뀌어요. 기후대가 약간 바뀌어요. 그래서 회수를 중심으로 그렇게 틀을 놓고, 우리 식으로 말하면, 한국전쟁으로 말하면, 낙동강 전선이라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그래서 강에서 사람이 많이 죽었어요. 그래서 그렇게 죽은 분들에 대해서도 원혼을 좀 달래야 될 필요가 있고, 그래서 산 사람, 죽은 사람 할 거 없이 모두가 화합해서 억울한 것도 없고, 맺힌 것도 없이, 전체가 풀렸으면 좋겠습니다라고 하는 게 사실은 수륙제의 의미입니다. 그리고 그거는 조금 더 안쪽으로 들어가면 한나라 때 만들어지는 동중서의 한나라 무제 때 천인감응설이라고 하는 것 때문에 그래요. 인간들도 서로 기운이 뭉쳐 있고 막혀 있으면, 조금 이렇게 이 세상과 감응을 하는 과정에서 조금 안 좋아진다는 얘기예요. 이 세상 사는 게. 그래서 안 좋아지는 게 외부 환경으로 나타나면 무슨 재난이 내리는 거죠. 요즘으로 말하면. 근데 진짜 재밌지 않아요, 저도 되게 재밌었는데, 제가 얼마 전에 중국 갔었는데 송이가 나오는데 더워요. 그리고 지금 얼마 전에 추석이었잖아요. 추석이 중추절이라고도 합니다. 중추라는 게 뭐냐 하면, 옛날에는 계절을 세 달씩 끊었거든요. 봄, 여름, 가을, 겨울을 세 달씩 끊었어요. 그래서 맹중계(孟仲季) 이렇게 넣거든요. 맹이 그러니까는 맹추, 중추, 계추예요. 그래서 중추면 중간이라는 뜻이거든요. 가을의 중간이 추석이야. 폭염이죠. 열대야입니다. 열대야. 뭐 이런 게 있나 싶을 정도로. 그래서 어떻게 보면 사람들이, 옛날 사람들은 그렇게 했어요. 비가 너무 많이 오고, 비가 안 오고, 그다음에 이런 기상 이변들, 이런 것들도 사람들의 막힌 기운들이 많으면 그게 하늘과 감응에서 그런 일들을 벌인다더라라고 옛날 사람들은 생각했어요. 그래서 모든 것을 화합시키는 것이야말로 국가를 위해서 굉장히 중요하고, 국가 발전을 위해서 도움이 된다. 그래서 수륙재도 국행수륙재예요. 되게 재밌는 게, 이걸 왜 국가적으로 하지? 이거 그냥 종교 의례잖아요. 그럼 불교 안에서 하면 되지, 왜 국가(에서) 차원에서 하지? 뭐하고 똑같은 거냐면 안전띠 매라. 자동차 회사 안전띠 매라, 안전벨트 매라는 걸 국가 차원에서 계속 홍보했죠. 사실 거기서 가장 많은 돈을 버는 사람들은 보험회사입니다. 그렇지 않아? 안전띠를 많이 매서 사람이 크게 많이 안 다쳐요. 그럼 보험회사에서 버는 거예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왜 국가 차원에서 그런 것들을 캠페인을 계속해줬을까. 그거는 그게 단순히 보험회사의 문제를 넘어서서 국가적으로도 이익이 되는 거죠. 사람들이 많이 다치면 거기서 끝나는 게 아니고, 그게 장애인 발생도 되고, 결국 국가 예산을, 많은 부분이 복지 예산이 더 할애돼야 돼. 그래서 언뜻 보기에는 보험회사를 도와주는 것 같지만, 실제로는 그게 이익이 되는. 그래서 불교의 수륙재도 마찬가지예요. 언뜻 보면 이게 왜 국가 행사여야 돼요. 하지만 모든 막힌 기운들이 다 풀려서 화합이 되면, 화합이 되면 그거야말로 국가적인 역량이 훨씬 강화되고 발전에 도움이 된다라는 생각을 했던 거예요. 그래서 그렇게 존재하는 거고, 오늘날에 이게 굉장히 중요하다는 생각을 하거든요. 제가 살면서, 살면서, 오늘날같이 쓸데없이 초미화돼 있는 세상을 본 적이 없는 것 같아요. 제가 살아온 바로는. 그래서 예전에도 이념 갈등도 있었고, 별게 다 있었어요. 근데 지금처럼 첨예하게 서로 죽일 듯이는 안 했던 것 같아. 지금은 남녀 갈등도 있고요. 남녀 갈등도 있고, 정치권도 막 엄청난 갈등 속에, 예전에는 저렇게까지 죽이자고는 안 했었거든요. 여당, 야당을 얘기하는 게 아니에요. 서로 간에 어느 정도 룰들이 좀 있었는데, 그래서 전에 정치인 만나니까 누가 그런 얘기하던데, 스님들은 사실 조계종의 특징 중에 하나가 잘 싸웁니다. 굉장히 전투적이에요. 여러분 몰라서 그래. 임제종이 원래 활발발하기 때문에, 그리고 남성 집단이래서 주기적으로 한 번씩 이렇게 뭘 터뜨려줬어요. 되게 재밌어요. 무협 영화가 홍콩에만 있지는 않았다더라. 뭐 이런 게 있었거든. 이런 게 있었어. 되게 재밌는데. 근데 저는 그게 그렇게 나쁘다는 생각은 안 해요. 왜냐하면 그게 임제종의 기질이에요. 임제종의. 그게 이제 잘만 되면 우리식으로 말하면 그거지. 마치 한국 사람 기질도 마찬가지인데, 2002년 월드컵 때 벌써 옛날 얘기입니다. 2002년이면 진짜 청소년한테 얘기하라 했는데, 청소년 테어나기도 전 얘기 지금 하고 있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들 같은 경우는 2002년이 엊그제 같죠. 그게, 그게 슬픈 거예요. 그게 인생이 슬픈 건데. 월드컵 때 전 세계가 놀랐던 것 중에 하나가 저렇게 미친 듯이 응원하는 나라가 있을까에 대한 거거든요. 그게 한국인의 어떻게 보면 기질이에요. 약간 불광동 휘발유 같이 쫙 올라오는 그런 기질이 있어요. 그리고 그 에너지가 어떻게 보면 한국불교, 그다음에 서울 안에서는 이 진관사에 있는 것 같아요. 진관사에 있는 것 같아. 아니, 아니야, 아니, 아니야. 이거 앞에 어른들 계시다고 대놓고 얘기하는 건 아니고, 상도덕상 얘기해 드리는 건 아니고요. 실제로 제가 이렇게 여러 절들을 다녀보면 이 절같이 빡신 절 없습니다. 굉장히 힘듭니다. 저도 일생을 빡시게 살아온 사람이거든요. 제 좌우명이 <죽은 뒤에 쉬어라>예요. 그거 장재의 서명에 나오는 말이거든요. 최선을 다해서 언제나 노력하고, 그다음에 쉬는 건 죽은 뒤에 쉬면 된다라는 그 모토가 있어요. 그리고 저는 원래, 원래 일중독이에요. 절 아시는 분은 아시겠지만 제가 원래 일 중독이에요. 그래서 끊임없이 움직이고. 그래서 스님들이 휴가 간다는 걸 저는 납득을 못합니다. 휴가를 간다 하면 아니 “휴가 오는 데 살면서 뭔 휴가를 가” 이렇게 말하면 꼰대입니다. 그래서 뒤에서만 꿍시렁거리지 앞에서는 얘기를 못 해요. 차마. 어떤 일을 당할지 모르기 때문에. 그런데 저는 실제로 그렇게 생각을 하면서 사는 사람이에요. 그리고 유기체라고 하는 것은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야 돼요. 제가 어른들한테도 그렇게 말씀하시거든요. “드시고 싶은 거 있으면 많이 드세요. 좀 있으면 향 연기만 드셔야 돼요.” 이렇게 말씀드리는데 움직일 수 있을 때 움직여, 좀 있으면 못 움직입니다. 그래서 미리 쉴 필요가 없어. 조금만 있으면 계속 쉰다. 영구적으로 쉰다. 영구적으로. 그래서 아니야, 아니야, 별로 좋아할 일 아니야, 별로 좋아할 일 아니야. 그래서 저는 개인적으로 열심히 사는 사람을 좋아하고, 동양 철학의 기본적인 모토 중에 하나가 있어요. 주역의 건괘에 보면 저는 그 구절을 굉장히 좋아하거든요. 천행건 군자이 자강불식(天行健 君子以 自强不息)이라고, 하늘의 움직임은 언제나 굳건해서 계속해서 쉬지 않는대. 쉬지 않고 계속 움직인대. 하늘의 움직임이라는 게 원래 그런 거잖아요. 그런 것처럼 군자는 스스로 굳세여서 쉬지 않는다. 계속 움직이면서 무언가 일을 벌려간다라고 하는데, 여기는 우리 군자는 아니고, 군녀 스님들이 많이 사시는 데가 아닌가 싶어요. 진짜 여기 노동력으로만 따지면, 제가 보기에는 여러분들이 속해 있는 이 절은 진짜 대단한 거예요. 여기 반만 해도 진짜 조계종이 어떻게 보면 우리나라 전체 종교를 리드할 겁니다. 목사보다 빡신 것 같아요. 목사보다. 목사들 얼마나 빡신 줄 알아. 거기 자본주의에서 뛰는 대로 그게 올라가거든요. 새벽 예배부터 시작합니다. 일주일에 한 10번씩 떠들어요. 우리 떠드는 것만큼 떠들더라고. 내가 굉장히 놀랐거든. 여기는 사람들 갈아넣죠. 여기는 우리 스님들을 갈아넣고 있어. 근데 그렇게 하는 것 자체가 사실은 불교에 어떻게 보면 불교의 수행이라는 체계도 있고, 포교라는 체계가 있는 거예요. 그 포교 때문에 지금 오늘날 불교가 살아있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늘상 말씀드리는 거 있어요. 부처님은 6년 동안 수행하셔서 깨달음을 얻으셨고, 45년 동안 교사로서 끊임없이 걸어 다니면서 중생제도를 했고, 그 45년 때문에 오늘날 불교가 남아 있는 겁니다. 그래서 지금 여러분들이 이 복된 도량에 오신 이 인연이야말로 사실은 굉장히 소중한, 그리고 여러분들이 가까이 계시는 스님들이야말로 시대를 넘어서는 큰 스님이 아닌가라는 생각을 해봅니다. 아니 이건 진짜 솔직한 얘기예요. 제가 솔직한데 약간 아부 같죠. 근데 제가 진짜 여러 절들을 많이 다녀봐요. 그런데 여기같이 열심히 사는 데는 없어요. 제가 보기에는, 열심히 사는 걸로만 따지면 거의 1등입니다. 그래서 그거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굉장히 어려운 일이에요. 그리고 그거는 소신과 관련되고 목적과 관련되는 거예요. 그래서 기운이 맺힌 게 풀리면, 마치 마사지를, 몸에 마사지하고, 그다음에 침 맞고, 그다음에 부항 뜨고 하면서 몸을 풀어가듯이, 정신적인 거나 원한적인 거, 영혼적인 것들을 풀어내고 대화합을 일으키는 것, 그게 수륙재예요. 그래서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는 한국 불교가 아니고, 한국 사회 전체에 있어서 이 수륙재야말로 굉장히 중요한 의미를 가지는 게 아닌가 싶어요. 지금 우리나라가 이제 고성장에서 끝나고 저성장으로, 이렇게 내리막길을 걷고 있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제가 늘상 하는 얘기 있어요. 먹을 거가 많이 있을 때 싸울 것 같지만, 축소될 때 더 박 터지게 싸웁니다. 진짜 그래요. 이게. 그래서 축소되기 시작하면, 없으면서 더 싸워. 놀랍게도. 왜냐하면 그게 양보할 여력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에 그래요. 조선 후기도 보면 진짜 잔인할 정도로 상대당을 죽여가거든요. 굳이 저렇게까지 죽여야 되나. 근데 그런 시대들이 도래한 거예요. 하지만 한 번만 더 생각하시면, 여러분 어렸을 때보다 지금이 훨씬 좋아진 시절이에요. 왜 큰스님들 그런 얘기하시잖아요. 무슨 나 그런 거 좀 안 했으면 좋겠어. 큰스님 맨날 그 기록에 보면 뭐가 나오냐하면, 쉰밥을 씻어서 먹었다는 둥, 그다음에 옷을 뭐 이렇게 기워 입었다는 둥 막 그런 거 나와요. 그 시대에 막말로 얘기해서 그렇게 안 사신 분 거의 없습니다. 지금 그러면 당신들이 그렇게 사냐. 안 살아. 뭔 소리야. 다 시대마다 틀린 거예요. 그러니까 성철 스님 기워 입었다 이렇게 해서 그거 막 얘기하고. 야 나도 어렸을 때 기워 입었어, 뭔 소리야. 나보다, 저보다 연세가 훨씬 많으니까 당연히 그 옷은 더 기워 입으신 거예요. 여러분 부모님들 다 기워 입으신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그리고 그때 먹을 거 없어서 보릿고개 지나고 쉰밥 먹은 사람 많다니까. 큰스님이래서 드셨던 거 절대 아닙니다. 그 시대에 따라서 그 표준점들이 다 존재하는 거예요. 그래서 그걸 가지고 현대에 너네들은 얼마나 팔자가 편한 줄 아는데, 이렇게 말씀하시면 절대 안 돼 시대가 바뀐 거예요. 그러면 주변에 사람이 없어집니다. 그런 얘기 한 두어 번 하면 대단한 눈빛으로 보는 게 아니고 약간 이질적 눈빛으로 보기 시작하거든요. 사람을. 그리고 더이상 안 와요. 그래서 그런 부분들하고 생각을 해보면, 훨씬 더 풍요로워졌어요. 풍요로워졌지만 더 첨예화됐습니다. 왜. 그게 이제 욕심이 더 커져서 그렇죠. 욕심이 더 커져서. 정확하게 말하면 예전에는 진짜 궁핍할 때는 이팝에 고깃국만 있어도 굉장히 좋을 것 같았는데, 지금은 이팝에 고깃국으로는 그건 그냥 기본 중에 기본이지. ‘햄버거 먹고 한 달 버티면 돈 얼마 줄게’ 이런 식으로 나와도 안 먹는데. 지금 시절 자체가. 우리 어렸을 때, 저는 처음 롯데리아 가서 그 햄버거를 먹었던 기억이 지금도 있어. 내가. 와 그건 천상의 음식이었어. 진짜, 진짜. 그래서 저는 서울 사람이라 일찍 먹었어요. 시골 사람들은 상상도 못할 때 나는 먹었어. 그래서 그런 것들을 이런 기회를 들어서라도 돌아가신 분은 천도재고 남은 사람들은 다 화합할 수 있는 이 화기야말로 어떻게 보면 생계에서 가장 중요한 기운이다라고 할 수 있어요. 그리고 불교에서는 원력이라고 합니다. 우리 스님들이 부지런히 사시는, 물론 여기는 두 가지 종류의 스님이 계실 거예요. 부지런히 마음을 내서 사시는 분도 있고, 어쩌다 보니까 딸려가는 스님도 있고, 그러지 싶기는 한데 원력 있는 삶이 아름다운 거예요. 언제나 그리고 똑같은 얘기를 하면 원력이라는 게 뭐냐 하면, 내가 이것을 이렇게 구현해서 그게 대승적인 생각입니다. 꼭 내 자신의 이익만 추구하면 처음에는 사람들이 주변에 있고 일이 되는 것 같이 보여도 결국은 일이 무너져요. 그래서 대승적 발원을 하고 원력이 있어야 그게 지속적으로 돌아갈 수 있어요. 그거는 뭐든지 마찬가지라는 생각을 해요. 공공성이라고 하는 것은 사람이 결국은 세상을 사는 데 있어서 돈도 중요하고 뭣도 중요하지만, 공동의 목적이 있느냐라고 하는 것은 엄청나게 중요한 일이에요. 그리고 오늘 주제와 관련해서 사실은 제가 말씀드리려고 하는 것도 <목적 있는 삶>이라고 하는 거예요. 사람들이 잘 모르는 것 중에 하나가 제가 여러 번 말씀드렸는데도, 저에 대해서 기대를 하시는 분들이 있더라고요. 그래서 저는 공부를 열심히 하고 태어나서 제가 지금까지 살면서 공부한다는 생각이 없습니다. 까놓고 얘기해서. 그래서 제가 어렸을 때 공부를 못했습니다. 진짜. 진짜 못했어요. 단 저는 특징이 뭐냐 하면, 제가 먹을 때도 그렇거든요. 제가 굉장히 편식을 해요. 그러니까 내가 좋아하는 거는 계속하고, 그리고 그 좋아하는 거는 동네 거의 짱 먹을 때까지 올라갑니다. 게임을 해도 그렇고, 뭘 해도 그렇고, ‘나는 이게 좋아’ 그러면 그거를 계속해서 주변 사람들보다는 훨씬 잘할 정도까지는 올라가요. 그러니까 한 번만 꽂히면 그걸로 가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게임을 지금도 못해. 어렸을 때 제가 진짜 잠이 많았는데, 잠이 많았는데, 제가 저희가 오락실 첫 세대입니다. 제가 그런 얘기하거든요. ‘만약에 내가 조금만 늦게 태어났으면, 나는 프로게이머가 됐을 수도 있다’ 이런 얘기하거든요. 아니 가능성이 있는 얘기예요. 오락실 첫 세대였는데 너무너무 그게 재밌었어요. 진짜 지금으로 말하면 공짜로 해도 재미없는 그런 단순한 게임이었는데, 그 당시에는 그게 미친 듯한 게임이었어. 그리고 저희 아버지가 사업하시고 상황 파악을 잘 못하셔가지고 저한테 용돈을 많이 줬어요. 제가 늦자식이다 보니까 큰형 기준에 맞춰서. 근데 큰 형이 저보다 9살이 많아. 그래서 그쪽에 용돈을 맞추니까, 제가 고등학교 때까지 전교에서 용돈이 제일 많았었어요. 그 얘기는 뭐냐. 미친 듯이 지를 수 있다는. 오락실 정도면 내가 진짜 엄청나게 지를 수 있는 그런 상황이 된 거예요. 그래서 제가 아침잠이 많아서, 제가 유치원을 중퇴한 이유가 아침에 못 일어나서요. 아침에 못 일어나서. 나 정신을 못 차리겠어. 그리고 그게 오늘날까지 남은 게 아침밥을 못 먹습니다. 잠이 안 깨요. 그래서 눈만 떠 있지. 사람이 약간 이렇게 반 수면 마취 상태, 그래서 뭘 먹지를 못해요. 그런 식으로 살았는데 그래서 학교도 늘상 지각하거나, 뭐 이렇게 진짜 태만하게. 그리고 저는 결석을 해도 뻔뻔합니다. 굳이 굳이 이거 재미없는데 이러면 안 가도 돼. 그래서 조금 달라. 막 이유를 붙이고 우리는 그런 거 잘 안 해요. 가기 싫으니까. 이유가 뭐냐면 가기 싫은 거야. 그게 이유야. 그래서 제가 전에 그런 얘기 안 해드렸나요? 내가 까뮈 이방인 읽을 때 그 실존철학에 관련된 얘기인데, 되게 저는 그게 이해가 됐었다니까. 그 사람이 사람을 죽이는데 총을 쏴서 누가 죽였어. 그래서 그게 법정에 섰는데, 그 소설에 나오는 얘기예요. 근데 왜 죽였습니까? 이랬더니 ‘태양빛이 너무 눈이 부셔서, 그래서 그냥 당겼어요.’라고 하는 거예요. 인과가 없어. 근데 우리도 비슷한 행동들을 하거든요. 저는 그게 납득이 돼요. 왜 학교를 안 갔어? 그러면 그냥. 그래서 부모님이 되게 좀 속을 많이 썩었죠. 저게 약간 애가 모지르나. 보통 그런 경우가 닥치면 애들은 막 뭐라도 이렇게 근거를 대려고 하는데 그냥입니다. 그냥 가기가 싫어. 뭐 졸려. 이런 거야. 이런 거. 그런데 제가 오락실에 꽂혔을 때 이건 너무 재밌기 때문에, 너무 재밌기 때문에, 학과 학교 끝나고 방과 후에만 해서는 안 돼. 그래서 아침에 일찍 학교를 가는 거예요. 그때가 내가 진짜 내 일생에서 자발적으로 가장 열심히 일찍 일어났던 시절이야. 그래서 아침에 학교를 가는 과정에서 한두 시간을 합니다. 끝나고 또 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래서 아저씨가 저 때문에 일찍 문 열었어요. 손님도 없는데. 그렇게 그런 거 되게 재밌어. 그러다가 전설적인 일을 하나 만들어냈지. 너무 게임이 잘 된 거예요. 50원이었는데 그 당시에. 이거 진짜 얘기하면 사람들이 거짓말이라고 하는 사람들도 있는데, 아침 8시에 들어가 가지고요. 저녁 6시까지 한판을 했습니다. 한 판 한 게임으로. 화장실 두 번 갔습니다. 두 번. 그럼 화장실은 어떻게 갔냐. 딴 애를 대신 세워놨어. 그럼 걔가 몇 마리 죽어. 그러면 내가 그거를 받아서 다시 채워놓으면 돼. 학교는 당연히 제꼈고요. 내가 그렇게 살던 사람이라니까.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들었냐면 중학교 3학년 때 제가 이제 각성을 하기 시작하거든요. 이렇게 그지같이 살다가는 평생 병풍 인생이 되겠다. 이게 그 당시에 프로게이머가 있었으면, ‘그게 내 길이다.’ 이랬을 수도 있어. 진짜. 근데 그 당시에는 그런 게 없었어. 그래서 야 이거 너무 거지같이 사는 거 아니야. 이거 해도. 그리고 그때는 제가 또 복권을 많이 살 때예요. 난 될 것 같아. 뭔가 될 것 같아. 인생은 이렇게 뒤집는다. 제가 아마 고등학교 1학년 때까지 복권 사다가 복권 안 샀을걸, 그 뒤로는. 이제 생각이 조금씩 바뀌어가거든요. 복권을 왜 사느냐. 돈이 많다니까. 돈이 많다니까. 그냥 유흥비로 써가지고는 돈이 충분해요. 그래서 복권도 사보고. 뭐 이렇게 그냥 다 여러 가지를 해봤어요. 그런데 중학교 3학년 때 무슨 생각을 했냐면 공부는 못하고, 하기도 싫고, 그리고 하기 싫은 거를 못 했을 때 부끄러움이 없어요. 제 특징 중에 하나인데 제가 얘기하잖아. 저는 초등학교 2학년 때 가를 맞아본 사람이다. 가를 맞아본 사람이다. 그리고 가를 맞은 거에 대해서 창피한 걸 생각을 안 했다. 초등학교 저학년 때 가를 맞는 거는 수 맞는 것보다 훨씬 어려워요. 결손 가정 외에는 없었습니다. 반에 없었습니다. 그게 나예요. 진짜. 그래서, 그래서 무슨 생각했냐면 이거 따라가지도 못하겠고. 그때 무슨 생각을 했냐면 이걸로는 안 되겠다. 그리고 공부를 조금 해볼려고 그랬어. 안 되더라고. 왜 재미가 없어요. 그래서 저는 그렇게 얘기하거든요. 젊은 사람들. 저희 누나가 하루는 저한테 얘기했어요. ‘니 조카한테, 스님이 조카한테 좀 공부하라고 좀 얘기 좀 해줘.’ 왜 이렇게 막 그렇게 간절하게 얘기를 하더라고. 근데 나 초등학교 때 가 맞은 걸 자기가 아는데 무슨 쓸데없는 소리를 하나. 내가 처음에 이랬는데. 그래서 가보라고 이렇게 해서 내가 둘만 남겨놓고, 애만 남겨놓고, 내가 뭐라 그랬냐면 “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내가 그랬어. “하기 싫은 거 억지로 하는 거 아니다. 세상은 하고 싶은 것만 하고 살아도 충분하다. 괜찮다. 단 책임을 네가 질 수만 있으면.” 저는 그때 제가 중학교 3학년 때 각성을 한 게 뭐냐 하면 “아, 나는 공부가 내 길이 아닌 것 같다.” 못 이기겠어. 좀 해봤는데 같은 시간을 해보니까 쟤를 못 이기겠어. 게임도 그런 거 있어. 게임도 나중에 내가 접게 된 이유가 더 이상 안 되는 한계가 있어요. 동네 짱입니다. 동네 짱인데, 그 이상은 못 올라가겠어. 이게. 있어, 있어. 여러분이 수영을 하든 무슨 골프를 배우든 다 마찬가지예요. 어디까지 올라가는데 딱 내가 이거를. 그 계산이 딱 서는 거예요. 이 계산이 없는 사람은 진짜 못하는 사람이에요. 이 계산이 뭐냐 하면, 내가 시간 투자를 얼마를 더 하고 돈을 얼마를 더 갖다 박으면, 요다음 단계로 넘어가겠다는 계산이 떨어지면 그나마 하는 사람입니다. 되는지 안 되는지도 모르고, 그냥 계속 가는 사람은 진짜 못하는 사람이에요. 그런데 아무리 계산을 해도, 그다음 단계까지는 못 가겠는 거예요. 그래서 공부도 딱 애들하고 비교해 보니까 안 돼. 쟤 못 이기겠어. 근데 반에도 못 이기는 애들이 지금 나보다 잘하는 애들이 굉장히 많은데. 그러면 전국적으로는. 아니 저는 제가 얘기하지만 제가 8학군 출신이에요. 그래서 공부 잘하는 애들이 진짜 있었다니까. 많았었다니까. 생긴 거는 내가 8학군같이 안 생겼잖아. 내가 약간 동남아 같이 생겼잖아. 그래서 내가 살 쪄가지고 약간 부티난다고 사람들이 하더라고. 그전에는 맨날 베트남, 뭐 이런 거 이런 거 했었는데. 그래서 무슨 생각을 했냐면 “이거는 내 길이 아닌 것 같다. 그렇지만 다른 방식으로 무언가 대체할 수 있는 게 나한테 존재할 거다. 그리고 그게 제대로 없다면 살아서 뭐 하겠나” 이 생각은 계속 가지는 생각이에요. 나중에 출가하고 나서도 그냥 병풍같이 살 거면 그냥 게임을 끝내고 다시 시작하는 게 지지치고 나가는 게 안 낫겠나 이런 생각을 우리는 하거든요. 그래서 그때 뭘 했냐면, 그때 중학교 3학년 때부터 뭘 했었냐면, 그때 도교, 불교, 유교, 도가, 이런 거를 공부를 했어요. 그때 아무도 안 하고 그런 거를 사람들이 다 별로 대단하게 안 볼 때예요. 잘해놨지. 지금 생각해 보니까. 그래서 제가 해주 스님이 제 지도 교수님이라고 그랬잖아요. 석사 때 근데 해주 스님이 한 얘기가 지금까지 기억나는 거, 수업 시간에 얘기한 거 한 개도 기억 안 나고요. 두 개 기억납니다. 제가 그때도 약간 이렇게 좀 아는 소리를 했거든. 그랬더니 스님이 뭐라고 얘기하냐면 아마 비구 스님이 지도 제자였으면 아마 디게 뭐라 했을 거예요. 근데 제가 비구래서 그나마 참으면서 이 어른이 얘기한 거야. 뭐라고 얘기했냐면 “그렇게 스님이 아는 게 있으면 말을 하지 말고 논문을 쓰세요. 논문을 써서 인정을 받으세요.” 그래서 그 뒤부터 제가 논문을 썼어요. 실제로. 그래서 내가 우리나라 인문학자 중에서 제일 많은 등재지에 논문을 낸 사람이 나라니까. 그게 그러니까는 그냥 뒷방 얘기만 계속하지 말고, 니가 그렇게 생각이 있으면 정리를 해서 그 바탕에서 쉽게 말해서 전문가들한테 인정받도록 해봐라. 그리고 또 하나가 뭐였었냐면 제가 수업 들으면서 이렇게 제가 딴 짓을 또 많이 해요. 수업 시간에. 제 특징이 굉장히 이렇게 집중력 있게 선생님 말씀을 들을 것 같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상당히 산만합니다. 그러다가 뭐 물어보면 제가 대답은 또 잘해요. 대답은 잘해. 그때 해주 스님이 한 얘기가, 나중에 이르지 마세요, 뭐라고 얘기했냐면 스님은 그렇게 사람들을 알로 보는 눈빛을 하지 말라고. 내가 그때도 그랬었나 봐. 뭐라고 얘기하냐면 교수를 알로 보는 것 같대. 학생인데. ‘느그들이 뭘 알고 있어’ 이런 식으로 보는 것 같대. 근데 그게 생각이 없었던 건 아니야. 내가 솔직히 얘기하면 없었던 건 아니야. 근데 그게 가능한 이유가 뭐냐면, 나는 중학교 때부터 이런 것들을 보기 시작했어. 그래서 이미 내가 대학원 다닐 때 교수보다 더 많이 봤다니까. 이게. 그러니까 그게 은연중에 계속 보이는 거야. 지금은 겸손해졌습니다. 지금 이 눈빛은 노안이어서 잘 안 보여서 그렇게 보고 있는 것뿐이지, 실제로 겸손한 눈빛이에요. 그래서 그때부터 어떻게 보면 제 인생이 좀 바뀌기 시작했어요. 그리고 그때만 하더라도 어른들이 그런 거 이런 거 공부하는 거를 되게 좀 이상하게 봤어. 그 저게 무슨 제정신인가 싶었어. 그런데도 우리는 한 번 꽂히면 또 끝까지 가니까 혼자서 계속해서. 지금은 제가 늘상 얘기하는 거 있어요. 쓸데없는 걸로, 이 나라에서 동아시아의 어떻게 보면 콘텐츠, 안 그러면 문화 이런 걸로 나만큼 아는 사람도 없을 거다. 그리고 제가 불교 쪽에는 이런 식으로 교만한 얘기를 합니다. “내가 모르면 한국에서는 모른다.” 미친 자신감인데, 괜찮아. 그런 정신으로 살아. 그런데 이게 뭐냐면, 무엇을 잘할 수 있는가를 스스로 찾는 거고, 그다음에 목적이 있느냐예요. 목적이 있느냐. 나는 그냥 병풍으로 살기가 너무 싫었어. 주목받지 않는, 저는 원래부터 제가 약간 관종과거든요. 저는 트럼프를 좋아하는 사람이고, 일론 머스크를 좋아하는 사람이에요. 우리 관종계의 대부들이잖아. 80 먹어서도 그런 관종짓을 할 수 있는 게 쉽지 않습니다. 정상적으로 계속 관종들도 한 60 넘어가면 그리 쉽게 못합니다. 그런데 트럼프 대통령 그거 하시잖아요. 진짜 대단한 분 아니에요? 난 놀랐는데 진짜. 대통령을 하던 사람이 떨어지니까, 자기가 현직 대통령이었는데, 선거가 부정선거가 있었다는 둥, 그거 야당에서 하는 거지, 자기가 여당인데 무슨 부정선거 얘기를 해. 그러더니 한 번 쉬었다가 또 올라오잖아. 그리고 이 귀때기 총 맞을 때 보셨어? 진짜 그 짧은 시간에 총알이 스쳐갔다고 생각해 봐요. 정신이 없어요. 보통 사람도 정신, 그때 손을 들고 이게 가능한 리액션인 줄 아세요? 그거 일반 사람 그거는 진짜 관종 중에 대마왕급 아니면 할 수가 없는 거예요. 제가 그런 영상이나 사진을 보면서 ‘배워야겠다. 배움이란 끝이 없구나’ 이런 생각을 했다니까 우리는 진짜 조족지혈이다. 새발의 피다. 제가 보스톤인가 미국에 갔을 때 진짜 대단한 걸 봤다니까. 건물이 이렇게 큰 게 있는데, 거기에 간판이 우리도 그런 LG나 삼성 이런 건물들 보면 삼성 이렇게 써 있잖아요. 거기에 뭐라고 써 있었냐면 <트럼프> 이렇게 간판이 써 있어. 그래서 내가 설마 아닐 거야. 다른 회사가 있나, 트럼프라는 회사가 있나. 그래갖고 제가 가이드한테 물어봤어요. 설마 저 트럼프가 그 트럼프는 아니겠죠? 그랬더니 그 트럼프입니다. 지 건물이라고 건물에다가 이름을 진짜 엄청나게 크게 써놓은 거야. 광고판 붙여놓듯이. 존경스럽고요. 존경스럽고요. 그래서 사람마다 성향이 다를 수는 있어요. 그래서 관종이면 한번 드러나고 싶어하는 성향을 갖는 게 맞고. 그리고 그 부분에 대해서는 끊임없이 노력해야 돼요. 노력이 없이 빛나는 거는 진짜 복이 있는 사람만 가능해. 복이 있는 사람만 가능해. 그리고 그 복이 있는 데까지 가기 위해서는 전에 노력을 했거나, 안 그러면, 안 그러면 부모를 잘 만나면 돼요. 이런 얘기는 좀 그런데 부모 잘 만나면 돼요. 근데 내가 내 자신을 되돌아봤을 때 우리 부모님이 이번 경기에서는 약간 잘못 만난 것 같다, 그러면 노력해야죠. 노력하라는 뜻이야. 노력하라는 뜻이야. 그래서 공부는 행복, 아니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 이거 우리 어렸을 때 ,그 영화 그다음에 소설 이런 것 때문에 아주 유명한 얘기였는데, <멈추면 비로소 보이는 것들> 뭐 이런 것처럼 멈추면 비로소 보인다는 뜻이 뭔 뜻인지 아세요? 노안이라는 뜻입니다. 움직여도 보이는 게 정상인 거예요. 그리고 행복은 성적 순위 아니잖아요. 그거 구라예요. 성적 순이야. 그리고 그렇게 말하는 사람은 성적 순인지도 모르는 거야. 바보 같은 놈들. 100% 성적 순위입니까? 아닙니다. 99% 성적 순입니다. 그리고 그걸 알기 때문에 우리나라가 학력 인구가 줄지만, 교육비 지출은 늘고 있습니다. 실제로. 왜 부모님들이 어떻게 보면 애들 교육에만 안 들여 박으면 훨씬 더 넉넉하고 행복한 삶을 살 수도 있어. 그런데 거기에 엄청난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좀 잘 사는 집 봐봐. 애들이 영어 유치원 가기 시작하잖아. 몇 백씩 갖다 박아요. 한 달에. 나한테 그리 박았으면. 어떤 집은 개한테도 그리 박잖아. 그래서 내가 그런 얘기하는데 개만도 못한 인생. 동대 옆에 가면 그 개병원이 있는데 개 스케일링 이래가지고 나와요. 그래서 내가 뭐라고 했냐면, 나 스케일링 지금까지 살면서 한 번 해봤거든. 개만도 못한. 개도 스케일링을 하는 세상인데. 이런 개 같은 경우가 있나. 광고판도 무지하게 커. 그래서 공부는 성적순이 아니에요. 아닌데 그런 말에 낚기면 인생 골로 가는 겁니다. 그리고 마음이 예뻐야지. 외모는 중요하지 않다. 네가 외모가 아니어서 그런 말 하는 거야. 외모가 중요해. 아이돌이나 연예인들 봐봐라. 다 외모지. 그럼 거기 마음 착한 사람이 거기 뭐 몇 명이나 있어. 딱 보면 그런 애들이 tv에 나와서 그렇지, 현실로 옆에서 보잖아. 후광이다. 진짜 연예인은 다르네요. 이 말이 여기까지 나온다. 체면 때문에 참아, 여기까지 해서 참는 거야. 진짜야 보면 실물하고 달라. 그러니까 우리가 tv에서 볼 때 ‘아 쟤는 조금 떨어지는 것 같은데’ 떨어져도 이런 데 오잖아. 확 삽니다. 확 삽니다. 이거 야명주가 뭐 이렇게 실제로 그래요. 실제로. 그래서 외모가 전부냐. 전부 아닙니다. 99%. 공부가 공부가 행복을 좌우하느냐. 99%. 그래서 부모님들도 전부 그렇게 공부를 하라고 얘기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저는 젊은 애들한테 부모님들이 그렇게 말씀하시는 분이 있어요. 저 이제 책 같은 거 내고 이러면, ‘우리 애가 저번에 입시인데 좋은 글을 한번 써주세요.’ 이러면 ‘공부가, 공부가 꼭 올바른 것은 아니지만, 당신의 목적, 너가 성취하려고 하는 목적에 도달하는 가장 효율적이고 빠른 길인 거는 분명하다’ 이런 식으로 써줘요. 공부하라는 얘기는 안 해. 저는 공부하라는 얘기, 내가 공부 안 했다니까. 안 했다니까. 그냥 좋은 것만 해도 돼. 단 그 좋은 거를 할 때는 책임을 질 줄 알아야 돼. 그리고 살 수 있는 방안을 찾아야 돼. 단순히 지금만 좋은 거를 해가지고는 견딜 수가 없어요. 그래서 바둑 둘 때 그 얘기했거든요. 다음 수 없는 수는 두지 마라. 그러니까 계속 그것을 지속할 수 있느냐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셔야 돼. 그래서 목적이 뚜렷해야 되고, 저는 개인적으로 예전에는 검사나 무슨 판사나 의사나 이런 사람이 대단한 줄 알았어. 근데 좀 살아보니까 별 볼 일 없더라고. 그냥 그냥 조금 더 돈 많이 버는 직업이에요. 그런데 그들이 겪는 거는 훨씬 짜증 나는 조건이지. 검사나 판사 다 문제 있는 것만, 그 정신적으로 온전할까 내가 이런 생각했거든요. 그런 것만 계속 보고 있어. 아니 얼마 전에 누구 만났는데 자기가 변호사인데, 뭐라고 얘기하냐면 이혼 전문 변호사래. 그래서 내가 가정 생활은 더 잘 되겠다고, 반면교사를 삼아서. 근데 그런 것만 계속 보잖아. 그러면 상태가 과연 좋아질까. 그리고 의사도 마찬가지예요. 저는 개인적으로 의사 중에서 제일 좋은 게 안과하고 치과라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수술, 막 피나는 수술 덜 해도 되잖아. 약간 지저분해서 그렇지. 그다음에 안과는 거의 기계로 하거든. 이게 너무 예민한 거라서 사람이 손으로 이렇게 손대기가 어려워요. 그래서 기계로 하거든요. 그러니까 그게 좀 의료사고 날 일도 상대적으로 적고, 그다음에 피 볼 일이 별로 없고. 그런데 제가 그래서 내가 치과는 괜찮지 않나라는 생각을 했다가. 얼마 전에 돌아가신 김성철 선생님하고 저하고 좀 오래된 인연인데, 그러니 그 치과의사 하다가 불교, 불교대학원 와서 전공해서 나중에 경주 교수로 들어갔거든요. 경주 동대 교수로 들어갔거든요. 그래서 제가 궁금해서 물어봤어요. “이게 더 재밌냐고 그게 더 재밌냐”고 그랬더니, “그거 할 짓 아니라고” 할 짓 아니라고. 저 닭장 같은 데 갇혀가지고 계속 가는데 미칠 것 같대. 그래서 지금 다다음 달인가, 김성철 선생님 추모 세미나를 제가 주관을 하는데, 그때 이제 그 보살님도 보게 될 거예요. 근데 그 집이 내외간이 다 그러니까 부인도 치과 의사예요. 치과 의사예요. 그래서 제가 그때 그 말을 해주고 싶었는데 차마 못 했다니까. “그렇게 선생님이 싫으면 부인도 해방을 시켜줘야 되는 거 아닙니까?” 그 말은 차마 못했는데 그때는 제가 약간 그 양반이 저보다 한참 선배였기 때문에 그때는 덜 친해서. 그리고 나중에 그 양반 돌아가실 때도 되게 재밌어요. 그 양반도 소신 있는 사람이거든요. 굉장히 고집이 있다고 사람이 부드러운데 굉장히 고집이 있어. 그러면서 당신이 심장병이 있는데, 심장이 좀 안 좋은데, 뭘 열심히 더 달리기를 해가지고 그 근육 비슷하게 만들어서 그걸 에너지를 강화시켜서 뭐 해야 된대. 그래서 열심히 뛰었어요. 그래서 제가 그 얘기를 듣고 뭐라고 생각했냐면 ‘안 좋은데 그거 뛰어도 됩니까? 그러다가 문제 생기는 거 아닙니까?’ 이랬더니 내가 그래도 의사인데 이러면서 얘기를 하더라고. 그래서 내가 속으로는 뭔 얘기했었지. 무슨 생각했냐면 ‘그쪽 과 아니잖아요. 그쪽 과 아니잖아.’ 내가 그걸 내가 여기까지 나왔는데, 사람 무시하는 것 같아서 내가 그래도 참았는데 돌아가셨어요. 결국 달리기하다가. 당신. 근데 다른 사람들은 좀 안타깝다라고, 저도 안타까운 건 안타까운 건데, 그거는 불교를 위해서 안타까운 거예요. 그 어른 정도로 이렇게 해줄 만한 사람들도 없어. 근데 참 한국불교가 어떻게 보면 전체적으로 약간 운이 좀 없다라는 생각을 제가 하는 이유는 오래 사셔야 될 분들이 좀 더 빨리 돌아가시고, 저분들은 좀 빨리 가셔도 될 것 같은데 이런 분들은 또 오래 사세요. 이게 뭔가 싶은. 스님들도 조심하세요. 스님도 조심하세요. 일찍 문제 생길 수도 있어. 이거 아니면 이 진관사가 그 징크스를 깼으면 하는 생각을 가져봅니다. 그런데 그 어른이 한국 불교를 위해서는 굉장히 안타깝다는 생각을 했어요. 저는 더 그런 분들이 많은 일을 해주기를 원했거든요. 제 윗세대 중에 어떻게 보면 전국구라고 할 만한 분이 그 어른밖에 없어요. 교수 해봐야. 일반인들에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이 없었어. 그래서 안타까웠는데, 한편으로는 저는 그 어른의 죽음을 슬퍼하지는 않습니다. 당신이 소신껏 주변에서도 계속 얘기했대. 뛰면 안 됩니다. 계속 얘기했대. 그런데 당신 소신껏 하고 하다가 돌아가신 거예요. 저는 그런 죽음에는 사실은 찬사를 보냅니다. 제 아는 스님이 모모 스님이 계신데, 그 어른이 담배 같은 거를 많이 태우셨는데, 나는 그 양반이 멋있게 돌아가실 줄 알았어. 근데 병원 가서 “얼마 안 남았습니다.” 이 얘기를 한 번 듣고 담배를 끊더라고. 나는 그냥 계속 피다 가기를 원했어요. 그게 당신 소신에 맞다라고 생각해서. 멋있는 삶이라고 생각했어. 내가 담배 끊고 그 양반하고 잘 얘기를 안 합니다. 이거 변절자, 변절자. 담배를 모독하는 것도 아니고, 평생 즐겨놓고. 저는 소신이라고 하는 거를 굉장히 중요하게 생각해요. 그래서 내가 세운 목적과 그게 부합하면. 사실 사람이라는 게 돈으로도 움직이는 거고, 그다음에 사회적 조건, 이런 것도 굉장히 중요한 거예요. 하지만 열정이 만들어낼 수 있는 것은 내가 내 자리에 나에게 맞는 옷을 입었느냐가 굉장히 중요한 겁니다. 그래서 의사가 안 될 사람들도 있고, 주변에 이렇게 보면 공부를 잘해서 밀려서, 주변 사람들 가족들이 “너는 공부를 잘하니까 의대에 가야 되는 거 아니냐” 지금은 더 심해진 거예요. 예전에는 법대 쪽도 얘기가 많았는데 로스쿨 생기고 나서, 의대 쪽이 압도적으로 강력해졌거든요. 지금 현실이. 그래서 그렇지만 안 맞는 옷에 자기가 들어가서 입고 있으면 평생을 얼마나 힘들까를 생각해요. 개인적으로는 저는 출가하기 잘했다라고 생각하는 사람이고, 제가 하는 얘기가 있어요. 절이 극락이다. 이것 여러분들은 동의 안 하실 수도 있는데, 저는 그렇게 생각하거든요. 저는 진짜 절에서 편히 살았어. 절에서 편히 살았어. 어른들이 공부한다 그러면 빼줘. 나 일을 거의 안 했어. 공부한다고 그러면 빼준다니까. 굉장히 부당하다고 생각했습니다. 내 공부하는 거지. 그런데 그걸 빼주더라고. 왜 한국 사회에서는 그게 있어요. 공부에 대한 어느 정도 열망 같은 게 있어서, 어른들일수록 그래요. 그래서 저는 무슨 생각했냐면 ‘내가 주지가 되면 절대 안 빼줘야지.’ 내가 이런 생각했거든. 그거 지 일이잖아. 근데 열정이 있는 삶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은 굉장히 편하고 아름다운 삶이에요. 그래서 나에게 맞는, 내가 목적을 가지는 원까지 가지는 거는 어렵고, 원력을 가지는 삶이라는 건 진짜 위대한 삶이에요. 그건 위대한 삶이고. 목적을 가진 삶, 흔들리지 않는 어떤 조준점을 가진 삶이 있다면 그것은 진짜 가볼 만한 거예요. 그리고 그걸 내가 잘 못 찾겠어. 내가 중고등학생인데 어떻게 그런 걸 찾겠어, 그러면 공부입니다. 왜 공부는 선택지를 줄 수, 선택지를 가질 수 있는 여건을 만들어줘. 사실 슬픈 애들이 누구냐면, 저는 그런 사람들 보면 좀 슬프거든요. 아이돌 지망생. 그래서 몇 년 동안 합숙하고 연습했어. 그리고 진짜 나중에는 걔네들이 나이가 먹으면 관절에 무리가 갈 정도로 어떻게 보면 힘든 생활을 했어. 우리가 눈으로 볼 때는 그걸 딱딱 맞춰서 하는 그 칼군무라고 하는 게 쉬운 것 같지만, 무지하게 연습을 한 결과예요. 진짜 어려운 거거든요. 그런데 그중에서 몇 명만 데뷔하고, 대부분은 시작도 못하고 끝나고, 데뷔해도 대부분 그 사이에서 또 도태돼. 현실이 그런 거예요. 현실이. 그러다가 무슨 일이 벌어지냐면 너무 힘들고 경제적으로 어려워지면 나이는 먹고 그게 다 데뷔할 수 있는 나이가 있는 거. 그건 수명이 굉장히 짧잖아. 아이돌이라고 하는 건 몇 년 딱 가면 끝이지 뭐 어떻게 할 거예요. 그러니까 그게 안 되면 이제 인생이 바뀌는데, 그때 후회하는 사람들이 있어. 후회하는 사람들. 내가 그때 왜 그걸 했을까. 근데 두 가지라고 생각을 하는 거예요. 그렇게 후회할 생각을 할 정도면, 너는 거기에 대한 열정이 없는 거에요. 열정이 없는 거야. 열정에 미쳐 있었다면 나는 거기에 성공하지 못했더라도 후회는 안 남아, 할 만큼은 했어. 내 조건 안에서 진짜 내가 할 만큼은 했어라고 떨어지는 거예요. 그리고 그 정도 용기가 없다면 보험을 들어두는 거예요. 보험을 들어두는 거예요. 그 보험이 1차적으로는 공부입니다. 공부가 행복이냐. 행복은 아니지만 행복으로 갈 수 있는 가장 중요한 포인트를 잡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그 공부는 꼭 학교 공부해야 되냐? 저는 그런 생각은 안 해요. 오늘날에는 진짜 다양한 공부들이 있어요. 그리고 예전에는 진짜 학교 공부만 해야 사람들이 올라갔는데 지금은 진짜 유튜브나 방송에 나오는 사람들 봐. 진짜 별 또라이들이 다 있다. 폭이 진짜 이게. 저도 내로라하는 그런 과였었는데. 요즘 너무 초심을 잃어서 사람이 순해졌다. 저희 도반들이 수계받을 때 속퇴 1호로 꼽았던 게 전데, 같은 계 받은 사람들의 90%가 나갔고, 살아남아 있습니다. 왜? 나는 이게 내 옷에 맞는 일이에요. 내 몸에 맞는 옷을 입고 있는 거예요. 그래서 어떤 사람은 저같이 말하는 걸 놓고 욕하는 사람도 있어요. 저는 색을 강하게 얘기를 하기 때문에. 대부분 덕담하고 “잘될 거야.” 이렇게 말하는 거 전 싫어합니다. 잘될 거야. 억번 해봐라. 잘 되나. 제가 얘기하잖아. 주식 산 사람은 전부 주식이 오르기를 바래. 하지만 떨어져. 하지만 떨어져. 염원으로 되는 게 아니야. 시장의 변동이라는 게 염원보다 센 거예요. 이거 이거 자 봐봐. 여기 있는 사람이 이거 이거 떠올라라. 떠올라라. 모든 사람이 생각해 봐. 떠오르나, 안 떠올라. 안 떠올라. 뭔 소리야, 안 돼. 안 되는 건 안 돼. 그러니까 마음 자세를 바꿔 먹는다고 하는 거는 내 안에서 행복과 관련되는 거지. 그게 물질과 직결되는 게 아니에요. 일체는 마음먹기에 달렸다. 그러길래 내가 뭐라고 얘기했냐면 그러면 네가 저 뭐야 고속도로 가서 한번 서 있어 봐라. 차 안 오나. 바로 바로 교통사고 당하는 거여. 무슨 차 안 온다, 차 안 온다, 누구 갖다 세워봐라. 일체유심조인가, 안 되는 건 안 돼. 기도도 마찬가지로 될 거를 해야지. 갑자기 뭐 1등을 해주세요. 야 기도비 10만 원 내고, 자식이 도대체 뭐 얼마나 성적이 오르길 바래. 한 두 문제 찍은 거 더 맞으면 됐지. 그럼 뭐 한 1억을 내보든가. 자기도 안 믿어놓고는. 그래서 공부라고 하는 게, 공부라고 하는 게 다양한 공부가 있고, 내가 즐길 수 있느냐가 굉장히 중요해요. 그리고 젊었을 때는 돈하고 무관할 수 있어. 하지만 어느 시점이 지나면 돈과 관련된 부분이 안 되면 더 이상 영위할 수 없어요. 그래서 제가 맹자의 그 말은 무지하게 좋아합니다. 그게 뭔 뜻이냐 하면, 유항산(有恒産)이 있어야 유항심(有恒心)이 있다고, 항상된 소출이 있어야 쉽게 말해서 돈이 안 끊어져야 항상된 마음을 유지할 수 있대. 그리고 아무리 사람이 괜찮은 것 같아도 너무 궁핍하면 예의염치가 없어진대. 장발장 생각하시면 돼요. 그 사람이 도덕적으로 문제가 있는 사람이어서 빵을 훔쳤냐, 너무 상태가 안 좋았기 때문에 그 사람이 예의염치를 차릴 정도가 안 됐던 거예요. 그래서 내 소신을 계속 지키기 위해서는 뭐가 필요하느냐. 돈이 필요합니다. 돈이 필요합니다. 그거는 결혼해도 마찬가지여. 결혼해도 내 주머니가 있어야 자식 앞에서도 발언권이 달라져. 막말로 얘기해서. 인생이 다 그런 거예요. 참 좋은 거 가르쳐주지. 절에서 마음을 내려놓으라 할 것 같지. 아니야, 아니야, 아니야. 그 옛날 방식이야. 옛날 방식. 그거 다음 주에 우리 어른 스님 오시면 해줘. 이런 어른 스님들 오시면 박수 치는 거 되게 좋아한다. 그리고 끝날 때쯤 돼서 너무 박수 치면 안 돼. 그럼 길어져. 길어져. 다 룰이 있어. 그렇게 해서 현실적인 부분을 무너뜨리면서 무언가 이상을 추구하는 것도 문제고. 그게 어떻게 보면 부처님 식으로 말하면 중도예요. 현실적인 것도 어느 정도 하고 이상적인 것도 맞춰갈 수 있고. 그리고 그 안에서 내가 잘할 수 있는 걸 찾아야 되고. 내 목적이 흔들림이 없이 갈 수 있는 것들을 찾아내야 돼. 그리고 내가 그것을 젊었을 때 못 찾는다면, 1차적으로는 공부를 하고 있어야 돼요. 왜? 그래야 내가 원하는 선택지가 걸렸을 때 공부를 못해서 선택은 하고 싶은데 선택을 못하는 상황이 안 벌어져. 저는 의사 돼 있는 사람들이나 뭐 이런 사람들을 대단하게는 안 봐. 왜? 그들이 행복하다는 생각을 잘 안 해. 행복하면 니가 나한테 와서 그 얘기를 하고 있겠냐? 내가 너한테 가서 그 얘기를 듣고 있겠지. 그러니까 돈을 벌어도 돈이라고 하는 게 다 마찬가지야. 어느 정도 이상 있으면 그것을 통해서 극단적 행복이 더 이상 누려지지 않아. 인생이라는 게 다 그래요. 그래서 기본적인 것들은 깔고 가야 된다. 놀라운 얘기 마지막 해드리면 제가 고등학교를 중퇴하려고 그랬었어요. 나는 그게 필요가 없다고 생각했어. 고등학교 1학년 때. 왜 나는 도를 닦아야 돼, 도를 닦아야 돼. 그래서 내가 산에 산 밑에 방을 얻어가지고 도를 닦고. 참 진귀하지. 진짜 인생 특이하게 살았다. 그때 우리 큰형이 한 말이 두 가지였었어요. “뭘 할지는 모르겠는데 기본은 하고 그만 니 방식을 찾았으면 좋겠다.” 그리고 그때 왜 그래야 하냐 내가 물어봤을 때, 굉장히 설득력 있는 말을 했어. “내가 쪽팔리다. 내 동생이 고등학교 중퇴라는 게 내가 쪽팔리다.” 나를 생각해서 하는 얘기가 아니고 내가 쪽팔리다. “내가 어디 가서 말을 못하겠다.” 아니 저는 근데 그 말이 제가 설득되는 논리였었어요. 설득되는 논리였었어. 그리고 또 뭐라고 얘기했냐면, 제가 학교를 안 가니까 무슨 얘기를 했냐면, “자거나 뭘 해도 좋은데 가서 잤으면 좋겠다. 가서 잤으면 좋겠다.” 근데 그것도 제가 지금도 그 말을 쓰거든요. 바뀌는 게 없는 것 같지만 가서 자면서 바뀌어요. 그래서 제가 그런 얘기하잖아요. 한국말을 어디서 배웠느냐. 엄마 등 위에 업혀서 자다가 배웠다. 자다가 배웠다. 그래서 절에도 왜 와야 됩니까? 스님들이 염불을 하는데 뭔 얘긴지도 모르겠고, 길기만 하고. 이게 절의 가장 큰 특징이 스님이 염불을 하는데 보이는 건 스님 뒤통수만 보여. 오늘 머리를 깨끗하게 미셨네요. 뭐 이런 것만 보여. 알아듣는 것도 아니고 그다음에 바닥에 앉아 있으면 힘들어. 이게 다야. 그래서 그렇지만 계속 와서 닦이다 보면 스스로가 생겨요. 마치 어린애 등에 업혀서, 업혀서 한국말을 배우듯이 생각 아무 생각 없었어. 그냥 업혀서 다니다가 한국말이 터지는 거예요. 그런 것처럼 절에 왜 다녀야 되느냐. 습이 바뀌어. 습이 그러니까는 어떻게 보면 관점이 조금씩 틀어지기 시작해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런 좋은 도량에서 수륙재에도 같이 이렇게 참석을 하시고. 또 어저께 제가 유튜브를 보니까 이 마당에서 쟁반을 들고 뺑뺑이를 도는. 그런 저는 보면서 무슨 생각했냐면, 나한테 들으라고 하면 내가 잘 못할 것 같은데, 내가 쑥스러우면 나의 몫인가. 뭐 이런 생각을 했는데 보는 사람은 재미있었대요. 그런데도 불구하고 오늘도 이렇게 와주셔서 굉장히 감사합니다. 그 행동들이, 여러분의 그 행동들이 여러분들에게 복으로 돌아가고, 여러분들에게 가피로 집안에 충만하게 될 겁니다. 그리고 가까운데 이런 좋은 도량을, 그다음에 어떻게 보면 조계종에서 등수로만 얘기하면 1등을 줘도 될 정도로 열심히 사시는, 어떻게 보면 보살의 현대적 화신이라고 생각을 하시고, 잘 모셔서 한국불교가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한국불교의 버팀목이 될 수 있도록, 내가 그것을 할 수 있느냐. 여기에 여러분이 동참하고 있다는 것만 가지고도 아마 세월이 지나면 그게 의미가 되고 기록으로 남는 일들이 벌어질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진짜 복 있는 분들이고, 멀리 계시는 분들은 영상으로라도 이렇게 볼 수 있는 게 이것도 복이에요. 그래서 많이 동참을 하셔서, 이 열정과 함께 가면. 공자가 그런 말이 있어. 다른 제자가 공자에 대해서 평가를 했다. “다른 사람이 물어보는데 선생님 저는 대답을 잘 못했습니다”라고 하니까, 공자가 왜 그렇게 얘기하지 않았냐. “배우는 것을 좋아해서 늙는 줄 모르는 사람이라고.” 그 열정 속에 같이 동참해 있으면 여러분은 이미 승리자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모두가 행복한 승리자가 될 수 있는 이러한 바람을 가져보면서 오늘 마치도록 하겠습니다. 들어줘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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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9월 15일 국행수륙재 2재 법문
해주스님 2024-09-15
국행수륙재도량인 진관사에서, 금년도 불기 2568년에 봉행하고 있는 이 수륙재 무차법회에 오신 수륙공해 일체 유주무주 애혼고혼 영가들이시여, 잘 오셨습니다. 여기 오셔서 계시는 것만으로도 아미타 부처님, 불보살님의 가피가 함께 하시고, 가호를 입으신 것입니다. 수륙재의 원만 회향도 불보살님의 가피하에 이루어지는 것이죠. 이 수륙법회 봉행하시는 진관사 회주 스님, 주지 스님 그리고 사부대중들의 공덕이 한량없으심을 축하드리고, 동참하신 재자분들도, 여기 함께 있는 우리 아기, 어린이들도 업장이 다 소멸되고, 육근이 청정해서 장애가 없게 되심을 축하드립니다. 수륙재는 여기서 천도 받는 분들과 천도를 해드리는 이 분들이 사실 둘이 아닙니다. 죽은 분들의 안락이 산 자에 행복이 되고, 조상님이 각자 모두 나, 자기 안에 계십니다. 그래서 수륙재 천도, 조상님의 천도는 바로 각자 자기, 나, 나를 제도하는 것이라 할 수 있겠습니다. 내가 제도 되면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가 행복하시면 내가 제도 되는 것이기 때문이죠. 그래서 여기 아기와 어린이들을 위한 행복 세상도 바로 각자 자기 자신, 내가 이루는 행복 세상이 되겠습니다. 이 이치는, 이 도리는 부처님 가르침에서, 경전에서 많이 말씀을 하고 있는데요. 예를 들면 삼세독립제가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 과거· 현재 ·미래가 모든 시간을 셋으로 나눈 건데요. 그것이 다 하나이다하는 게 독립제예요. 그 시간을 조금 더 세분해서 나누어서 우리 법성게에서 노상 만나듯이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이랬죠. 아홉으로 나누고 열로 나누더라도, 그것이 상즉해서 곧 하나이다. 이거죠. 하나인 그 이치가 되겠어요. 그래서 법성게에서 계속해서 말씀되고 있는 그 말씀들이, 다 하나 안에 일체가 있고, 많은 거 속에 하나가 있고, 하나가 일체고, 많은 것이 하나다 하는 그 도리에 의해서 여기에 일중일체 일즉일체다즉일(一中一切多中一 一卽一切多卽一), 그게 체로는 상즉(相卽)이고 용으로는 상입(相入)의 이치에 의해서 내가 행복한 게 모두가 행복하고 모두의 행복이 바로 나의 행복이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러한 세계가 화엄법계라고 하는 우리들의 세계입니다. 그러면 우리 눈앞에 지금도 벌어지고 있는 생사의 문제, 죽음의 고통 문제는 또 어떻게 해결해야 하는가? 나를 제도하면 모두가 다 제도된다고 하는데, 나를 제도화하는 그 방편은 무엇인가, 궁금할 수 있겠어요. 그죠. 그것은 이제 화엄적으로 말하면 <8만 사천 방편문이 있다> 이렇게 표현을 하는데, 그 모든 것이 상즉상입(相卽相入)의 도리에 의할 거 같으면, 자타불이력(自他不二力)이다 이래요. 내가 깨닫는 거 하고 불보살님이 제도해 주시는 거 하고, 자력과 타력이 둘이 아니다하는 거죠. 그 자타불이력에 의해서 자력으로 깨달으시고, 자타불이력에 의해서 타력 불보살님의 가피로 내가 제도받는 거다, 이렇게 말씀을 드릴 수 있겠습니다. 사생육도 법계 유정들, 그 유정들의 세상은 사실은 모두 업보 소상이니, 유정들이 지은 바로 업의 과보로 고통세계가 벌어져 있는 거죠. 업은 다 아시다시피, 내가 짓는 여러 가지 하는 행동을 업이라고 하죠. 그 업을 우리는 삼업이라고 다 잘 알고 있어요. 그죠. 인제 삼업으로 해도 되고, 신구의 삼업, 달리 말하면 육근으로 짓는다 이거죠. 육근이 안이비설신의.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생각하고 하는 그것의 과보가 우리들의 세상이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네요. 그런데 그것을 실은 업을 짓는 자도 없고, 업의 과보, 고통을 받는 자도 없다, 또 이렇게 말씀을 해요. 내가 나라고 생각하는 나는 오온이라고 하는 반야심경에서 우리 만나는 색수상행식, 그것이 임시로 화합을 해서 내가 됐어요. 그러니까 그 화합이 깨지면, 조건이 없어지면, 연이 없어지면 또 없어져요. 무상한 거다 이거죠. 그렇기 때문에 그 나는 진짜 내가 아니고, 오온아(五蘊我), 연기아(緣起我), 이 아는 진짜 내가 아니다 이거죠. 그것이 무아라는 거예요. 내가 나라고 생각하고 지금까지 살아왔는데, 지금도 마찬가지, 이게 진짜 내가 아니다, 그거를 무아라고 얘기해요. 자성이 없어서 공하다. 그래서 무아이고, 공함을 깨달아 아는 거 그거예요. 다른 말로 달리 말하면 본무생사(本無生死), 본래 생사가 없다. 무생무멸이다. 생함도 없고 멸함도 없다. 생겨난 것도 없고 사라지는 것도 없다. 그것을 깨달으면 일체 모든 죽음의 고통까지도 이미 해결된 거다, 이렇게 말할 수 있다는 거죠. 많이 들어보신 말씀이죠, 여기서 처음이 아니고. 그다음에 달리 말하면 또 내가 나라고 생각하니 내가 진짜 내가 아니다하는 거를 공부하라고 했다면, 그건 내가 없으니까 내 것도 없죠. 그럼 진짜 나는 있는가. 진짜 나는 어떤 모습인가. 찾아야 되겠다. 만약에 지금까지 내가 우리 아이라고 생각하고 길렀는데, 병원에서 바뀌었던 것을 알았어. 그럼 어떡해요. 진짜 아이를 찾아 나서겠죠. 그것을 뭐라고 얘기하냐하니까, 일체중생개유불성(一切衆生皆有佛性) 일체중생실유불성(一切衆生悉有佛性)이라. 그래서 모든 중생들에게 다 불성이 있다. 여기 따라 하시는 분도 계시는데요. 입 모양 보니까. 다 아시는. 다 아는 거하고 깨닫는 거 하고가 다르네요. 이래서 찾아 나서기는 해야 될 텐데, 한평생 안 찾고 지나는 수도 있어요. 그 우리들에게 있는 본래 구족해있는 그 불성을, 부처님 성품이죠, 부처님 성품을 여래성, 아니면 부처님을 여래라고 하니까, 그것을 바로 보고 그 성품을 드러내면 그거를 현성이라고 해요. 그걸 뭐라고 하느냐 하니까 견성성불(見性成佛)이라고 하네요. 그러면 생사해탈하게 되는 거다 이거죠. 부처님 성품인데, 우리 중생들에게 구족해 있는데, 우리 중생들에게 있는 불성은 부처님에게 있는 불성, 원래 부처님 성품이니까, 그거하고 조금 다르다 이거죠. 우리 중생들에게 있는 불성을 여래장(如來藏) 이렇게 얘기해요. 장이라는 말은 감출 장. 이것은 창고처럼 땅처럼 모든 것을 다 함장해 있어서, 갖고 있어서, 출생, 내어 쓰기도 할 수 있는 공덕이 한량 없는 거를 장이라고도 하는데, 여래장이라고 했을 때는 그런 의미보다는, 이 장의 의미가 번뇌망상이에요. 번뇌망상 때문에 그 안에 매여있는 부처님 성품이 활동을 못하고 있는 상태다 이거죠. 그래서 법신은 법신인데, 번뇌망상에 묶여 있어서 여래로 살지 못하는 그 법신이라서, 재전법신(在纏法身)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것을 인제 화엄경에서는, 우리 진관사 도량은 법화경을 많이 독송하고 유통시키고 있는 도량인 줄 아는데요. 그런데 먼저 가신 진관사 큰스님은 또 화엄경 엑기스를 담은 보현행원품을 즐겨 읊으셨다고 우리 회주 스님이 인터뷰하고 있는 것도 제가 봤어요. 그 법화경하고 화엄경은 일승 경전의 대표예요. 그 2개가. 그게 뭐냐 하니까 우리 모두 다 부처님에게로 가는 가르침이다. 이거죠. 그 화엄경에서는 이 불성을 진함경권유(塵含經卷喩)라 그래서 아주 미세한 티클 속에 삼천대천 세계 이를 다 담고 있는 삼천대천세계만한 경전이 들어있는데, 그 아주 미세한 티끌 속에 갇혀 있어 가지고 도움을 못 주고 있다. 그래서 그 티끌을 깨뜨려 가지고 경전을 꺼내가지고 이익을 주게 하리라 하는 말씀이 있어요. 그래서 부처님께서 중생들을 보시고 하신 말씀이, 이어서 뭐라고 하셨다고 했냐 하니까, “이상하고 이상하다 모든 중생들에게도 다 부처님과 같은 똑같은 지혜 마음이 있는데, 보지 못하고 알지 못해서 고통을 받고 있구나.” 이런 말씀을 하죠. 왜 보지 못하고 알지 못 하느냐 하니까, 이제 여래장이라는 말씀에서도 느끼듯이, 망상, 집착 때문에. 망상, 집착 때문에 지혜 마음을 못 쓰고 있다는 거야. 지혜 마음은 뿌리가 있어요. 체가 있는데, 망상 집착은 뿌리가 없어요. 용은 있는데. 그런데 그 망상 부리고 집착하느라고 우리에게 본래 구족해있는 불성, 부처님 지혜 마음을 못 쓴다는 거죠. 그래서 망상 집착만 없으면 부처님 지혜 마음이 드러난다는 거예요. 망상이 뭔지, 집착이 뭔지 감이 오시죠. 감도 안 오면 또 어떻게 해볼 수가 없네, 그죠. 감이 오는데 그것을 망상 집착만 없으면, 망상만 없으면, 집착만 없으면, 그건 망상도 근거가 없는데 부리는 거죠. 그래서 의상 스님은 화엄경 전체 내용 60권 화엄경의 핵심을 읊은 법성게에서는 망상을 끊는다라고 하지 않으시고 식망상(息妄想) 그랬어요. 망상을 쉰다고. 망상을 쉬기만 하면 돼. 망상을 안 부리기만 하면 된다는 거예요. 뭘 하는 게 어렵다고 우리가 알고 있는데, 안 하는 게 어려운 게 번뇌 안 일으키는 거죠. 망상 안 부리는 거. 그래서 식망상이다. 이것을 다르게 얘기를 하면 반증이라고 표현을 해요. 반대한다는 반자. 돌이킨다고 하는 반자. 증식 우리가 알고 보고 느끼고 뭐 이런 거는 다 망증에 의해서, 그거는 인제 없애야 될, 정화해야 될, 지혜로 돌려야 될, 그 식정으로 하기 때문에, 그것을 되돌려 가지고 건 분별에 의해서, 무분별, 분별없는 지혜로 되돌리게 한다. 이것을 인제 법성게에서는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제법부동본래적(諸法不動本來寂)이라고 하는, 그렇게만 되면 부처님의 지혜 마음으로 살 수 있다 이거죠. 그리고 반증을 말씀을 해요. 근데 법성게에서는 계속해서 계속해서. 지금 제가 그 인터넷을 통해서 보기에는 초하루법회 때 큰스님의 법성게 법문이 이어지는 거를 잠깐 봤어요. 그런데 이 법성게는 우리나라에서 굉장히 오래전부터, 668년에 지어졌는데, 그 이후로 지금까지 사찰해서 독송이 되고 있는 그러한 게송이에요. 근데 인제 영정조 시대, 조선시대에 그 나라의 문화문물이 한참 제일 성할 때, 그때부터도, 그때에도 여전히 이 문헌에 남아 있기를 “전국 대소 사찰에서 큰 재든 작은 재든 법성게가 독송되지 않는 곳이 없다”라고 하는 것이 기록에 남아있어요. 지금까지도 우리 수륙재를 하는 이 자리에서도 화엄 신장님의 가피를, 장애 없이 끝나길 바랄 때도 인제 신장단에 주로 읊는 게송이 법성게다. 또 반야심경은 물론 하지만, 영단과 함께 예불을 할 때는 큰 절에서 예불을 할 때는 신장단을 향해서 반야심경하고 법성게를 읊기도 해요. 도량을 돌면서 옹호도량으로 장애가 없기를 바랄 때도 법성게를 하고, 영가분들이 극락까지 잘 가시도록 마지막으로 바래다 드릴 때도 법성게를 하죠. 그 법성게에서는 이러한 삶을, 무망상 무집착의 삶을 무연선교착(無緣善巧捉)이라고 했어요. 무연, 연이 없다. 모든 것은 연따라 일어난다. 나조차도. 운이 인연따라 화합해서 임시로 이루어져 있다고 보잖아요. 그러니까 연생연멸이죠. 연으로 생겨난 거는 또 연으로 없어지기도 해요. 연이 생겨나면 생기고 연이 사라지면 없어지고. 이 연이 뭐냐 하니까 조건이에요. 조건 따라 생긴 것은 조건 따라 없어진다. 사람을 사귈 때도 조건 따라 사귀면 나중에 조건이 없어지면 헤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여기 법성게에서는 무연의 선교로 이랬어요. 선교는 방편이에요. 선교방편. 전부 다 연따라인데 무연을 얘기하냐? 연이 없는 거. 어디에서 제가 법성게 법회를 1번 한 적이 있는데, 지방에서 그때 질문이 법성게 구절 중에서 그분은 무연선교가 제일 이해가 안 된다고. 다 연기 존재지 어떻게 무연이냐. 부처님께서 출현하시는 거는 중생의 연 따라 나타나시지만, 부처님이 중생연 따라 나타나시는 거는 연기라고 안 해요. 부처님의 성품이 그대로 자세하게 드러나는 걸로 보기 때문에 그것을 성기(性起)라고 해요. 불성할 때 그 성품. 그것이 그대로 나타나는 게 여래 출현이라. 근데 우리들은 이제 인연 조건 따라 조건 따져가지고. 그거를 연을 따르는 게 아니라, 무연으로 그렇게 하면 어디에 도달하느냐 하니까, 무연선교착여의 귀가수분득자량(無緣善巧捉如意 歸家隨分得資糧) 이런 말씀 있죠. 다 잘 아셔 가지고, 법성게 말씀드리는데 아주 재미가 있네요. 고개를 많이 끄덕이시고, 또 따라서 말씀도 하시고, 그러니까 예를 들면 나일론 같은 데 물을 뿌리면 다 흘러내리는데 솜에다가 물을 부으면 다 흡수하잖아요. 그래서 저보다 더 잘 아시는데 그것에 의해서 많은 세계를 넓혀 나가시게 하기 위해서 제가 방편으로 그 말씀을 좀 드릴게요. 이 무연은 뭐냐 하니까, 그 인연법이라는 게 연생연멸이라는 게 뭐냐 하니까, 이 세상에 있다고 하는 모든 것, 일체, 일체를 부처님 당시에 만동자(鬘童子)라는 분이 물었어요. 아니 부처님께서 일체개고 그죠. 일체개고(一切皆苦) 제행무상(諸行無常) 일체개고 제법무아(諸法無我) 이래 말씀하시는데요. 제법, 일체제법 그게 뭐냐고 여쭤봤어요. 그랬더니, 부처님께서 오온이거나, 오온, 오온 아니면 뭐 이거든 저거든 다 포함된다 그러죠. 12처, 12처에 지나지 않는다 그랬어요. 12처가 뭐예요? 육근, 육진, 육경이라고도 하죠. 육근이 육진과 만나면 육식은 자동 발생하니까 그것을 12처 18계 이랬어요. 반야심경에서도 그것이 다 공해서 없다고 하는 것부터 시작이 되죠. 그러니까 우리는 무상한 거에 의거해서 사는데, 그것은 공해서 자성이 없어서 의지할 만한 게 못 된다부터 일러주고 계세요. 그러면 육근은 나한테 있어, 그죠. 안이비설신의 인식 기관이에요. 상대하는 대상이 뭐죠? 색성향미촉법, 그게 육진육경이에요. 그러면 만나면 육식이 발생한다. 이거 안이비설신의식. 그래서 그거를 십팔계로 봐가지고 무안계 내지 무의식계까지 다 공해서 없다라고 하셨죠. 그런데 우리한테 눈이 있어요. 그쵸. 귀가 있으니까 지금 들리니까 고개도 끄덕끄덕해요. 몸이 있으니까 반응도 하죠. 이게 연기법이에요. 이게 연기법인데 그럼 어떻게 한다는 거냐. 어떻게 한다는 거냐. 보는데 망상이 없고, 듣는 데 망상 집착이 없이 한다. 그걸 뭐라고 표현하냐니까 육근이 청정하면 된다는 거죠. 그러면 보이는 것에도 집착을 안 하고, 들리는 것에도 집착을 안하고, 망상이 더 깊어진 게 집착이니까. 그걸 뭐라 그러냐 하니까 육진에 자유자재한다. 그것이 육진삼매라 그래요. 그니깐 무연선교는 육근이 청정하고 육진에 자유자재해서 육진삼매에 들고, 이 말씀으로 우리가 무연선교를 이해하기도 해요. 그렇게 하면 어디로 가느냐 하니까 법성가에 도달한다고 그랬어요. 법성가의 제목이, 법성게의 제목이 법성을 노래한 거죠. 그런데 그 전체도 다 법성의 내용이에요. 그 법성의 집, 법성가, 그것이 우리들의 본래 고향이라는 거죠. 본래 우리 자리가 법성신의 자리예요. 나의 몸과 마음이 법성신이다 이거죠. 법성신은 모든 부처님을 표현하는 말이기도 해요. 그래 되면 이 법성신이 어떻게 하냐니까 십불로 출연한다. 열부처님으로. 열이라는 말은 화엄에서 모든 수예요. 그죠. 딱 10개가 아니라 원만수, 무진수죠. 그래서 우리들의 세상이 부처님 세상이 되는 그 말씀을 게송에서 이제 읊고 있네요. 그래서 육군청정 육진삼매. 그렇게 할 때 반야심경에서도 말씀드릴 때는 열반도 없고, 얻는 것도 없고, 지혜도 없고, 다 없다 했는데 그럼 아무것도 없이 그냥 깜깜해지나 그게 아니라 구경열반(究竟涅槃)을 얻는다 했죠. 그죠. 그거 구경열반의 우리들의 본래 자리에 앉게 된다. 이제는 우리 중생들의 마음은 물든 마음 이러죠. 불성을 그대로 쓰기만 하면 되는데, 뿌리 있는 불성을 안 쓰고, 뿌리 근거도 없는 망상 번뇌를 일으킨다 이거야. 그러기 때문에 우리는 뭘 보아도 흔들리고 보이는 것에도 매달리고. 사실은 보이는 모든 것은 내 마음이 만든 건데 내 마음이 만든 그 육진에 또 끄들려가요. 그런데 인제 수행자는 그래서 거기에 망상 집착을 부리지 않는다. 안 끄들려 간다 이 말씀이에요. 본래 자리에서 본래 몸의 세계를 잘 드러낸다 이거죠. 아주 쉬운 것 같은데, 다 알고 계시잖아요. 아니 그런데 그 아주 쉬운 게 실천이 안 될 때 엄청 답답해요. 그죠. 다 쉽고 다 알아요. 아마 수도 없이 들으셨던 말씀이실 수도 있어요. 핵심이니까. 근데 잘 안 돼. 안 깨달았죠. 그럼 어떡하냐 이거예요. 내가, 내가 생각할 때 그래 되면 좋은데, 노력은 안 해봤지만, 노력을 한다 해도 금생에 그래 될 수 있을까? 우리 이제 아기들이 계시는데 조금만 더 참아보세요. 어린이들이 계시는데, 앉아계시는 것만 해도 대단해요. 이게 그리 멀지 않는 때에 아마 이 공덕이, 이 이익이 한량없음을 느낄 때가 올 거예요. 그런데 이제 우리는 그래도 남은 세월이 있어, 그죠. 남은 세월이. 특히 연세 많으신 분은 인제 집안 할 일은 거의 다 하셨죠. 그럼 뭐 해야 돼요. 다음 생 준비에 올인 할 때가 될 수도 있어요. 종교심이 더 늘어나게 될 때일 수 있죠. 그래서 기회가 있는데, 먼저 가신 분들은 어떻게, 먼저 가신 분들은. 물론 49재, 천도재를 잘 해드려가지고 극락에 가셨으면 좋은데, 혹시 육도에 헤매고 계시면 어쩌냐. 그분들을 위해서 이렇게 천도재를ㅡ 수륙재까지 아주 잘 해드리고 있는 대표적인 사찰이 우리 진관사에요, 그죠. 근데 우리 진관사에 오시는 분들은 조상님들 걱정하실 게 없네요. 그죠. 자 그러면 혹시 조상님이 극락에 계셔가지고, 여 못 오시면 우야노. 오히려 역차별로. 그거는 염불문에 보면 다 <불보살님의 가피로 잠깐 왔다 가세요> 하는 부분도 있어요. 자 그러니까 극락에 계셔도, 극락에 계시는 거는요, 사바세계에 다시 오는 건 일도 아니에요. 잠깐 왔다 가시는 거. 우리가 극락 가는 건 좀 어렵지만. 극락에서는 자유자재해요. 그래서 부처님 허락하에 오시면 되거든. 근데 여기 다 만나고 가시면 돼요. 그래서 수륙재를 해드리고, 천도재를 해드리고, 그렇게 하면 아미타 부처님의 가피, 불보살님의 가피로 정토에 왕생하고, 특히 서방 극락 세계에 가셔서 극락을 누리시면 되죠. 글자 그대로 즐거움뿐이에요. 즐거움을, 우리 사바세계에서 즐거운 거는요, 즐겁다가도, 괴롭다가도, 또 나는 즐거운 것 같았는데 옆에 친구가 더 즐거워, 그러면 안 즐거운 것 같다 가도. 그런데 나는 별로 즐거운 건 모르겠는데 옆에 친구가 아이 괴롭게 사네. 아이 그럼 내가 만족해야지, 이런 즐거움이 아니다는 거예요. 순 즐거움 뿐이라서 극락이에요. 그게 열반락입니다. 열반. 열반사덕이 그러니까 뭐죠? 우리가 중생들이 다 모든 것이 무상하다 했는데 극락세계는 항상 하고, 모든 것이 괴롭다 했는데 극락세계는 모든 게 즐거움일 뿐이고, 열반 세계는 무아라 그랬는데 참나, 아까 말씀드렸고, 염오(染汚)세계라고 그랬는데 청정(淸淨)세계다. 이래서 열반사덕을 상락아정이라고 그러죠. 그 상락이에요. 항상 즐거운 거, 그것이 열반락이다, 이거죠. 그러한 즐거움의 세계에 가시게 하도록 지금도 이렇게 해드리고 있네요. 저는 박수는 강요를 안 하는데, 우리 회주 스님과 주지스님의 노고에 다시 한번 박수를 해드릴까요. 그 극락세계의 부처님, 아미타 부처님의 아미타는 무량수, 무량광이라는 의미라고 보죠. 다 아세요. 무량수불, 무량광불. 그래서 아미타 부처님 모신 전각을 무량수전이라고도 하잖아요. 그죠. 수명이 한량 없으시대요. 그래서 무량 수불이에요. 극락세계는 수명이 한량 없으시니까 죽음이 없죠. 죽음의 고통 물론 없어요. 무량광 부처님이세요. 광명이 한량없으시다. 지혜광명, 자비광명, 원력광명 그 광명 중에, 지혜광명만 하더라도, 지혜가 모든 번뇌망상 어두움 다 사라지게 하는 공덕이 있죠. 그래서 극락 가기만 하면, 가기 전에 못 깨달았더라도 아미타 부처님의 원력으로 돈오 무생법인(無生法忍)을 하게 돼요. 무생법인이요. 생사 고통은 전혀 없는 남이 없는 법인을 얻게 된다 이거죠. 자 그래서 영가축원에도 다 극락하셔가지고, 돈오무생법인 하시고, 또 광도인천, 모든 중생들을 제도 해주세요 하는 축원까지 인제 해드리고 있습니다. 그런데 다 극락 가시도록 천도를 다 해 드려 놓고도 천도재를 다 하잖아. 그죠. 해놓고도 마지막으로, 떠나보내면서 영가분들을 봉송하면서 마지막으로, 붙들고 이 법문은 꼭 듣고 가세요 하는 법문이 있어요. 뭐겠어요? 도량을 돌면서, 법당을 돌면서 하는 게송, 법성게예요. 그죠. 법성게는 꼭 듣고 가세요. 이거죠. 왜 지금까지 인제 천도하는 그 도중에서도 이 법회가 항상 있잖아. 그죠. 법사 스님 모셔가지고, 염불만 해도 되는데 법사 스님의 법문을 또 들어요. 그랬는데 그 법문 다 들었겠지만, 또 한번 다시 한번 가시기 전에 법문 듣고 가세요. 가시기 전에 법문 듣고 깨달아 보세요. 이거예요. 가면 또 깨닫긴 하지만. 자 그럴 때 천도는 다 해드렸으니까 옛날 큰스님들 말씀에 극락왕생 하는데 왕생의 길은 영가분들이 걸어 가셔야 돼. 인제 또 걸어가시거나 부처님의 광명 속에 들어가서 함께 가거나. 마지막에 한번 더 왕생의 길을 깨달음의 길로 한번 해보세요. 그러면 가셔도 되고 안 가셔도 돼요. 청산첩첩 미타굴(靑山疊疊 彌陀窟) 창해망망적멸궁(滄海茫茫寂滅宮) 이러잖아요. 시방 세계가 다 불국토인데 굳이 안 가셔도 상관없다. 그 옛말에 그 논밭이 한 마을 전체가 큰 부자 집의 논밭인 경우에, 이제 곡식이 지금 가을이니까, 무르익어가는데 허수아비 세우잖아요. 참새들 무서워서 날아가라고, 그래갖고 쫓아요. 그런데 이제 그 집은 하인들에게 허수아비 세울 것도 없고, 참새 쫓을 것도 없어. 쫓아봐야 날라간 땅이 내 땅이야. 그러니까 가도 또 우리 곡식 먹을 거니까. 근데 왕생의 길이 깨달음의 길이니까. 한번 걸어보실래요. 이거예요. 그럴 때 이 법성게가 역시 육근청정 육진삼매가 왕생의 길이고, 깨달음의 길이다 하는 게 나오고 있어요. 그거는 뭐와 같으냐 하니까, 우리 애기들이 어린이들이 엄청 잘 크셨는데, 부처님 도량에 이때부터 이렇게 오시니 공덕이 한량 없으신데, 지금 잘 안 들어올 거예요. 네. 그런데 부모님은 느끼시겠지만, 걸음마부터 배우잖아. 그죠. 걸음마. 걸음마 떼고 걸음 걸을 때 일을 혹시 기억해요? 우리 어린이들 기억 못 한다. 그죠. 여기 부모님 공덕이 얼마나 큰지. 걸음마 떼고 갈 때, 걸음을 처음에 배울 때, 지금은 혼자 잘 걸어와요. 걸을 때 자기가 걷는데, 자기가 일어서고, 옆에서 잘 일어서고, 잘 걸어간다고 막 그냥 축하 박수가 그냥 나와요. 그죠. 그때는 걷기만 해도 칭찬해요. 근데 지금은 훨씬 잘 달려도 칭찬 안 하는데. 근데 그때 엄마나 부모가 옆에 지켜보고 있어요. 여차하면 넘어지면 바로 일으키고, 여차하면 보듬어주고, 막 영 못 걸으면 인제 그냥 안아주고. 그러한 아미타 부처님의 가피 속에서 한번 가보는 거 이거죠. 요즘 들리는 말에 세태를 반영하는 말이야, 이런 우스갯소리가. 토마토 가족이 있는데, 엄마 토마토, 아빠 토마토, 애기 토마토 셋이 길을 가는데 이제 애기 토마토가 다리 아프다고 징징거렸어. 혹시 걸어갈 때 다리 아프면 어떻게 해요? 엄마가 업어줘요, 태워줘요, 혼자서 걸어가라 그래. 그래 잘 걸어가는데 뭐 가야지 인제 이럴 수 있는데, 그리 해도 되는데, 아빠 토마토가 와서 애기 토마토를 발로 확 밟아버렸어. 징징댄다고. 땅에 퍼져버렸어요. 한참 가는데 엄마 토마토가 왜 안 따라와? 돌아보니까 땅에 퍼져 있거든. 자 그러면 이제 어떡하겠어요. 가서 데려 오면 되는데, 안고 오면 되는데, 엄마 토마토 하는 말이 “야 케첩 빨리 와.” 이랬다는거야. 나는 너무 독립심을 너무 참 많이 길러준다. 해도. 그러니까 이제 한번 해보고 안 되면 내가 또 안고 가고, 보듬고 가고. 그래 안되면 빨리 몸을 아미타 부처님에게로 돌려가지고 부처님의 광명속으로 들어가라 이거죠. 그러면 무량광불의 광명위덕으로 극락은 저절로 따라가게 된다. 인제 이 말씀인데요. 우리들의 이 몸, 무아의 이 몸은 업보신이죠. 업보신으로는 생사바다 호해바다를 혼자 못 건너가요. 그거는 어디다 비유하냐면 돌멩이. 돌멩이를 물에 띄워보려고 해도 돌멩이는 아무리 작아도 안 떠요. 빠져요. 근데 이 돌멩이를 배에다 실으면 잘 가겠죠. 그러니까 작은 돌멩이가 아니라 큰 바윗덩어리도 배에 실으면 잘 가요. 그래서 우리가 아미타 부처님의 반야 용선을 타고 가면 피안인데, 피안으로 아주 수월하게 잘 가게 되죠. 그것이 가피를 입은 거고, 그것이 부처님께서 감응해 주신 거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어요. 지금 제가 말씀드리는 중에 자기가 하든 부처님 가피를 입든 많이 말씀된 단어 중에, 말 중에, 육근청정이라는 말이 많이 나오죠. 그래서 육근청정에 대해서 조금 더 말씀드릴게요. 화엄경에 보면은 부처님을 견문 친견한 상근 공덕이 한량없다 하는 말씀이 나와요.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 명호를 듣고 부처님을 가까이하고, 어릴 때부터도 법당에서 부처님을 가까이하고 한 공덕이 한량없다는 말씀이 있는데, 그것을 3가지 비유로 말씀한 가운데, 설산에 있는 약왕수(藥王樹) 비유를 했어요. 약왕나무. 그 나무는 가까이 하면 모든 병을 다 없애주고 안락하게 해준다, 이거거든요. 근데 우리는 부처님을 약왕이라고도 불렀어요. 의왕이라고도 하고. 의사 중에 의사다 해서 대의왕 이러죠. 중생들의 근기에 따라 법문 설해 주시는 거를 응병여약(應病與藥)이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게 대기설법이다. 이거거든요. 대기설법. 그런데 화엄경은 대기설법이 아니라, 어렵다 그래요. 지금 드리는 말씀이 많이 들었지만, 확실하게 실천이 안 되면 어려우세요. 왜냐하니까 화엄경 자체가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 자리에서, 깨달으신 직후에 그 깨달으신 내용을 그대로 쏟아내신 말씀이다, 이렇게 전해지고 있어요. 그래서 잘 못 알아들으니까 뭐예요? 이제 낮춰가지고 아함경부터 시작해서 그렇게 다시 말씀하셨다 이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법화경은 알아듣는 수준에서 최고의 법문이다. 이래서 법화경을 많이 우리가 독송을 하는데, 그 법화경조차도 화엄경은 최고의 말씀인 거는 마찬가지로 칭송하고 있어요. 중생이 좀 알아듣기 어렵지만. 근데 화엄종에서는 우리 알아들을 수 있다고, 알아들으려고 노력을 해보겠다고 해서 화엄경을 그렇게 독송하는데, 우리나라에서는 전례된 이후로 지금까지 독송되고 있어요. 자, 그래서 쉬운 거는 아니기는 하지만 화엄경에 육근청정 말씀이 나와요. 그러니까 얼마나 부처님을 뵙고, 부처님 명호를 듣고 하는 공덕이 큰지를, 눈으로 부처님을 보면 눈이 청정해지고, 귀로 부처님 명호를 들으면, 아미타불, 석가모니불, 비로자나불, 다 어떤 명호을 들으면 귀가 청정해지고, 눈과 귀가 청정해지면 불국토에 왕생하고, 이 말씀이에요. 우리 선지식들, 보살들의 발원문에도 보면 어떤 말씀이 들어있는 거를 볼 수 있냐 하면은, <내 모습을 보는 이나 내 이름을 듣는 이는 해탈성불하여지이다> 하는 발원을 하죠. 그런데 심지어 하물며 부처님의 모습을 뵙고 부처님의 명호를 들으면 그 공덕은 헤아릴 수 없겠죠. 자 그렇게 해서 마지막으로, 부처님을 항상 생각하면, 부처님 생각하는 게 염불이에요. 그죠. 또 우리는 염불, 염법, 염승, 불법승 삼보 생각하는 거를 다 염불이라고 해요. 반야심경을 읊어도 염불이라 그러고, 관세음보살을 불러도 염불이라 그래요. 어쨌든 부처님 생각하면 염불인데, 항상 부처님을 생각하면 그 뜻이 맑아져서, 뜻이 맑아져서 염불삼매에 들어간다. 염불삼매에 들어오면 당연히 가피를 입겠죠. 그래서 극락왕생하고 성불하는 그 말씀드리고 있어요. 그런데 이 육근으로 육진을 상대하는 데는 눈이 보고 귀가 듣지만 마음이 함께 해요. 그죠. 그것을 전오근 안이비설신 이것은 제육 의근(意根)이 함께해야 인식을 할 수 있다. 이래서 눈으로 보아도 마음이 함께 하지 않으면 보이지 않고, 귀로 들어도 마음이 함께하지 않으면 들리지 않고, 이 얘기 많이 해요. 그죠. 그런데 인제 옛날에는 시간을 알리는 종소리가 있을 때, 자기가 5번밖에 못 들었는데, 12번을 쳤다는 거죠. 왜냐 앞에는 들을 생각이 없어, 안 들렸던 거죠. 어쨌든 제6 의근은 앞에 전오근하고 함께 오진을 상대하기도 하지만 자기 혼자 인식하기도 해요. 그래서 독두의식(獨頭意識)이라 꿈속에조차도 활동하죠. 그래서 몽중의식이라 하는데 마음이 함께해야 되는데, 이 마음이 물든 마음이면 어떻겠어요. 육근이 악업을 치겠죠. 그래서 이 육근청정은 굉장히 중요해요. 그러면 뭐하고 함께 해야 되겠어요? 청정한 마음이 뭐라 그랬어요? 불성. 우리들에게 있는 부처님 마음, 부처님 성품이 함께하면 육근이 청정해지고, 마음이 청정하면 국토도 청정해지고, 그냥 그렇게 된다. 이거죠. 그래서 우리 마음 따라, 이 말씀을, 우리들의 불성 따라, 부처님 마음 따라 보고 듣고 하면 당연히 행복한 세상이 되겠습니다. 오늘이 2재인데요. 2재, 2재의 주제 다 아시죠. 아기와 어린이를 위한 행복 세상이더라고요. 그래서 우리 아기와 어린이를 위한 행복세상. 그래서 우리 어린이들이 앉아있는데, 무슨 소리를 하는지, 법사 스님이 우리한테 안 맞춰 준다 하는 생각이 들 거예요. 그래서 제가 주지스님이 법사로 청할 땐 인제 허락을 해 놓고, 주제는 나중에 들려 주셨어요. 만약에 주제를 먼저 말씀해 주셨으면 제가 사양을 했을 거예요. 그래서 나중에 인제 주제를 말씀하시는데 제가 잠깐 주춤했죠. 왜냐하면, 저는 아기들하고 어린이들하고 함께 많이 있어 본 적이 없어요. 주로 대학에서 강의를 했잖아요. 그러니까 대학생이나 뭐 또 쫌 어른 대학원생 어른이나 막 이러면은 제가 막 그래도, 뭐 제가 부족하지만 해보겠습니다할 텐데, 아기와 어린이를 위한 행복 세상, 그래서 제가 머뭇거리는 걸 눈치를 채셨는지 우리 주지스님이, 그래서 주지를 하시는 것 같아요, 뭐라 그러냐면 아기는, 우리 어린이들은 오래 견디기가 어려우니까 잠깐 왔다 가고, 부모가 다 계신다 이거야. 그 바람에 제가 왔어요. 역시 그래서 이 수륙재가 아주 잘 되는 가보다 찬탄을 해드릴 만한데. 제가 인제 대학에서 어린이들 생각할 때는 언제냐 하면 국민학교 6학년은 6학년은 중학교 3학년, 고등학교 3학년만 있으면 대학에 가요. 6년만 지나면 나한테서 강의를 듣게 되네, 그러니까 국민학생이 뭐하고 놀며, 무슨 생각을 하고 ,얼마나 행복한지를 관심을 안 둘 수는 없어요. 그래서 그때는 제가 관심을 좀 두기는 하죠. 그런데 제가 아기들한테는 많이 배워요. 학교에서 공적인 일로 우리 강사 스님한테 전화로 물어볼 일이 있어서 했더니, 제 생각에 애기가 받아요. 아기가. 그래서 제가 뭐라 그랬냐면은 “애기가 전화를 받네. 아빠는 안 계세요?” 그랬더니, “난 아기가 아니에요. 애기는 우리 엄마 배 속에 있어요.” 이러더라고요. 그다음에 얼마 전에는 또 제가 사는데 그 가까운 삼거리에서 제가 생각이 애기야, 아기가. 엄마겠죠, 어른 따라 지나가는데 하도 반가워서, 요새 어린이 보기 어렵잖아. 길에서. 그래서 너무 부드러운 소리로 내 딴에는 “애기네” 이랬어요. 그러더니, 그 아기가 길 가다가 서서 저를 똑바로 쳐다보고 뭐라 했는지 아세요. “애기라고” 이러는 거예요. 애기라고 이건 자기 애기 아니다 이거죠. 그래서 머리 1대 띵 얻어맞은 것 같았어요, 물론 엄마나 부모나 주위에서 “넌 인제 애기가 아니야. 다 컸어요.” 그래 했겠죠. 그래서 제가 새삼 절에 와가지고 국어사전을 검색을 해봤어요. 애기를 몇 살까지 애기라고 하는지 그랬더니, 3~4살 때부터 국민학생까지가 어린이고, 어린아이 그죠. 여긴 다 어린이들이야 그쵸. 여기 계신 분, 아 그 형은 아니에요. 중학교 들어가서. 뭐 어린이는 아니에요. 이제 중3이에요. 아이고. 그러니까 초4도 지나고, 중1도 지나고, 부모님들이 아주 긴장한 시기 다 지나고, 중3이시네요. 중3, 중3이라고 그러니깐 중3이라고 하니까, 누가 농담을 하기를 스님이 목욕탕에 가셨는데, 거기서 학생으로 보인 학생이 너무 장난치고 놀아서 “좀 조용히 해라 나는 중이야”, 이러니까 걔가 “나는 중3이요.” 그래 가지고 애기는 그 이전이라 3살 때까지더라고. 그래서 또 배웠네요. 또 얼마 전에는 인제 초등학생이 보이스카웃인가 그래서 방학 때 수련하는 프로그램에 다녀왔다고 엄마 되시는 보살님이 그 학생 데려 와 가지고 자랑을 하셔서 나는 칭찬해 줄려고 말을 걸었어요. 그래 “거기 해보니까 뭐가 제일 좋더노?” 이래 물었어요. 근데 그 학생이 반문을 해요. 뭐라고 하냐 하니까 “제일 유익한 것 말씀입니까? 제일 재밌는 거 말씀입니까?” 이래요. 명색이 제가 대학에서 강의하고 있는 교수였는데, 초등학교 저학년 한 3학년인가쯤 됐는데, 그래 물어요. 그래서 제가 또 체면이 있잖아. 그래서 제일 유익한 것부터 물었더니, 텐트장 주변에 옥광산이 있었는데, 거기 견학을 한 게 좀 유익했대요. 그러면 제일 재미있는 거는 개울에 물이 많아 가지고 수영하고 장난친 게 너무 재밌었다네요. 그니까 유익하든지 재밌든지 해야 되죠. 둘 다면 금상첨화고, 근데 설사 둘 다 아니면 좀 곤란한데 그때는 유익한 줄 몰랐는데 살아가면서 삶에 도움되는 좋은 말씀도 있기는 해요. 그죠. 어쨌든 불교에서는 어린아이를 경에서 동자라고 많이 불러요. 동자동녀 어린 남자아이는 동자고 어린 여자아이는 동녀인데 이 동자를 수행자에게 이름 호칭을 좀 많이 불러드려요. 수행자, 대표적인 구법자의 동자라고 이름을 붙인, 우리가 알고 있는 수행자는 설산동자라든지, 선재동자, 남쪽으로 선지식을 찾아서 순례를 했다고 남순동자라고 불리는 그 동자가 왜 불러드리냐 하니까, 이런 어린아이다 라는 의미보다 어린아이가 가지고 있는 좋은 점, 그 상징성을 이름에다 붙여드린 거예요. 저 우리 생각하기에 우리 어린애들에게 제일 좋은 점, 어른들에게는 좀 찾아보기가 어려운데 좋은 점에 뭘 들 수 있겠어요? 순수성. 물듦이 없는 순수성, 그게 인제 구법자의 자질로 본 거죠. 동진(童眞) 이런 말을 많이 해요. 동진 어린아이는 세상에 물들지 않아서 세상을 구하려고 삼업이 청정하고 육근이 청정한 자, 이래서 동자라고 불러요. 그런데 인제 어린아이는, 어린아이란 말은 아직 어리니까, 불법을 만나도 만난 지 얼마 안 돼가지고 초심이 그대로 남아있는 존재, 그러니까 그 초심으로 끝까지 정진하는 좋은 점을 구도자에게 붙여줬어요. 그래서 선재동자 이렇게 하죠. 여기 계시는 분들은 사실 그런 의미로 동자로 붙여 드릴 분이 얼마나 많은지. 야 박수하네요. 많은 모양이라. 그런데 이런 구도자 말고도 대보살 마하살에게도 동자로 붙였어요. 누구요? 문수동자, 보현동자. 그래서 오대산에 있는 문수동자는 총각 머리를 하고 있는 상이에요. 그죠. 왜 그러면 대보살 마하살한테는 수행하는 도중에 있는 분도 아닌데 이랬을까? 그것은요, 어린아이엔 인제 또 다른 측면이 있어요. 뭐냐 하니까 아직 어리석어. 그러니까 어린 나이의 어린이라는 말은 어리석다는 의미라고 그래요. 그래서 어리석은 자를 몽매한 아이들 같다 그래서 동몽이라고도 해요. 동몽. 그러니까 동몽을 교화하시려면 동사습을 해야지 되니까, 동사습 하시는 모습 그것을 동자라 했어요. 어른들도 어리석구나. 어린아이들에게 보이는 유치성, 그걸 아직도 벗어나지 못하면 어린애예요. 그죠. 그러니까 동몽 같은, 어린애 같은 중생들을 교화하시기 위해서 눈높이, 동사습 하시는 모습을 동자라고 이름 붙였네요. 그래서 화엄경에도 입법계품 보면 근본법회에서는 문수사리보살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근데 거긴 다 깨달은 분뿐이라서 인간계로 내려오세요. 교화하시려고. 그때부터 문수사리보살을 문수동자라고 부르고 있어요. 경전에서도. 그래서 이러한 여러 의미를 우리 애들이 있는데, 그렇다면은 뭐예요? 지금까지 우리 주변에서 보이는 분 중에 가장 수행자답고 가장 배울 게 많은 이들이 누구겠어요? 우리 어린이들이다. 이거죠. 그거 인정하시죠. 아주 순수하고 세상일에 물 안 들고 세상일에 물 안 드니까 반대로 세상물정 잘 몰라가지고 한 두 애들 빼고 잘 가르치고 보살피고 해야 될 분이다 이거죠. 그래서 우리 어린아이들이 아직은 눈도 깨끗하고 귀도 깨끗하고 어른들이 됐어. 다 생각도 맑고 그것이 계속 이어지도록 적어도 적어도 천진한 아기들의 웃음, 아기들 웃음 아주 매력적이에요. 근데 점점 커가면서 이제 없어지는. 굉장히 자주 웃는데 어른들이 애기처럼 하루에 많이 웃으려면 아마 얼굴 근육 아프다 할 거야. 그리고 아주 천진한 어린이들의 초심으로 나아가는 순수한 열정, 그것이 오염되지 않도록 어른들이 해줘야 되겠죠. 그럴려면 어때요. 어른들이 견문이 청정해야 되겠어요. 왜냐하면, 어른들이 보고 듣는 거를 아이들이 보고 들어요. 어른들이 보고 들은 대로 아이들이 보고 들으면서 자라가게 되네요. 그러니까 견문의 모범을 보여야 되겠다. 어른들도 육근이 청정하도록 항상 자기 불성을 살펴야 되겠단 이 말씀을 드릴 수 있겠네요. 그래 되면, 마음이 청정하니까 삼업이 청정하고, 육근이 청정하고, 국토가 청정하고, 그리되면 우리 오늘의 주제처럼 아기와 어린이를 위한 행복 세상은 절로 오게 되겠습니다. 어른들도 따라서 하시다 보면 가르치면서 배워요. 하시다보면 어른들의 세상도 행복한 세상이 되겠습니다. 마지막으로, 한 600년 동안 내려온 그 나옹 스님의 게송 하나를 소개해 드리고 마치겠습니다. 우리 스님들은 다 아시는 게송이에요. 왜냐하면, 가끔 종종 기도 마무리할 때 이 게송을 많이 하죠. 제가 잘 못하지만 한번 읊어 볼게요.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착득심두절망막(着得心頭切莫忘)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 하리라. 아미타불재하방가. 아미타불 부처님이 어디에 계시는가. 착득심두절망막하라. 심두, 두는 어조사고. 마음에 붙여서, 마음에 새겨서 간절히 잊지말라. 염도염궁무념처하면, 생각이 다해서 생각이 없는 곳에 생각이 이르르면, 육문상방자금광하리라. 육문에서 안이비설신의 육근에서 항상 아미타부처님의 자애로운 사색 금빛 광명을 놓으리라. 하면 무슨 말씀이냐 하니까 아미타 부처님은 어디 계시는가 하고 항상 아미타부처님을 생각하면 ,염불삼매를 증득해서 내가 도로 아미타불이 된다, 이 말씀이네요. 그래서 우리가 흔히 10년 공부 도로아미타불 이라 말씀하는데, 잘못 쓰고 있는 경우 많아요. 10년 동안 공부했는데 허사더라 할 적에 도로아미타불 이렇게 농담으로 하는데 그게 아니에요. 공든 탑은 안 무너지죠. 10년 동안 공부를 했더니, 아미타 부처님을 불렀더니, 내가 도로 아미타불이 되었더라 이 말씀이죠. 자 그래서 아미타불 염불 공덕으로 다 함께 극락 누리고 성불을 합시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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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9월 8일 국행수륙재 초재 법문
용학스님 2024-09-08
반갑습니다. 진관사 수륙재 개건 626주년, 지난 9월 1일날 이제 입재하시고, 오늘은 초재, 큰 주제가 <우리 모두를 위해> 이렇게 타이틀이 되어 있죠. 오늘 법문 초재 주제는 뭡니까? <우리 모두 힘내자.> <우리 모두 힘내자.>입니다. 이렇게 수륙재라고 하는, 부처님으로부터 이어져 내려오는 중생을 건지는 큰 보배 그물을 널리 펼쳐서, 수륙공계에 또 빈부귀천, 남녀노소를 불구하고, 전부 모든 일체중생 모두 다, 부처님의 깨달음을 이뤄서 행복한 인생이 되기를 바란다, 이런 뜻으로 수륙재를 행하면서, 지난 입재때는 혜국큰스님 모시고, <나라의 별이 되신 분들을 위한 갑진년> 법문을 이제 해오셨고, 오늘은 <우리 모두 힘내자>. 제가 지금 부산에서 새벽같이 달려왔더니, 힘이 쭉 빠져 있어요. 힘을 내는 방법이라고 하는 것은, 뭐 여러분들도 다 아시다시피, 박수 치고, 웃고, 이렇게 힘이 척척 나잖아요. 그죠. 질질 짜고 이러면 있던 힘도 쭉 빠져버리잖아요. 어쨌든지 화엄경 보현행원품에 보면 이런 말씀이 있습니다. <전소선언(前笑先言)>. 같이 해보실까요? <전소, 먼저 웃어준다. 선언, 말을 먼저 건넨다.> 마음에 안 들면 우리가 전화번호도 차단하고 그러잖아요. 그런 게 아니라, 내가 조금 마음에 부대끼고, 또 어설프고, 좀 밉상스럽다 하더라도, 항상 전소선언이라. 이것이 모든 업장이 소멸되면서, 즐기면서, 홀가분하고, 편안하고, 천연스럽고, 그렇게 인생을 힘내는 길이 아닌가 이런 생각이 듭니다. 짜증나면 있던 힘도 쭉쭉 빠지게 되어 있어요. 그래서 <우리 모두 힘내자>, 이것은 불교의 칠불통계처럼, 언제나 그게 우리 불교의 주제죠. 그래서 오늘도, 염불할 때 매번 반복이 됩니다. <원컨대 공법계제중생>, <원공법계제중생(願共法界諸衆生).> 누구든지 다 아는 구절이죠. 원컨대 공법계, 이 말법 시대에 동생상계, 함께 인류로 태어나 가지고 처지가 어떻게 됐든지, 이 말법시대에 우리 함께 같이 태어난 이 사람들끼리, 뭐 축생들까지 다 합쳐 가지고, 식물 동물 할 것까지 없이, 나하고 사상에 맞든지 안 맞든지 상관없이, 이 원공법계제중생이라, 모든 중생들이 동입(同入), 이 수륙대재하는 의의가 어디 있습니까? 동입, 우리 모두 다 함께 들어가자. 어디로 동입미타대원해(同入彌陀大願海), 아미타불의 원력의 바닷속으로 다 함께 들어가야 된다. 압록강은 서쪽으로 흐르고, 두만강은 동쪽으로 흐르고, 낙동강은 남쪽으로 흐른다 하더라도, 바다로 들어가면 압록강, 두만강, 낙동강은 다 자기 이름을 버리고, 강의 이름을 버리고, 다 뭐가 되죠? 태평양이 된다. 바다가 된다. 그래서 이제 부처님 같은 마음을, 똥물 같은 사람도 있을 것이고, 맑은 물도 있을 것이고, 모두 모두 흘러서 우리는 부처님의 바다로 들어간다. 바다를 왜 바다라고 하죠? 다 받아들인다고. 바다는 한 사람도 거부하지 않고 모두 다 받아들인다고 바다다. 비가 억수같이 쏟아져도 다 받아들인다고 바다다. 부처님의 넉넉한 품이 되잖아. 오죽했으면 부처님은 당신을 독살하고, 악독하게 출가하기 전부터, 출가한 뒤로 계속 스토킹하면서 따라다니던 데바닷다, 부처님한테 하도 많이 데받아(되받아) 가지고 이름이 데바닷다, 그 데바닷다가, 법화경에 데바닷다품을 보면 그렇죠. “내가 전생에 그 왕으로 있을 때 불법을 공부하고 싶었는데, 그때 아시타 선인이 계셨다. 그분이 법문를 하실 때 내가 엎드려서 걸상이 되고 법상이 됐다. 신위상좌변삼천(身爲床座福三千). 그때 나에게 법의 공부를 일러 주시던 분이 참 아이러니하게도 저 못된 데바닷다다. 데바닷다가 있어서 내가 성불할 수 있었다. 데바닷다 너무 미워하지 마라.” 데바닷다가 성불해야 부처님의 원력이 완성되죠. 자타일시성불도(自他一時成佛道). 또 데바닷다도 딱 빠져버리면 퍼즐이 하나 이제 빠지는 거예요, 한 조각이. 그래 뭐 이것은 불교를 떠나가지고, 기독교로 보더라도 유다가 빠져버리면, 예수로서 포용을 못 하면은 예수가 될 수 없잖아요. 그래서 어쨌든지 뭐 데바닷다는 부처님한테 그렇게 되받아가지고 달려들다가 지옥 가서는 이름을 바꿨어요. 개명을 했어. 죄받았다(제바달다). 자 어쨌든지 이게 아미타불의 원력의 바다에 동시에 가기 위해서, 우리가 모두 다 함께 힘내서 가기 위해 가지고, 오늘 초재 법문도 이렇게 청해서 같이 듣고 있습니다마는, <진미래제도중생(盡未來際度衆生)>이라, 미래제가 다 할 때까지 허공이 녹아 없어지고. 이렇게 능엄경 같은데 보면 이런 구절 있죠. <순야다성(舜若多性)이 가소무(可消無)언정 삭가라심(爍迦囉心)은 무동전(無動轉)이라>. 저 허공이, 없는 허공이 녹을지언정, 철석같은 바다같은 삭가라심,-우리가 왜 방생 가면 사가라 용왕, 사가라 용왕 하잖아요. 그죠. 사가라 용왕, 대해 용왕, 대해 용왕, 큰 바다 용왕.- 삭가라심은 무동전이라, 이런 컵이나 이렇게 기울어지고 쏟아지고 엎어지고 자빠지고 이렇게 하지 바닷물이 엎어지는 법은 없잖아요. 허공이 녹을지언정 철석같은 이 마음은 변함이 없다. 순야다성은 가소무언정 삭가라심은 무동전이라. 여러분들 너무 인제 저는 역할이, 이제 큰 선생님들 많이 오시니까, 그분들한테는 큰 마음의 위로라든지 이런 걸 좀 봐주시고, 그죠. 저는 인제 강의, 법문 이런 것이 아니고, 공연하듯이, 그러면서 어찌 보면 이렇게 법석이 조금 이제 가벼워질 수도 있고 그러는데, 그것도 좀 편한 마음으로 하시는 게 안 좋겠습니까? 저는 뭐 법도 없고, 뭐 생긴 거는 이래도, 피부가 그것도 백옥 같고 뽀얘서. 아니 원래 그래요. 제가 좀 새카맣게 느껴지는 분들은 업장이 두꺼워. 미래제가 다하도록 중생을 구한다. 말이 쉽지, 참 지난한 길이죠. 어렵고도 어렵고. 그래서 <자타일시성불도>라. 그래서 인제 다음 2재가 되면은 뭡니까? <아기와 어린이의 행복> 다음 주는 그렇고, 그 다음에는 인제 쪼매 더 자라는가 봐요. 그죠. <청소년을 위한 정말 팔팔한 덕담>. 박사 학위도 이만큼 많은 스님이 오시니까 얼마나 좋겠노. 인물도 좋고. 참 갈수록 점입가경입니다. 그죠. 4재 때는 종자범자 큰 스님께서도 <청년과 사회 초년생을 위해 다 잘되는 덕담>. 제목만 읽어도 그저 마음이 시원해집니다. 참 기획을 참 잘하신 것 같아요. 또 본각스님께서 <기성세대를 위한 아주> 신묘장구대다라니 하시는가 봐요. 신묘한. 예 아주 신기하고 묘하죠. 하, 이름을 잘 지으시더라구요. 이 묘, 신묘하다고 하는 것이 엄마와 아빠를 위한 기성세대를 위한, 신묘하게 해야 돼요. 신묘하다고 하는 거는 이 묘하다고 하는 것은, 화엄에 이르기를 신묘하다. 신묘장구대다라니 하잖아요. 그죠. 그거는 진흙탕 같은 이제 뻘밭 같은 탁한 똥물 같은 세상에, 또 활활 타는 불꽃 속에도 시들거나, 타지 않고, 물들지 않는 연꽃 같은 것을 신묘하다 이렇게 표현해요. 아, 위로 잘 됐어요. 엄마, 아빠 얼마나 고생 많겠어요, 그죠. 자식 키우면서, 그래도 세상에, 고통에 빠지지 않는다. 아까 저는 오늘 여기 와서 처음 봤는데 너무 좋아가지고, 1장 가져갈라고 주지스님한테 1장 얻었습니다. 그리고 <노년을 위한 환희로운 법문>, 참 노년에 그 모든 미련이 떨어지고, 모든 애착이 떨어지고, 인생의 무상을 절감하고, 꽃이 떨어질 때 떨어지고, 열매가 떨어진 것을 아쉬워하지 않고, 역할을 다 했다고 하는 거죠. 그죠. 그런 노년이 인제 우리에게도 있었으면 참 좋겠다. 제목이 너무 좋아요. 시인이 하신 것 같아, 시인이.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 종정스님께서는 <백년을 잘 사는 법문>. 죽는 거보다는 잘 사는 게 낫겠죠. 100년을 잘 산다 해서, 옛 어른 스님들은 이제 혹시 누구든지 결혼하시게 되는 분들 글을 써주실 때, 백년화락(百年和樂)이라고 이렇게 써주죠. 100년 동안 서로 화목하고 즐겁게 극락처럼 백년해로해라, 이렇게 백년화락이라고 많이 써주셨어요. 어쨌든 오늘 이제 국행수륙재 목적은, <원이차공덕으로>, 이 수륙재의 공덕으로 인해서, <보급어일체라>, 법화경이나 화엄경이나 공히 어떤 경전이든지 마찬가지지만은, <우리 모두 다 함께 성불하자.> 이것이 인제 거의 뭐 불교의 큰 테마고, 영원한 천년만년 가는 테마잖아요. 그래서 마음에 기대있기 때문에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개공성불>도 그렇게 되어 있죠. 그렇게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는 없고. 두 구절은 이렇게 살짝 집어넣어 놨지요, 양념상. 근데 그 당생극락국 동견무량수를 중간에 넣어 놓으니까 더 내용은 확 잘 드러나는 것 같아요. 이차 공덕으로 일체의 모든 중생들이, 우리 모든 중생들이, 아등여중생이, 개공성불도, 요게 인제 법화경 화성품에 나오는 구절이죠. 개공성불도, 모두, 공, 함께 불도를 이루자. 어쨌든 우리가 모두 힘을 내고 서로 격려하고, 힘을 낼라면 탁마하고 이렇게 살아가야 되는데, 상생을 그렇게 도모를 하셔야 되는데, 그 상생이 될라면 소통이 돼야 되고, 소통을 할려면 일단은 화목해야 되잖아요. 그래서 우리 종정 스님께서 마지막에 이제 보면 또 오시겠지만은, 종정 스님이 주석하시는 통도사 일주문에 가면 기둥이, 양기둥이 돌기둥이 있습니다. 흥선대원군 고종 아버지가 써놓은 글이 <영축산 통도사>라고 써놨는데, 그 옆에 인제 돌기둥에다 뭐라고 써놨냐 하면은, <방포원정상요청규(方抱圓頂常要淸規)라>. 가사 입고 머리 깎은 사람들은 부처님 계율대로 부처님처럼 살아갈 것이요. 그렇게 살아가다 보면 각기 인연이 다르고, 태생이 다르고, 수준이 다르고, 그렇게 심보가 다른 사람들끼리 살아가면 얼마나 티격태격 싸우는 일이 많겠는가. 그래서 그 옆에 구절이 이성동거(異姓同居)에, 갖가지 성받이끼리 살아가자면은, 서로 다른 문화에서 살아온 사람끼리 출가해서 같이 살자면은, <이성동거에는 필수화목(必須和睦)이다>. 반드시 화목해야 된다. 이것이 인제 우리 모두 힘내는 길이잖아요. 그죠. 그래서 저번에 와서 법문할 때 뭐라 했습니까? 내 눈에 눈물 내면은 그대 눈에는. 어떻게 하지? 무자비한 분들이 그리 안 웃어요. 니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쏟아지도록 하겠다. 내 가슴에 못을 박으면은 니 가슴에 100만 송이 꽃을 안겨주겠다. 이렇게 우리가 살아가는 게 서로 같이 힘내는 게 좋아. 내 눈에 눈물 내서 니는 그냥 영 향 냄새 맡게 해주겠다든지, 그렇게 모진 소리 하면 안 되죠. 태생이 다르지만 여러 사람이 잘 어울려서 살라면은 자존심 있어야 됩니다. 자존심이라고 하는 것은 자기 자신에게 스스로를 존경하고 예의를 갖추는 것을 자존심이라고 하는데, 일반적으로 사람들은 자존심을 착각을 해 가지고, 자만심을 가지고 내 자존심을 건드리지 말아야 된다고. 가만 쳐다보면 그건 자만심이죠. 자만심이면 자기 자신을 형편없이 업신여기면서 부처 같은 자기를 거지 같은 자기로 만드는 수가 있죠. 그래서 참 불쌍하다 하는 생각이. 우리가 절에 와 가지고 같이 힘내고 같이 어울려서 인제 잘 지내려고 하면은 자꾸 이렇게 며칠 살다 보면 삐끄러지고 찌그락거리고 이렇게 하기 때문에, 저희들은 한 보름에 1번씩 해인사 같은 데는 포살을 합니다. 포살이라고 아시죠. 포살을 어떻게 하냐면 첫째, 묻습니다. 포살법사가 “대중은 뭐죠? 뭐?” 큰소리로 하이소. 참. 그래 “대중은 화목한가.” 화목이 전제되지 않는 상태에서는 아만스러운 사람들한테는 어떤 법문을 해도 법문이 귀에 들어가질 않고, 포살도 귀에 들어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이성간은 화합이고 화목이 제일 먼저, 대중은 일단 화목하는 거. 그래서 수행을, 가만히 점차별로 이렇게 경험적으로 보면, 신심 있는 사람이 결국은 도덕적으로 완성돼서 계율을 잘 지키고, 그 계율을 잘 지키는 사람이 자기 자신의 양심에 체면을 잘 챙기고, 남부끄러운 줄도 알고, 그렇게 참회를 한 사람이, 참제업장이 된 사람이라야 비로소 법문이 들리기 시작합니다. 악독한 사람들은 아무리 법문해도 법문이 귀에 들어가질 않아요. 혹시 법문이 잘 안 들리고, 관심이 없고, 잠이 온다든지, 이런 분들은 아주 악독하다고 스스로 생각해요. 업장이 많다고 생각합니다. 제 얘기 아니에요, 진짜예요. 그 법문이 딱 들리는 순간에 법문이 내 걸로 되면은 그때부터는 사람이 남에게 베풀어 주기 시작합니다. 잘 베풀어주는 사람, 유심하게, 보시한 사람들 쳐다보면은 아주 방편과 지혜가 날렵합니다. 솜씨가 아주 좋아요. 그래서 신심 있는 사람이 즐기기 때문에, 즐긴 사람은 굉장히 솜씨가 깊이 들어갈 수 있어요. 깊이 들어가서 이해한 사람은 현실로 나타납니다. 이치가, 안쪽에서 충분히 내가 이론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실제적으로 설계도를 다 그려서 건물을 올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죠. 그래서 지혜 방편을 갖춘 사람은 기억력이 굉장히 뛰어납니다. 또렷합니다. 절대 안 까먹습니다. 죽을 때까지, 관짝이 덮여서 칠성판이 덮힐 때까지 안 까먹습니다. 어 정말. 치매가 걸려도 안 까먹습니다. 정확합니다. “저분은 치매 걸렸는데 잘 모르실 건데요.” 아니거든. 정확하게 다 기억하고 있어요. 그러니까 솜씨가 무르익어서 또렷하게 명심한 사람들은 그것이 골수까지, 뼛속까지, 핏속까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완전히 솜씨가 무르익어서 사람 자체가 그냥, 추사 김정희 같은 건 손으로 쓰든 발로 쓰든 눈으로 쓰든 그냥 추사체가 나오게 되어 있어요. 꿈까지도 그렇게 되어있어요. 축구선수, 축구 잘하는 사람들은 꿈속에서도 축구 잘합니다. 중노릇도 마찬가지예요. 중노릇 잘하는 사람은 꿈속에서 만나봐도 허튼짓 안 합니다. 남 안 봐도. 꿈은 지 밖에 안 보는데도 거기서도 허튼짓 안 합니다. 그렇게 완전히 골수까지 인제 스며든 사람이 나중에 부처님처럼 어떠냐. 어떤 상황에서든지 어떤 조건이든지 말로 설명하는 데 막힘이 없다. 이렇게 전제조건으로 수행하는 순찰하는 경계를 쫙 기록이 되어있습니다. 여러분들 좀 딱딱하죠. 딱딱한 것 같은데. 좀 웃기는 아재 개그를 금방 생각나는 거 하고 가겠어요. 아재 개그. 조금 있으면 겨울이 되면 우리가 난로 때잖아요. 난로, 난로 중에 어떤 난로가 제일 좋아요. 전기난로? 가스난로? 에 손난로. 석유난로. 제가 볼 때는 오늘의 주제 뭐죠? 화목난로다. 제일 중요한 건 화목난로 있죠. 장작. 그게 좋은 것 같아요. 말이 그게 맞든지 안 맞든지 화목하면 따뜻해질 거 아니에요. 그쵸. 여러분들이 오늘 이제 <우리 다 함께 잘 되자>. 그래서 잘되는 길은 식상한 소리 같지만 공덕을 지어야 된다, 이런 말씀드릴 수가 있겠어요. 통도사 같은 데도, 얼마나 서로 화목 안 하면, 돌기둥에 새겨놨겠어요. 이성, 갖가지 성, 다른 성이 동거해 함께 살아가면 필수, 반드시 요구된다, 필수 반드시 수요가 있다, 요구된다, 뭐가? 화목. 그러니까 예전이나 지금이나 그냥 뭐 임전무퇴 결사항전이 우리에게 종식을 갖다 투쟁 경고의 시대예요. 필수 화목인데. 범어사에 가면은 어산교라고 하는 자그마한 다리가 하나 있습니다. 자그마한 다리. 어산교, 범어사 금정산 다리다, 조그마한 다리가 있는데, 그 다리를 건너자마자 바로 사람 이름이 하나 있고, 옆으로 45도, 한 25도, 35도, 저 정도 요렇게 새겨져 있는 게 있습니다. 그래서 여기 범어사에 들어오는 사람은 반드시 선근 공덕을 지어야 된다. 김선근. 바위에 딱 새겨져 있어요. 김선근. 그래 그 옆에서 한 3발짝 딱 가면 김선근이 무슨 뜻인지 아시겠죠? 사람 이름이에요. 근데 사람 이름이 얼마나 좋으면, 거 써도 개똥이처럼 써놓으면 안돼. 이 절은 뭐하는 곳이에요? 선근을 심는 자리인데, 사람 자체가 김선근이야. 저는 이제 다시 큰 절에 들어와서 이렇게 살다 보니까, 제가 이름이 용학이라고 이렇게 하는데, 우리 학인 스님들은 방학도 나가고, 또 신도님들도 방학도 하시고 그래 하잖아요. 그죠. 저는 신도님들 방학하시고 나서, 우리 그다음에 학인들을 계속 가르쳐야 되고, 학인들 방학하고 나면 신도님들 또 개학해요. 그래서 저는 방학이 없으니까, 이름 자체를 용학이라 안 하고, 앞으로 방학이라 하려고. 이래저래 방학 없는데 뭐 이름이라도 방학이라고. 그래서 이분이 얼마나 좋으면 이름 자체가 김선근. 자, 오늘 이제 수륙재라고 오셨는데, 열반경에 선근(善根)에 대해서 얘기하는 게 있습니다. 우리가 선근이라면 좋은 착한 뿌리잖아요. 그죠. 착한 뿌리를 심고, 심고, 심는데, 최고의 선근은 무엇이겠습니까? 이 세상에 최고의 선근은 무엇이겠습니까? 경전에는 분명히 기록되어 있습니다. 무슨 착한 일이 많지요, 그쵸. 뭐 요거 아시는 분은 제가 크게 한턱 쏘겠습니다. 경전에 나와요, 경전에. 선근, 선근, 막연한 선근 말고. 그죠. 진짜 선근을 몰라. 산 중에서 제일 높은 산은 불교에서는 수미산, 수미산이다. 그죠. 경전에 고대로 나와요. 발자국 중에서 제일 큰 발자국은 코끼리, 예. 어우, 코끼리 발자국. 광명 중에 제일 밝은 것은 태양. 예. 태양, 일광이 제일 밝다. 이렇게 왕 중에서 제일 높은 왕은 전륜성왕. 여러분들 뭐 거의 천재, 모르시는 게 없습니다. 다 아세요. 전륜성왕이다. 선근 중에 제일 훌륭한 선근은 뭘까요? 한번 큰소리로 해 보십시오. 보시, 잘 보시오. 땡. 이 세상에 산이 제일 높은 것이 수미산이고, 저 밝은 태양이 광명 중엔 제일 밝다. 태양이 한번 떠버리고 나면 서울 시내 가로등, 부산, 대구, 대전할 것 없이 온 가로등 다 붙여놔도 태양 하나에 따라갈 수 없고, 저 하늘에 총총한 그 밤에 많던 별도 별 볼 일 없어져 버립니다. 태양 빛 하나에 모든 것이 다 가려져 버립니다. 부처님도 턱 앉으면은 천만 대중이 전체가 형색이 무색해져 버리잖아요. 그쵸. 그렇게 하듯이 선근 중에서 가장 훌륭한 선근이 뭐냐. 끊임없이 정진하는 <불방일(不放逸)>이다. 이렇게 했습니다. 불방일이 선근 중에서 가장 큰 선근이다. 불방일이 뭐죠? 게으리지 않고 계속 정진한다는 거예요. 불방일은 어떤 선근이냐. 어떤 뿌리냐. 이른바 아뇩다라삼먁삼보리 선근이다. 그래서 삼세제불이 불방일 선근으로 인해서 다 성불을 하셨다. 제가 우리 어른 스님을 표현할 때, 불교 방송에서 급하게 인터뷰 하다 보면 그래요, “스님, 화엄경 완간하시고 난 다음에 스님이 시자로서 수십 년 스님 모시고 계신데, 스님이 어떤 분이십니까?” 제가 어른 스님 표현하기는 좀 뭐하고 그렇습니다마는, 우리 어른 스님은 제가 이렇게 모셔보면, 태양이 휴가 안 갑니다. 매일 하십니다, 매일. 오늘 아침도 아마, 8시 통근길에 대머리 총각, 유튜버 화엄경 강의하셨을 겁니다. 아, 정말 불방일. 요번에 올림픽 가서 뭐 사격, 펜싱, 활, 금메달 많이 땄잖아요. 그죠. 그 사람들이 뭘 심었다? 불방일 선근으로 인해서 그것이 금메달로 치환된 거죠. 바뀌어진 거죠. 안 그렇습니까? 불방일이라고 하는 거는 다른 말로 인제 쉽게 하면 <정진바라밀>이라 볼 수 있는데요. 게으른 사람들은 아주 악업장이 많고, 핑계가 많고, 핑계가 많은 사람들은 탐심이 많습니다. 탐심이 많아. 탐심이 많아서, 탐심이 막 욕심, 눈에도 가득하고, 입에도 가득하고, 욕심이 많이 있어 이래 쳐다보면 가득 하거든. 여긴 안 계시네. 그런데 욕심이, 눈 뭐 욕심이 가득하다잖아요. 우리, 그죠. 욕심이 바늘로 폭 찔러 터져버리고 나면은 밀가루가 바람결에 날리듯이 주체가 안 됩니다. 욕심 안 터지도록 좀 줄어야 돼요. 욕심을 줄이는 방법이 불방일로, 매일토록, 자기가 그러니까 난전을 펴놓고 10년만 그 자리에서 열심히만 하면은 다 성공한다는 얘기가, 옛말이 그게 허튼 게 아니에요. 일체 모든 부처님의 모든 선행의 근본이 뭐다? 불방일이다. 그러니까 불방일하고, 저기 큰, 진관사 올라오다 보면은 소나무가 굉장히 좋습니다. 시원하게, 북한산 소나무답게, 그죠. 저 큰 소나무는 이제 많이 크면 더 안 자라잖아요. 그죠? 아니요. 아니요. 이 아름드리 소나무가 매일, 오늘 또 자라고, 내일 또 자라고, 죽을 때까지 자랍니다. 범어사 가면 600년 되는 은행나무가 한 열 아름이나 되는 게 있습니다. 큰 거. 열 아름은 거짓말이고, 한 다섯 아름쯤 되나. 그 600년 된 은행나무가 굉장히 크죠. 그 은행나무를 삽으로 뽑으면 뽑을 수 있겠습니까? 처음에는 콩나물만큼 뭐 실오라기만큼 약한 묘목 쪼만한 씨앗 하나가 발아해 가지고, 작은 싹이 자라고 자라서, 600년을 자라서 불방일한 결과로, 오늘날 그 은행나무를 뽑아낼 수는 없다. 자, 우리 모두 힘내는 길은 뭡니까? 불방일로 죽으나 사나, 그냥 자나 깨나, 오나 가나, 뭘 해야 되겠어요? 정진하고, 정진하고, 정진하고. 뭘 정진합니까? 화목하게, 화목하게, 화목하게. 좋게 보면 전부 꽃이고, 제가 알라고 달려 들게 되면 전부 다 잡초잖아요. 그래서 불방일 하면은 이 게으르지 않는 것도 이렇게 증장이 되지만은, 다른 것도 따라서 같이 자라나게 된다고 그래요. 그래서 뭐 이런 수륙대재를 통해 가지고, 뭐 짐승 중의 사자처럼, 나는 새 중에는 금시조처럼, 전륜성왕처럼, 우리도 인제 선근 중에서 불방일을 제일 우선시해서, 정진하고 정진하다 보면은, 깊고 견고해져서 쉽게 뽑아지지 않는다. 이렇게 인제 말씀드릴 수가 있어요. 그리고 우리가 33천 중에 저기 도리천에 올라가면은, 그 도리천에 이제 천자, 소유제천자(所有諸天子)라. 그게 왕자들이 밥을 먹는데 공동일기식(共同一器食)이라. 화엄경에는 공동일기식이라고 나오는데, 유마경에서는 더 찬란하게 써놨죠. 공동보기식(寶器食)이라. 모두 함께 보배 그릇에 밥을 먹는다. 근데 소식은 각부동(所食各不同)이라. 각자 먹는 음식이 다르다. 똑같은 한 그릇 밥에다가, 밥 한 그릇을 똑같이, 한 그릇 밥을 가지고 몇십 명이, 몇백 명이 모여서 먹는데, 어떤 사람은 짜장면 먹고, 어떤 사람은 볶음밥 먹고, 어떤 사람은 국수 먹고, 냉면 먹고, 또 어떤 사람 뜨뜻한 거 먹고, 어떤 사람은 찬 거 먹고. 그쵸. 다 달라. 오늘 이렇게 수륙대재라고 한다고 이렇게 모여서 왔는데, 우리가 어때요? 각기 <우보일생만허공이나 중생수기득이익이라>. 자기 그릇만큼 알아듣고, 듣기 싫은 사람도 있고, 듣기 좋은 사람도 있고, 눈이 열린 사람도 있고, 캄캄한 사람도 있고. 그렇지마는, 이렇게 수륙대재라든지 이런 법회를 통해 가지고, 또 우리가 이 말법시대에 같이 태어나 가지고, 같이 인류로 살아가면서, 서로 싸우지 않고, 인정하고 존중하고 이렇게 될라면은 첫째는 믿음이 있어야 되요. 믿음이. 이 선근을 인제 정리를 하자면 이렇게 돼요. 믿음을 먼저 키워야 되는데, 믿음이 잘 돋아나지가 않아. 믿음이 잘 돋아나지가 않아요. 그 믿음을 잘 돋아나게하려면은 절에 오면 제일 먼저 가르치는 게 <수원리악우(須遠離惡友)하고 친근현선(親近賢善)이라> 그래요. 악한 사람하고 자꾸 만난 사람들은,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천친보살께서 딱 정의해 놓기를 “신귀덕업(信貴德業)이라,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덕업, 공덕을 짓는 것을 귀하게 여기는 일을 믿음이라고 한다.” 이렇게 답합니다. 그리고 그 뒤로 이제 <신위도원 공덕모(信為道元功德母)라>. 화엄경에도 그렇게 얘기해요. 많이 들어보셨죠. 믿음이라고 하는 것은 도의 근원이고, 공덕을 짓는 어머니다. 그리고 ‘믿음이, 아, 뿌리가 되는데 그걸 믿음을 갖추면 되겠구나. 내가 불교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내 자신에 대한 믿음이 있는가, 내가 신용불량자는 아닌가, 다른 사람들한테 믿음을 갖추는가, 안 갖추는가.’ 그러면 가만히 생각하면은, 그럼 믿음이 어떻게 하면 돋아날까. 첫째, 능엄경 같은 데서 가르칠 때 믿음이 안 돋아나는 사람들은 아주 오신채 탁한 걸 많이 먹어서 그렇대. 그걸 조기제인이라. 1번이 그거야. 그 도와주는 음식을 가려라. 제기조인(除其助因)이라. 고기정성(刳其正性)이라. 안쪽에서 탐진치를 뽑아내라. 현실에서 이렇게 부딪칠 때, 또 이렇게 내가 거짓말하고, 도둑질하고, 또 내 유리한 대로 아만과 교만을 부릴 때, “내 수준이 와 이런 데”는 없고, 외면하고, 거기에 시시비비에 내가 휘말려 들어가지 말아라. 근데 말려 들어가면은 밀가루 속에다가 기름 1방울 통 들어가 가지고 또르르 말려들어가 다시는 탈출하지 못하는 거와 같다. ‘내가 똥파리처럼 살아서 되겠나.’ 여 인제 나온다는 거죠. 그래서 믿음이 딱 갖춰진 사람들은 부지런한 게 이제 따라붙어요. 부지런해야 이 정진 다음에. 저 정진은 불방일의 초보예요. 초보. 병아리야. 병아리. 정진이 자라고, 자라고, 자라다 보면, 나중에 어미 닭이 됐을 때는 불방일이라 그래요. 그래서 믿음이 있는 사람은 그다음에 오는 현상에 가만히 쳐다보고, 여러분들이 절에 와서 공덕을 짓고 이런 분들이 이래 보면 굉장히 부지런합니다. 저는 꼭 버릇이 지각을 잘했어요, 어릴 때. 학교 다닐 때도 지각하고, 절에 와서 지각하고, 뭐 계속 지각을 자주 하더라구요. 그리고 왜 스님이 자꾸 지각합니까? 너무 규칙적인 생활을 하느라고. 지각하던 사람이 안 하면 이상하죠. 계속 지각. 여러분들도 이렇게 모임이 있으면, 늦는 사람 계속 늦지요. 또 빨리 오는 사람도 너무 빨리 와가지고 좀 별나죠. 빨리 오는 사람은 좀 별납니다. 빨리 오시는 분들은 자기가 잘하기 때문에 남 모자라는 거 (못 봐요.) 그냥 빨리 오면 빨리 온 대로, 또 늦게 오면 늦게 온 대로 이렇게 다 포용하고, 이해하는 것이, 인제 오늘 같은 날 한번 다시 짚어보는 것들입니다. 그다음에 부지런해지게 되면 사람이 자기 안쪽으로 또 바깥쪽으로 참회를 하게 되죠. 참회를 하는데, 참회가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참회를 하지 않으면 법문이 안 들려요. 여기서 진관사도 자비도량참법을 시작했다고 하잖아요. 그렇죠. 믿음이 있고 난 뒤에, 그 다음에 자비도량 참법을 해서, 참법을 반드시 해야 법문이 쑥하고, 밭에다가 돌을 갖다가 인제 걷어내고, 돌자갈을 걷어내야 곡식을 심을 때 곡식이 좀 잘 자랄 수가 있겠죠. 그래서 이 참회를 한 사람들은 그다음에 오는 현상이 탐심이 많이 쪼그라듭니다. 그다음에 화닥질이, 자 화닥질이라 해야 되나, 화가 잘 안 나요. 화내는 사람은 수준이 아주 낮은 사람입니다. 저는 화를 한 번도 내본 적이 없습니다. 아, 정말로. 저는 이제까지 태어나가지고 이제까지 화를 내 본 적이 없어요. 그래서 강의를 해도 꼭 저는 수요일날 합니다. 수요일. 화목의 중간에. 물처럼 유연하게. 정말로 수요일날 강의를 합니다. 오늘은 일요일인데, 오늘 수요일이죠. 금방 뽀록나 버리네. 탐심은 어떤 것이냐. 집착이 탐심을 만드는 거죠. 진심은 어떻냐. 진(嗔心)심은 이절(離絕)로 위선(爲善)이라. 진심이 안 나는 사람은 이렇게 화를 금방금방 잘라내거든요. 그래서 탐심이 사라지고 나면은 화내는 마음이 인제 많이 이렇게 잦아들게 되고, 또 화내는 마음이 많이 잦아들게 되면은 판단력이 정확해지죠. 화를 많이 내는 사람을 옆에서 이렇게 쳐다보세요, 한번. 골내고 싸우는 사람들 있잖아요. 그죠. 옆에서 한번 가만히 관찰해보면은 자기 말이 자기가 들리질 않아요. 자기 말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몰라요. 그래서 뭐가 잘 보이지가 않아요. 눈이 디벼졌다 합니다. 그쵸. 확 돌았다고 그러잖아요. 그쵸. 그렇게 잘 안보여요. 그래서 이게 탐진치가 사그라들고 이렇게 되면은, 그 다음부터 탐심과 진심과 이렇게 못된 그런 삿된 소갈딱지가 싹 사라지면은, 오는 현상이 몸도 마음도 홀가분한, 편안하다고 그래요. 이 편안한 상태가 오면 그 다음에 찾아오는 게 뭡니까? 불방일. 그 다음에 오는 게 불방일이야. 몸도 무겁고 힘들고 귀찮아 죽겠고 정신적으로 또 버겁고 지치고 뻑뻑하고 이런 데다가 부지런할라 하면 되겠습니까? 안 되잖아요. 그죠. 그러니까 어떤 난관에 있더라도 홀가분하게 여기는 사람들은 불방일로 갈 수 있기 때문에 용맹정진을 하죠. ‘와 저렇게 되게 아픈데도 정진하고 노력하는가봐.’ 이럴 정도로 옆에서 보면 ‘달라도 뭔가 다르시구나.’ 이렇게 보여지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은 불방일이라 하는 사람들한테, 부지런한 사람들한테 오는 특징이 뭐냐 그러면, 친소를 잘 가리지 않아요. 친한 사람, 안 친한 사람 안 그래. 소인배는, 맹자에 보면, 작당한대요. 여기 소인배들은 우리 당, 우리 당 해가지고 작당을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마음이 보살심으로 넓어진 사람들은 사념이 청정해서 베푸는 마음이 <대원경상에는 절친소라(大圓鏡上 絶親疎)>. 부처님께서는 아까 뭐 했죠. 데바닷다도 아껴야 되고, 관세음보살도 아껴야 되는 게 부처님의 입장이에요. 선택을, 가리지 않는다. 그러니까 본래 마음에는 선악이 없잖아요. 생각에는 선악이 있지만은, 본래 마음에는 선악이 없어요. 본래 마음에는 진공이기 때문에 선악이 붙을 자리가 없어요. 선하다 악하다 해버리고 전부 다 우리가 선근, 선근 하지만, 부처님의 불방일 선근이라고 하는 것은 선악없는 선이에요. 예. 악은 말할 것도 없고. 집착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친소가 다 친하다 안 친하다 이렇게 끊어지면, 우리가 거기서 우리 입으로 감히 말할 수 있는 게 <자타일시성불도 원공법계제중생 동입미타대원해 진미래제도중생 자타일시성불도 원이차공덕 보급어일체 아등여중생 개공성불도>, 이렇게 인제 얘기를 할 수 있어요. 그러면 내가 친하고 친하지 않은 것이 끊어진 사람한테 오는 현상은 뭐냐. 절대 남을 해꼬지 하지 않는다는 거예요. 이 11가지가 믿음에서 정진으로, 그리고 스스로 부끄럽게 여기고, 남의 체면을 차리고, 이렇게 쭉 흘러가 나가는 것이 탐심이 없고, 진심이 없고, 치심이 없고, 그리고 홀가분한 정신 상태가 되면서 불방일를 가지고 친소를 떠나서, 남북을 떠나서, 그저 동서를 떠나서, 고금을 떠나서, 빈부귀천을 다 떠나서, 일일이 평등하게 사람을 바라보는 마음이 있기 때문에 모든 사람을 귀하게 여기니까 해코지 하겠습니까? 안 하겠습니까? 잘 안 한다. 예. 고런 것들이 우리 부처님의 가르침 속에 있는데, 어쨌든지 뭐 이렇게 목동 눈에는 소 꼴만 보이고, 사냥꾼 눈에는 사냥감만 보이지만, 평생 산에 살아도 의사가 한의사가 비로소 산을 올랐을 때 뭐가 보입니까? 낙조. 그래서 이제 수륙재 이렇게 뭐 오늘 법문 재미없습니다마는, 재미있어라고 하는 법문는 아니니까, 그렇게 조금 염두에 두고 좀 정진했으면 좋겠다는 말씀 때문에 드리는 건데. 범어사에 가면은 어산교을 지나면 누가 있다? 김선근이가 있다. 김선근 옆에 또 이렇게 더 잘생긴 바위가 하나 있어요. 김사철이라. 밟을 철자. 전철을 밟아간다잖아요. 그죠. 사유할 사자. 부처님이 가신 길을 잘 사유하고 거기로 따라가라. 그러다 이제 왼쪽으로 이렇게 한 3미터 쪽에 돌아보면은 김영덕이가 있어요. 영원히 공덕을, 신심공덕을 짓고 살아라. 와, 그러니까 범어사 오는데도, 평생 30년, 50년 다녀도 까막눈은 보이지 않아요. 그런데 여러분들 혹시나 부산 범어사 가시게 되면 김선근이네 한번 보고 착한 일 하나 하고, 김사철이네, 계속 착한 일하고, 일불이불삼사오불(一佛二佛三四五佛)이종선근이어무량천만불소종(而種善根已於無量千萬佛所種)에. 그리고 언제까지 또 공덕을 지어야 되겠어요? 김영덕. 그래서 가만히 쳐다보면 우리 다 함께 힘내자 하는데 남하고 똑같을 필요는 없어요. 채소를 보더라도 뿌리 먹는 거, 도라지, 더덕, 또 뭐 있나요? 예. 당근, 또 무, 감자, 땅콩. 그렇다고 뭐 뿌리는 뿌리대로 훌륭하고, 잎사구는, 잎사구가 아니고, 뭐 제가 이게 서울말을 할라고 임플란트를 서울에서 했는데 안 되네요. 그게 아이 참. 이파리, 잎사구, 또 잎사구라, 잎 먹는 상추, 배추, 양배추, 뭐 이런 게 있잖아요. 그죠. 또 열매 맺는 채소도 있지만 열매 먹는 거, 채소로 보면 뭐가 있어요. 옥수수, 강낭콩, 예? 토메이토. 그리고 어떤 것도 껍질 먹는 거도 있고, 그죠. 계피 같은 것도 있고, 껍질 먹는 것도 있고, 알맹이 먹는 것도 있고, 그렇게 어떤 거는 즙을 짜가지고 먹는 것도 있고. 안 그렇습니까? 이런 것을 우리는 다 어울려서 살아내서 세주묘엄(世主妙嚴)이다. 이렇게 늘 얘기를 해요. 세주묘엄. 그래서 인인이 다 잘났다 해서 다 우리 힘내자. 이것이 각득기소(各得其所)라. 각기 지 역할이 있다. 모난 놈은 모난 대로, 아니 저기 호랑이한테 뿔 달리면 이상하잖아요. 그렇죠. 소는 뿔 있는데, 호랑이는 뿔이 없어. 그죠. 고양이는 발톱이 있는데, 개는 발톱이 있긴 해도 시원찮잖아요. 그래서 어떤 거는 물에도 살고, 어떤 거는 숲에도 살고, 허공에도 살고, 땅에도 산다. 그 모든 중생들, 수륙이란 말이 그 모든 중생들, 태난습화 모든 중생들, 구류중생들이, 구류중생 일법계라. 그 구류 중생이 함께 자라장리살진주(紫羅帳裏撒眞珠) 구류 중생이 일법계라. 우리가 같이 살아가는데 우리가 조금 뭐 돈 많이 가진 사람, 인물 잘난 사람, 못난 사람, 학벌이 높은 사람, 낮은 사람, 이런 걸 다 떠나가지고 전부 다 같이 잘 살자 이런 뜻이 있잖아요. 왜 요번에 올림픽을 이렇게 보면은, 그게 경기할 때 가만히 쳐다보면, ‘아유 저건 축생경기다, 저거는 지옥경기다, 저거는 인간경기다, 저거는 신선경기다’, 이런 게 있잖아요. 왜 그거 활 쏠때는 한 발짝도 안 움직이고 쏘잖아요. ‘와 신선 같다 신선.’ 근데 100미터 달리기 하든지 저기 수영하고 이런 거는 남 해코지 안 하고 어떻게 지 기록만 하잖아요. ‘아 우리 정말 인간 같네’, 그리고 구기종목 같은 걸 하잖아요. 그죠. 축구 같은 거 이런 거 하고. 그리고 아마 치고받고 하고 왔다갔다 하면 ‘좀 인간인데 조금 모자라는 아이들 같다.’ 조금 수준 높은 인간은 네트 딱 달아놓고 배드민턴도 치고 테니스도 하고 하잖아요. 저걸 서로 엉겨 붙어 싸우지 않으면서 게임을 잘도 한다. 그래도 조금 넘어가서 복싱이나 유도 오면 눈탱이 째지고 레슬링해서 지옥이다. 지옥. 100미터 딱 달리기 할 때 보면 준비 땅 10초 만에 끝내서 금메달 하나 딴 사람 있죠. 그죠. 저건 돈오돈수인데. 2시간동안 쎄빠지게 뛰어가지고, 메달 겨우 하나, 그 마라톤 있잖아요. 똑같은 메달 한 개인데 왜 저리 많이 뛰노. 저건 돈오점수다. 가만 보면 별별개 다 있어요. 탁구공은 가볍고, 탁구공 가벼워야 그렇게 배트가 이렇게 치고 해야지 볼링공은 어때요? 볼링공으로 탁구 치면 탁구대가 다 빠그라져. 인생을 살면서 우리가 볼링공처럼 무겁게 살아가는 사람은 자기 업이니까 어쩔 수 없어요. 마음은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그죠. 거기에서 볼링공을 잘 굴려야 될 것이고. 탁구공 같은 인생은 탁구공처럼 내 인연을 순응하고 살아야 되고. 야구공을 가지고 축구할 수는 없잖아요. 또 럭비공은 또 얼마나 모났어요. 모난 놈들이 럭비 하는 것 같애. 사각으로 그죠. 어디 튈지 몰라. ‘아 이렇게 모난 사람은 저건 어디 튈지 모르겠다’ 그렇게 이해해 주는 거예요. 그래서 야 공 하나만 보더라도 자 던져놓고 참 별 게 다 희한하게 살아간다 이런 생각이 있어요. 어쩌든지 우리가 크든지, 작든지, 길든지, 짧든지, 무겁든지, 가볍든지, 껄끄럽거나 미끄럽다, 이런 것은 전부 인연법이고, 생멸이 멸이(滅已)하여 불생불멸로 가는 길. 이것이 인제 우리 모두 행복하게 살아야 된다. 이런 뜻이에요. 제가 통도사 얘기를 했고, 범어사 말씀도 드렸고, 그쵸. 예, 그럼 제 출가 본사 해인사 가면 이런 게 있어요. <원각도량이 하처냐(圓覺道場何處)>. 우리의 진정한 극락세계, 원만한 부처님의 세상이 어디에 있더냐. <현금생사즉시(現今生死卽時)다>. 지금 오늘 하루하루 살아가는 이 순간에, 모든 집착만 내려놓으면 좋겠다. 그 집착이 내려놔지나. 안 내려놔지지. 중생은 집착하며 살아야 되는 것 같애요. 어쨌든지 오늘 이제 수륙대재 초재 법문하면서 에 조금 생색을 안 낼라면은, 강물이 바다에 들어가면 내 고집스러운 이름도 다 포기하고, 뭐 포기 안 해도 낙동강 들어가는 순간에 저 낙동강 이름이 지워지게 돼 있어요. 우리가 부처님 마음속으로 쑥 들어가 버리고 나면은, 내가 족벌이나, 학벌이나, 뭐 재물이나 이런 걸 따지지 않게 돼요. 그 계급 없는 그쪽으로 되니까. 뭐 그걸 잘 명심하시고 그렇게 하면 좋을 것 같아요. 저 하늘의 태양이 콩도 익어가고, 뭐 영양 고추도 익어가고, 또 참외도 익어가고, 수박도 익어가고, 다 익어가지만은, 그게 다른 태양이 아니라 태양은 하나다. 우리 마음은 전부 하나다. 업연이 다를 뿐이다. 업연이 이제 다르다, 요런 걸 갖다가 조금 명심을 하다 보면 공부가 잘 되지 않을까 싶어요. 근데 태양은 높은 산을 먼저 비추고, 낮은 산 늦게 비추고, 평지는 나중에 비추고, 뭐 계곡은 더 늦게 비춰버리지만, 태양이 내가 이걸 먼저 비쳤다, 늦게 비쳤다 하는 것이 아니라, 지가 높은 데 있다보니까 먼저 비춰지고, 낮은 데 있다 보니까 낮게 비춰졌다, 이럴 거 같애요. 우리가 여기서 뭐 어쨌든지 조금 더 높은 수준으로 올라가려고 하면 욕궁천리목인 데는 갱상일층루라(欲窮千里目 更上一層樓), 한층 더 이렇게 올라갈라 하면은 이런 게 있습니다. 요즘 한참 나는 게 사과도 나고, 배도 나고, 감도 나오죠. 그죠. 근데 제가 요즘 가만히 요즘 잡꽃 피는 시절인데 꽃이 이제 따뜻할 때 피는 꽃도 있고, 싸늘할 때 차꽃도 피고 국화도 피고 이렇게 하는데, 여기 대들보가 이렇게 볼만합니다. 어떻습니까? 웅장합니까? 여러분들 우리 앞에 계신 청년 분들이렇게 보는 것 같습니다. 저 기둥도 이렇게 볼만 합니다. 그죠. 저 서까래도 엔간합니다. 그죠. 뭔 나무겠습니까? (소나무) 금강송이면 더 좋고, 그죠. 그러나 감나무나 사과나무나 대나무 정도 가지고는 기둥을 쓸 수 없습니다. 안타깝게도. 할 수 있으면 좋겠지만은, 사과나무 가지고 여기 기둥이나 대들보를 쓸 수는 없습니다. 무슨 뜻입니까? 왜 소나무가 이렇게 대들보가 됐습니까? 여러분들 부디 수륙재 진관사 같은 데서 대들보처럼 잘 이케 자라셔야 되고, 인생을 향하셔야 되는데, 소나무는 왜 대들보가 됐습니까? 결코 인생 살아가면서 달콤한 열매를 맺지 않았다. 여러분들 인생에 쓰고 달고 한 게 얼마나 많겠습니까? 고랑에 빠지지 않고 그저 송진을 품고 달빛하고 교감하면서 송월교감이라, 달빛을 벗 삼아 가지고 이렇게 살면은 소나무 같은 기둥이 안 되겠어요. 그렇죠. 진관사 자체가 한국 불교의 기둥 같습니다. 대들보 같고, 참 보기가 좋습니다. 그래서 이 도량을 여러분들께서 오래오래 신심 있게 잘 지켜주셔야 이 말법시대에 더 좋을 것 같아요. 그래서 마지막으로, 한 말씀 드리자면은 설중송백은 유청청이라(雪中松柏兪靑靑), 눈이 내릴 때 소나무, 잣나무가 더 푸르러 보이죠. 힘든 인생살이 속에서 우리가 수행 정진하고 불방일 한다면은 더 아름다운 거야. <설중송백은 유청청이요. 월하임중에 미인래(美人來)라>. 그 솔밭에 달빛이 쏟아지는데 거기에 미인이 걸어오고 있더라. 그 미인 다 여러분들이 되셨으면 좋겠고, 우리 모두 힘내서 잘 정진했으면 좋겠습니다. 성불하십시오. 그리고 여기 나눠준 유인물은 집에 가서 잘 읽어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