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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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니기도천독] 6월11일 신묘장구대다라니 42수 회향 다라니기도 천독기도 법문
가섭스님 2023-06-11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이죠. 제가 진관사 올 때마다 예언을 하나씩 하는데 예언이 딱딱 들어맞아요. 제가 동지 때, 겨울에 와가지고 예언한 게 있는데, <3월달에 꽃이 필 거다.> 이런 예언했는데 이미 꽃 폈죠. 오늘 예언 하나하고 할까요? 10월달에 아마 단풍이 질 겁니다. 스님이 오자마자 ‘이렇게 싱거운 소리를 하나’,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데 이게 영험이에요. 이것이 신통이고 이것이 가피입니다. 그 계절에, 그 절기에, 그 절기다움이 없으면 큰일이죠. 요즘에는, 이제 하도 바쁘게 여러 일들이 일어나는 시절이다 보니까, 만나면 인사가 “별일 없어요?” 이렇게 인사들을 하죠. 별일이 있으면 안 되는데. 우리가 천독 다라니를 독송하고 또 42수 진언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의 가정생활에서 별일 없도록 하기 위한 거예요. 별일이 뭐냐 그러면 장애잖아요. 장애. 근심과 걱정이잖아요. 근심과 걱정과 장애만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없어도 살 만하거든요. 숨이 잘 쉬어지면 살 만한데, 숨이 잘 안 쉬어지면 사는 맛이 안 난단 말이죠. 숨이 멈춰진 경험들이 있으면 알겠지만, 우리가 이제 등산할 때도 경사로가 높은 데를 막 가면 숨이 턱턱 막힌다고 그러잖아요. 정말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경험들을 삶에서 한 번씩 하게 되는데, 그럴 때에 그거를 잘 넘길 수 있는 힘을 우리가 쌓아놓는 것, 그게 기도의 원래 취지입니다. 삶의 여정이 그런 깔딱고개가 없으면 그런 기도가 굳이 필요 없는데, 사는 것 자체가 그런 여정 속에 놓여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가 필요하다 그러죠. 이제 이런 것들을 우리 옛날 어른들 말로는 영험이라고 얘기를 해요. 영험 또 불교식 표현으로는 가피라고 하죠. 근데 그 가피와 영험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데서도 우리가 경험할 수가 있는 거란 말이죠. 근데 그 가피를 기도를 통해서 영험을 경험을 해야지만이 또 신심이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근데 그 영험과 가피를 입으려면 가피라고 하는 게 더함을 입는 거기 때문에 더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걸 의미하잖아요. 우리 삶 속에서 좋은 일이 많이 생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물론 다라니 천독을 열심히 외우고, 42수를, 진언을 의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이야기하는 이 네 가지를 꼭 마음속으로 잘 기억해야만이 그 가피가 더 빨라질 수 있다,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요즘에는 그 영험과 가피가 잘 없는 것 같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는 영험과 가피가 있어요. 그게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죠. 옛날 어른들은 기도를 통해서, 그런 영험과 가피를 경험을 했고, 그런 영험과 가피를 써서 기록에 남긴 걸 영험록이라고 얘기를 해요. 그 영험록에는 바로 관세음보살을 기도로 해서 얻은 영험들이 가장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 일반 대중들은 관세음보살님을 많이 의지하고 있는 거죠. 저도 관세음보살님을 의지하고 있어요. 언제 아느냐. 문득문득 어떤 경계가 나타났을 때 나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게 돼요. 제가 있는, 속해 있는 사찰은 반야바라밀 수행을 해요. 정근도 반야바라밀로 하거든요. 이제 여기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정근하잖아요. 우리는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이렇게 정근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 속에서는 반야바라밀도 하지만, 관세음보살이 우선 나와요. 제일 먼저. 그거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의지해 왔기 때문에 그런 건데요. 그 가피와 영험이란 큰 게 아니고 제가 옛날에 한 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저는 어렸을 때 막 놀다 보면 예불 시간이 지나버려요. 그러면 스님한테 혼나잖아요. 아이들과 놀다가 고개를 넘어가야 절이 있으니까 예불시간을 놓쳐버리는 거예요.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딱지치기, 자치기, 그다음에 술래잡기 이런 거 하다가 놓쳐버리는 거예요. 시간을. 그래서 절에 올라갈 때, 그 혼날 생각에 정신없이 가면 여지 없이 혼나요. 그런데 고개를 넘어가면서 “관세음보살님 한번 도와주세요. 안 혼나게 해주세요. 관세음보살님.”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걸을 때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이렇게 하고 가면 희한하게 스님이 “빨리 가서 씻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거 안 하고 혼날 생각에 가면 여지 없이 가서 108배 해야 돼요. 그때 내가 “아, 관세음보살님은 존재한다.” 어린 마음에. 지금도 그때의 그런 습성 때문에 삶의 경계에서 어려운 일이 딱 생기면, 마음에서 관세음보살님이 딱 화두처럼 들려요. 그럼 걱정했던 일들이 대부분이 다 사라지거나 좀 덜해지거나 그런 경험들을 하게 되거든요. 그게 사실은 본인이 그러한 믿음이 있기때문에 가능한 건데요. 더 큰 이야기로는 저도 이제 들은 이야기인데, 어머님이 절에 열심히 다니는 가족이 있었어요. 물론 그 자녀들은 절을 열심히 라기보다는, 안 다닌 건 아닌데 초파일에 한 번 정도 오는 초파일 신도, 초파일에 와서 비빔밥 먹고 가는 그런 신도였는데, 이분들이 부산에 살았는데 포항고속도로 가다가 교통사고가 난 거예요. 부부가 타고 가다가. 근데 차가 전복을 해가지고 몇 바퀴를 굴렀어요. 그 사위는 코가 깨지고 자기 딸은 어깨가 탈골된 거예요. 차는 이제 거의 폐차 수준인데도. 그래서 어머니가 놀라서 간 거죠. 갔는데 놀라운 거는 그 딸이 병실에서 이제 수술을 하려고 누워있는데 엄마가 가니까 엄마한테 그러더라는 거예요. 사고가 딱 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나 살자고 하는 생각이 아니라, 아기가 있으니까 아기 걱정이 되더라는 거예요.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관세음보살님 우리 아기 살려주세요.” 이런 생각이 딱 들더라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 아기를 딱 이렇게 안은 거죠. 아기는 안 다쳤어요. 근데 그 순간에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하얀 천을 입은 사람이 아기를 이렇게 안고 있는 영상이 이렇게 스크린에서 싹 지나가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얘기를 이제 어머니한테 한 거죠. 그러니까 그 어머님이 이제 ‘관세음보살님이 우리 아이를 구해줬다.’ 이렇게 큰 영험도 있는 거죠. 얼마나 어머님이 열심히 기도했으면 그런 가피를 받았겠습니까? 그런 큰 가피부터 일상 속에 작은 가피까지. 작은 가피 같은 경우에는 배가 막 아픈데, 저도 그런 경우 있거든요. 배가 엄청 아파요. 지금 당장 터질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그때 관세음보살님을 막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은 몸이 약간 제어되는, 조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제어되는 경험을 하거든요, 호흡을 다스리면서 하다 보면. 그런 일상에서 아주 작은 것까지,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다 어떻게 보면 영험이고 가피다. 그런 경험들을 한 번씩 하셔야 되는데, 하시고 계시죠? 그걸 한번 써가지고 제출해 보실까요? <진관사 숙제>. <마음의 정원의 글>, <난 이렇게 부처님께 가피를 입었다.>해가지고, 아마 그렇게 한 장씩 그동안의 신행생활을 10년 하든, 20년, 30년 하든, 그런 것들을 한 장씩 써내면, 그 이야기들이 나에게도 감동이지만, 쓰면서 감동이지만, 아마 그걸 읽는 사람들은 엄청난 감동일 겁니다. 또 그 이야기들이 많은 이들을 부처님 법과 인연을 맺게 하는 씨앗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는 이런 부분들이 이웃 종교에 비해서 좀 약한 게 있어요. 자기는 잘 경험을 했는데 그걸 잘 토해내지 못해요, 잘 표현해내지 못해요, 잘 적어내지 못해요. 엄청난 많은 경험들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앞으로 이런 거 다시금 부흥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일상에서 작은 것부터 아주 큰 것까지 부처님의 가피 아래,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었던 것들을 같이 나누고 공유하고 함께 하는, 그런 흐름들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42수 끝나게 되면, 다라니 천독 끝나게 되면, 천독 끝날 때 몇 분들이 나오셔서, “저는 천독 때 이런 경험들을 했어요, 이런 어려움들이 해소가 됐어요, 이런 장애들이 사라졌어요.” 라고 같이 나누는 그런 이야기들을 한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진관사 사찰 음식이 맛있다는 얘기만 하지 말고, -그건 당연한 거니까,- 그런 부분들이 우리가 공유가 돼야 많은 불자들이 이제 그러한 인연 따라서 불자가 되지 않을까, 일반인들이,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가피나 내지는 영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첫 번째로 갖춰야 되는 게, -마음에 잘 기록을 하세요.- 한 생각이 있어야 돼요. 한 생각, 일념(一念)이라고 하죠, 일념. 이 염자는 생각 염자인데, 파자를 하면 지금의 마음이잖아요. 지금 마음. 지금 마음인데, 생각 염자 다른 말로 리멤버(remember)에요, 기억하는 거예요. 기억하는 거. 그 한 생각에 뭘 기억하느냐.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그 스님들과 내가 부처님께 약속한 계, 살도음망주(殺盜淫妄酒), 그리고 어떻게 베풀 건가, 내가 어떻게 베풀고 살건가, 또 내가 그 결과 내가 어느 좋은 세상에 인연을 맺을 건가. 여섯 가지가 원래 있어요. 근데 여기서 말한 일념은 하나로 생각을 통일하는 거예요. 통일하는 거. 42주를 하든 다라니를 하든 한 생각으로. 경전에는 뭐라고 비유가 나오냐면, 머리에다가 화로를 지고 있는 것처럼, 이고 있는 것처럼 염불하라, 정진하라, 그러거든요. 이마에 여기 화로가 얹혀 있으면 얼마나 다급하겠어요. 그게 바로 일념이거든요. 이번에 진관사에 오니까 초파일 때 굉장히 귀여운 부처님을 하나 만들어서 나눴대요. 보니까 밑에는 <당신의 부처입니다.> 이렇게 써있고. 덕원스님이 그걸 하나 저한테 보여주길래, 제가 이렇게 머리에다가 올려가지고 “내가 이렇게 해서 법당에 들어가면 어떨까?” 그때 덕원스님이 뭐라고 한 줄 알아요? “드릴까요?” 그래. 하라는 소리잖아요. 머리에 부처님을 이고 있는 것은 당연한 거고, 정말로 내가 큰 뜨거운 화로를 얹어놓은 것처럼 일념으로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일념으로 해야 된다. 그런데 이제 하다 보면 자꾸 망상이 올라오는데, 망상이 올라온다고 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스님, 저는 기도만 하면 자꾸 마음에서 망상이 올라온다.”고. 이것도 생각나고 저것도 생각나고. 근데 그건 당연한 거예요. 마치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흔들리듯이 당연한 거예요.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 흔들리는데, 나무가 흔들린다고 걱정하는 사람, 똑같은 거예요. 그만큼 바보스러움이 없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건 그 흐름대로 그냥 놔둬야 돼요. 나도 다시 다라니 독송에 집중하고 42수 진언을 외우는 데 집중해야 된다. 일념. 첫 번째 일념이 돼야 되고. 두 번째로는 신심이에요. 믿어야 됩니다. 믿어야 돼요. 여기서 믿는다는 걸 뭘 믿느냐 그러면, 자기 자신을 믿어야 돼요. 이 기도를 통해서 내가 변화하고 내가 가피를 입고 내가 영험을 경험할 거라고 하는 믿음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라니를 읽고 진언을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마음에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야, 이거 뭐 밑져야 본전인데 뭐 해보지 뭐.” 이렇게 해가지고는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정말 절실한 믿음을 가지고 해야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믿음은 좀 더 불교적으로 말하면, 내가 원래 본래 붓다인데, 본래 부처인데, 지금 중생의 먼지가 껴 있다. 그 먼지를 덜어내는 과정으로써 이 다라니를 하는 것이고 이 사십이수를 하는 것이에요. 그래야 부처님이 드러나죠. 그래서 첫 번째로 믿는 건 <내가 부처님이다>라는 걸 믿어야 돼요. 맨날 말로는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그렇게 해놓고, 마음으로 의심해 버리면 난 중생이에요. 당신은 부처님이야 라고 하면서 나는 중생인가? 나도 부처란 얘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경전을 읽는다든가, 뭐 우리가 불교 수행하면서, 제일 착각하는 게 뭐냐면 내 얘기를 해야 되는데, 자꾸 상대방을 얘기를 해요. 우리가 자비를 말하고 지혜를 말할 때도 ‘내가 자비로운가, 내가 지혜로운가’ 봐야 되거든요. 자비와 지혜는 맑고 밝은 거, 따뜻하고 온화한 거예요, 그냥. 자비 지혜라고 하는 거는. 자비 지혜가 별거 있어요? 지금 내가 이 시점에서 맑고 밝은지, 따뜻하고 온화한지만 살피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자꾸 상대방에게 ‘너 자비롭냐, 너 지혜롭냐’ 얘기하는 것처럼 오해해요. ‘당신은 부처님이다’라는 말은 우리는 상대방을 존중하라는 뜻도 있지만, 그것을 내 안에서, 내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입니다. 결국은 ‘당신은 부처입니다’라고 얘기하는 거는 ‘나도 부처님이에요 나도 부처예요.’ 쉽게 말하면 ‘나도 지혜로운 존재고 나도 자비로운 존재예요. 나도 맑고 밝은 사람이고,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걸 믿으라는 거예요. 그 믿음 없이 중생의 습성을 위해서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더 나아가서는 그거 아주 기본적인 큰 법문이고, 이거 알아들으면 아주 큰 법문이에요. 더 이상 법문할 필요가 없어요. 근데 지금 눈빛을 보니까 아리송해. 말은 맞는 말인데 눈빛을 보니까, 이거 스님이 맞는 말을 했는데, 이게 잘 와닿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믿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다라니 기도를 통해서, 이 진언을 통해서 내가 변할 거라고 하는 믿음이 있어요. 의심하지 말아야 됩니다. <반드시 성취할거다>라고 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에요, 두 번째 갖춰야 될 것이. 그 옛날에 어른 스님들은, 의상대에서 의상 스님은 그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까치발을 하고 관세음보살을 정근한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안 되니까 어떻게 돼요? 홍련암 밑으로 몸을 던진 거잖아요. 그런 절실함, 그런 믿음, 내가 몸을 던지면 이 생에서 이 몸은 사라지겠지만, 그 정진력으로 내가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그 일념으로 한 거거든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의심하지 말아야 됩니다. 두 번째가 의심하지 말자. 세 번째로는 긍정적인 마음이 있어야 돼요. 긍정적인 마음. 긍정적인 마음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면, 긍정적인 말을 해야 됩니다. 말. 일단은 말은 습관이기 때문에 바꿀 수 있어요. 가족 간에 얘기할 때 굉장히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네 가지의 말이 뭐가 있어요? 하나는 거짓말 있죠. 거짓말. 하나는 꾸민 말이 있죠. 요만한 얘기를 이만하게 얘기하는 거. 저도 그걸 잘해요. 저도 요만한 얘기를 이만하게 잘 포장해서 얘기하는 기술이 있어요.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예요? 양설이죠, 이간질하는 거예요. 첫째한테, 둘째한테 다른 얘기하고, 친구들 만나서 A라는 친구한테 얘기했던 거를 B라는 친구한테 “A라는 애가 이렇게 얘기하더라. 너에 대해서.” A를 만나가지고는 “B라는 친구가, 그 보살님이 이런 얘기 하더라.” 또 이 스님 만나가지고는 “스님에 대해서 저 스님이 그렇게 얘기하더라.” 이렇게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이건 화합을 깨는, 이거는 막을 수가 없죠, 화합이 깨지는 거는. 마지막으로는 뭐예요? 욕설이죠. 억센 말하는 사람들이죠. 상대방에게 그냥 비수를 꽂는 말을 하는 사람들, 습관적으로. 그래서 긍정적인 마음인데, 그 긍정적인 마음을 갖추려면 언어를 따뜻한 언어로 바꿔라. 긍정적인 언어로 바꾸라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말할 때 살펴보면 됩니다. 말할 때 우리는 살피지 않고 툭툭 내뱉는 습관이 있어요. 감정에 의거해서, 감정에 의지해가지고, 말을 툭툭 내뱉는 습관들이 있거든요. 말을 할 때는 말을 입으로 뱉지만, 생각을 안으로 끌어들여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지 부정적인 말들이 안 나옵니다. 네 번째로는 이 세 가지를 하면 얻어지는 결과이기도 한데, 얼굴에 웃음을 띠어야 됩니다. 웃음을 띠어야 돼요. 제가 진관사 마음의 정원에 오면, 우리 스님들 만나면 제일 높이 평가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거 내가 처음 얘기하는 건데, 우리 저 스님한테도 처음 얘기하는 건데, 진관사는 큰 장점이 웃음이에요. 웃지 않는 스님이 없어요. 물론 이제 당신들끼리 있을 때는 뭐 그렇게 안 할 수도 있겠지만, 다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어요. 그렇죠? 스님들께 박수 한번 주세요. 어느 집안도 마찬가지예요. 그 집안이 잘 되느냐. 딱 부부 만나보면 알아요. 잘 웃는 부부는 잘 풀리는 집안입니다. 그런데 서로 간에 얼굴이 굳어 있어, 근육이. 얼굴에 근육이 제일 많다 하잖아요. 그래서 얼굴이 굳어 있는 사람들이, 그거는 평소에 습성이, 업이 그렇게 굳어진 거예요. 그래서 혹시라도 얼굴이 굳어 있는 분들은 오늘부터 집에 가셔가지고 거울 보고 이거(웃는 모습) 한번 하세요. 이 웃음은 얼굴 연습을 해야지 나옵니다. 물론 우리가 이제 자연스럽게 우스운 이야기나 재미난 광경을 보면 웃게 되는데, 평소에 잘 안 웃는 사람들이 웃잖아요. 저게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잘 모르겠어. 어정쩡한, 왜냐면 근육이 굳어 있기 때문에. 근데 웃어야지 됩니다.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말이 있잖아요. 웃으면 복이 와요. 제 경험담을 하나 얘기하면 이것도 영험을 받은 이야기인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삶이 너무 괴로운 거예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는 청춘이란 노래 아세요? <언젠간 가겠지.~> 중학교 때 그 노래를 듣고 3일을 울었어요. 인생이 너무 무상한 거야. 보세요. 제가 얼마나 잘 꾸미는지. 요만한 걸 이만하게 잘 꾸며서 얘기하죠. 실제로 그 노래 듣고 너무 마음이 슬펐어요. ‘야,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는 거구나.’ 중학교 2학년짜리가. 아마 그때 이 출가의 씨앗이 뿌려진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 고등학교 때 인생이 너무 힘든 거예요. 학교 다니는 게 너무 힘들어. 친구들하고 만나가지고 얘기하다 보면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그때 생각했어요. ‘내가 힘든 삶을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며칠을 고민했어요. 그래서 제가 고민 끝에 흰 종이에다가 딱 한 자를 썼어요. 뭐라고 썼게요? <웃자.> 고등학교 때, 웃자. 그래 웃어. 이렇게 썼어요. 흰 종이에다가. 그리고 그걸 벽에다가 딱 붙여놓고 맨날 웃는 연습을 했어요. 그때는 제가 혼자 자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 먹지도 못하고 잘 입지도 못하고 잘 자지도 못했어요. 근데 그때 그 <웃자, 그래 웃어.>를 해놓고, 내가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그때 진짜 부처님하고 인연이 됐어요. 절에 살다가 좀 나와 있던 시절이었는데, 다시 부처님하고 인연이 되고, 불교 학생회 활동을 하게 되고, 회장도 하게 됐어요. 불교 학생 회장도. 왜냐. 제가 천수경을 외웠거든요. 지도법사 스님이 목탁을 가르쳐주는데 애가 목탁을 잘 치는 거예요. 저는 어렸을 때 목탁 치고 살았잖아요. 천수경도 외우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천수경을 외우냐고. 그때 스님이 나보고 회장 하래요. 절에 나간 지 3개월 만에 학생회장을 했어요. 그러면서 부처님하고 진짜 인연이 됐거든요. 그때 지도법사 스님이 지금도 계세요. 대구에 주지하고 계시는데 그분도 주지, 저도 주진데.(웃음) 네, 그렇게 웃어야 됩니다. 어떻게 웃느냐.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아이고 제 나이 이제 뭐 육십, 칠십인데..” 그래야 웃으면서 갈 수 있어요. 살아온 세월을 어쩔 수 없지만, 명증한 건 뭐예요? 이제 갈 시간만 남았다는 거. 그렇죠. 갈 시간이 남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갈 시간을 웃으면서 가야 될 거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다라니를 열심히 독송하고, 42수를 지극하게 하는 이유는 웃으면서 살고, 웃으면서 살다가 웃으면서 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처럼 다음 생에 웃으면서 올려고 하는 거잖아요. 부처님이, -지금 우리 관세음보살님이신가요?- 모셔져 있는데, 웃어요? 울어요? 슬플 때 보면 우는 거 같고, 기쁠 때 보면은 웃는 거 같아요? 항상 웃고 계시죠, 미소를 짓고 계시죠. 그 미소는 아무 바람이 없는 그런 웃음인데, 저기까지 가려면 오래 걸리겠지만, 적어도 오늘 가셔가지고 이제 화장 지우잖아요. 화장 지울 거죠? 선크림 지워야 할 거 아닙니까? 저도 아침에 선크림 바르고 왔거든요. 어제 그제 제주도 연수를 갔다 왔는데 햇빛에 너무 많이 그을러 가지고 얼굴이 시커멓게 탔어요. 지금 선크림 발라서 이 정도예요. 그러면 선크림을 싹 지우면서 어떻게? 거울 보면서 이렇게 웃어야죠. 그리고 파운데이션을, -별 걸 다 알죠, 스님이,- 파운데이션 하면서 웃으면서 하세요. 근데 파운데이션 하면서도 인상을 쓰고 해. 그러니 이게 팔자가 바뀌겠냐고요, 운명이 바뀌겠냐고요. 웃어야지 운명이 바뀌거든요. 웃을 수 있죠? 연습하실 거죠? 42수, 첫 번째부터 42번째까지 다 우리에게 도움 되는 가르침, 진언이에요. 첫 번째는 뭐예요? 잘 살게 해달라는 거예요. 부자로 살게 해달라는 얘기예요. 첫 번째 진언은. 가난하게 살면 아무것도 안 돼. 이 사바세계는. 첫 번째가 부자로 살게 해달라. 거기부터 모든 장애가 사라지게 해달라, 눈을 맑게 해 달라, 장수하게 해달라, 모든 장애를 없애달라, 마귀 마구니를 없애 달라. 그 진언 하나하나가 다 우리에게 소중한 겁니다. 그거를 의지해서 우리는 있으니까, 너무 근심 걱정하지 마시고. 지금 네 가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는 일념으로 하고 또 하나는 뭐예요? 진심으로 하고, 또 하나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고, 마지막으로 웃으면서 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애프터 서비스를 해야죠. 그거는 뭐냐면 진관사 오셔가지고 주지스님을 만나시면 됩니다. 만나셔가지고 “스님, 그때 그 키 큰 스님, 눈썹 진한 스님 있잖아요. 그 스님이 얘기했는데, 했는데 잘 안 돼요. 어떻게 해야 되죠?” 그러면 거기에 맞춤형 처방을 주지 스님께서 딱 주실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걱정이에요? 근심 걱정하지 마시고, 늘 즐겁게 행복하게 맑고 밝게 온화하고 따뜻하게, 그렇게 불자로서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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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5월 20일 음력 4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3-05-20
안녕하십니까. 오늘 계묘년 4월 초하루 진관사 신중기도 입재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의 주제는 여래소성법(如來所成法), 여래가 성취하신 법, 여래소성법, 이런 내용인데요. 이 동아시아에서 세 글자가 총칭 명칭이 있어요. 총칭 명칭. 그게 뭐냐면 물건 물자하고 물, 또 도라고 하는 길 도자하고, 또 법이라고 하는 법 법자가 개별 명칭이 아니라 총칭 명칭이에요. 법이다 그러면 전체 모든 것. 도라고 해도 마찬가지고, 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고. 爾時世尊始成正覺이시세존시성정각二行永絕 達無相法이행영절 달무상법立不思議 普見三世입부사의 보견삼세(華嚴經 如來名號品)(화엄경 여래명호품) 그러면 여래소성법, 그러면 여래께서 성취하신 법이 무엇이냐. 화엄경 여래명호품(華嚴經 如來名號品)에 보면, 이시에 세존이(爾時世尊), 이때 세존께서, 부처님께서, 시성정각(始成正覺)하시니,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시니. 그러니까 여래는 성정각이에요. 정각을 이룬 거예요. 여래 성정각. 이게 여래의 소성법이죠. 여래께서 성취하신 법이다. 그럼 정각이 뭐냐. 첫 번째 말씀이 이행이 영절하고(二行永絕), 여래는 두 가지 행위가 영원히 끊어졌다. 이렇게 시작이 돼요. 그럼 두 가지 행위는 뭐냐. 하나는 취행, 취하는 행, 취하는 행이 뭔가. 취할 취자는 구할 구잔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구해요. 구해도 구해도 끝이 없어서, 구하면서 태어나고 구하면서 죽어요. 죽을 때도 대략 우는데 왜 우느냐. 구하던 것이 안 구해져서 울면서 죽는 거예요. 그럼 태어날 때는 왜 우느냐. 뱃속이 좋은데, 그 어렵게 세상에 나와서, 배 속에 있을 때는 탯줄로 숨을 쉬어서 편안했는데, 밖으로 나오니까 자기 코로 숨을 쉬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섭기도 하고 힘도 들고. 왜 우냐. 편안한 걸 그때부터 구하니까 왜 이렇게 어려운 게 많나. 그 공포와 그 불편함 때문에 “와~”하고 우는 거거든요. 그래서 운다고 신기해하는데 신기할 거 하나도 없어요. 다 저 살라고 우는 거예요. 저 살려고. 거기 엄마는 없어요. 인생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 중심이고 엄마한테서 먹고 튀는 거다. 먹으면 도망가요. 안 도망가면 이건 더 큰일이여. -도망간다는 얘기 하니까 이제 마스크가 먼저 도망가려고.- 그러니까 근데 그 취행이 영절하고, 취하는 행위가 영원히 끊어졌어요. 그게 깨달음이에요. 구하는 일이 없어요. 두 번째는 사행이 영절하고. 버리는 행위, 버릴 사자. 인간은 하나 구하면 하나 버리거든요. -축원 계속 했으면 좋겠네. 난 편안히 쉬면 되니까.- 하나 취하면 하나 꼭 버립니다. 그래서 이게 취사가 멈추질 않아요. 한 사람 버리고 또 새 사람 만나고 맨날 이래요. 맨날 이래요. 근데 여래는 취행이 영절하고, 사행이 영절이라. 버리는 행위가 완전히 끊어졌다. 그럼 어찌 돼요. 할 일이 없는 거예요, 세상에는. 세상에는 전부 취행과 사행, 취하고 버리는 일인데 그 일이 끊어졌으면 어떻게 돼요. 할 일 전혀 없어요. 그러니까 할 일이 많다는 거는 전부 번뇌 망상이에요. 알고 살아야 돼요. 어떤 사람은 바빠서 좋다고 그러는데, 바쁜 사람은 번뇌 망상이 제일 많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웬만한 건 취해도 만족 못 하는 성격이거든. 나이가 들어도 계속 인정받으려고. 어떤 사람은 80에도 떨린다고 하더라고. 80에 뭐 하려고 떨어. 아니 80에 떨 일이 도대체 없는데 스스로 떠는 거예요. 그래서 이행이 영절이요. 취하는 행위, 버리는 행위가 영원히 끊어지고, 달무상법(達無相法)이라, 없을 무자, 형상 상자, 법 법자, 무상법을 통달했다. 무상법이라고 하는 건 진여법을 말해요. 흘러도 흘러도 흘러도 참 그대로, 무엇하고 만나도 만나도 만나도 참과 똑같다. 이걸 진여법이라고 하거든요. 진여법을 통달했다. 죽어도 죽어도 죽는 일이 없고, 나도 나도 나는 일이 없는 진여법. 꿈을 꿔도 꿔도 달라지는 일이 없고, 꿈을 안 꿔도 안 꿔도 달라지는 일이 없는 이 진여법을 통달을 했어. 통달이라는 건 의심이 전혀 없다는 얘기죠. 세월이 가고 장소가 바뀌어도 진여법에 대한 의심이 전혀 없어서, 진여법을 항상 눈앞에서 보는 거예요. 이걸 현견진여(現見眞如)라고 그러는데, 현재라는 현자, 볼 견자, 진여법을 현재 항상 보고 있어요. 이게 달무상법이에요. 그래가지고 입부사의(立不思議)하고, 부사의, 아니 불자, 생각 사자, 의논할 의자. 이건 생각할 수 없는 거. 이 번뇌망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법을 가르쳐요. 그게 이제 진여법을 가르치고, 두 가지 행위가 영원히 끊어진 세계를 가르치는 게 이게 부사의법이죠. 그래서 보견삼세(普見三世)라. 과거, 현재, 미래를 통으로 다 본다. 이 보견이라는 건 넓을 보자인데, 통째로. 지나간 일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흔적도 없거든요. 현재도 한 백 년 지나가면 흔적도 없어요. 그럼 백 년 후에는 뭔가. 역시 현재와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그냥 눈앞의 것만 보는 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통째로 다 봐. 이걸 보견삼세라고 그래요. 이 경지에 올라갈 분을 성정각이라고 한다. 정각을 이뤘다고 한다. 이렇게 화엄경 여래 명호품에서 몇 구절로 설명을 했어요. 一切凡夫 無明業相 見聞覺知일체범부 무명업상 견문각지 三界輪迴 無有息止 삼계윤회 무유식지 그러면 정각을 이루지 못한 범부는 뭐냐. 일체범부(一切凡夫)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이라고 그러는데, 무명은, 무명업상은 번뇌망상이라는 소리예요. 무명은 어리석음인데, 뭔 어리석음인가. 이 진여법을 모르는 걸 무명이라고 그래요. 시장에 가서 뭐 물건 사고 이런 거 모르는 게 아니라 진여법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그런다. 밝음이 없다. 이 진여법을 모를 때는 이 구하고 버리는 일이 계속돼요. 진여법을 모르기 때문에. 무상법을 모르니까 구하지 않으면 못 살고 버리지 않으면 못 살아요. 그래서 뭐 청소는 할수록 좋고, 이거 뭐 티끌 묻히는 건 안 할수록 좋은 거 아니에요. 이렇게 돼서 이거 안 하면 못 살아요. 그래가지고 무명업상으로, 무명업이라는 건 어리석게 계속 취하고 버리는 업의 행동으로, 견문각지(見聞覺知)를 하는데, 이 계속 구할 때는 눈으로 구하고 이게 견이요 견. 눈으로 가면 그냥 그냥 보는 게 아니에요, 눈으로 보는 거는. 내가 아는 건가 모르는 건가, 좋은 건가 나쁜 건가, 항상 눈으로 그걸 살피는 거예요. 누가 딱 지나가면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인가. 그럼 과거에 만났던 사람은 아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고, 못 만났던 사람은 모르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잖아요. 근데 항상 눈으로 구하는 게 이게 무명이 하는 일이에요. 또 듣는 것도 항상 귀로 들어요. 저 아는 소린가 모르는 소린가, 좋은 소린가 나쁜 소린가. 이게 견문, 다 무명업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무명뿐이에요. 왕이 하나 있으면 그 왕이 밑에 사람들을 다 시켜서 왕업을 달성하는 것처럼, 무명이 있으면 그 무명이 견문각지를 통해서 무명업을 이루어가요. 이게 범부의 하는 일이거든요. 그다음에 이제 각이라는 게 있어요. 각은 비각, 코로 느끼는 거, 냄새 맡는 거. 비설, 혀로 느끼는 거. 신, 몸 전체로 느끼는 거. 그래서 이제 코로 구하고 맛으로 구하고 몸 전체 촉감으로 구하고, 전부 구하는 행위에요, 이게요. 또 지는 과거에 경험했던 거, 다 알고 있고, 현재의 견문각 하는 거 다 판단하고 있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부 계산하고 있고, 이게 지각이란 말이죠. 지각. 그래서 전부 느끼는 거예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지각. 그러면 이 느끼는 거는 특징이 뭐냐 하면, 전부 밖에 거를 느끼는 거예요. 밖에 거. 보는 것도 밖에 것 보지요. 듣는 것도 밖에 거 듣죠. 느끼는 것도, 전부 코로 느끼는 것도 밖에 거 아니에요. 근데 여기 이제 역할은 조금씩 달라. 성격이 달라. 시각하고 청각은 떨어져야 느껴요. 이게 이이라고 둘은 떨어져야 된다. 그런데 후각하고 미각하고 촉각은 붙어야 느껴요. 이건 합삼이라고 그러는데, 이이합삼, 둘은 떨어져서 느끼고 셋은 합해서 느낀다. 이 지각은 전부 이제 분별해서 느끼는 거죠. 분별. 이렇게 돼서 진여법을 모르기 때문에 전부 생멸법의 노예가 돼요. 죽고 사는데 노예가 돼버려. 그래서 항상 삼계에 윤회(三界輪迴)를 하게 돼요. 욕계, 색계, 무색계. 돌고 돌아. 그래가지고 그 돌고 도는 일이 끝나지를 않는다. 무유식지(無有息止)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견문각지 무명업상이 딱 멈춰져서, 그 견문각지에 묻혀져 있던 지혜가 활짝 드러나면 거기에 이제 진여법을 알게 되고 이행이 영절하게 돼요. 奉佛佛子 信心堅固 修福勤學봉불불자 신심견고 수복근학 天上人間 福德具足 천상인간 복덕구족 그런데 봉불불자(奉佛佛子)는, 이렇게 삼계에 윤회하는 범부 중에서도 부처님을 잘 친견하고 부처님 법을 받드는 불자는 신심이 견고(信心堅固)해요. 그 무슨 신심이냐. 여래의 깨달은 진여불성, 진여불성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고 또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이 견고해요. 이제 중생들이 잘못해도 벌 안 받는다. 이 믿음이 굉장히 강해요. 그래서 죄 중에 모르는 죄가 제일 큰 죄다 이러고. 벌 중에 괘씸죄가 큰 벌이다 이러고. 그러니까 뭘 모르느냐. 인과를 믿지 않는 게 큰 이게 어리석음인데. 그래서 맨날 술 먹고 놀아도 술이 안 취하기를 맨날 바래요. 근데 그만 먹으라면 화내요. 하나도 안 취했다고. 그게 이제 인과를 모르는 거죠. 그리고 자기 인생이 자기 마음에서 오는 걸 안 믿고, 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걸로 알고, 자기 부모에게서만 오는 걸로 알고, 자기 시절 운수에서만 오는 걸로 알고, 이거는 진여불성을 안 믿는 거거든요. 인과응보를 안 믿고, 진여불성을 안 믿으면 그게 무명업상인데. 봉불불자들은, 부처님을 잘 받드는 불자들은 이 진여불성과 인과응보에 대한 신심이 견고해. 견고하다고. 술 취하기 싫으면 술을 안 먹고, 조금만 취하고 싶으면 조금만 먹고, 이게 인과응보거든요. 다른 사람한테 존경을 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존경을 하고, 무시를 당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먼저 무시를 하고. 그런데 저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는 거는 이거 인과응보를 안 믿는 거예요. 전혀 안 믿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은 한 번 죽으면 그만이다 이거는 진여불성을 안 믿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한 개인이 죽거나 살거나 상관없이 그대로 참 그대로가 여여하게 돌아가는 법이 있는데, 참 그대로 여여한 법이 있다는 걸 안 믿어.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다 이거예요. 내가 죽어도 지구는 돈다. 나 죽는다고 지구가 안 도는 거 아니거든. 그래서 이런 인과에 대한 신심과 진여법에 대한 신심이 강해서 수복을 근학(修福勤學)이라, 복을 닦는 일을 부지런히 배워. 이게 봉불불자들이 하는 일이에요. 좋은 일을 하면 복이 생기고 나쁜 일을 하면 죄가 생기는데, 좋은 일 하는 이 복을 닦는 법을 부지런히 배우면 그게 봉불불자예요. 그리고 천상인간(天上人間)에서 이 사람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에 떨어지질 않고, 봉불불자는 인간이 아니면 천상에 난다. 인천복을 받는다 이거지. 인천. 사람이 이게 인간 세상에 다시 환생 하는 것도 이게 그냥 쉽게 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육도 윤회를 볼 때 이게 로또 맞은 일과 마찬가지라니까요. 인간에 태어났다는 게. 인간은 로또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가 있는데 그중에서 인간에 태어났단 말이에요. 그런데 다시 인간에 태어난다는 거는 노력하지 않으면 안 돼요. 또 인간보다 더 나은 천상에 태어난다는 거는 더 좋은 거죠. 이게 인천복락인데, 복 복자, 즐거울 락자. 이 복 닦는 일을 부지런히 배우면 천상 아니면 인간에 환생한다. 이런 걸 환생. 더 이제 염불 잘하면 극락에 왕생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일은 환생 아니면 왕생을 원해야 되는 거예요. 극락세계에 가는 건 왕생이라 그러고, 인천 세상에 다시 오는 건 환생이라 그런단 말이에요. 一切菩薩 般若觀照 現見佛性일체보살 반야관조 현견불성 無有恐怖 遠離妄想 무유공포 원리망상 그러면 일체보살(一切菩薩)들은 어떻게 되냐. 일체 보살은 이 무명심 거기서 보리심으로 넘어가는 반야심이 있는데, 무명심은 그냥 견문각지를 계속하는 거고, 이 반야심은 볼 관자, 조명이라는 조자, 관조(觀照)라고 그래요. 무슨 현상이 나타나면 무조건 쫓아가서 구하는 게 아니라 이걸 바라봐.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응당히 이와같이 보라.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그게 보살이에요. 오온이 다 불생불멸임을 조견한다. 비춰본다. 보살은 뭐든지 뭐가 나타나든지 관조를 해요. 보는 걸 해요. 이걸 택법관조(擇法觀照)라고 그래요. 하늘이 보이면 하늘을 관조하고, 땅이 보이면 땅을 관조하고, 죽고 사는 게 보이면 죽고 사는 걸 관조하고. 이 법을 간택을 해서 가려서, 지금 이 법당 기둥을 내가 딱 본다. 법당 기둥을 보는 건 이건 택법이에요. 가릴 택자, 법 법자. 가린다는 말은 선택이란 말이죠. 법당 기둥을 내가 딱 선택을 해서 ‘저 기둥의 실상이 뭔고’ 보는 거예요. 그럼 생로병사를 느끼면, 생로병사를 딱 선택을 해서, 생로병사는 법이고 선택한다는 것은 가리는 건데 간택이란 말이지. 가려낼 간자. 이게 뭐든지 눈앞에 나타나면 그 눈앞에 나타난 거를 선택을 해서 지목을 해서 딱 생각을 멈추고, 생각 이전의 생각으로 그걸 봐요. 그래서 생각으로 보는 걸 망념이라고 그러고, 망념, 허망할 망자.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상태로 보는 거를 정념(正念)이라고 그러거든요. 바를 정자, 생각 념자. 거기에 어떤 자기 생각을 붙이지 않고 생각 이전의 생각으로 딱 본단 말이야. 이게 정념관조다. 이 정념관조라는 말은 강원에서 가르치는 절요라는 책이 있는데, 절요 서문 부분에서 딱 강조한 말이 <정념 관조하라>. 정념관조하면 금방 깨닫게 돼요. 뭐든지 눈앞에 나타날 때 그걸 딱 선택을 해서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그대로 여여한 마음으로 본다. 본다. 그러면 처음에는 물질을 봤는데, 나중에는 그 물질 속에서 눈을 감지도 않은 상태에서 진여불성을 보는 거예요. 이걸 현견불성(現見佛性)이라고 해요. 처음에는 이 찻잔을 봤는데 이걸 정념으로 딱 관조를 하고 있어요. 이 찻잔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여기서 진여 불성을 봐요. 이 그릇을 보는 게 아니라. 이게 반야관조예요. -이런 소리 하면 또 어렵다고 짜증 내면 안 되는데. 짜증 낼 수도 있지.- 그래서 택법관조하면 현견진여라. 이게 묘법이에요. 뭐든지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걸 정념으로 딱 선택해서 관조하면 거기서 진여불성이 보이지, 다른 게 보이질 않아요. 왜냐하면 일체 만상에는 진여불성밖에 없거든. 다른 거를 보는 거는 전부 전도몽상이고 망상 집착으로 다른 걸 보는 거다. -무슨 소리인지. 참. 심오한 것도 같고 헛소리도 같고 그렇죠.- 진여불성뿐인데, 다른 여러 가지 분별상을 보는 거는 전도몽상으로 보는 거다, 이 소리예요. 그게 반야심경에서 보는 거 아니에요, 전도몽상. 전도라는 건 뒤바뀐 거. 있는 데서 있는 거 찾는 거 이걸 전도라고 그래요. 기우멱우(騎牛覓牛). 소를 지금 타고 있는데 기우, 소 탈 기, 다시 또 소를 찾아. 소를 탄 상태에서 소를 찾아 그걸 멱우라고 하거든요. 그런 걸 전도라고 그래요. 자기 집에서 자기 집 찾는 거, 해탈 속에서 해탈을 찾는 거, 이런 걸 전부 전도몽상이라 그래요. 그러면은 무유공포(無有恐怖)하고, 그렇게 현재 물건 속에서 진여불성을 보면 공포가 없어요. 그 무유공포는 뭐냐. 공포라는 거는 다섯 가지 공포를 화엄경 환희지품에서 설명을 하는데, 첫째는 전도망상, 몽상으로 불안에 대한 공포가 있어. 살지 못할까 하는 공포. 내가 못 살면 어떡하나. 그다음에 악명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나한테 무슨 악명이 들러붙어서 나한테 나쁜 소문이 나면 어떡하나. 그다음에 사망 공포가 있어요. 죽으면 어떡하나. 이게 무명업상으로 살아가는 범부중생의 공포거든요. 그 다음에는 타악도에, 내가 내생에 악도에 떨어지면 어떡하나, 이런 공포가 있어요. 그런 사람은 더러 있더라고. “아니 내생에 내가 나쁜 데 가면 어떡하죠?” 그런 공포심이 일어나면 다른 방법 없어요. 경을 자꾸 읽으세요. 염불을 오래오래 하세요. 그러면 악도에 떨어질 염려가 하나도 없어요. 근데 경도 안 읽고 염불도 안 하고 악도에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만 하면 그 사람 반드시 악도에 떨어져요. 걱정 근심으로 악도를 면하는 게 아니에요. 간경, 염불로 악도를 면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대중공포가 있어요. 대중공포. 이 많은 사람 중에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많으면 어떡하나, 이게 대중 공포거든. 그런 거 하나도 걱정할 거 없지. 자기가 이 일체 현상에서 진여불성을 보고, 허망한 걸 구하지 않고, 진실에 대한 정진을 해나가는 사람이 대중이 두려울 게 뭐가 있어. 대중이 두렵다는 거는 자기의 진실성이 없을 때 대중이 두려운 거예요. 자기 진실성을 갖춰야지, 자기 진실성을 갖추지 않고 대중을 기준으로 해서 잘난 대중이 있고 못난 대중이 있다고 그러면, 잘난 사람은 두려워하고 못난 사람은 오만하고 그게 절대로 아니에요. 자기 진실성을 갖춰라. 그럼 대중은 없다. 언제나 자기 진실성뿐이다. 이런 다섯 가지 공포가 없다고 그래서 무유공포라고 그래요. 무유공포. 그다음에 원리몽상. 원리전도몽상이라는 같은 말인데, 있는 건 싫어하고 없는 건 구하고 이런 게 다 몽상이거든요. 자기는 한 사람 뿐이여. 근데 얼굴 보고 자기 모습을 자꾸 고치고 싶어. 그건 몽상이에요. 자기 현재 있는 모습이 뭐가 어때서. 현재 있는 모습으로 보지를 못하나, 듣지를 못하나 뭐가 어떻다는 거예요 도대체. 그런 걸 다 멀리 여읜다. 그걸 보살이라고 한다. 원리몽상 무유공포 이게 보살이에요. 그러면은 도대체 여래는 어떻게 해서 여래가 됐을까. 여래하고 범부하고는 종자가 다른가. 여래될 종자는 따로 있고 범부될 종자는 따로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해결한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중생과 부처가 어떻게 다르냐. 이런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어떤 스님이 3년 동안 경상북도 봉암사 있는데, 그 문경 쪽 학가산이라고 있고 보문사라고 있는데, 거기로 고려시대 목우자 지눌스님이 화엄경을 짊어지고 들어가서 학가산 보문사에서 3년 동안 화엄경을 보다가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 이 구절을 만나서, “아! 중생과 부처가 본래 다른 게 아니다.” 이걸 깨달았단 말이에요.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그냥 철철 눈물을 흘리고 그 책을 머리에 이고 하염없이 돌았다. 이게 구도의 기쁨이거든요. 도를 구하는 기쁨이 있어. 이 기쁨이 극한에 올라가면 울어요. 좋아 좋아. 이건 극도에 못 간 거예요. 좋다는 말도 안 나오고 눈물부터 나와. 근데 요새는 울면 너 미쳤나 이럴까 봐. 왜 우노 이럴까 봐. 그럼 안 통하는 거지. 좋아 좋아하는 건 그건 껍데기요. 껍데기. 진짜 좋으면 운다고. 無一衆生 而不具有 如來智慧무일중생 이불구유 여래지혜但以妄想 轉倒執著 而不證得단이망상 전도집착 이불증득若離妄想 一切智 自然智 無礙智則得現前 약리망상 일체지 자연지 무애지즉득현전(華嚴經 如來出現品)(화엄경 여래출현품) 그래서 이 중생과 부처가 이게 다른 게 아니로구나 하는 것이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말씀이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 뭔 말이 있냐면, 한 중생도, 어떤 한 사람의 중생도 무불구유 여래지혜라(無一衆生 而不具有 如來智慧), 여래의 지혜를 갖추어 있지 않은 이는 없다. 여래의 지혜가 다 갖추어 있다는 거예요. 여래의 지혜가. 다 갖춰져 있는데, 단이망상 전도집착(但以妄想 轉倒執著)으로, 망상과 전도와 집착으로 이불증득(而不證得)하나니라. 그 여래의 지혜를 증득하지 못하느니라. 증득이란 그냥 얻는 거예요. 자기가 깨달아서 얻는 거. 그러니까 여래 지혜가 다 있는데 그걸 못 깨닫고 못 얻는 것은 거기서 세 가지를 얘기했어. 망상, 전도, 집착. 그것 때문에 못 얻는다. 그러니까 망상 전도 집착만 없으면 다 열렸다 이 말이죠. 아 이게 “중생심이 바로 부처다”라는 말이 여기 있구나. 그래가지고 그냥 그냥 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 그래서 이 선과 교의 문제가 다 해결됐어. 선에서는 마음을 얘기하고 교에서는 부처를 얘기하는데, 이 마음과 부처가 조금도 다름이 없구나. 이래가지고 그다음은 약이, 만약 여읜다면, 뭘 여의어요? 망상. 약리망상하면, 만약 망상을 여읜다면, 일체지와 자연지와 무애지가 즉득 현전하나니라(若離妄想 一切智 自然智 無礙智則得現前). 즉득이라는 거 곧 현전함을 얻는다. 현전이라는 건 앞 전자도 이게 나타날 전자고, 나타날 현자도 나타날 현자고. 앞에 뒤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냥 나타나는 거예요. 시방삼세가 없이, 과거 현재가 없이, 동서남북이 없이, 그냥 나타나는 걸 여기서 현전이다 이러거든. 그러면 일체지(一切智), 모든 지혜, 또 자연지(自然智), 이 지혜라는 게 어디 쌓아놨다가 컴퓨터처럼 입력해야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그냥 허공에서 바람 불듯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지혜를 자연지라 그래요. 일체지, 뭐든 지, 뭐든 지혜, 자연지혜. 또 무애지(無礙智), 걸림이 없는 지혜라. 이 세간지라는 거는 가는 데마다 이 지혜의 용도가 달라서 가는 데마다 배워야 돼요. 이쪽에서 배운 거 가지고 저쪽에서 안 통해요. 그래서 공자라는 사람도 영리한 사람인 게, 사당에 들어가서 예법을 논하는데, 그 공자가 유명한 지식인이니까 사당에 들어가서도 예법을 잘 알 것이다 이랬거든. 제사 지내는 공간에. 그런데 딱 가자마자 거기 사당 집사한테 하나하나를 물었어요. 요건 어떻게 합니까. 요건 어떻게 합니까. 요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이게 완전히 빗나간 거예요. 공자는 다 알 줄 알았는데 그걸 집전한 사람에게 하나하나 묻는다. 그게 어떻게 공자가 예를 안다고 하는 것이냐 그러니까, 공자가 그런 말을 했어요. “사당에 들어가서는 사당법을 묻는 것이 예법이다.” 이게 무애지라는 거야. 무애지. 걸림이 없어. 이 세상 건 그런데 제 방식대로 했다간 다 걸려요. 그거 물으면 어때. 얼마나 좋아. 이거 뭐냐. 이게 무애지가 되려면 어느 곳에 가든지 안 통하는 게 없는 거죠. 안 통하는 게 없는. 그리고 요새 나이 많은 시어머니들이 시어머니 방식대로 며느리한테 얘기하면요, 그 큰일 나요. 30년 전의 법이 지금 통할 수가 없어요. 근데 습관적으로 잔소리 하는 수가 있거든. 그건 자기가 몰라서 그래요. 모르면 잔소리하고, 알면 배운다. 얼마나 좋아. 요건 어떻게 하는 거냐. 요건 어떻게 하느냐. 아니 며느리한테 배우면 좋잖아요. 유명한 공자가 사당에 가서 집사한테 다 물었는데. 나도 한 십몇 년 전에 제등 행렬할 때는 저 기름으로 만든 초를 불에 붙여서 들고 다녔거든. 근데 요새는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고. 옛날식으로 제등 행렬하니까 초 사서 초 준비하라고 그러면 그거 통하겠어요? 안 통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무애지는 항상 걸림이 없어야 돼. 그냥 그 당시에 가장 좋은 거를 늘 쓰는 거지. 그게 이제 그런 게 바로 현전한다 나타난다 이거거든요. 근데 이제 이런 말씀이 이 조사의 교법에서는 여래지혜라는 말보다 일념심법이라고 그래요. 한 생각 마음 법. 일념심법이 있다. 한 생각이야. 한 생각. 이거는 과거 현재 미래 삼세도 없고 동서남북 사방도 없고 언제나 일념심법이다. 근데 이거는 항상 평등하고 항상해. 그래서 이걸 평상법이라고, 평상심법. 순서가 없어요. 평등이. 또 변화가 없어요. 그래서 이걸 평상이라. 도가 뭐냐 평상심이 도다.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죽고 사는 것도 없고, 그냥 평상. 평상심법. 그리고 무사심법이란 말을 써요. 무사심법. 일이 없어. 생로병사도 없고 흥망성쇠도 없고, 부귀영화도 없고 온갖 고뇌, 장애도 없고. 이런 게 전부 일인데, 그 심법에는 평상심법, 무사심법이다. 무사, 일없는 마음법이다. 그래서 이걸 하나 딱 증득하면 할 일이 전혀 없는 거죠. 이걸 요사범부(了事凡夫)라고 그래요. 일을 다 수료한 범부다. 내가 뭐 내 모습이 갑자기 뭐 관세음보살되고 문수보살되고 석가모니 된 게 아니에요. 범부요 범부. 그냥 눈 코 입 다리, 감기 오면 감기 앓고, 여름 되면 땀 흘리고, 그냥 범부여. 근데 이 무사심법을 하나 떡 증득하면 요사범부다, 일을 다 해 마쳤다. 두려운 일도 없고 잘못되는 일도 없고 요사범부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또 조사 가르침이에요. 그걸 조사선법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 동아시아에서는 조사들의 가르침이 엄청나니까 그걸 외면하면 안 돼요. 뭐 하려고 외면을 해, 그 좋은 가르침을. 그렇게 되면 자연히 일체지 자연지 무애지가 늘 앞에 있다. 이게 무사심법이라는 거죠. 일 없는 마음법이다. 그걸 증득하면 요사범부가 된다. 일을 다 해 마친 범부가 된다. 이런 말이죠. 그럼 이렇게 여래의 가르침에 대한 믿는 신심을 한 번 일으키는 순간에 여래가 떡 앞에 나타나시는 거예요. 이걸 강림이라고 하고 출현이라고 그래요. 여래가 강림하셨다, 오셨다 이거지. 출현하셨다 나타나셨다. 그러면 여래교법에 대한 신심을 일으켰을 때 여래가 강림하고 여래가 출연하지, 안 일으키면 안 나타나요.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은 다른 날이 아니라 여래 교법에 대한 신심을 일으킨 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다. 또 여래를 믿는 그 신심을 일으켰을 때 여래를 보게 돼요. 여래에 대한 신심이 일어났을 때 여래를 보는 거지, 신심을 안 일으켰을 땐 여래를 못 봐요. 그리고 여래에 대한 믿음을 일으켰을 때 스스로 여래가 되는 날이다. 이걸 자성정각이라 그래요. 스스로 정각을 이룬다. 今日是好日 如來出現日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 날今日是好日 如來親見日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뵙는 날今日是好日 自成正覺日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되는 날 그래서 오늘 4월 초파일이고, 부처님 오신 날 법문은 진관사에서 할 수도 없고 저기 창원에 우리 상좌 절에 가야 돼요. 상좌 오라는 데는 여기보다 더 무서워요. 안 가면 안 돼요. 그래서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 늘 하는 법문인데, 부처님 오신 날은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일으켰을 때 오시는 거다. 그래서 이걸 한문으로 만들면 금일은 시호일(今日是好日)이다. 오늘은 뭔 날이냐.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일으킨 날. 금일은 시호일이니 여래 출현일(如來出現日)이다. 여래가 출현하는 날이다. 금일은 시호일이니, 오늘은 좋은 날이니, 여래 친견일(如來親見日)이다. 여래를 친견하는 날이다. 금일은 시호일이니 자성정각일(自成正覺日)이다. 스스로 정각을 이루는 날이다. 신심 하나로 친견도 하고 스스로 이루기도 하고 강림한 것을 느끼기도 하고 다 해요. 심심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우리 말로 여러 사람들이 하는 말인데,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뵙는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되는 날>, 이런 거거든요. 이제 저하고 여러분들하고 같이 한번 읽어요. 오늘은 좋은 날, 오늘은 제가 읽으면 여러분들은 좋은 날, 부처님 하면 오신 날, -그 기억을 해야 되는데,-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뵙는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되는 날, 기억하시겠어요? 제가 먼저 읽어볼까요?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뵙는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되는 날!” 참 좋네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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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4월 20일 음력3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큰스님 2023-04-22
如來 所說法(여래 소설법)--如來說法 隨機接引 種種敎說 成就衆生----여래설법 수기접인 종종교설 성취중생-- 안녕하십니까. 계묘년 3월 초하루 진관사 신중기도 입재라 하더라고요. 나는 초하루밖에 몰라요. 하여튼 초하루 신중기도 입재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할 제목은 여래 소설법(如來 所說法),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이다. 여래설법(如來說法)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여래가 왜 설법을 하셨을까. 설법한 목적. 여래가 설법한 목적은 중생을 성취시키는 거예요. 중생성취. 그래서 그것을 성취중생(成就衆生)이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럼 성취가 뭐냐. 중생이 여래와 같이 해탈을 하고, 중생이 여래와 같이 열반을 얻는 거거든요. 해탈 열반. 그럼 해탈이라는 거는 뭐냐. 무장무애. 아무 장애가 없는 걸 해탈이라고 그래요. 몸의 장애, 마음의 장애, 물질의 장애. 그래서 해탈은 이장(離障)이라, 장애에서 벗어나는 거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원만구족이에요. 원만구족. 원만하게 다 갖추어진 것을 열반이라고 하거든요. 무장무애 원만구족. 이거를 석가모니가 얻었는데, 그것을 다른 범부중생도 다 얻도록 하는 것이 중생을 성취시키는 거거든요. 성취중생. 그럼 어떤 방법으로 하냐. 내용은 해탈 열반인데, 방법은 그 법문을 듣는 중생에 따라서, 법문 듣는 중생을 어려운 말로 당기 중생이라, 당기(當機). 당자는 해당할 당, 기자는 근기라고 하는 근기 기, 기계 기잔데, 사람도 기계와 같이 그 성능, 용심, 희망이 다르다. 그래서 그 기계에 비유해서 근기(根機) 이러거든요, 뿌리 근자 써가지고. 그 법문을 지금 듣고 있는 사람이 당기 중생이에요. 해당하는 근기 중생이라고요. 그 당기 중생에 따라서 그 중생이 도움이 될 만한 법을 설해요. 그 중생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법은 안 설해요. 근데 뭘 하든지 석가모니는 해탈 열반 외에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중생에게 도움이 될 법을 설한다, 중생이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법을 설한다. 그래가지고 그거를 방편설법이라고 하거든요. 방편이라는 건 서로 통한다는 소리예요. 접근한다 이 말이거든. 방법은 방편 설법을 하는데, 목적은 해탈 열반이에요. 그래서 해탈 열반에 방해되는 말은 일체 안 하셔요. 그걸 무기법(無記法)이라고 그래요. 말하지 않는다고. 기록할 기자. 기록을 안 해요. 기록은 말인데, 말을 안 해요. 석가모니는 무슨 말을 해도 해탈 열반에 필요한 말만 하시지, 다른 말은 안 하셨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래서 그 유명한 비유가 독전(毒箭) 비유인데요. 독화살 비유.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는데, 그 독화살을 맞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뭐냐. 독화살을 빼내고 그 독이 몸에 퍼진 걸 치료해서 본래 사람으로 돌아가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화살을 빼내지 않고 연구부터 해. 이 화살 종류가 뭐며, 독기가 뭐며, 어떤 사람이며, 그러면 그 사람은 죽는다. 그래서 중생에게도 해탈 열반이 필요하지, 이것저것 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래서 독전유(毒箭喩), 해탈 열반, 방편 설법. 그런 것을 가지고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여래설법은 수기 설법이다. 근기에 따라서 설법을 한다. 설법을 해가지고 그 해탈 열반으로 인도를 하는 거예요. 수기접인(隨機接引)이라. 잡을 접, 인도할 인, 잡아서 인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종종교설(種種敎說)로, 가지가지 교설로 성취중생이라, 중생을 성취한다. 그래서 여래설법은 그 말을 듣고 해탈 열반을 이루는 게 중요해요. 말에 머무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가지고 비유가 있어요. 월타추담계영한(月墮秋潭桂影寒)인데, 월, 달이, 추담, 가을 연못에, 타, 떨어졌다. 그래서 연못을 이렇게 들여다 보면 연못 안에 달덩이가 훤하게 있거든요. 근데 이게 월타추담인데, 계영이라고 하는 건 계수나무 계자, 그림자 영자, 달에 계수나무가 있어요. 지금 달나라 가 보니까 없지만, 달나라 가기 전에는 계수나무가 항상 있었어요. 그래서 계수나무 그림자가 그게 달이에요. 계수나무 그림자 달은 저 허공에 차디차게 지금 분명히 있는 거예요. 그런데 월타추담이요. 달은 또 가을 연못 속에 떨어져서, 가을 연못이라고 하는 것은 제일 맑은 연못을 가을 연못이라고 하거든요. 물이 맑게 보일 때가 가을이에요. 그 이상하잖아요. 분명히 연못 속에 달이 떨어졌는데, 분명히 하늘에 달이 그냥 차디차게 있어. 계영이 차. 이게 여래설법이다. 그 달이 연못 속에 떨어진 것은 비유로 설법하는 것이고, 그 하늘의 달이 분명하게 있는 거는 해탈 열반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걸 잘 모르고 입수 착영(捉影)하면, 달 그림자가 연못 속에 보이니까 그 연못 물에 들어가서 입수란 말이죠. 입수 착영을 해. 그림자를 잡아. 잡을 착자가 있고 그림자 영자가 있는데, 달 그림자가 물속에 보이니까 물에 들어가서 그림자를 잡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종부득(終不得)이라. 마침내 그 그림자를 잡을 수가 없다. 如來說法 敎相判釋여래설법 교상판석如來說法 時別分釋여래설법 시별분석五乘判釋오승판석1.人天乘 2.聲聞乘 3.緣覺乘 4.菩薩乘 5.佛乘1.인천승 2.성문승 3.연각승 4.보살승 5.불승 그러니까 설법을 딱 들으면 그 설법에 맴돌면 어리석은 거고, 그 설법에서 가리키는 해탈 열반을 얻는 게 중요해요. 얻는 게. 그런데 중생들은 지혜로 해탈하는 것보다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 습관화돼서, 모든 걸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역사가 오래되면서 불교의 내용이 뭐냐. 해탈을 하려고 안 하고 내용 분석을 많이 했어요. 그 내용 분석을 하는데, 내용 분석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20세기서부터 출발한 건데, 역사가 아주 짧은데 시별분석(時別分釋)이라고 하는 게 있어요. 시별분석, 시대별로 분류해서 여래설법을 해석한다. 시대별로, 이게 시별이거든요. 때 시자, 다를 별자. 분석이라는 거. 분류를 해요. 여래설법을 나누어서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게 이제 20세기서부터 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칠 때 이걸 가르쳐요. 그래서 대학 불교하고 사찰 불교하고는 달라요. 사찰 불교는 실천해서 공덕을 이루는 게 사찰 불교인데, 대학 불교는 분석해서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게 생명이에요. 그러나 대학이 망하면 불교도 거기서 없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유교도 향교에 있다가 대학으로 다 들어갔는데, 대학에서 유교 과목이 폐강이 되니까 그냥 끝났어요. 근데 불교는 절에 있다가 대학으로 다 안 갔어요. 그래서 남아있는 거예요. 뭔 말인지. 그래서 일본에서 <20세기 불교학이 흥하면 불교는 쇠약하고, 20세기 불교학이 쇠약하면 불교는 흥한다.> 이런 말을 했어요. 그게 사실이에요. 그럼 어떻게 되냐. 여래가 세상에 계시고, 여래가 세상에 계신 후 한 100년까지를 초기불교라고 하는데요. 초기불교가 없었다면 그 후에 여러 부파가 일어나는데 부파불교는 없었을 것이고, 이게 시별 분석이에요. 시대별로 분석하는 거. 또 온갖 부파가 서로 논쟁을 하고 서로 다툴 때, 그 부파불교가 없었다면 반야 불교는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 부파에서 논쟁하는 것을 싹 쓸어서 반야 공으로 전부 다 통일시킨 게 용수거든요. 그 반야 불교가 없었으면, 또 유식 불교가, 오직 생각이라고 하는 유식 불교가 없었을 것이고, 유식 불교가 없었다면 여래장 불교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반야 유식 여래장, 또 초기, 부파 이런 거를 시대별로 쭉 분류를 해서 이걸 연구하는 게 교리 발달사에요. 이런 것만 가르쳐요. 그래서 처음 이걸 배우면 눈이 휘둥그레서, 절에서 수리수리 마수리 하는 거 하고 전혀 틀리거든. 그래가지고 여기에 뭐가 있는 줄 알아요. 그래서 막 강의도 듣고, 논문도 써보면, 역시 들어갈 때도 생각이 없고 나올 때도 생각이 없고, 마음은 항상 아는 게 많을수록 허망해요. 이런 게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학문적으로 불교를 연구해서 저술을 한 30권, 50권 냈는데 죽는 순간이 돌아왔어. 근데 자기 저술이 옆에 산처럼 쌓였어. 근데 죽을 때 이렇게 자기 저술을 쳐다보면, 저놈은 책더미가 내 죽는 거 하고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여러분 그거 알아요? 자기가 그냥 책을 100권, 70권, 50권, 30권, 열 권 이상 저술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숨넘어갈 때, 숨이 똑 떨어지려고 할 때, 내가 어디로 가는고 할 때, 저놈의 책이 내 죽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니까요. 이거 경험 안 해본 사람 몰라요. 그리고 화가도 마찬가지예요. 자기가 좋은 그림 작품을 많이 남겼어요. 근데 자기가 목숨을, 딱 숨을 거둘 때 자기가 그린 그림이 내 죽음하고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소설가도 마찬가지. 작품을 엄청나게 남겼는데, 자기가 남긴 작품이 자기 죽음에 도움이 안 된다. 이상한 거죠. 지금 평생 남의 다리 긁은 것도 아니고, 헛짓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이미 기력이 다 해서 때는 이미 늦었어. 그런데 또 이상한 건, 그런 고비를 넘기고 다시 깨어났는데도 몸이 조금 좋아지면 또 그 짓 해요. 야, 이게 인생이에요. 그래서 한 번 몸에 습관이 되면 좀처럼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이런 시별분석이 있고, 이거 시별 분석이라는 건 내가 만들어낸 용어인데 어디 출처가 없어요, 이거는. 시대별로 분류해서 해석한다, 이게 시별 분석이거든요. 이게 종범이가 만들어낸 용어예요. 어디 근거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근데 이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불교 분류법이 있는데 이걸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그래요. 가르칠 교, 모양 상, 서로 상자, 모양 상. 판석, 판단할 판, 해석할 석. 이제 시대와 상관없이 이 교리를 보고 판단해서 해석하는 걸 교상판석이라 그러고, 이걸 줄여서 교판이라 그래요. 교상판석을 딱 보니까 부처님이 인천도를 강조한 법문이 있다. 이걸 인천승(人天乘)이라고 하거든요. 사람은 지옥 아귀 축생 삼악도에 떨어지지 말고 인도에 환생하고 천도에 상생하고, 적어도 인천에서는 벗어나지 말아야 된다, 이런 걸 가르쳤어요. 이걸 인천승이라고 그래요. 승자는 간다, 실천한다. 수레 승자인데, 이거 움직이는 거잖아요. 길 도자도 되고, 가르칠 교자도 되고, 실행할 행자도 되고. 인천승이 기본이에요. 그다음에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 늘 부처님을 따라다니면서 공부하던 분을 성문이라고 그래요. 부처님 음성을 듣고 배웠다고. 그분들에게는 고집멸도 사성제법을 가르치고 이걸 성문승이라고 해요. 또 인연을 다 관찰하기 좋아해요. 이걸 연각승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성문승에게는 사성제를 가르치고, 연각승에게는 12인연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제 보살에게는 이게 보살승인데, 육바라밀을 가르쳤다. 그리고 부처님의 세계를 남김없이 아낌없이 바로 말한 설법이 있는데, 이걸 불승(佛乘)이라고 하는데요. 부처가 가는 길, 부처의 길, 부처의 행, 이게 불승인데, 이거를 경으로 보면 화엄경이다, 이렇게 해요. 그래서 보살승은 반야경 이런 거고, 이제 나머지는 다 초기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여러 경전들이 있어요. 그래서 이걸 이제 오승차별이라고 그러는데, 인천승,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불승. 근데 오승이 전부 목적은 해탈 열반이에요. 다만 부처, 이제 나는 이렇게 부처가 됐다. 이건 이제 보살들에게 하는 법문인데, 이렇게 보살행을 닦으면 이렇게 성불한다, 부처님 경지를 이야기하는 게 화엄경의 여래출연품 같은 거고, 세주묘엄품, 이런 게 그 여래의 세계를 바로 말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깨달음이 뭐냐 하면, 화엄경 여래출연품이나 화엄경 세주묘엄품, 여래현상품 이거는 그 깨달은 세계를 이야기한 거예요. 이걸 불승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거를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그러면 이게 사승이잖아요. 그런데 다 이게 인천승은 모두가 해당되니까,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이걸 삼승이라고 그러고, 불승은 부처님 하나의 세계를 말한다고 그래서 일승이라고 그러고. 그래서 항상 이 불교를 이야기할 때 삼승과 일승, 일승과 삼승 이래요. 이게 교상판석이에요. 그래서 경을 딱 보면, ‘아 이거 일승법이구나, 이건 보살승법이구나, 이거는 성문승법이구나, 이건 연각승법이구나’ 알아요. 그게 교판이에요. 그리고 시대별로 분석하다 보면, 책이 딱 나와서 책 보면 ‘이거는 어느 시대 거네’ 이거 금방 아는 게 이게 시판이에요. 그리고 누가 설법을 해도 ‘아 저거는 시대별로 초기불교냐 부파불교냐, 반야불교냐 유식불교냐, 여래장불교냐’ 바로 아는 거죠. 그건 시대별로 분석을 해요. 그런데 이건 불교 아는 사람들이 알아듣는 거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데, 그거 알아봐야 전혀 자기 해탈, 자기 열반에 도움이 안 돼요. 그래서 절에서는 실천과 성취를 이야기하지, 그 분석과 지식을 강조하지 않아요. 그런데 대학에 가면 전부 분석, 지식뿐이에요. 그래서 대학 나오면 끝이에요. 끝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거기에 빠져서 절에 안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상좌가 대학 가면 못 쓴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상좌 대학 가면 못 쓴다. 일제시대 때는 이제 일본식으로 개명한 걸 개명승이라고 그랬는데, 그게 이제 대학 불교를 와서 본 거예요. 개명하고 절에 떡 왔더니 제일 먼저 한 일이 선대에서부터 물려준 법답(法畓)이 있는데, 우리 스승과 제자로 물려가는 논이 있어요. 그걸 제일 먼저 팔더래요. 그래서 개명승은 선매 법답이라, 먼저 법답부터 판다. 이게 이제 지식 불교에 대한 굉장히 비관적인 평가였어요. 나는 심각하게 말하는데 이해가 안 돼서 아무 반응이 없네. 개명 승자는 선매법답이라. 이거 얼마나 당혹한 말이에요. 이 불교의 세속화를 빗대어 말하는 거지. ①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金剛經 正信希有分16)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금강경 정신희유분16)②須菩提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以用布施 是人所得福德 寧 수보리 어의운하 약인만삼천대천세계칠보이용보시 시인소득복덕 영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即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 위다부 수보리언 심다 세존 하이고 시복덕 즉비복덕성 시고여래설복덕多 若復有人 於此經中受持乃至四句偈等 為他人說 其福勝彼 何以故 須 다 약부유인 어차경중수지내지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승피 하이고 수菩提 一切諸佛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皆從此經出 須菩提 所謂佛보리 일체제불 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개종차경출 수보리 소위불 法者 即非佛法(金剛經 依法出生分제8)법자 즉비불법(금강경 의법출생분제8)③如來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誑語者 不異語者 如來所得(所說)法 여래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여래소득(소설)법此法無實無虛(金剛經 離相寂滅分제14)차법무실부허(금강경 이상적멸분제14) ①眞語者 : 二行永絕 十力證得 如己所證 還為人說 진어자 : 이행영절 십력증득 여기소증 환위인설②實語者 : 爲聲聞人 說四諦法 斷三界結 得滅盡定 실어자 : 위성무인 설사제법 단삼계결 득멸진정③如語者 : 爲諸菩薩 說眞如法 如理不謬 故云如語 여어자 : 위제보살 설진여법 여리불유 고운여어④不異語者 : 說授記法 終無差錯 云不異語 (金剛仙論) 불이어자 : 설수기법 종무차착 운불이어 (금강선론) 그런데 본래 불교는 금강경에서 여래는 진어자(眞語者), 실어자(實語者), 여어자(如語者), 불이어자(不異語者) 이런 말이 있는데, 이상적멸분 제14(金剛經 離相寂滅分제14)에서 한 말이거든요. 그럼 여래는 뭘 설했냐. 이게 이제 금강경에서 하는데, 진어자라는 것은 참말을 하는 분이 여래다. 진어, 참 진자, 말씀 어자. 그럼 참말이 뭐냐. 여래는 이행이 영절하고(二行永絕), 두 가지 행위가 영원히 끊어지고. 두 가지 행위는 뭐냐. 취하고 버리는 거, 이거 취하고 이거 버리고, 이거 취사 행위인데 여래는 취사를 안 해요. 그래서 취행, 사행 이 두 가지 행위가 영원히 끊어졌어. 그거 왜 그러냐. 이거 취하고 저거 취하는 것은 무슨 일 때문에 그러냐 하면은, 상에 상이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서 여래가 취사를 안 하는 것은 상에서 상이 없는 진실을 깨달았다. 이걸 통달무상이라고 그래요. 무상을 통달했다. 이게 핵심인데, 여래가 뭘 깨달았느냐. 상에 상이 없음을 깨달았다. 꿈에 꿈이 없고, 죽음에 죽음이 없고, 삶에 삶이 없고, 하늘에 하늘이 없고, 땅에 땅이 없고, 이게 무상법인데 이걸 통달했어요. 근데 이게 상인데(컵을 들어보이시며), 이렇게 보면 상인데, 여기서 무상을 보는 것이 반야지견이에요. 이거를 인식하고 분별하는 것이 의식 분별이에요. 아, 이거 이런 말 조금 오래 하면 조는데. 의식분별로 보면 반드시 이게 그릇이고, 뭐 상인데, 이게 반야지견으로 보면 이건 무상이에요. 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통달 무상을 하면 생사해탈을 해요. 생사에 생사가 없어. 이 무상법을 몰라가지고 이 상에 속아서, -속는 걸 미혹이라고 하거든요.- 이 상에 속아서 온갖 고생을 다 하는 거예요. 장미가 좋다더니 꺾어보니 가시로다. 사랑이 좋다더니 따라가 보니 눈물이다. 전부 이게 상에 상이 없음을 몰라가지고 그런 거예요. 젊음이 오래 안 가는데 무조건 그냥 죽자 사자 쫓아갔는데, 며칠 있으면 젊음도 없어지고, 기쁨도 없어지고, 이 모양으로 이렇게 하는 걸 이걸 생사윤회라고 그래요. 그래서 상에서 상이 없는 걸 깨달으면 생사 해탈이에요. 상에 상이 없는 걸 반야로 본다고요. 그 지혜로, 반야로. 생각으로는 분별하고, 반야는 견공을 해, 공을 봐. 공이라는 건 불생불멸이거든요. 반야로 딱 보면 불생불멸인데, 의식으로 분별하면 저게 형상이야, 형상. 형상만 보지 공을 못 봐. 그래가지고 그 공을 보니까 거기서 뭐가 생겼느냐. 큰 여래의 열 가지 지혜가 생겼어요. 이걸 십력(十力)이라고 그래요. 열 십자, 힘 력자. 지혜는 힘이다. 그래서 십력을 증득(十力證得)했다. 이행을 영원히 끊었다. 이걸 여래로 표현하거든요. 그래가지고 여기소증(如己所證)으로, 자기의 증득한 바와 똑같은 내용으로, 환위인설(還為人說)이라, 도리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얻은 거와 똑같이 얘기를 하기 때문에 진어자라는 거예요. 참말을 하는 것이 여래라는 거예요. 그리고 실어자(實語者), 진실한 말을 하는 이다. 그리면 성문들을 위해서 사성제법을 설하는데(說四諦法), 이 성문들이 이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에 집착하는 번뇌를 딱 끊고(斷三界結), 멸진정을 딱 증득해서(得滅盡定), 삼계 생사를 면했어요. 근데 무명 생사만 남아 있지, 삼계 생사는 다 끊은 것이 아라한이거든요. 그래서 사성제를 말한 것이 실어자다 그러고. 여어자라고 하는 것은 ‘너는 앞으로 뭐가 될 거다, 너는 앞으로 뭐가 될 거다,’ 이게 수기법(授記法)인데, 이게 하나도 틀리는 법이 없어요. 현재를 보면 미래를 알아. 현재를 보면 과거를 알고. 이게 삼세수기거든요. 수기라는 건 줄 수자, 기록할 기자. 기록이라는 건 사연인데, ‘너는 앞으로 무슨 사연이 올 거다, 너는 앞으로 무슨 사연이 올 거다’, 지금 딱 보면 미래가 보여. 그래서 이 수기법인데, 이거는 종무차착(終無差錯)이라. 수기법에 절대로 이게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없다. 그래서 불이어다. 금강경에는 불광어(不誑語)라고 하는 게 있는데, 이 네 개를 다 합치면 속이지 않는 말이다 이런데, 다른 번역에서 네 개뿐이 없어요. 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이어자. 이런 설법을 한 것이 여래다. 이렇게 금강경에서 분류를 했으니, 이 경의 말씀이니까 따르고. 그럼 우리는 이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상에서 상이 없음을 깨달아야 돼요. 모든 상에는 상이 없어요. 이게 연기법이에요. 왜냐. 인연으로 일어난 거기 때문에. 그래서 무상이라는 걸 다른 말로 하면 인연법이라는 얘기에요. 저게 뭐 실체가 있는 게 아니고, 저렇게 일어날 만한 인연이 모여서 저렇게 일어난 거니까, 저것이 흩어질 만한 인연이 생기면 흩어진다. 그러니까 없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없고, 있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있으니까, 있고 없는데 아무런 실제 형상이 없다. 이걸 통달 무상이라고 하거든요. 무슨 소리인지. 이 몸에 몸이 없어요. 그럼 뭐냐. 잊고 없는 걸 초월한 진여법만 있는 거예요. 진여법. 있고 없는 걸 초월해 있어. 참으로 아는 지혜는 알고 모르는 걸 초월해 있어요. 그건 예를 들면, 참으로 듣는 거는 듣고 안 듣는 걸 초월해 있다. 우리가 보통 듣는 거는 막 소리가 나면 듣는다고 그러고, 소리가 안 나면 못 듣는다고 하잖아요. 근데 그 듣는 거는 소리가 안 날 때는 소리 안 나는 조용한 거 그걸 지금 듣고 있는 거예요. 이건 경에 밖에 안 나와요. 있을 때는 있는 거 보지만 없을 때는 없는 것도 봐요. 뭐 문 탁 열어보고 사람 없으면 ‘아무도 없네요’, 그래요. 그럼 그때 못 봤냐. 본 거예요. 뭘 봤냐. 아무도 없는 거 그거 본 거예요. 그래서 살 때는 사는 거 알지만, 죽을 때는 죽는 거 아는 거, 그게 지혜예요. 아 이거 이거 심각한데 이거. 무서워하잖아요, 죽을 때. 그 왜 무서워하냐. 그 죽는 것이 무슨 이상한 걸로 보니까 무서운 거예요. 사는 거 하고 죽는 거하고 똑같다. 사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살고, 죽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죽는데, 단 거기서 변함이 없는 것은 살 때는 사는 거 알고, 죽을 때는 죽는 거 알고, 또 있을 때는 있는 거 보고, 없을 때는 없는 거 보고. 그거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여여상견 상주법계. 여여히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이게 같을 여자 두 개 써서 여여법이라고 해요, 여여. 상견, 항상 봐. 또 상주법계에요. 항상 머무는 법계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여여상견 상주법계. 그걸 떡 증득하고 있으면 생사거래라는 게 저 허공에 뜬구름과 같은 거예요. 뜬구름은 왔다 갔다 하지만 허공은 뭐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문제는 왜 인생이 괴로우냐. 상에 상이 없다는 거 못 깨달아서. 그럼 어떡하면 깨닫냐. 간단해요. 마음을 딱 그쳐. 그치면 조용해져요. 그러면 상에 상이 없는 게 환하게 보여요. 이게 괴로움이 뭐와 같으냐 그러면, 맑은 물에 먼지 섞인 거 같은 건데, 맑은 물에 먼지를 섞으면 어떻게 되냐. 막 물이 탁하고 안 좋잖아요. 그럼 그놈을 맑히려면 어떻게 해야 돼야. 이거 흔들면 안 돼요. 가만히 놔두면 이걸 지수라고 그래요. 그칠 지, 물 수자. 그친 물이다. 물을 딱 흔들지 말고 그치면, 그쳐놓으면 먼지가 아래로 싹 가라앉아요. 근데 그 상태는 이제 마음을 딱 챙기면 조용하다가, 막 움직이면 다시 시끄러워지고 이런 상태인데, 거기서 더 깊이깊이 먼지 흙가루가 가라앉으면, 이게 가라앉은 그 흙먼지 부피가 아주 작아져요. 그래서 신경질이 자꾸 줄어들면 그게 공부된 거예요. 신경질이 왜 나느냐. 상에 상이 없는 걸 몰라서 나는 거거든요. 지 마음대로 얻으면 크게 좋을 것 같은데, 인간은요, 물질이 아니라 생각이기 때문에, 지가 원하는 거 얻어봐도 금방 또 싫어져요. 이걸 모른다고. 알면 어쩔건데. 뭐 별수 없지 뭐 알아도. 왜냐면 거기서 못 벗어나니까. 알아도 못 벗어나요. 몰라도 못 벗어나지만. 그러면 점점 이게 가라앉은 먼지 가루가 줄어들면 웬만해서는 화도 안 나고 걱정도 안 돼. 웬만하면. 그런데 이제 누가 칼을 들고 와서 목을 벤다고 그럴 때 화가 나거든. 그건 그 흙덩어리가 밑에 가라앉아 있다는 거야, 완전히 안 없어지고. 그러면 이제 이걸 맑은 물만 싹 따로 이제 덜어내고, 그 흙덩어리를 완전히 버려서 완전히 지수가 아니라 정수가 돼서, 깨끗할 정자, 물 수자, 정수가 되면 아무리 흔들어도 전혀 더러운 게 안 올라오잖아요. 그 상태예요. 그래서 이 마음 공부는 명경지수와 같이 하라. 지수는 물을 그치는 거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생각을 딱 그치고, 앞에 뭐 인상을 쓰고 쳐다보지도 말고. 눈을 딱 감고 인상 쓰고 뭐 하지도 말고. 그냥 그치고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이게 지수예요. 그친 물이다. 명경이라는 거는 뭘 덮지 말고 묻히지 말고 그대로 밝은 거울 그대로 놔두면 이게 밝은 거울이에요. 거기다 먼지 하나라도 붙이고, 뭐 수건 하나라도 덮으면 명경이 아니에요. 이거 아무것도 그때 붙이지 말고, 가리지 말고, 그대로 놔두면 이게 명경이거든요. 그래서 마음에도 좋은 생각이든지, 나쁜 생각이든지, 과거 생각이든지, 현재 생각이든지, 아무것도 거기다가 들러붙게 하지 말고, 덮어씌우지 말고, 쫓아가지 말고, 딱 그치면 밝은 거울처럼 환히 나타나고, 그친 물처럼 맑아진다. 그래서 이걸 한자로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그래요. 명경이라는 건 밝은 거울이라는 말이고, 지수라는 건 그친 물이라는 소리예요. 어떤 사람은 모르고 지수가 명경에다가 물 뿌린 거라고 하는데, 그 천만에 말씀. 명경에 물 뿌리면 거울이 안 보여요. 그게 이제 부처님이 눈을 뜨지도 않고 감지도 않고, 감아서 뭘 피할 것도 아니고, 떠서 쫓아갈 것도 아니고, 그래서 여래의 눈을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감는 건 피하는 거고, 눈에 인상 쓰고 불 키는 건 쫓아가는 거잖아요. 근데 이 상에 상이 없는 무상법을 떡 알고 나면, 피할 것도 없고 쫓아갈 것도 없어 그래서, 턱하니 이게 이제 해탈 열반의 모습을 불상으로 표현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불상 만드는 사람이 굉장히 그 지혜가 깊어지고 원력이 깊어지고 신심이 깊어졌을 때 좋은 불상이 나와요. 그냥 뭐 술 먹고 놀다가 노래 부르고 놀다가 불상 만들려면 잘 안 만들어져. 그게 이제 산란한 생각이 앞을 자꾸 가리거든. 신라시대 이때는 불심이 높아서 전부 불상마다 명작들이에요. 수준이 굉장히 높단 말이에요. 참 이상하지. 아주 이상해요. 석굴암 불상 같은 게 안 나와요 요새는. 왜 안 나오냐. 그만큼 정신세계가 따라가지 못해서 그래요. 탁 보면 눈도 인상 쓰고 앞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눈 딱 감고 뭐 피하는 것도 아니고, 떡하니 참 희한하게 그렇게 해탈 열반을 표현을 해요. 그래서 여래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寧受地獄苦 得聞諸佛名 不受無量樂 而不聞佛名 영수지옥고 득문제불명 불수무량락 이불문불명所以於往昔 無數劫受苦 流轉生死中 不聞佛名故 소이어왕석 무수겁수고 유전생사중 불문불명고(華嚴經 須彌頂上偈讚品)(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 그러면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華嚴經 須彌頂上偈讚品)이라고 하는 데가 있는데, 거기에 뭔 말이 있냐면, 영수지옥고하고 득문제불명이언정(寧受地獄苦 得聞諸佛名), 차라리 지옥고를 받고, 여러 부처님의 명호를 들을지언정. 여래명호가 뭐냐. 이미 해탈하고 열반을 증득해서 무상법을 통달하여 시현세간이라, 세간에 나타나는 분을 여래라고 하거든요. 그럼 그 여래가 일체중생이 다 그렇게 될 수 있는 희망의 등불을 지금 보인거다 이거죠. 희망의 등불. 그래서 불수무량락(不受無量樂)하고 이불문불명(而不聞佛名)이라. 이 세상에서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으면서 부처님 명호 듣지 않는 것은 내가 안 하겠다. 이게 이제 보살의 서원인데 이런 말이 있어요. 그래서 뭐 경전을 많이 외우고 이거보다도 석가모니불 그러면 이거는 상에서 무상을 통달하고, 취하고 버리는 행위가 영원히 끊어지고, 온갖 지혜를 성취한 그런 아주 명명백백하게 표시 증거를 하는 분이다. 이러니까 우리의 미래가 석가모니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나도 무상법을 통달할 수 있고, 번뇌망상을 끊을 수 있고, 무량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불명을 듣는다는 게, 부처님 명호를 듣는다는 게 그렇게 소중하였기 때문에, 지옥고를 받으면서 부처님 명호를 들을지언정, 무량락을 받으면서 부처님 명호 안 듣는 일은 난 절대로 안 하겠다. 이런 서원이 있어요. 그다음에는 소이어왕석(所以於往昔)의 무수겁수고(無數劫受苦)는, 옛날에 무수한 지난 세월 동안에 한량없는 고통을 받아서, 유전생사(流轉生死中)는, 생사 중에 돌고 또 돌고 한 것은, 불문불명고(不聞佛名故)라, 부처님의 명호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게 이제 사찰에서 하는 신심불교, 원력불교, 공덕불교, 서원불교인데, 사찰불교는 뭘 알아내려고 연구하고 논문 쓰고 발표하고 그게 아니에요. 내가 스스로 믿고, 그 세계를 이루어가는 게 이게 사찰불교거든요. 대학 불교는 이게 증명이 안 되기 때문에, 이건 어떻게 발표할 수도 없고, 시험 볼 수도 없고, 또 학점 매길 수도 없고, 이거 안 돼요. 그래서 불교가 대학에 가면 과학이 돼요. 불교가 사찰에서는 이렇게 신심, 원력, 실천, 성취, 이런 쪽으로 가서, 이런 법문을 딱 듣고, 석가모니불, 화엄성중, 뭘 하든지 하면, 이거는 이제 마음이 석가모니불 할 때, 이렇게 염불을 하면 거기에는 선정과 지혜가 따라온다. 석가모니불 할 때는 그 순간은 자연히 망상이 안 일어나요. 그런 부분은 마음이 이미 그쳐진 거예요. 그래서 그걸 선정이라고 그래요. 선정. 그러면 이제 자꾸 하다 보면 마음이 맑아져서, 맑은 생각이 계속 일어나. 이걸 지혜라고 그래요. 그래서 염불을 하다 보면 염불을 할 때는 언제든지, 염불을 하는 게 먼저 일어나요. 그걸 지혜가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에 선정이 따라온다. 근데 이제 참선을 할 때는 먼저 그쳐요. 선정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지혜가 있어요. 이게 틀려요. 경을 볼 때도 지혜가 먼저 있는 거예요. 금강경은 금강경을 죽 보면 그게 지혜인데, 보다 보면 다른 망상이 안 일어나니까 마음이 조용하게 그쳐져서 선정이 따라와. 그래서 선정이 먼저냐 지혜가 먼저냐, 지혜가 먼저냐 선정이 먼저냐. 이게 선후는 참선이나 간경이나 염불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내용은 똑같아요. 나무아미타불을 하면 선정을 일부러 안 따라도 그 나무아미타불을 하는데 선정이 들어 있어요. 그게 사찰불교예요. 그러니까 가만히 마음을 돌아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용해져요. 물로 말하면 그 먼지가 물 꼭대기만 조금 조용해도 맑은 물이 보이잖아요. 그래서 조금만 마음을 그치고 있어도 굉장히 마음이 편안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이제 누가 옆에서 탁 건드리면 신경질이 확 나지. 그건 이제 깊이 그 먼지가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근데 이제 먼지가 점점 깊이 가라앉으면 웬만해서는 신경질 안 내요. 그런데 누가 목 내놓으라고 달려들면 신경질이 확 나거든. 그런데 그 번뇌망상이 완전히 싹 없어졌을 때는 목을 아무리 끊어가도 무상법을 통달했기 때문에 아무 장애가 없어요. 이게 무장무애예요. 뭔 소리인지. 먼 나라 얘기다. 먼 나라 얘기인데 이게 어려운 게 아니고요, 안 되는 게 아니에요. 안 해서 안 되는 거예요. 누가 그러잖아, 고양이가 나갔는데, 누가 옆에서 ‘고양이도 생물이라 사랑을 줘야 된다’ 이러잖아요. 그러니까 그 주인이 ‘고양이 저한테 줄 사랑이 어딨어’ 이랬거든. 근데 그건 모르는 소리예요. 사랑이라는 거는 어디 창고에 쌓아놓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하다 보면 할수록 사랑이 점점 생기는 게 사랑이에요. 사랑이 하면 할수록 생기는 거지 어디 쌓아놓은 걸 보고 예금한 거 꺼내다 쓰듯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뭔 소리예요. 몰래 박수 치는 거예요. 지금 박수를 같이 쳤으면 내가 기분이 좋았을건데. 사랑은 쌓아놓고 하는 게 절대로 아니에요. 하면 생기는 게 사랑이에요. 하면 생겨. 그렇듯이, 이 기도나 이런 것도 기도가 안 된다고. 그게 아니에요. 안 해서 안 되는 거예요. 하면 돼요. 경도 자꾸 읽으면 마음이 조용해지고 머리가 맑아져. 그런 거예요. 그게 이제 석가모니가 원했던 해탈 열반이지 다른 목적을 위해서 한 건 아무것도 없다.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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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3월 22일 윤2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3-03-22
안녕하십니까. 계묘년 윤이월 초하루 진관사 법회 법문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게 이제 상당히 중요한데, 부처님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여래소설법(如來所說法)이 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이 있다, 그게 경전이거든요. 근데 여래 소설법이 어디서 나왔냐. 여래 소득법(如來所得法)에서 나왔다. 얻은 바 법. 여래가 깨달음을 이루셨는데, 그 깨달음으로부터 말씀이 나왔다. 그래서 어떨 때는 여래소득법이라고 설명한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여래소설법이라고 설명한 때도 있는데, 그것만 가지고 잘 몰라요. 금강경에 보면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라고 하는 데서, 여래소설법은 불가취(不可取)다, 취할 수가 없다, 불가설(不可說)이다, 말할 수가 없다, 비법(非法)이다, 법도 아니다, 비비법(非非法)이다, 비법도 아니다.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저 뒤에 가면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제22라고 하는 금강경이 있는데, 거기는 무슨 말씀이 있냐면, 아어아뇩보리(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무유소법가득(乃至無有少法可得)이니, 아주 조그만한 것도 내가 얻은 바가 없으니,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다,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것이 여래의 깨달음이다, 이랬어요. 내가 깨달음에서 무유소법가득이라, 아주 작은 것도, 가득이라는 건 얻은 건데, 얻은 게 없다. 그걸 일러서 여래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래 놨으니 여래의 깨달음이 과연 어떤 거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이게 이제 문제가 되니까 대승불교에서는 여래가 어디에 몸을 쉬는가, 그게 여래의 불토(佛土)인데, 불토를 불찰(佛刹)이라고 하거든요. 사찰 찰자. 여래의 불찰만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가 있는데 그게 정토종이에요. 그거를 한자로 쓰면 연꽃이라는 연자, 종파라는 종자, 연종(蓮宗)이라고 그래요. 연종은 불찰이다. 불찰 가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고, 그것만을 중심으로 할 때, 그게 정토종이 돼요. 그리고 여래의 깨달음을, 이제 법을 중심으로 해서 깨달은 법, 그걸 화엄종이라고 그러는데, 그거는 다 통한다고 둥글 원자 하나 써가지고 원종(圓宗)이라,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그게 여래의 깨달은 내용을 대승불교식으로 설명하는 게 법성원융무이상이에요. 그래서 그거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하다. 여래의 깨달은 내용인데, 그게 해인삼매다. 법성원융이다. 그래서 그런 화엄을 중심으로 하면 그걸 원종이라 그러고, 여래가 머무르는 세계를 중심으로 하면 그걸 정토종, 연종이라고 그러고. 그럼 여래가 머무는 거는 극락세계고, 여래가 말씀하신 건 법성원융, 원융무애, 원종이라고 한다면 여래의 마음만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가 있어요. 그걸 선종(禪宗)이라 그래요. 극락세계도 치우고, 법성원융도 치우고, 순전히 여래의 마음, 그걸 중심으로 하는 분을 조사(祖師)라고 그러는데, 그 조사가 중심이 되는 종단이라고 조종(祖宗)이라고 하거든요. 조종. 조사라는 할아버지 조자. 그건 왜 조종이냐. 명 불심종(佛心宗)이라. 부처님 마음을 밝히는 종파다. 다른 건 다 안 해요. 불심만 밝혀. 이렇게 연종, 원종, 조종, 이게 이제 대승불교의 아주 핵심이에요. 오로지 부처님 계신 곳을 내가 가야 되겠다. 그러면 그게 정토종인데 염불만 하면 부처님 계신 국토에 가요. 부처님이 깨달은 해인삼매를 내가 알아봐야 되겠다 그러면 이제 법성원융무이상, 화엄삼매에 떡 들고, 화엄경을 공부하면, 처음이 끝이고, 끝이 처음이고,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고, 일순간이 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순간이고. 이걸 정리해 놓은 게 의상스님이 원교종요(圓敎宗要)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원교 해인삼매의 말씀이 화엄경인데, 화엄경에 종이라는 건 근본이라는 말이고, 요라고 하는 건 허리라는 말인데, 아주 근본 뿌리에 해당하고 줄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원교종요. 화엄법성도, 그게 의상스님의 저술인데 이게 어렵단 말이에요. 이게 극락세계에도 내가 가야 아는 거고, 원종도 화엄삼매에 들어야 알고, 이제 여래의 마음을 근본으로 하는 것도 조사의 마음에 들어가야 그걸 계합(契合)이라고 그러는데, 계약할 계자, 합할 합자. 그러니까 어려워요. 釋迦如來八相成道석가여래팔상성도兜率來儀相 昆藍降生相 四門遊觀相 逾城出家相 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 사문유관상 유성출가상雪山修道相 樹下降魔相 鹿苑轉法相 雙林涅槃相 설산수도상 수하항마상 녹원전법상 쌍림열반상護明菩薩 : 不受福德 發菩提心 常修功德 恒時廻向 호명보살 : 불수복덕 발보리심 상수공덕 항시회향(釋門儀範上, 莊嚴念佛)(석문의범상, 장엄염불) 鑽木而得火 掘地而得水 찬목이득화 굴지이득수精勤正方便 無求而不獲 정근정방편 무구이불획世間無救護 中貪愛癡毒 세간무구호 중탐애치독哀愍衆生故 求智慧良藥 애민중생고 구지혜양약(佛所行讚破魔品제13)(불소행찬파마품제13) 그래서 이제 한 가지 또 방법이 여래소설법, 여래소득법, 이런 거 말고 여래소행법(如來 所行法)을 한번 보자. 여래가 행하신 법. 그래서 그 많은 경전 이거 말고, 이제 여래가 어떻게 태어나셔서 어떻게 해서, 어떻게 계시다가, 어떻게 가셨나. 이게 이제 불소행(佛所行)이라고 그래요, 불소행. 부처님이 행하신 바, 마명보살이 불소행찬을 지었는데 그 불소행찬(佛所行讚)을 8가지로 딱 구분해서 설명한 걸 팔상성도(八相成道)라고 하고, 그건 불소행찬을, 부처님이 행하신 바를 찬탄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걸 여덟 가지로 구분을 했어요. 이렇게 마명보살 불소행찬을 팔상성도로 구분해가지고. 우리나라 큰 절에는 팔상전이 거의 다 있어요. 이게 아주 좋은 방법이에요. 여래가 행하신 바를 보면 짐작할 수가 있고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그게 이제 여덟 가지로 했는데, 장엄염불을 할 때 이 석가여래의 팔상성도를 이제 하는데 이게 참 좋아요. 장엄염불에 석가여래 팔상성도예요.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이 얼마나 좋아. 그 여덟 가지만 외우면 부처님 일생이 환하게 들어오거든요. 그게 하나의 방법이에요. 그럼 첫 번째는 부처님이 도솔래의상이라고, 도솔천인데 참 재밌어요. 도솔이라는 말은 지족(知足)이라는 뜻입니다. 알 지자, 만족할 족자. 그래서 도솔암이라는 데도 있고 지족암이라는 데도 있어요. 같은 소리예요. 그럼 모든 그 정신적 능력은 만족하는 데서 생긴다. 부처님이 오신 데가 지족천, 도솔천이에요. 그래서 만족했어요. 거기서 도솔천에서. 그런데 만족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두 가지 현상인데, 하나는 만족을 소유해서 타락하는 경우가 있고, 만족에서 깨달음을 늘 간직해서 거기서 또 새로운 길로 가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타락하지 않고 도솔천에서 잘 계셨다고 해서, 보호할 호자, 밝을 명자, 호명보살(護明菩薩)이라고 해요. 호명이라는 말은 마음이 늘 깨어 있어서 그 밝은 마음을 늘 간직하고 보호하고 있었다. 그래가지고 호명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거냐. 온갖 게 풍족한 데가 도솔천인데, 도솔천에 계실 때 불수복덕(不受福德)이라, 복덕을 하나도 안 받았다. 이 복덕을 받아버리면 타락해요.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지위를 누리지 않고 재산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게 성자예요. 지위를 안 누려. 늘 사람들과 지위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다가가. 그게 호명보살이에요. 재산이 많은데 그걸 쓰지를 않아. 청빈해. 그래서 그 지위도 높고 재산도 많은데, 늘 청빈 겸손을 하면 그게 호명이다. 돈 있다고 펑펑 쓰면 그건 타락하는 거고, 직위 높다고 권한을 부리면 그건 타락이에요. 그렇게 해서 왔다 이거예요, 호명보살로. 그래 가지고 늘 또 상수공덕(常修功德)이라, 늘 공덕을 닦아. 그리고 또 항시회향(恒時廻向)이라, 항상 닦은 공덕을 내가 안 쓰니까 돌려줘, 다. 그럼 거기서 오래 계셔도 될 텐데 아니다 이거예요. 도솔천보다 고통이 있는 사바 세계로 가야 되겠다. 그래서 이제 온 게 올 래자, 의식이라는 의자인데, 그게 옥편에 보면 의식 의자가 <올 의> 그렇게 돼 있어요. 온다는 뜻이고. 올 래, 올 의. 도솔천에서 내려오는데 어떻게 내려왔냐. 코끼리를 타고 내려왔어요. 코끼리. 불교에 동물의 아주 상징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사자요, 하나는 코끼리인데, 사자는 깨달음을 이루어서 설법하는 걸 상징한 게 사자예요. 그래서 사자후라고 그래요. 근데 수행하는 거는 코끼리예요. 코끼리라는 놈이 재밌는 게, 아무리 물이 깊고 물살이 세도 헤엄치는 법이 없어요. 이 놈이. 한 발짝 한 발짝, 뛰는 법도 없고, 다 더듬어서 깊은 곳은 깊은 곳대로 밟고 가고, 얕은 곳은 얕은 곳대로 밟고 가고, 그걸 수행에다가 비유한 거예요. 그래서 수행은 건너뛰는 법이 없어요. 다 마주해서 거기서 지혜를 얻는 게 수행이거든요. 도망가는 건 수행이 아니에요. 마주해서 지혜를 얻는다. 코끼리를 타고 턱 오셔서 이제 사바세계에 강생을 하는데, 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昆藍降生相), 룸비니에서 강생을 하는데, 강생이라는 게 이제 완전히 도솔천 천신이 아니라 사바세계 인간의 모습으로 강생했다. 내릴 강, 태어날 생. 그러니까 나보다 한 단계 낮은 데로 가야 그게 깨어 있는 사람이에요. 높은 데로 가서만 계속 따라다니면 그건 죽은 사람이에요. 그건 정신적으로 이미 죽었다. 그러니까 강생을 한 거예요. 상생을 한 게 아니라. 높은 데 가서 난 게 아니라 낮은 데로 와서 났다 이거지요. 그렇게 부처님의 생애를 정리하고 있어요. 그다음에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인데, 이 세상에 어떤 문제가 있나. 생로병사가 있다. 아, 이게 생로병사가 있는 한 인간의 성공과 인간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무 쓸모가 없다. 정반왕은 국왕의 목적을 가지고 있고, 자기 어머니는 그 집안이 뭐 화목하고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고, 자기 아내는 부부의 사랑과 아이 양육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생로병사를 보고 난 후에는, 이 생로병사를 해결하기 전에는 죽음을 앞에 둔 시한부 인생이 성공을 한들 뭐하며, 소유를 한들 뭘 하겠냐. 이게 이제 꽉 꽂힌 거죠. 이게 이제 코끼리가 가는 길이에요. 생로병사를 마주했으면 이거를 그냥 피해 가고, 덮어두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걸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뭐 술을 많이 먹는다든지, 쾌락에 많이 또 치우친다든지 그게 아니에요. 이 생로병사, 이 놈이 뭐야 이게. 죽음이라는 게 이게 뭐야. 딱 마주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속적인 방법으로는 이걸 해결할 길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문유관상이라고, 동서남북에서 이걸 보고 난 뒤에는,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아버지 노릇 해가지고도 안 되고, 그래서 석가모니, 아버지 노릇 안 했어요. 아주 웃기는 사람이에요. 아들은 낳는데 아버지 노릇을 안 했어. 이런 수가 어딨어요. 남편 노릇도 안 했어요. 남편인데도 남편 노릇 안 하고, 아들인데도 아들 노릇 안 했어요. 정반왕 아들이잖아요. 이게 참, 이게 말이 안 돼, 내가 볼 때는 이거. 아들 노릇도 안 한다, 남편 노릇도 안 한다, 아버지 노릇도 안 한다, 왕을 물려받으니 왕 노릇도 안 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오직 생로병사 이거 해결하는 길로 들어선단 말이에요. 근데 다른 사람은 생로병사 이건 관심이 없어요. 어떻게 왕을 하느냐, 어떻게 자식을 키우느냐, 어떻게 부부가 사랑을 나누느냐, 가정을 어떻게 이루느냐, 이것만 관심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부처님은 관심 없어요. 죽음 앞에 부부가 뭐며, 가정이 뭐며, 왕이 뭐냐 이거에요. 참 희한한 분이에요, 이분이. 그 팔상성도 그걸 보면 그렇게 기술하고 있어요. 이건 문학도 최고의 문학이고 철학도 최고의 철학이에요. 또 종교도 최고의 종교예요. 이거 안 움직이면 이게 철학과 무슨 문학으로 끝이는데, 이걸 움직이면 종교가 되는 거예요. 움직이면. 그래서 한 게 이제 유성출가(逾城出家)에요. 출가는 모든 걸 버린다는 거예요. 출가라는 게 집 떠나는 게 아니라, 다 버리는 게 출가예요. 그런데 전부가 다 그 생로병사 하라고 하는 동의하는 사람이었거든.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부처님도 좀 비겁해요. 밤에 월장으로 도망갔어. 담 넘어서. 부처님이라고 다 위대한 게 아니에요. 아버지 노릇 안 한 거로 보면 그 위대한 거 아니라고 그게. 그 사람이 전부가 위대해야 될 필요가 없는 거예요. 하나만 잘하면 되는 거예요. 그 어떤 사람은 내가 못하는 게 많다고. 못하는 게 많은 게 당연하지. 왜 잘해야 되는데요. 잘하는데 노예가 될 필요가 없어요. 왜 잘해야 돼. 그 석가모니 보면 다른 거 다 팽개치고, 오직 생로병사 하나 해결한 거 그거에요. 그 유성출가를 했다고. 유성출가를 하는데, 성을 넘어서 출가를 했어. 근데 유성출가가 이렇게 재미있어요. 이렇게 아주 통쾌해. 다른 사람 다 동의 안 하고 다 못 하게 해도 나는 하는 거에요. 이게 살아있고 깨어있는 정신이거든요. 그리고 설산(雪山)에 들어갔어요. 설산에 갔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성은 나왔지만은, 태자의 의복이 그대로 있고, 태자의 머리가 그대로 있고, 이런 거예요. 그래서 머리를 깎아요. 그 머리를 깎는 거는 그 신분에 따르는 이익을 버린다는 거예요. 이게 머리라는 게 신분을 말하는 거거든요. 또 옷을 벗는다는 거는 사회의 지위를 버린다는 거예요. 근데 이걸 어디서 수행자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되나 보니까, 수행자가 옆에 있어요. 그래서 “그 옷을 나하고 바꿔 입을 수 없느냐” 그러니까, “좋다”고. “그럼 당신은 수행자 옷이 없으면 뭘 입고 수행할 거냐?” “아, 나는 수행자가 아니고, 수행자 옷을 입고 사냥을 하면 동물들이 안 도망가서, 내가 사냥 쉽게 하려고 이거 입은 거다.” 이래요. 여기에서 또 큰 문학적인, 철학적인 의미가 있어요. <옷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꿔 입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누릴 수 있는 건 이제 하나도 없는 거예요. 머리 깎아서 신분도 버리고, 또 옷을 다 바꿔가지고 사회 지위도 버리고, 이제 진짜로 된 거지. 그다음에는 이걸 누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찾아다니게 되는 거죠. 이게 이제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인데, 설산이라는 게 저 히말라야 눈 덮인 게 아니에요. 거기 간 일이 없어요. 저 성자들이 많고, 사상가가 많고, 고행자가 많은 사람을 찾아다닌 거거든. 그래서 보니까 선정주의자도 있고, 고행주의자도 있고, 논리주의자도 있고, 많은 사람이 있어요. 다 만나봐도 생로병사가 해결이 안 돼요. 그 사람들도 지금까지 배운 거, 익힌 거 다 버려.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닌 한, 지금까지 뭘 익혔어도 다 버려버려요. 이것도 참 이게 희한해. 보통 자기 지식이 신통찮다고 느껴져도 그거 주장하는 사람도 많아요. 쓸모없는 거. 쓸모없는 지식을 주장할수록 소리를 더 크게 높여. 큰 소리로 말하는 거 절대 들으면 안 돼요. 옛날에 어명을 전할 때 큰 소리로 전하는 법이 없어. ‘어명이요’ 하면 그냥 온몸이 바르르 떨리지. 근데 내용 없는 말은 크게 떠들어도 하나도 겁도 안 나. 그래서 이제 ‘아, 이 문제는 배워서 되는 게 아니구나.’ 이제 마지막에 선정을 깊이 드는데, 고행과 선정을 함께 닦자. 이제 배우려야 배울 데도 없고, 구하려야 구할 데도 없으니까 일어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 얼마나 안 일어났는지, 팔상성도 그림에 보면 부처님 머리에 새가 앉아 있어요. 참 이게 피카소가 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절에 가니까 있더라니까. 피카소는. 발상이 이거 얼마나 이게 상징적인 발상인지, 머리에 새가 딱 앉아 있어요. 통도사에도 팔상전이 있는데 그 새가 앉아 있어. 하도 그게 좋아서 어느 책 내는데 그걸 표지로 쓴 적이 있어요. 고행과 선정을 함께 하는데, 그 고행과 선정이라고 안 하고 팔상성도에서는 설산수도상 다음에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나무 밑에서 마구니를 항복시켰다. 이게 나오거든요. 깨달음이란 말도 없어요. 수하항마상, 그다음에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녹야원에 가서 법을 말씀하시고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구시나성(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드셨다. 이게 팔상이거든요. 世間五欲燒衆生 猶如猛火焚乾草 세간오욕소중생 유여맹화분건초亦如焰幻無有實 亦如泡沫不久停역여염환무유실 역여포말불구정四大五蘊假合成 筋骨相纏而暫有사대오온가합성 근골상전이잠유智者誰應貪著此 凡夫迷故生欲心 지자수응탐착차 범부미고생욕심如是諸幻我已知 是故於中不貪著여시제환아이지 시고어중불탐착欲求畢竟自在樂 今當於此證菩提 욕구필경자재락 금당어차증보리我已解脫於世間 如空中風難可繫 아이해탈어세간 여공중풍난가계(方廣大莊嚴經 降魔品제21) (방광대장엄경 항마품제21) 근데 여기서 이제 오늘 주목하는 게, 핵심이 수하항마상이에요. 항마. 항복이라는 건 없앤단 말이에요. 항이라는 건 없앤다. 마라고 하는 게 있어요. 마. 마라는 게 뭐냐. 이 녀석이 나쁜 놈인데, 쓸데없는 거 알면서도 구하는 게 있어요.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요게 마거든. 이제는 후회해도 어쩔 수 없네. 그게 마란 말이에요. 그거를 마주친 거예요. 안 되는 줄 나도 알아요, 이래요. 근데 나는 해요. 알면서 하는 경우에 마라고요. 그래서 뭐를 안 좋은 줄 아냐 하니까, 이제 선정에 딱 들고 보니까 이 몸이 무상하다 이건 알아. 근데 무상한데 버리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이 몸이 죽을 줄 알면서도 계속 몸에 매이는 게 그게 마거든요. 이 몸 죽을 줄 누가 몰라. 근데 몸이 막상 죽는다고 그러면 안 죽으려고 그래요. 이거 참 이게, 그래서 인간은 논리적이 아니에요. 그게 말이 되냐. 말은 논리거든요. 말 다 안 돼요. 자기만 안 되나. 다 안 돼요, 말이. 처음부터 말이 안 돼. 혼자만 말 안 되는 게 아니에요. 말은 논리란 말이에요. 뭐 며느리가 일 잘하면 기분이 좋은데, 딸이 시집에서 일 많이 하면 기분이 아주 나빠. 이게 말이 되냐고 이게요. 말 안돼. 그 말 안 되는데 좋은데 어쩔거여. 좋은데. 그렇잖아요. 사위가 처갓집에 와서 일을 잘하면 기분이 좋아. 근데 내 아들이 장인 장모한테 가서 일 많이 하면 아주 속이 뒤틀려서 밥맛도 없고 잠도 안 와요. 이게 말이 되냐고. 그러니까 말 안 된다고 탓할 거 없어요. 다 말이 안 돼요. 이게 이제 마구니거든요. 마구니. 그래서 이 몸이 색수상행식 오온인데, 오온은 무상하다. 근데 이 무상한 것을 붙들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느냐. 욕락(欲樂)을 구한다. 욕망의 즐거움을 구해요. 이게 이제 무상과 욕락이라는 아주 이율배반적인 게 인간에게 있는 거예요. 무상함을 느끼면 이거를 접어두고 딴 길을 찾아야 될 건데, 이 무상함을 뒤덮기 위해서 욕락을, 욕망과 쾌락을 얻어가지고, 이 몸의 무상함을 잠시 마비시키고, 잠시 덮어두고, 잠시 외면하고 살다가, 이제 무상이 들이닥쳐서 완전히 명줄이 끊어지면 그때는 후회해요. 그게 인생의 통곡이에요.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인생무상을 감당할 수 없는 순간에 울음이 나오는데 그걸 인생 통곡이라고 그래요. 근데 때는 늦었지. 그래서 이 무상과 욕락이 있다. 그래서 욕락을 불교에서는 그냥 오욕이라고 그래요. 오욕. 재색식명수, 이렇게 설명을 하는데, 재물, 사랑, 먹는 거, 명예, 편안한 거, 이거를 구한단 말이여. 인생무상을 해결하는 방법이. 그래서 그 기록에 보면, 오욕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을 다 태우는데, 그거는 맹화(猛火)와 같다. 아주 맹렬하게 불타는 불길과 같다는 거예요, 오욕이. 재물을 구하는 욕망의 불길, 쾌락을 구하는 욕망의 불길. 그건 왜 그러냐. 이 인생무상의 공포가 있어서 그래요. 공포가 욕락을 부른다. 이 몸이, 오온신상이라고 하는 것은 포말(泡沫)과 같다. 물거품과 같다. 그래서 이 물거품이 차 타고 가다도 꺼질 수가 있고, 잠들더라도 꺼질 수가 있고, 배고파서 꺼질 수가 있고, 이게 어느 순간에 사라질지 모른다는 거를 알아요.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걸, 그것이 생각이 나면 날수록 그 욕락을 더 맹렬하게 더 구해요. 그래서 오온 신상은, 오온의 몸 모습은 여포말이오, 물거품 포, 물거품 말, 포말과 같고, 탐애욕락은, 욕락을 탐애하는 것은 여맹화라, 사나운 불길과 같다. 범부는 미고로 생욕심(凡夫迷故生欲心)하고, 범부는 그걸 알기는 아는데 깊이 알지 못한다고, 미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욕심을 내요. 그 욕락에 욕심을 내요. 근데 나중에는 욕락에 한계가 와. 인생무상을 덮을 수가 없어. 그래서 죽을 때 다 울면서 죽는 거예요. 인생 무상을 욕락으로 해결하려고 지금까지 돈 벌고 출세하고 했거든. 근데 해결이 안 되는 거지. 그런데 지자는, 진짜 지혜로운 이는, 수응탐착차(智者誰應貪著此), 누가 그 무상을 덮기 위해서 욕락을 탐하고 집착하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냐. 부처님이 그런 마구니를 무상한 줄 알면서, 욕락에 집착하는 마구니를 다 항복한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는 게 그야말로 물거품과 같다는 거를 깊이 알았기 때문에 이게 된 거예요. 깊이 모르면 그게 슬쩍 덮혀버려요. 내가 나 죽을 때 무슨 소용이 있나, 그건 한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역시 돌아서면 욕심내요. 부처님이 어떻게 그 인간의 욕망을 항복시켰지? 이거는 인생의 관찰이 깊어서 그래요. 이 목숨이라는 게 이게 물거품 같다. 이거를 깊이 보니까 욕망이 들러붙지를 못해요. 그래서 해결한 거예요. 그래서 그거를 인생무상을 알고 욕락이 허망함을 알아서, 거기에 전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와도 공포심이 안 생겼어요. 그래서 이 무상과 욕락을 다 해결했어요. 그걸 항마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해결하고 보니 무상과 욕락에 구하는 마음이 딱 사라지니까, 거기에서 이제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여기 대웅광명이 나타난 거예요. 여기 대웅, 크게 웅장한 광명. 그래서 이런 거를 이제 가르칠 때 첫 번째는 조복(調伏)이라고, 조복. 조화시킬 조자, 항복시킬 복자. 조복. 인생이 무상한 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도 계속 욕망과 쾌락을 쫓아서 달려나가는 그 망아지와 같은 마음을 잡아당겨서 복종시킨다는 거에요. 모든 근심 걱정과 인생 재앙은 너의 욕망에서 왔다. 시어머니한테서 온 게 아니에요. 며느리한테서 온 게 아니야. 남편한테서 온 게 아니에요. 아내한테서 온 게 아니에요. 자식한테서 온 게 아니에요. 자기 욕망 해결하려고 여러 사람 다 만나고, 안 태어나려고 하는 아들 낳으려고 온갖 고생 다 했거든. 그래서 아들 때문에 애먹는 거예요. 아들만 안 낳어도 애 훨씬 적게 먹었을 거예요. 딸 때문에 애먹지, 그 딸만 안 낳어도 훨씬 편안했을 텐데. 결혼만 안 했어도 얼마나 신선같이 살았을 텐데, 이 결혼을 해가지고. 왜 결혼했어요? 욕망 때문에 결혼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게 지자가 가는 길이에요. 지혜로운 이가 가는 길이다. 이거 아무나 가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런 거를 듣고 우리 이제 잠시라도 마음을 씻어내면 그걸로 족한 거지, 우리가 다 석가모니 되라고. 야단나요. 야단나. 안돼요, 안돼. 안돼. 안돼. 그래서 범부는 미고로 생욕심이라, 미했기 때문에, 알기는 아는데 깊이 모르고 껍데기로 알기 때문에, 계속 욕심을 내다가 통곡하면서 죽는 거예요. 부처님이 이렇게 처음에는 조화를 시키려고 하고, 그다음에 복종시키고, 조, 복, 조하고, 복을 하면 마음이 딱 복종이 되면 고요해져요. 고요할 적자를 써요. 적. 조 복 적. 고요 적자. 그 다음에 깨끗할 정자를 딱 써요. 마음이 깨끗해져요. 욕락을 구하는 마음이 전혀 없어요. 그럼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요. 명이요. 첫 번째는 조, 두 번째는 복, 세 번째는 적, 네 번째는 정, 그 다음에는 밝아져, 명, 다섯 번째, 그 다음에 통해버려요. 이게 조복적정명통 이런 순서로 가는 거예요. 조복적정명통. 그래서 밝아져서 통하니까, 모든 게 욕심이 아니고 명심이다. 밝은 마음이다. 욕심과 명심이 있어요. 그걸 보리라고 그래요. 보리. 욕심을 번뇌라고 그러고, 이게 전부 이름만 달라요. 뭘 욕락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욕심이라고 그래요. 그냥 밝은 마음을 명심이라고 한다고. 밝은 명자, 마음 심자. 그걸 깨달은 마음이다. 근데 이게 이상하단 말이에요. 왜 명심 하나만 있으면 될 텐데, 욕심이 왜 있었느냐, 이런 거거든요. 그게 또 재밌어요. 멀쩡하게 낮에 일해도 저녁에 꿈꾸는 수가 있어요. 꿈 없는 사람이 없어요. 근데 꿈을 깨고 나면 그 꿈이 오로지 나인 걸 알 수가 있어요. 그 욕심에서 벗어나면 욕심도 내 마음인 걸 알 수가 있는 거예요. 이러니까 불교가 어려워. 실컷 높은 데 갔는데, 가고 나니까 가지 않았을 때와 다름이 없어요. 그래서 <큰 깨달음을 얻으니까, 내가 깨달음에서 얻은 바가 하나도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거 이건 깨달은 분들 자기들끼리 하는 소리고, 우리가 볼 때는 전혀 아니거든요. 그런 거죠. 그래서 이 항마라는 거, 우리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데 석가모니는 어떻게 안 되는 일은 왜 안 할 수 있었을까. 안 되는 일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안 할 수 있었던 것은 관찰이 깊어서 그래요. 이 몸을 위해서 뭘 구해봤댔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깊이 알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기록에 그런 말이 있어요. 욕구필경자재락(欲求畢竟自在樂)이 있는데, 이 욕락의 쾌락이 아니라, 필경자재락, 필경이라는 건 영원한 걸 말하거든요. 영원히 자재하는 즐거움이 따로 있는데, 그거는 보리다. 그래서 이 보리를 얻으려고 하고, 그 세속적 욕망을 무상한 줄 알아서, 두려움이 막 생기고 죽으면 어떻게 하나 공포가 생겨도, 이 마라는 거는 공포예요. 공포. 그래서 그 공포를 어떻게 해결하나. 욕락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게 범부거든. 그러니까 이 공포를 욕락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깨달음으로 해결하는 게 이게 석가모니예요. 그래서 깨달음을 딱 얻고 나니까 자재락이 생겨요. 자재. 욕락이 아니라 자재락이다. 그 자재락이 딱 생기고 보니까, 이 밖으로 구하던 욕심하고 이 자재락하고를 비교해보니, 욕심은 개똥불, 개똥불 아시나 모르겠네. 몰라요? 이게 난 어렸을 때 많이 봤는데, 이게 무슨 벌레 같아, 벌레. 그런데 그 불빛이 있어요. 그걸 개똥불이라고 그래요. 벌레인데. 주지스님 아셔, 개똥불? 반딧불. 충청도에서는 개똥불이라고 그래요. 반딧불하고 태양하고 비교를 했어요. 자재락은 태양이고, 욕락은 반딧불이다. 그렇게 비교 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뭘 위해서 살아야 하나. 왜냐면 기도하면 하는 거 있어요. 만수무강하고, 소원 성취하고, 자손 창성하고, 복덕구족하고. 자손 창성해봐야 그 녀석들 다 우리한테 도움도 안 돼요. 저들 살기 바빠. 부귀 영화하고. 부귀 영화 해봐야 근심 걱정 더 많아. 차라리 가난하고 마음 편한 게 낫다니까요. 그래서 축원 하는데 저거 구해봐야 소용이 없는데 그런 생각 나요, 내가. 오래 살아봐야 그거 별거 아니여. 힘만 들어. 그런 건데 그게 다 욕락으로 해결하는 거예요, 그게. 깨달음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알면서 못하는 게 범부니까 그거 어떻게 해요. 다 석가모니 되라고, 지금 당장 여기서 되라고 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안 돼도 이런 이야기라도 듣고 죽으면 내세에는 돼. 이제 점점 가까이 가는 거죠. 그게 방편이에요, 방편. 그래서 오늘 이제 부처님 생애에서는 항마까지 말씀을 드렸는데, 이게 너무 중요한 거예요. 부처님은 왜 인간의 욕망과 쾌락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그건 인간에 대한 관찰이 깊어서 그랬다. 그 아이한테 뭐 돈 몇 푼 더 줘봐야 그건 욕락인데, 그게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할 수가 없어요. 인생무상의 통곡이 와. 무상 통곡을 놔두고 집 하나 사주고 뭐 하나 사주고 해봐야 인생 문제가 해결이 안 돼요. 안 되는데 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건 말이 안 되는 짓을 하는 거예요. 말 되는 짓만 하는 게 흔한가 그게. 다 말 안 되는 짓을 하는데.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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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기도]3월 9일 지장천일기도 회향 법문
종범스님 2023-03-09
-人生苦惱(인생고뇌)와 出身活路(출신활로)- 천일지장기도 회향 법문입니다. 身命과 無明(신명과 무명)身命無常 剎那生滅 • 無明業識 貪愛不息신명무상 찰나생멸 • 무명업식 탐애불식一切世人 貪著五欲 獨處空閑 有何榮樂일체세인 탐착오욕 독처공한 유하영락生老病死患 於中未解脫 無明愛毒箭 猶未得拔出 생로병사환 어중미해탈 무명애독전 유미득발출榮位須臾間 智者深觀察 不應於此事 而生希有想영위수유간 지자심관찰 불응어차사 이생희유상依井中樹根 貪蜜墮口中(賓頭盧爲王說法經)의정중수근 탐밀타구중(빈두로위왕설법경) 기도는 왜 하느냐. 인생에 고뇌와 불만족이 있어서 기도를 해요. 고뇌가 있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기도를 하거든요. 그럼 고뇌가 뭐냐. 괴로움, 근심, 걱정인데, 근심, 걱정이 왜 생기는가. 그것은 어리석음 때문에 생겨요. 어리석음. 근심 걱정은 어리석음에서 온다. 그럼 어리석음은 뭐냐. 탐애(貪愛), 탐심과 애착. 탐심과 애착이 어리석음인데, 그것 때문에 생긴다. 그러면 탐심과 애착에서 오는 어리석음을 해결하는 방법이 지인와 범부가 다른데, 지혜 있는 사람이 해결하는 방법하고 보통 범부가 해결하는 방법하고가 달라요. 지혜있는 사람은 탐심과 애착을 충족하려고 애쓰기 전에, 인생부터 관찰을 하는데, 이걸 지인의 인생 관찰이라 이렇게 얘기해요. 지혜 있는 사람의 인생 관찰이라. 그러면 지인의 인생 관찰을 어떻게 하냐. 통시적 관찰이라고 그래요. 통시적, 통시(通時)라는 거는 통할 통자, 때 시자인데, 과거, 현재, 미래를 전부 다 본다. 그러면 보통 범부의 인생 관찰은 현시적 관찰, 현재를 중심으로 본다. 그래서 현재만 보면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는데, 이걸 긴 역사로 보면 좋고 나쁜 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지혜 있는 이들은 좋고 나쁜 걸 절대 탐할 필요가 없다. 좋고 나쁜 것을 탐하고, 버리는 거는 현시적으로 봐서 현재 눈앞에 있는 것만 봐서 그렇게 한다 이거예요. 긴 안목으로 보면, 현재가 바로 미래가 되고, 현재가 바로 과거가 돼서, 좋고 나쁜 게 오랜 세월 속에서 다 허망하고 무상하고 부질없어가지고, 구할 만한 가치도 없고 버리려고 애써야 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인생 관찰에 두 가지 관찰법, 눈앞에 있는 걸 중심으로 보느냐, 오랜 세월을 통해서 보느냐, 이건데 항상 이거에 대한 충돌이에요. 그래서 옛날부터 지금까지 늘 들려주는 얘기가 뭔 말이 있느냐면, 우물 안에 나무뿌리에 매달린 사람이, -이걸 수중 뭐라고 그러더라,- 정중수근(井中樹根)이라고, 정중수근. 우물 정자, 가운데 중자, 나무 수자, 뿌리 근자. 우물 속에 나무뿌리에 매달려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밑에는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고, 위에는 아주 사람을 해치는 코끼리가 그냥 바라보고 있어서, 어디 매달려 있는 건 정중수분인데, 우물 속에 나무뿌리인데, 여기에 매달려 있는데 좀 있다보니까 흰쥐하고 검은 쥐하고 와서 그 나무뿌리를 쫒고 있더라. 그런데 가만히 있다보니까 그 나무 위에서 벌이 꿀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는데 그 꿀이 입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거를 밀타구중(蜜墮口中)이라고 해요. 밀타구중. 꿀 물자, 떨어질 타자. 입 구자, 가운데 중자. 꿀이 떨어진 게 하필 입으로 떨어졌어요. 그때 입안으로 꿀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니까 그 꿀맛이 그게 보통 맛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밑에 독사가 있는지, 위에 코끼리가 있는지, 나무뿌리에 매달려 있는지, 흰쥐, 검은 쥐가 지금 쫒고 있는지 다 잊어버리고, 오직 그 꿀 한 방울 두 방울만 바라보고 있다. 그것만 좋아하고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제 이렇게 설명을 해요. 그래서 그 꿀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오욕락, 재색식명수(財, 色, 身, 命, 壽), 인간 쾌락이지, 인간 오욕 쾌락을 말하는 게 그 꿈이고, 밑에 독사는 죽음이고, 위의 코끼리는 무상한 세월이다. 그리고 매달려 있는 건 생명 명줄인데, 흰쥐, 검은 쥐는, 흰쥐는 낮이고 검은 쥐는 밤이다. 이렇게 인생이 무상하고, 이렇게 인생이 부질없는 건데, 그 무상하고 부질없는 거는 전혀 모르고, 오직 눈앞에 있는 쾌락, 눈앞에 있는 향락, 눈앞에 있는 즐거움 그것만 탐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거를 계속했어요. 여기 깊은 인생관이 있거든요. 뭐냐하면, 무명 탐애(無明 貪愛)라. 이렇게 깊고 또 무상 생명이 이렇게 빠르다. 무상이 신속하고 무명이 아주 강성하다. 강하고 왕성해. 그런 법문인데 이 법문이 그런 갑다 하고 그냥 듣고 참 중요한 법문이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 법문이 빈두로 존자라는 분이 한 분이 있는데, 빈두로 존자가 위우타연왕설법경이라고 우타연왕을 위해서 설법을 한 경이다, 이렇게 나와요. 그 내용이 어떻게 되냐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비유는 제일 끝부분에 결론적으로 나오는 거고, 앞부분에 보면 우타연이라고 하는 분이 깊은 산속으로 유람을 갔는데, 어떤 분이 그 숲속에 가만히 앉아서 선정을 닦고 있어요. 그래서 우타연은 이상하게 생각해서 “저분이 이 숲속에서 뭘 하고 있는가.” 그래서 가서 물었어요. 묻기를, “일체의 세인(一切世人)은, 일체의 세상 사람은, 탐착 오욕(貪著五欲)이어늘, 오욕을 지금 탐착하고 오욕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살거늘, 그대는 독처공한(獨處空閒)이라, 독처, 홀로 머문다. 아무것도 없고 한가한 숲속에서, 빌 공자, 한가할 한자, 공한해서, 유하영락(有何榮樂)고. 하는 어찌 하자, 영락은 영화와 즐거움, 즐거울 락, 영화와 즐거움이 무엇이 있느냐?” 그렇게 질문했어요. 세상 사람들은 다 오욕에 탐착해서 사는데 당신은 이 숲속에서 홀로 머물러서 무슨 영화가 있고 무슨 쾌락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했거든요. 거기에 대한 대답이 빈두로존자의 우타연왕, 빈두로존자의 위우타연왕설법인데, 그 내용은 뭐냐 하면, 인생에는 생로병사환(生老病死患)과, 나서 늘고 죽는 근심과, 또 무명애독전(無明愛毒箭)이 있는데, 어리석은 탐애의 독화살이 있다. 생로병사의 근심과 무명애독전, 탐애하는 그 독화살, 독 독자, 화살 전자인데, 범부는 다 이 탐애 독화살에 맞아 죽는다. 누가 나를 죽이는가. 나의 탐애가 나를 죽인다. 무엇이 걱정인가. 생로병사가 걱정이다. 그런데 누구든지 이 세상 사람 중에 생로병사환에서 어중미해탈(於中未解脫)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고, 무명 독화살에서 유미득발출(猶未得拔出)이라. 미득이라는 건 얻지 못했다. 유, 아직까지도, 발출, 뽑을 발, 날 출자인데, 뽑아내지를 못했다. 그러니 생로병사의 근심과 이 무명애독의 화살에서 뽑아내는 것이, 화살을 뽑아내는 것이 인생 고뇌에서 벗어나 볼 수 있는 좋은 길이다. 그 좋은 길이라는 것을 한 서적에서는 출신활로(出身活路)라고 그래요. 출신이라는 거는 출세한다는 게 아니고, 몸이 나아갈 수 있는, 몸이 나아간다. 날 출자, 몸 신자인데, 그걸 새길 때, 나아가는, 어록에 보면, 가라 할 때는 출신하라 이렇게 했어요. 인생 고뇌(人生苦惱)에서 출신할 수 있는, 나아갈 수 있는 활로, 좋은 길, 살 활자, 길 로자인데, ‘출신활로가 뭐냐.’ 지정된 문제인데, ‘너의 출신활로가 뭐냐.’ ‘나의 출신활로가 뭐냐.’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길이 뭐냐.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길이 뭐냐, 이런 뜻이죠. 근데 인생의 출신활로는 세상 것을 구하는 게 아니라, 생로병사에서 벗어나고, 무명애독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공부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영위는 수유간(榮位須臾間)이니, 세상에 영광스러운 쾌락이나 영광스러운 왕위나 이런 영위는 잠깐 사이에 사라진다. 그래가지고 지자는 심관찰(智者深觀察)이라, 지혜에 있는 이는 이 세상에 영위와 세상의 쾌락이 잠깐 사이에 없어지는 것을 아주 깊게 관찰한다 이거예요. 심관찰이라, 깊게 관찰을 해요. 그래서 불응어차사(不應於此事)에, 이 세상에 영화와 세상의 쾌락에, 이에 인생이 희유상(而生希有想)이라, 희유하다, 좋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한다. 세상의 영광과 세상의 쾌락에 좋다는 생각을 내는 거는 이런 일만 쳐다보는 현시적 인생관이고 이거는 잠깐이다. 구할 게 없다. 탐할 게 없다. 잠깐 머무는 것을 구하고 탐애하는 것은 어리석은 부질없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이, 이것이 지자의 관찰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는 세상의 쾌락에 좋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이런 법문이에요. 그래서 얼마나 이게 쾌락이 허망하고 얼마나 인생이 무상하냐. 마치 우물에 나무뿌리에 매달린 사람이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꿀방울을 탐하는 것과 똑같다. 이게 무서운 인생 관찰인데요. 이런 관찰을 항상 해야 돼요. 쾌락은 잠시요, 고통은 길다. 그런데 통시적으로 관찰하면 이게 보이는데, 현시적으로 관찰하면 앞에 쾌락만 보이지 그 꿀 떨어질 때 그것만 알지, 금방 이게 매달리는 나무뿌리가 다 떨어지고, 금방 밑에 독사한테 물려 죽고 이게 안 보인단 말이에요. 그래서 도 닦기 전에는 인생 관찰부터 깊이 해야 도를 닦아요. 석가모니가 ‘인생은 생로병사가 있구나.’ 이런 관찰이 없으면 절대 도를 못 닦아요. 그러면 이렇게 도를 닦을 인생 관찰이 됐으면, 이거 어떻게 닦느냐 하는건데. 처음에는 괴로움을 없애는 쪽으로 부처님이 계속 인도를 했어요. 괴로움을 없애는 쪽으로. 이고(離苦). 고를 여의면 즐거움을 얻는다. 이고득락을 가르쳤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다음에는 보살행을 하는 쪽으로 가르쳤어요. 바라밀 공덕행을 닦으면 괴로움에서 다 벗어날 뿐 아니라 지혜를 얻는다. 그다음에는 화엄경, 법화경 얘기인데,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는데 이 마음에는 없는 게 없다. 일체중생도 그 마음 안에 다 있고, 일체의 불보살도 그 마음 안에 다 있다. 그래서 닦아서 얻을 수 있는 걸 도라고 그러고,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 걸 업이라고 그러는데, 도에는 반야도도 있고, 또 보리도도 있고, 열반도도 있고, 해탈도도 있고, 있는데, 반야, 보리, 열반, 해탈은 다 마음 떠나서 없다 이거에요. 마음 없는 반야가 없고, 마음 없는 보리가 없고, 마음 없는 열반이 없고, 극락세계에 가도 극락세계를 느끼는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마음 없는 극락이 없죠. 그래서 마음은 일체 만법의 근본이다. 이걸 가르치는 게 불교예요. 마음은 일체 만법의 근본이다. 그래서 이 한마음에 십법계가 벌어지고 삼천 세계가 벌어진다고 가르치는 게 천태종의 가르침이거든요. 무념삼천 무념십법. 그리고 화엄경에서는 일어남이 없이 일어나는 게 마음이다. 불기이기라. 무용의용이라, 움직임이 없이 움직이는 게 마음이다. 그래서 삼계가 일심이요, 중생사회가 모두 한마음이고, 또 제법이 일심이고, 모든 만법이 다 일심이고 또 성현이 일심에서 나온다. 그러면 이 일심으로 돌아가면 된다. 일심으로 돌아가는 게 뭐냐. 다만 이 마음 중에 좋은 마음만 쓰면 된다. 그게 불보살이다 이거지. 좋은 마음만 쓰면 되는 거예요. 그럼 그 좋은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나. 첫째는 나쁜 마음을 항복시켜요. 나쁜 마음은 뭔가 허망한 거 구하는 마음이거든요. 나무뿌리에 매달린 사람이 그 꿀 떨어지는 것만 생각하는 거, 그게 허망한 거 구하는 마음이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 허망한 걸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되느냐. 그 허망함을 구하는 마음을 중지시켜야 돼요. 이제 이게 휴망상(休妄想)이에요. 망상을 쉬어라. 그리고 참 마음을 잘 써야 돼요. 휴망상 선용심(善用心). 마음을 잘 써라. 선용심이라. 착할 선자, 쓸 용자, 마음 심자. 마음을 잘 쓴다. 망상은 쉬고, 그 불보살의 마음과 범부 중생의 마음이 있는데, 범부 중생은 누르고, 쉬고, 불보살은 마음을 잘 쓰면 된다. 이게 불교예요. 그러려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되냐. 이렇게 가르치면 전생에서부터 마음 닦은 사람은 금방 아는데요. 금방 알아버려요. 근데 전생에서부터 이 나쁜 마음 쉬는 업이 부족하고, 좋은 마음 쓰는 업이 부족하면 몰라요. 그러니까 뭐냐. 온갖 방편을 부처님이 낸 거예요. 그게 수행이라는 거예요. 수행은 방편이요, 일체 수행은 다 방편이다. 방편이라는 건 뭐냐. 안 되는 데서 되는 대로 나아가는 길이거든요. 접근이라고 방편이라는 거는. 수행은 방편인데, 방편은 접근이라는 거지요.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길이에요. 그러면 그 방편 중에 이제 기도라는 게 있는 거예요. 기도를 딱 하면, 말이 기도지, 이렇게 행사는 하지만 사실 잘 안 해요. 기도 행사할 때 보면 되게 많이 할 것 같지만, 돌아서면 그만이에요. 그건 솔직해야지. 왜 그러냐면 하도 많이 즐거움만 구하는 것이 업이 돼서, 즐거움이 허망하다는 걸 깊이 못 느끼니까 기도해야 되겠다 하지만은, 행사는 해요. 그런데 돌아서면 잘 안 하거든요. 그런데 행사라도 하는 게 그게 어디냐 이거지. 행사 안 하는 것보다 얼마나 난데. 누가 그러데요. 단합대회 한다고 그래서, 단합하면 됐지, 대회는 왜 하냐. 근데 단합도 안 하는데 대회까지 안 하면 더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기도도 안 하지만, 기도 행사까지도 안 하면 더 안 하니까, 기도하게 하는 한 방편으로서 입재를 하고, 회향을 하고, 중간에 계속 정진을 하고, 이게 다 방편인데, 허망한 걸 구하는 마음을 쉬고, 참다움을 구하는 지혜의 마음을 자꾸 키워서, 한쪽으로는 쉬고 한쪽으로는 키워서, 그러면 이제 마음이 점점 어두운 마음은 줄어들고 밝은 마음이 많아져가지고, 그 한마음으로 돌아간다. 이거 이제 일념일심이라고해요. 한마음으로 돌아가면 그 한 마음 안에 일체 중생도 있고 불보살도 있고, 다 있다. 그리고 이거는 한 생각으로 바로 해탈하는 길이 책을 보기 이전에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이거든요, 이게. 염불을 한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이렇게 관법을 닦는다든지 화두법을 닦는다든지 이게 다 마음으로, 바로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이에요. 근데 이걸 안 믿는 사람은 경을 봐야 돼요. 이게 일체중생도 마음이고, 제불보살도 마음이라는 게 이게 과연 맞나. 일체 중생도 마음 없이는 있을 수가 없고, 마음 없는 지옥이 어디 있냐 이 말이죠. 마음 없는 극락이 어딨어요. 제불보살도 마음 없이는 있을 수가 없으니, 기도다, 참선이다, 무슨 관법이다, 염불이다 하는 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들어가는 길이에요, 이게요. 근데 자꾸 글을 보고, 방법을 묻고, 그러면 이게 좀 답답한데, 등산을 가서 가만히 보면 등산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 길만 물어요. “여기로 가면 어디로 가요? 요리 가면 얼마나 가요? 요리 가면 쉬워요?” 이런 사람 길 가르쳐주지 말아요 돼요. 뭐라고 그러냐. “가보세요.” 가보면 자기가 알지, 근데 가기 싫을 때는 꼭 앉아서 물어, 이렇게 앉아서. “해탈하면 뭐가 좋은데요? 성불하면 뭐가 좋은데요?” 이런 식으로. “안 하면 안 되나요?” 이게 이제 그것도 그런 신심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신심을 낼 때까지 필요한 거예요. 그냥 그거 안 하고 신심이 바로 나면, 바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가니까, 이제 수행이라고 본단 말이죠. 경을 보는 것도 기도, 참선, 염불하고 똑같은 방법으로 경을 봤는데, 경전을 해석하기 위해서 보는 게 아니라, 이제 망상을 쉬고 지혜를 키우는 참선식 간경, 기도식 간경, 염불식 간경을 전통적으로 했어요. 그래서 이제 학교에서 경전 공부하는 거 하고, 사찰에서 경전 공부하는 거, 이게 근본이 틀려요.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한문경을 보는데, 한자 한 자도 모르는 사람이 경을 다 봤어요. 그걸 인연 간경이라고 그래요. 인연 간경. 인연으로서 경을 보는 거지. 그건 뭐냐 하면, 한문을 보면 몰라. 그래서 그걸 인연으로 이력을 졸업한다. 그걸 인연이력이라고도 하고, 이력은 강원합방을 하는데, 은사들이 그래요. “너는 금생에 인연이라도 지어야 되니까 강원에 가서 졸업을 하고 와라.” 그때 한자 하나도 모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글을 아는 학인들과 똑같이 예불을 하고, 똑같이 경 펴면 펴요. 경 닫으면 닫고. 그래서 시간에 맞춰서 어김없이 경을 펴고, 경을 닫고 보는 것이 중요하지, 그걸 알고 해석하고 풀이하는 건 관심이 없어. 그래서 간경도 참선식으로 한다. 이게 조계종 종품이거든요. 참선이라는 건 뭐냐. 허망한 마음은 다 쉬고 그 지혜의 마음을 점점 키운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마음의 근본을 봐버리면 그걸 견성이라고 그러는데, 그 견성이 뭐냐. 제불의 마음이나 보살의 마음이나 중생의 마음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근원심으로 돌아간다 이거죠. 기도가 그런 거예요. 허망한 중생심을 쉬고, 청정한 불보살의 마음을 열어, 한쪽은 쉬고 한쪽은 열고, 그래서 바로 가는 것이 범부의 지위를 떠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간다. 이게 이제 전통 수행법이거든요. 祈禱因緣 기도인연地藏大聖威神力 恒河沙劫說難盡지장대성위신력 항하사겁설난진見聞瞻禮一念間 利益人天無量事견문청례일념간 이익인천무량사尊號稱名 念念無間 清淨光明 一時現前존호칭명 염념무간 청정광명 일시현전 그래서 여기 보면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神力)이 항하사겁설난진(恒河沙劫說難盡)이니라. 항하사겁을 얘기하도록 다 말할 수가 없다. 견문청례를 일념간(見聞瞻禮一念間)이라도, 일념간이란 일찰나인데, 보고 듣고 얘기하는 것을 한 찰나 순간만 하더라도, 이익인천무량사(利益人天無量事)라, 인천에 이익됨이 그 일이,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게 있는데, 이걸 더 줄여서 이야기를 하면은, 존호를 칭명하야(尊號稱名), 지장보살, 지장보살 하는데 높은 명호란 말이야. 이걸 불러. 그런데 이 지장보살님, 지장보살 부르는 의미가 뭐냐. 허망심 쉬는 거예요. 허망한 마음을 쉬는 게 지장보살 부르는 의미예요. 그리고 지혜심을 밝히는 거예요. 지장보살하면 허망한 마음은 쉬어지고, 지혜심이 밝아져요. 이래가지고 염념무간(念念無間)하면, 한 생각 한 생각 지장보살, 지장보살, 그 한 생각 한 생각에 허망한 마음은 점점 가라앉고, 밝은 마음은 점점 올라와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중생심 그대로 바로 제불심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 말이죠. 이게 형상에서 보면 여기서 저곳 가려면 여기를 떠나서 저곳에 도착할 수 있는데, 이 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여기 앉아서 거기 가는 거예요. 왜냐. 일심은 무형이라. 일심은 형상이 없어. 그래서 무형의 마음으로 무형의 마음에 가는 거니까 여기를 떠나지 않고 간다. 중생심으로 떠나지 않고 제불심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뭔 소린지. 참말인지. 참말 아니라고 들으면 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래가지고 청정광명(清淨光明)이, 청정, 청정심으로 딱 가면, 상광상조라. 항상 광명이 항상 비친다. 이게 제불심이거든요. 이 상광상조 청정광명이 일시에 현전(一時現前)이라. 바로 한순간에 눈앞에 나타난다. 이게 기도예요. 일시현전이라. 기도를 보면 마장이 생길 수가 있어요. 무슨 마장인가. 현상장애라는 게 있는데, 꼭 기도 좀 깊어지면 불보살이 나타나요. 불보살이 어떤 불보살인가. 청정광명 불보살이 아니라, 현상시현, 형상으로 이제 나타내는 불보살이 나타나요. 그 기도 좀 하면요. 꿈에 부처님 모습이 나타났어. 그게 어떤 부처님 모습이냐. 자기가 눈으로 익힌 부처님 모습이에요. 근데 어느 절에 가니까 그 꿈에 본 부처님이 그 절에 있어요. 그러면 그냥 좋아가지고 그게 뭐 엄청난 건 줄 알고 그랬는데, 그거 쫓아다니다 보면 그게 마장이에요. 그게 견불마장이라고, 견불마장이 생기면은 청정광명을 못 얻어요. 청정광명불을 얻어야 되지, 견불마장에 끌리지 마라. 어떤 불보살이 꿈에 보여도 거기에 멈추면 안 돼요. 오직 좋은 칭명을 계속해서, 부처님 보는 생각도 점점 이제 맑아져가지고, 그 맑은 마음이 온몸을 다 삼키고, 하늘을 다 삼키고, 땅을 다 삼켜서, 오직 일념정광뿐이다. 이것을 허공이 방락하고 세계가 평침이라고, 허공도 다 없어지고, 세계도 다 없어지고 일념정광 그거 하나뿐이다. 이게 기도예요. 한생각 맑은 광명. 몸도 없어요. 이거 몸도 일념정광이에요. 한 생각 맑은 광명. 하늘도 한 생각 맑은 광명. 일체 중생도 한 생각 맑은 광명. 이런 거를 가르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일체 불보살이 일심 불보살이다. 一心三寶 일심삼보普放慈光 常揮慧劍 照明陰路보방자광 상휘혜검 조명음로斷滅罪根 倘切歸依 奚遲感應담멸죄근 당절귀의 해지감응掌上明珠一顆寒 自然隨色辨來端 장상명주일과한 자연수색변래단幾回提起親分付 暗室兒孫向外看 기회제기친분부 암실아손향외간(地藏請文.釋門儀範下) (지장청문, 석문의범하) 그래가지고 여기 석문의범(釋門儀範)에 보면, 장상명주일과한(掌上明珠一顆寒)이라, 지장보살이 손에 구슬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게 일념정광심이거든요. 한 생각 청정 광명의 마음이란 말이에요. 장상명주가 하나의 그 구슬 덩어리가 차고 차다. 차다는 얘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거기. 범부도 없고, 제불도 없고, 보살도 없고, 생사도 없고, 지옥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느냐. 자연수색변래단(自然隨色辨來端)이라. 자연이 응화가 무진이요, 일념정광이 응화, 응용해서 변화하는 것이 끝이 없어요. 그래가지고 자연의 색을 따라서 변래단이라. 오는 단서, 오는 여러 가지 하나하나를, 끝 단자는 하나하나, 단서 단서, 사사물물인데, 그 일념정광에 비춰 보는 사사물물을 다 가려낸단 말이죠. 그런데 이게 구슬이 움직여서 가려내는 거 아니에요. 가만히 있으면서 사람이 오면 사람을 가리고, 비춘다 이 말이에요. 산이 나타나면 산을 비추고. 이렇게 지장보살을 찬하고 있어요. 자연수색변래단이라. 그다음에 밑에는 또 한탄인데, 이게 중생이 얼마나 세상사에 쫓아다녔는지 알 수 있거든요. 기회제기친분부(幾回提起親分付)라, 몇 번이나 지장보살의 맑은 광명을 세워서 광명으로 돌아가라고 친히 분부를 했겠는가. 근데 안 듣지. 말해봐요. 안 들어요. 그래서 여기도 그래놨어요. 그런데 암실아손향회간(暗室兒孫向外看), 암실아손들은, 저 어두운 방에 있는 후손들은 향외간이라, 자꾸 밖을 쫓아서 쾌락과 향락과 현세 허망 만족을 쫓아서 달려가고 있다. 향외간이라, 밖을 향해서 본다 이거거든요. 이게 기도예요. 이제 불교가 처음에는 보리 열반을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청정일심을 가르치기 시작을 했어요. 보리 열반이나 온갖 게 전부 다 이게 청정일심을 떠나서 있는 게 아니니까, 경전도 이제 많이 유통이 됐고 법문도 많고 하니까 이제는 마음에서 마음을 바로 가라, 그게 수행이에요. 근데 학교에 가서 불교를 해보니까 이게 안 되겠더라고요. 마음에서 마음 갈 생각을 꿈에도 못 꿔. 해석해서 논문 써내려고만 자꾸 애를 써요. 왜냐면 논문을 써내야 그 논문에 자기 이름이 실리거든. 그러니까 이게 금방 죽어서 없어질 허망한 이름을 구하려고, 마음이고 수행이고 무엇이고 다 팽개치고 그리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아주 고약한 불교다, 천하에 없던 불교다. 이거는 영명연수도 이 불교를 안 했고, 서산, 사명도 안 했고, 원효, 의상도 안 했다, 이런 불교는. 그래서 이 불교 인제 이대로 하면 안 되요. 옛날에 연수, 규봉, 원효, 의상이 했던 불교로 돌아가야 된다. 이래가지고 인문학적 불교학에서 승가 불교로 돌아와야 된다고 나 혼자 막 떠들었는데,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 안 쳐다보나 마나 나는 떠나도 간판이라도 달아 놓자고 간판 달아놓고 나왔구먼. 여기도 그랬어요. 기회제기친분부아, 명주일과, 밝은 구슬 한 덩어리, 청정일심, 명주일과를 이걸 찾아라. 이렇게 몇 번이나 이걸 드러내서 해보라고 분부를 했던가. 근데 암실아손들은, 어둠 속에 머무는 이 후손들은 향외간이라. 전부 다 이게 밖을 향해서만 가고 있다. 나만 간판 달아놓고 나온 게 아니라, 옛날 선지식이 다 그냥 그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기도를 잘하면 이렇게 한마음을 떠나지 않고, 바로 불보살하고 통할 수 있는 길이다 이거에요. 그런데 이게 왜 잘 안 되느냐. 눈에 보이는 재미가 없거든요. 재미가 없어서 안 하는 거예요. 재미 찾다가 인생 망치는 거지. 재미는 결과가 없어요. 현 순간뿐이야. 그래서 이제 더 근기가 높고 신심이 깊을수록 이걸 해요. 경을 봐도 경 새기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마음 돌아가는 경을 본다고요. 이걸 해요. 그런데 진관사는 이제 중요하면 행사 기도라도 보더라도 이 길을 계속 하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행사 기도도 안 할 수도 있는데, 얼마나 좋은데, 행사 기도라도 계속 하니까. 기도한다고 선전만 해도 그만큼 공덕이 되고, 기도해야 되겠다 하고 동참만 해도 그만큼 공덕이 되고, 또 가끔 와서 지장보살 한 번씩이라도 불러도 이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참 좋은 일이에요. 오늘 좋은 일에 좋은 법문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