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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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9월 17일 국행수륙재2재 법문
영진스님 2023-09-17
진관사 수륙무차대회가 이번이 625년 됐다 합니다. 그리고 6·25 전쟁이 끝난 지 70년, 그리고 무형문화재가 된 지 10년. 그래서 아주 뜻깊은 이번 2023년 진관사 수륙재입니다. 수륙재라고 하면은 물이나 육지, 그러니까 모든 생명들이 사는 것이죠. 불교에서는 태란습화라고 해서 태생·난생·습생·화생 이야기하는데, 수륙재도 마찬가지일 겁니다. 온 우주에 알게 모르게 수많은 영가들이 떠다니고 있어요. 그런데 여러분들 어디에 집 잡으려면 집 터보고 산세 보고 그러죠. 그런데 영가여도, 이곳은 큰 스님들을 모시고 늘 기도하기 때문에 늘 맑은 영가들이 이 도량에 가득 찰 겁니다. 그래서 다른 데보다는 그런 수승한 기운에 의해서 영가는 천도되게 될 것이고요. 또 오늘 주지스님 말씀 들어보니까, 자운 큰스님께서 이 수륙재를 복원하고 싶으셔서 고민하시다가 이곳을 정하고, 그 도반 스님들하고 칠일 칠야를 연구를 하셨다 해요. 근데 자운스님, 석주스님, 관응스님, 월산스님, 탄허스님 이런 분들은 제가 알기로는 회 이름이 있어요. 여석회(餘石會)라고 남을 려자, 돌 석자, 남은 돌 모임이라고 해서, 그냥 쓰고 남은 거, 그냥 이렇게 당신들이 겸양한 회입니다. 근데 그분들이 결국은 종정도 다 하시고, 조계종의 최고 어른들을 지내셨던, 그러면서도 도반들 간에 서로 겸양하고 이러셨던 분들입니다. 특히 석주스님 같은 분은 종정도 안 하셨는데, 종단에서 전계대화상을 좀 맡아달라니까 하신 말씀이 있어요. 전계대화상이라고 굉장한 자리예요. 출가하는 스님들이 전부 그 스님의 이름으로 계를 봤거든요. 그런데 “나는 큰 산중에 안 있고 이 서울에 삽니다. 여기 칠보사, 근데 내가 몸이 늙다 보니까 계란은 먹어요. 계란 먹는 사람이 어떻게 전계대화상이요.” 이리 겸양하신 분이에요. 참 대단한 분들이잖아요. 그런 분들이 원력을 세워서 수륙재를, 옛날부터 오던 그 전통을 되살리시고, 또 지금 주지하시다가 회주로 계시는 계호 스님께서 이제 매년 하는 걸로 이렇게 정착을 시켰다 해요. 지금처럼 온 지구촌에 병자와 어려운 일들이 많은 이런 시기에 아주 적절하고 꼭 필요한 일이 아닌가 싶습니다. 저는 어떤 말씀을 드릴까 하다가 <참으로 영가 천도가 뭘까, 진짜 의미는 뭘까>, 이걸 좀 생각해 봤어요. 제 주제는 이제 <물 속의 생명들 또 육지의 생명들도 이 법문을 듣는다.> 이렇게 이제 주지 스님이 법문 제목을 정하셨는데, 그 제목을 보면서 생각난 게 있습니다. 제가 4년 전에 스님들 80명과 티베트를 갔다 왔습니다. 수미산을 순례하려고. 정말 힘들었죠, 고산지대라. 근데 거기 가서 느낀 게 있는데, 거기는 장례법이 4가지로 구분되더라고요. 화장이 있습니다. 화장은 스님들만이 합니다, 티베트는. 일반인은 화장을 못 해요. 그다음에 여러분들 어디 화면에서 보는 천장이라는 거 있지요, 조장이라고도 하고. 저 바위 위에다가 세워놓고 육신마저도 이제 보시하면서 가는 거. 근데 이 천장은요, 우리가 볼 때 흉측한데요. 천장은 아무나 지내는 게 아니에요. 죄가 없는 사람이 천장을 지내요. 죄가 조금 있는 사람은 수장을 합니다, 수장. 그래서 그 사람들은 물고기를 안 먹어요. 먹을 게 없잖아요, 티베트에. 근데 물고기를 안 먹어요. 수장하기 때문에 안 먹기도 하지만, 물고기 한 마리나 야크 한 마리나 생명의 가치는 똑같다 이래요. 정말 이 생명 존중 사상에 의해서 야크는 한 마리 잡으면, 거기는 뭐 야크밖에 먹을 게 없으니까, 우유며 야크 털 이런 거 사용하니까, 많은 인원들이 나눠 먹는데, 물고기는 한 마리에 한 사람도 못 먹는다는 거예요. 근데 거기에다가 알을 뱄을 때는 몇 억 마리다. 철두철미하게 부처님 사상에 입각해서 그 사람들이 생활을 합니다. 그러면 이제 우리나라는 옛날에 다 매장을 했는데, 스님들은 화장했어도. 지금은 이제 다 화장 받아들이죠. 매장은 거기서는 매장이 좋은 게 아니에요. 죄가 많은 사람을 매장해요. 그런데 고이 쉬라고 매장하는 거잖아요, 돌아가신 분. 근데 구멍을 하나 뚫어놓고 팔을 하나 내놓고 여기 끈 달아 놔요, 밖에다. 지나가는 사람이 흔드는 거야. 쉴 만하면 흔들고, 쉴 만하면 흔들고, 이러니까 매장당할까 봐 죄를 안 지으려고 해요. 이런 생활화 불교를 하는구나. 우리 위대하신 우리 부처님 법이 어떻게 수륙재 기간만 있겠어요. 그죠? 그런데 1년 365일 늘 그래야 되는데요. 재라는 것은 가지런히 한다, 삼간다 이런 뜻이에요. 내 마음을 가지런히 하고. 수행이에요, 지금 재가. 재가 수행이라고. 평소에 하던 습관도 좀 내려놓고 좀 삼가는 거예요. 그러면서 본래면목으로 들어가려고 하는 그런 자세가 이 재인데, 365일 할 수 없으니까 이렇게 날짜를 정해서 49일 동안 큰 스님들을 모셔다가 법문을 듣는 겁니다. 그리고 우리 비구니 최초의 어장이라고 하시는 분 어산, 어장이라면 대단해요. 비구니 스님 중에 의식 염불론 최고로 권위 있는 자리가 어장이에요. 어산. 그분이 직접 여러 스님들과 함께 오셔서 집전을 해 주시니까 여기에 참여하신 모든 수중 육지 공중 떠돌아다니는 원혼들이 안식을 찾으리라고 봅니다. 여러분 불국토 아시죠? 불국토. 불국토에는 누가 계셔요? 부처님이 계시지요. 그러면 이 땅이 불국토가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될까요? 여러분이 스스로 다 부처인데 그걸 모르고 있는 거죠. 그러면은 ‘내가 부처다’라고만 하고 있으면 될까요? 안 되죠. 교리적으로 ‘이것은 이걸 것이다’ 이해해서도 안 됩니다. 만약에 가마솥에 펄펄 끓는 물이 있다 이 말이에요. 근데 진짜 많이 끓은 건 움직이지 않아요. 그래서 뜨거운 물인지 모르고 손을 담그면 어떻게 돼요? 화상을 입죠. 화상 입은 사람은 절대 가마솥에 있는 물 그다음부터는 함부로 안 만집니다. 내가 부처라 해도, 우리가 부처라 해도, 확인하는 작업은 우리가 해야 된단 말이죠. 그것이 수행입니다. 오늘같이 수륙재에 참여한다든지, 참선한다든지, 염불을 한다든지, 기도한다든지, 부처님 경전을 읽는다든지, 또 자기 여건에 맞게 재능 기부를 한다든지, 수많은 보시를 한다든지, 보시는 따뜻한 말 한마디도 보시입니다. 그죠? 불사도 보시고. 다 보시입니다. 이런 일을 하는 것이 수행입니다. 그중에 저는 이제 선원에서 왔으니까, 선 입장에서 몇 마디만 하자면, 요즘 스님들을 안 해요. 너무 안 돼요. 이것도 흐름이 있나, 신부님도 안 되고 수녀님도 안 돼요. 독신하는 사람들은 이제 잘 안 하더라고. 그런데 옛날에는 해인사에 암자가 많아요. 그중에 이제 어느 비구니스님 암자에 꼬마들이 많았어요. 꼬마들한테 승복을 입히고, 머리를 깎아 놓으면 예쁘잖아요. 그리고 막 천방지축 다녀도 이뻐요. 관광객들이 지나가다가 “너 왜 절에 왔니? 너 왜 절에 와서 사니?” 이래요. 그러니까 아기가 대답할 말이 없으니까, 나중에 이제 “스님 이러면 어떻게 해요?” 그러니까 어느 스님이 “그걸 묻거든, 세상이 무상해서요.” 이렇게 이야기해라. 그다음부터 누가 묻기만 하면 “세상이 무상해서요.” 그런데 “무상이 뭔데?” 하면은 막히는 거야. 그것만 알려줬잖아요. 이건 지혜를 빌린 거예요. 그죠? 또 하나는 옛날에는 큰 절은 절에다가 두부도 만드는 기계도 있고, 국수 미는 기계도 있고 이랬어요. 근데 작은 절은 반찬을 하려면 두부를 사와야 해요. 날마다 두부를 사오라고 해야 돼요. 동자승이 그 담당인데, “두부 사오너라.” 노스님이 그러면 “예.”하고 이제 마을에 내려가서 두부를 사러 가면, 꼭 그 장사하는 어느 분이 “스님 어디 가세요?” 이렇게 묻는단 말이야. “두부 사러요.” 그 몇 날 며칠 그래도 또 묻고, 또 대답하고, 그러니까 이게 동자승이 또 스님한테 와서 “자꾸 물어서 좀 짜증이 나요. 자꾸 물어요.” “그래? 그러면 묻거든 다음에는 극락정토 간다고 해라.” 기뻐서 내려가는데, 아닌 게 아니라 “스님, 어디 가세요?” 그러니까 “극락정토 가요.”“극락정토는 왜요?” “두부 사러요.” 이게 남의 지혜는 자기 게 아니에요. 그죠? 여러분 극락정토 가셔야지 그러지요, 여기가 극락정토인데. 이렇게 부처님한테 기도하고 의지하는 것도, 이게 이제 불교는 타력 신앙과 자력 신앙을 같이 인정을 합니다. 부처님 가피가 당연히 있죠. 그런데 내가 하지 않으면 손뼉도 마주쳐야 되고, 기도도 자기가 해야 감흥이 오죠. 그죠? 부처님의 가피의 유신력을 기르는 것이 이제 타력 신앙입니다. 그럼 자력 신앙이라는 것은 자기가 본래 부처임을 스스로 수행을 통해서 확인하는 일입니다. 그러면 그 기준이 뭘까? 부처님이 도를 깨달았다고 하는 기준이 뭘까? 부처님의 핵심 가르침은 뭐냐 이 말이에요. 많은 8만 4천 법문이 있지만, 한마디로 요약하면 중도입니다. 중도라는 것은 있다. 뭐가 있다? 이것도 아니고. 없다. 이것도 아니에요. 있지도 않고 없지도 않다 이렇게 보는 거예요. 보세요. 내가 오늘 새벽에 여기를 출발하려고 머리를 깎으려고 보니까 바쁠 것 같아서 어제 깎았어요. 어제 깎을 때 내 머리가 맨들맨들 했어요. 지금 까칠까칠해요. 어제의 내가 아니에요. 그죠? 어제의 내가 아니라고. 변화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어제에 집착하는 순간 오늘을 견딜 수가 없어요. 그죠? 있던 것이 없어지기도 합니다. 근데 우리가 왜 고통이 오느냐 하면 비교하니까 그래요, 비교. 있다 없다 비교하는 거야. 여러분 잘 살다가 동창회 갔다 오면은 배우자한테 불만이잖아요. 그죠? 옛날에는 나보다 공부도 못 했는데 다이아를 이만한 거 끼고 왔다. ‘당신은 뭐 했어’ 이렇게 되는 거야. 비교하는 순간 행복은 없어요. 부처님이 왜 비교를 해요. 그래서 이 중도라는 것은 절대 모양에 치우치지 않습니다. 오늘 오면서도, 저도 그런 말 하면서도, 오늘 비 안 오기를 발원했어요. 안 와요. 내가 설악산 백담사에서 출발 5분 전까지 비가 주룩주룩 내렸어요. 차를 타기 직전까지. ‘나 차 탈 때 우산 좀 안 받게 해주시오’ 했더니 딱 5분 전에 멈춰서 지금까지 안 와. 늘 마음을 중도에 두는데도 또 내가 마음 먹은 대로 좀 이루어지면 기쁜 거예요. 그죠? 또 안 이루어지면 또 슬프고. 근데 진짜 중도의 의미는 그게 아니에요. 존재하는 모든 생명은, 또 모든 물건은 존재 이유가 있다. 이게 진짜 중도입니다. 물고기 존재 이유가 있어요. 날아다니는 새도 존재 이유가 있어요. 육지에서 사는 사람들도, 또 짐승들도 다 존재 이유가 있습니다. 그런데 인간의 욕심으로 조금 더 가지려고 기후를 파괴하고, 생명을 함부로 살상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불교는 그러지 않아요. 내가 아는 불교에서의 전쟁은 딱 이런 사건이 하나 있었어요. 다른 나라는 종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크게 전쟁을 일으켜가지고 많은 사람들이 죽고 이러잖아요. 불교는 한 번인데 제가 8일 전에 여기 도착했어요, 우즈베키스탄 갔다가. 거기가 대승불교의 꽃을 피운 곳이에요. 구법승들이 신라나 당나라 현장 법사, 서유기가 다 우즈베키스탄이 무대인데. 정말로 이 큰 스님들이 그 많은 구법승들이 그 길을 넘어서 인도로 가서 부처님 법을 구하고 배우고 다시 돌아와서 역경을 하고 이랬어요. 그래서 옛날에는 역경하는 스님이 국보입니다. 역경하는 스님. 범어를, 산스크리트어나 팔리어를 중국 같으면 한문으로 번역하는 거. 근데 아까 반야심경에 <마하반야바라밀다심경 관자재보살> 이런 거 다 스님들이 역경한 거예요. 역경을 하려고 보니까 역경사가 필요한데, 전쟁을 일으켜요. 중국에 있는 전진의 왕 부견이가 전쟁을 일으켜서 한 개, 반개를 얻었다고. 한 개 반개 딱 그걸로 끝난 거예요. 한 개는 구마라집 스님이고 반 개는 외발인 습착지스님입니다. 경전을 번역하기 위해서 무력으로 뺏어온 거예요. 그거 말고는 불교가 불교를 전파하기 위해서 수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전쟁을 일으키고 이러지 않았습니다. 불교는 철저히 생명 존중 사상입니다. 먹고 살기 위해서 부득이한 것 말고는. 근데 부득이하더라도 그래서 방생을 많이 하고 보시를 많이 하라는 것이죠. 그러지 않고는 취미로 하는 것은 아닙니다. 여러분 나무에 생명이 없어요? 식물도 생명이 있어요. 왜 아름다운 꽃이 가시를 드러냅니까. 자기 보호하려고 한 거예요. 그래서 필요 없이는 그렇게 함부로 나무를 꺾거나 꽃을 꺾거나 이러지 않아야 돼요. 필요하면 최소한으로 해야지. 그러니까 동물은 보이니까 그걸 하는데, 죽으면 안타깝고 그런데, 식물도 마찬가지예요. 식물도 생명이 있어요. 아니 살려고 햇볕 울창한 숲에서도 하늘로만 크잖아요. 햇볕 바라보고. 왜 생명이 없어요. 하물며 인간끼리, 또 자기가 사랑하는 강아지도 있고, 이거 함부로 살상하면 안 되잖아요. 함부로 살상해서는 안 됩니다. 이 수륙재를 맞이하면서 무차라는 말은 평등하다는 뜻이잖아요. 막지 않는다, 가리지 않는다 이 말이야. 뭘? ‘모여드는 모든 생명을 똑같이 인정한다’ 이 뜻이 무차입니다. 평등. 부처님은 인류 최초의 평등 선언을 하신 분입니다. 왜? 탄생에 ‘천상천하 유아독존’ 했잖아요. 하늘 위와 하늘 아래 오직 나 홀로 높다. 이것은 당신을 얘기한 게 아니고, 개개인의 생명이 가지고 있는 그 부처님의 성품, 본바탕 이것은 위아래로 나눌 수 없다 이래요. 지금은 여러분이 그 말씀을 인정할 겁니다. 그런데 2600년 전에 인도는 그러지 않습니다. 날 때부터 범천에 꼭대기로 나오고, 정수리로 나오고, 옆구리로 나오고 우리와 같이 나오고, 발바닥으로 나와서 날 때부터 신분이 정해져 있는 사회에서 “평등하다.” 이 선언이야말로 인류의 최초의 평등 선언이고, 또 모든 이에게 다 불성이 있다는 것이야말로 우주 역사 속에서 가장 성스러운 선언입니다. 그런 우리 부처님을 만났기 때문에 우리는 하루도 허투루 보낼 수가 없습니다. 어떻게 좋은 일만 하겠습니까. 그죠? 그래서 그동안 좀 미뤄져 왔던 일이 있다고 하면은 지금부터라도 시작해야 됩니다. 언제까지 계산만 하고 방향만 잡고 있을 거예요. 방향이 올바르게 정해지면 걸어가는 겁니다. 여기 앞에 여기 계시는 분들은 조금 평균 나이가 되기도 하고, 못 되기도 하고, 넘기도 했는데, 앞으로 우리가 -아주 젊은 분들은, 양해하세요.- 50년 산다는 보장이 없잖아요. 그죠? 여러분 해마다 이 진관사 수륙대재에 참여하셔가지고 스님들 법문 듣고 이렇게 성스러운 자리를 갖는 게 앞으로 몇 번이나 있겠어요. 1년에 한 번씩 해도 몇 번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느슨할 수가 있습니까? 느슨할 수 없습니다. 느슨해도 좋은 사람이 있어요. 그것은 내가 가는 곳을 아는 사람은 느슨해도 좋아요. 내가 가는 곳을 아는 분들은 두려움이 아니지. 근데 내가 가는 곳을 모르는 사람들은 어떻게? 죽음이 두렵죠? 죽음이 왜 두려워요? 가는 곳을 모르니까 그래요. 어제 저녁 잘 주무셨나요? 영진 스님 법문 듣는다고, 수륙재 회주 스님, 법해 스님 이런 분들 뵙는다고 못 주무신 분들도 있겠지만, 비교적 잘 거예요. 근데 만약에 여러분이 자다가 눈을 못 뜬다 하면 잘까요? 졸려도 억지로 깨어 있으려고 할 거예요. 근데 왜 자요? 오늘 수륙대재 2재에 내가 참여해서 스님들 법문도 듣고, 진관사 스님들 친견도 하고, 염불 잘하시는 어장 스님들 이렇게 법다운 염불 소리도 듣고, 이걸 알잖아요. 아니까 두려움이 아니에요. 근데 만약에 내가 죽은 뒤에 나의 모습을, 가는 곳을 안다면 죽음이 두렵지 않습니다. 그것은 마음을 깨친 이들은 그렇습니다. 그래서 앉아 죽고, 서서 죽고, 물구나무 서서 죽고. 옛날 스님들 한 분만 더 이야기하죠. 은봉선사라는 스님이 있어요. 당나라 때 마조스님의 제자인데, 이분은 굉장히 괴각이었어요. 괴각이라는 말 아시죠? 성격이 좀 다른 이하고 보편적으로 같지 않았다 이 말이지요. 근데 이제 죽을 때가 돼가지고 고민이야. ‘이거 내가 좀 독특하게 죽고 싶은데 어떻게 죽으면 좀 잘 죽었다고 소문이 날까.’ 제자들을 모아놓고 “얘들아 서서 죽은 이가 있느냐?” “예, 있습니다.” “앉아 죽은 이는?” “있습니다.” 좌탈은 앉아 죽고 입망은 서서 죽는 게 좌탈입망(坐脫立亡), 실제로 많아요. 우리나라에도 많았어요. 6·25 막 지나고 돌아가신 방하남 스님 같은 분은 인민군이 쳐들어왔을 때 상원사 큰방에 앉아가지고, 불 내려고 하는데 방하남 스님이 앉아 계시니까 인민군이 불을 못 냈어요. 그래서 아직 그 문수정이 살아있는 거예요. 생사를 초월한 분이니까 그런 거예요. 인민군 장교도 감화된 거지. 근데 이분이 돌아가시면서 탁 앉아서 이렇게 돌아가시고. 서옹 큰스님도 앉아서 돌아가셨어요. 물론 꼭 그렇게 앉아서 돌아가신다고 다 최고고, 누워서 돌아가신다고 최고가 아니고 그런 건 아니에요. 성향 따라 다른데. 은봉 선사는 물으니까 다 있네. 그러니까 갑자기 “물구나무 서서 죽은 이가 있느냐?” 하니까 “없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딱 물구나무서서 가버린다. “나 간다.” 아니 화장을 해야 되잖아요. 근데 안 넘어가는 거야. 물구나무서서. 그래 이제 소문이 나니까 그 은봉선사의 여동생이 비구니 스님인데, 수행을 잘하는 비구니스님이었어요. 소문을 듣고 오더니 “오라버니는 살아생전에도 괴각해서 사람들 골탕 먹이더니 죽어서도 그래 사람 골탕 먹이기요. 제발 속 좀 차리시오.” 하니까 넘어가더라고. 생사를 좌지우지한다 이야기입니다. 죽음에 두렵지 않고 해서 자유자재한다. 이제 이런 뜻으로 제가 비유를 들어서 말씀드렸습니다. 여러분들 진관사 와서 수륙대재 지내고 싶지요. 만약에 0.01%라도 없으면, 없는 분들은 가는 곳을 알도록 하세요. 수행을 열심히 해서 남의 힘 빌리지도 않고, 내 힘으로 그냥 극락정토에 가버리면은 그건 필요 없겠죠. 그러지 않으면은 하루하루, 또 수륙대재를 지내는 이 기간만이라도, 우리가 이곳에 와서 마음을 모으고, 부처님께 발원도 하고, 왕생극락을, 또 영가들의 왕생극락을 발원하고, 그런 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생활을 하시면 누구보다도 무량대복을 받으리라고 생각합니다. 어쨌든 복도 많이 지으시고, 그 받은 복을 널리 이웃을 위해서 회향하는 우리 불자들이 되기를 발원하면서 제 말씀을 마칠까 합니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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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9재] 9월 17일 49재 법문
영진스님 2023-09-17
오늘 49재일을 맞이하는 신원적 소천 망자모 영가시여. 잠시 이 진관사에 강림하셔서 법다운 공양 받으시고 부처님 법문을 들으십시오. 영가시여. 오늘 가족 친지가 49재를 맞이하여 정성을 모아 제사를 지내드리고, 영가의 왕생극락을 위하여 이 진관사에 모였습니다. 잠시 이 자리에 왕림하셔서 부처님 법을 들으십시오. 오늘 돌아가신 영가와 이 자리에 참여하신 재자분들한테 다 해당되는 부처님 말씀을 전할까 합니다. 생종하처래 사향하처거(生從何處來 死向何處去), 태어남은 어디로 부터 시작되었으며 죽어서는 어디를 향해서 가는가. 생야일편부운기(生也一片浮雲起), 삶이란 맑은 하늘에 한 조각 구름이 잠시 모여 있는 것과 같고, 죽음이란 사야일편부운멸(死也一片浮雲滅), 한 조각 구름이 다시 소멸되는 것 같다 했습니다. 나고 죽는 문제가 일대사라고 그럽니다. 가장 큰 문제죠. 그런데 뜬구름에 나고 죽는 문제를 비유했지만, 이 뜬구름 자체도 부운자체본무실(浮雲自體本無實)입니다. 원래 구름으로 끝까지 남아있지 않습니다. 그 실다움이 없는 것이죠. 아시다시피 구름은 비가 되고, 물이 되고, 얼음이 되고, 우박이 되고, 이슬이 되고, 서리가 됩니다. 본질은 같지만 그렇게 수많은 고체, 액체, 기체로 변화하는 것이 구름입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우리의 삶도 그렇다는 것이죠. 뜬구름에 원래 실다움이 없다. 생사거래역여연(生死去來亦如然), 우리들도 그와 마찬가지다. 그러나, 독일물상독로(獨一物常獨露)합니다. 한 물건이 홀로 딱 드러나 있습니다. 이것은 생사를 따르지 않습니다. 이 생사를 따르지 않는 이 한 물건이야말로 우주의 주인공입니다. 물건은 있다가 없다가 또 변화하고 이런 거지만은, 이 한마음, 이 본질적인 것은 변화하지 않습니다. 마치 물이 얼음이 되고, 얼음이 물이 되고, 수증기가 되고, 우박이 되고, 서리가 되고, 이슬이 되듯이, 본질은 변하지 않는데 모양만 변하는 겁니다. 근데 그 변화한 것을 가지고 우리는 태어났다, 죽었다, 있다, 없다 이렇게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은 생사를 따르지 않는 한 물건이 윤회를 하는 원인은 무엇일까? 원래 생사를 따르지 않는 그 한 물건이 있었는데, 그것을 망각하고 우리가 살아가면서 수많은 업력을 짓게 됩니다. 업이라는 것은 선업도 있고 악업도 있습니다. 그 업의 그림자를 따라서 생사를 보고 가는 것이 삶이라 이렇게 봅니다. 그래서 우리는 어떻게 해야 될까요? 그 업의 자락을 끊어내야 됩니다. 그래서 49재의 의미는, 돌아가신 지 49일 되는 날이 아주 중요한 날인 게 어떻게 보면은, 그분의 미래를 좌지우지할 정도로 중요합니다. 물론 수행이 많이 된 분들은 이러한 부처님의 가피력이나 법문이 필요 없겠지만, 수행이 되지 않은 사람들은 그나마 부처님의 가피력과 이 법문의 내용을 듣고, 훌훌 가시고 싶은 곳으로 가도록 하는 것이 49재입니다. 그래서 아까 염불에도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러잖아요? <나무는 귀의합니다> 이 말입니다. 아미타 부처님에게 귀의합니다. 그런데 아미타불이라는 것은 번역하면은 무량광 무량수 그렇습니다. 한량이 없는 수명, 한량이 없는 광명이라고 그럽니다. 그래서 <돌아가실 때 정성을 들여서 아미타불을 10번만 해도 지옥의 과보는 면한다.> 이런 말이 있을 정도로 우리가 아미타불을 신앙하게 됩니다. 그것은 한량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십시오. 영가와 이 자리에 참여하신 재자분들 눈으로는 모양을 보게 되죠. 그러면 눈으로 모양을 보면은 거기에서 한 세계가 만들어집니다. 이것이 안식이라고요. 안계라고도 합니다. 저것은 저렇게 생겼고, 이것은 이렇게 생겼다. 눈이 주관이라면, 보여지는 모양은 대상, 객관이겠죠. 안, 그다음 이, 귀. 귀는 소리를 듣게 돼 있습니다. 그럼으로 해서 한 세계가 또 벌어집니다. 이것은 맑은 바람 소리다, 이것은 시끄러운 소음이다. 이렇게 우리가 또 판단하죠. 안이비, 비는 코입니다. 냄새. 이렇게 해서 비설, 혀는 또 말이죠. 신, 몸은 또 몸으로 접촉해서 촉감으로 접촉해서 부드럽다, 거칠다. 이런 느낌이 이런 식으로, 안이비설신의에 의해서 한 세계가 벌어집니다. 그런데 이 받아들이는 것을 우리가 분별로 받아들이기 때문에, 업을 끊으려면은 분별을 떠나야 되는 것이죠. 근데 아시다시피 우리는 꼭 비교 분석하잖아요. 무엇보다 무엇이 크고, 무엇이 작고 이렇습니다. 근데 옛날 도인들은 그러지 않아요. 불교에서는 핵심 교리가 중도인데, 중도를 체득한 사람들은 그러지 않아요. 예를 들자면, 옛날 당나라 때 마조도일이라는 큰 스님이 계셨습니다. 그분은 한국불교의 선불교에 끼친 영향이 굉장합니다. 우리가 그 후손들입니다. 그분을 모시고 오는 시자가 산길을 가는데, 시자 스님이 자기 스승 마조 스님을 시험하고 싶은 거예요. 그래서 앞에 가는 큰 스님을 불러요. “스님.” 그러니까 “왜 그러느냐” 하고 돌아보니까, 이 짚고 다니는 주장자로 땅에다가 하나는 길게 긋고, 세 개는 짧게 그었습니다. “한마디 일러보십시오. 짧다 길다를 떠나서 한마디 하시오.” 자기 스승에게 다그친 겁니다. 그러니까 마조스님이 당신이 짚고 다니는 주장자로 한 획을 아무렇게나 하나 긋고, 짧다 길다 말하지 않고 “내가 이거 맞췄다” 이래요. 이게 뭐가 다를까요? 자, 보세요. 질문한 사람은 짧다 길다 생각이 들어가 있어요. 그죠? 상대적인 세계에 머물러 있습니다. 그런데 마조스님의 한 획은 그것이 없어요. 절대의 한 획입니다. 즉 중도를 체득한 분들은 이런 것이 나온다는 거죠. 순간적으로.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더러 선문답하듯이 엉뚱한 소리한다고 이러지만 그렇지 않습니다. 그 가운데에는 중도 사상이 녹아들어 있습니다. 이 중도 사상만 녹아들어 있으면 괴로움이 없습니다. 그런데 우리는 알게 모르게 비교하고 그래요. 저는 오늘 설악산 백담사에서 새벽 6시에 출발했는데 얼마나 아름다워요. 그럼 백담사가 아름답다고 하고, 설악산이 아름답다고 하는 이유가 뭘까? 그 보이는 나무, 바위를 딱 잘라서 아파트처럼 획일적으로 해놓으면 아름답다 할까요? 그러지 않죠. 있는 그대로 어우러져 있는 것이죠. 그렇기때문에 <존재하는 모든 것은 다 소중하고, 존재하는 모든 것은 주인공이다> 이 생각이 있으면 누구를 헤아릴 필요도 없고, 비교해가지고 낙담할 필요도 없고, 괴로워할 필요도 없습니다. 이게 부처님의 중도입니다. 그래서 불교는 <무엇보다 무엇이 낫다> 이런 표현은 실제로 불교가 아닙니다. 있다, 없다 이것도 불교가 아닙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반야심경에 보면 색불이공 공불이색(色不異空 空不異色) 색즉시공 공즉시색(色卽是空 空卽是色) 이러잖아요. 모양은 공과 다르지 않다. 비어 있는 것과 다르지 않다. 또 비어 있는 것은 모양과 다르지 않다. 거기서 더 깊이 들어가면 모양이 곧 허공이고 허공이 곧 모양이다 이렇게 되는 것이죠. 즉이라는 말은 그 가운데 그것이 또 있다는 이야기예요. 틈 없이. 여러분 보이는 이 법당이 참 아름답잖아요. 그러나 이 법당도 공이 들어가 있는 겁니다. 그래서 변화하죠. 지금 우리가 기후 문제나 지구의 온난화 문제 이런 것 때문에 이상 기후가 오고 이런 말을 부처님은 옛날부터 하셨어요. 성주괴공(成住壞空)이다. 성, 이루어지고, 주, 머물고, 괴, 무너지고, 공한 상태, 이것이 순환된다 했어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그래서 정말로 우리가 다른 이의 도움을 받지 않고 자기가 주인공이 되는 일은 평소의 삶을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며. 또 돌아가셔서는 또 그런 신이 완전히 자기가 자기 힘을 회복하지 못했기 때문에 부처님의 가피력이나 법문을 들어야 되는데, 돌아가신 분은 이미 육신을 여의였어요. 우리 영가께서는 이제는 육신에 대한 미련이 없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으로 훨씬 식이 맑아 있습니다. 우리가 알아듣지 못하는 것도 염불도 이거 다, 염불 자체가 법문이거든요. 염불이 전부 법문 내용이에요. 그렇기 때문에 오늘 분명하게 왕생극락하시리라 생각합니다. 아미타불재하방(阿彌陀佛在何方), 아미타불 아미타불 아미타불이라는 이 아미타 부처님 어느 곳에 계시는가. 착득심두절막망(着得心頭切莫忘)하라. 마음에 심두에 꽉 붙들어 갖고 간절히 잊지 말라. 염도염궁무념처(念到念窮無念處)하면은, 생각이 도달하고 생각이 다해서 무념처에 이르게 되면. 무념이라는 게 중요합니다. 우리가 망상 번뇌가 없는 걸 무념이라고 그러지, 멍 때리는 게 무념이 아닙니다. 뭘 해도 할 뿐이지, 그 안에 망상이 들어가 있지 않습니다. 그렇게 해서 극에 도달하는 무념처에 도달하면, 육문상방자금광(六門常放紫金光)이라. 아까 말씀드린 안이비설신의, 이 육식인데, 이것이 육문인데, 이 육문에서 상대적으로 주관에서 객관을 보고 판단하는 여기에서 부처님의 광명이 자금광이에요. 자금색. 그 광명을 나툰다. 즉 불교는 있는 것을 없애고 없는 것을 만드는 게 아닙니다. 즉했다는 말을 아까 드렸죠. 바로 육문에서 그냥 상대적인 세계에 머물던 이 안이비설신의에서 부처님의 자비광명을 나타내라. 이 말은 곧 부처님의 세상에 도달했을 것이다, 이런 말씀이 되겠습니다. 오늘 49재일를 맞이해서 정성으로 이 자리에 모이신 가족 친지 복위 신원적 소천 망자모 영가시여. 부디 모든 몸과 마음을 놓아버리고 일체의 미련 없이 극락세계에 왕생하소서. 그리고 남아있는 가족 친지들을 잘 보살펴서 좋은 길을 갈 수 있도록 자비로 섭수하여 주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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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9월15일 음력 8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도혜스님 2023-09-15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오늘 여러분에게 말씀드릴 부분은 <칭찬 여래>입니다. 보현행원품 가운데에 칭찬 여래가 나오죠. 이 칭찬 여래에서 여래라는 단어는 부처님을 말씀하는 겁니다. 그래서 부처님을 찬탄하는 것이 칭찬 여래입니다. 그런데 일체의 모든 삼라만상이 모두 부처님입니다. 그러면 일체 삼라만상이 모두가 부처님이니까 우리는 일체 삼라만상을 다 칭찬하고 찬탄해야만 되겠죠. 왜 그러면 이렇게 일체의 모든 삼라만상을 우리는 칭찬하고 찬탄해야 하느냐 라고 근원을 따져본다면, 그 근원적인 문제가 바로 우리가 감사한 내용입니다. 왜 감사해야 되느냐. 여러분이 살아가는 인생 자체가 일체 삼라만상 유정 무정 모두의 도움으로 여러분은 살아가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항상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것이 진정한 행복을 구가하는 삶이 되는 겁니다. 매사에 감사하며 살아가는 사람은 항상 마음이 따뜻하고 복 받을 사람입니다. 그런데 불만으로 가득한 사람은 어느 곳에 가든 그 사람은 항상 불만스러워요. 아무리 좋은 일이 있어도 좋은 걸 느끼지 못합니다. 불만스러워해요. 이렇게 불만을 가지고 사는 사람들은 자기의 인생을 삭막한 인생으로 자초시키는 겁니다. 그러한 자기의 마음가짐을 다른 사람이 대신해줄 수 없어요. 옆 사람이 그러지 말라고 해도 그 사람 마음이 그렇게 돌아가지 않으면 어떻게 대신 해줄 수 없거든요. 티베트가 전 세계적으로 행복 지수가 굉장히 높은 나라입니다. 전 세계적으로 세 번째로 행복 지수가 높은 나라라고 해요. 그 티베트를 직접 한번 가보니까 사는 게 아주 열악합니다. 어느 정도로 열악하냐면, 날씨가 계속 좋지 않고 춥고 기후가 좋지 않아서 거기서 농사가 지어지는 것은 보리밖에 없답니다. 보리는 농사가 잘되는데 다른 어떤 곡식이나 이런 쌀이나 이런 종류는 전부 다 수입을 해서 갖다 먹어야 되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고원지대라서 차 같은 것은 생산이 되는 모양입니다. 그래서 그 사람들은 차를 잘 재배를 해서 그것을 우려서 그 차에다가 우유를 타고, 거기다 보리가루를 넣어서 먹는 것이 그 사람들의 주식이에요. 그리고 살아가는 환경도 굉장히 발달되지 못하고 열악해요. 고속도로를 닦는 데 몇 미터 닦는 게도 1년 걸린답니다. 그만큼 기계 기술도 발달되지 못한 상황이죠. 그런데도 거기에 사는 사람은 행복한 거예요. 왜 그러냐. 마음 자체가 행복하기 때문에, 환경이 어떻게 됐든 늘 행복한 겁니다. 그래서 늘 웃고 삽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는 것이 아주 중요하죠. 걸을 때는 걸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앉을 때는 앉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먹을 때는 먹을 것이 있어서 감사하고, 이 세상 모두가 감사하지 않은 게 없습니다. 그러한 감사한 마음으로 산다면 우리는 늘 행복하고 불행할 일이 없는 겁니다. 그래서 이렇게 지극한 정성으로 감사하는 마음을 가지면 그 사람에게는 부처님의 가피가 늘 따라붙습니다. 감사하면서 살아가는 생활은 자기가 자기 자신의 행복을 창조하면서 살아가는 것과 다름이 없어요. 그리고 우리가 그렇게 감사한 생활을 하게 되면 부처님의 가피와 축복을 단번에 내가 수용하는 것이 되는 겁니다. 근데 어떠한 조건에 있든 감사하지 않고 불만만 가지는 사람은 어디다 갖다 놔도, 그야말로 좋은 곳에 갖다 놔도, 좋은 음식이 있어도, 항상 좋은 음식을 먹으면서도 ‘이것은 짜다, 싱겁다, 이거는 뭐다 뭐다’ 이러한 여러 가지 불만을 갖게 되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감사하는 생활을 하게 되면 여러분 자신이 너무 행복해지는 거예요. 왜 그러냐 하면, 이 땅 구석구석에는 부처님의 자비광명이 항상 가득하게 실려 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가득하게 실려 있는 부처님의 가피를 우리가 그것을 이제 실상 생명의 공덕이라고 하는데, 그 실상 생명의 공덕이 가득한 것을 우리가 감사함을 느낌으로 인해서 그것이 겉으로 나타나는 겁니다. 오늘 여러분들이 초하루라서 진관사에 오셨습니다. 그런데 오시는 마음속에는 뭐가 있을까요? ‘부처님. 우리 손자도 잘 되게 해주시고, 우리 아들 사업도 잘되게 해주시고, 복도 많이 받고, 뭔가 생각하는 대로 다 소원이 성취되게 해 주십시오.’ 이런 마음이 아마 여러분들 마음 밑바닥에 있어서 오늘 초하루에 이렇게 오셨을 것이라고 생각을 하는데, 그러한 부처님의 공덕과 축복을 바로 받을 수 있는 비법이 있습니다. 그 비법이 뭐냐. 바로 칭찬 여래예요. 그래서 오늘 당장 집에 가셔서 아드님을 칭찬해 보세요. 그리고 며느님을 칭찬해 보시고, 남편 되시는 분을 칭찬해 보세요. 남편이 저녁에 퇴근해 오면, ‘왜 술 먹고 왔냐, 뭐가 어쨌냐’ 잔소리 하시지 마시고 항상 칭찬하는 마음으로 바라보고 칭찬해보세요. 손자분들도 ‘너 왜 숙제 안 하고, 공부 안 해. 왜 게임만 하고 앉아 있어.’ 이러지 말고 칭찬으로 그 게임을 하지 않을 수 있도록 돌려서 칭찬을 해보세요. 그러면 그렇게 칭찬받은 상대방이 여러분을 기쁘게 해줄까요 아니면 기분 나쁘게 해줄까요? 기쁘게 해주겠죠. 그러면 그 즉시에 여러분은 행복을 받는 겁니다. 이 그 자리에서 부처님의 가피를 받는 방법이 바로 이 칭찬 여래에요. 모든 것을 칭찬하는 마음, 이것은 아주 대단히 거룩하고 좋은 방법입니다. 부처님의 가르침이 여러분은 굉장히 어렵고 이해하기 어렵다고 생각하실지 모르지만, 남 칭찬하는 거 쉽습니까, 어렵습니까? 칭찬을 하면 돼요. 그런데 문제는 여러분들 마음에 칭찬하는 것이 쉽지가 않아요. 그죠? 그게 문제입니다. 그게 문제인데, 그 마음을 버리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일반적으로 남을 칭찬하고 다른 사람을 인정해주고 다른 사람의 능력을 높이 평가해 주는데 굉장히 인색해요. 그렇게 인색한 마음 밑바닥에는 뭐가 있느냐 하면은 질투하는 마음이 있습니다. 남이 잘 되면 뭐라고 그러죠? 사돈이 논 사면 배가 아프다. 그거는 남이 잘되는 꼴을 못 보는 마음이거든요. 그런데 그러한 마음을 버리고 항상 긍정적인 마음으로 상대방을 칭찬해준다면은 여러분들도 행복하게 될 수가 있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칭찬하는 데는 세 가지 법칙이 있습니다. 뭐냐 하면은 첫째는 모든 사람이 보는 앞에서 해라. 뒤에서 하지 말고. 그다음에 두 번째는 구체적으로 해라. ‘니가 이거 이거 이렇게 잘했다.’ 이렇게 고유명사까지 숫자까지 넣어서 구체적으로 칭찬을 하고. 세 번째는 즉각적으로 해라. 그 사람이 잘한 행동을 했을 때 그 자리에서 바로 칭찬을 해줘야지, 한참 있다가, 한 달 뒤에 하면 칭찬받는 사람이 전혀 감동을 못 받습니다. 본인도 그 시간이 지난 다음에 칭찬하려면 좀 뻘쭘하고 기분이 그렇죠. 그러니까 상대방이 잘했을 때 그때 바로 즉각적으로 칭찬을 해야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세 가지 칭찬하는 방법을 여러분들이 꼭 지켜서 칭찬을 하시고요. 그렇게 상대방을 칭찬을 하면 여러분들도 항상 상대방이 나를 칭찬해서 기쁘게 해주는 그러한 삶을 살 수 있게 됩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이렇게 살아있는 것이 당연할까요? 절대로 당연하지 않습니다. 우리가 이렇게 살아서 움직인다라는 것은 여간 감사한 일이 아니죠. 당장 죽어가는 사람에게 우리가 이제 살아있다라는 것은 전혀 당연하지 않고 무한히 감사한 일입니다. 그다음에 우리가 밥 한 끼 먹는 거 당연한 겁니까? 당연하지 않아요. 밥 한 끼를 못 먹어서 죽어가는 사람에게는 이 밥 한 끼가 정말 놀랄 만큼 감사한 일입니다. 여러분은 일주일, 열흘 이렇게 안 굶어보셨겠죠? 3일 굶어서 도둑질 안 하는 사람이 없다 그럽니다. 그만큼 먹는 것이 정말 중요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먹거리를 대하고 먹고 하면서도 그 먹는 음식에 대해서도 감사할 줄 알아야 하고, 그 음식이 오는 과정, 농사 지은 사람이 있고 채소를 가꾸는 사람이 있고 또 그 먹거리를 가져다가 중간 중간에 연결해 주는 그러한 장사하시는 분들이라든가 이런 것이 전부 다 있기 때문에, 여러분이 마트에 가면은 여러분 원하는 게 다 있잖아요. 여러분이 먹고 싶은 걸 다 구입할 수 있는 것이 그런 분들이 다 계시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먹을 수 있는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두 눈을 가지고 볼 수 있다는 거 이거 당연한 걸까요? 당연하지 않습니다. 눈을 잃을 상황에 처한 사람에게는 두 눈으로 볼 수 있는 이것은 정말 기가 막힌 행복입니다. 만약 여기 여러분이 눈을 뜨고 살다가 만약 갑자기 눈을 잃게 되면 그 사람의 삶은 완전히 어떻게 살아야 할지 모를 만큼 당황하겠죠. 그래서 우리가 입을 옷이 있다는 거, 여러분들이 이렇게 법문 듣고 돌아갈 집이 있다는 거, 또 먹을 것이 있다는 거, 또 여러분이 갈 수 있는 직장이 있다는 거, 또 사랑하는 가족이 있다는 거, 나를 위해서 잔소리해 주는 어머니가 계시다는 거, 정말 믿을 수 있는 친구가 있다는 거, 이 모든 것들이 당연한 게 아닙니다. 정말 모든 것이 너무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그뿐만이 아니에요. 우리가 살아가면서 지금까지 당연하게 생각했던 모든 것들이 전혀 당연하지 않기 때문에, 그 하나하나에 우리가 감사한 마음을 가진다면, 여러분들의 삶은 지금부터 당연한 것이 아니라 기적적인 놀라운 그러한 삶이 됩니다. 그래서 우리가 늘 감사한 마음을 가졌을 때 우리는 어떤 마음이 일어나냐면 정말 내가 이렇게 살아가는 게 모두의 도움이고 하늘의 도움이고 땅의 도움이고 모든 자연의 도움이다 이렇게 생각을 한다면 정말 감사한 일이죠. 그리고 보현보살님의 이 행운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다른 게 아니에요. 뭐냐 하면 마음의 문을 열고 칭찬 찬탄하고 우주의 모든 것에 감사를 하고 극락을 바깥에서 찾지 말고 감사할 줄 아는 넉넉한 마음이면 곳곳이 정토 아닌 데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렇게 찬탄을 하게 되면 무량한 공덕이 시공을 초월해서 끝없이 끝없이 이어지게 됩니다. 그래서 이러한 감사한 부분은 내가 감사할 수 있는 조건 속에 있을 때에만 감사를 느끼는 것이 아니라, 어떠한 조건에 처해 있더라도 그 처해 있는 조건에서 내가 감사할 수 있는 부분을 찾아서 감사한다면, 그 행복은 내가 창조적인 아주 좋은 에너지입니다. 그래서 감사야말로 이제 강력한 창조의 동력이 되는 거죠. 주어진 조건이 감사한지 아닌지를 판단할 게 아니라, 주어진 조건 속에서 내가 아주 형편없는 조건 속에 있다 하더라도, 그 주어진 조건 속에서 감사할 일을 발견하고 감사함을 느낀다면, 더 많은 감사함이 나에게 생겨나게 됩니다. 설사 내가 아무것도 없이 빈털터리로 정말 가난하게 산다할지라도, 가만히 생각해 보면 이 땅에 인간으로 태어났다라는 그 자체 하나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해야 됩니다. 왜냐하면 여러분들 주변에 있는 모든 짐승, 그러니까 소나 돼지나 닭이나 이런 것들을 한번 보십시오. 그리고 요즘 TV에서 동물의 왕국을 해주잖아요. 그 동물이 살아가는 과정을 한번 보면 정말 늘 불안합니다. 사자나 이러한 큰 백수의 왕인 이러한 동물들도 고통이 없을 것 같아도 굉장한 고통이 있고, 그 외에 다른 동물들은 항상 잡혀 먹힐까 봐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가 없겠죠. 조금만 힘이 부족하거나 조금만 어떻게 잘못되면 바로 사자나 큰 동물들이 잡아먹잖아요. 생명이 일각에 달려 있는 겁니다. 그러한 생활을 할 뿐만 아니라. 자연의 동물들은 그렇다고 하더라도, 집 안에서 사람들이 키우는 소나 돼지나 닭이나 이런 것들은 어떻게 됩니까? 소를 왜 키우죠? 여러분들이? 잡아먹으려고 키우죠. 그래서 제가 확실히는 모릅니다마는 돼지는 태어나서 6개월 만에 잡힌다고 들었습니다. 그러니까 6개월 만에 죽어서 여러분들의 식탁에 오르는데, 그 돼지가 언제 자신의 정신과 육체나 물질을 향상시킬 수 있는 시간과 조건이 되겠습니까? 전혀 되질 않아요. 그러니까 한 번 축생에 떨어지면 수없이 수많은 세월을 지나도 벗어나기가 어렵다는 겁니다. 그러니까 부처님 경전을 보면, 까치로 한 번 태어나면 500생을 까치 생활을 하고, 뭔가 새나 이런 걸로 태어나면 500생을 새나 이런 조류로 살아간다는 것이 경전에 더러더러 나옵니다. 그런데 제가 처음에는 그런 경전을 봤을 때 아무러면 500생 동안이나 그 까치 생활에서 못 벗어날까 생각했는데, 가만히 제가 생각해 보니까 그 까치의 그 업에서 벗어날 수 있는 어떤 여건이 전혀 없는 겁니다. 그런데 인간은 설사 아무것도 없이 빈 몸으로 지금 있다 하더라도 그 사람이 힘을 내서 열심히 일하고 생각을 바꾸어서 하면 얼마든지 일어날 수 있고, 일어나고 안 나고를 떠나서 인간이라는 부류에 속해 있다는 그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정말 감사할 일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경제적인 조건이 험악하고 안 좋다 하더라도 여러분들은 감사하고 행복할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돈만 많으면 행복하다? 절대 그렇지 않습니다. 돈 많은 사람이 더 불행해요. 더 불행한 경우가 더 많더라고요. 다는 아니겠지만. 왜냐하면 돈이 많으면 자녀분들이 서로 부모님 돈 좀 뺏어가려고 애를 쓰죠, 그죠? 그런 자제분들이 많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그러한 돈 많은 거 너무 거기에 탐착하지 마시고, 살아가는 조건에서 전부 다 감사한 것을 여러분들이 창조하고 창출을 한다면 여러분들은 끝없이 행복할 수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항상 감사함을 찾아야 될 뿐만 아니라, 다른 일체의 모든 존재들에게 칭찬 찬탄하는 그러한 마음을 놓아버리지 않아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늘 모든 일체 존재들을 칭찬 찬탄하는 그러한 생활을 해야만 됩니다. 그러면 한번 따라해보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칭찬하고 찬탄하는 생활을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칭찬하고 찬탄하는 생활을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금 칭찬하고 찬탄하는 생활을 하겠습니다. 여러분들 이렇게 3창을 했으니까, 앞으로는 지금부터, 지금 이 자리에서 일어나는 순간부터, 항상 칭찬하고 찬탄하는 그러한 마음가짐으로 살아야 됩니다. 어떤 일본 사람이 물에 대한 연구를 한 것이 있습니다. 그것을 보면 그 물에게도 칭찬을 하면 그 물이 아주 좋은 결정체를 맺는다 그래요. 근데 물에게도 자꾸 욕을 하고 나쁜 소리를 하면 그 물의 결정체가 어그러진답니다. 그리고 밥을 한 그릇 떠서 놓고 그 밥을 “아이고 참 맛있다, 넌 참 밥이 잘 됐구나.” 이렇게 칭찬을 하면 그 밥이 오래도록 유지가 되는데 그 밥을 보고 “맛도 없고 너는 그냥 그렇다”고 욕을 하면 그 밥이 금방 부패가 돼버린답니다. 그러니까 일체 유정 무정이 전부 다 부처님의 기운을 갖고 있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일체의 모든 것에 칭찬을 아끼지 말아야 됩니다. 그리고 또 한 가지는 어느 보살님이 아드님이 너무너무 속을 썩이는 거예요. 말도 못해, 그냥 나갔다 하면 일을 쳐서, 남 때리고 뭐 아니면 여자문제로 물어줘야 되고 이건 하루에 한 건씩 일으키다시피 하도 그렇게 애를 먹이니까, 어느 날은 너무너무 속이 상해서, 그 울분이 어떻게 감당이 안 돼서 버스를 타고 한없이, 그냥 목적지도 없이 가다 보니까 조계사 팻말이 보이더랍니다. 그래서 자기도 모르게 그 조계사 앞에 내려서 조계사에 들어가서 “아이고 부처님. 저놈 새끼 그냥 딱 죽었으면 좋겠다”고 처음에는 그랬대요. 그래서 한참 1시간 정도 절을 하다 생각하니까, “아이고 그래도 죽으면 안 되지, 죽지는 말고 그만 정신을 좀 차리도록 좀 해 주십시오. ” 그런데 그렇게 눈물이 나더라는 거예요. 그리고 이제 그렇게 한 번 갔다 와서 조계사를 한 일주일인가 계속 다닌 모양입니다. 그런데 법당에 가기만 하면 울어요. 왜냐하면 그 아들 생각만 하면 막 속에 울분이 나서 못 견디는 거예요. 그러니까 이제 법당을 맡은 스님께서 그걸 아마 보신 모양입니다. 그래서 “왜 보살님 맨날 오시면 우느냐” 그러니까 이제 보살님이 그런 이야기를 한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그 스님이 뭐라고 했냐면 노트를 하나 사서 아드님을 칭찬할 일을 하루에 10가지를 쓰라는 거예요. 10가지씩 그래서 100일을 해라. 그러면서 더불어서 기도를 같이 해라. 그래서 이제 처음 노트를 사가지고 칭찬할 일을 쓰려니까 아무것도 없어. 뭘 쓸지 아무리 찾아도 칭찬할 일이 없는 거예요. 하도 하도 쓸 게 없어서, 죽지 않고 살아 있어서 다행이다. 처음에는 그렇게 쓰고, 또 어느 날은 조금 일찍 들어왔다는 거예요. 그래서 아이고 일찍 들어와 다행이다. 그렇게 아들이 잘하는 부분을 자꾸 찾아서 쓰다 보니까, 나중에는 시간이 흐르면서 아들이 잘하는 모습이 더러더러 있더라는 거죠. 처음에는 한 가지도 없어서 하도 하도 쓸 게 없어서 살아있는 게 다행이다라고 썼는데, 아들이 잘하는 걸 자꾸 찾아보니까 뭔가 보이더라는 거죠. 그래서 50일이 넘어가니까 아들이 집으로 조금씩 들어오더랍니다. 그래서 나중에 100일을 채우고 그 아들이 마음이 바뀌어서 장가 가서 아주 잘하고, 지금은 소원이 성취돼서 잘 살고 있다고 합니다. 만약에 여러분이 가장 미워하는 존재가 있다. 여러분이 살아가는데 인간이니까 미워하는 사람이 없을 수가 없겠죠. 그러면 그 미워하는 사람이 잘하는 부분을 찾아보세요. 찾아보시고 내가 왜 저 사람을 미워할까 이것도 한번 생각해 보셔야 됩니다. 이 칭찬 여래는 어떤 업을 소멸해 주느냐 하면 다른 사람을 질투하는 마음을 없애줍니다. 다른 사람을 자꾸 칭찬하다 보니까 남을 미워하고 하는 그러한 마음이 이제 자꾸 사라져서 그 악업이 없어지는 거죠. 그래서 부처님의 수많은 말씀 가운데 핵심은 뭐냐 하면 우리 앞에 펼쳐진 이 모든 모습을 바로 보라는 거예요. 새 우는 소리, 꽃이 피는 모습 이러한 모습들을 우리가 똑바른 마음으로 바라봐서 그 모습들이 내 마음을 환희롭게 할 수 있도록 내 마음을 활짝 열라는 겁니다. 그래서 마음의 문을 활짝 열게 되면 이 우주에 모든 좋은 것들이 여러분 마음속으로 들어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웃과 우주를 향해서 여러분 마음을 활짝 열어라. 그렇게 활짝 열게 되면 부처님의 가피와 축복, 모두가 여러분들 마음 속 안으로 다 들어오게 됩니다. 그러면 자연히 가피를 받게 되겠고 자연히 복이 들어오게 되겠죠. 이와 같이 하는 데는 또 한 가지 가르침이 있는데, 그것이 <수희 공덕>입니다. 따라 기뻐하는 공덕입니다. 그래서 보현행원 가운데에 칭찬 여래와 수희 공덕은 이제 따로 되어 있지만, 여러분들에게 오늘은 궤를 같이 하는 수희 공덕을 간단하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따라 기뻐하는 공덕은 첫 번째는 뭐냐 하면 부처님의 무한한 공덕을 우리가 따라 기뻐하는 거예요. 부처님께서 수많은 세월 동안 공부하셔서 고행하시고 또는 수많은 세월 동안 당신의 모든 몸까지, 그냥 보시가 아니라 눈, 코, 귀, 자기 몸, 화엄경에 보면 60종 보시가 나오는데, 그 60종 보시 안에 전부 다 들어 있습니다. 눈도 보시하고 귀도 보시하고 코도 보시하고 심지어는 심장, 간장 이런 것까지 다 보시하는 이러한 내용이 나옵니다. 그렇게 무한한 공덕을 쌓았기 때문에 지금 여러분이 부처님께 ‘돈 주시오, 복 주시오, 뭐 주시오, 뭐 주시오’ 해도 부처님이 다 줄 수 있는 능력을 가지신 겁니다. 그러한 무량한 공덕을 우리가 따라 기뻐하고, 또 이 수희 공덕은 부처님 공덕만 따라 기뻐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의 모든 중생의 기쁜 거, 다른 사람의 기쁜 그러한 것을 따라 기뻐하는 공덕이 바로 수희 공덕입니다. 그래서 이 따라 하는 공덕 역시 칭찬 여래와 같이 이 질투의 마음을 없애주는 겁니다. 그래서 다른 사람이 잘하는 거, 다른 사람이 잘 되는 거 이거를 항상 내가 따라 기뻐하는 거예요. 그래서 천상 세계, 욕계 천상 중에 제일 높은 하늘인 타화자재천(他化自在天)이 있습니다. 이 타화자재천이라는 이름 자체가 뭐냐. 다른 사람의 기쁨을 바로 자기가 즉각적으로 내 기쁨으로 만들어버리는, 만들어서 즐기는 그 하늘이 타화자재천이에요. 그러니까 여러분들은 동창 모임에 가서 동창생이 뭐 좀 잘 됐다 그러면 배가 좀 살살 아프고, 여러분이 잘 돼야 되는데 그 동창이 잘 됐다 그러면 심장이 이상해서 집에 와서 또 남편을 들들 볶죠. 아무개는 뭐 무슨 차 타고 다니고, 다이아몬드 반지도 끼고 다니고, 귀걸이도 했는데 나는 왜 안 사주냐 해서 싸움을 하고 야단이 나죠. 그런데 이 수희 공덕은 다른 사람이 잘하는 모든 공덕을 내가 따라 기뻐하기 때문에, 이 우주 가운데 기쁜 일이 있는 사람이 한두 사람이겠습니까? 수많은 사람의 기쁨을 다 내 기쁨으로 하는 거예요. 그렇죠? 그러면 여러분들은 항상 기쁘겠죠. 안 그래요? 그래요. 대답은 하면서도 따라 기뻐하지 못하죠. 또 괜히 남이 논 사면 배가 아파서 ‘아이고 어떻게 또 방해를 하나’ 이런 마음 가짐은 안 되죠. 그래서 이 남을 질투하는 이 악업이 대단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주변에 이렇게 가만히 보면 질투로 악업을 짓는 경우가 굉장히 많습니다. 그래서 우리 불자님들이 살아가면서 힘들고 어려우면 ‘아이고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지어서 이럴까’ 이런 소리 많이 하시는데, 전생에 지은 죄업도 물론 바탕이 되겠지만, 금생에 여러분들이 지어서 만든 악업과 고통도 더 많아요. 그래서 전생에 지은 것이 씨가 되고, 금생에 여러분들이 지은 것이 거의 아마 50% 정도는 될 것 같아 보입니다. 그래서 어리석거나 이 질투하는 마음을 일으키게 되면 없던 고통을 내가 만듭니다. 그래서 이러한 따라 기뻐하는 마음 수행을 바로바로 하게 되면 여러분들은 여러분 생각에 ‘부처님 법이 8만 4천 법문이라고 하는데 그걸 다 어떻게 내가 배워서 수행을 하나’ 이렇게 어렵게 생각할 거 없어요. 오늘 여러분들께 말씀드린 거 쉬운 일이죠. 다른 사람 칭찬하고 또 다른 사람 좋은 일이 있으면 함께 기뻐하고. 이거 쉽습니까, 안 쉽습니까? 쉽죠. 이렇게 쉬운 일을 안 하고 자꾸 딴 짓하면서 ‘힘들다. 스님, 힘들어 죽겠어요, 못 살아 죽겠어요.’ 이러면 안 되죠. 제가 말씀드렸죠. 어떠한 조건에 있다 하더라도 인간으로 살아가는 그 하나만으로도 여러분은 행복한 거다. 그렇죠? 그러니까 더 이상 바라면 안 됩니다. 먹을 수 있으면 먹을 수 있어서 감사하고, 우리가 이렇게 숨을 쉬는데 숨을 쉴 수 있는 게 얼마나 감사한 일인지 몰라요. 그리고 우리가 이 숨을 쉬는데 이 공기가 여러분에게 한 번 쉬는데 돈 얼마 이러지 않잖아요. 다 무한히 숨을 쉬고 살아도 조건 걸지 않습니다. 그러니까 그거 한 가지만으로도 우리는 감사한 일입니다. 그런데 옛날에는 생수 사 먹지 않았잖아요. 요즘 저기 사람들은 거의 생수를 사 먹어요. 그죠? 물이 맑지 않다고. 앞으로는 이렇게 우리가 자꾸 환경을 파괴를 하고 이러면 아마 이 공기도 사서 마실 때가 오지 않을까 싶습니다. 지금은 아직 사서 마시지 않으니까 너무 감사한 거죠. 그죠? 살아있는 자체가 감사한 거예요. 그렇게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렇게 생각하시면서 항상 감사한 마음으로 온갖 이 사물을 돌아보게 되면, 내가 이렇게 살아가면서 많은 것들의 도움을 받고 살아가면 나도 그 모든 일체 만물에게 또는 사람에게, 가까이 오는 사람에게 도움이 되는 그러한 삶을 살아야 되겠다. 이것이 인간의 마음이에요. 짐승은 그런 마음을 못 일으켜요. 그러니까 맨날 거기서 쳇바퀴 돌듯 죽었다가 또다시 축생으로 나고, 축생으로 나고, 거기서 벗어나기 힘들거든요. 그리고 이 사바세계라는 이 공간은 고통도 있고 즐거움도 있는 그런 세계입니다. 그런데 수행을 하기 아주 최적의 장소가 사바세계랍니다. 물론 극락세계는 태어나기만 하면 저절로 공부가 되는 장소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삼매를 정하려면 평생을 앉아서 이뭣고(이목고)을 하고 연구를 해도 삼매의 경지가 잘 되지 않아요. 근데 극락세계는 바람만 한 번 선뜩 불어도 삼매의 경지에 들어간답니다. 그만큼 환경이 좋아요. 그런데 사바세계에서 일평생 공부하는 그 수행이 극락세계에서 오랫동안 하는 수행보다 더 공덕이 크고 효과가 크다고 했습니다. 그만큼 이 사바세계는 수행을 하기가 딱 좋은 세계에요. 근데 여러분이 인간 몸 받기 어려운데 인간 몸 받았고, 또 불법을 만났고, 여러분이 이렇게 진관사에 오셔서 법문을 듣고 이 얼마나 감사한 일입니까. 다른 거 다 볼 거 없다 이 말이죠. 그리고 이 진관사가 또 국행수륙재를 해서 여러분들이 재마다 오셔서 공덕을 짓고, 눈도 호강을 하고, 귀도 호강을 하고 그렇죠? 이러한 진관사의 신도가 된 것을 정말로 감사하게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이 질투의 악업이라고 하는 것은 정말 무서운 거예요. 부처님 당시에 미묘비구니라는 비구니가 있었습니다. 그 비구니가 자기가 이제 나이가 들어서 아랫사람을 지도해야 할 그러한 자리에 있었을 때, 그 비구니가 후배들에게 지금까지 살아왔던 자기의 삶과 정말 험악한 삶을 살았던 전생의 악업을 이야기를 합니다. 그러니까 이제 아라한과를 증득해서 전생에 자기가 어떤 악업을 지어서 금생에 그렇게 힘들고 어려운 삶을 살았는지를 본인이 이제 다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그 내용을 이야기를 하는데, 보통 사람들 같으면 자기가 전생에 나쁜 악업을 진 거 다른 사람한테 말 안 하고 싶겠죠. 근데 이제 이분은 벌써 아라한과를 증득했기 때문에 내가 잘나야 된다, 내가 남한테 잘 보여야 된다, 이런 마음이 전혀 다 끊어진 분이에요. 그러니까 자신이 전생에 질투의 악업을 지어서, 금생에 자기가 출가하기 전까지 그야말로 이루 말할 수 없는, 인간으로 겪을 수 없는 고통을 겪었거든요. 그래서 출가를 했습니다. 그러한 이야기를 이제 다 한 겁니다. 자기가 전생에 어느 큰 부잣집의 본부인이었어요. 근데 자기가 자식을 못 낳아 첩을 들인 거죠. 첩을 들여서 그 첩의 몸에서 아들을 낳았습니다. 자식이 없다가 아들을 낳으니까 온 집안 식구가 이제 그 애를 이뻐할 뿐만 아니라, 그 첩하고 애를 막 받들고, 남편뿐만 아니라 시어머니, 시댁 모든 사람들이 그 사람만 추켜세우고, 오로지 그 애하고 그 부인밖에 없는 거예요. 자기가 그동안은 본부인으로 아주 큰소리 치고 살았는데, 그렇게 되니까 소외된 느낌도 들 뿐만 아니라,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이 아이가 크게 되면 아들이니까, 이 재산을 다 저 아이가 물려받게 되면, 자기의 신세가 어떻게 되겠는가 이렇게 생각을 한 겁니다. 그래서 이분이 어떤 생각을 했느냐. 저 아이를 없애는 수밖에 없다. 그래서 없애려고 그 아이 숨골에 바늘을 꽂았어요. 길고 큰 바늘을 꽂아서 애가 시들시들 말라서 죽는 거예요. 그러니까 애를 때려서 멍을 들인다든가 애를 밥을 안 준다든가 이런 게 아니니까 아무도 모르죠. 바늘을 꽂았으니까 모른다 이 말이죠. 그러니까 애가 시들시들해서 자꾸 아프고 죽으니까, 모든 사람이, 그 애를 낳은 엄마도 그렇고, 이제 모두가 이 본부인이 그렇게 한 게 아니냐 하고 의심을 하니까, 이 본부인이 “난 절대 안 했다. 내가 만약 했다면 다음 생에 호랑이한테 물려 죽을 거고, 뭐가 어쩔 거고 어쩔 거고” 악독한 말을 엄청나게 많이 했어요. 그 말을 그다음 생에 그대로 다 받았습니다. 이 받은 내용을 말하면 너무 길어서 이렇게 간단히 줄이는 거예요. 그래서 이 질투의 업이라는 게 이렇게 무서운 겁니다. 그리고 여러분이 지금 현재 이웃들이나 여러분 주변에 살아가는 사람들의 모습을 가만히 보세요. 거의다 질투의 마음으로 사람들을 못살게 굴고 하는 것이 허다합니다. 많아요. 남의 집이 장사 잘 되면 그거 훼방하려고 나쁜 짓하고 이런 것들 허다하게 많아요. 그리고 다른 사람 잘났다고 자꾸 다른 사람을 칭찬하고 자기는 못 났다 그러면 그거 방해하려고 또 오만 짓 다 하고. 그래서 이 질투의 업이라는 게 아주 무서운 겁니다. 그러한 악업을 막아주는 것이 바로 칭찬 여래고 수희 찬탄입니다. 그러니까 이 악업만 짓지 않아도 여러분에게는 저절로 복이 오게 되겠죠, 그죠? 그래서 오늘은 이제 여러분이 딱 기억할 수 있는 겁니다. 남을 칭찬하고, 그다음에 뭐 하라고요?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을 따라 기뻐한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좋은 일을 따라 기뻐해주면 그 기뻐해 줌을 받는 사람은 용기와 희망을 갖게 돼요. 다른 사람이 나를 이렇게 잘한다고 칭찬해주니까 내가 그동안은 잘못하는 줄 알았는데 참 잘해야 되겠다. 이렇게 용기와 희망을 가지고 기뻐하게 되면, 다른 사람을 기뻐하게 해주면 그 기쁨이 나에게도 오는 겁니다. 다른 사람이 아주 그 찬란한 그러한 좋은 일이 있다. 그것을 함께 기뻐해 주면 나에게도 언젠가는 그러한 찬란하고 좋은 일이 생기는 겁니다. 그것이 이 세상의 원리입니다.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이 수희 공덕, 따라 기뻐하는 이 공덕은 돈을 들이지 않고도 할 수 있는 큰 보시가 된다. 그러니까 너희들이 이 수희 공덕을 열심히 지어라.’ 이렇게 주장을 하시기도 하셨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이러한 수희 공덕이나 칭찬 여래는 두고 할 것도 아니고, 지금 당장부터 실천해야 됩니다. 아셨죠? 그래서 이러한 보현행원의 공덕을 여러분들이 실질적으로 실천을 해서 바로바로 그 자리에서 무한한 부처님의 공덕과 축복과 가피를 받으시는 불자님들이 되시기를 기원하면서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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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9월 10일 국행수륙재 초재 법문
도혜스님 2023-09-10
네, 여러분 반갑습니다. 오늘 법문의 주제는 광수공양(廣修供養)입니다. 이 공양이라고 하는 것은, 복잡하게 설명하지 않고 간단하게 말씀드리면, 주는 것입니다. 주는데, 그 주는 마음에 정성과 공경과 존중하는 마음을 담아 주는 것이 바로 공양입니다. 또 이 공양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가 삶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일체 모든 중생들의 많은 희생의 바탕 위에 내가 살아가고 있다라는 것을 인식하게 하기 위해서 공양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이 ‘준다’라고 하는 것은 무엇을 말하느냐 하면은, 모든 주는 것은 부메랑처럼 반드시 나한테 돌아옵니다. 그러니까 주는 것은 결국 나한테 주는 게 되는 거예요, 남한테 주는 게 아니라. 그리고 이제 오늘 이 수륙재를 시설해서 이렇게 재를 베풀고 있는데, 이 베푸는 재 역시 공양의 의미입니다. 모든 것이. 그래서 이렇게 오늘 부처님과 또는 신중님과 모든 영가님들을 초청해서 공양을 올리는데 법답게, 의례에 맞춰서, 의례에 따라서 여러 가지로 공양 올리는 것이죠. 음식만 공양 올리는 것이 아니라, 여러 가지로, 바라 춤과 또는 악기로 음악을 연주도 하시고, 이렇게 해서 여러 가지로 법에 의해서 의례 중에 이렇게 공양을 올리는 것입니다. 이렇게 의례를 하는 가운데 스님들께서 바라 춤도 추시고 나비 춤도 추시고 또 악기도 연주하시고 그렇게 하시죠. 그러면 왜 이러한 수륙재를 지내면서 그러한 춤을 추신다거나 또는 악기를 연주하신다거나 그렇게 하느냐. 그것은 왜 그러냐 하면, 여러분도 회갑 잔치나 생일잔치나 이런 것을 하실 때, 수준 높은 잔치를 할 때는 반드시 음악과 춤이 따릅니다. 그래야만 그 잔치가 수준 높은 잔치가 되고, 여러분들 마음을 감동시키는 가수가 와서 노래를 했을 때 여러분들은 기분이 아주 좋죠. 그래서 이 세상의 이치는 한 가지입니다. 왜냐하면은 예를 들어서 여기는 이제 여성 불자님이 많으시니, 남편분께서 여러분에게 ‘좋아한다, 사랑한다’ 이렇게 그냥 말하는 것보다 아내에게 바치는 노래를 작사 작곡해서 꽃다발을 주면서 노래를 하는 이벤트를 하면 어때요, 여러분들 기분이 좋을까요? 어떨까요? 감격하겠죠. 그러면 그동안에 남편한테 서운했던 거, 섭섭했던 거 가슴에 이렇게 맺혀 있던 거 다 풀어질까요? 안 풀어질까요? 풀어지겠죠. 똑같습니다. 왜냐하면은 지금 이 자리에 오신 모든 영가분들, 말로는 우리가 죽는다라는 것은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다라고 말하지만, 옷을 갈아입는 것과 같다라는 그 말은 생사윤회를 벗어난 경지에 들어간 스님에 한한 것이지, 일반 불자들이 어떻게 죽는 것을 옷을 갈아입는 것 같은 경지가 되겠습니까? 내가 평생 쓸고 닦고 정말 보물같이 여기던 이 몸뚱이 그거를 다 버려야 되죠. 그뿐만입니까. 눈에 넣어도 안 아픈 자식, 손자들, 그 사람들을 다 두고 가야 되죠. 또한 자기가 가장 아끼던, 여러분들 다이아몬드 반지도 있을 거고, 애착하는 물건들이 많을 텐데 그런 걸 다 놓고 가는 그 마음이, 그 충격이 얼마나 크고 힘들고 어렵겠느냐 이 말이죠. 그런데 그렇게 모든 걸 놓고 다른 환경으로 바뀌어서, 어떻게 해야 될지 갈팡질팡하는 상황에 그 고통이 어떻겠느냐 이 말이죠. 그래서 애착을 못 끊어서 가지 못하는 유주무주 고혼들이 얼마나 많습니까. 그러한 영가님들을 지금 다 초청해서 이 자리에서 스님들께서, 정말 부처님께도 공양 올리지만, 영가님들께도 공양을 올립니다. 그런데 이 <재를 지낸다>라고 하는 것은, -제가 이제 예를 잔치를 들었으니까 또 이 재 지내는 게 잔치와 같은가 이런 생각을 하실까 봐서,- 잔치와는 다릅니다. 재를 지내는 것은 스님들이 염불하시는 그 염불 속에 무한한 법문이 들어 있습니다. 그래서 조금 전에 제가 예를 들었지만, 그냥 좋아한다, 사랑한다보다 거기에 가사를 붙여서 하는 것이 훨씬 상대방을 감동시키는 것처럼, 스님들이 이렇게 곡조를 넣어서 염불을 하시는데, 여러분들은 이 염불이 한문으로 되어 있어서 잘 못 알아들으시겠지만, 영가님들은 이 몸을 벗어나면 아홉 배나 밝아져요. 그래서 스님들이 한문으로 하든 한글로 하든 다 알아듣습니다. 그래서 이 영가님들이 염불로 한 번 마음을 기쁘게 하고 애착을 끊고, 법문으로 한 번 다시 마음을 바꾸고, 그래서 애착과 집착을 모두 끊고 자기가 가야 할 길을 가서, 고통 속에 헤매지 말라고 인도하는 의식과 재가 바로 이 수륙재입니다. 그래서 이제 오늘은 공양에 대한 말씀이라서, 공양에 대한 것을 다시 다른 말씀으로 드려보면은, 공양도 여러 가지가 있는데, 스님들이 조석으로 예불하는 가운데에 계향, 정향, 해향, 해탈향, 해탈지견향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이것을 이제 오분향이라고 하는데, 이 오분향을 스님들께서 무량한 시방제불부처님께 공양 올린다라는 내용으로 조석으로 예불을 드리거든요. 그래서 이 5가지 오분향의 공양 중 계라고 하는 것은 뭐냐 하면, 우리 불자님들이 일상생활에서 몸가짐을 잘하는 그것이 계입니다. 이렇게 우리 불자님들이 몸가짐을 잘해서 나쁜 것은 전부 다 버리고 좋은 행동만 해서 그 청정한 마음과 행동에서 풍겨나는 향기, 그것이 계향입니다. 그래서 그러한 향기가 우리 주변을 맑힌다. 여러분들이 행동을 잘하게 되면 주변 사람들이 다 편안하고 행복하고 즐겁습니다. 그것이 바로 계향이예요. 그렇게 우리가 계를 잘 지켜서 마음이 안정이 되면 선정이 생겨요. 선정을 정향이라고 하죠. 그다음에 선정이 생기게 되면 지혜가 생깁니다. 마음이 딱 안정이 되고 편안해지니까요. 그러면 이렇게 지혜가 생기는 것이 해향이죠. 이 지혜가 생기게 되면 자연히 해탈하게 됩니다. 해탈향이고. 해탈지견향은 해탈을 하게 되면 우리 마음이 청정하고 지혜롭고 자유로워지고, 자유로워지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일체 중생을 제도할 수 있는 그러한 지혜와 모든 것이 생겨나죠. 그래서 그것을 해탈지견향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오분향을 제가 왜 이렇게 오늘 말씀을 드리느냐. 이 오분향은 정말 우리가 내 마음을 잘 조정을 해서 완전히 깨달음에 이르는 그러한 경지가 바로 이 오분향의 내용입니다. 그러면 왜 오분향이 부처님께 올리는 공양이 되느냐 하면은, 여러분이 이제 자제분을 두셨을 때에 여러분 자제분이 정말 공부 잘하고 건강하고 효성스럽고 그러면 부모 마음이 더 이상 기쁠 수가 없겠죠. 제불보살님도 중생이 고통에서 벗어나서 기쁘고 행복하고 이러한 모습을 보실 때 부처님이 제일 행복하시고 또 좋으실 것이고, 그렇게 이끌기 위해서 불보살님들이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겁니다. 그러니까 불보살님들이 이 세상에 출현하시는 것은 중생의 고통을 없애주시기 위한 겁니다. 그래서 오늘 이 베푸는 수륙재가 여기에 오신 모든 영가님들이나 불자님들의 영성을 향상시키기 위해서 의식으로 한번, 법문으로 한번 여러분에게 베풀어서 공양 올리는 겁니다. 그래서 영가님과 여러분들이 향상할 수 있도록 이 거룩하고 훌륭한 수륙재를 열어 베푸시는 진관사 회주스님, 또 주지스님 또는 모든 대중 스님들은 이 수륙재를 시설해서 여러분과 영가님께 공양 올리는 거예요. 여러분이 참석하고 있는 이 수륙재를 시설하는 게 쉬운 일이 아닙니다.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닌데, 더욱이 전국에 큰스님과 법사님을 모셔서 주마다 이렇게 법문을 하는 일은 더더욱 보통 어려운 일이 아니죠. 정말 여러분은 감사하게 생각하고 이 수륙재 만난 것을 기적으로 여겨야 됩니다. 그래서 우리 진관사 모든 스님들께 ‘감사합니다’하고 큰 박수 한번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의식을 집전해 주시는 모든 스님들께 ‘감사합니다’하고 큰 박수 한번 보내주세요. 그리고 동참하신 여러분들은 ‘수륙재 구경 가자’ 이런 마음을 가지고 오시면 안 됩니다. 여러분도 의식을 통해서 마음의 모든 번뇌와 진구를 버리고, 또 법문을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과 행동이 바뀌어야만 됩니다. 여러분이 생각을 바꾸는 것이 매우 중요하거든요. 오늘의 생각이 여러분의 미래의 자본이 되는 겁니다. 살아가는 데 미래의 자본이 되기 때문에, 여러분들이 이 수륙재에 참석한 것을 정말 행운으로 생각하셔야 됩니다. 그래서 이 부분을 한 번 더 반복하겠습니다. 의식을 통해서 마음의 모든 번뇌와 진구를 버리고, 법문을 통해서 여러분의 마음과 행동이 바뀌어야만 된다. 그래서 여러분의 생각을 바꾸는 것이 많이 중요하다 이 말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바뀌어야 되겠느냐 이 말이죠. 첫째 이고득락(離苦得樂), 고통을 버리고 즐거움을 얻어야 됩니다. 두 번째는 지악수선(止惡修善), 악을 멈추고 선을 닦아야 되고, 세 번째는 전미개오(轉迷開悟), 어리석음을 버리고 깨달음의 세계로 가야만 되는데, 이렇게 바뀌고 변하는 것이 바로 여러분들의 영성이 향상되는 거다. 영성은 여러분의 신령스러운 마음, 그것이 향상되는 것이고, 그렇게 향상이 되면은 영가 천도는 물론이고 여러분들이 받는 복락 역시 크다고 볼 수가 있겠습니다. 여러분들이 지금 이 재에 참석하는 것은 영가천도만이라고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영가천도뿐만 아니라, 여러분 자신의 마음이 향상되는 것이 바로 천도가 되는 거예요. 영가님들은 여러분과 이렇게 함께 연결되어 있다고 보시면 되겠습니다. 그래서 여러분의 영성이 향상이 되면 영가님들도 그 영향을 굉장히 많이 받습니다. 그러니까 여러분들이 정말 수륙재 동안뿐만이 아니라, 앞으로 쭉 행복하고 좋은 일이 많이 가득할 겁니다. 그래서 향상되고 바뀌는 방법은 앞으로 큰 스님들께서 법문하실 때 잘 들으시면은 방법을 알게 될 건데, 제가 앞에서 말한 세 가지 문제는 더 펴서 말씀을 드려야 여러분들이 좀 알아들으시겠지만, 시간상 다 펴서 말씀을 드리지 못하고, 앞으로 이제 많은 법문이 재마다 있습니다. 그렇게 법문을 하실 때 잘 들으시면 여러분들이 앞으로 자기 마음을 가지고 어떻게 바꾸어 나가고 삶을 살아야 할지를 알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재를 지내면 영가가 천도를 받아서 환생을 하고, 여러분은 마음을 바꿔서 복을 짓고, 전미개오하는 그러한 큰 복을 얻게 되는 것이죠. 그리고 이제 또 한 가지 중요한 것이 있는데, 지금 우리는 영가님들을 천도하겠다고 재를 지내고 있는데, 여러분들도 언젠가는 죽게 되겠죠. 죽으면 그 자리에서 영가가 됩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영가가 되면 그 후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 여러분들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생각해 보셨습니까? 생각해 보시지 않았죠? ‘여러분들이 죽으면은 염라대왕을 만난다. 그리고 업경대 앞에 서면 조금도 자신의 삶에 대해서 숨길 수 없다.’ 이런 소리 아마 들어보셨을 겁니다. 근데 이 소리를 듣고 어떻게 생각하셨습니까? ‘정말 그래. 나도 그럴 거야.’ 이렇게 확고하게 믿어지던가요? ‘아마도 그냥 전해지는 이야기겠지. 설마하니 내가 죽고 나서 염라대왕을 만날까?’ 안 믿어지는 분도 계셨을 겁니다. 그렇다면 사후에 일어나는 일들에 대해서 과학적으로 입증해서 믿을 수 있는 부분을 조금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죽음 이후의 분야도 지금은 이제 과학이 발달하면서 조금은 밝혀지고 있어요, 과학적으로. 옛날에는 스님들께서 이렇게 말씀을 하시면 반은 믿고 반은 안 믿고 이런 부분이 있었죠. ‘죽어서 갔다 왔나’ 이런 식으로. 그렇지만 지금은 과학적으로 이 사후의 문제를 연구를 하는 분야가 있습니다. 그 분야는 직접 의사를 하는, 죽음을 다루고 삶을 다루는 의사들이 영성에 대한 것을 연구하는 그러한 집단이 있어요. 그래서 그 분야에서 이제 연구를 해서 발표한 내용을 오늘 잠깐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1970년대 중반부터 조금씩 이제 죽었다가 다시 살아난 분들의 체험담을 모아서 발표한 그러한 내용입니다. 심정지가 된 후에 다시 살아난 사람들. 그래서 2001년도에는 랜싯이라는 유서 깊은 의학 학술지, -의학 학술지가 한 100개 정도 되는데, 그중에 이 랜싯이라는 의학 학술지가 세 번째 정도로 인정을 받는 그러한 학술지라고 합니다.- 이 학술지에 심정지 후에 회생한 사람의 근사 체험, 네덜란드에서 전향적 연구라는 제목의 근사 체험 연구 발표가 실렸는데, 이 네덜란드 연구자들은 10개 병원을 선정을 하고, 거기에서 사망 판정을 받은 직후 심폐소생술로 다시 살아난 사람들 344명을 대상으로 조사를 벌였습니다. 그중에서 64명이 근사 체험에 대해 발표를 했어요. 그 근사 체험 중에 10가지가 있는데, 이 10가지를 오늘은 시간이 너무 촉박해서 다 말씀을 드릴 수가 없고, 딱 한 가지만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한 가지는 뭐냐 하면은, 사후에 자신이 살았던 모든 것을 다시 회고하는 부분이 있다고 합니다. 자기가 살았던 모든 것을 주마등처럼 쭉 지나가면서 체험을 한다고 하네요. 그런데 이제 그 체험을 하면서 자기가 선행을 했던 부분은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답니다. 자기가 선행을 했던 모습을 자기가 이제 직접 보는 거죠. 그러니까 이 근사 체험은 자기가 살아온 생을 다시 회고하는 이 부분에서는, 자기의 일생 중에 중요한 부분 부분만 쭉 이렇게 허공에 그림이 펼쳐진 것처럼, -여러분 영화 보시면은 극장이 아닌 야외 영화를 볼 때는 큰 스크린을 설치해놓고 바깥에서 영화를 보시는 것 같은 그러한 느낌이라고 생각하시면 될 것 같아요.- 주마등처럼 자기 일생이 쭉 지나가는데, 자기가 잘 살은 부분, 선행을 하고 살았던 부분은 그렇게 기쁠 수가 없답니다. 그런데 자기가 잘못하고 살았던 부분을 지나갈 때는 실제로 자기가 살았던 그때보다 몇백 배 아프다는 거죠. 마음이 아프고 고통스럽다고 합니다. 이러한 부분이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에서는 ‘우리가 사후에 염라대왕을 만나서 이러이러한 일이 있다’라고 수많은 서적 등이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사후에 일어나는 이러한 일들을 천편일률적으로 딱 이렇다라고 할 수는 없다는 거예요. 왜냐하면 자기가 살아온 과정에 의해서, 기독교를 믿었던 분들은 죽어서 그 하느님을 만난다고 합니다. 그리고 그렇지 않은 분들은 이제 거의 70~80%가 염라대왕을 거친다고 하는데, 이것이 일체유심조의 도리에 의해서 행해지는 것 같아요. 그래서 죽어서 겪는 이 과정도 천편일률적이 아니고, 그 사람 업에 따라서 모든 사람들의 생각이 다 다른 거예요.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여러분들 생각도 똑같은 사람이 아마 거의 없을 겁니다. 그러니까 업이 다 천차만별이에요. 그러한 천차만별인 업이기 때문에 자기가 평소에 들었던 거에 따라서 사후의 생도 그렇게 된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중국이나 한국이나 일본의 돌아가신 분들은 거의 이제 자기가 살면서 염라대왕을 만난다라는 그러한 의식을 갖고 돌아가서 그런지 거의 돌아가신 후에도 염라대왕을 만난다고 합니다. 실제로 어느 큰스님 반열에 계신 분을 제가 아는데, 한 돌아가신 지 지금 한 10년 됩니다, 그분은 깨달음을 얻었다는 분이고, 그분이 불상 점안, 부처님 점안을 하면 부처님이나 탱화에서 광명이 났다고 합니다. 그만큼 이제 공부가 높으신 분인데, 제가 직접 그분에게 들은 이야기입니다. 그분이 한 8시간 정도 돌아가셨다가 살아났답니다. 그래서 그 당신이 돌아가셨던 체험을 제가 그분에게 직접 들었습니다. 그분이 돌아가셔서 염라대왕을 만나셨대요. 만났는데 잘못 모셔간 거예요. 사자들이 이분이 가셔야 할 때가 아닌데 다른 사람하고 착각해서 모셔갔더라는 거죠. 그래서 가서 염라대왕을 만났는데, 염라대왕이 잘못 모셔왔다고 죄송하다고, 이왕 오셨으니까 지옥이랑 구경을 좀 하시고 가시라고 그래서, 지옥 구경을 하셨답니다. 지옥 구경을 했는데 경전에 나오는 그 지옥의 모습보다 천배 만배 참혹하더라는 거죠. 소리도 너무 참혹해서 들을 수가 없고, 눈으로 보는 것도 너무 참혹해서 도저히 눈을 뜨고 볼 수가 없는 지경이더라. 경전에 이제 지옥 모습이 더러더러 나옵니다. 정법염처경 같은 곳에는 지옥의 모습이 많이 묘사가 돼 있죠. 그런데 그 묘사된 거보다 천 배 만배 더 고통스럽고 힘들더라는 거죠. 그리고 지옥뿐만 아니라, 지옥에 가는 그 길목, 또 돌아오는 길목에서 본 여러 가지 모습들을 보면서, 그러한 체험을 하고 오셔가지고는 삶이 달라지셨어요. 물론 당신이 그러한 체험을 하시기 전에도 깨달음을 얻으신 분이지만, 다른 모든 모습도 다 달라지셨지만, 영가 천도하는 이러한 의식을 굉장히 철저하게 하셨습니다. 그분이 영가 천도를 맡으면 이 시식이나 이런 것을 조금도 의식에 어긋나지 않게 하나도 빠뜨림 없이 하셔서, 한 번 시식을 하기 시작하시면 2시간, 3시간 하셨어요. 그러면서 이제 그분께서 그러셨습니다. “우리가 영가 천도를 할 때 사실 우리는 능력이 없는 것 같아서 마음에 좀 죄책감을 느낀다.” 이런 말씀을 드렸더니, “의식에 따라서 열심히만 하면 천도가 된다.” 이렇게 말씀을 직접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살아가면서 어떻게 그 삶을 살아야 하는지를 잘 생각하면서 살아야 됩니다. 우리는 이러한 부분으로 통해서 우리가 어떻게 앞으로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서 깊이 생각을 하고, 지금부터라도 바르게 인과를 철저히 믿고, 자신을 철저히 통제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살아있는 동안 은근슬쩍 ‘조금 잘못해도 이 정도는 뭐 괜찮겠지, 이 정도는 괜찮겠지,’ 생각하지만 그렇지가 않다고 합니다. 물론 스님의 사후의 소리도 제가 이제 직접 들었지만, 그 외에도 몇 년 전에 들은 이야기가 있습니다. 저의 형님이 강원도에 지금 살고 계세요. 그 형님 집에 다니는 신도님이 할머니가 돌아가셨는데, 그 할머니가 이 손주한테 씌어가지고 쭉 이제 돌아간 과정을 이야기를 하는 내용도 보면은, 그 할머니가 살아계실 때 참 며느리한테 잘못했대요. 시집살이를 엄청 시켰나 봐요. 근데 이제 돌아가시고 나서 보니까 당신이 너무 잘못했다는 거예요. 그래서 손녀한테 이 할머니가 씌었어요. 씌어서 살아있는 이 며느리한테 가서 잘못했다고 100배, 천배 눈물로 사죄를 하는 일이 있었습니다. 여러분이 이승에서 할 때는 ‘이만큼은 잘못해도 괜찮겠지’ 이렇게 생각하지만, 저승에서의 판단은 절대로 틀림이 없어요. 용납이 없어요. 그래서 여러분이 이번 수륙재를 통해서 여러분의 업과 나쁜 습관을 바꾸고, 또 여러분의 정신 상태 그러니까 영성을 높이 향상시키는 그러한 기간으로 삼으셔야 됩니다. 수륙재가 끝났다고 해서 그걸로 끝나는 게 아니라, 이렇게 법문을 듣고 재를 지내서 돌아가신 여러분들의 조상님들, 또는 나하고 인연이 있는 모든 영가님들을 천도한 복을 누릴 뿐만 아니라, 이렇게 법문을 들어서 여러분들의 생각이 바뀌어야 됩니다. 생각이 바뀌게 되면 재가 끝나고 나서도 ‘이렇게 살면 안 되겠구나. 내가 참 며느리한테는 이렇게 해야 되고 다른 사람한테는 이렇게 해야 되고’ 이런 것을 여러분들이 확실히 깨달아서 여러분들의 삶이 달라져야 됩니다. 그것이 이 재를 지내는 가장 큰 공덕이에요. 물론 여러분들이 영가를 천도하는 공덕도 무량하지만, 여러분 자신의 영성이 바뀌는 것이 가장 큰 공덕입니다. 영성이 바뀌게 되면 앞으로 여러분의 남은 삶도 큰 영향이 있지만, 그 남은 삶을 어떻게 사느냐에 따라서 다음 생도, 그다음 생도, 그다음 생도 연결이 되는 겁니다. 그러니까 얼마나 이 재가 중요한지 여러분들이 정말 실감을 하시고, 정말 좋은 공덕을 심고, 공덕을 심을 뿐만 아니라 마음 자체를 여러분들이 바꾸는 것이 이렇게 재를 지내는 도중에 법문 듣는 공덕입니다. 신도님들 보면 대체적으로 의식을 할 때는 참가를 하다가도 법문한다 그러면 다 뒤로 빠져요. 공양한다고 뒤로 빠지고. 관음재일이나 이런 데 법문하면 이제 의식만 끝나면 ‘아이고 이제 됐다’ 뒤로 가서 공양이나 하시고 이러는데, 법문 듣는 게 중요해요. 왜냐 어떻게 해야 하는지 여러분들이 알아야 앞으로 공덕이 되지, 그냥 와서 부처님께 절만 하고, 물론 절하는 것도 공덕이 되겠지만, 여러분들의 마음이 바뀌는 것이 가장 중요합니다. 바뀌어야 행동이 달라지고 선행도 짓고 공덕도 짓고 모든 것이 거기에 달려 있죠. 그래서 여러분들이 이 수륙재를 통해서 여러분들의 업과 나쁜 습관을 바꾸고, 여러분들의 영성, 여러분들의 마음, 그것이 향상이 되어서 이 수륙재 기간 동안뿐만 아니라 계속 무한한 공덕과 복을 지어서 앞으로 영원히 행복한 삶을 누릴 수 있도록 기원을 드립니다. 여러분 모두 행복하시고 복 많이 받으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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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행수륙재] 9월 3일 국행수륙재 입재 법문
용학스님 2023-09-03
-수륙재 공덕의 복전(福田)- 반갑습니다. 오늘이 진관사 선망 부모 및 조상 영가 천도와 가정 행복 기원 진관사 국행수륙대재 입재 날입니다. 올해는 또 이제 국가문화재로 지정된 지 10주년을 맞이해서, 더욱더 회주 스님을 위시해서 주지 스님 이하 사중 스님들께서, 또 신도님들께서 1년 내내 이렇게 수륙대재를 장엄하게 준비하신 것 같습니다. 하여튼 대한민국 번영과 또 우리 국민들의 행복과 또 세계 평화 이와 같은 주제를 담고, 제가 어제 주지스님께서 전해주는 리플렛을 보니까 <대자대비의 물로서 생명의 꽃을 피운다.> 화엄경에서는 흔히 이제 그 자비로움을 상징할 때 일곱 번째 주제를 가지고 해나가는데, 선재동자가 53 선지식을 찾아갈 때 일곱 번째 휴사우바이가 자비를 상징하고, 17번째 무염족왕이 자비를 상징하고, 스물일곱 번째 관세음보살이 자비를 상징하고, 그리고 여기 진관사 주제처럼 37번째가 그 유명한 개부수화일체주야신이니라. 모든 나무와 꽃나무와 모든 꽃 생명에 물을 주는 개부, 전부 다 꽃에 생명을 주는 것이 식지 선지식의 개부수화일체중생주야신이죠. 모든 일체 중생의 꽃을 피운다. 그래서 오늘 수륙대재을 이렇게 맞이하는데, 세계가 안고 있는 위기를 극복하고, 우리 국가 내적으로도 서로 대립 갈등을 볼 때 참 가슴이 아픈 일들이 한둘이 아니죠. 그리고 오늘 법문은 학교 공부하듯이 듣지 마시고, 또 의례적으로 공연하듯이 그렇게 참석하시지도 마시고, 볼거리는 많습니다마는. 조금 전에 여법하게 화엄신중을 청하시고, 그리고 법을 청할 때 게송이 이렇습니다. 나에게 한 권의 책이 있는데 종이나 먹으로 된 것이 아니다. 펼쳐보면은 한 글자도 없지만은, 전개무일자(展開無一字)나, 상방대광명(常放大光明)이라. 이 모습을 우리가 잘 기억해야 될 것 같아요. 오늘 제가 여러분들께 <화엄경 입법계품 지남도> 책을 한 권씩 나눠드린 게 있습니다. 뒤에는 그 유명한 우리의 화엄종주 의상스님의 법성게를 책 찍는 걸음에 하나씩 더 찍어놨어요. 천년의 노래를. 이 화엄경 지남도를 왜 가져왔느냐. 오늘 이 수륙대재의, 제가 어제 받은 주제가 이거에요. <복전이 뭐냐, 경전이 뭐냐, 비전이 뭐냐, 이전이 뭐냐.> 우리가 복을 심는 것도 있을 것이고, 복을 짓는 것도 있을 것이고, 복을 아끼는 것도 있다. 조금 수준이 높은 거는 복을 심는 것이고, 조금 수준이 낮은 사람은 복을 짓는 것이고, 더 형편없는 사람들은 복을 아끼기라도 해야 된다. 음식이라든지 여러 가지 복을 좀 아끼고 그렇게 사는데, 차돌을 갖다가 저기 지나가는 맑은 냇물에 아무리 담가놓더라도 물에 있을 때는 물이 좀 젖은 것 같지만, 끄집어내면 금방 바짝 말라버리는데, 우리는 감각 나라 중생이라. 아주 강직하고 뻣센 중생이라서 도대체 부처님의 말씀이 솜에 스며들듯이 스며들지가 않기 때문에, 그럼 경전에는 어떻게 말씀해 놓느냐. 억센 중생은 세력으로 제압해라. 그래서 저는 중생 제도의 길로 나선 사람이 아니고, 중생 제압의 길로 나선 그런 입장입니다. 오늘 수륙대재에 오면서 중생을 제압해야 되겠다. 그리고 보드라운 중생들은 어떠냐. 제가 별명이 보들 스님인데, 피부가 백옥 같잖아요(웃음) 이 보들 스님이 혹시 시커멓게 보이는 분들은 억장이 좀 두꺼운 분들.(웃음) 어쨌든 우리가 이제 보드라운 중생들에게는 뭘 설해야 되냐. 법을 설해야 된다. 법을 설하지 않아도 잘 알아서 한다. 그래 억센 중생들은 세력으로, 주먹이 센 사람은 더 주먹 센 사람을 갖다주고, 말 잘하는 사람은, 사기 잘 치는 사람은 더 말 잘하는 사람을 갖다주고, 돈이 많은 사람에게는 더 부자를 갖다 줘가지고, 그 사람의 세상놀음의 생멸법을 꺾는 데 그 뜻을 두고 있다, 이런 말씀이에요. 감각 나라 중생인데, 꺾기 힘든 억센 중생들은 세력으로서 그 사람을 다스리고, 인물 잘 났다고 뻣세고 그러면 더 인물 좋은 사람, 우리 같은 사람 딱 갖다 놓으면 기가 죽거든요. 자그마한 반딧불 같은 지혜는 가로등 같은 지혜가 있다고, 자기가 뭘 잘한다고 하는 사람은 부처님 같은 태양을 갖다 놓아버리면은 싹 수그러든다 이 말씀이에요. 함석이 조금 야물다고 쇠하고도 다르고 무쇠를 갖다 놔버리면 돼요. 그렇죠? 그러니까 단단하다고 자랑하는 사람은 더 단단한 거를, 부드럽다고 자랑하는 사람한테는 더 부드러운 것을, 이게 이제 생멸법의 중생을 제압하는 방법이에요. 근데 오늘은 여러분들께 이 책을 한 권 드렸는데, 조금 전에도 말씀드렸잖아요, 사회자분께서. <우리 괴불을 이렇게 함월당에 여법하게 모셨다.> 지금 그림이 참 볼 만하고, 부처님 저기 계시잖아요. 저렇게 부처님은 흔적도 없이 와 계신데, 그림으로 부처님을 보시면 안 된다. 약이색견아 이음성구아 시인행사도 불능견여래(若以色見我 以音聲求我 是人行邪道 不能見如來)라. 제가 여기 앉아 있는데 저를 여러분들은 보실 수가 없을 거예요. 아마 혹시 본다면은 내 몸뚱이 고깃덩어리를 보고 계시지 않을까. 육신만 보고 법신은 못 보지 않을까. 그래서 오늘 여기 드린 책도 분명히 글자가 있고, 그림이 있을 겁니다. 그러나 글자, 그림으로 전할 수 없는 부처님의 메아리가 있고 부처님의 그림자가 여기 담겨 있는데, 글로서 글자로서는 쓸 수가 없습니다. 그죠? 그래서 얼핏 보면은 여기에 그림 한 장에 여기 해설 한 장 있잖아요. 그러니까 이 책은 보시지 마시고 집에 가셔서, 타로점 보듯이 오늘의 운세가 딱딱 적혀가지고 그림 한번 보고 운세글 한번 보고. 이 책을 집에 가서 야무지게 보시는 분들은 범죄 행위에 속한다 이거야. 이거는 그림 한 번 보고 대충 읽고 아셨죠? 그러나 간과하지 말아야 될 건, 요 밑에 제가 한 줄 평을 써놓은 게 있어요. 예를 들자면 126페이지 보면은 <황금 그릇을 가지면은 거지 깡통이 미래는 없다.> 이런 구조는 제가 편찬을 해놓는 거라서 제 일기라서 그거는 볼 만합니다. 그거만 한 줄만 딱 읽어야지, 그 위에 한문 읽는다든지 이런 거는 범죄 행위에 속하는 거야. 절대 보지 마시고. 누구하고 오늘 짜장면 값 내기 해야 된다. 이러면 딱 그림을 펴서 너는 사람 몇 명 나왔냐. 나는 몇 명 나왔다. 이런 용도로 쓰셔야지. 라면 놓을 때 뜨거운 냄비 받침대. 그 외에 그렇게 하셔도 이 안에 묻어 있는 뜻은 충분히 우리가 알 수가 있을 것이다. 오늘은 여러분들께 또 이 조그만 종이 하나 나눠드렸죠. 오늘 법문 시간이 한 30분밖에 안 돼가지고 종이 하나 나눠 드린 게 있어요. 요거 일단 화엄경 얘기니까 한번 읽고, 이 책을 가지고 또 한번 읽겠습니다. 못난 사람에게 잘 해라. 제가 왜 이걸 가져왔냐 하면은, 심청이가, -심청이 우리 다 아시죠?- 심청이가 효성이 지극해서 공양미 300석에 팔려서 그 파란만장한 천길만길 되는 인당수에 몸을 던졌는데, 목숨 바쳐서 아버지 눈을 뜨게 해드리려고 했는데 아버지가 눈을 못 떴어요. 뺑덕이 엄마하고 산다고 심청이 인당수에 빠졌는데도 불구하고 아버지는 눈을 못 뜨셨다. 그죠? 목련존자가 아주 효성이 지극하고 신통력도 뛰어나고 지혜가 밝은 인데, 그렇게 효성이 뛰어난데도 어머니를 지옥에서, 아귀도에서 구하려고 하니까 구할 수가 없었다. 목련존자가 어떻게 어머니를 구했죠? 대중 스님들께 만발 공양을 한 뒤라야 목련존자의 어머니를 구할 수 있었다. 신통이 아무리 뛰어나도 어쩔 수 없다. 그럼 대중의 중요성을 우리는 알 수가 있어요. 심청이가 그렇게 지극한 효성이면 아버지가 눈을 떠야 되는데 눈을 못 떠. 심청이가 뭐 하고 난 뒤 아버지가 눈을 떠요? 잔치, 잔치 벌렸네. 심청이가 잔치를 벌여서 온 나라에 눈먼 사람을 구제하려고 했을 때, 비로소 누가 눈을 뜰 수 있다? 오늘 심봉사 눈 뜨는 날입니다. 심봉사 이름이 심학규. 학교 규칙대로 살면 눈이 캄캄한 사람이다. 융통성이 있어야 돼요. 오늘 수륙대재라고 하는 것은 우리 조상이 천도되려면, 미루어 짐작컨대, 무엇을 해야 된다?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이 다 행복해지기를 바라야 우리도 같이 잘 될 수 있다는 메시지를 담고 있는 것이죠. 그래서 그 내용을 가장 잘 담아놓은 내용이 법화경에 보면 화성유품에 동남방에서 대범천이 모여서 게송을 얻는 게 있습니다. 대통지승여래, 대통지승여래는 법화경에 누구죠? 석가모니 부처님의 아버지죠. 석가모니 부처님은 대통지승여래의 16번째 아들이라고 법화경에 나오죠. 16번째. 또 어름한 중들은 “정반왕 아들 아니에요?” 이러고 앉아 있다. 6번째 아들이라고 하는 이 사바의 세계는 잘 살면은 팔정도, 못 살면은 팔사도가 된다. 진관사에 들어오면은 우리가 그 누각 통과할 때 기둥이 4개 좋은 게 있잖아요. 그죠? 왜 그 돌기둥 세워놨어요? 사홍서원을 다짐하는 거예요. 사홍서원. 저기 일주문 통과해가지고, 해탈문 지나서 이렇게 대웅전 들어가기 전에 큰 돌기둥 있잖아요. 중생무변서원도(衆生無邊誓願度) 번뇌무진서원단(煩惱無盡誓願斷) 법문무량서원학(法門無量誓願學) 불도무상서원성(佛道無上誓願成). 법화경의 주제가 그거거든. 그래서 법화경의 대통지승여래의 성불을 찬탄하면서, 동남방의 대범왕이 자기 궁전을 부처님께 공양을 올리고, 궁전만 올리는 게 아니고 다 장엄을 해서 올리고, 꽃도 태산같이 올리고 난 뒤에, 이렇게 부처님께 수륙대재 공양 올리듯이 떡도 올리고, 공양도 올리고, 음성 공양도 올리고, 눈에 보이는 것도, 귀에 들리는 것도 다 올리고 난 뒤에, 색성향미촉법을 올리고 난 뒤 어때요? 원이차공덕(願以此功德) 보급어일체(普及於一切) 아등여중생(我等與衆生) –당생극락국은 없고- 동견무량수(同見無量壽)이랬잖아요. 그죠? 근데 극락이 빠지면 심심하니까 법화경 법문에는 없지만, 우리가 염불 할 때는 당생극락국(同見無量壽) 동견무량수라 그렇게 얘기를 하죠. 법화경 화성유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이 수륙대재를 지낼 때, 경전 중에 수륙대재에 가장 잘 부합하는 것이, 이제 공양 올리는 것은, 화엄경 십회향품 제6회향에 보면은 무차 시혜 대법회라고 나옵니다. 무차법회라고 나와요. 우리 여기는 무슨 법회라고 했죠? 평등수륙대재라고 했잖아요. 평등이 바로 차등이 없는 무차법회거든요. 무차법회, 그건 화엄경 십회향품에 나오는 말씀이에요. 그래서 거기에 음식으로부터 해서 모든 생필품을 일체 중생에게 공양을 합니다. 그러고 나서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어떻게 심청의 아버지가 눈을 뜬다? 모든 사람에게 잔치 잔치 벌렸네. 이러니까 집에 있다가도 눈 뜨고, 잔치 얻어먹으러 오다가도 눈 뜨고, 얻어먹고 집에 가다가 눈 뜨고, 자고 일어나 눈 비비다가 눈 뜨고, 자다가 눈 번쩍 뜨니까 집에 있다가도 뜨고, 저기 왕궁에 잔치 얻어먹으러 가다가도 뜨고. 그래서 그런 것들 볼 때 멀리 있어도 눈을 뜨고, 가까이 있어도 눈을 뜨고, 잘 생긴 봉사도 눈 뜨고, 못 생긴 봉사도 눈 뜨고, 전라도 봉사도 눈 뜨고, 경상도 봉사도 눈 뜨고. 대충 짐작 가요. 걸어다니는 사람도 눈 뜨고, 자던 사람도 눈 뜨고, 어린아이도 눈 뜨고, 남녀노소 빈부 귀천을 막론하고 모든 사람이 자타일시 성불도. 잔치 공덕이 그렇다. 수륙대재에서 우리 조상을 오늘 어떻게 천도시킬 것인가. 조상은 놔두고라도 나부터 어떻게 천도될건가. 학교 규칙대로 살지 말고 조금 융통성을 발휘해서 살아야 된다. 융통성을 발휘하는데, 여러분들이 기존의 관념을 가지고 살던 것이 아마 정반대가 되지 않을까? 저는 화엄경의 이 구절을 읽으면서 이게 화엄경이 잘못됐나? 제가 잘못됐나? 저는 감히 강의 문자 법사라서 강의만 하고 사는 사람이 돼서 시원치 않은데 항상 이렇게 얘기합니다. 책이 잘못되면 잘못됐지, 내가 잘못되지는 않았다. 사람이 어째 잘못되나, 책은 오자, 탈자 있을 수 있다. 자 한번 읽어봅시다. 못난 사람에게 잘해라. 못된 사람한테 잘할 수가 있습니까, 우리가? 못한다. 화엄경에는 이렇게 얘기해 놓습니다. 이게 잔치입니다. 불자들이여, 보살 마하살이 이와 같이 선근을 닦을 적에 악한 중생에게 악하고 아주 못된 데바닷다같은 중생에게, 데바닷다가 부처님한테 많이 되받아 가지고 데바닷다가 됐잖아. 지옥 가서는 이름을 바꿨죠. 어떻게 바꿨어요? 죄 받았다, 죄받았다로 바꿨죠. 고달프고 악하고 내 못된 짓을 하는 사람들에게, 고달프고 싫은 생각을 내지 아니하며 또한 버릴 생각도 일으키지 아니한다. 설사 세간에 가득한 모든 중생이 은혜를 갚을 줄 모르더라도 아주 쪽제비처럼 여우처럼 얍삽하게 살더라도, 보살 수행을 하는 우리는 그 사람들에게 혐오하고 원망하고 한탄하는 마음이 없고 잠깐이라도 나한테 은혜 갚기를 바라는 마음이 없으며 다만 그 못난 중생들의 한량없는 고통을 멸해주려고 해야 한다. 어렵겠죠. 이거 실천할 수 있겠습니까? 없어요. 우리는 일본한테 침탈을 당하고, 중국한테도 침탈을 당한 역사가 많아요. 그리고 마을에 있어 보면, 이웃집에 못된 짓 하는 사람들도 많거든. 정말 못된 사람들이잖아요. 그죠? 그보다 더 못된 사람이, 자기 집안의 형제끼리 못된 짓 하면 더 못 됐겠죠. 우리가 그러고 있잖아요. 우리는, 일본이나 중국에 부끄러워해야 될 일이, 남북이 서로 가슴에 총을 겨누고 있어요, 형제의 가슴에. 이거는 한국 사람이 아무리 자랑스러운 한국인이라 해도, 이 수륙대재 이런 데서 우리가 돌아보면은 참 늘 가슴 아픈 얘기야. 나라가 뺏겨도 좋다 이거야. 근데 집안이 풍지박살 나도 좋은데, 형제끼리 제발 싸우지는 말아야 된다. 요새 형제끼리 안 싸우나, 부모 자식도 싸우고, 야단 법석이잖아요. 그렇죠? 엊그제 보니까 2살 때 자식을 버리고 갔다가, 여러분들 다 아는 뉴스죠, 엄마가 돈 찾으러 왔대요. 아들은 그 배가 전복돼서 물에 빠져 죽고. 그러면 되겠어요, 안 되겠어요? 두 살 때 아이 버렸는데 그것도 못 찾으러 올까? 화엄경을 하면 이제 그런 소견이 생깁니다. 그래 그 사람이 돈 찾으러 와야지. 여러분들 같으면 어떻겠어요? 내가 버렸는데 양심에 찔려서 찾겠어요? 그러니까 수륙대재 하지. 긴병에 효자 있다 없다? (없다) 누가 그래요. 긴병에 효자 있다. 따라해보세요. 그러니까 병이 오래오래 가다 보면은 그 자식이 효자인지 불효자인지 알 수 있어요. 적당한 효자들은 오래되면 도금이 다 벗겨져. 그러니까 진짜 효자는 천년이 되든 만년이 되든 부모님이 앞에 누워 계시든 어떻든지 간에 싫어할까요, 안 싫어할까요? 싫어하지 않아요. 그런데 가짜 효자는 조금 길게 되면 어때요? 긴 병에 효자있다. 이게 이제 수륙대재 법문 듣는 느낌이고, 우리가 그렇게 살아가야 된다 이거예요. 긴 병에 효자있다. 입수에 장단이라. 물에 들어가 보면 누가 긴지 짧은지 표가 나는 거예요. 물에 담그기 전에는 쭉쟁이인지 알맹이인지 잘 분간이 안 가. 볍씨를 물에 딱 넣어보면은 가라앉는 게 있고 뜨는 게 있어요. 내일 모레 이제 백로가 다가오는데 찬바람 불 때 고개를 못 숙이면 그건 쭉쟁이 되고 마는 것이라. 이 책에 있어요. 오늘 여러분들하고 이 책을 한 번도 못 하고 이제 법문 시간은 다 될 것 같아요. 어쩌겠나 할 수 없어요. 연속극도 재미있을 때 끝나버려야 돼요. 복전 얘기는 한마디도 못 하고. 긴병에 효자 있다. 그리고 또 저기 수륙대재 하는 마음가짐을 어떻게 가져야 된다는 걸 이제 제가 전해드리는 겁니다. 그죠? 수륙대재. 네가 내 눈에 눈물 내면 네 눈에는 감사의 눈물이 쏟아지게 내가 너에게 잘하겠다. 이렇게 해야 되는 거 아니에요? 그런데 남의 피눈물 이야기는 그거는 생멸법이지. 우리 부처님의 분상에서는 그런 얘기 안 한다고. 법화경에서 부처님께서 부처님이 되실 수밖에 없던 얘기가 있잖아요. 우리는 공공의 적 데바닷다, 부처님을 독살하려고 달려들고, 출가하기 전부터, 출가하고 평생토록 부처님을 고생시키고 애먹였던 데바닷다를 부처님께서는 어떻게 했습니까? “그런 소리하지 마라. 내가 전생에 불교를 공부하고자 할 때 신의상좌변삼천(身爲床座遍三千)이라. 그 게송이 거기서 나온 거 아니에요. 내가 데바닷다한테 불법을 얻어 들어가지고 내가 성불을 했다. 데바닷다는 나의 전생에 스승이었다.” 데바닷다를 포용 못하면 부처님이 될 수가 없죠. 다른 종교지만은 유다를 포용 못하면 예수가 될 수 없는 것이라. 우리는 그래서 중생으로 살 수밖에 없는 거에요. 조금만 미우면은 그 사람 전화번호 차단시켜버린다. 그래서 남들이 못된 짓하고 도둑질하고 할 때는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래 니 소임이다. 미사일 많이 쏘라. 이놈아. 동족에게 가슴에 그냥 상처를 남겨라. 니 소임이다 이러고 넘어가야지, 그걸 갖다 싸울 수는 없다. 내 가슴에 못을 박으면 나는 그대 가슴에 꽃다발을 안긴다. 못을 박기는, 또 누가 대못을 박고. 그런 그 망발을 하고. 그래서 그렇게 될 때 비로소 화장하지 않아도 너무나 아름다운, 참 천진난만한 소녀 같은 그런 얼굴이 여러분들 모습에서 나타날 수 있을 것이다 하는 거예요. 그걸 갖다 유마경에는 화중생연(火中生蓮)이라, 버글버글 끓는 용광로에서 연꽃이 필 것이다 이래요. 그러면 오늘 여러분들께 소개시켜드릴 것은, 우리는 이 수륙대재의 공양을 올리는데 어떻게 올려야 되냐. 보현행원품 중에서 제9번째 항순중생(恒順衆生)을 여러분들께 소개시켜 드립니다. 오늘 다른 의식이 너무 좋은 게 많은 관계로 이거는 그냥 간식처럼 제 법문을 하고 말겠습니다. 185페이지 한번 펴보세요. 이게 화엄경의 전체 주제입니다. 화엄경이라든지 우리 인생살이의 전체 주제는 <심불급중생 시삼무차별(心佛及衆生 是三無差別)이라.> 이것은 이제 60화엄경 야마천궁게찬품에 나오는 말씀인데, 여러분들 흔히 잘 아는 약인욕요지 삼세일체불 응관법계성 일체유심조(若人慾了知 三世一切佛 應觀法界性 一切唯心造)라는 얘기 있죠. 그것이 바로 일체유심조 얘기. 화엄경의 주제는 뭐냐. 이 수륙대재의 주제가 뭐냐. 심불급, 마음과 부처와 중생과 잘난 사람, 못난 사람이 시삼무차별이다. 전부 차별이 없다. 이게 무차별 평등 수륙 대재다. 그럼 누구한테 잘해야 돼요? 부처님한테는 잘할 필요가 없어요. 부처님도 우리한테 고맙게 생각하셔야 돼요. 부처님은 너무나 잘 나셔가지고 중생들을 위한 자비로운 마음이 펼쳐지지만, 우리처럼 악독한 중생들끼리 모여가지고 수륙대재, 이 말법 시대에 법문한다는 거는 기적과 가까운 일이에요. 그렇죠? 21세기의 기적이에요 기적. 그리고 특히나 나같이 말 안 듣는 사람이 삭발하고 가사 입고 부처님을 따라간다는 거는 참 부처님도 고맙게 생각하셔야 돼. 우리가 안 하면 당신은 어쩔 거예요, 혼자서. 그래서 이 항순중생이라고 하는 품이 있어요. 여기에서 보면 이제까지 여러분들이 기존 상식으로 가지고 계시던 얘기가 정반대로 나옵니다.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는 구절을 읽겠습니다. 항순중생, 항상 중생을 따라서 잘 맞춰줘라. 선남자여, 항상 중생의 뜻에 수순한다는 것은 말하자면, 온 법계 허공계 시방세계의 중생이 여러 가지 차별이 있어서 알에서 나고(卵生) -알에서 나는 사람들은 앞뒤 꽉 막혀 미혹하다 그랬어요. 육조 혜능 스님께서.-, 태에서 나고(胎生) - 태에서 나온 거 탯줄이 연결된 사람 정이 많아 끈끈해. 가벼운 놈은 날아가지고 새가 되고. 새가 됐는데 그 새가 된 놈은 하도 미혹하기 때문에 새대가리라 하잖아요. 새가 돼도 우리가 저 비둘기처럼 그런 새가 돼야지, 닭처럼 되면 안 돼. 닭이 한 번 날을 수 있나요? 절대 날 수 없어요. 일성한안 여장천(一聲寒雁礪長天)이라, 기러기 한 마리 저기 높이 날아가는 거 보면은 사람의 뼛속까지 비워야 날 수 있구나. 이런 자유를 느껴야 돼. 닭은 똥집이 무거워서 타조하고 날지를 못해. 우리 얘기입니다. 한 세상 사람 몸 받아서 살다 습기로 태어난 사람(濕生)은 삿되고, 변화하여 나는 사람(化生)은 이거는 주로 하는 직업이 보이스피싱이나 하고 이런대. 그리고 태난습화 또한 땅(地)과 물(水)과 불(火)과 바람(風)을 의지하여 살기도 하고, 허공을 의지하여 살기도 하고, 풀숲(草木)을 의지해서 살기도 하느니라. 또한 어디 하는지 아십니까? 이게 오늘 주제예요. 또한 여러 가지 종류(生類)와 여러 가지 몸(色身)과 여러 가지 형상(形狀)과 여러 가지 모양(相貌)과 여러 가지 수명(壽量)과 여러 가지 종족(族類)과 여러 가지 이름(名號)과 여러 가지 성질(心性)과 여러 가지 소견(知見)과 여러 가지 욕망(欲樂)과 여러 가지 뜻(意行)과 여러 가지 위의(威儀)와 여러 가지 의복(衣服)과 여러 가지 음식(飮食)으로 여러 가지의 시골 마을(村營聚落)과 도시의 궁전(城邑宮殿)에 사는 이들이니라. 중생의 모양이 각양각색이죠, 각양각색이라. 내지 천신(天神)과 용(龍)과 팔부신중(八部神衆)과 인비인(人非人) 등과 발이 없는 것(無足)과 두 발 가진 것(二足)과 네 발 가진 것(四足)과 여러 발 가진 것(多足) 또는 몸이 있는 것(有色)과 몸이 없는 것(無色)과 생각이 있는 것(有想)과 생각이 없는 것(無想)과 생각이 있는 것도 아니고 없는 것도 아닌 중생들(非有想非無想), 이와 같은 갖가지의 중생 종류가 내가 모두 그들에게 수순하여 갖가지로 섬기고 갖가지로 공양하기를, 누구와 같이?, 부모와 같이 공경하고 스승과 아라한과 내지 부처님이나 다름이 없이 받드는 것이니라. 여기서 부모를 사실은 은전이라 그래요. 복전 중에 세 복전이 있어요. 부처님이나 불법승 삼보나 성인이나 아라한이나 이런 분들은 복전 중에도 경전이라 그래. 공경하면은 나에게 무량한 공덕이 떨어진다고 경전. 그리고 아주 가난하고 인물도 찌찌불하게 못 나고, 가난하든지 병 들든지 사람 구실을 제대로 못하는 이런 사람들을 불쌍히 여기다 보면 비전이잖아요. 그죠? 그걸 자비를 베풀어준 비전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그 자비를 베풀어주고, 없는 사람을 거둬주고 하다 보면 또 나한테 무량한 공덕이 생길 가능성이 굉장히 많기 때문에 비전. 은전은 반드시 갚아야 될 스승이나 부모님의 은혜를 은전이라고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여기 나오는 대목들이 다 오늘 주제 그런 것들이에요. 부모와 같이 공경하고 스승과 아라한 내지는 부처님이나 다름없이 받드는 것이니라. 누구를? 중생을 부처님처럼. 그래서 우리가 사시마지 예불 올릴 때마다 하는 대목이 있어요. 이 대목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하는 대목. <어제병고 위작양의 어실도자 시기정로 어암야중 위작광명 어빈궁자 영득복장 보살 여시 평등요익 일체중생(於諸病苦 爲作良醫 於失道者 示其正路 於暗夜中 爲作光明 於貧窮者 令得伏藏 菩薩 如是平等饒益 一切衆生)>, 이것이 바로 오늘 수륙대재에 해당하는 무차 법회입니다. 뜻이 어떠냐. 스님들은 매일 하니까 다 훤하게 아시는데, 병든 사람들에게는 의사가 되어주고, 길을 잃은 사람에게는 바른 길을 보여주고, 캄캄한 밤에는 빛이 되어주고, 가난한 사람에게는 묻혀 있는 로또를 안겨준다. 보배를 얻게 하면서 이렇게 보살이 일체 중생을 차별 없이 평등하게 이롭게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다. 이것이 이제 항순 생이고 수륙대재의 무차 법회다 이 말입니다. 이해하셨습니까? 경전에 이와 같이 정확하게 나와있어요. 화엄경에 주제는 중생이나 부처님이나 마음이 차별이 없다. 이것이고 그 차별 없는 마음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뭘 해야 되느냐. 실천 공덕으로서는 보현행원을 해야 된다. 보현행원 중에서도 반드시 우리가 실천해야 될 것은 항순중생편이다. 그래서 우리가 사시마지 올릴 때마다 <어제병고 위작양의 어실도자 시기정로 어암야중 위작광명 어빈궁자 영득복장 평등요익 일체중생>이라고 햇중때부터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달달달달달달달달 외는 거야. 여러분들도 이제 다 들었잖아요. 그렇죠. 그럼 그거 한 번 들으면 성불을 하고, 마음을 부처님과 같이 써야 되는데 왜 안 되느냐. 마음은 비록 똑같다고 할지라도 무명 번뇌에 찌들린 업장의 두께에 따라가지고 얇은 사람, 두꺼운 사람이 있어서 쉽게 녹는 사람이 있고, 안 녹는 사람이 있다 이거야. 어떤 사람은 금방 나물 데치듯이 되는 사람이 있지만은, 어떤 놈은 쇳덩거리 같아가지고 용광로에 집어넣어도 겨우 녹는다고. 그런 분들은 저한테 오면 제가 바로 한 3일 만에 정리해 줍니다. 조타 3천 모타 800. 아침에 3천대 두드려 패고, 모타 800, 저녁에 800대 두드려 패라고 조주스님이 그리 말씀하셨거든. 미친 개는 뭐가 약이다? 몽둥이가 약이거든. 전도몽상이 많은 사람은 두들겨 패가지고 고쳐야 돼. 말로 해서 안 돼요. 왜냐하면은 만약 보살이, 거기는 같이 읽겠습니다. 왜냐하면 보살이 만약 중생을 수순하게 되면 곧 모든 부처님을 수순하여 공양하는 것이기 때문이며, 만약 중생을 존중하여 섬기면 곧 부처님을 존중하여 섬기는 것이 되기 때문이며, 또 만약 중생을 기쁘게 하면 곧 부처님을 기쁘게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자비하신 마음으로 바탕을 삼으시기 때문이니라. 중생으로 인하여 큰 자비심을 일으키고 자비로 인하여 보리심을 내고 보리심으로 인하여 정각을 이루느니라. 자비심이 있어야 사람이 삼매에 들어갑니다. 최소한 제 경험으로 볼 때는. 자비심이 없는 무자비한 놈은 절대 삼매에 들어갈 수 없어요. 탐진치가 많은 사람들은. 고행해서 삼매에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그거는 빼짝 마른 산매고, 빼짝 마른 삼매 볶은 종자 같다가, 종자 볶으면 싹이 안 나잖아요. 보살 삼매는 자비심으로 간대. 자비심. 그걸 가장 큰 자비가 사자빈신 삼매라고 그렇게 얘기해요. 중생으로 인하여 무엇을 일으킨다, 큰 자비심을 중생이 비전이라고 했잖아요. 그죠? 부처님처럼 모시니까 또 경전이고. 그렇죠? 그렇게 복을 짓는다고. 그래 자비로 인하여 뭐가 나느냐. 보리심을 낸다. 이세간품이라고 하는 화엄경에 이래 나옵니다. 망실 보리심 하면은 보리심을 잃어버린 사람에게는 시위마업이니라(忘失菩提心 是為魔業), 그것은 전부 마군의 업이라. 우리가 참선를 하든지 경전 공부를 하든지 수륙대재를 하든지 뭘 일으켜야 된다? 발 보리심 없이 이걸 하면 그거는 마군의 업이다 이 말이야. 이해가세요? 밥을 먹어도 무엇을? 발보리심으로 해야 된다. 이세간품에 분명히 그 10가지 마업 중에 첫 번째가 그거예요. 보리심 빼면은 마업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저는 그거를 세 글자로 만들어 놨어요. 여러분 따라 해보세요. 보빼시. 보리심 빼면 시체다. 간단하죠. 보빼시. 여기 경전에 나와도 전달할 길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제가 이렇게 저는 강연을 하는 게 아니고, 어디 공연을 하는 편인데, 교수법 중에 제일 좋은 교수법이 뭔가 보니까 학문적으로 나와 있어요. 웃으면서 전달해야 된다. 그런데 여러분들 웃고 농담으로 생각하지 마시고 농담 속에는 항상 전하는 메시지가 아마 있을 거예요. 그죠? 보빼시. 보리심으로 인하여 뭘 이룬다? 아뇩다라삼먁삼보리를 이룬다. 발보리심으로 인해. 비유하자면 마치 넓은 모래사장에 서 있는 큰 나무의 뿌리가 물을 만나면 가지와 잎과 꽃과 열매가 모두 무성한 것 같아서, 나고 죽는 생멸의 광야의 보리수도 또한 이와 같으니라. 지금 우리가 생명의 광야에 내몰려 있는 보리수 아닙니까, 우리가 전부, 그렇죠. 오늘 지금 복전 이런 경전 비전 얘기해야 되는데 이전이 나오네. 뻘밭. 중생들이 제일 국회나 이렇게 가면은 이전투구라고 있어요. 이전이 있어요. 이전. 뻘밭 있잖아요. 뻘밭. 뻘밭도 있고, 모래밭도 있고, 황토밭도 있고. 제가 이렇게 오늘 진관사 와서 앞에 이 산에 보니까 소나무가 암전에 살대. 돌밭에 살더라고. 저 소나무는 돌의 뿌리를 박고 살기 때문에 몇 년 가물어도 안 죽겠구나. 부드러운 흙에 사는 거는 물이 없으면 죽겠지만은, 처음에 단단한 바위에 뿌리 박고 사는 나무가 물이 없다고 그 가뭄을 탓하겠습니까. 그렇지 않잖아요. 그죠? 여러분들도 어쨌든지 그러니까 해바라기는 햇빛을 받아 피고 달맞이꽃은 달빛을 받아 피지만, 산삼꽃은 그 햇빛 달빛에 안 피거든. 별빛을 모아서 핀다고, 별빛을. 수행자는 그렇거든. 그 아스라한 별빛을 모아서 자기의 꽃을 피우기 때문에 약이 되는 거예요. 시시한 해바라기 정도 가지고 안 된다. 생멸의 탐진치에 따라가는 거, 그 색성향미촉법 따라가는 거 시원찮고, 말초 신경 그거 자꾸 따라가면은 그 업장 안 녹아요. 학도지문 별무기특 지요세척근진하 무량겁래업식종자(學道之門 別無奇特 只要洗滌根塵下 無量劫來業識種子)라, 도를 닦는 데는 별도로 특별한 방법은 없다. 참선이고 염불이고 방법이 없다. 제가 오늘 왜 신이 나느냐. 회주스님한테 말씀을 듣자하니, 76년도에 자운 노스님께서 이렇게 수륙대재를 크게 이제 번창해서 개설하시고, 그때 자운 노스님하고 죽마고우처럼 양날개처럼 늘 같이 다니던, 그 그림자와, 바늘과 실처럼 늘 따라다니던 분이 우리 노스님이라. 노스님이 여기 와서 70년대 첫 법주를 하셨다는 거야. 첫 법주. 저는 노스님의 흔적도 없는 자취가 남들은 그렇게 보이지만은, 우리 노스님 말씀 아까 들었을 때 혼자서 울 뻔했어요, 지금도 눈물이 막 나잖아요. 저 이렇게 약해요. 마음이. 경전을 읽을 때는 또 감동할 준비를 해야 돼요. 여러분 금강경 보다가 눈물이 많이 나잖아요. 금강경 읽다 우는 중은 한 번도 못 봤다, 수보리만 울어. 수보리만. 수보리만 울지, 아무도 안 울어. 그냥 경전을 읽을 때는 어떻게 감동할 준비를 해야해요. 아까 뭐 빼짝 마른 돌처럼 ‘니가 어쩌나 보자’ 하지 말고. 조금만 더 합시다. 일체중생은 뿌리가 되고 부처님과 보살들은 꽃과 열매가 되어 자비의 물로 중생을 이롭게 하면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의 지혜의 꽃과 열매를 이루느니라. 일체 중생은 뿌리다. 이거 줄 열 번 그어야 해요. 우리가 얼핏 생각하면 부처님이 뿌리라 하잖아요. 아니다. 누가 뿌리에요? 일체 중생이 뿌리고, 부처님과 보살들은 그 뿌리에 달려있는 꽃과 열매다. 보살들은 바라밀의 꽃이고 부처님은 두 개의 복과 지혜의 열매다 이 말이야. 자비의 물로 중생을 이롭게 하면은 누가 되느냐. 모든 부처님과 보살들이 지혜의 꽃과 열매를 이루느니라. 왜냐하면 보살들은 자비의 물로 중생을 이롭게 하면 최상의 깨달음을 성취하기 때문이니라. 그러므로 보리는 중생에게 달렸으니 중생이 없으면 모든 보살이 마침내 가장 훌륭한 정각을 이루지 못하느니라. 보리, 깨달음이라고 하는 거는 어디에 달려 있냐. 중생들에게 우리가 얼마나 잘하느냐 못하느냐에 달려 있대. 아까 처음에 읽었던 건 뭐죠? 악한 중생이라도 나를 깨닫게 해주는 길이 있다. 그래서 미운 사람한테 뭐 준다? 떡 하나 더 준다 왜? 그럼 떡 되어보라고. 그런 심보를 가지면 안 되겠죠. 중생이 없으면 모든 보살이 마침내 가장 훌륭한 정각을 이루지 못하느니라. 조금 시간이 지났어요. 선남자여 그대는 이 이치를 이렇게 알아라. ‘중생에게 마음을 평등하게 함으로써 -우리가 오늘 평등 수륙대재가 이제 이루어지는 거죠. 그래서 우리 조상도 더불어서 천도 되지 않겠나, 내 자신이 우선 좋아지지 않겠나 이런 생각을 가져봅니다.- 원만한 자비를 성취하고, 자비심으로 중생을 수순함으로써 부처님께 공양함을 성취하는 것이다’라고 알아야 할 것이니라. 보살은 이와 같이 중생을 수순하나니 허공계가 다하고 중생계가 다하고 중생의 업이 다하고 중생의 번뇌가 다하여도 내가 중생을 수순하는 마음은 다함이 없느니라. 염념이 계속하여 잠깐도 쉬지 않건만 몸과 말과 뜻으로 하는 일은 지치거나 싫어함이 없느니라. 태양이 휴가 가는 거 보셨어요? 없어요. 마지막으로 회향게하고 오늘 법회가 앞으로 7·7 49재 동안 큰 스님들 잘 모시고 회향 잘 되기를 바라고, 여러분들도 이 수륙대재를 통해서 또 부처님의 불제자로서 더욱더 공고한 신신공덕의 원력이 자라나기를 바라겠습니다. 마지막 회향게(廻向偈) 하면서 오늘 입재 법문을 가늠합니다. 아차보현수승행(我此普賢殊勝行)무변승복개회향(無邊勝福皆迴向)보원침익제중생(普願沈溺諸眾生)속왕무량광불찰(速往無量光佛剎) 화엄경에서 제일 마지막 게송이 이겁니다. 그러니까 원래 80권 화엄경의 마지막 두 번째 게송은 찰진심념가수지(剎塵心念可數知)대해중수가음진(大海中水可飲盡)허공가량풍가계(虛空可量風可繫)무능진설불공덕(無能盡說佛功德)이지만은, 40권 화엄경까지 볼 때 입법계품의 제일 마지막 게송이 이 게송이다. 이것이 이제 오늘 수륙대재에 딱 맞는 법문인데, 나의 이러한 보현보살의 거룩한 행과 그지없는 행복한 복을 모두 다 내 있는 복을 다 회향해가지고 진정으로 저 삼계고해 헤매는 참 못난, 저 못된 중생들이 아미타불 극락세계에 다 왕생하기를 바라나이다. 이래서 오늘 법문을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