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生苦惱(인생고뇌)와 出身活路(출신활로)-
천일지장기도 회향 법문입니다.
身命과 無明(신명과 무명)
身命無常 剎那生滅 • 無明業識 貪愛不息
신명무상 찰나생멸 • 무명업식 탐애불식
一切世人 貪著五欲 獨處空閑 有何榮樂
일체세인 탐착오욕 독처공한 유하영락
生老病死患 於中未解脫 無明愛毒箭 猶未得拔出
생로병사환 어중미해탈 무명애독전 유미득발출
榮位須臾間 智者深觀察 不應於此事 而生希有想
영위수유간 지자심관찰 불응어차사 이생희유상
依井中樹根 貪蜜墮口中(賓頭盧爲王說法經)
의정중수근 탐밀타구중(빈두로위왕설법경)
기도는 왜 하느냐. 인생에 고뇌와 불만족이 있어서 기도를 해요. 고뇌가 있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기도를 하거든요. 그럼 고뇌가 뭐냐. 괴로움, 근심, 걱정인데, 근심, 걱정이 왜 생기는가. 그것은 어리석음 때문에 생겨요. 어리석음. 근심 걱정은 어리석음에서 온다. 그럼 어리석음은 뭐냐. 탐애(貪愛), 탐심과 애착. 탐심과 애착이 어리석음인데, 그것 때문에 생긴다.
그러면 탐심과 애착에서 오는 어리석음을 해결하는 방법이 지인와 범부가 다른데, 지혜 있는 사람이 해결하는 방법하고 보통 범부가 해결하는 방법하고가 달라요. 지혜있는 사람은 탐심과 애착을 충족하려고 애쓰기 전에, 인생부터 관찰을 하는데, 이걸 지인의 인생 관찰이라 이렇게 얘기해요. 지혜 있는 사람의 인생 관찰이라. 그러면 지인의 인생 관찰을 어떻게 하냐. 통시적 관찰이라고 그래요. 통시적, 통시(通時)라는 거는 통할 통자, 때 시자인데, 과거, 현재, 미래를 전부 다 본다. 그러면 보통 범부의 인생 관찰은 현시적 관찰, 현재를 중심으로 본다. 그래서 현재만 보면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는데, 이걸 긴 역사로 보면 좋고 나쁜 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지혜 있는 이들은 좋고 나쁜 걸 절대 탐할 필요가 없다. 좋고 나쁜 것을 탐하고, 버리는 거는 현시적으로 봐서 현재 눈앞에 있는 것만 봐서 그렇게 한다 이거예요. 긴 안목으로 보면, 현재가 바로 미래가 되고, 현재가 바로 과거가 돼서, 좋고 나쁜 게 오랜 세월 속에서 다 허망하고 무상하고 부질없어가지고, 구할 만한 가치도 없고 버리려고 애써야 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인생 관찰에 두 가지 관찰법, 눈앞에 있는 걸 중심으로 보느냐, 오랜 세월을 통해서 보느냐, 이건데 항상 이거에 대한 충돌이에요.
그래서 옛날부터 지금까지 늘 들려주는 얘기가 뭔 말이 있느냐면, 우물 안에 나무뿌리에 매달린 사람이, -이걸 수중 뭐라고 그러더라,- 정중수근(井中樹根)이라고, 정중수근. 우물 정자, 가운데 중자, 나무 수자, 뿌리 근자. 우물 속에 나무뿌리에 매달려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밑에는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고, 위에는 아주 사람을 해치는 코끼리가 그냥 바라보고 있어서, 어디 매달려 있는 건 정중수분인데, 우물 속에 나무뿌리인데, 여기에 매달려 있는데 좀 있다보니까 흰쥐하고 검은 쥐하고 와서 그 나무뿌리를 쫒고 있더라. 그런데 가만히 있다보니까 그 나무 위에서 벌이 꿀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는데 그 꿀이 입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거를 밀타구중(蜜墮口中)이라고 해요. 밀타구중. 꿀 물자, 떨어질 타자. 입 구자, 가운데 중자. 꿀이 떨어진 게 하필 입으로 떨어졌어요. 그때 입안으로 꿀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니까 그 꿀맛이 그게 보통 맛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밑에 독사가 있는지, 위에 코끼리가 있는지, 나무뿌리에 매달려 있는지, 흰쥐, 검은 쥐가 지금 쫒고 있는지 다 잊어버리고, 오직 그 꿀 한 방울 두 방울만 바라보고 있다. 그것만 좋아하고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제 이렇게 설명을 해요. 그래서 그 꿀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오욕락, 재색식명수(財, 色, 身, 命, 壽), 인간 쾌락이지, 인간 오욕 쾌락을 말하는 게 그 꿈이고, 밑에 독사는 죽음이고, 위의 코끼리는 무상한 세월이다. 그리고 매달려 있는 건 생명 명줄인데, 흰쥐, 검은 쥐는, 흰쥐는 낮이고 검은 쥐는 밤이다. 이렇게 인생이 무상하고, 이렇게 인생이 부질없는 건데, 그 무상하고 부질없는 거는 전혀 모르고, 오직 눈앞에 있는 쾌락, 눈앞에 있는 향락, 눈앞에 있는 즐거움 그것만 탐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거를 계속했어요. 여기 깊은 인생관이 있거든요. 뭐냐하면, 무명 탐애(無明 貪愛)라. 이렇게 깊고 또 무상 생명이 이렇게 빠르다. 무상이 신속하고 무명이 아주 강성하다. 강하고 왕성해.
그런 법문인데 이 법문이 그런 갑다 하고 그냥 듣고 참 중요한 법문이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 법문이 빈두로 존자라는 분이 한 분이 있는데, 빈두로 존자가 위우타연왕설법경이라고 우타연왕을 위해서 설법을 한 경이다, 이렇게 나와요. 그 내용이 어떻게 되냐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비유는 제일 끝부분에 결론적으로 나오는 거고, 앞부분에 보면 우타연이라고 하는 분이 깊은 산속으로 유람을 갔는데, 어떤 분이 그 숲속에 가만히 앉아서 선정을 닦고 있어요. 그래서 우타연은 이상하게 생각해서 “저분이 이 숲속에서 뭘 하고 있는가.” 그래서 가서 물었어요. 묻기를, “일체의 세인(一切世人)은, 일체의 세상 사람은, 탐착 오욕(貪著五欲)이어늘, 오욕을 지금 탐착하고 오욕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살거늘, 그대는 독처공한(獨處空閒)이라, 독처, 홀로 머문다. 아무것도 없고 한가한 숲속에서, 빌 공자, 한가할 한자, 공한해서, 유하영락(有何榮樂)고. 하는 어찌 하자, 영락은 영화와 즐거움, 즐거울 락, 영화와 즐거움이 무엇이 있느냐?” 그렇게 질문했어요. 세상 사람들은 다 오욕에 탐착해서 사는데 당신은 이 숲속에서 홀로 머물러서 무슨 영화가 있고 무슨 쾌락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했거든요. 거기에 대한 대답이 빈두로존자의 우타연왕, 빈두로존자의 위우타연왕설법인데, 그 내용은 뭐냐 하면, 인생에는 생로병사환(生老病死患)과, 나서 늘고 죽는 근심과, 또 무명애독전(無明愛毒箭)이 있는데, 어리석은 탐애의 독화살이 있다. 생로병사의 근심과 무명애독전, 탐애하는 그 독화살, 독 독자, 화살 전자인데, 범부는 다 이 탐애 독화살에 맞아 죽는다. 누가 나를 죽이는가. 나의 탐애가 나를 죽인다. 무엇이 걱정인가. 생로병사가 걱정이다. 그런데 누구든지 이 세상 사람 중에 생로병사환에서 어중미해탈(於中未解脫)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고, 무명 독화살에서 유미득발출(猶未得拔出)이라. 미득이라는 건 얻지 못했다. 유, 아직까지도, 발출, 뽑을 발, 날 출자인데, 뽑아내지를 못했다. 그러니 생로병사의 근심과 이 무명애독의 화살에서 뽑아내는 것이, 화살을 뽑아내는 것이 인생 고뇌에서 벗어나 볼 수 있는 좋은 길이다. 그 좋은 길이라는 것을 한 서적에서는 출신활로(出身活路)라고 그래요. 출신이라는 거는 출세한다는 게 아니고, 몸이 나아갈 수 있는, 몸이 나아간다. 날 출자, 몸 신자인데, 그걸 새길 때, 나아가는, 어록에 보면, 가라 할 때는 출신하라 이렇게 했어요. 인생 고뇌(人生苦惱)에서 출신할 수 있는, 나아갈 수 있는 활로, 좋은 길, 살 활자, 길 로자인데, ‘출신활로가 뭐냐.’ 지정된 문제인데, ‘너의 출신활로가 뭐냐.’ ‘나의 출신활로가 뭐냐.’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길이 뭐냐.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길이 뭐냐, 이런 뜻이죠. 근데 인생의 출신활로는 세상 것을 구하는 게 아니라, 생로병사에서 벗어나고, 무명애독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공부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영위는 수유간(榮位須臾間)이니, 세상에 영광스러운 쾌락이나 영광스러운 왕위나 이런 영위는 잠깐 사이에 사라진다. 그래가지고 지자는 심관찰(智者深觀察)이라, 지혜에 있는 이는 이 세상에 영위와 세상의 쾌락이 잠깐 사이에 없어지는 것을 아주 깊게 관찰한다 이거예요. 심관찰이라, 깊게 관찰을 해요. 그래서 불응어차사(不應於此事)에, 이 세상에 영화와 세상의 쾌락에, 이에 인생이 희유상(而生希有想)이라, 희유하다, 좋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한다. 세상의 영광과 세상의 쾌락에 좋다는 생각을 내는 거는 이런 일만 쳐다보는 현시적 인생관이고 이거는 잠깐이다. 구할 게 없다. 탐할 게 없다. 잠깐 머무는 것을 구하고 탐애하는 것은 어리석은 부질없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이, 이것이 지자의 관찰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는 세상의 쾌락에 좋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이런 법문이에요.
그러면 그 방편 중에 이제 기도라는 게 있는 거예요. 기도를 딱 하면, 말이 기도지, 이렇게 행사는 하지만 사실 잘 안 해요. 기도 행사할 때 보면 되게 많이 할 것 같지만, 돌아서면 그만이에요. 그건 솔직해야지. 왜 그러냐면 하도 많이 즐거움만 구하는 것이 업이 돼서, 즐거움이 허망하다는 걸 깊이 못 느끼니까 기도해야 되겠다 하지만은, 행사는 해요. 그런데 돌아서면 잘 안 하거든요. 그런데 행사라도 하는 게 그게 어디냐 이거지. 행사 안 하는 것보다 얼마나 난데. 누가 그러데요. 단합대회 한다고 그래서, 단합하면 됐지, 대회는 왜 하냐. 근데 단합도 안 하는데 대회까지 안 하면 더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기도도 안 하지만, 기도 행사까지도 안 하면 더 안 하니까, 기도하게 하는 한 방편으로서 입재를 하고, 회향을 하고, 중간에 계속 정진을 하고, 이게 다 방편인데, 허망한 걸 구하는 마음을 쉬고, 참다움을 구하는 지혜의 마음을 자꾸 키워서, 한쪽으로는 쉬고 한쪽으로는 키워서, 그러면 이제 마음이 점점 어두운 마음은 줄어들고 밝은 마음이 많아져가지고, 그 한마음으로 돌아간다. 이거 이제 일념일심이라고해요. 한마음으로 돌아가면 그 한 마음 안에 일체 중생도 있고 불보살도 있고, 다 있다. 그리고 이거는 한 생각으로 바로 해탈하는 길이 책을 보기 이전에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이거든요, 이게. 염불을 한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이렇게 관법을 닦는다든지 화두법을 닦는다든지 이게 다 마음으로, 바로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이에요. 근데 이걸 안 믿는 사람은 경을 봐야 돼요. 이게 일체중생도 마음이고, 제불보살도 마음이라는 게 이게 과연 맞나. 일체 중생도 마음 없이는 있을 수가 없고, 마음 없는 지옥이 어디 있냐 이 말이죠. 마음 없는 극락이 어딨어요. 제불보살도 마음 없이는 있을 수가 없으니, 기도다, 참선이다, 무슨 관법이다, 염불이다 하는 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들어가는 길이에요, 이게요. 근데 자꾸 글을 보고, 방법을 묻고, 그러면 이게 좀 답답한데, 등산을 가서 가만히 보면 등산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 길만 물어요. “여기로 가면 어디로 가요? 요리 가면 얼마나 가요? 요리 가면 쉬워요?” 이런 사람 길 가르쳐주지 말아요 돼요. 뭐라고 그러냐. “가보세요.” 가보면 자기가 알지, 근데 가기 싫을 때는 꼭 앉아서 물어, 이렇게 앉아서. “해탈하면 뭐가 좋은데요? 성불하면 뭐가 좋은데요?” 이런 식으로. “안 하면 안 되나요?” 이게 이제 그것도 그런 신심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신심을 낼 때까지 필요한 거예요. 그냥 그거 안 하고 신심이 바로 나면, 바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가니까, 이제 수행이라고 본단 말이죠. 경을 보는 것도 기도, 참선, 염불하고 똑같은 방법으로 경을 봤는데, 경전을 해석하기 위해서 보는 게 아니라, 이제 망상을 쉬고 지혜를 키우는 참선식 간경, 기도식 간경, 염불식 간경을 전통적으로 했어요. 그래서 이제 학교에서 경전 공부하는 거 하고, 사찰에서 경전 공부하는 거, 이게 근본이 틀려요.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한문경을 보는데, 한자 한 자도 모르는 사람이 경을 다 봤어요. 그걸 인연 간경이라고 그래요. 인연 간경. 인연으로서 경을 보는 거지. 그건 뭐냐 하면, 한문을 보면 몰라. 그래서 그걸 인연으로 이력을 졸업한다. 그걸 인연이력이라고도 하고, 이력은 강원합방을 하는데, 은사들이 그래요. “너는 금생에 인연이라도 지어야 되니까 강원에 가서 졸업을 하고 와라.” 그때 한자 하나도 모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글을 아는 학인들과 똑같이 예불을 하고, 똑같이 경 펴면 펴요. 경 닫으면 닫고. 그래서 시간에 맞춰서 어김없이 경을 펴고, 경을 닫고 보는 것이 중요하지, 그걸 알고 해석하고 풀이하는 건 관심이 없어. 그래서 간경도 참선식으로 한다. 이게 조계종 종품이거든요. 참선이라는 건 뭐냐. 허망한 마음은 다 쉬고 그 지혜의 마음을 점점 키운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마음의 근본을 봐버리면 그걸 견성이라고 그러는데, 그 견성이 뭐냐. 제불의 마음이나 보살의 마음이나 중생의 마음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근원심으로 돌아간다 이거죠. 기도가 그런 거예요. 허망한 중생심을 쉬고, 청정한 불보살의 마음을 열어, 한쪽은 쉬고 한쪽은 열고, 그래서 바로 가는 것이 범부의 지위를 떠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간다. 이게 이제 전통 수행법이거든요.
祈禱因緣 기도인연
地藏大聖威神力 恒河沙劫說難盡
지장대성위신력 항하사겁설난진
見聞瞻禮一念間 利益人天無量事
견문청례일념간 이익인천무량사
尊號稱名 念念無間 清淨光明 一時現前
존호칭명 염념무간 청정광명 일시현전
一心三寶 일심삼보
普放慈光 常揮慧劍 照明陰路
보방자광 상휘혜검 조명음로
斷滅罪根 倘切歸依 奚遲感應
담멸죄근 당절귀의 해지감응
掌上明珠一顆寒 自然隨色辨來端
장상명주일과한 자연수색변래단
幾回提起親分付 暗室兒孫向外看
기회제기친분부 암실아손향외간
(地藏請文.釋門儀範下) (지장청문, 석문의범하)
그래가지고 여기 석문의범(釋門儀範)에 보면, 장상명주일과한(掌上明珠一顆寒)이라, 지장보살이 손에 구슬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게 일념정광심이거든요. 한 생각 청정 광명의 마음이란 말이에요. 장상명주가 하나의 그 구슬 덩어리가 차고 차다. 차다는 얘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거기. 범부도 없고, 제불도 없고, 보살도 없고, 생사도 없고, 지옥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느냐. 자연수색변래단(自然隨色辨來端)이라. 자연이 응화가 무진이요, 일념정광이 응화, 응용해서 변화하는 것이 끝이 없어요. 그래가지고 자연의 색을 따라서 변래단이라. 오는 단서, 오는 여러 가지 하나하나를, 끝 단자는 하나하나, 단서 단서, 사사물물인데, 그 일념정광에 비춰 보는 사사물물을 다 가려낸단 말이죠. 그런데 이게 구슬이 움직여서 가려내는 거 아니에요. 가만히 있으면서 사람이 오면 사람을 가리고, 비춘다 이 말이에요. 산이 나타나면 산을 비추고. 이렇게 지장보살을 찬하고 있어요. 자연수색변래단이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