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지장기도]3월 9일 지장천일기도 회향 법문 2023-03-09

-人生苦惱(인생고뇌)出身活路(출신활로)-

 

        천일지장기도 회향 법문입니다.

 

身命無明(신명과 무명)

身命無常 剎那生滅 無明業識 貪愛不息

신명무상 찰나생멸 무명업식 탐애불식

一切世人 貪著五欲 獨處空閑 有何榮樂

일체세인 탐착오욕 독처공한 유하영락

生老病死患 於中未解脫 無明愛毒箭 猶未得拔出

생로병사환 어중미해탈 무명애독전 유미득발출

榮位須臾間 智者深觀察 不應於此事 而生希有想

영위수유간 지자심관찰 불응어차사 이생희유상

依井中樹根 貪蜜墮口中(賓頭盧爲王說法經)

의정중수근 탐밀타구중(빈두로위왕설법경)

 

        기도는 왜 하느냐. 인생에 고뇌와 불만족이 있어서 기도를 해요. 고뇌가 있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기도를 하거든요. 그럼 고뇌가 뭐냐. 괴로움, 근심, 걱정인데, 근심, 걱정이 왜 생기는가. 그것은 어리석음 때문에 생겨요. 어리석음. 근심 걱정은 어리석음에서 온다. 그럼 어리석음은 뭐냐. 탐애(貪愛), 탐심과 애착. 탐심과 애착이 어리석음인데, 그것 때문에 생긴다.

 

        그러면 탐심과 애착에서 오는 어리석음을 해결하는 방법이 지인와 범부가 다른데, 지혜 있는 사람이 해결하는 방법하고 보통 범부가 해결하는 방법하고가 달라요. 지혜있는 사람은 탐심과 애착을 충족하려고 애쓰기 전에, 인생부터 관찰을 하는데, 이걸 지인의 인생 관찰이라 이렇게 얘기해요. 지혜 있는 사람의 인생 관찰이라. 그러면 지인의 인생 관찰을 어떻게 하냐. 통시적 관찰이라고 그래요. 통시적, 통시(通時)라는 거는 통할 통자, 때 시자인데, 과거, 현재, 미래를 전부 다 본다. 그러면 보통 범부의 인생 관찰은 현시적 관찰, 현재를 중심으로 본다. 그래서 현재만 보면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는데, 이걸 긴 역사로 보면 좋고 나쁜 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지혜 있는 이들은 좋고 나쁜 걸 절대 탐할 필요가 없다. 좋고 나쁜 것을 탐하고, 버리는 거는 현시적으로 봐서 현재 눈앞에 있는 것만 봐서 그렇게 한다 이거예요. 긴 안목으로 보면, 현재가 바로 미래가 되고, 현재가 바로 과거가 돼서, 좋고 나쁜 게 오랜 세월 속에서 다 허망하고 무상하고 부질없어가지고, 구할 만한 가치도 없고 버리려고 애써야 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인생 관찰에 두 가지 관찰법, 눈앞에 있는 걸 중심으로 보느냐, 오랜 세월을 통해서 보느냐, 이건데 항상 이거에 대한 충돌이에요.

 

        그래서 옛날부터 지금까지 늘 들려주는 얘기가 뭔 말이 있느냐면, 우물 안에 나무뿌리에 매달린 사람이, -이걸 수중 뭐라고 그러더라,- 정중수근(井中樹根)이라고, 정중수근. 우물 정자, 가운데 중자, 나무 수자, 뿌리 근자. 우물 속에 나무뿌리에 매달려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밑에는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고, 위에는 아주 사람을 해치는 코끼리가 그냥 바라보고 있어서, 어디 매달려 있는 건 정중수분인데, 우물 속에 나무뿌리인데, 여기에 매달려 있는데 좀 있다보니까 흰쥐하고 검은 쥐하고 와서 그 나무뿌리를 쫒고 있더라. 그런데 가만히 있다보니까 그 나무 위에서 벌이 꿀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는데 그 꿀이 입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거를 밀타구중(蜜墮口中)이라고 해요. 밀타구중. 꿀 물자, 떨어질 타자. 입 구자, 가운데 중자. 꿀이 떨어진 게 하필 입으로 떨어졌어요. 그때 입안으로 꿀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니까 그 꿀맛이 그게 보통 맛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밑에 독사가 있는지, 위에 코끼리가 있는지, 나무뿌리에 매달려 있는지, 흰쥐, 검은 쥐가 지금 쫒고 있는지 다 잊어버리고, 오직 그 꿀 한 방울 두 방울만 바라보고 있다. 그것만 좋아하고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제 이렇게 설명을 해요. 그래서 그 꿀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오욕락, 재색식명수(, , , , ), 인간 쾌락이지, 인간 오욕 쾌락을 말하는 게 그 꿈이고, 밑에 독사는 죽음이고, 위의 코끼리는 무상한 세월이다. 그리고 매달려 있는 건 생명 명줄인데, 흰쥐, 검은 쥐는, 흰쥐는 낮이고 검은 쥐는 밤이다. 이렇게 인생이 무상하고, 이렇게 인생이 부질없는 건데, 그 무상하고 부질없는 거는 전혀 모르고, 오직 눈앞에 있는 쾌락, 눈앞에 있는 향락, 눈앞에 있는 즐거움 그것만 탐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거를 계속했어요. 여기 깊은 인생관이 있거든요. 뭐냐하면, 무명 탐애(無明 貪愛). 이렇게 깊고 또 무상 생명이 이렇게 빠르다. 무상이 신속하고 무명이 아주 강성하다. 강하고 왕성해.

 

        그런 법문인데 이 법문이 그런 갑다 하고 그냥 듣고 참 중요한 법문이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 법문이 빈두로 존자라는 분이 한 분이 있는데, 빈두로 존자가 위우타연왕설법경이라고 우타연왕을 위해서 설법을 한 경이다, 이렇게 나와요. 그 내용이 어떻게 되냐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비유는 제일 끝부분에 결론적으로 나오는 거고, 앞부분에 보면 우타연이라고 하는 분이 깊은 산속으로 유람을 갔는데, 어떤 분이 그 숲속에 가만히 앉아서 선정을 닦고 있어요. 그래서 우타연은 이상하게 생각해서 저분이 이 숲속에서 뭘 하고 있는가.” 그래서 가서 물었어요. 묻기를, 일체의 세인(一切世人), 일체의 세상 사람은, 탐착 오욕(貪著五欲)이어늘, 오욕을 지금 탐착하고 오욕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살거늘, 그대는 독처공한(獨處空閒)이라, 독처, 홀로 머문다. 아무것도 없고 한가한 숲속에서, 빌 공자, 한가할 한자, 공한해서, 유하영락(有何榮樂). 하는 어찌 하자, 영락은 영화와 즐거움, 즐거울 락, 영화와 즐거움이 무엇이 있느냐?” 그렇게 질문했어요. 세상 사람들은 다 오욕에 탐착해서 사는데 당신은 이 숲속에서 홀로 머물러서 무슨 영화가 있고 무슨 쾌락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했거든요. 거기에 대한 대답이 빈두로존자의 우타연왕, 빈두로존자의 위우타연왕설법인데, 그 내용은 뭐냐 하면, 인생에는 생로병사환(生老病死患), 나서 늘고 죽는 근심과, 무명애독전(無明愛毒箭)이 있는데, 어리석은 탐애의 독화살이 있다. 생로병사의 근심과 무명애독전, 탐애하는 그 독화살, 독 독자, 화살 전자인데, 범부는 다 이 탐애 독화살에 맞아 죽는다. 누가 나를 죽이는가. 나의 탐애가 나를 죽인다. 무엇이 걱정인가. 생로병사가 걱정이다. 그런데 누구든지 이 세상 사람 중에 생로병사환에서 어중미해탈(於中未解脫)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고, 무명 독화살에서 유미득발출(猶未得拔出)이라. 미득이라는 건 얻지 못했다. , 아직까지도, 발출, 뽑을 발, 날 출자인데, 뽑아내지를 못했다. 그러니 생로병사의 근심과 이 무명애독의 화살에서 뽑아내는 것이, 화살을 뽑아내는 것이 인생 고뇌에서 벗어나 볼 수 있는 좋은 길이다. 그 좋은 길이라는 것을 한 서적에서는 출신활로(出身活路)라고 그래요. 출신이라는 거는 출세한다는 게 아니고, 몸이 나아갈 수 있는, 몸이 나아간다. 날 출자, 몸 신자인데, 그걸 새길 때, 나아가는, 어록에 보면, 가라 할 때는 출신하라 이렇게 했어요. 인생 고뇌(人生苦惱)에서 출신할 수 있는, 나아갈 수 있는 활로, 좋은 길, 살 활자, 길 로자인데, ‘출신활로가 뭐냐.’ 지정된 문제인데, ‘너의 출신활로가 뭐냐.’ ‘나의 출신활로가 뭐냐.’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길이 뭐냐.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길이 뭐냐, 이런 뜻이죠. 근데 인생의 출신활로는 세상 것을 구하는 게 아니라, 생로병사에서 벗어나고, 무명애독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공부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영위는 수유간(榮位須臾間)이니, 세상에 영광스러운 쾌락이나 영광스러운 왕위나 이런 영위는 잠깐 사이에 사라진다. 그래가지고 지자는 심관찰(智者深觀察)이라, 지혜에 있는 이는 이 세상에 영위와 세상의 쾌락이 잠깐 사이에 없어지는 것을 아주 깊게 관찰한다 이거예요. 심관찰이라, 깊게 관찰을 해요. 그래서 불응어차사(不應於此事), 이 세상에 영화와 세상의 쾌락에, 이에 인생이 희유상(而生希有想)이라, 희유하다, 좋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한다. 세상의 영광과 세상의 쾌락에 좋다는 생각을 내는 거는 이런 일만 쳐다보는 현시적 인생관이고 이거는 잠깐이다. 구할 게 없다. 탐할 게 없다. 잠깐 머무는 것을 구하고 탐애하는 것은 어리석은 부질없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이, 이것이 지자의 관찰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는 세상의 쾌락에 좋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이런 법문이에요.

 

        그래서 얼마나 이게 쾌락이 허망하고 얼마나 인생이 무상하냐. 마치 우물에 나무뿌리에 매달린 사람이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꿀방울을 탐하는 것과 똑같다. 이게 무서운 인생 관찰인데요. 이런 관찰을 항상 해야 돼요. 쾌락은 잠시요, 고통은 길다. 그런데 통시적으로 관찰하면 이게 보이는데, 현시적으로 관찰하면 앞에 쾌락만 보이지 그 꿀 떨어질 때 그것만 알지, 금방 이게 매달리는 나무뿌리가 다 떨어지고, 금방 밑에 독사한테 물려 죽고 이게 안 보인단 말이에요. 그래서 도 닦기 전에는 인생 관찰부터 깊이 해야 도를 닦아요. 석가모니가 인생은 생로병사가 있구나.’ 이런 관찰이 없으면 절대 도를 못 닦아요.

 

        그러면 이렇게 도를 닦을 인생 관찰이 됐으면, 이거 어떻게 닦느냐 하는건데. 처음에는 괴로움을 없애는 쪽으로 부처님이 계속 인도를 했어요. 괴로움을 없애는 쪽으로. 이고(離苦). 고를 여의면 즐거움을 얻는다. 이고득락을 가르쳤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다음에는 보살행을 하는 쪽으로 가르쳤어요. 바라밀 공덕행을 닦으면 괴로움에서 다 벗어날 뿐 아니라 지혜를 얻는다. 그다음에는 화엄경, 법화경 얘기인데,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는데 이 마음에는 없는 게 없다. 일체중생도 그 마음 안에 다 있고, 일체의 불보살도 그 마음 안에 다 있다. 그래서 닦아서 얻을 수 있는 걸 도라고 그러고,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 걸 업이라고 그러는데, 도에는 반야도도 있고, 또 보리도도 있고, 열반도도 있고, 해탈도도 있고, 있는데, 반야, 보리, 열반, 해탈은 다 마음 떠나서 없다 이거에요. 마음 없는 반야가 없고, 마음 없는 보리가 없고, 마음 없는 열반이 없고, 극락세계에 가도 극락세계를 느끼는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마음 없는 극락이 없죠. 그래서 마음은 일체 만법의 근본이다. 이걸 가르치는 게 불교예요. 마음은 일체 만법의 근본이다. 그래서 이 한마음에 십법계가 벌어지고 삼천 세계가 벌어진다고 가르치는 게 천태종의 가르침이거든요. 무념삼천 무념십법. 그리고 화엄경에서는 일어남이 없이 일어나는 게 마음이다. 불기이기라. 무용의용이라, 움직임이 없이 움직이는 게 마음이다. 그래서 삼계가 일심이요, 중생사회가 모두 한마음이고, 또 제법이 일심이고, 모든 만법이 다 일심이고 또 성현이 일심에서 나온다. 그러면 이 일심으로 돌아가면 된다. 일심으로 돌아가는 게 뭐냐. 다만 이 마음 중에 좋은 마음만 쓰면 된다. 그게 불보살이다 이거지. 좋은 마음만 쓰면 되는 거예요.

 

       그럼 그 좋은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나. 첫째는 나쁜 마음을 항복시켜요. 나쁜 마음은 뭔가 허망한 거 구하는 마음이거든요. 나무뿌리에 매달린 사람이 그 꿀 떨어지는 것만 생각하는 거, 그게 허망한 거 구하는 마음이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 허망한 걸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되느냐. 그 허망함을 구하는 마음을 중지시켜야 돼요. 이제 이게 휴망상(休妄想)이에요. 망상을 쉬어라. 그리고 참 마음을 잘 써야 돼요. 휴망상 선용심(善用心). 마음을 잘 써라. 선용심이라. 착할 선자, 쓸 용자, 마음 심자. 마음을 잘 쓴다. 망상은 쉬고, 그 불보살의 마음과 범부 중생의 마음이 있는데, 범부 중생은 누르고, 쉬고, 불보살은 마음을 잘 쓰면 된다. 이게 불교예요.

        그러려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되냐. 이렇게 가르치면 전생에서부터 마음 닦은 사람은 금방 아는데요. 금방 알아버려요. 근데 전생에서부터 이 나쁜 마음 쉬는 업이 부족하고, 좋은 마음 쓰는 업이 부족하면 몰라요. 그러니까 뭐냐. 온갖 방편을 부처님이 낸 거예요. 그게 수행이라는 거예요. 수행은 방편이요, 일체 수행은 다 방편이다. 방편이라는 건 뭐냐. 안 되는 데서 되는 대로 나아가는 길이거든요. 접근이라고 방편이라는 거는. 수행은 방편인데, 방편은 접근이라는 거지요.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길이에요.

        그러면 그 방편 중에 이제 기도라는 게 있는 거예요. 기도를 딱 하면, 말이 기도지, 이렇게 행사는 하지만 사실 잘 안 해요. 기도 행사할 때 보면 되게 많이 할 것 같지만, 돌아서면 그만이에요. 그건 솔직해야지. 왜 그러냐면 하도 많이 즐거움만 구하는 것이 업이 돼서, 즐거움이 허망하다는 걸 깊이 못 느끼니까 기도해야 되겠다 하지만은, 행사는 해요. 그런데 돌아서면 잘 안 하거든요. 그런데 행사라도 하는 게 그게 어디냐 이거지. 행사 안 하는 것보다 얼마나 난데. 누가 그러데요. 단합대회 한다고 그래서, 단합하면 됐지, 대회는 왜 하냐. 근데 단합도 안 하는데 대회까지 안 하면 더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기도도 안 하지만, 기도 행사까지도 안 하면 더 안 하니까, 기도하게 하는 한 방편으로서 입재를 하고, 회향을 하고, 중간에 계속 정진을 하고, 이게 다 방편인데, 허망한 걸 구하는 마음을 쉬고, 참다움을 구하는 지혜의 마음을 자꾸 키워서, 한쪽으로는 쉬고 한쪽으로는 키워서, 그러면 이제 마음이 점점 어두운 마음은 줄어들고 밝은 마음이 많아져가지고, 그 한마음으로 돌아간다. 이거 이제 일념일심이라고해요. 한마음으로 돌아가면 그 한 마음 안에 일체 중생도 있고 불보살도 있고, 다 있다. 그리고 이거는 한 생각으로 바로 해탈하는 길이 책을 보기 이전에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이거든요, 이게. 염불을 한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이렇게 관법을 닦는다든지 화두법을 닦는다든지 이게 다 마음으로, 바로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이에요. 근데 이걸 안 믿는 사람은 경을 봐야 돼요. 이게 일체중생도 마음이고, 제불보살도 마음이라는 게 이게 과연 맞나. 일체 중생도 마음 없이는 있을 수가 없고, 마음 없는 지옥이 어디 있냐 이 말이죠. 마음 없는 극락이 어딨어요. 제불보살도 마음 없이는 있을 수가 없으니, 기도다, 참선이다, 무슨 관법이다, 염불이다 하는 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들어가는 길이에요, 이게요. 근데 자꾸 글을 보고, 방법을 묻고, 그러면 이게 좀 답답한데, 등산을 가서 가만히 보면 등산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 길만 물어요. “여기로 가면 어디로 가요? 요리 가면 얼마나 가요? 요리 가면 쉬워요?” 이런 사람 길 가르쳐주지 말아요 돼요. 뭐라고 그러냐. “가보세요.” 가보면 자기가 알지, 근데 가기 싫을 때는 꼭 앉아서 물어, 이렇게 앉아서. “해탈하면 뭐가 좋은데요? 성불하면 뭐가 좋은데요?” 이런 식으로. “안 하면 안 되나요?” 이게 이제 그것도 그런 신심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신심을 낼 때까지 필요한 거예요. 그냥 그거 안 하고 신심이 바로 나면, 바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가니까, 이제 수행이라고 본단 말이죠. 경을 보는 것도 기도, 참선, 염불하고 똑같은 방법으로 경을 봤는데, 경전을 해석하기 위해서 보는 게 아니라, 이제 망상을 쉬고 지혜를 키우는 참선식 간경, 기도식 간경, 염불식 간경을 전통적으로 했어요. 그래서 이제 학교에서 경전 공부하는 거 하고, 사찰에서 경전 공부하는 거, 이게 근본이 틀려요.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한문경을 보는데, 한자 한 자도 모르는 사람이 경을 다 봤어요. 그걸 인연 간경이라고 그래요. 인연 간경. 인연으로서 경을 보는 거지. 그건 뭐냐 하면, 한문을 보면 몰라. 그래서 그걸 인연으로 이력을 졸업한다. 그걸 인연이력이라고도 하고, 이력은 강원합방을 하는데, 은사들이 그래요. “너는 금생에 인연이라도 지어야 되니까 강원에 가서 졸업을 하고 와라.” 그때 한자 하나도 모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글을 아는 학인들과 똑같이 예불을 하고, 똑같이 경 펴면 펴요. 경 닫으면 닫고. 그래서 시간에 맞춰서 어김없이 경을 펴고, 경을 닫고 보는 것이 중요하지, 그걸 알고 해석하고 풀이하는 건 관심이 없어. 그래서 간경도 참선식으로 한다. 이게 조계종 종품이거든요. 참선이라는 건 뭐냐. 허망한 마음은 다 쉬고 그 지혜의 마음을 점점 키운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마음의 근본을 봐버리면 그걸 견성이라고 그러는데, 그 견성이 뭐냐. 제불의 마음이나 보살의 마음이나 중생의 마음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근원심으로 돌아간다 이거죠. 기도가 그런 거예요. 허망한 중생심을 쉬고, 청정한 불보살의 마음을 열어, 한쪽은 쉬고 한쪽은 열고, 그래서 바로 가는 것이 범부의 지위를 떠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간다. 이게 이제 전통 수행법이거든요.

 

祈禱因緣 기도인연

地藏大聖威神力 恒河沙劫說難盡

지장대성위신력 항하사겁설난진

見聞瞻禮一念間 利益人天無量事

견문청례일념간 이익인천무량사

尊號稱名 念念無間 清淨光明 一時現前

존호칭명 염념무간 청정광명 일시현전 

 

        그래서 여기 보면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神力) 항하사겁설난진(恒河沙劫說難盡)이니라. 항하사겁을 얘기하도록 다 말할 수가 없다. 견문청례를 일념간(見聞瞻禮一念間)이라도, 일념간이란 일찰나인데, 보고 듣고 얘기하는 것을 한 찰나 순간만 하더라도, 이익인천무량사(利益人天無量事), 인천에 이익됨이 그 일이,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게 있는데, 이걸 더 줄여서 이야기를 하면은, 존호를 칭명하야(尊號稱名), 지장보살, 지장보살 하는데 높은 명호란 말이야. 이걸 불러. 그런데 이 지장보살님, 지장보살 부르는 의미가 뭐냐. 허망심 쉬는 거예요. 허망한 마음을 쉬는 게 지장보살 부르는 의미예요. 그리고 지혜심을 밝히는 거예요. 지장보살하면 허망한 마음은 쉬어지고, 지혜심이 밝아져요. 이래가지고 염념무간(念念無間)하면, 한 생각 한 생각 지장보살, 지장보살, 그 한 생각 한 생각에 허망한 마음은 점점 가라앉고, 밝은 마음은 점점 올라와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중생심 그대로 바로 제불심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 말이죠. 이게 형상에서 보면 여기서 저곳 가려면 여기를 떠나서 저곳에 도착할 수 있는데, 이 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여기 앉아서 거기 가는 거예요. 왜냐. 일심은 무형이라. 일심은 형상이 없어. 그래서 무형의 마음으로 무형의 마음에 가는 거니까 여기를 떠나지 않고 간다. 중생심으로 떠나지 않고 제불심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뭔 소린지. 참말인지. 참말 아니라고 들으면 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래가지고 청정광명(清淨光明), 청정, 청정심으로 딱 가면, 상광상조라. 항상 광명이 항상 비친다. 이게 제불심이거든요. 이 상광상조 청정광명이 일시에 현전(一時現前)이라. 바로 한순간에 눈앞에 나타난다. 이게 기도예요. 일시현전이라.
         기도를 보면 마장이 생길 수가 있어요. 무슨 마장인가. 현상장애라는 게 있는데, 꼭 기도 좀 깊어지면 불보살이 나타나요. 불보살이 어떤 불보살인가. 청정광명 불보살이 아니라, 현상시현, 형상으로 이제 나타내는 불보살이 나타나요. 그 기도 좀 하면요. 꿈에 부처님 모습이 나타났어. 그게 어떤 부처님 모습이냐. 자기가 눈으로 익힌 부처님 모습이에요. 근데 어느 절에 가니까 그 꿈에 본 부처님이 그 절에 있어요. 그러면 그냥 좋아가지고 그게 뭐 엄청난 건 줄 알고 그랬는데, 그거 쫓아다니다 보면 그게 마장이에요. 그게 견불마장이라고, 견불마장이 생기면은 청정광명을 못 얻어요. 청정광명불을 얻어야 되지, 견불마장에 끌리지 마라. 어떤 불보살이 꿈에 보여도 거기에 멈추면 안 돼요. 오직 좋은 칭명을 계속해서, 부처님 보는 생각도 점점 이제 맑아져가지고, 그 맑은 마음이 온몸을 다 삼키고, 하늘을 다 삼키고, 땅을 다 삼켜서, 오직 일념정광뿐이다. 이것을 허공이 방락하고 세계가 평침이라고, 허공도 다 없어지고, 세계도 다 없어지고 일념정광 그거 하나뿐이다. 이게 기도예요. 한생각 맑은 광명. 몸도 없어요. 이거 몸도 일념정광이에요. 한 생각 맑은 광명. 하늘도 한 생각 맑은 광명. 일체 중생도 한 생각 맑은 광명. 이런 거를 가르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일체 불보살이 일심 불보살이다.

 

一心三寶 일심삼보

普放慈光 常揮慧劍 照明陰路

보방자광 상휘혜검 조명음로

斷滅罪根 倘切歸依 奚遲感應

담멸죄근 당절귀의 해지감응

掌上明珠一顆寒 自然隨色辨來端

장상명주일과한 자연수색변래단

幾回提起親分付 暗室兒孫向外看

기회제기친분부 암실아손향외간

(地藏請文.釋門儀範下) (지장청문, 석문의범하)

   

        그래가지고 여기 석문의범(釋門儀範)에 보면, 장상명주일과한(掌上明珠一顆寒)이라, 지장보살이 손에 구슬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게 일념정광심이거든요. 한 생각 청정 광명의 마음이란 말이에요. 장상명주가 하나의 그 구슬 덩어리가 차고 차다. 차다는 얘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거기. 범부도 없고, 제불도 없고, 보살도 없고, 생사도 없고, 지옥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느냐. 자연수색변래단(自然隨色辨來端)이라. 자연이 응화가 무진이요, 일념정광이 응화, 응용해서 변화하는 것이 끝이 없어요. 그래가지고 자연의 색을 따라서 변래단이라. 오는 단서, 오는 여러 가지 하나하나를, 끝 단자는 하나하나, 단서 단서, 사사물물인데, 그 일념정광에 비춰 보는 사사물물을 다 가려낸단 말이죠. 그런데 이게 구슬이 움직여서 가려내는 거 아니에요. 가만히 있으면서 사람이 오면 사람을 가리고, 비춘다 이 말이에요. 산이 나타나면 산을 비추고. 이렇게 지장보살을 찬하고 있어요. 자연수색변래단이라.

 

        그다음에 밑에는 또 한탄인데, 이게 중생이 얼마나 세상사에 쫓아다녔는지 알 수 있거든요. 기회제기친분부(幾回提起親分付), 몇 번이나 지장보살의 맑은 광명을 세워서 광명으로 돌아가라고 친히 분부를 했겠는가. 근데 안 듣지. 말해봐요. 안 들어요. 그래서 여기도 그래놨어요. 그런데 암실아손향회간(暗室兒孫向外看), 암실아손들은, 저 어두운 방에 있는 후손들은 향외간이라, 자꾸 밖을 쫓아서 쾌락과 향락과 현세 허망 만족을 쫓아서 달려가고 있다. 향외간이라, 밖을 향해서 본다 이거거든요.

 
       이게 기도예요. 이제 불교가 처음에는 보리 열반을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청정일심을 가르치기 시작을 했어요. 보리 열반이나 온갖 게 전부 다 이게 청정일심을 떠나서 있는 게 아니니까, 경전도 이제 많이 유통이 됐고 법문도 많고 하니까 이제는 마음에서 마음을 바로 가라, 그게 수행이에요.

        근데 학교에 가서 불교를 해보니까 이게 안 되겠더라고요. 마음에서 마음 갈 생각을 꿈에도 못 꿔. 해석해서 논문 써내려고만 자꾸 애를 써요. 왜냐면 논문을 써내야 그 논문에 자기 이름이 실리거든. 그러니까 이게 금방 죽어서 없어질 허망한 이름을 구하려고, 마음이고 수행이고 무엇이고 다 팽개치고 그리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아주 고약한 불교다, 천하에 없던 불교다. 이거는 영명연수도 이 불교를 안 했고, 서산, 사명도 안 했고, 원효, 의상도 안 했다, 이런 불교는. 그래서 이 불교 인제 이대로 하면 안 되요. 옛날에 연수, 규봉, 원효, 의상이 했던 불교로 돌아가야 된다. 이래가지고 인문학적 불교학에서 승가 불교로 돌아와야 된다고 나 혼자 막 떠들었는데,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 안 쳐다보나 마나 나는 떠나도 간판이라도 달아 놓자고 간판 달아놓고 나왔구먼. 여기도 그랬어요. 기회제기친분부아, 명주일과, 밝은 구슬 한 덩어리, 청정일심, 명주일과를 이걸 찾아라. 이렇게 몇 번이나 이걸 드러내서 해보라고 분부를 했던가. 근데 암실아손들은, 어둠 속에 머무는 이 후손들은 향외간이라. 전부 다 이게 밖을 향해서만 가고 있다. 나만 간판 달아놓고 나온 게 아니라, 옛날 선지식이 다 그냥 그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기도를 잘하면 이렇게 한마음을 떠나지 않고, 바로 불보살하고 통할 수 있는 길이다 이거에요. 그런데 이게 왜 잘 안 되느냐. 눈에 보이는 재미가 없거든요. 재미가 없어서 안 하는 거예요. 재미 찾다가 인생 망치는 거지. 재미는 결과가 없어요. 현 순간뿐이야. 그래서 이제 더 근기가 높고 신심이 깊을수록 이걸 해요. 경을 봐도 경 새기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마음 돌아가는 경을 본다고요. 이걸 해요.

       그런데 진관사는 이제 중요하면 행사 기도라도 보더라도 이 길을 계속 하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행사 기도도 안 할 수도 있는데, 얼마나 좋은데, 행사 기도라도 계속 하니까. 기도한다고 선전만 해도 그만큼 공덕이 되고, 기도해야 되겠다 하고 동참만 해도 그만큼 공덕이 되고, 또 가끔 와서 지장보살 한 번씩이라도 불러도 이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참 좋은 일이에요.

       오늘 좋은 일에 좋은 법문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