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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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7월18일 음력 6월 신중기도 입재
도혜스님 2023-07-18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을 오늘 이렇게 만나서 반갑고요. 저는 조금 전에 소개받았던 것처럼, 수원 봉녕승가대학이라고 스님들을 교육하는 전문 교육기관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제 몸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여러분들께 말씀드릴 내용은 보현행원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평소에 여기 진관사에서는 보현행원품을 많이 독송한다라고 들었는데, 맞죠? 그래서 그 행원에 대해서 조금 말씀을 드리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무엇이 행원인가>부터 여러분들이 아셔야만 될 것 같아요. <행원은 원을 가지고서 행동을 한다.>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행동 하나하나에 원을 세우면서 행동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원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행원은 물론 이 보현행원을 좁게는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열 가지에 한정이 된다고 보지만, 넓게 보면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다 보현행원입니다. 여러분들이 행동하는 모든 것 하나하나에 원을 세우고 행동을 하면 그것이 바로 보현행원이 되는 겁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면, 운전을 직업으로 가진 운전기사님이 운전을 할 때 손님이 차에 탔어요. 그러면 그 손님을 태웠을 때 ‘내가 태운 이 손님이 나와 인연이 됐으니까, 내가 목적지까지 잘 모셔다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이 손님이 늘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 이러한 마음으로 운전을 하고, 그분을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리면 그것이 바로 보현행원이에요. 쉽죠? 여러분들은 보현행원이라고 하니까 막 엄청 어렵고 뭐가 거창하고 이런 것 같지만, 이렇게 쉽게 생각해 보면 이 불교는 굉장히 쉽습니다. 쉬운데, 원체 이 자료가 팔만대장경으로 저장돼 있다 보니까 여러분이 생각할 때 엄청 어렵다고 생각하세요. 그렇죠? 그러면 이제 이 보현행원은 어디에서 나왔느냐, 출처가 어디냐, 그건 알아야 되겠죠. 이 출처는 화엄경에서 나왔습니다. 화엄경이라고 하는 경전은 굉장히 경지가 높은 그런 경전입니다. 분량도 어마어마하게 많고, 내용도 굉장히 어려운데, 이 화엄경의 가장 작은 분량이 80권 화엄이에요. 그런데 이 80권의 화엄의 내용을 여러분들이 다 배우면 너무 어렵고 힘들고 무슨 소리인지 모르니까, 보현보살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진정한 자비로서 10가지 원력으로 묶어서 생활의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보현행원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 10가지 행원이 쭉 나오게 되는데, 또 열 가지라고 하니까 여러분들이 또 마음에 부담이 돼요. ‘열 가지를 내가 다 못하면 어떡하나’ 그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열 가지 다 못하면, 한 가지만 해도 되고, 열 가지를 또 다 하면 되고. 근데 열 가지 다 어렵지 않습니다.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현보살님이 진정한 자비로서 묶어놓은 거, 만들어 놓은 거, 여러분이 실천하기 좋게 해놓으신 것이 보현행원품의 10가지 행원이다, 원력이다, 이런 소리입니다. 자 그러면, 이 화엄경이라는 게 도대체 어떤 경전인지 그거는 조금은 알고 가야 될 것 같아요. 화엄이 어떠한 경전인가를 조금 이제 여러분에게 말씀드려보면, 80권이나 되는 화엄을 간단하게 말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여러분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씀드려보면, 어떤 것이 화엄이냐. 부처님의 경지, 그러니까 부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주(無所不住)한 부처님이다. 즉 부처님은 온 우주에 꽉 차 계십니다. 공기처럼, 또 산소처럼 비처럼 이렇게 꽉 차 계시는 분이 부처님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그 단어 자체가 또 어려워요. 무소부주다 하니까 무소부주가 뭐지? 어디든지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이 이해가 잘 안 돼요. 그래서 이해가 되게끔 제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우주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것들, 산, 강, 물, 집, 이 모든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또는 볼 수 없는 거, 전체를 다 통틀어서 물질이든지 물질이 아니든지 간에, 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만들어진 모든 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면은, 물질은 전부 다 여러분들이 보는 이런 물질이죠. 그럼 물질의 가장 낮은 단계, 물질의 근원이 되는 단계가 뭐냐 하면은, 쿼크라는 것이 제일 물질의 낮은 단계입니다. 우리 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거예요. 아주 몇만 배나 되는 작은 것을 볼 수 있는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볼 수 있는 그러한 물질의 가장 낮은 단계, 지금은 쿼크보다 더 밑에 낮은 단계를 개발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쿼크라는 단계의 물질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물질로도 보이고 에너지로도 보인다. 물질로 보였다가 에너지로 보였다가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우주가 만들어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말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모든 만들어진 것은 전부 다 에너지로 만들어진 겁니다. 이것도 지금 거시화되어서 제가 지금 만지고 있는 이 탁상 또는 도자기 컵, 여러분들이 입고 있는 옷, 전부 모든 것이 다 거시적인 것이지, 미시적인 것으로 들어가 보면은 에너지로 만들어졌다. 그럼 이 에너지라는 것은 어디에서 생겨났느냐. 즉 부처님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 부처님이냐. 부처님은 에너지입니다. 에너지 자체예요. 그러면 일체 우주가 에너지로 만들어졌다면은 부처님으로 만들어졌다, 부처님의 기운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산도 강도 물도 다 부처님인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그 찬불가에 그런 가사가 있잖아요. <산도 강도 강물도 부처님 모습> 그런 찬불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찾아보세요. 들어보시기도 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원리이기 때문에 이러한 노래를 만들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바라보는 이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 산, 강, 나무, 건물, 이 모든 것들이 다 부처님의 에너지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산소, 이것 역시 부처님의 에너지로 만들어졌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체가 다 부처님이다. 가능하죠. 그러니까 부처님은 공기처럼 비처럼 이 우주에 꽉 차 있다. 가득하다. 근데 우리 중생들은 왜 그런 부처님을 못 보느냐, 내 자신이 딱 마음으로 칸을 막아서,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이렇게 분별을 하고 보니까 부처님이 눈에 안 보이는 거죠. 이래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이러한 부처님의 세계에 우리가 눈에 가린 가림막을 다 걷어내는 과정이 수행의 과정이 되겠죠. 그래서 우주에 꽉 찬 부처님의 세계, 그 부처님의 경지, 부처님의 세계를 설한 경전이 바로 화엄경전이다. 화엄경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또 되게 어렵게 느껴지죠. 근데 사실은 쉬워요.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이제 앞으로 풀어나갈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부처님의 세계, 부처님의 경지, 그것을 바로 설한 경전이다. 에둘러서 방편으로 이렇게 한 게 아니라, 바로 직설적으로 설한 것이 바로 화엄경이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화엄경은 굉장히 어렵고 쉽지 않은 경전이다. 이렇게 모두들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화엄경은 뭐냐 하면은, 이러한 부처님이 될 수 있는 단계를, 52단계의 부처님이 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다 말씀해서, <어떻게 수행을 하면은 부처님이 될 수 있다>라는 과정을 쭉 설명한 경전, 그래서 이 두 가지 뜻을 가진 것이 바로 이 화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화엄은 잡화엄식(雜華嚴飾)이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잡화엄식은 아주 여러 가지 꽃으로 장엄을 했다, 그런 뜻이에요. 여러분이 지금 설악산이라든가 금강산이라든가 이런 산이 굉장히 아름답다라고 들어보셨을 거고 또 직접 가보신 분도 계실 거예요. 그럼 설악산이나 금강산, -금강산은 저도 못 가봤습니다마는,- 같은 데를 가보면, 아주 단일하게 한 가지 바위만 있다든가, 한 가지 나무만 있다든가, 꽃도 한 가지 꽃만 있다, 그러면 장엄스러울까요? 바위가 있어도 그냥 밋밋한 바위가 쭉쭉쭉 서 있다 그러면 안 좋아 보이겠죠. 바위가 굴곡이 있고, 큰 바위도 있고, 작은 바위도 있고, 그 사이 사이에 또 나무가 나서 자라고, 그 기기묘묘한 모습, 그 사이에 또 소나무 같은 것도 아주 산이 높으니까 크게 자란 게 아니라 조그맣게 바위 틈에서 나서 자란, 이러한 모습들이 서로서로 모여서 그렇게 아름답고 거대한 모습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하나하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저기 여러분들이 밟고 다니는 꽃 그런 꽃들도, 그 꽃들에게 여러분이 ‘피지 마라’ 이러면 안 피나요? 핍니다. 발로 밟고 다녀도 피어요. 필 꽃은 다 핍니다. 또 피라고 막 애를 써도 자기가 필 때가 돼야 피지 안 펴요. 그런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지금 이 법당 안에 계시는 여러분들 모습이 다 각자 달라요. 눈코입귀는 다 있지만은 모습이 다 다르게 달려 있어요. 그러니까 다 각자 이렇게 구분을 하죠. 이분은 이분이고, 이분은 김 씨고 이분은 이씨고 이렇게 구분을 할 수가 있고, 각자 나름대로 다 다르기 때문에 또 그것이 장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저 정원 장엄이 잘 돼 있다고, 아주 좋다고 꽃 구경하러 가는 이런 정원에 가보면, 여러 가지 꽃이 다 한 곳에 잘 꾸며져 있으니까 그 정원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각자 각자가 나름대로 결혼하고 자식 놓고 다 나름대로의 뭔가를 이루고 살고 있어요.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꽃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게 하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여러분들이 지금 진관사에 와서 계시는데, 진관사에 오시면 대웅전이 있고 또 옆에 건물이 있고 이렇게 딱 어우러져 있으니까 참 좋아 보이지, 만약에 대웅전만 하나 덩그렇게 있고 아무것도 없다. 보기가 안 좋죠. 그와 같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고, 잘난 사람도 있고, 수많은 그러한 것들이 전부 다 하나의 어떤 것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하나가 다 꽃이다. 그래서 그러한 잡화엄식으로 꾸며진 거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 화엄은 이 세상에 우주가 돌아가는 모든 원리, 중생이 살아가는 모든 근본, 이런 것을 하나하나 다 자세하게 밝혀놓고 말씀하신 경전이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이 화엄은 정말 높고 깊은 그런 경전이고 좋은 경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이제 좋은 경전을 배우면서, 왜 그러면 보현행원을 우리가 지금 배워야 되느냐. 조금 전에도 이 화엄은 부처님이 되는 길을 알려준 경전이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10가지 행원 속에 부처님이 되는, 될 수 있는 방법을 여러분들이 실천할 수 있게끔 보현보살님이 만들어서 설해 놓으셨다 했죠. 그래서 여러분이 행원을 듣게 되면, 듣고 그 자리에서 한 가지라도 실천하면,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화엄경과 다른 경전의 차이가 뭐가 있느냐 하면은, 다른 경전은 삼아승지겁을 수행을 해야만 부처가 된다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근데 화엄경전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바로 행원을 실천하면 ‘너가 그 자리에서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세요. 그래서 화엄과 법화경은 불교의 가장 제일 윗 단계에 있는 경전이고 불교의 꽃이고, 불교를 대표하는 가장 높은 경전이다, 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왜냐하면은 보현행원을 실천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고, 또 보현행원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지, 부처님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제 이 보현행원을 잘 듣고 들으면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래서 이제 이 부처님이라는 경지를, 우리가 부처님이 되고 싶어 하고, 되려고, 모두 우리 스님들은 이렇게 직접 머리 깎고 수행하려고 뛰어든 분들입니다. 그런데 세속에 계시는 여러분도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바로 부처님이 될 수가 있어요. 그것이 바로 이 보현행원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부처님은 왜 돼야 되느냐. 스님들 생활하는 거 보면 굉장히 힘들어 보이고, 새벽에 그렇게 일찍 일어나서 스님들이 예불하고 수행하는 게 힘들어 보이고, 이래서 우리 불자님들은 따님이나 아드님이 출가한다 하면 아주 그냥 질색을 하고 말립니다. 그렇죠? 그래서 요번에 저희 봉녕사에서 이 스님들의 부모님을 초청해다가 템플스테이를 했습니다. 그래서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그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절에 보내놓고, 걱정하고, ‘아이고 우리 아무개가 절에 가서 얼마나 고생을 할까’ 이럴까 봐, 부모님을 모셔다가 템플스테이 1박 2일을 했어요. 회향할 때 저희들이 그분들의 소감을 들어보니까, 그래도 마음이 좀 놓인다고,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이 부처님이 왜 돼야 되느냐. 부처님의 경지는 무한하게 좋은 자리입니다. 여러분들이 제일 좋아하는 거, 새해가 되면 여러분들 뭐라고 인사합니까? 복 많이 받으세요. 그 복이 뭡니까? 부자 되는 거잖아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게 돈이잖아요. 그렇죠? 돈 돈 돈. 그 돈 되고 부자 되는 거, 부처님의 자리는 부자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부처님은 십자재(十自在)를 가진 분입니다. 부처님의 경지가 더 이상 많은 게 있지만은, 여러분이 제일 좋아하는 게 이 물질, 부자, 돈이고 그렇죠? 그러니까 그 부분을 이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부처님은 십자재가 있는데 십자재를 다 말씀드리면 너무 시간이 길고, 여러분이 좋아하는 재자재, 재자재는 재물 자재입니다. 재물 자재는 그러면 어떤 경지가 되느냐. 여러분들 아마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돈 나와라 뚝딱 하면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 집 나와라 뚝딱 하면 집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 그거 하나씩 있었으면 좋겠죠, 그렇죠? 그런데 부처님의 경지는 그런 도깨비 방망이를 천 개 만 개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면 생각이 되겠죠. 얼마만큼 마음대로 할 수 있는지, 그죠? 온 우주에 있는 이 재물을 당신이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다. 어느 정도냐. 과거의 것을 끌어올 수도 있고, 미래 것을 끌어올 수도 있고, 이런 능력이 부처님 자리입니다. 그런 부처님 자리 여러분들 한번 돼보고 싶지 않으세요? 돼보고 싶죠? 그러면 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잘 들으셔야 돼요. 재자재만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 자리는 재자재만 있으면 별 그게 없죠. 그런데 재자재만 부처님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뭐가 있느냐 하면, 수명 자재도 있고, 수명 자재는 죽고 싶으면 죽고, 살고 싶으면 살고 마음대로 하는 거, 또 수생자재입니다. 어디에 태어나고 싶다, 나는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싶다 그러면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지옥에 가서 중생을 좀 제도해야 되겠다 그러면 지옥에 태어나고, 돼지를 제도하겠다 하면 돼지로 태어나고, 제도를 다 마치고 나면 또 떠나고.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죽는다 그러면 벌벌 떨고, 그냥 안 죽으려고 야단이 나고, 병원에 가서 암이라는 소리만 들으면 그냥 울고 불고 야단 나잖아요. 그럴 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부처님 자리라는 것이 그만큼 좋은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보현행원을 공부한다는 것은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로 공덕이 있느냐. 여러분들 보현행원을 읽으셨다니까 거기 원문에 보면 ‘보현행원의 소리를 귀로 스치기만 해도 무한한 공덕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있느냐. 수많은 억겁 동안 수많은 사람을,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람과 부처님을 공양한 공덕보다 보현행원을 듣는 것이 더 공덕이 크다. 또는 대방광불화엄경이라는 구절만 들어도 절대로 삼악도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이제 그런 것을 경험한 것이 조선시대에 있었는데, 그 이야기까지 하면 여러분들의 시간을 너무 잡아먹는 것 같아서 그것은 생략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덕이 크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믿지를 않아요. 왜? ‘설마 설마하니 그러려고, 아이고 난 못 믿어.’ 그렇게 공덕이 크다고 하는데 나는 못 믿는다. 그러면 그 못 믿는 것을 과학적으로 한번 이야기를 해봅시다. 생각의 비밀이라는 게 있는데 뭐냐 하면은, 생각은 성공을 여는 열쇠입니다. 보통 성공을 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평균을 내보니까 정확한 목표와 그것을 이룰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모두 성공을 했다는 거죠. 근데 이제 이 생각이라는 것은 머리 속에만 있는 게 아니고 물리적인 힘이 있어요. 우리는 생각을 하면 이건 뇌의 작용이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뇌의 작용뿐만 아니라 이것이 물리적으로 현상적으로 나타납니다. 나타난 것을 제가 지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뭐냐.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에 대웅전에 앉아 계시는데, 대웅전을 지은 분이 대웅전을 지으려고 설계를 하고, 어떻게 어떻게 몇 평짜리 대웅전을 무엇으로, 소재는 나무로 하고 어떻게 어떻게 짓겠다. 설계를 해서 지었을까요? 그냥 막무가내로 지을 수 있었을까요? 설계를 했죠. 설계가 뭡니까? 바로 우리 생각에서 나온 거잖아요. 그리고 여러분들 그 노래 있잖아요. ‘저 푸른 초원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다.’ 그게 뭡니까? 그렇게 살고 싶으면 그렇게 자기가 마련을 해서 살면 되는 거예요. 그쵸? 그게 생각이 현실로 나타난 경우입니다. 여러분들이 앉아서 지금 법당의 부처님, -지금 제가 등을 지고 있습니다만- 부처님을 뵙죠. 부처님도, 저러한 부처님을 이렇게 이렇게 모셔야 되겠다라고 생각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 바로 부처님의 모습이고, 이 진관사의 정원이나 건물 배치, 또는 템플스테이라면 여러분들이 눈으로 보는 이 모든 것들은 어디서 나왔어요?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은 물리적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없다? 있습니다. 이것이 증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보현행원을 듣고, “아 내가 이렇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라고 했으니까 바로 실천에 옮기면 바로 그 자리에서 여러분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어요. 이게 물리적인 힘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면서 버스를 타고 왔든, 차를 갖고 오셨든 여러분들이 온 길, 여러분들이 모두 바라보는 이 모든 것들은 전부 다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생각이 물리적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생각을 달리 먹으면 달라질 수 있어요. 어느 고등학생이 조금 공부를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너는 공부 못해.’ 이렇게 해서 그 학생이 ‘나는 공부 못하는 학생이야’ 이렇게 생각하고 아예 공부를 안 했어요. 그런데 그 학생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됐는데,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 얘를 보고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앞으로 미국의 링컨 대통령처럼 그렇게 될 수도 있고.’ “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뭐가 되고 싶으냐?” 그러니까 이 학생이 뭐가 되고 싶다 했겠죠. 그러니까 “너는 그렇게 얼마든지 될 수 있어. 열심히만 해.” 그래서 그 선생님 말을 믿고 열심히 했더니 정말 그 학생이 나중에 교수가 됐습니다. 이래서 그 사람의 생각이 중요한 거죠. 그래서 여러분이 이 보현행원을 들으면 공덕이 무량하다 하니까, ‘그렇게 무량해?’ 그게 아니에요. 생각 하나가 바뀌는 데 따라서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고, 그 사람의 운명이 지금 달라지면 지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이 쭉 세세생생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나무가 되는 씨앗 하나가, 은행이 되는 은행 씨앗 하나, 은행 하나가 아주 작죠, 요만한 손가락보다 작습니다. 하지만 거기 싹이 터서 나무가 되면 큰 은행나무가 되잖아요. 똑같은 이치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에 부처님의 씨앗을 심고, 그것도 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실천을 하면, 바로 내가 지금 부처님의 행동을 하고, 그렇게 부처님을 행동을 하면, 머지 않아서 -내가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죠,- 재자재가 있고, 무슨 수명 자재, 무슨 자재, 무슨 자재가 서서히 서서히 나에게 금생에 오는 거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공덕이 무량한 거죠. 그렇죠? 그러니까 “아 참,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무량한 공덕이 있는 거구나.” 이렇게 여러분들이 확실하게 믿으셔야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믿고 실제로 여러분이 실천해 보셔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첫 번째가 예경제불(禮敬諸佛)이에요. 열 가지 원력 중에 첫 번째가 예경제불인데, 예경제불이라고 하면은 제불께 예경을 한다. 그럼 제불은 무슨 뜻이냐. 모든 부처님이라는 뜻이에요. 모든 부처님. 그래서 “대성(大聖)이시어. 어떻게 예경하면 되겠습니까?”라고 했는데 이것이 요점입니다. 그럼 제불께 예경을 하는데, 어떤 부처님께 어떻게 예경을 해야 되느냐 이것이 요점이죠. 그러면 모든 부처님은 어떤 분이 모든 부처님이냐 이걸 이제 먼저 알아야 되겠죠. 여러분이 지금 대웅전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데, 지금 대웅전에 모셔진 우리 부처님께 계속 몸으로 절만 하면 예경제불이 되는 걸까요? 물론 그것도 예경제불입니다마는, 우리가 먼저 진정한 예경제불을 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물론 대웅전에 계신 부처님도 부처님이지만, 화엄경에서 보현행원품에서 말하는 제불은, 모든 부처님은 일체 유정 무정 두두물물 법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제불입니다. 앞부분에서 말했죠. 일체 모든 삼라만상이 에너지로 만들어졌는데, 그 에너지가 부처님의 에너지다,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유정무정 모든 게 부처님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우주는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 자체이고, 바로 불국토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부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가슴 깊이 뜨겁게 받아들여야 돼요. 그래서 형상적인 부처님이 아니라, 진정한 법신불을 우리는 친견할 수 있어야 되고, 문자나 음성의 법문이 아닌 실제 살아있는 생명의 법문을 우리는 들을 수 있어야 된다. 여러분이 마음을 열면 그러한 진정한 부처님을 만나뵐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칠정례를 합니다. 또는 이 사시에, 여러분들 조금 전에도 기도를 올리면서 칠정례를 하셨을 텐데, 그렇게 예경하는 칠정례는 부처님 형상에 예경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성품, 부처님의 마음 즉 지혜로 널리 우주에 두루하신, 그러한 유정무정 모든 것들에 부처님의 성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일체 모두가 부처님이다라는 그 마음으로 하는 것이 진정한 예경제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께 예경하는 것도 ‘우리가 공덕을 짓겠습니다.’ 하는 발원인 것이고, 또 우리가 부처님께 예경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는 무한 공덕을 전부 다 겉으로 드러날 수 있게끔 하는 그러한 상대방과 나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예경을 하는 것이 진정한 예경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러한 삶을 본래 구족되어 있는 공덕이 드러날 수 있게끔 살겠습니다 하는 그런 발원이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예배를 해야 그것이 진정한 예배가 된다 그 말이죠. 그래서 부처님은 공덕신이고 복덕신입니다. 여래의 마음은, 여래의 부처님은 지혜 덩어리예요. 지혜의 덩어리가 부처님이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데,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의 경계에서 보면 이게 무슨 소리냐. 여러분들 조금 전에도 법성게 하셨죠. 그중에 구세십세호상즉이 나옵니다. 이 소리가 무슨 소리냐. 구세는 과거에, 과거의 마음에 과거, 미래, 현재가 있고, 현재의 마음에 과거, 미래, 현재가 있고, 또 미래의 마음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어요. 그러면 3·3은 9가 되죠. 마음이 되는데 그게 현전 1년을 보태면은 십세가 돼요.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1년 전의 일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생각해 보셨어요? 생각해 보셨죠? 그러면 1년 전의 일을 생각해 보는데 1년 동안 시간이 걸리나요? 지금 현전 1년에 그게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내가 한 달 후에 우리 딸 예식이 있어요. 결혼을 시켜야 되는데 그 결혼식장은 어떻게 하고, 딸을 어떻게 결혼을 시켜야지 이런 생각하실 수 있죠? 그러면 그 시간 동안 그만큼 시간이 돼야 그걸 생각할 수 있나요? 지금 당장 생각할 수 있죠? 그러면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 이 모두가 지금 현전 일년에 적혀 있다는 소리는 바로 하나다 이 말이죠. 그렇죠? 하나입니다. 맞죠? 그래서 구세십세호상즉의 경계에서 보면, 우리가 예배하는 이 예경은 나의 미래불이 -내가 앞으로 부처가 될 거니까, 그쵸?- 나의 미래불이 현재 나를 제도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앞으로 부처가 될 수 있으니까 그 희망을 가지고 우리는 수행을 하니까, 내가 지금 수행을 하고 수행을 안 하는 여러분도 이렇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니까, 나는 나쁜 습관은 버리고 좋게 행동하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부처님처럼 대하고 이래야 되겠다. 이러니까 과거 미래불이 현재 나를 제도하는 거와 같고, 또는 내가 나에게, 나의 미래불에게 예경하는 거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을, 법당의 부처님을 모시고 예경을 하니까 다른 종교에서는 우리를 비방을 해요. 부처님 등신불 모셔놓고 예경한다고 비방을 하는데, 우리는 전혀 그게 아닙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그러한 생각으로 예경을 하는 건데, 그러면은 부처님의 모습이나 이 자비 은혜는 특별한 모습이 아니에요. 별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 곁에 있는 부모님이나 스승과 남편 부인의 모습으로 항상 나와 함께 살고 있고, 또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일상생활 가운데에 부처님의 자비 은혜가 여러분에게 베풀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한 부처님의 법문는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 한없이 서려져 있는 거예요.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해라.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 이게 전부 다 부처님 법문입니다. 또 남편이 여러분에게 뭐라 뭐라 하고, 또 여러분이 남편 술 많이 잡술까봐 ‘술 많이 잡수지 마세요.’ 잔소리하고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부처님 설법이다 이 말이죠.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풀어서 말씀을 드려보면, 여러분의 가정에 남편 되시는 분은 남편 부처님이고, 아내 되시는 분은 아내 부처님, 따님은 따님 부처님, 아들은 아들 부처님, 어머님 아버님은 어머님 아버님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일체처 일체 곳에서 만나는 모든 분들이 모두 부처님이세요. 근데 여러분은 어떻게 대합니까? 부처님으로 대하지 않으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 당장 집에 가서 남편을 부처님으로 모셔보세요. 그 남편도 여러분에게 부처님처럼 대합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거예요. 맨날 남편하고 싸우고 술 먹는다고 투정 부리고 이러지만, 여러분이 부처님처럼 남편을 모셔보세요. 모셔보면 달라집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보면 부인이 말하자면 조금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그런 분하고 아주 높은 선비가 결혼을 했는데, 이 부인이 맨날 그야말로 말할 수 없이 행동도 거칠고 말도 거칠고, 선비 입장으로 볼 때는 엄청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 가지고 맨날 선비가 부인을 야단칩니다. “당신은 왜 이걸 이래 하냐 저걸 저래 하냐” 하도 그러니까 이제 부인은 또 남편이 하도 잔소리 하니까 싫어가지고 계속 싸우는 거에요. 맨날.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어요. 그랬는데 어느 날 이 남편이 글을 보다 보니까, 모두가 다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이런 글귀를 보게 됐어요. 그래서 우리 부인도 참 착한데 내가 뭘 잘못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때부터 남편이 부인한테 자꾸 절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인이 당신 그렇게 나한테 잔소리하고 하더니 왜 이렇게 갑자기 절을 하냐고 미쳤냐고. 막 그래도 자꾸 절을 하거든요. 그래서 3개월이 지나가니까 이 부인이 남편이 자꾸 그렇게 절을 하니까 미안해서 부인도 따라 절을 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부인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싸우지 않고 잘 살았다는 소리가 있는데, 여러분이 남편을 대할 때도 부처님처럼 대하고, 자식을 대할 때도 부처님처럼 대하고, 모든 사람을, 어머니 아버지를 대할 때도 부처님처럼 대한다면, 여러분의 생활은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거예요. 멀리 쳐다보고 멀리 따라갈 거 없어요. 시간이 지나고 그럴 일이 전혀 없다 이 말이죠. 예경제불 한 가지만 잘해도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부처님으로 대하고, 경전에 보면 눈앞에 대하듯 깊은 믿음으로 대하라 그랬어요. 여러분은 부처님으로 대하라 하니까 부처님으로 안 대하고, ‘설마 부처님이라고? 저렇게 그냥 엉망인 사람이 어떻게 부처님이냐?’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 모든 한 분 한 분이 다 부처님이라는 것을 깊은 믿음으로 대하라는 거예요. 그렇게 대하면, 여러분이 그렇게 대하는 여러분 마음이 부처님이고, 또 그런 부처님 대접을 받는 분은 마음이 또 부처님을 닮아갑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도 부처가 되고, 상대방도 부처님을 만드는 그러한 것이 바로 이 예경제불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을 부처님처럼 공경하고 본질적으로 상대방과 내가 둘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대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게 하면 안 되겠죠. 내가 존중스러우면 다른 사람도 존중해줘야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공경이라고 하는 것은 만행의 근본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공경이 들어가지 않으면 관계가 아주 소홀해집니다. 그래서 개인과의 성장이나 자연과의 친화나 이런 것들이 전부 다 공경에서 시작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자연 환경을 함부로 했기 때문에 지금 오존층이 파괴가 돼서 기후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부터 시작이 돼서 앞으로는 아주 점점 더 어려운 기후가 오고 공기도 나빠지고 물도 안 좋아지고, 지금 그것을 전 세계의 사람들이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유정 무정을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면 상대방을 소홀하게 여긴다 이 말이죠. 이 세속 분들 보면 옷이라도 좀 번듯하게 입고, 그 뭡니까, 명품 가방이라도 들으면 좀 괜찮게 보고, 좀 시원찮게 입었다, 좀 시원찮다 싶으면 무시하고, 이게 일반화돼 있잖아요. 그런데 그러한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대했을 때, 바로 여러분에게 부처님의 경지가 열리는 겁니다. 그래서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도 또는 스승이 제자를 가르칠 때도, 모든 관계에서 이 공경이라는 것이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으면, 인간관계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로 간의 신뢰가 깊어지지 않죠. 그래서 이제 이러한 인간관계가 잘 성립이 되면 여러분이 원하는 소원도 성취가 바로바로 된다는 겁니다. 그 한 예로 뭐가 있냐면은 해인사에 희랑대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옛날에 희랑대사라는 희랑조사가 계셨는데, 그분이 굉장히 큰 스님이시거든요. 어느 날 그 희랑대에 어느 젊은 부인이 쌀하고 미역하고 잔뜩 머리에다 이고 불공을 하러 왔어요. 그래서 희랑대사가 위에 서 계시다가 그 부인이 오는 걸 내려다보고 부인에게 “어떻게 왔느냐” 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불공하러 왔습니다”, 그랬어요. 그럼 “무슨 불공을 하러 왔느냐” 그러니까 “생남불공 하러 왔대요.” 그러니까 이 스님이 “그래, 생남불공 하러 왔으면 그 머리에 인 거 그대로, 미역이랑 쌀이랑 이고 온 거 그대로 바로 너 집으로 가라”는 거에요. “아니 불공 하러 왔는데 가라 그러면 어떡합니까?”하니까 “내 시키는 대로 하라”고, “네 집에 가서 네 시어머니한테 잘해라. 그러면 불공이 성취될거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제 며느리가 그 머리에 쌀하고 미역 그대로 이고 집으로 갔습니다. 가니까 시어머니가 밥을 한 솥을 하고 국을 잔뜩 끓이고 뭔가 반찬을 해가지고 막 이제 먹으려고 차리는 중에 며느리가 들어온 겁니다. 근데 그 시어머니가 어떤 시어머니였냐면은 재취로 온 시어머니로, 재취로 온 지 한 6개월밖에 안 됐는데, 며느리가 먼저 시집 와서 살림을 다 거머쥐고 있고 재취로 시어머니가 들어왔으니까 그 시어머니가 이 며느리 눈치를 보느라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나 봐요. 그러니까 며느리가 불공하러 간다니까 이제 오늘 저녁 돼야 오겠지 싶어서 쌀을 퍼다가 밥하고 국 끓이고 자기 먹고 싶었던 반찬 다 만들어서 먹으려고 하는데 며느리가 오니까 너무 깜짝 놀랐어요. 며느리가 그 모습을 보고 뭘 알았느냐면은 ‘아, 어머니가 내 눈치를 많이 보셨구나. 내가 그런 걸 모르고 있었구나.’ 그래서 이 며느리가 그때부터 시어머니에게 그렇게 마음을 다해서 잘했어요. 그랬더니 1개월 조금 지나서 바로 임신이 돼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서 희랑대에 인사드리러 왔답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잘하면 바로 여러분에게 소원이 성취가 됩니다. 그래서 그 시어머니가 이 며느리한테는 부처님인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부처님이 따로 계신 게 아니라, 일체 모두가 다 부처님이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러한 이치를 잘 아셔야 됩니다.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공경하는 거와 똑같아요. 왜냐하면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남편을 부처님처럼 대하면 남편도 여러분에게 잘할 것이고, 자식에게도 부처님처럼 대하고 상대방을 부처님처럼 대하면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다 돌아와요. 그러니까 나를 위하는 거와 똑같은 이치죠. 그래서 남을 존중하는 것이 다 나를 존중하는 것이고, 남을 위하는 것이 결국은 나를 위하는 게 됩니다. 우리가 사홍서원을 합니다. 그 사홍서원은 중생을 다 구제하겠다는 건데, 그 사홍서원이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내 자성의 중생을 구하게 되고, 내 자성의 번뇌를 끊게 해줍니다. 그러니까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것이 바로 내 중생을 구제하는 게 돼요. 그래서 보살도를 행하는 그것은 뭐냐 하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에요. 상구보리를 하려면 하화중생을 해라. 위로 부처님의 경지를 구하려면 밑으로 중생을 구제를 해라. 이것이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원리입니다. 너무 오래 하면 안 되겠죠? 그런데 이렇게 공경할 수 있는 지름길이 또 한 가지 있는데 짧게 하고 끝내겠습니다. 뭐냐 하면은 이 지름길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공경하는 지름길이에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부모님 은혜, 스승의 은혜, 나라의 은혜, 중생의 은혜를 아주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백중을 1년 행사로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부모님의 은혜, 스승의 은혜, 이런 은혜를 갚는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이 정말 마음속으로, 부처님 은혜가 막중하고 부모님 은혜가 막중하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꼈을 때, 비로소 천방지축처럼 날뛰던 여러분 마음이 방황을 멈추고, 여러분 마음에 감사하고 또 참회하는 그러한 눈물이 가슴 깊이 속에서 솟아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깊은 감사를 느끼지 못하면 공경하라 해도 마음이 우러나질 않아요. 요즘 시대는 들어보면, 옛날에는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을주목적으로 하고 우리가 살아왔는데, 지금 젊은 세대들은 부모님을 참 그야말로 키워주는 기계로 아는 이런 시대가 돼서 참 문제입니다마는, 여러분들이 감사할 때, 사람뿐만 아니라 이 모든 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천지의 은혜를 여러분이 느끼고 감사할 때, 이 천지가 여러분에게 그 감사한 은혜를 돌려줍니다. 이것이 원리예요. 진리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진정한 공경심이 우러나올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고난을 만났을 때, 역경이 생겨났을 때, “아 내가 도저히 못 살겠다.” 이러한 생각이 났을 때도 감사한 마음을 일으키면 그 고난에서 빨리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잘 살다가 그야말로 부도가 나서 길거리에 나 앉았다 그러면 어떤 생각을 하느냐. ‘그만 나는 안 살고 죽어야 되겠다.’ 이럴 게 아니라 ‘재물은 다 없어졌지만, 내 몸은 그래도 이렇게 안 죽고 살아났으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 이렇게 생각하면 또 살 길이 생깁니다. 실제로 부산 통도사 경봉 큰스님이 살아계셨을 때, 부산에 어느 큰 대보살이 있었는데, 그 보살이 부처님을 신봉하고 정말 깊은 불자였는데 사업을 아주 크게 했어요. 그러다 부도가 났어요. 부도가 나니까 살 길이 없다 싶어서 태종대에 가서 빠져 죽으려고, 태종대에 밤에 가서 바위에 올라 앉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빠져 죽는 것도 그렇지만, 경봉 큰스님께 가서 법문 한 번 듣고 빠져죽어도 늦지 않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려와서 그다음 날 경봉 큰스님을 찾아가서 자기 이야기를 쭉 했죠. 그래서 제가 죽으려고 했다. 그러니까 경봉 큰스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압니까? “너 평양에서 내려왔지?” “예. 그렇습니다.” “내려올 때 뭐 갖고 내려왔나?” “아무것도 손에 든 거 없이 맨몸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래. 그때 생각하면 지금 너는 맨몸이냐, 뭐가 좀 있냐?” “그때 비하면 지금 뭐가 있습니다.” “뭐가 있노.” 재물은 다 없어졌지만 자기가 그동안 쌓아놓은 신용, 다른 회사와 거래했던 거래처의 모든 신용이라든가 이런 거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 평양에서 내려올 때보다 니가 부자인데 뭘 죽으려고 그러냐” 생각해 보니까 그래요. 그래서 다시 살아서 다시 사업을 일으켜서 큰 부자가 돼서 불사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사한 마음을 일으킨다면 여러분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행복해지는 거예요. 여러분 정말 먹을 끼니가 없다, 다음에 뭐 할 게 없다, 아무것도 물질은 없어도 내 몸은 멀쩡하다. 그러면 그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죠. 여러분들이 엄마 배 속에서 나왔을 때 뭐 들고 왔습니까? 옷 들고 왔어요? 아니면 뭐 들고 왔습니까? 들고 오신 분 손 한번 들어봐요. 아무것도 안 들고 왔죠. 그럼 지금 부자지 뭐.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분들은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이렇게 살아 숨 쉬는 자체가 감사한 일이고 여러분들 이렇게 걸어 다니는 거 이게 바로 기적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걸어 다닐 수 있다, 숨 쉴 수 있다, 이것만 해도 기적인데 뭘 더 바라요. 바라는 게 문제지, 그죠? 그 마음만 버려도 벌써 여러분은 행복한 자리에 있는 거예요. 아셨죠?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박수 받고 더 하면 안 되죠, 그렇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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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중기도] 7월 13일 백중 입재
가섭스님 2023-07-13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네. 반갑습니다. 조금 전에 주지스님께서 소개한 키만 큰, 키만 큰 스님입니다. 원래 이게 등치 큰 사람들이 되게 쪼잔해요. 밴댕이라고 그러잖아요. 밴댕이. 그래서 법문을 하는데 잘 안 들어주면 잘 삐져요. 잘 들어주길 바랍니다. 올해도 이제 백중을 입재하게 되는데 백중을 우란분재라고 합니다. 우란분. 우란분이라고 하는 거는 이제 거꾸로 매달려 있다 라는 고통을 받는 걸 우란분이라고 그래요. 우란분재를 지내서 선망 부모, 7세의 선망 부모와 현세의 어버이를 편안하게 하는 기도가 바로 우란분재의 백중 기도다, 이렇게 말씀드릴 수 있는데요. 오늘은, 올해의 백중은 <법장을 여는 우란분재>라는 주제로 말씀을 드릴까 합니다. 백중은 불교의 5대 명절인데, 우란분은 옛날에는 이제 백중이라고 그랬죠. 우리는 일반적으로 백중으로 다 알고 있는데, 백중에는 이제 우란분경이라고 하는 경전이 있어요. 그 경전이 기본이 되고, 그리고 목련경이라든지 부모은중경이라든지 이런 부분들이 다 부모의 은혜를 어떻게 갚아야 하는지를 잘 설하고 있는 경전입니다. 오늘은 우란분경을 말씀을 드릴까 하는데 우란분경은 이제 축법호라고 하는 번역승이 번역을 했어요. 거기에 보면은 목련존자가 나와요. 목건련이라고도 말하는데, 보통은 이제 부처님의 10대 제자 중에 신통제일이라고 하잖아요. 신통 제일 목건련 이렇게 하는데, 목건련은 신통이라기보다는 효행 제일인 것 같아요. 어머니에 대한 마음이 지극했던 것 같아요. 누구나 다 이제 어머니에 대한 그런 아련함들이 있잖아요. 목련도 아마 그랬던 것 같아요. 그래서 본인이 선정을 들어서 아라한과를 증득한 다음에, 제일 먼저 떠올린 사람이 어머니였어요. 어머니를 떠올려 보니까 어머니 좋은 갈래에 가서, 좋은 곳에 가서 편안하게 계신 줄 알았는데, 저기 아귀도에 떨어져서 거꾸로 매달려 있는 고통을 받고 있는 거예요. 그리고 잘 먹지 못해가지고 피골이 상접해 있어요. 그러니까 이제 아들 입장에서는 얼마나 안타깝고 안쓰럽겠습니까. 그래서 이제 본인이 신통을 제일 잘하니까, 본인이 받은 발우의 공양을, 발우에 담은 공양을 신통으로 어머니한테 보내줬어요. 어머니가 그 발우를 딱 받고, 오랜만에 음식을 보니까 얼마나 반가워요. 그래서 음식을 손에다 딱 집고 입에다 넣으려고 하는 순간, 그 음식이 불로 딱 변해서 타버리는 거예요. 도저히 먹을 수가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목련존자 입장에서는 더더욱 안타까운 거죠. 본인이 신통을 부려서 어머니에게 음식을 베풀었는데 그 어머니는 그 음식을 드는 순간마다 불로 변해 다 타버리고 마는 거예요. 그래서 이제 이 목련이 그 광경을 보고 눈물을 흘립니다. 어머니가 너무 안쓰러워서. 울부짖어요. 그리고나서 그 당시에 사위성 기수급고독원에 계시던 부처님을 찾아갑니다. 그런 광경들을 다 이야기를 해요. 이야기를 했는데 그때에 부처님께서 “어머니가 인생에 지은 여러 가지 업이 지중해서, 악업이 지중해서 그런 과보를 갖는다.”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러니까 “혼자의 힘으로는 불가능하고, 하안거가 끝나는 자자날에,” 스님들은 이제 오늘 입재하면은 지금 하안거 기간인데 7월 15일날 해제를 해요. 여름 수행을 마무리하는 자자를 하게 됩니다. “자자하는 그 날에 많은 스님들에게 공양을 베풀면 그 공덕으로 어머니가 좋은 데 날 거다.”라고 말씀하시는 거예요. 뿐만 아니라 그 우란분경에 보면 “그때 많은 스님들에게 정성을 다해 공양을 베풀면 현세의 부모까지도 또 과거로는 7세의 어버이까지도 다 좋은 공덕을 받는다.” 이렇게 말씀을 하시는 거예요. 그 말씀을 듣고 이제 목련존자가 그런 재를 마련해서 유래된 것이 이 백중이라고 하는 거죠. 그래서 백중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보면 조상천도를 하는 것인데, 조상천도를 왜 하냐 그러면, 조상이 편안해야 되거든요. 왜 그렇게 얘기했어요? 내가 편하려고 하는 거예요. 내가 편안하려고, 조상을 편안하게 하는 거고 또 조상이 편안해야 내 마음도 편안하죠. 백중 때 여러 가지 일들 많지만, 또 무더운 여름이긴 하지만, 7번의 재를 마련해가지고 정성스럽게 진관사에서 선망부모를 모시고 재를 지내는 이유란 말이죠. 그런데 우리는 이제 선망 부모가 그렇게 편하려면 우선적으로 이루어야 될 것이 뭐냐 그러면, 내 마음이 편안해야 돼요. 내 마음이. 내 마음이 편안해야지만이 선망부모도 편안하다라는 거예요. 그래서 우선 백중을 기도하면서 내 마음 정리부터 먼저 해야 돼요. 근데 백중을 하는데 아주 고구정령하게 내가 이번 백중만큼은 우리 조상님들을 위해서 공양을 베풀고 또 스님들에게 공양을 내겠다라는 마음을 가져야 되는데, 혹자들은 백중을 입재하고 내지는 천도재를 할 때 응당 과보를 바라면서 하는 때가 있죠. 천도재을 하거나 또 백중기도를 하면 나한테 좋은 과보가 올 거다. 물론 그것도 틀린 건 아닙니다마는, 요번 백중만큼은 그런 마음을 좀 내려놓고 내 마음에 집중하는 백중이 되었으면 좋겠다. 내 마음에 집중한다는 얘기가 뭐냐면 내 마음을 좀 여는, 열어서 좀 스스로가 바라보는 그런 백중이 됐으면 좋겠다라고 하는 생각을 해보게 됩니다. 여러분 오늘 기도하기 전에 천수경을 다 읽었죠. 그 천수경 중에 개법장진언이 있어요. 그렇죠? 개법장진언. 개법장진언이 뭐냐 하면 법장을 여는 진언이라는 참말이란 말이죠. 그게 법장이 뭐냐, 그러면 법의 창고예요. 법. 법은 다른 말로는 연기라고도 표현합니다. 연기 또는 법을 다른 말로는 여래라고도 표현하기도 해요. 이 법에 여래를 넣으면은 여래장이 되죠. 여래장. 여래장은 어디 있냐 그러면, 어디에 있는 게 여래장이에요? 내 마음에 있는 게 여래장이에요. 여래라는 부처님인데, 장자는 숨어 있다, 숨겨져 있다. 또 창고할 때 그 장이에요. 창고 장자. 곳집이라는 뜻인데, 그러니까 내 안에 여래가 이렇게 있는데, 그게 지금 숨겨져 있는 거예요. 드러나지 않아 있어요. 그 여래를 여는 것, 그게 개법장진언이에요. 그러니까 개법장진언을 하면서는 그냥 입으로만 하면 안 되고 마음속으로 내 마음에 부처님의 문이 활짝 열린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개법장진언을 해야 돼요. 나만 그러냐. 그런 게 아니라 백중기도 기간에는 개법장진언을 외우면서 내 마음도 활짝 열리지만 선망 부모의 마음도 활짝 열린다. 그러면 거기에 여래의 지혜광명이 드러난다라는 생각을 하면서 해야 되는 거예요. 근데 이 법장이, 여래장이 열려야 되는데 이게 꽉 닫혀 있어요. 열쇠가 이렇게 꽉, 자물쇠가 딱 채워져가지고 이게 도대체 잘 열리지가 않아요. 근데 그게 꽉 잠겨져 있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개법장진언의 진언은 뭐예요? <옴 아라남 아라다>죠. 다 아시죠? “개법장진언 옴 아라남 아라다” 이렇게 하잖아요. 그렇죠? ‘옴’이라는 얘기는 길상이라는 뜻도 있지만 모든 게 처음에 시작할 때, 시작할 때 하는 말이고, ‘아라남’은 뭐냐면 무쟁이라는 뜻이에요. 무쟁. 다툼이 없는 거예요. 무쟁삼매라는 뜻입니다. 아라남. 그리고 또 하나 ‘아라다’는 만족이라고 하는 뜻이 있어요. 그러니까 개법장진언은 하나는 다툼이 없는 마음과 또 하나는 만족하는 마음이 있는 거예요. 그게 법장을 여는 키예요. 우리가 이제 내 안에 부처님이 있는데 본래 붓다가 있잖아요.“ 당신은 부처님입니다.” 그게 부처님이 있단 말이에요. 그게 여래장이라는 뜻이에요. “당신은 부처님입니다”라는 말이 여래장이라는 뜻이에요. 당신은 여래장이다. 당신 안에는 여래가 있습니다. 원래 붓다, 본래 붓다다 이런 뜻이란 말이에요. 근데 “당신은 부처님입니다.” 그러는데, 그 부처님이라는 얘기를 입으로는 하는데 내 안에 부처님을 열어야 되거든요. 근데 여기에 지금 다 잠겨져 있는데 하나가 뭐냐면, 무쟁이 돼야 되는데, 다툼이 없어야 되는데 이 안에는 맨날 끊임없는 갈등과 대립이 있어요. 가만히 돌이켜보면은 내 마음은 늘 싸우고 있어요. 내 마음은 늘 전쟁 중이야. 요럴까 저럴까, 이럴까 저럴까, 요게 맞나 저게 맞나, 오만 생각을 하죠. 오만 생각을 하면서 오만 한 가지 생각을 하죠. 그러니까 맨날 마음 서로 갈등을 하는 거예요. 갈등. 이게 중생업의 발로입니다. 그런 갈등을 하게 되면 마음에 지혜가 싹틀 수가 없어요. 이 갈등이 내려앉는 거예요. 갈등을 하지 않는 거거든요. 갈등이 안 일어나려면 어떻게 해요? 멈춰야 되죠. 그게 아라남이에요. 무쟁, 다툼이 없는 거예요, 내 마음속에. 그런 다툼이 끊어져야 그다음에 아라다가 되는 거예요. 만족하는 삶을 살 수 있는 거예요. 만족. 그러니까 하나는 불만족인 거죠. 불만족. 하나는 다툼이고 하나는 불만족인데, 이 불만족도 나 자신에 대한 불만족보다는 상대에 대한 불만족이 많아요. 현상에 대한 불만족들이 많거든요. 그래서 이 무쟁 다툼이라고 하는 거는 나하고의 다툼인 거고, 그게 일차적이고, 불만족은 환경에 대한 불만족이 더 많아요. 그래서 불행해지는 거죠. 행복 아니면 불행이거든요, 반대말이. 불만족이 불행이란 말이에요. 뭐가 완벽하지 못하면 계속 본인이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거예요. 우리나라가 잘 아시다시피 행복 지수가 세계에서 꼴찌 했다가, 꼴찌에서 2등 했다가 막 그러잖아요. 왜 행복지수가 낮냐 물어보면, 대부분이 다 본인의 삶에 대해서 만족하는 사람이 별로 없어요. 뭔가 불만이야. 불만이라는 말은 뭔가 부족하다는 거예요. 부족하다는 말은 뭐예요? 기대를 많이 한다는 거예요. 기대. 뭔가 기대를 많이 해. 근데 그 기대가 안 채워지면 불만이 되는 거잖아요. 그래서 안으로는 자기하고 끊임없이 싸우고 밖으로는 늘 불만족이니까 행복할 순간이 없어요. 맨날 불행하다고 생각하는. 이제는 관점을 바꿔야 됩니다. 우리가 개법장진언을 외우는 이유는 하나는 그러한 내 안에 다툼을 내려놓고, 밖으로는 어떠한 환경이 오더라도 그것에 만족하리라고 하는 큰 가르침이 있는 거예요. 또 하나는, 하나는 그런 다툼이 가라앉고 만족하게 되면 내 마음에 여래장이 열린다는 거. 여래장이 열려야 내가 성취할 수 있어요. 내 삶이 장엄될 수가 있습니다. 근데 그것은 어디서 누가 주거나, 내지는 땅에서 솟거나, 하늘에서 내려오는 게 아니라, 내 안에서 발현되는 거예요. 이거는 틀림없는 사실입니다. 다만 그 내 안에서 발현을 아직까지 시키지 못한 것뿐이에요. 그러니까 우리가 백중을 입재하면서 오롯하게 조상님의 극락왕생과 편안함을 원한다면, 내 마음의 다툼을 첫째로 정리해야 됩니다. 내 마음의 갈등을 내려놔야 됩니다. 어떤 글에 보니까 우리의 삶을 100%로 했을 때, 늘 자기 내적 갈등으로 쓰는 게 30%래요. 그리고 감정 소비로 쓰는 게 30%래요. 우리가 행복으로 쓰는 거 있잖아요, 내 삶의 행복으로 내 마음을 쓰는 것은 많이 돼야 20%라는 거예요. 어떤 사람들은 2%도 안 되는 사람도 있다는 거예요. 내 삶을 가만히 들여다보면 늘 갈등하고 사는지, 아니면 늘 내려놓고 사는지 스스로 들여다보면 돼요. 그냥 바로 하면 됩니다. 그냥. ‘아 내가 조금 내적 갈등이 심한 사람이다.’ 그러면 내 마음을 자꾸 비춰보면서 전환시켜야 돼요. 전환시켜가면서. 또 ‘내가 불만족이 많다.’ 입만 열면 불만족이에요. 이것도 습관이거든요. 그럴 때마다 자기 자신을 한번 돌이켜봐야 되는데, 이게 굉장히 큰 공통점이 있어요. 내적 갈등이 심한 사람이나 아니면 불만족인 사람이 공통점이 뭐냐 그러면, 관점이 늘 밖에 가 있어. 상대가 있어요. 내 안에 들어가 있는 적이 별로 없습니다. 내 안으로 끌어들여야 돼요. 그래야지 해결되는 문제에요. 행복은 결국은 딴 데 있는 것이 아니라, 내 안에 있는 거다. 그래서 ‘당신은 부처님입니다.’ 이렇게 얘기하는 거예요. 부처님이 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 법장을 열어야 된다. 법장을 열려면 어떻게 해야 된다? 내적 갈등과 불만족을 내려놔야 된다. 그래야 진정으로 그 바탕 위에서 조상 천도가 될 수 있는 거예요. 욕심이 가득가득한 마음 내지는 안으로 갈등이 가득한 그런 마음 가지고 천도를 하면, 조상님들도 우리가 이제 그런 말 있잖아요. <잘못되면 조상 탓>이라 하잖아요. 조상이 불편하면 후손 탓이에요, 역으로 얘기하면. 그러니까 우리가 우란분경이라든지 목련경이라든지 이런 데서 얘기하는 거 자체가, 결국은 후손들이 공덕을 지어서 후손들이 마음이 편안해야 조상도 편안하다 이런 말이에요. 그렇지 않겠습니까? 부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간절하게 바라는 게 두 가지가 있는데 뭘 것 같아요? 부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거. 행복~ 그렇죠. 비슷비슷한 대답이 나오는데. 다 알면서 지금 용기가 없어서 말을 못하는 것뿐이지, 다 알고 있죠. 그렇죠? 건강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가는 거예요. 팔만대장경을 우리 말로 풀어가지고 풀이해보면 다른 말이 없어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라.> 이게 부처님이 정리한 뜻입니다. 근데 우리가 이제 자식을 바라볼 때 자식한테 바라는 게 뭐가 있어요? 건강하게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아라. 그렇죠. 그 외에는 없어요. 자식에게 큰 명예를 얻어라. 또 큰 돈을 벌어라. 한참 성장할 때는 그런 얘기를 하죠. 근데 이제 여기 앉아 계신 연식이 되면, 이렇게 연식이 되면 그런 것도 사라져요. 자식한테 큰 명예를 원치 않고 큰돈도 버는 것도 원치 않고. 그렇죠. 자식한테 오로지 원하는 거는 건강한 거예요. 건강한 거. 그리고 행복한 거잖아요. 그게 부처님하고 부모님 마음하고 똑같은 거예요. 아마 선망 부모님들도, 우리하고 인연됐던 역대 모든 선망 부모님들이 이 자리에 앉아 계신 모든 분들에게 바라는 게 건강하고 행복한 거예요. 그 마음 그대로 잘 우리가 실천해야 하는 거잖아요. 부처님이 우리에게 바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명확하게 알았기 때문에, 여러분도 그것을 실천해야 돼요. 건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또 행복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건강하려면 어떻게 해야 돼요? 자기하고 싸움을 그쳐야 돼요. 자기 목줄을 맨날 졸라. 그리고 맨날 답답하다 그래요. 속 탄다 그래. 숨이 잘 안 쉬어진다고 얘기를 해요. 근데 그 목을 누가 조르고 있느냐. 본인이 목을 조르고 있는 거거든요. 진짜 목 조르지 마시고요. 그리고 본인이 부처님께서 이렇게 행복하라 행복하게 살아야 된다는 말씀을 늘 하시지만 행복한 방법보다는 계속 서로 불만족해가지고 밖에서 뭔가를 계속 구하다 보니까 헐떡임이 심해지고, 그러다 보니까 늘 쫓기는 삶을 살게 되는 거잖아요. 요 백중 49일 동안에는 하루에 딱 49일이니까 49초만, 49분도 아니고 4시간 9분도 아니고 딱 49초만 자기 자신을 바라보자. 내 마음을 바라보자. 49초만 하자. 50초도 원하지 않아요. 49초만. 내 마음에 내 내적 갈등을 쉬는 시간을 갖고 내 스스로가 만족하는 삶을 살고, 그렇게 해서 현상에 쫓겨가지는, 현상에 휘달리지 않는 그런 시간을 49초만 가지면, 아마도 49일 뒤에는 뭔가 변화된 자신을 바라보게 되고 ‘이게 우리 선망 부모의 진정한 바람이구나. 또 부처님께서 그 긴 시간 동안 그 오랜 시간 동안 오랜 말씀으로 우리에게 바랐던 점들이 이러이러한 거구나. 내가 법장을 열어야 되겠구나.’라는 것을 확인하게 될 겁니다. 아무쪼록 장마가 시작됐지만, 또 바람도 불고, 여러 가지 기후가 안 좋지만, 이럴 때일수록 건강하게 잘하시고 여름 잘 보내시고 백중 끝나고 건강한 모습으로. 제가 예언을 또 하나 하겠는데 딱 딱 들어맞는 예언만 해요. 10월에 국화가 핍니다. 아셨죠! 10월 국화 필 때 뵙도록 하겠습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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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라니기도천독] 6월11일 신묘장구대다라니 42수 회향 다라니기도 천독기도 법문
가섭스님 2023-06-11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반갑습니다. 오랜만이죠. 제가 진관사 올 때마다 예언을 하나씩 하는데 예언이 딱딱 들어맞아요. 제가 동지 때, 겨울에 와가지고 예언한 게 있는데, <3월달에 꽃이 필 거다.> 이런 예언했는데 이미 꽃 폈죠. 오늘 예언 하나하고 할까요? 10월달에 아마 단풍이 질 겁니다. 스님이 오자마자 ‘이렇게 싱거운 소리를 하나’, 그렇게 얘기할 수 있는데 이게 영험이에요. 이것이 신통이고 이것이 가피입니다. 그 계절에, 그 절기에, 그 절기다움이 없으면 큰일이죠. 요즘에는, 이제 하도 바쁘게 여러 일들이 일어나는 시절이다 보니까, 만나면 인사가 “별일 없어요?” 이렇게 인사들을 하죠. 별일이 있으면 안 되는데. 우리가 천독 다라니를 독송하고 또 42수 진언을 하는 이유는 우리의 삶 속에서, 우리의 인생의 여정에서, 우리의 가정생활에서 별일 없도록 하기 위한 거예요. 별일이 뭐냐 그러면 장애잖아요. 장애. 근심과 걱정이잖아요. 근심과 걱정과 장애만 우리의 삶의 여정에서 없어도 살 만하거든요. 숨이 잘 쉬어지면 살 만한데, 숨이 잘 안 쉬어지면 사는 맛이 안 난단 말이죠. 숨이 멈춰진 경험들이 있으면 알겠지만, 우리가 이제 등산할 때도 경사로가 높은 데를 막 가면 숨이 턱턱 막힌다고 그러잖아요. 정말로 숨이 꼴딱꼴딱 넘어가는 경험들을 삶에서 한 번씩 하게 되는데, 그럴 때에 그거를 잘 넘길 수 있는 힘을 우리가 쌓아놓는 것, 그게 기도의 원래 취지입니다. 삶의 여정이 그런 깔딱고개가 없으면 그런 기도가 굳이 필요 없는데, 사는 것 자체가 그런 여정 속에 놓여있기 때문에 우리는 기도가 필요하다 그러죠. 이제 이런 것들을 우리 옛날 어른들 말로는 영험이라고 얘기를 해요. 영험 또 불교식 표현으로는 가피라고 하죠. 근데 그 가피와 영험이라고 하는 것은 특별한 것이 아니라 아주 작은 데서도 우리가 경험할 수가 있는 거란 말이죠. 근데 그 가피를 기도를 통해서 영험을 경험을 해야지만이 또 신심이 더 깊어지기도 합니다. 근데 그 영험과 가피를 입으려면 가피라고 하는 게 더함을 입는 거기 때문에 더 좋은 일이 많이 생기는 걸 의미하잖아요. 우리 삶 속에서 좋은 일이 많이 생기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물론 다라니 천독을 열심히 외우고, 42수를, 진언을 의지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오늘 이야기하는 이 네 가지를 꼭 마음속으로 잘 기억해야만이 그 가피가 더 빨라질 수 있다, 경험할 수 있다 이렇게 말씀을 드립니다. 요즘에는 그 영험과 가피가 잘 없는 것 같지만, 여전히 우리의 삶 속에는 영험과 가피가 있어요. 그게 우리가 느끼지 못할 뿐이죠. 옛날 어른들은 기도를 통해서, 그런 영험과 가피를 경험을 했고, 그런 영험과 가피를 써서 기록에 남긴 걸 영험록이라고 얘기를 해요. 그 영험록에는 바로 관세음보살을 기도로 해서 얻은 영험들이 가장 많습니다. 그만큼 우리 일반 대중들은 관세음보살님을 많이 의지하고 있는 거죠. 저도 관세음보살님을 의지하고 있어요. 언제 아느냐. 문득문득 어떤 경계가 나타났을 때 나도 모르게 관세음보살을 부르게 돼요. 제가 있는, 속해 있는 사찰은 반야바라밀 수행을 해요. 정근도 반야바라밀로 하거든요. 이제 여기는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 정근하잖아요. 우리는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마하반야바라밀> 이렇게 정근을 해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상 속에서는 반야바라밀도 하지만, 관세음보살이 우선 나와요. 제일 먼저. 그거는 어렸을 때부터 그렇게 의지해 왔기 때문에 그런 건데요. 그 가피와 영험이란 큰 게 아니고 제가 옛날에 한 번 이야기를 한 적이 있는데, 저는 어렸을 때 막 놀다 보면 예불 시간이 지나버려요. 그러면 스님한테 혼나잖아요. 아이들과 놀다가 고개를 넘어가야 절이 있으니까 예불시간을 놓쳐버리는 거예요. 어둑어둑해질 때까지 딱지치기, 자치기, 그다음에 술래잡기 이런 거 하다가 놓쳐버리는 거예요. 시간을. 그래서 절에 올라갈 때, 그 혼날 생각에 정신없이 가면 여지 없이 혼나요. 그런데 고개를 넘어가면서 “관세음보살님 한번 도와주세요. 안 혼나게 해주세요. 관세음보살님.”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걸을 때마다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관세음보살 이렇게 하고 가면 희한하게 스님이 “빨리 가서 씻어라.”고 그러는 거예요. 그거 안 하고 혼날 생각에 가면 여지 없이 가서 108배 해야 돼요. 그때 내가 “아, 관세음보살님은 존재한다.” 어린 마음에. 지금도 그때의 그런 습성 때문에 삶의 경계에서 어려운 일이 딱 생기면, 마음에서 관세음보살님이 딱 화두처럼 들려요. 그럼 걱정했던 일들이 대부분이 다 사라지거나 좀 덜해지거나 그런 경험들을 하게 되거든요. 그게 사실은 본인이 그러한 믿음이 있기때문에 가능한 건데요. 더 큰 이야기로는 저도 이제 들은 이야기인데, 어머님이 절에 열심히 다니는 가족이 있었어요. 물론 그 자녀들은 절을 열심히 라기보다는, 안 다닌 건 아닌데 초파일에 한 번 정도 오는 초파일 신도, 초파일에 와서 비빔밥 먹고 가는 그런 신도였는데, 이분들이 부산에 살았는데 포항고속도로 가다가 교통사고가 난 거예요. 부부가 타고 가다가. 근데 차가 전복을 해가지고 몇 바퀴를 굴렀어요. 그 사위는 코가 깨지고 자기 딸은 어깨가 탈골된 거예요. 차는 이제 거의 폐차 수준인데도. 그래서 어머니가 놀라서 간 거죠. 갔는데 놀라운 거는 그 딸이 병실에서 이제 수술을 하려고 누워있는데 엄마가 가니까 엄마한테 그러더라는 거예요. 사고가 딱 나는 순간 자기도 모르게 나 살자고 하는 생각이 아니라, 아기가 있으니까 아기 걱정이 되더라는 거예요. 그 순간 자기도 모르게 “관세음보살님 우리 아기 살려주세요.” 이런 생각이 딱 들더라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그 아기를 딱 이렇게 안은 거죠. 아기는 안 다쳤어요. 근데 그 순간에 정신이 혼미해지면서 하얀 천을 입은 사람이 아기를 이렇게 안고 있는 영상이 이렇게 스크린에서 싹 지나가더라는 거예요. 그러니까 그 얘기를 이제 어머니한테 한 거죠. 그러니까 그 어머님이 이제 ‘관세음보살님이 우리 아이를 구해줬다.’ 이렇게 큰 영험도 있는 거죠. 얼마나 어머님이 열심히 기도했으면 그런 가피를 받았겠습니까? 그런 큰 가피부터 일상 속에 작은 가피까지. 작은 가피 같은 경우에는 배가 막 아픈데, 저도 그런 경우 있거든요. 배가 엄청 아파요. 지금 당장 터질 것 같은 느낌이 있어요. 그때 관세음보살님을 막 부르는 거예요. 그러면은 몸이 약간 제어되는, 조복까지는 아니더라도 제어되는 경험을 하거든요, 호흡을 다스리면서 하다 보면. 그런 일상에서 아주 작은 것까지, 작은 것부터 큰 것까지 다 어떻게 보면 영험이고 가피다. 그런 경험들을 한 번씩 하셔야 되는데, 하시고 계시죠? 그걸 한번 써가지고 제출해 보실까요? <진관사 숙제>. <마음의 정원의 글>, <난 이렇게 부처님께 가피를 입었다.>해가지고, 아마 그렇게 한 장씩 그동안의 신행생활을 10년 하든, 20년, 30년 하든, 그런 것들을 한 장씩 써내면, 그 이야기들이 나에게도 감동이지만, 쓰면서 감동이지만, 아마 그걸 읽는 사람들은 엄청난 감동일 겁니다. 또 그 이야기들이 많은 이들을 부처님 법과 인연을 맺게 하는 씨앗이 되지 않을까. 그런데 우리는 이런 부분들이 이웃 종교에 비해서 좀 약한 게 있어요. 자기는 잘 경험을 했는데 그걸 잘 토해내지 못해요, 잘 표현해내지 못해요, 잘 적어내지 못해요. 엄청난 많은 경험들을 했는데도 불구하고. 저는 앞으로 이런 거 다시금 부흥이 됐으면 좋겠다고 생각합니다. 내가 일상에서 작은 것부터 아주 큰 것까지 부처님의 가피 아래, 관세음보살의 가피를 입었던 것들을 같이 나누고 공유하고 함께 하는, 그런 흐름들이 있으면 좋겠다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래서 우리 42수 끝나게 되면, 다라니 천독 끝나게 되면, 천독 끝날 때 몇 분들이 나오셔서, “저는 천독 때 이런 경험들을 했어요, 이런 어려움들이 해소가 됐어요, 이런 장애들이 사라졌어요.” 라고 같이 나누는 그런 이야기들을 한번 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하는데요. 진관사 사찰 음식이 맛있다는 얘기만 하지 말고, -그건 당연한 거니까,- 그런 부분들이 우리가 공유가 돼야 많은 불자들이 이제 그러한 인연 따라서 불자가 되지 않을까, 일반인들이, 그런 생각도 해보게 됩니다. 그러면 그런 가피나 내지는 영험을 얻으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첫 번째로 갖춰야 되는 게, -마음에 잘 기록을 하세요.- 한 생각이 있어야 돼요. 한 생각, 일념(一念)이라고 하죠, 일념. 이 염자는 생각 염자인데, 파자를 하면 지금의 마음이잖아요. 지금 마음. 지금 마음인데, 생각 염자 다른 말로 리멤버(remember)에요, 기억하는 거예요. 기억하는 거. 그 한 생각에 뭘 기억하느냐. 부처님과 부처님 가르침과 그 스님들과 내가 부처님께 약속한 계, 살도음망주(殺盜淫妄酒), 그리고 어떻게 베풀 건가, 내가 어떻게 베풀고 살건가, 또 내가 그 결과 내가 어느 좋은 세상에 인연을 맺을 건가. 여섯 가지가 원래 있어요. 근데 여기서 말한 일념은 하나로 생각을 통일하는 거예요. 통일하는 거. 42주를 하든 다라니를 하든 한 생각으로. 경전에는 뭐라고 비유가 나오냐면, 머리에다가 화로를 지고 있는 것처럼, 이고 있는 것처럼 염불하라, 정진하라, 그러거든요. 이마에 여기 화로가 얹혀 있으면 얼마나 다급하겠어요. 그게 바로 일념이거든요. 이번에 진관사에 오니까 초파일 때 굉장히 귀여운 부처님을 하나 만들어서 나눴대요. 보니까 밑에는 <당신의 부처입니다.> 이렇게 써있고. 덕원스님이 그걸 하나 저한테 보여주길래, 제가 이렇게 머리에다가 올려가지고 “내가 이렇게 해서 법당에 들어가면 어떨까?” 그때 덕원스님이 뭐라고 한 줄 알아요? “드릴까요?” 그래. 하라는 소리잖아요. 머리에 부처님을 이고 있는 것은 당연한 거고, 정말로 내가 큰 뜨거운 화로를 얹어놓은 것처럼 일념으로 해야 된다는 거예요. 일념으로 해야 된다. 그런데 이제 하다 보면 자꾸 망상이 올라오는데, 망상이 올라온다고 또 괴로워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스님, 저는 기도만 하면 자꾸 마음에서 망상이 올라온다.”고. 이것도 생각나고 저것도 생각나고. 근데 그건 당연한 거예요. 마치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가 흔들리듯이 당연한 거예요. 바람이 불면 나뭇가지 흔들리는데, 나무가 흔들린다고 걱정하는 사람, 똑같은 거예요. 그만큼 바보스러움이 없죠. 그럼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건 그 흐름대로 그냥 놔둬야 돼요. 나도 다시 다라니 독송에 집중하고 42수 진언을 외우는 데 집중해야 된다. 일념. 첫 번째 일념이 돼야 되고. 두 번째로는 신심이에요. 믿어야 됩니다. 믿어야 돼요. 여기서 믿는다는 걸 뭘 믿느냐 그러면, 자기 자신을 믿어야 돼요. 이 기도를 통해서 내가 변화하고 내가 가피를 입고 내가 영험을 경험할 거라고 하는 믿음이 있어야 돼요. 그런데 어떤 사람들은 다라니를 읽고 진언을 함에도 불구하고 계속 마음에서 의심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야, 이거 뭐 밑져야 본전인데 뭐 해보지 뭐.” 이렇게 해가지고는 안 된다 이 말이에요. 정말 절실한 믿음을 가지고 해야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그 믿음은 좀 더 불교적으로 말하면, 내가 원래 본래 붓다인데, 본래 부처인데, 지금 중생의 먼지가 껴 있다. 그 먼지를 덜어내는 과정으로써 이 다라니를 하는 것이고 이 사십이수를 하는 것이에요. 그래야 부처님이 드러나죠. 그래서 첫 번째로 믿는 건 <내가 부처님이다>라는 걸 믿어야 돼요. 맨날 말로는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그렇게 해놓고, 마음으로 의심해 버리면 난 중생이에요. 당신은 부처님이야 라고 하면서 나는 중생인가? 나도 부처란 얘기잖아요. 그러니까 우리가 이제 경전을 읽는다든가, 뭐 우리가 불교 수행하면서, 제일 착각하는 게 뭐냐면 내 얘기를 해야 되는데, 자꾸 상대방을 얘기를 해요. 우리가 자비를 말하고 지혜를 말할 때도 ‘내가 자비로운가, 내가 지혜로운가’ 봐야 되거든요. 자비와 지혜는 맑고 밝은 거, 따뜻하고 온화한 거예요, 그냥. 자비 지혜라고 하는 거는. 자비 지혜가 별거 있어요? 지금 내가 이 시점에서 맑고 밝은지, 따뜻하고 온화한지만 살피는 거예요. 근데 우리는 자꾸 상대방에게 ‘너 자비롭냐, 너 지혜롭냐’ 얘기하는 것처럼 오해해요. ‘당신은 부처님이다’라는 말은 우리는 상대방을 존중하라는 뜻도 있지만, 그것을 내 안에서, 내 안으로 끌어들이기 위함입니다. 결국은 ‘당신은 부처입니다’라고 얘기하는 거는 ‘나도 부처님이에요 나도 부처예요.’ 쉽게 말하면 ‘나도 지혜로운 존재고 나도 자비로운 존재예요. 나도 맑고 밝은 사람이고, 온화하고 따뜻한 사람이에요.’ 라고 하는 말입니다. 그걸 믿으라는 거예요. 그 믿음 없이 중생의 습성을 위해서 하면 안 된다 이 말이에요. 더 나아가서는 그거 아주 기본적인 큰 법문이고, 이거 알아들으면 아주 큰 법문이에요. 더 이상 법문할 필요가 없어요. 근데 지금 눈빛을 보니까 아리송해. 말은 맞는 말인데 눈빛을 보니까, 이거 스님이 맞는 말을 했는데, 이게 잘 와닿지 않아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믿음은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다라니 기도를 통해서, 이 진언을 통해서 내가 변할 거라고 하는 믿음이 있어요. 의심하지 말아야 됩니다. <반드시 성취할거다>라고 하는 것, 그것이 믿음이에요, 두 번째 갖춰야 될 것이. 그 옛날에 어른 스님들은, 의상대에서 의상 스님은 그 믿음을 확인하기 위해서 까치발을 하고 관세음보살을 정근한 거 아니에요. 그러다가 안 되니까 어떻게 돼요? 홍련암 밑으로 몸을 던진 거잖아요. 그런 절실함, 그런 믿음, 내가 몸을 던지면 이 생에서 이 몸은 사라지겠지만, 그 정진력으로 내가 깨달음의 세계에 들어가겠다고 하는 그 일념으로 한 거거든요. 믿음이 있어야 됩니다. 의심하지 말아야 됩니다. 두 번째가 의심하지 말자. 세 번째로는 긍정적인 마음이 있어야 돼요. 긍정적인 마음. 긍정적인 마음을 하려면 어떻게 해야 되냐면, 긍정적인 말을 해야 됩니다. 말. 일단은 말은 습관이기 때문에 바꿀 수 있어요. 가족 간에 얘기할 때 굉장히 부정적으로 말하는 사람이 있어요. 네 가지의 말이 뭐가 있어요? 하나는 거짓말 있죠. 거짓말. 하나는 꾸민 말이 있죠. 요만한 얘기를 이만하게 얘기하는 거. 저도 그걸 잘해요. 저도 요만한 얘기를 이만하게 잘 포장해서 얘기하는 기술이 있어요. 그다음에 또 하나가 뭐예요? 양설이죠, 이간질하는 거예요. 첫째한테, 둘째한테 다른 얘기하고, 친구들 만나서 A라는 친구한테 얘기했던 거를 B라는 친구한테 “A라는 애가 이렇게 얘기하더라. 너에 대해서.” A를 만나가지고는 “B라는 친구가, 그 보살님이 이런 얘기 하더라.” 또 이 스님 만나가지고는 “스님에 대해서 저 스님이 그렇게 얘기하더라.” 이렇게 습관적으로 하는 사람들이 있거든요. 이건 화합을 깨는, 이거는 막을 수가 없죠, 화합이 깨지는 거는. 마지막으로는 뭐예요? 욕설이죠. 억센 말하는 사람들이죠. 상대방에게 그냥 비수를 꽂는 말을 하는 사람들, 습관적으로. 그래서 긍정적인 마음인데, 그 긍정적인 마음을 갖추려면 언어를 따뜻한 언어로 바꿔라. 긍정적인 언어로 바꾸라는 거예요.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말할 때 살펴보면 됩니다. 말할 때 우리는 살피지 않고 툭툭 내뱉는 습관이 있어요. 감정에 의거해서, 감정에 의지해가지고, 말을 툭툭 내뱉는 습관들이 있거든요. 말을 할 때는 말을 입으로 뱉지만, 생각을 안으로 끌어들여야 되는 거예요. 그래야지 부정적인 말들이 안 나옵니다. 네 번째로는 이 세 가지를 하면 얻어지는 결과이기도 한데, 얼굴에 웃음을 띠어야 됩니다. 웃음을 띠어야 돼요. 제가 진관사 마음의 정원에 오면, 우리 스님들 만나면 제일 높이 평가하는 것 중에 하나가, 이거 내가 처음 얘기하는 건데, 우리 저 스님한테도 처음 얘기하는 건데, 진관사는 큰 장점이 웃음이에요. 웃지 않는 스님이 없어요. 물론 이제 당신들끼리 있을 때는 뭐 그렇게 안 할 수도 있겠지만, 다 얼굴에 미소를 띠고 있어요. 그렇죠? 스님들께 박수 한번 주세요. 어느 집안도 마찬가지예요. 그 집안이 잘 되느냐. 딱 부부 만나보면 알아요. 잘 웃는 부부는 잘 풀리는 집안입니다. 그런데 서로 간에 얼굴이 굳어 있어, 근육이. 얼굴에 근육이 제일 많다 하잖아요. 그래서 얼굴이 굳어 있는 사람들이, 그거는 평소에 습성이, 업이 그렇게 굳어진 거예요. 그래서 혹시라도 얼굴이 굳어 있는 분들은 오늘부터 집에 가셔가지고 거울 보고 이거(웃는 모습) 한번 하세요. 이 웃음은 얼굴 연습을 해야지 나옵니다. 물론 우리가 이제 자연스럽게 우스운 이야기나 재미난 광경을 보면 웃게 되는데, 평소에 잘 안 웃는 사람들이 웃잖아요. 저게 웃는 건지 우는 건지 잘 모르겠어. 어정쩡한, 왜냐면 근육이 굳어 있기 때문에. 근데 웃어야지 됩니다. <웃으면 복이 와요>라는 말이 있잖아요. 웃으면 복이 와요. 제 경험담을 하나 얘기하면 이것도 영험을 받은 이야기인데, 고등학교 2학년 때 삶이 너무 괴로운 거예요. 고등학교 2학년 때. 내가 중학교 2학년 때는 청춘이란 노래 아세요? <언젠간 가겠지.~> 중학교 때 그 노래를 듣고 3일을 울었어요. 인생이 너무 무상한 거야. 보세요. 제가 얼마나 잘 꾸미는지. 요만한 걸 이만하게 잘 꾸며서 얘기하죠. 실제로 그 노래 듣고 너무 마음이 슬펐어요. ‘야, 인생이 이렇게 흘러가는 거구나.’ 중학교 2학년짜리가. 아마 그때 이 출가의 씨앗이 뿌려진 것 같아요. 그리고 이제 고등학교 때 인생이 너무 힘든 거예요. 학교 다니는 게 너무 힘들어. 친구들하고 만나가지고 얘기하다 보면 너무 힘들어요. 그래서 그때 생각했어요. ‘내가 힘든 삶을 전환시킬 수 있는 방법이 없을까?’ 며칠을 고민했어요. 그래서 제가 고민 끝에 흰 종이에다가 딱 한 자를 썼어요. 뭐라고 썼게요? <웃자.> 고등학교 때, 웃자. 그래 웃어. 이렇게 썼어요. 흰 종이에다가. 그리고 그걸 벽에다가 딱 붙여놓고 맨날 웃는 연습을 했어요. 그때는 제가 혼자 자취하고 있었기 때문에, 잘 먹지도 못하고 잘 입지도 못하고 잘 자지도 못했어요. 근데 그때 그 <웃자, 그래 웃어.>를 해놓고, 내가 그렇게 생각해 보니까 그때 진짜 부처님하고 인연이 됐어요. 절에 살다가 좀 나와 있던 시절이었는데, 다시 부처님하고 인연이 되고, 불교 학생회 활동을 하게 되고, 회장도 하게 됐어요. 불교 학생 회장도. 왜냐. 제가 천수경을 외웠거든요. 지도법사 스님이 목탁을 가르쳐주는데 애가 목탁을 잘 치는 거예요. 저는 어렸을 때 목탁 치고 살았잖아요. 천수경도 외우잖아요. 그러니까 어떻게 천수경을 외우냐고. 그때 스님이 나보고 회장 하래요. 절에 나간 지 3개월 만에 학생회장을 했어요. 그러면서 부처님하고 진짜 인연이 됐거든요. 그때 지도법사 스님이 지금도 계세요. 대구에 주지하고 계시는데 그분도 주지, 저도 주진데.(웃음) 네, 그렇게 웃어야 됩니다. 어떻게 웃느냐. 지금도 늦지 않았어요. “아이고 제 나이 이제 뭐 육십, 칠십인데..” 그래야 웃으면서 갈 수 있어요. 살아온 세월을 어쩔 수 없지만, 명증한 건 뭐예요? 이제 갈 시간만 남았다는 거. 그렇죠. 갈 시간이 남았다는 거예요. 그러면 그 갈 시간을 웃으면서 가야 될 거 아니에요. 우리가 지금 다라니를 열심히 독송하고, 42수를 지극하게 하는 이유는 웃으면서 살고, 웃으면서 살다가 웃으면서 가려고 하는 겁니다. 그러면서 부처님처럼 다음 생에 웃으면서 올려고 하는 거잖아요. 부처님이, -지금 우리 관세음보살님이신가요?- 모셔져 있는데, 웃어요? 울어요? 슬플 때 보면 우는 거 같고, 기쁠 때 보면은 웃는 거 같아요? 항상 웃고 계시죠, 미소를 짓고 계시죠. 그 미소는 아무 바람이 없는 그런 웃음인데, 저기까지 가려면 오래 걸리겠지만, 적어도 오늘 가셔가지고 이제 화장 지우잖아요. 화장 지울 거죠? 선크림 지워야 할 거 아닙니까? 저도 아침에 선크림 바르고 왔거든요. 어제 그제 제주도 연수를 갔다 왔는데 햇빛에 너무 많이 그을러 가지고 얼굴이 시커멓게 탔어요. 지금 선크림 발라서 이 정도예요. 그러면 선크림을 싹 지우면서 어떻게? 거울 보면서 이렇게 웃어야죠. 그리고 파운데이션을, -별 걸 다 알죠, 스님이,- 파운데이션 하면서 웃으면서 하세요. 근데 파운데이션 하면서도 인상을 쓰고 해. 그러니 이게 팔자가 바뀌겠냐고요, 운명이 바뀌겠냐고요. 웃어야지 운명이 바뀌거든요. 웃을 수 있죠? 연습하실 거죠? 42수, 첫 번째부터 42번째까지 다 우리에게 도움 되는 가르침, 진언이에요. 첫 번째는 뭐예요? 잘 살게 해달라는 거예요. 부자로 살게 해달라는 얘기예요. 첫 번째 진언은. 가난하게 살면 아무것도 안 돼. 이 사바세계는. 첫 번째가 부자로 살게 해달라. 거기부터 모든 장애가 사라지게 해달라, 눈을 맑게 해 달라, 장수하게 해달라, 모든 장애를 없애달라, 마귀 마구니를 없애 달라. 그 진언 하나하나가 다 우리에게 소중한 겁니다. 그거를 의지해서 우리는 있으니까, 너무 근심 걱정하지 마시고. 지금 네 가지를 했는데도 불구하고, 하나는 일념으로 하고 또 하나는 뭐예요? 진심으로 하고, 또 하나는 긍정적인 마음으로 하고, 마지막으로 웃으면서 하고, 그래도 해결이 안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야 돼요? 애프터 서비스를 해야죠. 그거는 뭐냐면 진관사 오셔가지고 주지스님을 만나시면 됩니다. 만나셔가지고 “스님, 그때 그 키 큰 스님, 눈썹 진한 스님 있잖아요. 그 스님이 얘기했는데, 했는데 잘 안 돼요. 어떻게 해야 되죠?” 그러면 거기에 맞춤형 처방을 주지 스님께서 딱 주실 거예요. 그러니까 뭐가 걱정이에요? 근심 걱정하지 마시고, 늘 즐겁게 행복하게 맑고 밝게 온화하고 따뜻하게, 그렇게 불자로서 생활하시기를 바랍니다.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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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5월 20일 음력 4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3-05-20
안녕하십니까. 오늘 계묘년 4월 초하루 진관사 신중기도 입재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의 주제는 여래소성법(如來所成法), 여래가 성취하신 법, 여래소성법, 이런 내용인데요. 이 동아시아에서 세 글자가 총칭 명칭이 있어요. 총칭 명칭. 그게 뭐냐면 물건 물자하고 물, 또 도라고 하는 길 도자하고, 또 법이라고 하는 법 법자가 개별 명칭이 아니라 총칭 명칭이에요. 법이다 그러면 전체 모든 것. 도라고 해도 마찬가지고, 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고. 爾時世尊始成正覺이시세존시성정각二行永絕 達無相法이행영절 달무상법立不思議 普見三世입부사의 보견삼세(華嚴經 如來名號品)(화엄경 여래명호품) 그러면 여래소성법, 그러면 여래께서 성취하신 법이 무엇이냐. 화엄경 여래명호품(華嚴經 如來名號品)에 보면, 이시에 세존이(爾時世尊), 이때 세존께서, 부처님께서, 시성정각(始成正覺)하시니,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시니. 그러니까 여래는 성정각이에요. 정각을 이룬 거예요. 여래 성정각. 이게 여래의 소성법이죠. 여래께서 성취하신 법이다. 그럼 정각이 뭐냐. 첫 번째 말씀이 이행이 영절하고(二行永絕), 여래는 두 가지 행위가 영원히 끊어졌다. 이렇게 시작이 돼요. 그럼 두 가지 행위는 뭐냐. 하나는 취행, 취하는 행, 취하는 행이 뭔가. 취할 취자는 구할 구잔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구해요. 구해도 구해도 끝이 없어서, 구하면서 태어나고 구하면서 죽어요. 죽을 때도 대략 우는데 왜 우느냐. 구하던 것이 안 구해져서 울면서 죽는 거예요. 그럼 태어날 때는 왜 우느냐. 뱃속이 좋은데, 그 어렵게 세상에 나와서, 배 속에 있을 때는 탯줄로 숨을 쉬어서 편안했는데, 밖으로 나오니까 자기 코로 숨을 쉬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섭기도 하고 힘도 들고. 왜 우냐. 편안한 걸 그때부터 구하니까 왜 이렇게 어려운 게 많나. 그 공포와 그 불편함 때문에 “와~”하고 우는 거거든요. 그래서 운다고 신기해하는데 신기할 거 하나도 없어요. 다 저 살라고 우는 거예요. 저 살려고. 거기 엄마는 없어요. 인생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 중심이고 엄마한테서 먹고 튀는 거다. 먹으면 도망가요. 안 도망가면 이건 더 큰일이여. -도망간다는 얘기 하니까 이제 마스크가 먼저 도망가려고.- 그러니까 근데 그 취행이 영절하고, 취하는 행위가 영원히 끊어졌어요. 그게 깨달음이에요. 구하는 일이 없어요. 두 번째는 사행이 영절하고. 버리는 행위, 버릴 사자. 인간은 하나 구하면 하나 버리거든요. -축원 계속 했으면 좋겠네. 난 편안히 쉬면 되니까.- 하나 취하면 하나 꼭 버립니다. 그래서 이게 취사가 멈추질 않아요. 한 사람 버리고 또 새 사람 만나고 맨날 이래요. 맨날 이래요. 근데 여래는 취행이 영절하고, 사행이 영절이라. 버리는 행위가 완전히 끊어졌다. 그럼 어찌 돼요. 할 일이 없는 거예요, 세상에는. 세상에는 전부 취행과 사행, 취하고 버리는 일인데 그 일이 끊어졌으면 어떻게 돼요. 할 일 전혀 없어요. 그러니까 할 일이 많다는 거는 전부 번뇌 망상이에요. 알고 살아야 돼요. 어떤 사람은 바빠서 좋다고 그러는데, 바쁜 사람은 번뇌 망상이 제일 많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웬만한 건 취해도 만족 못 하는 성격이거든. 나이가 들어도 계속 인정받으려고. 어떤 사람은 80에도 떨린다고 하더라고. 80에 뭐 하려고 떨어. 아니 80에 떨 일이 도대체 없는데 스스로 떠는 거예요. 그래서 이행이 영절이요. 취하는 행위, 버리는 행위가 영원히 끊어지고, 달무상법(達無相法)이라, 없을 무자, 형상 상자, 법 법자, 무상법을 통달했다. 무상법이라고 하는 건 진여법을 말해요. 흘러도 흘러도 흘러도 참 그대로, 무엇하고 만나도 만나도 만나도 참과 똑같다. 이걸 진여법이라고 하거든요. 진여법을 통달했다. 죽어도 죽어도 죽는 일이 없고, 나도 나도 나는 일이 없는 진여법. 꿈을 꿔도 꿔도 달라지는 일이 없고, 꿈을 안 꿔도 안 꿔도 달라지는 일이 없는 이 진여법을 통달을 했어. 통달이라는 건 의심이 전혀 없다는 얘기죠. 세월이 가고 장소가 바뀌어도 진여법에 대한 의심이 전혀 없어서, 진여법을 항상 눈앞에서 보는 거예요. 이걸 현견진여(現見眞如)라고 그러는데, 현재라는 현자, 볼 견자, 진여법을 현재 항상 보고 있어요. 이게 달무상법이에요. 그래가지고 입부사의(立不思議)하고, 부사의, 아니 불자, 생각 사자, 의논할 의자. 이건 생각할 수 없는 거. 이 번뇌망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법을 가르쳐요. 그게 이제 진여법을 가르치고, 두 가지 행위가 영원히 끊어진 세계를 가르치는 게 이게 부사의법이죠. 그래서 보견삼세(普見三世)라. 과거, 현재, 미래를 통으로 다 본다. 이 보견이라는 건 넓을 보자인데, 통째로. 지나간 일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흔적도 없거든요. 현재도 한 백 년 지나가면 흔적도 없어요. 그럼 백 년 후에는 뭔가. 역시 현재와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그냥 눈앞의 것만 보는 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통째로 다 봐. 이걸 보견삼세라고 그래요. 이 경지에 올라갈 분을 성정각이라고 한다. 정각을 이뤘다고 한다. 이렇게 화엄경 여래 명호품에서 몇 구절로 설명을 했어요. 一切凡夫 無明業相 見聞覺知일체범부 무명업상 견문각지 三界輪迴 無有息止 삼계윤회 무유식지 그러면 정각을 이루지 못한 범부는 뭐냐. 일체범부(一切凡夫)는 무명업상(無明業相)이라고 그러는데, 무명은, 무명업상은 번뇌망상이라는 소리예요. 무명은 어리석음인데, 뭔 어리석음인가. 이 진여법을 모르는 걸 무명이라고 그래요. 시장에 가서 뭐 물건 사고 이런 거 모르는 게 아니라 진여법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그런다. 밝음이 없다. 이 진여법을 모를 때는 이 구하고 버리는 일이 계속돼요. 진여법을 모르기 때문에. 무상법을 모르니까 구하지 않으면 못 살고 버리지 않으면 못 살아요. 그래서 뭐 청소는 할수록 좋고, 이거 뭐 티끌 묻히는 건 안 할수록 좋은 거 아니에요. 이렇게 돼서 이거 안 하면 못 살아요. 그래가지고 무명업상으로, 무명업이라는 건 어리석게 계속 취하고 버리는 업의 행동으로, 견문각지(見聞覺知)를 하는데, 이 계속 구할 때는 눈으로 구하고 이게 견이요 견. 눈으로 가면 그냥 그냥 보는 게 아니에요, 눈으로 보는 거는. 내가 아는 건가 모르는 건가, 좋은 건가 나쁜 건가, 항상 눈으로 그걸 살피는 거예요. 누가 딱 지나가면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인가. 그럼 과거에 만났던 사람은 아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고, 못 만났던 사람은 모르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잖아요. 근데 항상 눈으로 구하는 게 이게 무명이 하는 일이에요. 또 듣는 것도 항상 귀로 들어요. 저 아는 소린가 모르는 소린가, 좋은 소린가 나쁜 소린가. 이게 견문, 다 무명업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무명뿐이에요. 왕이 하나 있으면 그 왕이 밑에 사람들을 다 시켜서 왕업을 달성하는 것처럼, 무명이 있으면 그 무명이 견문각지를 통해서 무명업을 이루어가요. 이게 범부의 하는 일이거든요. 그다음에 이제 각이라는 게 있어요. 각은 비각, 코로 느끼는 거, 냄새 맡는 거. 비설, 혀로 느끼는 거. 신, 몸 전체로 느끼는 거. 그래서 이제 코로 구하고 맛으로 구하고 몸 전체 촉감으로 구하고, 전부 구하는 행위에요, 이게요. 또 지는 과거에 경험했던 거, 다 알고 있고, 현재의 견문각 하는 거 다 판단하고 있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부 계산하고 있고, 이게 지각이란 말이죠. 지각. 그래서 전부 느끼는 거예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지각. 그러면 이 느끼는 거는 특징이 뭐냐 하면, 전부 밖에 거를 느끼는 거예요. 밖에 거. 보는 것도 밖에 것 보지요. 듣는 것도 밖에 거 듣죠. 느끼는 것도, 전부 코로 느끼는 것도 밖에 거 아니에요. 근데 여기 이제 역할은 조금씩 달라. 성격이 달라. 시각하고 청각은 떨어져야 느껴요. 이게 이이라고 둘은 떨어져야 된다. 그런데 후각하고 미각하고 촉각은 붙어야 느껴요. 이건 합삼이라고 그러는데, 이이합삼, 둘은 떨어져서 느끼고 셋은 합해서 느낀다. 이 지각은 전부 이제 분별해서 느끼는 거죠. 분별. 이렇게 돼서 진여법을 모르기 때문에 전부 생멸법의 노예가 돼요. 죽고 사는데 노예가 돼버려. 그래서 항상 삼계에 윤회(三界輪迴)를 하게 돼요. 욕계, 색계, 무색계. 돌고 돌아. 그래가지고 그 돌고 도는 일이 끝나지를 않는다. 무유식지(無有息止)라.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견문각지 무명업상이 딱 멈춰져서, 그 견문각지에 묻혀져 있던 지혜가 활짝 드러나면 거기에 이제 진여법을 알게 되고 이행이 영절하게 돼요. 奉佛佛子 信心堅固 修福勤學봉불불자 신심견고 수복근학 天上人間 福德具足 천상인간 복덕구족 그런데 봉불불자(奉佛佛子)는, 이렇게 삼계에 윤회하는 범부 중에서도 부처님을 잘 친견하고 부처님 법을 받드는 불자는 신심이 견고(信心堅固)해요. 그 무슨 신심이냐. 여래의 깨달은 진여불성, 진여불성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고 또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이 견고해요. 이제 중생들이 잘못해도 벌 안 받는다. 이 믿음이 굉장히 강해요. 그래서 죄 중에 모르는 죄가 제일 큰 죄다 이러고. 벌 중에 괘씸죄가 큰 벌이다 이러고. 그러니까 뭘 모르느냐. 인과를 믿지 않는 게 큰 이게 어리석음인데. 그래서 맨날 술 먹고 놀아도 술이 안 취하기를 맨날 바래요. 근데 그만 먹으라면 화내요. 하나도 안 취했다고. 그게 이제 인과를 모르는 거죠. 그리고 자기 인생이 자기 마음에서 오는 걸 안 믿고, 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걸로 알고, 자기 부모에게서만 오는 걸로 알고, 자기 시절 운수에서만 오는 걸로 알고, 이거는 진여불성을 안 믿는 거거든요. 인과응보를 안 믿고, 진여불성을 안 믿으면 그게 무명업상인데. 봉불불자들은, 부처님을 잘 받드는 불자들은 이 진여불성과 인과응보에 대한 신심이 견고해. 견고하다고. 술 취하기 싫으면 술을 안 먹고, 조금만 취하고 싶으면 조금만 먹고, 이게 인과응보거든요. 다른 사람한테 존경을 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존경을 하고, 무시를 당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먼저 무시를 하고. 그런데 저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는 거는 이거 인과응보를 안 믿는 거예요. 전혀 안 믿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은 한 번 죽으면 그만이다 이거는 진여불성을 안 믿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한 개인이 죽거나 살거나 상관없이 그대로 참 그대로가 여여하게 돌아가는 법이 있는데, 참 그대로 여여한 법이 있다는 걸 안 믿어.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다 이거예요. 내가 죽어도 지구는 돈다. 나 죽는다고 지구가 안 도는 거 아니거든. 그래서 이런 인과에 대한 신심과 진여법에 대한 신심이 강해서 수복을 근학(修福勤學)이라, 복을 닦는 일을 부지런히 배워. 이게 봉불불자들이 하는 일이에요. 좋은 일을 하면 복이 생기고 나쁜 일을 하면 죄가 생기는데, 좋은 일 하는 이 복을 닦는 법을 부지런히 배우면 그게 봉불불자예요. 그리고 천상인간(天上人間)에서 이 사람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에 떨어지질 않고, 봉불불자는 인간이 아니면 천상에 난다. 인천복을 받는다 이거지. 인천. 사람이 이게 인간 세상에 다시 환생 하는 것도 이게 그냥 쉽게 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육도 윤회를 볼 때 이게 로또 맞은 일과 마찬가지라니까요. 인간에 태어났다는 게. 인간은 로또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가 있는데 그중에서 인간에 태어났단 말이에요. 그런데 다시 인간에 태어난다는 거는 노력하지 않으면 안 돼요. 또 인간보다 더 나은 천상에 태어난다는 거는 더 좋은 거죠. 이게 인천복락인데, 복 복자, 즐거울 락자. 이 복 닦는 일을 부지런히 배우면 천상 아니면 인간에 환생한다. 이런 걸 환생. 더 이제 염불 잘하면 극락에 왕생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일은 환생 아니면 왕생을 원해야 되는 거예요. 극락세계에 가는 건 왕생이라 그러고, 인천 세상에 다시 오는 건 환생이라 그런단 말이에요. 一切菩薩 般若觀照 現見佛性일체보살 반야관조 현견불성 無有恐怖 遠離妄想 무유공포 원리망상 그러면 일체보살(一切菩薩)들은 어떻게 되냐. 일체 보살은 이 무명심 거기서 보리심으로 넘어가는 반야심이 있는데, 무명심은 그냥 견문각지를 계속하는 거고, 이 반야심은 볼 관자, 조명이라는 조자, 관조(觀照)라고 그래요. 무슨 현상이 나타나면 무조건 쫓아가서 구하는 게 아니라 이걸 바라봐.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응당히 이와같이 보라.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그게 보살이에요. 오온이 다 불생불멸임을 조견한다. 비춰본다. 보살은 뭐든지 뭐가 나타나든지 관조를 해요. 보는 걸 해요. 이걸 택법관조(擇法觀照)라고 그래요. 하늘이 보이면 하늘을 관조하고, 땅이 보이면 땅을 관조하고, 죽고 사는 게 보이면 죽고 사는 걸 관조하고. 이 법을 간택을 해서 가려서, 지금 이 법당 기둥을 내가 딱 본다. 법당 기둥을 보는 건 이건 택법이에요. 가릴 택자, 법 법자. 가린다는 말은 선택이란 말이죠. 법당 기둥을 내가 딱 선택을 해서 ‘저 기둥의 실상이 뭔고’ 보는 거예요. 그럼 생로병사를 느끼면, 생로병사를 딱 선택을 해서, 생로병사는 법이고 선택한다는 것은 가리는 건데 간택이란 말이지. 가려낼 간자. 이게 뭐든지 눈앞에 나타나면 그 눈앞에 나타난 거를 선택을 해서 지목을 해서 딱 생각을 멈추고, 생각 이전의 생각으로 그걸 봐요. 그래서 생각으로 보는 걸 망념이라고 그러고, 망념, 허망할 망자.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상태로 보는 거를 정념(正念)이라고 그러거든요. 바를 정자, 생각 념자. 거기에 어떤 자기 생각을 붙이지 않고 생각 이전의 생각으로 딱 본단 말이야. 이게 정념관조다. 이 정념관조라는 말은 강원에서 가르치는 절요라는 책이 있는데, 절요 서문 부분에서 딱 강조한 말이 <정념 관조하라>. 정념관조하면 금방 깨닫게 돼요. 뭐든지 눈앞에 나타날 때 그걸 딱 선택을 해서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그대로 여여한 마음으로 본다. 본다. 그러면 처음에는 물질을 봤는데, 나중에는 그 물질 속에서 눈을 감지도 않은 상태에서 진여불성을 보는 거예요. 이걸 현견불성(現見佛性)이라고 해요. 처음에는 이 찻잔을 봤는데 이걸 정념으로 딱 관조를 하고 있어요. 이 찻잔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여기서 진여 불성을 봐요. 이 그릇을 보는 게 아니라. 이게 반야관조예요. -이런 소리 하면 또 어렵다고 짜증 내면 안 되는데. 짜증 낼 수도 있지.- 그래서 택법관조하면 현견진여라. 이게 묘법이에요. 뭐든지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걸 정념으로 딱 선택해서 관조하면 거기서 진여불성이 보이지, 다른 게 보이질 않아요. 왜냐하면 일체 만상에는 진여불성밖에 없거든. 다른 거를 보는 거는 전부 전도몽상이고 망상 집착으로 다른 걸 보는 거다. -무슨 소리인지. 참. 심오한 것도 같고 헛소리도 같고 그렇죠.- 진여불성뿐인데, 다른 여러 가지 분별상을 보는 거는 전도몽상으로 보는 거다, 이 소리예요. 그게 반야심경에서 보는 거 아니에요, 전도몽상. 전도라는 건 뒤바뀐 거. 있는 데서 있는 거 찾는 거 이걸 전도라고 그래요. 기우멱우(騎牛覓牛). 소를 지금 타고 있는데 기우, 소 탈 기, 다시 또 소를 찾아. 소를 탄 상태에서 소를 찾아 그걸 멱우라고 하거든요. 그런 걸 전도라고 그래요. 자기 집에서 자기 집 찾는 거, 해탈 속에서 해탈을 찾는 거, 이런 걸 전부 전도몽상이라 그래요. 그러면은 무유공포(無有恐怖)하고, 그렇게 현재 물건 속에서 진여불성을 보면 공포가 없어요. 그 무유공포는 뭐냐. 공포라는 거는 다섯 가지 공포를 화엄경 환희지품에서 설명을 하는데, 첫째는 전도망상, 몽상으로 불안에 대한 공포가 있어. 살지 못할까 하는 공포. 내가 못 살면 어떡하나. 그다음에 악명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나한테 무슨 악명이 들러붙어서 나한테 나쁜 소문이 나면 어떡하나. 그다음에 사망 공포가 있어요. 죽으면 어떡하나. 이게 무명업상으로 살아가는 범부중생의 공포거든요. 그 다음에는 타악도에, 내가 내생에 악도에 떨어지면 어떡하나, 이런 공포가 있어요. 그런 사람은 더러 있더라고. “아니 내생에 내가 나쁜 데 가면 어떡하죠?” 그런 공포심이 일어나면 다른 방법 없어요. 경을 자꾸 읽으세요. 염불을 오래오래 하세요. 그러면 악도에 떨어질 염려가 하나도 없어요. 근데 경도 안 읽고 염불도 안 하고 악도에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만 하면 그 사람 반드시 악도에 떨어져요. 걱정 근심으로 악도를 면하는 게 아니에요. 간경, 염불로 악도를 면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대중공포가 있어요. 대중공포. 이 많은 사람 중에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많으면 어떡하나, 이게 대중 공포거든. 그런 거 하나도 걱정할 거 없지. 자기가 이 일체 현상에서 진여불성을 보고, 허망한 걸 구하지 않고, 진실에 대한 정진을 해나가는 사람이 대중이 두려울 게 뭐가 있어. 대중이 두렵다는 거는 자기의 진실성이 없을 때 대중이 두려운 거예요. 자기 진실성을 갖춰야지, 자기 진실성을 갖추지 않고 대중을 기준으로 해서 잘난 대중이 있고 못난 대중이 있다고 그러면, 잘난 사람은 두려워하고 못난 사람은 오만하고 그게 절대로 아니에요. 자기 진실성을 갖춰라. 그럼 대중은 없다. 언제나 자기 진실성뿐이다. 이런 다섯 가지 공포가 없다고 그래서 무유공포라고 그래요. 무유공포. 그다음에 원리몽상. 원리전도몽상이라는 같은 말인데, 있는 건 싫어하고 없는 건 구하고 이런 게 다 몽상이거든요. 자기는 한 사람 뿐이여. 근데 얼굴 보고 자기 모습을 자꾸 고치고 싶어. 그건 몽상이에요. 자기 현재 있는 모습이 뭐가 어때서. 현재 있는 모습으로 보지를 못하나, 듣지를 못하나 뭐가 어떻다는 거예요 도대체. 그런 걸 다 멀리 여읜다. 그걸 보살이라고 한다. 원리몽상 무유공포 이게 보살이에요. 그러면은 도대체 여래는 어떻게 해서 여래가 됐을까. 여래하고 범부하고는 종자가 다른가. 여래될 종자는 따로 있고 범부될 종자는 따로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해결한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중생과 부처가 어떻게 다르냐. 이런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어떤 스님이 3년 동안 경상북도 봉암사 있는데, 그 문경 쪽 학가산이라고 있고 보문사라고 있는데, 거기로 고려시대 목우자 지눌스님이 화엄경을 짊어지고 들어가서 학가산 보문사에서 3년 동안 화엄경을 보다가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 이 구절을 만나서, “아! 중생과 부처가 본래 다른 게 아니다.” 이걸 깨달았단 말이에요.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그냥 철철 눈물을 흘리고 그 책을 머리에 이고 하염없이 돌았다. 이게 구도의 기쁨이거든요. 도를 구하는 기쁨이 있어. 이 기쁨이 극한에 올라가면 울어요. 좋아 좋아. 이건 극도에 못 간 거예요. 좋다는 말도 안 나오고 눈물부터 나와. 근데 요새는 울면 너 미쳤나 이럴까 봐. 왜 우노 이럴까 봐. 그럼 안 통하는 거지. 좋아 좋아하는 건 그건 껍데기요. 껍데기. 진짜 좋으면 운다고. 無一衆生 而不具有 如來智慧무일중생 이불구유 여래지혜但以妄想 轉倒執著 而不證得단이망상 전도집착 이불증득若離妄想 一切智 自然智 無礙智則得現前 약리망상 일체지 자연지 무애지즉득현전(華嚴經 如來出現品)(화엄경 여래출현품) 그래서 이 중생과 부처가 이게 다른 게 아니로구나 하는 것이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말씀이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 뭔 말이 있냐면, 한 중생도, 어떤 한 사람의 중생도 무불구유 여래지혜라(無一衆生 而不具有 如來智慧), 여래의 지혜를 갖추어 있지 않은 이는 없다. 여래의 지혜가 다 갖추어 있다는 거예요. 여래의 지혜가. 다 갖춰져 있는데, 단이망상 전도집착(但以妄想 轉倒執著)으로, 망상과 전도와 집착으로 이불증득(而不證得)하나니라. 그 여래의 지혜를 증득하지 못하느니라. 증득이란 그냥 얻는 거예요. 자기가 깨달아서 얻는 거. 그러니까 여래 지혜가 다 있는데 그걸 못 깨닫고 못 얻는 것은 거기서 세 가지를 얘기했어. 망상, 전도, 집착. 그것 때문에 못 얻는다. 그러니까 망상 전도 집착만 없으면 다 열렸다 이 말이죠. 아 이게 “중생심이 바로 부처다”라는 말이 여기 있구나. 그래가지고 그냥 그냥 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 그래서 이 선과 교의 문제가 다 해결됐어. 선에서는 마음을 얘기하고 교에서는 부처를 얘기하는데, 이 마음과 부처가 조금도 다름이 없구나. 이래가지고 그다음은 약이, 만약 여읜다면, 뭘 여의어요? 망상. 약리망상하면, 만약 망상을 여읜다면, 일체지와 자연지와 무애지가 즉득 현전하나니라(若離妄想 一切智 自然智 無礙智則得現前). 즉득이라는 거 곧 현전함을 얻는다. 현전이라는 건 앞 전자도 이게 나타날 전자고, 나타날 현자도 나타날 현자고. 앞에 뒤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냥 나타나는 거예요. 시방삼세가 없이, 과거 현재가 없이, 동서남북이 없이, 그냥 나타나는 걸 여기서 현전이다 이러거든. 그러면 일체지(一切智), 모든 지혜, 또 자연지(自然智), 이 지혜라는 게 어디 쌓아놨다가 컴퓨터처럼 입력해야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그냥 허공에서 바람 불듯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지혜를 자연지라 그래요. 일체지, 뭐든 지, 뭐든 지혜, 자연지혜. 또 무애지(無礙智), 걸림이 없는 지혜라. 이 세간지라는 거는 가는 데마다 이 지혜의 용도가 달라서 가는 데마다 배워야 돼요. 이쪽에서 배운 거 가지고 저쪽에서 안 통해요. 그래서 공자라는 사람도 영리한 사람인 게, 사당에 들어가서 예법을 논하는데, 그 공자가 유명한 지식인이니까 사당에 들어가서도 예법을 잘 알 것이다 이랬거든. 제사 지내는 공간에. 그런데 딱 가자마자 거기 사당 집사한테 하나하나를 물었어요. 요건 어떻게 합니까. 요건 어떻게 합니까. 요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이게 완전히 빗나간 거예요. 공자는 다 알 줄 알았는데 그걸 집전한 사람에게 하나하나 묻는다. 그게 어떻게 공자가 예를 안다고 하는 것이냐 그러니까, 공자가 그런 말을 했어요. “사당에 들어가서는 사당법을 묻는 것이 예법이다.” 이게 무애지라는 거야. 무애지. 걸림이 없어. 이 세상 건 그런데 제 방식대로 했다간 다 걸려요. 그거 물으면 어때. 얼마나 좋아. 이거 뭐냐. 이게 무애지가 되려면 어느 곳에 가든지 안 통하는 게 없는 거죠. 안 통하는 게 없는. 그리고 요새 나이 많은 시어머니들이 시어머니 방식대로 며느리한테 얘기하면요, 그 큰일 나요. 30년 전의 법이 지금 통할 수가 없어요. 근데 습관적으로 잔소리 하는 수가 있거든. 그건 자기가 몰라서 그래요. 모르면 잔소리하고, 알면 배운다. 얼마나 좋아. 요건 어떻게 하는 거냐. 요건 어떻게 하느냐. 아니 며느리한테 배우면 좋잖아요. 유명한 공자가 사당에 가서 집사한테 다 물었는데. 나도 한 십몇 년 전에 제등 행렬할 때는 저 기름으로 만든 초를 불에 붙여서 들고 다녔거든. 근데 요새는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고. 옛날식으로 제등 행렬하니까 초 사서 초 준비하라고 그러면 그거 통하겠어요? 안 통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무애지는 항상 걸림이 없어야 돼. 그냥 그 당시에 가장 좋은 거를 늘 쓰는 거지. 그게 이제 그런 게 바로 현전한다 나타난다 이거거든요. 근데 이제 이런 말씀이 이 조사의 교법에서는 여래지혜라는 말보다 일념심법이라고 그래요. 한 생각 마음 법. 일념심법이 있다. 한 생각이야. 한 생각. 이거는 과거 현재 미래 삼세도 없고 동서남북 사방도 없고 언제나 일념심법이다. 근데 이거는 항상 평등하고 항상해. 그래서 이걸 평상법이라고, 평상심법. 순서가 없어요. 평등이. 또 변화가 없어요. 그래서 이걸 평상이라. 도가 뭐냐 평상심이 도다.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죽고 사는 것도 없고, 그냥 평상. 평상심법. 그리고 무사심법이란 말을 써요. 무사심법. 일이 없어. 생로병사도 없고 흥망성쇠도 없고, 부귀영화도 없고 온갖 고뇌, 장애도 없고. 이런 게 전부 일인데, 그 심법에는 평상심법, 무사심법이다. 무사, 일없는 마음법이다. 그래서 이걸 하나 딱 증득하면 할 일이 전혀 없는 거죠. 이걸 요사범부(了事凡夫)라고 그래요. 일을 다 수료한 범부다. 내가 뭐 내 모습이 갑자기 뭐 관세음보살되고 문수보살되고 석가모니 된 게 아니에요. 범부요 범부. 그냥 눈 코 입 다리, 감기 오면 감기 앓고, 여름 되면 땀 흘리고, 그냥 범부여. 근데 이 무사심법을 하나 떡 증득하면 요사범부다, 일을 다 해 마쳤다. 두려운 일도 없고 잘못되는 일도 없고 요사범부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또 조사 가르침이에요. 그걸 조사선법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 동아시아에서는 조사들의 가르침이 엄청나니까 그걸 외면하면 안 돼요. 뭐 하려고 외면을 해, 그 좋은 가르침을. 그렇게 되면 자연히 일체지 자연지 무애지가 늘 앞에 있다. 이게 무사심법이라는 거죠. 일 없는 마음법이다. 그걸 증득하면 요사범부가 된다. 일을 다 해 마친 범부가 된다. 이런 말이죠. 그럼 이렇게 여래의 가르침에 대한 믿는 신심을 한 번 일으키는 순간에 여래가 떡 앞에 나타나시는 거예요. 이걸 강림이라고 하고 출현이라고 그래요. 여래가 강림하셨다, 오셨다 이거지. 출현하셨다 나타나셨다. 그러면 여래교법에 대한 신심을 일으켰을 때 여래가 강림하고 여래가 출연하지, 안 일으키면 안 나타나요.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은 다른 날이 아니라 여래 교법에 대한 신심을 일으킨 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다. 또 여래를 믿는 그 신심을 일으켰을 때 여래를 보게 돼요. 여래에 대한 신심이 일어났을 때 여래를 보는 거지, 신심을 안 일으켰을 땐 여래를 못 봐요. 그리고 여래에 대한 믿음을 일으켰을 때 스스로 여래가 되는 날이다. 이걸 자성정각이라 그래요. 스스로 정각을 이룬다. 今日是好日 如來出現日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 날今日是好日 如來親見日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뵙는 날今日是好日 自成正覺日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되는 날 그래서 오늘 4월 초파일이고, 부처님 오신 날 법문은 진관사에서 할 수도 없고 저기 창원에 우리 상좌 절에 가야 돼요. 상좌 오라는 데는 여기보다 더 무서워요. 안 가면 안 돼요. 그래서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 늘 하는 법문인데, 부처님 오신 날은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일으켰을 때 오시는 거다. 그래서 이걸 한문으로 만들면 금일은 시호일(今日是好日)이다. 오늘은 뭔 날이냐.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일으킨 날. 금일은 시호일이니 여래 출현일(如來出現日)이다. 여래가 출현하는 날이다. 금일은 시호일이니, 오늘은 좋은 날이니, 여래 친견일(如來親見日)이다. 여래를 친견하는 날이다. 금일은 시호일이니 자성정각일(自成正覺日)이다. 스스로 정각을 이루는 날이다. 신심 하나로 친견도 하고 스스로 이루기도 하고 강림한 것을 느끼기도 하고 다 해요. 심심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우리 말로 여러 사람들이 하는 말인데,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뵙는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되는 날>, 이런 거거든요. 이제 저하고 여러분들하고 같이 한번 읽어요. 오늘은 좋은 날, 오늘은 제가 읽으면 여러분들은 좋은 날, 부처님 하면 오신 날, -그 기억을 해야 되는데,-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뵙는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되는 날, 기억하시겠어요? 제가 먼저 읽어볼까요?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뵙는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되는 날!” 참 좋네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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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중기도] 4월 20일 음력3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큰스님 2023-04-22
如來 所說法(여래 소설법)--如來說法 隨機接引 種種敎說 成就衆生----여래설법 수기접인 종종교설 성취중생-- 안녕하십니까. 계묘년 3월 초하루 진관사 신중기도 입재라 하더라고요. 나는 초하루밖에 몰라요. 하여튼 초하루 신중기도 입재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할 제목은 여래 소설법(如來 所說法),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이다. 여래설법(如來說法)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여래가 왜 설법을 하셨을까. 설법한 목적. 여래가 설법한 목적은 중생을 성취시키는 거예요. 중생성취. 그래서 그것을 성취중생(成就衆生)이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럼 성취가 뭐냐. 중생이 여래와 같이 해탈을 하고, 중생이 여래와 같이 열반을 얻는 거거든요. 해탈 열반. 그럼 해탈이라는 거는 뭐냐. 무장무애. 아무 장애가 없는 걸 해탈이라고 그래요. 몸의 장애, 마음의 장애, 물질의 장애. 그래서 해탈은 이장(離障)이라, 장애에서 벗어나는 거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원만구족이에요. 원만구족. 원만하게 다 갖추어진 것을 열반이라고 하거든요. 무장무애 원만구족. 이거를 석가모니가 얻었는데, 그것을 다른 범부중생도 다 얻도록 하는 것이 중생을 성취시키는 거거든요. 성취중생. 그럼 어떤 방법으로 하냐. 내용은 해탈 열반인데, 방법은 그 법문을 듣는 중생에 따라서, 법문 듣는 중생을 어려운 말로 당기 중생이라, 당기(當機). 당자는 해당할 당, 기자는 근기라고 하는 근기 기, 기계 기잔데, 사람도 기계와 같이 그 성능, 용심, 희망이 다르다. 그래서 그 기계에 비유해서 근기(根機) 이러거든요, 뿌리 근자 써가지고. 그 법문을 지금 듣고 있는 사람이 당기 중생이에요. 해당하는 근기 중생이라고요. 그 당기 중생에 따라서 그 중생이 도움이 될 만한 법을 설해요. 그 중생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법은 안 설해요. 근데 뭘 하든지 석가모니는 해탈 열반 외에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중생에게 도움이 될 법을 설한다, 중생이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법을 설한다. 그래가지고 그거를 방편설법이라고 하거든요. 방편이라는 건 서로 통한다는 소리예요. 접근한다 이 말이거든. 방법은 방편 설법을 하는데, 목적은 해탈 열반이에요. 그래서 해탈 열반에 방해되는 말은 일체 안 하셔요. 그걸 무기법(無記法)이라고 그래요. 말하지 않는다고. 기록할 기자. 기록을 안 해요. 기록은 말인데, 말을 안 해요. 석가모니는 무슨 말을 해도 해탈 열반에 필요한 말만 하시지, 다른 말은 안 하셨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래서 그 유명한 비유가 독전(毒箭) 비유인데요. 독화살 비유.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는데, 그 독화살을 맞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뭐냐. 독화살을 빼내고 그 독이 몸에 퍼진 걸 치료해서 본래 사람으로 돌아가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화살을 빼내지 않고 연구부터 해. 이 화살 종류가 뭐며, 독기가 뭐며, 어떤 사람이며, 그러면 그 사람은 죽는다. 그래서 중생에게도 해탈 열반이 필요하지, 이것저것 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래서 독전유(毒箭喩), 해탈 열반, 방편 설법. 그런 것을 가지고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여래설법은 수기 설법이다. 근기에 따라서 설법을 한다. 설법을 해가지고 그 해탈 열반으로 인도를 하는 거예요. 수기접인(隨機接引)이라. 잡을 접, 인도할 인, 잡아서 인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종종교설(種種敎說)로, 가지가지 교설로 성취중생이라, 중생을 성취한다. 그래서 여래설법은 그 말을 듣고 해탈 열반을 이루는 게 중요해요. 말에 머무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가지고 비유가 있어요. 월타추담계영한(月墮秋潭桂影寒)인데, 월, 달이, 추담, 가을 연못에, 타, 떨어졌다. 그래서 연못을 이렇게 들여다 보면 연못 안에 달덩이가 훤하게 있거든요. 근데 이게 월타추담인데, 계영이라고 하는 건 계수나무 계자, 그림자 영자, 달에 계수나무가 있어요. 지금 달나라 가 보니까 없지만, 달나라 가기 전에는 계수나무가 항상 있었어요. 그래서 계수나무 그림자가 그게 달이에요. 계수나무 그림자 달은 저 허공에 차디차게 지금 분명히 있는 거예요. 그런데 월타추담이요. 달은 또 가을 연못 속에 떨어져서, 가을 연못이라고 하는 것은 제일 맑은 연못을 가을 연못이라고 하거든요. 물이 맑게 보일 때가 가을이에요. 그 이상하잖아요. 분명히 연못 속에 달이 떨어졌는데, 분명히 하늘에 달이 그냥 차디차게 있어. 계영이 차. 이게 여래설법이다. 그 달이 연못 속에 떨어진 것은 비유로 설법하는 것이고, 그 하늘의 달이 분명하게 있는 거는 해탈 열반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걸 잘 모르고 입수 착영(捉影)하면, 달 그림자가 연못 속에 보이니까 그 연못 물에 들어가서 입수란 말이죠. 입수 착영을 해. 그림자를 잡아. 잡을 착자가 있고 그림자 영자가 있는데, 달 그림자가 물속에 보이니까 물에 들어가서 그림자를 잡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종부득(終不得)이라. 마침내 그 그림자를 잡을 수가 없다. 如來說法 敎相判釋여래설법 교상판석如來說法 時別分釋여래설법 시별분석五乘判釋오승판석1.人天乘 2.聲聞乘 3.緣覺乘 4.菩薩乘 5.佛乘1.인천승 2.성문승 3.연각승 4.보살승 5.불승 그러니까 설법을 딱 들으면 그 설법에 맴돌면 어리석은 거고, 그 설법에서 가리키는 해탈 열반을 얻는 게 중요해요. 얻는 게. 그런데 중생들은 지혜로 해탈하는 것보다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 습관화돼서, 모든 걸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역사가 오래되면서 불교의 내용이 뭐냐. 해탈을 하려고 안 하고 내용 분석을 많이 했어요. 그 내용 분석을 하는데, 내용 분석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20세기서부터 출발한 건데, 역사가 아주 짧은데 시별분석(時別分釋)이라고 하는 게 있어요. 시별분석, 시대별로 분류해서 여래설법을 해석한다. 시대별로, 이게 시별이거든요. 때 시자, 다를 별자. 분석이라는 거. 분류를 해요. 여래설법을 나누어서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게 이제 20세기서부터 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칠 때 이걸 가르쳐요. 그래서 대학 불교하고 사찰 불교하고는 달라요. 사찰 불교는 실천해서 공덕을 이루는 게 사찰 불교인데, 대학 불교는 분석해서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게 생명이에요. 그러나 대학이 망하면 불교도 거기서 없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유교도 향교에 있다가 대학으로 다 들어갔는데, 대학에서 유교 과목이 폐강이 되니까 그냥 끝났어요. 근데 불교는 절에 있다가 대학으로 다 안 갔어요. 그래서 남아있는 거예요. 뭔 말인지. 그래서 일본에서 <20세기 불교학이 흥하면 불교는 쇠약하고, 20세기 불교학이 쇠약하면 불교는 흥한다.> 이런 말을 했어요. 그게 사실이에요. 그럼 어떻게 되냐. 여래가 세상에 계시고, 여래가 세상에 계신 후 한 100년까지를 초기불교라고 하는데요. 초기불교가 없었다면 그 후에 여러 부파가 일어나는데 부파불교는 없었을 것이고, 이게 시별 분석이에요. 시대별로 분석하는 거. 또 온갖 부파가 서로 논쟁을 하고 서로 다툴 때, 그 부파불교가 없었다면 반야 불교는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 부파에서 논쟁하는 것을 싹 쓸어서 반야 공으로 전부 다 통일시킨 게 용수거든요. 그 반야 불교가 없었으면, 또 유식 불교가, 오직 생각이라고 하는 유식 불교가 없었을 것이고, 유식 불교가 없었다면 여래장 불교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반야 유식 여래장, 또 초기, 부파 이런 거를 시대별로 쭉 분류를 해서 이걸 연구하는 게 교리 발달사에요. 이런 것만 가르쳐요. 그래서 처음 이걸 배우면 눈이 휘둥그레서, 절에서 수리수리 마수리 하는 거 하고 전혀 틀리거든. 그래가지고 여기에 뭐가 있는 줄 알아요. 그래서 막 강의도 듣고, 논문도 써보면, 역시 들어갈 때도 생각이 없고 나올 때도 생각이 없고, 마음은 항상 아는 게 많을수록 허망해요. 이런 게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학문적으로 불교를 연구해서 저술을 한 30권, 50권 냈는데 죽는 순간이 돌아왔어. 근데 자기 저술이 옆에 산처럼 쌓였어. 근데 죽을 때 이렇게 자기 저술을 쳐다보면, 저놈은 책더미가 내 죽는 거 하고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여러분 그거 알아요? 자기가 그냥 책을 100권, 70권, 50권, 30권, 열 권 이상 저술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숨넘어갈 때, 숨이 똑 떨어지려고 할 때, 내가 어디로 가는고 할 때, 저놈의 책이 내 죽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니까요. 이거 경험 안 해본 사람 몰라요. 그리고 화가도 마찬가지예요. 자기가 좋은 그림 작품을 많이 남겼어요. 근데 자기가 목숨을, 딱 숨을 거둘 때 자기가 그린 그림이 내 죽음하고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소설가도 마찬가지. 작품을 엄청나게 남겼는데, 자기가 남긴 작품이 자기 죽음에 도움이 안 된다. 이상한 거죠. 지금 평생 남의 다리 긁은 것도 아니고, 헛짓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이미 기력이 다 해서 때는 이미 늦었어. 그런데 또 이상한 건, 그런 고비를 넘기고 다시 깨어났는데도 몸이 조금 좋아지면 또 그 짓 해요. 야, 이게 인생이에요. 그래서 한 번 몸에 습관이 되면 좀처럼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이런 시별분석이 있고, 이거 시별 분석이라는 건 내가 만들어낸 용어인데 어디 출처가 없어요, 이거는. 시대별로 분류해서 해석한다, 이게 시별 분석이거든요. 이게 종범이가 만들어낸 용어예요. 어디 근거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근데 이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불교 분류법이 있는데 이걸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그래요. 가르칠 교, 모양 상, 서로 상자, 모양 상. 판석, 판단할 판, 해석할 석. 이제 시대와 상관없이 이 교리를 보고 판단해서 해석하는 걸 교상판석이라 그러고, 이걸 줄여서 교판이라 그래요. 교상판석을 딱 보니까 부처님이 인천도를 강조한 법문이 있다. 이걸 인천승(人天乘)이라고 하거든요. 사람은 지옥 아귀 축생 삼악도에 떨어지지 말고 인도에 환생하고 천도에 상생하고, 적어도 인천에서는 벗어나지 말아야 된다, 이런 걸 가르쳤어요. 이걸 인천승이라고 그래요. 승자는 간다, 실천한다. 수레 승자인데, 이거 움직이는 거잖아요. 길 도자도 되고, 가르칠 교자도 되고, 실행할 행자도 되고. 인천승이 기본이에요. 그다음에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 늘 부처님을 따라다니면서 공부하던 분을 성문이라고 그래요. 부처님 음성을 듣고 배웠다고. 그분들에게는 고집멸도 사성제법을 가르치고 이걸 성문승이라고 해요. 또 인연을 다 관찰하기 좋아해요. 이걸 연각승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성문승에게는 사성제를 가르치고, 연각승에게는 12인연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제 보살에게는 이게 보살승인데, 육바라밀을 가르쳤다. 그리고 부처님의 세계를 남김없이 아낌없이 바로 말한 설법이 있는데, 이걸 불승(佛乘)이라고 하는데요. 부처가 가는 길, 부처의 길, 부처의 행, 이게 불승인데, 이거를 경으로 보면 화엄경이다, 이렇게 해요. 그래서 보살승은 반야경 이런 거고, 이제 나머지는 다 초기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여러 경전들이 있어요. 그래서 이걸 이제 오승차별이라고 그러는데, 인천승,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불승. 근데 오승이 전부 목적은 해탈 열반이에요. 다만 부처, 이제 나는 이렇게 부처가 됐다. 이건 이제 보살들에게 하는 법문인데, 이렇게 보살행을 닦으면 이렇게 성불한다, 부처님 경지를 이야기하는 게 화엄경의 여래출연품 같은 거고, 세주묘엄품, 이런 게 그 여래의 세계를 바로 말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깨달음이 뭐냐 하면, 화엄경 여래출연품이나 화엄경 세주묘엄품, 여래현상품 이거는 그 깨달은 세계를 이야기한 거예요. 이걸 불승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거를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그러면 이게 사승이잖아요. 그런데 다 이게 인천승은 모두가 해당되니까,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이걸 삼승이라고 그러고, 불승은 부처님 하나의 세계를 말한다고 그래서 일승이라고 그러고. 그래서 항상 이 불교를 이야기할 때 삼승과 일승, 일승과 삼승 이래요. 이게 교상판석이에요. 그래서 경을 딱 보면, ‘아 이거 일승법이구나, 이건 보살승법이구나, 이거는 성문승법이구나, 이건 연각승법이구나’ 알아요. 그게 교판이에요. 그리고 시대별로 분석하다 보면, 책이 딱 나와서 책 보면 ‘이거는 어느 시대 거네’ 이거 금방 아는 게 이게 시판이에요. 그리고 누가 설법을 해도 ‘아 저거는 시대별로 초기불교냐 부파불교냐, 반야불교냐 유식불교냐, 여래장불교냐’ 바로 아는 거죠. 그건 시대별로 분석을 해요. 그런데 이건 불교 아는 사람들이 알아듣는 거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데, 그거 알아봐야 전혀 자기 해탈, 자기 열반에 도움이 안 돼요. 그래서 절에서는 실천과 성취를 이야기하지, 그 분석과 지식을 강조하지 않아요. 그런데 대학에 가면 전부 분석, 지식뿐이에요. 그래서 대학 나오면 끝이에요. 끝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거기에 빠져서 절에 안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상좌가 대학 가면 못 쓴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상좌 대학 가면 못 쓴다. 일제시대 때는 이제 일본식으로 개명한 걸 개명승이라고 그랬는데, 그게 이제 대학 불교를 와서 본 거예요. 개명하고 절에 떡 왔더니 제일 먼저 한 일이 선대에서부터 물려준 법답(法畓)이 있는데, 우리 스승과 제자로 물려가는 논이 있어요. 그걸 제일 먼저 팔더래요. 그래서 개명승은 선매 법답이라, 먼저 법답부터 판다. 이게 이제 지식 불교에 대한 굉장히 비관적인 평가였어요. 나는 심각하게 말하는데 이해가 안 돼서 아무 반응이 없네. 개명 승자는 선매법답이라. 이거 얼마나 당혹한 말이에요. 이 불교의 세속화를 빗대어 말하는 거지. ①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金剛經 正信希有分16)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금강경 정신희유분16)②須菩提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以用布施 是人所得福德 寧 수보리 어의운하 약인만삼천대천세계칠보이용보시 시인소득복덕 영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即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 위다부 수보리언 심다 세존 하이고 시복덕 즉비복덕성 시고여래설복덕多 若復有人 於此經中受持乃至四句偈等 為他人說 其福勝彼 何以故 須 다 약부유인 어차경중수지내지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승피 하이고 수菩提 一切諸佛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皆從此經出 須菩提 所謂佛보리 일체제불 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개종차경출 수보리 소위불 法者 即非佛法(金剛經 依法出生分제8)법자 즉비불법(금강경 의법출생분제8)③如來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誑語者 不異語者 如來所得(所說)法 여래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여래소득(소설)법此法無實無虛(金剛經 離相寂滅分제14)차법무실부허(금강경 이상적멸분제14) ①眞語者 : 二行永絕 十力證得 如己所證 還為人說 진어자 : 이행영절 십력증득 여기소증 환위인설②實語者 : 爲聲聞人 說四諦法 斷三界結 得滅盡定 실어자 : 위성무인 설사제법 단삼계결 득멸진정③如語者 : 爲諸菩薩 說眞如法 如理不謬 故云如語 여어자 : 위제보살 설진여법 여리불유 고운여어④不異語者 : 說授記法 終無差錯 云不異語 (金剛仙論) 불이어자 : 설수기법 종무차착 운불이어 (금강선론) 그런데 본래 불교는 금강경에서 여래는 진어자(眞語者), 실어자(實語者), 여어자(如語者), 불이어자(不異語者) 이런 말이 있는데, 이상적멸분 제14(金剛經 離相寂滅分제14)에서 한 말이거든요. 그럼 여래는 뭘 설했냐. 이게 이제 금강경에서 하는데, 진어자라는 것은 참말을 하는 분이 여래다. 진어, 참 진자, 말씀 어자. 그럼 참말이 뭐냐. 여래는 이행이 영절하고(二行永絕), 두 가지 행위가 영원히 끊어지고. 두 가지 행위는 뭐냐. 취하고 버리는 거, 이거 취하고 이거 버리고, 이거 취사 행위인데 여래는 취사를 안 해요. 그래서 취행, 사행 이 두 가지 행위가 영원히 끊어졌어. 그거 왜 그러냐. 이거 취하고 저거 취하는 것은 무슨 일 때문에 그러냐 하면은, 상에 상이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서 여래가 취사를 안 하는 것은 상에서 상이 없는 진실을 깨달았다. 이걸 통달무상이라고 그래요. 무상을 통달했다. 이게 핵심인데, 여래가 뭘 깨달았느냐. 상에 상이 없음을 깨달았다. 꿈에 꿈이 없고, 죽음에 죽음이 없고, 삶에 삶이 없고, 하늘에 하늘이 없고, 땅에 땅이 없고, 이게 무상법인데 이걸 통달했어요. 근데 이게 상인데(컵을 들어보이시며), 이렇게 보면 상인데, 여기서 무상을 보는 것이 반야지견이에요. 이거를 인식하고 분별하는 것이 의식 분별이에요. 아, 이거 이런 말 조금 오래 하면 조는데. 의식분별로 보면 반드시 이게 그릇이고, 뭐 상인데, 이게 반야지견으로 보면 이건 무상이에요. 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통달 무상을 하면 생사해탈을 해요. 생사에 생사가 없어. 이 무상법을 몰라가지고 이 상에 속아서, -속는 걸 미혹이라고 하거든요.- 이 상에 속아서 온갖 고생을 다 하는 거예요. 장미가 좋다더니 꺾어보니 가시로다. 사랑이 좋다더니 따라가 보니 눈물이다. 전부 이게 상에 상이 없음을 몰라가지고 그런 거예요. 젊음이 오래 안 가는데 무조건 그냥 죽자 사자 쫓아갔는데, 며칠 있으면 젊음도 없어지고, 기쁨도 없어지고, 이 모양으로 이렇게 하는 걸 이걸 생사윤회라고 그래요. 그래서 상에서 상이 없는 걸 깨달으면 생사 해탈이에요. 상에 상이 없는 걸 반야로 본다고요. 그 지혜로, 반야로. 생각으로는 분별하고, 반야는 견공을 해, 공을 봐. 공이라는 건 불생불멸이거든요. 반야로 딱 보면 불생불멸인데, 의식으로 분별하면 저게 형상이야, 형상. 형상만 보지 공을 못 봐. 그래가지고 그 공을 보니까 거기서 뭐가 생겼느냐. 큰 여래의 열 가지 지혜가 생겼어요. 이걸 십력(十力)이라고 그래요. 열 십자, 힘 력자. 지혜는 힘이다. 그래서 십력을 증득(十力證得)했다. 이행을 영원히 끊었다. 이걸 여래로 표현하거든요. 그래가지고 여기소증(如己所證)으로, 자기의 증득한 바와 똑같은 내용으로, 환위인설(還為人說)이라, 도리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얻은 거와 똑같이 얘기를 하기 때문에 진어자라는 거예요. 참말을 하는 것이 여래라는 거예요. 그리고 실어자(實語者), 진실한 말을 하는 이다. 그리면 성문들을 위해서 사성제법을 설하는데(說四諦法), 이 성문들이 이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에 집착하는 번뇌를 딱 끊고(斷三界結), 멸진정을 딱 증득해서(得滅盡定), 삼계 생사를 면했어요. 근데 무명 생사만 남아 있지, 삼계 생사는 다 끊은 것이 아라한이거든요. 그래서 사성제를 말한 것이 실어자다 그러고. 여어자라고 하는 것은 ‘너는 앞으로 뭐가 될 거다, 너는 앞으로 뭐가 될 거다,’ 이게 수기법(授記法)인데, 이게 하나도 틀리는 법이 없어요. 현재를 보면 미래를 알아. 현재를 보면 과거를 알고. 이게 삼세수기거든요. 수기라는 건 줄 수자, 기록할 기자. 기록이라는 건 사연인데, ‘너는 앞으로 무슨 사연이 올 거다, 너는 앞으로 무슨 사연이 올 거다’, 지금 딱 보면 미래가 보여. 그래서 이 수기법인데, 이거는 종무차착(終無差錯)이라. 수기법에 절대로 이게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없다. 그래서 불이어다. 금강경에는 불광어(不誑語)라고 하는 게 있는데, 이 네 개를 다 합치면 속이지 않는 말이다 이런데, 다른 번역에서 네 개뿐이 없어요. 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이어자. 이런 설법을 한 것이 여래다. 이렇게 금강경에서 분류를 했으니, 이 경의 말씀이니까 따르고. 그럼 우리는 이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상에서 상이 없음을 깨달아야 돼요. 모든 상에는 상이 없어요. 이게 연기법이에요. 왜냐. 인연으로 일어난 거기 때문에. 그래서 무상이라는 걸 다른 말로 하면 인연법이라는 얘기에요. 저게 뭐 실체가 있는 게 아니고, 저렇게 일어날 만한 인연이 모여서 저렇게 일어난 거니까, 저것이 흩어질 만한 인연이 생기면 흩어진다. 그러니까 없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없고, 있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있으니까, 있고 없는데 아무런 실제 형상이 없다. 이걸 통달 무상이라고 하거든요. 무슨 소리인지. 이 몸에 몸이 없어요. 그럼 뭐냐. 잊고 없는 걸 초월한 진여법만 있는 거예요. 진여법. 있고 없는 걸 초월해 있어. 참으로 아는 지혜는 알고 모르는 걸 초월해 있어요. 그건 예를 들면, 참으로 듣는 거는 듣고 안 듣는 걸 초월해 있다. 우리가 보통 듣는 거는 막 소리가 나면 듣는다고 그러고, 소리가 안 나면 못 듣는다고 하잖아요. 근데 그 듣는 거는 소리가 안 날 때는 소리 안 나는 조용한 거 그걸 지금 듣고 있는 거예요. 이건 경에 밖에 안 나와요. 있을 때는 있는 거 보지만 없을 때는 없는 것도 봐요. 뭐 문 탁 열어보고 사람 없으면 ‘아무도 없네요’, 그래요. 그럼 그때 못 봤냐. 본 거예요. 뭘 봤냐. 아무도 없는 거 그거 본 거예요. 그래서 살 때는 사는 거 알지만, 죽을 때는 죽는 거 아는 거, 그게 지혜예요. 아 이거 이거 심각한데 이거. 무서워하잖아요, 죽을 때. 그 왜 무서워하냐. 그 죽는 것이 무슨 이상한 걸로 보니까 무서운 거예요. 사는 거 하고 죽는 거하고 똑같다. 사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살고, 죽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죽는데, 단 거기서 변함이 없는 것은 살 때는 사는 거 알고, 죽을 때는 죽는 거 알고, 또 있을 때는 있는 거 보고, 없을 때는 없는 거 보고. 그거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여여상견 상주법계. 여여히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이게 같을 여자 두 개 써서 여여법이라고 해요, 여여. 상견, 항상 봐. 또 상주법계에요. 항상 머무는 법계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여여상견 상주법계. 그걸 떡 증득하고 있으면 생사거래라는 게 저 허공에 뜬구름과 같은 거예요. 뜬구름은 왔다 갔다 하지만 허공은 뭐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문제는 왜 인생이 괴로우냐. 상에 상이 없다는 거 못 깨달아서. 그럼 어떡하면 깨닫냐. 간단해요. 마음을 딱 그쳐. 그치면 조용해져요. 그러면 상에 상이 없는 게 환하게 보여요. 이게 괴로움이 뭐와 같으냐 그러면, 맑은 물에 먼지 섞인 거 같은 건데, 맑은 물에 먼지를 섞으면 어떻게 되냐. 막 물이 탁하고 안 좋잖아요. 그럼 그놈을 맑히려면 어떻게 해야 돼야. 이거 흔들면 안 돼요. 가만히 놔두면 이걸 지수라고 그래요. 그칠 지, 물 수자. 그친 물이다. 물을 딱 흔들지 말고 그치면, 그쳐놓으면 먼지가 아래로 싹 가라앉아요. 근데 그 상태는 이제 마음을 딱 챙기면 조용하다가, 막 움직이면 다시 시끄러워지고 이런 상태인데, 거기서 더 깊이깊이 먼지 흙가루가 가라앉으면, 이게 가라앉은 그 흙먼지 부피가 아주 작아져요. 그래서 신경질이 자꾸 줄어들면 그게 공부된 거예요. 신경질이 왜 나느냐. 상에 상이 없는 걸 몰라서 나는 거거든요. 지 마음대로 얻으면 크게 좋을 것 같은데, 인간은요, 물질이 아니라 생각이기 때문에, 지가 원하는 거 얻어봐도 금방 또 싫어져요. 이걸 모른다고. 알면 어쩔건데. 뭐 별수 없지 뭐 알아도. 왜냐면 거기서 못 벗어나니까. 알아도 못 벗어나요. 몰라도 못 벗어나지만. 그러면 점점 이게 가라앉은 먼지 가루가 줄어들면 웬만해서는 화도 안 나고 걱정도 안 돼. 웬만하면. 그런데 이제 누가 칼을 들고 와서 목을 벤다고 그럴 때 화가 나거든. 그건 그 흙덩어리가 밑에 가라앉아 있다는 거야, 완전히 안 없어지고. 그러면 이제 이걸 맑은 물만 싹 따로 이제 덜어내고, 그 흙덩어리를 완전히 버려서 완전히 지수가 아니라 정수가 돼서, 깨끗할 정자, 물 수자, 정수가 되면 아무리 흔들어도 전혀 더러운 게 안 올라오잖아요. 그 상태예요. 그래서 이 마음 공부는 명경지수와 같이 하라. 지수는 물을 그치는 거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생각을 딱 그치고, 앞에 뭐 인상을 쓰고 쳐다보지도 말고. 눈을 딱 감고 인상 쓰고 뭐 하지도 말고. 그냥 그치고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이게 지수예요. 그친 물이다. 명경이라는 거는 뭘 덮지 말고 묻히지 말고 그대로 밝은 거울 그대로 놔두면 이게 밝은 거울이에요. 거기다 먼지 하나라도 붙이고, 뭐 수건 하나라도 덮으면 명경이 아니에요. 이거 아무것도 그때 붙이지 말고, 가리지 말고, 그대로 놔두면 이게 명경이거든요. 그래서 마음에도 좋은 생각이든지, 나쁜 생각이든지, 과거 생각이든지, 현재 생각이든지, 아무것도 거기다가 들러붙게 하지 말고, 덮어씌우지 말고, 쫓아가지 말고, 딱 그치면 밝은 거울처럼 환히 나타나고, 그친 물처럼 맑아진다. 그래서 이걸 한자로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그래요. 명경이라는 건 밝은 거울이라는 말이고, 지수라는 건 그친 물이라는 소리예요. 어떤 사람은 모르고 지수가 명경에다가 물 뿌린 거라고 하는데, 그 천만에 말씀. 명경에 물 뿌리면 거울이 안 보여요. 그게 이제 부처님이 눈을 뜨지도 않고 감지도 않고, 감아서 뭘 피할 것도 아니고, 떠서 쫓아갈 것도 아니고, 그래서 여래의 눈을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감는 건 피하는 거고, 눈에 인상 쓰고 불 키는 건 쫓아가는 거잖아요. 근데 이 상에 상이 없는 무상법을 떡 알고 나면, 피할 것도 없고 쫓아갈 것도 없어 그래서, 턱하니 이게 이제 해탈 열반의 모습을 불상으로 표현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불상 만드는 사람이 굉장히 그 지혜가 깊어지고 원력이 깊어지고 신심이 깊어졌을 때 좋은 불상이 나와요. 그냥 뭐 술 먹고 놀다가 노래 부르고 놀다가 불상 만들려면 잘 안 만들어져. 그게 이제 산란한 생각이 앞을 자꾸 가리거든. 신라시대 이때는 불심이 높아서 전부 불상마다 명작들이에요. 수준이 굉장히 높단 말이에요. 참 이상하지. 아주 이상해요. 석굴암 불상 같은 게 안 나와요 요새는. 왜 안 나오냐. 그만큼 정신세계가 따라가지 못해서 그래요. 탁 보면 눈도 인상 쓰고 앞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눈 딱 감고 뭐 피하는 것도 아니고, 떡하니 참 희한하게 그렇게 해탈 열반을 표현을 해요. 그래서 여래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寧受地獄苦 得聞諸佛名 不受無量樂 而不聞佛名 영수지옥고 득문제불명 불수무량락 이불문불명所以於往昔 無數劫受苦 流轉生死中 不聞佛名故 소이어왕석 무수겁수고 유전생사중 불문불명고(華嚴經 須彌頂上偈讚品)(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 그러면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華嚴經 須彌頂上偈讚品)이라고 하는 데가 있는데, 거기에 뭔 말이 있냐면, 영수지옥고하고 득문제불명이언정(寧受地獄苦 得聞諸佛名), 차라리 지옥고를 받고, 여러 부처님의 명호를 들을지언정. 여래명호가 뭐냐. 이미 해탈하고 열반을 증득해서 무상법을 통달하여 시현세간이라, 세간에 나타나는 분을 여래라고 하거든요. 그럼 그 여래가 일체중생이 다 그렇게 될 수 있는 희망의 등불을 지금 보인거다 이거죠. 희망의 등불. 그래서 불수무량락(不受無量樂)하고 이불문불명(而不聞佛名)이라. 이 세상에서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으면서 부처님 명호 듣지 않는 것은 내가 안 하겠다. 이게 이제 보살의 서원인데 이런 말이 있어요. 그래서 뭐 경전을 많이 외우고 이거보다도 석가모니불 그러면 이거는 상에서 무상을 통달하고, 취하고 버리는 행위가 영원히 끊어지고, 온갖 지혜를 성취한 그런 아주 명명백백하게 표시 증거를 하는 분이다. 이러니까 우리의 미래가 석가모니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나도 무상법을 통달할 수 있고, 번뇌망상을 끊을 수 있고, 무량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불명을 듣는다는 게, 부처님 명호를 듣는다는 게 그렇게 소중하였기 때문에, 지옥고를 받으면서 부처님 명호를 들을지언정, 무량락을 받으면서 부처님 명호 안 듣는 일은 난 절대로 안 하겠다. 이런 서원이 있어요. 그다음에는 소이어왕석(所以於往昔)의 무수겁수고(無數劫受苦)는, 옛날에 무수한 지난 세월 동안에 한량없는 고통을 받아서, 유전생사(流轉生死中)는, 생사 중에 돌고 또 돌고 한 것은, 불문불명고(不聞佛名故)라, 부처님의 명호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게 이제 사찰에서 하는 신심불교, 원력불교, 공덕불교, 서원불교인데, 사찰불교는 뭘 알아내려고 연구하고 논문 쓰고 발표하고 그게 아니에요. 내가 스스로 믿고, 그 세계를 이루어가는 게 이게 사찰불교거든요. 대학 불교는 이게 증명이 안 되기 때문에, 이건 어떻게 발표할 수도 없고, 시험 볼 수도 없고, 또 학점 매길 수도 없고, 이거 안 돼요. 그래서 불교가 대학에 가면 과학이 돼요. 불교가 사찰에서는 이렇게 신심, 원력, 실천, 성취, 이런 쪽으로 가서, 이런 법문을 딱 듣고, 석가모니불, 화엄성중, 뭘 하든지 하면, 이거는 이제 마음이 석가모니불 할 때, 이렇게 염불을 하면 거기에는 선정과 지혜가 따라온다. 석가모니불 할 때는 그 순간은 자연히 망상이 안 일어나요. 그런 부분은 마음이 이미 그쳐진 거예요. 그래서 그걸 선정이라고 그래요. 선정. 그러면 이제 자꾸 하다 보면 마음이 맑아져서, 맑은 생각이 계속 일어나. 이걸 지혜라고 그래요. 그래서 염불을 하다 보면 염불을 할 때는 언제든지, 염불을 하는 게 먼저 일어나요. 그걸 지혜가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에 선정이 따라온다. 근데 이제 참선을 할 때는 먼저 그쳐요. 선정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지혜가 있어요. 이게 틀려요. 경을 볼 때도 지혜가 먼저 있는 거예요. 금강경은 금강경을 죽 보면 그게 지혜인데, 보다 보면 다른 망상이 안 일어나니까 마음이 조용하게 그쳐져서 선정이 따라와. 그래서 선정이 먼저냐 지혜가 먼저냐, 지혜가 먼저냐 선정이 먼저냐. 이게 선후는 참선이나 간경이나 염불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내용은 똑같아요. 나무아미타불을 하면 선정을 일부러 안 따라도 그 나무아미타불을 하는데 선정이 들어 있어요. 그게 사찰불교예요. 그러니까 가만히 마음을 돌아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용해져요. 물로 말하면 그 먼지가 물 꼭대기만 조금 조용해도 맑은 물이 보이잖아요. 그래서 조금만 마음을 그치고 있어도 굉장히 마음이 편안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이제 누가 옆에서 탁 건드리면 신경질이 확 나지. 그건 이제 깊이 그 먼지가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근데 이제 먼지가 점점 깊이 가라앉으면 웬만해서는 신경질 안 내요. 그런데 누가 목 내놓으라고 달려들면 신경질이 확 나거든. 그런데 그 번뇌망상이 완전히 싹 없어졌을 때는 목을 아무리 끊어가도 무상법을 통달했기 때문에 아무 장애가 없어요. 이게 무장무애예요. 뭔 소리인지. 먼 나라 얘기다. 먼 나라 얘기인데 이게 어려운 게 아니고요, 안 되는 게 아니에요. 안 해서 안 되는 거예요. 누가 그러잖아, 고양이가 나갔는데, 누가 옆에서 ‘고양이도 생물이라 사랑을 줘야 된다’ 이러잖아요. 그러니까 그 주인이 ‘고양이 저한테 줄 사랑이 어딨어’ 이랬거든. 근데 그건 모르는 소리예요. 사랑이라는 거는 어디 창고에 쌓아놓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하다 보면 할수록 사랑이 점점 생기는 게 사랑이에요. 사랑이 하면 할수록 생기는 거지 어디 쌓아놓은 걸 보고 예금한 거 꺼내다 쓰듯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뭔 소리예요. 몰래 박수 치는 거예요. 지금 박수를 같이 쳤으면 내가 기분이 좋았을건데. 사랑은 쌓아놓고 하는 게 절대로 아니에요. 하면 생기는 게 사랑이에요. 하면 생겨. 그렇듯이, 이 기도나 이런 것도 기도가 안 된다고. 그게 아니에요. 안 해서 안 되는 거예요. 하면 돼요. 경도 자꾸 읽으면 마음이 조용해지고 머리가 맑아져. 그런 거예요. 그게 이제 석가모니가 원했던 해탈 열반이지 다른 목적을 위해서 한 건 아무것도 없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