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4월 20일 음력3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3-04-22

  

如來 所說法(여래 소설법)

--如來說法 隨機接引 種種敎說 成就衆生--

--여래설법 수기접인 종종교설 성취중생--

 

       안녕하십니까. 계묘년 3월 초하루 진관사 신중기도 입재라 하더라고요. 나는 초하루밖에 몰라요. 하여튼 초하루 신중기도 입재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할 제목은 여래 소설법(如來 所說法),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이다. 여래설법(如來說法)을 이야기하고자 합니다. 여래가 왜 설법을 하셨을까. 설법한 목적. 여래가 설법한 목적은 중생을 성취시키는 거예요. 중생성취. 그래서 그것을 성취중생(成就衆生)이라 이렇게 얘기를 합니다.

       그럼 성취가 뭐냐. 중생이 여래와 같이 해탈을 하고, 중생이 여래와 같이 열반을 얻는 거거든요. 해탈 열반. 그럼 해탈이라는 거는 뭐냐. 무장무애. 아무 장애가 없는 걸 해탈이라고 그래요. 몸의 장애, 마음의 장애, 물질의 장애. 그래서 해탈은 이장(離障)이라, 장애에서 벗어나는 거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열반이라고 하는 것은 원만구족이에요. 원만구족. 원만하게 다 갖추어진 것을 열반이라고 하거든요. 무장무애 원만구족. 이거를 석가모니가 얻었는데, 그것을 다른 범부중생도 다 얻도록 하는 것이 중생을 성취시키는 거거든요. 성취중생.

 

       그럼 어떤 방법으로 하냐. 내용은 해탈 열반인데, 방법은 그 법문을 듣는 중생에 따라서, 법문 듣는 중생을 어려운 말로 당기 중생이라, 당기(當機). 당자는 해당할 당, 기자는 근기라고 하는 근기 기, 기계 기잔데, 사람도 기계와 같이 그 성능, 용심, 희망이 다르다. 그래서 그 기계에 비유해서 근기(根機) 이러거든요, 뿌리 근자 써가지고. 그 법문을 지금 듣고 있는 사람이 당기 중생이에요. 해당하는 근기 중생이라고요. 그 당기 중생에 따라서 그 중생이 도움이 될 만한 법을 설해요. 그 중생에게 도움이 되지 않을 법은 안 설해요.
       근데 뭘 하든지 석가모니는 해탈 열반 외에는 말하지 않았어요. 그래서 중생에게 도움이 될 법을 설한다, 중생이 이해할 수 있고 실천할 수 있고 성취할 수 있는 법을 설한다. 그래가지고 그거를 방편설법이라고 하거든요. 방편이라는 건 서로 통한다는 소리예요. 접근한다 이 말이거든. 방법은 방편 설법을 하는데, 목적은 해탈 열반이에요. 그래서 해탈 열반에 방해되는 말은 일체 안 하셔요. 그걸 무기법(無記法)이라고 그래요. 말하지 않는다고. 기록할 기자. 기록을 안 해요. 기록은 말인데, 말을 안 해요. 석가모니는 무슨 말을 해도 해탈 열반에 필요한 말만 하시지, 다른 말은 안 하셨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래서 그 유명한 비유가 독전(毒箭) 비유인데요. 독화살 비유. 어떤 사람이 독화살을 맞았는데, 그 독화살을 맞은 사람에게 가장 필요한 건 뭐냐. 독화살을 빼내고 그 독이 몸에 퍼진 걸 치료해서 본래 사람으로 돌아가게 하는 거예요. 그런데 그 화살을 빼내지 않고 연구부터 해. 이 화살 종류가 뭐며, 독기가 뭐며, 어떤 사람이며, 그러면 그 사람은 죽는다. 그래서 중생에게도 해탈 열반이 필요하지, 이것저것 해봐야 소용이 없다. 그래서 독전유(毒箭喩), 해탈 열반, 방편 설법. 그런 것을 가지고 부처님의 설법을 이해를 하고 있거든요.
       그래서 여래설법은 수기 설법이다. 근기에 따라서 설법을 한다. 설법을 해가지고 그 해탈 열반으로 인도를 하는 거예요. 수기접인(隨機接引)이라. 잡을 접, 인도할 인, 잡아서 인도하는 거예요.

       그래서 종종교설(種種敎說), 가지가지 교설로 성취중생이라, 중생을 성취한다. 그래서 여래설법은 그 말을 듣고 해탈 열반을 이루는 게 중요해요. 말에 머무는 건 중요하지 않아요. 그래가지고 비유가 있어요. 월타추담계영한(月墮秋潭桂影寒)인데, , 달이, 추담, 가을 연못에, , 떨어졌다. 그래서 연못을 이렇게 들여다 보면 연못 안에 달덩이가 훤하게 있거든요. 근데 이게 월타추담인데, 계영이라고 하는 건 계수나무 계자, 그림자 영자, 달에 계수나무가 있어요. 지금 달나라 가 보니까 없지만, 달나라 가기 전에는 계수나무가 항상 있었어요. 그래서 계수나무 그림자가 그게 달이에요. 계수나무 그림자 달은 저 허공에 차디차게 지금 분명히 있는 거예요. 그런데 월타추담이요. 달은 또 가을 연못 속에 떨어져서, 가을 연못이라고 하는 것은 제일 맑은 연못을 가을 연못이라고 하거든요. 물이 맑게 보일 때가 가을이에요. 그 이상하잖아요. 분명히 연못 속에 달이 떨어졌는데, 분명히 하늘에 달이 그냥 차디차게 있어. 계영이 차. 이게 여래설법이다. 그 달이 연못 속에 떨어진 것은 비유로 설법하는 것이고, 그 하늘의 달이 분명하게 있는 거는 해탈 열반을 얻게 하는 것이다. 이거예요. 그런데 그걸 잘 모르고 입수 착영(捉影)하면, 달 그림자가 연못 속에 보이니까 그 연못 물에 들어가서 입수란 말이죠. 입수 착영을 해. 그림자를 잡아. 잡을 착자가 있고 그림자 영자가 있는데, 달 그림자가 물속에 보이니까 물에 들어가서 그림자를 잡는단 말이에요. 그러면 어떻게 되겠어요. 종부득(終不得)이라. 마침내 그 그림자를 잡을 수가 없다.

 

如來說法 敎相判釋

여래설법 교상판석

如來說法 時別分釋

여래설법 시별분석

五乘判釋

오승판석

1.人天乘 2.聲聞乘 3.緣覺乘 4.菩薩乘 5.佛乘

1.인천승 2.성문승 3.연각승 4.보살승 5.불승

       그러니까 설법을 딱 들으면 그 설법에 맴돌면 어리석은 거고, 그 설법에서 가리키는 해탈 열반을 얻는 게 중요해요. 얻는 게. 그런데 중생들은 지혜로 해탈하는 것보다 생각으로 헤아리는 것이 습관화돼서, 모든 걸 생각으로 해결하려고 그래요. 그래서 역사가 오래되면서 불교의 내용이 뭐냐. 해탈을 하려고 안 하고 내용 분석을 많이 했어요.
       그 내용 분석을 하는데, 내용 분석이 두 가지가 있어요. 하나는 20세기서부터 출발한 건데, 역사가 아주 짧은데 시별분석(時別分釋)이라고 하는 게 있어요. 시별분석, 시대별로 분류해서 여래설법을 해석한다. 시대별로, 이게 시별이거든요. 때 시자, 다를 별자. 분석이라는 거. 분류를 해요. 여래설법을 나누어서 해석을 하는 거예요. 그게 이제 20세기서부터 대학에서 불교를 가르칠 때 이걸 가르쳐요.

        그래서 대학 불교하고 사찰 불교하고는 달라요. 사찰 불교는 실천해서 공덕을 이루는 게 사찰 불교인데, 대학 불교는 분석해서 학문적으로 정리하는 게 생명이에요. 그러나 대학이 망하면 불교도 거기서 없어지는 거에요. 그래서 유교도 향교에 있다가 대학으로 다 들어갔는데, 대학에서 유교 과목이 폐강이 되니까 그냥 끝났어요. 근데 불교는 절에 있다가 대학으로 다 안 갔어요. 그래서 남아있는 거예요. 뭔 말인지. 그래서 일본에서 <20세기 불교학이 흥하면 불교는 쇠약하고, 20세기 불교학이 쇠약하면 불교는 흥한다.> 이런 말을 했어요. 그게 사실이에요.

       그럼 어떻게 되냐. 여래가 세상에 계시고, 여래가 세상에 계신 후 한 100년까지를 초기불교라고 하는데요. 초기불교가 없었다면 그 후에 여러 부파가 일어나는데 부파불교는 없었을 것이고, 이게 시별 분석이에요. 시대별로 분석하는 거. 또 온갖 부파가 서로 논쟁을 하고 서로 다툴 때, 그 부파불교가 없었다면 반야 불교는 없었을 것이고, 그래서 그 부파에서 논쟁하는 것을 싹 쓸어서 반야 공으로 전부 다 통일시킨 게 용수거든요. 그 반야 불교가 없었으면, 또 유식 불교가, 오직 생각이라고 하는 유식 불교가 없었을 것이고, 유식 불교가 없었다면 여래장 불교가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 반야 유식 여래장, 또 초기, 부파 이런 거를 시대별로 쭉 분류를 해서 이걸 연구하는 게 교리 발달사에요. 이런 것만 가르쳐요. 그래서 처음 이걸 배우면 눈이 휘둥그레서, 절에서 수리수리 마수리 하는 거 하고 전혀 틀리거든. 그래가지고 여기에 뭐가 있는 줄 알아요. 그래서 막 강의도 듣고, 논문도 써보면, 역시 들어갈 때도 생각이 없고 나올 때도 생각이 없고, 마음은 항상 아는 게 많을수록 허망해요. 이런 게 있어요. 그래서 이렇게 학문적으로 불교를 연구해서 저술을 한 30, 50권 냈는데 죽는 순간이 돌아왔어. 근데 자기 저술이 옆에 산처럼 쌓였어. 근데 죽을 때 이렇게 자기 저술을 쳐다보면, 저놈은 책더미가 내 죽는 거 하고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여러분 그거 알아요? 자기가 그냥 책을 100, 70, 50, 30, 열 권 이상 저술을 했어요. 그런데 지금 숨넘어갈 때, 숨이 똑 떨어지려고 할 때, 내가 어디로 가는고 할 때, 저놈의 책이 내 죽는데 전혀 도움이 안 된다니까요. 이거 경험 안 해본 사람 몰라요. 그리고 화가도 마찬가지예요. 자기가 좋은 그림 작품을 많이 남겼어요. 근데 자기가 목숨을, 딱 숨을 거둘 때 자기가 그린 그림이 내 죽음하고 아무 도움이 안 돼요. 소설가도 마찬가지. 작품을 엄청나게 남겼는데, 자기가 남긴 작품이 자기 죽음에 도움이 안 된다. 이상한 거죠. 지금 평생 남의 다리 긁은 것도 아니고, 헛짓했다는 생각이 들거든요. 그런데 이미 기력이 다 해서 때는 이미 늦었어. 그런데 또 이상한 건, 그런 고비를 넘기고 다시 깨어났는데도 몸이 조금 좋아지면 또 그 짓 해요. , 이게 인생이에요. 그래서 한 번 몸에 습관이 되면 좀처럼 못 벗어나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이런 시별분석이 있고, 이거 시별 분석이라는 건 내가 만들어낸 용어인데 어디 출처가 없어요, 이거는. 시대별로 분류해서 해석한다, 이게 시별 분석이거든요. 이게 종범이가 만들어낸 용어예요. 어디 근거가 있는 거 아니에요.

       근데 이제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불교 분류법이 있는데 이걸 교상판석(敎相判釋)이라 그래요. 가르칠 교, 모양 상, 서로 상자, 모양 상. 판석, 판단할 판, 해석할 석. 이제 시대와 상관없이 이 교리를 보고 판단해서 해석하는 걸 교상판석이라 그러고, 이걸 줄여서 교판이라 그래요. 교상판석을 딱 보니까 부처님이 인천도를 강조한 법문이 있다. 이걸 인천승(人天乘)이라고 하거든요. 사람은 지옥 아귀 축생 삼악도에 떨어지지 말고 인도에 환생하고 천도에 상생하고, 적어도 인천에서는 벗어나지 말아야 된다, 이런 걸 가르쳤어요. 이걸 인천승이라고 그래요. 승자는 간다, 실천한다. 수레 승자인데, 이거 움직이는 거잖아요. 길 도자도 되고, 가르칠 교자도 되고, 실행할 행자도 되고. 인천승이 기본이에요. 그다음에 성문승(聲聞乘), 연각승(緣覺乘), 보살승(菩薩乘). 늘 부처님을 따라다니면서 공부하던 분을 성문이라고 그래요. 부처님 음성을 듣고 배웠다고. 그분들에게는 고집멸도 사성제법을 가르치고 이걸 성문승이라고 해요. 또 인연을 다 관찰하기 좋아해요. 이걸 연각승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성문승에게는 사성제를 가르치고, 연각승에게는 12인연법을 가르쳤다. 그리고 이제 보살에게는 이게 보살승인데, 육바라밀을 가르쳤다. 그리고 부처님의 세계를 남김없이 아낌없이 바로 말한 설법이 있는데, 이걸 불승(佛乘)이라고 하는데요. 부처가 가는 길, 부처의 길, 부처의 행, 이게 불승인데, 이거를 경으로 보면 화엄경이다, 이렇게 해요. 그래서 보살승은 반야경 이런 거고, 이제 나머지는 다 초기불교에서 이야기하는 여러 경전들이 있어요.

       그래서 이걸 이제 오승차별이라고 그러는데, 인천승,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불승. 근데 오승이 전부 목적은 해탈 열반이에요. 다만 부처, 이제 나는 이렇게 부처가 됐다. 이건 이제 보살들에게 하는 법문인데, 이렇게 보살행을 닦으면 이렇게 성불한다, 부처님 경지를 이야기하는 게 화엄경의 여래출연품 같은 거고, 세주묘엄품, 이런 게 그 여래의 세계를 바로 말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깨달음이 뭐냐 하면, 화엄경 여래출연품이나 화엄경 세주묘엄품, 여래현상품 이거는 그 깨달은 세계를 이야기한 거예요. 이걸 불승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거를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그러면 이게 사승이잖아요. 그런데 다 이게 인천승은 모두가 해당되니까, 성문승, 연각승, 보살승 이걸 삼승이라고 그러고, 불승은 부처님 하나의 세계를 말한다고 그래서 일승이라고 그러고. 그래서 항상 이 불교를 이야기할 때 삼승과 일승, 일승과 삼승 이래요. 이게 교상판석이에요. 그래서 경을 딱 보면, ‘아 이거 일승법이구나, 이건 보살승법이구나, 이거는 성문승법이구나, 이건 연각승법이구나알아요. 그게 교판이에요.

       그리고 시대별로 분석하다 보면, 책이 딱 나와서 책 보면 이거는 어느 시대 거네이거 금방 아는 게 이게 시판이에요. 그리고 누가 설법을 해도 아 저거는 시대별로 초기불교냐 부파불교냐, 반야불교냐 유식불교냐, 여래장불교냐바로 아는 거죠. 그건 시대별로 분석을 해요. 그런데 이건 불교 아는 사람들이 알아듣는 거고, 모르는 사람은 모르는데, 그거 알아봐야 전혀 자기 해탈, 자기 열반에 도움이 안 돼요. 그래서 절에서는 실천과 성취를 이야기하지, 그 분석과 지식을 강조하지 않아요. 그런데 대학에 가면 전부 분석, 지식뿐이에요. 그래서 대학 나오면 끝이에요. 끝 뿐만 아니라 잘못하면 거기에 빠져서 절에 안 들어오는 경우도 있어요. 그래서 상좌가 대학 가면 못 쓴다, 이렇게 하는 거예요. 상좌 대학 가면 못 쓴다. 일제시대 때는 이제 일본식으로 개명한 걸 개명승이라고 그랬는데, 그게 이제 대학 불교를 와서 본 거예요. 개명하고 절에 떡 왔더니 제일 먼저 한 일이 선대에서부터 물려준 법답(法畓)이 있는데, 우리 스승과 제자로 물려가는 논이 있어요. 그걸 제일 먼저 팔더래요. 그래서 개명승은 선매 법답이라, 먼저 법답부터 판다. 이게 이제 지식 불교에 대한 굉장히 비관적인 평가였어요. 나는 심각하게 말하는데 이해가 안 돼서 아무 반응이 없네. 개명 승자는 선매법답이라. 이거 얼마나 당혹한 말이에요. 이 불교의 세속화를 빗대어 말하는 거지.

 

如來常說 汝等比丘 知我說法 如筏喩者(金剛經 正信希有分16)

여래상설 여등비구 지아설법 여벌유자(금강경 정신희유분16)

須菩提 於意云何 若人滿三千大千世界七寶以用布施 是人所得福德 寧

   수보리 어의운하 약인만삼천대천세계칠보이용보시 시인소득복덕 영

爲多不 須菩提言 甚多 世尊 何以故 是福德 即非福德性 是故如來說福德

위다부 수보리언 심다 세존 하이고 시복덕 즉비복덕성 시고여래설복덕

多 若復有人 於此經中受持乃至四句偈等 為他人說 其福勝彼 何以故 須

다 약부유인 어차경중수지내지사구게등 위타인설 기복승피 하이고 수

菩提 一切諸佛 及諸佛阿耨多羅三藐三菩提法 皆從此經出 須菩提 所謂佛

보리 일체제불 급제불아뇩다라삼먁삼보리법 개종차경출 수보리 소위불

法者 即非佛法(金剛經 依法出生分8)

법자 즉비불법(금강경 의법출생분제8)

如來是眞語者 實語者 如語者 不誑語者 不異語者 如來所得(所說)

여래시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광어자 불이어자 여래소득(소설)

此法無實無虛(金剛經 離相寂滅分14)

차법무실부허(금강경 이상적멸분제14)

 

眞語者 : 二行永絕 十力證得 如己所證 還為人說

진어자 : 이행영절 십력증득 여기소증 환위인설

實語者 : 爲聲聞人 說四諦法 斷三界結 得滅盡定

실어자 : 위성무인 설사제법 단삼계결 득멸진정

如語者 : 爲諸菩薩 說眞如法 如理不謬 故云如語

여어자 : 위제보살 설진여법 여리불유 고운여어

不異語者 : 說授記法 終無差錯 云不異語 (金剛仙論)

불이어자 : 설수기법 종무차착 운불이어 (금강선론)

 

       그런데 본래 불교는 금강경에서 여래는 진어자(眞語者), 실어자(實語者), 여어자(如語者), 불이어자(不異語者) 이런 말이 있는데, 이상적멸분 제14(金剛經 離相寂滅分14)에서 한 말이거든요.

       그럼 여래는 뭘 설했냐. 이게 이제 금강경에서 하는데, 진어자라는 것은 참말을 하는 분이 여래다. 진어, 참 진자, 말씀 어자. 그럼 참말이 뭐냐. 여래는 이행이 영절하고(二行永絕), 두 가지 행위가 영원히 끊어지고. 두 가지 행위는 뭐냐. 취하고 버리는 거, 이거 취하고 이거 버리고, 이거 취사 행위인데 여래는 취사를 안 해요. 그래서 취행, 사행 이 두 가지 행위가 영원히 끊어졌어. 그거 왜 그러냐. 이거 취하고 저거 취하는 것은 무슨 일 때문에 그러냐 하면은, 상에 상이 없다는 걸 깨닫지 못해서 그렇다. 그래서 여래가 취사를 안 하는 것은 상에서 상이 없는 진실을 깨달았다. 이걸 통달무상이라고 그래요. 무상을 통달했다. 이게 핵심인데, 여래가 뭘 깨달았느냐. 상에 상이 없음을 깨달았다. 꿈에 꿈이 없고, 죽음에 죽음이 없고, 삶에 삶이 없고, 하늘에 하늘이 없고, 땅에 땅이 없고, 이게 무상법인데 이걸 통달했어요. 근데 이게 상인데(컵을 들어보이시며), 이렇게 보면 상인데, 여기서 무상을 보는 것이 반야지견이에요. 이거를 인식하고 분별하는 것이 의식 분별이에요. , 이거 이런 말 조금 오래 하면 조는데. 의식분별로 보면 반드시 이게 그릇이고, 뭐 상인데, 이게 반야지견으로 보면 이건 무상이에요. 상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통달 무상을 하면 생사해탈을 해요. 생사에 생사가 없어. 이 무상법을 몰라가지고 이 상에 속아서, -속는 걸 미혹이라고 하거든요.- 이 상에 속아서 온갖 고생을 다 하는 거예요. 장미가 좋다더니 꺾어보니 가시로다. 사랑이 좋다더니 따라가 보니 눈물이다. 전부 이게 상에 상이 없음을 몰라가지고 그런 거예요. 젊음이 오래 안 가는데 무조건 그냥 죽자 사자 쫓아갔는데, 며칠 있으면 젊음도 없어지고, 기쁨도 없어지고, 이 모양으로 이렇게 하는 걸 이걸 생사윤회라고 그래요. 그래서 상에서 상이 없는 걸 깨달으면 생사 해탈이에요. 상에 상이 없는 걸 반야로 본다고요. 그 지혜로, 반야로. 생각으로는 분별하고, 반야는 견공을 해, 공을 봐. 공이라는 건 불생불멸이거든요. 반야로 딱 보면 불생불멸인데, 의식으로 분별하면 저게 형상이야, 형상. 형상만 보지 공을 못 봐.

 

        그래가지고 그 공을 보니까 거기서 뭐가 생겼느냐. 큰 여래의 열 가지 지혜가 생겼어요. 이걸 십력(十力)이라고 그래요. 열 십자, 힘 력자. 지혜는 힘이다. 그래서 십력을 증득(十力證得)했다. 이행을 영원히 끊었다. 이걸 여래로 표현하거든요.
        그래가지고 여기소증(如己所證)으로, 자기의 증득한 바와 똑같은 내용으로, 환위인설(還為人說)이라, 도리어 다른 사람을 위해서 말하고 있다. 그래서 자기가 얻은 거와 똑같이 얘기를 하기 때문에 진어자라는 거예요. 참말을 하는 것이 여래라는 거예요.

       그리고 실어자(實語者), 진실한 말을 하는 이다. 그리면 성문들을 위해서 사성제법을 설하는데(說四諦法), 이 성문들이 이 욕계, 색계, 무색계, 삼계에 집착하는 번뇌를 딱 끊고(斷三界結), 멸진정을 딱 증득해서(得滅盡定), 삼계 생사를 면했어요. 근데 무명 생사만 남아 있지, 삼계 생사는 다 끊은 것이 아라한이거든요. 그래서 사성제를 말한 것이 실어자다 그러고

 

       여어자라고 하는 것은 너는 앞으로 뭐가 될 거다, 너는 앞으로 뭐가 될 거다,’ 이게 수기(授記法)인데, 이게 하나도 틀리는 법이 없어요. 현재를 보면 미래를 알아. 현재를 보면 과거를 알고. 이게 삼세수기거든요. 수기라는 건 줄 수자, 기록할 기자. 기록이라는 건 사연인데, ‘너는 앞으로 무슨 사연이 올 거다, 너는 앞으로 무슨 사연이 올 거다’, 지금 딱 보면 미래가 보여. 그래서 이 수기법인데, 이거는 종무차착(終無差錯)이라. 수기법에 절대로 이게 어긋나고 잘못된 것이 없다.
       그래서 불이어다. 금강경에는 불광어(不誑語)라고 하는 게 있는데, 이 네 개를 다 합치면 속이지 않는 말이다 이런데, 다른 번역에서 네 개뿐이 없어요. 진어자, 실어자, 여어자, 불이어자. 이런 설법을 한 것이 여래다. 이렇게 금강경에서 분류를 했으니, 이 경의 말씀이니까 따르고.

       그럼 우리는 이런 부처님의 설법을 듣고, 상에서 상이 없음을 깨달아야 돼요. 모든 상에는 상이 없어요. 이게 연기법이에요. 왜냐. 인연으로 일어난 거기 때문에. 그래서 무상이라는 걸 다른 말로 하면 인연법이라는 얘기에요. 저게 뭐 실체가 있는 게 아니고, 저렇게 일어날 만한 인연이 모여서 저렇게 일어난 거니까, 저것이 흩어질 만한 인연이 생기면 흩어진다. 그러니까 없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없고, 있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있으니까, 있고 없는데 아무런 실제 형상이 없다. 이걸 통달 무상이라고 하거든요. 무슨 소리인지. 이 몸에 몸이 없어요. 그럼 뭐냐. 잊고 없는 걸 초월한 진여법만 있는 거예요. 진여법. 있고 없는 걸 초월해 있어. 참으로 아는 지혜는 알고 모르는 걸 초월해 있어요. 그건 예를 들면, 참으로 듣는 거는 듣고 안 듣는 걸 초월해 있다. 우리가 보통 듣는 거는 막 소리가 나면 듣는다고 그러고, 소리가 안 나면 못 듣는다고 하잖아요. 근데 그 듣는 거는 소리가 안 날 때는 소리 안 나는 조용한 거 그걸 지금 듣고 있는 거예요. 이건 경에 밖에 안 나와요. 있을 때는 있는 거 보지만 없을 때는 없는 것도 봐요. 뭐 문 탁 열어보고 사람 없으면 아무도 없네요’, 그래요. 그럼 그때 못 봤냐. 본 거예요. 뭘 봤냐. 아무도 없는 거 그거 본 거예요. 그래서 살 때는 사는 거 알지만, 죽을 때는 죽는 거 아는 거, 그게 지혜예요. 아 이거 이거 심각한데 이거. 무서워하잖아요, 죽을 때. 그 왜 무서워하냐. 그 죽는 것이 무슨 이상한 걸로 보니까 무서운 거예요. 사는 거 하고 죽는 거하고 똑같다. 사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살고, 죽는 것도 인연에 의해서 죽는데, 단 거기서 변함이 없는 것은 살 때는 사는 거 알고, 죽을 때는 죽는 거 알고, 또 있을 때는 있는 거 보고, 없을 때는 없는 거 보고. 그거는 불생불멸 불구부정 부증불감 여여상견 상주법계. 여여히 죽어도 죽는 게 아니고, 살아도 사는 게 아니고. 이게 같을 여자 두 개 써서 여여법이라고 해요, 여여. 상견, 항상 봐. 또 상주법계에요. 항상 머무는 법계다. 이게 깨달음이에요. 여여상견 상주법계. 그걸 떡 증득하고 있으면 생사거래라는 게 저 허공에 뜬구름과 같은 거예요. 뜬구름은 왔다 갔다 하지만 허공은 뭐 아무 상관이 없잖아요.

 

       그러니까 이제 문제는 왜 인생이 괴로우냐. 상에 상이 없다는 거 못 깨달아서. 그럼 어떡하면 깨닫냐. 간단해요. 마음을 딱 그쳐. 그치면 조용해져요. 그러면 상에 상이 없는 게 환하게 보여요. 이게 괴로움이 뭐와 같으냐 그러면, 맑은 물에 먼지 섞인 거 같은 건데, 맑은 물에 먼지를 섞으면 어떻게 되냐. 막 물이 탁하고 안 좋잖아요. 그럼 그놈을 맑히려면 어떻게 해야 돼야. 이거 흔들면 안 돼요. 가만히 놔두면 이걸 지수라고 그래요. 그칠 지, 물 수자. 그친 물이다. 물을 딱 흔들지 말고 그치면, 그쳐놓으면 먼지가 아래로 싹 가라앉아요. 근데 그 상태는 이제 마음을 딱 챙기면 조용하다가, 막 움직이면 다시 시끄러워지고 이런 상태인데, 거기서 더 깊이깊이 먼지 흙가루가 가라앉으면, 이게 가라앉은 그 흙먼지 부피가 아주 작아져요. 그래서 신경질이 자꾸 줄어들면 그게 공부된 거예요. 신경질이 왜 나느냐. 상에 상이 없는 걸 몰라서 나는 거거든요. 지 마음대로 얻으면 크게 좋을 것 같은데, 인간은요, 물질이 아니라 생각이기 때문에, 지가 원하는 거 얻어봐도 금방 또 싫어져요. 이걸 모른다고. 알면 어쩔건데. 뭐 별수 없지 뭐 알아도. 왜냐면 거기서 못 벗어나니까. 알아도 못 벗어나요. 몰라도 못 벗어나지만. 그러면 점점 이게 가라앉은 먼지 가루가 줄어들면 웬만해서는 화도 안 나고 걱정도 안 돼. 웬만하면. 그런데 이제 누가 칼을 들고 와서 목을 벤다고 그럴 때 화가 나거든. 그건 그 흙덩어리가 밑에 가라앉아 있다는 거야, 완전히 안 없어지고. 그러면 이제 이걸 맑은 물만 싹 따로 이제 덜어내고, 그 흙덩어리를 완전히 버려서 완전히 지수가 아니라 정수가 돼서, 깨끗할 정자, 물 수자, 정수가 되면 아무리 흔들어도 전혀 더러운 게 안 올라오잖아요. 그 상태예요. 그래서 이 마음 공부는 명경지수와 같이 하라. 지수는 물을 그치는 거다. 다른 방법이 없어요. 생각을 딱 그치고, 앞에 뭐 인상을 쓰고 쳐다보지도 말고. 눈을 딱 감고 인상 쓰고 뭐 하지도 말고. 그냥 그치고만 있으면 되는 거예요. 이게 지수예요. 그친 물이다. 명경이라는 거는 뭘 덮지 말고 묻히지 말고 그대로 밝은 거울 그대로 놔두면 이게 밝은 거울이에요. 거기다 먼지 하나라도 붙이고, 뭐 수건 하나라도 덮으면 명경이 아니에요. 이거 아무것도 그때 붙이지 말고, 가리지 말고, 그대로 놔두면 이게 명경이거든요. 그래서 마음에도 좋은 생각이든지, 나쁜 생각이든지, 과거 생각이든지, 현재 생각이든지, 아무것도 거기다가 들러붙게 하지 말고, 덮어씌우지 말고, 쫓아가지 말고, 딱 그치면 밝은 거울처럼 환히 나타나고, 그친 물처럼 맑아진다. 그래서 이걸 한자로 명경지수(明鏡止水)라고 그래요. 명경이라는 건 밝은 거울이라는 말이고, 지수라는 건 그친 물이라는 소리예요. 어떤 사람은 모르고 지수가 명경에다가 물 뿌린 거라고 하는데, 그 천만에 말씀. 명경에 물 뿌리면 거울이 안 보여요.
       그게 이제 부처님이 눈을 뜨지도 않고 감지도 않고, 감아서 뭘 피할 것도 아니고, 떠서 쫓아갈 것도 아니고, 그래서 여래의 눈을 그렇게 만드는 거예요. 감는 건 피하는 거고, 눈에 인상 쓰고 불 키는 건 쫓아가는 거잖아요. 근데 이 상에 상이 없는 무상법을 떡 알고 나면, 피할 것도 없고 쫓아갈 것도 없어 그래서, 턱하니 이게 이제 해탈 열반의 모습을 불상으로 표현하는 거거든요. 그런데 불상 만드는 사람이 굉장히 그 지혜가 깊어지고 원력이 깊어지고 신심이 깊어졌을 때 좋은 불상이 나와요. 그냥 뭐 술 먹고 놀다가 노래 부르고 놀다가 불상 만들려면 잘 안 만들어져. 그게 이제 산란한 생각이 앞을 자꾸 가리거든. 신라시대 이때는 불심이 높아서 전부 불상마다 명작들이에요. 수준이 굉장히 높단 말이에요. 참 이상하지. 아주 이상해요. 석굴암 불상 같은 게 안 나와요 요새는. 왜 안 나오냐. 그만큼 정신세계가 따라가지 못해서 그래요. 탁 보면 눈도 인상 쓰고 앞을 쳐다보는 것도 아니고, 눈 딱 감고 뭐 피하는 것도 아니고, 떡하니 참 희한하게 그렇게 해탈 열반을 표현을 해요. 그래서 여래설법이라고 하는 것은 이런 것이다.

 

寧受地獄苦 得聞諸佛名 不受無量樂 而不聞佛名

영수지옥고 득문제불명 불수무량락 이불문불명

所以於往昔 無數劫受苦 流轉生死中 不聞佛名故

소이어왕석 무수겁수고 유전생사중 불문불명고

(華嚴經 須彌頂上偈讚品)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

 

       그러면 화엄경 수미정상게찬품(華嚴經 須彌頂上偈讚品)이라고 하는 데가 있는데, 거기에 뭔 말이 있냐면, 영수지옥고하고 득문제불명이언정(寧受地獄苦 得聞諸佛名), 차라리 지옥고를 받고, 여러 부처님의 명호를 들을지언정. 여래명호가 뭐냐. 이미 해탈하고 열반을 증득해서 무상법을 통달하여 시현세간이라, 세간에 나타나는 분을 여래라고 하거든요. 그럼 그 여래가 일체중생이 다 그렇게 될 수 있는 희망의 등불을 지금 보인거다 이거죠. 희망의 등불. 그래서 불수무량락(不受無量樂)하고 이불문불명(而不聞佛名)이라. 이 세상에서 한량없는 즐거움을 받으면서 부처님 명호 듣지 않는 것은 내가 안 하겠다. 이게 이제 보살의 서원인데 이런 말이 있어요. 그래서 뭐 경전을 많이 외우고 이거보다도 석가모니불 그러면 이거는 상에서 무상을 통달하고, 취하고 버리는 행위가 영원히 끊어지고, 온갖 지혜를 성취한 그런 아주 명명백백하게 표시 증거를 하는 분이다. 이러니까 우리의 미래가 석가모니가 될 수 있다는 거예요. 나도 무상법을 통달할 수 있고, 번뇌망상을 끊을 수 있고, 무량지혜를 얻을 수 있다. 그러니까 불명을 듣는다는 게, 부처님 명호를 듣는다는 게 그렇게 소중하였기 때문에, 지옥고를 받으면서 부처님 명호를 들을지언정, 무량락을 받으면서 부처님 명호 안 듣는 일은 난 절대로 안 하겠다. 이런 서원이 있어요.

 

       그다음에는 소이어왕석(所以於往昔)무수겁수고(無數劫受苦), 옛날에 무수한 지난 세월 동안에 한량없는 고통을 받아서, 유전생사(流轉生死中), 생사 중에 돌고 또 돌고 한 것은, 불문불명고(不聞佛名故), 부처님의 명호를 듣지 못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이게 이제 사찰에서 하는 신심불교, 원력불교, 공덕불교, 서원불교인데, 사찰불교는 뭘 알아내려고 연구하고 논문 쓰고 발표하고 그게 아니에요. 내가 스스로 믿고, 그 세계를 이루어가는 게 이게 사찰불교거든요. 대학 불교는 이게 증명이 안 되기 때문에, 이건 어떻게 발표할 수도 없고, 시험 볼 수도 없고, 또 학점 매길 수도 없고, 이거 안 돼요. 그래서 불교가 대학에 가면 과학이 돼요. 불교가 사찰에서는 이렇게 신심, 원력, 실천, 성취, 이런 쪽으로 가서, 이런 법문을 딱 듣고, 석가모니불, 화엄성중, 뭘 하든지 하면, 이거는 이제 마음이 석가모니불 할 때, 이렇게 염불을 하면 거기에는 선정과 지혜가 따라온다. 석가모니불 할 때는 그 순간은 자연히 망상이 안 일어나요. 그런 부분은 마음이 이미 그쳐진 거예요. 그래서 그걸 선정이라고 그래요. 선정. 그러면 이제 자꾸 하다 보면 마음이 맑아져서, 맑은 생각이 계속 일어나. 이걸 지혜라고 그래요. 그래서 염불을 하다 보면 염불을 할 때는 언제든지, 염불을 하는 게 먼저 일어나요. 그걸 지혜가 먼저 일어나고 그다음에 선정이 따라온다. 근데 이제 참선을 할 때는 먼저 그쳐요. 선정이 먼저 있고 그다음에 지혜가 있어요. 이게 틀려요. 경을 볼 때도 지혜가 먼저 있는 거예요. 금강경은 금강경을 죽 보면 그게 지혜인데, 보다 보면 다른 망상이 안 일어나니까 마음이 조용하게 그쳐져서 선정이 따라와. 그래서 선정이 먼저냐 지혜가 먼저냐, 지혜가 먼저냐 선정이 먼저냐. 이게 선후는 참선이나 간경이나 염불에 차이가 있을지언정 내용은 똑같아요. 나무아미타불을 하면 선정을 일부러 안 따라도 그 나무아미타불을 하는데 선정이 들어 있어요. 그게 사찰불교예요. 그러니까 가만히 마음을 돌아보고 있으면 마음이 조용해져요. 물로 말하면 그 먼지가 물 꼭대기만 조금 조용해도 맑은 물이 보이잖아요. 그래서 조금만 마음을 그치고 있어도 굉장히 마음이 편안하게 느껴져요. 그런데 이제 누가 옆에서 탁 건드리면 신경질이 확 나지. 그건 이제 깊이 그 먼지가 가라앉지 않았기 때문에 그런 거예요. 근데 이제 먼지가 점점 깊이 가라앉으면 웬만해서는 신경질 안 내요. 그런데 누가 목 내놓으라고 달려들면 신경질이 확 나거든. 그런데 그 번뇌망상이 완전히 싹 없어졌을 때는 목을 아무리 끊어가도 무상법을 통달했기 때문에 아무 장애가 없어요. 이게 무장무애예요. 뭔 소리인지. 먼 나라 얘기다. 먼 나라 얘기인데 이게 어려운 게 아니고요, 안 되는 게 아니에요. 안 해서 안 되는 거예요. 누가 그러잖아, 고양이가 나갔는데, 누가 옆에서 고양이도 생물이라 사랑을 줘야 된다이러잖아요. 그러니까 그 주인이 고양이 저한테 줄 사랑이 어딨어이랬거든. 근데 그건 모르는 소리예요. 사랑이라는 거는 어디 창고에 쌓아놓고 하는 게 아니에요. 하다 보면 할수록 사랑이 점점 생기는 게 사랑이에요. 사랑이 하면 할수록 생기는 거지 어디 쌓아놓은 걸 보고 예금한 거 꺼내다 쓰듯이 그렇게 하는 게 아니다. 뭔 소리예요. 몰래 박수 치는 거예요. 지금 박수를 같이 쳤으면 내가 기분이 좋았을건데. 사랑은 쌓아놓고 하는 게 절대로 아니에요. 하면 생기는 게 사랑이에요. 하면 생겨. 그렇듯이, 이 기도나 이런 것도 기도가 안 된다고. 그게 아니에요. 안 해서 안 되는 거예요. 하면 돼요. 경도 자꾸 읽으면 마음이 조용해지고 머리가 맑아져. 그런 거예요. 그게 이제 석가모니가 원했던 해탈 열반이지 다른 목적을 위해서 한 건 아무것도 없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