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5월 20일 음력 4월 초하루신중기도 입재 법문 2023-05-20

 

      안녕하십니까. 오늘 계묘년 4월 초하루 진관사 신중기도 입재 법문입니다.

      오늘 법문의 주제는 여래소성법(如來所成法), 여래가 성취하신 법, 여래소성법, 이런 내용인데요.

     이 동아시아에서 세 글자가 총칭 명칭이 있어요. 총칭 명칭. 그게 뭐냐면 물건 물자하고 물, 또 도라고 하는 길 도자하고, 또 법이라고 하는 법 법자가 개별 명칭이 아니라 총칭 명칭이에요. 법이다 그러면 전체 모든 것. 도라고 해도 마찬가지고, 물이라고 해도 마찬가지고.

 

 

爾時世尊始成正覺

이시세존시성정각

二行永絕 達無相法

이행영절 달무상법

立不思議 普見三世

입부사의 보견삼세

(華嚴經 如來名號品)(화엄경 여래명호품)

 

      그러면 여래소성법, 그러면 여래께서 성취하신 법이 무엇이냐. 화엄경 여래명호품(華嚴經 如來名號品)에 보면, 이시에 세존이(爾時世尊), 이때 세존께서, 부처님께서, 시성정각(始成正覺)하시니, 처음으로 정각을 이루시니. 그러니까 여래는 성정각이에요. 정각을 이룬 거예요. 여래 성정각. 이게 여래의 소성법이죠. 여래께서 성취하신 법이다.

 

      그럼 정각이 뭐냐. 첫 번째 말씀이 이행이 영절하고(二行永絕), 여래는 두 가지 행위가 영원히 끊어졌다. 이렇게 시작이 돼요. 그럼 두 가지 행위는 뭐냐. 하나는 취행, 취하는 행, 취하는 행이 뭔가. 취할 취자는 구할 구잔데, 인간은 태어나면서부터 계속 구해요. 구해도 구해도 끝이 없어서, 구하면서 태어나고 구하면서 죽어요. 죽을 때도 대략 우는데 왜 우느냐. 구하던 것이 안 구해져서 울면서 죽는 거예요. 그럼 태어날 때는 왜 우느냐. 뱃속이 좋은데, 그 어렵게 세상에 나와서, 배 속에 있을 때는 탯줄로 숨을 쉬어서 편안했는데, 밖으로 나오니까 자기 코로 숨을 쉬어야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무섭기도 하고 힘도 들고. 왜 우냐. 편안한 걸 그때부터 구하니까 왜 이렇게 어려운 게 많나. 그 공포와 그 불편함 때문에 ~”하고 우는 거거든요. 그래서 운다고 신기해하는데 신기할 거 하나도 없어요. 다 저 살라고 우는 거예요. 저 살려고. 거기 엄마는 없어요. 인생이라는 게 그런 거예요. 인생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자기 중심이고 엄마한테서 먹고 튀는 거다. 먹으면 도망가요. 안 도망가면 이건 더 큰일이여. -도망간다는 얘기 하니까 이제 마스크가 먼저 도망가려고.- 그러니까 근데 그 취행이 영절하고, 취하는 행위가 영원히 끊어졌어요. 그게 깨달음이에요. 구하는 일이 없어요.

 

      두 번째는 사행이 영절하고. 버리는 행위, 버릴 사자. 인간은 하나 구하면 하나 버리거든요. -축원 계속 했으면 좋겠네. 난 편안히 쉬면 되니까.- 하나 취하면 하나 꼭 버립니다. 그래서 이게 취사가 멈추질 않아요. 한 사람 버리고 또 새 사람 만나고 맨날 이래요. 맨날 이래요. 근데 여래는 취행이 영절하고, 사행이 영절이라. 버리는 행위가 완전히 끊어졌다.

 

      그럼 어찌 돼요. 할 일이 없는 거예요, 세상에는. 세상에는 전부 취행과 사행, 취하고 버리는 일인데 그 일이 끊어졌으면 어떻게 돼요. 할 일 전혀 없어요. 그러니까 할 일이 많다는 거는 전부 번뇌 망상이에요. 알고 살아야 돼요. 어떤 사람은 바빠서 좋다고 그러는데, 바쁜 사람은 번뇌 망상이 제일 많은 사람이에요. 왜냐하면 웬만한 건 취해도 만족 못 하는 성격이거든. 나이가 들어도 계속 인정받으려고. 어떤 사람은 80에도 떨린다고 하더라고. 80에 뭐 하려고 떨어. 아니 80에 떨 일이 도대체 없는데 스스로 떠는 거예요.

 

      그래서 이행이 영절이요. 취하는 행위, 버리는 행위가 영원히 끊어지고, 달무상법(達無相法)이라, 없을 무자, 형상 상자, 법 법자, 무상법을 통달했다. 무상법이라고 하는 건 진여법을 말해요. 흘러도 흘러도 흘러도 참 그대로, 무엇하고 만나도 만나도 만나도 참과 똑같다. 이걸 진여법이라고 하거든요. 진여법을 통달했다. 죽어도 죽어도 죽는 일이 없고, 나도 나도 나는 일이 없는 진여법. 꿈을 꿔도 꿔도 달라지는 일이 없고, 꿈을 안 꿔도 안 꿔도 달라지는 일이 없는 이 진여법을 통달을 했어. 통달이라는 건 의심이 전혀 없다는 얘기죠. 세월이 가고 장소가 바뀌어도 진여법에 대한 의심이 전혀 없어서, 진여법을 항상 눈앞에서 보는 거예요. 이걸 현견진여(現見眞如)라고 그러는데, 현재라는 현자, 볼 견자, 진여법을 현재 항상 보고 있어요. 이게 달무상법이에요그래가지고 입부사의(立不思議)하고, 부사의, 아니 불자, 생각 사자, 의논할 의자. 이건 생각할 수 없는 거. 이 번뇌망상으로 생각할 수 없는 법을 가르쳐요. 그게 이제 진여법을 가르치고, 두 가지 행위가 영원히 끊어진 세계를 가르치는 게 이게 부사의법이죠.

 

 

      그래서 보견삼세(普見三世). 과거, 현재, 미래를 통으로 다 본다. 이 보견이라는 건 넓을 보자인데, 통째로. 지나간 일이 많이 있었는데 지금 지나간 일을 생각하면 흔적도 없거든요. 현재도 한 백 년 지나가면 흔적도 없어요. 그럼 백 년 후에는 뭔가. 역시 현재와 똑같은 거예요. 그래서 그냥 눈앞의 것만 보는 게 아니라 과거, 현재, 미래를 통째로 다 봐. 이걸 보견삼세라고 그래요.

      이 경지에 올라갈 분을 성정각이라고 한다. 정각을 이뤘다고 한다. 이렇게 화엄경 여래 명호품에서 몇 구절로 설명을 했어요.

 

一切凡夫 無明業相 見聞覺知

일체범부 무명업상 견문각지

           三界輪迴 無有息止

           삼계윤회 무유식지

 

      그러면 정각을 이루지 못한 범부는 뭐냐. 일체범부(一切凡夫) 무명업상(無明業相)이라고 그러는데, 무명은, 무명업상은 번뇌망상이라는 소리예요. 무명은 어리석음인데, 뭔 어리석음인가. 이 진여법을 모르는 걸 무명이라고 그래요. 시장에 가서 뭐 물건 사고 이런 거 모르는 게 아니라 진여법을 모르는 것을 무명이라 그런다. 밝음이 없다. 이 진여법을 모를 때는 이 구하고 버리는 일이 계속돼요. 진여법을 모르기 때문에. 무상법을 모르니까 구하지 않으면 못 살고 버리지 않으면 못 살아요. 그래서 뭐 청소는 할수록 좋고, 이거 뭐 티끌 묻히는 건 안 할수록 좋은 거 아니에요. 이렇게 돼서 이거 안 하면 못 살아요. 그래가지고 무명업상으로, 무명업이라는 건 어리석게 계속 취하고 버리는 업의 행동으로, 견문각지(見聞覺知)를 하는데, 이 계속 구할 때는 눈으로 구하고 이게 견이요 견. 눈으로 가면 그냥 그냥 보는 게 아니에요, 눈으로 보는 거는. 내가 아는 건가 모르는 건가, 좋은 건가 나쁜 건가, 항상 눈으로 그걸 살피는 거예요. 누가 딱 지나가면 아는 사람인가 모르는 사람인가. 그럼 과거에 만났던 사람은 아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고, 못 만났던 사람은 모르는 사람으로 분류가 되잖아요. 근데 항상 눈으로 구하는 게 이게 무명이 하는 일이에요. 또 듣는 것도 항상 귀로 들어요. 저 아는 소린가 모르는 소린가, 좋은 소린가 나쁜 소린가. 이게 견문, 다 무명업이 하는 일이다. 그래서 무명뿐이에요. 왕이 하나 있으면 그 왕이 밑에 사람들을 다 시켜서 왕업을 달성하는 것처럼, 무명이 있으면 그 무명이 견문각지를 통해서 무명업을 이루어가요. 이게 범부의 하는 일이거든요. 그다음에 이제 각이라는 게 있어요. 각은 비각, 코로 느끼는 거, 냄새 맡는 거. 비설, 혀로 느끼는 거. , 몸 전체로 느끼는 거. 그래서 이제 코로 구하고 맛으로 구하고 몸 전체 촉감으로 구하고, 전부 구하는 행위에요, 이게요. 또 지는 과거에 경험했던 거, 다 알고 있고, 현재의 견문각 하는 거 다 판단하고 있고, 미래가 어떻게 될지 전부 계산하고 있고, 이게 지각이란 말이죠. 지각. 그래서 전부 느끼는 거예요. 시각 청각 후각 미각 촉각 지각.

 

       그러면 이 느끼는 거는 특징이 뭐냐 하면, 전부 밖에 거를 느끼는 거예요. 밖에 거. 보는 것도 밖에 것 보지요. 듣는 것도 밖에 거 듣죠. 느끼는 것도, 전부 코로 느끼는 것도 밖에 거 아니에요. 근데 여기 이제 역할은 조금씩 달라. 성격이 달라. 시각하고 청각은 떨어져야 느껴요. 이게 이이라고 둘은 떨어져야 된다. 그런데 후각하고 미각하고 촉각은 붙어야 느껴요. 이건 합삼이라고 그러는데, 이이합삼, 둘은 떨어져서 느끼고 셋은 합해서 느낀다. 이 지각은 전부 이제 분별해서 느끼는 거죠. 분별.

       이렇게 돼서 진여법을 모르기 때문에 전부 생멸법의 노예가 돼요. 죽고 사는데 노예가 돼버려. 그래서 항상 삼계에 윤회(三界輪迴)를 하게 돼요. 욕계, 색계, 무색계. 돌고 돌아. 그래가지고 그 돌고 도는 일이 끝나지를 않는다. 무유식지(無有息止).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이 견문각지 무명업상이 딱 멈춰져서, 그 견문각지에 묻혀져 있던 지혜가 활짝 드러나면 거기에 이제 진여법을 알게 되고 이행이 영절하게 돼요.

 

奉佛佛子 信心堅固 修福勤學

봉불불자 신심견고 수복근학

          天上人間 福德具足

          천상인간 복덕구족

 

      그런데 봉불불자(奉佛佛子), 이렇게 삼계에 윤회하는 범부 중에서도 부처님을 잘 친견하고 부처님 법을 받드는 불자는 신심이 견고(信心堅固)해요. 그 무슨 신심이냐. 여래의 깨달은 진여불성, 진여불성에 대한 믿음이 견고하고 또 인과응보에 대한 믿음이 견고해요. 이제 중생들이 잘못해도 벌 안 받는다. 이 믿음이 굉장히 강해요. 그래서 죄 중에 모르는 죄가 제일 큰 죄다 이러고. 벌 중에 괘씸죄가 큰 벌이다 이러고. 그러니까 뭘 모르느냐. 인과를 믿지 않는 게 큰 이게 어리석음인데. 그래서 맨날 술 먹고 놀아도 술이 안 취하기를 맨날 바래요. 근데 그만 먹으라면 화내요. 하나도 안 취했다고. 그게 이제 인과를 모르는 거죠. 그리고 자기 인생이 자기 마음에서 오는 걸 안 믿고, 저 하늘에서 뚝 떨어지는 걸로 알고, 자기 부모에게서만 오는 걸로 알고, 자기 시절 운수에서만 오는 걸로 알고, 이거는 진여불성을 안 믿는 거거든요. 인과응보를 안 믿고, 진여불성을 안 믿으면 그게 무명업상인데. 봉불불자들은, 부처님을 잘 받드는 불자들은 이 진여불성과 인과응보에 대한 신심이 견고해. 견고하다고. 술 취하기 싫으면 술을 안 먹고, 조금만 취하고 싶으면 조금만 먹고, 이게 인과응보거든요. 다른 사람한테 존경을 받고 싶으면 내가 먼저 다른 사람을 존경을 하고, 무시를 당하고 싶으면 다른 사람을 먼저 무시를 하고. 그런데 저는 다른 사람을 인정하지 않으면서 다른 사람으로부터 인정받기를 바라는 거는 이거 인과응보를 안 믿는 거예요. 전혀 안 믿는 거예요. 그리고 사람은 한 번 죽으면 그만이다 이거는 진여불성을 안 믿는 거예요. 이 세상에는 한 개인이 죽거나 살거나 상관없이 그대로 참 그대로가 여여하게 돌아가는 법이 있는데, 참 그대로 여여한 법이 있다는 걸 안 믿어. 나 하나 죽으면 그만이다 이거예요. 내가 죽어도 지구는 돈다. 나 죽는다고 지구가 안 도는 거 아니거든. 그래서 이런 인과에 대한 신심과 진여법에 대한 신심이 강해서 수복을 근학(修福勤學)이라, 복을 닦는 일을 부지런히 배워. 이게 봉불불자들이 하는 일이에요. 좋은 일을 하면 복이 생기고 나쁜 일을 하면 죄가 생기는데, 좋은 일 하는 이 복을 닦는 법을 부지런히 배우면 그게 봉불불자예요.

       그리고 천상인간(天上人間)에서 이 사람은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에 떨어지질 않고, 봉불불자는 인간이 아니면 천상에 난다. 인천복을 받는다 이거지. 인천. 사람이 이게 인간 세상에 다시 환생 하는 것도 이게 그냥 쉽게 되는 게 아니에요. 지금 우리가 육도 윤회를 볼 때 이게 로또 맞은 일과 마찬가지라니까요. 인간에 태어났다는 게. 인간은 로또다. 지옥 아귀 축생 아수라가 있는데 그중에서 인간에 태어났단 말이에요. 그런데 다시 인간에 태어난다는 거는 노력하지 않으면 안 돼요. 또 인간보다 더 나은 천상에 태어난다는 거는 더 좋은 거죠. 이게 인천복락인데, 복 복자, 즐거울 락자. 이 복 닦는 일을 부지런히 배우면 천상 아니면 인간에 환생한다. 이런 걸 환생. 더 이제 염불 잘하면 극락에 왕생한다. 그러니까 우리가 원하는 일은 환생 아니면 왕생을 원해야 되는 거예요. 극락세계에 가는 건 왕생이라 그러고, 인천 세상에 다시 오는 건 환생이라 그런단 말이에요.

 

一切菩薩 般若觀照 現見佛性

일체보살 반야관조 현견불성

           無有恐怖 遠離妄想

          무유공포 원리망상

 

 

       그러면 일체보살(一切菩薩)들은 어떻게 되냐. 일체 보살은 이 무명심 거기서 보리심으로 넘어가는 반야심이 있는데, 무명심은 그냥 견문각지를 계속하는 거고, 이 반야심은 볼 관자, 조명이라는 조자, 관조(觀照)라고 그래요. 무슨 현상이 나타나면 무조건 쫓아가서 구하는 게 아니라 이걸 바라봐. 응작여시관(應作如是觀). 응당히 이와같이 보라. 조견오온개공(照見五蘊皆空), 그게 보살이에요. 오온이 다 불생불멸임을 조견한다. 비춰본다. 보살은 뭐든지 뭐가 나타나든지 관조를 해요. 보는 걸 해요. 이걸 택법관조(擇法觀照)라고 그래요. 하늘이 보이면 하늘을 관조하고, 땅이 보이면 땅을 관조하고, 죽고 사는 게 보이면 죽고 사는 걸 관조하고. 이 법을 간택을 해서 가려서, 지금 이 법당 기둥을 내가 딱 본다. 법당 기둥을 보는 건 이건 택법이에요. 가릴 택자, 법 법자. 가린다는 말은 선택이란 말이죠. 법당 기둥을 내가 딱 선택을 해서 저 기둥의 실상이 뭔고보는 거예요. 그럼 생로병사를 느끼면, 생로병사를 딱 선택을 해서, 생로병사는 법이고 선택한다는 것은 가리는 건데 간택이란 말이지. 가려낼 간자. 이게 뭐든지 눈앞에 나타나면 그 눈앞에 나타난 거를 선택을 해서 지목을 해서 딱 생각을 멈추고, 생각 이전의 생각으로 그걸 봐요. 그래서 생각으로 보는 걸 망념이라고 그러고, 망념, 허망할 망자. 생각이 떠오르지 않는 상태로 보는 거를 정념(正念)이라고 그러거든요. 바를 정자, 생각 념자. 거기에 어떤 자기 생각을 붙이지 않고 생각 이전의 생각으로 딱 본단 말이야. 이게 정념관조다. 이 정념관조라는 말은 강원에서 가르치는 절요라는 책이 있는데, 절요 서문 부분에서 딱 강조한 말이 <정념 관조하라>. 정념관조하면 금방 깨닫게 돼요. 뭐든지 눈앞에 나타날 때 그걸 딱 선택을 해서 생각을 일으키지 말고 그대로 여여한 마음으로 본다. 본다. 그러면 처음에는 물질을 봤는데, 나중에는 그 물질 속에서 눈을 감지도 않은 상태에서 진여불성을 보는 거예요. 이걸 현견불성(現見佛性)이라고 해요. 처음에는 이 찻잔을 봤는데 이걸 정념으로 딱 관조를 하고 있어요. 이 찻잔이 그대로 있는 상태에서 여기서 진여 불성을 봐요. 이 그릇을 보는 게 아니라. 이게 반야관조예요. -이런 소리 하면 또 어렵다고 짜증 내면 안 되는데. 짜증 낼 수도 있지.- 그래서 택법관조하면 현견진여라. 이게 묘법이에요. 뭐든지 눈앞에 나타났을 때 그걸 정념으로 딱 선택해서 관조하면 거기서 진여불성이 보이지, 다른 게 보이질 않아요. 왜냐하면 일체 만상에는 진여불성밖에 없거든. 다른 거를 보는 거는 전부 전도몽상이고 망상 집착으로 다른 걸 보는 거다. -무슨 소리인지. . 심오한 것도 같고 헛소리도 같고 그렇죠.- 진여불성뿐인데, 다른 여러 가지 분별상을 보는 거는 전도몽상으로 보는 거다, 이 소리예요. 그게 반야심경에서 보는 거 아니에요, 전도몽상. 전도라는 건 뒤바뀐 거. 있는 데서 있는 거 찾는 거 이걸 전도라고 그래요. 기우멱우(騎牛覓牛). 소를 지금 타고 있는데 기우, 소 탈 기, 다시 또 소를 찾아. 소를 탄 상태에서 소를 찾아 그걸 멱우라고 하거든요. 그런 걸 전도라고 그래요. 자기 집에서 자기 집 찾는 거, 해탈 속에서 해탈을 찾는 거, 이런 걸 전부 전도몽상이라 그래요.

그러면은 무유공포(無有恐怖)하고, 그렇게 현재 물건 속에서 진여불성을 보면 공포가 없어요. 그 무유공포는 뭐냐. 공포라는 거는 다섯 가지 공포를 화엄경 환희지품에서 설명을 하는데, 첫째는 전도망상, 몽상으로 불안에 대한 공포가 있어. 살지 못할까 하는 공포. 내가 못 살면 어떡하나. 그다음에 악명에 대한 공포가 있어요. 나한테 무슨 악명이 들러붙어서 나한테 나쁜 소문이 나면 어떡하나. 그다음에 사망 공포가 있어요. 죽으면 어떡하나. 이게 무명업상으로 살아가는 범부중생의 공포거든요. 그 다음에는 타악도에, 내가 내생에 악도에 떨어지면 어떡하나, 이런 공포가 있어요. 그런 사람은 더러 있더라고. “아니 내생에 내가 나쁜 데 가면 어떡하죠?” 그런 공포심이 일어나면 다른 방법 없어요. 경을 자꾸 읽으세요. 염불을 오래오래 하세요. 그러면 악도에 떨어질 염려가 하나도 없어요. 근데 경도 안 읽고 염불도 안 하고 악도에 떨어지면 어쩌나 걱정만 하면 그 사람 반드시 악도에 떨어져요. 걱정 근심으로 악도를 면하는 게 아니에요. 간경, 염불로 악도를 면하는 거예요. 그다음에 대중공포가 있어요. 대중공포. 이 많은 사람 중에 나보다 더 잘난 사람이 많으면 어떡하나, 이게 대중 공포거든. 그런 거 하나도 걱정할 거 없지. 자기가 이 일체 현상에서 진여불성을 보고, 허망한 걸 구하지 않고, 진실에 대한 정진을 해나가는 사람이 대중이 두려울 게 뭐가 있어. 대중이 두렵다는 거는 자기의 진실성이 없을 때 대중이 두려운 거예요. 자기 진실성을 갖춰야지, 자기 진실성을 갖추지 않고 대중을 기준으로 해서 잘난 대중이 있고 못난 대중이 있다고 그러면, 잘난 사람은 두려워하고 못난 사람은 오만하고 그게 절대로 아니에요. 자기 진실성을 갖춰라. 그럼 대중은 없다. 언제나 자기 진실성뿐이다. 이런 다섯 가지 공포가 없다고 그래서 무유공포라고 그래요. 무유공포.

      그다음에 원리몽상. 원리전도몽상이라는 같은 말인데, 있는 건 싫어하고 없는 건 구하고 이런 게 다 몽상이거든요. 자기는 한 사람 뿐이여. 근데 얼굴 보고 자기 모습을 자꾸 고치고 싶어. 그건 몽상이에요. 자기 현재 있는 모습이 뭐가 어때서. 현재 있는 모습으로 보지를 못하나, 듣지를 못하나 뭐가 어떻다는 거예요 도대체. 그런 걸 다 멀리 여읜다. 그걸 보살이라고 한다. 원리몽상 무유공포 이게 보살이에요.

      그러면은 도대체 여래는 어떻게 해서 여래가 됐을까. 여래하고 범부하고는 종자가 다른가. 여래될 종자는 따로 있고 범부될 종자는 따로 있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되는데 이것을 해결한다고 무진 애를 썼는데, 중생과 부처가 어떻게 다르냐. 이런 문제가 있어요. 그래서 이 문제를 해결한다고 어떤 스님이 3년 동안 경상북도 봉암사 있는데, 그 문경 쪽 학가산이라고 있고 보문사라고 있는데, 거기로 고려시대 목우자 지눌스님이 화엄경을 짊어지고 들어가서 학가산 보문사에서 3년 동안 화엄경을 보다가 화엄경 여래출현품에서 이 구절을 만나서, “! 중생과 부처가 본래 다른 게 아니다.” 이걸 깨달았단 말이에요. 얼마나 감동을 받았는지 그냥 철철 눈물을 흘리고 그 책을 머리에 이고 하염없이 돌았다. 이게 구도의 기쁨이거든요. 도를 구하는 기쁨이 있어. 이 기쁨이 극한에 올라가면 울어요. 좋아 좋아. 이건 극도에 못 간 거예요. 좋다는 말도 안 나오고 눈물부터 나와. 근데 요새는 울면 너 미쳤나 이럴까 봐. 왜 우노 이럴까 봐. 그럼 안 통하는 거지. 좋아 좋아하는 건 그건 껍데기요. 껍데기. 진짜 좋으면 운다고.

 

無一衆生 而不具有 如來智慧

무일중생 이불구유 여래지혜

但以妄想 轉倒執著 而不證得

단이망상 전도집착 이불증득

若離妄想 一切智 自然智 無礙智則得現前

약리망상 일체지 자연지 무애지즉득현전

(華嚴經 如來出現品)(화엄경 여래출현품)

 

      그래서 이 중생과 부처가 이게 다른 게 아니로구나 하는 것이 화엄경 여래출현품에 말씀이 있어요. 그래서 거기에 뭔 말이 있냐면, 한 중생도, 어떤 한 사람의 중생도 무불구유 여래지혜라(無一衆生 而不具有 如來智慧), 여래의 지혜를 갖추어 있지 않은 이는 없다. 여래의 지혜가 다 갖추어 있다는 거예요. 여래의 지혜가. 다 갖춰져 있는데, 단이망상 전도집착(但以妄想 轉倒執著)으로, 망상과 전도와 집착으로 이불증득(而不證得)하나니라. 그 여래의 지혜를 증득하지 못하느니라. 증득이란 그냥 얻는 거예요. 자기가 깨달아서 얻는 거. 그러니까 여래 지혜가 다 있는데 그걸 못 깨닫고 못 얻는 것은 거기서 세 가지를 얘기했어. 망상, 전도, 집착. 그것 때문에 못 얻는다. 그러니까 망상 전도 집착만 없으면 다 열렸다 이 말이죠. 아 이게 중생심이 바로 부처다라는 말이 여기 있구나. 그래가지고 그냥 그냥 뭐 그 기쁨은 이루 말할 수가 없지. 그래서 이 선과 교의 문제가 다 해결됐어. 선에서는 마음을 얘기하고 교에서는 부처를 얘기하는데, 이 마음과 부처가 조금도 다름이 없구나. 이래가지고 그다음은 약이, 만약 여읜다면, 뭘 여의어요? 망상. 약리망상하면, 만약 망상을 여읜다면, 일체지와 자연지와 무애지가 즉득 현전하나니라(若離妄想 一切智 自然智 無礙智則得現前). 즉득이라는 거 곧 현전함을 얻는다. 현전이라는 건 앞 전자도 이게 나타날 전자고, 나타날 현자도 나타날 현자고. 앞에 뒤에 나타나는 게 아니라 그냥 나타나는 거예요. 시방삼세가 없이, 과거 현재가 없이, 동서남북이 없이, 그냥 나타나는 걸 여기서 현전이다 이러거든.

 

      그러면 일체지(一切智), 모든 지혜, 자연지(自然智), 이 지혜라는 게 어디 쌓아놨다가 컴퓨터처럼 입력해야만 나오는 게 아니라, 그냥 허공에서 바람 불듯이 자연스럽게 나오는 지혜를 자연지라 그래요. 일체지, 뭐든 지, 뭐든 지혜, 자연지혜. 또 무애지(無礙智), 걸림이 없는 지혜라. 이 세간지라는 거는 가는 데마다 이 지혜의 용도가 달라서 가는 데마다 배워야 돼요. 이쪽에서 배운 거 가지고 저쪽에서 안 통해요. 그래서 공자라는 사람도 영리한 사람인 게, 사당에 들어가서 예법을 논하는데, 그 공자가 유명한 지식인이니까 사당에 들어가서도 예법을 잘 알 것이다 이랬거든. 제사 지내는 공간에. 그런데 딱 가자마자 거기 사당 집사한테 하나하나를 물었어요. 요건 어떻게 합니까. 요건 어떻게 합니까. 요건 어떻게 합니까. 그래서 이게 완전히 빗나간 거예요. 공자는 다 알 줄 알았는데 그걸 집전한 사람에게 하나하나 묻는다. 그게 어떻게 공자가 예를 안다고 하는 것이냐 그러니까, 공자가 그런 말을 했어요. “사당에 들어가서는 사당법을 묻는 것이 예법이다.” 이게 무애지라는 거야. 무애지. 걸림이 없어. 이 세상 건 그런데 제 방식대로 했다간 다 걸려요. 그거 물으면 어때. 얼마나 좋아. 이거 뭐냐. 이게 무애지가 되려면 어느 곳에 가든지 안 통하는 게 없는 거죠. 안 통하는 게 없는. 그리고 요새 나이 많은 시어머니들이 시어머니 방식대로 며느리한테 얘기하면요, 그 큰일 나요. 30년 전의 법이 지금 통할 수가 없어요. 근데 습관적으로 잔소리 하는 수가 있거든. 그건 자기가 몰라서 그래요. 모르면 잔소리하고, 알면 배운다. 얼마나 좋아. 요건 어떻게 하는 거냐. 요건 어떻게 하느냐. 아니 며느리한테 배우면 좋잖아요. 유명한 공자가 사당에 가서 집사한테 다 물었는데. 나도 한 십몇 년 전에 제등 행렬할 때는 저 기름으로 만든 초를 불에 붙여서 들고 다녔거든. 근데 요새는 그게 아니라고 하더라고. 옛날식으로 제등 행렬하니까 초 사서 초 준비하라고 그러면 그거 통하겠어요? 안 통하는 거라고. 그러니까 무애지는 항상 걸림이 없어야 돼. 그냥 그 당시에 가장 좋은 거를 늘 쓰는 거지. 그게 이제 그런 게 바로 현전한다 나타난다 이거거든요.

      근데 이제 이런 말씀이 이 조사의 교법에서는 여래지혜라는 말보다 일념심법이라고 그래요. 한 생각 마음 법. 일념심법이 있다. 한 생각이야. 한 생각. 이거는 과거 현재 미래 삼세도 없고 동서남북 사방도 없고 언제나 일념심법이다. 근데 이거는 항상 평등하고 항상해. 그래서 이걸 평상법이라고, 평상심법. 순서가 없어요. 평등이. 또 변화가 없어요. 그래서 이걸 평상이라. 도가 뭐냐 평상심이 도다. 남자도 없고, 여자도 없고, 죽고 사는 것도 없고, 그냥 평상. 평상심법. 그리고 무사심법이란 말을 써요. 무사심법. 일이 없어. 생로병사도 없고 흥망성쇠도 없고, 부귀영화도 없고 온갖 고뇌, 장애도 없고. 이런 게 전부 일인데, 그 심법에는 평상심법, 무사심법이다. 무사, 일없는 마음법이다. 그래서 이걸 하나 딱 증득하면 할 일이 전혀 없는 거죠. 이걸 요사범부(了事凡夫)라고 그래요. 일을 다 수료한 범부다. 내가 뭐 내 모습이 갑자기 뭐 관세음보살되고 문수보살되고 석가모니 된 게 아니에요. 범부요 범부. 그냥 눈 코 입 다리, 감기 오면 감기 앓고, 여름 되면 땀 흘리고, 그냥 범부여. 근데 이 무사심법을 하나 떡 증득하면 요사범부다, 일을 다 해 마쳤다. 두려운 일도 없고 잘못되는 일도 없고 요사범부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또 조사 가르침이에요. 그걸 조사선법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이 동아시아에서는 조사들의 가르침이 엄청나니까 그걸 외면하면 안 돼요. 뭐 하려고 외면을 해, 그 좋은 가르침을. 그렇게 되면 자연히 일체지 자연지 무애지가 늘 앞에 있다. 이게 무사심법이라는 거죠. 일 없는 마음법이다. 그걸 증득하면 요사범부가 된다. 일을 다 해 마친 범부가 된다. 이런 말이죠.

 

      그럼 이렇게 여래의 가르침에 대한 믿는 신심을 한 번 일으키는 순간에 여래가 떡 앞에 나타나시는 거예요. 이걸 강림이라고 하고 출현이라고 그래요. 여래가 강림하셨다, 오셨다 이거지. 출현하셨다 나타나셨다. 그러면 여래교법에 대한 신심을 일으켰을 때 여래가 강림하고 여래가 출연하지, 안 일으키면 안 나타나요.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은 다른 날이 아니라 여래 교법에 대한 신심을 일으킨 날이 부처님 오신 날이다. 또 여래를 믿는 그 신심을 일으켰을 때 여래를 보게 돼요. 여래에 대한 신심이 일어났을 때 여래를 보는 거지, 신심을 안 일으켰을 땐 여래를 못 봐요. 그리고 여래에 대한 믿음을 일으켰을 때 스스로 여래가 되는 날이다. 이걸 자성정각이라 그래요. 스스로 정각을 이룬다.

 

今日是好日 如來出現日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 날

今日是好日 如來親見日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뵙는 날

今日是好日 自成正覺日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되는 날

 

 

      그래서 오늘 4월 초파일이고, 부처님 오신 날 법문은 진관사에서 할 수도 없고 저기 창원에 우리 상좌 절에 가야 돼요. 상좌 오라는 데는 여기보다 더 무서워요. 안 가면 안 돼요. 그래서 할 수도 없고, 그래서 부처님 오신 날 늘 하는 법문인데, 부처님 오신 날은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일으켰을 때 오시는 거다. 그래서 이걸 한문으로 만들면 금일은 시호일(今日是好日)이다. 오늘은 뭔 날이냐. 부처님에 대한 신심을 일으킨 날. 금일은 시호일이니 여래 출현일(如來出現日)이다. 여래가 출현하는 날이다. 금일은 시호일이니, 오늘은 좋은 날이니, 여래 친견일(如來親見日)이다. 여래를 친견하는 날이다. 금일은 시호일이니 자성정각일(自成正覺日)이다. 스스로 정각을 이루는 날이다. 신심 하나로 친견도 하고 스스로 이루기도 하고 강림한 것을 느끼기도 하고 다 해요. 심심이 없으면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이걸 우리 말로 여러 사람들이 하는 말인데,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뵙는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되는 날>, 이런 거거든요. 이제 저하고 여러분들하고 같이 한번 읽어요. 오늘은 좋은 날, 오늘은 제가 읽으면 여러분들은 좋은 날, 부처님 하면 오신 날, -그 기억을 해야 되는데,-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뵙는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되는 날, 기억하시겠어요? 제가 먼저 읽어볼까요?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오신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뵙는 날, 오늘은 좋은 날 부처님 되는 날!” 참 좋네요.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