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신중기도] 7월18일 음력 6월 신중기도 입재 2023-07-18

 

 

        안녕하십니까. 반갑습니다. 여러분들을 오늘 이렇게 만나서 반갑고요. 저는 조금 전에 소개받았던 것처럼, 수원 봉녕승가대학이라고 스님들을 교육하는 전문 교육기관이 있습니다. 거기에 이제 몸담고 있습니다. 그리고 이제 오늘 여러분들께 말씀드릴 내용은 보현행원품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여러분들이 평소에 여기 진관사에서는 보현행원품을 많이 독송한다라고 들었는데, 맞죠? 그래서 그 행원에 대해서 조금 말씀을 드리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이제 <무엇이 행원인가>부터 여러분들이 아셔야만 될 것 같아요. <행원은 원을 가지고서 행동을 한다.> 그런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바로 행동 하나하나에 원을 세우면서 행동하는 것, 그것이 바로 행원입니다. 그래서 이제 이 행원은 물론 이 보현행원을 좁게는 보현행원품에 나오는 열 가지에 한정이 된다고 보지만, 넓게 보면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전부 다 보현행원입니다. 여러분들이 행동하는 모든 것 하나하나에 원을 세우고 행동을 하면 그것이 바로 보현행원이 되는 겁니다.

        예를 한번 들어보면, 운전을 직업으로 가진 운전기사님이 운전을 할 때 손님이 차에 탔어요. 그러면 그 손님을 태웠을 때 내가 태운 이 손님이 나와 인연이 됐으니까, 내가 목적지까지 잘 모셔다 드리는 것은 물론이고 앞으로 이 손님이 늘 건강하고 행복하십시오.’ 이러한 마음으로 운전을 하고, 그분을 목적지까지 모셔다 드리면 그것이 바로 보현행원이에요. 쉽죠? 여러분들은 보현행원이라고 하니까 막 엄청 어렵고 뭐가 거창하고 이런 것 같지만, 이렇게 쉽게 생각해 보면 이 불교는 굉장히 쉽습니다. 쉬운데, 원체 이 자료가 팔만대장경으로 저장돼 있다 보니까 여러분이 생각할 때 엄청 어렵다고 생각하세요. 그렇죠?

        그러면 이제 이 보현행원은 어디에서 나왔느냐, 출처가 어디냐, 그건 알아야 되겠죠. 이 출처는 화엄경에서 나왔습니다. 화엄경이라고 하는 경전은 굉장히 경지가 높은 그런 경전입니다. 분량도 어마어마하게 많고, 내용도 굉장히 어려운데, 이 화엄경의 가장 작은 분량이 80권 화엄이에요. 그런데 이 80권의 화엄의 내용을 여러분들이 다 배우면 너무 어렵고 힘들고 무슨 소리인지 모르니까, 보현보살님께서 여러분들을 위해서 진정한 자비로서 10가지 원력으로 묶어서 생활의 실천에 옮길 수 있도록 만들어 놓은 것이 보현행원이에요. 그래서 이제 이 10가지 행원이 쭉 나오게 되는데, 또 열 가지라고 하니까 여러분들이 또 마음에 부담이 돼요. ‘열 가지를 내가 다 못하면 어떡하나그런 걱정 안 하셔도 돼요. 열 가지 다 못하면, 한 가지만 해도 되고, 열 가지를 또 다 하면 되고. 근데 열 가지 다 어렵지 않습니다. 하면 됩니다. 그래서 이렇게 보현보살님이 진정한 자비로서 묶어놓은 거, 만들어 놓은 거, 여러분이 실천하기 좋게 해놓으신 것이 보현행원품의 10가지 행원이다, 원력이다, 이런 소리입니다.

 

        자 그러면, 이 화엄경이라는 게 도대체 어떤 경전인지 그거는 조금은 알고 가야 될 것 같아요. 화엄이 어떠한 경전인가를 조금 이제 여러분에게 말씀드려보면, 80권이나 되는 화엄을 간단하게 말하기가 쉽지는 않겠지만 여러분들이 알아듣기 쉽게 말씀드려보면, 어떤 것이 화엄이냐. 부처님의 경지, 그러니까 부처님은 전지전능하시고 무소부주(無所不住)한 부처님이다. 즉 부처님은 온 우주에 꽉 차 계십니다. 공기처럼, 또 산소처럼 비처럼 이렇게 꽉 차 계시는 분이 부처님입니다. 이렇게 말씀드리니까 그 단어 자체가 또 어려워요. 무소부주다 하니까 무소부주가 뭐지? 어디든지 계시지 않은 곳이 없다는 뜻입니다. 그럼 이렇게 말씀드리면 여러분이 이해가 잘 안 돼요. 그래서 이해가 되게끔 제가 말씀을 드리려고 합니다. 이 우주가, 우리가 살아가는 이 모든 것들, , , , , 이 모든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또는 볼 수 없는 거, 전체를 다 통틀어서 물질이든지 물질이 아니든지 간에, 이 우리가 살아가는 공간에 만들어진 모든 것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가를 한번 생각해 보면은, 물질은 전부 다 여러분들이 보는 이런 물질이죠. 그럼 물질의 가장 낮은 단계, 물질의 근원이 되는 단계가 뭐냐 하면은, 쿼크라는 것이 제일 물질의 낮은 단계입니다. 우리 이 육안으로 볼 수 없는 거예요. 아주 몇만 배나 되는 작은 것을 볼 수 있는 현미경으로 보아야만 볼 수 있는 그러한 물질의 가장 낮은 단계, 지금은 쿼크보다 더 밑에 낮은 단계를 개발해냈다고 합니다. 그래서 그 쿼크라는 단계의 물질을 어떤 마음으로 바라보느냐에 따라서, 물질로도 보이고 에너지로도 보인다. 물질로 보였다가 에너지로 보였다가 한다는 겁니다. 그러면 이 우주가 만들어진, 우리가 눈으로 볼 수 있는 것 말고 정신적으로도 그렇고, 모든 만들어진 것은 전부 다 에너지로 만들어진 겁니다. 이것도 지금 거시화되어서 제가 지금 만지고 있는 이 탁상 또는 도자기 컵, 여러분들이 입고 있는 옷, 전부 모든 것이 다 거시적인 것이지, 미시적인 것으로 들어가 보면은 에너지로 만들어졌다. 그럼 이 에너지라는 것은 어디에서 생겨났느냐. 즉 부처님이라는 분은 어떤 분이 부처님이냐. 부처님은 에너지입니다. 에너지 자체예요. 그러면 일체 우주가 에너지로 만들어졌다면은 부처님으로 만들어졌다, 부처님의 기운으로 만들어졌다, 이렇게 볼 수 있는 거죠. 그런 입장에서 본다면, 산도 강도 물도 다 부처님인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 그 찬불가에 그런 가사가 있잖아요. <산도 강도 강물도 부처님 모습> 그런 찬불가 있습니다. 여러분 한번 찾아보세요. 들어보시기도 했을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원리이기 때문에 이러한 노래를 만들 수 있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바라보는 이 바깥에 있는 모든 것들, , , 나무, 건물, 이 모든 것들이 다 부처님의 에너지로 만들어졌다, 우리가 지금 숨 쉬고 있는 산소, 이것 역시 부처님의 에너지로 만들어졌다라고 볼 수가 있습니다.

        그렇다면 일체가 다 부처님이다. 가능하. 그러니까 부처님은 공기처럼 비처럼 이 우주에 꽉 차 있다. 가득하다. 근데 우리 중생들은 왜 그런 부처님을 못 보느냐, 내 자신이 딱 마음으로 칸을 막아서, 나는 나고, 너는 너고, 이렇게 분별을 하고 보니까 부처님이 눈에 안 보이는 거죠. 이래서 문제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제 이러한 부처님의 세계에 우리가 눈에 가린 가림막을 다 걷어내는 과정이 수행의 과정이 되겠죠. 그래서 우주에 꽉 찬 부처님의 세계, 그 부처님의 경지, 부처님의 세계를 설한 경전이 바로 화엄경전이다. 화엄경이다. 이렇게 말하니까 또 되게 어렵게 느껴지죠. 근데 사실은 쉬워요. 여러분들이 이해할 수 있게끔 이제 앞으로 풀어나갈 겁니다. 그래서 그러한 부처님의 세계, 부처님의 경지, 그것을 바로 설한 경전이다. 에둘러서 방편으로 이렇게 한 게 아니라, 바로 직설적으로 설한 것이 바로 화엄경이다라는 겁니다. 그래서 화엄경은 굉장히 어렵고 쉽지 않은 경전이다. 이렇게 모두들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로 이 화엄경은 뭐냐 하면은, 이러한 부처님이 될 수 있는 단계를, 52단계의 부처님이 되는 과정을 하나하나 다 말씀해서, <어떻게 수행을 하면은 부처님이 될 수 있다>라는 과정을 쭉 설명한 경전, 그래서 이 두 가지 뜻을 가진 것이 바로 이 화엄이라는 겁니다.

        그래서 이 화엄은 잡화엄식(雜華嚴飾)이다라고 표현을 합니다. 잡화엄식은 아주 여러 가지 꽃으로 장엄을 했다, 그런 뜻이에요. 여러분이 지금 설악산이라든가 금강산이라든가 이런 산이 굉장히 아름답다라고 들어보셨을 거고 또 직접 가보신 분도 계실 거예요. 그럼 설악산이나 금강산, -금강산은 저도 못 가봤습니다마는,- 같은 데를 가보면, 아주 단일하게 한 가지 바위만 있다든가, 한 가지 나무만 있다든가, 꽃도 한 가지 꽃만 있다, 그러면 장엄스러울까요? 바위가 있어도 그냥 밋밋한 바위가 쭉쭉쭉 서 있다 그러면 안 좋아 보이겠죠. 바위가 굴곡이 있고, 큰 바위도 있고, 작은 바위도 있고, 그 사이 사이에 또 나무가 나서 자라고, 그 기기묘묘한 모습, 그 사이에 또 소나무 같은 것도 아주 산이 높으니까 크게 자란 게 아니라 조그맣게 바위 틈에서 나서 자란, 이러한 모습들이 서로서로 모여서 그렇게 아름답고 거대한 모습을 우리에게 선사하는 거잖아요. 그러니까 하나하나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들, 저기 여러분들이 밟고 다니는 꽃 그런 꽃들도, 그 꽃들에게 여러분이 피지 마라이러면 안 피나요? 핍니다. 발로 밟고 다녀도 피어요. 필 꽃은 다 핍니다. 또 피라고 막 애를 써도 자기가 필 때가 돼야 피지 안 펴요. 그런 것처럼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에 지금 이 법당 안에 계시는 여러분들 모습이 다 각자 달라요. 눈코입귀는 다 있지만은 모습이 다 다르게 달려 있어요. 그러니까 다 각자 이렇게 구분을 하죠. 이분은 이분이고, 이분은 김 씨고 이분은 이씨고 이렇게 구분을 할 수가 있고, 각자 나름대로 다 다르기 때문에 또 그것이 장엄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저 정원 장엄이 잘 돼 있다고, 아주 좋다고 꽃 구경하러 가는 이런 정원에 가보면, 여러 가지 꽃이 다 한 곳에 잘 꾸며져 있으니까 그 정원이 아름다워 보이는 것과 똑같습니다. 그래서 여러분 각자 각자가 나름대로 결혼하고 자식 놓고 다 나름대로의 뭔가를 이루고 살고 있어요. 그것이 한 사람 한 사람이 다 꽃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 삼라만상의 모든 것이, 나무뿐만 아니라 모든 것이 그렇게 하나를 형성하고 있는 것과 다름이 없다.

        여러분들이 지금 진관사에 와서 계시는데, 진관사에 오시면 대웅전이 있고 또 옆에 건물이 있고 이렇게 딱 어우러져 있으니까 참 좋아 보이지, 만약에 대웅전만 하나 덩그렇게 있고 아무것도 없다. 보기가 안 좋죠. 그와 같다. 그래서 이 세상에는 착한 사람도 있고, 악한 사람도 있고, 못난 사람도 있고, 잘난 사람도 있고, 수많은 그러한 것들이 전부 다 하나의 어떤 것을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 하나하나가 다 꽃이다. 그래서 그러한 잡화엄식으로 꾸며진 거다.

        그러니까 한마디로 말하면 이 화엄은 이 세상에 우주가 돌아가는 모든 원리, 중생이 살아가는 모든 근본, 이런 것을 하나하나 다 자세하게 밝혀놓고 말씀하신 경전이다, 그런 뜻이에요. 그래서 이 화엄은 정말 높고 깊은 그런 경전이고 좋은 경전입니다.

       그런데 이렇게 우리가 이제 좋은 경전을 배우면서, 왜 그러면 보현행원을 우리가 지금 배워야 되느냐. 조금 전에도 이 화엄은 부처님이 되는 길을 알려준 경전이다라고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래서 이 10가지 행원 속에 부처님이 되는, 될 수 있는 방법을 여러분들이 실천할 수 있게끔 보현보살님이 만들어서 설해 놓으셨다 했죠. 그래서 여러분이 행원을 듣게 되면, 듣고 그 자리에서 한 가지라도 실천하면,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부처가 되는 겁니다. 그래서 이 화엄경과 다른 경전의 차이가 뭐가 있느냐 하면은, 다른 경전은 삼아승지겁을 수행을 해야만 부처가 된다라고 말씀하고 계세요. 근데 화엄경전은 그렇지 않습니다. 바로 바로 행원을 실천하면 너가 그 자리에서 바로 부처님이다,’ 이렇게 말씀하고 계세요. 그래서 화엄과 법화경은 불교의 가장 제일 윗 단계에 있는 경전이고 불교의 꽃이고, 불교를 대표하는 가장 높은 경전이다, 이렇게 평가를 합니다. 왜냐하면은 보현행원을 실천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고, 또 보현행원을 생각하는 그 마음이 바로 부처님 마음이지, 부처님 마음이 따로 있는 게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그렇게 말씀을 하시는 겁니다.

        그러면 여러분들이 이제 이 보현행원을 잘 듣고 들으면 부처님이 될 수 있는 길이 열립니다. 그래서 이제 이 부처님이라는 경지를, 우리가 부처님이 되고 싶어 하고, 되려고, 모두 우리 스님들은 이렇게 직접 머리 깎고 수행하려고 뛰어든 분들입니다. 그런데 세속에 계시는 여러분도 열심히 하면 얼마든지 바로 부처님이 될 수가 있어요. 그것이 바로 이 보현행원이다, 이 말이죠.

        그러면 부처님은 왜 돼야 되느냐. 스님들 생활하는 거 보면 굉장히 힘들어 보이고, 새벽에 그렇게 일찍 일어나서 스님들이 예불하고 수행하는 게 힘들어 보이고, 이래서 우리 불자님들은 따님이나 아드님이 출가한다 하면 아주 그냥 질색을 하고 말립니다. 그렇죠? 그래서 요번에 저희 봉녕사에서 이 스님들의 부모님을 초청해다가 템플스테이를 했습니다. 그래서 템플스테이를 하면서 그 부모님들이 자식들을 절에 보내놓고, 걱정하고, ‘아이고 우리 아무개가 절에 가서 얼마나 고생을 할까이럴까 봐, 부모님을 모셔다가 템플스테이 12일을 했어요. 회향할 때 저희들이 그분들의 소감을 들어보니까, 그래도 마음이 좀 놓인다고, 편안한 마음으로 돌아가셨습니다.

         그러면 이 부처님이 왜 돼야 되느냐. 부처님의 경지는 무한하게 좋은 자리입니다. 여러분들이 제일 좋아하는 거, 새해가 되면 여러분들 뭐라고 인사합니까? 복 많이 받으세요. 그 복이 뭡니까? 부자 되는 거잖아요. 여러분들이 좋아하는 게 돈이잖아요. 그렇죠? 돈 돈 돈. 그 돈 되고 부자 되는 거, 부처님의 자리는 부자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부처님은 십자재(十自在)를 가진 분입니다. 부처님의 경지가 더 이상 많은 게 있지만은, 여러분이 제일 좋아하는 게 이 물질, 부자, 돈이고 그렇죠? 그러니까 그 부분을 이제 말씀을 드리는 겁니다. 부처님은 십자재가 있는데 십자재를 다 말씀드리면 너무 시간이 길고, 여러분이 좋아하는 재자재, 재자재는 재물 자재입니다. 재물 자재는 그러면 어떤 경지가 되느냐. 여러분들 아마 많이 들어보셨을 거예요. 돈 나와라 뚝딱 하면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 집 나와라 뚝딱 하면 집 나오는 도깨비 방망이, 그거 하나씩 있었으면 좋겠죠, 그렇죠? 그런데 부처님의 경지는 그런 도깨비 방망이를 천 개 만 개 만들 수 있는 능력이다, 그러면 생각이 되겠죠. 얼마만큼 마음대로 할 수 있는지, 그죠? 온 우주에 있는 이 재물을 당신이 마음대로 쥐락펴락할 수 있다. 어느 정도냐. 과거의 것을 끌어올 수도 있고, 미래 것을 끌어올 수도 있고, 이런 능력이 부처님 자리입니다. 그런 부처님 자리 여러분들 한번 돼보고 싶지 않으세요? 돼보고 싶죠?

         그러면 이제 정신 바짝 차리고 잘 들으셔야 돼요. 재자재만 있는 게 아닙니다. 부처님 자리는 재자재만 있으면 별 그게 없죠. 그런데 재자재만 부처님 자리에 있는 게 아니라 뭐가 있느냐 하면, 수명 자재도 있고, 수명 자재는 죽고 싶으면 죽고, 살고 싶으면 살고 마음대로 하는 거, 또 수생자재입니다. 어디에 태어나고 싶다, 나는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싶다 그러면 극락세계에 태어나고, 지옥에 가서 중생을 좀 제도해야 되겠다 그러면 지옥에 태어나고, 돼지를 제도하겠다 하면 돼지로 태어나고, 제도를 다 마치고 나면 또 떠나고. 마음대로 하는 거예요. 그런데 여러분은 죽는다 그러면 벌벌 떨고, 그냥 안 죽으려고 야단이 나고, 병원에 가서 암이라는 소리만 들으면 그냥 울고 불고 야단 나잖아요. 그럴 게 하나도 없는 겁니다. 그러니까 이 부처님 자리라는 것이 그만큼 좋은 자리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보현행원을 공부한다는 것은 한량없는 공덕이 있다고 합니다. 어느 정도로 공덕이 있느냐. 여러분들 보현행원을 읽으셨다니까 거기 원문에 보면 보현행원의 소리를 귀로 스치기만 해도 무한한 공덕이 있다고 나와 있습니다. 어느 정도로 있느냐. 수많은 억겁 동안 수많은 사람을, 셀 수 없이 수많은 사람과 부처님을 공양한 공덕보다 보현행원을 듣는 것이 더 공덕이 크다. 또는 대방광불화엄경이라는 구절만 들어도 절대로 삼악도에는 떨어지지 않는다. 실제로 이제 그런 것을 경험한 것이 조선시대에 있었는데, 그 이야기까지 하면 여러분들의 시간을 너무 잡아먹는 것 같아서 그것은 생략을 하고 넘어가겠습니다.

         그런데 이렇게 공덕이 크다는 것을 여러분들이 믿지를 않아요. ? ‘설마 설마하니 그러려고, 아이고 난 못 믿어.’ 그렇게 공덕이 크다고 하는데 나는 못 믿는다. 그러면 그 못 믿는 것을 과학적으로 한번 이야기를 해봅시다. 생각의 비밀이라는 게 있는데 뭐냐 하면은, 생각은 성공을 여는 열쇠입니다. 보통 성공을 한 사람들의 공통점을 평균을 내보니까 정확한 목표와 그것을 이룰 수 있다, 나는 할 수 있다라는 신념을 가진 사람이 모두 성공을 했다는 거죠. 근데 이제 이 생각이라는 것은 머리 속에만 있는 게 아니고 물리적인 힘이 있어요. 우리는 생각을 하면 이건 뇌의 작용이다, 이렇게 말을 하는데 뇌의 작용뿐만 아니라 이것이 물리적으로 현상적으로 나타납니다. 나타난 것을 제가 지금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뭐냐. 여러분들이 지금 여기에 대웅전에 앉아 계시는데, 대웅전을 지은 분이 대웅전을 지으려고 설계를 하고, 어떻게 어떻게 몇 평짜리 대웅전을 무엇으로, 소재는 나무로 하고 어떻게 어떻게 짓겠다. 설계를 해서 지었을까요? 그냥 막무가내로 지을 수 있었을까요? 설계를 했죠. 설계가 뭡니까? 바로 우리 생각에서 나온 거잖아요. 그리고 여러분들 그 노래 있잖아요. ‘저 푸른 초원에 그림 같은 집을 짓고 살고 싶다.’ 그게 뭡니까? 그렇게 살고 싶으면 그렇게 자기가 마련을 해서 살면 되는 거예요. 그쵸? 그게 생각이 현실로 나타난 경우입니다. 여러분들이 앉아서 지금 법당의 부처님, -지금 제가 등을 지고 있습니다만- 부처님을 뵙죠. 부처님도, 저러한 부처님을 이렇게 이렇게 모셔야 되겠다라고 생각한 사람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이 바로 부처님의 모습이고, 이 진관사의 정원이나 건물 배치, 또는 템플스테이라면 여러분들이 눈으로 보는 이 모든 것들은 어디서 나왔어요? 사람의 생각에서 나온 겁니다. 그러니까 사람의 생각은 물리적으로 나타날 수가 있다, 없다? 있습니다. 이것이 증거예요. 그러면 여러분들이 보현행원을 듣고, “아 내가 이렇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라고 했으니까 바로 실천에 옮기면 바로 그 자리에서 여러분 부처님이 될 수 있을까요, 없을까요? 있어요. 이게 물리적인 힘이 된다는 겁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이 오면서 버스를 타고 왔든, 차를 갖고 오셨든 여러분들이 온 길, 여러분들이 모두 바라보는 이 모든 것들은 전부 다 사람들의 머리 속에서 나온 거예요. 그러니까 생각이 물리적으로 나타난 겁니다.

 

        그렇게 본다면, 우리가 생각을 달리 먹으면 달라질 수 있어요. 어느 고등학생이 조금 공부를 못했던 모양입니다. 그러니까 선생님이 너는 공부 못해.’ 이렇게 해서 그 학생이 나는 공부 못하는 학생이야이렇게 생각하고 아예 공부를 안 했어요. 그런데 그 학생이 고등학교 1학년이 됐는데, 고등학교 1학년 담임 선생님이 얘를 보고 너는 할 수 있어. 너는 앞으로 미국의 링컨 대통령처럼 그렇게 될 수도 있고.’ “니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뭐가 되고 싶으냐?” 그러니까 이 학생이 뭐가 되고 싶다 했겠죠. 그러니까 너는 그렇게 얼마든지 될 수 있어. 열심히만 해.” 그래서 그 선생님 말을 믿고 열심히 했더니 정말 그 학생이 나중에 교수가 됐습니다.

        이래서 그 사람의 생각이 중요한 거죠. 그래서 여러분이 이 보현행원을 들으면 공덕이 무량하다 하니까, ‘그렇게 무량해?’ 그게 아니에요. 생각 하나가 바뀌는 데 따라서 그 사람의 운명이 달라지고, 그 사람의 운명이 지금 달라지면 지금으로 끝나는 게 아니에요. 그것이 쭉 세세생생 이어집니다. 그러니까 나무가 되는 씨앗 하나가, 은행이 되는 은행 씨앗 하나, 은행 하나가 아주 작죠, 요만한 손가락보다 작습니다. 하지만 거기 싹이 터서 나무가 되면 큰 은행나무가 되잖아요. 똑같은 이치입니다. 여러분들 마음에 부처님의 씨앗을 심고, 그것도 심기만 하는 게 아니라 바로 내가 실천을 하면, 바로 내가 지금 부처님의 행동을 하고, 그렇게 부처님을 행동을 하면, 머지 않아서 -내가 조금 전에 말씀을 드렸죠,- 재자재가 있고, 무슨 수명 자재, 무슨 자재, 무슨 자재가 서서히 서서히 나에게 금생에 오는 거를 느끼게 됩니다. 그러니까 이 공덕이 무량한 거죠. 그렇죠? 그러니까 아 참, 부처님의 가르침은 이렇게 무량한 공덕이 있는 거구나.” 이렇게 여러분들이 확실하게 믿으셔야 됩니다. 그래서 그렇게 믿고 실제로 여러분이 실천해 보셔야 된다 이 말이죠.

        그러면 첫 번째가 예경제불(禮敬諸佛)이에요. 열 가지 원력 중에 첫 번째가 예경제불인데, 예경제불이라고 하면은 제불께 예경을 한다. 그럼 제불은 무슨 뜻이냐. 모든 부처님이라는 뜻이에요. 모든 부처님. 그래서 대성(大聖)이시어. 어떻게 예경하면 되겠습니까?”라고 했는데 이것이 요점입니다.

        그럼 제불께 예경을 하는데, 어떤 부처님께 어떻게 예경을 해야 되느냐 이것이 요점이죠. 그러면 모든 부처님은 어떤 분이 모든 부처님이냐 이걸 이제 먼저 알아야 되겠죠. 여러분이 지금 대웅전에서 법문을 듣고 있는데, 지금 대웅전에 모셔진 우리 부처님께 계속 몸으로 절만 하면 예경제불이 되는 걸까요? 물론 그것도 예경제불입니다마는, 우리가 먼저 진정한 예경제불을 좀 알아야만 되겠습니다. 물론 대웅전에 계신 부처님도 부처님이지만, 화엄경에서 보현행원품에서 말하는 제불은, 모든 부처님은 일체 유정 무정 두두물물 법계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제불입니다. 앞부분에서 말했죠. 일체 모든 삼라만상이 에너지로 만들어졌는데, 그 에너지가 부처님의 에너지다, 그렇게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니까 유정무정 모든 게 부처님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이 우주는 비로자나 법신 부처님 자체이고, 바로 불국토입니다. 그래서 이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부처님이라는 것을 우리는 가슴 깊이 뜨겁게 받아들여야 돼요. 그래서 형상적인 부처님이 아니라, 진정한 법신불을 우리는 친견할 수 있어야 되고, 문자나 음성의 법문이 아닌 실제 살아있는 생명의 법문을 우리는 들을 수 있어야 된다. 여러분이 마음을 열면 그러한 진정한 부처님을 만나뵐 수 있는 겁니다.

        우리가 아침마다 칠정례를 합니다. 또는 이 사시에, 여러분들 조금 전에도 기도를 올리면서 칠정례를 하셨을 텐데, 그렇게 예경하는 칠정례는 부처님 형상에 예경하는 것이 아니고, 부처님의 성품, 부처님의 마음 즉 지혜로 널리 우주에 두루하신, 그러한 유정무정 모든 것들에 부처님의 성품이 들어 있다는 것을 우리가 생각하고, 일체 모두가 부처님이다라는 그 마음으로 하는 것이 진정한 예경제불이 되는 겁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께 예경하는 것도 우리가 공덕을 짓겠습니다.’ 하는 발원인 것이고, 또 우리가 부처님께 예경하는 것은 우리 모두에게 본래 갖추어져 있는 무한 공덕을 전부 다 겉으로 드러날 수 있게끔 하는 그러한 상대방과 나를 존중하는 마음으로 예경을 하는 것이 진정한 예경이다, 이 말이죠. 그래서 그러한 삶을 본래 구족되어 있는 공덕이 드러날 수 있게끔 살겠습니다 하는 그런 발원이기도 합니다. 그런 마음으로 우리가 예배를 해야 그것이 진정한 예배가 된다 그 말이죠. 그래서 부처님은 공덕신이고 복덕신입니다. 여래의 마음은, 여래의 부처님은 지혜 덩어리예요. 지혜의 덩어리가 부처님이다, 이렇게 보시면 되는데, 구세십세호상즉(九世十世互相卽)의 경계에서 보면 이게 무슨 소리냐. 여러분들 조금 전에도 법성게 하셨죠. 그중에 구세십세호상즉이 나옵니다. 이 소리가 무슨 소리냐. 구세는 과거에, 과거의 마음에 과거, 미래, 현재가 있고, 현재의 마음에 과거, 미래, 현재가 있고, 또 미래의 마음에 과거, 현재, 미래가 있어요. 그러면 3·39가 되죠. 마음이 되는데 그게 현전 1년을 보태면은 십세가 돼요. 그러면 여러분이 지금 이 자리에 앉아서 1년 전의 일을 한번 생각해 보세요. 생각해 보셨어요? 생각해 보셨죠? 그러면 1년 전의 일을 생각해 보는데 1년 동안 시간이 걸리나요? 지금 현전 1년에 그게 생각이 됩니다. 그러면 내가 한 달 후에 우리 딸 예식이 있어요. 결혼을 시켜야 되는데 그 결혼식장은 어떻게 하고, 딸을 어떻게 결혼을 시켜야지 이런 생각하실 수 있죠? 그러면 그 시간 동안 그만큼 시간이 돼야 그걸 생각할 수 있나요? 지금 당장 생각할 수 있죠? 그러면 과거의 생각과 미래의 생각, 이 모두가 지금 현전 일년에 적혀 있다는 소리는 바로 하나다 이 말이죠. 그렇죠? 하나입니다. 맞죠? 그래서 구세십세호상즉의 경계에서 보면, 우리가 예배하는 이 예경은 나의 미래불이 -내가 앞으로 부처가 될 거니까, 그쵸?- 나의 미래불이 현재 나를 제도하는 겁니다. 그게 무슨 소리냐. 내가 앞으로 부처가 될 수 있으니까 그 희망을 가지고 우리는 수행을 하니까, 내가 지금 수행을 하고 수행을 안 하는 여러분도 이렇게 하면 부처님이 될 수 있다니까, 나는 나쁜 습관은 버리고 좋게 행동하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도 부처님처럼 대하고 이래야 되겠다. 이러니까 과거 미래불이 현재 나를 제도하는 거와 같고, 또는 내가 나에게, 나의 미래불에게 예경하는 거와 다름이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부처님을, 법당의 부처님을 모시고 예경을 하니까 다른 종교에서는 우리를 비방을 해요. 부처님 등신불 모셔놓고 예경한다고 비방을 하는데, 우리는 전혀 그게 아닙니다. 그걸 여러분들이 아셔야 돼요. 그래서 우리가 이제 그러한 생각으로 예경을 하는 건데, 그러면은 부처님의 모습이나 이 자비 은혜는 특별한 모습이 아니에요. 별다른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고, 여러분들 곁에 있는 부모님이나 스승과 남편 부인의 모습으로 항상 나와 함께 살고 있고, 또 서로를 위하고 사랑하는 일상생활 가운데에 부처님의 자비 은혜가 여러분에게 베풀어지고 있는 겁니다. 그리고 또한 부처님의 법문는 우리 일상생활 가운데 한없이 서려져 있는 거예요. 부모가 자식에게 공부해라. 이러면 안 된다 저러면 안 된다. 이게 전부 다 부처님 법문입니다. 또 남편이 여러분에게 뭐라 뭐라 하고, 또 여러분이 남편 술 많이 잡술까봐 술 많이 잡수지 마세요.’ 잔소리하고 이 모든 것들이 전부 다 부처님 설법이다 이 말이죠. 따로 떨어져 있는 게 아니다 이 말입니다.

        그래서 이것을 풀어서 말씀을 드려보면, 여러분의 가정에 남편 되시는 분은 남편 부처님이고, 아내 되시는 분은 아내 부처님, 따님은 따님 부처님, 아들은 아들 부처님, 어머님 아버님은 어머님 아버님 부처님입니다. 그리고 일체처 일체 곳에서 만나는 모든 분들이 모두 부처님이세요. 근데 여러분은 어떻게 대합니까? 부처님으로 대하지 않으니까 문제가 생깁니다. 오늘 당장 집에 가서 남편을 부처님으로 모셔보세요. 그 남편도 여러분에게 부처님처럼 대합니다. 그러면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거예요. 맨날 남편하고 싸우고 술 먹는다고 투정 부리고 이러지만, 여러분이 부처님처럼 남편을 모셔보세요. 모셔보면 달라집니다. 그래서 조선시대에도 보면 부인이 말하자면 조금 성격적으로 문제가 있는 그런 분하고 아주 높은 선비가 결혼을 했는데, 이 부인이 맨날 그야말로 말할 수 없이 행동도 거칠고 말도 거칠고, 선비 입장으로 볼 때는 엄청 마음에 안 들어요. 그래 가지고 맨날 선비가 부인을 야단칩니다. “당신은 왜 이걸 이래 하냐 저걸 저래 하냐하도 그러니까 이제 부인은 또 남편이 하도 잔소리 하니까 싫어가지고 계속 싸우는 거에요. 맨날. 집안이 조용할 날이 없어요. 그랬는데 어느 날 이 남편이 글을 보다 보니까, 모두가 다 착한 성품을 가지고 있다. 이런 글귀를 보게 됐어요. 그래서 우리 부인도 참 착한데 내가 뭘 잘못하는 게 아닌가 싶어서, 그때부터 남편이 부인한테 자꾸 절을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인이 당신 그렇게 나한테 잔소리하고 하더니 왜 이렇게 갑자기 절을 하냐고 미쳤냐고. 막 그래도 자꾸 절을 하거든요. 그래서 3개월이 지나가니까 이 부인이 남편이 자꾸 그렇게 절을 하니까 미안해서 부인도 따라 절을 한 거예요. 그러다 보니까 부인의 마음이 바뀌었습니다. 그래서 그다음부터는 싸우지 않고 잘 살았다는 소리가 있는데, 여러분이 남편을 대할 때도 부처님처럼 대하고, 자식을 대할 때도 부처님처럼 대하고, 모든 사람을, 어머니 아버지를 대할 때도 부처님처럼 대한다면, 여러분의 생활은 지금 당장 행복해지는 거예요. 멀리 쳐다보고 멀리 따라갈 거 없어요. 시간이 지나고 그럴 일이 전혀 없다 이 말이죠. 예경제불 한 가지만 잘해도 여러분은 그 자리에서 행복한 가정을 만들 수가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모든 것을 부처님으로 대하고, 경전에 보면 눈앞에 대하듯 깊은 믿음으로 대하라 그랬어요. 여러분은 부처님으로 대하라 하니까 부처님으로 안 대하고, ‘설마 부처님이라고? 저렇게 그냥 엉망인 사람이 어떻게 부처님이냐?’ 이렇게 생각하지만, 그 모든 한 분 한 분이 다 부처님이라는 것을 깊은 믿음으로 대하라는 거예요. 그렇게 대하면, 여러분이 그렇게 대하는 여러분 마음이 부처님이고, 또 그런 부처님 대접을 받는 분은 마음이 또 부처님을 닮아갑니다. 이렇게 해서 여러분도 부처가 되고, 상대방도 부처님을 만드는 그러한 것이 바로 이 예경제불의 가르침입니다. 사람을 부처님처럼 공경하고 본질적으로 상대방과 내가 둘이 아니다라는 생각으로 대한다 이 말이죠. 그러면 내가 하기 싫은 것은 다른 사람에게도 하게 하면 안 되겠죠. 내가 존중스러우면 다른 사람도 존중해줘야 된다 이 말이죠. 그래서 공경이라고 하는 것은 만행의 근본이 되는 거예요. 그리고 모든 인간관계에 있어서 공경이 들어가지 않으면 관계가 아주 소홀해집니다. 그래서 개인과의 성장이나 자연과의 친화나 이런 것들이 전부 다 공경에서 시작이 되는 거예요.

        우리가 자연 환경을 함부로 했기 때문에 지금 오존층이 파괴가 돼서 기후도 제대로 돌아가지 않고, 지금부터 시작이 돼서 앞으로는 아주 점점 더 어려운 기후가 오고 공기도 나빠지고 물도 안 좋아지고, 지금 그것을 전 세계의 사람들이 당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이러한 유정 무정을 함부로 대했기 때문에 나타나는 결과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이러한 공경하는 마음을 갖고 있지 않으면 상대방을 소홀하게 여긴다 이 말이죠. 이 세속 분들 보면 옷이라도 좀 번듯하게 입고, 그 뭡니까, 명품 가방이라도 들으면 좀 괜찮게 보고, 좀 시원찮게 입었다, 좀 시원찮다 싶으면 무시하고, 이게 일반화돼 있잖아요. 그런데 그러한 모든 사람을 부처님으로 대했을 때, 바로 여러분에게 부처님의 경지가 열리는 겁니다. 그래서 의사가 환자를 대할 때도 또는 스승이 제자를 가르칠 때도, 모든 관계에서 이 공경이라는 것이 밑바닥에 깔려 있지 않으면, 인간관계가 제대로 되지 않습니다. 그리고 서로 간의 신뢰가 깊어지지 않죠.

       그래서 이제 이러한 인간관계가 잘 성립이 되면 여러분이 원하는 소원도 성취가 바로바로 된다는 겁니다. 그 한 예로 뭐가 있냐면은 해인사에 희랑대라는 곳이 있습니다. 거기에 옛날에 희랑대사라는 희랑조사가 계셨는데, 그분이 굉장히 큰 스님이시거든요. 어느 날 그 희랑대에 어느 젊은 부인이 쌀하고 미역하고 잔뜩 머리에다 이고 불공을 하러 왔어요. 그래서 희랑대사가 위에 서 계시다가 그 부인이 오는 걸 내려다보고 부인에게 어떻게 왔느냐그랬습니다. 그러니까 부인이 불공하러 왔습니다”, 그랬어요. 그럼 무슨 불공을 하러 왔느냐그러니까 생남불공 하러 왔대요.” 그러니까 이 스님이 그래, 생남불공 하러 왔으면 그 머리에 인 거 그대로, 미역이랑 쌀이랑 이고 온 거 그대로 바로 너 집으로 가라는 거에요. “아니 불공 하러 왔는데 가라 그러면 어떡합니까?”하니까 내 시키는 대로 하라, “네 집에 가서 네 시어머니한테 잘해라. 그러면 불공이 성취될거다.” 그랬습니다. 그래서 이제 며느리가 그 머리에 쌀하고 미역 그대로 이고 집으로 갔습니다. 가니까 시어머니가 밥을 한 솥을 하고 국을 잔뜩 끓이고 뭔가 반찬을 해가지고 막 이제 먹으려고 차리는 중에 며느리가 들어온 겁니다. 근데 그 시어머니가 어떤 시어머니였냐면은 재취로 온 시어머니로, 재취로 온 지 한 6개월밖에 안 됐는데, 며느리가 먼저 시집 와서 살림을 다 거머쥐고 있고 재취로 시어머니가 들어왔으니까 그 시어머니가 이 며느리 눈치를 보느라고 밥도 제대로 못 먹었나 봐요. 그러니까 며느리가 불공하러 간다니까 이제 오늘 저녁 돼야 오겠지 싶어서 쌀을 퍼다가 밥하고 국 끓이고 자기 먹고 싶었던 반찬 다 만들어서 먹으려고 하는데 며느리가 오니까 너무 깜짝 놀랐어요. 며느리가 그 모습을 보고 뭘 알았느냐면은 , 어머니가 내 눈치를 많이 보셨구나. 내가 그런 걸 모르고 있었구나.’ 그래서 이 며느리가 그때부터 시어머니에게 그렇게 마음을 다해서 잘했어요. 그랬더니 1개월 조금 지나서 바로 임신이 돼서 떡두꺼비 같은 아들을 낳아서 희랑대에 인사드리러 왔답니다.

       그래서 상대방에게 잘하면 바로 여러분에게 소원이 성취가 됩니다. 그래서 그 시어머니가 이 며느리한테는 부처님인 거예요. 그래서 이 세상에는 부처님이 따로 계신 게 아니라, 일체 모두가 다 부처님이다 이렇게 여러분들이 생각해야 됩니다. 그래서 여러분이 그러한 이치를 잘 아셔야 됩니다. 다른 사람을 공경하는 것은 자기 자신을 공경하는 거와 똑같아요. 왜냐하면 조금 전에도 말했듯이, 남편을 부처님처럼 대하면 남편도 여러분에게 잘할 것이고, 자식에게도 부처님처럼 대하고 상대방을 부처님처럼 대하면 결과적으로는 나에게 다 돌아와요. 그러니까 나를 위하는 거와 똑같은 이치죠. 그래서 남을 존중하는 것이 다 나를 존중하는 것이고, 남을 위하는 것이 결국은 나를 위하는 게 됩니다.

 

       우리가 사홍서원을 합니다. 그 사홍서원은 중생을 다 구제하겠다는 건데, 그 사홍서원이 결국은 어떻게 되느냐. 내 자성의 중생을 구하게 되고, 내 자성의 번뇌를 끊게 해줍니다. 그러니까 중생을 구제하겠다는 것이 바로 내 중생을 구제하는 게 돼요. 그래서 보살도를 행하는 그것은 뭐냐 하면 상구보리 하화중생(上求菩提下化衆生)이에요. 상구보리를 하려면 하화중생을 해라. 위로 부처님의 경지를 구하려면 밑으로 중생을 구제를 해라. 이것이 상구보리 하화중생의 원리입니다.

       너무 오래 하면 안 되겠죠?

       그런데 이렇게 공경할 수 있는 지름길이 또 한 가지 있는데 짧게 하고 끝내겠습니다. 뭐냐 하면은 이 지름길은 감사하는 마음을 갖는 것이 공경하는 지름길이에요. 그래서 부처님께서는 부모님 은혜, 스승의 은혜, 나라의 은혜, 중생의 은혜를 아주 많이 강조하셨습니다. 우리가 백중을 1년 행사로 하는 이유도 바로 이 부모님의 은혜, 스승의 은혜, 이런 은혜를 갚는 행사이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이 정말 마음속으로, 부처님 은혜가 막중하고 부모님 은혜가 막중하다는 것을 가슴 깊이 느꼈을 때, 비로소 천방지축처럼 날뛰던 여러분 마음이 방황을 멈추고, 여러분 마음에 감사하고 또 참회하는 그러한 눈물이 가슴 깊이 속에서 솟아오르게 됩니다. 그렇게 깊은 감사를 느끼지 못하면 공경하라 해도 마음이 우러나질 않아요. 요즘 시대는 들어보면, 옛날에는 부모님께 효도하는 것을주목적으로 하고 우리가 살아왔는데, 지금 젊은 세대들은 부모님을 참 그야말로 키워주는 기계로 아는 이런 시대가 돼서 참 문제입니다마는, 여러분들이 감사할 때, 사람뿐만 아니라 이 모든 천지에 존재하는 모든 천지의 은혜를 여러분이 느끼고 감사할 때, 이 천지가 여러분에게 그 감사한 은혜를 돌려줍니다. 이것이 원리예요. 진리입니다. 그래서 모든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가질 때, 진정한 공경심이 우러나올 수가 있다는 겁니다. 그리고 고난을 만났을 때, 역경이 생겨났을 때, “아 내가 도저히 못 살겠다.” 이러한 생각이 났을 때도 감사한 마음을 일으키면 그 고난에서 빨리 벗어날 수가 있습니다. 여러분이 정말 잘 살다가 그야말로 부도가 나서 길거리에 나 앉았다 그러면 어떤 생각을 하느냐. ‘그만 나는 안 살고 죽어야 되겠다.’ 이럴 게 아니라 재물은 다 없어졌지만, 내 몸은 그래도 이렇게 안 죽고 살아났으니까 얼마나 감사한 일이냐이렇게 생각하면 또 살 길이 생깁니다.

        실제로 부산 통도사 경봉 큰스님이 살아계셨을 때, 부산에 어느 큰 대보살이 있었는데, 그 보살이 부처님을 신봉하고 정말 깊은 불자였는데 사업을 아주 크게 했어요. 그러다 부도가 났어요. 부도가 나니까 살 길이 없다 싶어서 태종대에 가서 빠져 죽으려고, 태종대에 밤에 가서 바위에 올라 앉았는데, ‘가만히 생각해 보니까 빠져 죽는 것도 그렇지만, 경봉 큰스님께 가서 법문 한 번 듣고 빠져죽어도 늦지 않겠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는 거예요. 그래서 내려와서 그다음 날 경봉 큰스님을 찾아가서 자기 이야기를 쭉 했죠. 그래서 제가 죽으려고 했다. 그러니까 경봉 큰스님이 뭐라고 하시는지 압니까? “너 평양에서 내려왔지?” “. 그렇습니다.” “내려올 때 뭐 갖고 내려왔나?” “아무것도 손에 든 거 없이 맨몸으로 내려왔습니다.” “그래. 그때 생각하면 지금 너는 맨몸이냐, 뭐가 좀 있냐?” “그때 비하면 지금 뭐가 있습니다.” “뭐가 있노.” 재물은 다 없어졌지만 자기가 그동안 쌓아놓은 신용, 다른 회사와 거래했던 거래처의 모든 신용이라든가 이런 거 남아 있는 거예요. “그러면 평양에서 내려올 때보다 니가 부자인데 뭘 죽으려고 그러냐생각해 보니까 그래요. 그래서 다시 살아서 다시 사업을 일으켜서 큰 부자가 돼서 불사도 많이 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가 감사한 마음을 일으킨다면 여러분들은 그 자리에서 바로 행복해지는 거예요. 여러분 정말 먹을 끼니가 없다, 다음에 뭐 할 게 없다, 아무것도 물질은 없어도 내 몸은 멀쩡하다. 그러면 그것만 해도 감사한 일이죠. 여러분들이 엄마 배 속에서 나왔을 때 뭐 들고 왔습니까? 옷 들고 왔어요? 아니면 뭐 들고 왔습니까? 들고 오신 분 손 한번 들어봐요. 아무것도 안 들고 왔죠. 그럼 지금 부자지 뭐. 그렇게 생각하면 여러분들은 너무 감사한 일입니다. 이렇게 살아 숨 쉬는 자체가 감사한 일이고 여러분들 이렇게 걸어 다니는 거 이게 바로 기적이에요. 아침에 일어나서 걸어 다닐 수 있다, 숨 쉴 수 있다, 이것만 해도 기적인데 뭘 더 바라요. 바라는 게 문제지, 그죠? 그 마음만 버려도 벌써 여러분은 행복한 자리에 있는 거예요. 아셨죠?

        그러면 오늘은 여기까지 하겠습니다. 박수 받고 더 하면 안 되죠, 그렇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