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동지기도]12월 22일 동지기도 회향 법문 2021-12-22

        안녕하십니까. 오늘 신축년 동지일, 진관사 동지 법문입니다.

       동지는 불교가 동아시아에 들어오기 전부터 있었습니다. 동지는 이 동아시아인들의 우주관을 뜻하는 것입니다. 동아시아에서는 이 천지 우주 기운을 이해할 때 <천지는 음양이다.> 이렇게 생각했어요, 음양. 그래서 음양은 기운인데, 천기에는 음기와 양기가 있다. 그래서 양의 기운은 동지서부터 하지 때까지고, 음의 기운은 하지서부터 동지 때까지다. 이렇게 파악을 하고, 이 천지 음양의 기운이 자꾸 순환을 하는데, 그 순환하는 그 부분을 이십사절기(節氣)라고 해서 기운이 마디마디 바뀐다는 거죠. 마디 절자, 기운 기자, 절기. 이것이 이 동아시아인들의 우주 음양 순환적 우주관입니다.

       그런데 불교가 동아시아에 들어와서 그 행사를 할 적에 옛날서부터 기념하고 경축하던 날짜에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래서 그 동지 음양의 우주관에 의한 명절날에 불교 법회를 하게 된 겁니다.

       그런데 이 동지에 있던 풍속을 보면 민족에 따라서 동지를 엄청난 축제로 생각하고, 경축을 하고, 또 복을 빌고 감사를 표하고 그런 게 있어요. 그리고 이 동양인들은 어떻게 사는 게 행복한 길이냐라고 하는 거를 파악을 할 때, 이 천지 음양 하늘의 기운을 거역하면 안 된다, 그걸 거역하는 것을 역천이라고, 그래서 천지 기운을 거역하면 그것이 역천인데, 하늘을 거역하는 것인데 그거는 망한다고 했어요. 역천자는 망이라(逆天者亡). 그러면 어떡하는 게 잘 사는 거냐. 순천(順天)을 해야 된다. 천지 음양의 기운에 순응해야 된다 이거죠. 순응해야 된다. 그래서 공자께서 노병에 누워 계시는데, 제자가 가서 선생님 좀 오래 사시라고 기도를 하면 어떻겠습니까.” 그러니까 공자가 뭐라고 그랬느냐면 획죄어천(獲罪於天)이면, 하늘에 죄를 얻으면, 무소도라(無所禱也), 기도할 곳은 없다.” 이렇게 얘기를 했어요. 하늘의 죄를 얻으면 빌 곳은 없다. 이게 공자의 우주관이에요. 그래서 하늘에 순응해야지 하늘 기운 밖에 어디 가서 빌어서 될 일은 아니다. 이것이 순천이죠.

 

陰陽相生 節氣循環 壽福康寧 禦寒辟暑

음양상생 절기순환 수복강령 어한벽서

冬則溫之 以禦其寒 夏則凉之 以辟其暑

동즉온지 이어기한 하즉량지 이벽기서

 

        그러면 일상생활에서 순천의 생활이라는 게 어떤 거냐. 음양이 상생하고(陰陽相生), 음과 양이 서로서로 생기고, 절기가 순환하니(節氣循環), 절기가 돌고 도니, 수복강령(壽福康寧)을 하기 위해서는, 수명과 복덕, 건강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한벽서(禦寒辟暑), 어한이라고 하는 것은 추위를 막는다. 이 동기 때는 추우니까 추위는 잘 막아서 따뜻하게 하고, 벽서라고 하는 건 물리칠 벽자인데, 더울 서자, 더위는 잘 물리쳐서 몸을 건강하게 보호해야 된다. 이게 순천이에요. 그래서 순천을 하는 것은 안분(安分)이다. 편안할 안자, 분수 분자. 분수에 편안하게 사는 것이 그게 역천을 하지 않고 천기 순환에 순응하는 길이다. 이런 우주관을 가지고 있었어요. 그래서 추울 때는 추위를 잘 막아서 따뜻하게 하고 더울 때는 더위를 잘 물리쳐서 서늘하게 해서 그 음양의 기운에 잘 순응해서 뭘 얻느냐. 수복과 강령을 얻고, 수명 복덕 건강을 얻고, 자손 창성을 얻고, 자손이 대대로 창성하고, 또 부귀 영화를 얻는다. 이것이 불교 이전부터 있었던 동양인들의 우주관이에요. 그래서 이 동양인들은 순천, 안분, 하늘의 기운에 순응에서 자기 분수의 편안함을 갖는 것이 행복한 길이다. 편안할 안자, 분수 분자. 안분이라는 건 뭐냐. 군군신신부부자자라(君君, 臣臣, 父父, 子子). 군주는 군주답게 행동을 하고, 신하는 신하답게 행동을 하고, 부모는 부모답게 하고, 자식은 자식답게 하고 그러면 행복하다는 거예요. 이게 순천 안분 교육이고 사상이에요.

 

諸法從因生 諸法從因滅

제법종인생 제법종인멸

如是滅與生 沙門說如是

여시멸여생 사문설여시

(佛本行集經불본행집경제48)

 

緣起法 연기법

因緣法 : 因親緣疎 諸法生成

인연법 : 인친연소 제법생성

因果法 : 業因受報 三世相續

인과법 : 업인수보 삼세상속

 

       근데 불교는 하늘에 순응하는 게 아니에요. 석가모니 부처님이 깨달은 건 인연법(因緣法)을 깨달았어요. 인연법. 불교가 처음으로 깨닫고 처음으로 가르친 그 진리가 인연법이에요. 인연법이라는 것은 이 세상 모든 것이 이것과 저것이 만나는 데서 이루어진다. 하늘이 인간을 지배하는 게 아니고, 다른 것이 인간을 지배하는 게 아니고, 인연에 의해서 이루어지고, 인연에 의해서 발전된다. 이걸 가르친 게 석가모니 부처님이에요. 그래서 이제 인연법은 연기법이라고 그러는데, 인연에 의해서 일어난다, 이게 연기법(緣起法)이죠.

       얼마 전에 누구하고 대화를 하는데, 질문을 하기를 도인이 뭡니까?” 이렇게 물어요. “도인이 뭡니까.” 그래서 연기법을 아는 것이 도인이다.” 그랬더니 그러면 연기법하고 인연법하고 인과법하고는 어떻게 다릅니까?” 이렇게 물어요. 그래서 그렇게 물을 수도 있겠다.’ 생각을 했어요.

       연기법(緣起法)이 기본 개념이고, 전체 뜻인데 연기법이라고 하면 <인연으로 말미암아 일어난다>하는 법이니까 가장 통합적이고 원론적으로 표현한 게 연기법이에요. 그런데 이 연기법은 인연법(因緣法), 인과법(因果法)이 있는데, 인연법은 뭐냐. 인연이라고 하는 것은 인이 있고 연이 있어요. 그러면 인은 뭐냐. 인은 가까운 거고 친한 걸 인이라 그래요. 연은 조금 떨어진 걸 연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한자문화권에서는 인연을 가르칠 때 인친연소(因親緣疎), 인은 친하고 연은 떨어질 소자가 있는데, 연은 조금 떨어진 것이다. 그래서 인친연소를 인연이라고 그러는데, 이게 도대체 뭘 말하는 거냐. 인은 종자와 같고, 연은 흙과 물과 공기와 같다, 이렇게 가르쳐요. 그래서 종자가 인이 돼서 흙을 만나고, 물을 만나고, 공기를 만나면, 싹이 나고, 줄기가 자라서 이루어진다. 이걸 제법생성(法生成)이라 그럽니다. 제법이 생성, 모든 법이 나서 이루어진다. 인연이라고 그러면 모든 것 전체를 종자와 환경이 만나서 이루어지듯이 설명하는 구조가 인연이고요, 인과라 그러면 전체를 설명하는 게 아니라 개별개별, 개별개별이 하나하나가 업인수보(業因受報), 업의 원인으로 받을 수, 보답 보, 보답을 받아서 삼세상속(三世相續)이라, 과거 현재 미래에 계속 서로서로 이어가는 걸 설명할 때 인과라 그래요. 그래서 인과는 삼세인과고, 인연은 제법 인연이다. 제법 전체를 말할 때는 인연이라 그러고, 하나하나가 과거 현재 미래 원인과 결과가 이어지는 걸 말할 때는 인과라고 한다 이거죠. 그래서 하나하나 설명할 때는 인과고, 전체로 말할 때는 인연이고, 인과 인연을 합쳐서 말할 때는 연기다.

       그러면 이게 뭐냐. 불교는 자기가 인업을 형성하면, 원인의 업, 그럼 과보를 받아요. 인업수보. 우리가 나의 행복이 하늘에서 온다든지 땅에서 오는 게 아니라 내가 좋은 원인의 행위를 하면 그 행위가 업인데, 그 원인 행위에 의해서 좋은 결과를 받으니까 나의 행복을 내가 만들어가는 거예요. 나의 행복을. 그래서 불교는 정견(正見)과 해탈이에요. 정견, 바를 정자, 볼 견자. 정견은 뭐냐. 그 인연, 인과, 연기법을 바르게 보는 걸 정견이라고 해요. 인연법을 바르게 본다, 인과법을 바르게 본다, 연기법을 바르게 보는 게 그게 정견이에요.

       그래서 뭐 하자는 거냐. 해탈하자는 거예요. 해탈은 고통해탈, 고통으로 부터 벗어난다, 생사해탈, 생사로부터 벗어난다. 법계해탈, 법계는 우주인데 우주에서부터 벗어나는 게 그게 법계연기, 법계해탈이에요. 그래서 생사로부터 벗어나는 거는 오온 인연을 보는 거죠. 이 몸이 어떻게 이루어졌냐. 반야심경에 있는 그대로 몸이라고 하는 것은 색수상행식 다섯 가지 인연으로 이루어졌는데, 이것을 자세히 보면 인연은 공한 것이다. 공이라는 건 뭐냐. 인연으로 난 것은 난 게 아니다, 이거죠. 이게 뭔 소리냐. 물이 찬 공기를 만나면 얼음이 생겼는데, 그 얼음 자체는 그대로 물이지 다른 게 없다는 거예요. 이걸 자성이 없다고 그래요. 그냥 얼음도 물뿐이지, 찬 거 만나면 얼음되는 것뿐이지, 물이 달라진 건 없다. 그래서 불생이라는 거죠. 불생. 난 것이 없다는 거죠. 그다음에 따뜻해지면 얼음이 물 되는데 얼음이 없어지고 물이 됐다고 그래도 없어진 건 없다. 불멸이라는 거죠. 그래서 이 오온 인연을 바로 딱 관찰을 하면 해탈해요. 해탈. 이 선근공덕 인연, 착한 종자, 공덕 종자를 자꾸 쌓으면 장애에서부터 해탈을 해요. 장애라고 하는 것은 신장, 몸의 장애, 몸이 병이 있다든지, 인장, 사람의 장애, 사람으로부터 고통을 당한다든지, 또 물장, 재물로부터 고통을 당한다든지, 이런 장애가 심해지고 심해지면 그걸 삼악도라고 그러는데, 이 선근공덕을 자꾸 지으면 삼악도에서 벗어나게 되고요. 오온 정견을 자꾸 닦으면 오온을, 우리 몸을 바로 보는 그 수행을 자꾸 하면 몸이 불생불멸이라는 걸 알게 돼요. 그래서 오온은 개공(五蘊皆空)이니, 오온은 다 공이니 공상은 불생불멸이다. 공의 진실상은 나는 것도 아니고 죽는 것도 아니다. 이게 오온 정견 생사해탈, 오온을 딱 바로 보면 생사에서 벗어나게 된다. 선근공덕을 많이 닦으면 고통장애에서 벗어나게 된다.

       그런데 이 인연법을 자기 한 사람만 보면 오온 정견인데, 우주 전체를 보면 이건 법계 정견이 되는 거예요. 법계 정견. 이 법계라는 거는 하나에 모든 것이 들어 있고, 모든 것이 하나에 들어가는데, 이 하나와 모든 것이 원융무애(圓融無礙)해요. 원만히 다 통하고 서로서로 장벽이 없고 장애가 없어요. 이게 법계 연기에요. 그래서 이 법계 연기 실상을 깊이 보면 이게 법계관법인데, 이 법계관법으로 들어가고 들어가면 원융무애가 되는 거예요. 원융무애라는 건 뭐냐. 이 하나하나에 자체 성격이 없는 연기법이기 때문에 하나하나가 다 통해요. 이게 원융이예요. 그리고 무애라는 것은 사물 하나하나가 자체 성격이 없기 때문에, 나무가 불에 들어가도 걸림이 없고 불이 나무에게 들어가도 걸림이 없고, 흙이 물에 들어가도 걸림이 없고, 물이 흙에 들어가도 걸림이 없고. 이 걸림 없이 융통한 법계 연기 실상을 어려운 말로 사사무애(事事無礙)라 그래요. 사사무애. 일 사자, 일 사자는 물건이라는 말인데 물건 물건이 전혀 걸림이 없다. 하나하나 성격 성격이 전부 원만하게 융통한다.

       이렇게 법성원융 사사무애 법계 연기 실상을 깊이 보면 법계가 없어요. 오직 마음이 나타난 거예요. 법계는 무법이오 유심소현(唯心所現)이라. 오직 마음이 나타난 거다. 이게 법계 정견, 법계 해탈이에요. 불교는 이걸 가르치는 거예요. 그래서 선근공덕으로 고통 장애에서 해탈을 하고, 오온 정견으로 오온을 바로 보는 것으로 생사윤회에서 해탈을 하고, 법계의 실상을 바로 보는 것으로 법계에서 해탈을 한다. 그걸 깨달음이라고 그럽니다. 깨달음.

     그럼 뭐 하자는 거냐, 깨달음이. 행복해요. 어떤 장애가 없을 때 행복해요. 그걸 딱 깨닫고 보면 장애는 내가 만든 거예요. 근데 깨닫기 전에는 내가 장애를 만들었다는 걸 몰라요. 그래서 이제 깨닫고 보니까 원래 장애가 없었는데 내가 장애를 만들어서 괴로워했구나.’ 이거를 알게 돼요. 이게 불교예요.

 

如依所數物 而有於能數 彼性無所有 如是了知法

여의소수물 이유어능수 피성무소유 여시료지법

譬如算數法 增一至無量 數法無體性 智慧故差別

비여산수법 증일지무량 수법무체성 지혜고차별

(華嚴經夜摩偈品, 精進林菩薩頌)

(화엄경야마게품, 정진림보살송)

由能數智 作百千解 一多相待 故無體性

유능수지 작백천해 일다상대 고무체성

喻彼妄想 於無性中 計爲有無(清凉疏)

유피망상 어무성중 계위유무(청량소)

 

 

       그래서 이 연기법을 설명하는데, 불생불멸 공으로도 설명을 하고, 화엄경에서는 여러 가지 설명 방법이 있는데, 첫째가 산수법으로 설명해요. 연기법으로 산수법. 산수(算數)라는 건 뭐냐. 계산할 산자, 숫자라는 수자, 경상도 말로 시알린다고 그러는데, 수를 세는 게 산수인데, 산수가 참 묘해요. 인도인들은 이걸 느꼈어요. 이 수라는 게 아무 실상이 없는데, 고정 성격이 없는데, 또 수가 이루어지는 거예요. 그래서 화엄경에서는 이 산수 비유를 가지고 연기법을 설명하는데 산수 비유가 뭐냐. 첫째 산수는 하나에서부터 출발하거든요. 하나. 그다음에 둘이에요. 보통 열까지를 만수라고 그러는데, 본수, 만수. 끝나는 숫자가 만수고, 시작하는 숫자가 본수에요. 하나 둘 셋 넷 다섯 열이면 또 그다음에 열이 되고 열이 되고 해서 이제 한없이 펼쳐 나갈 수 있죠. 그런데 이 하나라는 게 말이에요, 이게 정해진 게 없어요. 누구든지 이게 하나다라고 마음 먹는 대로 하나가 되는 거예요. 이게 찻잔을 하나 떡 들고 이게 한 개다라고 내가 인정하면 이게 한 개지, 이게 정해진 게 아니에요. 여기서 하나라는 숫자는 없는 거예요. 그래서 이 숫자가 정말로 자체가 없이 그냥 펼쳐지는 거거든요. 그럼 둘이라는 거는 하나가 있을 때 둘이 돼요. 하나 없으면 둘 안 돼요. 또 셋이라는 것도 하나, 둘이 있을 때 셋이 돼요. 하나, 둘 없는 셋은 없어요. 이게 연기법이라는 거죠. 넷도 하나, , 셋이 있을 때 넷이 되고요. 다섯도 하나, , , 넷 있을 때 다섯이 된단 말이에요. 이런 식으로 아홉이 있을 때 열이 되는 거지, 아홉 없는 열은 없어요. 그래서 아홉의 인연으로 열이 생겼다. 그러면 열 속에는 열이 자체적으로 열이라는 게 있는 게 아니에요. 열 속에는 아홉이 있고, 여덟이 있고, 일곱이 있고, 이런 식으로 하나가 있을 때 열이 있는 거란 말이지요. 그래서 열이라는 것은 하나하나에 의해서 열이 있고 또 열이 있을 때 하나하나가 있다. 묘한 거예요. 그래서 이렇게 인도에서는 수를 철학적으로 이해하게 됐어요. 이걸 수학적으로는 다르게, 이게 이렇게 딱 달라요. 그래서 이 하나로 보면 둘이 됐을 때도 하나는 그대로 있는 거예요. 셋이 됐을 때도 하나는 그대로 있고, 넷이 됐을 때도 그대로 하나가 있는 거예요. 그리고 이 하나가 백하고 만나면 이게 백 하나가 되고요. 똑같은 하나인데, 천하고 만나면 천 하나가 되고요. 만하고 만나면 만 하나가 돼요. 그런데 하나는 그냥 하나인 거예요. 이래서 모든 건 인연법인데 인연법이 만나는 대로 다 이루어진다. 이게 산수로서 인연을 설명한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 재미있는 건 이 하나라는 게 손가락을 가지고 말을 하더라도 이게 그냥 몸인데 손가락 하나 인정하면 하나가 되는 거예요. 그리고 또 이 손가락을 셀 때 어디서부터 세냐. 엄지손가락부터 세면 엄지손가락이 1번이 되는 거고요. 새끼손가락부터 세면 새끼손가락이 1번이 되는 거예요. 중간서부터 세면 중간이 1번이 되는 거에요. 이거 뭐냐. 첫째, 둘째가 없다는 거예요. 정하는 대로 첫째가 된다는 거죠. 엄지를 1번으로 정하면 엄지가 1번이고, 중간 걸 1번으로 정하면 중간 게 1번이고, 마지막 걸 1번으로 정하면 마지막 게 1번이라. 그리고 또 이게 정하더라도 사람에 따라서 왼쪽으로 돌 수가 있고, 오른쪽으로 돌 수가 있는데, 이게 새끼손가락을 1번으로 하면 이 무명지가 2번이 되고요, 장지가 3번이 되고, 그다음에 식지가 4번 되고, 이게 엄지가 5번 되는 거예요. 그런데 엄지를 1번으로 정하는 사람 만나면 이 엄지가 1번 되고요. 이렇게 돼서 인연이라는 거는 만나는 대로 이루어지는 거지, 정해진 게 하나도 없다.

        그래서 이 수량법으로 뭘 가르치냐 그러면은, 연무자성(緣無自性)이라, 인연에는 자체 본성이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그래서 행복과 불행도 자체 본성이 없는 거예요. 내가 만드는 거예요. 나의 고통도 내가 만들고, 나의 행복도 내가 만들고, 나의 생사도 내가 만들고, 나의 해탈도 내가 만들고, 우주도 내가 만드는 거예요. 유심소현이라, 오직 마음이 나타난 거다.

 

諸惡莫作 諸善奉行

제악막작 제선봉행

自淨其意 是諸佛教

자정기의 시제불교

(法句經下 述佛品)

(법구경하 술불품)

 

善根功德 人天受福

선근공덕 인천수복

自净其意 生死解脫

자정기의 생사해탈

 

       이렇게 돼서 선근공덕(善根功德)을 자꾸 쌓으면 그 인연으로 인천수복(人天受福)한다고 가르쳐요. 태어날 때마다 인간 세상과 인간 세상보다 더 복된 천상 세상에서 복을 받고 또 자정기심(自淨其心)하면 마음을 스스로 맑혀서 온 신상을 관찰하면, 이 색수상행식 오온으로 된 몸의 진실상을 잘 관찰을 하면, 몸이 불생불멸이고 반야가 부증불감이라. 그래서 이 불생불멸 부증불감 피안경계, 이 생노병사 차안경계가 아니라 불생불멸 부증불감의 저쪽 경계 피안 경계에 가는데 그걸 생사 해탈이다, 이렇게 얘기를 해요.

       그리고 우주 전체를 관찰을 하면 이게 법계관인데 법계의 관법이 깊어지면 법성원융 사사무애를 깨달아서 일체우주현상이 유심소현이라는 걸 알고, 오직 마음이 나타난 걸 알고, 이걸 신통자제라고 그래요. 신통 자재의 경지에 들어간다. 신통이라고 하는 것은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는 거예요. 신통이 생각하는 대로 이루어진다. 보는 대로 보인다. 이게 법계 해탈이에요. 수수즉수라, 따를 수, 요구할 수, 요구하는 데 따라서, 즉수, 곧 거둔다. 곧 즉, 거둘 수. 이게 신통자재입니다. 법계 해탈 신통자재.

       그러니까 이 동짓날 동지의 전통은 하늘의 기운을 잘 받들어서 행복한 그런 전통이지만, 불교에서 동지를 맞이하는 것은 이 정견 해탈로 인연법을 바로 봐서 모든 고통으로부터 해탈하는 이런 염원과 행위로 법회를 하는 거거든요.

       오늘 날씨가 추운데 마당에 앉아서 법문을 들으니 얼마나 추위가 심하시겠어요. 그래도 이 정견 해탈 법문을 통해서 우리가 더 좋은 복덕을 누리고 또 해탈을 이루면 그게 오늘 동지법회를 봉행하는 참뜻입니다.

       마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