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
[신중기도]3월 22일 윤2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3-03-22
안녕하십니까. 계묘년 윤이월 초하루 진관사 법회 법문입니다. 불교는 <부처님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그게 이제 상당히 중요한데, 부처님을 이해하는 방법으로 여래소설법(如來所說法)이 있다, 여래께서 말씀하신 법이 있다, 그게 경전이거든요. 근데 여래 소설법이 어디서 나왔냐. 여래 소득법(如來所得法)에서 나왔다. 얻은 바 법. 여래가 깨달음을 이루셨는데, 그 깨달음으로부터 말씀이 나왔다. 그래서 어떨 때는 여래소득법이라고 설명한 때도 있고, 어떨 때는 여래소설법이라고 설명한 때도 있는데, 그것만 가지고 잘 몰라요. 금강경에 보면 무득무설분(無得無說分)이라고 하는 데서, 여래소설법은 불가취(不可取)다, 취할 수가 없다, 불가설(不可說)이다, 말할 수가 없다, 비법(非法)이다, 법도 아니다, 비비법(非非法)이다, 비법도 아니다. 이런 말씀이 있거든요. 저 뒤에 가면 무법가득분(無法可得分) 제22라고 하는 금강경이 있는데, 거기는 무슨 말씀이 있냐면, 아어아뇩보리(我於阿耨多羅三藐三菩提)에, 내가 아뇩다라삼먁삼보리에, 무유소법가득(乃至無有少法可得)이니, 아주 조그만한 것도 내가 얻은 바가 없으니, 시명아뇩다라삼먁삼보리(是名阿耨多羅三藐三菩提)다, 이것이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것이 여래의 깨달음이다, 이랬어요. 내가 깨달음에서 무유소법가득이라, 아주 작은 것도, 가득이라는 건 얻은 건데, 얻은 게 없다. 그걸 일러서 여래의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래 놨으니 여래의 깨달음이 과연 어떤 거고, 어떻게 이해할 수 있나. 이게 이제 문제가 되니까 대승불교에서는 여래가 어디에 몸을 쉬는가, 그게 여래의 불토(佛土)인데, 불토를 불찰(佛刹)이라고 하거든요. 사찰 찰자. 여래의 불찰만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가 있는데 그게 정토종이에요. 그거를 한자로 쓰면 연꽃이라는 연자, 종파라는 종자, 연종(蓮宗)이라고 그래요. 연종은 불찰이다. 불찰 가는 것만을 목적으로 하고, 그것만을 중심으로 할 때, 그게 정토종이 돼요. 그리고 여래의 깨달음을, 이제 법을 중심으로 해서 깨달은 법, 그걸 화엄종이라고 그러는데, 그거는 다 통한다고 둥글 원자 하나 써가지고 원종(圓宗)이라,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 그게 여래의 깨달은 내용을 대승불교식으로 설명하는 게 법성원융무이상이에요. 그래서 그거는 원융무애(圓融無碍)하다. 여래의 깨달은 내용인데, 그게 해인삼매다. 법성원융이다. 그래서 그런 화엄을 중심으로 하면 그걸 원종이라 그러고, 여래가 머무르는 세계를 중심으로 하면 그걸 정토종, 연종이라고 그러고. 그럼 여래가 머무는 거는 극락세계고, 여래가 말씀하신 건 법성원융, 원융무애, 원종이라고 한다면 여래의 마음만을 중심으로 하는 종파가 있어요. 그걸 선종(禪宗)이라 그래요. 극락세계도 치우고, 법성원융도 치우고, 순전히 여래의 마음, 그걸 중심으로 하는 분을 조사(祖師)라고 그러는데, 그 조사가 중심이 되는 종단이라고 조종(祖宗)이라고 하거든요. 조종. 조사라는 할아버지 조자. 그건 왜 조종이냐. 명 불심종(佛心宗)이라. 부처님 마음을 밝히는 종파다. 다른 건 다 안 해요. 불심만 밝혀. 이렇게 연종, 원종, 조종, 이게 이제 대승불교의 아주 핵심이에요. 오로지 부처님 계신 곳을 내가 가야 되겠다. 그러면 그게 정토종인데 염불만 하면 부처님 계신 국토에 가요. 부처님이 깨달은 해인삼매를 내가 알아봐야 되겠다 그러면 이제 법성원융무이상, 화엄삼매에 떡 들고, 화엄경을 공부하면, 처음이 끝이고, 끝이 처음이고, 하나가 모든 것이고, 모든 것이 하나고, 일순간이 무량겁이고 무량겁이 일순간이고. 이걸 정리해 놓은 게 의상스님이 원교종요(圓敎宗要)라고 이름을 붙였어요. 원교 해인삼매의 말씀이 화엄경인데, 화엄경에 종이라는 건 근본이라는 말이고, 요라고 하는 건 허리라는 말인데, 아주 근본 뿌리에 해당하고 줄기에 해당하는 것이다. 원교종요. 화엄법성도, 그게 의상스님의 저술인데 이게 어렵단 말이에요. 이게 극락세계에도 내가 가야 아는 거고, 원종도 화엄삼매에 들어야 알고, 이제 여래의 마음을 근본으로 하는 것도 조사의 마음에 들어가야 그걸 계합(契合)이라고 그러는데, 계약할 계자, 합할 합자. 그러니까 어려워요. 釋迦如來八相成道석가여래팔상성도兜率來儀相 昆藍降生相 四門遊觀相 逾城出家相 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 사문유관상 유성출가상雪山修道相 樹下降魔相 鹿苑轉法相 雙林涅槃相 설산수도상 수하항마상 녹원전법상 쌍림열반상護明菩薩 : 不受福德 發菩提心 常修功德 恒時廻向 호명보살 : 불수복덕 발보리심 상수공덕 항시회향(釋門儀範上, 莊嚴念佛)(석문의범상, 장엄염불) 鑽木而得火 掘地而得水 찬목이득화 굴지이득수精勤正方便 無求而不獲 정근정방편 무구이불획世間無救護 中貪愛癡毒 세간무구호 중탐애치독哀愍衆生故 求智慧良藥 애민중생고 구지혜양약(佛所行讚破魔品제13)(불소행찬파마품제13) 그래서 이제 한 가지 또 방법이 여래소설법, 여래소득법, 이런 거 말고 여래소행법(如來 所行法)을 한번 보자. 여래가 행하신 법. 그래서 그 많은 경전 이거 말고, 이제 여래가 어떻게 태어나셔서 어떻게 해서, 어떻게 계시다가, 어떻게 가셨나. 이게 이제 불소행(佛所行)이라고 그래요, 불소행. 부처님이 행하신 바, 마명보살이 불소행찬을 지었는데 그 불소행찬(佛所行讚)을 8가지로 딱 구분해서 설명한 걸 팔상성도(八相成道)라고 하고, 그건 불소행찬을, 부처님이 행하신 바를 찬탄했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걸 여덟 가지로 구분을 했어요. 이렇게 마명보살 불소행찬을 팔상성도로 구분해가지고. 우리나라 큰 절에는 팔상전이 거의 다 있어요. 이게 아주 좋은 방법이에요. 여래가 행하신 바를 보면 짐작할 수가 있고 쉽게 이해할 수가 있다. 그게 이제 여덟 가지로 했는데, 장엄염불을 할 때 이 석가여래의 팔상성도를 이제 하는데 이게 참 좋아요. 장엄염불에 석가여래 팔상성도예요. 도솔래의상(兜率來儀相), 이 얼마나 좋아. 그 여덟 가지만 외우면 부처님 일생이 환하게 들어오거든요. 그게 하나의 방법이에요. 그럼 첫 번째는 부처님이 도솔래의상이라고, 도솔천인데 참 재밌어요. 도솔이라는 말은 지족(知足)이라는 뜻입니다. 알 지자, 만족할 족자. 그래서 도솔암이라는 데도 있고 지족암이라는 데도 있어요. 같은 소리예요. 그럼 모든 그 정신적 능력은 만족하는 데서 생긴다. 부처님이 오신 데가 지족천, 도솔천이에요. 그래서 만족했어요. 거기서 도솔천에서. 그런데 만족하면 어떤 현상이 벌어지는가. 두 가지 현상인데, 하나는 만족을 소유해서 타락하는 경우가 있고, 만족에서 깨달음을 늘 간직해서 거기서 또 새로운 길로 가는 수가 있어요. 그래서 타락하지 않고 도솔천에서 잘 계셨다고 해서, 보호할 호자, 밝을 명자, 호명보살(護明菩薩)이라고 해요. 호명이라는 말은 마음이 늘 깨어 있어서 그 밝은 마음을 늘 간직하고 보호하고 있었다. 그래가지고 호명하는 건 어떻게 하는 거냐. 온갖 게 풍족한 데가 도솔천인데, 도솔천에 계실 때 불수복덕(不受福德)이라, 복덕을 하나도 안 받았다. 이 복덕을 받아버리면 타락해요. 아무리 재산이 많고 아무리 지위가 높아도 지위를 누리지 않고 재산을 사용하지 않으면 그게 성자예요. 지위를 안 누려. 늘 사람들과 지위로 다가가는 게 아니라 인간으로 다가가. 그게 호명보살이에요. 재산이 많은데 그걸 쓰지를 않아. 청빈해. 그래서 그 지위도 높고 재산도 많은데, 늘 청빈 겸손을 하면 그게 호명이다. 돈 있다고 펑펑 쓰면 그건 타락하는 거고, 직위 높다고 권한을 부리면 그건 타락이에요. 그렇게 해서 왔다 이거예요, 호명보살로. 그래 가지고 늘 또 상수공덕(常修功德)이라, 늘 공덕을 닦아. 그리고 또 항시회향(恒時廻向)이라, 항상 닦은 공덕을 내가 안 쓰니까 돌려줘, 다. 그럼 거기서 오래 계셔도 될 텐데 아니다 이거예요. 도솔천보다 고통이 있는 사바 세계로 가야 되겠다. 그래서 이제 온 게 올 래자, 의식이라는 의자인데, 그게 옥편에 보면 의식 의자가 <올 의> 그렇게 돼 있어요. 온다는 뜻이고. 올 래, 올 의. 도솔천에서 내려오는데 어떻게 내려왔냐. 코끼리를 타고 내려왔어요. 코끼리. 불교에 동물의 아주 상징이 둘이 있는데, 하나는 사자요, 하나는 코끼리인데, 사자는 깨달음을 이루어서 설법하는 걸 상징한 게 사자예요. 그래서 사자후라고 그래요. 근데 수행하는 거는 코끼리예요. 코끼리라는 놈이 재밌는 게, 아무리 물이 깊고 물살이 세도 헤엄치는 법이 없어요. 이 놈이. 한 발짝 한 발짝, 뛰는 법도 없고, 다 더듬어서 깊은 곳은 깊은 곳대로 밟고 가고, 얕은 곳은 얕은 곳대로 밟고 가고, 그걸 수행에다가 비유한 거예요. 그래서 수행은 건너뛰는 법이 없어요. 다 마주해서 거기서 지혜를 얻는 게 수행이거든요. 도망가는 건 수행이 아니에요. 마주해서 지혜를 얻는다. 코끼리를 타고 턱 오셔서 이제 사바세계에 강생을 하는데, 도솔래의상 비람강생상(昆藍降生相), 룸비니에서 강생을 하는데, 강생이라는 게 이제 완전히 도솔천 천신이 아니라 사바세계 인간의 모습으로 강생했다. 내릴 강, 태어날 생. 그러니까 나보다 한 단계 낮은 데로 가야 그게 깨어 있는 사람이에요. 높은 데로 가서만 계속 따라다니면 그건 죽은 사람이에요. 그건 정신적으로 이미 죽었다. 그러니까 강생을 한 거예요. 상생을 한 게 아니라. 높은 데 가서 난 게 아니라 낮은 데로 와서 났다 이거지요. 그렇게 부처님의 생애를 정리하고 있어요. 그다음에 사문유관상(四門遊觀相)인데, 이 세상에 어떤 문제가 있나. 생로병사가 있다. 아, 이게 생로병사가 있는 한 인간의 성공과 인간의 목적을 이루는 것이, 목적이 아무 쓸모가 없다. 정반왕은 국왕의 목적을 가지고 있고, 자기 어머니는 그 집안이 뭐 화목하고 이런 목적을 가지고 있고, 자기 아내는 부부의 사랑과 아이 양육의 목적을 가지고 있는데, 이게 죽음을 맞이한 순간에 아무 쓸모가 없다는 거예요. 그래서 생로병사를 보고 난 후에는, 이 생로병사를 해결하기 전에는 죽음을 앞에 둔 시한부 인생이 성공을 한들 뭐하며, 소유를 한들 뭘 하겠냐. 이게 이제 꽉 꽂힌 거죠. 이게 이제 코끼리가 가는 길이에요. 생로병사를 마주했으면 이거를 그냥 피해 가고, 덮어두고, 또 어떤 경우에는 그걸 잠시라도 잊기 위해서 뭐 술을 많이 먹는다든지, 쾌락에 많이 또 치우친다든지 그게 아니에요. 이 생로병사, 이 놈이 뭐야 이게. 죽음이라는 게 이게 뭐야. 딱 마주하는 거예요. 그런데 이 세속적인 방법으로는 이걸 해결할 길이 없는 거예요. 그래서 사문유관상이라고, 동서남북에서 이걸 보고 난 뒤에는, 이걸 어떻게 해야 되나. 아버지 노릇 해가지고도 안 되고, 그래서 석가모니, 아버지 노릇 안 했어요. 아주 웃기는 사람이에요. 아들은 낳는데 아버지 노릇을 안 했어. 이런 수가 어딨어요. 남편 노릇도 안 했어요. 남편인데도 남편 노릇 안 하고, 아들인데도 아들 노릇 안 했어요. 정반왕 아들이잖아요. 이게 참, 이게 말이 안 돼, 내가 볼 때는 이거. 아들 노릇도 안 한다, 남편 노릇도 안 한다, 아버지 노릇도 안 한다, 왕을 물려받으니 왕 노릇도 안 한다, 아무것도 안 하고 오직 생로병사 이거 해결하는 길로 들어선단 말이에요. 근데 다른 사람은 생로병사 이건 관심이 없어요. 어떻게 왕을 하느냐, 어떻게 자식을 키우느냐, 어떻게 부부가 사랑을 나누느냐, 가정을 어떻게 이루느냐, 이것만 관심이 있단 말이에요. 그런데 부처님은 관심 없어요. 죽음 앞에 부부가 뭐며, 가정이 뭐며, 왕이 뭐냐 이거에요. 참 희한한 분이에요, 이분이. 그 팔상성도 그걸 보면 그렇게 기술하고 있어요. 이건 문학도 최고의 문학이고 철학도 최고의 철학이에요. 또 종교도 최고의 종교예요. 이거 안 움직이면 이게 철학과 무슨 문학으로 끝이는데, 이걸 움직이면 종교가 되는 거예요. 움직이면. 그래서 한 게 이제 유성출가(逾城出家)에요. 출가는 모든 걸 버린다는 거예요. 출가라는 게 집 떠나는 게 아니라, 다 버리는 게 출가예요. 그런데 전부가 다 그 생로병사 하라고 하는 동의하는 사람이었거든. 그러니까 어떻게 해요. 부처님도 좀 비겁해요. 밤에 월장으로 도망갔어. 담 넘어서. 부처님이라고 다 위대한 게 아니에요. 아버지 노릇 안 한 거로 보면 그 위대한 거 아니라고 그게. 그 사람이 전부가 위대해야 될 필요가 없는 거예요. 하나만 잘하면 되는 거예요. 그 어떤 사람은 내가 못하는 게 많다고. 못하는 게 많은 게 당연하지. 왜 잘해야 되는데요. 잘하는데 노예가 될 필요가 없어요. 왜 잘해야 돼. 그 석가모니 보면 다른 거 다 팽개치고, 오직 생로병사 하나 해결한 거 그거에요. 그 유성출가를 했다고. 유성출가를 하는데, 성을 넘어서 출가를 했어. 근데 유성출가가 이렇게 재미있어요. 이렇게 아주 통쾌해. 다른 사람 다 동의 안 하고 다 못 하게 해도 나는 하는 거에요. 이게 살아있고 깨어있는 정신이거든요. 그리고 설산(雪山)에 들어갔어요. 설산에 갔는데 무슨 일이 벌어졌는가. 성은 나왔지만은, 태자의 의복이 그대로 있고, 태자의 머리가 그대로 있고, 이런 거예요. 그래서 머리를 깎아요. 그 머리를 깎는 거는 그 신분에 따르는 이익을 버린다는 거예요. 이게 머리라는 게 신분을 말하는 거거든요. 또 옷을 벗는다는 거는 사회의 지위를 버린다는 거예요. 근데 이걸 어디서 수행자의 옷으로 갈아입어야 되나 보니까, 수행자가 옆에 있어요. 그래서 “그 옷을 나하고 바꿔 입을 수 없느냐” 그러니까, “좋다”고. “그럼 당신은 수행자 옷이 없으면 뭘 입고 수행할 거냐?” “아, 나는 수행자가 아니고, 수행자 옷을 입고 사냥을 하면 동물들이 안 도망가서, 내가 사냥 쉽게 하려고 이거 입은 거다.” 이래요. 여기에서 또 큰 문학적인, 철학적인 의미가 있어요. <옷만 보고 판단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바꿔 입었어요. 그러니까 이 세상에 누릴 수 있는 건 이제 하나도 없는 거예요. 머리 깎아서 신분도 버리고, 또 옷을 다 바꿔가지고 사회 지위도 버리고, 이제 진짜로 된 거지. 그다음에는 이걸 누가 아는 사람이 있는가 찾아다니게 되는 거죠. 이게 이제 설산수도상(雪山修道相)인데, 설산이라는 게 저 히말라야 눈 덮인 게 아니에요. 거기 간 일이 없어요. 저 성자들이 많고, 사상가가 많고, 고행자가 많은 사람을 찾아다닌 거거든. 그래서 보니까 선정주의자도 있고, 고행주의자도 있고, 논리주의자도 있고, 많은 사람이 있어요. 다 만나봐도 생로병사가 해결이 안 돼요. 그 사람들도 지금까지 배운 거, 익힌 거 다 버려. 내가 원했던 것이 아닌 한, 지금까지 뭘 익혔어도 다 버려버려요. 이것도 참 이게 희한해. 보통 자기 지식이 신통찮다고 느껴져도 그거 주장하는 사람도 많아요. 쓸모없는 거. 쓸모없는 지식을 주장할수록 소리를 더 크게 높여. 큰 소리로 말하는 거 절대 들으면 안 돼요. 옛날에 어명을 전할 때 큰 소리로 전하는 법이 없어. ‘어명이요’ 하면 그냥 온몸이 바르르 떨리지. 근데 내용 없는 말은 크게 떠들어도 하나도 겁도 안 나. 그래서 이제 ‘아, 이 문제는 배워서 되는 게 아니구나.’ 이제 마지막에 선정을 깊이 드는데, 고행과 선정을 함께 닦자. 이제 배우려야 배울 데도 없고, 구하려야 구할 데도 없으니까 일어날 필요가 없는 거예요. 그냥 가만히 앉아 있어. 얼마나 안 일어났는지, 팔상성도 그림에 보면 부처님 머리에 새가 앉아 있어요. 참 이게 피카소가 저 딴 데 있는 게 아니라 절에 가니까 있더라니까. 피카소는. 발상이 이거 얼마나 이게 상징적인 발상인지, 머리에 새가 딱 앉아 있어요. 통도사에도 팔상전이 있는데 그 새가 앉아 있어. 하도 그게 좋아서 어느 책 내는데 그걸 표지로 쓴 적이 있어요. 고행과 선정을 함께 하는데, 그 고행과 선정이라고 안 하고 팔상성도에서는 설산수도상 다음에 수하항마상(樹下降魔相), 나무 밑에서 마구니를 항복시켰다. 이게 나오거든요. 깨달음이란 말도 없어요. 수하항마상, 그다음에 녹원전법상(鹿苑轉法相), 녹야원에 가서 법을 말씀하시고 쌍림열반상(雙林涅槃相), 구시나성(쿠시나가르)에서 열반에 드셨다. 이게 팔상이거든요. 世間五欲燒衆生 猶如猛火焚乾草 세간오욕소중생 유여맹화분건초亦如焰幻無有實 亦如泡沫不久停역여염환무유실 역여포말불구정四大五蘊假合成 筋骨相纏而暫有사대오온가합성 근골상전이잠유智者誰應貪著此 凡夫迷故生欲心 지자수응탐착차 범부미고생욕심如是諸幻我已知 是故於中不貪著여시제환아이지 시고어중불탐착欲求畢竟自在樂 今當於此證菩提 욕구필경자재락 금당어차증보리我已解脫於世間 如空中風難可繫 아이해탈어세간 여공중풍난가계(方廣大莊嚴經 降魔品제21) (방광대장엄경 항마품제21) 근데 여기서 이제 오늘 주목하는 게, 핵심이 수하항마상이에요. 항마. 항복이라는 건 없앤단 말이에요. 항이라는 건 없앤다. 마라고 하는 게 있어요. 마. 마라는 게 뭐냐. 이 녀석이 나쁜 놈인데, 쓸데없는 거 알면서도 구하는 게 있어요. 안 되는 줄 알면서 왜 그랬을까. 요게 마거든. 이제는 후회해도 어쩔 수 없네. 그게 마란 말이에요. 그거를 마주친 거예요. 안 되는 줄 나도 알아요, 이래요. 근데 나는 해요. 알면서 하는 경우에 마라고요. 그래서 뭐를 안 좋은 줄 아냐 하니까, 이제 선정에 딱 들고 보니까 이 몸이 무상하다 이건 알아. 근데 무상한데 버리는 건 안 되는 거예요. 이 몸이 죽을 줄 알면서도 계속 몸에 매이는 게 그게 마거든요. 이 몸 죽을 줄 누가 몰라. 근데 몸이 막상 죽는다고 그러면 안 죽으려고 그래요. 이거 참 이게, 그래서 인간은 논리적이 아니에요. 그게 말이 되냐. 말은 논리거든요. 말 다 안 돼요. 자기만 안 되나. 다 안 돼요, 말이. 처음부터 말이 안 돼. 혼자만 말 안 되는 게 아니에요. 말은 논리란 말이에요. 뭐 며느리가 일 잘하면 기분이 좋은데, 딸이 시집에서 일 많이 하면 기분이 아주 나빠. 이게 말이 되냐고 이게요. 말 안돼. 그 말 안 되는데 좋은데 어쩔거여. 좋은데. 그렇잖아요. 사위가 처갓집에 와서 일을 잘하면 기분이 좋아. 근데 내 아들이 장인 장모한테 가서 일 많이 하면 아주 속이 뒤틀려서 밥맛도 없고 잠도 안 와요. 이게 말이 되냐고. 그러니까 말 안 된다고 탓할 거 없어요. 다 말이 안 돼요. 이게 이제 마구니거든요. 마구니. 그래서 이 몸이 색수상행식 오온인데, 오온은 무상하다. 근데 이 무상한 것을 붙들기 위해서 무슨 짓을 하느냐. 욕락(欲樂)을 구한다. 욕망의 즐거움을 구해요. 이게 이제 무상과 욕락이라는 아주 이율배반적인 게 인간에게 있는 거예요. 무상함을 느끼면 이거를 접어두고 딴 길을 찾아야 될 건데, 이 무상함을 뒤덮기 위해서 욕락을, 욕망과 쾌락을 얻어가지고, 이 몸의 무상함을 잠시 마비시키고, 잠시 덮어두고, 잠시 외면하고 살다가, 이제 무상이 들이닥쳐서 완전히 명줄이 끊어지면 그때는 후회해요. 그게 인생의 통곡이에요. 다른 어떤 것으로도 인생무상을 감당할 수 없는 순간에 울음이 나오는데 그걸 인생 통곡이라고 그래요. 근데 때는 늦었지. 그래서 이 무상과 욕락이 있다. 그래서 욕락을 불교에서는 그냥 오욕이라고 그래요. 오욕. 재색식명수, 이렇게 설명을 하는데, 재물, 사랑, 먹는 거, 명예, 편안한 거, 이거를 구한단 말이여. 인생무상을 해결하는 방법이. 그래서 그 기록에 보면, 오욕이라고 하는 것은 중생을 다 태우는데, 그거는 맹화(猛火)와 같다. 아주 맹렬하게 불타는 불길과 같다는 거예요, 오욕이. 재물을 구하는 욕망의 불길, 쾌락을 구하는 욕망의 불길. 그건 왜 그러냐. 이 인생무상의 공포가 있어서 그래요. 공포가 욕락을 부른다. 이 몸이, 오온신상이라고 하는 것은 포말(泡沫)과 같다. 물거품과 같다. 그래서 이 물거품이 차 타고 가다도 꺼질 수가 있고, 잠들더라도 꺼질 수가 있고, 배고파서 꺼질 수가 있고, 이게 어느 순간에 사라질지 모른다는 거를 알아요. 모르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그걸, 그것이 생각이 나면 날수록 그 욕락을 더 맹렬하게 더 구해요. 그래서 오온 신상은, 오온의 몸 모습은 여포말이오, 물거품 포, 물거품 말, 포말과 같고, 탐애욕락은, 욕락을 탐애하는 것은 여맹화라, 사나운 불길과 같다. 범부는 미고로 생욕심(凡夫迷故生欲心)하고, 범부는 그걸 알기는 아는데 깊이 알지 못한다고, 미했다고 그래요. 그래서 욕심을 내요. 그 욕락에 욕심을 내요. 근데 나중에는 욕락에 한계가 와. 인생무상을 덮을 수가 없어. 그래서 죽을 때 다 울면서 죽는 거예요. 인생 무상을 욕락으로 해결하려고 지금까지 돈 벌고 출세하고 했거든. 근데 해결이 안 되는 거지. 그런데 지자는, 진짜 지혜로운 이는, 수응탐착차(智者誰應貪著此), 누가 그 무상을 덮기 위해서 욕락을 탐하고 집착하겠는가. 그러면 어떻게 해야 되냐. 부처님이 그런 마구니를 무상한 줄 알면서, 욕락에 집착하는 마구니를 다 항복한 것은, 이 세상에 태어났다가 죽는 게 그야말로 물거품과 같다는 거를 깊이 알았기 때문에 이게 된 거예요. 깊이 모르면 그게 슬쩍 덮혀버려요. 내가 나 죽을 때 무슨 소용이 있나, 그건 한순간에 지나가 버리고, 역시 돌아서면 욕심내요. 부처님이 어떻게 그 인간의 욕망을 항복시켰지? 이거는 인생의 관찰이 깊어서 그래요. 이 목숨이라는 게 이게 물거품 같다. 이거를 깊이 보니까 욕망이 들러붙지를 못해요. 그래서 해결한 거예요. 그래서 그거를 인생무상을 알고 욕락이 허망함을 알아서, 거기에 전혀 죽음을 맞이하는 순간에 와도 공포심이 안 생겼어요. 그래서 이 무상과 욕락을 다 해결했어요. 그걸 항마라고 그래요. 그러니까 해결하고 보니 무상과 욕락에 구하는 마음이 딱 사라지니까, 거기에서 이제 무슨 일이 벌어졌느냐. 엄청난 일이 벌어졌는데, 여기 대웅광명이 나타난 거예요. 여기 대웅, 크게 웅장한 광명. 그래서 이런 거를 이제 가르칠 때 첫 번째는 조복(調伏)이라고, 조복. 조화시킬 조자, 항복시킬 복자. 조복. 인생이 무상한 게 언제 죽을지 모르는데도 계속 욕망과 쾌락을 쫓아서 달려나가는 그 망아지와 같은 마음을 잡아당겨서 복종시킨다는 거에요. 모든 근심 걱정과 인생 재앙은 너의 욕망에서 왔다. 시어머니한테서 온 게 아니에요. 며느리한테서 온 게 아니야. 남편한테서 온 게 아니에요. 아내한테서 온 게 아니에요. 자식한테서 온 게 아니에요. 자기 욕망 해결하려고 여러 사람 다 만나고, 안 태어나려고 하는 아들 낳으려고 온갖 고생 다 했거든. 그래서 아들 때문에 애먹는 거예요. 아들만 안 낳어도 애 훨씬 적게 먹었을 거예요. 딸 때문에 애먹지, 그 딸만 안 낳어도 훨씬 편안했을 텐데. 결혼만 안 했어도 얼마나 신선같이 살았을 텐데, 이 결혼을 해가지고. 왜 결혼했어요? 욕망 때문에 결혼한 거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게 지자가 가는 길이에요. 지혜로운 이가 가는 길이다. 이거 아무나 가는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이런 거를 듣고 우리 이제 잠시라도 마음을 씻어내면 그걸로 족한 거지, 우리가 다 석가모니 되라고. 야단나요. 야단나. 안돼요, 안돼. 안돼. 안돼. 그래서 범부는 미고로 생욕심이라, 미했기 때문에, 알기는 아는데 깊이 모르고 껍데기로 알기 때문에, 계속 욕심을 내다가 통곡하면서 죽는 거예요. 부처님이 이렇게 처음에는 조화를 시키려고 하고, 그다음에 복종시키고, 조, 복, 조하고, 복을 하면 마음이 딱 복종이 되면 고요해져요. 고요할 적자를 써요. 적. 조 복 적. 고요 적자. 그 다음에 깨끗할 정자를 딱 써요. 마음이 깨끗해져요. 욕락을 구하는 마음이 전혀 없어요. 그럼 마음이 환하게 밝아져요. 명이요. 첫 번째는 조, 두 번째는 복, 세 번째는 적, 네 번째는 정, 그 다음에는 밝아져, 명, 다섯 번째, 그 다음에 통해버려요. 이게 조복적정명통 이런 순서로 가는 거예요. 조복적정명통. 그래서 밝아져서 통하니까, 모든 게 욕심이 아니고 명심이다. 밝은 마음이다. 욕심과 명심이 있어요. 그걸 보리라고 그래요. 보리. 욕심을 번뇌라고 그러고, 이게 전부 이름만 달라요. 뭘 욕락을 구하고자 하는 마음을 욕심이라고 그래요. 그냥 밝은 마음을 명심이라고 한다고. 밝은 명자, 마음 심자. 그걸 깨달은 마음이다. 근데 이게 이상하단 말이에요. 왜 명심 하나만 있으면 될 텐데, 욕심이 왜 있었느냐, 이런 거거든요. 그게 또 재밌어요. 멀쩡하게 낮에 일해도 저녁에 꿈꾸는 수가 있어요. 꿈 없는 사람이 없어요. 근데 꿈을 깨고 나면 그 꿈이 오로지 나인 걸 알 수가 있어요. 그 욕심에서 벗어나면 욕심도 내 마음인 걸 알 수가 있는 거예요. 이러니까 불교가 어려워. 실컷 높은 데 갔는데, 가고 나니까 가지 않았을 때와 다름이 없어요. 그래서 <큰 깨달음을 얻으니까, 내가 깨달음에서 얻은 바가 하나도 없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이거 이건 깨달은 분들 자기들끼리 하는 소리고, 우리가 볼 때는 전혀 아니거든요. 그런 거죠. 그래서 이 항마라는 거, 우리는 안 되는 줄 알면서도 하는데 석가모니는 어떻게 안 되는 일은 왜 안 할 수 있었을까. 안 되는 일을 분명하고 확실하게 안 할 수 있었던 것은 관찰이 깊어서 그래요. 이 몸을 위해서 뭘 구해봤댔자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걸 깊이 알았단 말이에요. 그래서 기록에 그런 말이 있어요. 욕구필경자재락(欲求畢竟自在樂)이 있는데, 이 욕락의 쾌락이 아니라, 필경자재락, 필경이라는 건 영원한 걸 말하거든요. 영원히 자재하는 즐거움이 따로 있는데, 그거는 보리다. 그래서 이 보리를 얻으려고 하고, 그 세속적 욕망을 무상한 줄 알아서, 두려움이 막 생기고 죽으면 어떻게 하나 공포가 생겨도, 이 마라는 거는 공포예요. 공포. 그래서 그 공포를 어떻게 해결하나. 욕락으로 해결하려고 하는 게 범부거든. 그러니까 이 공포를 욕락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깨달음으로 해결하는 게 이게 석가모니예요. 그래서 깨달음을 딱 얻고 나니까 자재락이 생겨요. 자재. 욕락이 아니라 자재락이다. 그 자재락이 딱 생기고 보니까, 이 밖으로 구하던 욕심하고 이 자재락하고를 비교해보니, 욕심은 개똥불, 개똥불 아시나 모르겠네. 몰라요? 이게 난 어렸을 때 많이 봤는데, 이게 무슨 벌레 같아, 벌레. 그런데 그 불빛이 있어요. 그걸 개똥불이라고 그래요. 벌레인데. 주지스님 아셔, 개똥불? 반딧불. 충청도에서는 개똥불이라고 그래요. 반딧불하고 태양하고 비교를 했어요. 자재락은 태양이고, 욕락은 반딧불이다. 그렇게 비교 했거든요. 그러니까 우리는 뭘 위해서 살아야 하나. 왜냐면 기도하면 하는 거 있어요. 만수무강하고, 소원 성취하고, 자손 창성하고, 복덕구족하고. 자손 창성해봐야 그 녀석들 다 우리한테 도움도 안 돼요. 저들 살기 바빠. 부귀 영화하고. 부귀 영화 해봐야 근심 걱정 더 많아. 차라리 가난하고 마음 편한 게 낫다니까요. 그래서 축원 하는데 저거 구해봐야 소용이 없는데 그런 생각 나요, 내가. 오래 살아봐야 그거 별거 아니여. 힘만 들어. 그런 건데 그게 다 욕락으로 해결하는 거예요, 그게. 깨달음으로 해결하는 게 아니라. 그런데 알면서 못하는 게 범부니까 그거 어떻게 해요. 다 석가모니 되라고, 지금 당장 여기서 되라고 할 수는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지금은 안 돼도 이런 이야기라도 듣고 죽으면 내세에는 돼. 이제 점점 가까이 가는 거죠. 그게 방편이에요, 방편. 그래서 오늘 이제 부처님 생애에서는 항마까지 말씀을 드렸는데, 이게 너무 중요한 거예요. 부처님은 왜 인간의 욕망과 쾌락을 해결할 수 있었을까. 그건 인간에 대한 관찰이 깊어서 그랬다. 그 아이한테 뭐 돈 몇 푼 더 줘봐야 그건 욕락인데, 그게 그 아이를 행복하게 할 수가 없어요. 인생무상의 통곡이 와. 무상 통곡을 놔두고 집 하나 사주고 뭐 하나 사주고 해봐야 인생 문제가 해결이 안 돼요. 안 되는데 해야 돼요. 그러니까 이건 말이 안 되는 짓을 하는 거예요. 말 되는 짓만 하는 게 흔한가 그게. 다 말 안 되는 짓을 하는데. 마치겠습니다.
-
[지장기도]3월 9일 지장천일기도 회향 법문
종범스님 2023-03-09
-人生苦惱(인생고뇌)와 出身活路(출신활로)- 천일지장기도 회향 법문입니다. 身命과 無明(신명과 무명)身命無常 剎那生滅 • 無明業識 貪愛不息신명무상 찰나생멸 • 무명업식 탐애불식一切世人 貪著五欲 獨處空閑 有何榮樂일체세인 탐착오욕 독처공한 유하영락生老病死患 於中未解脫 無明愛毒箭 猶未得拔出 생로병사환 어중미해탈 무명애독전 유미득발출榮位須臾間 智者深觀察 不應於此事 而生希有想영위수유간 지자심관찰 불응어차사 이생희유상依井中樹根 貪蜜墮口中(賓頭盧爲王說法經)의정중수근 탐밀타구중(빈두로위왕설법경) 기도는 왜 하느냐. 인생에 고뇌와 불만족이 있어서 기도를 해요. 고뇌가 있고,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 있어서 기도를 하거든요. 그럼 고뇌가 뭐냐. 괴로움, 근심, 걱정인데, 근심, 걱정이 왜 생기는가. 그것은 어리석음 때문에 생겨요. 어리석음. 근심 걱정은 어리석음에서 온다. 그럼 어리석음은 뭐냐. 탐애(貪愛), 탐심과 애착. 탐심과 애착이 어리석음인데, 그것 때문에 생긴다. 그러면 탐심과 애착에서 오는 어리석음을 해결하는 방법이 지인와 범부가 다른데, 지혜 있는 사람이 해결하는 방법하고 보통 범부가 해결하는 방법하고가 달라요. 지혜있는 사람은 탐심과 애착을 충족하려고 애쓰기 전에, 인생부터 관찰을 하는데, 이걸 지인의 인생 관찰이라 이렇게 얘기해요. 지혜 있는 사람의 인생 관찰이라. 그러면 지인의 인생 관찰을 어떻게 하냐. 통시적 관찰이라고 그래요. 통시적, 통시(通時)라는 거는 통할 통자, 때 시자인데, 과거, 현재, 미래를 전부 다 본다. 그러면 보통 범부의 인생 관찰은 현시적 관찰, 현재를 중심으로 본다. 그래서 현재만 보면 큰 것도 있고 작은 것도 있고, 좋은 것도 있고 나쁜 것도 있는데, 이걸 긴 역사로 보면 좋고 나쁜 게 아무 의미가 없다. 그래서 지혜 있는 이들은 좋고 나쁜 걸 절대 탐할 필요가 없다. 좋고 나쁜 것을 탐하고, 버리는 거는 현시적으로 봐서 현재 눈앞에 있는 것만 봐서 그렇게 한다 이거예요. 긴 안목으로 보면, 현재가 바로 미래가 되고, 현재가 바로 과거가 돼서, 좋고 나쁜 게 오랜 세월 속에서 다 허망하고 무상하고 부질없어가지고, 구할 만한 가치도 없고 버리려고 애써야 할 필요도 없다. 그것이 인생 관찰에 두 가지 관찰법, 눈앞에 있는 걸 중심으로 보느냐, 오랜 세월을 통해서 보느냐, 이건데 항상 이거에 대한 충돌이에요. 그래서 옛날부터 지금까지 늘 들려주는 얘기가 뭔 말이 있느냐면, 우물 안에 나무뿌리에 매달린 사람이, -이걸 수중 뭐라고 그러더라,- 정중수근(井中樹根)이라고, 정중수근. 우물 정자, 가운데 중자, 나무 수자, 뿌리 근자. 우물 속에 나무뿌리에 매달려서 대롱대롱 매달려 있고, 밑에는 독사가 입을 벌리고 있고, 위에는 아주 사람을 해치는 코끼리가 그냥 바라보고 있어서, 어디 매달려 있는 건 정중수분인데, 우물 속에 나무뿌리인데, 여기에 매달려 있는데 좀 있다보니까 흰쥐하고 검은 쥐하고 와서 그 나무뿌리를 쫒고 있더라. 그런데 가만히 있다보니까 그 나무 위에서 벌이 꿀을 한 방울 한 방울 떨어뜨리는데 그 꿀이 입으로 들어갔다. 그래서 이거를 밀타구중(蜜墮口中)이라고 해요. 밀타구중. 꿀 물자, 떨어질 타자. 입 구자, 가운데 중자. 꿀이 떨어진 게 하필 입으로 떨어졌어요. 그때 입안으로 꿀이 한 방울 한 방울 떨어지니까 그 꿀맛이 그게 보통 맛이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밑에 독사가 있는지, 위에 코끼리가 있는지, 나무뿌리에 매달려 있는지, 흰쥐, 검은 쥐가 지금 쫒고 있는지 다 잊어버리고, 오직 그 꿀 한 방울 두 방울만 바라보고 있다. 그것만 좋아하고 있다. 그것이 인생이다. 이제 이렇게 설명을 해요. 그래서 그 꿀이라고 하는 것은 인간 오욕락, 재색식명수(財, 色, 身, 命, 壽), 인간 쾌락이지, 인간 오욕 쾌락을 말하는 게 그 꿈이고, 밑에 독사는 죽음이고, 위의 코끼리는 무상한 세월이다. 그리고 매달려 있는 건 생명 명줄인데, 흰쥐, 검은 쥐는, 흰쥐는 낮이고 검은 쥐는 밤이다. 이렇게 인생이 무상하고, 이렇게 인생이 부질없는 건데, 그 무상하고 부질없는 거는 전혀 모르고, 오직 눈앞에 있는 쾌락, 눈앞에 있는 향락, 눈앞에 있는 즐거움 그것만 탐하다가 죽음을 맞이한다. 이런 거를 계속했어요. 여기 깊은 인생관이 있거든요. 뭐냐하면, 무명 탐애(無明 貪愛)라. 이렇게 깊고 또 무상 생명이 이렇게 빠르다. 무상이 신속하고 무명이 아주 강성하다. 강하고 왕성해. 그런 법문인데 이 법문이 그런 갑다 하고 그냥 듣고 참 중요한 법문이다 했는데, 나중에 보니까 이 법문이 빈두로 존자라는 분이 한 분이 있는데, 빈두로 존자가 위우타연왕설법경이라고 우타연왕을 위해서 설법을 한 경이다, 이렇게 나와요. 그 내용이 어떻게 되냐면, 지금까지 이야기한 비유는 제일 끝부분에 결론적으로 나오는 거고, 앞부분에 보면 우타연이라고 하는 분이 깊은 산속으로 유람을 갔는데, 어떤 분이 그 숲속에 가만히 앉아서 선정을 닦고 있어요. 그래서 우타연은 이상하게 생각해서 “저분이 이 숲속에서 뭘 하고 있는가.” 그래서 가서 물었어요. 묻기를, “일체의 세인(一切世人)은, 일체의 세상 사람은, 탐착 오욕(貪著五欲)이어늘, 오욕을 지금 탐착하고 오욕을 얻기 위해서 열심히 살거늘, 그대는 독처공한(獨處空閒)이라, 독처, 홀로 머문다. 아무것도 없고 한가한 숲속에서, 빌 공자, 한가할 한자, 공한해서, 유하영락(有何榮樂)고. 하는 어찌 하자, 영락은 영화와 즐거움, 즐거울 락, 영화와 즐거움이 무엇이 있느냐?” 그렇게 질문했어요. 세상 사람들은 다 오욕에 탐착해서 사는데 당신은 이 숲속에서 홀로 머물러서 무슨 영화가 있고 무슨 쾌락이 있는가, 이렇게 질문했거든요. 거기에 대한 대답이 빈두로존자의 우타연왕, 빈두로존자의 위우타연왕설법인데, 그 내용은 뭐냐 하면, 인생에는 생로병사환(生老病死患)과, 나서 늘고 죽는 근심과, 또 무명애독전(無明愛毒箭)이 있는데, 어리석은 탐애의 독화살이 있다. 생로병사의 근심과 무명애독전, 탐애하는 그 독화살, 독 독자, 화살 전자인데, 범부는 다 이 탐애 독화살에 맞아 죽는다. 누가 나를 죽이는가. 나의 탐애가 나를 죽인다. 무엇이 걱정인가. 생로병사가 걱정이다. 그런데 누구든지 이 세상 사람 중에 생로병사환에서 어중미해탈(於中未解脫)하고, 거기서 벗어나지 못했고, 무명 독화살에서 유미득발출(猶未得拔出)이라. 미득이라는 건 얻지 못했다. 유, 아직까지도, 발출, 뽑을 발, 날 출자인데, 뽑아내지를 못했다. 그러니 생로병사의 근심과 이 무명애독의 화살에서 뽑아내는 것이, 화살을 뽑아내는 것이 인생 고뇌에서 벗어나 볼 수 있는 좋은 길이다. 그 좋은 길이라는 것을 한 서적에서는 출신활로(出身活路)라고 그래요. 출신이라는 거는 출세한다는 게 아니고, 몸이 나아갈 수 있는, 몸이 나아간다. 날 출자, 몸 신자인데, 그걸 새길 때, 나아가는, 어록에 보면, 가라 할 때는 출신하라 이렇게 했어요. 인생 고뇌(人生苦惱)에서 출신할 수 있는, 나아갈 수 있는 활로, 좋은 길, 살 활자, 길 로자인데, ‘출신활로가 뭐냐.’ 지정된 문제인데, ‘너의 출신활로가 뭐냐.’ ‘나의 출신활로가 뭐냐.’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길이 뭐냐. 내가 나아갈 수 있는 좋은 길이 뭐냐, 이런 뜻이죠. 근데 인생의 출신활로는 세상 것을 구하는 게 아니라, 생로병사에서 벗어나고, 무명애독전에서 벗어나는 것이다. 이런 공부를 하는 거예요. 그래서 영위는 수유간(榮位須臾間)이니, 세상에 영광스러운 쾌락이나 영광스러운 왕위나 이런 영위는 잠깐 사이에 사라진다. 그래가지고 지자는 심관찰(智者深觀察)이라, 지혜에 있는 이는 이 세상에 영위와 세상의 쾌락이 잠깐 사이에 없어지는 것을 아주 깊게 관찰한다 이거예요. 심관찰이라, 깊게 관찰을 해요. 그래서 불응어차사(不應於此事)에, 이 세상에 영화와 세상의 쾌락에, 이에 인생이 희유상(而生希有想)이라, 희유하다, 좋다는 생각을 내지 아니한다. 세상의 영광과 세상의 쾌락에 좋다는 생각을 내는 거는 이런 일만 쳐다보는 현시적 인생관이고 이거는 잠깐이다. 구할 게 없다. 탐할 게 없다. 잠깐 머무는 것을 구하고 탐애하는 것은 어리석은 부질없는 것이다. 이렇게 관찰하는 것이, 이것이 지자의 관찰이다. 그래서 지혜로운 이는 세상의 쾌락에 좋다는 생각을 내지 않는다. 이런 법문이에요. 그래서 얼마나 이게 쾌락이 허망하고 얼마나 인생이 무상하냐. 마치 우물에 나무뿌리에 매달린 사람이 나무 위에서 떨어지는 꿀방울을 탐하는 것과 똑같다. 이게 무서운 인생 관찰인데요. 이런 관찰을 항상 해야 돼요. 쾌락은 잠시요, 고통은 길다. 그런데 통시적으로 관찰하면 이게 보이는데, 현시적으로 관찰하면 앞에 쾌락만 보이지 그 꿀 떨어질 때 그것만 알지, 금방 이게 매달리는 나무뿌리가 다 떨어지고, 금방 밑에 독사한테 물려 죽고 이게 안 보인단 말이에요. 그래서 도 닦기 전에는 인생 관찰부터 깊이 해야 도를 닦아요. 석가모니가 ‘인생은 생로병사가 있구나.’ 이런 관찰이 없으면 절대 도를 못 닦아요. 그러면 이렇게 도를 닦을 인생 관찰이 됐으면, 이거 어떻게 닦느냐 하는건데. 처음에는 괴로움을 없애는 쪽으로 부처님이 계속 인도를 했어요. 괴로움을 없애는 쪽으로. 이고(離苦). 고를 여의면 즐거움을 얻는다. 이고득락을 가르쳤단 말이에요. 그런데 그다음에는 보살행을 하는 쪽으로 가르쳤어요. 바라밀 공덕행을 닦으면 괴로움에서 다 벗어날 뿐 아니라 지혜를 얻는다. 그다음에는 화엄경, 법화경 얘기인데, 인간에게는 마음이 있는데 이 마음에는 없는 게 없다. 일체중생도 그 마음 안에 다 있고, 일체의 불보살도 그 마음 안에 다 있다. 그래서 닦아서 얻을 수 있는 걸 도라고 그러고,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 걸 업이라고 그러는데, 도에는 반야도도 있고, 또 보리도도 있고, 열반도도 있고, 해탈도도 있고, 있는데, 반야, 보리, 열반, 해탈은 다 마음 떠나서 없다 이거에요. 마음 없는 반야가 없고, 마음 없는 보리가 없고, 마음 없는 열반이 없고, 극락세계에 가도 극락세계를 느끼는 마음이 있다는 거예요. 마음 없는 극락이 없죠. 그래서 마음은 일체 만법의 근본이다. 이걸 가르치는 게 불교예요. 마음은 일체 만법의 근본이다. 그래서 이 한마음에 십법계가 벌어지고 삼천 세계가 벌어진다고 가르치는 게 천태종의 가르침이거든요. 무념삼천 무념십법. 그리고 화엄경에서는 일어남이 없이 일어나는 게 마음이다. 불기이기라. 무용의용이라, 움직임이 없이 움직이는 게 마음이다. 그래서 삼계가 일심이요, 중생사회가 모두 한마음이고, 또 제법이 일심이고, 모든 만법이 다 일심이고 또 성현이 일심에서 나온다. 그러면 이 일심으로 돌아가면 된다. 일심으로 돌아가는 게 뭐냐. 다만 이 마음 중에 좋은 마음만 쓰면 된다. 그게 불보살이다 이거지. 좋은 마음만 쓰면 되는 거예요. 그럼 그 좋은 마음을 어떻게 써야 하나. 첫째는 나쁜 마음을 항복시켜요. 나쁜 마음은 뭔가 허망한 거 구하는 마음이거든요. 나무뿌리에 매달린 사람이 그 꿀 떨어지는 것만 생각하는 거, 그게 허망한 거 구하는 마음이라는 말이에요. 그런데 이 허망한 걸 구하지 않으려면 어떻게 되느냐. 그 허망함을 구하는 마음을 중지시켜야 돼요. 이제 이게 휴망상(休妄想)이에요. 망상을 쉬어라. 그리고 참 마음을 잘 써야 돼요. 휴망상 선용심(善用心). 마음을 잘 써라. 선용심이라. 착할 선자, 쓸 용자, 마음 심자. 마음을 잘 쓴다. 망상은 쉬고, 그 불보살의 마음과 범부 중생의 마음이 있는데, 범부 중생은 누르고, 쉬고, 불보살은 마음을 잘 쓰면 된다. 이게 불교예요. 그러려면 이제 어떻게 해야 되냐. 이렇게 가르치면 전생에서부터 마음 닦은 사람은 금방 아는데요. 금방 알아버려요. 근데 전생에서부터 이 나쁜 마음 쉬는 업이 부족하고, 좋은 마음 쓰는 업이 부족하면 몰라요. 그러니까 뭐냐. 온갖 방편을 부처님이 낸 거예요. 그게 수행이라는 거예요. 수행은 방편이요, 일체 수행은 다 방편이다. 방편이라는 건 뭐냐. 안 되는 데서 되는 대로 나아가는 길이거든요. 접근이라고 방편이라는 거는. 수행은 방편인데, 방편은 접근이라는 거지요. 안 되는 걸 되게 하는 길이에요. 그러면 그 방편 중에 이제 기도라는 게 있는 거예요. 기도를 딱 하면, 말이 기도지, 이렇게 행사는 하지만 사실 잘 안 해요. 기도 행사할 때 보면 되게 많이 할 것 같지만, 돌아서면 그만이에요. 그건 솔직해야지. 왜 그러냐면 하도 많이 즐거움만 구하는 것이 업이 돼서, 즐거움이 허망하다는 걸 깊이 못 느끼니까 기도해야 되겠다 하지만은, 행사는 해요. 그런데 돌아서면 잘 안 하거든요. 그런데 행사라도 하는 게 그게 어디냐 이거지. 행사 안 하는 것보다 얼마나 난데. 누가 그러데요. 단합대회 한다고 그래서, 단합하면 됐지, 대회는 왜 하냐. 근데 단합도 안 하는데 대회까지 안 하면 더 안 되잖아요. 그러니까 기도도 안 하지만, 기도 행사까지도 안 하면 더 안 하니까, 기도하게 하는 한 방편으로서 입재를 하고, 회향을 하고, 중간에 계속 정진을 하고, 이게 다 방편인데, 허망한 걸 구하는 마음을 쉬고, 참다움을 구하는 지혜의 마음을 자꾸 키워서, 한쪽으로는 쉬고 한쪽으로는 키워서, 그러면 이제 마음이 점점 어두운 마음은 줄어들고 밝은 마음이 많아져가지고, 그 한마음으로 돌아간다. 이거 이제 일념일심이라고해요. 한마음으로 돌아가면 그 한 마음 안에 일체 중생도 있고 불보살도 있고, 다 있다. 그리고 이거는 한 생각으로 바로 해탈하는 길이 책을 보기 이전에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이거든요, 이게. 염불을 한다든지 기도를 한다든지 이렇게 관법을 닦는다든지 화두법을 닦는다든지 이게 다 마음으로, 바로 마음으로 들어가는 길이에요. 근데 이걸 안 믿는 사람은 경을 봐야 돼요. 이게 일체중생도 마음이고, 제불보살도 마음이라는 게 이게 과연 맞나. 일체 중생도 마음 없이는 있을 수가 없고, 마음 없는 지옥이 어디 있냐 이 말이죠. 마음 없는 극락이 어딨어요. 제불보살도 마음 없이는 있을 수가 없으니, 기도다, 참선이다, 무슨 관법이다, 염불이다 하는 것은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들어가는 길이에요, 이게요. 근데 자꾸 글을 보고, 방법을 묻고, 그러면 이게 좀 답답한데, 등산을 가서 가만히 보면 등산할 마음이 없는 사람이 길만 물어요. “여기로 가면 어디로 가요? 요리 가면 얼마나 가요? 요리 가면 쉬워요?” 이런 사람 길 가르쳐주지 말아요 돼요. 뭐라고 그러냐. “가보세요.” 가보면 자기가 알지, 근데 가기 싫을 때는 꼭 앉아서 물어, 이렇게 앉아서. “해탈하면 뭐가 좋은데요? 성불하면 뭐가 좋은데요?” 이런 식으로. “안 하면 안 되나요?” 이게 이제 그것도 그런 신심이 일어나야 하기 때문에, 신심을 낼 때까지 필요한 거예요. 그냥 그거 안 하고 신심이 바로 나면, 바로 마음에서 마음으로 바로 가니까, 이제 수행이라고 본단 말이죠. 경을 보는 것도 기도, 참선, 염불하고 똑같은 방법으로 경을 봤는데, 경전을 해석하기 위해서 보는 게 아니라, 이제 망상을 쉬고 지혜를 키우는 참선식 간경, 기도식 간경, 염불식 간경을 전통적으로 했어요. 그래서 이제 학교에서 경전 공부하는 거 하고, 사찰에서 경전 공부하는 거, 이게 근본이 틀려요. 일제시대만 하더라도 한문경을 보는데, 한자 한 자도 모르는 사람이 경을 다 봤어요. 그걸 인연 간경이라고 그래요. 인연 간경. 인연으로서 경을 보는 거지. 그건 뭐냐 하면, 한문을 보면 몰라. 그래서 그걸 인연으로 이력을 졸업한다. 그걸 인연이력이라고도 하고, 이력은 강원합방을 하는데, 은사들이 그래요. “너는 금생에 인연이라도 지어야 되니까 강원에 가서 졸업을 하고 와라.” 그때 한자 하나도 모르잖아요. 그러면 어떻게 하느냐. 글을 아는 학인들과 똑같이 예불을 하고, 똑같이 경 펴면 펴요. 경 닫으면 닫고. 그래서 시간에 맞춰서 어김없이 경을 펴고, 경을 닫고 보는 것이 중요하지, 그걸 알고 해석하고 풀이하는 건 관심이 없어. 그래서 간경도 참선식으로 한다. 이게 조계종 종품이거든요. 참선이라는 건 뭐냐. 허망한 마음은 다 쉬고 그 지혜의 마음을 점점 키운단 말이에요. 그래서 그 마음의 근본을 봐버리면 그걸 견성이라고 그러는데, 그 견성이 뭐냐. 제불의 마음이나 보살의 마음이나 중생의 마음이나 전혀 다를 바가 없다. 근원심으로 돌아간다 이거죠. 기도가 그런 거예요. 허망한 중생심을 쉬고, 청정한 불보살의 마음을 열어, 한쪽은 쉬고 한쪽은 열고, 그래서 바로 가는 것이 범부의 지위를 떠나지 않고 마음에서 마음으로 간다. 이게 이제 전통 수행법이거든요. 祈禱因緣 기도인연地藏大聖威神力 恒河沙劫說難盡지장대성위신력 항하사겁설난진見聞瞻禮一念間 利益人天無量事견문청례일념간 이익인천무량사尊號稱名 念念無間 清淨光明 一時現前존호칭명 염념무간 청정광명 일시현전 그래서 여기 보면 지장대성위신력(地藏大聖威神力)이 항하사겁설난진(恒河沙劫說難盡)이니라. 항하사겁을 얘기하도록 다 말할 수가 없다. 견문청례를 일념간(見聞瞻禮一念間)이라도, 일념간이란 일찰나인데, 보고 듣고 얘기하는 것을 한 찰나 순간만 하더라도, 이익인천무량사(利益人天無量事)라, 인천에 이익됨이 그 일이, 헤아릴 수 없는 일이다. 이런 게 있는데, 이걸 더 줄여서 이야기를 하면은, 존호를 칭명하야(尊號稱名), 지장보살, 지장보살 하는데 높은 명호란 말이야. 이걸 불러. 그런데 이 지장보살님, 지장보살 부르는 의미가 뭐냐. 허망심 쉬는 거예요. 허망한 마음을 쉬는 게 지장보살 부르는 의미예요. 그리고 지혜심을 밝히는 거예요. 지장보살하면 허망한 마음은 쉬어지고, 지혜심이 밝아져요. 이래가지고 염념무간(念念無間)하면, 한 생각 한 생각 지장보살, 지장보살, 그 한 생각 한 생각에 허망한 마음은 점점 가라앉고, 밝은 마음은 점점 올라와서, 마음에서 마음으로 중생심 그대로 바로 제불심으로 들어가는 길이다, 이 말이죠. 이게 형상에서 보면 여기서 저곳 가려면 여기를 떠나서 저곳에 도착할 수 있는데, 이 마음은 그렇지 않아요. 여기 앉아서 거기 가는 거예요. 왜냐. 일심은 무형이라. 일심은 형상이 없어. 그래서 무형의 마음으로 무형의 마음에 가는 거니까 여기를 떠나지 않고 간다. 중생심으로 떠나지 않고 제불심으로 들어가는 거예요. 뭔 소린지. 참말인지. 참말 아니라고 들으면 손해가 이루 말할 수 없어요. 그래가지고 청정광명(清淨光明)이, 청정, 청정심으로 딱 가면, 상광상조라. 항상 광명이 항상 비친다. 이게 제불심이거든요. 이 상광상조 청정광명이 일시에 현전(一時現前)이라. 바로 한순간에 눈앞에 나타난다. 이게 기도예요. 일시현전이라. 기도를 보면 마장이 생길 수가 있어요. 무슨 마장인가. 현상장애라는 게 있는데, 꼭 기도 좀 깊어지면 불보살이 나타나요. 불보살이 어떤 불보살인가. 청정광명 불보살이 아니라, 현상시현, 형상으로 이제 나타내는 불보살이 나타나요. 그 기도 좀 하면요. 꿈에 부처님 모습이 나타났어. 그게 어떤 부처님 모습이냐. 자기가 눈으로 익힌 부처님 모습이에요. 근데 어느 절에 가니까 그 꿈에 본 부처님이 그 절에 있어요. 그러면 그냥 좋아가지고 그게 뭐 엄청난 건 줄 알고 그랬는데, 그거 쫓아다니다 보면 그게 마장이에요. 그게 견불마장이라고, 견불마장이 생기면은 청정광명을 못 얻어요. 청정광명불을 얻어야 되지, 견불마장에 끌리지 마라. 어떤 불보살이 꿈에 보여도 거기에 멈추면 안 돼요. 오직 좋은 칭명을 계속해서, 부처님 보는 생각도 점점 이제 맑아져가지고, 그 맑은 마음이 온몸을 다 삼키고, 하늘을 다 삼키고, 땅을 다 삼켜서, 오직 일념정광뿐이다. 이것을 허공이 방락하고 세계가 평침이라고, 허공도 다 없어지고, 세계도 다 없어지고 일념정광 그거 하나뿐이다. 이게 기도예요. 한생각 맑은 광명. 몸도 없어요. 이거 몸도 일념정광이에요. 한 생각 맑은 광명. 하늘도 한 생각 맑은 광명. 일체 중생도 한 생각 맑은 광명. 이런 거를 가르친단 말이에요. 그래서 일체 불보살이 일심 불보살이다. 一心三寶 일심삼보普放慈光 常揮慧劍 照明陰路보방자광 상휘혜검 조명음로斷滅罪根 倘切歸依 奚遲感應담멸죄근 당절귀의 해지감응掌上明珠一顆寒 自然隨色辨來端 장상명주일과한 자연수색변래단幾回提起親分付 暗室兒孫向外看 기회제기친분부 암실아손향외간(地藏請文.釋門儀範下) (지장청문, 석문의범하) 그래가지고 여기 석문의범(釋門儀範)에 보면, 장상명주일과한(掌上明珠一顆寒)이라, 지장보살이 손에 구슬을 가지고 있잖아요. 그게 일념정광심이거든요. 한 생각 청정 광명의 마음이란 말이에요. 장상명주가 하나의 그 구슬 덩어리가 차고 차다. 차다는 얘기는 아무것도 없어요, 거기. 범부도 없고, 제불도 없고, 보살도 없고, 생사도 없고, 지옥도 없고, 아무것도 없어요. 그런데 어떻게 되느냐. 자연수색변래단(自然隨色辨來端)이라. 자연이 응화가 무진이요, 일념정광이 응화, 응용해서 변화하는 것이 끝이 없어요. 그래가지고 자연의 색을 따라서 변래단이라. 오는 단서, 오는 여러 가지 하나하나를, 끝 단자는 하나하나, 단서 단서, 사사물물인데, 그 일념정광에 비춰 보는 사사물물을 다 가려낸단 말이죠. 그런데 이게 구슬이 움직여서 가려내는 거 아니에요. 가만히 있으면서 사람이 오면 사람을 가리고, 비춘다 이 말이에요. 산이 나타나면 산을 비추고. 이렇게 지장보살을 찬하고 있어요. 자연수색변래단이라. 그다음에 밑에는 또 한탄인데, 이게 중생이 얼마나 세상사에 쫓아다녔는지 알 수 있거든요. 기회제기친분부(幾回提起親分付)라, 몇 번이나 지장보살의 맑은 광명을 세워서 광명으로 돌아가라고 친히 분부를 했겠는가. 근데 안 듣지. 말해봐요. 안 들어요. 그래서 여기도 그래놨어요. 그런데 암실아손향회간(暗室兒孫向外看), 암실아손들은, 저 어두운 방에 있는 후손들은 향외간이라, 자꾸 밖을 쫓아서 쾌락과 향락과 현세 허망 만족을 쫓아서 달려가고 있다. 향외간이라, 밖을 향해서 본다 이거거든요. 이게 기도예요. 이제 불교가 처음에는 보리 열반을 가르치다가 나중에는 청정일심을 가르치기 시작을 했어요. 보리 열반이나 온갖 게 전부 다 이게 청정일심을 떠나서 있는 게 아니니까, 경전도 이제 많이 유통이 됐고 법문도 많고 하니까 이제는 마음에서 마음을 바로 가라, 그게 수행이에요. 근데 학교에 가서 불교를 해보니까 이게 안 되겠더라고요. 마음에서 마음 갈 생각을 꿈에도 못 꿔. 해석해서 논문 써내려고만 자꾸 애를 써요. 왜냐면 논문을 써내야 그 논문에 자기 이름이 실리거든. 그러니까 이게 금방 죽어서 없어질 허망한 이름을 구하려고, 마음이고 수행이고 무엇이고 다 팽개치고 그리 가는 거예요. 그래서 이거 아주 고약한 불교다, 천하에 없던 불교다. 이거는 영명연수도 이 불교를 안 했고, 서산, 사명도 안 했고, 원효, 의상도 안 했다, 이런 불교는. 그래서 이 불교 인제 이대로 하면 안 되요. 옛날에 연수, 규봉, 원효, 의상이 했던 불교로 돌아가야 된다. 이래가지고 인문학적 불교학에서 승가 불교로 돌아와야 된다고 나 혼자 막 떠들었는데, 아무도 쳐다보는 사람이 없어. 안 쳐다보나 마나 나는 떠나도 간판이라도 달아 놓자고 간판 달아놓고 나왔구먼. 여기도 그랬어요. 기회제기친분부아, 명주일과, 밝은 구슬 한 덩어리, 청정일심, 명주일과를 이걸 찾아라. 이렇게 몇 번이나 이걸 드러내서 해보라고 분부를 했던가. 근데 암실아손들은, 어둠 속에 머무는 이 후손들은 향외간이라. 전부 다 이게 밖을 향해서만 가고 있다. 나만 간판 달아놓고 나온 게 아니라, 옛날 선지식이 다 그냥 그렇게 했어요. 그러니까 기도를 잘하면 이렇게 한마음을 떠나지 않고, 바로 불보살하고 통할 수 있는 길이다 이거에요. 그런데 이게 왜 잘 안 되느냐. 눈에 보이는 재미가 없거든요. 재미가 없어서 안 하는 거예요. 재미 찾다가 인생 망치는 거지. 재미는 결과가 없어요. 현 순간뿐이야. 그래서 이제 더 근기가 높고 신심이 깊을수록 이걸 해요. 경을 봐도 경 새기는 데서 끝나지 않고 그 마음 돌아가는 경을 본다고요. 이걸 해요. 그런데 진관사는 이제 중요하면 행사 기도라도 보더라도 이 길을 계속 하니까 내가 얼마나 좋은 일이에요. 행사 기도도 안 할 수도 있는데, 얼마나 좋은데, 행사 기도라도 계속 하니까. 기도한다고 선전만 해도 그만큼 공덕이 되고, 기도해야 되겠다 하고 동참만 해도 그만큼 공덕이 되고, 또 가끔 와서 지장보살 한 번씩이라도 불러도 이게 보통 일이 아니거든요. 그러니까 참 좋은 일이에요. 오늘 좋은 일에 좋은 법문 마치겠습니다.
-
[일요 특별법회] 삼일절 특별강연
문광스님 2023-02-25
문광입니다. 반갑습니다. 진관사에서 3.1절을 맞이해서 이렇게 큰 기념행사를 하는데, 저에게 강연을 요청하셔서 제가 감당이 되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한국학 중앙연구원에서 한국학 연구를 하고, 탄허스님 연구를 해서 근현대 한국불교에 대해서 관심이 많고 연구를 했고, 그다음에 불교신문에 한국학에세이라는 글을 한 2년 정도 연재를 했고, 아마 이제 초파일쯤 되면 책이 나올 것 같아요. 불교에 나라가 어디 있으며, 민족이 어디 있고, 분별이 어디 있겠습니까만, 한국의 불교가 국가의 운명이 위험하고 힘든 상황에 처해 있을 때마다, 우리 한국불교의 많은 큰 스님들이 그리고 불자 여러분들이 국가를 수호하고 나라를 지켜왔다라는 이러한 역사가 있기 때문에, 우리 한국불교를 연구하는 것 역시 굉장히 중요한, 아주 중요한 문제이죠. 그래서 제가 작년에는 인왕경을 새로 번역하고 독송하자는 운동을 벌여서, 많은 분들이 지금 인왕경을 독송하고 있습니다. 전세계 인왕산이라고 하는 곳은 한국에밖에 없어요. 인왕호국반야바라밀경에서 나온 인왕이라고 하는 그 말을 써서 인왕경이라고 하는 경에서 인왕산이 왔고, 인왕사가 있었고, 무학대사가 인왕산에서 아마 인왕경을 독송했다고 보여집니다. 거기에 호국품이 나오고, 우리가 호국 정신으로 나라를 지키고, 그렇게 해왔던 역사가 있습니다. 여기에 이 진관사는 또 어떠한 곳이냐. 조선이 건국을 해서 4대문을 짓고 도성을 축조를 해서 조선이 시작이 됐을 때, 우리 수도 한양을 수호하는 동서남북의 사찰을 일단 설정을 했죠. 그래서 이 서쪽을 맡은 곳이 바로 진관사입니다. 그 전에 고려 때도, 그다음에, 그 이전에 역사는 굉장히 오래됐으나, 조선시대에도 그러한 임무을 가지는 아주 중요한 사찰입니다. 그리고 동쪽에는 불암사가 있고요, 북쪽에는 승가사가 있습니다. 거기도 비구니 스님 선원이 있고, 마애불이 있고 다 아시죠. 남쪽에 삼막사가 있어요. 그래서 이 수도 한양을 수호하는 동서남북의 네 사찰 가운데 서쪽을 수호하는 곳이 바로 이 진관사입니다. 그러면 그 정도의 중요한 임무가 있으니, 이 불교 역사에서 고려시대까지의 역사는 말할 것도 없고, 조선시대에도 이 진관사는 굉장히 의미가 깊은 그런 역사가 담겨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저도 왕조 실록을 예전에 보다 보면 진관사가 등장을 해요. 그래서 처음에 보니까 수륙재 이야기가 나와요. 왕조 실록에 수륙재 얘기가 나오면서, 이 수륙재가 진관사에서 벌어지고 있는데, 이 부분에 대해서 나눈 말씀들이 나옵니다. 진관사에서 계속 그렇게 수륙재를 할 수 있는 그런 지원을 해 주시고, 그다음에 세종대왕의 왕후였던 소헌왕후의 재를 여기서 지내고요. 뿐만 아니라 여기는 말로 다 할 수 없는 그런 역사가 이 진관사에 담겨 있지요. 진관사는 비구니 스님 사찰이니까 비구 스님이 비구니 스님 절에 잘 가지 않습니다. 그래서 많이 못 와보고 있었는데, 제가 탄허 스님을 연구하면서 이제 이 진관사에 조용하게 와서 현판 사진도 찍고, 주련도 보고, 그렇게 하는 기회가 있어서 왔다가, 그다음에 이제 동국대 불교한문아카데미에서 제가 강의를 하고 있었는데, 그때 수업 듣는 비구니 스님들, 스님들, 대중들이 같이 와서 참배를 정식으로 온 적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지금 주지 스님이 그때 총무로 계실 때, 그때 와서, 지금 회주로 계신 계호 스님, 주지로 계신 법해 스님을 그때 뵙고 인사를 드리고, 이제 인연을 맺어서 박사 논문을 쓰고 했었는데요. 오늘 제가 간단하게 출력을 한다고 해왔는데, 카트리지가 다 돼서 이렇게 빨간 게 나온 데도 있을 겁니다. 거기 보시면 제가 탄허스님의 자료를 막 찾다가, 탄허스님 마지막 입정하시는 날 사진을 구했어요. 그게 지금 마지막 1983년 6월 5일 탄허스님 입적하실 때에 오대산 방산굴의 상황입니다. 스님이 편찮으셔서 서울대병원에 입원을 하셨는데, 그때 위암이셨다고 하는데, 의사 선생님이 “스님, 3개월 뒤에 입적하신다”고 그랬더니 스님이 그러셨대요. “내가 그때 만약에 세상을 뜨면 아주 명의인데, 사람은 그렇게 죽지 않소. 복진즉사(福盡卽死)라, 복이 다 해야 죽지.” 날짜를 딱 얘기하셨대요. “83년 6월 5일,” 이렇게 딱 얘기하시면서 “유시에 나는 세상을 뜨기로 돼 있다.” 그게 6년 전이셨답니다. 그러고 나서 노자 도덕경과 주역까지 다 번역을 하시고, 불교 경전을 다 하시고 난 다음에, 모든 교재, 화엄까지 다 하시고, 사교 사지까지, 치문까지 다 하시고 나서, 노자, 장자, 주역 선해까지 다 번역을 다 하신 다음에, 마지막 노자 번역을 교정을 다 보시고 딱 놓으신 게 입적하시기 바로 일주일 전이었다고 그래요. 그래서 미질이 생기기 시작해서 건강이 갑자기 문제가 생기는 듯이 보이니, 문도의 모든 분들이 ‘진짜 이때 입적을 하시려나 보다’ 이렇게 해서 이때 다 모이셨다는 거예요. 그래서 실제로 이게 그 마지막 장면을 찍은 사진이에요. 6년 전에 내가 입적을 하겠다고 말씀을 하시고, 여기에 이 마지막 장면에 모든 대중들이 와서 볼 수 있게 해 주셨다. 그리고 마지막에 이 대화 장면들이 그대로 다 지금 나와 있죠. 그래서 이 사진을 왜 저기 앞에 했냐면, 그 앞에 옷매무새를 만져주고 계신 분이 우리 여기 진관 큰스님이셨어요. 진관 스님께서 이 진관사에 계실 때, 탄허스님이 서울에 개운사의 대원암에 번역도 하시고 계실 때, 춘성 스님이나 이런 어른 스님들하고 같이 서울에 볼 일이 있으셔서 오시고 하면 ‘진관사 가서 국수 좀 먹고 갈까’ 그래서 오셨다고 해요. 여기 진관사의 사찰 음식이 유명하죠. 이렇게 아름답고 깔끔한 도량이 어디 잘 있습니까. 우리 비구니계의 아주 큰 스님이신 진관 스님은 오대산 지장암 출신이시잖아요. 그래서 한암스님, 탄허스님께 다 가르침을 받고, 탄허스님 여기서 번역도 하실 때 도와주시기도 하시고, 공양을 많이 하시고 그랬던 그런 역사가 있는 곳입니다. 그래서 이 마지막 날, 진관 스님께서 오셔서 이렇게 했던 마지막 장면의 사진을 제가 탄허학연구라는 책에 실었습니다. 그래서 제가 그때 당시에 누구누구 계신가 하는 얘기까지 다 했고, 맨 오른쪽에 계신 스님이 마지막 여쭌 내용이, “스님, 마지막에 어떻습니까? 성성합니까?” 하니까, “성성하지, 성성하지 매하냐, 이 멍충아.” 그러셨대요, 마지막에. 그러시고 나서 마지막에 “유시됐나? 유시됐나?” 오후 5시부터 7시까지가 유시죠. “유시됐나?” “유시됐습니다.”하니까 딱 오른쪽으로 누우셔 가지고 입적하셨다. 그때 “마지막으로 한 말씀 남겨주십시오” 하니까, “일체 말이 없어.” 하셨다는 거예요. 여러분 팔만대장경이 일자불설(一字不說)입니다, 그죠. 팔만대장경 한 번도 설한 바가 없다. 그래서 그때 많이 오셨던 그 유적들이 지금 남아있는 게 이 <나가원> 현판이 있죠. 원래 나가원, 나가르주나 할 때 나가가 용입니다. 용. 나가대정이다, 이제 부처님의 선정을 나가대정이라 그래요. 여러분 인도의 부다가야에 가면, 부처님 성불하셨던 부다가야 보리수 나무 옆에 보면 부처님 앉아 계신데 위에 이렇게 용이, 뱀이 수호하고 있는 모습을 만들어 놨잖아요. 부처님의 선정에 드신 모습을 말씀하시는 게 이게 나가원입니다. 그래서 선원으로 사용하시는 곳이고, 여기서 정진하셨던 그런 곳이라고 하죠. 그 위에 사진의 대웅전이 1910년도에 6.25 때 이 진관사가 불타기 전에 대웅전이었고, 여기에 현판 글씨가 추사 김정희 선생의 글씨다, 맞죠. 여기에 글씨를 모각을 해서 지금 강남의 봉은사 현판이 이 글씨로 지금 되어 있어요. 판전 현판은 강남 봉은사에서 화엄경 경판을 만들 때 추사가 써주신 게 맞고, 이 대웅전 현판은 원래 진관사 현판이었다라고 하는 것입니다. 지금 진관사는 누구나 불자라면 다 아는 서울의 중요한 아주 유서 깊은 전통이 있는 아름다운 사찰인데요. 갑자기 2009년에 칠성각에서 태극기가 발견이 됐죠. 다 아시죠? 그래서 그 태극기가 발견이 되고, 그 안에 그때 당시에 독립신문, 3.1 독립운동에 대해서 다뤘던 모든 기사와 관련된 문헌들이 방대하게 나오게 되었습니다. 그게 2009년이었죠. 그 내용들이 나오면서, 이제 백초월 스님에 대해서 본격적으로 재조명이 되게 된 것입니다. 지금 오늘 여기도 오셨지만, 백초월 스님의 연구를 처음에 했던 김광식 교수님이 태극기가 나오기 전에 백초월 스님에 대해서 연구를 했고, 그리고 난 이후에 태극기가 나오기 시작을 하면서 본격적으로 이 진관사가 우리 일제시대 때 독립운동의 중심적인 역할을 했던 그런 곳이다, 초월 스님이 계셨던 곳이다, 이래요. 그래서 초월 스님이 1878년생이라고 이렇게 나와 있는데, 독립운동하시다가 독립을 못 보시고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하십니다. 감옥에 계시다가. 참 안타까운 일이죠. 한 1년만 더 계셨어도 독립을 보셨을 텐데. 그래서 그 유해가 청주교도소 근처에 있었다고 하는데 아직까지 유해를 찾지 못했다고 그렇게 알고 있는데, 안타까운 일입니다. 그러나 스님이 남겨 놓으신 그 사상과 그 내용들은 지금까지도 아주 강력한 메시지를 던져주고 있어요. 우리는 3.1 독립운동의 33인 가운데 용성스님, 만해스님 두 스님을 알고 있었는데 우리 초월스님 같은 경우에는 더 강력한 항일 투쟁을 하셨다, 독립운동을 하셨다는 걸 알 수가 있어요. 스님이 따로 쓰셨던 별호가 거북 구자, 나라 국자, 구국(龜國)이셨대요. 근데 고문도 많이 당하셨을 것이고, 옥살이를 많이 하시고, 이래서 나중에는 일제가 와서 뭘 자꾸 독립운동 이런 것에 대해서 캐고 묻고 하니까, 그냥 거북이를, 죽은 거북이를 하나 이렇게 앞에 놓고, 거북이하고 그냥 대화하셨대요. 그러고 있으니 스님이 정신이 좀 이상한가 보다 했다고 합니다. 나중에 스님 별호를 거북 구자, 나라 국자를 써서 구국이라고 쓰셨대요. 근데 그걸 그냥 읽으면 구국은 나라를 구한다는 거 아닙니까. 한자로 거북 구자를 쓴 거지만, 나라를 구한다는 구국이라는 의미를 그렇게 상징적으로 쓰시면서, 일제와 대화하지 않고 뜻을 굽히지 않으셨다고 하는 게 이제 우리가 다 아는 내용입니다. 그래서 저도 이번 기회에 논문들을 다 찾아서, 백초월 스님과 관련된 논문들, 태극기와 관련된 논문들을 다 찾아보면서, 김광식 선생님 쓰신 책도 보고, 공부를 이제 본격적으로 한번 해봤습니다. 아직 연구할 부분이 굉장히 많다는 생각이 들어요. 불교계에서 이렇게 진관사 칠성각에서 태극기가 나오니까 아주 놀랍지만, 이것이 만약에 그것이 아니었다면, 이 연구는 아주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많이 됐을 것이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니까 우리가 불교라고 하는 어떤 종교적인 그런 부분에서 차별을 좀 받고 있는 게 맞아요. 그러니까 지금 여러분 한국불교가 위기 아닌 적이 없습니다. 항상 이런 힘든 과정 속에서 한국불교가 이렇게 명맥을 유지하고 있는데, 이 초월 스님의 사상이라고 하는 것에 재조명이 다시 돼야 합니다. 그중에서 제가 이제 굉장히 관심을 갖고 본 게, 여러분 사진에 보시면, 태극기입니다. 그때 당시의 독립신문, 우리가 지금 독립운동을 했다는 걸 알린 상해의 신문도 있고 각가지 여러 형태의 신문이 있는데, 그 신문들이 1919년 6월부터 한 12월 사이에 나온 내용들이 다 이 태극기에 싸여 담겨져 있고, 왼쪽 위에 보시면 건괘 위에 살짝 불탄 모습이 있어요. 그래서 이 태극기는 사용을 했던 태극기라고 지금 추정이 되죠. 3.1운동 때 이 태극기를 사용했다고 봐야 되지 않겠느냐. 그리고 그냥 태양만 하나 이렇게 돼 있는 기존의 일장기인데, 거기에다가 태극을 그리고,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을 했었다라고 하는 그런 얘기들이 많았고, 그 이후에, 우리가 해방 이후에, 그렇게 만들어서 사용한 내용은 있었으나, 실제로 3.1운동 당시에 이렇게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그려서 사용한 태극기로는 유일하죠. 우리 진관사 태극기가 나와서 이걸 우리가 처음으로 실증을 하게 된 것입니다. 일본의 제국주의의 어떤 침탈, 그리고 식민지 일제 강점이라고 하는 이런 상황에 대해서, 그것에 대한 강력한 저항의 의미로 일장기 위에 태극기를 이렇게 그리셨죠. 그리고 괘를 그려놨는데 괘가 이렇게 번진 것을 보면 일장기에 그린 것이 확실하다 이렇게 보여집니다. 그리고 이 얼룩이 져 있고 이렇게 된 것을 보면 분명하게 사용을 했었던 것으로 보여집니다. 태극기를 이렇게 보면서 여러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저는 그 생각을 했어요. 앞으로 남북통일이 되면 어떤 국기를 써야 됩니까. 이 태극기를 써야 돼요. 그렇죠. 이 태극기가 고종 황제가 대한제국을 선포하기 전에 외국에 우리나라를 대표할 수 있는 형태의 국기가 필요해서 1882년이죠, 박영효로 하여금 태극기를 쓰게 했어요. 그리고 우리가 대한제국을 선포하면서 이 태극기를 국기로 썼고요. 그다음에 1919년에 독립운동 때 이 태극기를 다 사용을 했습니다.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에서도 이 태극기를 썼죠. 그러니까 이제 남북이 분단되기 이전부터 우리의 태극기는 전통성을 가지고 있다고 봐야 됩니다. 근데 여러분 태극기라고 하면, 태극이 어디서 나온 겁니까. 전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국기가 태극기에요. 그렇죠. 전 세계에서 가장 어려운, 난해한 국기가 뭐냐 그러면, 우리 국기가 있고, 또 사우디아라비아 국기도 되게 어렵던데, 하여튼 사상적으로 가장 힘들고 어려운 태극기를 우리가 가지고 있습니다. 이 태극이라 그러면, 첫 번째 떠오르는 게 조선조의 성리학의 주렴계의 태극도설이 떠오를 거예요. 그렇죠. 주렴계의 태극도설이 있어요. 그래서 유교의 모든 학문의 시작은 주역에 나오는 태극도설, 무극(無極)이 태극(太極)이다. 무극이라고 하는 것에서 태극이 나왔고, 그 무극이면서도 태극인 이 상황에서 이제음양이 나오고, 오행이 나오고, 사상 8괘 64괘까지 쭉 펼쳐지니까, 이거는 유교 사상에 입각한 거니까 조선시대의 사상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생각할 수 있을 겁니다. 근데 제가 2010년에 화계사에서 법화경을 같이 공부를 하다가, 법화경에는 견보탑품이 나오니까 다보탑을 실제로 한번 보러 갑시다 이래서, 성지 순례를 경주로 1박 2일을 갔는데, 그때 감은사지를 갔어요. 감포에는 문무왕 해중 수중릉이 있죠. 거기에 문무왕에게 감사한다는, 은혜에 감사한다는 뜻이 감은사고, 거기에 국보로 된 3층 석탑이 멋있게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까 바다에 있는 해중 용이 돼서 국가를 수호하겠다라고 하는 문무왕의 뜻이 담겨 있잖아요. 석굴암에서 이렇게 딱 봤을 때 바로 보입니다. 감포의 물길이 대종천이라고 하는데, 물이 왜 대종천이냐 하면은 몽고가 침입해서 종을 실어서 가다가 바다에 빠뜨렸다고 해서 그게 대종천이잖아요. 그러니까 요즘으로 말하자면 거기가 최고 빠른 고속도로 같은 거예요. 물길로 나르면 가장 빠르니까. 그 물로 들어오면 바로 경주로 들어오게 돼 있는 거죠. 근데 거기를 왜구가 침입을 하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그 입구에 문무왕이 수중릉에서 ‘이제 내가 지키겠다. 해중 용이 돼서 지키겠다.’ 그래서 용이 한번씩 이렇게 들어와서 쉴 수 있는 곳이 감은사라는 거예요. 근데 그 감은사에 주춧돌하고 이 상석이 다 남아있잖아요, 돌들이. 여러분 거기에 한 번 감은사 가시면 꼭 한번 보십시오. 태극이 그려져 있어요. 태극이 그려져 있습니다, 감은사에 가면. 그러니까 그런 태극이라고 하는 게 단순히 조선시대에 시작된 사상만은 아니라고 보여질 수 있어요. 이게 말하자면은 주역이라고 하는 것이 단순히 조선시대 때만 흥행했다는 것이 아니라, 예전부터 동양의 고유한 사상으로 이어져 왔던 것이고, 그것을 우리가 태극기로 사용을 했고, 이 어마어마한 사상들, 탄허스님이 그렇게 얘기하죠. “태극을 깨달은 것을 각이라 한다.” 깨달을 각자의 의미가 뭐냐면 태극을 깨달은 것을 각이라고 하는데요. 그럼 태극이 뭐냐. 태극이라고 하는 건 불일이 불이죠(不一不二). 하나도 아니고 둘도 아닌 거예요. 음양이 나누어져 있지만, 음양이 이렇게 반으로 딱 구분돼서 나눠져 있지 않고, 이렇게 서로 갈마들게 돼 있어요. 그러면 음인 듯하면서도 양이고, 양인 듯하면서도 음이고, 나눠졌는가 하면 하나고. 우리가 용수의 팔불중도(八不中道)에서 나오는 중도의 세계가 그대로 드러난 게 이게 태극 아니겠어요. 불생불멸이요, 그다음에 불일불이요, 불래 불거(不來不去)요, 이게 다 정신으로 다 그대로 태극이 함양하고 있는 겁니다. 근데 이 태극을 일이라고 하는 숫자로 표현하고 있지만, 이 태극의 본래 면목은 뭐냐. 무극이라는 거예요. 극이 없는 거죠. 음이다 양이다, 시비선악이 떠난 자리가 태극이죠. 그러니까 그 떠난 자리를 말로 하면 무극이 돼요. 그러면 무극을 어떻게 표현하냐. 원상 하나 그려놓는 겁니다. 무극은 원상입니다. 무극이 태극이면 태극을 이렇게 하나 그린 겁니다. 그러면 있음의 세계로 설명을 하면 태극으로 설명할 수 있지만, 공의 세계로 설명하면 무극으로 설명합니다. 무극은 숫자로 10수입니다. 10이라는 숫자예요. 화엄경의 수가 10수예요. 10주(十住)·10행(十行)·10회향(十廻向)·10지(十地). 이게 전부 다 10수로 되어 있습니다. 그러니까 무극이라고 하는 수는 숫자의 극수인 10이고, 그 10이라고 하는 무극수는 결국 공과 같은 거예요. 그래서 이제 공이면서도 색이고, 색이면서도 공이고, 공이면서도 1이고, 1이면서도 공인 것이 무극이 태극인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한마음이 일어나면 일심으로 나오는 것이고, 한마음이 끊어진 세계로 들어가면, 공의 세계로 들어가면 무심의 세계가 되는 거죠. 그래서 태극이라고 하는 걸 나타내도 불교의 모든 종지와 전혀 다르지 않다. 그래서 탄허 스님은 ‘태극을 깨달은 것을 각이라고 한다.’ 그렇게 얘기했어요. 이게 이제 이 유교의 핵심 사상이라고 하는 주역과 우리 불교와 화엄을 회통해서 그와 같이 말씀하신 것이죠. 그래서 주역이라고 하는 것도 그게 무교만의 책임이라고 할 수 없다 이거예요. 우주의 진여와 다 통해져 있다. 그래서 이 초월 스님께서 항일 독립운동을 하실 때 만드셨던 단체 이름이 일심교(一心敎)예요. 일심교. 그래서 마포에 진관사 포교당이 있었는데, 거기서 조직을 했어요. 이제 1930년대가 되면 중일전쟁, 만주사변이 일어나면서, 이제 전쟁을 해야 되니까, 모든 물자를 만주로 동원을 해가지고, 거기에 화물 기차가 가는데요. 여러분, 백초월 스님께서 얼마나 용감하셨냐 하면, 그 기차 옆면에다가 말이죠, <대한독립 만세>를 쓰셨대요. 대한독립 만세를 쓴 그 차가 만주까지, 용산에서 만주까지 가는 거예요. 그렇게 가게 하셔서, 그걸 모두 주도하신 분이 백초월 스님이신데, 그렇게 해서 일제에 잡히셨죠. 그때 당시에 스님은 지금 동국대학교의 전신인 중앙전문에서 강사도 하셨고, 아주 일대 강사셨어요. 박한영 스님처럼 그때 최고의 일대 강사셨고, 지리산 영원사에서 출가하셔서 아주 이른 시기에 20대에 이미 조실을 하셨을 만큼 불교에도 환하셨던 분이셨어요. 스님께서 독립운동을 하면서, 그때 지금의 동국대 같은 중앙전문의 학생, 스님들 그런 분들이 다 독립운동을 하게 하고, 상해 임시정부에 계속해서 물자를 지원을 하고, 자금을 보내드리고 했는데, 그때 잡힌 분들이 80여 분 된답니다. 그래서 세 분은 그때 당시에 고문을 당해서 세상을 뜨시고, 그러고 나서 나오셨다가 또 독립운동하셔서, 마지막에 잡혀 들어가셔가지고 청주교도소에서 순국하셨다는 겁니다. 이 과감한 어떤 강력한 이런 파워가 초월 스님에게 나타나는 멋진 독립 정신인데요. 일장기 위에 태극을 그려놓고 이렇게 하셨다는 것이, 우리 조선시대 때 우리 호국불교의 상징인 서산대사, 사명대사부터 시작돼서 일제의 독립운동까지 이렇게 내려오는 우리 불교의, 한국불교의 이런 기라성과 같은 선사 스님들의 독립운동이 다 같이 맥을 같이 하는 겁니다. 용성 스님, 만해 스님이 직접적으로 독립운동을 하셨다면, 우리나라의 큰 스님들이 전부 산중을 지키셨어요. 그러니까 사명대사께서 임진왜란에 나가시면서 그때 부휴선사라고 계셨죠. 부휴 선사가 그때 손을 못 쓰셨대요. 여기 김광식 선생님도 계시니까, 제가 해인사 출신이잖아요. 제가 이 해인사의 모든 사리탑, 부도하고, 진영을 제가 전부 조사하러 다녔어요. 사미 때. 진영이 너무 흩어져 있어서, 그래서 국일암이라고 하는 비구니 스님 암자에 제가 갔어요. -지금은 박물관이 해인사 성보박물관이 있지만, 그때는 성보박물관이 없었습니다.- 국일 스님이 누구냐면 벽암 스님이세요. 부휴 선사의 밑에 벽암 스님. 그 남한산성을 전부 다 다 10개의 사찰을 만들어서 지키셨던, 그래서 국일이라는 호는 벽암 스님의 시호에요. 그래서 국일암이거든요. 거기에 국일스님의 진영이 모셔져 있었어요. 거기에 부휴 선사 제자시니까 부휴 선사 사리탑이 있고 국일 스님 사리탑이 있었어요. 근데 잘 안 보입니다. 근데 제가 진영을 조사하러 왔다고 하니까 어른스님께서 창고문을 열어주시면서 들어오라 그래서 보여주시는데, 벽암각성스님의 진영이 있고, 그다음에 탁본을 떠 놓은 게 있었어요. 사리탑의 탁본을. 벽암 스님하고 부휴스님 사리탑에 탁본을 떠 놓은 게 있는데, 이 탁본을 일타 스님이 떴다고 하시더라고요. 일타 스님이 부휴 선사 재 때마다 내려오신다고 그래요. 지족암에서. 그러시면서 일타 스님이 전생을 굉장히 잘 보셨는데 그 말씀을 하시더랍니다. “내가 원래 통도사 스님인데, 이 해인사에서 살게 된 이유가 내가 전생의 부휴였다” 그래요. “내가 전생의 부휴였다. 그때 손을 다쳐서 손을 못 썼는데 이번 생도 연비를 해서 손을 못 쓴다. 그래서 내가 그 인연법으로 해가지고 해인사의 동쪽 골짜기에서 산다.” 그래서 동곡 일타(東谷 日陀)라고 호를 짓고 사셨단 말이죠. 그래서 그 진영이 그렇게 있었어요. 지금 이런 말씀을 왜 드리냐면, 곳곳에 국가를 호국으로 지켰던 우리 불교의 호국불교의 전통들이 남아 있단 말이죠. 서울에서는 이 진관사가 바로 그러한 곳이라고 볼 수 있겠습니다. 다른 곳도 많지만. 그래서 제가 이렇게 이번에 진관사 3.1운동에 관련해서 강연을 하려고 해서 제가 논문도 찾고 봤는데 제일 궁금한 것은 이거였습니다. 맨 밑에 여러분 사진 보시면 태극기를 한번 보실까요. 태극기에 보시면 왼쪽 위에 건괘가 있죠. 양이 3개가 있는 게 순양이 건입니다. 그렇죠. 그다음에 그 반대편에 대가 돼 있는 것이 곤이죠. 음이 3개가 돼 있죠. 그리고 어렸을 때 우리가 태극기 그리기 많이 했잖아요. 여러분 태극기 어떻게 그립니까. 저는 이렇게 외웠었거든요. 3.1절 이렇게 외웠어요. 3.1절 이게, 3에다가 중간에 1이 있잖아요. 그다음에 밑에는 끊어졌잖아요. 그니까 3.1절 이렇게 외웠어요. 그러면 3 1이니까 여기에 오른쪽에 1 그리고, 음 2개 치면은 되니까, 외우기 쉽게 그렇게 외웠었던 기억이 나는데, 그러면 어떻게 돼요. 건이고 곤이죠. 그다음에 감과 리가 있어요. 리가 뭐냐 하면 불입니다. 불. 그렇죠. 리중허(離中虛)라 그래요. 리중허, 안쪽이 비어 있는 게 리괘입니다. 그러면 건괘 밑에 있는 왼쪽 아래에 있는 게 리에요. 불이에요. 그러면 오른쪽 위에 오른쪽 곤 위에 있는 것이 감이 되겠습니다. 물입니다. 여러분 물 수자가 원래 전서체 보면, 물이 이렇게 흘러가는 거, 이게 괘 모양으로 돼 있죠. 전서체 보면 물 수자가 중간에 물이 쭉 길게 있고, 물이 이렇게 흘러가는 모양으로 해놓은 게 물 수자에요. 여러분 이게 물과 불이라고 하는 거는 64괘 가운데 건괘 곤괘라고 하는 건 순양과 순음인데요. 이거는 상징이에요. 세상에는 이런 게 없대요. 심볼릭한 사태예요. 순양과 순음은 없대요. 세상의 모든 건 음양이 섞여 있대요. 그건 상징일 뿐이에요. 이 세상은 모두 음양으로 구성돼 있다라는 걸 설명하기 위해서 건,곤이 존재하는 거예요. 근데 세상의 모든 것에 음양의 대표하는 것은 물과 불이라는 거예요. 그래서 원래 8괘가 있는데도 불구하고, 옛날에는 8괘를 그린 국기도 있었어요. 태극에다가 8괘를 다 그려놓은 게 옛날에 태극도에도 나오죠. 근데 우리가 태극기를 그릴 때는 건곤감리만 그렸잖아요. 그래서 이게 지금 감리라고 하는 게 하늘과 땅, 물과 불이에요. 근데 물과 불이라고 하는 걸 자세히 한번 여러분 생각해 보세요. 불 속에는 반드시 음이 있어요. 여기 지금 밑에 보시면 리 속에 음이 있죠. 물속에는 반드시 양이 있어요. 이게 무슨 뜻이냐 하면, 우리 스님들은 잘 아십니다. 촛불을 켜놓으면 여러분 초 끝이 뜨거워요. 그렇죠. 초 안에 심지가 있는데, 불 끌 때 그냥 손으로도 끌 수 있어요. 심지 안은 뜨겁지 않습니다. 양이라고 하는 불을 유지하려면, 속에 음이라고 하는 에너지가 있어야 유지가 됩니다. 그래서 불이라고 하는 것 속에는 항상 음이라고 하는 형태가 있어요. 그러니까 이글거리는 동적인 불 속에는 움직이지 않는 정적인 에너지가 있어야 불이 활활 타오를 수 있어요. 그래서 불 속은 오히려 차갑습니다. 태풍의 눈이 오히려 조용하듯이. 그러면 물이라고 하는 건 뭐냐. 물이라고 하는 건 겉에는 차갑지만 물의 안, 속에 들어가면 불기운이 있는 겁니다. 양기가 있어야 계속 흘러갈 수 있는 에너지가 생기는 겁니다. 그게 이제 감입니다. 이제 이렇게 돼 있는 상황인데, 우리 진관사에서 2009년에 출연한 태극기를 보면 감리가 바뀌어 있어요. 맞죠? 감리가 바뀌어 있어요. 이게 도대체 뭐냐. 그러면 이거 우리가 태극기 그릴 때, 우리 초등학교 태극기 그릴 때 잘못 그려가지고 이렇게 바뀌기도 하고, 심지어 외교부에서 잘못 걸기도 하고 어렵잖아요, 태극기가. 그래서 실수하신건가 이런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가만히 조사를 해보니 그렇지 않은 것이, 1942년에 상해 임시정부에서 썼던 태극기도 지금 우리 진관사에서 나온 초월 스님의 태극기와 같았어요. 박영효 시대 때부터 시작해서 고종 임금의 대한제국까지 썼던 태극기는 지금 우리가 쓰는 태극기와 같아요. 그러다가 삼일 독립운동할 때 태극기의 모양은 괘가 이렇게 됐다가, 1919년부터요, 그리고 상해 임시정부의 1940년대까지도 이 태극기를 쓰다가, 해방이 되고 난 다음에 다시금 지금의 태극기 형식으로 쓰고 있다, 이렇게 돼 있어요. 그러면 전체적인 흐름이 이렇게 돼 있다면, 물론 중간에 조금 같이 혼용해서 썼을 때도 있겠지만, 3.1운동 때 분명히 이 태극기를 썼다는 거예요. 그럼 이거에 대해서 제가 논문을 많이 찾아봤지만 설하고 있는 바가 없어요. 그래서 제가 오늘 학계에 하나의 가설을 제시하려고 그럽니다. 뭐냐 하면, 이제 이걸 주역적으로 풀 수밖에 없다. 이것을 처음에 어떤 의도로 이렇게 만들어서, 그림을 이런 식으로 사괘를 그리셨는지 그 내용은 역사적 고증이 나오면 너무나 감사하겠는데, 그거는 없으니, 후학의 입장에서, 이걸 한번 감이 위에 있는 거와 리가 위에 있는 거와 어떤 차이가 있는가에 대한 상황적인 유추를 귀납적으로 한번 해볼 수 있지 않겠느냐, 이런 생각을 해봅니다. 여러분 주역이라고 하는 거는, 무극이라고 하는 건 원이라고 그랬잖아요. 그러니까 동양의 시간관은 직선이 아니죠. 이렇게 직선으로 가고 있어도 나선형 쪽으로 이렇게 돌면서 가는 겁니다. 돌면서 가기 때문에 직선을 함유하고 있지만, 이것이 결국 가다 보면 이제 곡선으로 오게 돼 있어요. 그래서 원운동을 하게 돼 있습니다. 법성게가 중간에 법성원융무이상(法性圓融無二相)에서 시작이 돼서, 이쪽 위에 오른쪽 위에 갖다가 내려와서 구래부동명의불(舊來不動名爲佛)해서 법 밑에 바로 딱 붙죠. 그러면 이게 한 번 하고 맙니까? 법성게를 삼회 탑돌이 할 때 항상 부처님 우요삼장(右繞三匠)하잖아요. 부처님 주변을 세 번을 오른쪽으로 돌았다. 그래서 여기에서 법성원융무이상부터 해서 이렇게 우요삼장을 하게 돼 있는 거예요. 그러면 구래부동명이불 했을 때 불에서 다시 법으로 가는 거예요. 이어지게 돼 있는 거예요. 그러니까 직선적 사관이 아니에요. 우리는 원운동을 하고 있어요. 원이라고 하는 거를. 주역도 마찬가지입니다. 건괘, 곤괘부터 시작해서 64괘가 이어지는데, 64괘에서 끝나버리면 시간이 그냥 직선이 되잖아요. 근데 64개의 마지막 괘에서 다시 건괘로 돌아가게 돼 있어요. 근데 여기에 지금 보이는 불과 물, 감과 리라고 하는 것이 바로 63번째 괘와 64번째 괘를 구성하고 있어요. 그걸 제가 밑에 그랬잖아요. 수화기제(水火旣濟) 괘가 있고, 화수미제(火水未濟) 괘가 있는 겁니다. 수화기제괘라고 하는 거는, 이게 지금 여러분 보시면 우리가 지금 쓰고 있는 괘는 뭡니까? 위에 물이 있고 밑에 불이 있죠. 그러면 수화기제 괘예요. 수화기제 괘 ,63번째 괘입니다. 그러면 어떻게 됐냐면, 보세요. 여러분 한번 상상을 해보세요. 밑에 불이 있고 위에 물이 있어요. 그러면 물이라고 하는 건 항상 아래로 내려오려고 하죠. 불이라고 하는 건 항상 위로 올라가려고 하죠. 그러면 수화기제 괘라고 하는 건 뭡니까. 아래에 있는 불은 자꾸 위로 올라가고, 위에 있는 물은 자꾸 밑으로 내려오려고 하겠죠. 그래서 수화기제 괘는 소통이 되는 괘입니다. 그래서 기제괘입니다. 다 됐다. 음양이 완벽하게 소통이 됐다. 그리고 첫 번째 효(爻)가 1이라고 하는 건 양수잖아요. 2는 음수고요 근데 1이라고 하는 양수의 양이 있죠. 이라고 하는 음수의 음이 있죠. 그래서 중정(中正)이 구성됐다. 중국의 장계석이라고 하는 분의 호가 중정이에요. 이게 주역에서 나온 말입니다. 1이라는 숫자의 양이 있고, 2라는 숫자의 음이 있고, 딱 맞는 제 위치에 자기 자리를 잡고 있는 걸 중정이라 그래요. 이 수화기제 괘는 중정이 완벽하게 갖춰진 완전한 세계입니다. 완전한 세계가 됐다. 이거예요. 주역의 사상은 뭐냐 하면, 63번째 괘에서 이제 완전한 게 됐다. 이거예요. 완전한 게 됐다. 근데 64번째 괘는 이걸 거꾸로 했대요. 화수미제 괘가 됐어요. 완전한 그 형태가 거꾸로 뒤집히면서 불이 위에 있고, 물이 밑에 있으니까 불은 위로 올라가려고 하니까 올라가 버리고, 물이 밑으로 내려와 버리니까 이게 바뀌어서 소통이 안 되는 상황이 되죠. 그래서 미제괘가 된 거예요. 완성됐던 세계가 다시 미완성으로 끝났다는 거예요. 미완성으로 끝났기 때문에 64번째 괘가 다시 건괘로 돌 수가 있는 거예요. 완성이 돼 버리면 더이상 돌 리가 없겠죠. 그래서 64번째 괘는 미제괘입니다. 화엄에서 선재 동자가 미륵을 만나서 묘각을 이루어서 끝났어요. 근데 다시 처음에 문수보살로 돌아갑니다. 그래서 법성게가 이렇게 돌아가는 거예요. 주역하고 화엄하고가 똑같습니다. 그러면 이 괘가, 조선의 대한제국을 설립했을 때, 그다음에 지금 현재 우리 정부를 구성하고 있을 때는 수화기제 괘를 쓰고 있어요. 완전한 세상이라고 하는 걸 보여주고 있어요. 근데 3.1운동 때 하고, 상해 임시정부에서는 화수미제 괘를 쓰고 있어요. 이거를 우리가 분석해볼 필요가 있다는 거예요. 말하자면 지금의 세상은 완전한 세상이 아니라는 거죠. 이렇게 표현할 수 있지 않겠냐. 이거 만약에 내가 괘를 그린다고 했을 때, 이게 지금 완전한 세상이라고 볼 수 없다. 뒤집은 거죠. 고종 황제가 선언했던 대한제국은 우리의 완전한 어떤 독립국이라고 하는 걸 선언한 거지만, 지금은 이 세상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일제가 지배하고 있는 세상이에요. 그래서 일장기 위에다가 그려서 이 세상을 극복해야 되는 세상이에요. 그래서 64번째 궤를 그려가지고 다시 처음으로 건괘로 돌아가게 만들어준 거 아니겠느냐. 이렇게 추정이 가능하지 않겠느냐 이 말입니다. 어떻습니까? 그러니까 이러한 사유를 가지고 이 괘를 그리셔서 독립운동에 쓰시고 상해 임시정부에서 썼는지 안 썼는지는 알 수는 없으나, 주역의 형태로 우리가 후학적인 입장에서 볼 때는 이런 상황을 가지고 있다는 거예요. 괘의 구성이. 그러니까 그러고 난 후 우리가 해방이 되고 난 다음에 이제 우리가 다시 완전한 세상이 왔어요. 그래서 옛날에 괘의 구도의 형태를 다시 재배치했지 않겠느냐. 지금 일제가 우리를 지배하고 있는 것은 불은 하늘로, 위로 올라가 버리고 물을 땅으로 내려와 버리는 음양이 잘못된 세계다. 이건 다시 바꿔야 될 세계고, 다시 돌려서 법의 바퀴를 굴려가지고 곤괘로 돌려야 되는 세계가 된 것이 아니겠느냐. 이렇게 볼 수도 있지 않겠느냐. 그래서 이제는 이런 부분을, 이런 자료가 왜 이렇게 썼는지라고 하는 자료를 구하는 것이 급선무고요. 역사적인 고증을 할 수 있는, 왜 이렇게 괘를 획괘했는지, 태극기를 왜 이렇게 그렸는지 이유를 알아내는 것이 우선이지만, 역학적인 방식으로는 이것을 이렇게 풀이할 수 있겠다고 생각합니다. 그래서 수화기제가 화수미제로 왔다가, 이 3.1운동 이후 상해임시정부, 우리의 독립이 끝나고 나서 다시 기제 괘로 돌아가는 형태가 되지 않느냐 이런 부분에 어떤 의미를 가지고 한번 제가 학계에 제시를 합니다. 한번 이런 부분을 가지고 이것이 괘가 잘못된 것이 아니라 분명히 의미 체계를 가지고 공부하셨던 어른들이 전부 다 이렇게 쓰신 것은 아닐까. 주석을 달아서 증거 댈 수는 없으나, 지금 가설을 세워서 학계에 제시를 하는 바입니다. 그래서 여러분 우리 은평구에서는 3.1 운동 때가 되면 현재 쓰고 있는 태극기와 이때 초월 스님이 쓰셨던 우리의 태극기를 같이 계양을 한다고 들었습니다. 그렇죠. 이 아름다운 이러한 우리의 진관사는 6.25 때 불타고, 3.1운동 때는 이렇게 스님께서 정말 항거하는, 목숨을 걸고 독립운동을 하셨던 역사적인 자리입니다. 다시금 우리가 부처님과 그다음에 우리 국가를 수호하는 그런 마음을 이번 3.1절에 다시 되새겨야 되겠고요. 역사를 잊은 민족에게는 미래가 없어요. 우리가 다시 한번 한국 혼을, 한국 정신을 되새기는 그런 마음을 가다듬어야 되겠고, 여러분들의 후학과 자제분들이 있으면, 이 진관사에 3.1절 되면 적어도 한 번은, 1년에 한 번은 꼭 오셔서 여기를 참배를 하시고, 민족정신을, 그다음에 우리의 조상님들, 우리의 순국선열들의 어떤 그런 정신을 다시 되새겼으면 좋겠습니다. 저도 앞으로 관심을 갖고 연구를 많이 하고, 최선을 다해서 정진하도록 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
[49재] 2월 23일 49재 법문
금강스님 2023-02-23
오늘 영가님 49재를 맞이해서 뿌리 명상을 잠깐 하도록 하겠습니다. 고마운 마음으로 조상들께 인사합니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피와 살과 생명력이 혈관에 흐르고 있습니다.내 몸을 사랑하고 아낍니다. 그들의 기대와 경험, 지혜가 전해집니다. 내 안에 전 세대의 생명과 기대, 지혜, 행복, 슬픔 등이 전해옵니다.마음과 몸과 뼈를 내려 통찰력과 사랑의 에너지를 받을 것입니다. 아버지와 어머니, 할아버지와 할머니의 뿌리를 느낍니다.내가 조상들의 연속임을 알고 있습니다. 그대의 에너지를 주시고, 저를 보호해 주세요. 내 아이들과 손자, 손녀들이 어디에 있든, 조상들이 거기에 있음을 압니다. 그들이 언제나 자녀들을 사랑하고 있음을 알고 있습니다.나는 조상들이 고마움과 즐거움, 자신감과 동정심의 바탕 위에 삶을 세우려 했음을 압니다. 나를 통해 그들의 에너지가 흐르도록 할 것입니다. 그리고 언제나 보호해달라고 기도할 것입니다. 이 종이 한 장 있는데요. 이 앞에 있는 이 종이는 그냥 홀로 존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한 장의 종이에는 한여름에 구름도 담겨 있습니다. 벌목했던 사람의 땀도 담겨 있습니다. 한여름에 구름이 없었다고 한다면 비도 내리지 못하고, 그 비를 맞고 나무가 자라지 못합니다. 벌목꾼의 땀이 없었다면 이렇게 이 앞의 종이가 있지를 못합니다. 이 한 장의 종이에도 온 우주의 인연들이 함께 상호 존재합니다. 이 종이를 여기서 태운다 하더라도 없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 우주의 모든 원소들이 그대로 다 존재합니다. 사람의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한 사람이 존재하려고 한다면, 아버지와 어머니가 계셔야 하고, 아버지와 어머니의, 그 마음 다하고 정성을 다하고 덕스럽게 살았던 그 삶이 고스란히 저에게 담겨 있습니다. 그리고 또 할아버지 할머니의, 외할아버지 외할머니의 그 마음 다해서 살았던 그 정성스러웠던 삶이 그대로 담겨져 있습니다. 또 이 몸이 흩어진다 하더라도 이 우주 안에 그대로 그 원소들이 존재합니다. 눈에 보이는 곳에서 눈에 보이지 않는 곳으로 사라질 뿐입니다. 서산대사의 선가귀감에 첫 구절에 이런 구절이 있습니다. 여기에 한 물건이 있는데, 본래부터 밝고 밝고 신령스럽고 신령스러워서 잠깐도 생한 적이 없고 잠깐도 멸한 적이 없고, 이름 붙일 수도 없고 그림으로 그릴 수도 없다. 여기에 한 물건이라고 하는 것은 바로 이 말을 듣고 보고 생각하는 바로 이것을 이야기합니다. 지금 현재 여러분들이 보고 듣고 느끼고 생각하는 바로 이것은 본래부터 밝고 밝고 신령스럽고 신령스럽다. 그 본질은 한없이 밝다고 하는 것입니다. 태양의 빛보다 더 환하게 밝습니다. 그리고 그 변화성은 무궁무진합니다. 나의 이 모습으로 변화되어진 것은 바로 그 신령스러운 변화성 때문입니다. 그리고 오늘 하루를 아침부터 지금까지 움직이고 살았던 것도 또한 그 변화성입니다. 그 신령스럽고 신령스러운 기운 때문에 우리가 오늘 하루를 사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게 마치 북한산이 구름에 가리면 보이지 않듯이, 우리 눈으로 보자마자 분별하고 차별하고 욕심을 부리고 그 욕심을 채울 갖가지 생각을 하게 되면 그것이 구름이 되어져서 가리워서 보여지지 않습니다. 나타나지 않는 것이, 또 우리가 내 자존심 상하는 말 한마디 들으면 바로 화가 나서 먹는 것도 맛이 없고, 아주 좋은 소리도 귀에 들려지지 않고, 아무리 아름다운 풍경이라도 눈에 들어오지 않습니다. 먹구름이 끼면 전혀 밝고 신령스러움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또한 내 경험과 지식 정보가 또 큰 틀이 되어서, 색안경이 되어서, 그 안경으로 보려고 하면, 또 내가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들려줍니다. 그것을 삼독심이라고 하는데, 그 삼독심이 삼독심의 구름이 가려지게 되면 소소령령한 밝고 밝고 신령스럽고 신령스러운 그 마음이 나타나지 못합니다. 그러나 구름이 끼었다고 북한산이 없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그 안에 그대로 있습니다. 지혜의 바람이 불어서 구름을 물리치면 그대로 산은 그대로 드러납니다. 그 신령스럽고 밝고 밝은 그 성품, 이제 살았을 때, 혹여 탐진치 삼독심의 그 구름은 이 49재를 지내는 동안에 남아 있던 것은 싹 사라지고, 소소령령한 본래 성품만이 그대로 드러나게 하는 것이 바로 이 49재의 의미입니다. 오늘 49재 지내는 동안에 나무아미타불 염불을 할 것입니다. 나무는 <의지합니다> 이런 말이고, 아미타라는 말은 <무량광>입니다. 무량광이라고 하는 것은 한량없이 밝은 성품을 이야기를 합니다. 불, 바로 그 자리. 나무아미타불, 밝고 밝은 바로 그 본래 성품 자리에 의지한다 이 말입니다. 나무아미타불을 한번 부를 때, 부르는 내 마음도 환하게 밝아지고, 또 나무아미타불을 한번 부를 때, 영가님도 환하게 밝은 성품이 드러납니다. 소소령령한 바로 그 성품이 함께 드러나도록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나무아미타불 그렇게 하시기 바랍니다. 그리고 또한 문득문득 생각이 날 때마다, 늘 한 사람을 생각하면, 과거의 마음으로 갑니다. 어머니가, 할머니가, 또 친구가, ‘그때 내가 이렇게 좀 할 걸, 살아계실 때 이렇게 할 걸’ 하는 그런 과거의 마음으로 돌아가려고 하면 그때마다 나무아미타불을 부르세요. 그때마다, 내 마음이 부를 때마다, 환하게 밝아지고, 또 돌아가신 분의, 생각하는 그분의 마음도 환하게 밝아질 것입니다. 그런 마음으로 오늘 영가님의 49재를 한다면, 바로 염불하는 스님들과 또 함께 하는 가족과 일가 친족 친족과 그리고 지인들이 함께 마음을 모으면 너무나 가볍고 가볍고 가볍게 그렇게 극락 세계로 가실 것입니다. 그리고 극락 세계는 가는 게 아니라 사실은 아미타 부처님이 맞이하러 옵니다. 그렇게 가벼운 마음으로 행복한 마음으로 밝은 마음으로 49재를 지냈으면 좋겠습니다. ≪영단의식 명상≫ 눈을 지긋이 감고 숨을 천천히 들이마시고 천천히 내쉬고, 들이마시고 내쉬고, 영가님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마음을 고요하게 하는 입정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옛 부처님도 이렇게 가셨고, 현세의 부처님도 이렇게 가시고, 오늘 영가님도 이렇게 가십니다. 이 자리에 모인 우리들도 언젠가는 이렇게 갈 것입니다. 영가시여. 이 세상에 태어날 때 어느 곳에서 왔으며, 이 세상을 하직하고서는 이제 어느 곳을 향해 가십니까. 태어나는 것은 허공에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남이요, 죽는 것은 한 조각 구름이 사라지는 것과 같습니다. 구름 자체는 실체가 없는 것, 생사거래도 또한 이와 같습니다. 그러나 생사 거래에 상관없는 한 물건이 있어, 온갖 이름이나 모양에서 벗어났으므로, 밝고 고요하고 청정함이 뚜렷이 드러나 생사를 따르지 않습니다. 영가시여. 이 도리를 분명히 하십시오. 이러한 도리를 알고자 한다면 허공처럼 마음을 텅 비워 청정하게 하십시오. 번뇌와 망상을 떨쳐버리면 마음 내키는 일마다 거리낌이 없을 것입니다. 영가시여. 지금 내가 하는 이 말을 보고 들으십니까. 분명히 보고 듣는다면 보고 들을 줄 아는 그것이 무엇인지 살펴보십시오. 참법신불은 진공묘지가 갖추어져 둥근 보름달 같고, 일천해가 눈부시게 빛을 발하는 것 같습니다. 이제 허망하고 덧없는 꺼풀을 벗어버리고 금강석처럼 견고해서 무너지지 않을 참법을 얻었습니다. 청정한 법신에는 안팎이 없으니 육신의 생사 또한 지난 밤 꿈과 같은 것입니다. 영가시여. 이러한 이치를 알아듣겠습니까. 서산으로 지는 해는 동녘에 다시 솟아오르고, 동녘에서 솟은 달은 반드시 서산으로 기웁니다. 영가시여. 이 다음 생에는 부디 금강석처럼 튼튼한 몸을 받아 금생에 못다 이룬 뜻을 원만히 이루소서. 서방정토 아미타불께서 오늘 당신을 맞이하시니 열반의 기쁨을 누리소서. 대자대비하신 아미타불께 발원하옵니다. 오늘 이 자리에 모인 저희들은 영가의 왕생극락을 빌고자 부처님의 가르침에 따라 49재의 법요를 거행하고 발원하옵니다. 굽어 살피시옵소서. 아미타 부처님이시여. 오늘의 인연 공덕으로 영가가 생전에 못다한 공덕이 원만해지고 생전에 지은 허물이 소멸되어 정토에 왕생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오늘 일로 인하여 저희들 모두가 인생의 무상함을 느끼고 하루하루의 생활을 착실히 쌓아 나가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오늘 영가로 하여금 금생의 못다한 일에 대하여 미련을 가지지 않도록 보살펴 주옵소서. 자비하신 아미타불이시여. 오늘의 유족들이 영가께서 남기신 삶의 의지를 본받아 부처님 품 안에서 착실한 믿음에 근거하여 자신들 생업을 스스로 가꾸어 나갈 줄 알게 해주시고, 이 유족들의 슬픔을 거두시어 이 다음 부처님 곁에서 다시 만나 뵙는 일이 어디에 있는가를 알도록 해 주옵소서. 그리하여 오늘의 법요 뒤에 오래도록 이 가문이 평안하고 자손들의 복록이 나날이 증진하여, 이 인생에서는 행복을, 내생에서는 은혜를 누리는 불자가 되도록 이끌어 주옵소서. 나무 대자대비 무량수여래불 나무 대자대비 무량수여래불 나무 대자대비 무량수여래불
-
[신중기도] 2월20일 음력 2월 신중기도 입재 법문
종범스님 2023-02-20
오늘 계묘년 2월 초하루 진관사 신중기도 입재 법회를 맞은 법문입니다. 기도가 뭐냐. 봉불(奉佛)정진. 봉불정진. 부처님을 받드는 정진이다. 그런 뜻이거든요. 그러면 중생이 범부 중생(凡夫衆生)이 있고, 성체 중생(聖體衆生)이 있다, 이렇게 가르쳐요. 범부는 범은 전체라는 뜻이고, 부는 사람이라는 뜻이고, 성체는 성인 성자, 몸 체자, 성체 중생이라, 범부는 범부인데 성체를 간직한 범부다 그런 뜻이죠. 그래서 그것을 보살이라고 그럽니다. 보살. 범부중생, 성체중생. 그럼 어떻게 하면 성체가 되냐.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고, 부처님의 경전을 읽고, 부처님을 향해서 예경을 올리면, 이 몸에 부처님이 담겨요. 그래서 이 몸에 부처님이 담길 때 성체 중생이라 그래요. 같은 그릇인데 그릇에다가 금을 담으면 금 그릇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서 그릇의 내용이 달라지듯이, 우리가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고, 부처님의 경을 읽고, 부처님께 예경을 하고 그러면, 우리 몸에 그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과 원력이 담겨서 범부 중생이 성체 중생이 된다 이거죠. 그러면 부처님이 뭐 하는 분이냐. 부처님도 사업이 있는데 그걸 불사라고 그래요. 근데 부처님 사업 업종이, 중생을 깨우치는 게 부처님 사업 업종이에요. 그럼 부처님 사업은 왜 하고 많은 사업이 있는데, 그런 사업을 할까. 중생은 모든 문제가 미혹에서 생겼다, 이렇게 가르쳐요. 미혹. 미혹은 잘못 알고 있다는 거예요. 그게 미혹이에요. 그럼 미혹에서 벗어난 걸 깨달음이라 그래요. 그러니까 이 깨달음을 이루게 하는 것이 부처님이 하시는 일이에요. 그러면 미혹은 뭐고, 깨달음은 뭐냐. 미혹은 한마디로 말하면, 이 몸도 세계도 행위도 전부가 마음인데, 그걸 모른다는 거예요. 이 몸이 마음인 줄을 모르고, 저 세계가 마음인 줄을 모르고, 내가 행동하는 것이 마음인 줄 모른다. 그걸 미혹이라고 그러는데, 다른 말로는 무명이라고 그러고요. 무명. 무명은 밝음이 없다 이 말인데, 밝은 건 뭐냐. 마음인 줄을 아는 게 밝은 거고, 마음인 줄을 모르면 무명이다. 이런 거를 언어로 이제 공부하는 것이 있는데, 그런 것만 할래도 평생 해도 모자라요. 무명은 이제 번역된 말이고, 아비디아(a-vidya)인데 비디아는 밝다. 아는 없다. 이런 말이거든요. 밝음이 없다. 그거는 무명은 생각으로 나타난다. 의식, 의식은 그 진실을 보는 게 아니라, 내가 학습한 대로 행동하는 걸 의식이라 그래요. 그래서 인간은 자기가 학습되지 않은 거는 행동할 수가 없어요. 이 마스크 같은 것도 생전 안 써보던 사람한테 갖다주면 몰라요, 이거를. 그래서 학습된 것이 나에게 정리가 돼가지고, 나에게 저장이 되는데 학습하는 거를 식이라고 그러고, 정리하는 거를 생각 의자, 의라고 그러고, 저장하는 걸 마음 심자, 심이라고 그래서, 심의식(心意識) 이렇게 가르치거든요. 그래서 항상 이게 저장된 마음이 있고, 또 그걸 정리하는 자기 정리의 의가 있고, 또 모든 사물을 직접 보고 거기에서 인식을 하는 그런 식이 있어서, 이런 생각에 의해서 움직이는데, 그래서 산을 내가 본다 하지만 자기에게 학습된 산을 보는 거예요. 사람을 본다 하지만은 자기가 지금까지 학습한 사람을 보는 거고요. 내 몸도 몸의 진실을 보는 게 아니라 학습된 몸을 보는 거예요. 중국 사람들이 자연을 좋아하는데, 불교식으로 보면 모르는 거예요. 그게 학습된 자기 마음을 보고 있다는 거를 모르는 거예요. -이거 미치겠어요, 이런 거 보면.- 중국 기록 보면 전부 자연이에요. 근데 그 자연이 정해진 게 아니라, 보는 사람에 따라서, 학습된 내용에 따라서, 산을 다 평가를 하거든요. 그래서 이 깨달음이라고 하는 것은 그 학습 이전에 여실지견(如實知見)이라, 같을 여자, 진실할 실자. 그 본체에 진실과 같게 알고, 알 지자, 볼 견자, 보는 거다. 진실과 같게 아는 거, 진실과 같게 보는 거 그걸 여실지견, 그게 불지견이라 그래요, 부처님이 알고 보는 거는 여실한 지견이다. 그리고 여사지견, 같을 여자, 일 사자, 그 사물과 같게, 사물과 같게 알고 보는 것이 그게 부처님의 지견이다. 이 말인데, 그걸 표현할 때 <아뇩다라삼먁삼보리>다 이렇게 표현하는데, 아뇩다라는 ‘가장 높게’ 이 소리예요. 가장 높게. 삼이라는 거는 바를 정자인데, 정, 먁이라고 하는 건 평등할 등자인데, 그래서 삼먁 보리 이러면 되는데 그 보리 위에다가 정자를 하나 더 붙여서 삼먁 삼보리라고 그러는데, 이 삼이라는 거는 여실이라는 뜻이에요. 여실. 여실하게 안다. 그리고 이 우주의 진실이 뭐냐. 이걸 여실하게 알 때 그걸 정각이라 그러고, 또 이 세속에서 일체 중생이 어떻게 보고, 어떻게 아느냐, 그거를 세속과 그대로 아는 거를, 이거를 사물과 같이 한다 여사지라고 그러고, 사는 숫자라고 그래서 숫자와 같이 안다, 여량지(如量智)라고 그러는데, 그게 등자의 뜻이에요, 등. 그래서 정등각이라 그래요. 무상정등각(無上正等覺). 그 진실상과 똑같이 알고, 세속상과 똑같이 안다. 세속상과 똑같이 아는 거를 등이라 그러고, 진실상과 똑같이 아는 거를 정이라고 그러거든요. 정을 이제 삼, 이렇게 표현하고, 등을 먁 이렇게 표현하거든요. 먁. 그래서 그냥 정등보리라고 그래요, 정등보리, 보리는 각이잖아요. 정등보리. 이 정등보리를 이제 얻으면 전부 다 자기 마음 광명이에요. 이게 이제 우리 미혹으로 보면 나무인데, 이걸 정등 보리로 보면 나무는 자체가 없고, 이거 보는 마음만 있는 거예요. 예를 들면 거울에 뭐 모습이 딱 비춰지면, 그 비춰진 모습은 자체가 없고 거울만 있는 거예요. 그래서 뭘 들이대도 그 들이대는 모습은 자체가 없고 거울 안에 없잖아요. 그 거울 비치는 것만 있는 거다. 그래서 죽음이라는 것도 거울에 비춰진 그림자고, 사는 것도 그렇고, 죽는 것도 그렇고 보이는 것도 그렇고 안 보이는 것도 그렇고. 뭐 어두운 걸 겁내는데 그것도 거울에 비추어진 그림자와 같다. 어두운 것도. 그러니까 이걸 정등연각 정등보리를 얻으면 일체가 마음 광명이기 때문에, 걱정 근심할 거 요즘 말로 일도 없는 거예요. 근데 이거 보는 마음 광명은 모르고, 보여지는 사물에 취사 선택을 해요. 취하고 버리고 선택을 해요. 그래서 가지 말라고 붙잡기도 하고, 왜 안 가냐고 떠밀기도 하고, 이 짓 하다가 죽는 거예요. 그래가지고 중생에게는 우비고뇌라는 걸 불교에서 가르치거든요. 근심하고 슬프고 괴롭고 걱정되고 우비고뇌에 또 생로병사를 가르쳐요. 근데 이 우비고뇌 생로병사가 전부 미혹에서 나왔다. 이거를 알고 보면, 원적(圓寂) 원광(圓光), 원만히 생로병사 우비고뇌가 없다. 이게 둥글 원자 고요할 적자, 원적이라고 그러고. 그래서 생로병사 우비고뇌가 없는 그 원적의 세계에 모든 것이 다 갖춰졌다. 이걸 원광이라고 그래요. 둥글 원자, 빛광자, 원광. 원적 원광 열반 상락이다. 그 원적 열반을 생사 없는 열반이라고 그러는데, 그 열반에 항상 즐거운 모습이다. 원적 원광 열반 상락. 항상 상, 즐거운 락. 이걸 깨달음의 경지라고 그래요. 딱 깨닫고 보면 내 몸과 세계와 행위가 온전히 삶과 죽음이 없고, 불생불멸이고, 그걸 원적이라고 하거든요. 온전한 불생불멸. 그리고 온전히 빛나고, 이걸 원광이라 그래요, 원광. 원적 원광. 그래서 이 불생불멸이 항상 즐거워. 그래서 이걸 열반 상락이라 그런다. 이렇게 하라는 거예요. 그래서 기도를 하면 그렇게 될 수 있는 종자가 심어지고 그런 몸이 성장을 해서, 이 세속의 장애는 다 소멸되고, 그걸 업장 소멸이라고 하잖아요. 또 좋은 공덕은 성취하고, 지혜는 점점 증대해져서, 업장소멸 공덕성취 지혜증대로 구경성불이라. 구경은 마지막인데, 마지막에 다 성불은 깨달음을 이룬다 이 소리예요, 깨달음을 이룬다. 이렇게 가르치는 게 불교예요. 근데 이게 이런 말을 들으면 어떠냐. 좀 생뚱맞아요. 왜 생뚱맞냐. 우리가 귀에 익고 눈에 익은 거는 어디 가면 뭐 뭐 재밌는 게 있다, 어디 가면 맛집이 있다, 어디 가면 좋은 물건이 싸다, 이런 게 이제 귀에 익고 눈에 익었는데, 이거 뭐 원적 원광 무슨 열반 상락, 이게 뭔 소린가, 이게 처음 듣는 소리고. 이렇단 말이에요. 근데 그게 맨땅에 그냥 풀이나 나고, 빈 땅이었는데 거기다가 어떤 종자를 하나 심을 때, 생뚱맞은 거예요. 거기다 땅에 그냥 파서 생으로 파서 종자를 심을 때 이거 처음 있는 일이고 이상한 일이잖아요. 근데 그 종자가 자라나면 그 땅이 격이 달라지는 거예요. 풀밭이 곡식 밭이 되고, 또 풀밭이 과일나무 밭이 되고, 이런 게 이제 깨달음하고 같은 거거든요. 그래서 이 깨달음을 비유로 항상 가르치는 법문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마피, 마피라는 건 누런 삼 껍데기, 이걸 마피라고 그래요. 삼 껍데기가 있다. 또 마승, 그 삼 껍데기를 가지고 새끼줄을 만들어요. 이게 새끼줄 승자가 있어서, 삼 껍데기, 새끼 줄 이게 있어요. 근데 그 삼 껍데기로 새끼줄을 만들어서 동그랗게 놨는데, 저녁이 됐는데 누가 지나가다가 삼 껍데기 새끼 줄을 뱀으로 본 거예요. 뱀으로. 이걸 승사라고 그래요. 새끼줄이 뱀이 됐다고. 뱀으로 딱 보는 순간에 공포가 생겨. ‘야 저 뱀에 물리면 큰일 난다. 그냥 생명을 잃는다.’ 막 도망가고, 도망가다 보니까 막 넘어지고, 다치고 막 그럴 거 아니에요. 그게 비유에요. 그 마피는, 삼 껍데기는 원적 원광 열반 상락, 삶과 죽음은 하나도 없고, 마음 광명이 언제나 둥글게 빛나고, 항상 생사 없는 적멸 열반 세계에서 늘 즐거움으로만 계속 된다. 이걸 이제 삼 껍데기에다가 비유를 한 거예요. 삼은 영원히 삼이에요, 그냥. 근데 이게 이제 인연 따라서 새끼줄이 된단 말이죠. 이게 마승인데, 모양은 새끼줄이 됐지만은, 그 삼 껍데기는 하나도 변화가 안 됐어요. 삼 껍데기가 그대로 마피가 마승이 됐지, 그 새끼 줄이 딴 데서 온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그 새끼 줄을 생로병사에다가 비유를 해요. 생로병사는 삼 껍데기로 만든 새끼 줄과 같다. 그러니까 이 생로병사는 인연 따라 나고, 인연 따라 성장하고, 인연 따라 늙고, 인연 따라 죽고, 그 새끼 줄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그 새끼줄을 뱀으로 보는 게 이게 이제 문젠데, 뱀으로 보는 건 뭐냐. 거기에 온갖 감정을 붙여요, 생로병사에. 그냥 온전한 마음으로 태어나면 그게 열반 상락인데, 거기서부터 이제 우리 아버지는 누구고, 어머니는 누구고, 우리 조상은 누구고. 온갖 거기다가 이제 뭘 때려 붙여서 나는 어떻게 생겼고, 난 앞으로 뭘 할 거고, 잘 났다 못났다 뭐 온갖 걸 때려 붙여가지고, 거기서 생로병사에서 우비고뇌가 생기는 거예요. 그 우비고뇌가 그 삼 새끼줄에서 뱀을 본 것과 같은 거죠. 그거는 순전히 뱀으로 잘못 봐서 생기는 거지, 뱀이 어디에도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근심 걱정이 다 내 생각에서 나온 거다. 그러니 기도를 딱 하면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생각이 멈춰요. 그래서 지관이라고, 그치면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 행동에는 보면 그쳐요. 관이 먼저예요. <화엄성중>하면 다른 데로 막 달아났던 마음이 그쳐버려요. 그래서 망상을 일부러 없애려고 할 거 하나도 없고, 정진을 하면 망상은 없어져요. 또 망상을 없애야 정진이 된다 이것도 맞아요. 나중에 한참 하다 보면 망상이 없어지고 정진이 되는데, 그건 중간쯤 가서 일이고, 처음 시작할 때는 먼저 하면 없어지는 거에요. 하면. 나중에는 이제 그게 똑같이 가요. 그치고 하고, 하고 그치고. 관, 그치는 거, 지. 이걸 쌍수라고 지관쌍수(止觀雙修), 쌍으로 닦는다고. 그러면 이 뱀을 보던 그 잘못된 감정이 그냥 싹 없어져서 그 새끼를 보게 돼요. 새끼를 보면 뭐냐. 이 생로병사가 그냥 생로병사인 거예요. 열반 그대로 생로병사지, 열반을 떠나서 생로병사가 없다, 이것까지 아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정신세계가 높아지면 삶과 죽음이 똑같아요. 이게 노소가 똑같아요. 젊다고 좋은 것만 있는 거 절대로 아니에요. 젊어서 아주 고약한 거 참 많거든요. 늙었다고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늙으면 뭐 누가 시비하는 사람도 없고, 누가 쫓아다니는 사람도 없고, 누가 뭐 관심을 안 가지니까 얼마나 좋아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하고, 근데 젊을 때는 안 그래요. 온갖 그냥 날파리처럼 달라붙고, 내가 또 날파리가 되기도 하고, 내가 날파리로 당하기도 하고,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이거를 생로병사 그대로 진실상을 딱 관찰을 하면, 삼 껍데기 그대로 줄이 됐듯이, 그 상락 열반이 그대로 생로병사로 나타나는 거니까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프면 좀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그것뿐이에요. 요샌 또 진통제도 좋아가지고, 아프면 진통제나 하나 딱 맞고 있으면 그만이지, 뭐 억울하다든지 뭐 슬프다든지 이거는 전부 그 새끼줄에서 뱀 보고 무서워하는 거랑 똑같거든요. 그래서 기도하고 산란한 마음으로 딱 일어났을 때 그걸 없애려고 하지 말고, 경을 딱 읽는다든지, 부처님의 명호를 딱 부르면, 그 산란한 마음은 그냥 없어져요. 산란한 마음은 어둠과 같고, 그 기도를 하는 것은 불 켜는 거와 같아서, 불만 딱 켜면 어두운 건 그냥 자취도 없이 사라져요. 이런 거예요. 그래서 이런 얘긴데, 오늘 여기 이렇게 써왔거든요. 이거는 뭔 소리냐면, 이걸 요약한 거예요. 聞法信受 문법신수 법문을 듣고 믿어 받아서頓悟無生 돈오무생 바로 불생불멸을 깨달으면寂照含空 적조함공 고요히 비추는 마음이 허공을 삼키니 生死昨夢 생사작몽 생로병사는 어젯밤 꿈의 일이다. 문법신수(聞法信受)하고, 이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그걸 믿어서 받는다. 믿어서 간직하는 걸 문법 신수라. 믿을 신자, 받을 수자. 그래가지고 이걸 이제 깊이깊이 들어가면, 돈오무생(頓悟無生)이라, 바로 이 생멸이 생멸이 아닌 거를 알게 돼요. 이게 태어난 게 태어난 게 아니고, 죽는 게 죽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데, 이걸 무생이라고 하거든요. 생멸이 없다고, 무생. 그걸 알게 돼요. 이게 돈오무생이에요. 근데 오래 있어야 아냐. 아니에요. 전생에서부터 조금 기도했던 사람은 듣기만 하면 바로 알아요. 그럼 들어도 들어도 모르는 건 전생에 기도 어지간히 안 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모를 수가 없는 건데, 육조 같은 사람은 금강경 한마디 듣고 바로 알았거든요. 이게 모를 수가 없는 건데. 그러면 기도를 하면, 기도한 경험이 있으면 그럼 알아지게 돼 있어요. 이게 모를 수가 없는 거예요. 생로병사가 불생불멸이라는 거를 모르는 게 이상하지. 그러니까 새끼가 됐지만은, 삼 껍데기로 보면 하나도 생긴 게 없어요. 이게 무생이에요. 거울의 모양이 비춰지지만 거울로 볼 땐 하나도 생긴 게 없어. 그게 무생이란 말이야. 이걸 왜 모를 수가 있냐고.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래서 돈오무생이라, 바로 무생. 생로병사에서 생멸이 없는 걸 바로 딱 알아. 깨달음이라는 건 아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다음은 그 아는 마음이, 생로병사가 이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그 아는 마음이, 그게 찾아보면 마음이 있는 데가 없는데 항상 안다. 이걸 고요할 적자, 비출 조자, 적조(寂照)지견이라고 그러거든요. 적조로 알고 보는 거다. 그래서 그게 적절한 딴 게 아니고 그거 아는 마음이에요. 아는 마음. 생로병사가 불생불멸이라는 걸 아는 그 마음을 적조라고 그래요. 실체는 없는데 항상 안다고. 어떤 사람 마음 알아보려고 온갖 조사를 해보고, 엑스레이를 찍어봐도, 마음 안 찍혀요. 마음은 있는 데가 없는 거, 근데 항상 아는 거예요. 근데 얼마나 이게 신비롭게 아냐 그러면, 80된 사람이 다섯 살 때, 세 살 때 거 알고 있어요. 이게 어디에 붙어 있다가 나오는지 한번 생각해봐요. 그걸 보고 깨달아야 돼요. 아니 80년 전에 있었던 일이 그냥 순간순간 기억이 난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 팔십 년 전에 있었던 경험이 어디에 지금 붙어 있다가 오늘 튀어나오냐. 마음이란 이런 거예요. 그래서 실체는 없는데 항상 나와. 이걸 적조라고 그러거든요. 고요히 비춘다고. 그래서 이 생멸이 없는 걸 딱 알고 나면, 고요히 비추는 지혜광명 그것 뿐이에요. 이걸 적조가 함공(寂照含空)이라, 온 허공을 다 삼켜버렸다. 허공은 없고 적조뿐이다. 그래서 오불견공(悟不見空)이라고, 깨달은 사람은 허공을 못 본다. 왜 못 보냐. 허공이 전부 마음이니까. -상좌가 하나 있는데, 이 오불견공이라는 말을 듣고 그걸로 화두로 해야 되겠다고 그랬어요. 법문할 때 내가 무심코 이 말을 했더니 지 화두가 없어졌다고 불평을 하더라고. 왜 남의 화두를 없애냐고. 나 참 별일도 다 있네.- 깨달은 사람은 허공을 못 본다 이거예요. 왜냐. 온 허공이 마음이니까 허공이 본래 없던 건데, 미혹해서 봐왔거든요. 그 새끼줄에 뱀이 본래 없었는데 미혹해서 뱀을 보다가 삼 껍데기를 보는 순간에 뱀은 자치가 없이 사라졌다 이 말이죠. 이런 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오늘 제목이 깨달음 이야기에요, 깨달음 이야기. 딴 게 아니고요. 그래서 적조가 함공하니, 그 고요히 비치는 마음이 허공을 삼키니, 생사는 작몽(生死昨夢)이라, 죽고 사는 건, 작이라는 건 어제 작자가 있어요. 어제저녁의 꿈과 같다. 엊저녁 꿈, 오늘은 자취가 없거든요. 여기도 엊저녁에 꿈꾸고 오신 분이 있을지 모르는데 엊저녁 꿈은 오늘 아침 일어나면 자취가 없어요. 그게 이제 바로 깨달음이다. 見聞覺知 견문각지 밖의 사물을 인식하는 감각과 지각은因緣生滅 인연생멸 인연을 따라 생멸을 반복하지만.圓明性覺 원명성각 둥글고 밝은 본성의 마음은 常寂常照 상적상조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춘다.證悟性覺 증오성각 본성의 마음을 깨달아서見聞無惑 견문무혹 감각과 지각에 미혹함이 없으면. 一切萬法 일체만법 일체의 만법이寂照光明 적조광명 고요히 비추는 마음 광명이다. 그 밑에는 또 견문각지(見聞覺知)가 있는데, 보고 듣고 뭐 느끼고 알고 있는데, 이거는 인연생멸(因緣生滅)이다. 인연 따라서 일어나는 거예요, 생각은. 그런데 원명성각(圓明性覺)이라고, 그 본래 원적 원광 열반 상락, 그 본래 적조지견, -견문각지가 있고 적조지견이 있어요.- 적조지견은 본래 마음이에요. 견문각지는 이 보고 듣는 마음이에요. 보고 듣는 마음은 생겼다 없어졌다 이래요. 고요히 아는 그 마음은 불생불멸이고 상락이 열반이에요. 그걸 이제 원명 성각이라고 하는데, 성품 성자, 알 각자, 성품으로 아는 거지, 인연으로 아는 게 아니다. 그거는 상적상조(常寂常照)라. 항상 고요하면서 항상 안다. 어두움이 오면 무서워할 줄만 아는데, 그 어두움을 보는 내 마음이에요 그게. 죽음이 오면 슬퍼할 줄만 아는데, 죽음을 보는 내 마음인 거예요. 아이고 짜증 나네 참. 죽는다 그러면 그 죽는 걸 아는 내 마음이지 죽는 건 없는 거예요. 뭐가 죽는 거예요. 자세히 살펴보면 죽는 거 없어요. 어둡다 그러면 어두움을 아는 내 마음이지 어두운 건 없는 거예요. 해 뜨면 밝아지는데 해 뜨기 전에 어두움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두움도 없고 죽음도 없고, 그거를 뭐라고 그러느냐. 상적상조라고 한다. 항상 고요하지만 항상 안다. 항상 비춘다. 그걸 가르치는 거예요. 이거 부처님이 하는 사업이에요. 부처님의 업종이라고 이게. 그래서 증오성각(證悟性覺)하면, 그 항상 아는 그 마음을 깨달아서 알면, 이게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 깨달음을 경험하기 전에 온갖 번뇌가 다 사라진 상태로 그걸 깨달았어요. 수행을 얼마나 깊게 해가지고. 근데 그 제자들부터는 그 부처님처럼 그렇게 번뇌망상을 다 소멸하지 못한 상태로 깨달았기 때문에 깨달은 뒤에도 미혹함이 종종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걸 종자현행(種子現行)이라고 하는데, 미혹한 종자가 아직 남아 있어서 미혹한 행위가 밖으로 나와, 이걸 현행이라고 그래요. 행이 나타난다. 그래서 이걸 생멸이 없는 거를 깨닫고, 그 다음에 뭘 보든지 보는데 미혹하지 않고, 내 마음 밖에 저 보이는 것이 있다. 여기에 속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뭐 들리는 게 있어도 내 마음 밖에 저 소리가 있다. 소리에 미혹하지 않고 미혹이라는 건 속는 건데, 저 보이는 거는 내 마음이 나타난 건데, 내 마음이 나타난 건 모르고, 저 보이는 대상에만 쫓아가면 마음을 모르고 대상에 속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모르고 속는다. 이거 참 이 보통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항상 보고 듣는데 속아서 살아요. 보는데 쫓아가다 보면, 쫓아가는 대상은 사라지고, 쫓아가는 나 혼자만 고생하는 거예요. 이게 못 깨달은 고생이에요. 이게 개고생이 아니라 못 깨달은 고생이다 이거지. 못 깨달으면 고생이에요. 이 깨닫지 못해서 고생하는 거다 이 말이죠. 그래서 깨달음을 딱 얻으면 뭘 봐도 내 마음인 거예요 이게. 사람을 봐도 내 마음이고 사람을 보는 내 마음이다 이거야. 소리를 들어도 소리를 듣는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없으면 소리가 없어요. 소리는 다 이념 따라서 생겼다 사라지는 거고, 보는 건 소리가 날 때는 그 소리를 듣고, 안 날 때는 그 조용한 거 듣는단 말이에요. 조용한 감각이 또 있어요. 근데 조용한 감각은 못 듣는다고 그러고, 듣는 것만 듣는다고 하고, 이게 이제 속아도 너무 겹으로 속은 거예요. 조용한 거 아는 그게 내 마음이라고요. 시끄러우면 그걸 괴로워만 할 게 아니라 시끄러운 줄 아는 그게 내 마음이라. 그래서 깨닫고 나서 이거 보고 듣는데 속지를 아니하면, 뭘 봐도 내 마음 딱 나타나 있어. 뭘 들어도 내 마음 딱 나타나 있어. 무슨 생각이 일어나도 그게 내 마음이에요. 뭘 느껴도 그게 내 마음이라. 그래서 견문에 무혹(見聞無惑)하면, 견문에 미혹함이 없으면, 일체만법(一切萬法)이 온갖 것이, 적조광명(寂照光明)이라, 고요히 비치는 광명이다. 이렇게 적어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이거는 앞에서 한 거나 똑같은 거예요, 내용이. 圓明性覺 常寂常照 寂照知見 眞正見解원명성각 상적상조 적조지견 진정견해 云何眞正見解 金屑雖貴 着眼成瞖운하진정견해 금설수귀 착안성예 그러면 원명성각(圓明性覺) 상적상조(常寂常照), 그 본래 마음이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치는 거를, 적조지견(寂照知見)이라고 그러고, 견문각지가 아니라 또 임제선사 같은 분은 진정견해(眞正見解)라고 그래요. 참 진자, 바를 정자, 진정견해. 보고 아는 거, 진정견해, 적조지견. 고요히 비추는 알고 보는 것이다. 적조지견과 진정견해가 그게 깨달음의 정신인데, 그럼 깨달음의 정신인 적조지견 진정견해가 뭐냐. 어떤 것이 진정견해냐. 여기에는 아무런 점이 없어요. 점. 큰 점, 작은 점, 뭐 밝은 점, 어두운 점, 그냥 고요한 상태로 그냥 모든 것을 다 보는 거예요. 그래서 비유를 들기를 금설수귀(金屑雖貴)나, 가루 설자가 있는데, 금가루, 금가루가 비록 귀하기는 귀하지만은, 금이니까 귀할 거 아니에요. 착안성예(着眼成瞖)라, 이걸 눈동자에다 금가루를 딱 집어넣으면, 예라는 건 병이라는 말인데 눈병, 눈병 예자인데, 눈병이 된다. 아, 금이 아무리 좋은들 그거 눈에 집어넣어 봐요. 그게 눈병 되잖아요. 그래서 이 진정견해라고 하는 것은, -이게 법문이 하도 귀하니까, 목이 이제 지금 긴장을 해가지고 목이 다 막히네요.- 진정 견해라고 하는 것은 눈동자와 같다. 눈동자는 맑아서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서 온갖 걸 다 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기는 죽는다는 생각, 산다는 생각, 귀하다는 생각, 천하다는 생각, 어떤 생각도 없는 게 그게 진정견해에요. 슬프다는 생각. 그래서 이런 정신수련을 딱 하면 우울증이라든지 공황장애라든지 무슨 정신질환 흔적도 없어요. 진정견해를 내가 갖도록 노력하란다. 진정 견해는 뭘 사유를 하고, 주장을 하고, 발표를 하고, 그런 게 아니에요. 눈동자와 같이 깨끗하게 하는 거예요. 생각이 깨끗하면 일체 생각이 거기에 붙을 수가 없어요. 그걸 무적정신이라고 자취 없는 정신이라고, 무적정신. 그 자취는 내가 만든 거예요. 적조지견 진정견해. 그것뿐이라고. 그거는 이렇게 수행이라는 말인데, 수행은 딴 게 아니에요. 깨달음인데, 깨달음은 뭐냐. 딴 게 아니에요. 딱 진실을 보고, 번뇌를 멈추고, 번뇌를 끊을 게 없고, 그냥 멈추면 되는 거예요. 그 멈춘다는 말을 불교에서는 쉰다라고 그래요. 쉬어. 휴식. 쉬는 건 뭐냐. 쉬는 건 하는 게 아니고, 멈추는 거거든요. 쉬어라. 그럼 안 하는 거예요. 쉬는 것보다 더 쉬운 게 없는데, 또 끊는다라고 그래요. 멈춘다, 끊는다, 쉰다, 이게 다 똑같은 말인데요. 뭘 끊어라, 뭐 애정을 끊는다 하면, 그럼 어떻게 끊냐, 칼을 가지고 가서 끊나. 톱을 가지고 가서 끊나. 그 마음을 딱 멈추면 끊어지는 거예요. 하나도 힘들 게 없어요. 그러면 나중에 잊어버려. 멈추면 잊어져. 그거 얼마나 쉬워요. 뭐 담배를 끊는다 그래. 담배 가게에 가서 담배를 막 칼로 끊어 재끼나, 어떻게 하는 거요. 그 피던 거 딱 안 피우면 끊는 거잖아요. 그게 쉬는 거고. 근데 이 번뇌도 그와 같아서 번뇌망상 안 일으키면 그만이에요. 하는 건 어렵지만 안 하는 건 얼마나 쉬워요. 근데 그게 어렵다고. 그러면 그냥 안 쉬어지니까 기도를 하는 거예요. 기도하면 저절로 쉬어지고, 저절로 지혜가 드러난다 이런 거지. 그래서 그걸 그렇게 하는 거를 반야라고 그래요, 반야. 이 생사에 헤매는 거를 생사라고 하고, 범부는 생사고 보살은 반야다. 반야는 딱 관찰을 하는 거거든요. 뱀이 그 새끼 위에서 막 일어나면 그 뱀을 보고 겁을 내는 게 아니라 그 뱀의 모습을 딱 관찰을 하면 뱀이 없어져, 그게 색즉시공이에요. 색을 자세히 보면 색은 공이다. 그러면 색은 뭐냐, 생로병사고, 공은 뭐냐. 불생불멸이거든요. 생로병사를 가만히 보면 그게 불생불멸이 돼버려. 그래서 그 관을 하라고 그렇게 가르쳐요. 그게 관이 반야에요. 그게 보살은 반야에요. 그 보살이 보는 힘이 점점 높아지면 그게 이제 마하반야가 되고, 반야가 넓고 커진단 말이에요. 그리고 반야심경에서는 심반야(深般若)라고 그랬거든요, 심반야. 깊은 반야라고. 그리고 심심반야(甚深般若)라고 그래요. 심할 심자. 무상심심미묘법 하듯이. 심히 깊은 반야가 되면, 그게 이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되는데, 그걸 적조지견이라고 그런다. 그래서 이 관을 딱 하는 게 이게 기도예요. ‘화음성중 화음성중’ 하면 입으로는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으로는 생각하고, 몸을 딱 안정하고 그러니까 번뇌망상은 다 그치고, 그 반야지혜가 점점 드러나서 업장소멸 공덕성취 지혜증장이 이루어져가지고, 그 새끼줄에서 뱀을 보던 눈으로 나중에는 뱀도 새끼 줄도 아니고 삼 껍데기를 딱 보는데, 그걸 여실지견 진정견해라고 한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거죠. 오늘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