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럼 어떻게 하면 성체가 되냐. 부처님의 명호를 외우고, 부처님의 경전을 읽고, 부처님을 향해서 예경을 올리면, 이 몸에 부처님이 담겨요. 그래서 이 몸에 부처님이 담길 때 성체 중생이라 그래요. 같은 그릇인데 그릇에다가 금을 담으면 금 그릇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래서 무엇이 담기느냐에 따라서 그릇의 내용이 달라지듯이, 우리가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고, 부처님의 경을 읽고, 부처님께 예경을 하고 그러면, 우리 몸에 그 부처님의 지혜와 공덕과 원력이 담겨서 범부 중생이 성체 중생이 된다 이거죠.
그래서 이 깨달음을 비유로 항상 가르치는 법문이 있는데, 그게 뭐냐면 마피, 마피라는 건 누런 삼 껍데기, 이걸 마피라고 그래요. 삼 껍데기가 있다. 또 마승, 그 삼 껍데기를 가지고 새끼줄을 만들어요. 이게 새끼줄 승자가 있어서, 삼 껍데기, 새끼 줄 이게 있어요. 근데 그 삼 껍데기로 새끼줄을 만들어서 동그랗게 놨는데, 저녁이 됐는데 누가 지나가다가 삼 껍데기 새끼 줄을 뱀으로 본 거예요. 뱀으로. 이걸 승사라고 그래요. 새끼줄이 뱀이 됐다고. 뱀으로 딱 보는 순간에 공포가 생겨. ‘야 저 뱀에 물리면 큰일 난다. 그냥 생명을 잃는다.’ 막 도망가고, 도망가다 보니까 막 넘어지고, 다치고 막 그럴 거 아니에요. 그게 비유에요. 그 마피는, 삼 껍데기는 원적 원광 열반 상락, 삶과 죽음은 하나도 없고, 마음 광명이 언제나 둥글게 빛나고, 항상 생사 없는 적멸 열반 세계에서 늘 즐거움으로만 계속 된다. 이걸 이제 삼 껍데기에다가 비유를 한 거예요. 삼은 영원히 삼이에요, 그냥. 근데 이게 이제 인연 따라서 새끼줄이 된단 말이죠. 이게 마승인데, 모양은 새끼줄이 됐지만은, 그 삼 껍데기는 하나도 변화가 안 됐어요. 삼 껍데기가 그대로 마피가 마승이 됐지, 그 새끼 줄이 딴 데서 온 게 아니다 이 말이에요. 그래서 그 새끼 줄을 생로병사에다가 비유를 해요. 생로병사는 삼 껍데기로 만든 새끼 줄과 같다. 그러니까 이 생로병사는 인연 따라 나고, 인연 따라 성장하고, 인연 따라 늙고, 인연 따라 죽고, 그 새끼 줄과 똑같은 거예요. 그런데 그 새끼줄을 뱀으로 보는 게 이게 이제 문젠데, 뱀으로 보는 건 뭐냐. 거기에 온갖 감정을 붙여요, 생로병사에. 그냥 온전한 마음으로 태어나면 그게 열반 상락인데, 거기서부터 이제 우리 아버지는 누구고, 어머니는 누구고, 우리 조상은 누구고. 온갖 거기다가 이제 뭘 때려 붙여서 나는 어떻게 생겼고, 난 앞으로 뭘 할 거고, 잘 났다 못났다 뭐 온갖 걸 때려 붙여가지고, 거기서 생로병사에서 우비고뇌가 생기는 거예요. 그 우비고뇌가 그 삼 새끼줄에서 뱀을 본 것과 같은 거죠. 그거는 순전히 뱀으로 잘못 봐서 생기는 거지, 뱀이 어디에도 없어요.
그러니까 지금 근심 걱정이 다 내 생각에서 나온 거다. 그러니 기도를 딱 하면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에 생각이 멈춰요. 그래서 지관이라고, 그치면 보인다는 말이 있는데 실제 행동에는 보면 그쳐요. 관이 먼저예요. <화엄성중>하면 다른 데로 막 달아났던 마음이 그쳐버려요. 그래서 망상을 일부러 없애려고 할 거 하나도 없고, 정진을 하면 망상은 없어져요. 또 망상을 없애야 정진이 된다 이것도 맞아요. 나중에 한참 하다 보면 망상이 없어지고 정진이 되는데, 그건 중간쯤 가서 일이고, 처음 시작할 때는 먼저 하면 없어지는 거에요. 하면. 나중에는 이제 그게 똑같이 가요. 그치고 하고, 하고 그치고. 관, 그치는 거, 지. 이걸 쌍수라고 지관쌍수(止觀雙修), 쌍으로 닦는다고.
그러면 이 뱀을 보던 그 잘못된 감정이 그냥 싹 없어져서 그 새끼를 보게 돼요. 새끼를 보면 뭐냐. 이 생로병사가 그냥 생로병사인 거예요. 열반 그대로 생로병사지, 열반을 떠나서 생로병사가 없다, 이것까지 아는 거예요. 그래서 이 정신세계가 높아지면 삶과 죽음이 똑같아요. 이게 노소가 똑같아요. 젊다고 좋은 것만 있는 거 절대로 아니에요. 젊어서 아주 고약한 거 참 많거든요. 늙었다고 나쁜 것만 있는 게 아니에요. 늙으면 뭐 누가 시비하는 사람도 없고, 누가 쫓아다니는 사람도 없고, 누가 뭐 관심을 안 가지니까 얼마나 좋아요. 내가 하고 싶은 대로 내가 다 하고, 근데 젊을 때는 안 그래요. 온갖 그냥 날파리처럼 달라붙고, 내가 또 날파리가 되기도 하고, 내가 날파리로 당하기도 하고, 이런 거예요. 그러니까 그냥 이거를 생로병사 그대로 진실상을 딱 관찰을 하면, 삼 껍데기 그대로 줄이 됐듯이, 그 상락 열반이 그대로 생로병사로 나타나는 거니까 아무 문제가 없어요. 아프면 좀 고통스럽긴 하겠지만 그것뿐이에요. 요샌 또 진통제도 좋아가지고, 아프면 진통제나 하나 딱 맞고 있으면 그만이지, 뭐 억울하다든지 뭐 슬프다든지 이거는 전부 그 새끼줄에서 뱀 보고 무서워하는 거랑 똑같거든요. 그래서 기도하고 산란한 마음으로 딱 일어났을 때 그걸 없애려고 하지 말고, 경을 딱 읽는다든지, 부처님의 명호를 딱 부르면, 그 산란한 마음은 그냥 없어져요. 산란한 마음은 어둠과 같고, 그 기도를 하는 것은 불 켜는 거와 같아서, 불만 딱 켜면 어두운 건 그냥 자취도 없이 사라져요. 이런 거예요. 그래서 이런 얘긴데, 오늘 여기 이렇게 써왔거든요. 이거는 뭔 소리냐면, 이걸 요약한 거예요.
聞法信受 문법신수 법문을 듣고 믿어 받아서
頓悟無生 돈오무생 바로 불생불멸을 깨달으면
寂照含空 적조함공 고요히 비추는 마음이 허공을 삼키니
生死昨夢 생사작몽 생로병사는 어젯밤 꿈의 일이다.
문법신수(聞法信受)하고, 이제 부처님의 법문을 듣고 그걸 믿어서 받는다. 믿어서 간직하는 걸 문법 신수라. 믿을 신자, 받을 수자. 그래가지고 이걸 이제 깊이깊이 들어가면, 돈오무생(頓悟無生)이라, 바로 이 생멸이 생멸이 아닌 거를 알게 돼요. 이게 태어난 게 태어난 게 아니고, 죽는 게 죽는 게 아니라는 걸 알게 되는데, 이걸 무생이라고 하거든요. 생멸이 없다고, 무생. 그걸 알게 돼요. 이게 돈오무생이에요. 근데 오래 있어야 아냐. 아니에요. 전생에서부터 조금 기도했던 사람은 듣기만 하면 바로 알아요. 그럼 들어도 들어도 모르는 건 전생에 기도 어지간히 안 한 사람들이거든요. 그러니까 이게 모를 수가 없는 건데, 육조 같은 사람은 금강경 한마디 듣고 바로 알았거든요. 이게 모를 수가 없는 건데. 그러면 기도를 하면, 기도한 경험이 있으면 그럼 알아지게 돼 있어요. 이게 모를 수가 없는 거예요. 생로병사가 불생불멸이라는 거를 모르는 게 이상하지. 그러니까 새끼가 됐지만은, 삼 껍데기로 보면 하나도 생긴 게 없어요. 이게 무생이에요. 거울의 모양이 비춰지지만 거울로 볼 땐 하나도 생긴 게 없어. 그게 무생이란 말이야. 이걸 왜 모를 수가 있냐고. 모르는 게 이상한 거 아니에요? 그래서 돈오무생이라, 바로 무생. 생로병사에서 생멸이 없는 걸 바로 딱 알아. 깨달음이라는 건 아는 거거든요. 그러면 그다음은 그 아는 마음이, 생로병사가 이 불생불멸이라고 하는 그 아는 마음이, 그게 찾아보면 마음이 있는 데가 없는데 항상 안다. 이걸 고요할 적자, 비출 조자, 적조(寂照)지견이라고 그러거든요. 적조로 알고 보는 거다. 그래서 그게 적절한 딴 게 아니고 그거 아는 마음이에요. 아는 마음. 생로병사가 불생불멸이라는 걸 아는 그 마음을 적조라고 그래요. 실체는 없는데 항상 안다고. 어떤 사람 마음 알아보려고 온갖 조사를 해보고, 엑스레이를 찍어봐도, 마음 안 찍혀요. 마음은 있는 데가 없는 거, 근데 항상 아는 거예요. 근데 얼마나 이게 신비롭게 아냐 그러면, 80된 사람이 다섯 살 때, 세 살 때 거 알고 있어요. 이게 어디에 붙어 있다가 나오는지 한번 생각해봐요. 그걸 보고 깨달아야 돼요. 아니 80년 전에 있었던 일이 그냥 순간순간 기억이 난단 말이에요. 그러면 이 팔십 년 전에 있었던 경험이 어디에 지금 붙어 있다가 오늘 튀어나오냐. 마음이란 이런 거예요. 그래서 실체는 없는데 항상 나와. 이걸 적조라고 그러거든요. 고요히 비춘다고. 그래서 이 생멸이 없는 걸 딱 알고 나면, 고요히 비추는 지혜광명 그것 뿐이에요. 이걸 적조가 함공(寂照含空)이라, 온 허공을 다 삼켜버렸다. 허공은 없고 적조뿐이다. 그래서 오불견공(悟不見空)이라고, 깨달은 사람은 허공을 못 본다. 왜 못 보냐. 허공이 전부 마음이니까. -상좌가 하나 있는데, 이 오불견공이라는 말을 듣고 그걸로 화두로 해야 되겠다고 그랬어요. 법문할 때 내가 무심코 이 말을 했더니 지 화두가 없어졌다고 불평을 하더라고. 왜 남의 화두를 없애냐고. 나 참 별일도 다 있네.- 깨달은 사람은 허공을 못 본다 이거예요. 왜냐. 온 허공이 마음이니까 허공이 본래 없던 건데, 미혹해서 봐왔거든요. 그 새끼줄에 뱀이 본래 없었는데 미혹해서 뱀을 보다가 삼 껍데기를 보는 순간에 뱀은 자치가 없이 사라졌다 이 말이죠. 이런 걸 깨달음이라고 그래요. 그래서 오늘 제목이 깨달음 이야기에요, 깨달음 이야기. 딴 게 아니고요. 그래서 적조가 함공하니, 그 고요히 비치는 마음이 허공을 삼키니, 생사는 작몽(生死昨夢)이라, 죽고 사는 건, 작이라는 건 어제 작자가 있어요. 어제저녁의 꿈과 같다. 엊저녁 꿈, 오늘은 자취가 없거든요. 여기도 엊저녁에 꿈꾸고 오신 분이 있을지 모르는데 엊저녁 꿈은 오늘 아침 일어나면 자취가 없어요. 그게 이제 바로 깨달음이다.
見聞覺知 견문각지 밖의 사물을 인식하는 감각과 지각은
因緣生滅 인연생멸 인연을 따라 생멸을 반복하지만.
圓明性覺 원명성각 둥글고 밝은 본성의 마음은
常寂常照 상적상조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춘다.
證悟性覺 증오성각 본성의 마음을 깨달아서
見聞無惑 견문무혹 감각과 지각에 미혹함이 없으면.
一切萬法 일체만법 일체의 만법이
寂照光明 적조광명 고요히 비추는 마음 광명이다.
그 밑에는 또 견문각지(見聞覺知)가 있는데, 보고 듣고 뭐 느끼고 알고 있는데, 이거는 인연생멸(因緣生滅)이다. 인연 따라서 일어나는 거예요, 생각은. 그런데 원명성각(圓明性覺)이라고, 그 본래 원적 원광 열반 상락, 그 본래 적조지견, -견문각지가 있고 적조지견이 있어요.- 적조지견은 본래 마음이에요. 견문각지는 이 보고 듣는 마음이에요. 보고 듣는 마음은 생겼다 없어졌다 이래요. 고요히 아는 그 마음은 불생불멸이고 상락이 열반이에요. 그걸 이제 원명 성각이라고 하는데, 성품 성자, 알 각자, 성품으로 아는 거지, 인연으로 아는 게 아니다. 그거는 상적상조(常寂常照)라. 항상 고요하면서 항상 안다. 어두움이 오면 무서워할 줄만 아는데, 그 어두움을 보는 내 마음이에요 그게. 죽음이 오면 슬퍼할 줄만 아는데, 죽음을 보는 내 마음인 거예요. 아이고 짜증 나네 참. 죽는다 그러면 그 죽는 걸 아는 내 마음이지 죽는 건 없는 거예요. 뭐가 죽는 거예요. 자세히 살펴보면 죽는 거 없어요. 어둡다 그러면 어두움을 아는 내 마음이지 어두운 건 없는 거예요. 해 뜨면 밝아지는데 해 뜨기 전에 어두움이 없는 거예요. 그러니까 어두움도 없고 죽음도 없고, 그거를 뭐라고 그러느냐. 상적상조라고 한다. 항상 고요하지만 항상 안다. 항상 비춘다. 그걸 가르치는 거예요. 이거 부처님이 하는 사업이에요. 부처님의 업종이라고 이게. 그래서 증오성각(證悟性覺)하면, 그 항상 아는 그 마음을 깨달아서 알면, 이게 석가모니 부처님은 그 깨달음을 경험하기 전에 온갖 번뇌가 다 사라진 상태로 그걸 깨달았어요. 수행을 얼마나 깊게 해가지고. 근데 그 제자들부터는 그 부처님처럼 그렇게 번뇌망상을 다 소멸하지 못한 상태로 깨달았기 때문에 깨달은 뒤에도 미혹함이 종종 튀어나오는 거예요. 그걸 종자현행(種子現行)이라고 하는데, 미혹한 종자가 아직 남아 있어서 미혹한 행위가 밖으로 나와, 이걸 현행이라고 그래요. 행이 나타난다. 그래서 이걸 생멸이 없는 거를 깨닫고, 그 다음에 뭘 보든지 보는데 미혹하지 않고, 내 마음 밖에 저 보이는 것이 있다. 여기에 속지를 않는다는 거예요. 뭐 들리는 게 있어도 내 마음 밖에 저 소리가 있다. 소리에 미혹하지 않고 미혹이라는 건 속는 건데, 저 보이는 거는 내 마음이 나타난 건데, 내 마음이 나타난 건 모르고, 저 보이는 대상에만 쫓아가면 마음을 모르고 대상에 속는다, 이렇게 되는 거예요. 모르고 속는다. 이거 참 이 보통 일이 아니에요. 그래서 항상 보고 듣는데 속아서 살아요. 보는데 쫓아가다 보면, 쫓아가는 대상은 사라지고, 쫓아가는 나 혼자만 고생하는 거예요. 이게 못 깨달은 고생이에요. 이게 개고생이 아니라 못 깨달은 고생이다 이거지. 못 깨달으면 고생이에요. 이 깨닫지 못해서 고생하는 거다 이 말이죠. 그래서 깨달음을 딱 얻으면 뭘 봐도 내 마음인 거예요 이게. 사람을 봐도 내 마음이고 사람을 보는 내 마음이다 이거야. 소리를 들어도 소리를 듣는 내 마음이다. 내 마음이 없으면 소리가 없어요. 소리는 다 이념 따라서 생겼다 사라지는 거고, 보는 건 소리가 날 때는 그 소리를 듣고, 안 날 때는 그 조용한 거 듣는단 말이에요. 조용한 감각이 또 있어요. 근데 조용한 감각은 못 듣는다고 그러고, 듣는 것만 듣는다고 하고, 이게 이제 속아도 너무 겹으로 속은 거예요. 조용한 거 아는 그게 내 마음이라고요. 시끄러우면 그걸 괴로워만 할 게 아니라 시끄러운 줄 아는 그게 내 마음이라. 그래서 깨닫고 나서 이거 보고 듣는데 속지를 아니하면, 뭘 봐도 내 마음 딱 나타나 있어. 뭘 들어도 내 마음 딱 나타나 있어. 무슨 생각이 일어나도 그게 내 마음이에요. 뭘 느껴도 그게 내 마음이라. 그래서 견문에 무혹(見聞無惑)하면, 견문에 미혹함이 없으면, 일체만법(一切萬法)이 온갖 것이, 적조광명(寂照光明)이라, 고요히 비치는 광명이다. 이렇게 적어가지고 왔어요. 그런데 이거는 앞에서 한 거나 똑같은 거예요, 내용이.
圓明性覺 常寂常照 寂照知見 眞正見解
원명성각 상적상조 적조지견 진정견해
云何眞正見解 金屑雖貴 着眼成瞖
운하진정견해 금설수귀 착안성예
그러면 원명성각(圓明性覺) 상적상조(常寂常照), 그 본래 마음이 항상 고요하고 항상 비치는 거를, 적조지견(寂照知見)이라고 그러고, 견문각지가 아니라 또 임제선사 같은 분은 진정견해(眞正見解)라고 그래요. 참 진자, 바를 정자, 진정견해. 보고 아는 거, 진정견해, 적조지견. 고요히 비추는 알고 보는 것이다. 적조지견과 진정견해가 그게 깨달음의 정신인데, 그럼 깨달음의 정신인 적조지견 진정견해가 뭐냐. 어떤 것이 진정견해냐. 여기에는 아무런 점이 없어요. 점. 큰 점, 작은 점, 뭐 밝은 점, 어두운 점, 그냥 고요한 상태로 그냥 모든 것을 다 보는 거예요. 그래서 비유를 들기를 금설수귀(金屑雖貴)나, 가루 설자가 있는데, 금가루, 금가루가 비록 귀하기는 귀하지만은, 금이니까 귀할 거 아니에요. 착안성예(着眼成瞖)라, 이걸 눈동자에다 금가루를 딱 집어넣으면, 예라는 건 병이라는 말인데 눈병, 눈병 예자인데, 눈병이 된다. 아, 금이 아무리 좋은들 그거 눈에 집어넣어 봐요. 그게 눈병 되잖아요. 그래서 이 진정견해라고 하는 것은, -이게 법문이 하도 귀하니까, 목이 이제 지금 긴장을 해가지고 목이 다 막히네요.- 진정 견해라고 하는 것은 눈동자와 같다. 눈동자는 맑아서 아무것도 없어요. 그러면서 온갖 걸 다 본단 말이에요. 그러니까 여기는 죽는다는 생각, 산다는 생각, 귀하다는 생각, 천하다는 생각, 어떤 생각도 없는 게 그게 진정견해에요. 슬프다는 생각. 그래서 이런 정신수련을 딱 하면 우울증이라든지 공황장애라든지 무슨 정신질환 흔적도 없어요. 진정견해를 내가 갖도록 노력하란다. 진정 견해는 뭘 사유를 하고, 주장을 하고, 발표를 하고, 그런 게 아니에요. 눈동자와 같이 깨끗하게 하는 거예요. 생각이 깨끗하면 일체 생각이 거기에 붙을 수가 없어요. 그걸 무적정신이라고 자취 없는 정신이라고, 무적정신. 그 자취는 내가 만든 거예요. 적조지견 진정견해. 그것뿐이라고.
그거는 이렇게 수행이라는 말인데, 수행은 딴 게 아니에요. 깨달음인데, 깨달음은 뭐냐. 딴 게 아니에요. 딱 진실을 보고, 번뇌를 멈추고, 번뇌를 끊을 게 없고, 그냥 멈추면 되는 거예요. 그 멈춘다는 말을 불교에서는 쉰다라고 그래요. 쉬어. 휴식. 쉬는 건 뭐냐. 쉬는 건 하는 게 아니고, 멈추는 거거든요. 쉬어라. 그럼 안 하는 거예요. 쉬는 것보다 더 쉬운 게 없는데, 또 끊는다라고 그래요. 멈춘다, 끊는다, 쉰다, 이게 다 똑같은 말인데요. 뭘 끊어라, 뭐 애정을 끊는다 하면, 그럼 어떻게 끊냐, 칼을 가지고 가서 끊나. 톱을 가지고 가서 끊나. 그 마음을 딱 멈추면 끊어지는 거예요. 하나도 힘들 게 없어요. 그러면 나중에 잊어버려. 멈추면 잊어져. 그거 얼마나 쉬워요. 뭐 담배를 끊는다 그래. 담배 가게에 가서 담배를 막 칼로 끊어 재끼나, 어떻게 하는 거요. 그 피던 거 딱 안 피우면 끊는 거잖아요. 그게 쉬는 거고. 근데 이 번뇌도 그와 같아서 번뇌망상 안 일으키면 그만이에요. 하는 건 어렵지만 안 하는 건 얼마나 쉬워요. 근데 그게 어렵다고. 그러면 그냥 안 쉬어지니까 기도를 하는 거예요. 기도하면 저절로 쉬어지고, 저절로 지혜가 드러난다 이런 거지. 그래서 그걸 그렇게 하는 거를 반야라고 그래요, 반야. 이 생사에 헤매는 거를 생사라고 하고, 범부는 생사고 보살은 반야다. 반야는 딱 관찰을 하는 거거든요. 뱀이 그 새끼 위에서 막 일어나면 그 뱀을 보고 겁을 내는 게 아니라 그 뱀의 모습을 딱 관찰을 하면 뱀이 없어져, 그게 색즉시공이에요. 색을 자세히 보면 색은 공이다. 그러면 색은 뭐냐, 생로병사고, 공은 뭐냐. 불생불멸이거든요. 생로병사를 가만히 보면 그게 불생불멸이 돼버려. 그래서 그 관을 하라고 그렇게 가르쳐요. 그게 관이 반야에요. 그게 보살은 반야에요. 그 보살이 보는 힘이 점점 높아지면 그게 이제 마하반야가 되고, 반야가 넓고 커진단 말이에요. 그리고 반야심경에서는 심반야(深般若)라고 그랬거든요, 심반야. 깊은 반야라고. 그리고 심심반야(甚深般若)라고 그래요. 심할 심자. 무상심심미묘법 하듯이. 심히 깊은 반야가 되면, 그게 이제 아뇩다라삼먁삼보리가 되는데, 그걸 적조지견이라고 그런다.
그래서 이 관을 딱 하는 게 이게 기도예요. ‘화음성중 화음성중’ 하면 입으로는 부처님의 이름을 부르고, 마음으로는 생각하고, 몸을 딱 안정하고 그러니까 번뇌망상은 다 그치고, 그 반야지혜가 점점 드러나서 업장소멸 공덕성취 지혜증장이 이루어져가지고, 그 새끼줄에서 뱀을 보던 눈으로 나중에는 뱀도 새끼 줄도 아니고 삼 껍데기를 딱 보는데, 그걸 여실지견 진정견해라고 한다. 이것을 깨달음이라고 한다 이거죠. 오늘 이야기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