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륙재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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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4일 수륙재 초재 지형스님 법문
2025-12-10
안녕하십니까? 올해도 변함없이 수륙재(水陸齋) 행사를 위해서 밤낮으로 노고를 아끼지 않으시고 또 심혈을 기울여서 준비하신 진관사 회주이신 계호 스님을 비롯해서 이 법해 주지스님과 또 사부대중들께서 다 애쓰신 공력이 너무너무 역력해서 감동이 아주 큽니다. 그리고 또 현장에 와서 직접 보니까 우리가 인터넷이나 이런 걸로 보는 것보다도 훨씬 감명이 크고 또 아까 저기 염불를 해 주신 여기 동희 스님께서는 옛날부터 제가 잘 알고는 있고 또 잘 아는데 그 어장 스님이시고 그런데 연세가 참 많으셔요. 저보다 약간 선배 스님이십니다. 그런데도 너무 정말 역력하시게 잘하시는 모습을 보고 제 가슴이 울컥했습니다. 너무 좋아서 저절로 신심이 나고 제가 한 10분 20분 전에 와서 저 방에서 있었는데 여기 주지 스님과 차 한잔 마시면서 있었는데 너무 좋아가지고 정말 여기 진관사 신도님들께서는 참 복이 많으시구나. 정말 복이 많으신 분이시구나. 또 해마다 이런 도량에 오시기도 어렵고 저 시골에 사는 분들은 일부러 버스를 대절해도 안 옵니다. 뭐 농사 짓는 데 바쁘고 뭐 하는 데 바쁘고 해서 못 갑니다 이럽니다. 그러는데 여러분들께서는 이렇게 다 오셔서 매년마다 또 매주마다 이렇게 오셔서 다 참석하셔가지고 공양을 올리시고 다 하시는데 그 모습을 보고 굉장히 마음이 환희스러웠습니다. 여러분들은 정말 복 받으십니다. 아까 말씀하신 대로 이제 이 수륙재 법문에 대해서 진리의 숲으로 이끌어주시는 부처님 또 모든 스승님께 감사드린 그런 말씀을 했으면 하고 연락이 왔어요. 근데 이 진관사 수륙재는 조선시대 태조 임금 때부터 시작되어서 600년이 넘지요. 그 전통을 유지하고 이어온 아주 국행 수륙재 도량으로써 정말 명실상부한 이런 도량입니다. 다른 데도 저는 수륙재 몇 번 이렇게 참석을 하면은 이렇게 봐도 이렇게 질서정연하면서 정말 엄숙하고 환희스럽고 이런 거는 감동이 좀 덜 올 때가 많아요. 그런데 여기는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래서 굉장히 정말 좋은 엄숙하면서도 환희롭고 그런 마음이 일어나기 참 어렵거든요. 여러분들께서는 정말 좋은 도량이고 또 명실상부한 그런 진관사 도량입니다. 정말 수고 많으셨습니다. 회주 스님 주지 스님 대중 스님들 감사합니다. 이 수륙재는 천지명양 수륙무차평등대재(天地冥陽 水陸無遮平等大齋) 이렇게 해서 이 말의 줄임말로 그냥 수륙재라 이렇게 말씀을 드리는데 정말 이승과 저승, 물과 육지에 있는 모든 삼라만상 중생들의 높고 낮음, 크고 작음 또 산 자와 죽은 자를 가리지 않고 평등하게 베푸는 그러한 법석을 수륙재라고 합니다. 양나라 무제(梁武帝) 시대에 요즘 우주의 모든 중생들을 업장 소멸을 위해서 정말 지공선사라든지 이런 여러 스님들을 모시고 또 그 스님들과 의논을 해서 다 대덕 큰 스님들을 모시고 부처님 법답게 또 어떻게 의식을 만들어서 한번 잘해볼까 이렇게 생각하셨는데서, 그러니까 결국은 무제 임금 때에 이게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불교에서 49재, 수륙재 이런 등에 쓰이는 ‘재(齋)’라는 것은 그 산스크리트어로 우포사다(Upavasatha)라는 말에서 유래되었고 또 스님들께 공양 드리는 그런 의식을 말하는 것이죠. 그래서 불법(佛法)을 우리가 강설하고 음식을 베푸는 그러한 불교의 의례입니다. 이와 같이 부처님을 비롯한 모든 스승님들께 귀의하고 찬탄하며 청하여 공양을 올리고 또 공덕과 무차평등한 그러한 자비를 일으키는 마음으로 아까 산 자 죽은 자 참석한 모든 이들이 복을 얻는 그러한 법식(法式)이라 그랬죠. 그래서 그렇게 해서 베푼 음식과 부처님 법으로 윤회(輪廻)에 시달린 그러한 갈증을 벌이고 윤회의 고통에서 벗어나게 하는 그러한 것이죠. 그리고 이 우리가 천지 만물은 다 다 각자 각자 틀리는 그러한 개성을 다 가지고 있지만은 실제로는 천지만물은 결국은 같은 뿌리이기 때문에 동근(同根)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우리의 불성(佛性)은 결국은 하나이지요. 지수화풍(地水火風) 사대로 우리가 이 밖에 있는 모든 것도 지수화풍입니다. 그러니까 땅과 물과 불과 바람과 이렇지만 우리 몸도 마찬가지입니다. 우리 몸에 있는 뼈는 지(地)에 해당이 되고 살이라든지, 또 화(火)는 우리 몸속에 흐르는 피, 또 풍(風)은 우리가 움직이는 풍이지. 그래서 우리 지수화풍(地水火風)이 우리 몸에도 다 사대(四大)가 있기 때문에 사대라 이렇게 말하거든요. 이들은 그 사대로 이루어진 몸뚱이의 기가 있다면은 살아있는 자라고 말하지요. 근데 육체만 육체가 없고 그 기가 있다면은 육체는 없는데 기운이 있다 그러면 영가라고 부릅니다. 그래서 받은 몸의 형상에 따라서 여러 가지 이름으로 불리어지고 있지만은 실체는 하나입니다. 불성(佛性)의 화장세계(華藏世界)를 말하는 거죠. 그래서 하나이다 이렇게 하는데 그러나 그 본래 불성 자체는 바로 장엄의 의식이지만은 업식(業識)과 윤회(輪廻)로 나누어서 중생들이 12종류로 자기의 그 업에 의해 가지고 그런 힘이 크기 때문에 불·보살님과 스승님들에게 또 찬탄을 하고 공양을 올리고 예경하고 이러한 공덕을 전부 다 다 지우면은 그들의 원력(願力)에 힘입어서 우리 모두가 고통에서 건져질 수가 있는 겁니다.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공덕이 될 수 있을까요? 대지도론(大智度論)에 보면은 복이라는 것은 보시(布施)와 같은 행위 그 자체는 복은 아니지만 우리가 인색하다 또 탐욕이다 이런 모든 것들을 부수고 착한 그러한 법을 열 수 있는 선(善)의 뿌리이기 때문에 보시가 선의 뿌리이기 때문에 복이라고 부릅니다. 이것은 우리가 바느질할 때의 원리와 똑같습니다. 바늘질할 때 틀로 박고 바늘로 이렇게 꼬매잖아요. 그래가지고 이런 옷을 만들면은 그렇다고 해서 그 바늘이 이 옷에 붙어 있습니까? 붙어 있지 않습니까? 바늘 붙어 있으면 찔리거든요. 바늘은 빼죠. 바늘은 빼지만은 이렇게 옷은 훌륭하게 만들어져 이렇게 장삼이 되어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께서 이렇게 복을 잘 짓는다면은 복은 결국은 훌륭하게 만들어져서 복을 짓는 행위도 그와 같게 이제 말하는 거죠. 그래서 보시의 대상인 그 불보(佛寶)와 승보(僧寶)를 가리켜서 복덕을 키우는 밭이다 이런 뜻으로 우리가 복전(福田)이라고 합니다.그러니까 돈을 주는 행위라든지 뭐를 하는 그 자체는 복이 아니지만은 그걸 뿌리로 해서 그 공덕을 다 받아 입는 거는 사람들이고 중생들이거든요. 그래서 복전이라고 말합니다. 복전이 되어 주십시오. 이렇게 우리가 얘기를 하는 거거든요. 그래서 복은 몸과 입과 뜻, 신구의(身口意) 이렇게 말하죠. 세 가지 선한 업(業)으로 지은 그러한 선한 결과입니다. 또 몸으로는 착한 행동을 해서 상대를 향해서 바라지 않는 그러한 선한 마음을 일으키고 또 입으로는 선한 말과 또 입으로는 항상 찬탄을 하죠. 그렇게 하는 것이 결국은 복이 되는 것입니다. 신구의 삼업으로 결국은 복을 짓는 거죠. 우리가 남에게 보시한다 하니까 무슨 저기 많은 돈이나 있고 그런 것만 많이 주는 것이 보시가 아니에요. 마음으로 또 행동으로 남을 돕고 남을 도와주는 것. 제가 어떤 스님이 한 분 계시는데 얼마 전에 엊그저께 갑자기 상좌가 가버렸어요. 근데 그 상자가 연세가 많으신 스님인데 그 상자가 이렇게 아주 잘 시봉을 했는데 갑자기 몸이 약해서 갑자기 가버렸습니다. 그러니까 이 스님이 너무 힘드시는 거예요. 연세도 많으시고 놀래가지고 자꾸 전화를 하시는데 제가 도울 거는 아무것도 없잖아요. 그러니까 어떡하냐고 그 말씀을 자꾸 들어드리고 마음을 위로해 드리고 그것밖에 제가 할 수 있는 건 없거든요. 그러니까 마음을 통한 사람은 스님밖에 없어서 내가 전화한다 이렇게 말씀을 하셔요. 그러니까 여러분들께서도 남의 아픔을 같이 아프게 여기시고 남의 기쁨을 같이 기쁘게 여기시고 또 이렇게 도량이 환희스러울 때 여기 오셔가지고 마음이 환희롭다. 너무 환희롭다. 너무 좋구나 내가 이런 데 와서 이렇게 법문을 할 수 있구나. 저는 사실 종단에 제가 계단(戒壇)에 가서 여기 계호 스님과 함께 그 계단에 계(戒)를 줍니다. 요즘 수행 비구니로서 우리 이제 비구니 스님들에게 계를 주고 이런 건 하고 다니지만은 또 강의를 하고 스님들에게 이런 건 하지만 다른 절에 가서 법문을 잘 안 해요. 절대 오라고 해도 저는 안 갑니다. 그때 계호 스님께서 3월 달부터 계단에 오셔가지고 달력을 들이대면서 “오늘 날짜를 적어라 오늘밖에 없지 않느냐” 하면서 계속 강조를 하시니까 제가 뭐라고 계호 스님 뜻을 어기기가 어렵더라고요. 그래서 대답을 했는데 저한테 또 남의 절에 와서 이렇게 진관사에 와서 법문한다니까 신경이 쓰이는 거예요. 우리 절 같으면 그냥 제가 노상 하는 거니까 아무렇지도 않은데 제가 다른 데 가서 사실 법문하는 거는 옛날에 몇십 년 전에 저기 조계사입니다. 조계사 가서 한 번 법화경-인가 그때 무엇을 강의를 했고 불교회관에 비구니 회관에 가서 법화경(法華經)을 몇 품을 강의해 달라 그래서 제가 거기 가서 한 번 하고 또 계율(戒律) 강의를 해달라. 그래서 우리가 스님들께서 이렇게 계율 강의 뭐 해라 이런 거는 제 본분이니까 제가 계율 강의는 아주 많이 했습니다.주지 스님께서 저한테 옛날에 몇십 년 전이죠. 계를 받고 강의를 들으셨다 그래 저는 몰랐거든요. 그런데 80몇년도에 제가 범어사에서 들었습니다. 그렇게 말씀을 하셔서 그때는 내가 초짜였는데 그때 스님이 오셨었구나 제가 아까 그렇게 생각을 했거든요. 어쨌든 신구의(身口意)로, 그러니까 몸과 입과 뜻으로 선한 말과 찬탄을 하는 것이 복이 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와 관련된 아쇼카 대왕(阿育王)이라고 인도의 부처님 불멸 후 100년 이후에 나타나신 그 대왕의 얘기가 있어요. 그분의 전생 설화입니다. 어느 날 부처님께서는 이른 아침에 그 시자인 아난 존자와 함께 걸식을 하기 위해서… 그때는 인도에는 다 걸식을 해요. 우리나라는 걸식을 안 합니다. 왜냐하면 기온이라든지 온도라든지 삶의 방식이 인도하고는 완전히 틀리니까 걸식을 할 수가 없어요. 그래서 우리나라는 안 하지만 지금도 라오스라든지 미얀마 또 인도 이런 데는 가면 다 스님들은 걸식을 해요. 하루에 한 끼밖에 또 안 드시고 그렇게 하는데, 부처님께서도 항상 아침에 일찍 일어나셔서 아난 존자와 함께 이렇게 걸식을 하기 위해서 성 안으로 들어가셨습니다.길을 가는 도중에 그 어린아이들이 소꿉장난하는 것을 보았는데 그 아이들은 흙을 모아가지고 집도 짓고 창고도 짓고 또 이거는 곡식이다, 다 흙으로 돌려서 이거는 또 보물이다 하고 창고에다 흙을 모아놓고 이렇게 합니다. 그때 ‘사야’라는 이름의 어떤 조그마한 어린아이가 먼 데서 부처님께서 이렇게 발우를 드시고 걸식하러 오시는 모습을 보고 자기 마음에 저절로 어린아이가 무한한 공경심이 생겼고 또 무엇인가 보시하고 싶은 그러한 순수한 마음이 우러났습니다.그래서 그 아이는 창고에서 곡식이라고 불리는 흙을 한 줌 움켜쥐고 부처님께 올리려고 하니까 키가 너무 작아서 안 되니까 친구 어깨를 받쳐달라고 해서 어깨 위에 올라가서 부처님께 공양을 올려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발우를 낮추시고 머리를 숙여서 그것을 받아가지고 아난에게 주면서 “이것을 가지고 내 방바닥을 발라라, 그 흙으로 발라라” 이렇게 하셨어요.그러니까 걸식을 마치고 숙소로 돌아온 아난 존자는 시자입니다. 그 흙으로 부처님 처소의 방바닥 한 귀퉁이를 발랐어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좀 전에 그 아이가 기쁘게 흙을 보시하여 내 방 한 귀퉁이를 발랐다. 그 어린아이는 이 흙 한 줌을 올린 그 공덕으로 나중에 100년 후, 내가 돌아가고 난 뒤에 100년 후에는 아쇼카 왕이 될 것이다.” 하셨고, 실제로 아쇼카 왕이 되었습니다. 즉 역사에도 나오고 경전에도 나오고, 중국 말로는 아육왕(阿育王)이라고 부르거든요. 근데 아쇼카 왕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인도에 가면 지금도 탑도 있고 기둥도 있고, 아쇼카 왕이 세운 이런 기둥도 있고 다 볼 수 있어요. 여러분들이 인도 다녀오신 분은 보셨을 거예요. 그래서 이 이야기에서 우리는 가진 것이 정말 흙일지라도, 비록 흙이지만 순수한 마음으로 부처님께 올린 그 공덕이 무량한 것임을 알 수가 있습니다. 이것은 바로 깨달은 자가 깨달은 자이고 또 이것을 받은 자도 굉장히 깨끗한 순수한 마음의 자이기 때문에 받은 자가 깨달은 자, 또 공양을 올린 자가 지극히 순수한 마음이었기에 바로 가능한 이야기입니다. 얼마나 그 똑바로 순수한 마음으로 올렸기 때문에 그 공덕이 무량하지요.그래서 무차평등대재인 이 수륙대재(水陸大齋)는 모든 중생을 애민히 여기는 불보살님과 또 스승들과 원력과 지극한 자비, 또 그러한 공양 공덕으로 법계를 두드려서 모든 중생들의 업식(業識) 또 흐름을 멈추게 하고 건지는 것이 바로 수륙대재의 의미입니다. 그래서 곧 물과 육지에서 고통받는 영가의 업식은 물론 산 자들의 모든 대립과 또 반목과 갈등하는 그러한 전도된 흐름을 멈추게 하고 건지는 것입니다. 그 대자대비의 법력으로 이루어진 법식을 바로 수륙대재라고 합니다. 굉장하지요. 모두 한번 합장해 보십시오. 합장. 올해는 마침 광복 80주년이고 또 그것을 맞이해서 독립운동에 목숨을 바치신 호국 영령과 또 순국 선열들과 또 모든 천리명양 어둡고 밝은 그러한 수륙 중생들께 이고득락하시어 또 왕생극락하시기를 발원하옵니다. 제 말씀을 잘 들으소서. 불성(佛性)은 다 같으니라. 업과 고, 여자와 남자, 크고 작음, 높고 낮음으로 갈리었지만 불성은 다 같은 불성입니다. 어찌 이와 같은 형상에 매이리요. 단지 밝음과 어둠, 물과 육지에 있는 업식으로 고에 빠졌으니 불성에는 수륙고가 없는 까닭에 마음의 모든 산란함을 내려놓으시고, 고와 락, 선과 악의 경계를 벗어나시길 간절히 발원합니다. 불성 있는 모든 자들이여, 부처님과 스승의 힘으로 성불하소서. 또한 이 인연 공덕으로 여기에 참여하신 사부대중과 가족들, 그리고 그들의 조상님과 모든 영가들께서는 법을 청문한 공덕으로 두루 편안하고 모든 장애에서 벗어나는 공덕을 누리십시오. 이 자리를 마련한 진관사 도량에 늘 부처님과 성인들의 가피가 두루 함께 하여지이다. 합장 내리십시오. 인도에서 태어나신 고타마, 바로 싯다르타지요. 우리와 그분은 똑같은 인간이셨습니다. 결코 특별한 능력을 가진 그런 신이 아닙니다. 저희들도 이 강원에서 공부하고 할 때에는 부처님은 굉장히 거룩하신 뒤에 앉아 계시고, 계시는 부처님이시고 우리 인간 우리하고는 굉장히 틀린, 아주 훌륭하신, 우리하고는 비교할 수도 없는 그러한 부처님이시라고 저는 생각했습니다. 공부할 때는 그랬는데, 이제 계율(戒律)을 공부하면서 율장(律藏)을 딱 보는데 부처님이 너무 인간적이신 거예요. 너무 인간적이시고 너무 자비하시고 또 너무 고뇌하시고, 그런 인간적인 면을 제가 보게 됐습니다.저도 계율 그러면 아주 딱딱하고 율만 탁 지키면서 “뭐 그런 건 안 돼, 안 돼” 이런 것만 계율인가 저도 이렇게 생각했어요. 젊었을 때는 그랬는데, 율장을 딱 보면서 하루는 느꼈는데 뭐가 나오느냐면 여러 가지가 많지만, 스님들이 잘못하고 막 이러니까 고뇌도 많이 하시고 야단도 많이 치시고, 나중에 계속 보니까 부처님은 너무 잔소리쟁이가 아니신가 이런 생각이 들 때도 있었거든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이제 하루는 항상 걸어 다니면서 보행을 하시면서 하룻밤에 한 군데서 하룻밤만 자지, 두 밤을 자면 안 된다는 그런 것이 나왔어요. 근데 나중에 사리불 존자가 너무 많이 아팠기 때문에 하룻밤만 자고 가다가 그만 더 큰 병이 나서 굉장히 고생을 했거든요. 그걸 아시고는 “아프고 어려울 때는 하루 한 군데에서 두 밤을 자도 좋다” 이런 계율이 또 생겨납니다. 그러는데 부처님께서 이제 하룻밤, 이제 비가 막 오는데… 어제는 비 왔죠. 근데 오늘은 굉장히 날씨가 좋더라고요. 그래서 참 좋았습니다. 그래서 비가 막 오면서 축축하고 또 대중들 같이 다 옮기면서… 원래 1,250명은 상주 대중이에요. 상주 대중이 부처님을 따라다니는 대중이 1,250명이나 됩니다.그래서 공양을 받아도 한 군데에서만 받을 수가 없으니까 여기서는 누구누구, 여기에서는 어디 어디, 또 배당하는 소임자가 있어요. 그러는데 부처님께서도 이제 어느 곳에 가셔서 하룻밤을 쉬시게 되는데, 비는 막 내리고 또 눅눅하고 안 좋잖아요. 근데 부처님께서는 방에 들어가서 이렇게 이렇게 좋은 진관사 이런 방이라고 생각하시면 안 됩니다. 정말로 안 돼요. 그래서 그런 눅눅한 데 계시지만은 생각하시면서 이렇게 저기 비는 오고 축축한데 아난 존자는, 아난 존자가 누구십니까? 아니 저기 라훌라 존자, 네 부처님의 아들이지. 라훌라 존자 나이도 아주 어립니다. 그래 라훌라 존자가 어린데 우리 라훌라 존자는 어디에 가서 지금 어느 구석에 가서 이 밤을 지내고 있는가 하고 이렇게 관을 해보시는 거예요.이제 라훌라 존자에게 생각을 두시고 관을 턱 하고 계시니까 라훌라 존자는 이렇게 사미 중에 나이가 조금 많고 큰 사미들은 한 17살 이렇게 먹었는데, 라훌라 존자는 11살 12살 이렇게밖에 안 먹었는데 “너는 이 방에 들어올 수 없고 비좁고 하니까 바깥에서 지내라.” 그러니까 라훌라 존자가 어디로 가겠습니까? 화장실 이렇게 집으로 되는, 어름한 우리 옛날 6·25 이후에 시골 화장실 강원도 여러분 가보셨습니까? 그런 데 가면 잘못 밟으면 그 이렇게 통에 그 물통에 잘못 밟으면 나무가 부러져서 빠집니다. 그런 것도 있었어요.그런데 그런 화장실 근처에 비는 막 내리고, 그 집자락에서 물은 뚝뚝 떨어지고 하는데 그 화장실 속에 한쪽에 들어가서 이렇게 이제 밤을 지내고 하려고 있어요. 그런데 부처님께서 딱 관하니까, 라훌라 존자가 그 화장실 근처에 있는데 거기에 뱀이 또 사람 땀 냄새를 맡고 이렇게 기어가지고 라훌라 존자를 물려고 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부처님께서 깜짝 놀래가지고 신통(神通)을 부려서… 신통 부리지 말라고 하셨는데, 그 제자 목련 존자에게 신통 부리지 말라고 하셨습니다. 그러는데 신통을 확 나투어서 순식간에 라훌라 존자에게 가셨어요.가셔가지고 “안에 누구 있느냐?” 하고 물으시니까“라훌라 존자, 네 라훌라입니다.”이러면서 벌벌 떨면서 있으니까 그 뱀이 그냥 다 혀를 날름거리고 그 안으로 들어오려고 해요. 화장실 이렇게 문 사이로… 이렇게 우리나라의 지금 화장실 생각하면 안 된다고 제가 말씀드렸죠. 인도 한번 가보셔요. 지금도 인도 기가 막힙니다.그러니까 화장실에 그냥 뱀이 들어오니까 라훌라를 얼른 들어서 안고 부처님 거처로 오셔가지고 부처님이 방에 데리고 하룻밤을 주무셨어요. 주무시고 그 이튿날 제자들에게 막 꾸짖습니다.“라훌라가 누구더냐? 바로 내 아들이 아니더냐? 그런데 어떻게 나이 어린 사미(沙彌)라고 이렇게 잠잘 곳도 없는데 내치고 그 밤에 비 오는 밤에 이렇게 밖에다 두느냐?”그래서 부득이할 때는 비구(比丘) 스님이지만 사미도 하룻밤 데리고 잘 수 있다 그러한 법이 만들어졌습니다. 잘 곳이 없을 때는 사미도 하룻밤은 데리고 자거라 이런 법이 만들어졌다 이 말이죠. 제가 그걸 보면서 아주 정말 부처님이 너무 마음에 들었습니다. ‘부처님이 이렇게 인간적이시구나.’ 그리고 우리가 대중들하고 살면서 속이 굉장히 상할 때가 있죠. 속상하고 굉장히 안 좋을 때, ‘부처님은 어떻게 이럴 때 무슨 생각을 하시고 어떤 생각을 하시고 이렇게 하셨을까’ 제가 이제 그런 생각이 들 때가 있었어요.그래서 여러분들께서 부처님에게 지극 정성, 정말 내 마음을 다 오롯이 하고 공부하고 잘하면은 이 세상에 안 되는 게 한 가지도 없습니다. 그리고 기도도 금방 성취한다고 하는 게 아니에요. 지극정성하면 저절로 다 천천히 이루어집니다. 그게 명현가피(冥顯加被)라 그러거든요. 그래서 무슨 금방 하늘에서 돈이 뚝 떨어지길 바라는 거 그런 것이 아니에요. 그래서 여러분들이 진일한 마음으로 오롯한 마음으로 똑바르게 사시면은 다 이루어집니다. 어쨌든 제가 이거는 원래 하려고 안 했는데 저절로 나왔습니다. 그래서 이제 여러분들은 오늘 여기에 있으시면서 그 모습 그대로 제가 이제 부처님이라고 말하고 싶어요. 근데 그 많은 사람들에게 “여러분은 무엇 때문에 살고 계십니까? 삽니까?” 하고 물으면은 대부분 사람들은 “나는 돈 벌기 위해서 살지요.” 또 “명예를 위해서, 또 자녀를 위해서, 또 아내를 위해서, 남편을 위해서 산다.” 이렇게 대답하는 사람도 많은데 각자가 다 자기 좋아하는 것을 골라서 “나는 누구를 무엇을 위해서 산다.”고 대답을 합니다.그렇지만 그것은 우리가 살고 있는 삶의 한 방편이지요. 방편(方便)이지 무슨 수단이나 그런 것이지 목적은 될 수 없거든요. 그러니까 하지만 결국 다 알고 본다면은 누구를 위해서 산다 하지만은 인생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 결국 사는 겁니다. 그래서 자녀를 사랑하거나 무슨 명예를 존중한다거나 또 철학을 좋아하고 예술을 즐기고 그 모든 것들이 결국은 자기 자신을 복되게 하고 또 지혜롭게 하고 행복하게 하기 위해서 사는 것입니다.그렇지만 그 자기의 근본인 본연의 자세를 깨닫지 못하고 돈이나 명예나 사랑이나 이런 어떤 것이든 거기에 노예가 되면 안 되지요. 그래서 결코 근원적인 나의 행복은 우리에게 가져다줄 수 없기 때문에 왜냐, 가슴 한 구석이 어디엔가는 여전히 허전하고 또 외롭고 때때로 두려운 마음이 남아 있기 때문입니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근본 진리에서 근원에서 또 본질에서 벗어나 있기에 그런 것입니다.그러면은 불교에서는 인생의 목적이 무엇인가, 무엇이라고 합니까? 또 어떻게 살려고 하는가.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깨닫고 중생을 구하는 것이 불교의 근본 목적입니다. 아주 한마디로 쉽게, 상구보리(上求菩提)하고 하화중생(下化衆生)하라 이런 말씀이죠. 그래서 상구보리 하화중생, 이 바퀴 두 바퀴를 굴려가면서 우리가 열반(涅槃), 곧 깨달음을 향해서 걸어갑니다. 그것이 바로 불교에서 바라보는 인생의 목적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상구보리 하화중생은 어떻게 살아야 되는가, 결국은 불교는 배우는 데만 의미가 있는 게 아니죠. 우리가 아무리 경전을 잘 본다 하더라도 실천을 하지 않는다면 아무 이익이 없다고 봅니다. 그래서 이 법회에서도 여러분들께서 법문을 듣고 집에 돌아가셔서 다 잊어버리고 막 화를 내시면서 부부 싸움을 한다든지 아이들한테 너무 지나치게 꾸짖는다든지 그러면 별로 공덕이 없어져 버려요.그래서 내 안에 잠자고 있는 부처의 싹이 바로 싹이 트고 어둠이 서서히 다 물러가면서 환한 마음으로 살아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 자신이 무량광(無量光)·무량수(無量壽) 아미타불(阿彌陀佛) 부처로 여기 이곳에서 살아가게 되는 것입니다. 제가 주지 스님 방에 아까 들렸는데 “여러분이 바로 부처님이십니다.” 그 말귀가 딱 마음에 와닿거든요. 여러분의 순수한 본연의 마음은 특별한 게 없어요. 여러분이나 나나 누구나 본래의 마음은 아무런 특별한 감정도 없고 기쁨도 없고 나쁨도 없습니다. 그 순수한 마음이 바로 부처다 이 말이거든요. 그래서 이제 그렇게 본다면은 바로 이 사바세계(娑婆世界)가 그대로 불국토(佛國土)가 되고 극락세계(極樂世界)가 되는 것입니다. 극락이라는 것은 꼭 저 멀리 있는 서방정토(西方淨土), 거기에만 있고 여기에서 없는 것이 아니죠. 내 마음이 편안하고 모든 그러한 고뇌를 여이면은 그것이 바로 극락이기 때문에 절에 가면 스님들이 항상 “웃어라, 꽃처럼 살아보라.” 이렇게 말을 하시지요. 그러면은 여러분들이 법문을 듣고 “나도 남편이 아무리 나에게 성질을 부리고 좀 안 좋게 하더라도 나도 웃자, 한번 꽃처럼 내가 웃어봐야지.” 하면서 선한 마음으로 자꾸 노력을 합니다. 그러면은 남편께서 “뭐 저 사람이 잘못 먹었나, 왜 저렇게 저렇게 웃을까.” 그래도 나는 꽃이야, 이렇게 생각하면서 절에 가니까 꽃이다, 부처다 하니까 그런 마음으로 환하게 웃고 또 물러서지 않는 마음으로 이렇게 노력하고 또 노력하셔야 되는데, 왜 원래 나는 부처니까 그게 바로 불자의 태도라 이 말이죠. 그래서 어느 날 이제 절에 오니까 우리가 진짜 빛이요 꽃이요 부처로서 본래 모습대로 살고 있는 자신을 발견하게 됩니다. 바로 그것이 무엇이냐, 여러분들이 성공한 인생이라고 할 수 있죠. 그러니까 아무리 돈 많이 번다고 하고 아무리 좋은 넓은 아파트에 산다 해도 내 마음이 불편하면은 아무 이득이 없다 이 말이죠. 그래서 본래 내 모습대로 부처로 사는 것, 그것이 진정한 우리 장부의 모습이고 본연의 모습이라고 하는데 중국의 당나라 시대에 그 유명한 시인인 저기 백거이(白居易), 백낙천(白樂天)이라는 분이 계셨어요. 여러분도 백거이 백낙천 하면 다 아시잖아요. 너무너무 좋아서 달 건지다가 물에 빠져버리셨잖아요. 그 백낙천이라는 시인이 그 시가 참 좋은 시가 많습니다.그래서 이제 그분이 항주·소주에 아주 자사, 요즘 같으면 사또예요. 사또가 되셔가지고 갔는데 이 근처에 유명한 스님이 안 계시냐 하니까 “여기 복림사라는 곳이 있는데 유명한 스님이신 조과(鳥窠)라는 스님이 계십니다. 그 조과라는 스님은 작소도림선사(鵲巢道林禪師)예요. 그래서 얼마나 소나무 위에 올라가서 이렇게 공부를 하고 계시는데, 움직이지 않고 이 화두만 들고 딱 공부하시니까 새가 머리가 길어도 긴 줄 모르고 계시니까 그 새가 소나무인 줄 알고 거기에다 새 집을 지었대요. 그래서 작소도림선사라고 부르거든요. 근데 그분이 아주 유명하십니다.”그렇게 말을 하니까 “그럼 거기에 한번 가자, 가가지고 스님을 이제 뵙자.” 그래서 딱 가가지고 이제 여러 일화가 많지만은 다 말하면은 제가 법문하는 게 30분이라고 하시더라고요. 많이 할 수는 없습니다. 그래서 가셔서 딱 절을 하시면서 “어떤 것이 불법입니까? 불법이 무엇입니까?” 하고 물었어요. 그러니까 “제악막작 중선봉행 자정기의 시제불교(諸惡莫作 衆善奉行 自淨其意 是諸佛敎)”라 이랬어요.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은 나쁜 짓 하지 말고 착한 일만 하고 그 마음을 깨끗하게 하면은 그것이 바로 불교다 이 말입니다. 제악막작, 악을 짓지 말고, 이 말이거든요. 착한 일만 하고 마음을 깨끗이 하라. 그러니까 막 백낙천 자사가 막 하하거리고 웃었어요. 웃으면서 “스님, 그거는 세 살 먹은 삼척동자도 다 아는 일 아닙니까? 누구든지 착한 일하고 나쁜 마음 쓰지 말라고 하잖아요. 그건 다 아는 건데 뭐 그것이 불법이라고 합니까?” 그렇게 대답을 했어요.그렇게 물었습니다. 그러니까 그 작소도림선사께서 “무슨 소리냐. 3살 먹은 삼척동자도 다 알지만 80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 행하기는 어렵다.” 이 말이죠. 그래서 지금 얼마나 시끄럽습니까? 우리 승가와 뭐 또 다 마음 잘못 쓴 사람 많은 데는 정치도 마찬가지고 시끌시끌하죠. 그래서 시끄러운 겁니다. 그래서 그 80 먹은 노인도 실천하기는 어렵다, 이렇게 조과 선사께서 답하셨습니다.그래서 이 불법(佛法)은 결국은 행하는 데에서, 실천하는 데에서 지혜가 생기고 힘이 생깁니다. 그러나 불교는 행하는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진리를 알고 실천해야만 내 인생이 정립이 되고 또 우주관도 확립이 됩니다. 그래서 나는 왜 이렇게 여기 있고, 또 여기 있고, 이 세상에 태어나서 무엇을 명확하게 내가 잘 해야 할 것인가, 그런 분들을 여러분들이 확실하게 알고 항상 어느 곳에 처해도 자기 마음에 준비가 필요합니다. 근데 그렇게 하려고 하면 그 준비가 무엇인가, 결국은 나를 버리는 일입니다. 내 자신을 나를 버리지 않으면은요, 정말 일들이 복잡합니다. 여러분들께서 여러분 세속에 사시는 일들도 많이 복잡하지만은 저희들 절에서도 그래요. 이렇게 많은 스님들이 지금 여기 진관사 대중들이 다 사는데 마음을 잘 쓰면은 오늘같이 얼마나 환희스럽습니까? 아까 봉청 막 하시고 했잖아요. 염불, 그 환희스러운 마음에 막 제 마음이 이렇게 막 뜨면서 울렁울렁하더라고요. 그러는데 그런 거 하면서도 만약 밥을 먹고 지금 나가서 공양을 하고 하는데 누가 “스님 이것 좀 주세요” 이러면 괜찮은데, 막 바쁘고 힘들다고 “스님 이것 좀 갖고 와요” 이러면 금방 화가 푹 납니다. 납니까, 안 납니까? 아니 좋게 불러도 되는데 왜 나한테 빽 하는가, 그냥 화가 싹 올라오는 거, 그 아까 좋았던 환희로운 마음 싹 없어져버려요. 왜? 나를 버리지 않기 때문에. 그러니까 그 말 들어도 조금 기분이 나쁘죠. 내가 있으니까, 내라는 생각이 딱 있잖아요. 저도 그렇더라고요. 기분이 나쁜데 딱 참자, 조금만 참으면은 상대도 그렇게 해줘도 금방 또 화가 안 나고 누그러지니까 조금만 괜찮더라고요. 근데 참지 않고 빽쭉하면서 “왜 소리 질러” 이러려고 막 싸우게 되는 거예요.그래서 가장 중요한 게 뭐냐 하면은 결국은 무아(無我) 무아죠. 우리가 나를 내세우고 있으면은 바람이 확 불어와서 나에게 탁 부딪힙니다. 그래서 나는 바람 맞은 사람이 돼요. 그러는데 내가 없다면은 그냥 허공 따라 흘러가고 바람소리 따라 흘러가고 하니까 흥겨운 노랫소리가 절로 나오게 되죠. 그래서 불교에서는 무아를 강조합니다. 무아, 무아. 나를 없애라, 내가 없다, 나라고 고집할 것이 없다 이 말이죠. “왜 내가 없어? 나는 김 아무개 분명히 내가 있는데 왜 없지?” 이렇게 묻는다면은 그건 당연하죠. 그런데 이 무아라는 것은 결국은 고정된 실체가 없어요. 내가 없다라는 뜻이기 때문에 모든 존재는 연기(緣起)된 존재입니다. 그래서 일시적으로 그렇게 이름만 붙였을 뿐이지 그게 영원하지는 절대 않거든요. 변하지 않는 것은 없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보살님들도 “나는 누구이고, 나는 누구의 아내이고, 나는 누구의 딸이고, 누구의 제자이고” 뭐 하다 보면 자기 조건과 관계 속에서 계속 변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고정된 실체는 없는데, 이것은 바로 내가 아니라, 나라 하는 나의 것이 아니다. 나의 나는 결국은 자아가 없다. 이 모든 것들을 내가 아니면은 도대체 어떤 것을 나라고 할 수 있는가. 그래서 옛 스승들께서 이제 부처님과 마찬가지로, 부처님 제자가 다 우리 스승이지요. 스승들께서 “나는 누구인가?” 이것을 찾기 위해서 결국은 요즘은 명상이라고 많이 합니다. 근데 우리는 화두(話頭)라 그래요. 저희들은 화두 시대에 살아서 “내가 누구인가” 그걸 이제 공부를 하는 거죠. 그래서 “부모미생전 본래면목(父母未生前 本來面目)은 무엇이냐?” 이렇게 물어요. 부모님이 나를 낳기 전에 나의 본래 면목은 무엇인가, 부모에게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나의 본래 면목, 나의 진짜 모습은 나의 나라는 사람은 누구였던가, 무엇인가. 그거를 참 정말 고민되는 일입니다. 계속 이 무엇인가, 이것을 부여잡고 궁구하고 찾고 또 궁구합니다.그래서 불자라면 적어도 “오늘은 무엇을 입을까, 어떤 주식에 내가 투자를 해야 되나” 이런 것보다도 결국은 단 10분만, 단 5분만이라도 마음을 비우고 차분히 앉아서 “나는 누구인가, 이 누구인가” 이렇게 찾아야 됩니다. 이와 관련돼서 서산대사(西山大師)의 선가귀감(禪家龜鑑)의 첫 구절을 보면은 “유일물어차(有一物於此)하니, 종본이래(從本以來)로 소소영령(昭昭靈靈)하야부증생부증멸(不曾生不曾滅) 명부득상부득(名不得狀不得)이라.” 이랬거든요. 그게 무슨 말씀이냐면은, 여기에 한 물건, 일물이라 그러죠. 한 물건이 있으니 본래부터 밝고 밝고 신령스러워서 나지도 않고 멸하지도 않으며 이름도 붙일 수 없고 모양으로 나타낼 수도 없다. 이 글이요, 굉장히 쉬운 것 같은데 굉장히 아주 기막힌 글입니다. 나에게 한 물건이 있다. 이 물건, 그 물건이 바로 내 마음이거든요. 한 물건, 그 일물을 지금 얘기하는데, 그것은 우리 모두가, 여러분들께서 다 갖고 있는 아주 신령스럽고 신령스러운 존재입니다. 그거를 바로 일물(一物)이라고 이렇게 말씀을 하셨어요. 그래서 그 근본 본원에서 딱 살펴보면은 나지도 않고 죽지도 않고 또 생사(生死)는 그저 일시적인 나의 모양일 뿐이지 정말 하나로 이름 지어서 말할 수도 없고 어떤 모양으로 나타낼 수도 없다. 우리 모두는 근본 자리에서 그만큼 아주 소소영령(昭昭靈靈)한 그놈이다. 그게 한 물건(一物)이라고 그랬어요. 그래서 이 한 물건이 아까 제가 꽥 부르면 아까 염불하고 이럴 때는 굉장히 좋은 마음이었는데 누가 빽 부르면 소리 빽 내고 화가 나잖아요. 그것도 일물(一物)입니다.그리고 이제 가만히 무심하게 앉아 있는데 갑자기 누가 탁 때리면 깜짝 놀라고 이렇게 하거든요. 그것도 일물(一物)입니다. 또 어떤 스님이 공부를 굉장히 열심히 하셨어요. 공부를 열심히 탁 하셨는데, 갑자기 문 참 좋잖아요. 그문의 손을 이렇게 대고 바람이 살살 불어왔는데 “이놈은 무엇인가, 도대체 내가 누구인가” 딱 공부를 했는데 갑자기 문이 착 바람이 부니까 닫히면서 내 손가락을 탁 때린 거예요. 그러니까 손가락이 얼마나 아픕니까? 그냥 “아이고 아야” 이 정도만 했으면 좋았는데, 아야 하면서 자기도 모르게 화가 벌컥 났어요. 그 화를 내니까 그 자리에서 금방 뱀으로 변해가지고 탁 떨어졌다 그래요. 그러니까 얼마큼 우리가 한 번 성을 내고 한 번 마음을 잘못 쓰느냐가 굉장히 중요하기 때문에, 그 일물(一物)이 굉장히 아까 참 좋잖아요. 소소영령하고 내가 아는 놈이니까.나는 정말 어린애들 보면은 굉장히 좋은 마음이 들더라고요. 어린애가요, 기차를 딱 탔는데 엄마 이렇게 안겨가지고 뒤를 딱 보고 있는 거예요. 엄마는 못 보죠. 아기를 안고 있으니까. 근데 아기는 뒤로, 우리 스님네가 앉아 있으니까 너무 특이합니다. 그래가지고 들여다보고 우리를 쳐다봐요. 내가 손을 이렇게 이렇게 했더니 또 관심이 가는 거예요. 그래서 좋아가지고 또 이렇게 딱 숨었다가 다시 고개를 내면서 또 이렇게 쳐다봅니다. 그 아는 그 마음, 그래 좋아가지고 우리가 이렇게 하고 하니까 좋아가지고 생긋생긋 웃고. 그 마음이 굉장히 정말 순수하고 아는 그 마음이죠.그래서 근데 그 어린애만 그런 게 아니라 우리가 다 갖고 있죠. 그래서 그 마음을 제가 찾는 것이 우리의 불교의 본 목적이다 이거죠. 그래서 이 마음이라는 것은 언어로 우리의 마음을 어떻게 표현할 수도 없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누구인가” 하고 굉장히 궁구를 하셔야 되겠죠. 그래서 지금까지 우리의 스승이신 고타마 싯타르타 석가모니 부처님께서 깨달으신 그러한 내용이 결국은 “나는 누구인가”를 마음으로 깨달으시면서, 다 그 중생의 마음이 결국은 이 마음을 내가 잘 쓰고 곧게 잘 쓰면은 정말 이 마음이 깨끗하고 내 본래의 마음이 이렇게 소소영령(昭昭靈靈)하고 정말 똑똑한 이러한 내 마음 자체구나, 이걸 깨달음을 얻으셨어요.그래서 그때부터 이제 조사(祖師) 스님들께서도 계속 그걸 받아가지고 이어오시면서 공부하고 공부하고 해서 깨달으신 내용이 결국은 “나는 환한 우리 자신이 바로 부처요 환한 광명이다”라는 사실을 확연히 알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 역대 조사님들께서도 열심히 공부하셔서 깨달으신 내용도 이런 거죠. 그래서 인생을 아주 당당하고 또 아주 거침없게, 여러분들이 밝게 살아라. 그래서 행복하고 행복하라. 이것이 바로 스승에서 우리에게 또 간곡하게 전해주신 말씀인데, 그 석가모니 부처님의 가르침이 중국으로부터 전해오고 또 우리나라에 들어와서 오늘 여기까지 전해진 데에는 많은 스승들께서 그 의지적인 윤리를 지니고 또 대승적인 그러한 선행(善行)과 계율(戒律)로써 악을 그치고 선을 닦는 대로 지향하게 하셨습니다.그래서 피나는 노력이, 우리 선배 스님들 아주 훌륭한 스승님들께서 피나는 그러한 노력이 있었기에 오늘날 불교가 이렇게 꽃을 피우고 진관사에서 아주 장엄스럽게, 이렇게 화려하게 그러면서도 정중하고 엄하게 잘 꽃을 피우고, 여러분들이 많은 기쁜 마음으로 오늘 여기에 오셨습니다. 이런 것들이 하루 이틀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기 때문에, 더 스승님들께 감사하다 이런 얘기죠. 이런 것에 대한 고마움을 우리 불자님들은 잊지 마시고, 그 고마움으로 오늘 하루하루를 아주 당당하게 사시고 매일매일 이 순간을 소중하게 보내셔야 됩니다. 결코 어둠의 무기력이라든지 또 우울이 우리를 점령해서 내 마음을 옭아매게 그렇게 놓아두어서는 안 된다 이 말이죠. 바로 여러분께서는 환한 광명, 소소히 영령한 햇살 같은 그러한 존재입니다. 여러분이 바로 부처님이시다, 이 말이죠. 그동안 법문 들으시느라고 수고 많으셨습니다. 모두 다 행복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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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7일 수륙재 입재 혜국큰스님 법문
2025-12-06
지심발원 대자대비이신 불보살이 이 진관사에 내려오셔서 오늘 청해 모이신 모든 수륙재 운집 영가와 광복 80주년을 맞아 이 나라 광복을 위해 생명을 초개처럼 버린 모든 독립군 영령들과 이 나라를 위하여 목숨 바친 호국영령들을 위하여 증명하여 주옵소서. 진관사에서 해마다 수륙재를 지내는 이 공덕으로 금년에는 독립군 영령들과 호국영령들 부디부디 모든 의변(依邊)은 소멸하고 보리심은 분발하여 왕생극락하여지다. 나무아미타불. 해마다 수륙재를 위해 가지고 특히나 해마다, 올해는 우리나라 광복을 위해 가지고 온 가정과 자기 생명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독립을 위해서 평생 살다가 돌아가신 우리 독립군, 이름 없이 돌아가신 모든 호국영령들을 이렇게 모셔놓고 수륙재를 지내드린다는 거는 여러분들이 알고 있는 것보다 돌아가시는 영령들에게는 그렇게 고마울 수가 없을 겁니다. 그러한 모든 영령들을 위해서 해마다 이러한 수륙재 법회를 봉행하는 회주 스님의 큰 원력과 주지 스님의 원력, 그리고 대중 스님들이 그러한 마음에 정말 마음으로부터 고마움을 드립니다. 신도님들도 사실은 이것은 나라에서 해야 할 일이고 온 국민이 해야 할 일인데 그 어른들이 없었다면 이 나라 광복을 위해서 이 나라 해방을 위해서 그러한 독립 투사들이 없었다면 지금 우리나라가 있을 수가 없습니다. 지금 대한민국은 전 세계 어디 내놔도 부끄러움 없는 나라가 된 것은, 그리고 우리가 지금만큼 잘 살 수 있고 이런 나라를 우리가 살 수 있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은 그 독립군 한 분 한 분 그분들 발자국 때문이었고 그분들 그 피나는 고생 때문이었습니다. 우리가 그분들이 고마움을 모르고 그분들의 삶을 돌아보지 못하고 사는 삶이 저 자신부터 어쩌면 참으로 부끄러운 일인데 그러한 모든 분들을 대신해서 이 나라와 백성들을 대신해서 해마다 이러한 수륙재를 모시고 이런 정성을 다해 주시는 진관사 대중들께 정말 다시 한 번 고마움을 드리면서 그러면 오늘 수륙재에 오신 모든 영령들이요 이러한 정성이 한낱 헛되지 않도록 여기 모인 모든 신도들이 정성을 다하여 호국영령들을 청해 모시고 이렇게 수륙재를 모시는 이 정성이 헛되지 않기 위해서 오늘은 나하고 같이 회주 스님, 주지 스님, 모든 스님들을 다 같이 원력을 모아서 호국 영령 독립군 영령들께 큰 스승께 한번 모시고 가고 싶은 생각입니다. 그 스승은 벽을 허물어버렸기 때문에 한 허공이 된 분입니다. 한 허공이 된 분. 여러분들은 그분이 바로 이 자리에 있다고만 하면은 믿지를 않습니다. 안 믿어요? 하나 물어봅시다. 지금 진관사 앞에 맑은 공기 맑은 바람이 이렇게 지나가는데 바람이 보입니까? 안 보이죠. 산소 공기, 수소 공기 진관사는 워낙 산세도 좋지만 스님들이 워낙 잘 사시는 그 공기가 더해서 공기가 워낙 좋은데 그 공기가 보입니까? 그러면 공기도 볼 줄 모르고 바람이 지나가는 것도 볼 줄 모르는 눈을 너무 믿지 말자는 얘기야. 그러면 그 스승이 벽을 허물어버린 분은 공성(空性) 연기(緣起)라 그러한 깨달은 분에게는 허공이 없습니다. 허공이 보이지 않는다는 얘기예요. 즉 온통 청정이기 때문에 너와 내가 없는 불성(佛性)으로 있기 때문에 이 자리에 있어서 그분을 떠억 찾아뵙고 가서 그런데 우리가 떠억 호국 영령들이랑 여러분들을 모시고 가봤더니 다른 스님께서 먼저 가서 우리를 대신해서 질문을 한다 이 말입니다. 대주(혜해)스님께 호국영령들이여 오늘 호국영령들 영전에 대주혜해 스님이라는 큰 스님을 당신들 스승으로 모셔드리오니 정말 기뻐하십시오. 가서 뭐라고 물었느냐 하면은 어떻게 하면 이 나라를 위해서 싸우다가 때로는 마음에 상처를 받고 때로는 속상한 일이 있고 마음에 응어리진 게 많고 많은데 그거를 다 버려두고 대열반(大涅槃). 어떻게 하면 왕생극락하여 모든 공덕이 나라와 둘이 아닌 걸 알 수 있습니까? 즉 어떻게 하면 대열반을 얻을 수 있습니까? 이렇게 물었다 이 말이에요. 물으니깐 호국 영령들이여 내가 출가(出家)를 해가지고 살아보면 어릴 때는 어릴 때는 13살 때 내가 절에 들어왔으니까 66년 전이니까 뭘 알겠어. 그때 장난치다가 노상 노스님들한테 두드려 맞기만 하니까 노스님 미운 마음 저 날 때린 스님 두고 보자. 이제 몇십 년 후에 내가 가만히 안 둘 거라는데. 지금 계셨으면 정말 잘해드리고 싶어. 얼마나 큰 마음을 가지고 때려줬는지 그 인제야 뒤늦게 철이 든단 말이야. 뒤늦게. 사람들이 불행한 거는 여러분들 자식들도 뒤늦게 철이 들어. 지금은 그냥 베풀기만 해 놔두면 뒤늦게 철이 들어서 부모의 고마움을 알게 되는데 마찬가지로 스님을, 스승을 찾아가 가지고 “어떻게 하면 왕생극락(往生極樂)을 할 수 있습니까? 즉 대열반(大涅槃)을 얻을 수 있습니까?” 하고 물으니까 스승이 하는 말이 “호국영령들이여, 생사업(生死業)을 짓지 않으면 되느니라” 이랬다 이 말이오. 생사업을 짓지 않으면 된다. 그러면 오늘 진관사에서 수륙재에 동참한 모든 영가들과 선망 부모와 여러분들 한번 생각해 봅시다. 우리는 생사업을 짓고 있는가, 열반(涅槃)의 길을 가고 있는가? 열반은 업이 아니기 때문에 열반의 도를 걷고 있는가, 생사업을 짓고 있는가 한 번 돌아보십시다. 생사업이라는 게 뭐예요? 생사업이라는 게. 나고 죽고 나고 죽고 하는 그 길로 가는 걸 생사업이라고 하는데 여러분들은 모르지만은 해마다 요 스님들이 이게 쉬운 일이 아니거든요. 저는 하안거, 동안거만 해봐도 끝나면 또 바로 준비해서 또 해야 되는데, 이 수륙재(水陸齋)라는 게 참 참으로 소중하고 소중하고 모든 조상 모셔놓고 요만이라도 모자람이 없어야 잘못됨이 없어야 되기 때문에 정성 정성 다해서 법문만이 아니고 염불부터, 대령부터, 목욕부터 아주 신도들 대하는 것까지 하는 게 쉬운 일 아니에요. 진관사 신도님들은 참 진관사 스님들 고마운 줄 아셔야 돼. 저분들 없으면 이런 수륙재 이게 이렇게 정성들여 못 해봐요. 법사 스님 하나 청하는 것만 보더라도 참으로 모시기 어려운 분들을 모셔오니까 그분들 덕에 여러분들은 가만히 앉아서 이놈 법문도 듣고 저놈 법문도 듣고 참 좋은 세상이요. 옛날에는 우리가 찾아갔었거든. 그러면 생사업이라고 하는 게 무엇인가를 알면 오늘 호국 영령들이, 독립군들이 아, 나도 자칫 그 길로 가고 있었었구나. 생사업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분들이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경계를 생사업이라고 합니다. 생사업이다. 그럼 아까 말씀드렸듯이 여러분들 눈으로는 바람도 안 보이죠. 그렇죠? 대답하기 싫으면 하지 마라. 나 혼자 아주 잘 죽거려. 내가 본래 잘 죽거리는 사람. 혼자 잘 죽거려. 토굴에 오래 살면 자기 혼자 얘기를 잘하거든. 저 태백산 도솔암 같은 데 있어 보면 사방 몇 십 년에 아무도 없는 데서 생식하고 그냥 있으면 혼자 그냥 중얼중얼 혼자 잘 죽거려. 매미가 울어가면 너는 왜 우니? 산에 산짐승이 울면 왜 뭐가 불만이야? 혼자 잘 죽거려서 습관이 돼서 지금도 대답을 하거나 말거나 잘 죽거리니까 대답하고 싶지 않으면 하지 마라. 그러면 바람도 안 보이고 지금 우리가 앉아 있는 이 성스러운 진관사가 태양 둘레를 도느라고 우리가 앉아 있는 법당이 전체적으로 돌고 돌고 돌고 있죠? 그러면 돌고 있다는 말은 뭐예요? 변하고 있다는 말이고 그러면 빛의 속도로 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데 우리는 단 한 번도 태양을 본 일이 없습니다. 저 태양에서 햇빛이 출발해서 우리 지구에까지 오는데 얼마나 걸려요? 8분 걸리죠? 확실히 진관사 신도들 똑똑하네. 팔 분 걸려 팔 분. 그럼 우리가 보는. 지그들 좋다니까 박수 칠라고 하는 거 봐봐 또. 8분 걸린단 말이야. 그러면 우리가 보는 태양은 몇 분 전에 태양을 보는 거예요? 8분 전에 것만 보지 지금 당장 살아 있는 태양은 평생 못 봅니다. 우리가 밤에 보는 참 많고 많은 별자리들이 1억 년 전에 폭파돼서 없어져버린 별인데, 1억 년 동안 빛이 우리한테 오고 있으니 없는 별을 1억 년 동안은 있는 걸로 보고 있고, 새로 생긴 별이 수천 수만인데 그 빛이 우리한테 오는 데 천 년 걸리면 천 년 동안은 우리는 그 별이 안 보여요. 아, 내 눈을 믿으면 안 되겠구나. 낮에도 별이 수없이 많은 별이 있지만은 태양에 가려서 하나도 안 보이니 내 눈을 너무 믿지 말자. 그럼 이 집 자체가 전체가 태양 둘레를 돌아가는 그 엄청난 벼락 치는 소리가 들립니까? 안 들립니까? 안 들려요. 안 들려요. 그리고 오늘 저녁 옛날 나는 어릴 때 노스님들한테, 노스님들 모시고 살면 어린 것들을 두고 늘 그게 교육이었어. “혜국아”, “예, 스님”, “오늘이 처서다” 처서가 뭔지 아나 꼬맹이가. 14살짜리가 뭘 알아? “예” 하면은 “처서란 말이다, 귀뚜라미가 가을을 업고 오는 날이다” 이번 처서는 그래서 귀뚜라미한테 물어봤어. “왜 이리 처서가, 귀뚜라미 너희들이 가을 안 업고 왔냐?” 하니까 “요즘 가을 말 안 들어요.” “왜 그리 말을 안 듣는데?” 하니까 “요즘 사람들 똑 닮았어요.” 사람들이 말 안 들으니 가을도 안 업혀요. 그러나 어떤 더위도 가을을 이겨내는 더위는 없습니다. 벌써 아침저녁 서늘하거든요. 가을을 이겨낸 더위는 없다, 이 말이에요. 어떤 고난과 어떤 억울함과 어떤 속상한 것도 내 마음 불성(佛性)에는 이겨낼 수가 없다는 얘기야. 그러면 여러분들이 금방 대답하듯이, 눈으로 보는 것도 정확하질 못하고 귀로 듣는 것도 정확하지 못하면은 아, 내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걸 가지고 평생 판단해 왔는데 이거는 아니다, 이걸 오늘 놓아버리자. 그 생각을 놓아버리면, 여러분들이 그 생각을 방하착하면, 호국영령들과 선망부모와 모든 조상들도 와, 우리 자손들이 마음에 콱 맺혔던 마음의 상처를 놓아버리니 정말 보기 좋다, 우리도 놓아버리자. 내가 천도 되면 조상이 천도 되고, 조상이 천도가 되면 내가 천도가 되니 나와 조상은 DNA가 하나이기 까닭이다. 그러면 그 보고 듣고 하는 생사업(生死業)을 짓지 않고 열반(涅槃)의 길을 가려면 어떻게 해야 되느냐. 늘 드리는 말이지만은, 꼭 같은 지옥에 있다 하더라도 만약 오늘 저 많고 많은 영가들 중에 너무 한이 맺혀서 지옥에 있는 영가라면은, 그 영가가 만약 다른 종교를 믿는 영가라면 그 지옥에서 얼마 동안 있어야 돼? 얼마나? 얼마나 있어야 되냐고. 조금 덜 똑똑하네, 아주 똑똑한 줄 알았더니. 영원히, 영원히. 다른 종교에서는 영원히 떨어져 있어야 돼, 다시는 나올 생각 말아야 돼. 그런데 불교를 가까이했던 그런 영가들은, 불교의 지옥은 지옥에 가도 내 불성(佛性)은 적어지지 않는다. 조금도 나빠지지 않는다. 내 생각만 바꾸면 그날 나올 수 있다. 불교의 지옥은 똑같은 지옥인데 교육장이었다, 교육장. 교육만 받으면 바로 그냥 나온다, 이 말이야. 저 지금 염불 잘하는 스님들이 그 정성으로 염불을 할 때, 그 전부 교육시키는 말이거든. 영원 담적, 영원히 적어지지도 않고 많아지지도 않고, 지옥을 갔던 사람이 됐든 어디를 갔든 니 마음은 그대로다. 니 마음, 생각만 놓아버리면 바로 그 자리다. 그럼 교육장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열반(涅槃)의 도를 가려고 그러면은, 다른 종교에서는 죄를 다 없애두고 그 길을 새로 저만큼 걸어야 거기가 되는 줄 아는데, 불교에서 말하는 열반(涅槃)의 도, 왕생(往生) 가는 길은 ‘미운 마음, 원망하는 마음, 보고 듣는 그것만 놔버려라. 그거 믿지 말라. 그거 놔버리면 한 발자국 움직이지 않았고 그 자리가 바로 그 자리다.’ 그건 뭐와 같으냐면은, 서울에서 흘러가는 강물이 무슨 강물이야? 한강이죠. 낙동강, 경상도에서는 낙동강, 저 전라도에서는 섬진강, 느려터진 충청도에서는 백마강, 금강. 그러면 바다에 가서 낙동강이 섬진강 보고 “야, 나 너하고 안 놀아.” 섬진강이 낙동강 보고 “야, 나도 너하고 안 놀아.” 그렇게 서로 티격태격합니까? 그냥 한 바다가 돼가지고 파도가 철썩철썩할 때는, 청마 유치환 선생의 ‘파도’라는 시를 보면, “파도야 난 어쩌란 말이냐, 파도야 난 어쩌란 말이냐, 님은 뭍같이 꿈쩍 않는데 파도야 난 어쩌란 말이냐.” 아무 싸움도 없이 한 바닷물이 됩니까, 서로 싸웁니까? 그러면 여러분들이 불성(佛性)이라는 바다에서 볼 때는, 싸우는 것이 보고 듣는 생사의 업에서만 있는 것이지, 열반(涅槃)의 도, 극락(極樂)의 도에는 없다는 거예요. 없어. 그걸 새로 만들어서 가는 길이라면은 엄청 힘든 일인데, 부처님을 믿는 여러분들의 행복은, 내가 지금도 아까 와서 딱 절을 하면서 “다음 생, 다음 생, 몇 백 생 태어나더라도 스님의 길이 아니면 결코 가지 않겠습니다. 부처님 꼭 지켜봐 주십시오.” 66년 동안 스님 생활하다 보면요, 다른 길 같으면 “아이고, 짜증 나, 아이고, 타성에 젖어” 하면 할수록 부처님의 고마움이 뭐냐 하면은, 부처님은 “눈 온 들길을 걷는 나그네요.” 눈이 하얗게 온 들길을 걸어보면 걷는 대로 발자국이 찍히죠, 그죠? 삐딱삐딱 찍힌 사람은 삐딱삐딱하고 반듯한 사람은 반듯반듯하는데, 그러면 빼딱빼딱 지킨 사람이 이렇게 돌아보면 자기 발자국이 형편없으면 뒤로 돌아가서 발자국을 새로 바꿀 수가 있습니까? 없습니까? 없어요. 어제로 돌아갈 수가 없어요. 우리는 고등학교 시절로 돌아갈 수 없어요. 딱 한 번 1초 지나면 1초 전으로 못 돌아가요. 그래서 바로 현존(現存) 일념(一念)이다. 그걸 법정 스님은 일기일회(一期一會)라는 말을 많이 썼죠. 물론 경(經)에 있는 말이지만. 한 번 보고 한 번 볼 때 이미 끝난 일이다. 다시는 못 돌아간다. 그러면 다른 모든 철학에서는 그 삐딱삐딱한 발자국 때문에 너는, 너는 인생 조진 놈이다, 버린 사람 취급을 한다, 이 말이야. 부처님은 오늘 그걸 돌아볼 게 아니라 오늘 반듯반듯 걸어서 저만큼 가서 돌아보면 반듯반듯한 발자국이 보여요 빼딱빼딱한 게 보여요? 빼딱빼딱한 건 없어져 버렸어. 반듯반듯, 아, 현존 일념이 바로 내 인생이구나. 내 지금 마음에 깨어 있으면 영원히 깨어 있는 것이고, 내가 지금 마음을 놓치면 그건 영원히 다음다음도 그 마음이 그 마음이다. 그래서 『금강경(金剛經)』에는 “과거심(過去心) 불가득이요 현재심(現在心) 불가득이요 미래심(未來心) 불가득이다” 이랬는데, 그러면 생사업(生死業) 보고 듣고 느끼는 모든 그런 것을 놔버리려면 어떻게 해야 됩니까? 그걸 어떻게 하면, 어떻게 놓으면 좋겠습니까? 놓아버리는 법. 그것을 부처님께서는, 내 성질 같으면 이렇게 말해도 안 듣고 저렇게 말해도 안 들으면 때려 치워버릴 텐데, 『아함경(阿含經)』을 12년 동안이나 설해 주고 『방등경(方等經)』을 8년이나 설해 주고, 그게 다 공(空)이라는 거를 600부 반야 중에서 21년 살아나는 동안 577번째 『금강 바야바라밀(金剛般若波羅蜜)』을 떡 설하면서 거기서 뭐라고 그랬어요? 육조스님이 무슨 말 끝에 홀연히 열반(涅槃)의 도를 앓았습니까?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응무소주. 그래서 이제 이 스승에게, 호국 영령들이여. 당신들 오늘 대박 나는 날이오. 진관사라는 데가 있어서 수륙재의 모든 그런 나라를 위해서 돌아가신 그런 영혼들과 원래는 독립군 그런 호국 영령들까지 모셔놓고 해마다 이렇게 해드리는 건 사람 노릇 우리를 시켜주는 거예요, 여러분들. 사람 노릇 시켜주는 거라고. 그러면 “영령들이여. 어떻게 하면 보고 듣고 느끼는 경계를 한 생각에 탁 놓아버리고 열반의 도를 갈 수 있습니까?” 하니까, “야야 『금강경(金剛經)』에서 벌써 말 안 했나? 응무소주 이생기심하라.” 머무는 바 없이 그 마음을 쓰라. 그 마음을 내라. 그러면 여러분들은 머무는 바가 주로 어디에서 많이 나옵니까? 머무는 게. 가족들끼리 가장 머무는 게 많아요. 저 남편이 내 결혼기념일을 아는가 모르는가 자기만 알도록 달력에 딱 표시해 놨다가 알아주면 다행인데, 모르면 꼭 저녁 굶은 고양이 새끼 모양으로 꽁 해가지고 가슴에다가 “나는 너를 위해서 얼마나 했는데 그것도 하나 모르냐” 머물러 탁 가슴에 머물러. 딱 머물러가지고 머무르면 뭐가 돼요? 업(業)이 돼. 죄가 돼. 그게 생사라. 바로 보고 듣는 데 넘어갔으니까. 아들 딸들이 “나는 너에게 얼마나 인생을 다 바쳤는데 너는 어떻게 그렇게 어머니 말을 안 듣느냐. 아버지 말을 안 듣느냐” 왜 안 들을까 아들 딸들이. 아들 딸들 말 잘 들어요 안 들어요? 안 듣죠. 그 원인 분석해 봤어? 원인을. 여러분들이 아버지 어머니 말 지독히 안 들었거든요. 여러분들이 바로 안 들은 사람이요. 나 봐요. 나, 나는 아버지가 이 길 가는 걸 엄청 반대했어요. 그런데 이 길 갔어요, 안 갔어요? 내가 대표적으로 아버지 어머니 말 안 듣는 사람이야. 다음 생도 안 들을 거야. 어쩔 수 없어. 여러분들은 아버지 어머니 말 지 딴에 잘 들었다고 해도 부모가 볼 때는 반의 반도 안 들은 사람들이거든. 그러니 아들 딸들도 안 들을 수밖에 없어. 그리고 부모한테 뭔가 받을 게 있고 갚을 게 있기 때문에 아들로 태어나지. 당신들 말하는 대로 당신 말만 잘 들으면 오늘 딱 멈춰가지고 더 큰 데는 못 내려가요. 댐에 막혀서 못 내려간다 이 말이야. 아들딸들이란 내 마음대로 들어야 된다. 이런 데 멈춰 있구나. 내가 여기에 딱 머물러 있구나. 응무. 응무소주(應無所住)라야 할 텐데 머무름이 없어야 할 텐데 내가 여기에 탁 머물러 있으니 와, 진관사 수륙재(水陸齋) 하는 동안 내 가슴을 가만히 돌아봐서 이런 마음 이런 마음 이런 마음이 내 상처로 있구나. 요거 내려놔버리는 것이 응무소주 이생기심(而生其心)이다. 과거에 지나온 일은 지나가 버렸잖아. 오늘 내가 한강을 건너왔는데 오늘 조금 있다가 내려가다 보면 그 한강이 없단 말이여. 다 있다고 하는데 그거는 착각이여. 내가 본 강물은 벌써 바다로 흘러가 버려서 흔적도 없어. 다음 생애도 못 봐. 그러면 강물만 그러나요. 보고 듣는 게 보는 찰나다. 강물보다 몇십 배 빨리 흘러가 버리니. 아, 내가 보고 듣는다는 건 흘러가 버리는 게 없는 거를 내 마음에만 붙들고 있는 거를 머문다고 하는구나. 가장 머물기가 쉬운 곳이 내 가족이다. 남편, 부인, 아들, 딸. 근데 내가 볼 때는 좀 웃기는 게 있어 부부 간에. 남편들이 지 덕 보려고 장가간 거지 마누라한테만 잘하려고 장가간 건 아닐 거거든요. 근데 자기한테만 잘해주는 거예요. 그러면 보살들도 지 덕 보려고 시집을 갔지 남편한테 무슨 헌신적으로 가려고 간 게 아니거든요. 서로 그걸 인정해서 서로 다를 수밖에 없다. 다름을 인정하면 마음에 머물지 않습니다. 소나무는 소나무대로 좋고, 참나무는 참나무대로 좋고, 황새 다리는 길어요 작아요, 짧아요? 참새 다리는 어떤 스님 닮아서 좀 짧단 말이야. 가만 보니 날 닮아서 짧다는 걸 알고 웃는데 겉으로 볼 때만 그렇지 속에는 내가 이제는 하심(下心)을 많이 해서 엄청 큰 사람이 나왔는데 당신들이 볼 줄 몰라 웃거든. 그러면 참새 다리는 짧고 황새 다리는 기니까 황새 다리 긴 걸 딱 끊어다가 참새 다리 끊어서 서로 꽃같이 맞추면 뭐가 돼? 둘 다 죽어버려. 둘 다 죽어버려. 아 큰 건 큰 것대로 작은 건 작은 것대로 이 자체가 불성(佛性)에서 볼 때 성(性)에서 볼 때는 평등이구나. 눈에 보이는 게 크고 작다는 여기에 넘어가지 말자. 잘해준다 못했는데 넘어가지 말자.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이라는 말은 눈에 보이는 모양 색에 머물러서 마음을 내지 말고 귓구멍으로 듣는 소리에 머물러서 내지 말고. 우리 귀로 듣는 소리에 정말 많이 머물러요. 누가 욕 한 번 하면 그게 꽉 남는 거예요. 전생에 내가 욕을 했던 사람이 욕이라도 해주지 전혀 인연 없는 사람은 저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에 치치코프 새끼 미친 새끼라는 놈이 우리 욕해 줍디다. 욕 안 해요. 욕 안 해. 뭔가 욕을 들은 거는 인연이 있었구나. 내가 한 욕이 돌아왔으니 내 인생 오늘 해결됐네. 부처님 법이 응무소주 이생기심(應無所住 而生其心) 하나만 하더라도 아, 저런 큰 스승이 이 세상에 오셔가지고 불법문 중에 불사일법(不捨一法)이라. 모든 것은 하는 자체가 문제가 아니라 그 마음을 어떻게 응무소주 이생기심하고 있느냐. 그러면 여러분들은 진관사에 와서 해마다 수륙재만 동참하더라도 영가들에게 왕생극락(往生極樂)할 때는 아, 나부터 누구에게 서운한 마음, 마음의 상처 이거는 이 소중한 내 몸뚱이에다 이런 지저분한 오물을 내가 생각 그릇에 넣고 다니는 건 이건 냄새가 나도 너무 많이 난다. 여러분들 한번 들어보자 이 말이야. 눈으로 보면 여러분들이 나를 볼 때 저 스님은 세수를 잘 안 한다고 그러더니 오늘은 뭐 누구한테 잘 보이려고 세수를 하고 왔는가 보네. 나는 여러분들을 볼 때 집에서는 머리를 부시시하니 펄렁 도깨비 모양으로 남편이나 아들딸 앞에서 잠옷 차림으로 꼭 어디 무슨 뭐 각설이처럼 돌아다니더니 나올 때는 뭘 바르고 뭘 주어 입고 그냥 예쁘게 차리고 왔네. 그건 눈으로 본 소리요. 눈으로. 내가 그렇게 봤다면 눈으로 본 소리야. 마음으로 보면 차려 입을 줄 알고 여기 올 줄 알고 이 말을 들어서 생각을 바꿀 줄 아는 마음 마음 마음. 마음으로 보면 내 마음이나 여러분들 마음이나 한 마음이란 말이에요. 다시 한 번 반복하겠습니다. 시간이 다 돼서. 금일 영가들이나 호국영령들이나 우리나 새나 노루나 우리 생명을 우리가 만들어 본 일이 없어. 나무 한 그루, 풀 한 포기가 만든 공기. 공기를 코로 호흡을 통해서 빌려다 쓰는 게 내 생명이요. 공기 10분만 못 빌리면 우리는 다 죽어. 떠다니던 구름이 비가 되면 물이 돼서 물에서 물을 얻어 마시고 있으니까 물에서 빌려온 생명이요. 태양열 에너지에서 열량, 대지에서 나오는 모든 음식. 그러면 그 우주 생명을 우리는 빌려다 쓰는 걸 이 몸뚱이라고 한단 말이야. 빌려온 거란 말이야. 내가 빌려온 데하고 여러분들 빌려온 데가 같아 안 같아. 한 생명이란 말이야. 한 생명. 그러면 호국영령과 모든 사람들도 그 생명에 의해서 살고 있어. 그러면 오늘 호국 영령이 마지막 들어야 할 건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되려면 그때는 일본인들이 우리나라를 식민지 만들어 가지고 한국말을 못 쓰게 만들고 별별 고생을 다 하고 참 독립군들 고마운 건 그건 정말 어떻게 보면 말로 다 할 수가 없거든. 그런 환경에서 당신들을 독립을 했으면 지금도 그런 걸 미워하는 마음으로 살아가서는 결코 왕생극락을 못한다. 아, 그때 우리나라 국력을 키워놓지를 못했구나. 사색 당파로 니가 옳다 내가 옳다 싸우면서 일본인들에게 우리가 식민지를 당했구나. 그런데 지금은 오히려 일본을 능가해서 이번에 세계에서 가장 강력한 나라 몇 나라를 뽑는데 일본은 8위가 됐고 우리가 7위로 올라갔더라고. 일본이 그러면 그게 바로 이분들 덕이요. 박수 칠 수 있는 게 독립 호국영령들 우리 수륙재에 모시고 하는 그분들 덕이란 말이에요. 그러면 여러분들 덕인 줄 아는 후손들이 있으면 호국 영령들은 한국 땅에 진관사가 있어서 저런 신도들과 저런 분들이 해마다 이런 일을 해줬으니 나도 마음을 넓혀보자. 바다가 돼 보자. 섬진강, 낙동강이 하나라는 걸 한번 알아보자. 글로벌 시대 일본까지도 우리가 앞으로는 가르치자, 제도하자. 백제 불교가 전해져서 일본을 가르치듯이 내가 마음을 좀 더 넓게 쓰자. 그러려면 허공 영령들이여 이런 염불하고 이런 법문 듣고 이런 정성 들릴 때, “나는 누구인가?” 사람들은 돌아가신 호국 영령들, 독립군들을 청에 모시고 죄를 지내는 줄 알지만 스님들은 영원히 죽음이 없는 진관사 단어, “당신은 부처님입니다.” 영원한 생명 부처님을 모셔놓고 법문을 하니 응무소주 이생기심이 길을 가면 부처이고 미운 마음, 원망하는 마음, 눈으로 보고 귀로 듣는 데를 따라가면 중생이니 내가 어떤 길을 가느냐는 당신들이 해야 할 일이다. 그래가지고 결국은 앙산스님께서 위산스님 스승에게 묻기를 “어떻게 하면 내가 내 안에 있는 부처님이 참 부처님이 있는 걸 알 수가 있습니까?” 하니까 “니가 이 세상에서 보고 듣고 있던 모든 거는 빌려온 남의 지식을 기억한 거니까 기억된 것을 생각이라고 그런다.” 그 생각을 딱 놔두고 생각 끊어진 나, 생각 끊어지니까 죽을 줄 알았더니 고요하고 고요하여 적적본고향(寂寂本故鄕)이라. 고요하고 고요하니 이게 내 고향이었구나. 그 고요한 걸 아는 호국영령들 죽음이 없는 나. “이 뭣고?” 이 뭣고 이 하는 놈이 안 죽고 있다는 걸 딱 믿음이 가면 이 하면 희망이 솟는 거예요. 아, 영원히 죽음이 없는 내가 있었구나. 그것이 모든 생각을 놔버려 두고 이 뭣고, 모르는 놈만 남는 거예요. 모르는 놈만. 모르니깐. 모른다는 건 뭐예요? 백지잖아 백지. 백지는 비교가 없어. 고요요, 고요. 모르는 것이 세상 사람이 볼 때는 답답인데, 호국영령과 수륙재에 모인 모든 영가들이 볼 때는 청정이요, 고요요, 고요. 고요하니. 아까도 말씀드렸지만 러시아 블라디보스토크의 지치코프 새끼 미친 새끼인가 어떤 사람. 미운 마음 나, 안 나? 그리운 마음 안 나? 평화요, 평화! 모르는 건 평화구나. 금일 영가요. 다만 모르는 이 뭣고? 이것을 참고하고 참고하면 고요하고 고요하게 되니 진관사 스님들과 신도님들 정말 고맙습니다. 내가 고향이 멀리 있는 줄 알았더니 내 마음 한 번 바꾸니 거기가 내 고향이었네요. 그게 성성시아가(惺惺是我家)라. 거기에서 희망이 솟아서 살과 활이라. 하나는 죽이며 하나는 살리니. 생과 사가 둘이 아니니 현전고불로(現前古佛路)인데 부처님 걸어 가신 길이 바로 이 길이니 부처님 고마움이여. 누구나 부처라고, 당신도 부처 나도 부처 호국영령도 부처, 소속 제한된 모든 사람이 부처라고 해주신 분은 부처님밖에 안 계셔. 불교 신도들이 부처님 불교 믿는 그런 고마움을 모르면 그건 ‘리가대돌’이요. 뭐 리가대돌이라면 스님이 뭐 외국어를 좀 한다던데, 돌대가리를 거꾸로 하면 리가대돌이요. 돌대가리라 하면 기분 나빠하니까 이왕이면 “저놈들 리가대돌”하면 지는 못 알아들어 좋고 난 욕해서 좋고. 정말 부처님 고마운 줄 알아야 돼. 부처님 고마움으로 말로 다 할 수 없는 거야. 고로 호국영령들이 부처님이 어디 계시냐 하니까 이 그 자리니라. 무엇고. 모를 뿐인 청정이여 모를 뿐인 고요요. 불매시하물(不昧是何物)이냐? 원컨대는 진관사에서 해마다 모든 백성 대신하여 지극정성 수륙재를 봉행하는 이 공덕으로 호국영령과 독립군으로 눈을 감을 때에 피눈물을 흘리신 독립군 영령들이여. 이러한 공덕으로 마음에 묻은 한을 한 생각에 놓아버리고, 이 뭣고 부처 성품이 당신 본고향이라. 부디부디 왕생극락 나라리라라리라라 태평가를 불러 봅시다. 나무아미타불. 다시 한 번 회주 스님과 주지 스님, 진관사 스님들 정말 마음으로부터 내가 못한 일을 해줘서 고맙습니다. 성불하십시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