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님 법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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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년하례법회]2월2일 신년하례법회 법문
주지스님 2020-02-02
안녕하세요. 설이 지난 지 아흐레가 되었습니다. 네 번의 설을 보낸다고 했죠. 절기의 설이 두 번 있고, 음양의 설이 있습니다. 그래서 절기는 동지 때 한 번 쇠었고, 내일 모레 입춘 되면 또 절기에요. 그리고 양력 설, 음력 설 해서 음양의 설이에요. 입춘은 오늘 입재했고, 2월4일이 입춘 날입니다. 절기 설 마지막 인데, 입춘이 섣달에 드는 해도 있고, 정월에 드는 해도 있습니다. 올 해는 윤년이 들어서 정월에 들었습니다. <설은 질어야 좋고, 보름은 밝아야 좋다.>고 했습니다. <질어야 좋다.>는 말은 눈이 흠뻑 와서 질퍽해야 풍년이 든다는 건데, 올해는 질지도 않고 춥지도 않고, 병충해가 많으니 새해부터 세계가 난리가 났잖아요. 신종코로나바이러스. 그래서 오늘도 빨리 마쳐야 될 거 같은 느낌이에요. 사람이 많은 곳에 있으면 호흡기병이니까 병균을 남에게 옮기면 안 되잖아요. 마스크 쓴 분들도 계시는데 미연의 방지죠. 우리 전부 마스크 써야하는데요. 어쨌든 오늘 좋은 날입니다. 저희가 3일간 신중기도를 해서 종범스님께서 기도를 해주셨고, 어제는 자비도량참법기도를 3일간 해서 종범스님께서 좋은 법문을 해주셨고, 내일 모레는 입춘이라 덕담을 많이 듣고 지나갑니다. 듣는 것보다 실천이 중요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항상 보현의 실천과 문수의 지혜를 갖추면서, 우리 모두가 다 실천하는 분위기여야 됩니다. 복 짓는 것도 본인이 짓고, 나쁜 일도 본인이 짓는다고 말씀하셨는데, 복을 담을 그릇도 우리가 가지고 있어야 합니다. 올 해 경자년인데요. 경자가 들어가는 해는 별로 안 좋다고 해요. 1910년이 경술국치의 해이고, 1950년, 경인년에는 6.25가 일어났고, 1960년 경자년에는 4.19가 났고, 1980년, 경신년에는 5.18 등 여러 가지 일들이 일어났어요. 2020년에는 새로운 바람이 불어 4월에 선거가 있잖아요. 우리 모두의 지혜를 모아 좋은 분을 뽑도록 해야겠어요. 또 경자년 해는 변혁의 바람이 분다고 해요. 그렇지만 변화도 우리가 만들어 내는 거니까 변화를 잘 만들어 낼 수 있도록 잘 선택하셔야겠지요. 그래서 판단력이 있어야 되요. 합장해봅시다. 마음의 정원 진관사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부처님처럼 보고부처님처럼 생각하고부처님처럼 말하고부처님처럼 행동하겠습니다.저는 지금 이 순간 바로 여기에서 늘 깨어있습니다. 작년에는 달라이기도문을 1년내내 발원으로 삼았는데, 올 해 부처님처럼 보고,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부처님처럼 말하고, 부처님처럼 행동하겠다는 말은 부처님처럼 살겠다는 얘기에요. 그래서 우리는 맨날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라고 하는 겁니다. 올해도 여러 신도님들, 스님네들, 거사님들, 사부대중 모두가 부처님처럼 살면서, 부처님처럼 보고,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고, 모든 사람을 부처님처럼 여기면 이 세상이 전부 불국토가 되는 거예요. 우리가 지옥, 아귀, 축생, 인도, 천도도 다 우리가 만드는 거예요. 내 마음 속이 편하면 그게 천상이고 바로 극락이에요. 내 마음이 불편하고 남을 미워하고 남을 싫어하면 그게 다 지옥입니다. 누가 만드는 게 아닙니다. 자업자득이라고 하듯이 자기가 짓고 자기가 만드는 거니까 우리는 이왕이면 좋은 일을 하셔야 하잖아요. 좋은 행동을 하셔야 하고 좋은 일을 부처님처럼 하시면 모든 사람이 부처님이에요. 그렇지 못하니까 시시비비가 일어나고 여러 사람을 미워하는데, 다 부처님이다 생각하면 남편도 부처님, 보살도 부처님, 자식도 부처님 다 부처님이에요. 부처님처럼 살도록 합시다. 경자년, 은해사 극락보전에 가면 어간문에 휜 쥐와 검은 쥐가 있다고 해요. 이것은 밤과 낮을 표현하기도 하고 좋은 점과 나쁜 점 두 가지를 표현한다고도 하는데, 안수정등(岸樹井藤)에 보면 이런 이야기가 나옵니다. 어떤 사람이 막 지나가다 코끼리에 쫓겨 우물에 빠지게 되었어요. 칡줄기에 겨우 매달려 있는 상황인데, 밑에서는 독사가 지키고 있고요. 칡넝쿨 위에선 흰쥐와 검은쥐가 넝쿨을 갉아 먹는 거예요. 그런데 위에서 꿀이 한 방울 두 방울 떨어지고 그것을 먹으면서 자신의 처지를 잊고 말았어요.이 비유에서 흰쥐, 검은쥐는 밤과 낮을 의미하고, 세월이 흐르는 것을 표현하기도 하고, 우리가 오욕락에 취해가지고 자기의 본래자리를 모르는 것도 표현한 거예요. 올해 경자년은 흰쥐 해에요. 우리 모두가 쥐처럼 부지런하고 쥐 죽은 듯이 살지 말고, 쥐는 다산도 되고 지혜롭고 예민해요. 항상 지혜를 발휘해서 우리의 생각을 밝힐 수 있는 한 해가 되도록 합시다. 다같이 부처님되십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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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비도랑참법기도회향] 2월 1일 자비도량참법기도 회향 법문
종범스님 2020-02-01
<祈禱(기도)와 智行(지행)> 안녕하세요. 오늘은 <祈禱(기도)와 智行(지행)>, 지행은 지혜 지자, 행할 행자, 지혜를 실천한다는 내용으로 말씀드리겠습니다. 祈禱 : 發願 精進 加被 成就기도 : 발원 정진 가피 성취 作法祈禱 日常祈禱 작법기도 일상기도 眞正力 意志力 持續力 진정력 의지력 지속력 기도는 발원(發願)에서부터 시작해요. 발원, 원을 일으킨다, 이런 뜻이거든요. 원하는 만큼 되요. 원하지 않으면 안 돼요. 발원이 없는 것은 종자가 없는 것과 같아요. 아무리 땅이 좋아도 종자가 없으면 그 땅에서 이루어지는 게 없잖아요. 아무리 환경이 좋아도, 부모환경이라든지, 사회환경이라든지, 친지환경이라든지 환경이 좋아도 진정으로 본인이 원하는 것이 뭐냐. 본인 발원력이 없으면 안 돼요. 나만 좋다고 좋은 발원이 아니거든요. 발원이 그만큼 중요해요. 무엇을 어떻게 이뤄보고 싶다. 그 다음에는 정진(精進)이에요. 정진을 계속해나가는 것. 정이라는 것은 정성을 들인다는 뜻이고, 정성을 들여서 중단하지 않고 계속 노력하는 걸 정진이라고 해요. 정미소(精米所)라는 정자가 있거든요. 쌀이라는 건 벼 껍데기가 없다, 이런 뜻이거든요. 정진. 그렇게 정진하다보면 가피(加被)라는 게 있는데, 가피는 평소의 내 능력보다 더 많이 이루어지는 걸 가피라고 해요. 더할 가자, 입을 피자, 더 입었다. 가피를 예를 들면 어린아이가 혼자는 못 가는데, 엄마 아빠 손에 이끌려서는 가거든요. 그게 가피에요. 혼자 할 수 있는 능력보다 더 이룬 거죠. 손에 이끌려서, 가피 때문에. 그런 걸 가피라고 그런다, 가피. 가피에는 현상가피(現相加被)가 있고 명훈가피(冥勳加被)가 있는데, 현상이란 말은 눈으로 느낄 수 있는 것, 나타날 현자, 모양 상자. 어떤 모습을 느낄 수 있는 그런 건데요. 갑자기 도와주는 사람이 나타났다. 그건 현상가피구요. 그리고 정진을 계속하다보면 내 몸에서 변화를 느낄 수 있어요. 몸이라는 게 아주 신비해서 무슨 일이 닥치기 전에 먼저 느끼는 경향이 있어요, 이게. 꿈꾸는 것도 마찬가지예요. 꿈꾸는 것도 낮에 느낄 것을 밤에 느끼는 것이 꿈이에요. 그걸 영특한 꿈이라고 해요. 꿈을 꾸는 데 누구를 만났다, 어디 가서 그 사람을 만났다. 몸이 느낀 거예요. 몸으로 느끼는 가피, 사람으로 느끼는 가피, 다른 모습으로 느끼는 가피, 사업으로 느끼는 가피, 이런 것을 현상가피라고 그런다. 불교에서는 상자를 사람인변에 안 쓰고 나무 목 변에 써요. 옛날 사람들이 주로 자연 속에 살았기 때문에 눈 뜨면 딱 보이는 게 나무여. 그래서 눈목 옆에 나무에요. 눈에 들어오는 걸 표현하는데, 나무목과 오른쪽에 눈목해서 서로 상이라고 하는데, 모양 상이라 불교에서는 주로 그 상자를 쓰거든요. 현상가피. 명훈가피라는 것은 어두울 명자, 연기 쏘일 훈자인데, 연기를 시나브로 쏘이다보면 언제 연기냄새가 옷에 뱄는지는 모르지만 나중에는 연기냄새가 자욱하게 옷에 뱄어요. 그걸 명훈이라고 그래요. 근데 이거는 자기도 모르게 가피를 입은 거죠. 이런 가피를 가지고 성취(成就)를 하는 거예요. 이뤄지는 거예요. 발원, 정진, 가피, 성취 이런 걸 기도라고 그런다. 기도하는 방법은 작법기도(作法祈禱), 일상기도(日常祈禱). 작법은 작품 만들 듯이, 지을 작자, 법 법자인데, 어떤 법식을 갖춰서 법식을 만들어서 하는 걸 작법이라고 하거든요. 그냥 말로 하는 게 아니라 곡을 만들어서 노래를 부르는 것처럼 작법. 시간을 언제 한다, 형식을 어떻게 한다, 내용을 어떻게 한다, 정해놓고 하는 걸 작법기도라고 해요. 3일 하느냐, 100일 하느냐, 7일 하느냐. 모여서 하는 건 주로 작법기도죠. 그런데 일상기도가 있어요. 일상적으로, 날 일자 항상 상자, 날마다 항상 하는 발원 정진이 있는데요. 아무도 모르게 자기 혼자 맨날 하는 거예요, 자기 발원을 이루기 위해서. 그런데 작법기도는 수시로 하는 거지만, 일상기도는 항상 하는 거예요. 무서운 거죠. 늘 일상적으로 발원하고 정진하니 그 힘이 불가사의한 거예요. 인생이라는 건 여건만 좋아진다고 성취되는 게 아니에요. 종자가 좋아야 하듯이 발원이 건강해야 되요. 좋은 종자에서 좋은 열매를 얻는 거예요. 이게 참 문젠 거예요. 내 발원종자가 얼마나 좋은가 점검을 해봐야 해요. 요즘 거창하게 가치관이니 가치체계니 얘기하던데요. 불교식으로 말하면 발원이에요. 진정 원하는 게 뭐냐. 원하는 거 이외에는 안 이루어지니까요. 그런데 기도에는 첫째 진정력(眞正力)이라는 게 있어요. 참 진자, 바를 정자. 진정이란 다른 게 섞이지 않은 무작(無作) 진실. 기도에는 항상 진정력이 있어요, 안에. 진정력이 나를 움직이고, 사람을 움직이고, 마음을 움직인다. 움직이는 건 진정력이다. 진정력이 모든 걸 움직여요. 진정력이 없으면 안 움직여요. 우리나라 문화발전현상을 보면 50년 전과 지금과는 완전히 틀려요. 70년대 이전까지. 70년대면 50년 전인데, 그 때 문화하고 지금 2020년 문화하고는 50년 차이가 나는데요. 틀려요. 모든 게 다 틀려요. 2020년 대한민국은 선진국이에요. 70년 이전의 대한민국은 후진국이에요. 후진국의 사고방식으로 선진국을 살아가려면 여러 가지 마찰이 생겨요. 2020년 대한민국은 선진국이란 것을 명심해서 선진국에 동참해야 되요. 70년대 이전으로 살 수는 없는데, 그것도 자기도 모르게 고집하는 수가 있으면 어떻게 되냐. 충돌이 생겨요. 70년대까지 흔하게 듣던 얘기가 남아선호사상이었거든요. 남아선호사상. 그런데 요즘에 아들이 개뿔도 아니거든. 개한테 뿔이 없거든요. 그런데 뿔처럼 보이는 걸 가지고 있는데, 아들은 아예 보이는 것도 없다. 개뿔도 아니란 거예요. 차라리 개뿔보다 못하다. 근데 간혹 지금도 아들을 원하는 할머니가 계세요. 그게 70년대 이전 사고방식이에요. 인터넷에서 본 얘기인데요. 아들만 4형제를 난 할머니가 계신데, 아들들은 손자를 하나도 못 낳았대요. 며느리들만 보면 “아들 낳기가 얼마나 쉬운데. 난 낳기만 하면 아들이었다. 너희들은 왜 아들 하나를 못 낳느냐”고. 그게 아들 낳고 딸 낳는 것은 여자 맘대로 된다는 게 70년대 이전 사고방식이었어요. 요즘은 의무지식이 보편화 돼서 아무도 그런 생각을 안 하거든요. <여자 맘대로 아들딸을 결정하는 게 아니다.>라는 게 상식화 됐는데, 그 전에는 그걸 여자가 다 하는 걸로 알았어요. 그 할머니는 지금도 그렇게 생각하시는가봐. “난 낳기만 하면 아들이었는데, 너희들은 왜 아들 하나를 못 낳느냐.”고 맨날 아들손주, 아들 손주 이 말을 했대요. 서너 살 되었나, 나이도 얼마 안 되는 손녀가 어느 날, 명절 때 다 모였는데, “할머니, 할머니도 여자면서 왜 남자만 좋아해?” 그 때 할머니가 완전히 입을 닫았대요. 며느리들은 서로 눈치 보면서 좋아 죽고, 아들들도 “거봐, 거봐, 얘 말이 맞네. 아이만도 못 해.” 이러더래요, 반응을 보이기를. 그러면 그 할머니가 왜 아무 말도 못했을까. 그 애 말이 진정성이 있었거든요. 아무 것도 숨기고 감추는 게 없고요, 할머니라고 체면 본 것도 없고요. 며느리들은 감히 어떻게 해요. 또 아들들도 못하죠, 어머니 상처받을까봐. 얘는 아닌 거예요, 그냥. 오직 자기가 느낀 거예요. ‘할머니도 여잔데, 왜 남자만 좋아할까. 이상하다.’ 그래서 이 진정력에는 모든 걸 다 움직이는 힘이 있어요. 어머니, 아버지도 움직이고, 아버지, 삼촌도 움직이고, 할머니, 할아버지도 움직이고. 그 말에 꼼짝을 못했어요. 할머니는 화가 나니까 소주만 하루 종일 마시더래요. 진정력이 이게 뭐든 걸 움직여요. 진정력 하나로. 그래서 무서운 거예요. 그리고 지속력, 지속하는 것, 끊임없이 지속해 나가는 것이 굉장한 힘이에요. 아무리 진정성이 있어도 한 순간 하고 안 하면 별 힘이 없어요. 하고 또 하고, 지속적으로 하는 것. 이게 전부 기도의 내용이거든요. 하고 또 하고, 하고 또 하고. 그런데 가장 중요한 건 의지력이에요. 그만큼 모든 것이 의지에서 나와요. 조선시대에 서산스님이 계셨는데, 그 분이 제자에게 편지를 쓰셨어요, <의지가 중요하다.> 의지가 어떻게 중요하냐. 志之所在 氣亦隨之 氣之所在 天地鬼神亦隨之 故云지지소재 기역수지 기지소재 천지귀신역수지 고운天地不能奪 匹夫之心(西山集 제3권)천지불능탈 필부지심(서산집 제3권) 志之所在(지지소재)에, 뜻 지자, 갈 지자, 뜻이 있는 곳에 氣亦隨之(기역수지)하고, 기운 기자, 또 역자, 따를 수자, 갈 지자, 기운도 따른다. 뜻이 있으면 기운이 따른다는 거예요. 뜻이 없는데 기력이 따를 리가 있어요? 안 할려고 작정하는데 기운이 나오겠습니까. 그래서 지지소재에, 뜻이 있는 곳에 기역수지하고, 기운도 또한 따르고, 氣之所在(기지소재)에, 기가 있는 곳에, 기가 살았다, 기가 죽었다 이런 말 있잖아요, 기지소재에, 天地鬼神(천지귀신)도 亦隨之(역수지)라, 하늘 땅 귀신까지도 따른다는 거예요. 다 거기에 따라서 이루어지게 만들어요. 귀신은 보이지 않는 힘인데, 보이지 않는 힘도 다 따라오고 보이는 하늘과 땅도 다 따라온다. 그러므로 말하기를 天地不能奪 匹夫之心(천지불능탈 필부지심)이라. 하늘과 땅도, 불능탈이란 말은 뺏을 수 없다는 말이거든요. 뭘 뺏을 수 없냐. 필부지지(匹夫之志), 필부라는 건 말이나 소를 셀 때 한필 두필 그래요. 그러니까 아주 보통 사람, 사회의 기층, 바탕을 이룬 사람을 필부라고 해요. 짝 필자인데, 동물을 세는 단위거든요. 필마로 돌아드니, 말 한필로 돌아다녔다 이 말이거든요. 필부란 뭐냐. 어디서나 볼 수 있는 사람, 평범하고 보통사람. 평범하고 보통사람의 뜻을 하늘과 땅도 뺏을 수가 없다. 천지불능탈 필부지지(天地不能奪 匹夫之志)라. 그러니까 뜻을 세우고 끊임없이 정진해 나가는 게 기도인데, 그 기도의 힘이라는 것은 나한테 있기는 있는데 아직 나오지 않은 것을 나오도록 하는 거예요. 나오게끔 하는 것. 일상적으로 아니면 수시로 뜻이 건강하면 거기서 힘도 나오고 세상에서 이루어지도록 돕고. 거봐요, 담배 좋아하는 사람은 주변에서 담배 사다줘요.(웃음) 왜 사다주겠어요. 지가 좋아하니까 사다준 거잖아요. 지가 좋아해야 다른 이가 돕지, 지는 사투리인가요, 지가 안 좋아하면 다른 사람이 안 도와요. 의지가 있는 곳에 기운이 따르고, 기운이 따르는 곳에 하늘과 땅도 막을 순 없다. 서산스님이 공부하는 제자에게 한 법문이에요. 마음공부를 뜻을 가지고 해야 된다. 뜻이 없이 하면 안 된다, 이런 말이에요. 자기 뜻을 세워서 기운을 내서 많은 도움을 받아가지고 성취하는 거, 그게 기도에요. 가피, 도움 받는 게 가피에요. 뜻을 세워서 지속적으로 노력하는 사람한테는 도움이 저절로 와요. 기도가 있는 곳에 가피가 있고, 가피가 있는 곳에 성취가 있다. 기도가 깊이 올라가면 그 원이 점점 넓어지고 깊어져요. 이루는 것에 따라서 원이 달라져요. 마음이 점점 지혜로워지면 어떤 의식이 돌아 오냐 하면 이 세상에 헛된 것과 참된 것을 구분하는 능력이 생겨요. 무엇이 헛된 것이고 무엇이 참된 것이다. 예를 들면 우리가 밥을 먹는데, 밥은 우선 입에서 즐거워야 되거든요. 뭐니 뭐니 해도 맛있어야 돼요. 아무리 몸에 좋아도 맛이 없으면 안 먹어요. 그런데 입에서 맛만 보고 그냥 넘기질 않으면 안 좋아요. 그러니까 음식을 잘 만들어서 입에 넣기만 해가지고는 몸에 도움이 안 된다. 그런데 그게 그렇게 또 좋은 거예요. 음식 딱 먹었을 때 맛이 있니 없니 그거는 좀 품격이 낮은 거거든요. 어떤 음식도 안 넘기면 도움이 안 돼요. 넘겨야 돼요. 넘기면 그때부터는 음식이 몸이 되는 거거든요. 그건 음식이 아니라 몸이 돼 버려요, 몸. 피가 되고 살이 되고, 뼈가 되고. 기운이 되고. 몸이 된다고요. 몸 되는 게 그게 참된 거지, 그 모양을 어떻게 내나, 그릇을 뭘 사용하나, 맛을 어떻게 내나, 다 헛된 거예요, 그거는. 문제는 몸 되는 게 참된 거예요. 음식을 맛이 있네, 없네 하는 건 절대 헛된 거예요. 내가 잘 먹어서 소화 잘 시켜 자기 몸 되면 그만이에요. 인생사가 다 그래요. 그래서 매사에는 헛된 것과 참된 것이 있다. 상당히 중요한데요. 헛된 데 헤매다가 죽는 사람이 많아요. 헛된 데 헤매다가 죽을 때 ‘내가 뭐 했는고.’ 헛된 데 헤매고 있었던 거예요. 생각이 깊어지고 지혜가 자꾸 드러나면 ‘밖에서 얻은 건 다 밖으로 가는구나.’라는 걸 느끼게 되요. 남편도 가고 애인도 가고 재산도 가고 몸도 가고. 화장 용어에, 묘지 용어에 肉脫(육탈)이란 용어가 있어요. 근육이란 육자에 벗을 탈자. 육탈이라는 것은 무덤을 열어보면 뼈만 남은 거예요. 근육은 없는 거예요, 육탈돼서. 그걸 파괴해서 뼈까지 태워서 흩으면 아무것도 없는 거예요. 우리 몸이 가는 곳이 그것이거든요. 몸도 마지막엔 헛된 거예요. 아는 사람도 헛된 거고. 재산도 내가 죽으면 헛된 거예요. 내가 살아있을 때까지 중요한 거예요. 아, 인생이란 게 남은 게 뭔가. 이런 생각을 하게 돼요. 기도가 깊어지지 않은 사람은 절대 못하게 되요. 하루하루 이기느냐 지느냐, 죽느냐 사느냐 이렇게 절박하게 움직이는데 어떻게 그런 생각까지 해요. 菩薩智行 보살지행①菩薩智行 보살지행 一念普觀無量劫 無去無來亦無住 일념보관무량겁 무거무래역무주 如是了知三世事 超諸方便成十力(光明覺品제9) 여시료지삼세사 초제방편성십력(광명각품제9)②諸佛智行 제불지행 佛身普遍十方中 三世如來一切同 불신보편십방중 삼세여래일체동 廣大願雲恒不盡 汪洋覺海渺難窮 광대원운항부진 왕양각해묘난궁③本分人智行(了事人 了事凡夫) 본분인지행(요사인 요사범부) 無物可遣 無物可求 무물가견 무물가구 睡來合眼 飯來開口 수래합안 반래개구 一二三四五 六六三十六 일이삼사오 육육삼십육 本身自本身 不규雲霞色 본신자본신 불규운하색 그런데 정신력이 상당히 올라가면 생각하게 되요. 그 정신력 중의 하나가 普觀力(보관력)인데요. 넓을 보자, 볼 관자. 넓게 보는 힘이 생겨요. 넓게 본다. 一念普觀無量劫(일념보관무량겁)이라, 한 생각에 무량한 세월을 넓게 다 전체로 본다. 보관은 통관인데, 통자나 보자는 <전부 다> 이런 거거든요. 통상적으로 할 때, 그건 통할 통자인데, 모두 다 항상 한다는 게 통상이거든요. 근데 보관력이라는 것은 한 생각을 딱 멈춰서 이렇게 어느 부분에 집중하지 않고 마음을 거두어서 전체를 바라보는 것이 보관인데 이게 보살삼매에요. 보살은 항상 보관삼매를 해요. 보관일체, 보관무량겁, 보관삼세, 과거, 현재, 미래 삼세를 통관해요, 다 봐요. 보관일체, 일체만물을 통관해요. 보편적으로 다 봐. 죽 보면 무슨 이론이 나타나는가. 無去無來亦無住(무거무래역무주)라. 가는 것도 없고, 오는 것도 없고, 머무는 것도 없다. 이게 보살지에요. 생각을 해보세요. 천 년 전에 살았던 사람이 어디 갔는가. 지금 사람이 천 년 후에 어디 있을 건가. 그 생각을 해보면요, 지금 뭐 오고 가고, 성공, 실패가 의미가 없어요. 헛된 거예요. 아, 이거 참. 허무하네.(웃음) 헛되다는 걸 미리 알면 어떻게 성취를 해요. 그건 성취한 다음의 얘기거든요. 무거무래역무주라, 인생이 어디로 가느냐. 가는 거 없다, 어디서 오느냐. 오는 거 없다. 어디에 머무느냐. 머무는 곳 없다. 이게 보관력이에요. 널리 관찰하는 힘이에요. 그러면 거기서 지혜가 나와요. 지혜. 이게 보살의 지행이거든요. 보살은 언제나 보관을 해요. 보관일체, 일체 것을 널리 보고, 보관삼세, 과거세, 현재세, 미래세, 삼세를 널리 본다. 그게 보살의 지혜에요. 제불지(諸佛智)가 있는데, 제불지는 각지(覺智)가 변만(遍滿)이라, 깨달은 지혜가 우주에 가득하다. 늘 지혜광명으로 관을 안 해요, 그냥 적조(寂照)해요. 보관은 보살이요, 적조는 제불이라. 마음에 白淨심식(백정, 흰 백자, 깨끗할 정자)만 있어서, 깨끗한 정신밖에 없어요. 그걸 백정식이라고 하거든요. 그래서 뭐가 섞이지 않았고, 보관만 하더라도 뭔가 가린 게 있는 거예요. 그래서 관을 딱 할 필요가 있는 거예요. 그런데 가린 게 전혀 없이 백정의식이 되버리면 언제나 백정청정 진실광명, 그게 고요할 적자 寂인데, 그냥 보는 거예요. 비칠 조자(照), 그걸 적조라고 해요. 진실광명은 항상 그냥 보는 거예요. 일부러 선정에 드는 게 아니에요. 선정에 드는 것은 색계, 무색계, 망념이 있을 때 선정에 드는데, 망념이 다 백정청정이 되어 진실광명이 되면 그냥 적조가 常放大光明(상방대광명)이라, 고요히 비취는 것이 항상 대광명을 비춘다. 뭘 보든지 그냥 깨끗한 거울에 나타나면 그냥 나타나지, 가린다든지 더 보려고 한다든지 그런 거 없어요. 떠나는 건 떠나고 오면 또 나타나고. 그럼 떠나는 대로 나타나는 대로 아무 구애가 없는 거를 제불지라고 그래요. 적조광명이라고. 보살은 보관지혜, 제불은 적조광명. 늘 마음이 백정진실이에요. 그래서 거울 비추는 것처럼 그냥 비춰요. 그게 지혜거든요. 기도가 깊어지면 그런 데까지 가요. 무슨 소린지.(웃음) 정말이에요? 그런 얘기가 우리에게 필요해요? 가당치도 않아요.(웃음) 그게 다 필요하거든요. 이런 말을 들으면 종자가 돼서 나중에 싹이 날 수가 있거든요. 어린 아이가 대단한 전문선수들이 하는 걸 보면, 전혀 할 수 없지만, 그걸 본 아이가 나중에 그걸 이룰 수 있거든요. 어릴 때부터 안 보면 그 씨앗이 안 심어져서 안 돼요. 내 이런 얘길 들으면 어린 아이가 1등 선수들 경기하는 걸 보는 것처럼 마음에 심어져 이걸 이룰 수가 있어요. 제불은 적조광명이요, 조용히 비추는 광명으로 자재해요. 그게 지행이거든요. 근데 부처가 아닌데 그 부처의 지혜실상만을 이루는 분들이 있는 데 그분들을 本分人(본분인)이라고 해요. 이는 중생도 아니고, 보살도 아니고 제불도 아니고, 본래 나, 본래 나의 분산, 본래 나의 분자, 나눌 분자를 쓰는데, 분수라, 자기 능력, 자기 지위, 자기역할에 따라서 한다. 이걸 분이라고 하는데, 아버지분도 있고, 어머니분도 있고 형님분도 있고, 그게 전혀 아니고 본분, 자기 본래 분. 본분이란 말을 불교에서 쓰는데, 경에서도 본분이라고 쓰고요, 선어록에서 본분이라고 많이 씁니다. 본래 나. 본래 나, 본분으로 볼 때는 당신이 속인이냐, 나 속인 아니다. 당신이 도인이냐? 도인도 아니다. 당신이 여자냐? 난 여자도 아니다. 남자냐? 남자도 아니다. 나는 그냥 나다. 내가 왜 속인이냐, 내가 왜 도인이냐 나는 나야, 이게 본분이라고 그래요. 이거는 범부인데, 뭐라고 그러냐하면, 요사범부(了事凡夫)라고 해요. 수료할 료에 일 사자가 있는데, 모든지 헛된 세상일을 다 종료한 사람이에요. 세상일을 다 종료한 사람이라고 해서 요사인(了事人)이라고 해요. 근데 보살도 아니고 부처도 아니고 그냥 범부예요, 요사범부라고. 부처님처럼 32상을 갖추고 대인상(大人相)을 갖추고, 신통력을 갖추고, 자비력을 갖추고 그거 아니에요. 그냥 자기 본분. 그 불보살의 일이나 일체중생의 일을 전부다 마쳐버렸어요. 그거와는 상관이 없어요. 지행중에 본분지행이 있어요. 맘만 먹으면 다하는 거 아녜요. 부처 아니에요. 범부 아니에요. 그냥 나에요, 나. 그 얼마나 좋아. 듣기만 해도 속이 시원해져요. 성불하라고 하면 좋긴 좋은데 힘들게 보여. 어떡해 그 짓을 해요. 할 짓도 많은데. ‘너는 너대로 살아라. 본분대로. 하던 일, 쓸 데 없는 일 다 종료해버려라. 요사범부, 본분. 본분인은 아무 것도 버리는 게 없어요. 無物可遣(무물가견)이라, 물이란 어떤 것도 가견, 옳을 가자, 버릴 견자, 가견은 버린다는 말이거든요. 어떤 것도 버리는 게 없다. 버리는 게 자기 욕심이에요. 자꾸 버리려고 하잖아요, 자기 욕심별로, 그냥 놔두면 될 텐데. 전쟁하고 사람 살해하고 하잖아요. 사람을 왜 살해해요? 백년 기다리면 다 죽어요. 놔두면 죽는데 왜 죽여요.(웃음) 나, 기가 막혀서. 놔두면 다 죽어요, 왜 죽여. 그러니까 무물가견이라, 버릴 것은 하나도 없다. 어떤 것도 버릴 것이 없다. 또 無物可求(무물가구), 옳을 가자, 구할 구자, 구할 것이 없다. 버릴 것도 없고 구할 것도 없는 그 경지가 요사범부의 경지에요. 구하는 것도 자기 번뇌고, 버리는 것도 자기 번뇌망상이다. 그러면 어떡하냐. 睡來合眼(수래합안)이라, 잠잘 수자, 올 래자인데, 한자에서 올 래자는 주로 어조사로 많이 쓰여요, 본래, 원래 이런 거 있잖아요. 종래로 그럴 때. 수래하면 잠잔다는 얘기에요, 어디서 오는 게 아니라 잠을 잔다. 수래합안, 합할 합자, 눈 안자. 눈을 감아요. 이게 요사범부가 하는 일이에요. 잠잘 때는 눈을 감고. 또 飯來開口(반래개구)라, 밥 반자는 밥이라는 명사도 되지만, 먹는다는 동사도 되요. 그래서 반점이라고 할 때 밥집이라고도 하지만, 먹는 집이란 뜻도 되요. 먹을 때는 개구, 입을 벌려라. 열 개자, 입 구자. 그거예요. 어떤 것도 버릴 것이 없고, 어떤 것도 구할 것이 없고, 잠 잘 때는 눈 감고, 먹을 때는 입 벌리고. 이것이 본분인지에요. 이게 다 미래를 보면 사라질 존재들인데, 뭘 열심히 구한다고 원수지고, 열심히 버린다고 원수지고, 전부 부질없는 거거든요. 이거는 기도가 성취되어 상당히 올라갔을 때 보이는 현상이에요. 지금은 아니에요. 그런 지혜가 있어요. 그 다음 또 많은 분들이 이야기 하는데, 어떤 게 본분이냐. 一二三四五(일이삼사오)라, 하나 둘 셋 넷 다섯. 그것뿐이다. 하나가 제일인 것도 아니고 둘이 제일인 것도 아니고, 일이삼사오, 있는 그대로. 六六은 三十六(육육삼십육)이라, 육육은 삼십육이다. 여섯이 여섯이면 서른여섯이다. 빼고 더할 게 없다. 本身은 自本身(본신자본신)이라, 본래 나의 몸은 스스로 나의 몸이다. 본신, 본래라는 본자, 몸 신자. 본래 나의 몸은 스스로 나의 몸이다. 그런 거예요. 거기다 온갖 이름 다 갖다 붙이잖아요. 무슨 장, 전부 장 세상이고, 웬 장이 그렇게 많은 지.(웃음) 학사, 석사, 박사, 무슨 그리 이름이 그렇게 많아. 이게 전부 가짜예요. 내 본래 몸은 그런 거와 아무 상관이 없는 거예요. 근데 그 이름 하나 얻으려고 시간들이고, 돈 들이고, 정성 드리는 거 보면 같잖아서. 박사를 받는다고 하면 박사를 받는 방법을 말하고 싶은 생각은 꿈에도 없고, 어떻게 하면 저 사람한테 박사학위 받을 생각을 없애주나, 그게 내가 원하는 거예요.(웃음) 받을 생각 하나를 없애면 얼마나 편하고 이익이 되고 행복할 텐데 그 개도 안 물어갈 걸 왜 자기 몸에다 때려 붙이려고 저러나. 본신은 자본신이에요. 본래 몸은 스스로 자기 몸이에요. 이게 요사인지혜, 범부인 지혜에요. 그래서 선어록에서 많이 나온 얘긴데, 아니 불자, 걸칠 괘자, 不卦雲霞色(불괘운하색), 운하색이 있어요. 운하란 하늘에 구름이 있잖아요. 노을이 있잖아요. 노을은 햇빛이 비치면 벌겋게 보이는 걸 노을이라고 해요. 저 아무 필요도 없는 구름과 노을의 색깔을 내 몸에 걸치지 않는다. 이걸 불괘운하색이라고 했어요. 운하색을 몸에 걸치지 않는다는 거예요. 내 몸은 그대로 내 몸이다. 그런 지혜가 있어요. 불교에서는 그런 지혜를 많이 가르쳐요. 처음에는 기도를 가르치고, 점점 지혜 쪽으로 가르치는 게 불교거든요. 보관지혜, 적조지혜, 본분지혜. 멋있잖아요.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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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초신중기도] 1월 27일 정초신중기도 법문
종범스님 2020-01-27
<念願과 祈禱(염원과 기도)> 안녕하세요. 새해 복 많이 받으십시오. 오늘은 새해 복 받는 말씀을 드리려고 하는데요. 새해 복을 받아야 되는데, 복을 누가 줄까. 나한테 복을 줄 사람이 누굴까. 그게 문제거든요. 누구한테 “복 많이 받으십시오.”하니까 “복을 줘야 받지요.” 하더래요. 맞는 말이거든요. 줘야 받지요. 복 줄 사람이 딱 한사람 있거든요. 나한테 복 줄 사람이 한 사람 있어요. 그게 누굴까요? (나 자신) 다 알고 계시네요.(웃음) 더 이상 말씀 드릴게 없고, 마음공부하고, 마음치료하고, 마음기쁨을 얻는 그런 시간을 갖는 게 좋겠습니다. 여기서 뭘 들으려고 하지 말고, 마음공부, 마음치료, 마음기쁨. 나한테 복 줄 사람은 나다. 내가 나한테 복을 줄 수 있다. 그래서 新年受福 신년수복年年新年 盡未來劫 년년신년 진미래겁無量福德 自作自受 무량복덕 자작자수 年年新年(년년신년)이, 해마다 해마다 새해가 盡未來劫(진미래겁)이라, 미래의 세월이 끝날 때까지, 끝날 때까지 내 스스로가 無量福德(무량복덕)을, 한량없는 복덕을 自作自受(자작자수)하여지이다,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 것이 중요하다. 무량복덕을 미래의 세월이 다 할 때까지 스스로 지어서 스스로 받는다, 자작자수라. 내가 벌을 받을 때 누구에게 벌을 받는가. 나한테 받은 거예요. 다 자기의 벌로 자기가 벌 받는 거예요. 내가 복을 받을 때 누구에게 복을 받는가. 나한테 받는 거예요. 내가 복을 지으면 복을 내가 받거든요. 내가 죄를 지으면 그 벌을 내가 받아요. 벌 받고 고생한 사람들 가만히 봐요. 누가 벌을 줬나. 내가 나한테 준 거거든요. 복 받고 기쁨을 누리는 사람, 그 복과 기쁨이 어디서 왔나. 내가 지은 거예요, 그게. 그러니까 나한테 복 줄 사람은 딱 한 사람 있다. 나다, 나. 그래서 이게 복 받는 일이냐, 이게 벌 받는 일이냐, 이걸 살피는 게 마음공부예요. 내가 무슨 일을 할 때, ‘아, 이게 내가 복 받는 일인가, 내가 이거 벌 받는 일인가.’를 살피지 않고 그냥하면 그게 복 받는 습관이 몸에 꽉 뱄다면 무슨 일을 해도 복만 받을 수 있는데요. 벌 받는 일이라는 것이 분명한데, 벌 받는 일인 줄 모르고, 그냥 몸에 밴대로 몸에 젖은 대로 그냥 하다보면, 평소대로 했는데 안 좋아하는 사람들이 많아. 건강도 별로 안 좋아. 사람도 안 좋아하고, 건강도 안 좋아지고. 이러면 자기가 일부러 한 건 아닌데, 자기도 모르게 복 받는 일을 많이 못 한 거거든요. 자기가 자기한테 복을 안 준거예요. 그러니까 내가 나한테 복을 주자. 그럼 복이라는 게 뭐냐. 복은 受福(수복)이라, 받는 것이 복이에요. 받다, 수복(받을 수, 복 복). 받을 때 그걸 복이라고 그러거든요. 그럼 어디서 받냐. 부모한테 받고, 사람한테 받고, 물질로 받고. 그래서 유가에서는 오복을 얘기하는데, 불교에서는 만복을 얘기하고요. 만 가지 복덕. 이걸 줄이면 삼복이에요. 身福(신복), 몸이 건강한 게 복이에요. 몸 복이 있어요. 人福(인복), 사람이 나를 많이 믿어주면. 사람과 사람은 믿음이 없어지면 끝나는 거예요. 믿음이 떨어지면 정이 딱 떨어지고. 못 믿고 정 떨어지면 끝이에요. 이거 중요해요. 믿음이 안 가면 정이 떨어져. 그럼 끝나요. 그래서 사람으로부터 복을 받으려면 믿음을 항상 일으킬 수 있도록 신뢰를 줘야 되요. 그래야 감정이 안 상하고. 그래서 다른 사람들이 나를 믿어주는 사람이 많을 때 그걸 인복이라고 그래요. 다른 사람들에게 신뢰를 받는 거예요. 좋은 감정을 받는 거고. 사람 없으면 안 되거든요. 몸 건강하고. 자기를 믿어주고 좋아해주는 사람 많고, 그럼 신복, 인복을 받은 거죠. 그 다음에 財福(재복)이에요. 재물. 그런데 재물이 많이 있으면 재복을 많이 받은 건데, 그것도 다 받은 거죠. 다른 사람으로부터 받은 거. 그래서 복은 받는 것이다. 그런데 경에서는 복 다음에 德(덕)이라는 말을 써요. 덕이라는 것은 받는 게 아니에요. 行德(행덕)이라, 행하는 데서, 실천하는 데서, 노력하는 데서 생기는 게 덕입니다. 그래서 수복, 행덕이라고 얘기해요. 덕이라는 것은 내가 어떻게 노력을 하느냐, 여기에 따라서 다 이루어지는 거거든요. 복은 받는 거지만 덕은 행하는 것이다. 그럼 어떻게 행하냐. 덕 중에 가장 좋은 덕이 恭敬(공경)과 勤勉(근면)이거든요. 덕은 공경하는데서 생겨요. 오만하고 불손하고 요즘 말로 갑질하면 덕이 없는 거예요. 오만불손 갑질횡포, 이게 전부 다 덕을 없애는 거예요. 공경, 공경하는 데서 덕이 생겨요. 그래서 복덕이에요. 그래서 어디를 가든 누구를 만나든 공경하고 겸손하면 다 좋아해요. 그런 사람보고 덕망이 높다고 해요, 덕망. 그게 다 내가 나한테 복덕을 주는 거거든요. 그리고 근면해야죠. 게으르면 덕이 없어요. 복도 못 받아요. 이 근면과 공덕이라는 게 무지무지한 복덕을 받는 뿌리거든요. 아이들을 교육시킬 때 부지런한 습관을 몸에 잘 안 익히는 경우가 있는데, 이게 크게 잘못하는 거거든요. 공경하는 것이 몸에 배고, 부지런한 것이 몸에 배야 그 아이가 평생을 행복하게 살 수가 있어요. 행복이라는 것은, 많은 복을 누릴 때 행복이라고 해요. 복을 누릴 때, 복을 느낄 때 행복이거든요. 누린다는 것은 느끼는 거잖아요. 재물이 많아도 재물이 많다고 느낄 때 그것이 행복이지, 많으면 뭐해요, 나에겐 항상 부족하면 그건 행복은 아니에요. 재복은 있는데 행복은 없다. 느끼는 것만큼 행복한 거예요. 느끼려면 건강해야 하거든요. 건강해야 되요. 있는 것을 느낄 줄 아는 게 건강이거든요. 그런데 있는 거는 못 느끼고, 없는 거만 구하는 게 많아요. 그게 건강치 못한 거거든요. 있는 거는 관심이 없어. 근데 없는 거만 찾아. 아, 그거 참, 희한하더라고. 손녀를 봤는데, 손녀에게는 관심이 없어. 왜? 손자가 아니란 말이에요. 손녀에 대해서 좋은 감정을 느끼면 행복할 텐데, 앞에 있는 손녀는 관심이 없고 눈앞에 없는 손자를 자꾸 구하게 되면 행복한 게 아니에요. 그러니까 복이라는 것은 부지런하고 공경하는데서 복이 생긴다. 그리고 복이라는 것은 베푸는 데서 생긴다. 보시, 베푸는 데서 복이 오고 공경하는 데서 덕이 생긴다. 그러니까 베풀고 공경하면 복덕이 나날이 성장해서 행복해요. 복은 베푸는 데서 받게 되고 덕은 공경하는데서 이루어진다. 그거 다 알아요, 누가 몰라요. 그런데 이렇게 정초에 와서 기도한다는 것은 그게 엄청난 복덕이 되는 거예요. 축하드려요! 정초에 이런 도량에 와서 기도를 한다는 것은 그만큼 내 온 몸에, 온 마음에 복덕종자가 가득히 심어져요. 그것을 평소에 늘 가꾸어 나가고 이뤄나가면 그게 항상 내가 나한테 복을 받고 내가 나한테 복을 주는 거예요. 내가 나한테 복을 받아라. 내가 나한테 복을 줘라. 근데 내가 나한테 복을 안 줘. 안 준다는 것은 베풀지 못하고, 공경하지 못하니까 복을 안 주는 거지요. 아무 것도 아닌 소리를 심각하게 들어.(웃음) 여기 몇 마디 적어가지고 왔는데, 범부가 있고 보살이 있고 제불이 있는데, 부처님이 있는데, 범부들은 어떻게 하냐. 凡夫 범부 : 作禍求福 苦惱不絶 작화구복 고뇌부절 菩薩 보살 : 常作福德 不受福德 상작복덕 불수복덕諸佛 제불 : 福德智慧 圓滿具足 복덕지혜 원만구족 범부들을 作禍求福(작화구복)이라, 작화, 짓기는 화를 지어, 자꾸 사고를 만들어, 근심을 만들어, 그런데 구하기는 복을 구해요. 무슨 사고 또 쳤구나. 또 뭐 일 저질렀구나. 뭐 잘못했구나. 이게 다 작화거든요. 作禍(지을 작, 재앙 화). 만들기는 재앙을 만드는데, 구하기는 복을 구하는 거예요. 그러니까 苦惱不絶(고뇌부절)이라, 고뇌가 끊어지질 않는다. 그런 게 범부의 삶이에요. 그런데 보살의 삶은 어떠냐 하면 常作福德(상작복덕)을 하는데, 항상 복덕을 짓는데, 不受福德(불수복덕)을 해요. 복덕을 받지를 않아요. 항상 복덕을 짓기만 하지 복덕을 받질 않아요. 왜 그러냐 하면 보살은 所作福德 不應貪着(소작복덕 불응탐착)이라. 자기가 지은 복덕을 탐하고 집착하지 않아요. 그냥 보시하고 회향해요. 그게 보살들이 복 짓는 행위에요. 복을 짓기만 해요, 받지 않아요. 금강경 不受不貪分(불수불탐분) 28에 보면, 所作福德 不應貪着(소작복덕 불응탐착)이라. 보살은 不受福德(불수복덕)이라. 그 경에 말씀이 있어요. 복을 짓기만 해요. 복덕을 다 회향해요. 그리고 제불은, 모든 부처님들은 福智(복혜)가, 복덕과 지혜가, 복덕지혜가 다 圓滿具足(원만구족)해요. 모자라는 것도 없고, 남는 것도 없고, 복덕과 지혜가 원만하고 구족해요. 그게 부처님의 일이고, 보살은 常作福德 不受福德(상작복덕 불수복덕), 항상 복덕을 짓기만 하지 받지는 않고, 범부는 作禍求福 苦惱不絶(작화구복 고뇌부절), 짓기는 재앙을 짓는데, 구하기는 복을 구한다. 나를 왜 좋아하지 않느냐고 가서 때리는 거죠. 나 좋아하라고. 때리면 때릴수록 좋아하겠어요? 경상도에서는 <디비쫀다>고 해요.(웃음) 경상도 사람 아니면 잘 모르죠. 난 충청도인데, 경상도에 오래 살았기 때문에 <디비쫀다>, 반대로 한다는 얘기에요. 원효성사는 欲往東方而 向西行(욕왕동방이 향서행)이라고, 가기는 동쪽으로 가는데, 서쪽으로 가고 있다. 동쪽으로 가고 싶은 사람이 서쪽으로 가고 있다. 반대로 하는 거죠. 그게 우리들의 삶이에요. 자꾸 하는 짓은 재앙을 만들고 있는데, 구하기는 복을 구한다. 그러니까 근심걱정이 안 떨어져요. 고뇌가 부절이라. 왜 이러냐. 인생이라는 것은 人生行路(인생행로)라, 인생이 가는 길이 뭐냐. 제가 하는 얘기에요. 경에 있는데 그대로는 아니에요. 인생행로, 갈 행자, 길 로자. 人生行路 인생행로① 힘겹다 苦惱行 고뇌행② 싱겁다 無跡行 무적행③ 꿈같다 如夢行 여몽행④ 어허야 圓明行 원명행 첫 번째는, 제가 순서를 매긴 거고요. 인생은 힘겹다. 힘겨운데 이걸 한자로는 苦惱行(고뇌행)이라. 행자는 그냥 펼쳐진다는 의미에요. 힘겹게 펼쳐지는 게 인생이다. 힘겨워. 아들 노릇도 해야 되고, 딸 노릇도 해야 되고, 말을 안 해서 그렇지 남편노릇도 힘들어요. 아내 노릇만 힘든 게 아니에요. 남자들은 느끼지도 못하는 걸 여자들이 얘기할 때 미치는 거예요.(웃음) 전혀 생각도 없었는데 그런 걸 얘기하면 미치는 거죠. 그러니까 힘겨워, 다. 출세도 해야 되고, 부자도 돼야 하고, 사람노릇도 해야 되고 힘겨운 게 한두 가지가 아니에요. 힘겹게 펼쳐지는 게 인생이다. 그런데 결과는 뭐냐. 결과는 싱거워요. 싱거운 게 인생이에요. 그럼 싱거운 게 뭐냐. 지나가다 보면 옛날 집을 허물어뜨려서 새 집을 짓는 경우를 봐요. 그런데 그 집을 허물기 전에는 집을 쓸고 닦고 청소하고 수리하고 별별 일이 많았는데, 포클레인을 가지고 가서 그 집을 확 허무는 순간에 그 집에 무슨 집수리를 했는지, 도배를 어떻게 했는지, 청소를 어떻게 했는지 아무 가치가 없어요. 그게 인생이에요. 인생은 남는 게 없다. 이건 제 말이에요. 남는 게 없는 게 인생이에요. 그러니 청소했다고 신경질내지 마세요. 뜯으면 그만이에요. 썰렁하네요(웃음). 집 뜯는 순간에 청소 아무리 잘해도 아무 소용이 없는 거예요. 그냥 되는대로 살아요. 잠자면 그만이에요, 집이란 것은. 그게 인생이란 거예요. 그리고 얼굴을 가꾼다, 머리를 가꾼다, 몸매를 가꾼다, 그렇게 몸을 위해서 치장을 하고 가꿨는데 화장하는 순간에 아무 필요 없어요.(웃음) 화장하는 순간에 몸 가꾼 게 그게 무슨 소용이냐고요. 지하철 타 봐요. 성형 전 해놓고 성형 후. 그래서 어쩌라고. 태우는 순간에 전후가 어디 있어. 그게 인생인데 얼굴 가꿀 때는 그걸 모르거든. 집안 청소할 때는 집 뜯을 때 먼지 밖에 없다는 걸 모르거든. 인생은 그렇게 흘러가는 거예요. 그래서 인생은, 말이 좀 그렇긴 한데, 방귀풍이다. 제가 만든 말이에요. 인생은 방귀바람. 이 방귀라는 게 크게 나오는 소리도 있고 작게 나오는 소리도 있고, 냄새가 고약한 것도 있고 향기로운 것도 있지만, 어찌 됐든 조금 있으면 어디로 갔는지 모르게 사라지는 거예요. 인생도 평생 떠들고 다니는 것은 방귀소리가 아직 안 끝난 것 같고, 죽은 다음에는 다 날라 간 것과 같은 거예요. 이게 인생방귀명상이에요. 인생은 방귀바람이다. 신경질, 근심걱정 다 방귀처럼 다 날아가요. 인생은 방귀바람, 한자로는 방귀풍. 그 다음에 인생이라는 것은 꿈같다. 인생은 힘겹다, 인생은 싱겁다, 인생은 꿈같다. 그렇게 허무해도 고통스러웠던 기억이나 힘들었던 기억이 없는 게 아니에요. 있어요. 있는데 잡히지 않아요. 꿈인 거예요. 꿈이라는 게 다른 사람은 아무도 몰라도 꿈 꾼 사람은 알잖아요, 꿈을 깨도. 그래서 허무하면서도 아무 것도 없는 게 아니 것이 꿈이에요. 아무도 몰라, 그런데 자기는 꿈 꾼 기억이 분명히 있거든요. 인생은 꿈같다. 그러니까 편안하게 살아요. 힘겨워봐야 방귀바람이고, 또 무슨 짓도 꿈같다. 고통은 내가 안고 표시는 없다. 그럼 결과적으로 뭐냐. 엉뚱한 소리인 것 같은데, 인생을 한마디로 표현할 때 내가 세 글자로 표현했는데, <어허야>. <어허야><어허야>~~~이걸 한자로 쓰면 圓明行(원명행), 둥글고 밝은, 펼쳐진다. 언제나 둥글고 밝아요. 거기에는 힘겨운 것도 있고, 싱거운 것도 있고, 꿈같은 것도 있고, 다 있어요. 근데 그 핵심은 <어허야>에요. <어허야>, 원명행이라. 싱거운 것은 無跡行(무적행)이라, 없을 무, 자취 적, 행할 행, 자취 없는 게 인생이다. 그러니 뭐냐. 복을 지란다고 다 그렇게 져요. 말이 그렇지, 헛소리에요, 복을 지으라는 게. 복 받으란 소리도 헛소리에요. 받으란다고 누가 다 복을 받아요. 그러나 ‘금년에 죄 받으세요.’ 하면 다 신경질 낼 텐데, 죄 받으란 소리보다는 나은 거예요. ‘금년에 벌 받으세요.’ 보다는 낫잖아요. 그러니까 그렇게 다짐을 하고 염을 할 때 그게 완전한 복은 아니지만 복의 씨앗이 되요, 염원. 생각하고 원하는 것. 그래서 일상생활을 복을 짓고 복을 주고 복을 받는 삶을 사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염원을 간직하고 살면 그것이 복의 종자가 되고 복의 뿌리가 돼서 내가 나한테 복을 주게 되요. 내가 나로부터 복을 받게 되요. 이 세상의 다, 벌도 나한테서 받았고, 복도 나한테서 받았다. 이런 인식, 이런 생각이 굉장히 중요해요. 모든 벌 받는 사람이 그걸 누구한테서 받았느냐. 나한테서 받았는데, 그걸 인정을 못해요. 그래서 벌을 더 받아. 벌을 나한테서 받았다는 것을 인정을 하면 또 벌이 멈춰요. 인정을 안 하면 벌이 많아져요. 염원, 염원이 잘 이어지면 그것이 기도예요. 기도는 염원을 자꾸 키우는 거다. 염원을 북돋고 염원을 재배하는 거거든요. 내가 나한테 복을 지어서 복을 주어야겠다. 내가 스스로 복을 지어서 스스로 복을 받아야겠다. 이런 염원이 필요해요. 그런데 우리나라에는 그 염원을 문화화 시킨 게 많아요. 첫째로 설날이 되면 떡국을 먹는데, 이게 염원을 문화화 시킨 거거든요. 우리나라 특별한 음식이 있어요. 송편, 팥죽, 떡국, 이런 게 있거든요. 이게 전부 다가 염원을 담은 거예요. 그래서 생명력이 있는 거예요. 떡국이라는 게 뭐냐. 하예요(白), 그게. 이건 근심걱정 없고, 질병환란 없는 것을 말해요. 하얀 떡. 길어. 명 길어. <명 길고 질병 없고 근심 없고 걱정 없는 한 해가 되게 해주십시오.> 하는 염원으로 하얗고 긴 떡을 빼서 끓여 먹는 거예요. 그 얼마나 중요한 문화예요. 아주 중요한 문화거든요. 그러니까 기도 잘하시고 금년에는 내가 많은 복을 지어서 내가 많은 복을 받아야겠구나. 좋은 한 해가 되시고. 되란다고 다 되는 건 아니겠지만(웃음). 행복한 한 해가 되시고. 또 정초에 정초기도하시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아주 축하받을 일이다. 축하할 일이다. 서로서로 축하해 주세요.(박수)법문 마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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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요법회] 1월 26일 일요법회 법문
선우스님 2020-01-26
오늘은 정초 좋은날입니다. 이 좋은 곳에 모인 모든 분들 복 많이 받으세요. 복을 받기 위해서는 받을 준비가 되어있어야 합니다. 그래서 제가 구도의 관점을 다시 재정립했던 내용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관세음보살 친견 발원을 세웠던 회정대사는 온갖 노력 끝에 몰골이 형편없는 몰골옹 어른을 통해 해명방 노인을 찾아가면 관세음보살을 친견할 수 있을 거라는 것을 알게 됩니다. 회정대사가 몰골옹 어른이 일러준 산 속 깊은 곳 허름한 해명방의 집을 찾아가니 너무도 아름다운 처자가 이름은 보덕각시라 소개하며, 아버지인 해명방 노인은 무서운 사람이니 곧 오시게 될 해명방 노인이 말을 하면 무조건 "네"라고 대답해야한다는 말을 하면서 다짐시켰습니다. 아니나 다를까 그녀의 아버지가 오시어 그를 나무라면서 그녀와 결혼하지 않으면 관세음보살을 친견하긴 커녕 여기서 죽을 것이라 하였습니다. 그 때 회정대사는 처자의 다짐을 떠올리고 ‘네’라고 대답하였고, 어쩔 수 없이 그녀와 혼인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결혼으로 파계를 했고, 자신과 결혼한 각시가 고녀이고, 해명방 노인의 견디기 어려운 처가살이에 한달 두달 일년 이년.... 드디어 회정대사는 결심을 합니다. 이 곳을 빠쳐나가기로...... 자신의 이 생각을 보덕각시에게 말하고 보덕각시를 살피니, 보덕각시는 좋다 싫다의 말도 없을 뿐만 아니라 얼굴에 그 어떤 표정도 없음을 이상하게 여기며 장인인 해명방 노인에게도 자신의 결심을 말하고 바랑을 긴 나무막대에 걸어 어깨에 올려놓고 터벅터벅 집을 떠납니다. 산골 오두막을 나와 돌고돌아 해명방노인의 처소를 물었던 몰골옹 어른에게 들렀습니다. 몰골롱 어른은 회정대사를 보자 '그래 관세음보살을 친견했나?'고 물었습니다. 이 물음에 회정대사는 관세음보살 친견은커녕 그동안 힘들었던 자초지정을 몰골롱 어른에게 말하며 한탄을 했습니다. 이야기를 다 듣고 난 몰골롱 어른은 회정대사에게 말했습니다.회정대사를 견딜 수 없도록 괴롭혔던 노인은 보현보살이었노라고.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찾고 찾던 관세음보살이 보덕각시였노라고. 몰골롱 어른의 말에 정신이 번쩍 든 회정대사, 몰골롱 어른에게 물었습니다.노인장은 누구시냐고? 몰골롱 어른은 "나는 문수보살"이노라.잠시 뒤 몰골옹 어른을 보려하니 그 분 마저 사라졌습니다.해명방 어른 집으로 뛰어 가 보니 집은 오간데 없고 장작 패던 자리만 남아있었습니다. 하염없이 무수백배 절을 하니 새 한 마리가 나타났는데 얼굴은 보덕각시였어요. 정신없이 따라가 보니 폭포수가 있었고, 폭포수 안쪽 굴로 들어가니 그 곳에 보덕굴이라 쓰여 있었습니다. 그때 회정대사는 전생에 본인이 수행했던 터라는 것을 알았습니다. 그 뒤 그곳에서 평생 수행하였습니다. <부처님, 자비와 지혜를 꼭 실천하겠습니다.>라고 발원했으나, 해명방 어른같은 분이 나타나면 참을 수 있을까요? 평생 몰라봤습니다. 당신이 관세음보살님이십니다. 당신이 보현보살님이십니다. 내게 자비를 실천하라고 매질을 해주셨고 욕을 해주신 당신이 보현보살님이십니다. 내가 있어서 일체중생이 행복하기를, 내가 있어서 일체중생이 빛나기를, 내가 있어서 일체중생이 환해지기를. 마음의 정원 진관사에서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그래서 부처님처럼 보고,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부처님처럼 말하고, 부처님처럼 행동하겠습니다. 지금 나는 현재 이 순간 바로 여기서 늘 깨어있습니다. 부처님의 지혜의 언어로 말하면 <공, 중도, 연기>입니다. 지나간 것은 다시 되돌릴 수 없고, 오지 않은 미래는 내 생각대로 안 되는데, 지금 내가 왜 이렇게 괴로워하나. 지금 있는 이대로가 행복합니다. 이 이야기는 성인을 멀리서 찾지 말고, 본인이 인연된 도량의 수행봉사의 인연이 왔을 때 잠깐 사이 그 인연이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니 있는 동안 정성껏 잘 하시고 어느 곳에서 든 고정된 틀에 본인을 가두고 복덕의 순간을 놓치지 않는 새해가 되시기 바랍니다. 인연이 오면 바로 실천해 보시자구요. 진관사를 해명방골이라 생각하시고 인연의 그 가피를 잘 챙겨가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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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식]1월 18일 불교대학, 불교대학원 졸업식 법문
주지스님 2020-01-18
졸업을 진심으로 축하드립니다. 개근상, 정근상 수상한 분들도 정말 축하드립니다. 여러분들 봉사도 많이 하셨습니다. 오늘 불교대학, 불교대학원 졸업생 여러분께 큰 박수 한번 보내주세요. 오늘 졸업생 숫자도 많지만, 저희는 10배를 해서 23명이면 230명이고 27명이면 270명이라고 할 겁니다. 앞으로 더 많은 분들이 졸업을 했으면 좋겠습니다. 우리가 경을 배운다는 건 부처님을 친견하는 겁니다. 그래서 저희들이 항상 말씀드리는데, 경이 타종교에 비해서 굉장히 많아요. 그래서 팔만대장경이라고 합니다. 여러분은 부처님께서 21년간 설하신 금강경을 수행하고 정진하고 수지 독송하셨을 겁니다. 경전에는 가르침, 진리, 부처님의 체취가 담겨져 있습니다. 그래서 경전을 보고 읽는다는 것은 부처님의 법문을 듣는 것이고, 부처님의 경전내용을 곰곰이 생각한다는 것은 내가 부처님에 대해 사유하고, 생각을 해서 내가 바로 그 사상을 소화한다는 의미로 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여러분들은 경전을 보고 배우면서 읽음으로써 부처님과 똑같은 분이 되셔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수지독송이란 말을 많이 합니다. 신해행증이란 말도 많이 하는데, 경전을 보면 내가 바로 반야사상, 지혜의 공사상이거든요, 거기서 지혜를 배우면서, 지혜를 실천하면서, 보고 배우고 익히면서 항상 부처님처럼 생활하는 그대로 부처님이신 거예요. <마음의 정원 진관사 당신은 부처님이십니다. 부처님처럼 보고, 부처님처럼 생각하고, 부처님처럼 말하고, 부처님처럼 행동하겠습니다.>올 해의 과제입니다. 여러분들도 그렇게 실천해주시면서 다 같이 합장해주세요. 따라해 주세요. 엎드려 바라옵건데저는 세세생생에 어느 곳에서나 눈으로는 언제나 이 경전을 보고귀로는 언제나 이 경전을 듣고입으로는 언제나 이 경전을 외우고손으로는 언제나 이 경전을 사경하고 마음속으로는 언제나 이 경전 뜻을 이해하면서 부디 어느 생 어느 곳에서나 모든 성현들을 친견하고 모든 중생이 다함께 보리도량으로 나가게 하여 주옵소서나무석가모니불나무석가모니불나무시아본사석가모니불 날마다 좋은 날입니다 봄에는 꽃피고 가을에는 달이 밝고여름에는 시원한 바람 불고 겨울에는 눈 내리고 쓸데없는 생각만 마음에 두지 않는다면 언제나 한결같은 좋은 시절일세. 무문선사의 말씀입니다. 여러분 다같이 부처님 되십시다. 감사합니다.